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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르르…
주전자에서 물이 얇고, 길게 떨어진다.
떨어진 물은 커피필터 안 원두에 스며든다.
스며든 물이 똑똑 떨어져 이윽고 커피를 이룬다.
'이건 널리고 널린 아메리카노가 아니야.'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사실이다.
이렇게 손수 내린 커피는 아메리카노라고 부르지 않는다.
핸드드립 커피.
적당한 크기로 분쇄한 원두에 뜨거운 물을 부어 커피를 추출한다.
얼핏 간단해 보여도 초심자와 숙련자의 차이는 역력하다.
우려낸 커피의 맛이 전혀 다르게 느껴질 정도다.
또르르…
주전자에서 떨어지는 물줄기가 항상 같은 굵기를 유지하고 있다.
다르다면 덜 우려지거나, 과하게 우려진 커피가 섞이게 된다.
이는 곧 맛의 변질로 이어지기에 중요한 문제다.
당연하게도 적지 않은 집중력을 요한다.
심지어 그 한 가지만이 아니다.
필터 안 모든 원두를 고르게 적셔야 한다.
너무 우린 원두는 쓰고 떫은 맛.
덜 우린 원두는 신맛과 풋맛.
물을 붓는 위치와 방향을 신중히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
수도 없는 실패를 딛고 완벽이란 경지에 이르렀다.
자신이 가진 또 하나의 별명.
커피 물조절 장인이 탄생하게 된 비화이기도 하다.
"자, 드시죠."
왕린은 우린 커피를 도자기 잔에 따랐다.
자신이 아닌 누군가를 위한 커피다.
그 누군가라 함은 SKY T1 게임단의 감독.
"오오……."
향을 맡는 것만으로도 감탄사가 흘러나온다.
박다균 감독은 왕린의 사생팬으로 알려져 있다.
사정을 모르는 이들이 겉만 보고 퍼트린 헛소문이다.
엄밀히 말하면 반은 맞았다.
그가 우려낸 커피의 맛과 향에 매료되고 말았다.
설령 왕린이 실력 미달이었어도 영입 1순위였을 정도로.
"왕린, 여전히 최고의 커피 맛이야."
"나 커피 물조절 장인에게는 당연한 일이지."
단순히 에스프레소에 물을 타 아메리카노로 만든 것과는 다르다.
직접 내리는 데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농도는 비슷해도 맛과 향이 전혀 다른 오더 커피가 탄생한다.
핸드드립 커피는 장인마다 맛이 다르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수많은 장인들 중에서도 가히 최고봉.
사생팬이 될 정도로 박다균 감독은 왕린의 커피에 애착이 깊다.
그런 만큼 즉각 알아챌 수밖에 없다.
오늘의 커피 맛은 조금 다르다.
그 미묘한 변화를 눈치챘다.
"오늘 너의 커피 맛, 망설임이 느껴져."
"후후, 역시 너의 혀는 속일 수 없는 건가?"
장본인이라고 모를 수가 없는 일이다.
2분 전후에 걸쳐 천천히 우려내는 작업을 가진다.
커피 알갱이와 물이 만나는 시간을 조절하는 것이다.
장인의 컨디션이 안 좋으면 그날의 커피 맛도 상한다.
물론 그 정도의 일이야 문제가 안된다.
커피 물조절 장인이라는 별명이 괜히 붙은 게 아니다.
문제가 되는 쪽은 감정.
비 오는 날 부친 파전이 맛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커피에는 우려낸 이의 감정 또한 함께 담기기고 만다.
'기분이 편하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겠지.'
무엇보다 박다균은 그가 속한 게임단의 감독이다.
선수 개개인의 관리 또한 도맡는 입장이다.
일개 팬으로서도 신경이 쓰인다.
지난 승강전에서 크나큰 창피를 겪었다.
그 창피를 안겨준 장본인이 크게 선전했다.
KTX 롤러코스터 A가 완파됐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왕린…… 너의 패배는 내 책임이야. 지난 승강전은 나의 판단 착오였어."
SKY T1 정도는 되는 게임단에게 승강전은 지나가는 골목에 불과하다.
애초에 준비도 썩 열심히 하지 않았다.
박다균 감독은 기본적인 분석과 밴픽 체크를 마치고 여행을 떠났었다.
딱히 강자의 여유, 혹은 나태함이 아니다.
원래 롤챔스가 끝난 휴식 기간은 선수와 코치진의 휴가 기간이다.
남쪽 바다에서 자신의 피앙세를 찾을 수 있을 것만 느낌이 들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찾지는 못했지만 지친 몸과 마음의 피로는 충분히 달랬다.
긴 휴가에서 돌아오자마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그때 내가 여행을 가지 않고 붙어 있어야 했는데……."
"아니, 그렇지 않아. 패배한 건 순전히 내 실력이 부족했기 때문이지."
박다균의 귀에 믿을 수 없는 대답이 들려왔다.
왕린이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고?
평소 그의 성격이라면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실력 하나는 탁월하나 그 외의 부분에 문제가 많은 왕린이다.
비협조적인 팀플레이.
툭하면 터지는 멘탈적인 문제.
자랑인 실력마저도 파프리카 프릭스전에서는 솔직하게 뒤쳐졌다.
박다균은 내심 걱정을 하고 있었다.
경기야 이기겠지만 또다시 레전설에게 밀리는 건 아닌지.
또르르…
숙적과의 경기를 앞뒀음에도 왕린의 표정은 평안하기만 하다.
주전자에서 떨어지는 물줄기에 흔들림이 없다.
이윽고 만들어진 두 번째 잔.
"마셔봐. 그게 내 대답이니까."
아직 첫 잔을 다 비우기도 전이다.
그럼에도 두 번째 잔을 내밀어온 이유.
생각을 하기에 앞서 손이 먼저 움직였다.
왕린의 커피맛을 누구보다 잘 안다.
박다균은 직감적으로 느꼈다.
이 커피는 다르다고.
"이, 이 맛은!"
늘 완벽만을 추구하던 왕린이다.
커피 물조절 장인에게 있어 타협은 없다.
그렇기에 항상 최고지만 동시에 아쉽다고 생각했다.
완벽하다는 건 변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 성향은 플레이에도 고스란히 나타난다.
카오스 시절부터 왕린은 독불장군이었다.
"어때?"
"알겠어. 너의 대답……."
두 번째 잔은 평소 그의 오리지널과는 다르다.
변해버린 커피의 맛이 대답을 대신한다.
아니, 변한 것이 아니다.
'더욱 완벽해졌어.'
왕린은 어린 시절부터 왕도만을 추구했다.
커피의 왕도.
게임의 왕도.
이미 왕의 자리에 올랐기에 그 이상은 필요 없다.
그렇지 않다.
게으른 왕은 왕좌를 빼앗기는 시대다.
왕린은 더 이상 실패 따위 두려워 하지 않는다.
첫 잔에 담겼던 망설임.
다음 잔을 위한 초석이었음을 함께 말한다.
누구보다 왕린의 커피를 많이 마신 박다균 감독은 깨달았다.
'걱정 따위 기우였구나!'
모든 걱정과 근심을 사라지게 만드는 완벽 이상의 물조절이었다.
* * *
KTX 롤러코스터 A팀과의 대전은 승리로 끝이 났다.
과정은 등골이 삭았지만 이기긴 했다.
문제는 KTX전은 산전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아직 수전과 공중전이 남았어.'
SKY T1 S와의 경기가 수전에 해당한다.
상대적으로 해볼 만하기 때문이다.
이미 한 번 이겼었기에 만만하기도 하다.
"근데 내가 만만한 거지 너희들은 절대로 아니야."
오늘은 합동 컨텐츠를 진행 중이다.
프로게이머임과 동시에 BJ이기도 하다.
나 레전설, 파프리카TV의 팬들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
"어차피 전 안 나가잖아요."
"나갈 수도 있어 긴장해!!"
-대회 끝나자마자 시트콤 찍고 있네ㅋㅋ
-유리야 입술 내민 것 봐. 깨물어주고 싶다
-솔직히 긴장 안 해도 된다 인정?
입술을 뾰로통, 볼따구는 팅팅.
내 집까지 불려온 유리야가 불만이 많아 보인다.
왜 본인은 해당사항이 없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하비 열심히 했다! 더 열심히 한다!"
"Okay 하비. 지난 경기 괜찮았어."
유리야 뿐만 아니라 하비도 불렀다.
달래도 부르고 싶었는데 바쁘다며 쌩깠다.
나름 동서양의 미녀를 대표하는 둘이 내 앞에 무릎 꿇고 앉아있다.
-재활용이 되는지는 몰라도 분명 안 타는 쓰레기일 거야
-그거 인정!
-여자들 무릎 꿇리고 능욕하고 있네
무슨 능욕이야!
반성 좀 하라는 의미다.
지난 경기 등골 빠졌던 거 봤을 거 아니야?
"잼잼 듀오한테도 당연히 뭐라 했지. 경기 끝나자마자 한 소리 했어!"
근데 땡큐 땡큐!
누구보다 해맑게 웃고 있다.
웃는 낯에 어떻게 침을 뱉어.
그래도 말을 해야 하긴 하겠어서 피드백 시간을 가졌다.
거기서 그렇게 하면 안됐는데.
초보적인 실수는 주의를 해줘야 한다.
오케이 땡큐 땡큐!
둘이 호흡이라도 맞춘 듯 텐션이 높다.
나중에 또 시간 나면 잔소리를 할 예정이다.
하지만 오늘은 이 두 아리따운 사고뭉치 차례다.
"둘이 손 번쩍 들어."
"왜요!"
"유리야 너 자꾸 혼자서 불만이 많아?"
"우쒸……."
-왜 손을 들라는 거야ㅋㅋ
-그 와중에 하비 말 잘 들음
-그냥 재밌는가 본데?
하비는 무슨 상황인지도 모르고 실실 웃고 있다.
외국은 이런 체벌 문화가 없을지도 모른다.
유리야만 볼따구가 터지려고 한다.
'이거…… 은근히 우월감 들네.'
누가 봐도 미녀들을 무릎 꿇고 앉혔다.
손 번쩍 들게 벌도 세우고 있다.
약간 쾌감 오지는 부분인 각이다.
그렇다고 너무 오래 자만감에 도취되면 안된다.
방송이라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화가 풀린 척 선처를 해준다.
"죄인은 고개를 들라."
"I Know! 사극! 임금!"
"Okay Okay. 진정해 하비."
두 처자의 텐션이 정반대다.
요즘 리야가 삐뚤어지려고 한다.
왜 삐졌는진 모르겠지만 이야기를 진행한다.
"지금 우리팀이 결과적으로 이긴 거지 만신창이야. 심지어 상대는 갈수록 강해져!"
SKY T1 S, 그리고 SKY T1 K.
진짜 솔직히 말해서 지는 순간 샌드백이 되는 건 나다.
온갖 관심이 나한테 다 쏠려있어서 잘해도 욕 먹을게 뻔히 그려진다.
살면서 욕을 하도 먹어봐서 안테나가 빠릿하다.
-ㅆㅇㅈ
-레전설 만큼 욕 많이 먹고 살기도 힘들 듯
-욕 먹은 게 자랑?
자랑이 아니라 니들 같은 애들이 욕을 하잖아!
나는 가슴에 손을 얹고 나쁜 짓은 한 적이 없다.
아무튼 이 둘을 집까지 부른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그러므로 오늘부터 하비는 나와 특훈에 들어간다.
"트쿤?"
"특훈."
뭐 빠지게 해보자는 소리다.
발음은 귀엽지만 봐주는 건 없다.
지옥 같은 데이트, 아니 특훈 예정이다.
"리야 너는 숙제 내줄 테니 열심히 하고 있어."
"혼자 하라는 거죠?"
"그럼 숙제를 혼자 하지. 선생님이랑 하니?"
"몰라요."
-리야 삐쳤어ㅋㅋ
-유리야 요즘 많이 토라지네
-자꾸 혼자 둬서 그런 듯ㅋㅋㅋㅋ
감정 이입한 시청자들이 의도를 마음대로 해석하고 앉았다.
하지만 아주 틀린 말도 아닌 듯싶다.
나한테 한두 번 갈굼 받는 것도 아니고 왜 그러는 걸까 아마추어 같이.
"너 때문에 숙제도 아니, 컴퓨터도 사왔다. 정신이 없네."
"컴퓨터요…?"
"그래, 옆자리에 앉아서 다소곳이 솔랭해. 캠도 설치했으니까 방송하려면 하고."
유리야는 손에 닿는 거리에 둬야 한다.
Lv.10이 된 이후로 통통 튄다.
집중 관리를 해야 할 필요성이 생겼다.
"방송은…… 안 할래요."
"왜? 반항심의 표출이야?"
"이거 설정 안 했잖아요. 못생기게 나올 거 같아요."
여캠용 설정을 내가 했겠니?
유리야가 원래 좀 꿈과 희망이 가득 찬 소녀다.
여자애들이 으레 그렇듯 사진 이쁘게 찍고 싶어 한다.
"근데 어차피 너 캠 설정 못하잖아."
"잘하거든요! 선배보단 방송 선배거든요!"
"이런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 너 캠으로 보면 얼굴 찐빵 같애."
"흐에엥……. 선배 싫어."
-ㅋㅋㅋㅋㅋㅋ찐빵
-실물이 더 나음??
-남절이 피셜: 리야는 실물이 더 예쁘다
이거는 달래도 인정한 공식 오피셜이다.
삐진 척하면 얼굴을 호빵맨처럼 떼어먹는 수가 있다.
어렸을 땐 몰랐는데 지금 와서 생각하면 잔혹한 만화다.
"여기 딱 앉아서 게임해. 너 때문에 의자까지 샀다."
"싸구려 의자."
"볼따구 터트리기 전에 빨랑 앉아!"
자꾸 불만이 많아진다.
그리고 내 앞에서 아삭한 발언하다가는 언제 한 번 혼난다.
그에 반해 하비.
얼마나 파이팅이 넘쳐?
배우는 태도부터가 우수하다.
딱 한 가지만 빼놓고 말이다.
〈티몽 대위, 명을 받들겠습니다!〉
'…….'
하비가 자연스럽게 픽을 한다.
꼴도 보기 싫은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이어지는 게임은 이기고는 있는데 마음에 안 든다!
"괜찮아. 여기까지는 계획대로야."
-계획은 무슨ㅋㅋㅋㅋ
-대회에서 티몽시키게요?
-잼할 빼고 하비각 ㅇㅈ?
-ㄹㅇ잼할보다 잘할 수도 있어ㅋㅋ
아무리 잼할이 저조하긴 했어도 그 정도 취급 받을 건 아니다.
하비는 솔로 라인에 설 만한 실력까지는 되지 않는다.
심지어 챔피언도 티몽이라 애매하다.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 아니, 티몽 서폿으로 간다."
-??
-그냥 던져?
-티몽 서폿 좋지! 버섯으로 시야 장악함ㅋㅋ
대 SKY T1전을 향한 특수 작전을 실행한다.
========== 작품 후기 ==========
커피에 저 정도로 심오한 세계가 있는지 사실 문외한인 저는 모르겠습니다
커피물조절장인만이 아는 세계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