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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화 -->
춘자 시절부터 길쭉길쭉했던 달래다.
얘는 딱 봐도 크면 예뻐지겠구나.
그런 느낌이 드는 아이였다.
생각보다 너무 예뻐져서 당황스럽긴 했지만 아무튼.
-레전설 키 실화?
-여자랑 키 똑같네ㅋㅋㅋㅋ
-둘이 어깨동무 가능할 듯
-어휴, 쪽팔리다 레전설
…….'
170 가까이 커버릴 줄은 몰랐다.
심지어 자세도 바라서 크게 느껴진다.
물론 하비는 이런 달래보다 3cm 더 크다.
'하비는 운동화라서 문제가 없었어.'
야방도, 합방도 심심하면 같이 했던 하비다.
문득 하비가 그리워진다.
달래 얘는 양심도 없이 하이힐을 신고 왔다.
"너 때문에 내가 상대적으로 작아 보이잖아!"
"……찌질하다 진짜."
-찌-질
-여자는 하이힐 신어야 다리가 예뻐
-모델 체형이라 남자가 기가 죽네ㅋㅋ
-그래서 신발 사려고 하는 거?
힐을 신은 탓에 나랑 키가 비슷하다!
남자라면 신경을 안 쓸 수가 없는 부분이다.
"너 너무 커! 운동화 신어. 그리고 무슨 모델 워킹을 해 백화점에서!"
"모델이니까."
"……그러네."
그렇게 말하면 내가 할 말이 없네.
그래도 나랑 걸을 땐 운동화 신었으면 한다.
남자로서 가오가 상하는 부분이라 민감하다.
"아디다스 사줄게. 여기 백화점 아디다스 매장도 있지?"
"저기요 아저씨……. 요즘은 급식들도 안 신어요."
달래가 진심으로 어이없다는 듯 물어온다.
정말?
나 때는 아디다스 없어서 못 신었는데.
채팅창을 보니 정말 시대가 변하기는 했나 보다.
-아재……서요?
-아니, 아디다스라니 언제적 유행이야;;
-신발을 신경 안 쓰고 사나
-너무 보편화돼서 다른 브랜드들이 뜨는 추세에요
원래 신발은 아디다스, 패딩은 노스페이스 아니었어?
영원불변의 법칙이라고 생각했다.
역시 세상사 시간에 무뎌지지 않는 건 없는 모양이다.
나로서는 솔직히 믿기지가 않는다.
그냥 안 신는 것도 아니고 쪽팔려서 안 신을 정도라니.
진심이냐고, 컨셉 아니냐며 비아냥거리는 채팅이 올라온다.
"야, 왜 그래."
"몰라 아는 척하지 마 창피해…."
달래가 고개를 숙인 채 볼이 빨개졌다.
대체 왜 부끄러워 하는지 모르겠다.
브랜드는 유행을 탈 수 있는 거다.
'요즘 애들은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아디다스가 유행이 지났다는 사실 인정한다.
그렇게 싫어할 줄은 차마 몰랐다.
그럼 다른 브랜드를 사면 되지 괜히 소란은.
"그럼 나이키로 갈까?"
"제발 좀 닥쳐줘……"
-으아아아아악-!
-속보! 타임머신 타고 온 과거 인류 발견
-보는 내가 다 부끄럽네……
-진짜 방구석에서 게임만 했나?
남이사 방구석에서 게임만 하던 말던!
내가 원래부터 유행에 무심하긴 했다.
군대까지 겹쳐지면서 세상 모르고 살았다.
'지가 입고 있는 옷이나 창피해 할 것이지 거참.'
달래가 고개를 푹 숙인 채 히끅거린다.
코스프레 하고 있는 주제에 신발 브랜드를 창피해 하는 이상한 녀석이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고 솔직히 억울하다.
유행 좀 몰랐다고 그렇게 오바까지 떨어야 돼?
이런 건 오히려 당당해야 한다.
나 말고도 분명히 몰랐던 사람들 많을 것이다.
-남절이 옷 센스는 있는 거 같은데 취향이 아재네
-진짜로 안 서는 거 아님?ㅋㅋ
-이참에 달래한테 좀 배우자…… 제발!
시청자들이 물타기 해서 쪼아댄다.
이제부터라도 차차 알아가면 되는 거지.
간만에 백화점에 온 보람이 조금은 생긴 듯하다.
* * *
어제는 정말 쿨하게 신발만 사고 헤어졌다.
기왕 경기도 이겼는데 한 잔 하고 가지?
꼴에 여캠이라 스캔들 관리를 한단다.
홀연히 사라지면 시청자들이 의심할 수 있다.
와, 세상 피곤하게 사네 정말로.
동시에 그런 관리도 필요하다는 생각도 든다.
여캠에 별풍 쏘는 사람들이 사심충이기도 하고.
특히 달래는 반쯤 연예인이라 봐도 될 정도다.
처음 만났을 때는 안 그랬는데 요즘은 정말이다.
"헐, 달래다 달래! 누나 팬이에요!"
"대-박! 언니, 저 인스타 팔로우했는데."
"저 사람 저 사람 페북 스타잖아 몰라?"
명품관과 달리 신발 매장쪽은 사람이 북적였다.
대부분 10대에서 20대로 젊은 연령층.
다행히 가격대도 정상적이라 쭉 둘러볼 만했다.
쇼핑하는 과정에서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더라?
신기하게도 파프리카TV의 팬들은 없었다.
아니, 일부러 말하지 않은 거겠지.
'플랫폼 자체가 어디서 본다고 떠들기 좀 그렇긴 해.'
규모라는 면에서도 SNS가 훨씬 크기도 하다.
그 SNS에 달래가 엄청난 인기스타다.
에이, 인기 있으면 얼마나 있겠어.
다방면에서 이름이 알려지는 추세라고 한다.
그런 세간의 사정.
브랜드 유행도 모르는 내가 알 리가 없었다.
그렇게 잘나가시는 분과 스캔들이 나서 쓰나.
그래서 보내줬는데 수금하고 있네?
수금을 다 하셨는지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오빠, 우리집 비는데.〉
"그럼 넓게 자라."
장난스레 시작된 통화였다.
통화의 내용은 다름이 아니다.
모델 등의 일로 한동안 바쁠 예정이시라고.
어차피 하비도 곧 돌아온다고 연락이 왔다.
나도 더 이상 아쉬울 게 없는 입장이다.
달래와는 이것으로 끝.
"……."
그리고 오늘, 늦잠을 자고 늦은 아침을 먹었다.
갑자기 초인종이 눌리길래 문을 열었다.
택배 기사 아저씨가 오셨나.
여자였다.
푹 눌러 쓴 모자, 가벼운 추리닝.
하지만 신고 있는 운동화가 굉장히 낯익다.
달래에게 사준 그 운동화다.
"바쁘다며?"
"반갑다고부터 해주지."
바로 어제 봤는데 반갑다는 말이 나오겠니?
예고도 없이 찾아온 목적도 모른다.
목적 자체는 있을 만도 했다.
"잔금 받으려고 왔는데요."
"야 이 독한……."
마지막 말을 내뱉으려다 말았다.
확실히 신발값으로 퉁 치기엔 싸다.
할인 받으니 10만원이 살짝 안됐다.
"한 켤레 더 사줘?"
"누굴 수전노로 아나 정말."
운동화를 신어서 그런지 어제보다 작다.
고개를 숙이자 가슴팍에 들어온다.
갑자기 안겨와서 깜짝 놀랐다.
아직 문도 안 닫았는데.
"……들어가서 얘기하자."
"들어가도 돼?"
집까지 찾아왔는데 내칠 수는 없잖아.
아무리 빌라라고 해도 보는 눈이 있다.
그리고 한 가지 신경 쓰인다.
"이건 뭐야? 뭘 또 그렇게 사왔어……."
달래가 들고 있는 큰 종이 상자가 눈에 띈다.
혹시 뭐…… 홍삼이라도 사왔니?
요즘 내가 몸이 허한 편인데 주면 고맙고.
선물조차 아니었다.
"그냥 내 옷인데."
"……."
니 옷을 내 집에 왜 들고 와!
어떻게 보면 선물일 수도 있다.
상자 안의 내용물은 익히 낯이 익다.
"어제 코스프레 옷."
"그걸 대체 왜 들고 왔니?"
"오빠 취향 아니야? 안 좋아해?"
좋아하고, 안 좋아하고를 따지면 당연히 전자다.
롤 유저인 이상 싫어할 수는 없다.
아링이라는 챔피언은 남자의 본능을 자극한다.
저렇게 섹시하고 몸매 좋은 여자 만나고 싶다.
그런데 참 공교로운 일이다.
눈앞에 있네?
"어때? 바로 함 칠까?'
추리닝을 입었음에도 몸매가 선정적이다.
헐거운 옷으로도 가려지지 않는다.
꼭 붙어 비벼오자 촉각으로도 느껴진다.
"대체 뭘?"
"웅? 당근 떡이지."
"……."
순간 뇌정지가 왔다.
내가 잘못들은 건가?
혹시 몰라서 물어봤다.
"Rice cake?"
"뭐래. 농담 따먹기 해?."
명백히 이상한 손 모양을 해온다.
경기 중 수차례 봤던 가운데 손가락이 아니다.
엄지가 검지와 중지 사이를 뚫고 나온다.
일련의 행위가 연상되는 제스처다.
"너 바쁘다고 하지 않았니?"
"오늘 하루는 휴가 냈어. 그니까 같이 격하게 놀자. 웅?"
배시시 웃으며 애교를 부려온다.
평소와의 갭 때문에 뇌에 정지가 온다.
솔직히 살짝 변한 줄만 알았다.
잘나가다 보니 잊을 수도 있겠네.
괜시리 질척거리며 귀찮게 안 하려고 했다.
부탁도 안 하고 싶었는데 8강은 어쩔 수 없었다.
"달래야, 이런 말하기 뭣한데…… 너 또라이 같아."
"나도 알거든."
"알면서 그래?"
"그치만 나 돈 벌어서 오빠랑 행복해지고 싶단 말이야."
그렇게 귀엽게 말해오면 내가 뭐가 돼.
조금이라도 의심을 했던 사실이 쓰레기 같잖아.
볼을 뾰로통하게 부풀리며 가슴에 이마를 비벼온다.
자연스럽게 안기는 모양새가 되었다.
쇼파 위에서 애정 행각을 벌이는 모습이다.
아니, 이미 그러고 있다는 걸 부정하기 힘들다.
"오빠 있잖아~."
"왜, 왜."
"내 안에 푹- 해서 찍- 하면 기분 짱 좋지 않을까?"
"……."
엉덩이를 비비며 대놓고 섹스 어필을 해온다.
말랐을 줄 알았는데 은근히 살집이 있어서 곤란하다.
"진정하고 우리 건전한 대화를 나누자."
"뭐래, 떡 얘기거든. 맛있는 떡-."
떡, Rice cake.
굳이 힘 줘서 말할 필요 없는 글자다.
요염하게 속삭여오는 목소리하며 확실히 춘자와는 다르다.
오늘 밤 넘어가도 무죄라고 생각한다.
* * *
남자는 욕망에 솔직한 동물이다.
아무리 사정이 있고 그렇다고 해도.
대놓고 둘만 있을 때 밀어붙이면 약해진다.
하지만 But 동방예의지국의 후손이다.
여자와 함부로 살갗 겹치지 않는다.
물론 떡을 만드는 과정 이야기하는 거다.
"어땠어?"
"몰라…… 바보."
달래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
거실 쇼파에 앉은 채 훌쩍훌쩍.
어느새 뜯어놓은 티슈가 산더미다.
"인정하긴 싫지만 좋은 영화네. 여운도 남고."
"내가 뭐랬어. 보길 잘했잖아."
"흥……."
살짝 삐졌는지 눈길을 돌린다.
바로 티슈를 뽑아 코를 푼다.
그거 코푼 것도 있었구나.
치울 때 고려해야겠다.
"방송은 다 한 거야?"
"4시간이면 짧긴 한데 원래 난 길게 하는 편도 아니라서."
잠깐 방송 좀 할 테니 영화 보고 있어라.
어이가 없는지 달래가 입을 뻐끔뻐끔.
무시 당했다고 생각했나 보다.
그런 게 아니다.
"니가 그렇게 신경을 쓰니까 나도 알리바이를 맞춰준 거야."
너랑 달리 나는 어제 방송도 안 하고 잤다.
여자랑 쇼핑하면 너무 피곤해!
하루 더 쉬면 어떤 식으로든 이야기가 나온다.
만에 하나 달래랑 엮이면 속이 편할 수가 없다.
그리고 보여주고 싶은 영화이기도 했다.
2편 짜리 영화인데 다 보고 나면 여운이 이어진다.
감정을 쏟고 싶을 때 보면 좋은 영화다.
"……배고파."
"응?"
"오빠가 해준 밥 먹고 싶어. 오랜만에."
한바탕 울어서 그런지 배가 고픈가 보다.
옛날에는 종종 해줬었다.
아무래도 난 가사 스킬이 있는 편이라.
그에 반해 달래는 거의 전무해서 역할이 바뀌었다.
풋고추 널고 얼큰하게 끓인 된장찌개.
부모님이 나 먹으라고, 나 먹으라고 보내준 굴비.
그 외 간단한 찬거리들이다.
입맛에 맞는지, 정말 배가 고픈지 허겁지겁 먹는다.
"다이어트 한다면서요?"
"내일부터 다시 할래."
"아, 그래……."
밥공기를 한 그릇 싹싹 긁어먹는다.
예전부터 밥 먹는 모습이 참 예뻤다.
이곳저곳 많이 변한 달래지만 그 모습 하나 만큼은 이전과 그대로다.
"오빠, 우리집 가정부로 올래? 밥 너무 잘한다."
"가겠냐?"
"오면 하루하루가 무척 즐거워질 수 있는데도?"
"……."
그건 조금 끌릴 수 있는 부분이긴 하다.
하지만 나에겐 내 꿈이 있다.
너에게도 네 일이 있다.
그리고 아무리 달라져도 내 안에서 춘자는 춘자다.
"입에 밥풀이나 떼고 말해."
"이따 먹으려고 꼼쳐둔 건데."
"등치는 산 만해서 아직도 애같네."
"산 만하다 하지 마~."
칭얼대는 모습이 옛날과 다를 바가 하나 없다.
눈물 탓에 화장기도 지워져서 닮은 구석이 보이네.
어제 그 틱틱대던 모습이 떠오르자 헛웃음이 나온다.
"밥도 먹었으니까 웅?"
"우리 사귀는 사이 아닌 거 알고 하는 말이지…?"
"잔금."
"……."
내가 잔금을 몸으로 내야 돼?
내가 그렇게 서러운 처지야?
달래가 성격이 드세고 사납긴 해도 정신적으로는 불안정한 아이다.
툭 건들면 무너질 듯 위태위태하다.
저러다 사고 치는 거 아닌지 걱정도 되고.
힘이 되어줄 수 있다면 당연히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긴 하다.
"오빠가 사랑해주면 나 힘내서 일 열심히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손가락으로 꼼지락꼼지락 팔끝을 간지럽힌다.
아니, 그렇게 말하면 도와주고 싶잖아.
이러면 안되는 걸 모르지 않다.
알고 있음에도.
"방금 고민했지?"
"……."
"괜히 뇌세포 있는 척하지 말고 밥팅아."
피식 웃으며 과격한 도발을 해온다.
누가 춘자 아니랄까봐 언어 사용이 거칠다.
무죄는 아니어도 정상참작은 해줬으면 싶다.
========== 작품 후기 ==========
Rice cake입니다
오해하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