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목에 걸린 가시는 빼내야 한다
꿀처럼 선명하고 확실한 금발과 자수정처럼 빛나는 눈동자는 멜브란트의 왕족, 하루마키스를 상징했다. 흔하다면 흔한 색이고 적통 왕족조차 그 두 가지를 동시에 갖고 태어나는 일은 드물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랬다.
그러니 금발과 자주색 눈동자를 모두 갖고 태어난 라디아타를 두고 호사가들이 얼마나 입방아를 찧었는지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은 일일 것이다.
타우레드 후작가엔 예전부터 왕족의 핏줄이 섞여 있었다는 해명은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왜곡된 형태로 퍼졌고, 로샨의 뒷배가 되어주어야 할 카론 남작가는 너무 먼 곳에 있었다. 소문을 견디지 못한 로샨은 스스로 검을 부러뜨리고 타우레드 후작가 저택에 처박혔다.
제 울타리 안의 사람은 간을 빼줄 듯 아끼는 게 타우레드의 가풍이었으니, 과연 타우레드 후작은 아내와 딸을 기를 쓰고 보호했다. 후작의 교육 아래에서 라디아타는 자신은 타우레드의 일원이라는 강렬한 자의식을 가진 채로 성장했다.
데뷔탕트를 치르고 다시 번진 소문에 시달릴 때도, 가스트로의 구애를 꾸준히 거절할 때도, 펠른 3세의 기이한 호의와 친절을 감내할 때도 라디아타는 자신이 타우레드라는 걸 잊어본 일이 없었다. 강박에 가까운 자부심이 단단한 껍질이 되어 라디아타를 보호했다.
‘나는 사자의 일원이다.’
하지만 펠른 3세가 라디아타의 앞에서 쓰러져 죽음을 목전에 두었을 때, 그 단단한 껍질에 희미한 균열이 생겼다. 너무 오랫동안 묵혀둔 나머지 붙일 이름마저 잊은 마음이 그 틈새로 새어 나왔다. 검고 더럽고 퀴퀴한 냄새마저 나는 마음이었다. 딱히 놀랍지는 않았다.
라디아타는 펠른 3세의 곁으로 다가갔다. 명치를 누르고 헉헉대던 펠른 3세가 라디아타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흔들었다. 덩치에 맞지 않게 연약한 손짓이라고 생각한 순간,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대답을 들을 수 없겠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녀는 기꺼이 충동에 굴복했다. 머리 흰 늙은 남자 옆에 쪼그리고 앉아 백탁 낀 눈을 보며 속삭였다.
“전하. 제 질문에 솔직히 대답해 주시면 바로 의사를 불러올게요.”
펠른 3세의 표정에 노기가 어렸다. 하지만 지금 이 응접실에는 라디아타와 펠른 3세 단둘뿐이었고 따로 심부름을 보낼 만한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그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라디아타는 펠른 3세에게 남은 시간이 길지 않으리라는 걸 잘 알았다. 그녀는 사교계의 언어로 시간을 낭비하는 대신 직설적으로 물었다.
“저는 전하의 딸입니까?”
펠른 3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얼음 동상처럼 굳은 라디아타의 뺨을 어루만지는데, 그 손길이 봄바람처럼 보드랍고 다정했다. 헐떡대는 숨소리만 새던 입술이 형태 있는 말을 빚어냈다.
“내, 내 딸……. 널…… 더…….”
꾸역꾸역 말을 뱉던 펠른 3세가 입을 다물었다. 라디아타의 얼굴 가득히 떠오른 짙은 비웃음 때문이었다. 습관처럼 덧씌우고 있던 상냥한 가면은 어디론가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라디아타가 펠른 3세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부드럽지만 단호한 태도로 그의 손을 자신에게서 떼어놓았다.
“당신은 이런 태도로 왕비 전하에게서 평생 경멸을 샀지. 당장의 위기를 모면할 수만 있다면 긍지도 뭣도 없이 구는 그 태도, 정말이지 천박하기 짝이 없어.”
“아니다, 아냐, 라……. 허억…….”
펠른 3세가 입술을 벙긋거렸다. 하지만 그 입에서는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고통 섞인 신음만 간간이 울릴 뿐이었다.
“당신이 제때 왕궁마법사 파견을 승인하기만 했더라도 나도 이렇게까지 하진 않았을 거야. 아, 불쌍하고 안쓰러운 내 친족들. 그토록 충성을 바치는 왕이 이렇게 어리석고 비열한 작자라니.”
“흐으, 흐…….”
라디아타는 점점 검게 변해가는 펠른 3세의 안색을 즐겁게 구경했다. 가쁜 숨소리가 대가의 연주처럼 듣기 좋았다.
괴물에 시달리는 타우레드의 본성에 왕궁마법사를 제때 보내기만 했어도, 지지부진하게 시간을 끌려는 시도를 하지만 않았어도, 하다못해 라디아타가 제 딸이라는 거짓말을 긍정해서 로샨을 모욕하지만 않았어도.
기회는 충분했고 그걸 모조리 걷어찬 건 펠른 3세 본인이었다.
라디아타는 마침내 그가 까무룩 의식을 잃고 숨이 가늘어질 대로 가늘어졌을 무렵이 되어서야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제자리에서 몇 번 뜀박질을 해서 얼굴에 열이 오르게 한 다음, 테이블을 걷어차 보기 좋게 놓여 있던 찻잔을 죄다 뒤집어엎었다. 아악! 비명을 지르자 바깥에서 대기하던 기사들이 우르르 밀려들었다.
“전하, 전하께서……!”
“레이디, 정신 차리십시오!”
“의사를 불러! 당장! 전하!”
라디아타는 오늘도 허리를 꽉 조이는 코르셋을 차고 있었다. 조금 격하게 움직이고 눈물을 흘리며 횡설수설하는 것만으로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다리에 힘이 쭉 빠져 서 있을 수가 없게 되었다. 시야가 빙글 돌고 어깨에 큰 충격이 오더니 모든 게 컴컴해졌다.
레이디 타우레드가 쓰러졌다! 바로 곁에서 울리던 비명들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헉! 라디아타는 튕기듯 일어나 숨을 몰아쉬었다. 코르셋을 차고 잔 것도 아닌데 숨에서 단내가 나고 시야가 어지러웠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한기가 들었다.
“왜 이런 꿈을…….”
몇 년이 지난 지금에도 라디아타는 펠른 3세를 죽게 내버려 뒀던 일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직접 손을 쓴 것도 아니고 그저 찾아온 행운을 잡았을 뿐인데 후회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괴물로 변한 친족과 본가 식솔들의 시신을 수습하며 하루하루를 견뎌내던 날들의 절망과 고통이 아직도 뼈에 새겨져 있었다. 그때 잃어버린 목숨들을 생각하면 펠른 3세의 뺨 한 대 치지 않고 가만히 죽음을 기다렸던 자신의 인내심이 기특할 지경이었다.
사정을 짐작하고서도 자신과 결혼을 강행한 가스트로를 볼 때마다 등이 서늘한 불안에 시달리던 시절도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며 그런 불안은 의식 아래에 파묻고 꺼내보지 않을 정도의 요령이 생겼다.
라디아타는 이제 의학서적을 읽지 않았다.
신경질적으로 이불을 젖히고 나오던 라디아타는 침대 시트를 흥건하게 적신 핏자국을 보고 한층 불쾌해지고 말았다. 피임약 보급에 그렇게 힘을 쓰고 있으면서 정작 자신은 먹질 못한다니 어쩐지 억울했다.
머리맡에 늘어놓았던 레펙치오들을 죄 쓸어서 주렁주렁 달고 나니 욱신거리던 아랫배가 조금은 편해진 기분이 들었다. 고질적인 허리 통증이 한결 견딜 만해진 걸 보면 단순한 기분 탓은 아닐 것이다.
오늘 라디아타는 평소보다 조금 일찍 일어났다. 그녀는 시녀를 부르는 대신 제 손으로 술병을 찾아 꺼냈다. 이른 아침부터 산뜻한 백포도주를 한 잔, 두 잔, 세 잔. 네 잔째를 따르려는데 손목이 덥석 잡혔다.
“아침부터 술이라뇨. 자제하세요.”
“테티카 경…….”
라디아타를 호위하는 산트렘의 기사, 테티카는 라디아타의 애절한 눈빛을 단호하게 제압했다. 물러나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라디아타는 술 없인 못 사는 주정뱅이처럼 술을 졸랐다. 지난밤의 꿈을 말끔하게 씻어낼 게 필요했다.
“경도 알잖아요, 나 술 센 거. 이런 건 그냥 음료라고요. 레펙치오 때문에 취하지도 않는데 겨우 몇 잔 가지고…….”
“그럼 진짜 음료를 드시죠. 취하지 않는다고 술이 몸에 좋은 게 되는 것도 아닌데.”
“경, 적당한 음주는 몸에 좋아요. 산트렘 출신이잖아요? 알 만한 사람이 왜 이래요.”
“산트렘 출신이라 잘 아니까 막는 겁니다. 이 잔을 마시고 월경이 끝날 때까지 금주하실 거라면 놓아드리죠.”
“경…….”
“산트렘 기준으로도 전하는 술이 너무 과해요. 임신 안 하실 겁니까?”
임신 얘기가 나오자 라디아타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무심결에 임신을 입에 올렸던 테티카가 당황해 시선을 피했다. 결혼생활 몇 년이 지나도록 라디아타에겐 아이 소식이 없었다. 몇 번을 검사해도 부부 모두 건강하다는 결과만 나오는데도 그랬다.
“아니, 잠자리를 안 하는 것도 아닌데 안 생기는 걸 어쩌라고 사방에서 임신 타령인지……. 안 마시면 되잖아요, 안 마시면.”
라디아타는 팩 토라져 그깟 술, 안 마시면 그만이다 다짐했다. 술 한 잔 참는 거로 임신 얘기 며칠을 안 들을 수 있다면 나름 수지맞는 장사였다.
하지만 라디아타의 다짐은 고작 몇 시간 만에 그 진정성을 시험받았으니, 오전 일정으로 들린 브란젤 종합예술학교, 아르테 데아의 교장 에이쉬가 그녀에게 귀한 술을 선물했기 때문이었다. 두프트의 곡물주는 그윽한 향과 부드러운 맛으로 유명했지만 워낙 보관과 이송이 까다로워 멜브란트에서는 맛보기가 힘들었다.
“전하, 따로 한 잔 드릴까요?”
에이쉬가 눈치 없이 권했다. 순간 고개를 끄덕일 뻔했던 라디아타는 제 뒤에 선 테티카의 강렬한 시선을 느끼고 몸을 굳혔다. 여기서 좋다고 했다간 두고두고 잔소리를 들을 게 틀림없었다. 결혼 전에도 안 듣던 잔소리를 호위 기사에게 듣고 있는 처지라니, 서글프기 한량없었다.
‘산트렘의 기사만 아니었어도 확 갈아 치워 버리는 건데.’
왕비의 호위기사로 산트렘의 기사를, 그것도 여기사를 쓰는 게 어떤 의미인지, 라디아타가 모른다면 그건 거짓말이었다. 다소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멀쩡히 일 잘하는 사람을 자를 순 없었다.
“만찬이 있는 저녁 시간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술을 즐기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군.”
“그렇군요.”
에이쉬가 고개를 끄덕이며 술을 치웠다. 애타는 눈길이 멀어지는 술잔을 좇았다. 라디아타는 눈앞에서 술을 떠올리게 할 만한 게 다 사라진 뒤에야 겨우 진정했다. 이거야 원, 중독자라고 놀려도 할 말이 없었다.
“그웬 부인이 장남의 귀환을 애타게 바라고 있다던데, 생각 없나?”
“하하, 전하도 참, 어떻게 농담을 해도 그런 무서운 농담을 하십니까. 혹시 교장 자리에 앉히고 싶은 사람이 따로 생기기라도 하신 겁니까?”
“설마. 이 학교 교장으로는 자네가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네.”
언젠가 에이쉬가 오드리에게 건넸던 종합예술학교 설립 계획은 라디아타의 지원 아래에서 현실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하나하나 간섭이 어찌나 대단했는지, 에이쉬는 다 때려치우고 그냥 살론으로 도망가 버릴까 진지하게 고민한 적도 있었다.
예술가 후원과 육성은 본래부터 왕비의 업무 중 하나인 데다, 라디아타가 결혼 전부터 여성 화가만 골라 후원하는 기행으로 유명했던 덕에 누구도 그녀의 간섭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게 에이쉬의 불행이었다.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앙심을 품을 수도 있었을 상황이었지만, 에이쉬는 딱히 뒤끝이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라디아타가 아르테 데아의 기틀을 잡고 난 뒤 운영에서 손을 떼고 에이쉬에게 교장 자리를 맡기자 그걸로 충분하다며 만족했다.
“자네는 돈에도 관심 없고, 명예에도 관심 없지. 그저 오로지 자신의 안목이 정확하다는 걸 과시할 생각뿐이니…….”
“예에? 저도 돈과 명예 좋아합니다. 그런 거 싫어하는 사람도 있습니까?”
“그렇게 돈과 명예 좋아하는 사람이 교내에서 피임약을 대놓고 판매하나? 대체 무슨 생각이야? 기자들이 물어뜯으려는 걸 막느라 왕실에서 얼마나 수고를 들였는지 아는가?”
“으으음……. 하지만 그게 효과가 좋단 말입니다. 여학생들이 컨디션 관리에 그리 많은 신경을 기울이지 않아도 되는 게 얼마나 큰 이점인데요! 신체적, 정신적으로 부작용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마력이 늘어나면 잔병치레도 덜하고…….”
얼굴을 붉혀가며 피임약의 유용함에 대해 늘어놓던 에이쉬가 문득 말을 멈췄다. 라디아타가 우스워 죽겠다는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목덜미가 붉게 달아올랐다.
“자네가 이런 사람이라 내가 자네에게 아르테 데아의 운영을 안심하고 맡기는걸세. 안목 과시 목적으로 듣도 보도 못한 행사며 전시회를 자꾸 열어대서 날 피곤하게 만들기는 해도, 근본적으로는 예술가를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이라서.”
“감사합니다…….”
라디아타가 안목 과시 목적이라고 폄하하긴 했지만, 에이쉬의 행보에는 다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기존의 질서에 편입될 생각이 없어 뵈는 아르테 데아를 고까운 눈으로 바라보는 이들의 입을 닥치게 만들기 위해서인 목적이 컸다.
혹시 그 과정에서 사욕을 채우기라도 했으면 그걸 빌미로 잘라 버렸을 텐데, 에이쉬는 그런 방면에서는 철저히 깨끗했다. 메너트를 통해 이어진 헨젤의 기질이 그런 면에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
라디아타는 이 젊은 예술 애호가가 마음에 들었다.
“그웬 부인에 대해서는 걱정할 것 없어. 정작 결정권을 가진 그웬 백작은 셋째 공자가 아주 마음에 드는 눈치니까. 아마 가문도 셋째에게 물려주겠다고 할 것 같은데, 거기에 대해서는 딱히 할 말 없는 건가?”
“없습니다. 그웬가를 이을 인재로는 저보다 드케가 훨씬 적합합니다. 제가 그웬 백작이 되면 할아버님과 똑같은 짓을 하다가 가문을 홀딱 말아먹을 겁니다. 아버지께서 바른 선택을 하시는군요.”
에이쉬의 할아버지가 되는 선대 그웬 백작은 소문난 예술 애호가였다. 가문이 기울어지는 걸 빤히 알면서도 예술품 구입과 후원에 큰돈을 썼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글쎄……. 사람은 정말 변하는군. 사교 모임에서 만난 레이디의 지적 수준을 평가해서 줄을 세우던 사람이 이렇게……. 와…….”
마음의 준비를 할 틈도 없이 과거의 흑역사가 들춰진 에이쉬의 낯빛이 확 붉어졌다.
“전하!”
“미안하군. 하도 신기해서 그만 본심이 입 밖으로 나오고 말았어.”
철들기 전의 자신을 훤히 기억하는 사람을 상대하는 건 곤욕스럽다. 그것도 자신보다 신분이 훨씬 높은 사람이라면 더더욱.
에이쉬는 라디아타가 금주 스트레스를 자신을 놀리는 걸로 푸는 건 아닐까 의심했다. 매우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비록 라디아타는 조금도 동의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설마 내가 그렇게 속이 좁을까.”
“속이 좁지는 않지만 짓궂기는 하잖아. 일부러 그러고도 남지.”
오드리가 우우, 야유하는 표정을 지었다. 라디아타는 딴청을 부리며 친구의 놀림을 피했다.
오늘 두 사람이 마주 앉은 곳은 아르테 데아의 안쪽에 마련된 별실로, 볼린의 천사를 형상화한 도안이 곳곳에 장식되어 호화롭고 화려한 분위기가 났다. 언뜻 봐도 귀한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조성된 공간이었다.
공식적으로 약속된 만남은 아니었다. 아르테 데아의 후원자인 라디아타와 오드리가 마침 같은 날에 아르테 데아에 들렀다가 우연히 마주쳐 만남을 가졌다는 형식이었다. 두 사람 사이의 친분을 아는 사람들이 들으면 코웃음을 칠 핑계지만 때로는 이런 눈가림도 필요했다.
“자, 부탁했던 거야.”
라디아타는 오드리가 내민 상자를 조심스레 열었다. 손바닥에 쏙 들어올 정도로 작은 유리 꽃이 눈부시게 반짝거렸다. 정교하고 아름답지만 흔한 장식품인데, 두 사람의 표정은 이상할 정도로 진지했다.
“셰비언이 널 위해 특별히 만들었어.”
“고맙다고 전해줘.”
“라디아타……. 난 아직도 네게 이런 게 왜 필요한 건지 모르겠어.”
“호기심이야.”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말해줄 수 없는 비밀이 있다. 라디아타는 그저 웃었고, 오드리는 더 따져 묻지 못했다. 그저 잘 지내지, 아무 문제 없는 거지, 불안해하며 답이 정해져 있는 질문 몇 가지만 더 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로부터 약 열흘 남짓이 지난 어느 날, 가스트로는 라디아타에게서 유혹적인 초대장을 받았다. 점점 싸늘해져 가는 부부 사이에 있을 거라 생각지도 못했던 낭만적인 밤의 초대였다.
“왕비가 웬일이지? 평소에는 그리 피하더니만, 꼭 나와 잠자리를 해야만 하는 특별한 이유라도 생기셨나?”
가스트로는 노골적으로 빈정거리면서도 라디아타의 초대를 거절하지는 못했다. 초대장에 밴 라일락 향기를 맡은 순간부터 심장이 어찌나 거세게 뛰는지, 마치 쉴 새 없이 울리는 북을 가슴에 품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언젠가부터 드물대로 드물어진 국왕 부부의 밤을 준비하게 된 시녀들은 정말 온 힘을 다했다. 달빛 들이치는 방을 골라 침대를 놓고 꽃을 채우고 은은한 조명을 깔았다. 잠자리 날개 같은 휘장에 향을 입혀 곳곳에 걸어 늘어뜨렸고, 한쪽에는 뜨거운 물을 채운 욕조까지 갖다놓았다. 만약 라디아타가 허락하기만 했다면 악사를 불러다 연주까지 시켰을 것이다.
라디아타는 그 열의에 질린 표정을 지으면서도 하란 대로 순순히 응했다. 몸의 굴곡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얇은 침의를 입고 짤랑짤랑 소리가 나는 팔찌와 발찌를 찼다. 머리칼은 색실을 넣어 땋아 늘어뜨렸고 손톱엔 보석을 붙였다. 모양 좋은 입술도 붉게 물들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초대객 가스트로에게 그 방의 문이 열렸을 때, 그는 자신이 왕궁이 아닌 다른 세계에 있는 것 같은 환상에 빠지고 말았다. 겹겹이 걸린 휘장 너머로 보이는 실루엣에 한 걸음씩 다가갈 때마다 가슴에서 북소리가 울렸다.
한데 그토록 완벽하게 꾸민 방에서 라디아타가 뭘 하고 있었느냐면, 그녀는 달빛 비치는 긴 의자에 기대앉아 졸고 있었다. 달빛은 면사포처럼 라디아타의 전신을 덮고서도 그녀의 아름다움을 조금도 가리지 못했다. 속눈썹 끝에 알알이 맺힌 달빛을 따 모으면 진주 팔찌 하나쯤은 너끈히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같은 금발인데 왜 이렇게 감상이 다른지 모를 노릇이었다.
잠시 라디아타의 미모를 감상하던 가스트로는 살그머니 그녀의 입술을 훔쳤다. 아주 가벼운 접촉이었으나, 라디아타가 잠을 떨치고 눈을 뜨기엔 충분했다. 보는 이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자줏빛 눈동자가 가스트로를 온전히 담고 부드럽게 휘었다.
“왕비……. 취했나?”
라디아타는 어이가 없었다. 무조건 아름답다는 말이 나오도록 갈고 닦고 꾸미느라 들인 공과 시간이 얼만데 대뜸 취했냐니. 이 정도로 정성을 들인 방에 초대됐으면 첫 번째로 뱉을 말은 정해져 있는 것 아닌가?
“전하야말로 취하셨습니까?”
“왕비가 이렇게 아름답게 차리고 날 기다리고 있는 걸 보니 마시지도 않은 술에 취하는 기분이 드는군.”
라디아타가 이렇게 간지러운 말도 할 줄 알았느냐며 웃었지만 가스트로는 진심이었다. 매번 잠자리를 가질 때마다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몸을 빼던 아내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선 걸 보니 정말 취한 것처럼 마음이 울렁거렸다.
“대체 무슨 일이지? 뭐가 필요한가? 아르테 데아에 후원하는 금액을 늘리고 싶은가? 아르테 데아의 교장이 또 뭔가 터무니없는 짓을 저질러서 수습이 필요한가?”
“네? 아르테 데아가 왜 튀어나오나요?”
“그야…….”
요 몇 년간 당신은 아르테 데아의 일로 부탁할 게 없으면 내 옆에 누우려고 하지도 않았으니까 그렇지.
속에 꽁하니 담아놓은 이 말을 꺼내지 않은 건, 가스트로의 마지막 자존심이라고 해도 좋았다. 지금도 충분히 약자인데 이보다 더한 추락을 자초할 필요는 없잖은가.
“아무것도 아니야. 실언했군.”
고개를 갸웃대던 라디아타가 돌연 눈을 휘었다. 장난기 넘치는 짓궂은 표정, 에이쉬는 질색하고 오드리는 좋아하는 그 표정이었다. 가스트로는 굳이 말하자면 좋아하는 축에 가까웠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아니었다.
“전하, 에이쉬 그웬을 질투하셨어요?”
“…….”
언제든지 능숙하게 할 수 있었던 거짓말이 왜 이런 순간에는 나오지 않을까. 돌이켜 보면 라디아타 앞에서는 매번 이랬던 것 같기도 하고.
좌절하는 가스트로를 아는지 모르는지, 라디아타가 돌연 그의 목을 휘감고 제게로 끌어당겼다. 가스트로는 엉거주춤 허리를 숙여 그녀의 어깨를 안았다. 매끄러운 머리칼에서 짙은 라일락 향기가 났다. 눈앞이 아찔해졌다.
“제가 에이쉬 그웬을 좋게 보긴 하지만……. 그와 이런 걸 할 생각은 안 들어요.”
“들면 큰일이지.”
“누구에게 큰일이죠?”
“셋 모두에게.”
라디아타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큰일인지 묻는 대신 유혹하는 듯한 손길로 그의 뺨을 쓸었다. 가스트로는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이 순간, 그는 그녀의 변명거리가 되어도 좋았다.
얇은 침의는 단순한 형태만큼 벗기기도 쉬웠다. 가스트로가 입을 맞추면서도 능숙한 솜씨로 끈을 풀어내는데, 라디아타가 다급히 그를 멈춰 세웠다. 가스트로는 라디아타가 흘러내린 옷을 추켜올리는 걸 불만스럽게 바라보았다.
“왜?”
“잠깐, 잠깐만요.”
라디아타는 침대 머리맡에 두었던 유리꽃을 꺼냈다. 먼저 들었던 사용법대로 머리카락 한 올을 뽑아 유리꽃에 떨어뜨리자, 머리카락이 녹아 들어가며 투명하던 유리꽃이 하얗게 물들었다.
“전하 머리카락도 한 올 주세요.”
“이게 뭔데 이래?”
“오드리에게서 받아온 거예요. 날 위해 아르젠 백작에게 특별히 부탁했대요.”
몇 년째 지지부진하고 있는 셰비언의 연구 주제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 과정에서 피임약이라는 물건이 덜렁 튀어나왔기에 더더욱. 모르긴 몰라도, 그의 연구가 꼭 성공하기를 남몰래 기도하는 사람을 모으면 3등석 기차 한 칸 정도는 충분히 채울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드디어 연구에 성공했다던가? 그런 얘기는 못 들었는데.”
“빨리요.”
아이를 갖고 싶은 건 라디아타보다 가스트로가 더했다. 그는 군말 없이 제 머리칼 한 올을 뽑아 유리꽃에 떨어뜨렸다.
유리꽃에 은은한 분홍색이 차올라 꽃잎 끄트머리를 물들였다. 분홍색보다 흰색이 차지하는 면적이 훨씬 많은 작은 꽃을 보는 라디아타의 얼굴에 기쁨이 차올랐다.
“좋은 건가?”
“아주 좋은 거죠.”
라디아타가 유리꽃을 애지중지 수습해서 물을 채운 작은 수반에 넣었다. 가라앉는 게 당연할 유리꽃은 물 위에 둥둥 떠서 좋은 향기를 풍겼다. 짙은 장미향 같기도 하고 머스크향 같기도 한, 그런 향기였다.
가스트로는 와장창 깨져 버린 분위기를 어떻게 수습해야 아까처럼 될 수 있을까 고민했지만, 그건 하등 쓸모없는 걱정이었다. 라디아타가 적극적으로 다가와 먼저 입술을 붙여왔기 때문이었다.
“전하, 제가 먼저 입 맞추는 건 싫으세요?”
“아니……. 그럴 리가 있나.”
붉게 물든 입술, 발그레 혈색 오른 뺨, 그리고 이제껏 본 것 중에 가장 밝고 화사한 미소. 가스트로는 단숨에 휩쓸렸다. 따뜻한 체온이 그를 눅진하게 녹여 송두리째 삼켰다.
라디아타는 가스트로에게 안겨 흔들리며 펠른 3세를 생각했다.
‘역시 거짓말이었어.’
경멸스러운 인간! 펠른 3세는 죽음 앞에서까지 거짓말을 한 것이다. 셰비언이 만들어준 유리꽃, 혈연관계를 붉은색의 농도로 측정해 보여주는 유리꽃은 그들의 혈연이 그리 가깝지 않다고 가르쳐 주었다. 절대 이복남매일 수가 없다고.
목에 걸린 가시처럼 따끔거리던 무언가가 드디어 사라졌다. 드디어 편하게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
“라디아타…….”
라디아타는 열 오른 입술이 제 눈가를 훑고서야 제가 울고 있다는 걸 알았다. 가스트로가 뭔가 말을 했지만,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대답을 쥐어 짜내는 대신 그의 등에 팔을 두르고 신음을 흘렸다.
어차피 그 사람이 아니라면 다른 누구라도 똑같았다.
그저 그게 피를 나눈 남매는 아니길 바랐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