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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설의 격돌 -->
그 중요도가 결코 낮을 수 없는 경기다.
하지만 우리 파프리카 프릭스는 신생팀이다.
여러가지 따지면서 나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오늘의 선수 교체는 여러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하…… 솔직히 너무 섭섭했어요."
"제가 죄송해요."
"토사구팽은 너무하잖아요. 인정 해, 안 해?"
"깔끔하게 인정합니다."
지난 승강전 당시 우리 파프리카 프릭스의 정글러로 활동하셨던 분이다.
승강전 끝나고 프로게이머 컨셉으로 방송도 열심히 하셨다.
그런데 잼구에 밀려 주전 자리를 박탈 당했다.
"아무리 솔로랭크 점수를 고려한다 해도. 승강전의 공로를 무시하고 갈아엎는 건 난 아니었다고 봐."
"제가 점수에 눈이 멀었습니다."
JustLightThis 챌린저 6~800점대의 정글러다.
그리고 우리 자랑스러운 잼구.
1천점 사이를 줄타기하는 수준급의 실력자다.
고작해야 점수 2~300점 차이 아니야?
챌린저의 2~300점은 평생을 쏟아부어도 닿을 수 없는 하늘이다.
말하자면 대류권과 성층권의 차이다.
중간에 오존층이 떡하니 버티고 있다.
그리고 까놓고 승강전때 못했잖아!
망설이기에는 차이가 워낙 컸다.
결정적으로 잼잼 듀오다.
잼할과 함께 파프리카 프릭스의 상체를 지탱해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저희가 쭉 뭉쳤으면 판도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거봐요. 경기 봤는데 정글이 항상 문제더라고. 저랑 했으면 훨씬 더 쉽게 이겼잖아요. 인정해, 안 해?"
"저라딧님 방출하고 가슴 한켠에 늘 후회를 안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영입을 하니 대들보를 뽑아 먹을 기세다.
온갖 사고란 사고는 다 치고 다닌다.
저라딧에게 다시 권유를 해봤다.
다음 SKY T1 K전 뛰어보자고.
어지간히 징징댔지만 끝내 받아들였다.
스크림 연습 이후 다시 경기를 뛰게 됐다.
오늘 첫 번째 세트는 저라딧이 대신하여 경기를 진행한다.
물론 대신할 인재가 없는 탑은 잼할 그대로다
─소환자의 전장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밴픽이 끝나고 소환자의 전장에 발을 디딘다.
나는 원딜 포지션으로 게임에 임한다.
상체를 믿고 맡겨보겠다는 심산이다.
저라딧도 자신감이 충만해 보인다.
"우리 역사 한 번 써봅시다."
"역사요?"
"최강이라는 SKY T1 K 잡고, 본선 가서 우승하고. E-스포츠판 뒤집어보자고요."
롤챔스 첫 출전일 텐데 자신감이 과하게 넘친다.
승강전에서 경기를 뛰었으니 경험은 충분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역사를 한 번 써본다니.
'그건 좀 혹하긴 하는데…….'
과연 생각대로 이루어질지.
그러고 보면 잼구도 처음에는 그랬던 것 같다.
* * *
─퍼스트 블러드!
아군이 당했습니다!
적 레드 지역에서 이루어진 3대3 교전.
카정을 간 저라딧의 리심이 운명하셨다.
'이로써 역사 속으로 묻혀 사라져버렸고…….'
그 본인이 역사가 된다는 복선이었나 보다.
3분 24초 선취점 똑똑히 기억됐다.
솔직히 별 기대를 안 했어서 충격은 없다.
'판단이 틀렸던 건 아니야.'
레드 버프를 두른 리심이다.
선 블루인 2레벨 거미여왕이 만만할 만도 하다.
솔로랭크였다면 높은 확률로 이득을 보는 구도.
당연히 솔로랭크와는 다르다.
개개인의 실력 차이는 둘째 치고.
합류 속도랑 호응을 전제로 한 판단력 차이가 갈린다.
〈라딧님.〉
〈네…….〉
〈짜져서 먹을 수 있는 정글이나 드세요.〉
깊은 한숨의 미드라이너가 된 도인디가 짜증을 쏟아낸다.
정글러들이 항상 무리하다 죽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 심정 내가 누구보다 이해한다.
'그런데 어쩔 수가 없어.'
방금 전 저라딧의 스로잉으로 한 가지 확신할 수 있었다.
잼구가 못한 게 아니다.
저라딧도 틀리지 않았다.
그저 상대와의 실력 격차, 호흡의 정밀도가 극명할 뿐이다.
인지하지 못한 채 무리를 하니 던지게 된다.
수비적으로 하는 것도 정답은 아니다.
상대가 빈틈을 콕콕 찔러올 게 분명 하다.
오늘 경기도 결국 내가 캐리를 해내야 한다.
파앙!
튕기고 돌아온 회전도끼가 손에 잡힌다.
오랜만에 하는 챔피언이다.
가장 극단적인 하이리스크 하이리턴.
도라이븐의 캐리력은 분명 무지막지하다.
'킬을 먹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서 문제지.'
무난하지 않게 진행되는 라인전.
조금 생각을 잘못한 감이 있다.
상대의 견제가 지나치게 매섭다.
카라락!
적 서포터 루나의 검이 나를 노린다.
채 닿기 전에 가볍게 흘려낸다.
대형 도끼를 던져 끊어버렸다.
나에게 있어 당연한 플레이다.
하지만 당연하지 않은 사람도 있다.
하비의 힐라카가 적지 않게 고생 중이다.
'한 대 거하게 당해 점멸도 빠져버렸고.'
자신감도 잔뜩 움츠러든 상태다.
뒤에서 소극적으로 라인전을 보조한다.
상대가 워낙 강하다 보니 정신이 살짝 오락가락 하나 보다.
사실 그럴 만도 하다.
지금까지 만났던 그 어떤 상대보다 독보적으로 강하다.
SKY T1 K.
세계 최강의 팀으로 이름 높다.
그 사실이 새삼 느껴지는 라인전이다.
그럼에도 져서는 안되는 이유가 있다.
선전포고, 그 이전의 이야기다.
상대 서포터와는 징글맞게 아는 사이다.
'후만두…….'
과거 카오스에서 숱하게 얽힌 인연이다.
원탑을 꼽을 때면 항상 그와 나의 이름이 들어갔다.
비견될 정도의 실력을 가졌다는 소리다.
솔직하게 불만이긴 했다.
저 도박 장인이랑 내가 왜?
비하를 하는 게 아니라 정확한 팩트다.
카오스에는 도박이라는 시스템이 있다.
롤로 따지면 롱소드 값을 투자해서 VF대검을 얻는 게 가능하다.
당연히 확률이 낮아 잘 안 걸리지만 저 후만두는 운이 굉장히 좋다.
'그 점을 포함해도 실력 자체는 차고 넘쳐.'
이 내가 인정할 만한 급의 실력자다.
상대팀, 그것도 맞라인전을 서고 있다.
왕린과 마찬가지로 져서는 안되는 상대다.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는다.
고심 끝에 해답을 내어 놓는다.
정말 이런 짓까지 하기는 싫었지만.
"하비…… 부탁이 있어."
"What What?"
목소리가 평소와는 다르다.
조급한 나머지 대화하는 것마저 버거워 한다.
그럴 정도의 상대.
당연히 쉽게 이길 수는 없다.
나도 한 가지 포기해야 한다.
"가서 좀 죽어주지 않을래?"
"Wha…… Why? Pardon?"
우리나라 사람들이 영어를 생각해서 말하듯 하비 또한 마찬가지다.
뇌정지가 오면 한국어가 안 나온다.
자연스럽게 외국어가 튀어나온다.
나 레전설, 동방예의지국의 후손.
이었던 남자다.
승리를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다.
하비에게 희생을 강요하려 한다.
"가서 죽어. 그럼 내가 킬 딸게."
"Are you… serious?"
진심이냐고 물어온다.
미안하지만 진심이다.
늘 반쯤 장난기가 섞여있는 하비의 어조에 정색이 섞였다.
'그도 분명히 고민이 많았을 거야.'
나는 인간을 그만두겠다! 죠죠!
어떤 만화의 악역이 외친 명대사다.
저 말을 하기 전까지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겠는가.
조금은 공감대가 꽃피려고 한다.
나 또한 지금까지 먹은 빵의 개수를 센 적이 없다.
얼굴에 철판 깔고 라인전을 진행한다.
─아군이 당했습니다!
기회가 있다면 지금 뿐.
상대가 미끼를 물었다.
* * *
SKY T1 K는 분명 세계 최고의 팀이다.
하지만 모든 선수들이 최고인 건 아니다.
테이커를 제외하면 인지도면에서 다 고만고만하다.
'하, 나도 미드를 했어야 했는데.'
특히 원딜러인 휘글렛은 불만이 많다.
자신이 테이커보다 부족한 게 뭐란 말인가?
실력적인 면도, 캐리력도 밀릴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묻힌다.
이게 다 원딜 포지션이 가진 고질적인 한계다.
후반 캐리만 가능하지 초중반에는 존재감이 얕다.
극복하기 위해서는 임팩트 있는 장면을 보여줘야 한다.
그를 위한 제물이 도착했다.
최근 말도 많고 탈도 많다는 레전설의 목을 자신이 친다.
그럴 수 있는 구도는 이미 만들어두었다.
헤이클린을 픽해 라인전을 거세게 압박했다.
그 결과, 적 서포터 힐라카는 점멸이 빠진 상태다.
터엉-!
실력 또한 그다지 주의할 수준이 아니다.
고작해야 다이아 1,2티어.
라인전 내내 허점이 수도 없이 드러났다.
후만두의 루나가 점멸 방패치기로 결정타를 먹인다.
─적을 처치했습니다!
정확한 평타 한 방과 이어진 예측Q.
대탄환이 지나간 자리에는 시체만이 남는다.
추가 스펠을 쓸 것도 없이 깔끔하게 마무리한다.
'미안하지만 약육강식이야.'
특유의 썩소가 짓고 있는 휘글렛은 떠올렸다.
BJ하비라고 했었나.
외모가 굉장히 취향 저격인 금발의 서양녀다.
그렇다고 한들 봐주는 일은 없다.
프로게이머의 세계가 괜히 금녀의 영역이겠는가.
승부에 한해서 자신은 피도 눈물도 없는 남자다.
그런데 세상, 진정 피도 눈물도 없는 쓰레기도 존재한다.
그 사실을 알아챌 수 있을 만큼 야박하지 못했다.
인간인 이상 곱씹을 수밖에 없을 연민이 빈틈을 만들었다.
파앙!
힐라카가 죽었으니 당연히 도망을 갔겠지.
레전설의 도라이븐이 미친 듯이 달려든다.
인지하자마자 바로 투망을 쏴 내빼려 했지만.
카라락!
그만 끊기고 말았다.
공중에서 대형 도끼를 맞으며 허리가 꺾인다.
당연히 곧바로 힐과 점멸을 써 다시 거리를 벌렸다.
파앙!
파앙!
문제가 있다면 상대도 써왔다는 사실이다.
점멸로 투망을 뛰어넘으며 내려 찍는다.
휘몰아치는 두 자루의 회전 도끼.
헤이클린은 분명 견제력이 좋은 원딜러다.
도라이븐을 상대로 상성상 우위에 선다.
하지만 이런 맞딜 상황에서는 무력하다.
─적에게 당했습니다!
1대1의 교환.
썩소가 지어져 있던 휘글렛의 입가가 우그러진다.
자신이 죽었기 때문이 아니다.
여차하면 후만두까지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다.
물론 쉽게 킬을 내줄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다.
쉽게 내주지 않는다면 어렵게 가져간다.
수많은 미니언과 부쉬까지 활용한 악전고투.
─적 더블 킬!
그 결과는 한 끗 차이였다.
정화에 의해 방패치기의 스턴이 풀렸다.
간발의 차이로 더블 킬을 가져간다.
기묘하게 비벼지는 게임.
휘글렛의 머릿속에 설마하는 생각이 떠오른다.
'아니, 그럴 일이 설마…….'
자신 정도의 선수가 아니라면 떠올리지도 못했으리라.
어디까지나 가능성의 한 갈래다.
하지만 그런 소문을 가지고 있는 남자라면 할 법도 하다.
모골이 송연해지는 섬칫한 상상을 휘글렛은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 * *
충분히 있을 수도 있는 일이다.
옆구리를 주고 목을 취한다!
옆구리를… 너무 깊이 찔렸어…….
그렇게라도 되지 않은 이상 전략적 가치는 있다.
〈너무 대놓고 들어간다고 생각은 했었거든요.〉
클끼리 해설이 리플레이를 보며 다시 한 번 보며 되짚는다.
결과론적으로 생각을 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의도해서 저지른 낚시인지.
후자만은 아니기를 빌었다.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이 어찌 그 정도까지 하겠나?
-저건 빼박이다
-도라이븐한테 힐까지 주고 죽었어…
-안다. 나 저거 알아
-유리야! 빡대가리야!
전례가 없었으면 모를까 있다.
그 전례를 모를 수가 없는 사람이다.
레전설이 도라이븐을 할 때면 반드시 누군가가 고통을 받았다.
〈낚시를 한 거면 오히려 눈치를 챘을 텐데…… 일부러 한 걸음 깊이 들어갔어요. 루나가 얼씨구나 하고 받아 먹었죠.〉
점멸도 빠진 상황이니 노리는 게 당연하다.
심지어 엄청 깔끔하게 잡았다.
하지만 이것이 설계였다면?
갑작스러운 사고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힐라카는 초탈하게 죽음을 받아들였다.
힐을 받은 도라이븐이 내려 찍는다.
〈더블 킬! 옆구리를 내주고 목을 치는데 성공합니다.〉
〈그런데 이러면 옆구리가 시릴 수도 있겠네요?〉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이 바로 그겁니다.〉
아직까지 쌀쌀한 4월 초다.
하비와 그럭저럭 훈훈한 분위기를 내고 있다는 레전설.
너무 인간미 없는 선택을 해버렸다.
인간향 첨가도 과할 수준이다.
-유리야에 이어 하비까지……
-??? : 가서 죽어!
-근데 저러면 이득 아님?
-ㅇㅇ개이득이지 게임적으로는
그야말로 게임에 미친 남자.
상남자식 게임 운영을 보여주고 있다.
도라이븐은 확실히 킬만 따면 개이득이다.
심지어 더블 킬.
차고 넘치는 골드가 손에 들어온다.
과정이야 어찌 됐든 역전의 계기를 마련했다.
========== 작품 후기 ==========
재밌게 봐주시는 독자님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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