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 아침 드라마 -->
나름대로 계산 하에 내린 판단이다.
그도 그럴게 어색하다.
다시 만나면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
'솔직히 살짝 두렵기도 해.'
지은 죄가 많은 사람은 깃털만 떨어져도 지레 놀란다.
일평생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았건만.
한 여자에 한해서는 많이 찔린다.
신변에 위협을 느낄 지경이다.
"헐! 저 안 늦었어요. 선배가 너무 먼저 온 거에요. 진짜에요."
얘 말고.
유리야가 핸드폰을 꺼내서 자신의 무죄를 주장한다.
내가 시간에 민감한 편인 거지 융통성이 없는 건 아니다.
"괜찮으니까 촐싹대지 말고 있어봐."
"진짜요? 안 때릴 거에요?"
"안 때려."
"진짜 진짜요?"
나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말지어다…….
평소 같았으면 짜증이 나서라도 때렸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만큼은 유리야가 내 편이 돼줘야 한다.
'아직 폭탄은 도착도 안 했어.'
대회라는 건 단순히 밖에 나가 게임을 하고 오는 게 아니다.
현장의 느낌, 프레셔 기타 등등.
아무튼 집구석에서 컴퓨터 하는 거랑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래서 팀원들끼리 모여 결승전 관람을 가보기로 했다.
그런데 온라인 지인들이 늘상 그렇듯 약속 안 지킨다.
불참 희망자들의 변명은 대략 이렇게 정리된다.
당일이 되자 연락이 끊긴 사람이 한 명.
대회 경험 있어서 안 가도 된다는 사람이 한 명.
남들이 안 가니까 자기도 안 가겠다는 사람이 두 명.
'단합력이 정말 훌륭해 우리팀.'
고등학교, 대학교 새내기 때 열댓 번도 더 경험한 듯한 코스다.
딱히 놀랍지는 않지만 문제는 그거다.
원래 무리에 섞여서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만들어볼 생각이었다.
그 무리가 해체되자 방패막이할 사람이 없다.
달래랑 둘이 만나는 건 때려죽여도 사양이다.
금일 롤챔스 직관에 유리야를 부르게 된 이유다.
"이거 먹어봐요. 맛있어요."
"알아서 먹을게."
"히잉……."
"아, 줘봐."
카페 안에서 기다리는 중이다.
유리야가 디저트 케이크 하나를 내민다.
그런 걸 먹고 싶은 기분은 아니지만 먹어준다.
'……맛이 안 느껴져.'
상황이 너무 심각해서 미각도 제기능을 안 한다.
그래도 일단 먹어줘야 얘가 안 삐진다.
위급시에 고사리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마음이다.
팀원들의 땜빵으로 온 유리야.
같은 여자인 만큼 다소의 전력이 된다.
솔직히 얘 말고 부를 사람도 없긴 했다.
〈어느새 낙엽은 지고 변해버린 우리의 모습도…….〉
얼마 전, 오랜만에 다시 만났을 때.
엄밀히 말하면 강제로 찾아갔을 때.
나에게 분명 전화를 걸었었다.
날짜로 검색해보자 남아있다.
달래의 핸드폰 벨소리가 들린다.
'엿 먹이려고 일부러 안 오는 건 아니겠지?'
춘자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
다행히 그런 건 아니었다.
전화를 받더니 대수롭지 않게 내뱉는다.
가는 중.
어.
닦달하기도 뭣해서 그대로 끊었다.
"오는 중이래요?"
"엉."
"오면 때릴 거에요?"
뭔가 기대하는 눈치다.
눈을 초롱초롱 빛낸다.
내가 딱히 차별을 두는 성격은 아니지만…….
"그런 장난도 서로 친해야 할 수 있는 거지."
"저는, 저는…… 진짜 맞아 죽는지 알았단 말이에요오."
그 정도로 세게 때리진 않았어.
지금까지 맞은 적이 없으니 그게 아픈 거지.
유리야의 역치를 높여줄 필요성을 재확인했다.
'문제는 달래인데.'
온라인상에서야 장난을 칠 수 있다.
하지만 오프라인상에서는 다르다.
2년이 넘도록 연락을 하지 않고 지냈다.
내가 아는 춘자와는 많이 달라졌다는 사실.
이미 확인을 한 만큼 긴장이 안될 수가 없다.
분위기도 냉전 상태라 극한으로 어색할 것 같다.
"곧 도착한다고 했죠?"
"아마."
"그럼 저 화장실 좀 갔다 올게요. 오는 길에 달래씨 커피랑 디저트도 사올게요."
너랑 달리 먹는 걸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다.
싫어하는 것도 아니지만 최소한만 먹는다.
'아니, 그냥 지가 먹고 싶은 케이크 하나 더 골라오고 싶은 건가.'
이미 내 케이크를 지가 반절 정도 먹었다.
그래, 먹어야 정신이든 몸이든 성장하겠지.
사소한 거 가지고 참견할 겨를이 없는 상태다.
끼익.
유리야가 화장실을 가기 위해 일어난 직후다.
풀리지 않는 고민에 고개를 푹 숙이고 앉아있었다.
의자 삐걱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 우리 테이블에 앉았다.
이 덜렁이가 핸드폰이라도 놓고 간 건가.
이내 떠오른 생각을 부정했다.
그도 그럴게 위치가 바로 내 옆.
무엇보다 화장품 냄새가 진하게 풍긴다.
"안녕?"
춘자…… 아니, 이제는 달래라고 불러야 될 녀석이다.
코앞에서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인사를 건네온다.
만나게 되면 대체 어떤 상황이 연출될지.
내가 고려했던 상황에 이런 친근함은 없었다.
당황한 나머지 순간 대답이 안 나왔다.
입을 하기도 전에 대뜸 묻는다.
"쟤 누구야? 오빠 이거야?"
새끼 손가락을 쭉 피며 물어본다.
삐죽 긴 손톱과 화려한 네일아트.
말하는 것도 그렇고 생각보다 좀 심하게 개방적이다.
"리야잖아. 몰라?"
"아, 정말? 캠으로는 빵떡 같이 생겼던데 실물은 괜찮나 보네."
직접 본인의 입으로 유리야라는 분한테는 잘해주면서!
말도 했었으니 리야에 대해서는 알고 있을 것이다.
사진이나 방송으로 얼굴을 봤었을 수 있다.
실물과 갭이 있다는 사실.
솔직하게 인정하는 부분이다.
캠으로 보면 진짜 못나기는 했다.
'볼따구를 호떡 기계로 살짝 누른 느낌이긴 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얘가 기본적으로 이쁘다.
남한테 외모 지적 들을 만큼 못난 얼굴이 아니다.
그 지적을 하는 장본인이 너무 세련돼서 따지기 뭣하다.
'여캠하더니…… 몰라보게 이뻐지긴 했구나.'
오랜만에 만나는 달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다 됐다.
풍기는 분위기에서 춘자의 자취가 느껴지지 않는다.
어디 모델이나 연예인라고 해도 믿어버릴 정도다.
우연히 지나쳤다면 나도 모르게 눈길이 갔겠지.
테이블 자리가 구석져서 다행이다.
여기 여캠 있다고 소란 일으키는 건 사양이다.
"잠깐만 눈 감아봐."
"갑자기 왜?"
"됐으니까 5초만~."
하지만 춘자는 오히려 대담했다.
보란 듯이 찰싹 붙어서 말을 걸어온다.
BJ경력이 있는 만큼 다른 사람이 알아보는 경우가 흔하지 않다는 걸 알 수도 있겠다.
만약 그렇다 해도 할 짓이 있고, 안 할 짓이 있지.
어쩌면 처음부터 잘못 생각한 걸지도 모른다.
2년 넘게 지났으니 다른 사람이 됐을 것이다.
꼭 그렇게 단정지을 일이 아니었다.
세상 일이라는 게 변했다, 변하지 않았다 고작 두 문장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춘자의 경우는…… 이해가 안 간다.
어깨 쪽에 물컹한 감촉이 인다.
이내 차가운 손이 목덜미에 닿는다.
이해가 안 가는 상황이 10초 가량 이어졌다.
"아직도 담배 안 펴?"
"……어."
"짜식, 은근히 건실하단 말이야."
옛날에, 그러니까 2년 쯤 전.
짧게나마 춘자와 교제를 했다.
연인끼리 하는 짓도 당연히 했다.
그래봤자 지나간 시간, 과거의 추억이다.
그러면서도 내심 잊을 수는 없었다.
잊지 못했던 건 나만이 아니었던 듯하다.
"오~ 몸도 다부져 졌네. 꼴에."
예나 지금이나 피부가 차가운 녀석이다.
두 손으로 내 피부를 만져대고 있다.
너무 당황스러워서 도리어 침착해진다.
"너 대체 뭐 하는 짓이냐?"
"보면 몰라?"
"알 수 있는 상황이라고 생각해?"
머리가 지끈해진다.
그냥 어쩌다가 다시 재회를 한 것도 아니고.
온라인상에서는 죽일 기세로 치고 박고 싸웠다.
그런데 현실에서 만나자마자 연인이라도 된 분위기다.
"나 옛날이랑 달라. 오빠 놓아줄 생각 없어."
"……."
앞뒤 상황을 다 자르고 말해온다.
그럼에도 이해가 돼버려서 문제다.
춘자와 헤어진 계기는 정말 여러가지 있다.
우리 성격이 안 맞아!
너 나한테 솔직하지 않은 거 같아.
나는 이런 연애를 원한 게 아니었어.
연인들이 헤어지는 이유는 이런 문장 몇 개로 정리되지 않는다.
복합적인 이유가 복합적으로 얽혀서 복합적으로 터진다.
파국을 맞기 전에 서로가 점점 자각한다.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어차피 나는 곧 입대도 한다.
더 사귀어서 좋을 건 없잖아?
제지하는 분위기 없이 그대로 연락이 끊겼다.
2년이 지나 현재 2013년의 12월.
헤어지고 쭉 잊지 못하고 있던 걸까.
아니면 최근에 들어 다시 생각이 난 걸까?
물어보지 않는 이상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춘자는 관계를 되돌리고 싶은 모양이다.
"헉! 안녕하세요.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반가워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있던 그때.
어디선가 복붙이라도 한 듯한 인사말이 들린다.
나는 딱히 이야기를 해준 게 없는데?
평소라면 바로 타박을 줬을 것이다.
'……나이스 유리야.'
화장실을 갔다온 리야가 자신의 자리에 착석한다.
그것만으로도 얼어붙었던 공기가 풀린다.
춘자도 어느새 달래가 되어있었다.
"제가 달래씨 거 맛있는 걸로 골라왔어요. 혹시 싫으시면 딴 걸로 사올게요."
"와~ 정말 맛있어 보이네요. 저 이거 좋아해요."
달래가 너무 늦게 와버려서 시간이 많이 지체됐다.
그래서 리야가 적당히 알아서 골라왔다.
본인도 양심이 있는지 일단 거부는 하지 않는다.
다만.
"근데 이미 맛있는 걸 먹어서 맛만 볼게요."
"그러셨구나~. 오는 길에 드신 거에요?"
"아뇨, 방금요."
"그쵸~. 이 케이크도 맛있죠. 저도 맛있다고 생각해요!"
"……."
나를 힐끗 보더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다.
연락을 끊고 지낸 고작 2년.
변한 건지, 안 변한 건지, 춘자가 맞기는 한 건지.
모르거나 헷갈리거나 추리할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섰다.
'……롤챔스 보러 왔다가 왜 아침 드라마를 찍고 있는 거지?'
묻고 싶지만 답해줄 사람이 없다.
달콤했던 촉감이 머릿속을 더욱 어지럽힌다.
* * *
인천삼산월드체육관.
좌석 수 7~8천 석으로 그럭저럭 나쁘지 않다.
하지만 최근 떠들썩한 롤챔스 결승전 장소로 보기에는 터무니 없이 빈약하다.
아이러니한 뒷사정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지난 2013년 섬머 시즌의 결승전이 거의 폭망했었다.
결승전에 올라간 두 팀이 썩 인기 있는 팀들이 아니었다.
안 그래도 관중 몰이가 안되는데 실외 무대에 비까지 오네?
관중석이 텅텅 비며 요즘 롤챔스 한물 갔다.
역시 스타크래프트와는 비교가 안된다~.
그 결승전 마지막 세트에서 테이커가 듀를 상대로 이변을 일으켰다.
세상에서 제일 많이 죽은 자드.
세상에서 제일 강력한 게임단.
SKY T1 K라는 새로운 시대의 개막 치고는 흥행이 씁쓸하기만 했다.
이후 빠르게 재평가가 이루어졌지만 투자적인 관점에서는 다르다.
지난 결승전 흥행이 망했던 만큼 소극적이다.
그 비관적인 관점을 여봐란듯이 타파한다.
〈이렇게 많은 팬분들이 응원을 해주시니 삼선 레드도 젖 먹던 힘까지 짜낼 수 있는 거에요!〉
많이 흥분한 듯한 강빈 해설이 부르짖는다.
과연 젖 먹던 힘까지 짜낸 건지.
그건 모를 일이지만 확실히 대단하긴 하다.
파죽지세, 16연승까지 이어졌던 SKY T1 K.
다대기의 야흐오가 그 흐름을 한 번 끊었다.
도저히 지지 않을 것 같은 팀을 지게 만들기 직전이다.
〈이건 고작 한 세트 따라붙은 정도가 아닙니다. 삼선 레드가 말합니다. 너희는 더 이상 무적함대가 아니야!〉
클끼리도 기분이 고양됐는지 목소리 톤이 높다.
하도 지는 일이 없다 보니 붙어버린 별명이다.
불과 30분 전만 해도 SKY T1 K는 무적함대였다.
이제는 더 이상 아니고 서로 동등한 입장에 섰다.
예고되었던 결승전의 흥행이 더욱 불타오른다.
역시 라이벌은 치고 받아야 제맛이지 않은가?
그리고 이런 뜻깊은 결승전에 빼놓을 수 없다.
카메라가 미리 점찍어두었던 장소를 비친다.
다대기의 트리플 킬에 깜짝 놀란 듯하다.
〈그만큼 선수들 경기력이 미쳐 날뛴다는 반증이 아니겠습니까?〉
〈미인도, 미녀도 사람이니까요. 깜짝 놀라면 표정 관리가 안될 수도 있는 거죠.〉
진용준 캐스터와 클끼리가 자연스럽게 포장한다.
이쁜 여성팬이 E-스포츠 경기 관람하는 것.
그렇게 드문 일이 아니고 검색해보면 많이 나온다.
티오피녀, 재호녀, 얼밤녀, 와드녀 등등.
요즘은 관심 받기 위해 오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번에 한해서는 이야기가 전혀 다르다.
〈카메라가 한쪽만 비쳐서 몰랐는데 다시 보니 양손에 꽃이에요!〉
한동안 롤챔스 우와녀, 시크녀 등으로 검색어에 오르겠다!
캐치를 한 강빈 해설의 얼굴이 흐뭇하다.
옆에 앉은 클끼리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는 사실도 모른 채.
========== 작품 후기 ==========
재밌게 봐주시는 독자님들 감사합니다.
추천과 코멘트& 원고료 후원은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한올(HanAll) - 우리가 헤어진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