25화
격리시설에서의 하루가 지났다.
열쇠 뭉치를 들고 있는 군인이 계단 위에서 내려왔다.
끼이이이익.
쿵.
철창이 열렸다.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김준철 소령님께서 필요하시면 본부로 연락 달라고 하셨습니다.”
“옙.”
그가 격리 시설, 지하에 모인 플레이어를 모두 풀어 주었다.
-전원 준비되는 대로 지상으로 이동해주시기 바랍니다.
유소라가 반대편 방에서 내게 뛰어왔다.
다다다다.
“천재씨!”
“소라씨, 수고했어요.”
“수고는요! 조사라는 거 별것도 없더라고요. 그냥 어디서 왔는지. Z 바이러스의 감염체와 접촉이 있었는지. 그런 간단한 질문이었어요.”
마이클과 정우가 복도 반대편에서 이야기하며 천천히 걸어왔다.
굳어있는 얼굴로 보아 진지한 대화를 하는 것 같은데.
무슨 말을 하는 걸까.
나는 천천히 걸어가 정우의 목을 휘어잡으며 장난을 쳤다.
“얌마. 너 아이유 같은 사람한테 뽀뽀하고 싶다고 했었지?”
“닥쳐! 갇혀있는 동안 저 새끼 때문에 미치는 줄 알았다.”
“왜? 늠름한 전사 정우 오빠잖아?”
“오빠는… 지랄…. 하….”
마이클이 백 팩을 흔들면서 내 앞으로 다가와 환하게 웃었다.
“천재 킴!”
“마이클. 너도 수고했다.”
“아니에요우. 천재 킴이 말해준 대로 하니 다들 나한테 잘해줬어요우.”
모두의 상태는 양호.
아무런 이상 없이 세 번째 라운드 마을에 도착하게 되었다.
정우가 조영기의 얼굴을 힐끔 보더니, 계단 위로 빠르게 걸어갔다.
“빨리 가자고!”
“어, 어 그래.”
나는 뒤로 돌아 조영기와 김연희를 향해 말했다.
“저희 먼저 갑니다.”
조영기가 걸걸한 목소리를 뱉었다.
“그래. 우리도 곧 올라가마.”
김연희가 치마를 툭툭 털더니 내게 윙크를 했다.
“아저씨. 다시 만날 때까지 사고 치지 말고 다녀!”
“사돈 남 말하는 소리 하지 말고. 혹시 무슨 일 있으면 펍을 확인 하도록 해.”
“펍?”
“그래. 펍. 그곳에 숙소를 얻을 예정이야.”
“왜 여관이 아니라 펍에 숙소를 얻어?”
“그건 네 알바 아니다.”
“…… 뭐 나랑 상관없으니깐. 우선 알았어!”
대화를 마친 나는 대충 손을 흔든 후 지하실 위로 올라갔다.
격리 시설 밖으로 나가자 내가 생각한 것보다 많은 플레이어가 마을 안에 돌아다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멸망의 땅에서 ‘유토피아’라고 불리는 이 폐허가 된 마을.
가장 많은 수의 군인들이 마을을 지키고 있는데다가 주변으로 강한 몬스터들이 나타나지 않아 제일 안전한 곳이다.
개발진들이 고대 문명 속 바빌로니아 왕국을 축소해 현대식으로 재현해 놓았다고 들었는데…….
“정우야. 괜찮아 보이는 플레이어 발견하면 말해. 협상은 내가 직접 할게.”
“지금 필요한 직업이 뭐지?”
“…… 저격수나 궁수. 또는 마법사.”
“마법사를 뽑을 거면 차카니를 데리고 가는 게 낫지 않아?”
“왜? 뽀뽀해주려고?”“지라알! 그나마 우리가 아는 사람 중 쓸 만한 놈이니깐 그러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안 돼. 비밀을 아는 자를 데리고 다닐 수 없어.”
“…… 하긴.”
동쪽을 향해 걷는 동안 유소라가 내 옆으로 바짝 붙었다. 마이클과 정우가 뒤쪽에서 전방을 경계하며 와주었다.
혹시나 모를 다른 플레이어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평화로워 보이는 폐허가 된 광장 근처로 사람들이 돌아다녔다.
천사 모양 분수에서 물이 뿜어져 나와 바람을 타고 흔들렸다.
나는 분수대 앞으로 걸어갔다.
[제니를 던지시겠습니까?]
[YES] OR [NO]
“YES.”
[5제니 사용]
[남은 제니: 6,495]
손바닥 위로 금화 하나가 만들어졌다.
나는 동전을 높게 던져올려 분수대 중앙에 떨어지게 했다.
핑그르르르르!
퐁당!
동상이 빛을 내었다.
[오늘의 운세: 어려운 상황이겠으니 혼자의 힘으론 할 수가 없다.]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뭔데?’
십중팔구는 좋은 말만 한다는 ‘천사의 예언’이 내게 기분 나쁜 말을 하였다.
[어려운 상황.]
[혼자 힘으로는 할 수 없다.]
누가 들어도 좋은 말이 아닌데, 불길한 기운이 느껴졌다.
내가 아무 말 없이 서 있자 정우가 물었다.
“뭐라고 나왔어?”
“‘어려운 상황이겠으니 혼자의 힘으론 할 수가 없다.’ 내가 혼자 못 하는 일도 있나?”
“있지. 자기 팔꿈치 핥기 같은 거?”
“아, 좀…. 이 새끼야…. 그런 말이 아니잖아.”
정우가 코를 잡으며 멋쩍게 웃었다.
“농담이야. 뭐…. 저 분수의 예언은 99% 이상 적중하니 조심해.”
“그래야지….”
“‘어려운 상황’이라는 문구가 신경 쓰이네. 이 마을에서 벌어질 만한 상황이 뭐가 있지?”
“밖으로 나가지만 않으면 몬스터를 마주칠 일이 없으니. 마을에서 짱박으라는 말 같은데.”
“흐음…. 그럼 오늘은 다 같이 몸을 사리도록 하자.”
유소라가 천사 모양 분수를 바라보며 손뼉을 쳤다.
“너무 아름다워요….”
마이클도 감탄사를 뱉었다.
“뻐킹 뷰티풀….”
게임에서 볼 때와는 사뭇 다른 풍경. 이렇게까지 아름다운 마을인지 몰랐다.
‘폐허가 된 마을’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건축물들이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흠이라면 마을 겉면을 감싸고 있는 주X 아파트 단지. 컨셉상 저것들은 지우지 못했나 보다.
우리는 분수대 앞에 앉아 말없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을의 중앙에서 잠깐만 있더라도. 이곳의 플레이어 수를 대략 알 수 있기 때문이다.
“…… 정우야.”
“왜?”
“너 멸망의 땅 처음 했을 때 기억나냐?”
정우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때가 언제인데 기억나겠냐.”
“…… 우리 둘이서 이 광장에서 그룹 모은다고. 하루 종일 채팅 치고 있었는데.”
“그랬어?”
“어. 힐러가 없어서 계속 죽으니깐.”
“와…. 그런 게 기억나냐?”
나는 괜히 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야, 우리 제니 구걸도 했었어. 지나가는 플레이어들한테 10제니만 달라고.”
“우리 완전 개 민폐였네.”
“그래도 마지막에는 최강의 플레이어 중 한 명이 되었잖아.”
“…… 여기서도 그렇게 할 수 있으려나.”
또옥. 또옥. 또옥또옥.
갑자기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이쯤 하면 어느 정도인지 감이 잡힌 나는 모두를 데리고 동쪽 펍으로 이동했다.
대략 이 마을에 있는 플레이어는 이 백 명 이상. 누가 몇 라운드까지 정리했는지, 언제부터 시작했는지.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내가 이곳에 와서 본 사람 중 아직 게임의 후반부에 간 사람은 없었다.
장비를 보면 알 수 있으니깐 말이다.
* * * * *
비를 맞으며 동쪽 펍 안에 도착한 나는 구석에 자리를 잡은 후, 바 안에 서 있는 주인장에게 말을 걸었다.
“일인실 두 개. 이인실 하나. 이렇게 열흘에 얼마인가요?”
“일인실은 하루에 백 제니. 이인실은 하루에 백오십 제니입니다. 계산해보면…. 삼천오백 제니가 되겠군요.”
“예?! 그렇게 비싸요?”
“비싸다뇨. 마을 안에 방이 부족한 지금 이 정도면 싼 편이지요.”
완전 덤탱이다.
게임 안에서는 비싸봤자 하루에 10제니 이상 하지 않았다.
“후…. 할인 좀 안 될까요? 너무 비싼 것 같은데.”
주인장이 등을 돌리더니 잔을 닦기 시작했다.
“흥정은 안 됩니다.”
“…… 알았습니다. 그럼 동료들과 상의 후 다시 오도록 할게요.”
“예예. 그렇게 하시던가요.”
나는 그룹원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 마정우.”
비에 젖은 옷을 털던 마정우가 대답했다.
“어? 어. 말해.”
“일인실이 하루에 백 제니. 이인실이 하루에 백오십 제니. 흥정 불가란다.”
“열흘에 백 제니면 개꿀인 거 아니야?”
“하루에 백 제니라고.”
“뭐?!”
정우가 썩은 표정으로 주인장을 바라보았다. 그럴 만도 한 것이 게임 내에서도 만실 직전이 30제니이라고 했었으니깐.
“왜 그렇게 비싼 거래?”
“나도 모르지. 마을 안에 방이 부족하다는데, 다른 펍은 어쩔련지 모르겠네.”
“하…. 내가 다른 펍 좀 확인하고 올까?”
“그래야 할 것 같아. 흩어져서 다 같이 확인해보자.”
마정우가 북쪽.
마이클이 남쪽
내가 서쪽.
유소라가 이곳에 남아 연락망 역할을 하기로 했다.
“소라씨. 혹시나 누가 시비를 걸거나 무리한 요구를 해오면 이 무전기 버튼 누르고 말해요. 알겠죠?”
“네.”
“한 번 해봐요.”
“네?”
“무전 한번 해보라고요.”
“아…. 네.”
삐빅.
무전기가 켜졌다.
“이…. 이렇게 하면 되는 건가요…?”
마이클 허리춤에서 유소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맞아, 유소라. 그렇게 하는 거에요우.”
마이클이 자신의 권총을 유소라에게 준 뒤 우비를 챙겨 정우와 함께 펍에서 나갔다.
나 또한 제일 저렴한 비닐 우비를 구입하여 입었다.
“제니는 넉넉하게 있을 테니, 배고프면 뭐 사 먹고 계세요.”
“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펍 밖으로 나가기 전 안을 둘러보니 위험한 놈은 없어 보였다.
최대한 빨리 가격을 확인 후 복귀하는 수밖에.
펍의 문을 열자 미칠 듯이 쏟아지는 비가 보였다. 대 현자가 주문을 외웠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강하게 말이다.
“…… 시작부터 불길한데.”
출발하려는 때 아까 천사의 예언이 말해주었던 말이 기억났다.
‘…… 무리하지만 않으면 괜찮겠지.’
* * * * *
비를 뚫고 동쪽 펍 반대편에 있는 서쪽 펍을 찾아왔다.
너무 싸구려 우비를 입어서 그런지 옷이 전부 젖어버렸다.
젖은 머리를 털며 펍의 안으로 들어가자 안에서 대기하고 있는 모든 플레이어의 이목이 내게 쏠렸다.
모두 거리에서 한주먹 할 것 같이 생긴 얼굴들이었다.
“…….”
이곳에는 오는 게 아니었는데.
왠지 모르겠지만 일이 터질 것 같다.
역시나 동쪽 펍에 비해 서쪽 펍은 불량한 플레이어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이 근처에는 치안을 맡은 군인들이 없는데다가. 암묵적인 룰로 플레이어 간의 살인이 허용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제니를 아껴야 하니 어쩔 수 없지.
눈치를 보며 안으로 들어가자 바를 지키고 있는 카우보이 같은 복장의 주인장이 내게 말했다.
“얼굴이 곱상한 것을 보니, 이곳에 올 만한 자가 아닌 것 같은데?”
나는 씨익 웃으며 바 앞에 앉아 말을 이었다.
“…… 숙박료 좀 알아보러 왔습니다.”
“얼마나 머물 생각이지?”
“열흘. 일인실 두 개. 이 인실 한 개. 얼마일까요?”
“일인실은 하루에 오십 제니. 이 인실은 하루에 백 제니. 계산은 알아서 해봐라.”
전부 합쳐서 이천 제니.
총합을 보니 동쪽 펍에 비해 그렇게 싸지도 않았다.
물론 퍼센테이지로 보면 많이 싸진 것처럼 보이지만.
이 금액 또한 내가 생각하기에는 덤터기였다.
비를 뚫고 여기까지 온 것 치고는 실망적인 금액이다.
“흥정이 될까요?”
“아니. 요즘에는 방이 부족해서 흥정을 받지 않아.”
“조금도요?”
카우보이 주인장이 린넨으로 총구를 닦으며 내게 말했다.
“그래.”
저걸 왜 린넨으로 닦아?
그의 불쾌한 표정을 읽은 나는 대화를 마치고 펍으로 나갈 준비를 했다.
더 이상 대화를 해보았자 아무런 이득도 얻을 수 없을 것을 알기 때문이다.
뚜벅. 뚜벅. 뚜벅. 뚜벅.
펍 밖을 향해 걸어 나오고 있는데.
스윽-
두툼한 손 하나가 불쑥 튀어나와 내 앞길을 가로막았다.
“어이. 잠깐 나 좀 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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