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 빡대가리야 -->
곰곰이 생각을 해봤다.
두 판 연속 나 혼자 게임하는 느낌이었다.
아무리 실력 차이가 있다고 해도 어느 정도다.
얼핏 쉽게 이긴 것 같지만 한 번이라도 내가 실수했다면 역전되는 판이었다.
특히 원딜러가 아무것도 안 한다.
마실 나온 기분으로 덩실덩실 춤을 춘다.
잘나신 원딜러 유리야의 아이디를 전적 검색 사이트 CP.GG에서 검색해봤다.
아이디- 챌린저 유리야
전적- 421승 574패
아이디야 뭐 내키는 대로 짓는 거니 그러려니 한다.
프로게임단 사칭하는 유저가 어디 한둘일까?
티어 사칭 정도는 귀여운 수준이다.
하지만 이 정도로 갭이 크면 나도 모르게 한 소리 나오고 만다.
"야, 유리야."
"네? 왜요?"
"너 천 판이나 했다고 하지 않았냐?"
"저 다섯 판만 더 하면 천 판 맞아요!"
"아니, 그딴 걸 묻는 게 아니라……."
995판 했다고 꼬투리 잡을 만큼 내가 치졸하지도 않고, 한가하지도 않다.
유리야한테 쓸데없이 신경 쓰지 말자.
신경 써봤자 나만 빡친다.
만나기로 약속 잡은 순간부터 호흡을 고르며 다짐했다.
이제 와서 그 다짐이 깨질 일은 없다.
문제는 이 녀석의 진짜 티어다.
티어- 브론즈5 21P
헤이클린(1/5/6) 승리 3분 전
헤이클린(2/4/3) 승리 45분 전
럭키(6/7/1) 승리 1일 전
헤이클린(5/3/2) 패배 1일 전
'지저스…….'
1만 시간의 법칙이라는 게 있다.
요점은 많이 하면 결국 잘해진다.
특히 롤은 시간을 붓는 만큼 비례한다.
이 녀석도 천 판이나 했으면 어지간히는 하겠지.
나도 중간부터 다이아가 아니라는 건 알아챘다.
하지만 이토록 심각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헤이클린 승률이 57승 81패네?"
"네, 쪼금 저조해요."
"쪼오금?"
"그래도 저…… 헤이클린을 제일 잘하는데……."
어렸을 때부터 여자를 때리면 안된다.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이야기다.
이 녀석하고 말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손이 올라간다.
"브론즈5가 대회 참가하게 되어있냐?"
"저 동아리에서는 꽤 잘해요."
"유진아 설명."
"어, 그게……."
나유진은 서포터를 맡고 있는 13학번 후배다.
서글서글해서 가장 말을 걸기가 편하다.
먼저 친근하게 다가왔다는 이유도 있다.
서포터인 만큼 유리야에 대해서도 잘 알겠지.
다 듣고 나니 대충 무슨 상황인지 감이 온다.
당뇨도 아닌데 고혈압이 올 것 같다.
'그러니까 그거네 그거."
한 마디로 오냐오냐 해준 거다.
하긴 얘가 얼굴은 나름 여자여자하다.
솔직히 나니까 얘를 편하게 대하지 보통은 못한다.
나를 처음 소개시켜준 친구도 차마 막 대할 자신이 없어서 떠맡겼다고 나중에 실토했다.
확실히 내 사전에 남자랑 여자는 똑같은 인류다.
올라가려는 손을 가까스로 참았다.
"야, 유리야. 빡대가리야! 잘한다며? 에이스라며? 뒤질래?"
"저, 저 그래도 열심히 하고 있어요오……."
"열심히 하는 건 중요하지 않아요오~! 중요한 건 열심히 하는 게 아니라 잘하는 거야."
군대에서 가장 빡치는 간부가 누군지 알아?
열심히 하는데 못하는 사람이야.
없는 일거리 만들어 오니까!
딱 지금의 너처럼.
짐덩이도 보통 짐덩이가 아니다.
캐리를 해주려고 버스를 태워줘도 승차 거부를 해댄다.
버스 창문을 열고 뛰어내리려던 걸 기를 쓰고 말린 게 열댓번이 넘는다.
"그래도 리야 누나가 우리 동아리 회장이에요."
"회장 없이 한다는 건 말도 안되죠!"
"리야 누나도 할 때는 잘하잖아?"
"그치, 그치?"
그지 같은 게 그치 그치 하고 있네 니 생명을 그치게 해줄까?
눈앞이 캄캄해지고 손발이 부들부들 떨리는 게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다.
동맥이 터질 것 같은 고혈압.
깊은 빡침이 쌓여만 간다.
'완전히 여왕벌 동아리잖아!'
이렇게 오냐오냐 해주니까 본인이 진짜 잘하는 줄 알지.
친목 동아리인 건 한 눈에 알아봤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완전히 유리야가 학교 생활을 즐겁게 하기 위함 모임이다.
"유리야……. 이따 보자."
"왜요? 지금 봐도 되는데."
"지금 보면 내가 경찰서 갈 것 같아서 그래."
"경찰이요? 왜요? 군인도 경찰서에서 일해요?"
'주교보리고시따아~!'
사람 어금니 꽉 깨물게 만드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다.
순진무구한 띨빵함이 살의를 부추긴다.
백치미가 동치미를 담궈버리고 싶은 수준이다.
사실 엄청나게 화를 낼 만한 일도 아니긴 하다.
근데 이 녀석을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화가 난다.
이 깊은 빡침을 당장 풀지 않으면 어떻게 될 것만 같다.
마지막 상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샌드백이 좀 돼줘야겠다.
* * *
경기의 결과는 따질 것도 없이 완승이다.
이전 판보다 잘하는 상대도 아니더라.
가뿐하게 압도하며 빡침 또한 털어냈다.
그렇게 동아리 대항전은 마무리했지만 진짜 문제는 지금부터다.
유리야와 단둘이 어딜 좀 가야 한다.
요약하자면 채무 관계가 남아있다.
"나 돈 안 낸다. 말했다?"
"제가 사는 거에요. 부담 갖지 마세요."
"갖겠냐?"
말할 것도 없지만 당연히 공짜가 아니다.
맨입으로 퉁칠 만큼 쉬운 일도 아니었다.
아무리 내가 유리야를 몇 대 쥐어 박았고, 포인트를 쌓아야 한다고 한들 계산은 확실히 하는 편이다.
동아리 대항전을 도와준 대가로 밥을 얻어먹기로 했다.
물론 하나도 기대 안 하고 왔다.
얘가 사줘 봤자 뭘 사주겠냐.
설마 학식을 사주면서 나의 깊은 빡침을 유도하진 않겠지?
딱 그것만 신경 쓰고 있었다.
조금 상정 외의 일이 벌어졌다.
"여기 좀 비싸지 않아?"
"저 여기 스파게티 좋아해요."
"니 취향 따위는 관심 없고요……."
그렇게 엄청 비싼 가게는 아니다.
하지만 학생 입장에서는 부담된다.
적당히 대패 삼겹살집만 가도 감지덕지라고 생각했다.
현실은 당연히 그 아래겠지.
그런데 훨씬 윗줄로 잡혔다.
나름대로 고급진 이탈리안 레스토랑이다.
연인들이 데이트 장소로나 잡을 법한 그런 분위기의 가게.
유리야의 동문서답도 참아줄 만한 퀄리티다.
식사는 당연히 만족스러울 수밖에 없다.
'돈도 확실히 지가 내는 것 같고.'
저 지갑 안 갖고 왔어요.
놓고 왔나 봐요.
죄송해요오!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주둥아리를 찰싹 때려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군인 월급으로 빠듯하지만 낼 수는 있다.
뜻밖에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계산까지 깔끔하게 하고 있다.
'당연히 미안하진 않아.'
그만한 일을 해줬으니 당연하다.
내가 봤을 때 안 도와줬으면 첫 판 내지, 두 번째 판에서 참패하고 탈락했다.
특히 유리야의 막장 짓거리는 눈 뜨고 봐줄 수가 없었다.
그런 막장 짓거리에 대한 화가 조금은 풀린다.
"커피는 선배가 사요?"
"……."
"제가 살게요. 제발 사게 해주세요. 죄송해요."
"내가 살게."
"정말로요……?"
솔직하게 내가 얘를 너무 막 대하는 감은 있다.
10만큼 혼내야 하는데 나도 모르게 100만큼 혼낸다.
사람 사이라는 게 너무 편해지면 안되는데.
아주 조금은 반성하게 된다.
'근데 손목 드럽게 아프다 진짜.'
의문에 가득 찬 식사가 끝나고 카페에 도착해 커피를 기다리는 사이.
긴장이 풀리자 피로와 통증이 밀려온다.
사실 오늘 내내 참고 있었다.
최대한 자중을 하면서 게임을 했다.
그럼에도 무리가 가는 건 어쩔 수 없다.
원래라면 3주는 지나고 나서 반깁스를 풀으라고 군의관에게 들었다.
물론 의사 말이라는 게 곧이곧대로 들으면 안된다.
따듯한 물 많이 마시고, 술 절대 드시면 안돼요!
하라는 대로 다 하다가는 역으로 스트레스 받는다.
'조금 더 이성적으로 주의를 할 걸 그랬나.'
마지막 판에 살짝 달아올랐다.
유리야를 꿀밤 때린다는 마인드로 적을 팼다.
그러다 보니 두 가지를 깨달았다.
손목이 진짜 아프긴 아프구나.
그리고 피지컬이 줄긴 했구나.
확연하게도 차이가 난다.
상대가 못하니까 망정이지 실력이 있었다면 아찔했던 상황이 한두 번이 아니다.
머릿속에서 재생되는 플레이와 실제 내가 할 수 있는 플레이에서 차이가 난다.
차이가 보인다.
'생각보다 많이.'
다행스럽게도 방법이 있다.
천운이 따랐는지 기회를 얻었다.
포인트를 쌓을 수만 있다면 해결이 가능하다.
그런데 어디서, 어떻게 쌓아야 할지.
동아리 대항전도 끝났으니 다음 방도를 찾아봐야 한다.
"선배, 커피 받아왔어요."
"땡큐. 마음 같아서는 내가 가고 싶은데……."
"저도 알아요. 선배 아픈 거."
'내가 말했었나?'
스치듯 대화에서 한 번 말한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기억하리라곤 딱히 기대도 안 했다.
그도 그럴게 유리야니까.
나도 모르게 무시를 한 걸지도 모르겠다.
"괜찮으시면 제가 손목…… 주물러 드릴까요?"
"해봐."
"네, 열심히 할게요!"
기특해서가 아니라 신기해서 한 번 맡겨봤다.
갑자기 이쁜 짓을 하니까 겁 난다.
슬슬 사고를 칠 때가 됐지.
'뭐, 못하지는 않네.'
안마 치고는 턱없이 모자란 악력이다.
하지만 마사지로는 나름 합격점이다.
작은 손으로 오물딱 조물딱 열심히 주무른다.
조금 감동해버렸다.
아픈 거 알아주는 게 은근히 사무친다.
바보인 줄만 알았던 유리야가 어느덧 성장을 한 걸까?
"근데 선배……."
"왜?"
"저 내년에 3학년인데요."
"그래서?"
"선배는 2학년이죠? 그럼 이제 제가 선배인 거 아니에요?"
순간 내가 잘못 들었나 했다.
우쭐한 표정으로 되도않는 소리를 해온다.
"……만약 니 동기가 사정이 있어서 1년 휴학하면 니 후배야?"
"아니요."
"그럼 내가 군대 때문에 2년 휴학했다고 니 후배가 되는 게 아니지?"
"글쎄요?"
그러니까 저게 무려 나 빡치라고 하는 소리가 아니다.
나도 처음이었으면 농담인 줄 알았을 것이다.
적당한 손속으로 꿀밤 한 대 쥐어 박았다.
"때렸어…… 안 때린다면서 때렸어……"
"맞을 짓을 하지 마 제발……."
내가 절대 심성이 못돼서 손찌검을 하는 게 아니다.
이렇듯 한 번씩 터트리지 않으면 진심으로 빡칠 수가 있다.
"선배."
"왜 또."
"내일모레도 와줄 수 있어요?"
"뭘?"
"또 하는데 동아리 대항전."
"……."
"그, 그 안되시면 괜찮아요……!"
하나도 안 괜찮은 얼굴을 하면서.
사실 어느 정도 눈치는 채고 있었다.
옆 건물, 옆 건물에서도 할 정도로 판을 벌여 놓고 이렇게 빨리 끝날 리가 없지 않은가.
'이래야 유리야지.'
순진무구한 띨빵함도 처음 한두 번이나 귀엽다.
계속 듣다 보면 사람 인내심 테스트 제대로 한다.
하지만 오늘 만큼은 귀엽게 봐줄 요량이 조금은 생겼다.
* * *
동아리 대항전.
정식 명칭 한국대배 E-스포츠 최강자전은 한국대학교 총학생회가 고심 끝에 내놓은 대규모 이벤트다.
롤드컵의 한국 우승, 로드 오브 로드의 글로벌 E-스포츠화에 발맞춰 변화하는 한국대가 되겠다는 그럴 듯한 취지다.
물론 일련의 취지는 어디까지나 이벤트 허락을 맡기 위한 대의명분에 지나지 않는다.
"홍보 영상 완성됐으면 빨리 올리라고 그래."
"이미 올렸다는데요?"
"헐, 웬일이래? 평소에도 축제 때처럼 째각째각 좀 해주지."
게임 안 좋아하는 학생이 어디 있겠는가?
한 번쯤 학교에서 대회가 열렸으면 좋겠다.
일반 학생들의 적극적인 협조 덕에 학생회도 할 맛이 난다.
예선전 첫 날이 끝나자 분주해진다.
유튜브에 홍보 영상 하나 안 올려주면 섭하지 않은가?
영화 동아리에서 촬영을 하고, 촬영한 영상을 광고 동아리에서 편집한다.
물론 웬만하면 주목 받지 못한다.
댄스 동아리가 헐벗고 춤 한 번 쳐줘야 조회수가 팍팍 올라가는 법이다.
게임 대회인 만큼 그럴 일은 없다.
올라간 건 고작해야 게임 영상이다.
"근데 이게 우리 영상이 맞다고?"
"네, 저 아까 봤는데 느낌 좋던데요? 특히 재밌는 사람이 한 명 있어서……."
학생회 임원 하나가 다 알고 있다는 듯 중얼거린다.
가장 짬찌라 일을 도맡고 있다보니 필연이다.
하지만 가끔 예상을 벗어날 때가 있다.
"조회수가…… 왜 이럴까요?"
"그걸 나한테 물으면 어떡하냐?"
올린지 하루도 안된 영상이라고 보기에는 조회수가 지나치게 많다.
아니, 며칠 됐다고 쳐도 이 정도는 아니다.
학교 대회 영상을 보면 얼마나 보겠는가?
벌써 1만 명을 돌파했다.
화제의 중심, 범상치 않은 까까머리가 부각되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재밌게 봐주시는 독자님들 감사합니다.
추천과 코멘트는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