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헨젤 백작
하델은 쑥쑥 잘도 자랐다. 어느 날부터인가 갑자기 무릎이 아프다, 허리가 아프다, 앓는 소리를 해대더니 열여덟쯤에는 헨젤 백작과 눈높이가 비슷해졌고, 스무 살이 되자 그를 내려다볼 수 있게 되었다.
“저는 갈 겁니다.”
“안 돼.”
“자그마치 6년 전에 약속했던 겁니다.”
“허락하지 않겠다.”
하델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한다.
헨젤 백작은 하델이 자신에게 순종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델은 착하고 믿음직한 아들이라, 한 번도 자신을 실망시킨 적이 없었다. 처음에는 조금 반항하더라도 끝내는 자신을 따라왔다. 이번에도 당연히 그러하리라.
하나 시간은 부모뿐 아니라 자식에게도 똑같이 주어진 것이다. 헨젤 백작의 눈에는 여전히 어린 소년이지만, 하델은 자랐다. 적어도 아버지의 뜻이라면 전부 옳을 거라고 생각하는 대신 제 스스로 판단하고 그를 똑바로 말할 수 있을 정도로는 자랐다.
“허락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알아서 갈 테니까요.”
“……뭐?”
“일부러 브란젤이 아니라 만탈락에서 하는 결혼식입니다. 누나도 아르젠 백작도 성을 바꾸지 않을 거라죠. 그런 결혼식에 친족이 한 명도 안 간다는 건 말이 안 돼요. 그러니 제가 가겠다는 겁니다. 아버지더러 가라고 강요하지 않아요.”
헨젤 백작은 제 귀와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동안 입에 담지도 않던 누나라는 호칭을 자연스레 뱉고, 짜증스러워하는 감정을 조금도 숨기지 않고 드러내며 자신을 내려다보는 하델이라니.
“아버지.”
헨젤 백작은 하델이 자신보다 더 커졌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과 꼭 빼닮은 얼굴로 비웃듯이 자신을 내려다보는 저게, 저놈이, 하델이라고? 내 자식이라고?
“웬만하면 저도 이런 말까지는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무슨 말을 하려고 그렇게…….”
“아버지, 언제 은퇴하실 겁니까?”
뱀. 차가운 뱀. 감정이라는 걸 갖고 있기는 하는가 모르겠다는 평가를 받는 헨젤 백작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이젠 저도 성년이고……. 딱히 아버지가 현역으로 일하신다고 해서 헨젤에 도움이 되는 것도 없잖습니까. 이만 남부의 영지로 내려가시죠. 관리인의 충성심은 의심할 게 없다지만 역시 주인이 직접 가는 것만 하겠습니까?”
6년이었다. 고작 6년 만에, 오드리는 헨젤 백작의 영역 거의 대부분을 잡아먹었다. 헨젤 백작이 재무국에서 버텨온 세월이 얼만데 그렇게 되었나 싶겠지만, 그가 아뉴람브 성에 모아두었던 각종 자료가 송두리째 오드리의 손에 넘어가는 사태가 발생하면서 승패의 저울은 완전히 기울고 말았다.
공식적으로 아뉴람브 성은 도둑의 침입을 허용한 적이 없고, 오드리는 그 안의 자료 중 종이쪽지 한 장 받아본 적이 없다. 하나 아뉴람브 성에 설치된 엄중한 보안장치를 감쪽같이 뚫은 거로 모자라 흔적도 남기지 않고 대량의 자료를 빼돌릴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가 셰비언 빼고 또 누가 있겠는가.
헨젤 백작은 절대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 없으리라 여겼던 이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한꺼번에 등을 돌리는 사태를 경험하고서야 아뉴람브 성에 문제가 생겼음을 알았다. 그때 그는 자료를 빼앗겼다는 분노보다 제 발밑에서 벌어지는 일도 몰랐다는 수치심을 더 크게 느꼈더랬다.
그 수치스러운 사건은 두고두고 헨젤 백작의 발목을 잡았다. 오드리는 적에게서 빼앗은 물건이라고 사용하지 않고 보관만 하는 종류의 인간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네가…….”
헨젤 백작은 위협하듯 바짝 다가붙은 하델을 밀어냈다. 하델은 버티지 않았다. 두 손을 들고 순순히 밀려난다. 그 순순함이 헨젤 백작의 화를 돋웠다.
“이제까지 네가 누구의 그늘 아래에서 평안했는지도 모르고 말을 함부로 하는구나. 내가 없었더라면 헨젤이 이만큼이라도 버틸 수 있었을 것 같으냐?”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은 아니시죠? 아버지가 물러서지 않고 버티고 계시기 때문에 누나가 헨젤을 가만두지 않는 겁니다. 인정하세요. 아버지는 누나를 못 이기십니다.”
“하델!”
하델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동안 그는 헨젤 백작을 이해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노력에 노력을 기울일수록 알게 되는 게 있었으니, 매사 이성적인 헨젤 백작이 오드리에게만은 대단히 감정적으로 군다는 것이다.
어느 때는 더없이 미워하는 것 같다가, 또 어느 때는 소중히 아끼는 것 같다가, 또 어느 땐 한없이 자비롭다가, 또 어느 땐 평생의 적을 만난 듯 악랄하다가, 또 어느 땐…….
왕궁에서 오며가며 마주칠 땐 서로 소 닭 보듯 잘도 무시하는 두 사람이지만, 어쩌다 부딪칠 때는 정말 전심전력을 다해 부딪쳤다. 손해 같은 건 조금도 아깝지 않다는 것처럼 굴었고 실제로 어떤 손해를 입더라도 대범하게 굴었다. 하나 헨젤 백작은 몰라도 하델은 그 충돌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쓸데없는 낭비였다.
“제가 자라면서 알게 된 게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제가 아버지를 굉장히 닮았다는 겁니다.”
생김새만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격도, 사고방식도, 하다못해 행동하는 방식까지도 모조리 닮았다. 너무 닮아서 징그러울 정도였다.
“너, 무슨 말을 하려고…….”
“‘가문이 가장 중요하다. 헨젤이 곧 자신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행동해라’. 아버님의 가르침이 아닙니까? 저는 배운 대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헨젤 백작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갔다. 하지만 하델은 조금도 물러나지 않았다.
“헨젤이 곧 제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도 누나는 제 사정은 좀 봐주는 편이니까요. 하지만 이대로 계속 버텼다간 헨젤은 그나마 조금 남아 있는 영향력마저 죄다 잃어버릴 겁니다. 그다음엔? 뻔하죠. 남부의 대평원이 갈가리 찢겨 나갈 겁니다. 가진 힘 없이 지킬 수 있는 땅이 아니잖습니까.”
“그런…….”
“랄리우스는 알았겠습니까? 멜브란트 건국에 손을 보태 왕실의 문장에 수사슴까지 그려 넣었는데, 훗날 자신들의 깃발에서 백합이 빠질 거라고. 하지만 그런 일은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헨젤은 그럴 일 없을 거라 누가 장담합니까?”
헨젤은 랄리우스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한 가문이었다. 오드리가 헨젤의 숨통을 끊어버리겠다 덤비지 않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나름 자비를 베풀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 이왕이면 제가 출발하기 전에 결정하시죠. 누나의 결혼 선물로 아버지의 은퇴 소식을 전하면 꽤 화기애애한 광경을 연출할 수도 있을 것 같거든요.”
하델은 그 말을 끝으로 유유히 집무실에서 퇴장했다. 헨젤 백작은 감히 아들을 잡지도 못했다.
바닥이 무너지는 환상이 그를 덮쳤다. 익숙한 목소리, 잊어본 적 없는 목소리가 귓가에서 쨍하게 울렸다. 다 떨쳐 낸 줄 알았던 뤼나소의 부작용이 새삼 도진 것만 같았다.
뉴터 헨젤이 아직 헨젤 백작가의 후계자에 불과하던 시절, 헨젤의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일찌감치 반란의 실패를 예측하고 펠른 3세의 편을 들었지만, 그 공을 온전히 누릴 수는 없는 처지였다.
멍청한 숙부가 저지른 일이 너무 컸다. 본가가 국왕의 편에 선 것을 뻔히 알면서 반란군의 뒤를 봐주다니!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살 구멍을 파두겠답시고 저지른 일이라지만 제대로 감추지도 수습하지도 못하고 들키고 말았으니, 헨젤 백작은 가문의 수장으로서 동생의 일탈에 책임을 져야 했다.
‘내가 동생을 너무 아꼈다. 너무 많은 것을 허용했어.’
‘괜찮습니다, 아버지. 수습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 수습할 방법이 아주 없지는 않지.’
‘잘될 겁니다.’
뉴터 헨젤이 아버지와 그 대화를 나누었던 며칠 뒤, 숙부 일가의 사망 소식이 들려왔다. 수상한 죽음이었으나 따지는 사람은 없었고 장례는 약식으로 간략히 치러졌다. 사촌들과 친했던 메너트는 역시 충격받아 말이 없어진 뉴터를 붙들고 하염없이 울었다.
‘누나, 그만 울어. 우린 너무 애도하는 티를 내면 안 돼.’
‘기껏 입을 떼서 한다는 말이 고작 그거니? 여긴 장례식장이야!’
‘장례식장이라서 뭐?’
‘뉴터!’
‘누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잖아. 아버지가 우릴 보고 있어. 알아서 잘 처신해, 날 누나의 장례식에 참석시키고 싶은 게 아니라면!’
헨젤 백작은 그렇게 제 동생 일가의 목숨으로 헨젤가의 안위를 샀다. 그러나 가문의 영향력을 지탱하는 남부의 대평원까지 지키지는 못했다.
헨젤 백작은 대평원을 잃는 최악의 사태를 막기 위해 손쉬운 방법을 택했다. 가문의 후계자, 뉴터를 결혼 시장에 내놓은 것이다. 마침 결혼을 통해 가문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싶은 이들이 바글거리는 시기였다.
뉴터 헨젤이 밀리나 랄리우스를 만난 건 그렇게 내보내진 상품들이 서로 눈치를 보는 파티장에서였다. 그 지루한 곳에서 밀리나는 여왕처럼 군림하고 있었다.
결혼 시장에서 상품의 등급을 매기는 건 오래된 전통이다. 남부에서 배우자를 고르던 전통을 깨고 나온 마지막 랄리우스, 밀리나의 가치는 가히 최상급이라고 봐도 좋았다.
영락했다고는 하나 랄리우스의 이름은 여전히 명예로웠고, 랄리우스가 반란 진압에 세운 군공의 가치 또한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거액의 빚? 그깟 돈으로 살 수 없는 게 바로 가문의 혈통과 역사와 영향력이다. 만탈락의 주민들이 랄리우스를 왕처럼 떠받든다는 걸 모르는 귀족이 있던가.
더구나 밀리나는 재치 있고 영리한 미인이었다. 과연 랄리우스라는 걸 증명하듯 빛나는 지성을 과시할 때면 남부인 특유의 가무잡잡한 피부조차 단점이 아닌 매력이 되어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허구한 날 그녀의 주위를 맴도는 청년들의 무리가 사교계의 농담거리가 될 정도였다.
그 밀리나가 가을 무도회 파트너로 뉴터를 지목했을 때, 가장 놀란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뉴터 헨젤 본인이었다. 헨젤의 처지가 그리 좋지만은 않다는 걸 모를 만한 사람도 아니면서 날 고르다니, 혹시 내게 마음이 있었던 걸까 가슴이 뛰기도 했다.
‘레이디 랄리우스가 날 고른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그 많은 남자들 중에서 내 말을 제대로 듣는 사람이 공자뿐이라서요.’
가을 무도회에서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는 무척 좋았다. 뉴터는 밀리나에게 확실히 이성적인 호감을 느꼈고, 밀리나 역시 마찬가지일 거라 여겼다. 그 믿음을 증명하듯 이후로 그들은 여러 번 데이트했다. 눈 덮인 호숫가를 함께 걷고, 팔짱을 낀 채 연극을 보러 다니고…….
하지만 밀리나가 주목한 건 뉴터 본인이 아니라 어려운 처지에 빠진 헨젤가, 그 자체였다. 그녀는 랄리우스의 군공을 가장 비싸게 사줄 가문으로 헨젤을 선택했고 헨젤 백작은 그녀의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랄리우스는 시간을, 헨젤은 남부의 대평원을.
얼핏 공정한 거래였다. 그러니 서로가 서로를 완벽하게 거래 관계로만 대할 수 있었다면 차라리 좋았을 것이다.
긴 약혼 기간을 보내는 동안 어설프게나마 쌓인 감정과 기대가 서로를 상처 입혔다.
‘왜 계승권자 지명권을 내놓지 않냐고? 당연한 거 아니야? 랄리우스는 나지 당신이 아니야.’
‘우린 결혼했어. 내가 당신의 남편이고 보호자야. 랄리우스? 당신의 성이 아직도 랄리우스인 줄 알아? 받아들여, 랄리우스는 이제 없고 남은 건 헨젤뿐이야.’
‘남편이 별거야? 난 성인인데 왜 당신이 내 보호자야? 랄리우스를 갖겠다니, 꿈도 크지!’
‘별거? 당신 지금 남편이 별거 아니라고 한 거 맞아? 우린 결혼했어, 밀리나! 당신은 내 아내라고! 왜 날 부정하는 거지?’
끝끝내 랄리우스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밀리나와 당연한 남편의 권리를 행사하려는 뉴터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다. 친정이랄 것도 없는 여자가 버티기엔 엄청난 압력이 가해졌지만, 밀리나는 조금도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뉴터더러 헨젤 백작이 되더니 약속을 지킬 줄도 모르고 신의도 없는 남자로 변모했다며 비난하길 망설이지 않았다.
결혼 초에는 그래도 서로에게 존대하며 존중하는 시늉이라도 하던 부부 사이는 고작 몇 달 만에 급격히 삐걱거려 깨진 도자기 꼴이 되었다. 그나마 밀리나가 임신했을 때는 다툼을 멈췄지만, 아이가 태어난 뒤에는 다시 싸웠다.
‘오드리는 내가 가르칠 테니 당신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당연히 딸의 교육은 어머니가 알아서 하셔야지. 어디 내가 낄 틈이나 있겠어? 당신 마음대로 해.’
뉴터는 물건의 가치를 재듯 자신에게 값을 매기는 밀리나의 시선을 견딜 수가 없었다. 밀리나가 헨젤이 아닌 자신은 쓰레기처럼 볼 거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속이 울렁거렸다. 내가 곧 헨젤이다, 나는 헨젤로서 살아야 한다, 지독한 자기세뇌를 시작한 게 바로 이 무렵이었다.
밀리나는 천천히 건강을 잃었다. 뉴터는 점점 마르고 창백해지는 밀리나를 볼 때마다 먹은 것을 죄다 게워내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그 충동은 오드리에게도 고스란히 영향을 미쳤다. 오드리의 혈색 좋은 뺨과 통통한 팔다리가 짜증스러워 도저히 정이 가지 않았다.
그건 하델이 태어나고 밀리나가 몸져누운 뒤에도 변하지 않았다. 오드리가 딸이 아니라 아들로 태어났더라면, 그랬다면 밀리나가 위험을 감수하며 둘째를 낳는 대신 첫째에게 랄리우스와 헨젤 모두를 물려줄 수도 있었을 거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쓸모없는 자식.’
곱씹을수록 오드리는 쓸모없는 자식이었다. 기껏 헨젤 안에 랄리우스를 품었건만, 언젠가 그 랄리우스를 헨젤에서 빼갈 존재라는 점에서 특히. 밀리나는 오드리에게 랄리우스를 물려주겠다는 의사를 공공연하게 드러내곤 했다.
죽여 버릴까.
밀리나는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다. 그러니 자식이 하델 하나만 남으면 더 고집부리지 않을 것이다. 그게 랄리우스에도, 헨젤에도 좋은 일이다……. 밀리나가 좀 슬퍼하겠지만, 그거야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밀리나는 아팠고 오드리를 완벽하게 지킬 수 없었다. 남들 모르게 오드리를 죽일 기회는 몇 번이나 있었다. 하지만 뉴터는 몇 번이고 세운 계획을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딱히 오드리에게 정이 깊거나 해서는 아니었다. 젖먹이 시절 때부터 피할 수 있으면 되도록 피했고 대화도 몇 번 나눠본 적 없는데 정은 무슨 정.
그저, 결정적인 순간마다 숙부 일가의 장례식 풍경이 떠올랐다. 너무 파랗고 맑아서 거짓말 같던 하늘, 검은 옷을 입고 우중충하게 서 있던 사람들, 자신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시선, 눈이 빠지도록 울던 누나의 얼굴 등등이, 아주 생생하게 떠올랐다.
밀리나의 장례식 이후, 뉴터는 평생 기억할 것 같았던 숙부 일가의 장례식 풍경을 떠올릴 수 없게 되었다. 대신 우중충하게 구름 낀 하늘과 자꾸 연주를 틀리던 미숙한 악단, 흰 튤립을 쥐고 멍청하게 서 있던 어린 남매와 장례식에 난입한 변호사의 난동 따위가 그 자리를 채웠다.
「뉴터 헨젤, 당신, 재혼하지 마. 그랬다간 죽어서도 가만 안 둘 거야.」
유언장 끄트머리에 적혀 있던, 낙서 같은 한 줄을 떠올리면 바닥까지 떨어졌던 기분도 다시 상승했다. 아홉 살짜리 딸에게 만탈락을 맡기네 뭐네 하는 개소리도 들어줄 만했다.
뉴터는 밀리나를 잃고도 괜찮았다. 오히려 조금 시원하기까지 했다. 오래 걸리긴 했지만 결국 자신이 이겼으니까. 랄리우스는 가고, 헨젤은 남았다. 자신을 그리 무시하던 밀리나는 아무것도 남기지 못했다. 그리 믿었다.
“왜 내가 남자로 태어났으면 좋았을 거란 거지요?”
오드리가 찾아와 쓸데없는 말을 하기 전까지는 승리감에 젖어 있을 수 있었다. 뉴터는 그제야 오드리가 받는 수업의 내용에 대해 알아보았고, 딸이 후계자나 받을 법한 수업을 받으며 높은 성취를 보이고 있더라는 사실을 알았다.
오드리의 얼굴에서 밀리나가 보였다. 자신을 보며 값을 매기던 얼굴이었다. 재무국에서 괜찮은 성과를 내며 존경받는 자신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숙부 일가의 장례식에서 충격에 떨고 있는 어리고 멍청한 자신만 남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섬뜩했다.
뉴터는 오드리를 만탈락으로 보냈다. 밀리나의 유지를 지켜야 한다는 핑계를 대면서. 회피는 결코 답이 될 수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그랬다. 언젠가는 맞닥뜨려야 하는 걸 알면서도 미루고 또 미루고……. 그쯤 뤼나소를 접했고, 그는 일로 도피했다.
시간이 흘렀다. 섬뜩하던 인상은 희미해졌고 그래도 결혼은 시켜야겠지 싶어 오드리를 불렀다. 한데 7년 만에 만난 오드리의 얼굴은 어떻게 이럴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밀리나를 닮아 있었다. 그나마 자신을 닮았던 머리칼은 녹색으로 염색해 버린 데다 뽀얗던 피부도 태워 버려 영 제 자식 같지가 않았다.
밀리나를 쏙 빼닮은 오드리는 행보마저도 그녀와 비슷했다. 하델을 압도하는 재능과 배짱을 여봐란 듯이 과시하며 마구 엇나갔다. 그런 오드리를 볼 때마다 뉴터는 좀처럼 가늠하기 힘든 감정에 휩싸였다. 적극적으로 막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아주 방관하지도 못하는 어중간한 날들이 이어졌다.
끝내 오드리와 절연한 이후로도 마찬가지였다. 오드리와 관련되기만 하면 이성도 감정도 제 것이 아닌 듯했다. 미움도 사랑도 그 어떤 표현도 어울리지 않는 무언가에 잡아먹힌 것처럼 굴었다.
오드리가 머리칼을 흑발로 돌려놓은 뒤로도 밀리나의 그림자는 도무지 떨어지지 않고 그를 괴롭혔다. 오드리의 얼굴 위로 겹쳐지는 밀리나의 허상은 갈수록 짙어졌다.
“당신은 나를 못 이겨.”
아득한 환청이 뉴터를 오래된 열패감으로 몰아넣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해 왔건만, 꽉 쥐고 있던 손을 펴 보니 남은 게 아무것도 없었다. 억지로 붙들고 있던 모든 것들은 당연하다는 듯 제자리를 찾아갔다.
“그렇군, 내가 졌어.”
졌다는 걸 인정하기까지, 참 오래 걸렸다.
만탈락으로 출발하기로 한 날의 아침, 아니 아침보다는 새벽에 좀 더 가까운 시간. 하델은 푸르스름한 새벽빛을 등에 지고 알신다의 무덤 앞에 섰다. 찾아오는 사람은 없어도 관리는 잘 되고 있는 듯, 이끼 한 톨 끼지 않은 비석에선 반질반질 윤이 났다.
여기에 오면 할 말이 아주 많을 것 같았는데, 아교라도 발린 것처럼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주 무거운 무언가가 가슴을 꽉 누르고 있는 듯 답답했다. 뭘 가져와야 할지 몰라 고른 흰 튤립 한 다발을 비석 앞에 내려놓았다.
“……알신다.”
아주 오랜만에 불러보는 이름이었다. 다 잊은 줄 알았던 추억이 와르르 쏟아졌다. 무엇부터 집어 봐야 할지 모를 정도였다.
“초상화라도 한 장 남겨두지……. 벌써 얼굴이 가물거리는 거 알아?”
이슬 묻은 묘비는 차가웠다.
“누나에게서 편지가 왔어.”
약속한 때가 되었으니 결혼식에 증인으로 와달라는 편지였다. 편지만 온 건 아니었다. 의례적이지 않은 선물도 함께였다. 늘 그랬듯 달아서 입에도 못 댈 만탈락 특산품을 보낸 줄 알았더니만, 웬 나뭇가지를 보낸 것이다.
상자를 열자마자 짙은 아카시아 향기가 집무실 전체를 물들였다. 처음에는 나뭇가지에 향수를 뿌려 보내다니 이 무슨 악취미인가 했는데, 다시 보니 나뭇가지 자체에서 나는 향기였다. 아카시아도 아닌 게 무슨 아카시아 향이 나나 했지만, 견문 넓은 집사는 그게 바이델란트 지방에서 나오는 야누아 나무의 가지라는 걸 한눈에 알아보았다.
“바이델란트? 그건 남부가 아니라 북부잖아. 북부의 나무를 왜 남부에서 보내?”
“멜브란트 건국 전에 랄리우스가 자리 잡고 있던 지역이 바이델란트입니다. 야누아 나무는 그 지방의 특산품이고요. 성장이 느리고 향기가 아카시아와 흡사해서 수요는 별로 없습니다.”
“할아범이 별걸 다 아네. 내가 역사와 지리에 소홀했던 죄를 이렇게 받나?”
농담으로 웃으며 넘겼지만 정말 웃음이 났던 건 아니었다. 솔직히 짜증부터 났다. 오드리 본인은 헨젤 같은 건 다 잊은 듯 굴면서, 왜 자신에게는 랄리우스의 핏줄을 잊지 말라 이렇게 닦달을 하나. 이건 너무 불공평한 거 아닌가.
열넷이 되어 향수를 고를 때 베이스로 아카시아를 선택한 것마저 불쾌해질 지경이었다. 대충 밀봉해서 구석에 처박으려다 나뭇가지 아래에 꼬깃꼬깃한 쪽지가 있는 걸 발견했다. 몰래 집어넣은 듯 열심히 숨긴 흔적이 있는 종이엔 짧고 무거운 사과가 담겨 있었다.
「알신다의 일은 미안해. 그땐 내가 너무 어렸고, 성급했고, 시야가 좁았어. 오로지 날 지키는 데에 급급해서 네게서 유모를 빼앗아서 정말 미안해.」
다급히 휘갈겨 쓰느라 반쯤 날아간 글씨이지만, 그 순간 느낀 감정은 뭐라 표현하기가 힘들었다. 몇 년이 지난 일을 왜 이제 와서 사과하는지, 정말 사과 한마디로 목숨을 보상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이럴 거면 그동안 부정은 왜 했는지…….
“결혼식 증인이 그렇게 필요한가 했어. 하지만…… 웃기지, 그 우스운 사과 한마디에 마음이 풀렸다는 게. 네가 알면 화냈으려나?”
어쩌면 자신이 원망해야 할 대상은 누나가 아니라 아버지가 맞지 않나 싶기도 했다.
알신다가 갖고 있던 미련을 이용해 오드리를 북부로 쫓아 보낼 계획을 꾸며놓고 정작 알신다를 위험에서 지켜주지는 않은 그 사람. 알신다를 가볍게 써먹고 매정하게 버린 헨젤 백작.
사랑하고 미워하는 아버지, 당신은 왜 이리 매정하십니까?
“미안해.”
나이를 먹고 머리가 굵어진 이제는 이해한다. 적대적인 환경과 사람들 틈에서 고슴도치처럼 곤두서 있었을 열일곱의 오드리를 이해한다. 그 당시 그녀의 불안을, 아슬아슬함을, 위태로움을 이해한다. 이해가 꼭 용서를 의미하는 건 아니지만, 전처럼 미워할 수 없게 되었음은 확실했다.
‘가끔은 생각해. 내가 좀 더 영리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럼 널 잃지 않을 수도 있었을 텐데…….’
애초 알신다에게 휘둘리지 말았어야 했다. 틈틈이 보러 가고 싶단 이유로 브란젤에 남기지 말았어야 했다. 혹 그럴 거면 미래를 약속하며 헨젤가에 미련을 품게 해선 안 됐다. 하다못해 아버지와 누나 중 누구의 편도 들지 말라고 미리 경고해 두기라도 했어야 했다.
하나 아무리 후회해도 과거는 변하는 법이 없다. 묘비는 싸늘하고 그리운 향기는 다시 맡을 수 없다.
“앞으로는 가끔씩이라도 올게.”
무덤을 찾지 않는다고 알신다가 살아 돌아올 것도 아닌데 그동안 참 쓸데없는 고집을 부렸다. 이제 그런 고집은 꺾을 때도 되었다 싶었다.
하델은 공동묘지의 비석이 아침햇살에 물들 때까지 못 박힌 듯 서 있다가, 기차 시간이 임박해서야 그 자리를 떠났다.
만탈락의 분위기는 축제와 같았다. 하델은 좀 늦게 도착했지만, 신부의 가족이라는 특혜가 있어 한참 결혼식 준비 중인 오드리를 얼마든지 만날 수 있었다. 그 자리에서 그는 대체 왜 야누아 나뭇가지를 보냈는지를 물었다가 어이없는 대답을 들었다.
“신기하잖아. 희한하게 나뭇가지를 꺾어도 향이 좋더라고. 집무실이나 침실에 두면 딱히 방향제가 필요 없을 것 같아서 보냈지. 마침 네 향수와도 향이 비슷하잖니?”
참으로 단순한 이유였다. 랄리우스의 핏줄을 상기시키려고 보낸 게 아니라니 어찌나 허탈한지……. 혼자서 꽁해 있던 자신이 민망해질 지경이었다.
“그게 정말이라면 그 오아시스…… 알룬드라고 했죠? 거기 꼭 한번 가보고 싶네요.”
“결혼식이 끝나면 가. 길이 그렇게 잘 다듬어진 게 아니라서 일정을 길게 잡아야 할 거야.”
“온 김에 유적지 구경도 할 겸 가면 되죠. 그런데, 누나는 그게 야누아 나무인지 몰랐어요? 정말로?”
“난 식물학에는 영 관심이 없어서 말이야. 아카시아 향기가 나니까 당연히 아카시아인 줄로만 알았지. 그리고 만탈락은 남부잖아. 갑자기 바이델란트 지방이 튀어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어.”
“와……. 집사 할아범이 누나보다 낫네요.”
“이게 누나를 놀려?”
하델은 뺨을 쭉 잡아당기려는 오드리의 손을 날렵하게 피하고는 대신 번듯한 봉투를 쥐여주었다. 고급스러운 봉투를 이리저리 살핀 오드리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게 뭐야? 설마 너도 결혼하니? 그동안 아무 얘기도 없었잖아?”
“아직 약혼도 안 했는데 결혼은 무슨. 이건 왕비 전하가 누나에게 주는 결혼 선물이에요.”
“라디아타가?”
라디아타는 최근에 남녀 쌍둥이를 출산했다. 워낙 허리가 좋지 않아서 임신 기간 내내 레펙치오를 둘둘 감고 있다시피 했고 출산 과정에서도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다. 그녀가 목숨을 건지고 건강을 지킨 데에는 인간 마법사 중 유일하게 회복마법을 구사할 수 있는 아이샤의 활약이 아주 컸다.
라디아타는 오드리와 셰비언의 결혼식 공동 증인을 자신이 맡아야겠다고 한참 전부터 자리를 맡아두었는데, 하필 시기가 시기인 데다 오드리의 결혼식이 치러지는 장소가 만탈락인지라 직접 증인을 서지 못하고 대리인을 보냈다. 그 대리인은 한참 전에 도착해서 만탈락에 머물고 있었다.
“라디아타가 주는 결혼선물이라면 대리인이 잔뜩 가져왔는데……. 이건 또 뭐지?”
“제가 아나요. 나도 궁금하니까 얼른 열어보기나 해요.”
고개를 갸웃대며 봉투를 열었던 오드리는 충격에 잠시 말을 잊었다. 봉투에는 피임약 정식 허가서가 들어 있었다. 하델마저도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이, 이게 무슨……. 뭐가 이리 갑자기…….”
서류 사이에서 쪽지가 툭 떨어졌다. 얼어붙은 오드리 대신 쪽지를 주운 하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국왕 전하의 선물이었네요. ‘벗을 위하는 그대의 우정에 깊은 감사를 표하며, 가스트로 하루마키스’. 왕비 전하를 위해 만들어 보낸 레펙치오의 답례일까요?”
“그 건에 대한 답례는 한참 전에 받았어. 대체 뭐지?”
사실 그건 아직까지도 유리꽃의 진정한 정체를 알지 못하는 가스트로의 사심 섞인 선물이었다. 단 한 번 쓰고 마법이 사라져 단순한 장식품이 된 유리꽃을 하나 더 원하며 보낸 뇌물이었던 것이다.
하나 라디아타가 대체 왜 그런 마법도구를 원했는지 아직까지 이해할 수 없었던 오드리가 그의 오해로 점철된 속뜻을 짐작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가스트로를 만날 기회조차 드문 하델 역시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사정은 몰라도 남매는 드디어 피임약이 정식으로 허가되었다는 사실 자체를 축하하고 기뻐했다. 오드리는 드디어 셰비언에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하델은 더는 피임약 문제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하라는 치들에게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기뻐했다.
오드리는 락시 부인이 숨겨두었던 비상의 술을 땄고, 남매는 실컷 마셨다. 사실 하델도 오드리 못지않은 술꾼이었다. 술버릇이 너무 치명적이라 스스로 자제하는 것뿐이지.
“누나, 왜 결혼식 공동 증인이 왕비전하예요? 타우레드의 공자가 하면 딱 좋을걸. 라비린더러 오라고 해요!”
“야, 이……. 날 악마로 만들 셈이야? 내가 아무리 못됐어도 그건 좀 그렇지.”
“그런가?”
“그렇지.”
“그렇구나.”
하델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오드리는 라비린에게 청첩장을 보내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예의를 차린 것에 불과했고, 라비린 역시 예의를 차려 참석은 힘들 것 같다는 대답을 보내왔다.
“누나, 피임약처럼 난리 나는 약은 이제 안 만들 거죠?”
“앞날을 어떻게 장담하니? 만들 수 있고 필요하면 만드는 거지. 이건 내 생각인데 말이야, 셰비언은 지금 유통되는 것보다 훨씬 약효 좋고 안전한 낙태약도 만들 수 있을걸. 굳이 나한테 말하지 않으니까 나도 모른 척하는 거뿐이지.”
“낙태약이라니……. 미쳤어. 누나, 그건 절대 발표하지 마요. 발표해도 누나 이름으론 안 돼! 나 시달려 죽어요!”
“나 말고 셰비언에게 가서 얘기해. 난 셰비언이 부탁하는 건 그게 뭐든 언제든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야.”
“으, 그게 무슨 사랑에 눈먼 폭군 같은 대사람……. 셰비언은 어쩐지 말 걸기 어렵단 말예요. 제엔자앙…….”
술꾼 남매는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 마시고 잠들었다.
그리고 그날 밤, 하델은 납치당했다.
그건 오드리마저도 까맣게 잊고 있었던, 만탈락을 비롯한 남부의 전통 결혼 풍습 중 하나였다. 신랑은 결혼식 전까지 납치된 신부의 친족을 찾아내야 하며, 만약 해내지 못하면 신부와 결혼할 능력도 자격도 없는 남자로 간주되어 결혼식이 취소된다.
벌칙이 엄청나긴 하지만 사실은 장난에 가까운 풍습이었다. 대개 친구들이 며칠 숨겼다가 이리저리 헤매는 신랑에게 장소를 가르쳐 주곤 했다. 비록 아닌 밤중에 홍두깨를 맞은 하델은 엄청나게 황당했지만 말이다.
“이런 게 결혼식 풍습이라고? 뭐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릴! 당신들이 지금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나 알아? 이건 귀족 납치죄야! 납치죄!”
오드리의 어린 시절 친구들, 그러니까 그녀의 말썽쟁이 시절을 함께했고 이제는 어른이 된 만탈락의 주민들이 어깨를 으쓱였다.
“이런 걸 해줄 친구도 없는 인생이야말로 너무 서글픈 것 아닌가요? 도련님이 오셔서 다행이에요. 도련님이 아니었다면 아가씨를 직접 납치해야 했을 판이라 걱정하고 있었거든요.”
“도련님, 너무 그렇게 화내지 마세요. 며칠 편하게 쉬다가 돌아가시면 돼요. 아르젠 백작님이 그 전에 찾아내면 그땐 우리도 어쩔 수 없는 거지만요.”
“애초 락시 부인의 협조가 아니었으면 도련님을 들고 나오지도 못했어요. 아가씨가 화내는 건 락시 부인이 막아주시겠죠, 뭐!”
“설마 락시 부인도 한패였단 말이야?”
경악하는 하델에게 락시 부인의 편지가 전달됐다. 하델은 편지를 닳도록 읽은 뒤에야 가까스로 이 풍습이 진짜로 있는 것이며, 자신은 전통적인 남부식 결혼식의 여러 절차 중 하나에 참여 중이라는 것을 납득했다.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한 하델을 보고 샐샐 웃던 누군가가 그에게 술을 권하며 물었다.
“도련님, 아가씨의 옛날이야기 듣고 싶지 않으세요?”
“뭐?”
“아가씨가 어릴 적엔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말썽쟁이였거든요. 만탈락 최고의 말썽쟁이였어요. 그때 친 장난들을 다 합치면……. 어휴, 전설이죠, 전설!”
“그럼요, 그럼요! 브란젤에서 자란 도련님은 상상도 못 할 얘기가 아주 많다니까요!”
하델은 그만 혹하고 말았다.
“그러니까 말이죠, 그게……. 레이디 오드리가 처음 만탈락에 왔을 때는 피부도 뽀얗고 뺨은 통통하고 옷은 또 엄청 예쁜 드레스를 입고……. 딱 말로만 듣던 도시 공주님이었단 말이죠? 그래서 내가 공주님 놀래보라고 벌레를 한 움큼 모아 가지고…….”
세상에, 귀족에게 그런 장난을 치다니 무섭지도 않나? 하델은 그 물정 모르는 대담함에 경탄하며 주민들이 주는 만탈락 토산 술을 홀짝홀짝 마셨다. 달콤하고 산뜻하면서도 끝맛은 강렬한 게, 끝도 없이 들어가는 술이었다.
그는 몰랐지만 만탈락의 주민들은 오드리 얘기라면 하룻밤이 아니라 이틀 밤, 사흘 밤도 떠들 수 있는 사람들이었고 그들이 오드리의 결혼식을 위해 준비한 술은 하염없이 많았다. 하델은 자신이 술에 절여지는 과일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까지 술을 마셔야 했다.
셰비언은 벌칙의 내용을 듣자마자 귀띔을 받을 필요도 없이 하델을 찾아냈다. 이야기는 재미있어도 고작 이틀 만에 달짝지근한 술과 달짝지근한 안주, 달짝지근한 지역 음식에 질릴 대로 질렸던 하델은 셰비언을 보자마자 너무 반가워 눈물을 쏟을 뻔했다.
“무슨 결혼식이 이렇게 파란만장해요?”
“그러게 말이야. 무슨 벌칙이 그렇게 무섭담.”
그 외에도 여러 일이 있었지만, 오드리의 결혼식은 무사히 치러졌다. 만탈락의 주민이라면 누구든 참석할 수 있도록 도시의 광장 한복판에서 치렀는데도 좀 소란스러웠을 뿐 사고가 없었다. 하델은 때아닌 축제로 난장판이 된 만탈락의 광장에서 사람들에게 잡혀 억지로 춤추며 생각했다.
내 결혼식은 절대 만탈락에서 치르지 말아야지.
오드리의 결혼식이 있고 얼마 뒤, 헨젤 백작이 돌연 은퇴를 선언했다. 비록 헨젤가의 위세가 예전 같지는 않다지만 은퇴를 말하기엔 너무 이른 나이였던지라 놀라는 사람들이 많았다. 파격적인 작위 승계 선언의 뒷배경에 대해 궁금증을 가진 사람 역시 많았으나, 헨젤 백작은 그저 지쳤을 뿐이라는 말로 모든 의문을 일축했다.
오드리는 새로이 헨젤 백작이 된 하델과 퍽 좋은 관계를 유지했고 종종 입장이 부딪칠 때면 헨젤 백작가의 체면을 봐주기도 했다. 하지만 전 헨젤 백작인 뉴터 헨젤과는 평생 얼굴을 보지 않았는데, 그를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