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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잼할과 잼구 -->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게 있다.
나는 복귀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
승강전에서 그럭저럭 선전하긴 했지만 그건 결코 전력이 아니다.
'2년이나 접으면 몇 달 정도로는 손이 안 풀려.'
군대에서 삽질하다 복귀한 유저의 말 못할 속사정이다.
피지컬은 돌아왔어도 게임 내 플레이는 다르다.
머릿속 생각이 딱딱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
2년이라는 공백 탓에 어긋난 감이 있었다.
승강전에서 되찾은 자신감과 연습량.
점점 물이 오르고 있다는 느낌이다.
파앗!
르풀랑의 W스킬 뒤틀림.
궁극기로 한 번 더 복사해 사용한다.
적 직트와의 거리를 한순간에 좁힌다.
─적을 처치했습니다!
전설의 출현!
표식과 사슬을 정확하게 긋고 빠져나온다.
일련의 콤보만으로도 썰렸다.
게임 시간 25분에 600에 달하는 주문력.
방금 전 킬로 20가량이 더 올랐다.
'2스택.'
KTX A팀의 미드라이너 쿠키.
간식 대용으로 다섯 번째 까먹었다.
이제는 돈도 안 주지만 테자이를 올린다면 다르다.
킬을 올리면 2스택, 어시스트를 올리면 1스택이 적립된다.
테자이의 영혼약탈자는 스택에 비례해 주문력이 오른다.
죽으면 스택이 증발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지만.
'어차피 이 게임은 내가 죽는 순간 져.'
솔로랭크에서 은근히 잦은 케이스다.
대회에서도 겪게 될 줄은 차마 몰랐다.
어차피 져야 할 리스크라면 배로 짊어진다.
그리고 캐리한다.
파앗!
파앗!
르풀랑은 시야를 취득한 상태에서 암살 능력이 좋다.
순간적인 두 번의 약진.
그리고 침묵과 사슬에 의한 연계는 가히 사기적이다.
조금이라도 반응이 늦으면 죽음으로 연결된다.
사앗…!
카직트에게 연결된 금빛 사슬이 팽팽하게 이어진다.
동시에 무언가가 터지며 죽음을 막는다.
주술포식자.
카직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지만 끝나지 않았다.
치지직…!
토옥.
주술포식자가 막는 건 순수한 마법 피해 뿐이다.
점화의 고정딜과 평타의 물리딜은 못 막는다.
그리고 상대는 보호막이나 힐포터가 없다.
〈곰이다!〉
대신 순간적인 이니시에 능하다.
배티가 또다시 점멸 궁극기를 박아온다.
내가 암살하는 순간을 노리고 있었나 보다.
쨍그랑!
같이 은신으로 잠입해온 토이치가 독병을 던지며 모습을 드러낸다.
스턴을 맞았다면 분신이고 나발이고 끔살이다.
맞았다면 그랬을 거란 이야기다.
'요즘 애들은 모르나 보네.'
왜 자꾸 나한테 헛궁을 쓰는 걸까?
고민을 해본 결과 아마 그래서 일 것이다.
가볍게 점멸로 피하며 터트린다.
터억!
파앗!
침묵의 표식과 뒤틀림의 연계.
기본적인 콤보지만 상대는 못 피한다.
서로 점멸이 빠진 상황이고 스킬쿨은 내가 먼저 돈다.
─전설의 출현!
사슬에 스치자마자 터져버린다.
서포터인 만큼 당연히 몸이 종잇장.
깜짝 이니시를 실패한 시점에서 요단강이다.
퍼엉!
패시브 분신이 터지며 바람과 함께 사라진다.
CC기가 없는 토이치는 더 이상 쫓아오지 못한다.
잘못 쫓다간 자신도 죽을지 모른다는 걸 아는 듯하다.
'이걸로 17 페이지.'
지금까지 테자이의 영혼약탈자를 읽은 숫자다.
이것만으로도 어지간한 1코어 이상이다.
주문력을 무려 156이나 올려준다.
하지만 진정한 진가는 20스택을 쌓았을 때.
그 순간까지 앞으로 세 페이지 남았다.
한국대 독서왕의 위엄을 여실히 떨쳐준다.
* * *
세상에는 우연이라는 게 있다.
혹은 인생 게임이라는 것도 있다.
슈퍼 플레이가 전부 계획적으로, 계산적으로 이루어지진 않는다.
〈저는 처음에는 잘 맞아 떨어졌구나. 혹은 집중력이 엄청 뛰어났구나 그렇게 생각했어요.〉
KTX 롤러코스터 A팀이 가져간 배티.
수차례 너프를 먹었음에도 기용되는 이유가 있다.
너무나도 당연했기에 클끼리 해설도 눈치채지 못했다.
〈배티의 점멸궁이 굉장히 매섭잖아요?〉
〈곰이다! 한 번 터지면 살살 녹아내리지 않습니까? 저는 작년 생각하면 아직도 아찔해요~.〉
알고도 못 피하는 강제 이니시.
쏘냐의 상위 호환으로 이름을 떨쳤다.
전무후무한 캐리형 서포터의 위엄을 보여줬다.
너프를 먹은 탓에 작년 만한 위용은 이제 떨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KTX 롤러코스터 A팀은 가져갔다.
라인전의 킬각과 더불어 안티 캐리.
르풀랑의 머리 위에 곰돌이를 선물해주기 위함이다.
그 시도는 이미 몇 번이나 이루어졌다.
전부 다 실패로 돌아가서 문제지.
─곰이다!
배티의 궁극기가 또다시 땅바닥을 불태운다.
노린 타이밍 자체는 완벽했다.
사냥감에 집중한 사냥꾼은 무방비 상태다.
르풀랑이 암살을 시도하는 순간을 정확히 노렸다.
즉발 스턴인 배티의 궁이 끼얹어졌다.
이를 반응하는 레전설이 이상한 거다.
〈배티 궁이 빠졌어요. 이러면 파프리카 프릭스는 이지선다를 제시할 수 있죠.〉
우리 여차하면 바론 친다?
확인하러 가는 길목은 위험지대다.
언제 어느 때 엄습해올지 모르는 르풀랑의 공포.
파앗!
코앞까지 접근하자 트라우마가 되살아난다.
스치는 순간 반항도 못하고 사르르르 녹아내린다.
카직트의 점멸과 궁극기 판단은 분명 틀리지 않았다.
〈근데 이렇게 다 빠지면 바론이 더 위험해지거든요? 심지어 르풀랑이 테자이 20스택이라…….〉
테자이의 영혼약탈자.
20스택시 주문력 증가 수치가 180이다.
그리고 쿨타임 감소 15%의 권능이 붙는다.
르풀랑의 암살에 날개가 달린다.
궁극기가 거의 일반 스킬처럼 쿨이 돌아간다.
시도하다 보면 누군가 한 명은 빈틈을 내준다.
터억!
퍼엉!
두 개의 표식이 터지며 금빛 사슬이 이어진다.
누군가가 된 선데이의 티바나.
탱커이기 때문에 암살 당한 위험이 가장 적다.
그러다 보니 돌출돼 있었고 표적이 된다.
한 가지 착각할 수 있는 사실이다.
이 정도 큰 르풀랑은 피아식별을 하지 않는다.
쿠와앙-!
체력바가 순식간에 검은 칸까지 내려간다.
깜짝 놀란 티바나의 궁이 뒤로 빠진다.
그와 동시에 배티가 점멸로 덮친다.
화르륵!
배티는 일반 스킬로도 스턴이 된다.
그 대신 범위가 좁고 데미지도 약하다.
하지만 스턴만 걸 수 있으면 녹이고도 남는다.
궁극기를 켠 토이치가 촹! 촹!
무차별 사격은 끝내 닿지 못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도 있었다.
〈〈조냐아~~!!〉〉
클끼리와 김은준 해설이 약속이라도 한 듯 목청 높여 외친다.
회심의 일격마저 가볍게 흘려버린다.
KTX A팀으로선 세상에서 제일 불리한 구도의 한타가 열린다.
딸피에 궁극기도 빠진 티바나는 탱킹을 못한다.
카직트도 진입각을 보기 애매한 상황이다.
나머지 딜러들이 잘 성장했으면 뭣 하겠는가?
크허엉!
덮쳐온 애꾸사자를 떨쳐내는 것만으로도 고전이다.
그 사이에 조냐가 풀리고 스킬쿨이 돈다.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이 눈에 들어온다.
토이치를 지키기 위해 전력을 쏟아붓고 있다.
KTX A팀의 진영은 점점 뭉치게 된다.
그 위로 정확하게 두 번 밟힌다.
〈더블 킬~! 광역딜 제대로 들어가면서 토이치, 배티 사망!〉
점멸 뒤틀림으로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다.
그 자리를 궁극기로 한 번 더 밟아버린다.
주문력이 이미 800이 넘은 르풀랑이다.
스킬 콤보 따위 고려 안 해도 그냥 세다.
딜러진은 글자 그대로 개미처럼 터진다.
살아남은 직트도 길게 연명하지 못할 듯싶다.
〈치비르 궁극기 때문에 도망 못 가죠! 파프리카 프릭스 진격합니다. 카직트 원통하겠지만 라인 클리어 안돼요. 게임이 끝날 가능성이 9할!〉
클끼리가 신나게 외친다!
미드에 고속도로가 쭉쭉 뚫린다.
그 기세는 억제탑 하나 정도가 아니다.
─포탑이 파괴되었습니다!
억제탑이 파괴되었습니다!
주위 아군의 이동 속도를 상승시키는 치비르의 궁극기.
이는 미니언 또한 해당된다.
한 번 흐름을 타자 멈출 수가 없다.
억제탑에 이어 쌍둥이 포탑, 넥서스까지 허물어진다.
경기장 수백 명의 관중들이 흥분감을 감출 수 없다.
그들 대부분이 파프리카 프릭스를 응원하기 위해 왔다.
KTX A팀의 팬들도 있겠지만 현장의 분위기가 증명한다.
기대했던 이변이 그대로 터지며 환호성을 자아낸다.
〈KTX가 유리함을 끌고 나가지 못했습니다. 특히 마지막 한타에서 배티가 속된 말로 던졌죠?〉
〈근데 저는 던질 만도 했다고 보는 게…… 슬슬 맞아줄 때도 됐거든요! 레전설 선수가 몸을 미끼로 실수를 유도했어요.〉
불리하게 시작해도 이긴다는 계산이었다.
레전설만 어떻게 잡을 수 있다면.
그 전제를 한 번도 이루지 못해 패배했다.
전체 스코어 16대 18.
마지막 한타를 제하면 KTX가 내내 앞섰다.
하지만 저 18이란 숫자에 레전설을 포함시키지 못했다.
상공 2만 피트에서 펼쳐진 아찔한 외줄타기는 끝끝내 성공을 거둔다.
〈MVP는 13킬 0데스 2어시 레전설! 팀원들이 전부 말린 상황에서 슈퍼플레이를…… 몇 번 성공시켰나요?〉
〈게임 내내 슈퍼 플레이만 했습니다. 안 했으면 이길 수가 없는 게임이었으니까요~.〉
진용준 캐스터가 궁금해서 묻는다.
김은준 해설도 대답을 하면서도 신통방통하다.
이걸 대체 어떻게 이긴 거지?
결과만 놓고 보면 하드캐리인데 그 과정이 너무 말도 안됐다.
〈하찬은 선수가 점멸 궁만 한 세~네 번을 꽂았어요. 그때마다 천지신명이 도운 건지 몰라도 전부 피했고요. 결과적으로!〉
〈이게 결과적인 건지 저는 아직도 헷갈립니다. 판단이 안 서요.〉
한두 번 정도야 운이나 판단력으로 비벼볼 수 있다.
마지막 한타에서 괜히 꼴아박았던 게 아니다.
한 대 정도는 맞아줄 때 됐잖아!
안 맞았고 게임을 끝내는 결정타로 작용했다.
클끼리가 조심스레 가설을 제기해본다.
어차피 자기가 꺼낸 이야기는 아니다.
〈피맥 선수가 이런 말을 한 적이 했었어요. 어리면 심장박동수가 빨라서 시간을 느리게 인식한다. 그래서 피지컬이 좋을 수밖에 없다.〉
기자와의 인터뷰 때 저지른 4차원적 사고다.
하지만 워낙 피지컬이 좋은 피맥이다.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
웃어 넘기는 수준으로 짚어볼 만하다.
실제 장면을 보니 간담이 서늘해진다.
저런 입롤 같은 플레이가 정말 가능한 건가?
〈근데 레전설 선수는 프로필상 스물세 살인데요? 클끼리 해설과 두 살밖에 차이 안 나요?〉
〈저는…… 마음의 나이가 들었기 때문에 피지컬 저하는 이해를 해주셔야 합니다.〉
-마음의 나이ㅋㅋㅋㅋ
-얼굴 나이는 ㅇㅈ하자너~
-추템아 클하다
-군대 전에는 얼마나 미쳤던 거야ㄷㄷ
어째서 레전드에 전설이 곱해졌는지 증명하고도 남는 경기였다.
하지만 E-스포츠에서 증명이란 끊임이 없다.
아무리 잘하는 선수도 한 번 미끄러지면 조리돌림의 대상이 된다.
이름값 만큼이나 책임도 무겁다.
레전설이라는 세 글자는 쉬이 지탱할 무게가 아니다.
오죽하면 처음 프로 등록을 했을 때 아이디를 바꾸는 게 어떻겠냐?
권유를 했었을 정도다.
실제로 몇몇 프로들은 바꾼다.
아마추어 때 유명했던 나머지 부담감을 가진다.
쟤 아마추어 때 그렇게 나대더니 프로 데뷔하니까 ㅋ?
한 소리가 나올까봐 미리 쫀다.
〈인터넷 커뮤니티에 보면 레전설해버렸다는 드립이 있는데…… 이번 게임은 그렇게 설명이 안되는 경기력이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어지는 두 번째 세트, 여전히 KTX A팀이 유리합니다.〉
-클끼리 레전설 까더니 정신 못 차렸나?ㅋㅋ
-서로 훈훈하게 청산했지 않나?
-까는 게 아니라 클끼리 말이 맞음!
-레전설 안 했으면 그냥 지는 게임이었어~
더불어 상대의 실수도 적지 않게 컸다.
레전설의 기량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하지만 같은 실수를 두 번 안 하니까 프로게이머다.
로드 오브 로드는 결국 팀 게임.
양팀의 기량 차이는 첫 번째 세트로 증명됐다.
KTX A팀이 크게 무리만 하지 않으면 이기고도 남는다.
-무난하게 후반만 가면 KTX가 이기는 그림 아님?
-작정하고 용준하면 게임은 이기지
-진짜 그렇게 나오면 너무 치졸한데ㅋㅋㅋ
마침 이번 스프링 시즌의 메타도 그러하다.
강팀의 이점을 살리고자 하면 살릴 수 있다.
치졸하더라도 일단 이기고 자존심을 지켜야 한다.
이어진 두 번째 세트의 밴픽.
르풀랑을 밴한 KTX A팀의 판단은 가히 정석이다.
안티 캐리의 한타 조합 구성도 옳았다.
한 가지 가늠하지 못했을 뿐이다.
========== 작품 후기 ==========
재밌게 봐주시는 독자님들 감사합니다.
추천과 코멘트& 원고료 후원은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