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셰비언의 생일
살론의 마법사협회에서 초대장이 날아왔다. 수신인은 셰비언, 내용은 바일런 섀덤의 첫 번째 마법 동력 분해에 참여해 달라는 것이다.
오드리가 고급스러운 금박이 박힌 초대장으로 살랑살랑 부채질을 하며 입을 삐죽였다.
“전보 사업권만 처먹고 입은 싹 닦는 줄 알았는데 값을 하긴 하네?”
살론의 마법사협회장, 데블로프망이 들으면 피를 토했을 발언이었다.
발톱섬에 파견했던 마법사의 절반을 잃은 데다 셰비언이 오드리의 병수발을 드느라 파견에 대한 값을 늦게 치르는 바람에 실각 위기에 몰렸던 걸 수습하는 데만 거의 2년이 걸렸다. 바일런 섀덤의 마법 동력을 분해하자는 안건을 통과시킬 수 있을 정도로 영향력을 회복하는 데에는 4년이 더 걸렸고, 셰비언을 초대하니 마니 하는 거로 다투는 걸 제압할 때까지 1년이 더 걸렸다.
데블로프망이 7년을 허송세월하게 만든 장본인이 바로 오드리와 셰비언인 것이다. 간당간당해진 그의 명줄을 붙들어놓는 데에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이 오드리가 넘겼던 전보 사업권이라는 게 또 우스운 일이지만, 인생은 본래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다.
어쨌건 놓치기엔 너무 아쉬운 기회였다. 셰비언은 곧장 짐을 꾸렸다. 오드리와 이디케 등은 도저히 멜브란트를 떠날 수 없었기에, 셰비언의 시중 겸 보좌는 다이앤의 몫이 되었다. 한데 그 소식이 어디에서 어떻게 새어 나갔는지, 생각지도 못했던 껌딱지가 나타났다. 바로 비니타였다.
“마법 동력에 관심 없는 마법사가 어디 있어요? 아이샤도 새로 받은 제자 뒷바라지만 아니었으면 당장 뛰쳐나왔을걸요.”
“워커는?”
“워커 스승님이야 새 강철새 마감 때문에 당분간 아무 데도 못 가는 거 뻔히 아시면서. 그것만 아니었으면 저보다 빨리 오셨을 거예요.”
부정할 수 없이 맞는 말이었다.
데블로프망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멜브란트 마법계의 샛별로 불리는 비니타의 등장에 속이 뒤틀렸다. 셰비언이 데려온 게 아니었다면 빗자루를 휘둘러 대번에 쫓아냈을 것이지만, 그럴 수가 없으니 다른 방법을 썼다. 비니타를 살론으로 데려올 작정으로 꼬드기기 시작한 것이다.
최근 그 명성을 좀 잃긴 했지만, 살론은 뱃사람과 마법사의 나라는 별명을 가진 곳이었다. 멜브란트의 시골뜨기 햇병아리 마법사에게 살론의 선진적인 마법사 육성 시스템을 설명하는 동안 데블로프망의 가슴은 자부심으로 가득 차올랐다.
살론이야말로 마법사의 나라다! 마법의 미래는 살론에 있다!
【멜브란트는 아직도 도제 방식으로 마법을 가르친다죠? 정말 원시적인 방법입니다. 살론에서는…….】
“아하.”
【체계적인 교육 방식이…….】
“오호라.”
【다양한 관심 분야에 대한 접근을 제공…….】
“우와아.”
과연 비니타는 데블로프망이 한마디 할 때마다 눈을 크게 뜨고 선망과 존경의 눈빛을 보내며 감탄사를 아끼지 않음으로써 그를 몹시 만족시켰다. 하나 그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게 있었으니, 비니타는 살론어를 못했다.
셰비언 대신 비니타를 따라다니던 다이앤은 그 촌극을 구경하면서 웃음을 참느라 곤욕을 치렀다.
“살론의 마법사협회장이에요. 그렇게 놀려 먹으면 재밌어요?”
“당연히 엄청나게 재미있죠. 다이앤은 안 재밌어요?”
당연히 재밌었다. 엄청나게 재밌었다. 하나 아무리 하녀라지만 어른 된 입장에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다이앤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피했다.
“우습잖아요. 적어도 날 꼬드기고 싶으면 자기가 멜브란트어를 할 정도의 성의는 보여야 하는 거 아니에요? 최소한 내가 살론어를 할 줄 아는지 정도는 확인했어야죠.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할 말만 하고……. 어휴, 재수 없어!”
“음……. 그래도 마법 동력을 분해할 땐 다들 살론어로 말할 텐데 조금은 배워두는 게 낫지 않을까요. 사실 마법사한테도 살론어는 필수 교양에 속하고…….”
“그건 저도 알아요. 그치만 제가 살론어를 한마디도 못 하는 걸 여기 마법사들한테 들키면 엄청나게 얕보일 것 같단 말이에요. 다이앤이 가르쳐 주면 안 돼요?”
“저요?”
다이앤은 당황했고, 비니타는 씩 웃었다.
“다 알아듣는 거 알아요. 저 멍청한 협회장이 헛소리를 할 때마다 웃음 참느라 애쓰는 거 다 봤어요. 다이앤은 정말 대단해요. 나랍어도 잘하면서 어떻게 살론어도 할 줄 아는 거예요?”
다이앤이 나랍어를 잘하는 건, 그녀가 약제사이기 때문이었다. 북쪽에서는 백 가지 보석이 나고 남쪽에서는 천 가지 약초가 나온다는 속담은 괜히 있는 게 아니니까. 하지만 살론어를 잘하는 건, 그녀의 개인적인 욕심이 낳은 결과물이었다.
다이앤은 대학에 가고 싶었다.
살론의 대학은 여자도 입학할 수 있었다. 비록 그 문턱이 더럽게 높기는 하지만, 다이앤은 믿는 구석이 있었다. 약 10년 전부터 꾸준히 저술해 최근에 겨우 완성한 약초학 서적을 제출하면 입학이 가능할 것도 같았다.
“와……. 그럼 대학에 가려고 일부러 살론어를 배운 거예요? 대단하다! 그런데 왜 입학원서를 안 넣었어요? 혹시 학비가 비싸요?”
“학비는 이제까지 모은 돈이 있으니 괜찮아요. 근데 다른 조건이 받쳐 주니까 이제 시간이 안 되지 뭐예요. 비니타도 알다시피 로렐라이는 바쁘잖아요. 내가 대학에 가고 싶다고 하니까 이디케가 날 죽이려고 들더라고요.”
“에이, 그래도 레이디 오드리는 괜찮다고 하실 텐데요. 근데 어쩌다 대학 생각을…….”
“아가씨야 괜찮다고 하시겠지만 그러면 진짜 이디케한테 못 할 짓을 하는 거 같아서 말이에요. 이디케는 도대체 결혼 언제 할까요? 걘 빨리 결혼하고 싶다고 노래를 불러놓고 아직까지 연애만 하고 있어요. 이젠 아가씨도 결혼하셨는데! 비니타 양, 워커 씨한테 뭐 들은 거 없어요?”
“왜 없겠어요! 안 그래도 헤어졌다고 우울해하면서 얼마나 땅을 파고 있던지! 어차피 또 만날 거면서!”
다이앤의 말 돌리기는 성공적이었다. 안 그래도 워커와 이디케의 지지고 볶는 연애에 지칠 대로 지쳐 있던 비니타는 울분에 차서 제 마법사 스승의 연애가 얼마나 웃긴지 낱낱이 늘어놓기 시작했다.
‘다행이야. 잘 넘겼어.’
다이앤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그녀가 대학을 생각한 동기는 그리 순수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헨젤 저택을 오래 떠나 있을 수 있는 합당한 이유를 찾다가 생각해 낸 것이었으니까.
시작은 다이앤이 하델에게 뺨을 맞던 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두운 복도에 무릎을 꿇고 화풀이에 불과한 따귀를 맞은 날, 다이앤은 하델을 죽여야겠다고 결심했다. 아무도 모르게, 증거 한 조각 남기지 말고 죽여 버리겠다고.
그 건방진 꼬맹이가 없으면 오드리는 헨젤과 랄리우스의 유일한 상속자가 되니, 혹 범인임을 들켜 제가 죽는 일이 생기더라도 나쁘지 않은 장사라고 생각했다. 생각만으로 그친 것도 아니었다. 실제로 꽤 근사한 독약을 만들기도 했다.
만약 다이앤을 때린 일로 오드리에게 야단맞은 하델이 다이앤에게 형식적인 사과라도 건네지 않았더라면. 그랬더라면 하델은 끝내 열넷의 생일을 맞지 못했을 것이다.
하나 죽일 생각을 접었음에도 얼굴을 볼 때마다 짜증이 치미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하델을 보며 안쓰럽다고 말하는 이디케가 도저히 이해가 안 됐다. 하델이 하는 모든 행동이 다 거슬리다 못해 이러다 울화병이 나는 거 아닌가 싶어졌던 어느 날, 네이기스로부터 살론에서는 여자도 대학에 갈 수 있다는 말을 들었던 게 떠올랐다.
대학. 오드리의 화를 사지 않으면서 헨젤가에서 나가 있기에 충분히 좋은 핑계였다.
살론어 공부는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적지 않은 나이에 기초도 없이 무턱대고 시작한 공부는 고통스러웠지만, 그만큼 집중력과 시간을 빼앗는 효과가 있었다. 우습게도 공부에 치이다 보니 하델에 대한 미움마저 희미해졌다.
그렇게 책을 파고들어 익힌 다이앤의 살론어는 다분히 문어적이고 학문적인 면이 있었다. 일상적인 대화에서는 써먹기 어려웠지만, 의외로 비니타에게는 많은 도움이 됐다. 살론의 마법사들이 하는 말을 알아듣기에 매우 적절했던 것이다. 사하스바티의 열성적인 가르침을 받은 비니타는 셰비언보다 습득력이 좋았다.
마법 동력 분해 작업은 하루아침에 끝날 게 아니었다. 워낙 큰일이다 보니 머리를 들이밀고 싶어 하는 치들도 많았다. 두 달로 예정되어 있던 일정은 녹은 사탕처럼 자꾸 늘어졌다. 셰비언은 짜증이 머리끝까지 치밀었지만 비니타는 입꼬리가 내려갈 날이 없었다. 그녀는 마법 동력 말고도 살론에서 배워가고 싶은 게 아주 많았다.
셰비언과 오드리는 2, 3일에 한 번씩 편지를 주고받았다. 매일 일기를 써도 그렇게 길게 쓸 수는 없을 것 같은데, 둘 사이에 오가는 편지는 두툼하기 이를 데 없었다. 편지를 전달해 주던 다이앤이 이렇게 편지를 쓰다간 브란젤로 돌아갈 때가 되면 만년필의 펜촉이 다 닳겠다며 놀려댈 정도였다.
그렇게 오가는 편지 속엔 가끔 일상이 아닌 이야기도 담기곤 했다. 이를테면, 60년에 한 번씩 관측되는 혜성이 곧 올 때가 되었다든가, 혜성이 올 거란 소문이 퍼지자 거리 곳곳에 얼치기 점성술사들이 자리를 펴고 장사를 하는데 그중 제법 괜찮은 사람이 있다며 사교계에서 아주 화제라든가.
가볍게 혜성 이야기를 적어 보냈던 오드리는 생각지도 못한 답장을 받았다.
「인간 기준으로 60년 만에 오는 혜성이면 내 생일 혜성인가 봐요. 내 생일이 있을 때쯤엔 항상 떨어지던 혜성이 있었거든요.」
오드리는 용의 1년은 인간의 60년과 엇비슷하다던 말을 떠올렸다. 오드리와 함께하기 위해 최대한 인간과 엇비슷한 시간 감각으로 살고 있다는 셰비언이지만, 어쩌다 생일을 물어보면 몹시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멀었다고만 대답했던 것도.
한데 셰비언의 진짜 생일을 축하해 줄 기회가 이렇게 갑자기 찾아온 것이다. 오드리는 순식간에 의욕에 가득 차서 온갖 궁리를 시작했다.
“두 번째에도 내가 축하해 줄 수 있을지는 영 모르는 거잖아.”
질린 표정으로 이리저리 내빼던 사람들마저도 그 자리에 앉혀놓는 마법의 한마디였다. 마침 셰비언은 살론에 있었으니, 브란젤에 남은 사람들은 시도 때도 없이 모여 어떤 선물이 좋을지 궁리했다.
하지만 결론은 좀처럼 나지 않았다. 일단 오드리는 셰비언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을 이미 써버린 참이었다. 바일런 섀덤의 마법 동력 분해 말고 대체 뭘 주어야 할까. 그에겐 재능도, 보물도, 사랑도, 그 무엇도 부족한 게 없는데.
너무 괴롭힘을 당한 나머지 지칠 대로 지친 이디케는-오드리는 괴롭힘이 아니라 의논이라고 주장하겠지만- 아무렇게나 말했다.
“그냥 아가씨 목에 리본 감으세요.”
“뭐?”
“백작님이 받아서 좋아할 만한 게 뭐겠어요? 아가씨밖에 더 있어요? 제가 왕년의 솜씨를 최대한 발휘해 볼 테니까 기대하세요. 포장 하나는 끝내주게 해드릴게요.”
“셰비언이 그걸 좋아할까? 음, 어쩌면 좋아할 것 같기도 하고? 리본은 역시 빨간색이 좋겠지? 옷도 포장지처럼 입을까? 아니, 차라리 벗는 게 낫나?”
“……농담이에요. 진정하세요. 아가씨는 그런 얘긴 대체 어디서 들은 거예요?”
“로맨스 소설에 자주 나오던데.”
“아, 좀!”
그렇게 두 사람이 한창 투덕거리는 그 자리엔 라비린도 동석하고 있었다. 무선 전보 보급 투자금 문제 때문에 왔던 라비린은 자꾸 엉뚱한 곳으로 흘러가는 대화 흐름을 더 견디지 못하고 불쑥 끼어들었다.
“평소에는 멀쩡히 머리 좋은 두 사람이 왜 연애만 끼면 멍청한 토론을 하는지 모르겠다니까. 다 집어치우고 둘이 같이 여행이나 가. 셰비언은 다른 방해 없이 오드리 너와 단둘이 있으면 그걸로 만족할 거야.”
“여행?”
“너 발톱섬 사건 이후로는 한 번도 제대로 쉰 적 없잖아. 몇 년 전엔 만탈락에서 쉬겠다고 패기 있게 휴가장을 던지더니 그때도 가서 실컷 일하고 왔지? 이번엔 진짜 쉬어. 아예 만탈락 근처엔 가지도 말고, 그래, 차라리 셰비언 성벽은 어때?”
라비린의 말이 이어질수록 오드리의 얼굴은 환하게 밝아지는 반면 이디케의 안색은 까맣게 죽어갔다. 라비린은 이디케로부터 투자금 승인을 받기는 글렀다는 걸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적어도 오늘은 안 된다.
‘망했군.’
무선 전보는 지금도 제한적인 곳에서 쓰이고 있었다. 강철새가 뜨고 내리는 비행장이 대표적이었다. 라비린은 그 전보를 개량해서 지금보다 많은 곳에서 다양한 용도로 쓰이게 하고 싶었다. 개발은 충분히 됐고 남은 건 보급인데, 이디케의 반대가 만만찮았다. 이런 건 나라가 할 일이지 일개 상단에서 손댈 사이즈의 일이 아니라나.
일단 오늘은 후퇴가 현명해 보였다. 라비린은 오드리의 얼굴이 환해졌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기로 하고 모자를 집어 들었다.
“락시 양, 너무 그렇게 싫은 표정 하지 마. 오드리의 빈자리는 내가 최대한 메워볼 테니까.”
구색 맞추기로나마 덧붙인 이 위로는 훗날 산더미 같은 일거리로 돌아오게 되지만, 이 시점의 라비린은 아직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다. 제 발등을 찧은 거니 누굴 원망할까.
셰비언은 오드리에게서 단둘이 시간을 보내자는 편지를 받기 무섭게 살론을 떠났다. 어차피 마법 동력 분해 중 가장 중요한 작업은 다 끝냈고 나머지는 꼭 보지 않아도 되는 것들이었다.
졸지에 낯선 나라에 덜렁 남겨지게 된 비니타와 다이앤이 분통을 터뜨렸지만 어쩌겠는가. 시간을 돌려 오드리의 편지를 가로챌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 좋은 기회를 다 내던지고 멜브란트로 돌아갈 수도 없는데.
그나마 그들에게 위안이 된 것이라면, 오드리가 앞으로 그들의 일정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지원금을 주겠다는 의사를 밝혔다는 거였다. 기한도 금액 제한도 없는 파격적인 지원 의사를 확인한 날, 다이앤은 셰비언에게 퍼부었던 욕을 죄다 주워 담았다.
살론은 꼭 대학이 아니더라도 볼 것 즐길 것 배울 것이 많은 나라였다.
셰비언은 멜브란트 왕실에 셰비언 성벽 전 지역이 자신의 구역임을 통보했다. 가스트로가 대관식을 치르기도 전의 일이었다. 가스트로는 인간의 상식과 법으로 용과 싸우기보다 타협을 시도했고 셰비언은 관대히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으니, 셰비언 성벽의 일부 지역은 영구히 아르젠 백작의 영지가 되었다.
셰비언 성벽과 인접해 있다지만 궁벽한 지역이었다. 날은 추웠고 보석 산출량은 그저 그랬으며 자연히 인구도 적었다. 사람이 사는 곳보다 개발되지 않은 면적이 압도적으로 넓었다. 번화한 지역을 갖기보다 보다 넓은 구역을 차지하는 것에 집중했던 그에게는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하지만 셰비언이 자신의 영지에 방문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건 오드리도 마찬가지였으니, 일찍 찾아온 겨울을 대비하느라 바쁘던 주민들은 처음 맞이한 주인 부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혼란에 빠졌다.
딱 봐도 부부 둘이서 다정한 시간을 보내려고 온 거니 모른 체하는 게 맞긴 한데, 그러기엔 둘 다 너무 유명인인지라 그냥 보내기가 아쉬웠다. 촌장이 태도를 결정하지 못하고 허우적대는 동안 발 빠른 사람들이 행동을 개시했다.
매일 다른 간식을 만들어 가져다주며 한 번이라도 더 얼굴을 보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발톱섬의 전투가 담긴 책에 사인을 받고 싶어 안달하는 사람도 있었다. 오드리는 거의 매일 자수 모임에 초대를 받았고 셰비언은 같이 얼음지치기를 하러 가자는 동네 꼬맹이들에게 시달렸다.
오드리와 셰비언은 소탈한 태도로 주민들과 어울렸다. 색감과 무늬가 화려한 북부 특유의 천으로 만든 전통의상을 입고 목구멍이 화끈해지는 독주를 마셨으며, 눈썰매와 스키 같은 낯선 겨울 운동을 즐겼고 순록과 썰매개 등 신기한 가축도 구경했다.
“조용히 쉬러 온 분들을 귀찮게 하면 안 되지, 이 사람들아!”
“촌장, 그러는 촌장 아들도 책 가져가서 사인 받은 거 알아?”
“아니, 이 망할 놈이 대체 언제!”
촌장은 들뜰 대로 들뜬 사람들을 허겁지겁 나무라고 어린 아들의 머리도 몇 대 쥐어박아 준 뒤 오드리 부부에게 사과를 하러 찾아갔지만, 그들이 머물던 작은 집은 텅 비어 아무도 없었다.
셰비언은 모처럼 오드리와 단둘이 보낼 수 있게 된 귀한 시간을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싶어 하지 않았다. 북부의 문화는 가볍게 색다른 경험을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오드리 역시 주민들과 어울리기보다는 자신과 단둘이 있고 싶어 하는 셰비언의 소원을 들어주는 쪽이 훨씬 더 중요했다. 셰비언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여행이 아닌가.
하루아침에 마을을 떠난 셰비언이 오드리를 데려간 곳은 바로 자신의 둥지였다. 그가 절벽 아래 마을에서 오드리를 위해 사다 나른 마법도구들이 텅 비어 있던 둥지 곳곳을 채웠다.
오드리는 자신이 또 셰비언의 마력에 휘말려 엉뚱한 생각을 하는 건 아닐까 걱정했지만, 마력을 바닥까지 끌어쓰고 쇠약해졌던 그때의 오드리와 건강하고 활력이 넘치는 지금의 오드리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눈 덮인 평원은 그저 신비롭고 아름다울 뿐, 새삼 오드리를 뒤흔든다거나 하지는 못했다. 그녀는 남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음……. 제대로 달았나?”
오드리는 거울을 보며 제 목에 단 리본의 매무새를 매만졌다. 이디케에게 속성으로 배운 방법대로 묶었는데 어째 느낌이 달랐다. 묘하게 어설프고 조잡했다. 오드리는 입술을 꽉 깨물고 리본을 풀었다. 포기하면 편할 텐데 자꾸 다시 시도하게 되는 건, 셰비언에게 조금이라도 예쁘게 보이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다.
그렇게 몇 번째인지 모를 시도를 반복하던 중, 희미한 기척이 느껴졌다. 오드리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설마 셰비언이 벌써 돌아온 건가? 일부러 시간이 오래 걸릴 만한 걸로 부탁했는데!
하지만 이리저리 살펴도 셰비언은 보이지 않았다. 잠시 느껴졌던 기척도 금세 사라졌다. 오드리는 내가 착각했구나, 생각하고 다시 리본 매기에 열중했다. 시도에 시도를 거듭한 보람이 있는지 리본은 점차 제대로 된 모양새를 갖춰갔다.
오드리의 목에 빨갛고 풍성한 꽃이 피었다. 오드리는 드디어 거울에 비친 리본의 형태에 만족하고 남은 단장을 시작했다. 정성스레 머리를 빗질하고 옷을 갈아입고……. 오드리가 얇은 드레스의 허리끈을 묶고 있는데, 또 묘한 기척이 느껴졌다.
‘이상하다?’
이번엔 절대 착각이 아니었다. 오드리는 유령 따위를 믿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장소가 장소였다. 여긴 무려 용의 둥지인 것이다. 발톱섬에서의 기억이 되살아나며 등골에서 서늘한 한기가 흘렀다.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즐겁거나 설레서는 아니었다. 의식 구석에 묻혀 있던 공포가 되살아난 것에 가까웠다.
오드리는 남은 단장을 포기하고 기척의 주인을 찾아 둥지 곳곳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셰비언은 오드리를 위해 둥지의 많은 부분을 바꾸어놓았는지라, 아이샤까지 끼어 셋이서 지낼 때처럼 텅 빈 공간은 드물었다.
이곳에 다시 와서 셰비언에게 둥지를 안내받았을 때, 오드리는 셰비언이 둥지를 굉장히 아름답고 세련되게 잘 꾸몄다고 생각했다. 인간 사회에서 머무는 동안 멋진 심미안을 길렀다고 말이다.
한데 셰비언이 곁에 없는 지금, 멋지고 넓은 둥지는 딱 그만큼 황량하고 싸늘한 곳으로 변모해 있었다. 오드리가 정신없이 이 방 저 방을 뒤지고 다니는 동안에도 그 빌어먹을 기척은 사라지지 않고 종종 느껴지며 그녀를 자극했다. 몰이사냥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 셰비언이 본체 상태로 쉰다는 큰 공동에 다다랐을 때, 오드리는 더 견디지 못하고 주저앉아 셰비언을 불렀다.
“셰비언!”
셰비언, 셰비언, 셰비언……!
오드리 본인이 듣기에도 처량한 메아리가 되돌아왔다. 오드리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무릎을 끌어안고 머리를 처박았다. 작은 어깨가 동그마니 말려 언뜻 보기에도 안쓰러웠다.
그렇게 오드리가 웅크리고 앉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더없이 익숙한 손길이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오드리.”
셰비언이라는 걸 알았을 텐데도 오드리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도리어 거세게 팔을 쳐내기까지 했다. 단순히 장난을 칠 생각이었던 셰비언은 그제야 크게 당황했다. 이런 식의 잡기 놀이는 전에도 몇 번이나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땐 웃기만 하더니 이번엔 왜 이럴까.
“오드리, 많이 놀랐어요? 나예요. 진정해요.”
“흑…….”
발톱섬에서 온갖 험한 꼴을 다 보고도 눈물은 흘리지 않았던 오드리였다. 셰비언의 머리가 하얗게 비었다. 그는 오드리를 끌어안고 입이 닳도록 사과했다. 자신이 생각이 짧았다, 너무너무 잘못했다, 다시는 이런 장난은 치지 않겠다, 미안하다…….
오드리는 셰비언의 사과를 실컷, 정말 실컷 듣고 나서야 고개를 들었다.
“재밌었어?”
셰비언은 갈등했다. 꼭 솔직하게 말해야 하나? 하지만 발갛게 달아오른 오드리의 눈가를 보자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 조금은요…….”
오드리는 어이가 없었다. 이럴 때는 좀 거짓말을 해도 되는데 꼭 그렇게까지 솔직할 이유가 뭐가 있나? 하지만 그 융통성 없음에 혀를 차면서도 기분이 좋아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셰비언의 정직함이 흡족했다.
‘내가 이렇게 변덕이 심했던가?’
이렇게까지 기분이 널뛰어도 되나? 의문은 잠깐이었다. 침울하게 눈을 내리깐 셰비언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고 있으려니 화가 저절로 풀리는 걸 어쩌란 말인가.
‘저 얼굴에 대고는 화를 못 내겠다니까.’
하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안 그래도 미남계를 잘 쓰는 셰비언인데 앞으로 무슨 일이 있을 줄 알고? 오드리는 짐짓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놀랐잖아. 다신 이러지 마.”
“네, 절대 안 그럴게요.”
“샤를레아의 함정에 다시 빠진 기분이었단 말이야. 무사히 구출되어 그대와 결혼까지 했던 게 전부 환상이었으면 그건 진짜 못 견뎠을 거야. 그대가 조금만 더 늦었으면 진짜로 울어버렸을지도 몰라.”
셰비언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발톱섬에서 겪었던 일들은 거의 다 잊어버렸던 오드리였다. 대체 언제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단 말인가?
“오드리……. 이제 기억나는 거예요? 샤를레아가 오드리에게 저질렀던 일들.”
아차. 오드리의 얼굴에 낭패가 번졌다. 셰비언이 오드리에게 거짓말을 못 한다고는 하지만, 오드리도 셰비언에게 거짓말을 못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언제부터예요?”
“그게…….”
오드리가 구체적인 기억을 떠올리기 시작한 건 실렌다 사막에 발을 들였을 때부터지만, 징조를 보인 건 에이미에게서 풍기는 유황 냄새를 맡았던 그날부터였다.
큰 사자의 등을 타고 끝없는 사막을 헤매는 꿈.
그때는 그저 우스운 악몽 중 하나라고만 생각했지만, 지나고 나서 되짚어보니 그냥 넘겨도 좋을 꿈이 아니었다. 오드리가 겪었던 함정 중에서 가장 길었고 위험했던 환상이 바로 그 마지막 환상이었다. 그저 모험담의 내용을 꿈으로 꾼 것이 아니었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에이미가 제대로 갈무리하지 못하고 흘려낸 샤를레아의 마력이 오드리를 자극한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왜 말하지 않았어요?”
“어차피 지난 일이라고 생각했지. 실제로 그 뒤에도 아무 일 없었잖아?”
오드리가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 하나 셰비언은 오드리처럼 그리 쉬이 넘기지 못했다. 오드리가 불안해하며 둥지 곳곳을 달리던 게 연기가 아니었다 생각하니 절로 목이 메었다.
“정말 미안해요.”
“그대가 너무 미안해하니까 내가 오히려 당황스러운걸. 괜찮아, 괜찮아. 아까 우는 소리도 그대 들으라고 낸 거지 정말 눈물이 나서 그랬던 거 아니었어.”
“……그랬구나아. 난 정말 놀라서 아무 생각도 안 나고 그랬는데…….”
“크흐흠. 그나저나 여긴 왜 데려온 거야? 일부러 여기로 데려온 거 맞지?”
셰비언이 본체 상태로 머무는 공동은 아주 커다란 반구 형태를 띤 공간이었다. 조명이랄 것도 없이 희고 투명한 얼음만 벽과 천장을 이루고 있는데도 묘하게 밝고 환했다. 딱히 정성 들여 장식하지도 않았지만 너무 넓고 큰 공간은 그 자체로 경외감을 불러일으켰다.
셰비언은 오드리를 데리고 공동의 한가운데에 섰다. 천장이 뚫린 것도 아닌데 햇살이 들이쳐 오드리의 머리칼을 타고 흘러내렸다.
“오드리, 피 한 방울만 얻어도 될까요?”
오드리의 것이라면 빠진 머리카락 한 올도 아까워하던 이가 피를 요구하다니. 오드리는 순순히 손을 내주었다. 곧 따끔한 느낌과 함께 집게손가락 끝에 작은 상처가 생겼다. 손가락 끝에 맺혔던 피가 흰 바닥에 툭 떨어졌다.
다음 순간, 풍성한 마력이 공동 전체를 휩쓸었다. 차갑고 매끄럽던 바닥에 이끼와 풀이 자라나고 순식간에 키를 키운 나무들이 넓게 팔을 벌렸다. 바람도 없는데 이파리는 살랑살랑 흔들렸고 산뜻한 향기는 공동을 가득 메웠다.
오드리는 야누아 나무숲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그녀는 신발을 벗고 땅에 발을 디뎠다. 무성한 이끼와 풀이 침대 매트리스처럼 푹신했다.
“어때요? 마음에 들어요?”
“……정말… 정말로 마음에 들어. 근데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어? 여긴 그대가 잠들어야 할 곳인데 이래도 돼?”
“내가 본체 상태로 있는 날이 얼마나 된다고요. 그보다 오드리 마음에 든다니까 정말 다행이네요. 흰 벽과 눈 덮인 평원만 보고 있으면 지루하고 재미없잖아요. 네이기스 화백에게 도안을 짜달라고 한 보람이 있어요.”
셰비언이 제 둥지에 이만한 숲을 조성하는 데에 성공한 건 오드리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셰비언 혼자서는 온갖 짓을 다 해 봐도 실패만 거듭하던 숲이, 오드리의 피 한 방울이 더해진 것만으로도 이렇게 풍성하게 자라났다. 그는 만탈락의 주민들이 랄리우스를 신처럼 떠받든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일부러 야누아 나무로 구해왔는데, 꽃이 피는 시기가 아니면 향기가 그리 짙지 않다고 하더라고요. 억지로라도 꽃을 피워볼까 했는데, 풀도 아니고 나무의 생태를 조절하는 건 그리 좋은 영향을 미칠 것 같지가 않아서…….”
말끝을 흐리면서도 셰비언은 바지런히 손을 움직여 제법 그럴듯한 화관을 만들어냈다. 바닥을 차지한 들꽃들이 그를 위해 다투어 꽃을 피워냈다.
“자요, 선물. 이걸로 대신하는 날 용서해 줘요. 오드리가 피를 나눠주지 않았더라면 이런 숲은 꿈도 못 꿨을 거예요.”
오드리는 셰비언이 씌워준 화관을 만지작대며 얼굴을 붉혔다. 셰비언에게서 귀중한 선물은 수없이 많이 받아보았어도 이만큼 마음에 드는 선물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첫 번째는 당연히 청혼받던 날에 셰비언이 직접 만들어준 풍등이지만, 이 화관도 그에 못지않은 감흥이 있었다.
“여길 이렇게 숲으로 만들어 버리면 앞으로 그대는 어디에서 쉬어?”
“꼭 여기서 쉴 필요도 없는 걸요 뭐. 본체로 있지 않아도 얼마든지 쉴 수 있고요.”
꼭 둥지에서 쉴 필요가 없으면 둥지는 왜 만드며, 본체로 쉬지 않아도 괜찮으면 커다란 공동은 왜 만들어둔단 말인가. 하지만 성공했다며 뿌듯해하는 셰비언을 보고 있노라니 더는 걱정하는 말조차 꺼낼 수가 없었다.
“셰비언, 나 어때?”
“예뻐요.”
뭘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단숨에 나온 대답이었다. 오드리는 화관을 쓴 채로 몇 걸음 뒤로 물러나 제 목에 달린 리본을 가리켰다.
“그럼 이건 어때?”
“그것도 예뻐요. 일부러 연습했나요? 꽃 모양이 아주 근사한걸요.”
“풀어보고 싶지는 않아?”
“열심히 맸을 텐데 그걸 왜 풀고 싶어 해야 하죠?”
그래, 셰비언이 이렇게 나올 거라고 짐작하긴 했지. 오드리는 잠자코 입을 다물고 그 자리에서 뱅글뱅글 돌았다. 조금 구겨지긴 했지만, 선물상자의 포장지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한 옷이었다.
“……어? 어어?”
그제야 상황을 이해한 셰비언이 멍청한 소릴 내며 얼굴을 붉혔다. 덩달아 오드리의 얼굴도 붉어졌다. 분명 계획을 세우고 제 손으로 리본을 매고 옷을 챙겨입을 때까지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민망해하는 셰비언을 보니 없던 부끄러움이 해일처럼 몰려왔다.
“……이디케가 그러더라고. 그대가 받고 제일 좋아할 선물은 바로 나일 거라고…….”
“에이……. 농담이었겠죠. 오드리를 어떻게 선물로 받아요.”
얼굴을 한참 붉히고 있으면서도 지극히 이성적인 대답이었다. 오드리는 그 자리에서 녹아 사라지고 싶어졌다. 그래도 여기까지 온 이상, 할 말은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더 부끄러워질 게 분명하니까.
“그대의 생일이잖아. 정말 특별한 걸 주고 싶었는데 대체 뭘 줘야 할지 몰라서 그랬어.”
“생일선물은 지금도 받고 있는걸요.”
“응?”
셰비언이 오드리를 끌어안고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평소 서늘하던 입술이 몹시 뜨거웠다.
“한 달가량 오드리의 시간을 독차지할 수 있게 해준다면서요. 오드리의 시간이 얼마나 비싼데, 이 정도면 대단한 선물 아니에요?”
“그, 그게 그렇게 되나.”
오드리는 자꾸만 말을 더듬었다. 자연스럽게 어깨와 허리를 끌어안는 팔과 옷자락 사이를 파고드는 손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다. 목덜미에 닿는 숨이 뜨겁고 달았다. 이리저리 휘둘리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려보니 드레스 상의가 거의 벗겨져 어깨가 훤히 드러난 뒤였다.
가슴팍에 입 맞추는 셰비언의 머리를 억지로 붙들고 눈을 맞췄더니, 그가 세상에서 제일 억울한 표정을 짓는다. 오드리는 하염없이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고 물었다.
“그래도 혜성 떨어지는 건 봐야 하지 않겠어? 오늘 밤이라고 그랬는데.”
“오드리, 지금이 몇 시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별은 밤에 떠요.”
“으음.”
“아까 오드리가 부탁했던 술은 잘 사다놨으니까 걱정 마요. 이따 같이 별 보면서 마셔요.”
“으으음.”
셰비언은 오드리가 도망갈 수 있는 구석을 요령껏 다 틀어막고는 그녀 몰래 웃음을 삼켰다. 둥지의 마법과 나뭇잎으로 걸러진 햇살을 베일처럼 걸친 오드리는 피부가 발갛게 물들어 몹시 보기 좋았다. 입술을 가져다 대자 단단하게 결이 살아 있는 근육이 긴장으로 파르르 떤다.
다나를 잃고 미쳐 버렸던 샤를레아를, 그 미치광이를, 셰비언은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안 그래도 터무니없이 짧은 것이 인간의 생인데, 만약 오드리가 그마저 온전히 누리지 못하고 살해당해 생을 마감한다면 자신 역시 제정신을 유지할 자신이 없었다.
마법의 주인인 만큼 샤를레아보다 몇 배는 더 사납게 날뛸 게 분명했다. 그때는 마법망 안정화니, 바일런 섀덤의 마법 동력이니 뭐니 하는 건 밀가루 한 톨만큼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하아…….”
오드리가 뱉는 숨을 들이마셨다. 달고 달아 머리가 어지러웠다. 녹색 카펫 위에 흐트러져 펼쳐진 검은 머리칼이 셰비언의 시선을 온통 사로잡았다. 오아시스의 물속으로 가라앉는 오드리를 보았을 때의 공포가 새삼 되살아났다. 강하게 끌어안자 버거워하면서도 목과 어깨를 안아주는 팔이 그저 감격스러웠다.
도드라진 날개뼈를 쓰다듬자 오드리의 체온이 훅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그녀는 유독 등이 약했다.
“오드리……. 내가 그 얘길 했던가요? 오드리가 내 공간 안에서 처음으로 마력 안정화 치료를 받았던 날, 정신을 잃은 오드리의 등에서 용의 날개가 돋았었다고요.”
“……뭐? 날개? 뭔 날개?”
“내가 얘기 안 했나요?”
어처구니가 없어 말도 안 나오는 오드리를 앞에 두고 셰비언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순진하게 웃어 보였다.
“그걸 보고 우리가 마력의 계통만큼은 완벽한 동족이라는 걸 알았거든요. 그러고 보니 그날 이후로는 오드리의 마력이 쭉 얌전하기만 했네요. 무슨 일일까요?”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한번 불러볼까요?”
“벌써 다 정하고 묻는 거 아니야?”
“설마요. 오드리가 싫다면 당연히 안 해요. 하지만……. 오늘은 내 생일이잖아요. 들어줄 거죠?”
언제는 오드리의 시간을 독점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더니, 원하는 게 생기자 대뜸 생일 핑계를 댄다. 오드리는 눈을 흘기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셰비언인데, 설마 무슨 큰일이라도 나겠는가.
그리고 오드리는 고작 한 시간여 만에 자신의 안이한 결정을 후회하게 된다. 있는 줄도 몰랐던 날개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셰비언의 부름에 응답해 튀어나와 오드리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이런 게 내 몸에 달려 있다니 기분 나쁘다는 이성과 당연하다는 듯 느껴지는 감각이 충돌했다. 날개에 닿는 나뭇잎의 감촉, 입술의 따스함, 조심스레 뼈대를 훑는 손길에 묻어 있는 다정함…….
몸의 모든 감각이 족히 두 배는 예민해진 듯했다. 모든 것이 두 배였다. 자극도, 쾌감도, 아찔한 상승감과 아득한 추락감까지도, 전부 다.
“……날개 징그러워.”
“예쁜데.”
“징그럽고 무거워. 균형 잡기도 어렵고.”
오드리는 날개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안심하고 셰비언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댔다. 목이 까끌까끌해 침을 넘기는 것도 어려웠다. 신음을 조금만 더 내질렀으면 목이 완전히 쉬어버렸을 것이다.
대체 언제 해가 졌는지, 은은한 빛으로 가득 차 있던 공동은 잔잔한 어둠에 덮여 있었다. 하루아침에 아름드리나무로 자란 야누아 나무의 나뭇잎이 별빛을 모아 흩뿌렸다. 사각사각 풀 흔들리는 소리가 잔잔한 음악처럼 귓가를 간지럽혔다. 느릿한 심장 소리가 듣기 좋았다.
“셰비언……. 내가 그대의 다음 생일도 축하해 줄 수 있을까?”
“그건…….”
“올해 내 나이가 스물여섯이야. 60년에 한 번 오는 거니까, 음, 건강 관리 열심히 하면 그쯤은 살 수도 있겠지……?”
셰비언은 아직 열기가 남아 따끈한 손으로 오드리의 머리칼을 쓸었다. 구불거리면서도 탄력 있는 머리칼은 조금도 걸리는 것 없이 매끄러웠다.
“오드리, 내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 잊었어요?”
“응?”
“마력은 생명력이라고 했잖아요. 기억이 돌아왔다니 말하는 건데, 오드리는 샤를레아의 심장에 남아 있던 마력 대부분을 흡수해서 돌아왔어요. 오드리가 본래 가진 마력과는 워낙 성질이 달라 그다지 써먹지 못하겠지만, 수명 연장에는 확실히 도움이 될 거예요. 앞으로 60년쯤은 아주 거뜬할걸요.”
“으응…….”
“아니, 반응이 왜 그리 떨떠름해요? 내 장담이 못 미더워요?”
“뭐어……. 꼭 그런 건 아니지만. 그대의 장담이 이뤄지도록 노력해야겠는걸.”
“하, 참. 내가 억울해서 진짜, 빨리 연구를 마무리해야지. 내가 바로 용이고 마법의 주인인데 다른 것도 아니고 마력에 대한 의견에 신뢰성을 의심받다니요.”
대단히 진지한 다짐이었지만 오드리는 몸을 떨며 웃었다. 그녀는 피임약 개발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다. 셰비언과 정식으로 결혼도 했겠다, 하늘이 허락하지 않는 것은 바라지 말자고 다짐한 지 오래였다. 따로 셰비언에게 말한 적은 없지만.
“됐고, 이제 혜성 보러 가자.”
드디어 오드리가 기대하고 기대했던 메인 이벤트를 보러 갈 때가 되었다. 셰비언은 오드리를 꽁꽁 싸맸다. 다알리아 머리핀을 꽂고 흰 케이프 코트를 입힌 정도로는 영 마음이 안 놓인다는 것처럼 말이다. 참고 참던 오드리가 새끼 곰처럼 뚱뚱해진 제 꼴에 골을 냈다.
“내가 의상실의 마네킹이야? 적당히 좀 걸쳐.”
“걱정이 되어서 그래요.”
“알아. 그대가 아니었으면 진작 다 벗어버리고 뛰쳐나갔어. 이것 봐, 걷기도 힘들잖아.”
“뭐 어때요. 어차피 오드리는 눈밭에서 잘 못 걷는데 뭐가 다르다고요. 내가 안고 나갈 테니 구를까 걱정은 마요.”
오드리는 다알리아 머리핀 덕에 추위를 느끼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자청해서 눈밭을 구르고 싶진 않았다. 그녀는 얌전히 셰비언에게 안겨 별이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땅에서 빛나는 별이 없는 지역의 하늘은 유독 별이 뚜렷하고 숫자도 많았다. 수백 수천 개 다이아몬드를 뿌려놓은 듯 하늘 전체가 반짝거렸다. 어딜 봐도 별 없는 곳이 없으니, 이러다 혜성이 떨어져도 못 알아채는 거 아닐까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침묵에 잠겨 하늘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입김이 하얗게 날렸다. 오드리의 손을 만지작대던 셰비언이 문득 생각난 듯 중얼거렸다.
“아깝네요.”
“뭐가?”
“생일이 60년에 한 번뿐이라는 게요. 나도 인간처럼 매년 생일을 챙겼으면 오드리와 매년 이런 시간을 보낼 수 있었을지도 모르잖아요.”
오드리는 하마터면 크게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무슨 말을 하려나 했더니, 너무 귀엽지 않은가.
“꼭 생일이어야만 기념하나? 그냥 기념하면 되지. 셰비언, 우리 매년 이날을 기념할까?”
“그래도 돼요?”
“안 될 건 또 뭐 있어. 명분이야 붙이기 마련이지. 어떡할까, 정기휴일로 정해서 로렐라이를 쉬게 할까? 그럼 시간 빼기도 좋고……. 아, 저기, 혜성이다!”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60년에 한 번씩 오는 혜성이 긴 꼬리를 끌며 밤하늘을 가로질렀다. 쇼는 기다린 시간이 무색하도록 짧았지만, 오드리는 배부른 고양이처럼 흡족해졌다.
“그대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저 혜성은 내게 그냥 혜성이었을 텐데.”
“나도 그런 게 있어요. 오드리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내게 다알리아는 흔해 빠진 꽃 중 하나에 불과했을 거예요.”
“듣기 좋은 말 하기는……. 셰비언, 생일 축하해.”
“고마워요.”
오드리는 아까 약속했던 술을 깜빡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가장 좋은 순간을 놓쳐서 아쉽긴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이미 지나가 버린걸. 까짓거, 날이 밝고 나서 햇살 따뜻한 숲에서 마시면 된다.
그렇게 단둘이 먹고 마시고 뒹굴며 한껏 여유롭고 좋은 시간을 보낸 두 사람이 브란젤을 향해 출발하던 날, 셰비언이 충격적인 말을 던졌다.
“참……. 오드리. 당분간 셰비언 절벽 전체에서 보석 산출량이 급격히 떨어질 거예요. 혹시 필요한 게 있으면 미리 사둬요.”
“응? 그걸 어떻게 알아?”
“이 셰비언 절벽의 다음 대 주인이 태어날 거거든요. 보석을 만들던 마력이 죄다 그리로 흘러갈 거예요.”
오드리의 손에서 술잔이 툭 떨어졌다. 셰비언이 크게 웃으며 오드리의 뺨에 입을 맞췄다.
“농담…… 농담이지?”
“농담은요. 확실해요. 둥지에 있는 인큐베이터에 반응이 왔거든요.”
“나, 나, 술 많이 마셨는데…….”
“반쪽이라도 용의 새끼예요. 술 정도는 뭐 별것도 아니죠.”
“그보다 마음의 준비가……. 아니, 애초에 그대와 나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거 아니었어?”
“그걸 극복해 보려고 제가 꾸준히 노력해 온 것 아니겠어요? 지금 저는 이론의 성과도 봤겠다, 자식이 생겨서 매우 기쁜데, 오드리는 별로 안 기뻐요?”
“아냐……. 나도 기뻐…….”
오드리는 갑작스러운 2세 소식에 혼이 나갔다. 셰비언이 생각했다는 그 이론이 뭔지 물어볼 정신도 없었다. 분명 걷고 있는데도 발이 땅에 닿지 않고 둥둥 떠 있는 것 같았다.
셰비언은 아마 아이가 태생이 아니라 난생이 될 것 같다는 얘기는 좀 더 나중에 하기로 마음먹었다. 날개를 껄끄러워하며 싫어했던 오드리가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 가늠이 안 됐다.
훗날 셰비언은 그 결정 때문에 오드리에게 두들겨 맞다 못해 저택 밖으로 쫓겨나 길에서 노숙하는 진귀한 경험을 하게 되지만, 지금 그는 그저 기뻐하기에도 바빴다.
셰비언이라는 개인으로서도, 마지막 남은 용으로서도, 기뻐하기에 충분한 소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