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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몰래 온 손님 -->
굉장히 갑작스럽기는 하나 놀랍지는 않다.
마침 경기를 치르고 휴식하던 마당이다.
특별한 약속도 없어서 나가기로 했다.
'엄밀히 말하면 약속이 없는 건 아닌데…….'
한인 타운에 가서 밥을 먹고 싶다!
국뽕에 거나하게 취한 팀원들이 말을 꺼내왔다.
그들에게는 안타깝게도 일정이 생기고야 말았다.
"야."
"말 까지 마라.'
"평소엔 영어 쓰는 주제에 깐깐해!"
'아니, 영어란 뭔 상관이야.'
흔히 착각할 수 있는 부분이다.
영어에도 엄연히 존댓말이 있다.
애초에 영어는 기본적으로 존댓말이다.
물론 영어에도 반말이 분명 없지는 않다.
한국에서 그런 거 가르치는 강사가 없을 뿐이지.
수능, 토익의 출제 범위가 아닌데 누가 땅 파서 장사해!
이런 걸 알게 된 걸 보면 나도 미국 생활에 익숙해지긴 했다.
그 절반 이상이 스킬 빨이지만 아무튼.
내 앞에 있는 사람은 다름이 아니다.
"그럼 달래 존댓말 쓸까요? 오라버니."
"……그냥 말 놓자 우리."
이런 고민 안 해도 된다는 점에서 영어도 편한 감이 있다.
달래가 갑작스레 찾아오게 됐다.
연락을 받은 적도 없어서 얼척이 없었는데.
"촬영이 있다고? 미국에서?"
"네, 달래 모델 촬영 왔어요!"
"아, 제발…… 우리 오늘부터 친구 1일 하자."
그래, 요즘 세상에 두 살 차이는 연상도 아니지.
존댓말 가지고 괜히 깐깐하게 굴다가 피보고 있다.
우리 팀원들만 해도 다들 나이 차이가 나는데 편하게 지낸다.
'나는 약간 특별하게 공경하고 있는 것 같긴 한데.'
원래 미국 문화가 그런 거고 나만 좀 독특한 경우다.
카리스마로 휘어 잡았다고 좋게 해석하겠다.
달래와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카페 안.
"마이애미."
"니 엄마?"
"도시 이름이 마이애미야. 니 애미로 해줄까?"
훈훈한 대화가 오간다.
촬영지는 마이애미 City라고 한다.
플로리다 주에 실제로 존재하는 도시 이름이다.
"플로리다…… 여기서 좀 많이 멀지 않아?"
"비행기 타고 다섯 시간."
"……근데 왜 열로 왔니?"
굳이 한국에서 로스앤젤레스로 바로 왔다고 한다.
들어보니 바쁜 모양이다.
그것도 많이.
"매니저가 자꾸 성화야."
"……매니저?"
"응, 소속사 생겨서."
생각보다 왕성한 활동을 하는 모양이다.
일일이 물어보다간 머리가 아플 것 같다.
그냥 맞장구 치는 선에서 끄덕끄덕 하려 했는데.
"이제 어떡할 거야?"
"뭐? 나한테?"
"너 만나려고 온 거잖아……."
어쩌라고요.
만나러 와달라고 한 적은 없다.
하지만 무시하기는 또 힘든 부분이다.
'경유하는 길이라고는 해도 굳이 한국에서 만나러 와준 거니.'
기쁘게 환영해줄 수 있는 노릇이다.
용건이 다소 과격해 보여서 문제지만.
"뭐할까? 호텔!? 호텔 갈까? 아니면…… 호텔!?"
"……호텔이 전제니?"
"더 간단한 장소도 괜찮고."
한국이면 몰라도 미국에서는 좀 그렇지!
여기 얼마나 무서운 형들이 많은데.
호텔이 가장 적당할지도 모른다.
만난 시점에서 어느 정도 예상을 했음에도 막상 들으니 식겁한다.
"나 시간 없어. 빨리 가자."
"아니, 꼭 해야 돼?"
"뭐래. 니 껄떡대고 다니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
내 최근 활동에 대해 들은 바가 있나 보다.
좋은 쪽만 봐주지 이상한 쪽을 보고 있네!
'아니, 근데 성과가 나쁘지 않아.'
안경 누나와 달리 허들이 낮다.
치즈 누나는 관심이 있어 보인다.
비단 그녀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건 아니었다.
"니 은근히 인기 많은 거 아니까 애만 만들지 마라?"
"……응?"
"나머진 쿨하게 용서해줌."
굉장히 쿨하신 前여친이다.
마음씨가 넓은 건 고마운 일이다.
그런데 자꾸 무언가 착각하는 것 같아.
'이런 식으로 기정사실화 시키면 곤란해.'
나중 가서 내가 말을 바꿨다느니 하면 난감하다.
나는 아직 자유로운 인생을 살고 싶은 사람이다.
속박 당하는 건 지난 2년의 군생활로 차고 넘친다.
"결국엔 돌아올 거니까 괜찮아."
"응?"
"나보다 좋은 여자가 있을 리가 없잖아."
"……."
자신감이 넘치시는 모양이다.
무서운 게…… 딱히 틀린 말이 아니다.
이곳 미국에는 정말 다양한 인종의, 다양한 성격의, 다양한 특징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살아온 한국까지 포함해서 달래보다 좋은 여자.
짱구를 굴려봐도 있다고는 말하기는 힘들다.
물론 없다고도 말할 것도 아니긴 한데.
"솔직히 우리 한 번 헤어졌고 재결한 것도 아니지만……."
"아니지만?"
"전남친이 아메리카에서 애 만들어서 오면 충격 받아서 나도 내가 뭘 할지 모르겠어."
"……."
그건 좀…… 충격 받을 일이긴 한 것 같다.
우리나라의 자랑스러운 전통 예술.
막장 드라마에서도 안 쓰일 법한 소재다.
'차라리 김치로 싸대기를 때리는 게 낫지.'
혹은 지 딸도 아닌 예나를 달구간다던가.
안 그래도 정신적인 측면이 불안불안한 달래다.
자극이라도 했다가 큰일 정도로는 안 끝날 것이다.
"너 보수적이니까 애 만들면 책임질 거잖아."
"그, 그렇지."
"안 만들면 나 몰라라 할 거잖아."
"그건 아니지!"
"나는?"
"……."
내가 뭘 했는데…….
따지고 들다간 날이 샐 확률이 높다.
잘못하면 달래 성깔에 뒤통수를 뽑아갈지도 모른다.
어울려 주기로 했다.
* * *
이런저런 진솔한 이야기를 나눴다.
평소에도 딱히 허물은 없는 사이다.
약간 땡알 친구 느낌이라서 서로 말을 안 가린다.
그럼에도 고심하는 눈치다.
침대 토크에서 이어졌다.
"리야?"
"웅. 리야 언니가 오빠한테 연락 받고 싶어하는 눈치야."
들을 때마다 살짝 이질감을 느끼지만 달래가 리야보다 연하다.
우리 유리야.
내가 자랑스럽게 성장시킨 풀포켓몬이다.
"왜? 톡은 하는데? 이틀 전에도 했어."
"그런 거 말고~."
그런 거 말고 뭐 그럼!
내가 걔네 집에 비행기 타고 날아가서 궁디 팡팡이라도 해야 돼?
여자들의 생각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걔가 할 말 있다고 말했어?"
"그건 아니지만……."
"그건 아니지만 뭐."
"여자의 감."
내가 세상에서 제일 안 믿는 단어가 나왔다.
탑갱! 탑갱! 빨리!
왜? 지금 가는 중이야.
적 정글 올 거야 땅굴 ㄱㄱ!
동선 안 보였는데 어떻게 알아?
여자의 감.
아군이 당했습니다!
적 더블 킬!
봇라인이 다 뒤졌습니다.
탑갱이라며?
데헷~!
여자의 감 사건 이후로 얘랑 듀오하거나 같은 큐에 걸렸을 때 절대 정글 안 한다.
'그렇다고 얘가 생각 없이 말할 얘는 또 아니야.'
아닌 척해도 내가 눈 뜬 장님도 아니고 다 안다.
유리야가 생긴 건 나름 반반하게 예쁘다.
처음 만났을 때는 은근히 견제를 했다.
여친 아니냐고 물어보기도 하고, 어색한 공기도 흘렀고.
이제는 풀 포켓몬이라는 걸 자각했지만 그렇다고 아예 무해한 생물로 생각하는 건 또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을 꺼냈다는 것.
곱씹어볼 여지는 분명 있을 것이다.
근데 뭐 별일일까.
'일단 나도 내 코가 석 자란다.'
시간날 때 까톡을 한 번 해봐야겠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달래 본인도 힘든 게 많이 있나 보다.
"나 엄청 바빠."
"바빠?"
"웅,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그리고 힘들어."
"힘들어?"
"웅, 그리고 또……."
그렇구나!
솔직히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달리 없다.
나도 진짜로 내 코가 석 자라 해야 할 일이 한두세네 가지가 아니다.
오늘 만해도 경기가 끝난 날이라 시간이 날 뿐이다.
평소 같았으면 기껏해야 밥 먹고 땡이었다.
그래도 이야기 정도는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는데.
"그니까 명령해죠."
"……뭐?"
"나한테 하라고 시켜죠."
"시키면 하니? 동기 부여가 돼?"
"웅!"
시키면 하랬다고 했으면 우리 달래 서울대 갔겠네!
하지만 이해하지 못할 이야기도 아니다.
인간, 누구나 의지하고 싶은 대상이 있는 법이다.
달래에게 있어 그게 나라고 하니 멋쩍긴 하지만.
'진짜로 그런 게 있긴 해.'
솔직히 나는 해당되지 않는 일이다.
누군가에게 의지하는 걸 썩 좋아하지 않다.
내 스타일 자체가 홀로서기다.
'근데 홀로서는 게 쉬운 일일 수가 없어.'
다른 건 둘째 치고 정신적인 부담이 크다.
앞으로도 쭉 잘해갈 수 있을까?
학교 공부처럼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다.
인터넷을 검색한다고 나오는 일반적인 일이 아니다.
나도 그럴지 언데 달래는 더 하면 더 하지 덜하진 않겠지.
그 방법이 괴이하긴 하나 다소의 억지는 용납해줄 수 있다.
"잘해야 돼. 열심히 해야 돼?"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조금 플레이적인 면을 요한다.
"그렇게 사근사근하게 말구~."
"뭐 어쩌라고……."
"야성미 있게, 강압적으로 해죠."
아니, 그건 단순한 쓰레기잖아!
재현 드라마에서 한 번쯤 봤을 법한 기둥 서방들의 레퍼토리다.
알고는 있었지만 달래 얘도 여러모로 정상은 아니다.
"살짝 플레이처럼 해줘. 응? 감정 이입해서."
"그게 의미가 있니?"
"오빠가 하라고 하면……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그래."
아주 잠시, 단 1분만 눈물을 머금고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쓰레기가 되어야 했다.
* * *
Lan Mei Ci.
지향하는 바는 간단하다.
말하자면 용의 꼬리가 아닌 뱀의 머리다.
LMC는 본래 중국에 뿌리를 내리고 있던 게임단이다.
소속팀 전원 중국인들이니 당연하다!
외국인 용병도 한두 명인 법이다.
하지만 여러 사정이 겹쳐 연고지를 옮기게 됐다.
일단 중국에서 성적을 내기가 너무 힘들다.
그리고 스폰서의 압력 때문이 크다.
미국에서의 사업이 중요해졌다.
기업의 이름을 널리 알려야 할 필요성이 있다.
그 필요성에 따라 선수들에게는 LCS의 성적이 요구된다.
LMC의 숙소에 거주하는 선수들이 자는 시간, 먹는 시간도 아까워 하며 연습에 매진하고 있는 이유다.
그들에게 부여된 각오는 남다르다.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감정이다.
"알고 있겠지? 최소가 준우승이야. 이기지 못하면 끝이라는 각오로 임해!"
대체할 인재는 많으니까.
LMC의 코치 왕슈잉의 말은 얼핏 잔인하다.
사정을 모르는 다른 나라 사람들의 눈에는 말이다.
중국인들은 태어날 때부터 매일매일 듣고 자라왔다.
대체할 인재는 많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경쟁에서 이기는 수밖에 없다.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 중국.
그 자체만으로도 더없이 특수한 환경이다.
선수들은 북미 그 어느 팀보다 노력을 쏟아붓고 있다.
"애들은 잘 하고 있나?"
"예, 이 기세대로면 우승도 노려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알겠지만 중요한 건 결과야. 무슨 일이 있어도 조1위는 가져올 수 있도록 하게."
"예!"
감독의 지시에 코치가 복종한다.
미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상하 관계다.
하지만 동양권에서는 그리 드문 일도 아니다.
선진국인 한국과 일본만 해도 그러하다.
블랙 기업 같은 게 결코 남 일이지 않다.
하물며 개발도상국인 중국은 일반적인 상식 선에서 미개한 문화가 아직도 남아있다.
"감독님 근데 LCS측에서 중국 관련한 발언은 자제해 달라는 요청이……."
대놓고 눈에 띄는 친중적인 발언도 같은 맥락이다.
선수들이 스스로 애국 부심이 쩔어서 말을 꺼낼까?
그렇다 해도 막상 큰 자리에 나오면 입이 잘 안 벌어진다.
위에서 지시를 내리기 때문이다.
Lan Mei Ci는 친중적인 성향의 기업이다.
애초에 중국의 기업들은 대부분 그러한 하달을 받는다.
자신들의 보다 위.
중국을 지배하는 공산당에서 말이다.
세계 그 어느 나라보다 기업에 대한 간섭이 심하다.
그런 간섭을 받기 이전부터 목표가 확연했다.
회사 윗사람들의 성향이 지극히 보수적이다.
브랜드 가치를 선보일 대상 또한 친중 기업, 혹은 화교들이다.
미국에 거주하는 화교의 수만 500만 명에 달한다.
설사 구설수에 오르더라도 상관없다.
그들의 마음에 드는 것이 기업 입장에서는 더 정답이다.
LCS측의 요구에 따르지 않는다고 불이익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설사 불이익이 주어진다고 눈 하나 깜짝할 사람들도 아니다.
"하라는 대로 해. 다른 지시가 있으면 전하겠다."
"예!"
LMC는 자신들이 이루고자 하는 바를 착착 해나간다.
주위의 시선이 어떠하든 신경 쓰지 않는다.
흔히 볼 수 있는 유형의 중국인 관광객들처럼 말이다.
자국인들의 입장에서야 달가울 수가 없는 일.
하지만 어떻게 손 쓸 수도 없는 일이다.
누군가 해결을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든다.
========== 작품 후기 ==========
재밌게 봐주시는 독자님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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