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설의 재림-3화 (3/443)

###3

<-- 취업 문제 간단 해결 -->

갑자기 눈앞에 떠오른 영문 모를 글자.

반투명한 신명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당황스러웠지만 이내 이해했다.

그도 그럴게 군대에서 워낙 많이 봤다.

'……병영도서관의 베스트셀러에서.'

손목 부상을 이유로 일과를 쉬는 말년.

하도 심심하다 보니 책을 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처음에는 자기개발서를 읽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장르 소설이 손에 잡혔다.

'사서였던 2중대 상병 아저씨가 순수한 나를 꼬드겼지.'

계기야 어쨌든 맛이 들린 것도 사실이다.

말출 직전까지 병영도서관의 신세를 졌다.

그 장르 소설들에 흔히 나오는 클리셰.

주인공의 눈에 이런 식으로 보였다.

[게임 승리시 활약에 따라 포인트를 획득합니다.]

[포인트를 소모하여 스킬을 구입할 수 있습니다.]

내용 자체는 판이하게 다르다.

하지만 큰 틀에서 보면 또이또이하다.

말하자면 RPG게임의 상점 같은 개념이다.

'이른바 게임 시스템이라는 건데…….'

소설 주인공들이 저걸로 인생 개꿀 빨더라?

설마 내가 당사자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게임의 신이라는 작자와 대화를 해보기로 했다..

[대화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최성훈님.]

모니터 화면에 또 다른 글자가 떠올랐다.

이번에는 무려 궁서체다.

진지 빨 때나 쓴다는 그 폰트.

단순한 매크로 답변이 아니라는 확실한 증거다.

"전지전능한 신님…… 맞으십니까?"

병영도서관에서 엄청 많이 본 장르 소설의 단골 중의 단골이다.

신이면 그냥 알아서 뚝딱뚝딱 만들 것이지.

인간한테 부탁하고, 이상한 음모 꾸미고.

알고 보니 악의 축은 다 신 자식이었다는 스토리가 한둘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 신이 아니라고 한다.

신에 준하는 무언가.

[제 자신에 대해 명명하자면 E-스포츠의 사념체라는 표현이 어울릴 듯합니다]

"말 또띠 하십시오. 알아들을 수 있게."

[……그리스&로마 신화의 전쟁의 신, 대장장이의 신, 술의 신. 저는 현대에 새로 생긴 개념인 게임, E-스포츠의 신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그리스&로마 신화라니 그리운 이야기다.

그 만화책 그림체 하나는 괜찮았는데.

아무튼 무슨 상황인지는 알겠다.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라면 딱히 존대 안 해도 되겠지.

'한 마디로 존나 무능한 신이네.'

기껏해야 자신의 분야를 조금 더 이롭게 만드는 것이 권한의 전부라고 한다.

예를 들면 인간에게 포도주 빚는 법을 알려준다던가.

커피와 우유를 섞어서 커피우유를 만든다던가.

[다른 개념들은 이미 정착화되어 있기 때문에 개입하는 일이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맡고 있는 게임과 E-스포츠는 아직 시작 단계입니다.]

스타크래프트로 막을 연 E-스포츠.

이제는 로드 오브 로드가 바톤을 이어 받았다.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대충 느낌이 온다.

[단적으로 당신의 스타성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하고 많은 사람들 중에 나를 선택했나.

물어보자 바로 답변이 떠올랐다.

느낌이 온 대로 예상했던 상황 그대로다.

'그러니까 내가 군대랑 손목 문제로 프로게이머를 안 하는 게 아까웠다는 소리네?'

그런 거라면 호의를 받아줄 의향이 있다.

아니, 받는 형편에 왜 가리고 있어?

그것도 경우에 따라서다.

"나 말고는 달리 인재가 없고……?"

[당신 이외에는 없습니다.]

대답이 상당히 똑부러지는 타입인가 보다.

일단 상황 자체는 원했던 대로다.

교섭의 여지가 있다는 소리니까.

"알겠어…… 알겠는데. 복잡하게 갈 필요 없지 않아?"

나 말고 달리 인재가 없다.

즉, 조금 세게 나가도 되는 입장이다.

혹시 몰라서 반말로 떠봤는데 괜찮은 듯하다.

자연스럽게 말을 놓으며 진짜 본론.

"2년 전의 과거로 보내주면 입대 안 하고 프로게이머를 할게. 뭣하면 맹세를 해도 좋아."

나를 프로게이머로 만들고 싶은 거면 빙 둘러 능력을 주지 않아도 된다.

회귀만 시켜주면 서로 윈-윈.

마지막에 살짝 굽히긴 했지만 깔끔한 제안이다.

[불가능합니다.]

"……뭐?"

[제 권한을 벗어나는 일입니다.]

"아, 그러니."

사스가 무능한 신.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꿩이 안된다면 닭, 제2안이다.

"그럼 피지컬을 전성기 시절로 회복시켜 줘. 그것도 안되면 내가 고생을 사서 할 이유가 없잖아."

[그것은 가능합니다.]

제2안 또한 비현실적인 일이었다.

설마 해줄까 했는데 되나 보다.

살짝 꼬장을 피운 보람이 있다.

'하긴 과거로 돌아가는 건 에바참치잖아.'

홧김에 꺼냈는데 곱씹어볼수록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언제가 다시 재입대를 해야 하는 신세가 됐다면 프로게이머로 성공을 해도 찝찝했을 게 분명하다.

'근데 이거 꿈 아닌 거 맞겠지?'

들떠 있을 때가 아니다.

애초에 꿈이라면 말짱 도루묵.

혼자 우습게 망상을 꾸고 있던 꼴이다.

뺨을 찰싹 때리며 다시 모니터 화면을 바라봤다.

방금 전의 궁서체가 사라져 있다.

대신 처음의 신명조가 떠올랐다.

[신체 상태가 최고조로 회복됩니다.]

'일단…… 꿈은 아닌 모양이네.'

오른손을 쥐었다 폈다, 쥐었다 폈다.

통증은 물론 당기는 느낌도 없다.

부상 당하기 이전의 손목.

빠르게 슈슛! 잽을 날려봐도.

팔굽혀펴기를 스무 번 연속으로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본래의 내 손이다.

'아니, 전보다 더 매끄러운 것 같은데?'

제대로 된 방한 시설도 없이 사람 막 굴리는 군대에 2년이나 있었다.

몸이 녹슨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런데 한순간에 이전으로 돌아왔다.

'물론 그때와는 여러모로 다르겠지만.'

내가 괜히 과거로 보내 달라고 말을 꺼낸 게 아니다.

군대에 있었던 약 1년 10개월.

그 긴긴 시간동안 다른 유저들의 실력은 올라갔을 것이다.

게임의 평균 수준이 상향 평준화가 됐다고 봐도 무방하다.

휴가나 외박을 나갔을 때 은근하게 느꼈던 사실이다.

그래서 회귀를 원했는데 안된다고 하니 어쩔 수 없다.

'근데 그건 군지컬 시절 이야기고.'

삽질이 일상인 군인과 일반인은 차원이 다르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일반인 시절로 되돌아왔다.

특별한 능력 없이도 원탑을 찍던 그 시절로 말이다.

'마침 시간도 새벽 한 시…… 인간이 가장 게임을 하고 싶어지는 시간이지.'

새벽인 만큼 다소 피곤하기는 하나 대한민국 육군 병장이다.

다크템플러처럼 숨어있을 뿐 할 때는 누구보다 잘한다.

돌아온 피지컬의 시험 운행을 해볼 시간이다.

* * *

가히 전설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다.

레전드가 곱해져서 레전설이 되었다.

어느 쪽이 앞인지는 지금 중요하지 않다.

그가 복귀했고, 이미 게임을 진행 중이다.

─[속보]레전설 솔로랭크 시작!

계속 확인하고 있었는데 드디어 하네ㅋㅋ

시간 보니까 친구들이랑 한 잔 하고 돌아온 듯?

└ㅁㅊ그럼 음주롤이라는 소리잖아

└연승 중인 것보니 술 먹은 건 아닐지도

└에이, 배치고사 하는 정도로 소란이야

글쓴이-MMR 높아서 다이아3 만나고 있는데?

로드 오브 로드 커뮤니티 사이트 잉벤.

하루에만 수십만 명이 들락거리는 국내 최대 규모의 롤 커뮤니티다.

현재 그 잉벤이 실시간으로 들끓고 있다.

과거 압도적인 실력을 뽐내며 랭킹 1위를 구가하던 레전설이 돌아왔다.

슬슬 전역 때가 가까워졌다는 소문이 무성하던 그가 드디어다.

물론 아직 본 게임은 아니고 배치고사.

하지만 배치고사도 다 같은 배치고사가 아니다

공부하는 학원에서 레벨에 따라 반이 나뉘듯, 로드 오브 로드의 배치고사도 클라스가 나뉜다.

전 시즌에 잘했다면 배치고사도 수준 높은 곳에서 치른다.

하물며 랭킹 1위.

아무리 장기간 게임을 하지 않았다고 해도 격이 다른 사람이다.

소위 천상계라 불리는 다이아 티어가 짓밟힌다.

관심이 들끓는 것도 당연하다.

─다이아 구간을 그냥 학살해 버리네……

다이아5도 아니고 다이아3 만나는데 가차 없다

2년 동안 게임 안 한 사람 맞아?

군대에서 보직이 게임병이었나

└게임병은 게임하는 게 일과냐ㅋㅋ

└에이, 연습용 부캐가 따로 있겠지

글쓴이-있다 쳐도 진짜 잘하긴 잘한다. 관전 중인데 미쳤어!

└원래 타고난 재능충임 레전설은

어지간한 고수도 다이아 학살은 힘들다.

애초에 어지간한 고수가 다이아 티어다.

그 이상의 랭킹에 드는 아마추어, 혹은 프로게이머.

그들조차도 다이아 티어는 만만히 볼 수 없다.

물론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세상은 넓고, 괴물은 많다.

하지만 이만한 괴물.

결코 흔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연승이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진다.

─설마 진짜로 10연승 찍어버리나…?

이번 판 이기면 9연승째야

챔피언 폭도 완전 옛날인데 개잘한다

└리픈은 옛날부터 레전설이 원탑이었지~

글쓴이-레전설은 하는 것마다 원탑이었지 않음?ㅋㅋ

└ㅇㅈ근데 9연승 힘들어 보인다. 봇미드 터졌어

└팀똥으로 연승 끊기나? 팝콘 각이네ㅋㅋㅋ

아무리 잘하는 사람이라도 롤은 결국 팀 게임이다.

그리고 팀운 게임이기도 하다.

별안간 위기가 닥쳐올 때가 있다.

자신을 제외한 네 명이 전부 못한다거나.

그 최악의 케이스에 제대로 걸렸다.

아홉 번째 판에서 위기를 맞이한다.

─와, 미쳤다 진짜ㅋㅋㅋㅋㅋㅋㅋㅋ

혼자 스플릿해서 개어거지로 이김

옛날 유저 맞아?

평캔 속도가 또라이급인데

이러면 진짜 10연승 찍을 기세다

└이미 찍은 거나 다름 없지!

└저런 판 넘기면 다음 판부터 쉬워짐

└솔로랭크의 법칙이자너ㅋㅋㅋ

└안돼! 아직 한 판 남았다 ㅠ.ㅠ

수많은 이들의 기대, 그리고 저주.

배가 아파서라도 제발 져라.

하지만 지지 않는다.

그런 사소한 위기쯤 가볍게 넘겨버리니 레전설이다.

혼자 매드무비를 찍으며 강제로 캐리해버렸다.

안 그래도 들끓던 잉벤이 폭발 직전이다.

─이래서 레전설 레전설 하는구나······

검색해 보니 듀오도 아니고 솔로큐네

라인도 미드, 탑, 원딜 세 개나 하고

그 재능 조금만 떼어줬으면 좋겠다

└1/3만 떼어줘도…… 난 미드만 잘해도 만족함

└마지막 판도 아마 이기겠지? 이기면 티어 어디려나

└무조건 플1이지. 물론 MMR은 미쳐 돌아가겠지만

└복귀식 한 번 화려하네 사스가 레전설……

레전설, 그를 알고 있는 유저도 알지 못하는 유저도 어느새 한 마음이 되어 간다.

이래서 옛날에 원탑 찍었구나.

레전설이라 불리는 이유가 있었구나!

마지막 한 판 남았다.

이제 곧 아침 해가 떠오르는 여섯 시.

실시간으로 10연승을 확인하기 위해 졸린 눈을 비비며 기다린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다음 게임을 시작하지 않는다.

끝내 화룡점정이 찍히지 않은 채 긴긴 새벽이 지나가고 말았다.

========== 작품 후기 ==========

재밌게 봐주시는 독자님들 감사합니다.

추천과 코멘트는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