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설의 재림-423화 (423/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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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러니 -->

토이치TV.

파프리카 프릭스의 미국판이다.

조금 많이 심각할 정도로 상위 호환이다.

내가 작년까지 몸담았던 팀이기도 하다.

단순히 활동만 한 게 아니라 우승도 거머쥐었다.

NA LCS 섬머 시즌의 우승.

이어서 롤드컵 우승이라는 역사적인 업적도 해냈다.

스스로 말하긴 뭣한데 그런 평가를 받는다.

서양권에서는 최초로 있는 우승이었다나.

그렇기에 더욱 걱정이 일었다.

내가 나가고 팀이 공중분해 되면서 망한다.

그런 소리라도 들려온다면 잠자리가 뒤숭숭하잖아.

'태생부터 금수저라 별 걱정까진 안 했긴 해.'

워낙 스폰이 빵빵해서 잘 나가는 선수들만 모았다.

반쯤은 필연이었다는 소리다.

딱 절반.

여건이 좋다고 결과까지 좋으리란 법은 없다.

아폴로 신드롬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멀리서 찾을 것도 없이 KTX 롤러코스터의 예가 있다.

한 번 위기가 찾아왔을 것이다.

구심점이었던 내가 나가고 어떻게 다시 제 궤도에 올릴지.

'전혀 흔들리는 기색은 없던 모양이지만.'

나의 빈 자리가 그렇게 크지는 않았던 듯싶다.

그렇게 생각하니 오히려 서운해지네.

아무튼 잘된 일인 건 분명하다.

문제는 오히려 나였다.

롤드컵의 우승은 달콤했지만 그 대가는 참혹했다.

당시만 해도 한국 선수의 해외 진출이 흔하지 않았으니까.

아니, 한국 선수 때문에 우승을 못했다고?

그 선수가 대체 누구야?

국내에 대서특필 되며 자랑스러운 매국노로 이름을 날렸다.

"많이 힘들었겠어요."

"너무 남 일처럼 말하는데?"

"헤헤."

벨기에 브뤼셀.

한국에 비하면 조금은 따듯하다.

하지만 한 해가 저무는 11월에는 장사가 없다.

쌀쌀한 초겨울 바람이 손등을 때린다.

자신의 커피를 꼭 쥐며 미소 지어온다.

귀엽게 말하면 내가 따지기가 힘들잖아.

'직접 대면하는 건 거의 1년만인 거 같은데.'

토이치TV와의 인연을 만들어준 사람이다.

오랜만에 하비와 만났다.

길거리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때 너무 힘들어서 하루하루 눈물을 안 흘린 적이 없었어."

"정말요? 썽훈이 우는 모습은 상상이 안 가요."

"……"

감성팔이가 안 먹히네!

공감 능력이 너무 부족한 거 아니야?

우리나라 여자들과 달리 그런 걸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나 보다.

'당연히 그딴 걸로 울진 않았는데 나름 힘들긴 했어.'

나 레전설, 동방예의지국의 후손으로서 감당하기 힘든 상처였다.

근본도 없는 코쟁이들을 도와 조국을 상대한다니.

하지만 But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영화에서도, 만화에서도, 소설에서도 남용 가능한 치트키다.

현실에서는 씨알도 안 먹혀서 문제지.

하비와 일말의 진도도 나가지 못했다.

"저는 있었다고 생각하는데요?"

"대체 어디가?"

"교제할 마음이 없었을 뿐이에요."

"……."

술은 마셨지만 음주 운전은 하지 않았다 뭐 그런 건가?

하비가 정말 되도않는 소리를 해온다.

여전히 철벽이다.

'원래 서양은 오픈 마인드 아니었니?'

서로 프리한 관계.

미드에서 보면 여러 사람 돌려 사귄다.

그런 느낌으로 미국에서도 인연을 만들고 싶었다.

안타깝게도 하비는 굉장히 보수적이더라.

자신은 일과 사귄다는 뻔한 입장이었다.

물론 나한테만 보수적인 걸 수도 있다.

"거짓말 아니에요. 부족한 제가 제 직무를 수행해내려면 한눈 팔 틈이 없으니까요."

이래 봬도 토이치TV의 젊은 전무다.

본래는 이사급이었지만 능력을 인정 받아 올라갔다.

젊은 나이에 중요 직책을 맡고 있는 만큼 책임감을 느낄 만하다.

'사실 본래 이사급이었다는 것부터 대놓고 낙하산이긴 하지만.'

하비 집에 가봐서 안다!

으리으리한 대저택이다.

아버지가 아마조네스닷컴의 높으신 분이라고 들었다.

아마조네스닷컴은 토이치TV의 모회사.

자회사의 이사로 꽂아줬다는 뻔한 스토리다.

얼핏 그렇게 보일 수 있으나 나는 실상을 알고 있다.

하비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그리고 이 일에 얼마나 진심인지.

나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처음 만났을 때 생각하면 머리카락이 많이 자랐네.'

인상은 다소 선이 생겼다.

예전이 워낙 부드럽기도 했고

일 때문에 치이다 보면 사람이 민감해진다.

"나빴어요. 나이 들어 보인다는 소리에요?"

"나는 성숙한 쪽이 취향이야."

정말이다.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만큼 이상형이 없어.

요즘 세상에 두 살 차이는 연상으로도 안 친다.

'리얼루다가.'

달래도 틈만 나면 나한테 말을 깐다.

나도 하비한테 사실상 말을 놓긴 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문화의 차이다.

서양에서는 나이를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하비와는 좋은 친구로 지내고 있다.

약간 이용 당하는 느낌도 없지 않아 있지만.

"썽훈 덕분에 중국쪽 진출도 잘 되고 있고 고마워요."

"얼마나 벌었어?"

"그렇게 묻기에요?"

많이 벌었을 것이다.

그분은 "아아, 나는 취미로 사업을 하는 사람이다." 그런 느낌이라 많이 퍼줬을 거라고 본다.

아무튼 과거 이야기를 하자면 끝도 없다.

오늘 만나게 된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일단 하나는 연락이 왔길래.

저도 브뤼셀에 도착했는데 시간 있으면 볼래요?

거절하기도 난감한 시국이라 커피라도 한 잔 마시기로 했다.

"여기서 당신의 시간을 많이 빼앗으면 우리가 이기려나요?"

"영악하네."

"그럼요. 사업하는 사람인데요."

토이치TV도 롤드컵에 참가했다.

어제 8강 D조에서 유럽 1시드인 포나틱과 맞붙었다.

결코 만만한 팀이 아님에도 3 대 1의 여유로운 승리를 거뒀다.

따라서 C조인 우리와 준결승에서 만날 예정이다.

내 시간을 뺐으면 자신들의 승산이 조금은 올라가지 않을까?

짓궂은 농담을 건네온다.

참고로 토이치TV 팀원들은 런던 일정 중 만났었다.

나중에 대회 다 끝나고 한 잔 하자고 약속도 잡았다.

한동안은 서로 바쁘기 때문에 낭비할 시간이 전혀 없다.

'물론 그건 낮 시간이고.'

밤에는 시간이 널널한 편이다.

늦은 만남이라면 충분히 어울려줄 수 있다.

"썽훈은 미국에 쭉 있었으면 한 번은 고소 당했을 거 같아요."

"……주의할게."

"저한테는 괜찮아요."

씨익 웃으며 많이 짓궂은 농담을 건네온다.

아니, 설마 그런 걸로 고소 당하겠어?

판사 상상력이 어지간히 뛰어나야 연견할 수 있겠지.

밤에 그렇고 그런 일만 한다는 것 자체가 편견이고, 음란마귀다.

내 스케줄이 원래 그렇게 짜여있다.

낮에는 연습하고, 밤에는 쉬는 게 보통이지 않은가?

시각에 따라서는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말인 것도 인정은 한다.

"정말로 시간 괜찮아요? 너무 뺏는 거 아니에요?"

"이 정도는 괜찮아. 하비는?"

"급한 일은 다 끝내고 와서……."

작년 토이치TV 멤버에서 나만 빠진 게 아니다.

하비도 서포터 포지션으로 활약을 했다.

본인은 하기 싫어하는 눈치였는데 나만 죽을 수는 없어서 억지로 시켰다.

'팀에 모에캐가 하나쯤은 있어야 돼.'

어쩌다 보니 신조가 됐다.

KTX 롤러코스터도 동물을 하나 키우잖아.

그래서 키우는 거야.

안타깝게도 이제는 그만두었다고 들었다.

"제가 그때 얼마나 바빴는지 알아요?"

"몰라."

"정말……."

모르는 걸 나보고 어쩌라고.

근데 원래 젊었을 적 고생을 사서도 하는 거다.

누가 한 말인진 모르겠는데 합리화할 때 참 좋다.

'그리고 나도 엄청 바빴어.'

팀이 자리 잡지 않았던 단계다.

팀장으로서 혹독한 역할이 요구됐다.

다 해냈기 때문에 좋은 추억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 추억과 적으로 마주하게 되었다는 게.

* * *

벨기에 브뤼셀 엑스포.

불과 하루 전만 해도 중국인들이 북적이던 장소다.

거짓말 같다.

그 많던 중국인이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뭐, 세심하게 찾는다면 몇 명쯤은 있을지도 모르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그렇게 많은 중국인들이 자신들의 나라로 떠나갔음에도 현장은 여전히 북적거린다.

〈어제와는 분위기가 180도 다르죠~?〉

〈맞습니다. 정말 유럽의 한복판, 벨기에에 왔다는 느낌이 물씬 드네요.〉

-맨날 맞대

-그렇습니다, 맞습니다, 동의합니다!

-김은준도 은근히 레퍼토리 없어……

4강 2일차다.

진용준 캐스터의 물음에 김은준 해설이 답한다.

일련의 대답은 한 치의 과장도, 포장도 없는 순수한 감탄이다.

와아아-!

시끌벅적한 현장은 유럽 그 자체.

수천 명의 서양팬들이 벌써 관중석을 메웠다.

지금 이 시간에도 개미떼처럼 몰려들어오고 있다.

중국인들이 자리를 비워도 1만 5천석이 매진이다.

어제는 자리를 빼앗겼기 때문.

그것도 있겠지만 진짜는 기대가 되기 때문이다.

〈물론 어제의 경기도 현재까지 진행된 경기들 중 가장 핫한 매치업이었음이 분명하지만 오늘에 와서 또 갱신이 됐다는 감이 있거든요?〉

〈동의합니다. 어제는 사실 SKY T1의 우세를 점치고 있었어요. 3 대 0이라는 결과가 워낙 충격적이어서 그렇지…….〉

-동의?

-어 보감~

-김은준이 클끼리 말에 동의 안 하는 것 좀 보고 싶어!

-뭐 싸우자는 거냐?ㅋㅋ

데이터에 기반해 경기를 분석하는 김은준 해설이다.

그런 만큼 승부 예측도 자연스레 하게 된다.

사이즈 보니까 SKY T1이 이기겠네.

일련의 예측을 김은준만 한 것도 아니다.

─내 친구가 1부 프로팀 코치인데

업계에서는 SKY T1이 이길 거라 보는 추세라네

Royal 걔네는 대진운 안 좋았으면 8강 탈락했어도 이상하지 않다고

└응, 내 친구는 대통령이야

└하긴 Royal은 조별 때부터 불안했지

└ㅇㅇ포나틱 선에서 정리 당했을 듯

└코치들은 지들끼리만 정보 공유하나?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승부 예측은 농담 따먹기거리로도 참 좋다.

그런 정보라도 취합하다 보면 나름 신빙성이 생긴다.

하지만 이번 4강 B조의 경기는 다르다

섣부른 예측이 오가지 않고 있다.

그나마 있는 예측도 근거가 없는 부류다.

〈KTX 롤러코스터 대 토이치TV…… 정말 세상 일이라는 게 알다가도 모르는 거 같아요.〉

해설진을 물론 방송을 보는 시청자들도 대부분 알고 있다.

그도 그럴게 딱 작년 이맘 때였다.

2014년도 롤드컵의 주인공이다.

〈우승팀과 그 주역의 대결이라고 할 수 있죠.〉

〈아무리 승부의 세계가 냉정하다고 해도 레전설 선수로선 착잡하겠네요.〉

-착잡하겠지……

-근데 이게 결국은 만나게 돼있었음

-토이치TV는 여전히 존나 세더라

작년 롤드컵의 우승팀이었던 토이치TV.

레전설은 그 토이치TV의 에이스라고 할 수 있다.

준결승전에서 마주하게 됐으니 기분이 어떻겠는가?

커뮤니티에는 그의 심정을 공감하는 목소리가 드높다.

─레전설은 오늘 이겨도 져도 애국이네

ㄹㅇ루다가

└지는 순간 미국인ㅋㅋㅋㅋ

└큰 그림 그린 거자너~

└일부러 막 던지는 거 아니야?? 노후 대비하려고?

└아, 이 새끼 진짜로 불안하다

에이스가 빠졌으니 할 만하지 않겠나?

근데 토이치TV는 멤버 하나하나가 웬만한 팀의 에이스급이다.

과장이나 비유가 아니라 글자 그대로의 일이다.

〈비역슨도, 트리플리프트도…… 그리고 한국팬분들께 가장 익숙할 이펙트 선수도 토이치TV 소속입니다.〉

〈여기에 레전설 선수와 달래 선수, 그리고 하비 선수까지 있었는데…… 지금은 그 빈 자리를 그에 준하는 슈퍼 에이스들로 채우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북미의 슈퍼팀이다.

그 역사가 KTX보다 1년은 더 길다.

레전설이 빠졌음에도 여전히 강력한 성세를 떨치고 있다.

롤드컵 4강 무대에 올라왔다는 사실부터가 더 없는 증명이다.

만만한 팀을 상대한 것도 아니다.

GOO Tigers를 2위로 내몰았고, 유럽 1위팀인 포나틱을 잡았다.

〈심지어 서로 잘 알고 있어요. 레전설 선수, 물론 변수 그 자체! 어디로 튈지 모르는 불똥이에요. 그런데 이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봐온 셈이거든요?〉

서로를 잘 아는 초강팀간의 대결이다.

강팀 좋아하는 김은준 해설의 기대가 사무칠 만도 하다.

그리고 이는 한국팬들, 서양팬들도 마찬가지다.

동서양, 전세계 팬들의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KTX 롤러코스터 대 토이치TV.

준결승 4강, B조의 경기.

와아아아아아아-!

어제와 달리 편파는 없다.

벨기에 브뤼셀 엑스포.

쏟아지는 함성 속에서 선수들이 입장한다.

결승전 마지막 진출팀을 가리는 승부의 장이 시작된다.

========== 작품 후기 ==========

재밌게 봐주시는 독자님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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