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어느 멋진 날
한때, 잘 꾸며진 기차 1등칸을 타고 여행하는 것이 부와 성공의 상징이던 시절이 있었다. 요즘에도 훌륭한 관광자원으로 유명한 기차편이 있긴 하지만 기차 관광이 최고이던 건 어디까지나 과거의 이야기.
최근의 유행은 뭐니뭐니 해도 호화롭게 꾸민 대형 여객 강철새를 타고 하는 여행이었다. 개량에 개량을 거듭하고 새로운 마법을 적극적으로 적용한 호화 강철새는 하늘에 떠 있을 수 있는 시간만 거의 열흘에 육박했고, 밖을 볼 수 있는 특수 구조가 적용되어 경치를 보는 데에도 무리가 없었다.
비록 안전상의 이유로 많은 승객을 태우지도 않을뿐더러 표 값도 어마어마하게 비쌌지만, 그걸 또 매력으로 느끼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어 호화 강철새 영업은 순항을 거듭했다.
하지만 올해 스물네 살 생일을 맞은 레제 라콜타는 이런 호화로운 여행과는 별로 인연이 없는 인물이었다. 아르테 데아의 졸업 예정자 중 상위권 학생에게 주어진 특전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큰 초호화 강철새 여행은 꿈만 꾸었을 것이다.
레제는 바깥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로비 구석에 마련된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아 경치 구경에 여념이 없었다. 온통 고급품으로 채워진 침실도 충분히 좋았지만, 손톱보다 더 작게 보이는 건물과 길게 엎드린 산맥 등을 구경하는 것만큼 즐겁지는 않았다.
“세상이 넓다더니 그게 참말이었구나…….”
최근 개교 35주년을 맞은 아르테 데아는 본래 종합예술학교를 표방하며 출발했다. 하지만 예술가에게 지식과 지혜가 필요 없다는 건 편견의 소산물이라고 주장하며 정치, 경제, 지리, 철학, 마법, 역사 등 점차 다루는 학문의 영역을 늘리고 수준을 높이더니, 지금은 명실상부한 멜브란트 최고의 종합교육기관으로 자리 잡았다.
그런 곳에서 학생을 우물 안 개구리로 키웠을 리 없건만, 레제는 종이 위에 그려져 있던 지도와 실제로 눈앞에 보이는 지형을 비교하며 연신 감탄했다. 책을 통해 세계를 여행할 수도 있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간접경험에 불과하다는 걸 이렇게 체감하니 감흥이 남달랐다.
하나 아무리 구경이 좋아도 배는 채우고 봐야 한다. 레제는 로비 한쪽에 마련된 카페테리아를 찾았다. 간단한 핑거푸드와 음료 몇 가지를 파는 곳이었다.
‘세상에, 이게 다 뭐야…….’
레제는 카페테리아의 메뉴판을 받아들고 당황했다. 이름은 물론 설명을 봐도 알아볼 수 없는 메뉴들이었다. 눈이 마구 떨리고 등에서 땀이 났다.
‘피오치나……. 네가 그립다.’
금수저 물고 태어나 이런 것에 빠삭한 동기가 갑자기 그리워졌다. 그놈의 교오양을 강조해 대는 말버릇이 싫어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대충 다 떠맡겼더니, 설마 혼자서는 메뉴 주문도 못 하는 사태가 발생할 줄이야.
이 초호화 강철새에 탄 뒤로는 그야말로 만능 열쇠 같았던 피오치나는 아침부터 침실에 누워 쉬고 있었다. 그녀는 높은 고도를 견뎌내지 못하는 드문 체질의 소유자로, 주기적으로 마법약을 복용해야 했다.
“뭘로 하시겠어요?”
아까부터 한참을 기다리고 있던 점원이 끝내 주문을 재촉했다. 레제는 시야가 빙글빙글 도는 착각 속에서 적당히 아무거나 짚었다.
“이, 이거랑……. 이걸로 주세요.”
설마 이런 곳에서 사람 못 먹을 음식을 주지는 않겠지. 레제는 그리 믿었지만, 그건 너무나 안이한 생각이었다. 없는 것 없는 고급 여행을 영업 포인트로 삼은 이 초호화 강철새에는 호불호가 심하게 갈리는 지역 토산품도 빠짐없이 구비되어 있었다.
조금 뒤, 레제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지독한 구린내를 풍기는 정체불명의 과일 음료와 너무 달아서 정신이 나갈 것 같은 마들렌을 앞에 두고 진지한 고민에 빠졌다.
정말 이런 걸 주문해서 먹는 사람이 있단 말인가, 혹시 자신이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건 아닌가, 피오치나의 말대로 교오양을 익히지 못한 티가 그리 많이 났나, 나름 좋은 옷을 챙겨입고 나왔는데 이걸론 부족했단 말인가, 뭐 그런 고민이었다.
레제는 음식을 앞에 두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쩔쩔맸다. 정 못 먹을 것 같으면 그냥 버리고 다시 주문하면 되는데, 음식을 귀하게 여기라는 가르침이 몸에 배어 차마 그러지도 못했다.
바로 그때, 레제에게 구원의 손길이 내려왔다.
“아가씨. 혹시 마음이 바뀌어 그 메뉴를 먹을 생각이 사라진 거라면, 부디 제 것과 바꾸는 친절을 베풀어주시겠습니까? 실은 제가 몹시 먹고 싶었던 메뉴인데, 안타깝게 아가씨의 몫이 마지막 재료였다고 하는군요.”
말투도 내용도 친절한 사람이 내미는 접시엔 보기만 해도 청량한 계피 음료와 폭신한 파운드 케이크 조각이 담겨 있었다. 상당히 허기진 상태였던 레제는 사양의 미덕은 잠시 잊기로 했다.
“얼마든지요.”
“감사합니다.”
“에이, 천만에요. 감사는 제가 드려야……. 어?”
자신에게 친절을 베푼 상대의 얼굴을 뒤늦게 확인한 레제가 놀라 얼빠진 소리를 냈다.
그는 까마귀 깃처럼 새카만 머리칼, 얼음 언 호수처럼 옅은 물빛 눈동자가 인상적인 미남이었다. 짙고 우아한 눈썹, 곧은 콧대, 살짝 미소지은 입술……. 이 얼굴 그대로 조각상을 빚어 제출하면 교수로부터 미의식에 크게 발전이 있었다고 칭찬받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레제는 이 친절한 미남이 누구인지 단숨에 알아차렸다. 비록 실물을 보는 건 처음이지만, 그는 자신을 전혀 모르겠지만, 그래도.
“디하니예 랄리우스 가넷…….”
무려 아르테 데아의 가장 큰 후원자로 꼽히는 레이디 오드리의 유일한 친아들. 디하니예는 부모의 유명세 때문에 태어나기도 전부터 세간의 관심을 받았지만, 그가 어느 정도 자란 뒤에는 부모의 이름보다 본인의 미모로 더 유명해졌다. 오죽하면 남자에는 관심 없는 레제조차 그의 얼굴과 출신을 단박에 알아볼 정도일까.
디하니예가 곤란한 듯한 미소를 짓고 제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사적인 가족여행으로 온 것이니, 웬만하면 모른 척해주시겠어요?”
“아, 네……. 죄송,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즐거운 여행 되세요.”
감사는 무슨 감사. 레제는 쟁반에 고개를 처박고 파운드 케이크를 퍼먹었다. 메뉴판을 못 알아보고 아무거나 주문했던 것보다 유명인을 봤다고 대뜸 이름을 불러 버린 게 더 창피했다. 피오치나가 옆에 없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나 그건 어디까지나 레제의 감정일 뿐. 초면인 사람이 자신을 보고 아는 체하는 일에 워낙 익숙한 디하니예는 돌아서자마자 레제의 무례를 새카맣게 잊었다. 그는 잔뜩 신이 난 표정을 숨길 생각도 않고 손수 쟁반을 들어 날랐다.
“어머니, 시장하다고 하셨죠? 제가 직접 주문해 왔습니다.”
“……이 마들렌은 내가 좋아하는 게 맞는데……. 두리안 주스라니, 제대로 주문한 거 맞니?”
“달고, 고소하고, 부드럽잖습니까. 딱 어머니 취향인데요. 여기 카페테리아 수준이 높네요. 두리안 냄새를 이 정도로 억제하다니요. 컵에 마법이 걸려 있는 것 같은데, 대단하네요.”
오드리는 미친놈 보는 듯한 시선으로 제 아들을 바라보았다. 용과 인간의 혼혈로서 인큐베이터 마법진의 도움을 받아 태어난 디하니예는 보통 인간들보다 오감이 훨씬 더 예민했다. 자신도 맡을 수 있는 구린내면 디하니예에겐 똥통 수준으로 맡아질 게 분명했다. 한데 필요 이상으로 방긋방긋 웃고 있는 꼴을 보아하니 그 저의를 알 만했다.
‘놀려먹으려고 들고 온 거겠지. 아니면 앞으론 심부름시키지 말란 뜻이거나!’
오드리는 어이가 없었다. 결혼 30주년 기념 여행이니 따라오지 말라는 걸 굳이 따라와 놓고는 이런 심술이라니. 오랜만에 오기와 승부욕이 발동했다.
“좋아, 거기 딱 앉아 있어.”
“네?”
“설마 날 혼자 먹게 둘 거니? 맞은편에 앉아서 대화 상대를 해줘야지.”
디하니예는 뒤늦게 사정을 설명하고 쟁반을 치우려 했지만 늦었다. 오드리는 끝내 아들을 앞에 앉혀놓고 간식을 먹었다. 디하니예의 웃는 낯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어머니는 그 마들렌이 입에 들어가요? 어떻게 들어가요? 혀가 마비될 것 같지 않아요?”
“내 입맛에 네가 뭐 보태준 거 있니?”
“그렇게 말씀하시면 할 말은 없는데 말이죠……. 설탕 많이 먹어서 몸에 좋을 거 없어요.”
“이건 설탕이 아니라 선인장 수액과 과육을 넣어서 만든 거야. 여긴 음식을 제대로 한다더니 정말 그렇구나. 수액은 몰라도 과육은 제대로 보관하기가 꽤 까다로울 텐데 수준이 높네.”
한때 만탈락 특산품으로 멜브란트 전역에 유통되던 실렌다 사막의 선인장은 이제 고사 직전에 이르러 있었다. 원인은 명백했다. 서식지 파괴.
선인장이 자라던 실렌다 사막의 기후는 약 30여 년 전부터 극적으로 변화했다. 일단 사막의 마른 땅을 충분히 적시기에 충분한 비가 내렸고, 자갈밭이던 땅에 무성한 풀과 나무가 자라나는 등 초목의 구성이 바뀌었다. 자연히 정착하는 사람이 늘어났고 그들이 키우는 가축과 가축의 천적 등이 유입됐다. 여러모로 선인장이 서식하기엔 적합하지 않은 환경이었다.
뒤늦게 사태를 알게 된 오드리는 급히 선인장 온실을 짓는 등 뒷수습에 나섰지만 모든 걸 되돌리기엔 상황이 너무 나빴다. 안 그래도 단 것을 즐기는 문화 자체가 쇠퇴하고 있는 시기였는지라 선인장에 대한 수요는 점차 줄어들었고, 혀가 아릴 정도로 단 선인장 과즙을 이용한 간식은 이젠 소수의 취향이 되었다.
“그 마들렌을 입에 넣었던 아가씨 표정이 어땠는지 어머니가 보셨어야 했어요.”
“흥. 단맛의 매력을 모르는 사람들 같으니라고.”
“어머니, 두리안 주스는 안 드세요?”
“…….”
“휘젓지만 마시고 드세요.”
“이런 매정한 녀석.”
“다 어머니를 닮아서 이런 거예요. 솔직히 저는 얼굴만 아버지 닮았지, 내용물은 어머니를 똑 닮았잖아요.”
오드리는 차마 변명하지 못했다. 사실이었으니까. 어린 디하니예를 돌보던 릴리가 주인님은 어째 자식마저 주인님 같은 아들을 낳아서 자신을 괴롭히느냐고 한탄한 적도 있었다. 이디케 역시 그에 격한 동의를 표했고 말이다.
오드리는 숨을 멈추고 두리안 주스를 들이켰다. 맛있긴 맛있었다. 코가 떨어져 나갈 것처럼 괴로워서 그렇지. 적지 않은 양을 꾸역꾸역 원샷한 그녀가 입술을 닦으며 창백한 안색으로 중얼거렸다.
“두리안 주스를 시켰다는 그 아가씨, 언제 한번 얼굴이나 봤으면 좋겠구나.”
“어머니, 말씀하지 마세요. 냄새나요.”
“내가 저런 걸 자식이라고 키웠다니.”
디하니예는 오드리의 한탄은 듣는 둥 마는 둥 한 귀로 흘리고 얼른 쟁반을 가져다줘야겠다며 잽싸게 그 자리를 떴다. 어느 모로 보나 도망이었지만, 오드리는 디하니예를 붙잡지 못했다. 입을 열면 그대로 토할 것 같았다.
‘나이 먹고 이게 뭐 하는 짓이람.’
자기 자신에 대한 회의에 휩싸여 있는 오드리에게 쭈뼛거리며 다가온 사람이 있었다. 바로 레제였다.
“저어……. 이거 드실래요?”
벌벌 떨리는 손으로 내민 것은 입 냄새를 없애주는 효과가 있는 사탕이었다. 오드리는 고민에 빠졌다. 아무리 젊은 아가씨가 주는 거라지만 낯선 사람인데 이걸 받아, 말아?
“그, 그 주스 제가 시켰던 거거든요. 가넷 공자께서 메뉴를 바꿔주셔서 너무 감사했는데, 제가 보답할 수 있는 건 고작 이런 것뿐이라…….”
본래 레제는 파운드 케이크를 마구 퍼먹고 계피 음료를 원샷한 뒤 곧장 침실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도움을 받아놓고 그냥 자리를 뜨는 건 아무래도 마음이 걸려서, 입 냄새 제거 사탕을 들고 디하니예를 찾았다가 뜻밖의 광경을 목격했다.
“설마 레이디 오드리께서 드실 줄은 몰랐어요. 죄송해요.”
“아가씨가 나한테 죄송할 게 뭐가 있어요? 그걸 나한테 갖다 먹인 게 바로 내 아들인데. 그런데…… 묘하게 낯익은 얼굴이네요. 우리, 어디에서 본 적 있던가요?”
“아, 네! 저는 아르테 데아의 올해 졸업 예정자인 레제 라콜타라고 합니다. 재작년 겨울에 레이디 오드리께서 아르테 데아에 방문하셨을 때 멀리서나마 뵈었습니다.”
오드리가 희미하게나마 자신을 기억해 줬다는 것만으로도 레제의 얼굴엔 숨길 수 없는 기쁨이 어른거렸다. 옷깃에 달아둔 아르테 데아의 배지가 잘 보이도록 자세를 고치는 동작에서 학교에 대한 자부심이 넘쳐흘렀다.
그 솔직하고 순진한 반응이 오드리의 경계를 풀었다. 오드리는 순순히 레제가 내미는 사탕을 받아 입에 물었다. 몇 번 입에서 굴리며 침을 묻히자 순식간에 녹아 사라지며 입안이 상쾌해졌다. 계속 코를 울리던 냄새가 없어지니 그제야 살 것 같았다.
“고마워요. 마침 필요하던 거라……. 서 있지 말고 앉아요.”
“네? 네? 제가요? 레이디 오드리의 앞에? 앉아요? 제가요?”
“계속 그렇게 서 있으면 다리 아프잖아요.”
긴장할 대로 긴장한 레제의 동작은 극히 부자연스러웠다. 의상실의 마네킹이 삐걱대고 움직이는 것 같았다.
“뭘 그렇게 긴장을 하고 그래요? 내가 아르테 데아의 후원자라서 그래요?”
“그, 그것도 그렇지만요!”
레제는 빙긋 미소 짓는 오드리를 홀린 듯 바라보았다. 디하니예만 하더라도 레제보다 두 살이 많은데, 정작 디하니예의 어머니인 오드리는 레제의 또래처럼 보였다. 여전히 매끄러운 피부와 붉은 입술을 보노라면 쉰여섯이라는 나이가 조금도 믿어지지 않았다.
‘신문에 실리는 사진은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좀 나이 들어 보이게 손을 댔나? 어째 재작년에 봤을 때보다 더 젊어진 것 같아.’
어떤 사람의 얼굴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화가의 붓에 의존해야만 하는 시대는 카메라의 등장과 함께 끝났다. 사진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폭발적이었고 카메라는 해가 바뀔 때마다 극적인 발전을 거듭했다.
하지만 극도의 사실성을 강조하며 등장한 사진이 사실은 어느 정도 조작이 가능함이 밝혀지며 말들이 많았다. 보아하니 신문에 자주 실리곤 하던 오드리의 사진도 어느 정도 손을 댄 게 확실해 보였다.
‘손에 가볍게 들고 다닐 수 있는 카메라가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럼 바로 이 모습을, 어 저 포즈 좋다. 저걸 딱 찍어서…….’
사진에 관심이 많은 레제의 상상이 엉뚱한 곳으로 뻗어 나갔다. 가볍게 가지고 다니기엔 너무나 덩치가 크고 무거운 카메라가 원망스러웠다. 저 젊고 예쁜 얼굴, 시간이 비껴간 듯한 현세의 벨트람을 사진으로 남겨야 하는데 아쉬워 미칠 지경이었다.
아르테 데아의 학생이라면 대개 그렇듯, 레제도 레이디 오드리의 팬이었다. 벨트람 포스터 시리즈가 담긴 엽서를 모으는 게 그녀의 취미였다.
“이건 어쩌다 탄 거예요? 졸업기념 여행인가? 가족과 함께 왔어요?”
“아, 아뇨……. 아르테 데아에서 상위권 졸업 예정자에게 특전을 줬거든요. 그래서 다른 친구와 함께 왔어요.”
“아르테 데아에서……. 아하…….”
오드리는 돈 없다고 우는 소리를 하던 에이쉬를 떠올렸다. 깊은 배신감이 올라왔다. 이 초호화 강철새의 표는 그리 만만한 가격이 아니었다. 그걸 특전이랍시고 학생에게 턱턱 안겨줄 수 있으면서 후원금 액수를 늘려달라고 그리 졸랐단 말인가.
‘두고 보자.’
속으로는 칼을 갈아도 레제에게 보여주는 오드리의 얼굴은 여전히 우아하고 상냥했다.
“라콜타 양은 우수한 학생이로군요. 졸업 후 예정하고 있는 진로는 뭔가요?”
“아직은 결정한 게 없어요. 일단은…… 좀 돌아다녀 보려고 해요. 멜브란트도 좋고, 살론도 좋고, 두프트도 좋고, 나랍도 좋고……. 갈 곳은 얼마든지 있잖아요.”
“음……. 이런 질문은 실례인 걸 알지만, 라콜타 양은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나요?”
“스물네 살이요.”
레제가 이런 건 왜 묻느냐는 듯한 얼굴로 눈을 깜빡거렸다.
“한창 돌아다니기 좋은 나이죠. 결혼은 좀 늦게 해도 괜찮은 것 같아요.”
라고 말을 덧붙이며 흐뭇하게 웃기까지 하니, 오드리는 선명한 세대 차이를 느꼈다. 요즘 처녀들의 결혼적령기가 이십 대 중반까지 올라왔다는 보고를 받긴 했는데, 서류로 보는 게 아니라 눈앞에서 날 것의 의견을 들으니 역시 충격이었다.
‘나 땐 스물다섯에 결혼하는 것도 엄청나게 늦은 결혼이었는데.’
고작 30년 사이에 멜브란트의 분위기 자체가 이렇게 변한 데에는 몇 가지 중요한 계기가 있었다.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면 역시 귀족 상속법 개정안이 통과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딸이라도 정식으로 작위를 상속할 수 있었고, 남자 형제와 동등한 계승 순위가 주어졌다. 특별하고 합당한 이유 없이는 함부로 계승 순위에서 딸을 배제할 수 없었다.
그 과정에서 반발이 어마어마했지만 그만큼 밀어붙이는 사람들의 면면이 지극히 화려했다. 일단 국왕인 가스트로부터 하나뿐인 공주에게 카즈네 공작위를 상속시키고 싶어 했고, 타우레드 후작이 된 라비린은 피올 부부의 딸을 데려다 양녀로 삼고는 작정하고 자신의 후계자로 키워 버렸다. 그 외에도 라디아타 왕비, 일테니아 후작, 카즈네 공작, 카론 남작, 랄리우스 후작, 아르젠 백작……. 오스미다 혼자서 분투하던 때와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지원이 있었다.
귀족 상속법 개정의 영향은 사방으로 번졌다. 일단 계승 순위가 동등해지자 딸에게도 아들과 같은 고급 교육을 시키는 풍조가 생겼다. 심지어 데뷔탕트를 치를 때까지 집 안에 가둬두지 않고 아들과 똑같이 14세가 되면 밖으로 내보내 앞으로 진출할 분야에 대한 경험을 쌓게 만드는 게 유행하기도 했다.
아르테 데아는 그 과정에서 상당한 수혜를 입은 곳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유행이 유행에 그치지 않도록 꾸준한 영향을 미쳤다. 아르테 데아는 개교 당시부터 여학생에게도 문이 활짝 열려 있었으니까.
본래부터 여학생을 받았던 살론의 대학뿐만 아니라 아르테 데아까지도 늘어나는 학생에 흥청거리는 걸 본 다른 대학들도 슬금슬금 입학 문을 넓혀 여학생을 받았다. 여자 졸업생들은 비단 예술뿐만 아니라 사회의 다양한 분야에 진출했다. 아직은 유리천장이 공고하게 유지되고 있지만, 과연 앞으로도 그럴까?
공주가 카즈네 공작이 되고 라비린의 양녀가 타우레드 후작이 되는 건 정해진 미래였다. 미래의 고위 귀족 두 사람이 자신과 같은 성별에게 좀 더 유화적이고 친근하게 구는 건 일찍부터 유명했다. 눈치 빠르고 행동이 기민한 사람들은 여성 부하직원을 적극적으로 끌어올려 제 곁에 두었다. 최근 관료사회에서 초고속 승진을 한 사람들의 성별 대부분이 여자였다.
가문의 미래를 아들이 아닌 딸에게 맡기는 것을 불안해하는 사람들이야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의 입을 다물게 만드는 좋은 예가 있었으니, 바로 오드리와 산트렘의 기사들이었다.
오드리의 별명은 여전히 레이디 오드리, 현세의 벨트람이었다. 아무리 레이디 오드리라지만 저 성세가 얼마나 가겠느냐, 곧 무너질 것이다 악담하던 사람들이 무색한 세월을 보냈다.
로렐라이와 데멘사, 이 둘은 오드리가 가진 부와 명예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다. 유선 전보의 시대가 뒤로 밀려난 지금에도 마법망을 안정시킬 목적으로 전보선은 계속해서 깔리고 있었고 그녀가 적극적으로 투자한 강철새는 그야말로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산트렘의 기사들은 새로 편성된 공군에 대거 진출했다. 그들은 전장의 무대가 육지에서 바다로 이동하며 쓸모없는 고급인력쯤으로 추락했던 기사의 위상을 멱살 잡고 끌어올렸다. 기사로서 지휘관 교육을 받은 파일럿은 그렇지 않은 파일럿보다 확연히 우수한 성과를 냈다.
새로운 세대의 파일럿 육성을 위해 분투하는 산트렘의 기사들 상당수가 여기사였다. 연약한 여자를 강인한 남자가 지켜줘야만 한다는 말이 구시대의 농담처럼 들리기 시작한 데에는 그들의 영향이 매우 컸다. 산트렘 기사단은 이제 지역에 구애받지 않고 신입을 받았다.
그 외에도 마법약의 대가로 꼽히는 에이미, 강철새와 마법 동력 분야 최고 권위자인 비니타, 벨트람 포스터로 유명한 화가 네이기스, 명실상부한 로렐라이의 수장 이디케, 약초학 전공 학생들의 필수도서를 집필한 다이앤 등 사회 각 분야에서 이미 자신의 가치와 능력을 증명한 여자들이 이 시대에는 유독 많았다.
상류계층의 변화는 하위계층에게도 차근차근 흘러내려 갔다. 아직은 갈 길이 멀지만 영향을 미치고 있는 건 확실했다. 평민 여자들의 교육 기회와 활동 범위가 점차 늘어나고 있었다.
이 모든 요소들이 모여 여자들의 결혼적령기를 늦췄다.
오드리는 딱히 이런 변화를 유도한 적도 없고 목표한 적도 없었다. 그녀의 목표는 다른 곳에 있었다. 그녀는 오스미다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제2의 레이디 오드리를 키우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한데 그 긴 세월 동안 제2의 레이디 오드리는커녕 비슷한 시도를 하는 사람도 나오지 않았다.
예전보다 환경도 조건도 주변의 시선까지도 훨씬 좋아졌는데 왜 이럴까. 이러다 선구자가 아니라 별종으로 끝나고 마는 거 아닐까.
요즘 오드리의 최대 고민이었다. 오드리는 제 앞에서 발갛게 뺨을 붉히는 레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저 반짝이는 눈으로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몰라도, 아르테 데아에서 이런 값비싼 여행을 후원해 줄 정도의 성과를 보인 학생이다. 분명 인재일 것이다.
“라콜타 양, 혹시 부모님은…….”
“어머, 레이디 오드리! 안녕하세요!”
금화가 짤랑거리는 듯 맑고 높은 목소리가 대뜸 대화에 끼어들었다. 돈과 시간을 들여 정성스레 훈련한 그 목소리는 오드리에게 아주 익숙한 것이었다.
“피오치나? 네가 여긴 왜……. 넌 강철새가 체질에 안 맞을 텐데?”
“에이, 모처럼 아르테 데아에서 보내주는 여행인데 사양하긴 좀 그렇잖아요.”
레제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오드리와 친근하게 말을 나누는 피오치나를 바라보았다. 피오치나가 귀족 출신인 건 알았지만 오드리와 친분이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던 탓이었다.
피오치나는 오드리의 권유 없이도 냉큼 의자를 차지하고 앉아서는 레제를 손가락질했다.
“레이디 오드리, 보이세요? 제 친구가 이래요. 저와 기숙사에서 2년이나 같은 방을 썼고 지금은 제일 친한 친구인데도 이런다니까요. 레제, 너 내 성이 뭔지 기억은 하니?”
“당연히 알지. 피오치나… 피오치나 콘체… 콘체르테……. 여기 더 있었는데. 아, 피오치나 콘체르테 카즈네! 너 카즈네 공작가 영애였지, 참.”
현 치안대의 수장이자 수도방위대의 수장, 히엠스 카즈네 공작의 막내딸이 바로 피오치나였다. 편하게 이름을 부른 지도 오래된 데다 다른 학생들과 다를 바가 없는 평소의 모습에 너무 익숙해져서 까맣게 잊고 있었다.
“레이디 오드리, 피오치나도 저와 함께 아르테 데아의 특전을 받은 졸업 예정자예요. 음, 당연히 알고 계셨겠지만요.”
“아니에요, 처음 알았어요. 피오치나가 여기 탔을 줄은…… 상상도 못 했네요. 강철새가 맞지 않는 체질인데 어쩌다…….”
“레이디 오드리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면 어떡해요? 요즘 마법약이 얼마나 많이 발전했는데요. 약만 정기적으로 먹으면 아무 문제 없어요.”
피오치나가 입술을 삐죽였다. 살짝 눈을 흘기는 모습마저 앙큼하고 사랑스러웠다. 오드리는 자신이 한때 제2의 레이디 오드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기대했던 피오치나의 이마를 한 대 쥐어박고 싶어졌다.
“피오치나가 아르테 데아에 다니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대단한 특전을 받을 정도로 성적이 상위권이었는 줄은 몰랐는걸. 설마 라콜테 양과 나란히 1, 2등이라도 거머쥐었니?”
오드리의 당연한 질문에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레제와 피오치나가 서로의 눈치를 보며 우물댔기 때문이었다.
‘음……?’
오드리는 머릿속 구석에 처박혀 있던 피오치나에 대한 정보를 끄집어냈다. 피오치나는 어린 시절부터 그 오스미다에게 예쁨을 받을 정도로 말을 잘하고 머리 회전이 빨랐다. 오드리가 카즈네 공작가의 사람들이 죽은 듯이 사는 이유를 빤히 알면서도 너, 가주가 되어 가문을 이끌어보고 싶지 않니 충동질을 해 볼 정도였다.
하나 피오치나는 자신만큼 가족도 중요하다며 제 발로 아르테 데아에 들어갔고, 오드리는 아쉬움에 한참 투덜거렸었다. 거절할 거면 그냥 거절하면 되지, 부족한 재능을 기부금으로 때워가며 아르테 데아에 들어갈 건 또 뭐냐고 말이다.
‘그러게? 다른 일반 대학이라면 모를까, 아르테 데아에서 피오치나가 수석을 다툴 수가 있나?’
오드리는 지그시 피오치나를 바라보았다. 얼른 자수하렴, 네 친구 앞에서 네 입학 과정을 다 불어버리기 전에, 뭐 이런 뜻을 담아서.
“레이디 오드리, 사실대로 말씀드릴게요.”
피오치나는 눈치가 빠르고 결단력이 있는 아가씨였다.
“아르테 데아에서 상위권 졸업 예정자에게 이런 특전을 준 적은 없어요. 이 여행은 제가 개인적으로 계획한 거예요.”
“역시.”
“뭐어?”
오드리는 고개를 끄덕였고 레제는 기겁했다. 친구를 속였다는 말을 하면서도 피오치나는 당당했다.
“레이디 오드리께서 부군과 함께 실렌다 초원으로 여행을 가실 계획이라는 걸 들었어요. 이런저런 조건을 따져 봤더니 역시 이 비행편을 이용하실 것 같았고요.”
피오치나는 일부러 오드리와 같은 비행편을 골라 여행 계획을 짰다. 순진한 레제에게는 적당히 상위권 학생을 위한 특전이라고 변명했다. 장신구 몇 개를 팔아치우는 희생까지 치르며 이런 일을 한 이유는 간단했다.
레제에게 오드리를 후원자로 붙여주기 위해서.
오드리는 의아해졌다. 졸업 후엔 딱히 진로를 정하지 않고 이곳저곳 여행을 다닐 거라는 레제에게 왜 후원자가 필요한 걸까. 당연히 그만큼 여유가 있으니까 그런 계획을 짠 게 아닌가?
피오치나는 답답함에 가슴을 쳤다.
“한가롭게 여행이나 다니는 계획이 아니고, 미답지를 찾는 탐험 계획이에요. 당연히 위험하고 또 위험한 데다 수익은 개뿔도 기대하지 못할 장래 계획이죠! 한데 이 바보는 후원자는 찾을 생각도 안 하고……!”
“에이, 네 말대로 수익을 기대하기가 영 어려운데 어떻게 후원을 부탁해…….”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세상에!”
오드리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웃음을 참았다. 말하다 제풀에 폭발해 버린 피오치나가 레제를 들들 볶는 게 들려왔다.
너는 굶으며 탐험을 다닐 거냐는 둥, 안전을 위해서 레펙치오를 얼마나 써야 할지 가늠이 안 되느냐는 둥, 수익이 안 나긴 왜 안 나느냐는 둥, 사람들이 신기한 이야기에 얼마나 환장하는지 모르냐는 둥, 네가 그림을 그려오면 내가 글을 써주겠다는 둥…….
그때, 오드리의 시야에 셰비언의 얼굴이 가득 들어찼다. 30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예쁜 얼굴이었다. 소리도 기척도 없이 다가온 그가 오드리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췄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리 소란스러워요?”
“피오치나가 내 지갑이 필요하대.”
“이런.”
오드리는 피오치나와 레제가 그저 귀여웠지만, 그게 어디 셰비언의 눈에도 그렇겠는가. 그는 심술궂은 표정을 감추지 않고 입술을 삐죽거렸다.
“왜 그래?”
“중간에 내려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마법 동력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았거든요.”
셰비언이 오드리의 곁을 비운 건 이 호화 강철새의 설비 책임자가 제발 딱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마법 동력을 봐달라고 사정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거절하고, 거절하고, 또 거절하다가 결국 진절머리를 내며 마법 동력을 보러 갔다.
마법 동력은 정말 상태가 안 좋았다. 단순히 충전해 놓은 마력이 부족하다든가 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교체 시기를 놓친 마력 구슬에 너무 많은 마력이 담겨 아슬아슬했다. 설비 책임자가 손발이 닳을 정도로 빌고 또 빈 이유가 있었다.
오드리는 미간을 찌푸렸다. 강철새의 추락, 그것도 이렇게 승객을 잔뜩 실은 대형 여객 강철새의 추락은 반드시 대형사고로 이어진다. 어마어마한 가격의 티켓을 팔아놓고 설비관리에 소홀했다니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미친 거 아니야?’
로렐라이는 강철새를 제작해서 판매만 하기에 관리감독 책임까지는 지지 않는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만약 이 호화 강철새가 로렐라이 소속이었으면 오드리가 타기 전에 모든 점검을 다 끝마치고 반짝반짝한 신품 못지않은 상태가 되어 있었겠지만 말이다.
“고칠 수는 없었어?”
“강철새와 마법 동력에 대해서는 저보다 비니타가 훨씬 전문가예요. 그동안 공부를 게을리 한 벌을 이렇게 받네요.”
오드리가 까르르 웃었다. 그녀는 셰비언의 약한 소리에도 조금도 겁먹지 않았다. 그늘 한 점 없는 미소가 사랑스럽다. 셰비언은 장난을 시작하기도 전에 맥없이 고꾸라지고 말았다.
“이런 중대 사건이면 오드리를 좀 놀려볼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역시 어림도 없군요.”
“정말 큰일이면 그대가 이렇게 차분할 리 없잖아.”
“역시 연기를 못하는 내 탓인가요?”
“아니. 그대가 아무리 연기를 잘해도 나는 알아차릴 수 있어.”
“허세가 대단하네요. 두고 봐요, 오드리. 언젠가 내가 꼭 감쪽같이 속여 넘기고 말 테니까.”
오드리는 앉아서 고개를 젖힌 그대로 웃었다. 기꺼이 허리를 숙인 셰비언이 그런 오드리의 뺨과 턱을 어루만졌다. 낮은 웃음소리와 다정한 속삭임은 맞은편에 앉은 사람들도 듣지 못할 만큼 작았지만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 풍기는 특유의 분위기까지 몰라보는 건 불가능했다.
레제와 피오치나는 어느새 입을 꾹 다물고 눈만 데굴데굴 굴리는 중이었다. 부부의 달짝지근한 애정행각을 코앞에서 보고 있으려니 얼굴이 화끈거려 버틸 수가 없다. 덥지도 않은데 괜히 부채가 아쉬울 지경이었다. 둘은 슬슬 눈치를 보다 슬그머니 엉덩이를 뗐다. 부부가 서로에게 정신이 팔린 사이 몰래 도망칠 셈이었다.
“피오치나, 그리고 라콜타 양.”
기다렸다는 듯 날아온 목소리가 두 사람의 발목을 잡았다.
레제는 그야말로 울고 싶은 심정으로 뒤돌아섰다. 저희가 예의를 몰라서 그냥 도망가려고 했던 건 아니고요, 실은 두 분께 방해가 되는 것 같아서요, 인사는 나중에 따로 드리면 안 될까요……. 온갖 변명이 머릿속에 가득한데 정작 입 밖으로 나오는 건 하나도 없었다.
허리를 세우고 우아하게 의자에 앉은 오드리와 그런 그녀의 뒤에 서서 어깨를 감싸 안은 셰비언의 모습이 너무 완벽했기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책장이 닳도록 읽었던 보물 동화책의 삽화보다 눈앞의 두 사람이 훨씬 더 아름다웠다.
‘이건 반칙이야. 어떻게 사람이 그림보다 예뻐?’
저런 사람들을 찍은 사진을 자기 손으로 훼손해야 하는 사진사는 얼마나 비통한 심정일 것인가. 레제는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사진사를 실컷 동정했다.
“라콜타 양, 조만간 탐험 계획서를 작성해서 보내세요. 반드시 읽어줄 테니 지레 걱정은 말구요. 그 내용이 흥미롭고 괜찮다 싶으면 기꺼이 후원하도록 하죠.”
“네……. 네? 네? 정말요?”
“그렇게 흥분할 것 없어요. 무조건 지원하겠다는 게 아니니까.”
“기회를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해요! 피오치나, 고마워! 네 덕분이야! 이건 정말 내 인생에서……으읍!”
레제는 완전히 흥분상태에 돌입했다. 피오치나는 횡설수설 떠들기 시작한 친구의 입을 막으며 긴장으로 등을 굳혔다. 오드리가 분명 레제를 마음에 들어 할 것으로 생각하고 저지른 일이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일이 쉽게 풀린다는 건 어째 좀 이상했다.
“피오치나.”
“네.”
“난 네 추천이었기 때문에 라콜타 양의 계획서를 읽어주겠다고 한 거야. 그러니 내가 쓰레기를 읽게 하지는 않겠지?”
“그럼요.”
피오치나는 그림은 잘 그려도 글 쓰는 재주는 영 부족한 친구를 위해 며칠 밤쯤은 기꺼이 새울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레제의 성공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니 기대되는구나. 다행이야. 자, 그럼 이제 얼른 네 방으로 돌아가서 귀중품을 챙기렴.”
왜요? 피오치나는 정말 이유를 묻고 싶었다. 오드리의 지시에 즉각적으로 반응한 레제가 피오치나를 질질 끌고 그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더라면, 반드시 물어봤을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녀가 답을 알게 되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승객 여러분께 양해 말씀드립니다. 본 강철새는 불가피한 사정을 만나 예정에 없던 착륙을 하게 되었습니다. 비행이 다소 거칠 수 있으니 승객 여러분께서는 잡을 수 있는…….」
피오치나와 레제는 각기 다르게 반응했다. 피오치나는 역대 여객 강철새 사고들이 일으킨 참사 목록을 떠올렸고, 레제는 머릿속에 노선도를 펼쳐 놓고 지금쯤 어디를 지나고 있을지를 계산했다.
“이제 막 실렌다 초원 초입에 들어섰을 거야. 여긴 인구밀도가 높아서 이만한 크기의 강철새는 절대 못 착륙 못 해. 억지로 깔아뭉갰다간 피해가 엄청날 거고 강철새도 못 버텨.”
“그, 그럼 어떡해?”
“어떡하긴, 더 안으로 들어가야지. 그래도 실렌다 초원은 조금만 들어가도 인구밀도가 확 낮아지니까 괜찮을 거야. 사람도 없고, 딱히 기체를 부서뜨릴 만한 구조물도 없고.”
“아…….”
레제의 웃는 얼굴은 피오치나를 안심시켰다. 최악의 상황까지 머릿속에서 그려보던 피오치나는 퍽 차분해져 차근차근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하긴, 레이디 오드리와 아르젠 백작님이 여기에 타고 계시는데 뭐가 위험하겠어. 내가 괜한 걱정을 했네.”
때때로 무지는 앎보다 낫다. 레제는 웃는 낯으로 피오치나를 도왔지만 그 속은 전혀 차분하지 못했다.
실렌다 초원 안쪽 지역이 왜 인구밀도가 낮은가? 그야 사람이 살 만한 기반 시설이 전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수도도 없고, 도로도 없고, 조명도 없다. 전화는커녕 마법망을 지탱할 목적의 구닥다리 전보선조차 깔려 있지 않았다.
‘무사히 착륙한다고 해도 문제야. 이만한 강철새가 예정에 없던 착륙, 그것도 비행장이 아닌 곳에 착륙하게 만들 정도의 사정이라는 게 대체 뭐가 있지? 그게 실렌다 초원 한가운데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종류의 일이긴 해?’
어쩌면 구조대가 올 때까지 마냥 기다리거나, 아니면 꾸역꾸역 초원을 건너야 할지도 모른다. 레제는 탐험가 지망이고 실렌다 초원 역시 그 목록에 들어 있긴 하지만, 이렇게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맞닥뜨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자꾸 몸이 떨렸다. 흥분과 두려움이 뒤섞여 피를 타고 흘렀다.
“레제, 레제, 이리 와봐.”
피오치나가 레제를 불러 창문 밖을 가리켰다. 조금 전에 뭔가 이상한 걸 봤다면서, 너도 좀 와서 보라고.
“용……. 용이지?”
강철새 바로 곁에서 흰 용이 날고 있었다. 햇살을 받아 매끄럽게 빛나는 날개와 몸이 우아한 선을 그렸다. 활강하는 독수리처럼 펼치고 있던 날개를 어쩌다 한 번씩 날갯짓하는 게 너무 매력적이라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저게 용이구나.”
“저거라고 하면 안 돼. 아르젠 백작님이잖아.”
“그야 알지만…….”
발톱섬의 모험담에서 셰비언이 용으로 등장하는 부분은 언제봐도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장면이었다. 삽화 말고 실제로 보면 어떤 기분이 들까 상상해 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사진이든 실물이든 셰비언은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멎을 듯한 미남이라서, 그가 인간이 아닌 용이라는 게 별로 사실로 다가오진 않았다. 어른들이 2차 괴물사태 때 브란젤의 하늘에서 물고 뜯고 싸운 두 마리 용 이야기를 해줘도 그다지 실감이 안 났다. 또 지겹게 옛날 얘기한다, 뭐 이렇게 넘겼다.
그러나 그건 어제까지의 이야기다. 스물이 훌쩍 넘은 두 아가씨는 어린애처럼 창문에 매달려 용 구경을 하느라 넋을 놓았다.
셰비언은 마법 동력을 멈춘 강철새를 떠받치고 양껏 날개를 폈다. 드넓은 초원을 내달려 온 바람이 날개에 엉겼다가 밀려 나가는 느낌이 선명했다. 목적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마침 알룬드 마을의 야누아 나무에서 꽃이 피어나는 계절이었다. 손톱만 한 보랏빛 꽃송이가 다닥다닥 모여 주먹만 한 공이 되어 나뭇가지 곳곳에 매달려 있었다. 아카시아와 흡사한 달고 청량한 향기가 마을 전체에 자욱했다.
아슬아슬하게 마을 외곽에 딱 맞춰 착륙한 강철새에서 내린 사람들은 주변을 압도하는 나무의 위용에 넋을 놓았다. 비행장이 없고 직접 초원을 횡단해야만 올 수 있는 곳이라 그런지 말이야 많이 들었어도 보는 건 처음인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레제는 카메라를 챙겨오지 않은 걸 뼈저리게 후회했다. 등이 굽는 한이 있더라도 카메라를 지고 와서 한때는 사막이었던 초원에서 꽃을 피운 야누아 나무를 찍었어야 했다. 초원에 자리 잡은 거대한 호수와 그 가운데에서 자라난 거대한 나무의 조합은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경이로웠다.
“자, 이걸로라도 때워.”
피오치나가 이럴 줄 알았다는 듯 레제에게 스케치북과 연필을 건넸다. 레제는 고맙다는 말을 할 틈도 없이 냅다 스케치를 시작했다. 탐험가 지망이긴 해도 그녀의 전공은 회화, 그중에서도 풍경화였다. 흰 종이에 눈앞의 풍경이 빠르게 담겼다. 고작 스케치에 불과한데도 꽃의 향기가 배어나는 듯했다.
‘네이기스 씨의 뒤를 이을 인재를 발견했다고 생각했는데…….’
멍하니 레제의 그림을 구경하던 피오치나는 나무 아래에 두 사람의 인영이 그려지는 걸 보았다. 어떤 사람이기에 그림에 넣는가 싶어 고개를 들어보니 오드리와 셰비언이 나무 아래에 서 있었다. 나무 아래라는 게 바로 물 위라 어이가 없었지만 저 두 사람에게 그런 게 뭐가 문제겠는가.
오드리는 팔짱을 끼고 나무를 올려다보는 중이었고, 셰비언은 그런 오드리의 어깨를 감싸 안고 서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둘 다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셰비언이 수면을 떠다니던 꽃 몇 송이를 주워 오드리의 머리 위에 올렸다. 오드리는 도리질하며 몇 번이고 꽃을 떨어뜨렸지만, 셰비언의 끈질김에 결국 포기하고 얌전해졌다. 반묶음한 긴 곱슬 머리카락 사이에 보라색 꽃잎이 흩어진 모습이 일부러 장식한 것처럼 어여뻤다.
“나이가 몇인데 저러고 있나 몰라. 민망하지도 않나?”
부부가 사이좋은데 누가 초를 치냐! 피오치나는 조금 울컥했지만, 하필 그 말을 한 당사자가 그들의 아들이었다. 게다가 밉살맞은 말을 하면서도 디하니예의 표정은 밝기만 하니, 진심도 아닌 말에 파르르 화를 내봤자 화낸 사람만 우스워진다.
“허구한 날 싸우는 것보다는 저게 훨씬 낫지. 겉모습은 내 또래라고 해도 믿을 정도인데 뭐.”
“나 들으라고 한 말이야?”
“어머, 가넷가의 공자께서 옆에 계신 줄도 모르고 제가 말실수를 했네요. 혹시 불쾌하셨다면 너그럽게 용서하세요.”
피오치나와 디하니예는 어린 시절부터 친분이 있었지만, 쭉 사이가 나빴다. 피오치나는 사내새끼가 나보다 예뻐서 싫다고 했고, 디하니예는 어머니가 본인 딸도 아닌데 쟤만 이뻐한다고 싫어했다.
“말실수는 무슨. 네가 언제 날 앞에 두고 말실수 같은 거 한 적 있어?”
“뭐라는 거야. 야, 사람이 살면서 당연히 말실수쯤 할 수도 있지! 넌 여기 왜 왔어!”
“너 보러 온 거 아니니까 저리 꺼지시지!”
“레제한테 껄떡대기만 해 봐. 그땐 진짜…….”
“껄떡? 야, 넌 귀족 영양이라는 애가 단어 선택이 그게 뭐냐?”
“꺼지라고 지껄인 너도 다를 거 없거든!”
어릴 적부터 서로 머리끄덩이 잡아당기며 큰 두 사람인지라, 나이를 먹고 오랜만에 만나서도 오가는 대화가 유치하기 이를 데 없다. 레제는 그 유치한 말싸움을 바람 소리처럼 흘려보내며 경치를 그리는 데에 박차를 가했다. 이 순간의 분위기와 감흥을 고스란히 잡아내야 하다 보니 다른 곳에 팔 정신이 없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멋진 날이었다.」
훗날, 레제 라콜타는 미답지의 경치를 훌륭한 그림으로 남기는 탐험가로서 이름을 날리게 된 뒤에도 이날을 자신이 경험한 가장 멋진 날로 꼽았다. 그 인터뷰를 읽은 사람들은 레이디 오드리도 그날의 일을 기억하고 있는지 물을 수 없다는 걸 몹시 아쉬워했다.
사람 같지 않은 노화 속도를 보이던 오드리는 이만하면 충분히 했다며 결혼 60주년이 되는 해를 화려하게 축하한 뒤 깨끗하게 은퇴해 버렸으니까.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다니는지, 종종 목격담이 들려오긴 하지만 하나같이 기상천외한 것들이라 신빙성이 떨어졌다.
그 로렐라이와 데멘사의 주인이 개썰매 레이스에 참가해서 뒤에서 2등을 했다는 걸 믿으란 말인가? 고래 떼의 이동을 따라다니느라 6개월을 배에서 안 내리고 살았다는 걸 믿으라고?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사실이었다. 오드리는 셰비언과 함께 즐겁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었다. 두프트의 양조장에서 직접 빚은 술을 라디아타에게 보내고, 순록의 뿔로 만든 소박한 조각품을 모아 장난감 세트를 만들어 손녀에게 선물하고, 본 적 없는 꽃을 엮어 만든 화관을 서로의 머리 위에 얹어놓고 즐거워하면서, 그렇게.
제2의 레이디 오드리는 끝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선구자가 아닌 별종의 삶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들 부부의 끝이 어땠는지, 인간의 역사서는 기록하고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