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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비는 누구? -->
술자리라는 게 원래 다 겸사겸사다.
순수하게 술만 마실 거면 친구랑 마시지.
쓸데없이 후배들 술 사주고, 안주 사주고, 튕기는 애들 귀찮게 부르는 데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남자들 속마음은 다 그래.'
파릇파릇한 신입생들!
선배된 도리로 지도해주고 싶은 마음이 부쩍부쩍 든다.
대학 생활이 말이야~.
인간 관계가 말이야~.
약간 꼰대 같기도 한데 원래 선배는 그런 존재다.
듬직한 느낌.
의지하고 싶은 느낌!
나 레전설, 동방예의지국의 후손이다.
우리나라 조상님들 보수적이었다.
마음으로 감싸 안아줄 수 있는 남자다.
'그런데 요즘 애들은 사람을 너무 겉만 봐.'
얼빠라는 신조어가 괜히 생기는 게 아니다.
특히 여자애들은 어릴수록 얼굴을 밝힌다.
14학번 애들이 나의 깊이를 몰라주더라.
사람은 깊이다.
깊이 없는 사람은, 사랑은 오래가지 못한다.
이 만고불변의 진리를 모르는 세대라니 참으로 통탄스럽다.
'나 같이 진국인 사람을 가까이 해야 좋지. 요즘 애들은 이래서 안된다니까.'
처음 보는 선배인 만큼 낯설게 느껴질 수는 있다.
그 정도야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줄 수 있다.
그런데 어찌 선배한테 무엄하게 감히!
하다하다 복학생처럼 생겼다는 소리를 다 듣는다.
세상이 어찌 되려고 이러는지 모르겠다.
우리 때에는 상상치도 못하던 일이다.
좀 반반하게 생겼길래 오냐오냐 해준 여후배 한 명이 기어오르더라?
요즘 대학 생활 거꾸로 돌아가나 보다.
학과마다 꼭 있는 얄미운 타입이다.
이런 애들이 나중에 친하게 지냈을 때의 쾌감이…….
'……그런 거는 질풍노도의 시기에나 노리는 거고.'
짜증이 나서 집에 왔던 거 같다.
내 기억에 의하면 분명 그러했다.
그런데 지금 있는 곳이 아무리 봐도 내 집이 아니다.
침대가 작아 보일 정도로 넓은 방안.
유난히 보드랍게 느껴지는 이불.
우리집이 이렇게 좋지는 않다.
명백히 무언가 잘못됐다.
'약간 좋은 쪽 잘못 아닌가?'
해버린 건가?
해버렸나?
간밤의 나 분발했나?
원래 술을 많이 마시면 기억에 혼선에 온다.
이따금 용기를 발휘할 때가 있다.
유난히 틱틱대던 후배 녀석.
나의 포용력에 넘어온 걸지도 모른다.
물론 술 먹고 뻗어서 친구들이 호텔에 쑤셔 박았을 확률이 높겠지.
당연히 그럴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손끝에 부드럽고 따듯하고 촉촉한 것이 얽혀온다.
아니, 잠깐.
나 진짜로 기억 안 나는데?
장난으로 생각했던 일이 현실로 다가오자 깜짝 놀랐다.
무거웠던 눈꺼풀이 절로 떠진다.
"……그러면 그렇지."
익숙한 얼굴이 눈에 보인다.
달래였다.
달래가 내 옆에서 헐벗은 채 자고 있다.
그래, 현실은 달래다.
무슨 14학번 후배랑 썸을 타고 있어.
그리고 하룻밤만에 급진도를 나가고 있어.
일장춘몽에 지나지 않았다.
'잠깐만, 현실 나쁘지 않은데?'
입도 눈도 닫고 있으니 괜찮다.
달래라고 생각 안 하면 상당하다.
이불에 가려진 부위를 살짝 치워봤다.
'오우야…….'
엎드려 있어서 앞쪽은 안 보이지만 등이…….
얘가 운동도 한다고 하더니 근육이 장난 아니다.
남자의 우락부락한 그런 게 아니라 아름답고 섬세한 선.
살짝 쓰다듬어보자 부드럽다.
솜털과 함께 주르륵 미끄러진다.
그러면서 푹 파이지 않고 탄력있는 감촉이 중독성이 생긴다.
"우웅……."
조금 너무 만졌나?
웅얼거리는 소리를 내더니 뒤척인다.
뒤척인 탓에 앞면이 보여서 이불을 덮어줬다.
곤히 자는 모습이 참 천사 같다.
다른 사람의 비전으로는 평소에도 그럴지 모르겠다.
별풍선 1004개가 괜히 자주 터지는 게 아니라는 생각도 들긴 하는데.
"기지배야. 기지배야!"
"아 왱…… 나 잘꼬야."
"아니, 니가 왜 여깄냐고! 그리고 여기 어디야?"
잠깐 너무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보던 얼굴이라 방심해버렸다.
애초에 나랑 니가 왜 갑자기 자고 있어.
그것도 같은 방 안에서.
달래의 변명을 들어보자 기억이 나는 듯도 싶다.
"내가 불렀다고? 널?"
"잔뜩 취해서 꼬인 혀로 뭐라뭐라 하다가 좌표 찍어주길래…… 가줬지."
잠에서 반쯤 깬 달래에 의해 대략적인 사정을 알게 됐다.
듣다 보니 기억의 조각이 점점 맞춰진다.
술을 마시다가 취기가 도니 서러워졌다.
내가 왜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신입생들한테 복학생 취급 당하며 무시 받아야 되지?
홧김에 달래를 불렀던 것 같기도 하다.
왜 불렀는지는 모르겠는데.
"너 진짜 와서 나 데리고 간 거야?"
"멍충아. 그게 아니면 내가 니 위치를 어떻게 알아. 연락도 씹으면서."
"……."
한동안 도를 닦는다는 느낌이었다.
살짝 자아를 찾는다는 느낌도 있었다.
혼자 있고 싶은 기분이라서 누구의 연락도 안 받았다.
그것이 서운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어제 일로 풀린 모양이다.
"그렇게 꼴은 상태로 나를 불러? 응? 응?"
"아, 왜. 하지 마……."
"주위에 사람이 그렇게 없었냐? 응? 응?"
잠이 깼는지 손톱으로 쿡쿡 찔러온다.
날카로워서 겁나 아프다.
헤실헤실 웃으며 침대 토크가 이어졌다.
간밤에 아무 일도 없었던 건 아닌 듯하다.
"내 목이 무슨 손잡이냐? 잡고 막…… 이 나쁜놈아."
"……내가 그랬어?"
"몰라, 정말."
사람이 술을 마시면 솔직해진다.
나 좋아해주는 달래가 보고 싶긴 했나 보다.
더불어 내 안의 폭력적인 부분이 나오게 된다.
술이 그런 게 좀 있다.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을 끌어낸다.
그럼에도 불구하면 하면 안될 짓이긴 한데 다행히 플레이의 선에서 그쳤나 보다.
"그런 건 맨 정신일 때만 해라? 무서웠단 말이야."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아프진 않았으니 봐줄게. 좋았기도 하고."
달래가 거칠게 다뤄주는 걸 좋아한다.
성향이 원체 좀 그렇다.
물론 Rice cake 이야기다.
알갱이가 거칠어야 씹는 맛도 있고 이에도 끼지 않는다.
"근데 오빠, 뭐 안 좋은 일 있어?"
"갑자기 왜?"
"그냥 그런 거 같길래."
"……."
달래와는 오래 지내기도 했고 정도 많이 쌓였다.
서로에 대해 잘 알고 파악한다.
말로 설명하기 힘든 그런 부분이 정말로 있더라.
이심전심이라고 해야 할까?
당연히 텔레파시 같은 초능력은 아니다.
이야기를 하다 보면 그날의 감정 같은 걸 느낀다.
'내가 웬만하면 다른 사람한테 티를 안 내려는 스타일인데.'
많이 싱숭생숭하다.
그래서 연락을 않고 있었던 것이기도 하다.
술 한 번 마셨다고 이런 상황이 오다니 참…….
"누가 우리 오빠 괴롭혔어. 그년이야?"
"아니, 누구 말하는 거야?"
"어제 술자리에 있던 쥐새끼 같은 년."
"……."
말 참 살벌하게 하네.
하비 말하는 줄 알고 깜짝 놀랐다.
하비와는 다시 만나서 이야기를 해보았다.
들어보니 사정이 이해가 됐다.
헤드헌팅이라거나 그런 건 당연히 아니었다.
조건도 좋았고 하비 자체가 내가 믿고 싶은 사람이다.
'알고 지내다 보면 느낌이 와.'
이 사람은 왠지 믿어도 되겠다.
물론 첫인상 같은 걸로 믿는 게 아니다.
관계를 지속하며 그 사람에 대해 점점 알아간다.
나는 사람을 알 때 속단하는 걸 싫어한다.
특히 첫인상은 거의 안 믿는 편이다.
좋은 쪽이라면 더더욱.
세상에 무작정 좋은 사람은 없다는 게 내 신조다.
부정적인 건 맞는데 세상이 원래 그래!
티끌 없이 착한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어?
'그러니까 이따금 유리야 한 마리 키우고 싶은 거지.'
좀 멍청하긴 해도 적적할 때 보고 있으면 마음에 위안이 된다.
세상 아직 살 만하구나 이런 느낌으로.
하비는 나에게 거짓으로 대한 적이 없다고 느꼈다.
무언가 의도가 있었다면 진작에 알아챘을 것이다.
내가 이래 봬도 사람 골라 사귀는 편이다.
꿍꿍이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느낀다.
'그러다 보니 오해도 많이 받았지만.'
덕분에 주위에는 진국인 사람들만 남는 것 같다.
민우도 그렇고, 우리 달래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하비는 아직 오래 알고 지내지 않았다.
괜스레 놀랐던 이유이기도 하다.
혹시 내가 놓친 부분이 있나?
아닌 걸 알게 되자 마음이 놓인다.
"그래서 그년 누구야? 존말할 때 말해라?"
"……그냥 대학 후배야. 어제 처음 만났어."
"오~ 발뺌?"
내가 니 서방님도 아니고 일일이 보고해야 돼?
술에 꼴아서 전화까지 한 입장이라 켕긴다.
그래, 힘들 때 알아주는 이만큼 고마운 사람이 또 없다.
사람은 깊이, 지내봐야만 알 수 있다.
안 지내봤으면 내가 달래를 가까이 했을까.
딱 봐도 껌 좀 씹게 생긴 언니에 엄청 놀 거 같은 이미지인데.
"야."
"응?"
"술집에서 혹시 애들 놀래키거나 하진 않았지?"
"뭐래. 알아서 처신했으니 걱정 마."
걱정 너무 드는 건 내 노파심이겠지?
얼굴은 애들 기강 교육 잘 시키게 생긴 언니다.
눈도 못 쳐다보게 만들었을 것 같다.
'에이, 설마…….'
설마 하긴 하지만 걱정이 지워지지 않는다.
다행히 팔 뻗어 닿는 거리에 있는 휴대폰.
쭉 밀어서 잠금 해제해보자 까톡이 좀 많이 와있다.
「성훈아 잘 간 거 맞지? 아는 분 이래서 보내주긴 했는데……」
「성훈 선배님 저 어제 술자리 합석했던 윤아……」
「죄송합니다. 14학번 김채린이에요. 선배님 앞자리에 앉아있던……」
그것도 다수의 사람들에게.
잘은 모르겠지만 뭔 일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아마 이것도 노파심이겠지.'
무서워서 차마 클릭은 못해봤다.
핸드폰을 덮고 장본인을 마주 본다.
무서운 언니지만 내 남자에게는 따듯하시다.
"저기, 달래야."
"여기서 할 이야기?"
"……."
너 너무 날카롭잖아.
베이는 줄 알았어.
머리 꼭대기에 있는 거 같아서 무섭다.
'달래에게는 말을 해둘까.'
아직 확정된 건 아니다.
다만 마음이 쏠리고 있다.
곰곰이 곱씹어볼수록 거부할 이유가 없다.
여러가지 여건, 조건.
무엇보다 한 가지 크게 걸린다.
큰일이 될 수 있는 만큼 미리미리 말해놔야 나중에 섭할 일이 덜하다.
"밥이라도 먹으면서 얘기할까?"
"배고파?"
"배고픈 건 아닌데……."
니가 나가서 얘기 하자며.
생각해보니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한숨 더 자자. 응? 응?"
순수하게 코하자는 의미는 아닌 듯싶다.
* * *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연락이 뜸하면 소원해진다.
친하기에 더욱 연락을 주고 받는 것이 좋다.
하지만 간혹 친구 중에는 그런 부류가 있다.
어느 때라고 할 것도 없이 갑자기 들이닥친다.
늘 함께 할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드는 지인.
어느 순간을 계기로 멀어져 버린다.
"민하야!"
"왜 누나?"
"너 치킨 뭐 좋아해?"
"오늘은 네네치킨 오리엔탈 파닭이 좋을 듯한 기분이네."
롤챔스가 끝난 이후 유리야는 2일 1닭을 실행하고 있다.
눈치 주는 사람도 없어서 신나게 먹는다!
물론 혼자 다 먹는 게 아니라 동생인 민하랑 나눠 먹는다.
"오리엔탈 파닭? 싫어! 그거 맵잖아!"
"……나보고 어쩌라고."
대부분의 남매가 그러하듯 예의 그런 거 없다!
특히 누나 쪽에서는 동생의 사생활을 존중 안 해준다.
노크도 없이 문을 열고 들이닥친 누나의 얼척없는 고민에 유민하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성훈형 있을 때 시켰어야 했는데…….'
노려서 시켰는데 맵다고 한 입 먹고 성냈다.
성훈형이 있었다면 배가 빵빵해질 때까지 먹였겠지.
민하는 둘의 사이를 조금 그릇된 시선으로 응원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누나 성훈형 근황 알아? 요즘 방송 안 하고 쉬더라."
"몰라."
"……누나 혹시 성훈형한테 버려졌어?"
동생의 이야기를 듣고나서야 깨달았다.
매일 같이 괴롭히던 못된 선배가 연락을 안 한다.
덕분에 일상의 평화롭지만 그 기간이 너무 길어진다.
"당연히 연락할 줄 알았지……."
"누나."
"응?"
"성훈형한테 먼저 연락한 적 있어?"
"많지! 그런데…… 요즘은 전혀."
자꾸 괴롭힌다!
엉덩이 때린다!
서러운 일 많이 당했다.
오히려 도망 다니는 입장이 되었다.
그렇다고 선배가 싫어진 건 아니다.
약간 입장이 달라졌달까.
'계속 연락을 해주니까…….'
기다리면 언젠가 오리라.
자연스럽게 생각을 하고 말았다.
주머니 속 핸드폰을 보자 마지막 연락이 열흘 전.
내용도 별거 없는 농담 따먹기, 놀림이었다.
당연히 이어질 줄 알았던 대화가 끊어졌다.
확인한 리야도 깜짝 놀랄 정도로 오래 소식이 없었다.
「선배 뭐해요? 저 치킨 먹어요! 맛있게쬬?」
바로 까톡을 두들겨봤지만 답장이 없다.
숫자1이 사라지지 않는다.
서운해진 리야는 성훈을 찾아보고자 마음 먹었다.
========== 작품 후기 ==========
재밌게 봐주시는 독자님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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