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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챔스 -->
불안 반, 초조 반.
과연 제대로 된 팀원을 만날 수나 있을까.
걱정 가득 시작했던 대회는 의외로 순풍을 타고 있다.
─아군이 적을 처치했습니다!
봇라인에서 승전보가 울려 퍼진다.
아군 정글러가 갱킹을 성공시켰다.
심지어 라인까지 팍팍 밀고 추가 이득을 챙긴다.
─아군이 용을 처치했습니다!
저런 개념 찬 정글러가 아군으로 있다니.
최근 하도 거지 같은 팀운으로 게임 하다 보니 눈물이 다 나온다.
역시 잘 키운 제자 하나, 열 팀원 안 부럽다.
'그럼 난 설렁설렁 해도 되겠지?'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
군챔스 예선전 두 번째 경기.
첫 번째 경기에서 간을 보니 상대가 생각보다 많이 못하더라?
구태여 전력을 쏟아 붓지 않아도 되는 레벨이다.
심지어 나 뿐만 아니라 팀원들도 괜찮게 한다.
그래서 한 가지 투자를 하고 있다.
촹!
촹!
미니언 사이를 잽싸게 오가며 적을 교란한다.
시즌2 당시 OP챔피언이었던 이랠리야.
그다지 좋아하는 종류의 픽은 아니다.
하지만 가끔은 다른 픽도 해야 한다.
'언제까지 리픈만 할 수는 없잖아.'
이전 판에 리픈으로 가볍게 손을 풀었다.
손목 관절까지 풀리는 줄 알았다.
살짝 과장이지만 무리가 가는 건 사실이다.
피지컬을 극한으로 뽑아쓰는 챔피언.
관리를 한다고 해도 영향이 없을 수가 없다.
무엇보다.슬슬 의식하지 않으면 안될 시기다.
'상대가 밴을 할 수도 있거든.'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다.
상대팀의 에이스 픽을 자른다.
비단 대회가 아니더라도 솔로랭크에서 또한 흔히 볼 수 있다.
실제로 과거 한창 1위 자리를 사수하던 시절.
나를 저격밴 하는 이들이 수두룩했다.
물론 당시에는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조금 문제가 커.'
아무래도 세월이 많이 흘렀다.
그 사이에 실력이 퇴보했다.
라는 건 솔직히 문제가 안된다.
진짜 문제는 바로 챔피언 폭이다.
2년 사이에 별의별 챔피언들이 다 생겼더라.
전체적인 메타도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다르다.
너프나 버프 같은 직접적인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고로 필요하다.
챔피언 폭이 시대를 따라잡아야 한다.
내가 이런 말을 들을 처지는 아니지 않은가.
"이랠리야 같은 구닥다리 말고 쇈이나 네네톤 같은 주류챔이나 하지."
"닥쳐. 내가 하고 싶은 거 한다."
준규가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왔나 보다.
하지만 틀린 말도 아니긴 하다.
나는 충신의 조언을 흘려 듣지 않는다
'이랠리야가 조금 구닥다리긴 해.'
OP소리 들었던 건 지금이 아니라 시즌2다.
1년도 더 지난 이야기라는 소리다.
알아 보니 지금은 장인 아니면 안 쓰는 수준까지 떨어졌다고.
이랠리야의 위상이 그 정도로 낮아졌다니 실감이 나지 않지만 현실 적응을 해야 한다.
2년이나 게임을 하지 않았다는 것.
직시하지 못한다면 정말로 퇴물이 돼도 이상하지 않다.
촹!
촹!
철컹!
미니언 사이를 오가며 순식간에 적에게 접근한다.
내려치는 것은 평형의 일격.
체력이 많은 상대를 기절시킨다.
붕붕-!
적 탑라이너 잭트가 봉을 돌리며 반격을 꾀하지만 안된다.
가볍게 다시 미니언을 탄다.
도약하는 시점에 맞춰 다시 한 번 탄다면.
'…….'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
타이밍이 살짝 어긋나버렸다.
반격에 의한 1초 스턴.
그 탓에 솔킬각을 재지 못했다.
"요즘 잭트도 괜찮은데 왜 하필 그런 개똥챔을."
"닥쳐!"
시즌2 당시 가장 핫했던 탑 챔피언이 잭트와 이랠리야다.
그런데 잭트는 살아남고 이랠리야는 죽었다.
이런 아이러니한 일이 있을까.
'잭트는 챔피언이 단조롭고 재미가 없단 말이야.'
하려면 할 수는 있지만 딱히 하기가 싫다.
아집이라기 보다는 플레이 스타일이다.
나에게 맞는 챔피언은 암살자다.
시시각각, 아니 0.1초 단위로 변하는 긴장감 넘치는 전장에서 최고의 한 수를 꾀한다.
피지컬이라는 장점을 극한으로 살려낸다.
이를 해내기 위해서는 피지컬, 이전에 챔피언 자체가 손에 촥촥 감기듯 맞아야 한다.
'이랠리야도 잘 맞는 챔피언 중 하나인데 아쉽단 말이야.'
현재 메타에서 뒤떨어져 있는데 피지컬까지 받쳐주질 않는다.
이렇다 할 슈퍼 플레이가 안 나오는 것도 어쩔 수 없다.
방금 전 교전처럼 한 끝 차이로 아쉬운 결과가 나온다.
[게임을 승리했습니다!]
[포인트를 168만큼 획득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경기는 이겼다.
전 라인이 차이가 나니 질 수가 없다.
깔끔한 2승으로 16강까지 치고 올라왔다.
"아, 참 캐리하기도 힘드네."
"탑에서 파밍 한 거밖에 없으면서 무슨."
"야, 내가 정글이었으면 3라인 동시 갱 성공시켰어!"
"아무리 형이 잘했어도 그건 에바죠. 옛날 폼이 미쳤던 건 사실이지만."
준규 만큼 나를 잘 아는 녀석이 별로 없기는 하다.
그도 그럴게 내 팬이었다고 한다.
어느 날 메세지함에 초장문의 쪽지가 와있었다.
─안녕하세요 레전설님.
저는 레전설님을 동경해 카오스를 시작했던 유저입니다.
지금은 저도 마찬가지로 롤로 게임을 옮겨……
.
.
.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레전설님께 부디 게임을 배워보고 싶습니다!
당시 워낙 독보적인 존재였기 때문에 이런저런 이야기 많이 들었다.
게임을 배워보고 싶다, 혹은 게임 강사를 하지 않겠는가?
그런 제의까지 수도 없이 받아 봤다.
하지만 이렇게 진심이 한가득 담긴 쪽지는 처음이었다.
"너도 그렇게 귀여웠던 시절이 있었는데 어쩌다 머리 빡빡 깎은 군바리가 되었냐."
"아! 한 번만 더 옛날 얘기 하면 저 화냅니다. 대회 탈주하고 형이랑 같이 영창 갈 거에요."
"알아따따따! 누구 닮아서 이렇게 히스테리가 심하니."
"형 닮은 거잖아요!"
후임 앞에서 가오가 안 산다며 화를 내더라.
너무 반가운 마음에 옛날 얘기 좀 꺼냈지.
옛날과 달리 성격이 좀 괴팍해져 있었다.
'어떻게 닮아도 하필 나를 닮냐.'
내 캐릭터는 워낙 독보적이라 닮기도 힘들 텐데.
참 힘든 길을 선택했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아니다.
스승과 제자, 충분히 닮을 수도 있는 노릇이다.
그만큼 교감이 오갔다는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마치 포켓몬 마스터 지우가 열심히 훈련 시킨 성격 드러운 피카츄처럼.
"준규몬, 나는 편하게 쉴 테니 알아서 본선까지는 알아서 양학하도록."
"한 판만 지면 쓰레기 줍게 생겼는데 여유가 있어요?"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 설마 못해?"
"당연히 못하는 건 아닌데……."
아무리 얘가 머리가 커져도 결국 부처님 손바닥 안이다.
살짝 자존심을 긁어주면 지 알아서 잘 따른다.
나는 뒷짐 지고 구경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형, 마지막 경기는 많이 힘들 것 같은데요."
"힘들어? 하긴 니 실력이 많이 부족하긴 하지."
"아니 씨! 보고나 말해요! 우리 예선 결승 누구랑 붙나."
팔랑거리는 쪽지 한 장을 들이민다.
무슨 내용인지는 안 봐도 비디오다.
군챔스에 출전하는 총 40여 팀.
누가 누구랑 붙고, 어느 팀이 올라가고 있는지.
대진표를 빨간 선으로 쭉 표시해 놨다.
근데 이런 거 봐봤자 의미가 있나?
'아니, 본다고 알 리가 없잖아!'
프로게임단도 아니고, 유명한 네임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애초에 아이디를 기억하는 네임드들도 드물다.
내 눈에 차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었겠는가.
그들이 나를 알지 언정, 나는 그들을 모른다.
대부분의 이들은 이에 해당된다.
하지만 해당하지 않는 극소수.
"……진짜 본인이라고? 에이, 설마 그럴 리가 있나."
"그럴 리가 왜 없겠어요. 형도 여기 있는데."
"그러네……?"
과거 가장 치열하게 경쟁했던 한 명이다.
심지어 내가 빼앗는, 쟁탈하는 입장이었다.
결국 쟁탈해냈지만 그 과정은 결코 녹록지 않았고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그 장본인을 설마.
'왜 하필 군챔스에서 만나냐…….'
* * *
프로와 아마추어.
사실 이전 세대의 E-스포츠 스타크래프트 시절만 해도 차이가 현저했다.
아예 넘을 수 없는 차원의 벽, 넘사벽이라는 표현이 정확했을 정도다.
'스스로는 극복할 수가 없을 만큼.'
그 이유는 단순한 재능의 차이.
그리고 연습량과 실력 격차 같은 게 아니었다.
조금 더 간단하면서 어처구니 없는 이유였다.
다름 아닌 독점.
게임을 잘하는 노하우를 프로게임단과 선수들이 독차지했기 때문이다.
게임단을 통하지 않는다면 선수로서 결코 성장할 수 없다.
아마추어, 준프로, 프로.
이 사이의 벽은 스스로는 허물지 못한다.
당시 프로게이머들의 인권 문제라던가.
갑질 논란 등이 이로 인해 야기됐다.
'고삐를 누가 잡고 있냐의 차이지.'
상정은 잠시 과거의 기억을 회상했다.
그렇다, 어디까지나 과거의 이야기다.
스타크래프트에서 넘어와 로드 오브 로드.
잘하는 아마추어가 바로 프로를 지망할 수 있는 시대다.
문턱이 없지는 않지만 이전처럼 아예 벽이 세워지진 않았다.
그런 자유로운 환경에서 1년.
즐길 만큼 즐기다 입대했다.
"여기 라이터 있습니다."
"어, 고맙다."
"별 말씀을요. 헤헤……."
팀원이 건넨 라이터의 불을 입에 문 담배로 받으며 상정은 생각했다.
자대에 배치 받은지 한 달도 되지 않아 일어난 사태.
어이 없게도 게임 대회에 출전하게 되었다.
'더 이상 남은 미련 따위 없었는데.'
사람들이 프로게이머를 지망하는 이유.
크게 두 가지로 좁혀진다.
그 중 하나는 따질 것도 없이 돈이다.
그 돈에 대해 상정은 욕심이 하나도 없다.
'이미 진로가 정해진 마당인지라…….'
집안에서 하는 사업을 물려 받아야 한다.
하지만 프로게이머를 하는 이유는 한 가지가 더 있다.
다름 아닌 실력의 검증.
게이머라면 누구나 자기 자신을 자랑하고 싶다.
내가 이 정도다, 이 만큼이나 잘한다.
겸사겸사 인기 또한 얻으면 좋다.
그래서 했고, 충분히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었다.
은퇴를 하게 된 것은 어쩌면 필연.
솔직하게 미련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만약 그가 프로를 했다면 나도 더 매달리지 않았을까.'
상정은 1년이 넘는 프로게이머 생활 동안 노력한 적이 없었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줬을 뿐이다.
그것만으로도 상위권의 성적.
솔로랭크에서도 견줄 수 있는 실력자가 몇 없다.
몇 있었는데 지금 이미 세계적으로 활약하고 있다.
이를 테면 테이커.
"진짜 콩샐 선수님 프로 계속 하셨으면 롤드컵에도 나가고, 연봉도 엄청 받았을 텐데~."
"테이커랑 쌍두마차가 되지 않았을까?"
"콩샐님이면 그러고도 남았지!"
"……."
출전한 게임 대회, 일명 군챔스에서 이미 두 차례 경기를 치렀다.
배진표를 좋게 배정 받은 덕에 두 번의 승리로도 8강.
앞으로 또 두 번을 이기면 본선 무대에 진출이다.
듣기 거북스러운 팀원들의 대화를 들으며 상정은 바라봤다.
피고 있는 담배의 끄트머리.
태운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끝이 보일 정도로 타들어간다.
앞으로 길어봤자 1분.
재능이라는 것도 이처럼 보인다.
게임을 너무 잘하고, 재능이 있으면 알게 된다.
자신이 가진 한계가 어느 정도인지.
진심을 쏟아부었을 때 얼마나 발전할 수 있을지.
'남들보다 부족하다고는 생각한 적 없지만…….'
최고가 되기에는 모자람이 있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진정한 정상, 넘볼 수 없는 경지.
한 번 엿보게 된 순간부터였다.
그 이후로 모든 것이 허망해졌다.
자신은 호랑이가 없는 산에서의 여우다.
힘껏 다퉈 영역을 차지한다 한들 그것은 자신이 잘났기 때문이 아니라 호랑이가 산에 존재하지 않은 덕분이다.
프로게이머 생활을 일찍 접게 된 데에는 그 이유가 컸다.
가업 문제가 있어 어차피 그만두기는 했을 것이다.
다만, 좀 더 홀가분하게 털어낼 수 있었다.
'정말 갑작스러웠는데.'
그 남자는 너무 갑작스러웠다.
나중에 사정을 듣고 나서야 알았지 처음에는 영락없이 부캐라고 생각했다.
로드 오브 로드의 챌린저 티어.
지금이야 200명이지만 당시에는 50명이었다.
그 바늘 구멍과도 같은 틈을 초보 유저가 비집어 연다?
그것만으로도 놀라울 지경인데 자신과 순위 다툼을 한다?
'심지어 결국 뺏겼지.'
코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느새 역전 당했다.
허탈하기를 넘어 어안이 벙벙해 어느 하루는 꿈이라고 착각했을 정도다.
"저희 예선전 나머지 상대들 대진표 구해왔습니다."
"그래? 수고했어."
"예, 누가 올라오든 가볍게 꺾어버리시죠!"
상정은 팀원이 건네준 대진표를 받아 보았다.
8강 이후 맞붙게 될 상대팀들이 표시돼 있다.
그중 유난히 눈에 띄는 아이디가 존재했다.
보고도 믿기지 않지만 분명한 현실.
'병장 최성훈…… 아이디 전설?'
또다시 갑작스러운 사태를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