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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팬티 브라자 -->
우리 30사단의 탑을 맡아주고 있는 정상호 상병.
사단에서 가장 빡세다는 기갑수색대대의 2중대 2소대 소속으로 빛나는 세 줄 짜리 상병으로 진급할 동안 숱한 역경과 고난을 넘으며 임무 수행에 정진했겠지만 당연하게도 롤이랑은 아무런 연관이 없다.
─아군이 당했습니다!
정상호 상병의 쇈이 당해버렸다.
강도 높은 훈련으로 유지하는 사단 최고의 전투력은 어디다 엿 바꿔 먹었는지 도발을 허공에 긋는 거지 같은 딜교환 끝에 6스택 잭트에게 두들겨 맞다 야무지게 사망하셨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16강의 경기.
제22보병사단의 탑라이너 김철우 일병의 잭트에게 탈탈 털리고 있다.
'상병이 일병에게 털리다니 말세야 말세.'
물론 당연하게도 계급과 롤 실력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아니, 오히려 계급이 낮은 쪽이 더 유리하다.
나 같은 케이스가 특이한 거다.
내가 입대했던 2012년의 초.
롤이 이제 막 성수기를 맞이하던 때다.
그 이전에는 인기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카오스보다 인지도가 낮을 정도였지.'
갑자기 훅 떴으니 오히려 후임병들이 잘하는 것도 당연한 이치다.
사회에서 유행하던 롤을 한창 하다 왔을 테니 말이다.
일병이 상병에게 털리는 진귀한 장면.
군챔스에서만 볼 수 있는 유희 중 하나다.
그보다 더 볼 거리, 들을 거리는 따로 있긴 하지만.
"속보! 팬티 브라자 탑라이너 전사!"
"빤스 브라자 개털리는데?"
"역시 콘돔이 더 질긴 것인가."
'…….'
군챔스에 참가한 팀은 총 40여 팀이다.
그리고 현재 16강 경기가 진행 중이다.
즉, 나머지 24팀은 이미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는 소리다.
쓰레기 줍기가 확정된 패배자들이 초탈하여 경기를 관람하고 있다.
나의 뒷자석.
아니, 그 외에도 하나 대형 TV에 연결되어 있다.
PC방 내부 아주 큰 TV 앞에 장병들이 의자까지 끌어다 앉아 팝콘을 씹고 있다.
실제로 PC방 내부에서 과자 팝콘을 팔고 있으니 틀린 표현이 아니다.
나와 우리 상대팀.
제22보병사단의 경기를 보며 말이다.
'아니, 진짜 사단 마크로 별명 붙이는 거 안 하면 안돼?'
처음 입대했을 때 나도 좀 느끼기는 했다.
우리 제30기계화보병사단, 마크가 하트처럼 생기긴 했구나.
하지만 설마 팬티 브라자라 불릴 거라고는 아예 상상도 못했다.
'이런 건 대체 누가 별명을 붙이는 거야.'
우리 사단의 마크가 팬티와 브라자, 마치 빤스 브라자 같다!
다른 사단과 여단 아저씨들이 이따금 놀린다.
대회가 되자 대놓고 놀린다.
심지어 상대 사단도 만만치가 않다.
"속옷 대 콘돔의 대결이네. 피임률 대결이냐?"
"야! 니들 육군 교도소 끌려가기 싫으면 작작 해라."
"예, 알겠습니다!"
소위 아저씨, 아니 타사단 간부들이 말을 해도 태도가 고쳐지는 건 한순간 뿐이다.
진짜 아이러니 하게도 우리 30사단 마크의 별명이 팬티 브라자.
그리고 제22보병사단 마크의 별명이 바로 콘돔 부대다.
구경꾼 새끼들이 흥분한 것도 얼핏 이해는 된다.
'닥치고 경기나 관람해. 이 패배자 떨거지들아.'
순간 살짝 본심을 내뱉을 뻔했다.
아무튼 경기가 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번 게임.
16강에서는 탑과 미드가 라인을 스왑했다.
다행히도 아군 탑라이너가 미드, 탑 둘 다 할 줄 안다고 한다.
팀적 시너지를 고려해봤을 때도 탑이 딜챔프를 하는 것보다 탱을 해주는 편이 좋다.
정글 피셜, 갱 다니기 편해진다.
나도 정글을 하기 때문에 이해가 된다.
무엇보다 내가 미드를 더 잘한다.
탑이 그냥 전방이라면 미드는.
'G.O.P쯤 되지.'
가볍게 한 번 질주한다.
출시 시점부터 손에 완전히 익었던 암살자다.
아링이 자랑하는 3단 대쉬.
샤락!
각 도약의 거리는 짧지만 3회가 가능하다.
순식간에 적 미드라이너와 거리를 좁힌다.
하지만 공격 권한이 있는 건 상대도 마찬가지다.
구오오……!
거리가 닿자마자 바로 궁극기를 써왔다.
자드의 궁극기 죽음의 선고.
처음에 봤을 때는 상당히 당황했었다.
'뭔 또 재기발랄한 챔피언이 나왔나 했지.'
개발팀이 미쳐 가지고 이상한 사기 챔프를 만들었구나.
스킬 구조를 알게 되자 나름 이해는 된다.
하는 법은 몰라도 상대하는 법은 안다.
슈웅~!
타이밍을 맞춰 뒤로 유혹을 날린다.
먼저 궁극기를 써온 시점에서 확정타다.
유혹에 맞아 나풀나풀 홀려버린 자드를 마무리한다.
─적을 처치했습니다!
역시 이렇게 한 끝 차이의 킬각을 잡을 수 있어야 게임을 할 맛이 난다.
주구장창 사리면서 파밍이나 하고.
그러면 보는 입장에서도 재미 없겠지만 하는 입장에서도 뭐 하나 싶다.
"오, 팬티 브라자의 반격!"
"속보! 미드 라인 찢어진 콘돔으로 밝혀져……."
"자존심 강한 두 사단의 숨 막히는 대결!!"
'…….'
그 긴장감 넘치는 대결의 감상이 저질스러운 성드립이라니.
상당히 언짢지만 구경꾼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그도 그럴게 추가 보상을 얻는다.
포상 말고 보상 말이다.
[관람객들이 당신의 플레이에 진심 어린 환호를 보냅니다!]
[승리시 포인트를 22만큼 추가로 획득합니다.]
'아~ 저게 진심이었구나.'
당연히 알고는 있었다.
머리 뚜껑을 열어보지 않아도 진심을 알 수 있을 만큼 솔직하다는 점이 군인들의 좋은 점이다.
아무리 생각이 많은 사람도 군대에서 세월아 네월아, 시간 지나가는 것만을 바라다 보면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 웃고 울고 즐기게 된다.
'그렇다고 나의 진지한 혈투를 팬티와 콘돔으로 도배하진 말아줘.'
본능에 충실한 것도 정도껏 해줬으면 싶다.
물론 나도 살짝 본능에 충실하고 싶은 기분이 든다.
전 판에 워낙 버스 탔다는 느낌이 강하지 않았는가?
전황이 불리하게 흘러가던 쯤 터트려버린 미드 솔킬.
목 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발견한 기분일 것이다.
한 마디 우쭐거려줄 필요성이 있다.
"미드만 서면 내 클라스가 이 정도는 되지. 상대가 안되잖아."
"어차피 똥챔이잖아요 그것도."
"……."
픽을 하고 나서 들은 소리인데 아링의 근황이 무척 안 좋다고 한다.
롤드컵에 하도 나와서 너프를 당했다나 뭐라나.
내 기억 속 날아다니던 아링과는 조금 달랐다.
"유혹 못 맞히면 딜이 팍 죽게 돼서 요즘 아무도 안 써요."
"닌 군인이 뭐 그리 자세하게 다 아냐?"
"매달 휴가랑 외박 꼬박꼬박 나가니까 아는 거죠. 형은 안 나가서 모르나 보네."
"그래, 난 전역해서 집에 갈 테니 넌 열심히 포상 타서 휴가 나가라~."
"……."
나도 휴가 때마다 롤을 안 한 건 아니다.
그저 빠지듯이 진지하게 하지 않았을 뿐.
프로게이머에 대해 고민을 한 것도, 진로를 바꿔보려 한 것도 극히 최근이다.
군대에 있으면 세상과 단절된 기분을 느낀다.
그리고 전역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겠지!
근거 없는 자신감이 무럭무럭 샘솟는다.
그 자신감을 믿고 쓸데없이 세월을 허비했다.
다시 뒤따라 잡는 것은 역시 녹록한 일이 아니다.
특히 챔피언 폭은 근시일 내에 어떻게든 해결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나도 자드 같은 주류 챔피언들을 하고 싶긴 한데.'
상대해 보면서 느낀 거지만 챔피언이 꽤 괜찮다.
닌자 컨셉의 암살자라는 측면이 상당히 혹한다.
하지만 이제 와서 연습하기엔 늦지 않았을까.
적어도 이번 군챔스 진행 중에는 힘들어 보인다.
군챔스가 끝나고, 전역을 한 이후에 천천히 시간를 투자하는 수밖에 없겠지.
의외로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다.
한 가지 생각지도 못한 맹점이 존재했다.
─아군이 위험 신호를 보냄!
적 서포터 모르피나의 엇박자 로밍.
탑라인 쪽이 신경 쓰여 아래쪽 시야 장악이 부진했던 탓이다.
다가오는 직전까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물론 그것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지만.
구오오……!
또다시 자드가 궁극기로 나를 노려온다.
마음 같아서는 아까처럼 역관광을 제대로 보내버리고 싶다.
진짜 문제는 그럴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점멸 써도 잘못하면 죽을 각인데.'
모르피나가 가진 블랙 실드.
마법 피해만을 골라 막는 일종의 실드다.
서포터답게 실드량은 시들시들하지만 CC기를 막아내는 효과가 있다.
아까처럼 유혹을 던져도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내가 플레이하는 아링은 물몸.
깡체력으로 버텨내는 것도 불가능하다.
대인 암살에 특화된 자드의 폭딜은 스치기만 해도 죽는다.
즉, 스치지도 않으면 된다는 소리다.
그리고 또 하나.
샤락!
사선으로 달려나가는 황천 질주.
이어서 점멸을 섞은 페이크다.
원래의 나는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는 극피지컬의 농간이다.
'상대가 다음 장면을 예상할 수 없을 정도로 순식간에.'
움직임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게 아니라, 아예 필름이 끊겨 장면 전환이 휙휙 넘어간다는 느낌이다.
눈치를 챈 순간에는 이미 사망.
암살이라는 건, 특히 눈 뜨고 코 베버리는 암살은 그런 어이 없는 순간 판단과 망설임 없는 속도를 요한다.
슈웅~!
유혹-점멸.
역킬각을 생각지도 못하고 있던 모르피나는 그대로 맞았다.
뒤늦게 점멸로 도망가지만 이미 타들어가고 있다.
─적을 처치했습니다!
전설님이 학살 중입니다!
유혹을 못 맞히면 딜이 팍 죽는다.
그렇다면 맞히면 그만인 이야기다.
하지만 아직 위기 상황은 끝나지 않았다.
챠라락!
궁극기 그림자와 그림자 분신.
자드의 표창이 세 갈래로 쏘아진다.
이미 역주행을 해 모르피나를 따버린 마당이다.
그만큼 퇴로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맞서는 것밖에 선택지가 없는 상황.
지금의 나라면 불가능할 것도 없다.
샤락!
무빙을 밟으며 두 번째 황천 질주.
쏘아진 표창들을 슈팅 게임 하듯 가볍게 피해낸다.
자드는 포기하지 못하고 따라오지만 피해낸 시점에서 게임 셋이다.
거리를 주지 않고 미니언 쪽으로 끌어당긴다.
아군 미니언과 함께 자드를 농락한다.
쫓는 쪽이었을 자드가 어느새 사냥감 신세로 전락해버린다.
─더블 킬!
전설님이 미쳐 날뛰고 있습니다!
이런 가벼운 느낌의 2대1 역관광.
나에게 걸리면 식후 라보떼 거리밖에 안된다.
다소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는 게 옥의 티긴 하지만.
[신체 이상 완벽 회복(5초)의 시간이 종료되었습니다.]
'…….'
쓸 때마다 아까워서 피눈물이 나올 지경이다.
다급해서 쓰긴 했는데 본전도 못 뽑는다.
이거 이겨봤자 한 200포인트 주겠지.
의외로 이번에는 상당히 후했다.
[게임을 승리했습니다!]
[포인트를 223만큼 획득했습니다.]
[관람객들의 진심 어린 환호에 의해 161포인트를 추가로 획득합니다.]
2대1 역관광을 기점으로 게임은 터져버렸다.
아군 정글러가 유리야 마냥 놀고 있으면 모를까.
이래 봬도 준규는 내가 자식 돌보는 심정으로 애지중지 키워낸 제자다.
서포터의 공백이 생긴 봇라인의 빈틈을 제대로 찔렀다.
기갑수색대대 2중대 2소대 소속 정상호 상병의 쇈도 궁극기로 몇 번 어시스트를 챙기니 말렸던 라인전이 복구됐다.
물론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은 내 잘난 미드 캐리다.
"자식에게 쑥과 마늘도 먹여요 형은?"
"그래도 구워서 줬잖아. 쑥은 차로 줬고."
"그게 자식에게 할 짓입니까?"
"야, 마늘 튀겨서 맥주랑 먹으면 개쩔어. 뭘 모르네."
"알고 싶지도 않아요."
사자는 자신의 새끼를 절벽에서 굴러 떨어뜨린다.
보다 강인하게 크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이다.
독한 마음을 품었기에 비로소 지금의 너가 있을 수 있는 거다.
"그거 개구라고 절벽에서 떨어뜨리면 보통 죽어요."
"너는 안 죽었잖아."
"제발 부탁인데…… 저 다음의 희생자는 만들지 말아주세요."
당사자로서는 상당히 한이 되었던 모양이다.
너무 혹독한 교육은 때로는 역효과를 내기도 한다.
그런 느낌의 이야기를 만화책에서 본 기억이 있다.
'역시 독서는 하고 볼 일이야. 다음부터는 주의해야지.'
현재 진행형으로 다음을 밟고 있는 유리야.
이번 제자는 보다 온화한 마음으로 지켜보는 것도 나쁜 생각은 아니어 보인다.
전임자의 의견을 귀담아 듣는 건 아니지만 때로는 파격적인 교육 시도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그렇게 생각했었다.
* * *
"헐, 맛있겠당."
2013 지상군 페스티벌.
군인들의 축제지만 그 대상은 군인이 아니다.
전국 각지, 아니 세계에서 지상군 페스티벌을 보기 위해 찾아온다.
때로는 자신이 아는 사람, 충분히 만날 수도 있다.
"아저씨, 닭강정 얼마에요?"
"12000원. 아가씨 계룡시 주민이야?"
"아닌데요."
코를 찌르는 매콤달콤한 닭강정 소스의 향기.
먹을 것을 좋아하는 먹보라면 발걸음을 자연스럽게 멈춰진다.
그런데 혹시나 하고 물어본 가격이 완전 저렴하니 어찌 혹하지 않을 수가.
"주민이랑 군인은 할인 받아요? 헉!"
"……아가씨 이쁘니 하나 사는 거면 싸게 해줄게."
"아니요. 괜찮아요. 저 군인 아는 사람 있어요. 금방 데리고 올게요!"
한가했던 유리야는 축제에 놀러 오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