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한 번만 말해줄 거니 다들 잘 기억하도록 해. 지금 확실하게 알 수 있는 다른 플레이어는. 우리 앞쪽으로 걷고 있는 여고생과 그 옆에 있는 두 명의 남성이야.”
정우가 머리를 긁적였다.
“저 녀석 중 한 명이 네가 말한 암살자냐?”
“어. 저 여자애. 나를 추격하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어.”
“역시. 걷는 내내 주위를 둘러보는 게 보통은 아니라고 생각했어.”
“…… 그리고 이 줄의 맨 뒤에서 걷고 있는 스님 다섯 명. 저들도 플레이어야.”
마정우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소라가 나를 보는 척하며 스님들을 확인했다.
마이클이 호탕하게 웃으며 스님들에게 말을 걸었다.
“오우! 스님도 플레이어였어요우?”
아이 저 미친 X.
NPC인 척하던 스님 무리가 당황스러워하며 서로 눈치를 보았다.
그들 중 주지로 보이는 중년의 남성이 못마땅한 얼굴로 합장을 했다.
“그, 그렇습니다.”
“나도 부디스트. 스님 반가워요우.”
“보살님이십니까?”
“예스. 아임 보살. 우리 엄마도 보살이에요우.”
“나무아미타불…. 앞서가시는 분들도 플레이어이신지요?”
“예스! 저기 저 눈 찢어진 놈이랑 빨간 코트 입고 있는 사람. 전부 내 친구에요우.”
‘저 미친놈이.’
정우가 마이클의 목덜미를 잡아끌었다. 유소라가 손바닥으로 마이클의 입을 때렸다.
찰싹.
내가 스님들 앞으로 가서 대화를 이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저희 플레이어가 신경 쓰이게 해서 죄송합니다. 그럼 이만….”
스님이 고개를 숙여 우리에게 인사했다.
“관세음보살….”
자리로 돌아온 내가 이를 꽉 깨물고 마이클에게 말했다.
“마이클.”
“응? 천재 킴. 말해요우.”
“다른 플레이어에게 우리 신분 노출하지 마.”
“와이?”
“지금 이 무리 안에 있는 플레이어들은 대부분 멸망의 땅 경험자들이야.”
마이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인가요우?”
“어. 아마 모든 그룹에 경험자가 섞여 있을 거야. 아니라면 서로 경계하지도 않았겠지.”
“오우….”
“강북으로 넘어가기 전. 이곳에 있는 대부분이 죽어.”
이야기를 듣던 유소라가 내 옆으로 붙었다.
“천재씨 정말인가요? 대부분이 죽는다는 말….”
“예. 걱정할까 봐 미리 말씀드리지 않았는데. 여기서 살아남을 수 있는 인원은 NPC 포함해서 십 프로도 안 될 거예요.”
“저희는 살 수 있나요?”
“…….”
내가 대답하지 않았다.
나도 모르기 때문이다.
대답이 없자 유소라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침묵이 어떤 대답인지 알기 때문이다.
“소라씨. 마이클. 앞으로 다른 그룹과 친해지거나. 정을 주지 말아요. 독이 돼서 발목을 붙잡을 거니깐.”
“……”
* * * * *
신사 사거리를 지나 터미널 안으로 들어가자 곧장 한강에 도착했다.
넓게 펼쳐진 한강 물을 보는 순간 모두에게 미소가 지어졌다.
카페로 쓰고 있는 커다란 유람선과 함께 보트 여러 대가 보였기 때문이다.
시민 NPC들이 희망에 찬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가… 강북으로 갈 수 있는 건가!
-살았다…. 살았어…. 흐윽….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김준철 소령의 부대가 넓게 펴지며 한강에 있는 좀비들을 상대했다.
수가 많지 않은데다가 대부분이 띄엄띄엄 떨어져 있어서 사격하기 편했다.
탕!
주위를 정리한 김준철 소령이 환한 얼굴로 크게 소리쳤다.
“전원 배에 탑승하도록!”
시민 NPC들이 커다란 유람선에 줄지어 탑승하기 시작했다.
입구에는 플레이어들이 다리를 넘어갈 수 없게 투명한 막이 처져 있었다.
[입장 시간이 되지 않았습니다.]
내가 정우에게 담배를 받아 물었다.
치직. 치지직.
쓰읍. 푸후-.
이 기회에 모든 플레이어를 가까운 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다섯 명의 스님 무리.
여고생과 두 명의 운동선수.
그리고 제일 강력해 보이는 플레이어 한 명.
“정우야. 저놈 조심해야겠다.”
“…… 미쳤네.”
빡빡머리에 살의가 느껴질 정도로 흉악무도한 얼굴과 하얀 정장, 그 안으로 보이는 꽃무늬 셔츠와 백구두.
누가 봐도 어둠의 세계에서 힘 좀 쓰는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리던 중.
의외의 인물을 보게 되었다.
눈을 가로질러 얼굴에 길게 늘어진 상처와 피범벅이 된 검은 코트.
이 게임의 주요 NPC이자 마지막 라운드까지 악역을 맡은 악마.
화신(火神)이라 불리는 김정재가 우리 앞으로 섰다.
“비켜라.”
내가 그와 눈을 마주쳤다.
그가 나를 내려 보았다.
매서운 눈빛이 오금을 저리게 했다.
이렇게까지 악한 얼굴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멸망의 땅에서는 그의 얼굴이 그저 검은색 화면으로 표시되었으니깐.
나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지 않으면 녀석의 허리춤에 있는 검이 내 목을 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
놈이 걷는 대로 길이 뚫렸다.
군인들마저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길을 만들어 주었다.
나는 놈이 지나간 길을 보며 정우에게 흘리듯 말했다.
“저놈. 벌써 나왔어.”
“…… 스토리가 틀어졌나? 저 자식 각성 루시퍼가 나올 때까지는 등장하지 않는 놈이잖아.”
“아마도. 내가 첫 번째 라운드에서 루시퍼를 조져놔서 그런 것 같은데.”
“…… X 됐네.”
김정재가 유람선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의 걸음을 마지막으로 우리 앞을 가리고 있던 투명한 막이 사라졌다.
김준철 소령의 명령에 따라 도깨비 가면을 쓴 자들이 유람선 옆으로 놓인 보트에 탑승했다.
안쪽에 빨간 글씨로 ‘승선 정원 8명’이라고 적혀 있었다.
군인들이 전원 탑승하자 김준철 소령이 손을 휘저으며 플레이어들을 향해 소리쳤다.
“빨리 타십시오!”
남아있는 플레이어들이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생사가 걸린 선택지이기 때문이다.
유람선과 보트.
그 밖으로 홀로그램 화면이 나타났다.
[유람선: 115/120]
[소형 보트1: 6/8]
[소형 보트2: 6/8]
[소형 보트3: 6/8]
[소형 보트4: 6/8]
남은 인원은 열세 명.
유람선에 탑승할 수 있는 인원은 다섯 명.
그나마 안전한 큰 배에 탑승할 수 있는 인원이 제한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 먼저 선택하려 들지 않았다.
모두가 고민하는 사이.
“…… 가자.”
나는 탑승할 배를 단번에 선택했다.
* * * * *
어둠에 가리워진 한강.
천천히 떨어지던 빗방울이 점점 굵어지더니 강하게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투두두두두두.
스님 플레이어와 보병 부대 그리고 피난민들을 태운 유람선이 선착장에서 출발하였다.
쿠구우우우웅.
보트에 탑승한 나머지 군인들이 장비를 점검하며 뒤를 따를 준비를 했다.
김준철 소령이 빗물로 흠뻑 젖은 얼굴을 쓸어내리더니 크게 소리쳤다.
-유람선에 탑승하지 못하신 분들은! 보트로 이동해주시기 바랍니다!
그의 손짓에 따라 플레이어들이 자리를 이동하기 시작했다.
서로 눈치를 보았다.
우리 그룹은 자연스레 두 무리로 나누어졌다.
[김천재, 유소라]
[마정우, 마이클]
정우와 마이클이 첫 번째 보트.
우리는 마지막 보트에 탑승했다.
나머지 인원들은 그 사이에 있는 보트에 알아서 맞추어 앉았다.
보트 앞으로 가자 군인들이 손을 내밀었다.
“천천히 발을 내미시기 바랍니다.”
먼저 타게 된 유소라가 방긋 웃으며 군인의 손을 잡았다.
“네.”
도깨비 가면을 쓴 자들의 도움을 받아 소형 보트에 몸을 싣게 되었다.
유소라가 휘청대는 보트 위에 오르며 손을 잡아주는 군인에게 말했다.
“고마워요.”
“아닙니다. 탑승하셨으면 구명 조끼를 입어 주시기 바랍니다.”
“네.”
이 도깨비 마스크를 한 군인들은 ‘멸망의 땅’ 후반부의 스토리까지 따라오는 고급 인력.
최대한 우리와 가깝게 만들어야 한다.
물론 정해진 틀에 벗어나지 않고 본래의 스토리대로 흘러갈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빨리빨리 탑승해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보트에 탑승하기 전 한강을 둘러보았다.
어두워서 그런지 강물마저도 탁하게 보였다.
비릿한 물비린내와 함께 상류에서 흘러 내려온 좀비 시체가 보였다.
‘…… 징그러운 놈들.’
나는 유소라의 뒤로 보트에 탑승하며 군인들의 상태를 보았다.
군인 6명 사이에 내가 조종하는 ‘박규환’이 섞여 있었다.
‘좋아.’
미리 이 보트에 탑승하라고 명령해두기를 잘했다.
NPC 특성 덕분인가? 박규환의 상처들이 전부 회복되어 있었다.
터벅. 터벅. 터벅.
“모두 준비 되셨습니까?”
김준철 소령이 우리와 같은 보트에 탔다. 도깨비 부대의 우두머리인 김준철, 다른 플레이어들은 그가 여섯 대의 보트 중 무작위로 탑승한다고 알고 있지만….
아니다.
나는 알고 있었다.
그가 이 배에 탑승하리라는 것을.
“천재씨, 진짜네요. 정말로 저분이 이 보트에 탔어요.”
“…… 무조건이에요. 이 배 안에는 의무병이 타고 있으니까요.”
“어…. 의무병?”
“예.”
김준철이 이 배에 탑승함으로써 생존확률이 급격히 상승했다.
정우가 타고 있는 배도 작전과장이 동행했으니 침몰할 일은 없겠지.
고개를 돌려 다른 보트들을 보니 출발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여고생 플레이어와 건달 플레이어가 한 보트에 탔다.
그 옆으로 운동선수로 보이는 남성 플레이어 두 명이 보트에 타고 있었다.
그 외에 나머지, 스님들은 유람선에 탑승했다.
우아아아아아앙-!
모터에 시동을 걸자 물이 갈라지며 굉음이 났다.
보트들이 조금씩 움직이며 서로의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소라씨. 보트가 출발하면 고개를 최대한 낮추고. 절대 물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 알겠어요.”
“백신은 잘 챙겼죠?”
유소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참. 옷을 주려고 했는데.”
“옷이요?”
“예. 지금 마이클 가방 안에 있어서 나중에 드릴게요. 생각보다 좋은 능력치를 가진 물건을 찾아서요.”
“어디서요?”
“저희 살던 곳. 현대맨숀 4층이었나? 3층이었나.”
“아……, 고마워요.”
덜컹.
보트가 천천히 움직였다.
우우우우웅-.
학익진의 형태를 만들 듯 넓게 펼쳐진 보트들.
김준철 소령이 무전기로 신호를 내리자 차례대로 출발하기 시작했다.
삐빅.
“출발한다. 선착장에 남은 병력들은 다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도록.”
삐빅.
-알겠습니다.
무전을 마친 김준철 소령이 손을 높게 들더니 힘차게 휘저었다.
보트들이 일제히 출발하며 유람선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그의 신호에 따라 두 번째 라운드의 본 게임이 시작된다.
[두 번째 라운드]
[선택지 A의 두 번째 임무를 시작합니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세차게 내리던 비가 언제 그랬냐는 듯 멈추었다.
먹구름으로 가득 찼던 하늘이 갈라지고, 노을이 지고 있다.
어디선가 몰려오는 황토색 먼지들이 빛을 가려 폐허가 된 도시를 붉게 만들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자 흙냄새가 났다.
익숙한 풍경이다.
‘멸망의 땅’ 게임을 시작하면 첫 번째 로딩 화면에 나오는 그 도시.
그곳이 강북 넘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천재씨. 저기……”
“예?”
“저기가 정말 안전한 곳 맞나요?”
“…… 예.”
황폐해 보이지만 안으로 들어 갈 수만 있다면 우리에게 가장 안전한 곳이다.
지금 이곳에서 보아서는 알 수가 없다.
아지랑이가 핀 듯 황토색 도심이 흔들려 보일 뿐.
우리의 도착지는 단순히 선착장 반대편에 있는 강의 북쪽이 아니다.
‘멸망의 땅’에서 생존자들에게 주는 첫 번째 희망.
‘유토피아’가 기다리고 있으니깐.
위이이이이이이잉-
보트가 속도를 높여 물살을 가르기 시작했다.
유람선과의 거리가 점점 좁혀지자 강의 반대편에 있는 아파트 위에서 연기가 치솟아 올랐다.
연기를 확인한 김준철 대위가 무전기를 켰다.
삐빅.
“정보조. 사백 미터 전방 총기 소지자들 피아식별 가능한지?”
-통신이 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군부대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식별이 불가능하다는 말이냐?”
-예, 그렇습니다.
“…… 알았다. 계속 통신 대기 유지하도록.”
고개를 들어 위치를 확인하니 기관총과 대공 무기들이 그 위로 설치되어 있었다.
열려있는 창문 안으로 소총을 든 사람들이 보였다.
다들 제각기 다른 옷을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시민 부대 또는 예비군들로 편성한 부대 같았다.
허리를 깊숙이 숙인 유소라가 내게 물었다.
“언제까지 숙여야 하나요?”
“도착할 때 까지요.”
“…….”
그녀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강의 반쯤 도착했을 무렵.
총성이 들려왔다.
타앙!
피슝-.
김준철 소령이 망원경을 꺼내어 총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보았다.
“…… 뭐지?”
삐빅.
-여단장님! 북쪽에 있는 놈들의 총구가 저희를 향하고 있습니다.
“뭐?”
-반대편 회색 빌라 위 60mm M1으로 보이는 바주카포가 유람선을 조준합니다!!
“…… 바주카포?”
-옵니다!
휘유우우우웅-
바람 가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콰광!!
물이 터져 올랐다.
로그인 더 아포칼립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