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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수사슴과 사막의 상관관계 (57/62)

4. 수사슴과 사막의 상관관계

뜨겁고 건조한 공기, 형형색색 화려한 색상의 가볍고 편안한 옷, 느긋하고 친절한 사람들……. 아이샤는 만탈락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달콤한 음료를 입에 물고 나무 그늘 아래 긴 의자에 드러누워 있노라면 마음의 소리가 저절로 튀어나왔다.

“여기가 천국이구나.”

죽어야 갈 수 있는 천국과는 다르게 만탈락이라는 천국은 휴양지로서 문이 활짝 열린 천국이었다. 발톱섬에서 그 난리를 겪은 후, 아이샤는 쉴 수 있을 때까지 쉬겠다며 만탈락에 눌어붙어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왕궁마법사를 그만두고 만탈락에 정착하고 싶었지만, 그녀는 종신 계약을 한 몸이었다. 질질 끌려 브란젤로 돌아갔던 아이샤가 만탈락으로 다시 휴가를 즐기러 오기까지는 무려 4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애써서 누리는 휴가이고 기껏 찾아온 만탈락이니 그저 즐겁게 놀기만 하다 가면 얼마나 좋으련만, 마법사의 운명은 아이샤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말이 거창하니 간단히 줄여서 말해보자면, 아이샤는 만탈락에서 제자로 삼고 싶은 아이를 발견했다.

에이미, 열다섯 살. 관광객을 상대로 밀짚모자를 만들어 파는 게 일인 소녀였다. 가족은 두 살 터울의 오라버니, 토미 하나뿐이고 별달리 가진 것 없이 가난한 살림에 딱히 약혼자라고 할 만한 남자도 없었다.

아이샤는 고민했다. 가난하되 씩씩하게 잘 살고 있는 소녀를 마법사의 운명에 끌어들여도 되는 걸까? 하지만 가난한 하층민이 단박에 위로 올라가기 위한 방법으로 마법사가 되는 것만큼 확실한 길이 또 있던가.

자신에게 마법사의 재능이 있다는 걸 알게 된 에이미는 아이샤를 따라가고 싶다는 의사를 분명하게 표시했다. 언제까지나 밀짚모자를 팔면서 살 수는 없다고 말이다. 처음에는 거세게 반대했던 토미도 끝내 동생의 고집에 지고 말았다.

그러나 아이샤는 곧장 에이미를 자신의 제자로 들이지 못했다.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었다.

에이미에게서는 짙은 유황 냄새가 났다.

「‘그녀’와 매우 흡사한 마력을 가진 소녀 발견. 마법사의 재능 있음. 확인 요망. -A」

꾹꾹 눌러쓴 전보를 받은 셰비언은 곧장 만탈락으로 내려가기로 마음먹었다. 샤를레아는 시체가 되어 바닷속에 처박혀 있으니만큼 설마 큰일이겠느냐 싶긴 하지만, 그래도 확인해서 나쁠 것은 없으니까.

마침 끈적끈적한 브란젤의 여름 날씨에 완전히 질려 있던 오드리는 만탈락으로 갈 구실을 놓치지 않고 붙잡았다. 자연히 반강제로 로렐라이를 떠맡게 된 이디케가 비명을 질렀다.

“제가 결혼 못 하는 건 다 아가씨 때문이에요!”

“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줄은 미처 몰랐네. 이디케, 그럼 락시 부인에게 가서 네가 이제 결혼 생각이 들었나 보다고 말해도 되는 거야?”

이디케가 마법사인 워커와 연애하는 것을 극렬하게 반대했던 락시 부인이지만, 이디케의 나이가 결혼적령기를 훌쩍 넘어간 지금은 거의 포기 상태에 이른 것도 사실이었다. 마법사든 군인이든 상관없으니 남자를 데려오기나 해라 수준으로 허들이 내려갔다고 들었다.

하지만 이디케는 아직 결혼 생각이 없었다. 가정주부가 꿈이긴 하지만 마법사인 워커와 결혼하는 건 망설여지고, 그렇다고 아예 다른 남자를 만나자니 그건 싫은 오묘한 상태였다.

결국 이디케는 터덜터덜 상단주 대행을 떠맡았고, 오드리는 희희낙락 셰비언과 함께 만탈락으로 향했다. 비록 만탈락에 갔다고 마음 편히 놀 수 있는 건 아닐 테지만 브란젤을 벗어난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었다.

셰비언은 곧장 에이미부터 만났다. 그새 아이샤로부터 마력을 갈무리하는 법을 배운 에이미에게선 유황 냄새가 그리 짙지 않았다. 하지만 셰비언이 마력을 흘리자 곧장 불쾌감을 느끼고 원인을 찾아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셰비언에게 무조건적인 호감을 느꼈던 비니타와는 상반된 반응이었다.

“샤를레아의 자식이라고 해도 믿겠어.”

“그 정도예요?”

“시체를 내 눈으로 확인하고 둥지와 함께 바닷속에 처박지 않았더라면 일단 목부터 꺾고 봤을 거야. 미묘하게 달라서 더 불쾌해. 샤를레아와 무슨 접점이라도 있었던 건가?”

들끓는 듯한 어조에서 서슬 퍼런 진심이 느껴졌다. 아이샤는 잔뜩 얼어붙어 샤를레아와 에이미 사이의 인연을 설명했다.

6년 전. 에이미는 어릴 적부터 앓던 병 때문에 햇빛을 거의 보지 못하는 상태였고, 토미는 구두닦이로 일하며 생계를 꾸리고 있었다. 그러다 만탈락에 온 샤를레아가 자신의 안내역으로 토미를 지목하며 교류가 생겼다.

샤를레아가 만탈락을 떠나던 날, 에이미는 그녀에게 손수 만든 밀짚모자를 선물했다. 샤를레아는 그 선물이 몹시 마음에 들었는지 마중 나온 토미에게 선택지를 주고 고르게 했다.

남매가 성인이 될 때까지 충분히 쓰고도 남을 거액의 돈, 혹은 에미이의 병을 낫게 할 약.

토미는 에이미를 위한 약을 골랐다. 샤를레아는 붉고 얇은 보석처럼 보이는 것을 주며 에이미에게 먹이라고 했고, 토미는 그렇게 했다.

에이미는 그걸 먹고 고열을 내며 거의 열흘 가까이 누워 있었지만, 마침내 자리를 털고 일어났을 때에는 몸 곳곳에 있던 반점이 거의 다 사라진 상태였다. 이후로는 햇빛을 봐도 무사하고 환절기마다 앓아눕던 것도 없어졌다.

셰비언은 자신도 모르게 혀를 찼다. 안 그래도 오드리처럼 한 가지 종류의 마력 순도가 높아 마력균형이 흐트러진 사람이 또 있을 거라 생각하기는 했다.

“토미가 묘사하는 걸 제가 들어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용의 비늘이었겠지.”

“어, 음……. 어떻게 아셨어요?”

“샤를레아는 예전부터 마력 운용이 그리 섬세한 편이 아니었어. 인간 어린애의 마력균형이 흐트러진 걸 바로잡아 줄 만한 능력은 없다고 봐야 해. 그러니 남은 방법은 하나지. 용의 마력을 대량으로 퍼부어 아예 양으로 눌러 버리는 거.”

아이샤가 미간을 찌푸렸다. 최근 여러 이유 때문에 거의 잊히다시피 했던 마력 계통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고 있었다. 세월에 묻혀 있다가 다시 발굴된 자료 중에는 용의 마력에 대한 것도 있었다.

소유자에게 강력한 마법적 재능을 부여하지만 그만큼 다루기 까다롭고 위험한 계통의 마력.

“그거 너무 위험한 거 아닌가요? 자칫하면 못 깨어나고 그대로 죽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런 것까지 생각하는 녀석이 아니었으니까 그냥 비늘만 덩그러니 준 거지. 본래 가졌던 마력 계통이 뭐였는지는 모르겠는데, 아마 샤를레아와 상성이 잘 맞는 편이었을 거야. 그러니 지금까지도 쌩쌩하니 잘 살고 있었겠지.”

“앞으로도 별문제 없을까요?”

“아무 문제 없어. 마법사로 살면서 마력을 쓰면 어떻게 될까 봐 걱정스러운가 본데, 대체 왜 그런 걱정을 하는 거야? 용은 본래 마법 생물이라고. 마법을 쓰는 게 당연한 종족이야. 제자로 들이고 싶으면 들여. 내 눈치는 왜 봐?”

“크흠. 그게……. 혹시 셰비언님이 불편해하실까 봐……. 하하…….”

“네가 할 걱정은 따로 있어. 비니타는 어쩔 거야?”

아이샤는 어리둥절해졌다. 비니타는 이제 어엿한 한 사람의 마법사였다. 특히 강철새 분야에 있어서는 워커와 함께 독보적인 영역을 구축하고 있었다. 비록 아직 집을 마련하지 못해 아이샤와 함께 살고 있긴 하지만 전처럼 돌봄이 필요한 어린애라는 인상은 지워진 지 오래였다.

“비니타가 왜요? 걘 셰비언님보다 더 어른스러워요. 옛 보호자의 새 제자에게 질투하진 않을걸요.”

“질투는 무슨…….”

“셰비언님, 어른스럽고 착한 비니타 걱정은 꿈에도 마시고 본인부터 어떻게 하시는 게 어때요. 셰비언님이 사방팔방 온갖 곳에 다 질투를 해서 피곤하단 얘기가 제 귀에까지 들려와요. 세상에, 상대를 독점한다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해서 제게 질문을 퍼붓던 그 모자란 용은 어디로 갔나 모르겠다니까요.”

“언제 적 얘길 하는 거야.”

“삼 년 뒤면 증인을 설 수 있을 거라더니, 벌써 사 년 지났거든요? 만든다던 그 약은 대체 언제 완성돼요? 만들어주신 피임약은 저도 아주 감사하게 잘 쓰고 있긴 한데, 슬슬 진짜 결혼식 증인을 서고 싶거든요.”

최근 셰비언의 피임약에 뜻밖의 효능이 있음이 밝혀졌다. 피임약을 복용 중인 마법사는 마력이 늘어날 뿐만 아니라 이전보다 훨씬 적은 마력을 소모하며 마법을 쓸 수 있었다. 그는 곧 마법사의 수명이 기대보다 늘어났다는 것을 의미했다.

피임약은 여전히 불법이었지만 단속은 거의 사라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어느 나라에서든 중요한 인재로 대접받는 마법사들이 피임약을 원했으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정 안 되겠으면 빨리 포기하는 것도 한 방법이에요. 레이디 오드리를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말라고요.”

“금방 만들 거라니까.”

기회를 잡은 아이샤가 셰비언을 놀려댔지만 셰비언은 꿋꿋하게 버텼다. 그 버티는 모습 자체가 진귀한 구경거리였으니, 언젠가 이렇게 놀릴 수 없는 날이 오리라 생각하면 아이샤는 조금 아쉬워질 지경이었다.

발톱섬 사건이 벌어지고 3년 후, 결혼을 약속한 시기가 온 그때.

사실 그때 결혼하지 못한 건 약을 만들지 못한 셰비언 때문이 아니라 증인을 구하지 못한 오드리의 탓이었다. 하델은 여전히 증인을 서지 못하겠다고 버텼고, 언제든 증인을 서주겠다던 사람들은 갑자기 슬금슬금 발을 뺐다.

분기에 찬 오드리는 증인 없는 결혼식이라도 해야겠다며 외국으로 나갈 방법을 찾았고 실제로 시도했다. 하지만 증인 없는 도둑 결혼식을 무사히 치르기엔 오드리와 셰비언 모두 이름과 얼굴이 너무 많이 알려진 사람들이었다. 두 손으로 다 셀 수 없는 훼방이 이어지는 동안 그녀의 휴가는 끝이 났고 증인 없는 결혼식은 끝내 무산되었다.

그리고 도둑 결혼식 시도로부터 1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오드리는 증인을 찾지 못했다. 오드리는 오랜만에 만난 락시 부인을 붙들고 결혼식 증인을 해주면 안 되겠느냐 부탁했지만, 단박에 거절당했다. 사나운 기색을 애써 억누른 잔소리가 당연하다는 듯 뒤따랐다.

“저한테 그런 말 하실 게 아니라 하델 도련님을 설득하셔야죠. 진짜 증인의 자격이 있는 사람은 바로 하델 도련님이잖아요.”

“그야 알지이……. 하지만 걘 자기가 아버지의 허락을 받지 않아도 될 때까지는 절대 증인을 서지 않겠다고 버티고 있단 말이야.”

“……하긴 하델 도련님의 입장이 애매하긴 해요. 아버지와 누나가 그렇게 대놓고 싸워대니 그 사이에서 얼마나 힘들겠어요.”

그 입장 애매한 하델이 내 증인을 죄다 빼돌리고 있다니까……. 오드리는 차마 사실을 전하지 못하고 그저 하하 웃었다. 하델의 초상화를 받고 그 어린애가 언제 이렇게 컸느냐며 감개무량하던 락시 부인의 정신건강을 위한 최소한의 조처였다.

하지만 락시 부인이 하델을 마냥 안타까워하기만 하는 건 아니었다. 그러기엔 열네 살 생일을 넘기고도 한 번도 만탈락에 내려오지 않은 하델의 행보에 대한 분노가 너무 컸다.

“만탈락이 아가씨의 것이 된 게 그리 실망스러우셨던 걸까요? 아무리 그래도 도련님의 외가인데 어떻게 한 번도 오지 않으실 수가 있는 거죠?”

“하델이 유모를 한 번도 만나러 오지 않은 게 그리 서운해?”

“설마요. 하델 도련님이 저를 그리워하시기엔 제가 도련님의 곁에 있었던 시간이 너무 짧은걸요. 아마 제 얼굴은 기억도 못 하실 거예요. 솔직히 말해 제가 도련님을 버리다시피 하며 아가씨를 따른 것도 사실이니 새삼 서운해할 주제도 못 되고요.”

“냉정하네.”

“이 정도 주제파악은 할 줄 알아야 만탈락처럼 큰 도시의 대리를 맡지요.”

“그렇게 잘 알면서 하델을 왜 그리 기다려? 걔가 만탈락에 오려면 아무리 빨라도 성년은 지나야 해. 그전까지는 브란젤에서 꼼짝도 못 할걸. 여름휴가 기간인데도 브란젤에 잡혀 있는 거 봐. 유모, 앞으로 몇 년은 글렀다 생각하고 그냥 편히 살아.”

헨젤 백작과 오드리가 서로 데면데면하게 모른 척하고 지나갈 정도만 되었어도 하델의 운신 범위는 조금이나마 넓었을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피로 이어진 사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사이가 나빴고, 어떤 안건이든 일단 부딪치면 서로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다.

하델은 강제로 부여받은 조율자의 역할을 하는 것만으로도 벅찼으니, 어느 쪽으로든 기울어진 태도를 보일 수가 없었다.

락시 부인도 그런 사정을 뻔히 알고는 있었지만, 아무래도 제 손으로 기른 오드리 쪽으로 팔이 굽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녀는 제가 경험한 최악의 말썽쟁이를 지그시 바라보다 그만 한탄하고 말았다.

“아가씨라면 오셨을 텐데요.”

“하하, 하하하! 그랬겠지! 나라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했을 테니까!”

“어휴……. 제가 도련님의 순한 성정을 아쉬워하게 될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셰비언은 오드리와 락시 부인 사이에 오간 대화의 맥락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락시 부인은 자신이 하델을 버렸다는 걸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왜 하델을 기다리며, 오드리는 왜 그녀의 기다림을 당연하게 여기는지.

“그거 굉장히 곤란한 질문인걸.”

“왜요?”

“랄리우스의 비밀 중 하나와 얽혀 있는 이야기거든. 하지만 그대는 아직 랄리우스가 아니잖아.”

셰비언은 몹시 억울해졌다. 아니, 아직까지 결혼을 못 하고 있는 이유가 대체 누구 때문인데?

“그래요, 드디어 내 억울함을 풀 때가 온 거죠. 당장 내일 아이샤와 약속을 잡아야겠어요.”

“억울함? 그건 뭐야? 아이샤는 또 왜?”

“우리 결혼이 왜 미뤄지고 있는지 밝혀야겠어요. 내가 아직 임신을 유도하는 마법약 제작에 성공하지 못한 건 사실이지만, 그게 모든 이유의 전부는 아니잖아요? 그런데 사람들은 내가 그 약을 성공해야 오드리와 결혼할 거라고 믿고 있다고요.”

“셰비언……. 혹시 아이샤가 놀려?”

“네!”

오드리는 유리온실의 천장을 노려보며 웃음을 꾹 눌러 참았다. 셰비언이 자신의 손으로 그녀의 눈가에 그늘을 드리웠다.

“칫……. 실은 나도 알아요. 증인 없는 결혼식을 시도하다 실패하기까지 했는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 증인이었던 아이샤가 사정을 모를 리 없다는 거. 그냥 날 놀리는 게 재밌어서 그러는 거겠죠.”

“음.”

“그렇게 끙끙대지 말고 차라리 대놓고 웃어요.”

웃으란다고 웃으면 안 된다. 그랬다간 만탈락에 있는 내내 토라진 셰비언을 달래야 할지도 모르니까.

오드리는 자신이 얼마나 셰비언에게 약한지 새삼 깨달았다. 서운해 풀죽은 셰비언을 보느니 가문의 비밀이고 뭐고 다 털어놓는 쪽이 더 나을 것 같다니. 순식간에 기운 저울이 다시 되돌아오는 일은 없었고, 오드리는 가문의 비밀을 애인에게 나불나불 떠드는 멍텅구리 가주가 되었다.

“비밀이라고는 하지만 그리 거창한 건 아니야. 이 저택 지하에는 랄리우스 가문의 선조가 남긴 지팡이가 있는데, 랄리우스의 직계라면 반드시 한 번은 그 지팡이를 잡아야 해. 기록에 따르면 대엿 살 무렵에 잡는 게 보통이지만 나는 열 살이 되어서야 지팡이를 잡았지. 만탈락에 온 건 그때가 처음이었거든.”

“오드리는 그때 헨젤이었잖아요. 그래도 지팡이를 잡았다고요?”

“본래 다른 성을 가진 아이에겐 기회를 주지 않는 게 맞을 거야. 근데 그땐 아무것도 모를 때라서 말이야. 그냥 유모가 잡으라고 해서 잡았지 뭐. 아마 유모도 크게 고민하고 잡게 한 건 아니었을 거야. 내가 어머니의 자식이고 랄리우스의 피를 진하게 이어받았으니 당연히 잡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하델도 지팡이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 보면 아마 그럴 거야.”

“오드리는 그 지팡이를 잡는 것에 그리 큰 의미를 두지 않는가 보네요. 하델의 성은 헨젤인데도 락시 부인의 말에 크게 반발하지 않는 걸 보면요.”

“이젠 내가 랄리우스 후작인데 설마 그럴 리가. 오래된 가문의 전통은 하등 쓸데없는 것으로 보여도 나름의 의미가 있기 마련이야. 하델과 나는 피를 나눈 남매고, 그 애의 절반은 랄리우스니 그 부분을 잊지 않게 해야지.”

오드리는 셰비언의 뺨을 가볍게 꼬집으며 웃었다. 뭐 대단한 비밀이라고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집중한 얼굴이 사랑스러웠다.

“별것도 아닌 비밀을 기어이 들으니까 기분이 어때? 만족스러워?”

“아뇨. 아직 모자라요.”

“뭐?”

“봐야겠어요.”

셰비언은 당장이라도 그 지팡이를 보러 갈 기세였다. 오드리가 그의 어깨를 꽉 붙들고 말리지 않았다면, 곧장 락시 부인에게 달려가 길을 안내해 달라고 했을 게 분명했다.

“안 돼. 혈족이 아니라면 배우자라도 볼 수 없는 거야. 락시 부인도 문 앞까지만 데려다주고 안에는 들어오지 않았어.”

“어, 내가 예전에 말하지 않았어요? 오드리와 나는 동족이에요. 겉모습은 달라도 속의 마력만큼은 완벽한 동족이죠.”

“뭐라는 거야. 지금 그 얘기 하던 게 아니잖아.”

오드리는 기가 막혀 셰비언을 달랬지만, 셰비언은 조금도 물러나지 않았다. 어찌나 흥분했는지 평소엔 인간과 다를 바 없는 동공이 길쭉하게 곤두서기까지 했다.

“오드리가 정 허락하지 않으면 몰래 가서 볼 거예요. 알죠? 내가 브란젤의 보석경매장 창고를 내 집처럼 들락거렸던 거. 아무도 모를 거예요.”

“뭐 이런 당당한 도둑 선언이 다 있어? 아니, 대체 그 지팡이가 뭐라고 이렇게 고집을 부리는 건데?”

“……짐작 가는 게 있어서 그래요. 그건 오드리만이 아니라 나와도 관련이 있어요. 확실해요.”

가정형으로 시작한 말이 확신으로 끝났다. 내내 오드리와 눈을 맞추던 셰비언이 와락 그녀를 끌어안고 귓가에 속삭였다.

제발요.

오드리는 맥없이 무너졌다.

랄리우스의 비밀이라는 선조의 지팡이를 보관한 지하실은 성인 대엿 명이 함께 서면 다 찰 정도로 작은 공간이었다. 귀족 저택의 공간답지 않게 장식도 하나 없이 썰렁했다.

“효율적이잖아.”

오드리는 묻지도 않은 질문에 괜한 변명을 하며 지팡이가 보관된 함을 쓰다듬었다. 이래도 되는가 싶어 손이 벌벌 떨리긴 했지만, 여기까지 와서 망설여 봤자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녀는 과감하게 뚜껑을 열었다.

평범한 나무 지팡이였다. 적당히 굵고 긴 나뭇가지를 골라 잔가지를 쳐내고 표면을 대충 다듬은 게 전부인 물건이었다.

다만 그 향기가 특별했다. 함을 열었을 뿐인데 달고 상큼한 향기가 폭발적으로 흘러나와 지하실을 가득 채웠다. 향수병을 통째로 깨뜨려도 이렇게 향기가 진하진 않을 것이다.

“꽃도 아닌 나무, 그것도 오래전에 다듬어서 지팡이로 만든 나뭇가지에서 이런 향이 난다는 게 대단하지 않아? 내가 아카시아를 유독 좋아하는 건 이 지팡이를 접한 경험에 영향을 받아서일지도 몰라. 전에 하델도 아카시아 향이 나는 향수를 쓰는 거 보고 내가…….”

오드리가 무슨 말을 하든, 셰비언의 귀엔 들리지 않았다. 지팡이에서 눈을 떼질 못하는 셰비언의 이상한 태도는 오드리를 당황시켰다.

“……셰비언? 왜 그래? 설마 이 지팡이가 정말 그대와 연관이 있기라도 한 건가?”

셰비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함을 밀어내고 함이 놓여 있던 단의 표면에 손을 얹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오드리가 숨을 멈췄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역시…….”

“셰비언?”

“오드리, 여기 손을 올리고 마력을 불어넣어요.”

설마 셰비언이 내게 나쁜 짓을 시키진 않겠지. 오드리는 자신의 순진한 믿음에 놀라워하면서도 순순히 단에 손을 올렸다. 돌로 만들어진 단은 차갑고 싸늘했다. 그녀가 마력을 넣기 전까지는.

“어……?”

마력을 머금은 그 자리에서부터 변화가 시작됐다. 돌은 온기를 머금었고 낡아 바스러졌던 귀퉁이에선 새싹이 자라났다. 동시에 지하실 벽면 전체가 은은한 빛으로 일렁이더니,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복잡한 마법진으로 가득 채워졌다.

“손 떼지 마세요.”

셰비언의 경고가 아니라도 손을 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하지만 마법진은 시간과 함께 점차 흐려졌고 이내 얼마 가지 않아 벽을 채우던 빛무리마저 사라졌다. 따스하던 단은 싸늘한 돌로 돌아왔고, 틈새에서 자라났던 새싹도 자취를 감췄다.

작은 지하실을 채웠던 기적 같은 광경은 처음부터 그저 환상이었던 듯했다. 오드리는 다시 한번 마력을 불어넣어 보았지만, 조금 전과 같은 변화는 나타나지 않았다. 어쩐지 바보천치가 된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네. 진짜 보물은 지팡이가 아니라 이 지하실 자체였던 건가?”

“보물은 무슨? 지팡이고 지하실이고 다 쓰레기예요.”

셰비언의 동공이 하얗고 길쭉하게 변했다. 드러낸 목덜미에 흰 비늘이 도도독 돋아났다. 발아래에서 서리가 번졌다.

“셰비언!”

“오드리, 단명 문제를 해결하는 게 랄리우스의 오랜 숙원이라고 했죠? 내가 지금 당장 그걸 들어줄게요. 저 지팡이를 부러뜨리고 파편은 불태워 없애 버려요. 그럼 단명하는 사람은 나오지 않을 거예요.”

랄리우스의 보물이라는 선조의 지팡이와 그를 보관하는 지하실은 어떤 이름 모를 용의 걸작품이었다. 지팡이를 쥔 인간에게 강제로 용의 마력을 대량으로 부여하고 더 나아가 형질마저 뒤바꾸는 마법이 지하실 전체에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대엿 살의 어린 나이에 지팡이를 잡는 것이 보통이었다고? 당연히 그만한 나이의 아이여야 했을 것이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거부반응을 줄이고 마력을 많이 밀어 넣을 수 있었을 테니까. 그래봤자 오드리처럼 처음부터 용의 마력을 강하게 타고난 경우가 아니라면 제대로 된 효과를 볼 수 없었겠지만 일정량의 변화를 일으키기엔 충분했다.

어리고 몸이 건강할 때는 강제로 용의 마력이 들어오더라도 별문제가 일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머리가 비상해지고 몸에 활력이 넘치는 등, 아주 좋은 영향을 끼치는 것처럼 보인다.

비록 동물이 용의 마력에 위협을 느끼고 도망치는 부작용이 나타나기는 하지만,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오히려 뜻하지 않게 험한 일을 당할지도 모르는 가능성이 줄어드는 거니 부작용이라 할 것도 아니었다. 어차피 나이를 먹으면 점차 줄어드는 부작용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이를 먹고 몸이 자라며 타고난 마력의 양이 점점 늘어나면서 문제가 생긴다. 어릴 적에 최대한으로 받아들였던 용의 마력과 타고난 마력 사이의 균형이 무너지며 마법망에 지나치게 많은 영향을 받는 몸이 되는 것이다. 그러다 끝내 용의 마력을 견뎌낼 수 없게 되면 쇠약해져 죽는 것이고.

직계의 여자가 특별히 수명이 짧았던 건 그런 맥락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임신과 출산은 모체에게 엄청난 부담을 주는 행위였다. 출산을 겪은 몸은 급격히 약해졌고, 마력균형은 급속도로 무너졌다. 아무리 몸조리를 잘하더라도 한계가 있었다.

그렇게 보면 어릴 적부터 그리 건강한 축은 아니었던 밀리나가 아이를 둘이나 낳고도 4년이나 버틴 건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어쩌면 그녀는 뭔가를 짐작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어린 오드리에게 만탈락과 랄리우스의 이야기를 매일 밤 들려주면서도 지팡이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았던 걸 보면.

오드리가 열 살이 되어서야 지팡이를 잡았던 건 아슬아슬한 행운이라고밖에 할 말이 없었다. 너무 어릴 때 잡아서 마력을 지나치게 많이 받아들이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너무 나이 들어 잡아서 자랄 만큼 자란 타고난 마력과 크게 충돌을 일으키지도 않았으니까 말이다.

그렇더라도 적당한 때에 셰비언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오드리 역시 쇠약사하는 결과를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무리 용의 마력을 짙게 타고났다지만 어릴 적에 성질이 다른 마력을 대량으로 주입받은 여파는 컸다.

셰비언은 지팡이와 지하실을 남긴 용이 랄리우스의 선조 중 한 명일 것이라 단언했다. 인간과 결합해 자손을 남겼지만 정작 자손에게 용의 마력이 물려 내려가지 않는 것에 불만을 품고 그런 마법진을 고안했을 거라고. 피와 함께 마력과 재능을 모두 물려받아야 자식으로 치는 게 용의 문화였으니 그러고도 남는다고, 그렇지 않고서야 오드리의 마력에만 반응하는 게 말이 안 된다고 했다.

자식에 대한 샤를레아의 집착 때문에 호된 꼴을 겪었던 셰비언에겐 지팡이와 지하실이 끔찍하게만 느껴졌다. 손대기도 싫은 오물이 집 아래에 깔려 있었다니 구역질이 났다.

“그러니 당장 부숴 버려요.”

“……선조가 용일 수도 있다는 것엔 동의해. 하지만 단순히 자손에게 용의 마력을 남겨주기 위해 이런 마법진을 만들었을 거라곤 생각되지 않아. 뭔가…… 다른 이유가 있었을 거야.”

“다른 이유 같은 건 없어요. 가문의 보물이라는 저 쓰레기를 제 손으로 부수기 싫은 오드리의 마음만 있을 뿐이죠.”

“…….”

“빌어먹을, 마법이 곧 용이니 후손 같은 것에 집착하지 말라고 잠들기 전에 분명 얘기했고 다들 알아먹은 것처럼 굴었는데 이게 대체 어쩐 일일까요……. 샤를레아 같은 멍청이는 하나로도 충분한데 말이죠. 낳을 수 없으면 만들어보겠다니 뭐 이런 등신이 다 있담. 그게 됐으면 진즉 했지!”

펄펄 뛰는 셰비언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게 있었으니, 그가 욕을 퍼붓고 있는 그 등신 같은 용은 오드리의 조상이고, 대부분의 귀족들은 자신의 가문과 조상에 대해 드높은 자부심과 존경심을 갖는 교육을 받으며 자란다는 것이다.

물론 비슷한 교육을 받고도 가문에 대한 존경심은 신발 밑창 닦는 걸레만도 못한 라비린이나 피올 같은 경우도 있다지만 오드리는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이 랄리우스를 가질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때에도 랄리우스를 사랑했다.

“지팡이를 잡지만 않으면 아무 문제 없는 거잖아. 어차피 랄리우스에 의미 있는 혈통이라곤 나와 하델밖에 안 남았고 하델은 이 지팡이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지팡이를 절대 만지지 말고 구경만 해야 한다는 규칙을 추가하면 그만이야.”

“오드리!”

“랄리우스는 오래된 가문이고 혈통이 흐려진 만큼 상징이 중요해. 처음으로 만탈락에 저택을 지었을 때부터 있었던 지팡이고 지하실이야. 폐기라니, 말도 안 돼.”

“그 규칙이 엄격하게 지켜질 것 같아요? 본인의 어린 시절을 좀 생각해 봐요. 랄리우스의 후손이 아닌 인간 어린아이가 이 지팡이를 잡았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라고요.”

“참관인을 두면 돼.”

오드리는 강경했고, 셰비언의 설득을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셰비언은 어이가 없었다. 오드리가 이렇게 막무가내로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둘 모두 자신의 입장에서 한 치의 물러섬도 없으니, 바야흐로 연인 사이의 첫 번째 전쟁이 막을 올렸다. 둘은 아침부터 밤까지, 얼굴만 마주치면 장소를 가리지 않고 설전을 벌였다.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꼬투리를 잡아대는 솜씨가 가히 수준급이었다.

만탈락 저택의 식솔들은 오드리와 셰비언 사이의 전쟁을 흥미진진하게 구경했다. 누군가는 징그러울 정도로 사이가 좋던 두 사람이 저리 싸우는데 걱정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했지만, 누군가는 연인이 시끄럽게 싸울 땐 걱정할 것도 없다고 했다. 사랑싸움에 끼어들어 봤자 좋은 꼴은 못 볼 테니 그냥 가만있자고.

락시 부인은 후자의 입장에 가까웠다. 얼굴을 보고도 찬바람이 불고 종일 서로 말 한 마디도 나누지 않는 등 냉랭한 분위기가 감돌 때가 진짜 위기인 것이지, 아직 얼굴 보고 꼬투리를 잡을 정도로 싸우는 상태면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밖에서 구경하는 제삼자에게나 해당하는 얘기고, 당사자인 셰비언은 죽을 맛이었다. 만탈락에서 머물기로 약속한 날이 하루하루 줄어드는데 오드리는 조금도 고집을 꺾지 않았다. 결국 그는 최후의 수단을 사용했다. 락시 부인을 찾아가 사실을 모조리 고해바치고 자신을 도와줄 것을 부탁한 것이다.

알고 한 일은 아니라지만 제 손으로 오드리에게 독주를 마시게 한 꼴이 된 락시 부인은 큰 충격을 받았다. 언제나 꼿꼿하던 자세는 어디로 갔는지 순식간에 십 년은 더 늙은 것처럼 비틀거리며 자리에 주저앉는다.

“그 지팡이가…….”

“지하실에 새겨진 마법은 지팡이가 없으면 발동되지 않아. 둘 다 처분하는 게 어렵다면 지팡이만이라도 폐기하는 게 최선이야. 마력이 담긴 건 지팡이거든.”

셰비언은 마음이 급했다. 그에겐 충격을 받은 락시 부인을 배려하거나 추슬러 줄 만한 여유가 없었다.

“백작님께서 지하실의 마법을 수정하거나 할 수는 없는 건가요?”

“오물에 손대고 싶지 않아.”

딱 잘라 말했던 셰비언이 살짝 락시 부인의 눈치를 보고 말을 덧붙였다.

“……마법을 수정할 수 없도록 안전장치가 되어 있어. 내가 억지로 비틀면 부작용이 생길 거야. 그게 어떤 식으로 발현될지는 나도 몰라. 어쩌면 마력균형이 무너져도 쇠약사로 끝나는 지금과는 다르게 괴물로 변해가며 죽을 수도 있어.”

“맙소사…….”

“오드리는 지팡이를 만지지 않게 하면 그만 아니냐고 하는데, 오드리의 어린 시절 일화를 들어보면 인간 아이들이 그렇게 어른 말을 잘 들을 거 같지가 않거든? 분명 규칙을 깨는 녀석이 나올 거란 말이야. 그때 그런 부작용이 세상에 드러나면 어쩔 거야.”

“그 말씀을 아가씨께도 하셨나요?”

셰비언이 락시 부인의 시선을 피했다. 락시 부인은 말을 듣지 않아도 사정을 알 것 같았다. 용 중에서도 마법의 주인이라는 위치는 특별하다던데 못 한다는 말을 하기가 싫었겠지.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오드리니까 더더욱.

“부인도 랄리우스의 상징을 폐기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귀족 가문에서 상징은 중요해요. 다음 대 랄리우스 후작이 양자일 가능성이 높은 지금은 더더욱 그렇죠. 아가씨 말씀대로 규칙을 좀 손보면 괜찮을 수도 있고요.”

셰비언은 다급해졌다. 이러다 락시 부인마저 오드리의 편을 들면 큰일이었다. 그땐 진짜 몰래 숨어들어 저지르는 방법밖에 남지 않는다. 일단 저지르고 나면 발뺌도 힘들 것이고.

“꼭 양자를 들이지 않을 수도 있잖아. 지팡이를 남긴 용도 자손을 남겼는데…….”

“그 말씀, 책임지실 수 있나요?”

락시 부인이 셰비언의 위아래를 쓱 훑었다. 특정 부위에 시선이 오래 머문 것 같은 건 그의 착각이 아닐 것이다.

“아가씨와 약속했던 기한을 넘기셨잖아요. 기한 내에 만든 건 그…… 피임약이고요.”

피임약 앞에 ‘빌어먹을’이란 말이 붙었다. 셰비언은 못 들은 체했다. 마법사들의 강력한 요구가 있어 피임약의 필요성이 어쩔 수 없이 인정되었지만 논란은 그와 상관없이 아직도 현재진행형이었다.

“곧 해결될 거야.”

락시 부인은 영 미덥지 못하다는 눈으로 셰비언을 바라보았지만, 끝까지 오드리의 편을 들지는 못했다. 환절기마다 며칠씩 앓아눕던 오드리를 보며 가슴 졸이던 나날들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나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오드리 아가씨의 아이면 분명 사고란 사고는 다 치고 다닐 거고 어른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들을 테죠. 규칙은 어기라고 있는 거라 말할 게 분명하고요.”

“아니 무슨 말을 그렇게까지…….”

“어린애에게 가위를 쓰면 안 된다고 백번 타이르는 것도 분명 중요하지만, 멀쩡한 어른이라면 위험한 가위를 애초 어린애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치워두는 현명함을 발휘해야 마땅하겠죠. 제가 백작님을 도와드리겠습니다.”

“오!”

셰비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락시 부인이 작게 한숨을 내쉬곤 관자놀이를 짚었다.

“백작님도 싸우는 요령을 좀 알아야 해요. 아가씨 성질머리를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어르고 달래거나 설득할 생각은 않고 꼭 폐기해야 한다고 막무가내로 우기기만 하면 아가씨가 굽히겠어요? 우리 아가씨 나이가 겨우 스물셋이에요. 성질 죽으려면 멀었다고요.”

“괜찮아, 싸울 일 없어.”

“앞날을 자신하지 마세요. 충분히 경험하셨을 텐데요.”

셰비언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녀의 말이 맞았다. 4년 전의 셰비언은 자신이 4년 후에도 여전히 미혼일 거라고는 조금도 상상하지 못했으니까.

“저만 믿으세요.”

락시 부인의 자신감이 눈부셨다. 셰비언은 그녀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부인만 믿습니다.

오드리에게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아이샤였다. 오드리와 아이샤는 브란젤에서도 종종 만남을 가졌는데, 서로 워낙 바쁜 나머지 명확한 목적이 있을 때만 자리를 함께했다. 설마 만탈락까지 와서 또 얼굴을 마주 보게 될 줄은 몰랐다.

“만탈락에서 아이를 하나 거뒀는데, 레이디 오드리 얼굴이라도 좀 보여줄까 해서 데리고 왔어요. 나중에 모른 척하지 말고 사탕이라도 하나 쥐여주세요.”

“사탕은 무슨……. 내가 설탕 수입 사업을 하는 건 맞지만 아무 곳에나 공짜로 퍼줄 만큼 수익이 좋진 않거든요.”

농담으로 던진 말에 까칠한 대답이 돌아왔다. 아이샤는 오늘 오드리를 상대하는 게 그리 쉽지만은 않을 것을 짐작했다. 셰비언과 하루해가 짧다고 싸워댄다더니, 평소보다 인내심의 깊이가 매우 얕은 상태인 게 분명했다.

이럴 때 오드리를 잘못 건드리면 그야말로 뼈도 추리지 못할 정도로 탈탈 털리기 마련이지만……. 오늘의 아이샤에게는 비장의 무기가 있었다. 바로 영특하고 예쁜 자신의 제자였다. 오드리가 영리한 여자아이들을 유독 예뻐한다는 소문은 퍼질 대로 퍼져 있었고, 아이샤는 에이미를 제자로 삼은 지 며칠 만에 제 새끼가 너무 함함한 어미 고슴도치가 되어 있었다.

“레이디 오드리를 뵈어요.”

하지만 잔뜩 긴장한 에이미의 깜찍한 인사를 받고도 오드리의 표정은 풀릴 줄을 몰랐다. 아직 마력 갈무리가 그리 능숙하지 못한 에이미에게서 풍기는 옅은 유황 냄새 때문이었다.

코가 따끔거리는 냄새를 맡을 때마다 수면 아래에 가라앉아 있던 기억들이 들썩거리며 오드리를 자극했다. 커다랗고 둔한 칼이 뒷덜미를 툭툭 건드려 대는 것 같았다.

“너, 샤를레아와 접촉한 적이 있다지.”

“네…….”

에이미가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어깨를 옹송그렸다. 멜브란트에서 샤를레아에게 적대적인 지역으로 수위에 꼽힐 곳이 바로 만탈락이었다. 샤를레아에게 은혜를 입은 소녀는 그녀의 이름만 나와도 피할 곳을 찾는 게 습관이 되어 있었다.

오드리는 에이미의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그녀는 계속해서 물었다. 샤를레아와는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그동안 어떤 생각을 했는지, 얼마나 깊은 교감이 있었기에 인간을 싫어하는 용이 제 비늘까지 떼어주었는지 짐작되는 바는 없는지.

듣고 있는 아이샤의 표정이 점점 험상궂게 변했다. 오드리는 아이샤가 많이 참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끝내 마지막 말을 뱉고 말았다.

“넌 네가 스승으로 삼은 마법사가 샤를레아를 죽이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는 걸 알고 있니? 마법사협회의 본부에는 당시 발톱섬에서 있었던 전투의 자료가…….”

“레이디 오드리!”

의자가 쾅 소리를 내며 뒤로 넘어갔다. 아이샤가 에이미를 끌어당겨 제 품에 가두고 오드리를 노려보았다. 오드리가 순순히 양손을 들어 올렸다.

“미안해요. 내가 지나쳤어요.”

“레이디 오드리가 샤를레아에게 호되게 당한 당사자라서 내가 이만큼이나 참은 거예요.”

“알아요.”

“에이미는 그 망할 붉은 용과 아무 상관없어요. 그저 우연히 그 용의 변덕에 휩쓸렸던 것뿐이라고요. 유황 냄새가 그리 짙은 것도 아닌데 레이디 오드리가 이렇게 예민하게 반응할 줄 알았더라면 내가……. 읍!”

에이미가 쉴 틈 없이 자신을 변호하는 아이샤의 입을 막았다. 아이샤가 몹시 억울한 표정을 지었지만 에이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오드리에게 죄송하다 사과를 건네니, 오드리는 어딘지 민망하고 불편한 심정이 되고 말았다.

“사과는 내가 해야 하는데.”

“아뇨……. 스승님께서 열심히 저를 감싸주셨지만 그게 딱히 사실이 아니라서 죄송한 거예요.”

에이미는 샤를레아와 보냈던 시간을 보물처럼 간직하고 살았다. 햇빛 한 자락 보는 것도 고통스럽던 자신에게 찬란한 낮을 선물해 준 사람이었다. 그녀가 어떤 짓을 저질렀든 미워할 수 없었고 부정할 수도 없었다.

“저는 아직도 샤를레아님을 좋아해요. 죄송해요, 아가씨.”

“나에게 그런 말을 해서 좋을 게 없을 텐데? 로렐라이의 주인에게 미운털이 박히면 마법사로 살기 힘들어.”

“설마요. 자애로우신 아가씨께서 그러실 리 없잖아요.”

에이미가 눈을 크게 뜨고 반박했다. 오드리에게 추궁당하며 움츠러들었던 것은 벌써 다 잊은 듯했다. 아이샤는 내심 탄식했고 오드리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종류의 칭찬에 귀를 의심했다.

“아가씨께서는 매해 겨울마다 만탈락의 빈민들을 거둬 먹이시잖아요. 저와 제 오라버니가 그걸로 먹고살았는걸요. 한 번쯤은 꼭 아가씨의 얼굴을 뵙고 너무나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아가씨, 정말 감사해요. 아가씨의 자비심이 아니었다면 저희 남매는 한참 전에 굶어 죽었을 거예요.”

이것 보게.

“샤를레아님께서 용서받기 어려운 죄를 저질렀다는 건 저도 잘 알아요. 하지만 제게는 은인인걸요. 차마 미워할 수 없었어요. 스승님께는 그저 감사의 말씀밖에 드릴 게 없어요. 이렇게 어리석은 생각을 하는 어린애를 제자로 거둬주셨으니까요. 직접 싸우셨던 만큼 거부감도 크셨을 텐데 말이에요.”

에이미가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아이샤를 올려다보았다. 가련하고 안쓰러워 저절로 동정심이 일 만한 자태였다.

“저는 샤를레아님이 주신 마력으로 마법사가 되는 거니까, 그분 대신 세상에 속죄하는 마법사가 되려고 해요…….”

오드리는 크게 감탄했다. 불과 열다섯 살, 시장통에서 밀짚모자를 짜서 파는 아이답지 않은 언변과 연기력이었다. 비록 아직 나이가 어려서 그런지 뱃속의 꿍꿍이가 훤히 보이기는 하지만 그거야 시간과 경험이 해결해 줄 문제였다.

“아이샤 씨. 얘는 왕궁마법사로 키우세요.”

“레이디 오드리……. 남의 제자 미래를 왜 멋대로 정하세요…….”

“얘는 정치를 해야 하는 애거든요. 얘가 이대로만 자라면 장차 왕궁마법사장까지 해먹을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드네요. 어차피 그 자리는 마법 실력으로 올라가는 자리도 아니잖아요.”

아이샤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넘어진 의자를 도로 일으켜 세웠다.

“감히 내 앞에서 샤를레아를 두둔하는 배짱도 훌륭하고, 지은 죄가 어쨌건 자신에겐 은인이니 저버릴 수 없다는 고집도 마음에 들어요. 걱정이라면, 왕궁마법사장 자리에 오를 때까지 그 마음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거죠.”

“글쎄, 에이미는 제 제자라니까요.”

오드리는 아이샤의 한탄 같은 건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대신 아직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에이미의 뺨을 가볍게 잡아 늘이며 웃었다.

“에이미, 넌 분명 아주 높은 자리에까지 올라갈 수 있을 거다. 조금 전 같은 말을 다시는 입에 담지 않기만 한다면 말이야.”

“어…….”

“대중은 자신과 다른 사람을 싫어해. 그 사람이 자신보다 나으면 잡아 꺾고 싶어 하고, 모자라면 밟고 싶어 할 거다. 그걸 견디면서 널 닳게 하지 말렴. 네 속마음을 밝히는 건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서 해도 충분해.”

에이미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하긴 오드리의 앞에서도 제 할 말을 했던 아이니, 오드리의 말이 불만스럽기도 할 것이다.

“그때까지 네가 변하지 않을 수 있는가, 그게 문제지.”

“저는…….”

“샤를레아를 싫어하는 건 나만이 아니란다. 유황 냄새 나는 마력을 알아볼 사람은 수도 없이 많아. 험한 꼴을 꾸준히 겪다 보면 너도 그녀를 원망하고 싫어하게 되지 않을까?”

“그럴 리 없어요.”

에이미의 눈이 결연하게 빛났다.

“고통 없이 마음껏 햇살 아래를 걸을 수 있었던 날의 감격을 잊을 수 있을 리 없어요. 제 몸에는 아직도 지워지지 않은 반점들이 남아 있는걸요. 저에겐 샤를레아님이 그저 미친 용으로 기억되지 않게 할 의무가 있어요. 저는 반드시 세상에 도움이 되는 마법사로서 의미 있는 발자국을 남겨야 해요.”

오드리는 에이미에게서 희망을 봤다. 어쩌면 이 애가 제2의 레이디 오드리가 되어줄지도 모른다, 뭐 그런 희망. 열다섯 살이 뭐 어때서? 오드리는 그 나이에 로렐라이의 주인이었다.

“그래……. 샤를레아는 싫지만 너는 마음에 드는구나. 에이미, 네가 지금의 그 결심을 잊지 않는 한 내가 너의 후원자가 되어주마. 아이샤 씨, 괜찮죠?”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제안이었다. 아이샤는 오드리마저 제 편으로 끌어들인 제자가 예뻐 죽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얼굴도장 찍으러 왔던 에이미는 얼결에 후원자를 얻게 되었다.

오드리가 제 편이라고 확신하고 나자 에이미는 몹시 귀엽고 솔직해졌다. 고작 한 시간 만에 오드리의 팔을 잡고 함께 거리 구경을 가자고 조를 수 있을 정도로 대담해지기까지 했다.

평소의 오드리였다면 절대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수리에 닿는 햇살이 뜨겁고 거리에 사람이 넘쳐나는 시기였으니까.

하지만 요즘 오드리는 저조하게 가라앉은 기분을 끌어올릴 계기가 필요했고, 에이미가 선물이라며 가져온 밀짚모자는 퍽 예뻐 마음에 들었다. 결국 그녀는 에이미가 직접 만들었다는 밀짚모자를 쓰고 만탈락의 거리로 나섰다.

“레이디 오드리,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에이미는 어떤 사명감마저 느끼고 있는 듯했다. 소녀는 앞장서서 길을 안내하면서도 틈틈이 뒤를 돌아보며 오드리가 잘 따라오고 있나 확인했다. 어쩌다 오드리의 걸음이 느려지기라도 하면 부리나케 달려와 곁을 지켰다.

‘이거야 원, 웬 강아지를 하나 달고 있는 기분인걸.’

한때 만탈락 제일의 말썽쟁이라고 불렸던 오드리였다. 여전히 만탈락의 큰길을 거의 다 알고 있었고, 그 사이를 연결하는 작은 골목의 갈림길 대부분을 기억했다. 하지만 바짝 긴장한 에이미의 뒤통수가 귀여웠고 소소하게 변한 풍경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어 군말하지 않고 에이미의 안내를 받았다.

그렇게 걷다 보니 비슷비슷한 수사슴 장식이 이곳저곳에 걸려 있는 게 눈에 보였다. 수사슴 모양의 나무 인형이 가게 문 앞을 장식하고 있기도 했고, 수사슴 모양의 목판이 창문가에 매달려 있기도 했다. 유리창에 수사슴을 그려놓은 건 너무 흔해빠져 언급할 가치도 없었다. 그러다 마침내 수사슴 모양 마법등까지 발견했을 때, 오드리는 더 참지 못하고 에이미를 불러 세웠다.

“만탈락에 내가 모르는 유행이라도 생긴 거니? 웬 수사슴 장식이 이렇게 많아?”

에이미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어떻게 오드리가 모를 수 있느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랄리우스 가문이 만탈락에 자리 잡은 걸 기념하는 주간이잖아요.”

그런 게 있었니. 오드리는 자신도 모르던 기념 주간이 대체 언제 생겼는지 묻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정말 에이미를 실망하게 할 것 같았다. 그녀는 깜빡 잊은 척 고개를 끄덕이며 에이미의 옆구리를 찔렀다. 경험 부족한 미래의 왕궁마법사장은 -어디까지나 오드리의 머릿속에서만 그렇다- 오드리에게 설명해 줄 것이 생겼다는 게 신이 났는지 조잘조잘 잘도 떠들었다.

랄리우스는 아주 오래된 가문이었다. 랄리우스의 역사는 멜브란트의 건국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들은 비옥한 농지와 풍요로운 숲을 대대로 지배하는 강력한 일족이었다.

수십 개에 달하는 소국들이 지리멸렬하게 다투는 혼란스러운 시대에도 감히 그들의 영역을 넘보는 자가 없을 정도였으니, 가히 한 지역의 왕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비록 랄리우스가 왕을 자칭한 적 없고 누구도 그들을 왕으로 부르지 않았지만 말이다.

랄리우스를 상징하는 수사슴은 그들이 지배하는 땅의 상징이기도 했다. 겨울이 되어 농지가 비고 널따란 평야가 눈밭이 되면 부근의 숲에서 서식하던 사슴들이 농지까지 내려와 겅중겅중 뛰어다니곤 했다.

랄리우스 일족은 딱히 사슴 사냥을 금한 적이 없었지만, 주민들은 랄리우스의 상징이 수사슴이라는 것만으로도 사슴을 사냥하지 않았다. 굳이 겨울이면 내려오는 숲의 주민들을 사냥하지 않더라도 가을의 수확물은 풍족했고 배곯는 일이 없었다.

혼란스러운 시대의 어느 날, 하루마키스 가문의 젊은 무장이 전쟁이 계속되는 시대는 막을 내려야 할 때가 왔다고 선언하며 자신과 뜻을 함께할 자들을 모았다. 객기로 끝날 수도 있었을 그 선언에 역사 깊은 두 가문의 가주가 손을 보탰으니, 타우레드의 사자와 랄리우스의 수사슴 깃발이 하루마키스의 백합과 함께 휘날렸다.

하루마키스의 젊은이가 대체 무슨 수작을 부렸기에 부족한 것 없는 두 가문이 그와 함께하기로 했는지 알려진 바는 없다. 하지만 그가 이끄는 군대가 사자의 깃발과 함께 승전에 승전을 거듭하고 군대가 쓸고 간 뒷자리에 휘날리는 수사슴의 깃발을 보며 안심하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세상이 바뀌기 시작했다는 것만은 명백했다.

멜브란트 왕국의 탄생이었다.

타우레드는 제 본거지를 지켰으나 랄리우스는 실렌다 사막 근처에 자리한 작은 마을 만탈락을 원해 그리로 본거지를 옮겼다. 겨울이 되어도 눈이 내리지 않고 사슴이 내려오지도 않는 땅이었지만, 랄리우스는 앞으로는 만탈락이 자신들의 뿌리가 될 것이라 선언했다.

랄리우스의 본거지가 되면서 작은 마을 만탈락은 남부 전체에서 손에 꼽히는 대도시로 거듭났다. 랄리우스의 후손들이 단명에 단명을 거듭하면서 점차 영락해 중앙정치에서 밀려나기 전까지, 만탈락은 남부의 보석과 같은 도시로 영화를 누렸다.

이전과 같은 성세를 누리기 힘들어지고도 만탈락의 주민들은 랄리우스의 이야기를 대대로 전했다. 사실보다 전설에 가까운 이야기들이었다.

랄리우스가 만탈락에 정착하자 매년 여름마다 몰려오던 모래바람이 멎었다거나, 강의 수량이 두 배는 족히 풍부해졌다거나, 어느 날 갑자기 없던 언덕이 솟고 그 자리에 풀이 자라 양을 칠 수 있게 되었다거나, 자갈과 모래뿐이던 땅에 랄리우스가 다녀가니 옥토가 되었다거나, 해마다 넓어지던 실렌다 사막이 랄리우스의 정착 이후 쪼그라들기 시작했다거나…….

“그걸 믿니?”

“옛 마법이 아직 살아 있던 시대잖아요. 안 될 건 또 뭐예요?”

하긴 브란젤에 홍수가 나는 걸 막아보겠다고 강을 옮기는 미친 짓을 벌인 시대이긴 했다. 오드리는 묘하게 설득당한 느낌에 신음성을 흘렸다.

“하지만 랄리우스의 혈통에서는 마법사가 나오지 않는데…….”

“옛날의 랄리우스는 정말 대단했다고 들었어요. 멜브란트의 깃발에 수사슴이 들어갈 정도였잖아요. 아무리 콧대 높은 마법사라도 랄리우스의 권력과 금력으로 충분히 부릴 수 있지 않았을까요? 꼭 랄리우스가 마법사일 필요는 없는 거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아주 오래전부터 만탈락의 주민들은 해마다 햇살이 가장 뜨거운 시기가 되면 집 안과 거리 곳곳을 수사슴 상징물로 채워 장식함으로써 랄리우스를 기렸다. 이 독특한 풍습은 랄리우스의 성을 쓰는 사람이 없어지자 함께 사라졌었지만, 오드리가 랄리우스 후작이 되어 만탈락을 영지로 받았다는 소식이 퍼지자 단숨에 되살아났다.

“어쩐지, 내가 어릴 적엔 본 적 없던 풍습이다 했어.”

“아가씨께서 랄리우스 후작이 되셨다는 소식에 다들 엄청나게 흥분해 있었는데, 얼마 가지도 않아서 납치 소식이 전해졌잖아요. 돌아오시고도 오래 요양하셨고……. 부디 무사하셨으면 하는 마음에 불타올랐던 게 습관처럼 남았지 뭐예요.”

“이것 참, 마음 써줘서 고맙다고 해야겠구나. 그런데 4년 전에 왔을 때는 왜 못 봤을까? 그때도 이렇게 한참 걸어 다녔었는데.”

“날짜가 안 맞았겠죠, 뭐. 본래 이런 건 너무 오래 걸면 안 돼요. 그러면 오히려 재수가 없거든요. 포모스는 너무 많은 기원을 받으면 싫어해요.”

미신에 대해서라면 에이미는 따라올 사람이 없는 전문가였다. 오드리는 미신의 세계가 그리 넓고 방대하며 흥미진진하기까지 한 줄은 꿈에도 몰랐다. 종전처럼 그저 들어주는 척 연기하는 게 아니라 정말 정신이 팔려 귀를 기울였다.

그러느라 눈치채는 게 좀 늦었다. 오드리는 마법등 전문 상점의 전시장을 들여다보며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셰비언을 발견하고서야 사정을 알아차렸다.

“어쩐지, 같은 길을 자꾸 돈다 했더니……. 누구 사주를 받았니?”

“네? 사주가 뭐예요? 저는 그냥 예쁘게 장식된 거리를 보여 드리고 싶었던 거라서요. 설마 셰비언님을 만날 줄은 몰랐죠!”

에이미가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레이디 오드리를 만난다고 잔뜩 긴장해서 인사 연습만 한 시간을 하던 모습은 한참 전에 없어진 지 오래였다.

“오드리?”

시선으로 유리를 녹여 없앨 듯하던 셰비언이 오드리를 불렀다. 돌아갈 타이밍은 이미 놓쳐 버린 것이다. 에이미는 겁도 없이 오드리를 잡아끌고 셰비언의 옆에 데려다 놓고는 총총 뒷걸음질했다.

“이렇게 우연히 만나다니, 두 분은 정말 운명적인 커플이네요! 이렇게 된 거, 두 분이 사이좋게 거리 데이트라도 하세요. 저는 눈치껏 빠져 드릴게요.”

만난 게 아니라 만나게 한 거겠지. 누가 용과 예비 마법사 아니랄까 봐! 후원자보다 용이 더 좋냐! 어쩐지, 그 베텔 경이 날 너와 단둘이 보낸다 했다!

빈정거림이 목구멍까지 올라온 오드리의 심정을 뻔히 아는 것처럼 에이미는 부리나케 도망쳤다.

셰비언은 기회를 놓칠세라 냉큼 오드리의 옆에 가서 붙었다. 오드리라면 도시의 주민들 앞에서 싸우는 모습을 보이고 싶어 하진 않을 거란 계산이었다. 과연 오드리는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도시 전체가 다 수사슴 장식이에요. 뭔가 이유라도 있는 거예요?”

혹시 이것도 같이 짠 게 아닐까, 오드리는 의심스러워하면서도 랄리우스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냈다. 셰비언은 아주 열심히 들었다. 그중에서도 랄리우스가 만탈락에 정착한 뒤 만탈락이 얼마나 어떻게 변했는지에 대해 너무 진지하게 캐물어서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그건 그냥 전설이야. 랄리우스가 만탈락에 정착하면서 마을이 도시로 발전했으니 온갖 잡설이 다 붙은 거지. 에이미는 옛 마법을 써서 해냈을 거라는데 그때는 그렇게 마법사가 많은 시절이 아니었으니 신빙성 없는 추측이야.”

“랄리우스에게 만탈락은 특별하겠어요.”

“응. 내 개인적으로만 그런 게 아니라 가문의 역사에 있어서 만탈락은 특별한 지역이야. 내 어머니도 그 단명의 조건만 아니었으면 절대 만탈락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의 남자와 결혼하진 않았을…….”

재잘재잘 떠들던 오드리가 덜컥 말을 멈췄다. 셰비언은 급속도로 어두워지는 오드리의 안색을 못 본 체하며 엉뚱한 소리를 지껄였다.

“그러게요. 그래도 수사슴 장식만 있는 건 많이 아쉽네요. 이왕이면 용을 딴 장식도 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에요.”

“음……. 암사슴이 아니고?”

“랄리우스의 선조에 용이 있었고 오드리의 반려인 저도 용인데 용 장식이 있으면 안 될 이유가 뭔데요? 가넷의 문장도 용과 수사슴이 합쳐진 형태잖아요. 저라도 돌아가는 대로 용 장식을 만들어서 걸어둘 거예요.”

“하하하하!”

“왜 웃는 거예요? 전에 같이 풍등 만들었던 것 기억 안 나요? 내 손재주가 꽤 쓸만하다는 걸 벌써 잊진 않았겠죠?”

락시 부인의 장담대로였다. 외부의 압력 때문이긴 했어도 일단 서로 꼬투리를 잡아대는 걸 그만둔 것만으로도 둘 사이의 분위기는 몹시 화기애애하게 유지됐다. 둘은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이런저런 수사슴 장식품을 사들였고, 야외 테이블에 앉아 달콤한 음료를 마셨다.

그리고 오드리는 이 우연을 가장한 만남을 계획한 사람이 셰비언이 아니라 락시 부인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셰비언은 그렇다 쳐도 고지식한 카프러스와 처음 만난 에이미를 어떻게 그렇게 잘 구워삶았는지 존경스러울 따름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에이미가 신기한 얘기를 했어. 샤를레아가 준 마력으로 자기가 마법사가 되는 거라나……. 마법사의 재능은 타고나는 거잖아. 그런데 왜 그런 얘기를 했을까? 본래 가진 마력이 그렇게 적었나? 마법사가 될 꿈은 꾸지도 못할 정도로?”

“샤를레아의 마력은 에이미가 본래 타고난 마력과 상성이 아주 잘 맞았으니까요. 그게 잠들어 있던 재능을 두들겨 깨운 계기가 됐겠죠. 최근에 마법사협회에서 마력 계통에 대한 옛 연구를 발굴하고 있는데, 그중에 일정량 이상의 용의 마력은 강제로 인간 마법사의 재능을 개화시킨다는 내용이 있다더라고요.”

“오, 신기하네. 그러면 내가 그대에게 받아먹은 마력이 그리 많은데 왜 나는 마법사의 재능이 안 깨어났을까? 아무리 마법사의 재능이 혈통을 따라간다지만 꼭 혈통이 있어야만 하는 것도 아니잖아. 마법사 친척이 없어도 재능을 타고 태어나는 경우가 없는 것도 아닌데…….”

“음……. 그걸 꼭 내 입으로 말해야 할까요?”

“칫. 그래, 나도 알아, 없지는 않아도 드물기는 한 경우라는 거. 랄리우스의 혈통에서 마법사가 태어난 적은 한 번도 없으니 별로 기대하면 안 된다는 것도 알고. 그래도 그렇지, 역사가 긴 만큼 하나쯤은 나올 법도 한데 어떻게 한 명도 없을 수가 있는지 모르겠다니까. 재능을 다 삼켜 버리는 혈통이라도 되나.”

“그럴지도 모르죠.”

“으응?”

“마법사의 재능이 드러나기도 전에 지팡이를 잡잖아요. 그게 무슨 영향을 끼쳤는지 어떻게 알겠어요.”

락시 부인의 도움까지 받아 모처럼 조성했던 좋은 분위기가 순식간에 박살 났다.

“랄리우스는 먼 친척에게까지 아주 공정했더라고요. 방계더라도 어린 시절부터 어딘가에 재능을 드러내면 만탈락으로 데려와 지팡이를 잡게 했던 걸 보면요.”

“그걸 어찌 알았지?”

“락시 부인이 지팡이를 잡은 사람들의 명단을 보여줬거든요. 의료기록과 비교하니 확실히 알겠던데요.”

“……알고 한 일은 아닐 거야.”

“그렇겠죠. 오히려 좋은 뜻으로 그랬을 거예요. 영리해지는 건 물론이고 몸이 튼튼해지기까지 하니, 가문의 앞날을 걸어볼 만한 아이에게 아끼지 않고 베푼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무지가 불행을 불러온다는 속담이 이렇게 잘 맞아떨어지는 경우가 또 있을까. 오드리는 씁쓸한 입안을 음료로 헹구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삼키는 것마저 잊었다.

랄리우스의 긴 역사에서 지팡이와 단명의 관계를 정말 아무도 몰랐던 걸까?

오드리에게 지팡이에 대한 이야기를 함구한 밀리나만 보더라도 의심 정도는 한 게 분명한데, 그 긴 역사에서 머리가 비상하기로 유명한 랄리우스에서 눈치챈 사람이 정말 아무도 없을 거라고 어떻게 장담할까?

‘어쩌면 알고도 잡게 했을 수 있어. 어쨌거나 효과는 확실하고 직계라고 매번 영리한 아이가 태어나는 건 아니었을 테니까…….’

모자란 아이는 보통으로 만들려고, 보통인 아이는 영리하게 만들려고, 영리한 아이는 더 뛰어나게 만들려고. 그러다 부작용을 알아챘을 땐 이미 수가 너무 줄어서 천재의 탄생 말고는 가문을 일으킬 방법이 없겠구나 싶어 언젠가를 기약하며 아예 입을 다물고 사용을 묵인하고.

가문을 첫 번째로 여기는 사고방식이 꾸준히 이어진다면, 오드리가 아무리 지팡이의 위험에 대한 자료를 충분히 남겨두고 안전장치를 마련해 둔다 하더라도 누군가는 반드시 악용할 것이다. 진실은 힘이 세지만 지혜는 간직하기 어렵고 유혹은 언제나 강력한 법이니까.

“너도 결국엔 나와 같아질 것이다.”

헨젤 백작의 비웃음이 되살아났다. 다알리아 머리핀을 착용하고 있는데도 찬 서리를 맞은 듯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그때 자신은 뭐라 답했더라.

“오드리, 정말 지팡이를 폐기하는 게 부담스러우면, 봉인해서 다른 곳에 보관하는 건 어때요? 일단 지하실과 분리하기만 해도 훨씬 위험도가 낮아질……. 오드리? 갑자기 왜 그래요? 어디 아프기라도 해요?”

당황한 셰비언이 어깨를 잡고 흔들었지만, 오드리는 테이블에 머리를 처박은 그 자세 그대로 웅얼거렸다.

“그만 들어가자. 당장 들어갈래.”

락시 부인은 셰비언에게 안겨 돌아온 오드리를 보고 경악했다. 하지만 그녀는 셰비언의 멱살을 잡고 따지기 전에 오드리를 걱정해 찾아오는 만탈락의 주민들부터 달래야 했다. 어딜 가든 눈에 띄는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들렀던 곳이 하필 사람이 많이 지나다니는 큰 길가의 야외 테이블이었던 탓이었다.

오드리는 바로 그날부터 다른 사람들과는 얼굴을 맞대는 것조차 싫은 것처럼 굴었다. 카프러스도 락시 부인도 하다못해 셰비언까지도 그녀의 방문을 열고 들어갈 수 없었다.

오드리는 홀로 침대에 처박혀 내리 악몽을 꿨다. 헨젤 백작과의 대화가 뒤죽박죽인 채로 반복되는 꿈을 꾸는가 하면, 사자의 등을 타고 실렌다 사막을 며칠이나 헤매는 꿈을 꾸기도 했다. 그러다 깨어나면 침구에 밴 유황 냄새에 진절머리를 내며 죄 없는 고용인들을 들볶았다.

그렇게 닷새가 지난 날의 오후, 마침내 오드리는 셰비언을 불러들였다.

“지팡이 폐기하자. 부러뜨리든지, 소각하든지, 다 상관없으니까 한 조각도 남기지 마.”

“음…….”

뛸 듯이 기뻐할 줄 알았건만, 셰비언은 어째 뜨뜻미지근했다. 이러다 머리가 하얗게 되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고민 끝내 내린 결론인데 말이다. 저절로 목소리가 뾰족해졌다.

“왜? 이제 와서 완벽하게 폐기할 자신이 없어지기라도 했어?”

“설마요. 그전에 좀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요. 그 지하실의 마법진을 다시 한번 볼 수 있을까요? 이만큼 시간이 지났으니 한 번쯤은 더 볼 수 있을 거예요.”

못 들어줄 이유가 없는 요청이었다. 지하실의 문은 한 번 더 열렸고, 이전보다 몇 배나 되는 시간을 들여 마법진을 관찰하고 나온 셰비언은 어쩐지 창백해진 안색으로 오드리에게 사과했다.

“미안해요.”

“갑자기 왜 이래?”

“내가……. 내가 편견이 있었어요. 그 용은 단순히 제 자손을 남기기 위한 목적으로 지팡이를 남긴 게 아니었어요.”

용에게서 마법을 훔친 대도 로렐라이의 이야기는 전설인 동시에 진실이었다. 셰비언만큼 그걸 잘 아는 이가 없었다. 그런데 랄리우스가 만탈락에 정착하고 생겨난 변화에 대한 이야기들은 그저 전설로만 취급하는 게 과연 옳은 것일까? 그러기엔 그 내용이 상당히 일관적인데 말이다.

뭔가 있다.

촉? 예감? 오드리가 방에 처박혀 자신과 싸우는 동안, 셰비언은 차라리 확신이라고 불러야 맞을 듯한 번뜩임을 해소하기 위해 사방을 쏘다녔다. 락시 부인을 채근해 가문의 옛 문서를 꺼내 뒤지고 마법망을 살피며 조각나 흩어진 정보를 모았다. 오드리에게 지하실의 마법진을 다시 보게 해달라고 부탁한 건 최후의 확인에 가까웠다.

“고작 제 둥지 하나를 위해 기후를 주물럭거리는 생물이 바로 용이라고 얘기했었죠. 다만 랄리우스에 지팡이를 남긴 용은 그 반대였다는 게 놀라운 점이에요. 그 용은 실렌다 사막의 확장을 막기 위해 만탈락에 정착했고 제 자손들을 도구로 썼어요. 샤를레아와는 완전히 반대편으로 미쳤다고 봐야죠. ……제기랄.”

지팡이를 잡고 용의 마력을 몸에 담은 인간들은 사막의 확장을 막는 일종의 방어벽으로 기능했다. 그 효과는 그들이 살아서 만탈락에 머무를 때 가장 강력했다.

“내가 만탈락에서 유독 마력 회복이 늦었던 게 그것 때문이라고?”

“아무래도요. 그것 외에는 설명할 수 있는 구석이 없어요.”`

오드리는 기가 막혀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오래된 가문치고 비밀이 없는 가문은 없다지만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이젠 단명할 걸 알면서도 자식들에게 지팡이를 잡게 한 누군가를 원망할 수조차 없게 되었다.

“처음에는 아주 획기적인 방식이었을 거예요. 머릿수가 많을수록 부담이 적어지는 구조니까. 부작용은 좀 있을지라도 인간의 번식력을 믿었겠죠. 자손이 영리해지면 그만큼 번성할 테니 딱히 걱정할 거리가 아닐 거라 여겼을 거예요.”

“실렌다 사막의 면적은 해마다 늘어나고 있어. 그건 몇십 년 전부터 진행되어 온 일이야…….”

“그야 랄리우스의 숫자가 적으니까 힘에 부쳐서 그런 거죠. 이번 대에 지팡이를 잡은 건 오드리 혼자라는 걸 생각해 봐요.”

“맙소사.”

“그 지팡이를 폐기하면 실렌다 사막의 면적이 급격히 늘어날 거예요.”

만탈락과 실렌다 사막은 어깨를 나란히 한 이웃이었다. 고작해야 양을 치는 언덕 하나를 사이에 두고 녹지와 사막이 갈렸다.

지팡이를 폐기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계속 쓸 수도 없다. 오드리는 출구 없는 방에 갇힌 짐승이 된 기분이었다. 날카로운 송곳니가 입술을 짓이겼다.

셰비언이 오드리의 입술에 맺힌 피를 다정하게 핥으며 속삭였다.

“오드리……. 혹시 모를 지팡이의 악용과 실렌다 사막의 확장을 동시에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들어보겠어요?”

“내다 버리자고 하려고?”

“음, 그것도 매력적이죠. 하지만 그건 저 지팡이가 사막의 확장을 막고 있다는 걸 모를 때 내놓은 해결책이고요.”

“그럼 어쩌려고?”

“결국엔 사막이 문제인 거잖아요. 사막을 없애 버리죠.”

감히 상상도 해 본 적 없던 결론에 놀란 오드리가 눈을 크게 떴다. 셰비언은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오드리를 끌어안았다.

“난 마법의 주인이에요. 그 용은 제 자손들까지 희생하고서야 사막의 확장을 막을 수 있었지만, 나는 그런 희생을 치르지 않고도 사막을 없애 버릴 수 있어요.”

“그, 그게 돼?”

“물론 아무리 나라도 혼자서는 힘들 거예요. 하지만 지금은 혼자가 아니니까 가뿐히 할 수 있을 거예요. 지팡이도 있고, 목걸이도 있고…….”

“이왕이면 나도 좀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해주겠어?”

“싫어요. 내가 이렇게 편하게 오드리를 놀릴 기회는 별로 없단 말예요. 잠깐은 즐기게 해줘요.”

“내가 그대를 믿지 못하겠다면 어쩌려고 이래?”

“아무리 무서운 협박도 한두 번 해야 먹히는 법이죠. 난 이제 충분히 단련됐어요.”

말솜씨가 많이 늘었어도 셰비언은 여전히 거짓말이 서툴렀다. 하지만 오드리는 그 서툰 거짓말에 기꺼이 속아 넘어갔다. 그건 그녀의 은밀한 즐거움이었다.

* * *

자갈과 모래로 가득 찬 황량한 땅, 방문자를 배척하는 사막 가운데에는 아름다운 오아시스가 있다. 짙은 초록색 이파리를 머리에 얹은 껑충한 나무들이 하늘을 품은 영롱한 호수를 둘러싸고 바람에 고개를 끄덕대는 곳. 지친 여행자를 내치지 않고 기꺼이 품어주는 사막의 진주…….

오드리는 실렌다 사막 대오아시스의 경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라비린이 묘사하던 것만큼 아름답거나 거대하지는 않았지만, 자갈과 모래가 가득한 황량한 땅 한가운데에 덜렁 솟아난 나무와 물이 찰랑이는 호수는 그 자체로 경이로운 감정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레이디 오드리, 이 오아시스가 바로 실렌다 사막에서 가장 큰 오아시스입니다요.”

“그래 보이는군. 이제까지 지나쳐온 다른 오아시스들과는 규모가 달라.”

“그럼요. 이 정도로 큰 호수는 사막이 아닌 곳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겁니다.”

오드리 일행을 여기까지 데려온 사막의 안내인들이 의기양양하게 가슴을 폈다. 제 것도 아닌 오아시스를 자랑스러워하는 모습이 어쩐지 귀여울 지경이었다.

바람이 불었다. 오드리는 가슴 가득히 사막의 바람을 들이마셨다. 꿈속에서 맡았던 유황 냄새는 조금도 섞여 있지 않은데도 어쩐지 코끝이 간질간질했다. 아무리 보고 듣고 읽어도 영 낯설기만 하던 모험의 기억이 홀연 떠오를 것만 같았다.

그때, 셰비언이 구경하기 바쁜 오드리를 불쑥 안아 들었다.

“마음의 준비는 다 됐죠?”

“솔직히 말하자면, 아니. 지금이라도 다 관두고 돌아가는 게 나은 선택일 것 같아.”

오드리는 몹시 진지하게 자신의 진심을 피력했지만, 셰비언은 조금도 봐주지 않았다. 오드리를 안은 그대로 성큼성큼 오아시스 쪽으로 다가가더니 그대로 물 위로 발을 올린다.

“어어, 어어!”

“저, 저거!”

호수 표면을 밟으며 걸어가는 모양새에 기겁한 사막의 안내인들이 비명을 질렀다. 겉모습이 인간이다 보니 자연스레 잊고 있었던 그의 정체가 새삼 실감 나는 순간이었다.

저 마법사, 본래 용이었지.

어느새 호수 한가운데에까지 나아간 셰비언이 오드리를 내려놓았다. 오드리는 최대한 침착하려 노력하며 물 위에 섰다. 셰비언이 자신을 물에 빠뜨릴 리 없고, 자신은 수영을 할 줄 아는데도 이상하게 다리가 후들거렸다. 갓 태어난 아기 사슴이라도 된 듯 몸이 휘청거린다.

“잡아요.”

오드리는 코앞에 내밀어진 지팡이를 사양 않고 냉큼 잡았다. 뭐라도 손에 잡고 있으니 그나마 좀 마음이 놓이는 것 같았다. 셰비언이 장하다는 듯 오드리의 손등을 두들기며 웃었다.

“오드리, 이제 이거 놓치면 안 돼요.”

셰비언과 함께 잡은 지팡이가 오아시스의 수면에 닿은 순간 마력이 쑥 빠져나갔다. 오드리는 어찔해져서 그만 넘어질 뻔했지만, 악착같이 지팡이를 잡고 버텼다. 본랜 구경만 하라고 했던 것을, 우기고 우겨서 함께하게 된 일이었다. 여기서 쓰러져서 일을 망칠 순 없었다.

그렇게 오드리가 버티는 동안 오아시스의 수위는 빠른 속도로 내려갔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멍하니 구경하던 사막의 안내인들이 오아시스 기슭의 젖은 흙이 드러나는 걸 보고 경악했다.

“이, 이런 일이 있을 줄은 모르고 왔소!”

“기사님! 이게 무슨 일입니까!”

카프러스는 당장이라도 오아시스로 뛰어들고 싶어 하는 안내인들을 달래느라 곤욕을 치렀다. 오드리가 바로 랄리우스라고, 랄리우스를 못 믿으면서 어떻게 만탈락에 사느냐고 반쯤 으름장을 놓고 나서야 다들 불만 가득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아가씨, 빨리!’

다행히 랄리우스의 이름값이 다 떨어지기 전에 셰비언이 다음 단계에 돌입했다. 파랗게 빛나는 알룬드의 목걸이를 꺼내 지팡이에 걸친 것이다.

진짜 알룬드의 목걸이에는 홍수가 지면 물을 저장했다가 가뭄이 들면 비를 뿌린다는 전설이 있지만, 셰비언이 꺼낸 알룬드의 목걸이는 이름만 그럴듯한 평범한 목걸이였다. 그가 오드리에게 선물해 주고 싶어 브란젤의 보석경매장에서 훔쳐냈던 것이다.

하나 셰비언은 마법의 주인이었다. 알룬드의 목걸이로 불리기에 충분할 정도로 알이 크고 질 좋은 블루 다이아몬드가 인어의 마력을 품고 마법으로 정수된 물에 며칠씩이나 담겨 있었으니, 껍질뿐인 전설을 진짜로 만드는 건 그리 어렵지도 않은 일이었다.

숲의 마력을 품은 지팡이에 물을 끌어들이는 목걸이를 더해 마법으로 엮으면 사막을 없애 버리기에 충분한 상승효과를 볼 수 있다.

셰비언은 그리 자신했고 마법은 주인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아직 해가 질 때가 아닌데 사위가 어두워졌다.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게 몰려온 먹구름이 하늘을 가득 덮었다. 사막의 기후에 익숙한 안내인들이 목이 부러져라 고개를 꺾었다.

설마 비가 내리진 않겠지. 설마 아닐 거야. 수십 년 동안 사막을 오갔던 경험에 희망을 걸고 구름이 지나가길 빌었지만, 때로는 설마가 사람을 잡는다. 사막에 어울리지 않는 서늘한 바람이 옷깃을 파고든다 싶더니 굵은 빗방울이 얼굴을 적셨다.

“맙소사! 아직 비가 올 때가 되려면 몇 년이나 더 남았는데!”

“하랄이 미쳤나?”

“짐! 짐부터 챙겨! 피해야 해!”

실렌다 사막에서 제일 큰 오아시스 곁에 마을이 형성되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13년 주기로 내리는 큰 비가 오아시스 주변의 모든 것을 다 쓸어버리기 때문이었다. 물이 불어나는 속도도 어마어마하고 범위도 넓어서 일단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최대한 멀리 도망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안내인들은 준비를 마치고도 도망치지 못했다. 그들의 손님인 오드리 일행이 움직이려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오드리와 셰비언은 여전히 오아시스 위에 서 있었고, 카프러스는 다리에 뿌리라도 내린 듯 그 자리 그대로였다.

빗줄기는 점점 거세졌다. 몇 방울 툭툭 떨어지던 것이 어느새 눈 뜨기도 힘들 정도가 되어 옷자락을 흠뻑 적시고 말에 매단 봇짐까지 죄다 적셨다. 부산하게 짐을 꾸리던 안내인들이 조용해졌다. 도망치기에 너무 늦어 포기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이 보고 있는 걸 믿을 수가 없어서였다.

바닥을 흐르는 빗물이 오아시스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지팡이는 잡아주는 사람도 없이 가득 차오른 오아시스 수면 위에 홀로 꼿꼿하게 서서는 그 물을 죄다 빨아먹었다. 인근 지역을 죄다 휩쓸어 버리기에 충분한 어마어마한 양의 빗물을 전부, 혼자서.

번개가 떨어졌다. 하늘을 쪼개고 땅을 태워 버릴 듯 굵은 번개가 지팡이를 후려쳤다. 한 번, 두 번, 세 번……. 사위가 몇 번이고 밝아졌다가 어두워지길 반복했다.

지팡이에서 싹이 텄다. 순식간에 돋아난 뿌리가 오아시스 아래에 단단히 자리를 잡았고, 금세 무성해진 가지는 양껏 기지개를 켰다. 어른 팔뚝만 한 굵기였던 몸뚱이도 점점 두껍고 길어졌다.

마침내 비가 그쳤을 때, 물이 찰랑거리는 오아시스 한가운데에는 하늘에 닿을 듯 거대한 나무가 우뚝 서 있었다. 활짝 펼친 가지마다 짙은 초록색 나뭇잎이 가득 달려 바람에 한들거렸다. 꽃이라곤 한 송이도 없는데 짙은 아카시아 향기가 주변에 자욱했다.

전설의 한 장면을 눈앞에서 본 듯한 기분에 다들 말이 없는 가운데, 오드리와 셰비언만 태연자약했다.

“저거 아카시아인가?”

“글쎄요……. 전 나무에 대해서는 영 몰라서. 일단 향기는 아카시아가 맞는데요.”

“그렇지? 나도 당연히 아카시아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잎이 좀 다르게 생겨서 말이야. 혹시 향기만 아카시아인 건가? 아니면…….”

간신히 정신을 차린 카프러스가 끼어들었다.

“북쪽 지역에서 자라는 나무입니다. 아카시아와 아주 흡사한 향기를 내지만 보랏빛 꽃을 피웁니다. 열매는 보통 술을 담아 먹고요. 이름은…… 야…… 야…… 뭔데, 어, 지금은 모르겠습니다. 나뭇가지를 좀 꺾어서 동생에게 보내면 알려줄 겁니다.”

“베텔 경이 본인도 잘 모르는 걸 나서서 말하는 건 처음 보네요.”

“그러게요. 저는 지금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도대체 제가 방금 뭘 본 겁니까?”

저희도! 저희도 궁금합니다. 젖은 옷에서 물 짜낼 정신도 없는 안내인들이 카프러스의 편을 들었다. 그들의 열렬한 눈빛을 받은 오드리가 피식 웃으며 셰비언의 옆구리를 찔렀다. 모처럼 오드리의 앞에 나선 셰비언이 그윽한 눈빛으로 제 앞의 사람들을 쭉 훑었다.

“‘황폐한 땅에 랄리우스가 다녀가니, 땅이 기름져져 밀을 기르기에 적합해졌더라’.”

셰비언이 느닷없이 전설의 한 대목을 읊었다. 오드리는 당황해서 셰비언의 옷자락을 잡아당겼지만 별 효용은 없었다. 안내인들은 물론이고 카프러스마저 고개를 끄덕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긴 본래 사막이었던 땅이라 밀을 기르기엔 적합하지 않지만……. 시간이 지나면 자갈과 모래 대신 들풀이 우거진 광경을 볼 수 있을 거야. 더 지나면 양을 칠 수도 있게 될걸.”

그러고 보면 셰비언부터 전설 속 주인공 중의 한 명이었다. 오오오! 과연 랄리우스! 사람들은 셰비언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저 나무가 무사한 이상 이 실렌다 사막에 홍수가 나거나 물이 마르는 일은 없을 거야. 어쩌다 큰 비를 만나거든 여기로 피하도록 해.”

안전한 거점을 지정받은 안내인들의 눈이 번쩍번쩍 빛났다. 오드리는 이제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겠다는 걸 직감했다. 긍정은 당연히 긍정이고 부정은 겸손이 될 것이다. 그녀는 반쯤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오아시스의 이름은 이제부터 알룬드라고 하지.”

나무가 꿀꺽해서 흔적도 보이지 않는 값비싼 목걸이를 애도하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었다. 이후 오아시스 알룬드의 나무를 각별히 여긴 사람들이 나무를 레이디 오드리의 지팡이라고 부르며 해마다 기념일 행사까지 치를 거란 걸 미리 알았더라면, 오드리는 나무에도 평범한 이름을 붙여주었을 것이다. 하나 어쩌겠는가, 오드리는 미래를 알지 못하는 보통 사람이었다.

그리고 셰비언은 본의 아니게 소원을 성취했다. 나무를 기념하는 사람들은 나무에 수사슴뿐만 아니라 용 모양의 장식품도 함께 달아주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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