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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일병이 꺾였을 때였다.
일병 정기를 나왔는데 너무 갑갑하더라?
대학 동기인 민우에게 부탁해 여자를 소개 받았다.
'그게 바로 유리야였지.'
그 이후로 2년이 넘게 지속돼온 인연이다.
근데…… 옛말에 이런 말이 있다.
남녀 사이에 친구는 없다고.
언젠가 그런 일이 한 번은 생길 수도 있지 않을까?
내심 생각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안 생겼다.
모든 여자가 다 예뻐 보이는 군대라는 고비도 넘겼다.
알다가도 모르는 게 사람 인생인가 보다.
유리야와 내가 자게 되다니.
"잘 잤어?"
"……못 잤어요."
그래서 한숨 더 자기로 했다.
조금 특별한 호텔이라 그런지 침대가 푹신해서 잠이 잘 오네.
"왜 못 잤어?"
"……."
대답은 안 하고 부들부들 떨기 시작한다.
유리야의 진동 기능은 언제 봐도 놀랍다.
"저, 저…… 이제 시집 못 가요."
"왜?"
"선배가 저를…… 저를…… 엄청 만졌어요!"
하고자 하는 상황 재현은 다름이 아니다.
그러니까 그날.
미국에 가기 전에 뜻깊은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가기 전에 리야랑 좋은 추억 좀 만들고 싶었어.'
하루종일 같이 다니면서 놀았다.
당시 연락을 오랫동안 못해서 소원했다.
한 번에 몰아서 해치운다는 느낌으로 쏟아부었다.
재밌게 놀았던 걸로 기억이 남아있다.
오랜만에 만나기도 했거니와 미국에 가면 못 본다.
같이 지내는 시간에 더욱 애착이 생겨서 붙어 다녔다.
마지막에는 술도 마시러 갔다.
기분이 좋다 보니 많이 마셨고, 거나하게 취했다.
택시 타고 집에 갈 정신도 없어서 호텔에 간 모양이다.
"그때 내가 장난기가 좀 발동했나 보네. 러브 호텔을 다 가고."
"어, 어떻게 장난으로 이런 곳을 와요……."
"그러게. 나도 참 기발한 녀석이야."
아니면 주위에 호텔이 여기밖에 없었을 수도 있겠지.
아무튼 호텔에 방을 잡고 같이 잤다.
잠이 솔솔 왔던 걸로 기억한다.
'그때도 아마 생각을 했었는데…….'
안고 자니까 기분이 무척 좋다.
큰 강아지를 왜 키우는지 알 듯한 느낌.
보들보들 보슬보슬하면서도 귀 같은 거 깨물면 리액션도 앙증맞고.
"먹으면 안돼요! 흐아아앙!! 아파요. 아파요오!"
"귀가 왜 이렇게 부드럽냐. 푹 삶은 삼계탕 살 같아."
내가 술을 마신다고 필름이 끊기는 타입은 아니다.
한입 맛보자 계기가 되어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지금은 정말 맛만 봤는데 당시에는 더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 정도로 감칠맛과 육질이 살아있다.
술을 마시고 판단 능력이 모호해진 상태라면 더욱 탐할 만하다.
유리야의 엉덩이 이외에도 탐스러운 신체 부위가 한 곳 더 늘었다.
"저 진짜로 시집 못 가요……."
"에이, 엄살은."
"그치만…… 그치만……."
"그치만 또또 뭐?"
"다른 곳도 엄청 만졌어요."
"……."
안고 자는 인형 느낌이라서 잠꼬대를 좀 했나 보네.
얘가 애기처럼 보들보들하고 피부도 보드랍다.
잠결에 나도 모르게 손이 가버린 듯하다.
"리야야, 이런 말하기 뭣한데…… 사람은 자신한테 솔직하게 살아야 돼."
"그럼 저는요?"
"겉과 속이 같은 진실된 사람이 돼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니?"
"모르겠어요……."
내 감정에 솔직할 뿐이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도 만지작만지작 하고 싶다.
근데 선후배 사이에 그러면 안되니까 참는 거지.
"막말로 안고 자는 인형을 더치 와이프라고 부르진 않잖아? 안고 잤다고 와이프라고 부를 일은 아닌 거지."
"그럼 아무 일도 아닌 거에요?"
"아무 일도 아니지는 않긴 한데……. 책임을 질만한 일이라고 보기에는 비약이 있다 그런 말이야."
술을 마시고 거하게 실수를 했다는 건 인정한다.
내가 유리야를 평소에 굉장히 아낀다.
그러다 보니, 좋아하다 보니 감정이 새어 나왔을 뿐이다.
"오늘은 술 안 마셨지만 그때는 마셨잖아요."
"그랬지."
"저도 마셔서 기억 하나도 없어요."
"그렇구나."
미국에 가면 한동안 못 만나지 않는가?
술을 나만 마셨던 게 아니다.
유리야도 같이 마셨다.
'유리야가 술을 꺼려하긴 하는데.'
칵테일 같은 분위기 있고 달달한 건 좋아한다.
살짝 로망이 있는 느낌이라 입술로 쪽쪽 잘 빨아 마신다.
이전에 한 번 보내버린 적이 있기 때문에…… 경계를 했지만 결국 마셨다.
그냥 넘기기에는 달콤한 유혹이다.
마지막 날이기도 해서 기념비적인 의미다.
그것이 러브 호텔까지 연결되다 보니 생각이 복잡해지긴 한다.
"나쁜 일 했을 수도 있는 거잖아요."
"나쁜 일 뭐?"
"그, 그 있잖아요! 그거!"
"그래, 그래. 그래서 뭐?"
유리야라고 모르진 않겠지.
초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를 2학년까지 마쳤다.
S로 시작하는 그 단어를 입으로 내뱉기에는 거부감이 드나 보다.
"만약에 했으면 어떡해요."
"어떡하긴 기분 좋……. 아니, 했을 리가 없잖아."
무슨 슈뢰딩거의 고양이야?
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
아니면 관측을 해야만 우리가 그 사실을 알 수 있는 거니?
'몰래 카메라가 있었으면 그건 범죄겠지.'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는 몰라도 대충은 알 수 있다.
잠자기 전 기억은 모호해도 잠에서 깨어난 이후는 기억한다.
"너 그때 꿀잠 자고 잘 일어났잖아."
"잠은 푹 자긴 했어요."
"아침에 해장국도 먹고, 후식으로 아이스크림도 먹고, 리얼초콜릿라떼도 마시고……. 작작 좀 먹어라 진짜."
"히잉……"
먹는 건 진짜 잘 먹어.
그렇게 잘 먹고 돌아가서 나중에 삐져 가지고.
머릿속에서 무수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나를 미워하면 안되지.
"그럼 아무 일도 없었던 거에요 정말로?"
"야."
"네……."
"그때 만약에 일 있었으면 너 걸어서 못 돌아갔어."
내가 괜히 크하하+커져라를 언급한 게 아니야.
당연히 농담이지만 의구심 자체가 섭하다.
이 발랑 까진 녀석아.
"만약 그러고도 아무 말도 안 했으면 내가 쓰레기지."
"선배 쓰레기라고 많이 듣잖아요!"
"그건 방송 컨셉이고."
"선배 동기 오빠랑 언니들이 선배 쓰레기라고 했어요."
"……."
사람은 스스로 보고 느낀 것만 믿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의 말과 평판에 흔들려서는 안된다.
이번 일을 계기로 나에 대한 신뢰가 더욱 두터워졌으면 싶다.
"죄송해요…… 사실 저 선배가 그날 일 언급도 안 하고, 막 피하는 눈치라 멋대로 상상했어요."
"그냥 생각도 안 하고 있었어. 피하거나 그런 게 아니야. 이제라도 오해가 풀렸으니 됐다."
쿨하게 용서해줄 도량이 있는 남자다.
사람이 한 번쯤 실수할 수도 있다.
그리고 평소 내 행실도 잘못됐다.
유리야한테 장난도 많이 치고.
심한 짓도 한 적이…… 없지는 않고.
그러다 보니 사소한 오해가 쌓여서 이런 일이 일어난 거다.
"근데 저…… 선배."
"응?"
"그날 저 고, 고백도 했었는데……요. 기억나세요?"
"……."
그랬던 것 같기도 하구나.
리야가 그날을 특별하게 생각할 만도 하네.
'대놓고 말한 건 아니었지만.'
유리야 치고는 엄청난 용기를 냈던 걸지도 모른다.
최소한 본인은 그렇게 생각을 하나 보다.
"너도 알다시피 오빠가 바빠서 그럴 겨를이 없어. 일에 집중해야 하는 시기잖아."
"네, 알아요. 그러니까 저……."
기다려도 되냐고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어온다.
작았던 유리야가 달라졌다는 실감이 와 닿는다.
너무 꼬맹이라고만 여겼다는 걸 인정해야겠다.
'5년을 예상했던 적이 있었는데…….'
얘가 매력이 생기려면 최소 5년은 숙성해야 한다.
농담삼아 생각했던 이야기가 현실감을 가진다.
사실 여러모로 흠잡을 부분이 없긴 해.
원래부터 예뻤던 외모가 날이 갈수록 개화한다.
이 녀석 방송의 인기가 불어갈 만도 하다.
물론 성격은 여전히 애 같긴 하지만.
'이번에 보니까 많이 드세졌더라고.'
혹시 사춘기라도 왔나 걱정했잖아.
오해에서 비롯됐다고 하니 다행이다.
솔직히 많이 섬뜩할 정도로 충격이었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지도 모르고……."
"저 선배 아니면 사귈 마음 없어요."
"그래? 근데 기다려도 확답을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야."
"괜찮아요. 그리고 저도 방송을 쭉 하고 싶어요."
기특한 대답을 해주는 건 고맙다.
그런데 까놓고 말해서 부담스러워!
리야 코인이 만약 떡상을 해도 내가 여자로 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이런 건 긍정적인 대답을 해주는 게 맞겠지.'
유리야의 방송이 최근 성황이라는 걸 알고 있다.
파프리카TV에서 가장 잘 나가는 BJ로 손 꼽힌다.
처음 만날 당시만 해도 본업과는 거리가 멀었음에도 말이다.
결과적으로 내가 꼬드긴 감이 있다.
같이 쿨쿨 잔 건 책임지지 못해도 진로 부분은 책임감을 느낀다.
기왕 선택하게 된 거 잘 됐으면 하고 많이 응원하고 싶은 입장이다.
"리야야."
"네……."
침대 위에서 앉아 꼭 안아 등을 토닥토닥 두들겨 준다.
이 녀석 성격에 많이 힘들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고 그런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말이다.
물로 나도 대체 무슨 일인지 당황하고 그랬는데.
내 성격이 원체 뻔뻔해서 시간 지나면 다 잊는다.
하지만 리야는 분명 마음 고생 많이 했을 거다.
'그런데 진짜 신기하긴 하다.'
상황만 놓고 보면 굉장히 야시시하다.
러브 호텔에서 남녀가 침대 위에서 꼭 안고 있다.
심지어 한 번은 술도 마셨는데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스스로 말하긴 뭣하지만 자제심이 딱히 센 편이 아니다.
별일 없었을 거라고 말하면서도 내심 찔렸다.
혹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고를 쳤을까 봐.
'절대 그런 일 없었을 거야. 확신했어.'
지금 이 순간 성욕이 하나도 안 난다!
그냥 크고 무거운 인형 안고 있는 느낌이다.
부드럽고 체온도 따닷한 게 기분이 좋기는 하네.
"한 마리 키우고 싶긴 하다."
"넹? 뭐가요?"
"아니, 그런 게 있어."
최근 티격도 대고, 아쉬움도 있고, 자진모리 장단을 연주하고 싶었던 유리야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생각이 나지 않는다.
소중하게 아껴주고 싶은 후배다.
* * *
미국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한국인 입장에서 가장 친숙하게 와 닿는 도시다.
미국에서도 두 번째로 큰 도시로 입지는 더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로드 오브 로드 팬들에게는 두 번째가 아닌 첫 번째로 손꼽힌다.
그도 그럴게 NA LCS가 열리는 경기장이 L.A에 있다.
게임사 또한 L.A에 있고 주요 시설들도 대부분 근처에 위치한다.
우연이라기 보다는 필연에 가깝다.
게임사들이 대부분 L.A에 본사를 둔다.
E-스포츠의 성지라는 별명이 붙을 만도 하다.
〈선수를…… 팔라고요?〉
따라서 E-스포츠 게임단들의 숙소도 거진 그 주변에 자리 잡는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보통 크지 않기 때문에 교통 여건이 제 1조건이다.
밀집해있다 보니 이따금 사건사고가 생기는 경우도 있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 토이치TV는 이번 롤드컵에 큰 기대와 욕심이 있습니다.〉
웃돈을 얹어주더라도 뛰어난 선수를 영입하고 싶다.
이는 스포츠 업계에서는 상당히 흔한 경우다.
하지만 E-스포츠 업계에서는 드문 일이다.
그도 그럴게 엄청난 자금력을 가진 회사가 별로 없다.
거대 기업, 명문 스포츠팀들이 눈독을 들이게 되기 전이다.
토이치TV의 제안은 심사숙고하고 싶을 만큼 군침이 돌기는 하나.
〈흥미로운 제안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희 선수들 중에 희망하는 사람이 없어서 유감이군요.〉
〈얼마나 큰 돈을 주더라도 주요 선수들을 팔 생각은 없습니다.〉
평안 감사도 제 싫으면 그만이다
선수 개개인들의 의사도 존중해야 한다.
게임단들도 돈이 된다고 선수를 막 팔 수는 없다.
차기 시즌의 로스터도 생각해야 하고, 토이치TV가 강대해지는 것도 골치가 아프다.
여러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선수 영입은 난항을 겪고 있었다.
있었다.
과거형이다.
초대형 선수 한 명이 흥미를 보이고 있다.
"이 선수를 영입하는 게 가능해?"
"영입만 한다면 롤드컵 우승도 꿈이 아닐 테지만……."
토이치TV의 상층부로서는 혼란스럽다.
그보다 훨씬 아래급의 선수들도 영입이 힘들다.
그런데 탑티어의 선수라니?
건너 뛰어도 너무 건너 뛰었다.
역시나 게임단에서 허락해주지 않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저 비역슨!〉
상큼한 미소와 함께 역대급의 협상이 이루어진다.
========== 작품 후기 ==========
재밌게 봐주시는 독자님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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