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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걸걸한 목소리의 조영기가 말했다.

“…… 내 닉네임은 ‘차카니.’ 엘프 종족의 수장이었다.”

머리가 굳었다.

내 뇌가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보이지는 않지만 정우 또한 나와 마찬가지일 것이다.

귀가 쫑긋 서 있는 백발의 미녀 엘프 캐릭터를 조종하던 그 귀요미 차카니가 저 건달이라고?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싶어 되물었다.

“닉네임이 뭐라고요?”

“차카니. 엘프들의 수장이었는데, 모르나?”

모를 리가.

나와 정우의 심부름꾼이었는데.

“아….”

“하긴 일반 유저가 상위 랭커를 만나는 것은 힘든 일이니깐.”

“그렇죠…. 상위 랭커….”

나는 차카니가 여자 유저인 줄 알았다.

너무나도 귀여운 단어 선택과 끊임없는 애교.

정우와 나를 부를 때 항상 하트를 붙여가며 ‘오빠♡’라고 하던 그의 대화가 생각났다.

심지어 그룹 내에서는 차카니가 여 아이돌 중 누구를 닮았을까 생각하는 뇌피셜도 오갔었다.

내가 생각한 차카니는 청순가련한 박보영이었는데….

X발?

범죄자같이 생긴 얼굴로 우리에게 항상 그런 말을 하고 있었던 것인가.

“하하….”

남들 워터 파크에서 물총 싸움할 때 해맑은 얼굴로 리볼버를 꺼내 들 것 같은 저 흉악무도한 인상.

심심풀이로 지나가는 사람 배에 칼을 꽂을 것 같은 표정.

경찰이 이유 없이 수갑 채울 것 같은 그런….

7대 죄악이 전부 들어 있는 얼굴 말이다.

나는 고개를 떨구어 땅을 쳐다보았다.

“그렇구나….”

천천히 벽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지하실 바닥이 시멘트라 차가웠다.

내 마음하고 이 시멘트 바닥 중 뭐가 더 차가울까?

[‘마정우’ 플레이어의 타오르는 분노가 모든 그룹원에게 전달됩니다.]

정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X발!”

나는 아무 말 없이 벽을 바라보았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알기 때문이다.

정우가 생각하는 차카니는 국민 여동생 아이유였다. 말투가 너무 귀여워서 만나면 뽀뽀하고 싶다고 했었는데.

나중에 다시 물어봐야겠다.

아직도 그 마음이 남아있는지.

캉캉캉!

김연희가 발끝으로 철창을 쳐서 소리를 내었다.

“와! 아저씨가 정말 차카니에요?”

조영기가 걸걸한 소리를 뱉었다.

“그래.”

“나 아저씨 왕 팬인데! 저 엘프 헬름 어둠 길드소속 4급 암살자예요!”

김연희가 존댓말을 사용했다.

태세 전환이 빠른 것으로 보아 정말로 팬인가보다.

아까 전까지만 하더라도 미친개처럼 말싸움하던 둘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대화를 하였다.

“…… 엘프라니. 너 생각보다 괜찮은 아이였구나.”

“아저씨도요. 역시 모든 종족 중에는 엘프가 최고죠.”

“맞다. 엘프가 다른 종족들보다 전체적인 능력치도 높잖아.”

“맞아요! 이쁘기도 하고요!”

“맞다능! 아니 맞아!”

어쩌다가 저 둘이 우리와 같은 노선을 타게 되었을까.

차카니 같은 경우에는 우리와 같이 멸망의 땅을 플레이했었기에 같은 루트로 온 것에 대해 이해가 되었다.

다만 저 여자는 4급 암살자였다고 하는데.

중급 플레이어라고 부르기도 애매하고 상급 플레이어라고 말할 수 없는 위치다.

“너는 닉네임이 뭐였냐?”

“‘I맛탕공듀I’ 였어요.”

“아이디가 이쁘네.”

“헤헷.”

저런 대화를 나누는 자들과 같은 자리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가 비참해졌다.

스스로의 판단인지 어디서 공략법을 본 것인지 모르겠지만.

우리와 스토리 흐름을 똑같이 잡다니, 너무나 큰 우연이 겹쳤다.

‘저 건달 놈이 차카니라….’

그래도 차카니, 아니 조영기가 먼저 대화를 열어준 덕분에 서로의 직업을 유추할 수 있게 되었다.

조영기는 마법사.

김연희는 암살자.

물론 조영기의 직업이 확실한 것은 아니다.

유추일 뿐.

정우와 내가 먼저 신상을 공개하지 않은 것이 참 다행이다.

우리가 먼저 말했다면 조영기가 자신의 신분을 숨겼을 테니깐.

갑자기 적막이 흘렀다.

자기소개를 마친 차카니가 나를 향해 소리 질렀다.

“어이! 김천재!”

“예.”

“너도 자기 소개 좀 해봐.”

“…….”

“너는 게임 내에서 닉네임이 뭐였어?”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사실대로 말한다면 차카니, 아니 조영기가 큰 충격을 받을 것이다.

“고….”

“고?”

“고인… 돌이요. 고인돌.”

후.

“굉장히 낯이 익은 닉네임이네. 그럼 저- 기 끝에 있는 네 친구 닉네임은?”

“어…. 닉진.”

“닉진?!”

조영기의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나도 모르게 말해버린 정우의 닉네임 때문이다.

차카니는 정우의 껌딱지와도 같은 존재였기 때문에 큰 반응이 나온 것 같다.

“이, 익진이요. 토익진. 저놈이 토익을 진짜 열심히 공부했거든요.”

“아…, 익진이. 나는 또 아는 사람인 줄 알았네.”

나는 모르는 척을 하며 그에게 물었다.

“아는 사람 닉네임이 뭐였는데요?”

“…… 명닉진. 랭킹 2위이자 멸망의 땅 후반부에서 전장의 지배자라고 불리던 전설의 야만 전사.”

“……”

“이 정도는 너도 누군지 알지? 모를 수가 없는 분이니깐.”

압니다….

“특이한 닉네임이네요. 약 빨고 만든 것 같은데.”

“…… 닥쳐. 그분은 진짜 엄청난 사람이었어.”

지금 당신 옆에 있어요.

조영기가 무언가를 회상하듯 잠시 대화를 멈추더니 목이 메는 목소리를 내었다.

“생각해보니 그분보다 더 대단한 사람도 있었어.”

정우보다 대단한 사람?

“그게 누군데요?”

“유일무이한 전적으로 멸망의 땅에서 랭킹 1위를 차지한. 신이라 불린 고인물 플레이어님.”

예….

조영기가 추억팔이 하는 아저씨처럼 신나는 목소리로 대화를 이었다.

“그분은 정말 신이라고 불러야 하는 사람이야. 못 하는 게 없으셨으니깐.”

“아….”

“고인물 님은 멸망의 땅 후반부에서도 혼자 보스 몬스터 사냥하러 다니셨어. 굉장하지 않냐?”

“어…, 예….”

“멸망의 땅 라스트 게임의 마지막 라운드도 그 사람 혼자 마을을 전멸시켰잖아.”

“…… 그런 것 같아요.”

존경하는 인물을 말하듯이 설명하고 있다. 너무 흥분해서 대화를 끊지 못하겠다.

그의 칭찬 덕분에 기분이 더러우면서 좋아졌다.

* * * * *

회색 시멘트로 대충 만들어진 건물의 연구소라고 적힌 간판이 너덜거렸다.

중요한 장소였는지 입구부터 경계가 삼엄했다.

수십 개의 바리케이드와 중무장을 한 군인들.

양옆으로 탱크가 대기하고 있을 정도니 중요시설인 게 확실했다.

김준철 소령이 서둘러 건물의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똑. 똑. 똑.

“박사님. 김준철 소령입니다.”

-들어오세요.

철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흰색 가운을 입고 있는 노인이 보였다.

“오! 김준철 소령!”

“오박사님.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나야 뭐, 항상 같지.”

“하하…. 잘 지내셨다니 다행이네요. 최근 들어 돌연변이 놈들이 많아져서 걱정했습니다.”

“놈들이 여기까지 와봤자 뭘 어쩌겠나. 자네가 보내준 든든한 친구들이 지켜주고 있는데!”

박사가 테이블 위에 있는 커피잔을 들고 말을 이었다.

호로로록-

“그나저나 자네가 여기까지 왔으면 이유가 있을 텐데. 어쩐 일로 왔지?”

“별일은 아니고. 이번에 새로 보급받은 수트가 망가져서 고칠 겸 들렀습니다.”

김준철 소령이 수트를 책상 위에 올려놓더니 피곤한 듯 소파에 몸을 뉘었다.

“신형 수트가? 총탄도 뚫지 못하는 수트를 누가 망가트린 거지?”

“중급 돌연변이였는데. 제가 방심했습니다.”

박사가 수트를 펼쳐서 찢어진 부분을 보더니, 혀를 찼다.

“쯧쯧…. 이 정도로 찢어졌으면 큰 부상을 당했을 텐데. 죽지 않은 것이 다행이네.”

“제가 죽으면 되겠습니까. 놈들을 없애지 못했는데….”

“자네가 없어도 누군가는 하지 않겠어?”

김준철 소령이 씨익 웃더니 두터운 담배를 꺼내 물었다.

치직. 치지직.

쓰읍-

푸후-.

“누군가라…. 그럴만한 인물이 하나 있기는 하죠.”

“응? 그게 누군가?”

“만나게 되면 소개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살아있다면요.”

“살아있다면이라…. 보기 힘들겠군.”

박사가 껄껄 웃더니 김준철 소령의 반대편에 앉았다.

“수트. 말고도 또 내게 부탁할 일이 있지? 이제는 당신 눈빛만 봐도 알아.”

“…… 역시 오박사님이십니다.”

“이곳에 온 진짜 용건이 뭔가?”

김준철 소령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후우-

“연구, 아직 결과가 안 나왔습니까?”

“……”

“놈들의 세력이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학습능력 또한 발달했는지 공격 오는 패턴이 매번 바뀌고 있어요.”

“결과는 나왔지만…. 아직 미완성이네. 위험 요소가 너무 많아.”

김준철 대위가 석연찮은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쓰읍-

푸후-.

“언제쯤 완성될까요?”

“그건 나도 모르지. 다만 먼 미래는 아닐 거야.”

“추상적으로 가늠하지 말고. 정확하게 날짜를 말씀해주실 수는 없습니까?”

오박사는 김준철의 이야기가 불편했는지, 시선을 피하며 커피를 마셨다.

호로록-

“아까도 말했지만, 연구 결과라는 게 정확하게 언제까지 완성된다! 라고 딱 잡아서 말해 줄 수 없어.”

“……”

“이쪽에서도 열심히 노력하고 있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게나.”

김준철이 박사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먼저 일어나보겠습니다.”

“수트는 자네 부하를 통해서 보내도록 하겠네.”

“옙. 그럼 다시 만날 때까지 건강하게 지내십시오.”

“알았네. 그리고…. 나를 믿고 연구를 맡겨 주어서 고맙네.”

삐빅.

무전기가 울렸다.

-로미오 송신.

“말하라.”

-여단장님. 제1 기지 위병소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무슨 용건인지?”

-여단장님을 아는 자라면서 외부인이 난동을 피우고 있다고 합니다.

“나를 알아? 어디서 내 이름을 주워들은 건가…. 로미오, 외부인은 격리시설에 넣어라. 저항이 심할 경우 발포를 허가한다.”

-알겠습니다. 무전 끝.

“수신.”

삐빅.

대화가 끝났다.

김준철 소령이 머리를 긁적이더니 멋쩍게 웃으며 박사를 보았다.

“별 이상한 놈이 다 있군요. 저를 알고 있다니.”

“그러게 말이야. 외부인이라면 해외에서 보낸 용병이거나 밖에서 운 좋게 살아남은 떠돌이 동물들밖에 없을 텐데.”

“…….”

“해외에서도 이제 우리나라로는 못 들어오잖아?”

창밖을 바라보며 무전기를 허리춤에 꽂으려던 김준철 소령이 동작을 멈추었다.

“잠깐….”

김준철이 무언가가 떠오른 듯 빠르게 무전기를 켰다.

삐빅.

“브라보김 송신.”

-로미오 수신.

“나를 찾아왔다는 자의 이름이 무엇인지?”

갑자기 모래 폭풍이 불며 무전기에서 ‘치지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치지직 김 치지긱 재 치직입니다.

“뭐라고?”

-김천 치지지직 재 치직. 김천재 라고 합니다.

“김… 천재?”

김준철의 동공이 커졌다. 살짝 벌어진 입에서 힘이 풀리며 담배가 떨어졌다.

그가 침을 꿀꺽 삼키더니 다시 무전을 날렸다.

“김천재라고 했나?”

-치지지직 맞습니다.

“로미오! 발포를 불허한다. 그분을 정중히 안으로 모시도록 해라.”

-치지지지지직….

“로미오? 로미오! 로미오!!”

-치지직…. 수신. 정중히 안으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브라보 수신! 무전 끝, 내가 지금 당장, 그곳으로 직접 가도록 하겠다!”

김준철 소령이 목소리를 높이자 박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삐빅.

무전기가 꺼짐과 동시에 박사가 말을 걸어왔다.

“김준철 소령. 갑자기 왜 이렇게 흥분을 하고 그래?”

“…… 왔습니다.”

“왔어? 뭐가?”

“아까 말한 사람이요.”

“아까… 말한 자네를 알고 있다는 외부인?”

“…… 예.”

“그게 누군데?”

김준철 소령이 땅에 떨어진 담배를 주워 물더니 연기를 길게 내뱉으며 환하게 웃었다.

“여는 자. 문을 여는 자가 드디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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