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
<-- 물 같은 걸 끼얹나…? -->
조금 안타까운 결과다
상정했던 승리 공식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파랑이즈의 전성기 타이밍을 살려 캐리.
'근데 용한타를 너무 못 싸웠지.'
그래도 어떻게 후반에 가면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냥 후반 말고 극후반.
내가 괜히 챔피언을 이즈레알로 선택한 게 아니다.
풀템은 25분 전후해서 나왔다.
아이템 하나하나가 싼 편이다.
대신 후반에 갈수록 치명타 원딜러에 밀린다.
'극후반까지 가면 템트리를 갈아타려고 했는데…….'
죽치고 파밍해서 1만 골드 적립한다.
기존템을 다 팔고 AP템으로 선회한다.
띄우기가 힘들어서 그렇지 완성만 하면 엄청 강력하다.
멱살 캐리를 노리고 있었는데 그마저도 실패하고 말았다.
상대가 기세를 살려 게임을 끝냈다.
아군이 도저히 버텨내지 못했다.
"야, 유리야."
"네, 주인님……."
그 일등공신 되시겠다.
유리야가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인다.
맞다.
솔직하게 못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결과는 결과
승복하지 않으면 흔히 말하는 멘탈이 나간 거다
다음 게임에 지장이 생긴다.
"뒤에서 열심히 응원해. 알았어?"
"네! 열심히 할게요! 근데…… 어떻게요?"
응원하는 방법까지 물어보면 내가 대답을 해줘야 돼?
해주고 싶어지잖아.
한 가지 격하게 추천하는 방법이 있다.
"유리야, 벌떡 일어나."
벌떡 일어났다.
프로그래밍이 제대로 되어있다.
시키고 싶은 것은 다름이 아니다.
"복장은 그대로 해도 좋으니까…… 치어리딩 해봐."
남자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로망이다.
치어리더.
경기장에서 춤 추는 누나들이다.
나이가 먹어도 그 분들은 항상 누나다.
섹시함을 겸비한 여성만이 소화가 가능하다.
유리야에게는 어림도 없지만 어차피 안 보인다.
상상력을 자극하면 머릿속에서는 가능할지 모른다.
"저 춤 못 춰요……"
"그래? 그럼 하지 마. 눈 썩으니까."
"흐으으어어엉!"
유리야가 콧구멍이 벌름거릴 정도로 서러운가 보다.
말이 너무 심하네!
곧장 팀원들에게 한 소리 들었다.
'솔직히 좀 짜증나잖아 리얼루다가.'
살짝 짜증이 북받쳐 올랐다.
진짜 대회만 아니었어도 엉덩이 팡팡형이었다.
살다살다 방패 거꾸로 드는 건 처음 보네.
깜짝 놀라서 내가 잘못 봤나 했다.
'어쩔 수 없는 부분인 것도 맞긴 해.'
곧잘 하길래 너무 고평가를 한 걸지도 모른다.
유리야는 결국 유리야고 실수를 할 수도 있다.
심지어 세트가 거듭될수록 집중력이 저하됐다.
오래 가는 건전지가 아니었다는 소리다.
그로 인해 생기는 빈틈을 놓쳐줄 만큼 만만한 상대일 리 없다.
그래서 네 번째 세트는 간만의 원딜러다.
"하비?"
"Um…… Sorry."
"응?"
갑자기 왜?
서포터는 당연히 하비다.
반갑게 인사를 건넸더니 살짝 예상 못했다.
표정이 심상치 않다.
기분 탓이 아니었다.
"I can't 주인님."
"……."
아니, 뭐 팀원들도 듣고 있는 걸 알고는 있었다.
그런데 막상 지적 당하니 부끄럽네.
만담 정도로 생각해줬으면 싶다.
유리야에게 강제한 것도 아니다.
'스스로 우러나서 한 거잖아 우러나서!'
너희들 군대 억지로 끌려온 거야?!
아닙니다!
육군 훈련소에 가면 반드시 대답하게 돼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물어보는 조교도 '나만 억지로 끌려왔나?' 속으로 쪼개고 있었을 것이다.
"If it must…… I can."
"Really?! 아니, 꼭 필요하다는 건 아닌데……."
해주면 내가 좀 더 게임에 집중할 수 있겠지.
원래 주인님은 하나지만 파트너는 여럿 둘 수 있는 법이다.
원하던 호칭과는 조금 달랐다.
"OK. Master!"
"……."
마스터는 느낌이 안 살잖아!
주인님~ 샤방샤방한 그런 맛이 있어야 된다.
근데 생각해보니 원어민인 하비의 말투라면 주인님은 안 어울리긴 한다.
안타까운 마음을 뒤로 하고 호칭은 포기하기로 했다.
'일단 경기에 이기는 게 급선무야.'
나는 지금 진지하게 임하고 있다.
팀원에게 요구하는 것 하나하나에 사심이 없음이다.
나 레전설, 동방예의지국의 후손이다.
원래 우리나라는 액티브X 오지게 깔려있다.
불필요한 전철, 관습 등이 많고 주인님 호칭이 이에 해당한다.
하지만 시대는 변화를 원하고 있다.
언제까지 고리타분하게 놀 수는 없다.
보다 평등해진 입장에서 경기를 치른다.
원딜러만 딜을 넣어야 한다는 법은 없잖아?
* * *
〈사실 맨 처음부터 좋은 예상이 나온 경기는 아니었어요.〉
클끼리가 가볍게 중얼거린다.
벌써 네 번째 세트까지 왔다.
중간의 과정이 워낙 맛깔났다.
현재 가지는 팬들의 심정은 경기 시작 초와는 분명히 다르다.
─준결승전 B조 삼선 블루 vs 파프리카 프릭스 예측
삼선 블루가 3대0 완-승
레전설 밑천 드러나고 끝
└ㅇㅈ. 너희들은 너무 깝쳤어
글쓴이-내가 이런 글을 썼다고?
└지금 보니까 웃기네ㅋㅋ
└작성자 이불킥!
팀이 가진 기본기, 더불어 전략의 예측.
삼선 블루가 압승을 하리라 여겼다.
그렇게 여길 수밖에 없는 그림이었다.
기본기 측면에서 상대도 안되고, 무엇보다 미드가 다대기다.
개인의 가진 기량에서 절대 밀리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일각에서는 다른 의견도 제기됐다.
─레전설이 레전설해서 멱살 캐리하는 각ㅇㅈ?
파프리카 프릭스 우승 직행잼!
└네 다음 롤알못
└롤이 혼자 하는 겜이더냐ㅋㅋㅋ
└우승은 에바지 진짜로
글쓴이-흠냐;;
어느 쪽 예상도 들어맞지 않았다.
양팀이 치열하게 치고 박는다.
현재 세트 스코어는 2대1
삼선 블루가 한 걸음 앞서긴 했지만.
〈삼선 블루 입장에서는 이겨도 본전입니다. 애초에 지는 게 말이 안되는 거에요.〉
〈자존심이 걸려있지 않습니까? 신생팀인 파프리카 프릭스에게 흔들리고 있어요!〉
경기의 흐름은 더없이 팽팽하다.
그토록 많은 준비를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형제팀인 삼선 레드가 떨어졌다.
그럴 정도로 대 파프리카 프릭스전에 밑준비를 쏟았다.
그런데 경기가 팽팽하다니 롤판의 신흥 감호 삼선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파프리카 프릭스, 최고의 다크호스를 넘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꿈이 현실로 점점 다가오고 있어요.〉
그렇다고 파프리카 프릭스의 노력을 저평가할 것도 아니다.
조별 리그부터 이변을 써내리며 올라왔다.
기존 롤판 팬들의 비웃음?
가뿐히 즈려밟았다.
이윽고 진행되는 세 번째 세트의 밴픽.
한 가지 속보가 사전에 전파됐다.
현장에는 뒤늦게 공식적으로 알려진다.
〈유리야 선수와 인성제로 선수가 교체되었습니다. 집중력이 떨어졌다는 측면도 크고…… 분석도 많이 당했거든요?〉
-빡대가리야 ㅠ.ㅠ
-인제는 왜? 토이치로 따여서?
-레전설이 원딜 가려고 하는 거겠지
몇몇 팬들이 사진까지 찍으며 커뮤니티&SNS 등지에 퍼날랐다.
그만큼 중요한 정보이기 때문이다.
선수 변경에 따라 밴픽과 게임의 구도, 결과까지 전부 달라질 수 있다.
〈물론 달라지는 건 삼선 블루도 마찬가지입니다. 분석을 안 해왔을 리가 없어요.〉
오히려 보편적인 예측이 이쪽이었다.
유리야가 나와봤자 한두 세트겠지.
지금의 조합을 바라는 팬들이 많다.
-하비 Fighting!
-야흐오 원딜 가져오나요?ㅋㅋ
-도인디면 안정감 있게 버텨주겠지?
보다 안정감이 있기 때문이다.
미드도 보통 선수가 아니다.
도인디는 준비된 아마추어.
챌린저 극천상계에서 유명했다.
얘는 딱 대회 무대 스타일이다.
프로 데뷔가 기대되는 유저다.
그런 인지도 있는 아마추어 고수가 팀에 둘이나 더 있다.
파프리카 프릭스의 멤버진은 나름 나쁘지 않다.
독특한 팀의 특색과 성적 때문에 묻혀있을 뿐.
〈잼할 선수도 파트너인 잼구 선수가 돌아온 만큼 기량을 보다 뽐낼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안 그래주면 곤란한 상황이긴 합니다.〉
-잼구가 또……
-잼구 걔는 솔랭에서 얼마나 함? 다이아는 찍음?ㅋ
-잼구 챌린저 네 자리 점수대고 3위도 가봄
-???
데뷔하기 전까지만 해도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신인이었다.
심지어 잼할과 함께 탑&정글 팀플레이로 이름을 떨쳤다.
이거 정말 롤챔스 휩쓰는 거 아니냐?
레전설 캐리는 커녕 버스 타겠네!
전복이 좀 많이 되는 버스였다.
승객이 헐크처럼 밀어줘야 겨우 굴러간다.
어떤 의미로는 롤챔스를 휩쓸고 있는 덤앤더머다.
잼구스밥버거, 잼할머니보쌈이라는 별명까지 생기며 팬들 사이에서 화두가 오간다.
〈아직까지 못 보여준 건 사실이지만 앞으로 충분히 보여줄 수 있는 노릇이고, 그 가능성을 불밤과의 경기에서 보여주기도 했어요.〉
클끼리 해설의 말대로 잼구의 폼은 서서히 안정되고 있다.
잘리는 일도 줄어들고, 되도 않는 실수도 덜해진다.
다만 그 속도가 쭈쭈바를 녹여 먹는 수준.
아무리 빨아도 안 나온다.
손으로 주물주물하고 입으로 깍! 물어야 겨우 한 입 나온다.
그러다 어느 순간 봇물 터지듯 쭈쭈바가 왜 쭈쭈바인지 알게 되는 순간이 온다.
〈삼선 블루가 카직트를 밴했습니다. 왜냐! 잼구 선수를 견제하기 위해서죠!〉
강빈 해설이 삼선 블루의 새로운 밴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최근 잼구가 솔로랭크에서 꿀 빨고 있는 카드다.
OP정글러로 각광 받고 있는 카직트.
2세트에서 레전설의 활약이 있었지만 그 때문의 밴은 아닐 것이다.
아닐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원딜이고, 유리야도 벤치에 간 이상 잼구를 저격하는 의도가 맞다.
-강빈이 맞말을 하다니……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
-뭐지? 왜 갑자기 불안해지지?
〈잼구 선수가 잠재력이 있는 선수에요. 아무리 솔로랭크와 대회가 별개라고는 해도 아예 동떨어지진 않잖아요?〉
〈가장 가시적인 평가의 지표 아니겠습니까? 말하자면 수능 성적표 같은 거거든요!〉
인생은 성적순이 아니다.
하지만 영향이 없다고도 볼 수 없다.
나이 지긋하신 진용준 캐스터의 말대로 잼구는 분명 발휘하지 못한 포텐셜을 간직했다.
간직만 하지 말고 이번 경기를 통해서 보여줘야 한다.
물론 파프리카 프릭스의 진정한 에이스는 따로 있다.
레전설이 과연 어떤 픽을 보여줄지.
팬들이 가장 기대하고 있는 부분이다.
-또 야흐오&트롤킹 보여주나?
-야흐오 자체 밴임;
지금이야 말로 카시&티몽각?
-티몽 또 나오면 대박 와ㅅㅂㅋㅋㅋ
실제로 보여준 적이 있음이다.
또 나오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하지만 무작정 뽑을 수도 없는 일이다.
〈일단 안정적으로 힐라카를 가져오네요. 하비 선수가 힐라카를 굉장히 숙련도 있게 잘합니다.〉
〈그러니까 이전 세트에서도 밴이 됐던 거죠?〉
지켜보던 팬들로선 아쉬움을 삼킨다.
힐라카라니!
그 의도가 명확히 보이는 챔피언이다.
공격적으로 쓰였을 때도 분명 있다.
얼마 전에는 탑과 미드로도 기용됐다.
하지만 너무 OP라 결국 너프를 먹었다.
〈힐을 선마스터 해서 팀원을 케어하는 하비 선수에게는 큰 너프가 아니고, 레전설 선수를 철저하게 보조하겠다는 의미를 둔 픽이에요.〉
클끼리의 말이 나오기 전부터 몇몇 눈치 빠른 시청자들은 알아챘다.
롤챔스 한두 번 보는 것도 아니고 척하면 착이지.
최근 자주 나오는 메타이기도 하다.
-후반 가겠다는 거네……
-캐리형 원딜러로 3~4코어 바라볼 듯?
-하긴 레전설 핑크스 잘하긴 해
아쉬움을 괜히 삼킨 게 아니다.
레전설 치고는 수비적인 선택이다.
팀이 코너에 몰린 만큼 이해는 하는 부분이다.
도박수를 두기엔 상황이 녹록지 않다.
존버해서 특유의 피지컬로 원딜 캐리를 노려보겠다는 심산일 것이다.
픽이 진행될수록 의도가 더욱 눈에 띄게 묻어난다.
〈블러디체리? 이건…… 나쁘지 않은 픽이네요.〉
〈자주 보이는 픽은 아니지 않나요?〉
〈확실히 1티어 픽이라고 보기에는 애매한 부분이 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괜찮은 선택이에요.〉
다대기가 뽑으리라 예측이 되는 픽.
십중팔구 원딜을 노리기 쉬운 자드일 것이다.
하지만 후픽을 하기 위해 삼선 블루는 기다리고 있다.
파프리카 프릭스가 선수를 쳤다.
블러디체리는 전통적인 자드의 카운터다.
더불어 생존기도 있고, 라인 푸쉬도 좋아 존버에 최적화된 챔피언이다.
〈이번 네 번째 세트 조합 컨셉은 한타네요. 전 세트, 전전 세트에서 한타가 분명히 아쉬웠거든요? 이번에 제대로 만회를 하면 기세 다시 가져올 수 있어요 파프리카 프릭스!〉
다전제에서의 기세는 중요하다.
상대로 하여금 판단을 망설이게 만든다.
과연 그것을 눈 뜨고 주시하고 있을지.
삼선 블루의 부스 안, 내부 회의가 무섭게 진행된다.
========== 작품 후기 ==========
재밌게 봐주시는 독자님들 감사합니다.
추천과 코멘트& 원고료 후원은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