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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전설의 재림-5화 (5/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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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쌀한 가을 바람이 얇은 코트를 때린다.

코트만 때리면 좋겠는데 마빡도 때린다.

'……모자 쓰고 나올 걸.'

가까스로 빡빡이를 면한 머리가 차갑다.

절대 탈모라서 머리가 짧은 게 아니다.

대한민국 군인인 이상 어쩔 수가 없다.

물론 병장 특권으로 최대한 길렀다.

말출 동안도 당연히 안 잘랐다.

그런데 그 말출을 나가기 전 날.

〈내일 나가기 싫으면 머리 깎지 마~.〉

행보관이 사악하게 웃으며 한 마디 하더라.

휴가자들한테 꼭 하는 잔소리다.

그 말 듣기 싫어서 하루종일 숨어 있었다.

하필 휴가 전 날이 행보관 당직이라 발각되고 말았다.

'두발 규정 지키는 만큼 나라를 지켰으면 진작에 통일했겠다.'

마음 같아서는 머리가 길 때까지 엄한데 돌아다니고 싶지 않다.

하지만 여건상 그럴 수가 없다.

시스템이 말하는 포인트.

업인지 경험치인지 뭔지 하는 걸 쌓아야 한다.

오늘 내가 먼 걸음 행차해야 했던 이유다.

한국대학교.

입대를 하기 전까지 다니고 있던 대학교다.

스스로 말하긴 뭣하지만 나름 공부 좀 하는 곳이라 만족하고 있다.

단 한 가지를 제외하면.

'올라오기 정말 드럽게 힘드네!'

내가 학교를 온 건지 등산을 온 건지 구분이 안되는 등교 코스.

그나마 가을이니까 걸을 만하지 여름에는 진짜 죽을 맛이다.

그래도 다 올라오고 나면 보람이 쪼끔 생긴다.

지금은 비록 말라있지만 봄에는 꽃이 우거지는 화단.

화단 안쪽에 우뚝 솟아있는 정체 모를 나무들.

누가 관리하는지는 몰라도 조경이 썩 괜찮다.

'일병 정기 나왔을 때 깜짝 놀랐지.'

우리 학교가 처음부터 이렇게 자연 친화적인 건 아니었다.

내가 군대 가기 전까지만 해도 분명 정상적이었다.

이상한 동아리에서 저질렀다고 한다.

심지어 현재 진행형으로 늘어나고 있다.

상병 정기 나왔을 때보다 훨씬 우거져있다.

한국대 7대 불가사의라는 우스갯소리도 그럴 만하다.

'개인적으로 이 녀석 이상의 불가사의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적어도 나머지 7대 불가사의보다는 신기할 것이다.

다른 건 과학적인 증명이라도 가능하지 이 녀석은 증명도 안된다.

한국대학교 최대의 불가사의가 발바닥에 불나도록 뛰어오고 있다.

"헉! 죄송해요. 늦었어요. 그래서 뛰어왔는데 늦었어요."

얼마 전, 나에게 SOS를 친 후배 녀석이다.

나를 대학교까지 부른 주제에 5분이나 늦었다.

양심은 있는지 호흡을 고르면서 사과로 말문을 튼다.

"죄송할 짓을 대체 왜 하냐?"

"죄송해요. 때리지 마세요……."

마음 같아서는 보자마자 쥐어 박으려고 했다.

얼굴을 보자 화가 조금은 식으려고 한다.

볼 때마다 알면서도 식겁하게 된다.

'생긴 거 하나는 반반하긴 해.'

등신대 인형을 실물로 구현한 듯한 상판때기다.

행동하는 꼬라지도 얼핏 보면 귀엽다.

내가 설마 때리기도 할까.

머리를 감싼 채 눈을 꼭 감는다.

보호 본능을 자극시키는 무언가가 있다.

처음에는 나도 정말 동기사랑 나라사랑 할 뻔했다.

'……군바리한테 왜 여자를 소개시켜 주나 했지.'

막 일병이 꺾였을 때였다.

일병 정기를 나왔는데 너무 갑갑하더라?

이러면 안되는 걸 알면서도 대학 동기에게 부탁했다.

나 여자 한 명만 소개시켜주면 안되냐?

많은 거 안 바라고 그냥 여자 사람이면 된다.

군대에 있다 보니 마음이 답답하고 나 자신을 해방시키고 싶고 아무튼 그런 기분이 들어서 그렇다.

너무 흔쾌히 수락했을 때 눈치를 챘어야 했다.

"그래서 왜 늦었는데?"

"빨리 나오려고 했는데요. 오는 길에 자전거랑 부딪혔어요."

이번 경우는 선입견이 오해를 불러일으켰나 보다.

사람이 살다 보면 본의 아니게 늦을 수도 있다.

실수가 아니라 정말로 어쩔 수 없는 사고.

자전거에 부딪혔다면 납득할 만한 사유다.

아니, 걱정이 되지 않을 수가 없다.

저래 봬도 연약한 여자 사람이다.

"그거 큰일이었네. 어디 다친 데는 없고?"

"저, 저 다쳤어요! 넘어져서 손등을 세 바늘이나……."

성격도 나름대로 착한 녀석이다.

걱정해주자 감동한 눈초리로 바라본다.

똘망똘망한 눈동자에 눈물이 찔끔 맺힌다.

이렇게 보면 정말 애교 잘 부리는 후배 같은데.

심지어 다치고 왔다고 하니 마음이 약해진다.

세 바늘이라는 건 설마 많이 다쳤다는 소린가.

"보세요! 세 바늘이나 긁혔어요."

"야 이 썅……."

인상을 확 구기자 히익, 쫄아서 햄스터처럼 움츠린다.

내가 이 녀석을 절대 함부로 대하는 게 아니다.

이 녀석이 나로 하여금 함부로 대하게 만드는 거지.

'이 빡대가리가 어떻게 한국대를 합격했을까?'

하루 빨리 이 녀석을 한국대학교 8대 불가사의로 추가해야 한다.

어떻게 이 학교 문턱을 뚫었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정말로 사람 빡치게 만드는 재주가 유별나다.

"됐고, 빨리 가자."

"안 때릴 거에요?"

"안 때려."

"정말 정말 안 때릴 거에요?"

"안 때린다고!"

이렇듯 정당한 사유가 있어 연락을 씹고 있었다.

이 녀석을 한 시간 이상 상대하면 뒷목 잡는다.

그럼에도 만나러 온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살인 사건 나기 전에 빨리 안내해라."

"헉! 안내할게요. 때리지 마세요……."

로봇 같은 걸음걸이로 나를 앞서 뛰어가기 시작했다.

누가 보면 진짜 때리는 줄 알겠네.

이전에 너무 빡쳐서 몇 대 쥐어박은 후로 저런다.

'포인트도 포인트지만 그래도 조금 미안해서 도와주려고 온 건데.'

본명 유리야.

1년 차이의 후배다.

이름 그대로 유리 같은 녀석이라 나름 섬세하다.

혹시라도 마음의 상처가 있을까 풀어주고 싶었다.

동아리 대항전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런데 자기네 동아리가 밀린다.

한 마디로 응원을 요청해왔다.

대항전의 내용은 간단하다.

'옛날에는 스타크래프트를 했는데…… 시대가 변하긴 했어.'

요즘은 로드 오브 로드가 대세라고 한다.

확실히 군대 간 사이에 세상이 달라졌다.

나로서는 완전 환영이니 상관은 없지만.

"그런데 너도 참가하는 거냐?"

"당연하죠! 제가 저희 동아리 에이스인 걸요."

"……뭐? 다시 또박또박 좀 말해줄래?"

무려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자신이 동아리 에이스라며 우쭐하고 앉았다.

불주먹 에이스가 하늘에서 땅을 치고 후회할 만큼 에이스의 이름을 잘못 남용하고 있다.

"너 롤 할 줄은 알아?"

"씨이……."

"씨?"

"에이, 비, 씨이~ 저 롤 열심히 했어요. 솔로랭크를 천 판이나 했다고요!"

이번 경우도 내가 좀 섣불리 넘겨짚었나 보다.

처음 이 녀석을 만났을 때 롤을 가르쳐줬다.

생긴 거랑 다르게 상당한 겜순이다.

나를 소개 받은 이유도 게임을 잘해서였다고 들었다.

그래서 가르쳐줬는데 처음으로 여자한테 욕할 뻔했다.

이미 해버린 마당이지만 1년도 더 전의 일이다.

'그동안 솔로랭크를 천 판이나 했으면 웬만큼은 늘었겠지.'

롤이라는 게임은 많이 할수록 늘 수밖에 없다.

솔로랭크 천 판이면 했으면 엄청난 숙련자다.

동아리 내에서 가장 잘해도 이상하지 않다.

'내가 100판 좀 넘겨서 다이아, 300판 정도에 챌린저를 달았었나.'

천 판에는 이미 랭킹 1위를 찍고도 남았을 때지만 당시와는 상황이 다를 거다.

그리고 유리야의 하늘이 버린 재능을 생각해보면 당연히 그 아래.

그래도 천 판이나 했으니 최소 다이아는 찍지 않았을까?

"야, 근데 걸로 가는 거 맞아? 학생회관 그 방향 아니잖아."

유리야의 안내를 받으며 동아리 방으로 가고 있다.

그런데 얘가 엉뚱한 방향으로 가는 듯하다?

나중 가서 화를 내는 건 쪼잔하니 미리 짚어준다.

"아뇨, 저희 동아리방은 학생회관에 없어요."

"아, 그래?"

그럴 수도 있는 노릇이다.

대부분 동아리들은 학생회관 부근에 밀집해 있지만 다른 곳에도 없지 않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방향이 이상하다.

"여기로 가면 학교 정문 밖에 안 나올 텐데?"

"맞아요. PC방에서 만나기로 했거든요!"

여기까지 올라오느라 땀 뻘뻘 흘리며 개고생했다.

기껏 올라오니까 바로 내려간다고?

해맑게 웃으며 사람의 뒷목을 잡게 만든다.

'주교보리고시따…….'

어금니를 꽉 깨문 채 유리야의 뒤통수를 따라갔다.

* * *

포인트를 쌓을 수 있는 첫 번째 방법이 대회 출전이었다.

그리고 동아리 대항전, 바꿔 말하면 소규모 게임 대회다.

유리야를 도와주러온 데는 이러한 이해 관계가 얽혀있다.

'딱히 엄청난 기대를 하고 온 건 아니지만.'

참가하는 동아리가 많으면 얼마나 많겠는가?

말이 대회지 친구들끼리 거창하게 노는 수준이다.

못난 후배 한 명 도와주는 데에 좀 더 초점을 두었다.

원래 첫술은 배 채우기 보다는 맛보는 용도다.

그런데…… 생각보다 많이 먹고 갈 듯하다.

PC방 안이 북적이기를 넘어 미어터지려고 한다.

"야, 유리야."

"왜요 선배?"

"사람 왜 이렇게 많냐?"

"다른 동아리 사람들인가 봐요!"

"그러니까 왜, 어째서, 이렇게 많이 왔냐고."

묻는 거잖아 이 답답아.

한 마디 한 마디 끊어서 말하자 그제서야 대답한다.

"요번에 진~짜 많이 참가했다고 들었어요!"

"그렇구나……. 그런 거구나."

"저기랑 저기 PC방에서도 동시에 한데요!"

손가락 창문 건너편 빌딩 두 곳을 가리킨다.

그쪽 건물에도 PC방이 하나씩 있는 걸로 안다.

설명은 한없이 부족하지만 무슨 뜻인지 짐작은 간다.

'개떡 같이 말해도 찰떡 같이 알아들을 수 있어 이제는.'

유리야에 대해서는 지난 1년간 파악을 완료한 동물이다.

아무튼 생각보다 판이 훨씬 큰 모양이다.

이유에 대해서도 짐작 가는 바가 있다.

아무래도 롤드컵이 흥행하지 않았는가?

우리나라가 이따금 열풍이 불곤 한다.

수영도, 피겨도 하나도 관심 없다가 올림픽에서 선전하는 순간 난리가 난다.

이번 동아리 대항전도 아마 비슷한 케이스겠지.

우리도 롤드컵처럼 대회 한 번 열어보자!

대학에서도 붙이 붙었을 가능성이 크다.

'규모가 커서 나쁠 건 없긴 해.'

산보 하러 왔다가 등산하는 느낌은 있지만 그만큼 보상도 클 것이라 믿는다.

적어도 집에서 혼자 솔로랭크 하는 것보단 훨씬 수확이 있을 테다.

그렇게 참담한 수준이면 앞으로의 여정이 힘들어진다.

'부캐로 했을 때 한 판에 2점 들어왔었나…….'

아직 손목이 제상태가 아니라 차마 본캐는 돌리지 못했다.

배치고사 9승 0패.

10승을 일궈야 할 마지막 판을 대충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부캐로 한 판 해봤는데 코딱지 만큼 주더라.

최소 500포인트는 있어야 상점을 볼 수 있다고 한다.

무엇을 의미하는지, 병영도서관의 베스트셀러에서 본 기억이 있다.

'스킬도 구입하고 그런 거잖아?'

딱히 필요하진 않지만 솔직하게 관심은 간다.

갑자기 피지컬이 두 배로 상승!

나도 모르게 실웃음이 지어진다.

"선배 웃는다! 저랑 오랜만에 만나니까 좋죠?"

"진짜로 뒤져볼래?"

"아뇨, 그게 소개시켜 드려야 할 것 같아서. 저희 동아리 애들……."

이곳에 온 목적.

유리야네 동아리를 도와주기 위함이다.

유리야와 다르게 동아리 애들은 정상이길 바란다.

'그런데 이 유리야가 에이스라고 했었지.'

패널티로 생각하면 적절하지도 모르겠다.

다소 규모가 크다고 한들 아마추어 대회.

굳었던 몸을 풀 여흥으로는 적절하다.

========== 작품 후기 ==========

3, 4화 일부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적인 측면은 아니고 서술 추가 및 첨삭입니다.

이번 소설은 인성 남주와 빡대가리 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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