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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해자와 가해자 -->
오늘은 날씨가 유난히 맑고 깨끗하다.
최근 쌀쌀하기만 하던 날씨가 변덕을 부렸다.
햇님과 바람이 마치 나를 위해 웃어주는 듯하다.
'정말 외출하기 딱 좋은 날씨야.'
살짝 부른 입김이 뿌옇게 불어 흩어진다.
확실히 기온은 낮은데…… 이상하게 훈훈하다.
오늘 있을 조그마한 이벤트, 약속 때문일지도 모른다.
"헉! 벌써 오셨어요? 저 진짜 바로 온 건데 늦어서 죄송해요."
"괜찮아 나도 방금 왔어."
"……? 정말 괜찮아요? 가까이 가면 때릴 거 아니죠?"
누가 보면 내가 허구헌날 구박만 하는 줄 알겠네.
유리야가 먹이를 발견한 닭둘기의 표정을 짓는다.
함정 수사가 아닌지 의심을 하고 있는 듯하다.
'내가 평소 시간에 엄격한 편이긴 했지.'
그런데 너무 쉽게 봐주니 의아할 수도 있다.
가슴에 손을 얹고 그런 게 아니다.
이래 봬도 항상 미안하다는 감정을 느꼈다.
"요즘 멸망전 때문에 마음 고생 많을 텐데 사소한 건 신경 쓰지 마."
"……? 선배 오늘 뭔가 기분 나빠요."
"욘석, 못 보는 새에 장난끼가 많이 늘었구나? 하하하."
보고만 있어도 흐뭇한 웃음이 절로 지어진다.
아직까지도 의심을 하는 닭둘기 표정.
하지만 원래 닭둘기는 기억력이 3초다.
이내 까먹고 쪼르르 달려와 옆에 붙는다.
"어디 갈 거에요? 영화? 밥? 저 좋은 가게 알아요!"
"하하, 우리 리야가 하고 싶은 게 많구나. 하지만 날씨도 좋은데 잠깐 걷는 것은 어떻겠니?"
얼마 전 멸망전 예선전이 끝났다.
본선까지 다소의 준비 기간이 주어졌다.
한 마디로 여유 시간이 좀 생긴 셈이다.
간만의 여유 시간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이 뭐가 있을까?
고심 끝에 친애하는 후배인 리야와 약속을 잡았다.
물론 나도 BJ가 된 만큼 어느 정도 인지는 하고 있다.
'여캠방 시청자들이 불편해 할 수도 있잖아,'
그런데 나는 이미 검증을 마쳤다.
세상에서 제일 안전한 오빠.
롤을 할 때에 한해서는 아닐 수 있다는 거 인정하지만 적어도 오늘은 롤을 할 일이 없다.
그리고 유리야를 만나는 게 딱히 유별난 일도 아니다.
원래 휴가나갈 때마다 한 번씩은 만나곤 했다.
군대에 있을 때는 자주 면회까지 와줬다.
그렇게 아끼는 후배인 리야가 최근에 말 못할 고민이 있다고 한다.
'정말 안타까운 노릇이야.'
내가 그 고민을 해결해줄 수는 없겠지만…….
같이 길거리를 거닐며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을 줄 수는 있다.
지금껏 받아온 씀씀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않은가?
"선배가 아이디 이상하게 지어서 저…… 저…… 솔직히 요즘 너무 힘들어요."
"나쁜 시청자들이 많나 보구나. 힘내."
"힘내라고만 하지 말고…… 아이디 바꿔주시면 안돼요?"
"생각해볼게. 일단 밥부터 먹을까?"
"헉! 저 진짜 점 찍어둔 가게 있어요. 진짜 맛있어 보여요!"
알다시피 닭둘기는 3초다.
심각한 표정을 지어오지만 화제를 전환하니 그새 잊는다.
유리야와 함께 화기애애 식당으로 향했다.
같이 있다 보면 솔직하게 부럽기도 하다.
'순진한 모습으로 남는다는 게……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군대에 있다 보니 참 쓴물단물 다 먹었다.
비단 군대가 아니더라도 살기가 각박하다.
순진무구할 수 있는 것도 재능이고, 매력이다.
빡대가리 같은 모습이 암 걸리면서도 싫어할 수가 없는 이유다.
유리야와 걸어서 대략 15분.
시내에 있는 한 식당에 도착했다.
물론 따질 것도 없이 더치 페이다.
"야, 너 돈 많지?"
"돈이요? 방송 수입이랑 용돈 받아요."
"용돈도 받아?!"
"근데 용돈은 다 저금해요."
신사동 가로수길.
유리야가 자신 있게 데려온 식당이다.
내부 인테리어로 유추하건데 좀…… 돼 보인다.
아니, 나도 최근에 수입도 있었고, 이제 군인도 아니라 딱히 괜찮긴 한데.
"용돈은 얼마 받는데?"
"용돈…… 받긴 받는데 저 전부 저금해요."
"그렇구나. 그래서 모은 게 얼마나 되는데?"
"아빠가 나중에 집 사거나 하고 싶은 일할 때 보태 쓰래요."
'아, 그래서 대체 얼마냐고!'
사람 빡치게 하는 동문서답이지만 오늘 만큼은 큰 소리를 안 하기로 했다.
인내심을 갖고 찬찬히 들어보았다.
그런데 그 액수가 글쎄.
'고작 20대에 수백억대 CEO로 성장하신 김경아 대표님이 생각나는구나.'
차곡차곡 저금한 용돈 1억원으로 카페를 개업하여 7년간 적자만 봤지만 마침 아버지가 그 건물의 건물주였기 때문에 결국은 성공하셨다는 대단한 분이다.
어쩌면 내 눈앞에 있는 참한 리야.
제2의 카페 도래도래 대표 김경아가 될지도 모르겠다.
"밥 제가 살까요?"
"아니야. 됐어. 내가 살게."
"??? 선배가 밥도 사요?"
"아니, 뒤질래? 처음 만났을 때는 내가 몇 번 샀거든?!"
내 군생활 가장 짜릿했던 흑역사는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돈이 쳐많으면 소고기도 니가 좀 사지!
참고 있었음에도 불구 큰 소리가 나오게 만든다.
'아니야. 참아야 돼. 대의를 위해서라도 제발.'
오늘 유리야와 화끈하게 진도를 나갈 예정이다.
진심으로 사고라는 걸 한 번 쳐보려고 한다.
뭐, 술 먹이고 자빠뜨리면 되는 거겠지 대충.
"선배."
"저, 저 삼겹살 한 점만 먹어도 돼요?"
"상관은 없는데…… 부족하면 하나 더 시켜."
"아뇨, 그러면 많이 먹는 것 같잖아요."
삼겹살이라는 게 고깃집 철판 느낌이 아니라…….
막 스테이크 마냥 분위기 있게 썰어준다.
언뜻 보기에는 양식처럼도 보인다.
'분위기를 돈 받고 팔아먹네.'
이 얄미운 녀석한테 한 조각 덜어주는 거.
내가 이런 걸로 아까워하는 타입은 아니다.
근데 너 원래부터 꾸역꾸역 많이 쳐먹잖아.
이상하게 같이 있으면 한 마디 갈구고 싶다.
"괜찮아. 한창 먹을 나이지. 막걸리도 하나 더 시키자. 너의 눈동자를 향해 죽…… 아니 건배."
"헐, 오늘 선배 안 같아서 좋아요."
막걸리를 마치 와인 마냥 팔아재끼는 가게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 종류 별로 다 갖다 놨다.
그놈의 상술에 한 번쯤 속아 넘어 가준다.
'오늘 만큼은 어쩔 수 없어. 오늘 만큼은.'
배부르게 먹고 막걸리로 입가심도 했다.
주스 같은 막걸리지만 은근 취한다.
특히 알코올에 약한 편인 리야.
눈가가 살짝 풀리는 게 알딸딸한 듯하다.
원래는 오랜만에 영화나 한 편 때릴까.
생각을 했었는데 보다가는 잘 거 같다.
나도 살짝 위험한데 유리야는 100%다.
'하지만 술을 괜히 마신 건 또 아니야.'
어떻게 해야 의심 받지 않게 먹일 수 있을지.
고민을 했었는데 자연스럽게 구도가 나왔다.
기껏 잡은 찬스를 무로 돌릴 멍청이가 아니다.
"잠 좀 깰 겸 가로수길 좀 걷다가 오락실 들릴까?"
"저 못한다고 구박 안 하면요."
"하하, 욘석. 롤도 아니고 오락은 나도 잘 못해."
"선배도 못하는 게 있어요? 그럼 가요!"
'물론 금방 잘해지겠지만.'
갈굴 거리를 찾기 위해서라면 취한 상태에서도 빡집중이 가능하다.
오늘은 그러지 않기로 했다.
정말로 순수하게 놀아준다.
'고등학교 때 봉사 점수 따려고 노력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나는구나.'
오락실에서 리야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고전적인 총게임이나 두더지 잡기.
옛날에는 볼 수 없었던 3D 게임.
혼자라면 기록을 내는데 취지를 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나는 혼자가 아니다.
유리야가 내 옆에서 오토바이를 몰아재낀다.
겨우 오락실 오토바이를 타며 무섭다고 꺅꺅 거리는 모습이…….
어째서 어렸을 때 자전거 타는 애들을 밀어주고 싶었는지 기억이 난다.
같이 있으면 나도 정말 순수했던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는 듯한 기분이다.
"우리 리야는 정말 신기할 정도로 잘하는 게 무엇 하나 없구나."
"저 아직 면허 안 따서 그래요……."
"그래? 롤도 면허가 없어서 못하는 거겠지? 따면 잘해지겠지?"
하는 꼬라지를 보면 한숨이 푹푹 나오지만 제법 재밌는 것도 사실이다.
펌프도 한 번 시켰는데 산낙지처럼 흐물흐물.
주위 시선이 매섭다는 걸 깨닫고 끝나자마자 내려와 쪼르르 달려온다.
'3대 지랄견을 키우면 이런 느낌일까?'
이 녀석은 틀림없이 비글이겠지.
띨빵하지만 해맑은 모습이 그 반증이다.
사고를 치고 돌아와도 언제 그랬냐는 듯 의기양양.
인형 뽑기를 하고 싶다고 칭얼댄다.
"뭐 뽑고 싶은 거 있어?"
"헐, 말하면 뽑아줘요?"
"당연하지~. 인형 뽑기 프로게이머 있었으면 진작에 등록했어."
반쯤 허세이기는 하나 왕년에는 정말로 잘했다.
근데 이게…… 기계마다 특징이 다르다.
안 맞는 기계는 잘 안 뽑힌다.
덜컹!
하지만 한두 번 해보면 대부분 적응이 된다.
두 번째 도전 끝에 뽑아냈다.
유리야가 꼭 갖고 싶다던 토게피 인형.
"헉! 진짜 뽑았네요."
"그럼 가짜로 뽑냐?"
"선배가 절 위해서…… 두 번이나 도전해서…… 평생 잊지 않고 간직할게요."
두 번이나라는 부분이 빡침을 살살 긁는다.
내가 싫어하는 단어 선택을 잘하는 편이던데……
가끔은 일부러 저러는 게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
"그럼 갈까?"
"네! 날이 벌써 어둑어둑해졌네요. 저 안 바래다줘도 혼자 갈 수 있어요."
토게피 인형을 행복한 듯 끌어안은 유리야가 고개를 끄덕끄덕 한다.
안타깝게도 오늘은 보내줄 생각이 없다.
한 차례 이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조금 더 알코올을 주입할 계획이다.
"2차 가자. 오빠가 좋은데 알아."
"헉…… 너무 늦은 거 아닐까요?"
"애도 아니고 이 시간이 뭘 늦어."
"그쵸? 저도 애 아니에요. 하나도 안 늦어요."
꼬시는 것 자체는 하나도 어렵지 않다.
콤플렉스를 슬며시 자극시키면 끝이다.
그럼에도 으슥한 골목에 들어서자 놀란 모양이다.
"여기 어디에요? 이상한 곳 아니죠……?"
"내가 니랑 이상한 곳을 왜 가니."
평범한 술집, 아니면 이자카야 정도를 생각했나 보다.
그것도 나쁘지 않지만 오늘 일은 비밀을 요한다.
보다 조용하고 한적한 곳에서 모사를 꾸민다.
"선배랑 이런 곳 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나도 못했어. 불과 며칠 전까지는 확실히."
대부분의 바가 그러하듯 외진 골목에 있다.
영화 같은 분위기를 풍기기 위해서…… 가 아니라.
바에 드나드는 손님들이 그런 느낌을 원한다.
대중적인 술집이 아닌 나 자신을 아끼기 위한 장소.
조금 돈을 쓰더라도 아름다운 밤을 보내고 싶다.
는 개뿔이고 여자 꼬시는데 최적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헐, 토마토 주스 같아서 맛있어요. 하나도 안 독해요."
"그래? 나는 네가 마시는 모습만 봐도 행복하다."
칵테일의 한 종류 블러디 메리.
토마토 주스와 보드카를 섞은, 한 마디로 도수 있는 토마토 주스다.
맛도 정말 토마토 주스처럼 달달하게 맛있다.
그것이 바로 함정이다.
'괜히 레이디 킬러라 불리는 게 아니지.'
그렇게 칵테일로 만들어도 기본 도수가 있어 독하다.
그래서 한 가지 더 함정을 팠다.
주문 전에 셰이크를 해달라고 했다.
바텐더의 그 쓰레기를 보는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안 취했으면 한 잔 더 마실래? 오렌지 주스 좋아해?"
"저 오렌지 주스 엄청 좋아해요! 그리고 하나도 안 취했어요~."
스크류 드라이버.
오렌지 주스와 보드카를 섞은, 한 마디로 도수 있는 오렌지 주스다.
이것 또한 셰이크로 해달라고 했다.
바텐더가 자꾸 나를 째려본다.
'이 바…… 아는 형이랑 한 번 왔던 곳인데 다시는 들리지 못할 것 같네?'
어차피 형들이 사주는 거 아니면 개인적으로 들릴 만큼 넉넉하지 않다.
애초에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정말 여자 꼬시는데 직빵이라는 사실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오늘 평소 선배 같지 않아서~ 굉장히 상냥해서~ 좋아요."
"그렇구나. 마음에 들어서 다행이다."
"토게피 인형도 저 소중히 간직할게요."
바텐더의 눈이 더더욱 매서워진다.
어째서 셰이크로 해달라고 했는가.
셰이크는 칵테일을 만드는 기법이다.
텀블러 같이 생긴 통에 재료들을 넣고 흔든다.
그렇게 흔들면 알코올에 공기가 섞인다.
공기가 섞인 알코올은 한층 부드럽게 된다.
높은 도수의 술이 놀라울 정도로 마시기 쉬워진다.
'드디어 갔군.'
딱 두 잔 꿀꺽꿀꺽 마신 유리야가 풀썩 쓰러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 쌩쌩 했는데?
레이디 킬러라 불리는 칵테일들이 위험한 이유다.
바텐더가 나를 쓰레기 같이 바라본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심지어 그냥 시킨 것도 아니고 셰이커로.
다 알고서 수작을 부린 거니 그렇게 느낄 만도 하다.
게다가 유리야 얼굴이 아무것도 모르게 순진무구하게 생겼다.
'실제로 그렇기도 해.'
제법 지출은 있었으나 목표는 달성했다.
완전히 나가떨어져 헤롱헤롱 상태인 유리야를 들쳐 업고 이동한다.
온 세상 근심걱정 다 벗어버리고 새근새근 꿈나라에 빠진 사이 모든 것이 끝난다.
========== 작품 후기 ==========
주인공 정말 쓰레기네요
사람이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