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 1차 사료의 중요성 (62/62)

9. 1차 사료의 중요성

장갑 낀 손이 팔락팔락 종이를 넘겼다. 오래되어 낡은 책장이 혹 부스러질까 걱정하는 손길이 몹시 조심스러웠다.

◈ 2월 15일. 맑음.

새 드레스가 왔다. 정말 예뻐! 역시 언니가 추천해 준 곳은 다르구나. 이걸 입고 데뷔탕트를 하러 가면 모든 사람들의 시선은 다 내 것이 될 거야! 아하하하!

(새 드레스의 스케치)

◈ 3월 22일. 거지 같은 날씨. 바람은 왜 이리 쌩쌩이고 해는 왜 이렇게 흐릿해?

오늘 종일 먹은 거라곤 아몬드 몇 알과 우유 한 잔뿐이다. 어제는 사과 두 알에 계란 하나 먹었다. 마음껏 먹을 수 있는 게 고작 물뿐이야! 미친 거 아냐? 어떻게 이러고 살라는 거지? 하루 온종일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 눈앞이 빙글빙글 돌고 팔다리에 힘이 없고……. 이런 거에 어떻게 익숙해져? 익숙해지면 배고픔이 사라져?

(몰래 까먹은 초콜릿 포장 껍질)(껍질)(껍질)(반쯤 찢은 껍질)

어머니는 귓구멍이 막힌 사람 같다. 내가 아무리 말해도 들은 척도 하질 않아. 대신 레이디 타우레드 얘기만 자꾸 하시는데, 나는 레이디 타우레드가 아닌 걸 어떡하라고! 그렇게 한 줌밖에 안 되는 허리가 부럽거든 어머니가 날 잘 낳아주셨어야죠! 내 통짜 허리와 다리는 다 어머니를 닮은 거라고요. 어흐흑.

데뷔탕트 따위 빨리 치르고 끝나 버렸으면 좋겠다. 그럼 이런 식단으로 살지 않아도 될 텐데. 드레스 허리 늘려준다고 할 때 그 말 들을 걸 그랬어. 아, 후회스럽다! 아, 언니, 언니의 충고를 들었어야 했어! 무시해서 미안해!

참, 신기한 얘기를 들었다. 며칠 전에 웬 귀족영애 한 명이 말을 타고 브란젤 시내를 내달렸다는데, 진짜인가? 에이, 설마. 누가 헛소문을 퍼뜨린 거겠지.

◈ 4월 3일. 날씨 따위 알 게 뭐야.

(초록색 잉크)

오늘 내가 대체 뭘 본 거지?

혼란스럽다.

오늘 데뷔탕트에서 나는 전혀 주목받지 못했다. 하지만 조금도 서운하지 않다. 데뷔탕트에 암녹색 드레스를 입고 온 사람보다 더 주목받으려면 아예 옷을 벗고 나갔어야 할 테니까! 게다가 그 레이디는 머리칼을 초록색으로 염색하고 코르셋이 없는 드레스를 입고 왔다고! 그걸 나처럼 평범한 애가 어떻게 이겨?

레이디 헨젤……. 이름이 뭐더라, 오드리였나? 무도회에서 소개를 받지 못해서 제대로 기억하고 있나 확신이 안 선다. 그치만 아마 맞을 거야. 다들 뒤에서 수군거리기 바빴으니까.

흥, 이상하네 어쩌네 떠들어대지만 실은 속으로 부러워했던 거 다 알아. 나도 어머니의 반대만 아니었으면 이 평범한 갈색 머리카락을 금발이나 흑발로 바꾸었을 거야. 아니면 아예 새빨간 색으로 염색해 버리거나. 그래도 녹색은 좀 아닌 것 같지만…….

아무튼, 레이디 헨젤이 입은 암녹색 드레스는 진짜 끝내줬다. 버슬을 안 넣어서 좀 밋밋해 보이긴 해도, 허리를 대각선으로 감싸면서 허리와 상체의 라인을 돋보이게 하는 센스가 아주 좋았어. 키가 좀 작던데 혼자 있을 때는 그런 생각이 전혀 안 나더라. 코르셋을 안 찼으니 허리가 좀 두꺼워 보일 수도 있었을 텐데, 그보다 엄청 편해 보여서 부러웠다. 숨쉬기도 편했겠지?

부럽다! 코르셋 없는 드레스! 부럽다! 염색! 부럽다! 그걸 데뷔탕트에 해치우는 배짱과 실행력!

들어보니까 말 타고 브란젤을 가로질렀다던 귀족영애가 레이디 헨젤이었다던데. 요즘도 매일 새벽마다 엄청 큰 말을 타고 강변을 달린다고도 하고……. 우와아……. 헨젤 백작이 그걸 그냥 두나? 안 막나?

◈ 4월 6일.

레이디 헨젤은 이런 일정을 어떻게 소화하는 거지? 사람 맞으세요? 잠은 언제 주무세요? 아무리 쇼핑과 사교가 좋아도 이건 좀 아니지 않나요?

(최근 입수한 레이디 헨젤의 스케줄 정리표)

◈ 4월 7일.

레이디 헨젤을 따라 말브레 극장에 갔다가 죽을 뻔했다. 너무 무서웠어. 난 꽤 일찍 빠져 나왔는데, 레이디 헨젤은 괴한들이 전부 잡힐 때까지 극장에서 자리를 지키다가 천천히 나왔다더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안 무서웠나? 나랑 한 살 차이밖에 안 나는데. 나도 한 살 더 먹으면 그렇게 멋진 배짱을 가지게 되는 걸까?

(신문 스크랩 몇 개)

나도 본격적으로 승마를 배워볼까? 난 여자니까 가벼운 산책 정도만 할 수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었지만……. 언니도 말 정도는 잘 타는 게 좋다고 하기도 했고…….

◈ 4월 10일. 구름이 해를 가려서 아주 쾌적한 날씨.

어머니가 드디어 내 티타임에 레이디 헨젤을 초대하는 걸 허락하셨다. 기분 최고다! 요새 레이디 헨젤을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워낙 많아서 과연 내 티타임에 와줄까 걱정스럽기는 하지만, 그래도! 초대장을 보내볼 수 있다는 게 어디야! 따라다니는 거 너무 힘들었단 말이야!

(초대객 명단)

그나저나 어머니께서는 레이디 헨젤이 어릴 적엔 가무잡잡한 피부가 아니었다고 하던데 그게 진짜일까? 근데 남부인들은 다 가무잡잡하잖아. 헨젤 부인도 가무잡잡한 피부였다고 들었는데……. 어머니를 닮은 거 아닐까? 저번에 보니까 어깨 드러낸 드레스를 입고도 흰 부분 없이 가무잡잡하던데. 그냥 햇볕에 탄 거면 어깨와 가슴이 그런 색일 리 없잖아.

아이참, 벗겨볼 수도 없고!

◈ 4월 13일. 최악의 날씨다. 이런 날에 하늘이 맑다는 건 하랄의 직무유기야.

레이디 헨젤이 당분간 사교모임에 나오지 않겠다는 선언을 했다. 맙소사! 이럴 수가! 이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하필 내가 여는 티타임이 코앞인 이때에! 아아아아아! 포모스가 날 버렸어! 레이디 헨젤이 좋아한다는 간식과 음료를 공수하느라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데에에에!

레이디 헨젤을 불러놓고 그놈의 말브레 극장 사건이나 물어보며 떠들어댄 사람들, 다 망해 버려라! 못 봤다는데 왜 사람을 괴롭혀! 그 자리에 없었다잖아!

레이디 헨젤은 랄리우스의 후예라서 몸도 약할 텐데 정말 걱정이다. 설마 어디 아픈 건 아니겠지? 환절기가 다가오고 있다.

(레이디 헨젤에게서 받은 거절 편지) (눈물자국)

◈ 4월 14일. 왜 이런 날에 비가 오지 않지?

레이디 헨젤은 저택 밖으로 한 걸음도 나오지 않고 있다. 아마 나중에 꼬투리를 잡히기 싫어서 그러는 것 같다. 다행히 아직 의사가 헨젤가에 들락거리는 일은 없다.

레이디 헨젤이 이용하는 의상실을 알아냈다. 데이지 블룸. 여성용 승마바지라는 걸 만드는 유일한 의상실이다. 좋아, 당장 내일 내 것도 주문이닷!

(데이지 블룸의 명함)

◈ 4월 15일. 우중충하다.

오드리 헨젤, 17세, 3월 26일 생, 헨젤 백작가의 첫째.

초록색 머리칼과 눈동자, 가무잡잡한 피부색이 인상적이지만…… 머리칼은 염색이고 피부색은 일부러 태운 것일 확률이 높다(미쳤나봐). 남은 건 초록색 눈동자인데, 레이디 헨젤의 강렬한 인상의 80%는 바로 그 눈동자에서 오는 게 분명하다.

부모 중 어느 쪽도 초록색 눈동자가 아니었는데 그렇게 선명한 빛깔은 대체 어디서 온 거지?

좋아하는 꽃: 꽃보다 나무 취향. 굳이 꼽자면 체리꽃.

좋아하는 향수: 아카시아 향기를 베이스로 다양한 베리에이션을 준다.

좋아하는 색: 흰색과 녹색. 의외로 짙은 붉은색이 잘 어울리는데 잘 안 입어서 아깝다. 음, 그러고 보니 그냥 짙은 색은 다 잘 어울리는 거 같은데? 피부가 가무잡잡한데 신기한 일이야.

과일 취향: 딸기. 신맛이 강한 과일은 싫어하는 듯.

차와 다과 취향: 만탈락 특산 선인장 수액이 들어간 냉차를 가장 좋아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과일 향이 나는 차에 잼을 넣어 먹거나 설탕을 듬뿍 넣어 먹는 걸 좋아한다. 다과류도 초콜릿과 과일절임을 많이 쓴 걸 좋아함. 한번 따라 해 봤다가 죽는 줄 알았다. 어떻게 그렇게 달게 먹을 수 있지? 만탈락에선 다 그렇게 먹나?

특기: 춤!!!!! 레이디 헨젤은 춤을 정말 잘 춘다!!!! 뒤에서 수군대는 사람들도 이건 인정해야 할 거야. 치맛자락을 날리면서 날렵하게 춤추는 걸 보고 있으면, 발이 땅에 닿아있지 않은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자주 추지 않아서 정말 아쉬워. 내가 남자였으면 정말 좋았을 거야. 그럼 매번 무도회 때마다 레이디 헨젤에게 춤 신청을 했을 텐데.

아, 피아노도 칠 줄 아는 것 같은데, 이건 좀 불확실한 게……. 다른 모임에서 같은 곡을 연주하는 걸 몇 번이나 들었다. 하지만 사교모임용으로 몇 곡만 외워서 돌려막기 하는 건 가난해서 교육을 많이 받지 못한 사람이나 하는 짓인데……. 설마 레이디 헨젤이 그럴 리가 있나. 그냥 좋아하는 곡이라 자주 연주한 거겠지. 그럴 거야. 레퍼토리가 한정되어 있어서 그렇지, 일단 치는 건 정말 잘 치잖아.

취미: 승마. 애마의 이름은 윈디, 말채찍은 유모가 생일 선물로 준 것이고 애용하는 마구 세트는 장인 주드락의 작품. 쇼핑도 꽤 좋아하는 것 같다. 특히 마법 도구 신제품과 기발한 비마법 도구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없다. 멋모르는 공자 몇 명이 거들먹거리며 아는 척을 했다가 톡톡히 망신을 당하는 꼴을 보고 어찌나 고소하던지……. 특이하게도 쇼핑에서 현금을 많이 쓴다. 안 무겁나?

주로 이용하는 의상실은 데이지 블룸. 유행과는 상관없이 고객의 요구를 그대로 반영해 주는 곳이라 애용하는 듯. 보석상은 단골이 없고, 전담 하녀가 따로 있는데 눈이 높고 까다롭다고 입소문이 자자하다. 경매장까지 다니는 모양인데 정말 대단한 열정이야.

에스코트 기사는 카프러스 베텔 경. 직속 하녀들만큼이나 입이 무거워서 짜증난다. 뭐 알아낼 수 있는 게 없어. 어떻게 요즘 시대에 이렇게 이야기책에서 나온 듯한 기사가 있을 수 있지? 그런 주제에 레이디 헨젤의 일탈엔 의외로 관대하게 굴고……. 뭔지 모르겠단 말이야.

(레이디 헨젤의 아침 승마코스를 표시한 간단한 지도)

좀 더 알고 싶다. 궁금해. 나도 산책 정도는 할 수 있는데 승마바지 입고 가면 상대해 줄까? ……아, 일단 그 차림으로 집 밖에 나가는 것부터가 난관이겠구나……. 흑흑.

◈ 4월 18일.

레이디 그웬이 레이디 헨젤과 많이 친한 것 같아서 일부러 초대했는데 생각보다 아는 게 없다. 레이디 헨젤의 차 취향 같은 건 이미 예전에 다 수집했고 이젠 다른 것들을 더 알고 싶은데……. 헨젤가의 담장이 너무 높다. 좌절스러워.

레이디 타우레드를 만났다. 허리가 진짜 가느다랬다. 레이디 헨젤도 그다지 사람 같진 않지만, 레이디 타우레드도 사람 같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세상에 그런 사람이 존재하지? 빛과 설탕을 모아 빚어낸 사람 같았다. 얼굴과 몸만 그런 게 아니라 목소리가…… 와, 목소리가 정말 최고였어.

그런데 레이디 타우레드가 왜 레이디 헨젤에게 관심을 갖는 걸까? 이거야 원, 좋은 쪽인지 나쁜 쪽인지 알 수가 있나. 어머니는 무조건 좋은 쪽일 거라는데 그걸 어떻게 그리 장담하신담.

◈ 4월 24일.

데이지 블룸에서 코르셋 없이 입을 수 있는 새 드레스를 만들었다는데 당연히 레이디 헨젤 거겠지? 봄무도회에 나오려나 봐!

◈ 4월 27일. 세상이 아름답다.

역시! 봄무도회에는 레이디 헨젤이 올 줄 알았어! 레이디 헨젤의 머리칼은 여전히 초록색이고 드레스에는 여전히 코르셋이 없다! 이쯤 되면 그냥 대단하다는 말밖에 안 나온다. 그걸 그냥 두는 헨젤 백작도 대단하고, 사방에서 수군거리든 말든 듣는 체도 안 하는 레이디 헨젤도 대단하고.

레이디 헨젤은 무도회장에서 세 명의 남자와 춤을 추었고, 두 명의 남자를 거절했다. 그리고 남는 시간은 전부 만년필을 홍보하는 데 썼다! 와, 대단한 사람 같으니라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평소 사교모임에서는 활달하게 말도 잘하고 분위기도 잘 읽으면서 어떻게 이런 곳에서 그렇게 행동할 수 있지? 레이디 헨젤은 자기 평판을 개선할 생각이 없나?

귀부인들이 레이디 헨젤이 없는 곳에서 얼마나 입방아를 찧어대는지 나는 감히 끼어들 엄두도 안 나던데……. 설마 자기 평판을 모를 리는 없을 것이고.

하긴 개선 의지가 있었으면 새벽 승마부터 그만뒀겠지. 최소한 승마바지를 승마 드레스로 바꾸기라도 했을 거야.

그런데, 평판을 개선하지 않아서 어쩔 셈이지? 결혼할 생각이 없는 건가? 하지만 그런 선택을 하기엔 가문 내에서 입지가 썩 좋을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야. 뭘까? 뭐지? 더 관찰하면 알 수 있을까?

그나저나 만년필은 정말 흥미롭다. 평소 쓰는 깃펜과는 비교도 안 되게 편할 것 같다. 전용 잉크를 써야 한다는 점이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이거 전용 잉크, 색은 좀 다양한가? 일단 몇 개 사서 언니에게도 보내주고 나도 써야겠다.

◈ 4월 28일. 이런 날엔 비가 와야 해. 벼락이 쳐야 한다고! 하늘이 파랗다니 이건 말도 안 돼.

레이디 헨젤이 쓰러졌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사람이 왜? 레이디 헨젤은 랄리우스의 혈통이니까 이런 갑작스런 건강 악화 소식이 어색할 건 아니지만, 만탈락에서도 환절기마다 앓았다고는 들었지만, 브란젤에서는 쭉 건강했잖아.

어제 춤을 세 번이나 추면서 무도회장을 누비던 사람이 오늘은 침대에 드러누워 있다니, 어째 기분이 이상하다. 꾀병이면 좋을 텐데 헨젤가에 급히 의사가 들어갔다는 얘기를 들어보면 꾀병은 아닌 것 같고……. 아, 어떡하지. 마음 쓰여! 미칠 것 같아!

그래, 문병……! 문병 갈까? 딱히 대화를 나눠본 적도 없긴 하지만……. 친분이랄 것도 없지만……. 그래도 선물 가지고 가면 설마 내쫓지는 않겠지……? 레이디 헨젤은 평판이 나쁘니까 문병 올 사람도 딱히 없을 거고, 그러니 문병 온 사람이 있으면 기뻐할 거야. 어쩌면 이 기회에 친해질 수 있을지도 몰라!

뭘 가져가면 좋지? 당장 가져갈 수 있는 게 뭐가 있지?

(레이디 헨젤이 좋아하는 물품 목록)

◈ 4월 30일.

놀랍다. 나 같은 애들이 한둘도 아니고 여러 명이라니. 응접실에서 마주쳤을 때 정말 창피해서 죽어버리고 싶었다. 심지어 가져온 선물도 다 비슷했어. 달콤한 과자류나, 향기 좋은 나무가 심긴 화분……. 내 것도 나무 화분이었고. 흑흑, 하지만 괜찮은 선물을 고르기엔 너무 시간이 촉박했단 말이야.

제일 특이한 선물은 노란 깃이 예쁜 작은 새였는데…… 장담하는데 그거 자기 새였을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선물로 가져와 놓고 도로 가져가는 게 말이나 되냐고. 하여간 웃기다니까. 그리고 레이디 헨젤은 동물 안 좋아한다. 뭔가 길러보는 게 어떠냐고 사람들이 말할 때마다 생각 없다고 한단 말이야. 윈디를 아끼는 것도 신기할 지경이라고.

근데, 레이디 헨젤은 얼마나 아프기에 병문안 온 손님들에게 얼굴도 못 비추는 거지? 의사는 딱 한 번 다녀간 게 전부고 그냥 감기라고 해서 별일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왠지 불안해. 레이디 헨젤은 헨젤 백작이랑 사이 나쁘잖아. 망상은 적당히 해야지. 그치만 헨젤 백작은 10살짜리 딸을 남부에 처박고 한 번도 안 가봤 레이디 헨젤은 금방 일어날 거야.

◈ 5월 5일.

이상한 모임에 초대를 받았다. <레이디 헨젤의 취향이 궁금한 사람들의 모임>? 이게 뭐람. 징그러워.

◈ 5월 8일.

생각보다 괜찮은 모임이었다. 음, 의외로 나쁘지 않았어……. 나이도 비슷해서 말도 잘 통하고……. 성격도 비슷하고. 서로 가지고 있는 만년필을 늘어놓고 구경했는데 즐거웠어.

◈ 5월 17일.

레이디 헨젤은 오늘 종일토록 상점가를 돌았다. 시곗줄을 사러 온 것 같았는데 마음에 드는 게 없었는지 네 군데나 되는 상점의 창고를 뒤엎고도 아무것도 사지 않았다.

(가게 이름과 머무른 시간 기록)

마지막엔 그웬가의 오누이와 마주쳤는데, 가까이 가지 못해 대화를 못 들었다. 레이디 그웬이 제 오라비를 나무란 걸 보면 무슨 말을 했는지는 뻔하지만. 또 그웬가의 공자가 멋대로 점수를 매겼다가 한소리 들은 거겠지!

◈ 5월 19일.

제블린이 말하길, 레이디 헨젤은 자기 출신지가 만탈락이라고 말하고 다니는 사람이니까 최근의 살론 스타일은 더 마음에 안 들었을 거란다. 만탈락은 살론보다 색을 화려하게 쓰고 장신구도 대범한 느낌이 들도록 세공하는 게 특징이고 어쩌구저쩌구. 흥, 레이디 헨젤의 쇼핑을 따라다니면서 직접 취향을 확인한 사람이 바로 난데 무슨 잘난 척을 그리 하는 건지 모르겠다. 나도 알거든!

역사적 인물 혹은 사건과 동시대를 살았거나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이 직접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기록한 편지, 자서전, 유물 등을 1차 사료라 한다. 이 일기장은 확실한 1차 사료였다.

“출처가 어딜까.”

한창 자료 수집 중에 익명으로 날아온 일기장이었다. 레이디 오드리의 행적이 워낙 꼼꼼하게 적혀 있어 대단한 도움이 될 것 같긴 한데 출처를 모르니 쉽사리 쓰기가 망설여졌다. 물론 워낙 꼼꼼한 만큼 일기장의 주인을 찾아내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 같긴 하지만…….

“‘8월 14일. 레이디 헨젤이 벨키스 경, 레이디 타우레드와 함께 리가 항구로 휴가를 떠났다. 레이디 타우레드의 초대였다고 한다. 의외인 것은 베텔 경도 그 여행에 동행했다는 것이다. 누구의 억지였을까? 베텔 경은 그야말로 기사의 표본과 같은 인물이라 자신이 발 들일 곳을 정확히 아는 사람인데.’ 기차표 영수증을 첨부했네. 어떻게 구한 건지……. 흐음, 이런 자료는 진짜 귀한 건데.”

이렇게 좋은 자료를 안 쓰면 그건 그것대로 아까운 일이다. 오드리가 막 브란젤로 올라와 한참 욕을 먹던 시절, 그 시절에 그녀를 주시하고 있던 누군가의 일기는 그렇게 레이디 오드리 전기의 내용을 풍성하게 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잡스러운 이야기를 빼고 새로이 엮어 출판되기까지 했다.

레이디 오드리의 전기는 대히트를 쳤다. 출판사와 저자는 축배를 들었지만, 정작 그 전기를 펼쳐 본 오드리는 너무 큰 충격을 받은 나머지 쉽사리 기절하지 않는 자신의 굵은 신경줄을 한스러워했다.

일기장을 본 뒤에는 더했다. 본인도 까먹은 어린 시절을 이렇게까지 자세히 박제하다니, 너무한 거 아닌가! 안타깝게도, 그 시점의 오드리는 역사의 전면에 나설 만한 처지가 아니었다. 그녀는 눈물을 삼키며 항의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불평까지 포기한 건 아니었지만.

“날 따라다니는 아가씨들이 있는 거야 알았는데, 그걸 기록으로 남길 줄은 몰랐어. 아니, 기록할 거면 똑바로 기록하든가. 미묘하게 틀려서 더 기분 나쁘잖아.”

“어디가 문제인데요?”

“사방천지가 다 문제지만 무엇보다 여기! 난 동물을 좋아해! 동물이 날 싫어하는 것뿐이지!”

“…….”

“그리고 말이야, 내가 좋아하는 색이 흰색과 녹색이라는 건 대체 어디서 나온 정보야? 옷 보고 추측했나? 그때 나는 그냥 주는 대로 입어서 내가 무슨 색 옷을 입고 다녔는지도 잘 모르는데.”

“그럼 오드리는 무슨 색을 제일 좋아하는데요?”

“그야 당연히 은색과 옅은 푸른색이지. 내게 의미 있는 색은 딱 그 두 개뿐인걸.”

셰비언은 오드리 몰래 출판사를 뒤집어엎으려던 계획을 조용히 접었다.

덕분에 레이디 오드리의 전기와 이름 모를 누군가의 일기장은 무사히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나란히 그 해의 베스트셀러로 남을 수 있었다.

<레이디 오드리의 인생 외전>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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