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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전설의 재림-121화 (12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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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용산에 위치한 E-스포츠 스타디움.

스타크래프트부터 이어져 내려온 E-스포츠의 성지다.

오프게임넷에서 진행하는 경기의 대부분은 이곳에서 열린다.

금일 진행되는 롤챔스 승강전 또한 마찬가지다.

물론 승강전 경기는 팬들의 관심 밖이다.

승강전에 왔다는 것 자체가 S급팀은 아니라는 소리니까.

〈그런데 오늘은 정말 너무 많은 팬분들이 찾아와 주셨죠?〉

〈지금 현장 분위기가…… 과거 맛밤의 내전을 방불케 하는 수준입니다.〉

같은 게임단에 속한 두 팀의 경기를 내전이라 부른다.

맛밤 내전은, 얼밤과 불밤의 경기.

롤챔스의 양대 산맥으로 불리며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한 번 성사됐다 하면 양쪽 팬들의 신경전이 벌어졌다.

그렇게 롤 커뮤니티에서 1차전.

경기날 현장에 찾아와 2차전.

E-스포츠 스타디움이 발칵 뒤집힐 정도로 인파가 동원된다.

현재 경기를 해설하는 클끼리가 그 맛밤 내전의 당사자다.

얼밤의 정글러를 해먹었던 만큼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당사자의 입에서 동일한 표현이 나와버렸을 정도다.

〈스태프분들이 총출동해서 현장 정리를 하고 있습니다. 방송이 다소 늦어지는 점 고개 숙여 양해 부탁 드리겠습니다.〉

고작해야 롤챔스의 승강전.

이렇게 많은 팬분들 찾아올 거라고는 상정 자체를 못했다.

그러다 보니 스태프 배치가 늦었고, 현장에 다소 혼선이 왔다.

때 아닌 성화에 진용준 캐스터가 고개까지 숙이며 양해를 구한다.

-경기 치르기도 전부터 「용준」해버리네

-용준을 몰고 오는 용준좌……

-근데 왜 저렇게 직관을 많이 간 거야?

경기가 늦어진다는 건 시청자들 입장에서 짜증이 날 수 있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좀 다르다.

어째서 경기가 늦어진 건지.

도리어 그 이유가 화제를 몰고 온다.

〈시청자분들도 궁금해 하고 계시겠지만 사실 저희가 더 궁금해요.〉

〈E-스포츠가 하루이틀 이어져온 게 아닌 만큼 항상 예측을 합니다. 원활한 진행이 될 수 있도록 스태프들을 넉넉하게 배치 하거든요.〉

10년 이상 오프게임넷을 지탱해온 대들보다.

진용준 캐스터의 말을 안 믿는다면 누구 말을 믿을까?

오늘은 정말 1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수준의 방송 사고다.

승강전, 그것도 비주류에 속한 팀.

많이 와봤자 100명 내외겠지.

그 다섯 배가 넘는 관중들이 객석을 까맣게 채우고 있다.

한참 전에 용산 E-스포츠 스타디움의 한계치를 초월했다.

심지어 실시간으로 더 오고 있다는 속보까지 들린다.

찾아 와준 건 당연히 감사하지만 대체 왜?

〈사실 출근하는 길에 인파가 너무 범상치 않길래 물어봤어요. 대학교 친구분과 오신 듯한 한 팬분이 친절하게 대답을 해주시더라고요.〉

너무 궁금한 나머지 물어본 해설자가 있었다.

클끼리가 현재 방송 사고의 이유를 알고 있다.

들어보니 나름대로 납득은 되는데…….

-아, 솔직히 ㅇㅈ

-나도 알았으면 가는 건데 까비;

-지금도 늦지 않은 거 아닐까? 입석 가능?

한 마디로 연예인 보러 왔다는 느낌이다.

프로게이머도 공인인 만큼 어떻게 보면 연예인이다.

그런 부류의 이야기와는 조금 다르다.

〈아~ 오늘이 파프리카 프릭스의 방송 첫 경기죠?〉

〈정식으로 엔트리를 올린 지가 2주일이 채 안된 팀이니까요. 그런데 그 엔트리에 이름을 올린 선수 한 명이 지나친 기대를 불러일으킨 모양입니다.〉

흔히 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오늘이 아니면 언제 또 기회가 올지 모른다.

칼을 갈고 준비하던 팬들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

-저거 다 물소 새끼들이었어……?

-여캠 실물 보러 간 거였구만ㅋㅋ

-보고 싶긴 하다. 현실에서 여캠 보면 어떤 느낌일까

파프리카 프릭스.

이름 그대로 파프리카TV가 후원한다.

그래서인지 선수 한 명이 무려 여캠이다.

게임 잘하는 털털한 누나.

그런 느낌이 아니라 순수 100% 진짜 여캠 말이다.

여신급 미모를 자랑하는 BJ달래가 현장에 강림하신다.

애청자층도 여캠 중에서는 상당히 두터운 편이다.

그런데 롤여캠을 하며 신규 시청자까지 유입됐다.

현재 용산 E-스포츠 스타디움에는 물소들이 한가득.

〈저는 개인 방송으로 보고 왔습니다. 살짝 운명을 느낄 뻔했어요.〉

〈큰일 날 소리를 하네. 운명이요?〉

〈다른 게 아니라……이분 경기를 해설한다는 운명 말입니다.〉

중계석에도 한 명 앉아있었다.

클끼리가 진용준 캐스터의 타박을 듣는다.

파프리카TV의 개인 방송을 하는 만큼 볼 수도 있는 노릇이다.

아무튼 여캠의 실물을 보러 온 물소들 때문에 현장이 난리다.

다소 지체됐을 뿐이다.

이윽고 현장 정리가 완료되며 금일 첫 번째 경기의 막이 오른다.

* * *

"쟤네 진짜로 여캠 쓰는데요?"

"여기가 무슨 공중파 예능 프로그램인 줄 아나 봐~."

현재 롤챔스 승강전을 준비하고 있는 한쪽 부스다.

페닉스 썬더의 선수들이 어이 없다는 듯 중얼거린다.

고개를 조금만 들어 올려봐도 상대편 부스가 보인다.

그 부스 안에 조막만한 얼굴의 미녀가 계신다.

여성 스태프라면 오~ 왜 이쪽 부스는 안 오시나?

이야기가 오갔겠지만 스태프가 아니라 무려 선수다.

"끝나고 악수라도 한 번 권해볼까?"

"아서라. 니랑 놀 레벨 아니다."

"그럼 너랑은?"

"나 정도면 악수는 받아주지~."

"미친 새끼. 꼴값 떨고 있네."

경기를 앞두고 장비를 세팅 중인 선수들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광경이다.

긴장감이 하나도 엿보이지 않는다.

낄낄대며 농담 따먹기에 열중이다.

"얘들아, 집중 좀 해라 집중 좀."

"알겠습니다 감독님! 빨리 이기고 마저 떠들게요."

"그거 좋다!"

감독인 이승철이 한 차례 제지를 해도 분위기는 바뀔 줄 모른다.

아니, 애초에 이 분위기의 절반을 감독이 유도했다.

상대가 얼마나 만만한 팀인지.

오늘 경기가 얼마나 따놓은 당상인지.

전력 분석을 기초로 낱낱이 해부하여 알려줬다.

선수들로서는 간만의 꽁승에 들떠버린 것도 무리는 아니다.

'연습도 제대로 했으니 조금 기합 빠지는 정도로 문제 없겠지.'

어떤 일이든 다 관점의 차이다.

긴장을 푸는 것이 경기력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

무엇보다 선수들의 승부 욕구가 한껏 자극된 상태다.

20대 남자들이 으레 그렇듯 여자 앞에서 폼 잡고 싶다.

최소 체면 구길 일이 생기는 건 사양이다.

게임에 들어가면 절대 싸지 않기 위해 열심히 할 것이다.

"근데 레전설이라는 상대 오긴 왔나요?"

"글쎄…… 아직 안 보이네."

오늘 경기 엔트리에는 분명 있다고 확인했다.

선수의 물음에 이승철 감독도 고개를 갸웃한다.

그도 그럴게 상대편 부스에 선수석이 하나 빈다.

'잠수를 타주면 우리 입장에서는 고맙겠지만.'

주의해야 할 변수가 있다면 단 한 명.

최근 롤 커뮤니티에서 입방아에 오른다.

레전설에 대해서는 이승철도 들어본 바가 있다.

감독의 자리에 있는 이상 모를 수가 없다.

감독이 하는 주요 업무가 바로 스카웃이다.

어떤 선수를 우리 게임단에 받아들여야 할까?

롤이라는 E-스포츠는 역사가 오래되지 않았다.

2012년 초에 처음 국내 대회가 열렸다.

그런 만큼 인재를 발굴하는 작업이 쉽지 않다.

처음에는 당연히 솔로랭크에서 물색했다.

하지만 그런 건 다른 게임단들도 한다.

인적 자원이 부족하니 바깥으로 눈을 돌린다.

'박다균 자식이 대박을 칠 줄 누가 알았겠어.'

현재는 SKY T1의 감독을 지내는 녀석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일개 선수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다 신생 게임단의 감독으로 발탁돼 카오스의 인맥으로 게임단을 꾸렸다.

코웃음을 쳤지만 예상을 뛰어넘어 대성공.

이제는 명실상부 세계적인 게임단의 감독이다.

그 이후로 카오스 선수들을 캐내는 게 업계의 밈이 되었다.

'레전설은 요주의, 그것도 초요주의 후보야.'

전설이라는 말로도 부족할 정도의 인재다.

어디로 어떻게 튀어도 이상하지 않다.

물론 그래봤자 결국은 개인.

발목에 감은 족쇄도 보통 무거운 게 아니다.

경기는 십중팔구, 아니 십중십십은 이긴다.

게임단이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태라 변수가 생기는 게 달갑지 않을 뿐이다.

'만약 온다면 경기를 이긴 후에 스카웃을 하는 흐름도 괜찮겠는데?'

어느 쪽이든 오늘 경기는 자신들 페닉스 게임단의 큰 전환점이 될 것이다.

느긋하게 경기에 임하는 순간을 기다린다.

이윽고 시간이 됐다.

규정에 의해 상대의 지각이 확정되기 직전.

"쟤가 레전설인가?"

"오긴 왔나 보네."

"아마추어팀 아니랄까봐 정말 가지가지들 한다~."

소문의 레전설로 유추되는 선수가 도착했다.

상대편 부스에서 다소 소란이 일고 있다.

유리창 너머로 적나라하게 상황이 보인다.

안 그래도 풀려있던 분위기가 더욱 늘어진다.

레전설이고 뭐고 기본 자세가 안돼있네.

경기 시간 직전이 되어서야 들어오고 앉았다.

"얘들아."

"감독님이 집중하랜다!"

"집중해서 깔끔하게 두 세트 이기고 끝내자."

제지를 하는 감독이나 선수들이나.

긴장감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실력이 좋다 쳐도 저 정도로 막장이면 오히려 악영향만 끼치겠어.'

한 때 전설이라고 불린 게이머의 말로.

이승철 감독은 코웃음 쳤다.

* * *

변명이라는 건 당연히 알고 있다.

근데 진짜로…… 리얼루다가…….

중요한 날에 갑자기 일이 꼬일 때가 생긴다.

누구나 한 번씩은 경험해보는 일이다.

'오늘 또 할 줄 상상이나 했겠니.'

실수로 가스불을 켠 채 외출하고.

다시 들어갔는데 가방 놓고 나오고.

지하철 시간이 간발의 차이로 밀려버리고.

인생 살면서 3년에 한 번 할까 말까 한 실수다.

이 구차한 사정을 설명한다고 과연 이해해줄까?

당연히 그럴 리도 없을 테고 할 시간도 없다.

부스에 도착하자 들은 소리는 딱 한 소리.

"끝나고 보자 진짜."

부스의 문 바로 앞 의자에 달래가 앉아 있었다.

잔뜩 인상을 구긴 채 험악한 목소리로 소리친다.

다른 팀원들도 저마다 한 마디 하고 싶은 기색이었지만 이내 고개를 젓는다.

"경기 당일까지 정말 대단하십니다. 빨리 앉아서 세팅이나 하십시오."

인성제로의 말대로 일단 세팅을 하는 게 급선무다.

뒤에 서있는 심판들이 은근하게 눈치 준다.

그래, 늦은 입장에서 경기라도 하는 게 용한 거지.

"저기 님들. 얘들아. 늦어서 미안해요."

"거 미안하면 말로 하지 말고 캐리나 하십시오."

인제가 잔뜩 짜증이 차서 대꾸한다.

얘가 정말로 솔직하지 못한 애다.

이런 상황에서는 말이라도 해주는 게 고맙다.

"캐리하지. 밴픽도 다 짜왔어."

"그걸 믿으라고 하는 말이에요? 내가 형만 아니었으면 진짜로 한 대 쳤어."

멸망전 때랑 다름이 없는 분위기다.

굳어있던 부스 안의 분위기가 조금은 풀린다.

피식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심판들에게까지 들려온다.

'그래, 맞아도 할 말 없는 짓 하긴 했지.'

일주일간 잠수를 타다가 모습을 드러냈는데 그마저도 지각을 한 셈이다.

물론 혹시라도 팀 쪼개지면 어떡하지.

공중분해될까봐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만에 하나 그렇게 된다면 염치없더라도 나타나서 말려야 하니까.

다행히 내 뒷담 까면서 재밌게들 연습하더라.

연습하는 것을 보니 나름 기본 틀은 잡혔다.

'물론 그래봤자 턱도 없이 부족하지만.'

게임의 관점은 하나다.

내가 잘해야 한다.

그것도 무지 잘해야 한다.

웬만큼 잘해서는 턱도 없다.

"염치가 무지 없지만 팀장으로서 철판 깔고 피드백 좀 할게요."

"줫대로 하십쇼~ 어차피 줫대로 할 거잖아요."

"아, 빨리 하기나 해요. 욕은 나중에 얻어 먹으시고."

저라딧도 말문이 트였는지 한 마디 거든다.

내가 해주고 싶은 말은 별 거 없다.

"님들 연습하는 거 봤는데…… 겁나 개판이던데요? 그따구로밖에 못해요?"

"뭐요!?"

"화~나 진짜 안될 양반이네."

"무릎 꿇고 빌어도 모자를 마당에 도발을 쳐하세요?"

아니, 도발하는 게 아니라 팀장으로서 진실된 피드백이다.

당신들 겁나 못한다고요.

주제 파악 못하면 진다고요.

"저 띠껍죠? 때리고 싶죠? 근데 당신들 전부 저보다 못하죠? 그러면 말 들어요 그냥."

"저래서 쓰레기 소리 듣고 다녔구나?"

"나는 레전설 몰랐는데 오늘로 확실하게 알고 가겠다. 다시는 형이라고 부르나 봐라."

나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달래만 혼자 피식 웃는다.

나머지 세 명은 잔뜩 흥분해서 한 마디 한다.

팀내 민심이 바닥을 친 상황에서 첫 번째 세트가 시작된다.

#용준하다- 게임이 오래 가서 퇴근 시간이 늦어짐

========== 작품 후기 ==========

올리고 보니 오늘이 살짝 암 걸리는 파트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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