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어둡다.
밤은 아니었다.
그저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을 뿐.
[‘김천재’님의 그룹]
[앞으로 진행될 ‘멸망의 땅’ 두 번째 라운드의 스토리 흐름을 선택해주세요.]
A. 지하, 해상.
B. 해상, 지하.
언뜻 보기에는 순서만 다를 뿐 아무런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앞쪽에 오는 지형이 어디냐에 따라 성장 속도에 큰 영향을 끼친다.
[선택지- A]
모두가 A를 선택했다.
이것 또한 건물에서 나오기 전 대화를 마친 부분이었다.
사이렌 소리와 함께 민방위 훈련 방송처럼 커다란 스피커 소리가 울렸다.
위이이이이이이잉!!
-시민 여러분, 숨어계시지 마시고 건물 밖으로 대피해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전파합니다. 건물 밖으로 대피해주시기 바랍니다.
투드드드드드드.
도로가 내려앉을 정도로 많은 수의 탱크가 우리 눈앞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콰직!
그 밑으로 깔린 좀비들이 터지며 초록색 액체를 뿜어냈고.
-크에에엑!
뒤를 이어 걸어오는 방독면을 쓴 군인들이 K2 소총으로 사주 경계를 하며 건물들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건물 밖으로 나오는 시민들을 보호해라!”
우렁찬 외침에 고개를 돌려보니 소령 견장을 차고 있는 남성이 보였다.
가슴팍에 도깨비 자수를 달고 있는 군인.
그가 주변을 둘러보더니, 무전기에 대고 속삭였다.
-1대대 진입.
도깨비 가면에 검은색 특공 복장을 한 군인들이 유리창을 깨며 건물 안으로 진입했다.
와장창!
-2대대. 3대대. 4대대. 전원 진입하도록 한다. 전원 발포 허가할 테니 깨끗하게 처리하도록.
-알파, 수신.
-로메오, 수신.
-브라보, 수신.
-델타, 수신.
그의 명령과 함께 우리가 나온 빌라 근처에 있는 모든 건물을 군인들이 포위했다.
투! 웅!
귀가 먹먹했다.
탱크가 포를 발사한 것이었다.
공기가, 아니 공간이 흔들린다고 생각될 정도로 큰 굉음이었다.
피유우우우웅-
쿠궁.
쾅!
도로를 점령한 좀비 무리 중앙에 포탄이 터졌다. 탄이 터진 자리에 새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바람이 불자 연기가 걷히며 산산조각이 난 좀비들이 보였다.
익숙한 풍경의 도로.
그렇다.
실제로 와보지는 않았어도 ‘멸망의 땅’에서 질리도록 보았던 그곳.
[압구정]
두 번째 라운드의 시작점이다.
‘와……. 게임에서 봤던 장면이랑 똑같네.’
심지어 정부에서 파견했다는 군인들에 대한 묘사도 똑같았다.
게임 설정에 맞추다 보니 현실이랑 조금 차이가 있는 것 같지만, 어색한 간판들이 몇 군데 보였다.
“…… 아니지.”
이제는 이곳이 현실인가.
하여튼 시작 포인트는 자신의 집이어도 문을 열고 나오면 한국에 거주하는 모든 플레이어는 이곳으로 모이게 되어 있다.
마이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천재 킴. 여기가 어디에요우?”
“압구정. 마이클, 무전기 채널 맞췄지?”
“예스.”
“…… 좋아.”
터벅. 터벅. 터벅. 터벅.
우리 앞으로 방독면을 쓴 소령이 다가왔다.
가슴팍에 달린 도깨비 자수, 아까 무전을 날리던 놈이다.
“괜찮으십니까?”
“예.”
“저는 제19 공수특전여단의 김준철 소령이라고 합니다.”
딱딱해 보이는 인상이다.
김준철.
Z 바이러스 사건이 터진 후 여단장이 사망하여 임시로 모든 지휘를 맡게 된 장교다.
육군의 핵심이자 ‘멸망의 땅’에서 최고의 힘을 발휘하는 부대.
나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앞으로 자주 보게 될 테니깐.
“김천재입니다.”
“이 건물에서 나오신 분은 네 분이 전부입니까?”
“…… 예.”
“안에는 더 없고요?”
“없어요. 전부 좀비한테 죽었어요.”
“……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켜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고마워요.”
그의 안내를 따라 후방으로 이동하자 좀비들을 피해 도망 온 시민들이 보였다.
게임에서 묘사한 피난민과는 다르게 모두 세련된 옷과 깨끗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피난민들 사이에 도착한 내가 소령에게 말했다.
“이 행렬을 따라가면 되는 거죠?”
“…… 옙.”
“그럼 저희가 알아서 합류하도록 하겠습니다. 바쁘실 텐데 가보세요.”
“괜찮으시겠습니까?”
“예.”
“감사합니다.”
소령이 목례를 한 후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길게 늘어진 이 행렬이 향하는 곳은 성수대교다.
터벅. 터벅.
피난민의 뒤를 따라 걷는 내내 정적이 흘렀다.
목적지에 거의 다 도착하자, 나는 정우의 팔꿈치를 툭 쳤다.
내 눈빛을 받은 정우가 다른 이들의 손가락으로 찔러 신호를 보냈다.
모두가 내게 시선을 집중했다.
나는 우리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를 뱉었다.
“가자, 안전한 곳으로.”
* * * * *
성수대교 앞 사거리, 다리를 지키고 있는 좀비와 그들을 밀어내고 있는 군부대가 보였다.
나는 군인들을 따라 이동하는 피난민 무리에서 이탈했다.
안전하지 않으니깐.
우리는 근처 빌라의 옥상으로 올라갔다. 어차피 이득을 취하기 힘든 두 번째 라운드의 시작에서는 관전하는 것만 하더라도 충분하다.
괜히 같이 이동했다가는 좀비들이 넘쳐나는 곳에 같이 도착하니 말이다.
정우가 내게 물었다.
“김천재, 우리가 없어도 괜찮을까?”
나는 라이터를 똑딱거리며 대답했다.
“괜찮지. 우리가 없어도 스토리는 흘러갈 거야.”
“…… 그런가.”
“그렇지.”
어떻게 흘러갈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여기저기서 귀를 찌르는 포탄과 총탄 소리가 울렸다.
탕! 탕! 탕탕!
쾅!
손가락으로 두 귀를 막아 보았지만, 고막이 찌릿한 건 같았다.
김준철 소령이 무전기를 들더니 심란한 표정으로 명령을 내렸다.
“목표 지점 포 사격 중지. 전원 사거리를 방어하도록 한다.”
탱크들이 포 사격을 멈추었다.
이어 성수대교 앞 사거리에 탱크로 벽을 세웠다.
-키에에에엑!
도깨비 마스크를 쓴 특공대원들이 허리춤에 매고 있는 기다란 도검을 꺼내어 들었다.
스으윽.
이곳에서의 군인들은 총뿐만 아니라 검까지 사용하는 유능한 인재들이었다.
좀비를 상대하기 위해 특수하게 만든 은으로 만든 검.
도깨비 마스크를 쓴 특공대원들이 좀비들을 향해 도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샥.
-키에에에엑!!
털썩.
너무나도 깔끔한 일격이었다.
PC 게임에서는 정부에서 전국에 있는 검도 사범들을 전부 모아 인재들을 만들었다고 표현되어 있었는데.
한낱 NPC가 이 정도 실력을 갖추게 될 줄은 몰랐다.
일격 한 번에 한 마리씩 목을 베어냈다.
“다들 정신 차려!”
이어 피난 행렬과 함께 방독면을 쓴 일반 군인들이 모두 도착했다.
그들의 수를 대충 세어본 김준철 소령이 무전기를 켜고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삐빅.
“대교를 넘어간다. 기갑부대, 선 진입, 19공수여단과 예하 부대가 후 진입하도록 한다.”
-송신.
쿠구구구구구구구.
탱크들이 그대로 방향만 틀어 성수대교로 향했다.
앞길을 막는 좀비들을 무시하듯 그냥 밟으며 지나갔다. 벌레 밟듯이 뭉개진 좀비 시체들이 대교 앞을 가득 채웠다.
그 냄새를 버티지 못한 시민이 구토했다.
-우웩. 하아아…. 내, 냄새.
-신이시여…. 저희에게 구원을…. 아멘….
-신은 염병. X신되기 싫으면 빨리 걸어가!
다들 예민하다.
탕! 탕탕! 탕탕탕!
보병들이 이곳저곳에서 튀어나오는 좀비들에게 소총을 쏘며 시민들을 지켜냈다.
열심히 싸웠지만, 전부를 지켜내지는 못했다. 시민 중 몇몇은 좀비에게 공격을 당했다. 물론 그중에 플레이어들도 몇 섞여 있겠지.
저렇게 좀비들이 많은 곳에 가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
겁에 질린 시민들이 더욱 밀집했다. 숨이 막힐 정도로 좁게 말이다.
‘…… 빨리 가면 죽을 텐데.’
곧 시작 될 지옥이 내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나는 그들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최대한 앞줄로 가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보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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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재’님의 플레이어 그룹」
-김천재: 양호(파랑)
-마정우: 양호(파랑)
-유소라: 양호(파랑)
-마이클 비치: 양호(파랑)
[양호(파랑): 생명력 90% 이상]
[보통(초록): 생명력 75% 이상]
[나쁨(노랑): 생명력 50% 이하]
[최악(빨강): 생명력 15% 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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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궁. 쿠궁. 쿠궁.
전차 부대가 지나가고 있는 성수대교 아래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시작인가.’
다리 밑으로 그놈이 도착한 것 같다.
콰과과과과광!!
노후된 건물 수십 채가 동시에 무너져 내리는 듯한 굉음이다.
모두가 균형을 잃고 ‘어어어어’ 소리를 내며 서로를 붙잡았다. 좀비들이 땅에 쓰러질 정도로 땅이 크게 흔들렸다.
지진 강도 6.5 이상이면 이 정도이려나?
앞서 대한민국에서 느낄 수 없던 커다란 강진이었다.
“정우야. 시작하나 보다.”
“…… 멸망의 시작인가.”
쿠구궁.
[‘성수대교’가 붕괴됩니다.]
[플레이어 전원 안전에 유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리가 무너져 내렸다.
군인의 행렬을 따라가던 시민들이 비명을 지르며 다리 밑으로 떨어졌다.
미리 내용을 알지 못했다면 살아남을 수 없는 스토리.
즉, 이 게임을 해보지 않은 자는 죽으라는 말이었다.
-사, 살려줘어어어어!
-끼야야아악!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머리 위에 떠 있는 생명력 게이지를 보니 플레이어도 꽤 있었던 것 같은데.
“…… 후우.”
살아남은 시민들이 절망에 빠진 표정을 지었다.
나와 정우는 담배를 태우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유소라가 떨리는 손으로 입술을 잡으며 내게 물었다.
“처, 천재씨……. 다들…… 죽은 건가요?”
나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예. 떨어진 사람들 전부요.”
“…… 하아.”
유소라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이런 참혹한 광경을 봤으니 그럴 만도 하다.
쓰읍. 푸후-.
내가 뱉은 담배 하얀 담배 연기가 천천히 하늘로 날아갔다. 생각은 충분히 정리되었다.
내가 있는 곳은 멸망의 땅이 확실하다.
“갑시다. 다음 목적지로.”
* * * * *
김준철 소령이 모두에게 들으라는 식으로 무전기에 크게 소리쳤다.
-성수대교 붕괴! 전원 사거리로 후퇴한다!
-다시 전파한다. 성수대교가 붕괴 되었다. 전원 사거리로 후퇴하도록 한다.
삐빅.
그가 피난민들을 향해 소리쳤다.
“뒤로 물러나 주시기 바랍니다!!”
그저 뒤로 물러나라고만 했는데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사람들이 서로 먼저 뒤로 도망가려 언성을 높였다.
-비켜 이 늙은이야.
-어린놈이 어디서 확!
-다들 그만하고 빨리 뒤로 가요! 좀비들이 온다고요!
혼돈이다.
군인들도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이곳에서 강북으로 올라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막혔기 때문이다.
탕! 탕탕! 쿵구구궁.
총탄이 빗발치는 성수대교 사거리.
도깨비 가면 위에 상사 계급을 달고 있는 자가 달려와 김준철 소령에게 물었다.
“어떻게 합니까?”
“이곳에서 사령부의 명령을 기다린다.”
“좀비들의 수가 너무 많습니다. 조금 전 성수대교의 붕괴로 기갑 여단도 전부 잃게 되었고요.”
“…… 기갑여단장과는 연락은?”
“끊겼습니다. 아마도 지금쯤이면 한강 아래….”
김준철 소령이 무너진 성수대교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부대만 남은 건가?”
“77보병사단 예하 2개 대대도 남아 있습니다.”
“인원은?”
“이백오십 명가량 됩니다.”
“하아…. 야! 작전 과장!!”
드워프라고 생각될 정도로 키가 작은 군인이 뿔테 안경을 고쳐 잡으며 달려왔다.
방독면을 쓰지 않고 있는 그가 김준철 소령에게 보고했다.
“대위 노효만!”
“이 근처에서 제일 가까운 대피소가 어디냐.”
“지, 지하철입니다.”
“거리는?”
“오백에서 육백 미터 정도 됩니다.”
“사령부에서 연락은 안 왔고?”
작전 과장이 애꿎은 통신장비를 툭툭 치더니 풀죽을 얼굴을 하였다.
“아직….”
“알았다. 그럼 시민들을 지하철로 대피시키도록 하지. 작전 과장, 네가 앞장서도록 해라.”
“옙!”
김준철이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방에서 쏟아져 나온 좀비들이 시민들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키에에에엑!!
그가 무전기를 켰다.
삐빅.
“전원 압구정역으로 이동하도록 한다. 전원 압구정역으로 이동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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