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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전설의 재림 -->
프로 게임과 아닌 것을 나누는 가장 큰 기준.
그리고 로드 오브 로드의 절반을 차지하는 것.
바로 선택과 금지, 밴픽을 가리킨다.
〈야흐오…… 역시 자르네요. 파프리카 프릭스의 미드라이너 레전설 선수에 대한 저격 밴입니다.〉
파급을 몰고 왔던 멸망전.
그 해설을 맡았던 클끼리는 똑똑히 기억한다.
당시에는 BJ유리야남친절대아님, 현재는 레전설이라는 불리는 그의 야흐오를 말이다.
유튜브를 통해 영상이 퍼졌던 만큼 일반 시청자들 사이에서도 유명하다.
이전부터 방송에서 소소하게 언급되기도 했다.
페닉스 썬더는 그 하나로 끝나지 않았다.
미드라이너 레전설의 야흐오.
원딜러 인성제로의 이즈레알.
탑라이너 김재슥의 말카림.
해당 선수의 아이덴티티라고 볼 수 있는 챔피언이다.
위협이 될 수 있으니 밴 단계에서 전부 잘랐다.
하지만 절대 착각해서는 안된다.
〈소위 말하는 시그니처 픽들을 전부 봉인했네요. 이건 굉장히 현명한 판단입니다.〉
〈잘하는 챔피언을 못하게 됐으니 얼마나 당황스럽겠습니까? 궁수가 활을, 검사가 검을 못 쓰고 있는 꼴이에요!〉
해설자의 설명을 간단하게 정리하는 것이 캐스터의 역할이다.
진용준 캐스터의 말대로 특기인 무기를 못 쓰게 됐다.
고작 그 정도로 넘어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이렇게 저격밴을 하면 프로게임단들은 다른 OP챔피언을 가져와서 균형을 맞춥니다. 그런데 파프리카 프릭스는 못하고 있죠. 아마추어티를 못 벗었다는 반증입니다.〉
클끼리의 해설이 오늘 따라 유난히 가시가 돋친 듯하다.
신랄하게 느껴지지만 결코 틀린 말은 아니다.
운전 면허증을 땄다고 바로 건실한 운전자가 되는 걸까?
당연히 그렇지 않다.
도로연수도 하고, 초보운전 딱지도 떼는 등 경력이 쌓여야 한다.
넓은 의미에서 프로게이머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첫 출전인 파프리카 프릭스는 사실상 아마추어팀이나 다름없다.
프로게임단이면 할 수 있는, 해야 하는 기본기.
파프리카 프릭스는 아직 갖추지 못하고 있다.
밴픽 단계에서 어쩔 수 없는 손해가 누적된다.
〈설렁탕을 사왔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OP가 살았으면 가져가야 하는데 뺏기고만 있어요!〉
진용준 캐스터가 답답한 마음에 소리친다.
밴픽은 누가 봐도 페닉스 썬더가 이겼다.
클끼리가 페닉스 썬더의 본심을 말해준다.
〈페닉스 썬더는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프로의 세계에 온 걸 환영한다.〉
-자라나는 새싹팀에게 너무 박한 거 아니야?
-클끼리가 레전설 싫어하잖아ㅋㅋㅋ
-멸망전 때 겁나 까긴 했지
-알고 보니 레전설 본인이었던 거임ㅋㅋ
공식 방송에서는 차마 말하지 못할 사연이 있었다.
개인적인 원한!
까지는 아니더라도 섭섭한 마음이 있을 만도 하다.
그 심정이 해설에 묻어나는 듯한 건 기분 탓만은 아닐 것이다.
파프리카 프릭스가 얼마나 수세에 몰렸는지.
실상이 적나라할 정도로 대중에게 전달된다.
그리고 금일 경기의 해설자는 한 명 더 존재한다.
〈전체적인 운영에서도 파프리카 프릭스가 고전을 면치 힘들 것 같습니다. 왜냐! 페닉스 썬더는 오랜 경력을 자랑하는 노련한 게임단이거든요!〉
잠잠하던 강빈 해설도 조냐 상태를 깨고 한 마디 거든다.
평소 과묵하기 그지없는 그다.
하지만 이따금 내뱉는 한 마디는 날카로운 일침이 된다.
〈페닉스 썬더는 승강전에서 만큼은 항상 경기력이 좋았습니다. 막말로 승강전의 페닉스 썬더는 다른 팀으로 봐야 돼요.〉
〈크흐흐…… 승강전의 여포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죠. 오늘 파프리카 프릭스, 신고식이 매서워질 기미가 벌써부터 보입니다.〉
-클끼리 너무 좋아하는데?
-레전설 거품 빠지는 거 기대하나 봐
-근데 진짜 밴픽 말아먹긴 했다ㅋㅋ
-아마추어팀인데 어쩔 수 없지
사적인 감정이 섞여있을 수도 있다.
파프리카 프릭스 입장에서 서운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해설이 편파적이라는 소리는 결코 아니다.
페닉스 게임단은 경력 하나는 오래된 게임이다.
처음 출범을 했던 게 2012년의 스프링 시즌.
이후로 롤챔스의 터줏대감으로 자리 잡았다.
이따금 미끄러지지만 다음 시즌 되면 이내 올라간다.
그 이상으로 올라가지 못해서 안타까울 뿐.
말하자면 E-스포츠계의 한화 이글스다.
〈페닉스 썬더도 이제는 다른 모습을 보여줄 때가 됐어요. 물론! 파프리카 프릭스도 신인의 기세를 살린다면 이변도 불가능할 것 없습니다! 양 팀의 경기 시작~~~~~! 하겠습니다!〉
진용준 캐스터가 양팀의 관점을 짤막하게 정리해준다.
특유의 살짝 늘어지다 담백하게 감아주는 끝맺음.
우렁찬 외침과 함께 승강전 첫 번째 경기가 시작된다
* * *
밴픽.
E-스포츠 관계자가 아니더라도 안다.
프로 리그에서 얼마나 중요도가 높은지.
롤챔스만 시청했어도 모를 수가 없는 사실이다.
'근데 알아도 어쩔 수가 없어.'
밴픽을 잘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코치와 감독이 머리를 싸맨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선수가 챔프폭을 넓힌다.
까놓고 말해서 우리팀은 오합지졸이다.
어쩌다가 상황이 맞아서 롤챔스 나왔을 뿐이다.
선수 개개인은 지금도 아마추어나 다름이 없다.
챔프폭이 넓을래야 넓을 수 없다는 이야기다.
밴픽 단계의 손해는 애초부터 감수의 대상이었다.
즉, 소거법으로 따졌을 때 남은 건 코치와 감독인데.
'그것도 없지. 뭘 바래.'
내가 나름대로 노력은 했다.
근데 세상에는 노력해서 될 게 있고, 안될 게 있다.
전문 코치도 아닌 내가 변수와 조합까지 고려하며 밴픽을 짠다?
터무니없는 요구다.
나는 잘하는 게이머지, 유능한 코치가 아니다.
하지만 방향을 한 가지로 좁힌다면 불가능할 것도 없다.
화락!
챠라락!
그림자를 깔며 스킬쿨을 돌린다.
특이할 것 없는 자드의 라인전 견제다.
나는 맞히려고 하고, 상대는 피하려고 노력한다.
'근데 못 피하지.'
기본기가 안 잡힌 탓에 어쩔 수 없이 밴픽을 졌다.
마찬가지로 이 또한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상대와 나의 근본적인 실력 격차.
스킬샷의 정밀도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이것이 바로 AOS게임이 가지는 근간이다.
같은 여건이라도 존재감이 확연하게 갈린다.
구오오……!
체력을 깎아놓고 자연스럽게 잡는 킬각.
자드를 할 때 정말 흔하게 있는 라인전 구도다.
물론 팀게임에서는 반드시 신경 써야 하는 요소가 있다.
─FFs JustLightThis님이 리심을 지목!
바로 정글러의 백업이다.
솔로랭크에서는 하필 지금 정글이 오네.
둘러대겠지만 소통을 하는 팀게임은 필연이다.
마치 바둑처럼 상대의 움직임을 예상한다.
아군 미드라이너의 체력이 별로 없다.
빨리 미드에 가서 백업을 봐줘야지.
'그렇게 판단하는 게 틀리진 않아.'
그런데 AOS게임은 바둑과는 한 가지 다르다.
그래픽 같은 걸 말하는 게 아니라 판단.
옳은 판단이 1초 후에 틀린 판단이 될 수 있다.
챠라락!
본체, 그림자, 궁극기 그림자.
표창이 세 방향에서 쏘아진다.
코리아나는 지레 겁먹어 스펠을 쓴다.
보호막으로 데미지를 한 차례 씹겠다.
하지만 쏘아진 방향은 그쪽이 아니다.
보다 위, 리심이 백업 온 방향이다.
서걱!
세 개의 표창이 한 점에 교차한다.
동시에 점멸 평타를 박아 넣는다.
체력이 절반 이하인 적에게 추가 피해.
자드의 패시브가 묵직하게 터진다.
호롱!
콰드득!
코리아나가 궁극기를 쓰지만 상황은 종료된 후다.
그리고 그렇게 정직하게 쓰면 안된다.
궁극기 그림자로 가볍게 피해버린다.
─적을 처치했습니다!
실피가 남았던 리심은 점화에 의해 타들어갔다.
미드에 비해 레벨이 낮을 수밖에 없는 정글러.
순간적으로 집중된 화력을 버틸 수 없다.
살아남은 코리아나도 스킬을 낭비했다.
평타 싸움이 되자 전세가 역전된다.
2대1을 했음에도 오히려 도망가는 신세.
"야레야레, 미드 정글 노스펠."
〈쿨한 척 하지 마라 쳐때리기 전에.〉
"……."
신랄하네 정말.
참고로 여기 롤챔스다.
방송 심의에 어긋나는 표현은 안 썼으면 좋겠다.
'근데 맞아. 저래야 춘자지.'
지난 번 일은 분명 기억의 혼선일 것이다.
달래의 걸걸한 입담 덕.
그리고 내 슈퍼 플레이 덕.
싸늘했던 부스 안의 온도가 다소 올라간다.
〈미드 슈퍼 플레이 좋긴 한데 조합 차이 고려하세요. 긴장 풀다가 한 번 죽으면 비벼지는 거 순식간입니다.〉
저라딧이 겁나 폼 잡는 목소리로 한 마디 한다.
미드 차이로 정글 주도권을 잡자 신났다.
하지만 틀린 소리도 아니긴 하다.
'밴픽에서 손해를 보고 시작했으니까.'
밴픽 단계에서의 손해.
여러가지 있겠지만 가장 큰 건 한타력 차이다.
상대의 조합은 정식 한타에서 위력이 대단하다.
티바나와 리심이 진입하며 코리아나가 지원한다.
그려지는 그림이 상상만 해도 아득할 정도다.
어디까지나 한타가 성사 됐을 때 말이다.
'한타가 좋은 조합이면 한타를 못하게 만들면 되잖아.'
당연히 쉽게 시도하기는 힘든 해결책이다.
프로 리그에서 괜히 안정감을 추구하는 게 아니다.
밴픽의 중요도가 괜히 항상 거론되는 것도 아니다.
'근데 그건 실력 차이가 어느 정도 날 때의 이야기고.'
나는 롤에서 도전자의 입장이다.
처음으로 프로 리그의 문을 두들긴다.
그 말이 모든 돌다리를 두들겨 건넌다는 소린 아니다.
딱 봐도 스티로폼인데 굳이 주의할 필요 있어?
상대의 조합은 물론 이상적이다.
너무 이상적인 나머지 당연한 사실을 잊고 있다.
* * *
신고식, 다른 말로 세례를 맞는다는 표현이 있다.
2부 리그에 머물던 게임단들.
성적을 내서 승강전에 올라가면 보통 우쭐한다.
우리 정도 실력이면 충분히 먹히고도 남겠지?
아니, 이러다가 롤챔스 우승하는 거 아니야?
열에 아홉은 좌절하게 된다.
〈마치 모 해적 만화의 위대한 항로처럼 말입니다. 막상 가면 꿈이 아니라 현실을 경험하게 되죠.〉
경기 시작 직후, 클끼리가 쳤던 드립이다.
남자 열 명 중 아홉은 알고 있을 만화다.
관중석 여기저기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비유가 웃긴 거지 설명은 정확하다.
그 자신이 프로였던 만큼 현실을 안다.
수많은 프로 새싹들에게 조언도 해줬다.
1부 리그, 롤챔스팀들이 가지는 저력.
최약체조차 2군팀에 비할 바가 아니다.
아예 격이 다를 정도로 처참하게 발라버린다.
이를 보고 세례를 받는다.
진짜 프로 리그가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2군팀이 롤챔스에 도전하는 건 그 한 번의 좌절을 겪은 이후다.
─해일이당!
그 세례를 우리가 겪게 해주겠다.
페닉스 썬더가 물길을 끼얹는다.
인어의 파도가 미드 라인을 덮친다.
그림자가 빠진 자드는 피할 퇴로가 없다.
구오오……!
최소 점멸은 뺄 수 있는 상황.
결과적으로 점멸이 빠지긴 했다.
그런데 좀 이상한 방향으로 빠졌다.
피하기는 커녕 오히려 역주행한다.
자드가 그림자와 위치를 바꾸며 점멸.
궁극기로 물을 끼얹은 인어를 잡아먹는다.
지나친 성장의 격차.
미드와 서포터의 레벨 차이.
잠깐 스쳤을 뿐인데 초밥이 되고 말았다.
〈거미여왕이 퇴로까지 봐주면 추격은 힘들겠고……. 페닉스 썬더가 또다시 일방적으로 손해를 보게 됐네요.〉
클끼리의 말미가 무겁게 떨어진다.
이런 구도를 생각하고 한 말이 아닌데.
세례는 커녕 체면 부지도 못하고 있다.
현재 게임 스코어 11대 3.
누가 봐도 한 눈에 보일 정도다.
파프리카 프릭스가 승기를 잡았다.
〈물론 아직 승패가 정해진 건 아닙니다. 결과적으로 손해가 났을 뿐이지 백업이나 로밍은 페닉스 썬더가 훨씬 예리해요. 운영 단계로 넘어가면 충분히 만회가 가능합니다.〉
-클끼리 허겁지겁ㅋㅋㅋㅋ
-응 레전설이 다 때려부수고 있어
-구차하다 구차해…… 그냥 잘한다고 좀 해주지
구차하긴 하지만 틀린 이야기도 아니다.
롤이라는 게임은 솔킬 땄다고 땡, 라인전 이겼다고 땡이 아니다.
이후 게임을 어떻게 굴리냐가 중요하다.
그 점에 있어 페닉스 썬더는 강점이 있다.
경력이 있는 게임단인 만큼 노련미가 있다.
운영으로 격차를 좁히며 한타 역전을 꾀한다.
─FFs 레전설님을 도저히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럴 수 있는 여지를 아예 주지를 않는다.
자드의 암살에 속속들이 잡아먹힌다.
대놓고 보임에도 도저히 막을 수가 없다.
경기의 향방을 논했던 관점.
틀렸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이다.
위대한 항로에 들어가도 주인공은 일행은 잘 먹고 잘 살았다.
========== 작품 후기 ==========
재밌게 봐주시는 독자님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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