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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전설의 재림-42화 (42/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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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괴 당한 걸그룹 -->

상당히 난감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결승전을 우승한 건 당연한 결과다.

애초에 질 거라고는 0.1%도 생각하지 않았다.

진짜 문제는 그 이후.

아무 의미 없는 MVP 주신 건 감사한데 이상한 일을 떠맡겼다.

걸그룹 처자들이랑 게임을 하라나 뭐라나.

심지어 현재 시간이 오후 여섯 시다.

'아, 석식 먹어야 되는데.'

군인의 좋은 점이 딱 하나 있다.

규칙적인 생활 습관을 강제로 가지게 된다.

그래서 12시, 6시가 가까워지면 배가 출출하다.

배고파 죽겠는데 한 타임을 더 뛰라니.

안타깝게도 군인은 나쁜 점이 더 한 가득이다.

명령은 좋든 싫든 무조건 복종하지 않으면 안된다.

"리픈 하시는 거 봤어요. 엄~청 잘하시던데요?〉

"경기 보셨구나."

걸그룹 처자, 걸즈데이의 멤버 한 명이 말을 걸어온다.

게임을 알기나 하고서 이 자리에 앉은 건가.

의외로 챔피언 이름은 제대로 알고 있었다.

"근데 롤 해본 적은 있으시죠?"

"당연히 해봤죠~. 저희 멤버들끼리 자주 하는 편이에요. 대부분은 칼바람 협곡 하긴 하는데……."

고수랑 하는 건 처음이니 잘 부탁한다.

멋쩍은 인사를 건네온다.

아니, 뭐 해달라면 해줄 수는 있지만.

'귀찮게시리 무슨 이벤트야.'

하필이면 MVP로 걸려 가지고 빼도 박도 못하네.

물론 딱히 싫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세상에 여자 싫어하는 남자는 없는 법 아닌가.

"근데 한 가지 잘못 알고 계시는 게 있는데 정정해드려도 될까요?"

"어떤 거요?"

"리픈만 잘하는 게 아니라 뭐든 잘합니다. 참고로…… 사랑도 잘합니다."

내가 말하고도 어이가 없어서 실웃음이 나오지만 회심의 드립이었다.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 위한 비장의 한 수.

만에 하나 호감을 가진다면 좋은 일이고.

적어도 한 가지, 관중석의 빡침은 깨트린 것 같다.

'……농담도 못 하네 농담도.'

부스 안에서 보이는 관중석의 분위기가 굉장히 심상치 않다.

방벽 덕에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기세가 살벌하다.

농담 한 번 칠 수도 있지 참 너무하네.

"그러시구나~ 게임도 잘하실 테니 재밌게 해봐요."

본인들에게도 가볍게 까이고 말았다.

예상했던 결말이지만 은근히 상처 받는다.

가시방석에 앉아 걸그룹 처자들과 일반 게임 5인큐를 시작하게 됐다.

그런데.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말이 들린 것 같은데…….'

하나 무시할 수 없는 헛소리가 심기를 거스른다.

* * *

게임은 쉬이 과소평가의 대상이 되곤 한다.

과소평가, 본래의 사실보다 작거나 약하게 평가한다는 뜻을 가진 단어.

단순히 즐기기 위한 것이라고 폄하된다.

'틀린 말은 아니지.'

게임의 본질을 따지면 그러하다.

하지만 게임이란 단어는 상당히 폭이 넓다.

축구도, 야구도, 도박도 넓은 의미에서는 게임이다.

축구에서 수비수가 달려가기 귀찮다고 공격수 안 막아봐라.

야구에서 빠따 휘두르면 팔 아프다고 번트만 쳐봐라.

땀 뻘벌 흘리면서 열심히 하고 있던 입장에서 욕 나온다.

컴퓨터로 하는 오락이라고 다를 거 없다는 소리다.

단순히 시대가, 전장이 바뀌었을 뿐이다.

게임을 대충 하는 건 게이머에 대한 모욕이자 우롱이다.

─아군이 당했습니다!

긴 웨이브 펌의 걸그룹 처자.

아군 탑라이너인 티몽이 당해버렸다.

갱킹이나 그런 게 아니라 100% 순수 우리 쌀로 만들어진 무공해 솔킬이다.

"와~ 엄청 세요. 그래도 네네톤 점멸 빠졌어요."

네네톤이 티몽을 솔킬 따다니, 이건 굉장히 귀한 솔킬이다.

상성 관계가 역전되는 광경을 목격했다.

심지어 1데스도 아니고 3데스.

그럼에도 스코어는 유리하다.

파앗!

사앗…!

죽을 것 같아서 미리 탑라인에 동선을 잡아 놨다.

르풀랑의 W스킬 뒤틀림.

네네톤의 뒤를 잡으며 금빛 사슬로 묶는다.

딜교환을 하기는 한 건지 체력이 만땅이기는 하나.

사앗…!

퍼엉!

궁극기로 복사한 두 번째 금빛 사슬과 파괴의 표식.

묶어두고 샌드백처럼 패버린다.

스킬샷만 정확하게 맞히면 탱커고 나발이고 찢어발긴다.

─적을 처치했습니다

레전설님이 전장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대회는 커녕 일반 게임이다.

밴픽이 없으니 르풀랑을 픽했다.

그리고 미니언 잡듯이 전 라인 킬을 쓸어담았다.

내가 진지 빡겜을 하고 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

일단 스코어는 10 대 9로 앞서있다.

약속이나 한 것처럼 전 라인이 다 뒤져서 문제지.

진짜 단 한 라인도 정상적인 라인이 없다.

'뭐지, 개꿀잼 몰카인가?'

국가에서 나를 전역시키지 않기 위해 신개념 프로젝트를 준비한 건가?

인내력 테스트도 이 정도면 정말 박수를 쳐주고 싶다.

걸그룹과 함께 하는 암 걸리는 5인 듀오!

못할 거는 알았는데 조금 많이 심각하다.

못한다는 정도를 가볍게 넘어섰다는 느낌이다.

한 마디 화풀이를 안 하면 성이 안 찰 것 같다.

"혹시 입대곡이라고 아세요?"

"입대곡이요?"

"네, 군인들은 입대 날짜에 발표된 노래를 입대곡이라고 해서 평생 기억하거든요."

평생까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말년 병장인 나도 기억하는 것 보면 군대에 있는 동안은 잊을 수가 없나 보다.

참고로 2012년 1월 말 군번인 내 입대곡은.

"저희 노래가 입대곡이셨나 봐요?"

"아뇨. 티아란데요."

"…………네에."

티아라의 Lovey Dovey라는 곡이었다.

찌질하긴 하지만 나름 속이 시원해지는 복수였다.

속에 담아두는 타입이 아니라 바로바로 해결하지 않으면 화병 난다.

어쩌면 얕본 것은 내 쪽이었을지도 모른다.

─아군이 당했습니다!

─아군이 당했습니다!

─아군만 당했습니다!

아니, 뭐 참아줄 수 있다.

하도 죽으니까 슬슬 패턴을 파악했다.

걸그룹이라 그런지 죽는 것도 리듬을 타더라.

탑, 바텀, 정글, 탑, 바텀 정글 정글~.

그 다음은 따질 것도 없이 바텀이다.

그래서 미리 언질을 해줬다.

"상대 정글 바텀이에요. 포탑까지 쭉 빼면 안 죽어요."

─아군이 당했습니다!

내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증명해주기 위해서 몸소 쭉 빼지 않고 죽어줬나 보다.

흐뭇한 미소가 지어진다.

물론 여기까지 예상하고 빠르게 봇라인으로 향하고 있었다.

─적을 처치했습니다!

더블 킬!

레전설님은 전설적입니다…!

하나도 기쁘지가 않은 알림이다.

일반 게임에서 학살을 하든 깽판을 치든 전설을 찍든 무의미한 살생이다.

나도 이런 짓까지 하기 싫은데!

안 하면 게임 유지가 안된다…….

─아군이 당했습니다!

댐에 구멍이 나서 한 손으로 막자 다른 쪽 구멍이 세서 또 막았더니 또또또 반복된다는 흐름이다.

그래도 계속 잘해주다 보면 언 젠 가.

그 언젠가가 찾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근데요."

"네."

"저희 노래는 어떤 거 좋아하세요?"

긴 생머리의 나보다 한두 살 많아 보이는 처자가 물어온다.

개인적으로 누님 타입을 결코 마다하지 않는다.

오히려 취향이라면 취향 저격이지.

하지만 내 제 1취향은 언제나 변한 적이 없다.

"번쩍번쩍, 나를 잊어줘요, 기대해줘……."

"와~ 다 아시는구나!"

"노래는 좋은데 제가 헬로우비너스 일편단심 순정남이라 잡덕은 안 합니다."

"……네."

이번에는 놀리려고 한 말이 아니라 순수 100% 본심이다.

따로 팬인 걸그룹이 있는데 박쥐처럼 행동하면 그게 더 실례지.

그럼에도 왠지 마음속 응어리가 풀린 기분도 들었지만.

─아군이 당했습니다!

인간, 브레이크를 걸어도 작동이 안될 때가 있다.

나도 모르게 한 마디 튀어 나온다.

"아니, 저기요."

롤에는 암묵적인 룰이 하나 존재한다.

말을 절대 '아니'로 시작해서는 아니된다.

아니시에이팅.

알고 있음에도 저질렀다.

살짝 선을 넘으려고 그런다.

"저요?"

"님 말고 제가 지금 누굴 부르겠어요? 핑 찍은 거 봤어요, 안 봤어요?"

"보긴 봤는데 너무 멀어서……."

단발 머리의 귀여운 스타일의 처자다.

누런 색으로 염색도 해서 세련돼 보인다.

지금 내 목소리가 신명조라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한 기색이다.

'봤다고?'

1200보 양보해서 못 본 거면 넘어가 주려고 했다.

피곤해서 눈이 침침하면 실수할 수도 있지.

근데 못 본 것도 아니고 뭐?

"우리 집 강아지도 학교 갔다 돌아오면 멍멍멍 하거든요? 지금은 군대 갔다 돌아오면 멍멍멍 하긴 하는데……. 님은 제가 로밍을 갔는데 호응은 커녕 움직일 생각도 안 하네요?"

우리 집 강아지만도 못하시나?

가까스로 목 끝까지 올라온 말을 참았다.

명색이 걸그룹한테 되는 데로 지껄일 수는 없지 않은가.

'나도 목숨은 아까워.'

걸그룹 팬들이 얼마나 무서운데.

하지만 그렇다고 할 말을 못하고 싶지는 않다.

내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은 하고 살아야겠다.

"죄송해요. 다음부터는 바로 갈게요."

"아뇨. 그냥 제가 혼자 다~ 죽일게요. 그래야겠다. 내가 잘못했네."

그래, 실력이 떨어지면 못할 수도 있지.

절대 귀찮아서, 게임을 얕봐서 그러는 게 아니겠지.

대회 게임은 커녕 승급전도 아닌데 화를 내는 건 옳지 않다 아무렴.

다짐한지 5분도 안됐는데 뚜껑이 열릴 것 같다.

스플릿으로 봇 2차 포탑을 깨고 귀환을 탄 잠시.

바론 근처에서 파밍을 하던 아군이 정말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신기하게 물렸다.

쿠! 챠앙!

탈리반 3세를 멍하니 지켜보던 티몽과 마이.

덤앤더머가 깃창에 띄워지며 흙벽에 갇혔다.

그 뒤를 질 새라 따라 붙는다.

아군 봇듀오 배인과 힐라카가 동참했다.

─아군이 당했습니다!

적 더블 킬!

적 트리플 킬!

꺄르르륵! 다 이긴 게임 던진다!

너 집 가면 우리 한타 질 거 알거든?ㅋㅋ

내 귀에 대고 이렇게 속삭인다는 기분이다.

"저희 죽었어요. 어떡하죠?"

"제가 여기서 어떻게 더 해야 될까요?"

"아뇨, 그게 그……."

내가 스플릿 할 때면 전멸을 하든 뭘 하든 상관이 없다.

하필 최악의 타이밍만 골라서 죽어준다는 것.

고의든 아니든 빡이 올라오려고 한다.

─적팀이 바론 백작을 처치했습니다!

로드 오브 로드에서 가장 강한 몬스터.

괴수의 울음소리가 소환자의 전장에 울려 퍼진다.

아무리 롤을 잘 모르는 사람도 이게 무슨 의미인지는 안다.

"바론…… 나가면 많이 안 좋은 것 같은데."

안 좋은 행동을 대체 왜 하세요?

곱슬한 파마가 돋보이는 딱 요즘 애들 같은 느낌의 곱상한 처자다.

힐라카를 하고 있으며 그나마 인류의 진정한 모습에 조금은 가까운 실력을 가지고 있어서인지 상황 파악을 한 듯보인다.

그러지 못한 사람이 대다수였다.

"저희 아직 스코어도 비슷하고 한타도 다시 하면 분명 이길 수 있을 거에요!"

"맞아요. 기운 내서 역전해봐요. 화이팅~!"

걸그룹 아니랄까봐 목소리는 정말 듣기 좋다.

귀정화는 되는 듯하지만 뇌정지까지 풀리진 않는다.

'유리…… 하니까?'

살짝 유리 어쩌고 하는 바보 후배가 떠오르며 빡침에 기름이 끼얹어진다.

그 유리함을 누가 만들었을까?

누구 덕분에 게임이 유지가 될까?

설마 정말 몰라서 저런 말을 하나?

탑 라인이 소문난 맛집이라 손님도 오고, 혼밥도 하고.

정글러가 갱킹은 커녕 적 정글과 미팅 하다 차이고 있고.

봇듀오가 살아있는 시간보다 우물에서 쇼핑하는 시간이 더 많음에도 불구하고 게임이 진행되는 이유를 정말로 몰라?

뚝-!

머릿속에서 무언가 끊어진 듯한 소리가 들려온다.

이쯤 되면 나도 모르겠다.

맞아 죽더라도 할 말은 해야겠다.

"저기요. 단발."

"……?"

"여기 단발머리 님 말고 또 있어요?"

"네, 네."

"도움 안되니까 봇 라인 짱 박혀서 라인이나 미세요."

프로게이머도 배인 꼴픽 박으면 팀한테 쌍욕 듣는 경우가 허다한데 님이 배인을 왜 해요 대체?

물론 여기까지는 말하지 않았다.

나도 최소한의 선은 지킨다.

"저기요. 곱슬."

"네!"

"그 배인 가성비 엽기떡볶이급이니까 따라다니지 말고 미드 와서 힐이나 주세요."

하지만 할 말은 무조건 한다.

하지 않고서는 화를 달랠 수가 없다.

"직모 누나."

"……네?"

내가 이래 봬도 연장자한테 예의는 지키는 편이다.

물론 롤에는 나이보다 우선시되는 게 있다.

"제가 더 잘하는 거 같은데 오더 좀 해도 되죠?"

"아, 네. 말씀하세요."

"마이고 나발이고 탱템이나 두르세요 진짜로."

연장자라서 이 이상까지는 말하지 않겠다.

그러나 이 한 명 만큼은 봐줄 수가 없다.

마지막으로 덤앤더머.

"만악의 근원 티몽충. 당신이 젤 문제에요. 알아요?"

"죄, 죄송해요……."

"알긴 아네. 그래도 양심은 있네. 티몽 하는 건 좋은데 모니터 상단에 티몽 얼굴 한 번만 더 그려지면 제가 진심으로 짜증이 날 것 같아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말로 전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게 있다.

조금 많이 전한 감은 있지만 이 정도 했으면 알아들었을 거라 믿는다.

생각보다 심각하게 스노우볼이 굴러갈 거라는 걸 이때는 몰랐다.

========== 작품 후기 ==========

#오늘 1화 연재입니다..

이유는 비축분이 별로 없어서..

플롯이 막힌 건 아니고 그냥 제가 분량 비축을 못했습니다..

열심히 써서 빨리 다시 쌓도록 하겠습니다..

재밌게 봐주시는 독자님들 감사합니다.

추천과 코멘트는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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