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숨겨진 이야기(秘話)
피임약에 대한 수요는 어마어마했다. 오드리가 기를 쓰고 물량을 찍어내고 있었지만, 아직 허가가 나지 않아 본격적으로 팔지 못하는 상황이다 보니 사방에서 가짜 약이 성행했다. 어차피 구입하는 사람도 속을 각오를 하고 사는 것이고 가짜 약의 태반은 그저 맛대가리 없는 소화제라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지만, 때로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기도 했다.
가짜 약을 복용한 사람이 사망하는 큰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보건국은 가짜가 아닌 진짜 피임약이었을 거라며 시체의 조각 하나까지 뒤져 볼 기세로 부검했고, 그가 먹은 것이 낙태약이라는 사실을 알고 몹시 당혹했다. 그들은 부검 자체를 아예 없던 일로 만들고 싶어 했으나 차마 그러지는 못했다. 피임약을 먹고 사람이 죽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고 달려온 셰비언이 부검을 참관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어딜 가든 소화제만큼이나 쉽게 구할 수 있는 약이지만, 낙태약 역시 보건국의 허가를 받은 적이 없는 약물이긴 마찬가지였다. 보건국이 눈을 감고 단속하지 않는 것뿐이지.
그렇다 보니 보건국이 사람이 먹고 죽을 수도 있는 낙태약은 내버려 뒀으면서 부작용이 거의 없다시피 한 피임약은 매섭게 단속한다는 여론이 형성됐다. 불공평하다고 말이다.
당혹한 보건국에서는 여자가 아니라 남자가 먹었기 때문에 낙태약이 독이 되었다고 주장했지만, 익명을 요구한 산파, 약제사, 장의사 등의 인터뷰가 신문에 실리면서 낙태약의 위험성이 새삼 조명을 받았다. 말이 낙태약이지, 아기와 함께 임신부까지도 죽일 수 있는 강력한 독약이라고 말이다.
그중에서도 경험 많은 산파들은 정 낙태약이 필요하거든 솜씨 좋은 약제사를 찾아가 맞춤으로 낙태약을 지을 것을 추천하면서도 그럴 바엔 피임부터 하는 게 우선이라고 조언했다. 비록 약제사들이 만들어주는 피임약은 불임을 유발할 가능성이 있긴 하지만, 낙태를 시도했다가 죽는 것보단 낫지 않겠느냐며.
여론은 피임약 옹호론자들에게 점점 우세해졌다. 어차피 낙태약이든 피임약이든 구하려면 못 구할 것도 없는데 그렇다면 부작용이 없는 약이 널리 퍼지는 쪽이 훨씬 낫지 않겠느냐고 말이다. 약을 먹고 안 먹고는 개인이 알아서 할 일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을수록 반대론자들의 펜은 점점 더 격렬해졌다.
라비린은 오드리를 향해 폭우처럼 쏟아지는 비난 속에서 악의적인 비방과 인신공격을 걸러내는 작업을 자청해서 맡았다. 그에게는 남들에게 말할 수 없는 비밀스러운 동료가 있었는데, 바로 현 카즈네 공작이자 치안대의 수장인 히엠스였다.
라비린은 오드리에 대한 악의적인 비방과 인신공격을 이름까지 바꿔가며 반복적으로 신문사에 돌리는 이들의 명단을 뽑아 히엠스에게 건넸다. 히엠스는 낯익은 이름들이 줄지어 늘어선 명단을 읽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놈들은 머리에 뇌 대신 젤리가 들었나. 저번에 털린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이래?”
“명예훼손으로 처벌받은 게 아니잖아. 설마 이것 때문에 털렸을 줄은 몰랐겠지.”
“이번엔 무슨 꼬투리를 잡아야 하나……. 젠장, 이젠 핑계 만들기도 지겨워. 야, 너 빨리 레이디 오드리를 설득해서 이놈들 죄다 명예훼손으로 고소하라 그래. 꼭 명예훼손 아니어도 걸 수 있는 죄목 많아. 허위사실 유포라든가……. 나중에 취하하더라도 일단 한 번 엄포라도 놓으면 다음엔 많이 줄어들어.”
“그 말이 통할 거였으면 진작 통했겠지. 내버려 두라더라.”
“아, 씁……. 레이디 오드리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 거야? 욕먹는 게 재밌대?”
히엠스가 요란하게 혀를 차며 명단을 챙겼다.
“요즘엔 포르티투도에도 비난하는 기고문이 날아와.”
“오, 그래? 누구인지 배짱이 두둑하네. 노골적으로 오드리의 편을 드는 신문에 그런 글을 보내고 말이야. 하긴 요새 포르티투도의 영향력을 생각하면 거기만 보내지 않을 수도 없었겠지. ……싣지 않을 거지?”
“당연한 말씀을. 그런 걸 싣는 날이 포르티투도가 폐간하는 날이 될걸.”
세상 사람들은 영 모르는 일이지만, 히엠스는 레이디 오드리에게 매우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몇몇 사람 중 하나였다. 강철새의 시험비행 행사에서 보란 듯 벨트람 차림을 하고 나타난 오드리가 그리 인상적이었다나.
또한 그는 포르티투도의 가장 큰 후원자이기도 했다. 창간된 지 몇 년이 지났는데도 포르티투도의 자금이 마르지 않고 치안대가 그들을 잡지 못하는 건 그런 이유였다.
“여우보다 더 영악한 녀석 같으니.”
라비린은 멜브란트 사교계에서 가장 고지식한 인물로 히엠스가 꼽혔다는 게 아직도 믿어지지 않았다. 무려 2년 연속으로 세운 기록이라는 것도. 세상에는 눈 대신 단춧구멍을 달고 다니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내가 조사를 안 해서 그렇지, 오드리를 옹호하는 익명 기고문의 삼 분의 일은 네 녀석이 쓴 거 같거든?”
“설마. 다 꼽아봐야 십 분의 일도 안 될걸.”
“쓰긴 썼구나…….”
히엠스와 라비린은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내기도 했지만 서로 묘하게 통하는 구석이 있는 친구였다. 가문을 넌더리 나게 싫어하면서도 그에 매여 사는 것이나, 아닌 척하면서 뒤로 딴짓하는 일에 정통한 것이나.
“공작부인도 알아?”
“당연히 알지. 절반은 같이 썼는데 뭘. 내가 저번에 얘기하지 않았어? 딜레트는 레이디 오드리의 열렬한 팬이야. 나보다 더해. 레이디 오드리와 사교 모임에서 마주칠 때마다 냉랭한 척하는 게 너무 힘들다더라.”
라비린은 괜한 말을 꺼냈다고 생각했다. 제 사랑하는 부인이 얼마나 영리하고 아름다우며 현명한지에 대해 실컷 떠든 히엠스가 어딘지 안쓰러워하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았기 때문이었다.
“넌 결혼 언제 해?”
“……아버지는 물론이고 가문의 노인네들도 안 물어보는 걸 네가 물어보네.”
“그 사람들은 안 물어보는 게 아니라 못 물어보는 거지. 그랬다가 네가 또 후계자 같은 건 때려치우겠다며 떠나면 안 되잖아. 발톱섬 원정 때도 가계도에서 파낼 거면 파내라고 으름장을 놔서 허락받은 거라며?”
타우레드의 완벽한 후계자는 타우레드에 그다지 애착이 없었다. 아닌 말로, 가문에 대한 애정보다 그가 모은 벨트람 포스터 컬렉션에 대한 애정이 더 클 것이다. 그를 붙들고 있는 건 지대한 책임감이었다.
“젠장, 그걸 어떻게……. 아버지에게 사주라도 받았어?”
“내가 네 아버지에게 받을 게 뭐 있다고 사주씩이나 받냐. 그냥 타우레드의 앞날이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지.”
“유력가문의 후계자 상황에 관심을 갖다니, 카즈네 공작으로서 아주 훌륭한 자세야. 억지로 떠맡은 자리라 싫어 죽겠다더니 어느새 이렇게 잘 적응했군.”
“비꼬지 마. 친구로서 순수하게 궁금했을 뿐이니까. 계속 혼자 지낼 셈이야? 설마 방계에서 아이를 데려오려고?”
라비린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데멘사에 관련된 인터뷰를 하고 싶대서 응했더니 순 결혼 얘기만 묻기에 쫓아내 버린 기자가 떠올랐다. 아무래도 법이 필요했다. 말하기 싫은 결혼 계획 따위를 호기심으로 물어보면 감옥에 가둬 버리는 법. 안타깝게도 지금은 없지만.
“내가 죽어서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온다면 모를까, 내 손으로 방계에게 기회를 줄 일은 없어.”
내가 누구 때문에 파혼했는데 방계를 후계자로 삼을까 보냐.
“동생이 둘이나 있으니 아이는 그쪽에서 데려오면 돼.”
“한 명은 새로 작위를 받아 귀족이 되었고 한 명은 왕비인데 과연 아이를 줄까?”
“피올 놈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가스트로는 내가 공주에게 작위를 물려주겠다고 하면 냉큼 내줄 거야. 공주를 타국에 보내서 결혼 동맹으로 쓰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타우레드 후작가를 통째로 잡아먹을 기회이기도 한데 거절하진 않겠지.”
“……뭐?”
“뭘 놀라는 척을 해? 오스미다 전하의 인생 목표 몰라? 한때는 다 잊고 사시는 줄 알았지만……. 오드리를 끌어들인 걸 보면 아직 포기 안 하신 거야. 셰비언도 있겠다, 언제가 되어도 그렇게 될걸.”
라비린은 사교계 사람들의 눈이 단춧구멍인 게 아니라 히엠스의 연기 실력이 대단한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혼란스러워하는 표정이 너무 진짜 같았다.
“포르티투도 폐간시키고 싶어졌어? 젠장, 그런 거면 며칠만 말미를 주면 안 될까? 거기 괜찮은 기자들이 몇 있어서 빼내야 하거든.”
“아니, 그게 아니라……. 타우레드한테서 그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어서 좀 놀란 거야. 귀족상속법 개정에 호의적인 것도 놀랍지만 네가 아이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게 너무 의외라서.”
“…….”
제 핏줄에 대한 타우레드의 집착에 얽힌 일화는 손가락으로 꼽을 수도 없이 많았고, 어릴 적의 라비린에게 붙은 별명은 완벽한 타우레드, 전형적인 사자의 핏줄이었다.
라비린은 그 별명대로 자라지 않았지만, 오랫동안 헤어져 있다가 다 성장하고서야 다시 만난 히엠스는 별로 실감이 나지 않았다. 라비린이 제 방식대로이긴 해도 여전히 제 동생들을 아끼고 있으니만큼 더더욱.
“나는 그렇다 쳐. 너는 어때?”
“알잖아, 나는 내 작위를 자식에게 물려줄 수도 없는 사람이라는 거. 어차피 가스트로의 자식이 다음 카즈네 공작이 될 텐데 그게 왕자가 되든 공주가 되든 무슨 상관이겠어. 공식적으로 공주가 작위를 이을 수 있게 되면 오히려 그게 낫지. 적어도 내 자식이 지금 같은 견제는 안 받아도 될 테니까. 빌어먹을 왕위계승권, 원해서 가진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사방에서 그 어린애를 물어뜯지 못해 난리가 났어.”
“야…….”
“네 후계자와 내 자식의 마음의 안녕을 위해서라도 왕비 전하께서 빨리 임신해서 아이를 많이 낳아주셨으면 좋겠어. 그래야 내 아들이 왕궁에서 마음 붙일 상대가 있지. 지금은 혼자라 영 심심한 모양이던데.”
라비린은 차마 가스트로와 라디아타 사이에 찬바람이 쌩쌩 분다는 말을 솔직하게 할 수가 없었다. 사실 그가 아이를 기대하는 쪽은 라디아타가 아니라 피올 쪽이라는 것도.
히엠스가 라비린의 기운을 쪽 빼고 돌아갔지만, 사실 요즘 라비린이 상대해야만 하는 손님 중 가장 까다로운 사람은 그가 아니었다. 나랍에서 브란젤까지, 그 먼 거리를 달려 직접 피임약을 공수하러 온 탈린을 상대하는 게 제일 힘들었다.
“벨키스 경. 피임약 허가까지는 아직 멀었나요?”
“아, 예. 아무래도 반대 의견이 만만치 않습니다. 여론은 찬성 쪽으로 기울어지는데 정작 결정권자들이 영 반응을 안 하는군요.”
탈린이 눈썹을 들썩거렸다. 월경도 못 하는 것들이 어디 혓바닥을 놀려.
라비린은 탈린의 중얼거림을 못 들은 체했다. 그리 피임약이 중요하면 로렐라이에 가서 볶을 것이지 싶지만, 그 이디케마저 포기하고 자신에게 붙였으니 더 떠넘길 곳이 없었다. 다행히 오늘은 그 대신 탈린을 상대해 줄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네이기스였다.
그날 오후, 라비린은 탈린을 네이기스의 작업실로 데려다주었다. 오드리를 모티브로 한 벨트람 포스터 시리즈는 네이기스의 대표작인지라, 시리즈 중 특히 평이 좋았던 포스터의 원본이 널따란 작업실 곳곳에 걸려 있었다.
라비린은 네이기스가 탈린을 마음에 들어 하는 기색을 보이자마자 다른 약속이 있다는 게 뒤늦게 생각났다며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다행히 네이기스도 탈린도 그의 변명 같지 않은 변명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탈린은 나랍에서는 구하기 힘들었던 다양한 종류의 벨트람 포스터 앞에서 완전히 넋이 나갔다. 그녀는 입에 달고 살던 담배를 꺼내는 것마저 잊었다. 네이기스가 직접 화첩을 한 장씩 넘겨줄 때마다 뺨이 발갛게 물들고 눈이 반짝거렸다.
“탈린 씨, 이 화첩이 그렇게 마음에 들어요?”
“네, 마음 같아선 그냥 훔쳐 가고 싶을 정도…… 헉. 그러니까, 이게 진심은 아니고요, 그게…….”
이디케도 당해내지 못했던 비꼬기의 달인이자 험한 혓바닥의 소유자가 네이기스 앞에서 몸을 꼬아대며 말을 더듬었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고 그저 라비린의 부탁이라 탈린에게 작업실을 구경시켜 주었던 네이기스는 탈린이 순진하게 내보이는 팬심이 참 마음에 들었다.
“외부에 공개하지 않은 작품도 있는데, 그것도 볼래요?”
“네!”
서로 행복한 시간을 보낸 두 사람은 금세 친해졌다. 어느 정도냐면, 그날의 만남 이후로도 네이기스가 종종 탈린을 개인적으로 작업실로 초대해 함께 티타임을 즐길 정도였다. 그런 시간이 쌓이자 좋아하는 화가 앞에서 자꾸 혓바닥이 꼬여 난처해하던 탈린도 더 이상 얼어붙지 않고 편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제가 네이기스 씨의 그림을 좋아한다고 말한 적도 없는데 벨키스 경은 왜 절 네이기스 씨에게 소개해 준 걸까요?”
“음……. 제 그림은 좋아해도 레이디 오드리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있지만, 레이디 오드리를 좋아하는 사람치고 제 벨트람 시리즈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거든요. 탈린 씨는 레이디 오드리를 좋아하잖아요.”
“아하.”
탈린은 생각보다 간단한 이치에 고개를 끄덕댔다. 충분히 이해되는 설명이었다.
“그런데 왜 하필 벨트람이에요? 물론 레이디 오드리에게 벨트람이 아주아주 잘 어울리긴 하지만, 산 사람의 얼굴을 신화 속 주인공에 입히는 건 좀……. 어쩌다 그런 발상을 하신 거예요?”
네이기스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질문에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탈린은 자신이 실수했다고 생각하고 곧장 사과했지만, 네이기스는 그녀의 사과를 거절했다.
“실례는 아니에요. 그냥, 좀 의외라……. 처음 들어보는 질문이거든요.”
“아무도 그걸 궁금해하지 않았다고요?”
“다들 2차 괴물사태가 일어났던 밤을 기억하고 있으니까요. 저는 사람들이 머릿속에서 상상만 했던 장면을 구체적으로 그려서 보여준 것에 불과하답니다.”
“음……. 보는 사람의 이유는 알겠어요. 하지만 그린 사람의 이유도 같은가요?”
“탈린 씨는 의외로 날카로운 구석이 있네요. 맞아요, 내겐 다른 이유가 있죠. 그 이유를 얘기하려면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를 함께해야겠지만요.”
탈린이 자세를 고치고 귀를 활짝 열었다. 네이기스는 따뜻한 김이 오르는 찻잔을 쥐고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2차 괴물사태가 있던 날 밤, 나는 내가 짝사랑하는 치안대원이 너무 걱정된 나머지 말을 타고 헨젤 저택을 뛰쳐 나왔어요. 날 막을 만한 신분의 사람이 죄다 저택을 비우고 있어서 할 수 있었던 무모한 짓이었죠.
오, 너무 많은 게 생략된 것 같다고요? 그냥 들어요. 배경 얘기까지 전부 하려면 밤을 새워야 할지도 몰라요. 그냥, 그때쯤에 내가 헨젤가에서 오드리 언니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는 것 정도만 알아두면 돼요.
아무튼. 탈린, 당신 앞에서 말하기엔 좀 부끄러운 얘기지만, 그때 나는 나름 승마에 자신이 있었어요. 비록 한쪽으로 다리를 얌전히 모으고 타는 것밖에 할 줄 몰랐지만 괴물을 따돌리고 달릴 수 있을 거라 자신했죠.
……어떻게 그런 자세로 말을 탈 수 있냐고요? 원한다면 당장이라도 보여줄 수 있는데 안타깝게도 나에게 말이 없군요. 얘기가 궁금하지 않다면 더 말하지 않을게요. 좋아요, 바른 자세가 마음에 드네요.
그날의 풍경은 별로 자세히 말하고 싶지 않아요. 눈 닿는 곳마다 절망과 공포가 흘러넘쳤으니까요. 하필 그날 그 사람의 순찰 코스는 1차 괴물사태 때 피해를 입고 아직 복구되지 않았던 빈민가였기 때문에 더욱 그랬죠. 빈 건물, 깨진 창문, 부서진 문……. 별로 좋은 풍경은 아니었어요.
나는 나름 잘 달렸지만 결국 빈민가에서 길을 잃은 데다 괴물을 피하다가 말에서 떨어졌고……. 지금의 남편이 날 구해줬어요. 그리고 내게 청혼했죠. 그 짝사랑하는 치안대원은 어떻게 됐냐고요? 하하, 그 사람이 지금 남편인걸요. 크흠.
그런데 저택을 비웠던 오드리 언니가 내가 청혼을 승낙하는 그 순간 그 자리에 딱 나타났지 뭐예요. 연극이라도 그렇게 장면을 구성하면 욕을 먹을 텐데, 때로 현실은 연극보다 더 연극적이더군요.
오드리 언니는 너무 어린 나이에 미래를 정하면 안 된다며 내게 한바탕 훈계를 하더니, 이렇게 도시가 혼란스러운데 돌아다니다니 큰일 날 짓을 한다며 당장 저택으로 돌아가라고 했어요. 우습지 않아요? 오드리 언니와 난 겨우 한 살 차이밖에 안 나는데 말이에요!
하지만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어요? 오드리 언니의 승마 실력에 비하면 나는 이제 막 망아지를 타기 시작한 어린애와 같은걸요. 알았다고 대답하고 가르쳐 주는 대로 빈민가를 빠져나왔죠. 하지만 너무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더라고요. 오드리 언니가 날 먼저 보내고 자신은 무얼 하려는 건지.
“그래서요?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미행했어요?”
“아뇨. 안타깝게도 나는 탈린이 아니어서요. 내가 미행 따위를 했다간 숨 한 번 쉬기도 전에 들켰을걸요.”
나는 곧장 하티의 신전으로 달려갔어요. 그리고 거기서 가장 높은 방을 달라고 했죠. 탈린이 아는지 모르겠는데, 브란젤에 있는 하티의 신전 근처엔 높은 건물이 없어요. 먼 곳까지 한눈에 볼 수 있죠.
하늘에선 두 마리 용이 엉켜 싸우고, 골목 곳곳에서 튀어나온 괴물이 사람을 물고 뜯는데, 사람들은 본능처럼 금빛 기둥 근처에 모여 떨고 있었어요. 툭툭 꺼져 가는 가로등은 절망의 다른 이름 같았죠.
그런데 오드리 언니가 그 절망적인 풍경 한가운데를 뚫고 도시를 휘저으며 달리더군요. 오드리 언니가 흘리는 마력이 언니의 그림자를 따라 찬란하게 빛나고, 그 마력에 이끌린 괴물들이 모여들어 뒤를 쫓았지만 윈디의 발을 따라잡을 수 있는 괴물은 없었어요. 괴물은 저들끼리 밀치고 넘어지며 언니를 따르느라 다른 손쉬운 먹잇감들에 대해서는 깡그리 잊은 것 같았죠.
그때 오드리 언니의 모습은 그야말로 전쟁과 승리의 신 벨트람 그 자체였어요. 어지간한 군마만큼이나 큰 흑마를 타고 새하얀 케이프 코트를 망토처럼 휘날리며 달렸거든요. 피부는 가무잡잡하고 흩어진 머리칼은 초록색이었지만, 그게 뭐 어때서요?
신에게 인간의 미추 기준 같은 건 아무 의미도 없는 것 아니겠어요? 저는 바다의 신 페즈날이 비늘 달린 물고기 꼬리를 부끄러워한다는 말 같은 건 들어본 적도 없어요.
오드리 언니는 괴물을 유인해서 중앙 광장에 몰아넣었고, 군인과 치안대가 괴물을 잡는 동안 마법사 스와디와 함께 셰비언 씨를 도와 붉은 용을 물리쳤어요. 크게 부상당한 붉은 용이 물러나고 나자 유예되었던 아침이 시작되었죠.
“마치 신화의 한복판에 서 있는 것 같았어요.”
오로지 브란젤의 머리 위에만 머무르던 밤이 물러나고 아침이 밀어닥쳤어요. 네, 정말 밀어닥쳤다고밖에 표현을 못 하겠네요.
창문을 가리고 있던 커튼이 일시에 걷힌 것처럼, 단단히 닫혔던 상자의 뚜껑이 열린 것처럼, 향수병의 뚜껑을 처음으로 여는 순간 퍼지는 향기처럼……. 그렇게 해가 떠오르고 하늘이 푸르러지고 따스한 빛이 도시를 비췄죠.
그 모든 게 전쟁과 승리의 신 벨트람의 선물 같았어요. 내가 그녀의 적이 아니었다는 게 너무나 감사하고 뿌듯했어요. 만약 내가 반대편에 서 있었다면 이런 아침을 보지 못했겠구나 싶더라고요.
탈린은 어쩐지 신기한 기분이 되어 네이기스를 바라보았다. 그날의 일을 말하는 네이기스의 얼굴에 일렁이는 감정이 그토록 뚜렷할 수가 없었다. 경외, 감탄, 존경, 동경…….
“굉장한 경험이었겠어요. 말로만 들어도 이렇게 대단한데.”
“그럼요. 누군가 내 머릿속에 그 순간을 박제해 둔 것 같았어요. 눈을 뜨고 감을 때마다 오드리 언니가 브란젤을 누비며 달리는 장면이 떠올랐죠.”
“그래서 그림으로 그리기로 마음먹은 거예요?”
“음……. 그런 이유도 조금은 있어요. 하지만 내가 그 순간을 그림으로 남기기로 마음먹은 건 다른 것 때문이에요.”
브란젤의 사람들은 그 끔찍한 밤의 기억을 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검은 상복을 이례적일 정도로 빨리 벗어버리고 재빠르게 일상으로 복귀했다. 새로운 사람들이 유입되며 브란젤은 시끌벅적해졌고, 한계까지 써버린 마력을 채우기 위해 셰비언 성벽으로 떠난 오드리에 대한 기억은 점차 희미해졌다. 모두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오드리에 대해 입을 다물었다.
네이기스는 그걸 견딜 수가 없었다. 다들 나쁜 건 빨리 잊어야 한다고들 말하지만, 그렇다고 은혜도 함께 잊으면 되는가 말이다. 다행히 그녀에겐 그날의 일을 그림으로 기록할 만한 재능이 있었고, 그걸 사방에 퍼뜨릴 능력이 있는 혈육이 있었다.
에이쉬는 네이기스를 높이 평가한 자신의 안목에 자신이 있었다. 그는 단숨에 그녀의 제안을 수락한 걸로 모자라 한 단계 더 나아갔다.
단순히 신문에 그림 몇 번 싣는 거로는 네이기스의 목표를 이룰 수 없다고 판단하고, 광고비로 쓸 돈으로 포스터를 제작해서 뿌려보자 제안했다. 어차피 버릴 돈이면 효과라도 높여야 하지 않겠느냐며.
그 작업에 드는 인력과 자본이 만만치 않았지만, 에이쉬는 할아버지의 사교적인 성격과 예술에 대한 열정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데다, 가출한 상태이면서도 가문의 배경을 아낌없이 활용할 만한 뻔뻔함까지 갖춘 인물이었다. 평소 에이쉬와 교분을 나눠온 ‘친구’들은 기꺼이 그를 돕기로 약속했다.
피올의 보호와 에이쉬의 지원 아래에서 네이기스는 오로지 그림만 그리면 되었다.
오로지 그림만.
마침내 새하얀 캔버스 앞에 앉았을 때, 네이기스의 손은 흥분으로 부들부들 떨릴 정도였다. 그 어느 때보다도 머릿속의 이미지가 뚜렷했다. 그걸 꺼내기만 하면 됐다. 그녀가 첫 번째 벨트람 포스터를 완성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세 시간이었다.
“난 사람들이 오드리 언니에게 받은 도움을 잊지 않길 바랐어요. 오드리 언니가 괴물을 휩쓸어 달려갔을 때, 그 뒷모습을 보며 느낀 희망과 기쁨을 다시금 떠올리길 원했죠.”
“아하……. 그래서 벨트람이었던 건가요? 마침 레이디 오드리가 흑마를 타고 흰 코트를 날리며 달렸으니 신화적 상징을 쓰는 것에도 별로 부담은 없었겠어요.”
“맞아요.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도 위화감 없이 쉽게 받아들이더라고요.”
네이기스가 그리고 에이쉬가 기획한 벨트람 포스터 시리즈는 그야말로 대박을 쳤다. 그날의 일을 애써 기억 안쪽으로 파묻었던 사람들도 오드리의 뒷모습만은 기억하고 싶어 했다.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에 젖기보다는 승리자로서 살고 싶은 욕망이 더 컸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후로 네이기스는 벨트람, 볼린, 페즈날 등 신화 시리즈를 계속해서 그렸지만, 가장 인기가 좋은 것은 역시 벨트람이었다. 괴물사태를 겪지 않은 지역에서도 벨트람을 가장 좋아하는 건 얼핏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본래 벨트람은 신 중에서도 인기가 좋은 축에 속했다.
“정작 오드리 언니는 자신의 얼굴이 벨트람으로 그려지는 것에 좀 부담감을 느끼는 것 같았지만……. 어떡해요, 오드리 언니 말고는 그 어떤 얼굴도 떠오르질 않는걸. 이건 나만 그런 게 아니라고요.”
탈린이 깔깔 소리 내어 웃었다. 새침하게 눈꺼풀을 깜빡거리며 장단을 맞춰준 네이기스가 조그맣게 말을 덧붙였다.
“사실, 그 일이 있기 전에도 오드리 언니는 나의 벨트람이었어요.”
“……? 볼린의 천사, 뮤즈가 아니라요?”
“언제나 싸우고 있잖아요. 그리고 항상 승리하고요.”
“아하……. 그렇군요. 그렇네요, 레이디 오드리는…….”
네이기스는 지금도 싸우고 있는 오드리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탈린은 네이기스의 믿음에 기대어 오드리의 승리를 소망했지만, 그 소망이 실현되기까지 브란젤에서 기다릴 수가 없었다.
탈린이 나랍으로 돌아가던 날, 네이기스는 헤어짐을 아쉬워하며 그녀에게 커다란 선물상자를 안겼다. 통관 서류에는 평범한 책과 그림으로 기재되어 있었지만 덧붙인 말이 심상치 않았다.
“꼭 나랍에 가서 열어봐야 해요.”
나랍에 도착한 탈린이 두근대는 가슴을 안고 상자를 열었을 때, 그 안에는 아주 의외의 선물이 들어 있었다.
바로 피임약이었다. 그녀가 백방으로 구하려고 그리 애를 썼지만 끝내 구하지 못했던 것. 임상시험 중이라는 핑계 때문에 곧 떠날 외국인에겐 줄 수 없다던 약이 상자 가득히 들어 있었다. 동료들과 함께 나눠 먹어도 족히 일 년은 충분할 양이었다.
“맙소사…….”
상자 바닥에는 그림도 한 장 들어 있었다. 흰 날개를 달고 검을 쥔 탈린이 싸우기 직전의 긴장감 넘치는 표정을 짓고 있는 그림이었다. 대체 누가 모델을 서 주었는지 꿈틀거리는 근육의 움직임이나 자세가 아주 사실적이고 훌륭했다.
언뜻 천사의 초상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그건 천사가 아니었다. 싸울 준비를 마친 흰 새였다. 전쟁과 승리의 신 벨트람이 데리고 다니는 하얀 전령새 말이다.
탈린은 벨트람 포스터의 성공은 그저 운이 맞아떨어진 결과에 불과하다며, 모든 건 오드리의 덕분이라고 겸손하게 말하던 네이기스의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들고 싶어졌다.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은밀하게 숨겨두었던 욕망을 꿰뚫는 그림을 그려내면서 운은 무슨 운?
“일단……. 고맙다고 편지부터 보내야겠다.”
어쩔 수 없었다. 화를 내기에는 그 그림이 정말로 마음에 들었으니까. 그림값을 미처 쳐주지 못한 게 미안할 따름이었다. 도대체 뭘 보내야 이 그림에 대한 보답이 될까 고민스러웠다.
하지만 그림값은 아주 뜻밖의 사람이 대신 치렀으니, 바로 라비린이었다. 그는 성공적으로 탈린의 주의를 끌어준 네이기스에게 깊은 감사의 뜻을 표하며 그녀의 작품 수십 점을 아주 비싼 값에 사들였다.
네이기스는 텅 비다시피한 작업실을 황당해하며 피올에게 따졌다.
“어쩐지. 내가 벨키스 경의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했을 때 아무 말도 안 하더라니……. 당신,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죠?”
“설마요. 벨키스 경의 씀씀이가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걸요.”
서로 아끼면서도 얼굴 마주칠 때마다 으르렁대는 형제를 화해시키고 싶었던 네이기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딴청을 피우는 남편의 옆구리를 콱 꼬집었다.
“곧 아빠가 될 텐데 심술은 적당히 좀 부려요.”
“걱정이에요. 그 뻔뻔쟁이가 우리 자식을 탐낼 것 같아서 말이죠.”
“벨키스 경이 왜 우리 아이를 탐내요? 하여간, 이상한 걱정을 사서 한다니까.”
네이기스는 피올의 걱정을 쓸데없다 치부하며 귓등으로 흘렸지만, 피올은 정말 진지하게 걱정하며 딸을 소원했다. 라비린이 오스미다의 귀족상속법 개정 시도에 작정하고 손을 보탤 예정인 건 꿈에도 모르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