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꿈★은 이루어진다
상의는 품이 넉넉하고 소매를 조인 셔츠에 허리에 딱 맞는 조끼를 입고, 하의로는 탄탄하게 근육이 붙은 다리 선을 과감하게 드러내는 흰 승마바지를 입었다. 정강이를 가리는 부츠를 신은 뒤 고급 말채찍을 허리에 찼다. 구불거리는 녹색 머리칼은 한데 모아 높이 묶고 화장은 복장에 맞춰 입술만 가볍게. 마지막으로 흰 케이프 코트를 걸치자, 오드리는 요새 한창 유행하는 네이기스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전쟁의 신 벨트람과 꼭 닮은 모습이 되었다.
“세상에, 이걸 내 눈으로 보는 날이 오다니! 내 손으로 꾸몄지만 너무 감격스러워!”
“맞아! 네가 성격은 좀 별로라도 손은 참 야무지다니까!”
“흥, 칭찬 한마디 제대로 하는 법이 없는 너보다야 내 성격이 훨씬 낫지! 아가씨, 그렇게 멀뚱히 서 계시지만 마시고 이런저런 자세 좀 취해 보세요. 의자에 앉는다거나, 책을 편다거나……. 그래요, 그렇게!”
다이앤과 이디케는 얼굴이 벌게지도록 흥분해서는 오드리에게 이런저런 요구를 해댔다. 그들을 말려야 할 릴리마저도 눈을 반짝이고 있는 건 마찬가지라, 오드리는 일찌감치 불평을 접고 요구에 응했다. 그쪽이 시간 절약과 하녀들의 사기 진작에 훨씬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이렇게 오드리가 특별한 차림을 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워커의 강철새가 사람들 앞에서 정식으로 첫선을 보이는 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오드리는 현세의 벨트람이라는 별명을 몹시 부담스럽게 여겼지만, 그렇다고 전쟁과 승리의 신이 가진 이미지를 활용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오드리는 마차 대신 윈디를 타고 행사장에 나갔다.
2차 괴물사태를 겪은 브란젤의 시민들에게는 영웅이 필요했다. 진짜가 아니라도 좋았다. 마음을 달래고 희망을 가질 수 있을 만한 인물이면 충분했다. 오드리는 그들이 원하는 영웅에 기가 막힐 정도로 잘 들어맞는 인물이었다.
조금 전까지 멀쩡하던 사람이 괴물로 변해 다른 멀쩡한 사람들을 해치고, 신화와 전설 속에서나 등장하던 용이 하늘에서 부닥치며 싸웠던 밤. 건물이 무너지고 가로등의 빛은 꺼져 갔으며 사람들을 보호하던 마법사들은 하나둘 쓰러져 가는데 새벽은 도시 밖에 머무르기만 할 뿐 다가오지 않던 그 밤.
그 악몽 같은 밤 가운데에서 자신의 마력을 미끼로 괴물을 유인해 낸 오드리에게 어떻게 희망을 보지 않을 수 있고 어떻게 애정을 갖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물론 네이기스의 포스터는 그림 자체만으로도 훌륭했다. 하지만 대유행까지 이른 결정적 이유는 오드리를 향한 브란젤 시민들의 애정임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딱 한 명, 오드리 본인만 빼고.
오드리는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 때문에 기껏 걸친 코트가 홀라당 타버릴 것 같았다. 작정하고 벨트람 흉내를 내긴 했지만, 이 정도로 호의적인 반응을 얻을 거란 예상은 못 했던 탓이었다. 한낮 야외에 마련된 이 행사에서 제공하는 술이라곤 도수가 약하고 산뜻한 축에 속하는 칵테일뿐이니 다들 취한 것도 아닐 텐데 눈빛들이 이렇게까지 뜨거울 일인가 말이다.
다행히 오드리의 낯가죽은 몹시, 매우, 두꺼웠다. 오드리는 웃는 얼굴로 급작스러운 초대에 응해준 고마운 사람들에게 일일이 감사 인사를 전했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귀한 발걸음을 해주셔서 어쩌고, 반드시 성공으로 성의에 보답하고 싶다 저쩌고. 우리는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역사적인 장면을 눈으로 보게 될 것이며 블라블라.
오드리가 행사 주최자로서 성실하게 노동하는 동안 워커와 사하스바티는 시험비행 준비로 정신이 없었다. 강철새 자체는 아무 문제 없었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비행하는 게 처음인 비행사를 진정시키는 게 큰 문제였다.
“얼마나 날면 돼요? 대충 저기서부터 저기까지? 그냥 빙빙 돌기만 해요? 막 뒤집거나 그럼 안 되고? 고도는 꼭 계속 유지해야 하고? 아깝다, 나 곡예비행 잘하는데!”
“일리아 씨, 제발 진정해요.”
“저는 충분히 진정하고 있어요. 지금 제가 얼마나 차분한데요.”
전혀 차분해 보이지 않거든. 워커는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대꾸를 꿀꺽 삼켰다. 일리아는 과히 흥분한 나머지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고 쉴 새 없이 다리를 떨고 있었다. 구석에 처박혀 떠는 것보단 낫지만, 이러다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몰라 걱정이 태산이었다.
그러나 워커의 걱정은 기우로 끝났다. 성난 소처럼 콧김을 뿜어대던 일리아는 자신이 언제 그랬느냐는 듯 차분하게 비행했다. 그녀가 운전하는 강철새는 겨울바람을 타고 나는 독수리처럼 우아하게 하늘을 가르며 사람들의 눈을 죄다 사로잡았다. 오드리에게 정신이 팔려 있던 사람들마저 강철새에 넋이 나가서 말을 잊었다.
인간이 하늘을 날다니.
하늘은 인간이 아니라 날개 달린 짐승의 영역이었다. 신화시대는 끝났어도 인간이 발을 디딜만한 곳이 아니었다. 2차 괴물사태 당시 하늘에서 뒤엉켜 싸우는 두 마리 용을 지켜본 사람들 중엔 감히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조차 못하는 사람마저 있었다.
하지만 강철새는 인간이 만들어낸 물건이었다. 일리아는 커다란 모래시계가 두 바퀴나 돌 동안 강철새를 타고 하늘에 머물렀고, 지상에서 흔든 깃발 신호에 맞춰 사뿐히 내려앉았다. 소담히 피어난 들꽃 한 송이 다치지 않게 정교한 솜씨였다.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강철새를 보던 사람들은 일리아가 강철새에 내려 인사를 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박수를 쳤다. 박수, 환호성, 나직한 비명, 뜻 모를 탄식, 아낌없는 찬사……. 온갖 종류의 효과음이 시험비행 행사장을 메웠다. 워커는 자신도 모르게 사하스바티를 끌어안았다.
“우리가 해냈어. 우리가 해냈다고!”
“나보다는 네가 해낸 거지. 난 완성품에 숟가락만 얹었어.”
“에이, 그건 아니지. 네가 아니었으면 난 숟가락이 없어서 맨손으로 밥을 퍼먹었어야 할걸. 그러다 목 막혀 죽거나 식중독으로 죽거나 둘 중 하나가 됐겠지. 제기랄, 미쳐 버릴 것 같네. 심장이 너무 뛰어서 무서울 지경이야.”
“그래? 그럼 빨리 진정시켜. 일리아 씨가 보고 비웃기 전에. 잔소리를 그렇게 했는데 네가 그 사람과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으면 돼?”
워커는 입이 하나밖에 없는 게 아쉬워졌다. 만약 자신의 입이 두 개였더라면, 하나로는 심호흡을 하고 다른 하나로는 자신이 이 연구에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과 돈과 열정을 쏟아부었는지, 이렇게 흥분하는 게 얼마나 당연한 일인지 일일이 읊어줬을 텐데 말이다.
사하스바티는 낄낄거리며 워커의 등짝을 갈겼다. 그가 보기에는 워커나 일리아나 다를 게 없었다. 지켜보는 사람이 많아도 전혀 위축되지 않는 대담함이나, 뭔가에 꽂히면 다른 쪽으로는 극도로 시야가 좁아지는 독특한 성격이나.
“잘해.”
“당연하지.”
“내가 말이야, 멀미만 아니었어도 직접 몰아보는 건데. 쯔쯔, 아쉽게 됐어.”
워커는 사하스바티의 헛소리엔 크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는 얼른 그의 몫으로 만들어진 강철새에 올라타 조종간을 잡았다. 일리아가 그리 아쉬워했던 묘기비행은 사실 워커의 몫이었다. 훌륭한 마차 제작자가 꼭 훌륭한 마부라는 법은 없지만, 워커의 비행 실력은 부실한 강철새를 몰고 허우적댄 경력만큼이나 독보적이었다.
워커는 강철새를 몰고 사뿐히 날아올랐다. 익숙한 부유감이 몸을 휩쓸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까마득하게 작아졌다. 기분이 고양되면서 마음이 들떴다.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차올랐다.
“내가 바로 강철새의 마법사, 워커 크라티우스다! 하하하하!”
워커가 모는 강철새가 아찔한 곡예비행을 시작했다. 지상에서 목을 빼고 있던 관객들이 여기저기에서 약한 비명을 내질렀다. 저러다 떨어지겠어!
‘떨어지기는 무슨.’
이디케는 불안해하는 사람들을 한심하게 여겼다. 그녀는 워커를 잘 알았다. 그는 천재였고, 이제까지 그가 완성해서 세상에 내놓은 물건에 치명적인 결점이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개발 일정에 집중하지 않다가 뒤늦게 다급해져서 시간과 돈을 더 달라며 칭얼거려서 문제지.
모래시계가 한 바퀴 돌 동안 비행하고 내려온 워커가 동승해서 체험해 볼 사람을 요청했다.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대범한 척 어깨를 펴고 있던 사람들마저 그의 시선을 피했다. 이디케는 한숨을 삼키고 번쩍 손을 들었다.
“저요!”
젊은 처녀의 용감한 도전에 사람들이 와와 박수를 쳤다. 이디케는 워커가 부르기도 전에 강철새로 다가가 제 자리를 찾아 앉았다. 몇 번이고 보았던 구조라 손놀림에 거침이 없다.
“안 타요?”
멍하니 이디케 하는 것만 보고 있던 워커가 허둥지둥 자리를 찾아 앉았다. 강철새는 매끄럽게 떠올랐다.
이디케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워커를 못 믿는 것은 아니나, 내장이 떠오르는 듯한 부유감이 낯설고 어색했다. 뒤통수에도 눈이 달렸나, 워커가 다급히 이디케를 불렀다. 이디케, 주변을 좀 봐요! 이디케!
“……우와아!”
몇 번이고 부르는 목소리에 반응해 겨우 눈을 뜬 이디케는 비명 같은 탄성을 내질렀다. 거칠 것 없이 드넓은 하늘, 손가락보다 작은 사람들, 눈높이에서 나란히 날갯짓하는 새……. 한 번도 본 적 없는 풍경이 그녀를 반겼다.
이디케는 어깨와 허리에서 저를 단단히 붙들고 있는 끈을 확인했다. 발도 살짝 굴렀다. 그제야 사라졌던 현실감이 돌아왔다. 전부는 아니고, 반쯤.
“맙소사.”
“어때요, 대단하죠?”
워커가 우쭐거렸다. 평소라면 누가 천재 아니랄까 봐 재수 없게 군다고 했을 텐데, 상상도 못 했던 풍경을 본 이디케는 마음이 놀랍도록 관대해졌다. 그녀는 폭포수처럼 칭찬을 늘어놓았다.
“워커 씨, 당신은 정말 천재예요.”
“되다 만 강철새를 직접 탔다가 추락했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곤 했었는데, 이젠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되겠어요.”
“강철새를 만들기 시작할 때 이런 풍경을 볼 수 있을 줄 알았나요?”
“이 뚜껑이 투명해서 좋긴 한데, 창문은 없나요?”
이디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두 사람의 상체와 머리를 덮고 있던 투명한 뚜껑이 훌렁 열렸다. 그와 함께 몰아닥친 바람이 이디케의 머리칼을 마구 헤집었다. 으악! 이디케가 비명을 질렀다.
“괘, 괜찮아요?”
“그럼요, 괜찮죠. 설마 바람 좀 맞았다고 내 목이 부러지기야 하겠어요?”
“그건 그렇죠. 그럼 실컷 바람을 즐겨요! 일부러 열리게 만든 거니까!”
저놈의 마법사에게는 대체 언제쯤 눈치라는 게 생길까. 미리 말해주고 열면 어디 덧나기라도 하나? 이디케는 내심 한숨을 내쉬면서 머리칼을 정돈했다. 사방에서 휘몰아치는 바람이 대단하긴 해도 리본이 아예 날아가 버린 게 아니라 다행이었다.
“이디케, 의자 아래에 넣어둔 상자를 좀 꺼내 볼래요?”
“상자요?”
탑승자의 어깨와 허리를 고정한 끈은 일단 이륙하면 착륙할 때까지 풀리지 않는다. 덕분에 이디케는 발로 한참을 끙끙대고 나서야 그 상자를 꺼내 무릎에 올리는 데에 성공했다. 크기에 비해 묵직했다.
“이게 뭐예요?”
“선물이요! 구경 온 사람들에게 뿌리려고 챙긴 거예요. 공중에서 나눠주면 재밌겠죠?”
열어보니 작게 포장된 각설탕과 설탕꽃, 사탕 등이 들어 있었다. 이런 거라면 선물을 주고도 욕먹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눈치 없는 마법사가 준비했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괜찮은 선물이었다.
“좋아요, 언제쯤 던지면 돼요?”
“사람들 머리 위에 딱 데려다줄 테니까 그때 뿌려요!”
강철새가 홱 방향을 틀었다. 이디케는 내장이 짓눌리는 듯한 감각에 신음하며 상자를 꽉 끌어안았다. 몸이 반쯤 기울어진 채로 하늘을 가르는 기분이 아주 색달랐다. 땅이 점점 가까워지는 게 느껴졌다. 목덜미와 등에서 식은땀이 솟았다. 공포와 짜릿함이 뒤섞인 쾌감이 그녀의 이성을 곤죽으로 만들었다.
“꺄아아아아아!”
“지금이에요!”
워커는 모여든 사람들 머리 위에서 곡예비행을 선보였다. 강철새를 뒤집고 돌리고 좌우로 흔들고……. 멀리서 까부는 걸 볼 때와는 완전히 다른 압박감에 턱이 빠질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들의 머리 위로 그가 준비한 선물이 뿌려졌다.
이디케의 머릿속은 텅 비어버렸다. 그녀는 자신이 대체 무슨 정신으로 선물을 뿌렸는지 알 수가 없었다. 뭐가 좋아서 그리 손을 흔들며 비명을 질렀는지도. 무사히 땅에 발을 딛고 나서야 생각이라는 걸 좀 할 수 있게 되었고, 그러고 나자 뒤늦은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맙소사……. 이대로 사라지고 싶다.’
이 시험비행 행사의 참석자 태반이 오드리의 인맥이 닿아 있는 사람들이었다. 당연히 이디케도 얼굴을 알고 있었고, 몇몇 사람들과는 퍽 친밀하게 지내기도 했다. 쉽게 얕볼 수 없는 단정한 인상을 주기 위해 그동안 얼마나 노력해 왔는데, 그 모든 것이 한순간에 거품이 되었다.
그런 이디케의 좌절을 알 리 없는 워커는 비행이 아주 만족스러웠는지 보기 드물게 싱글벙글 웃는 표정이었다. 이디케는 어떻게 처음 타는 사람을 데리고 그런 짓을 할 수 있었냐며 따지고 싶었지만, 워커의 웃음을 보자 그 말이 쏙 들어갔다.
강철새는 워커의 평생소원이었다. 되지도 않을 일에 돈과 시간과 재능을 쏟는다며 사방에서 쏟아지는 조롱을 몇 년이나 견뎌 기어이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 그 결과물을 타고 사람들의 머리 위를 나는 동안 어마어마하게 즐거웠을 텐데 까짓거 조금 맞춰주는 것도 나쁘진 않을 성싶었다. 그동안 알고 지낸 정이 있지, 이렇게 기쁜 날에 어떻게 그의 기분에 초를 칠 수 있겠는가.
참자, 그리고 오늘은 워커에게 맞춰주자.
하지만 이디케의 그 결심은 채 반 시간도 지나지 않아 와르르 무너졌다. 이제 그만 오드리에게로 돌아가야 한다는 이디케를, 꼭 해야 하는 말이 있다며 붙든 워커가 대뜸 청혼을 한 것이다.
그렇다. 청혼이었다.
심지어 워커는 반지도 맞춰왔다. 다이앤의 영향을 받아 높아질 대로 높아진 눈으로 봐도 꽤 괜찮은 반지였다. 워커는 저 반지를 사기 위해 상당한 돈을 썼을 게 분명했다.
“한참 전에 결심한 거예요. 강철새를 만드는 데 성공하면 고백하겠다고요. 이디케, 나랑 결혼해 줄래요?”
얼굴을 벌겋게 붉힌 워커는 순진하고 열정적이었다. 하지만 이디케는 그저 황당할 뿐이었다.
교제 신청도 아니고, 대뜸 청혼? 그것도 고정벨트에 눌린 옷 곳곳에 구김이 가고 머리칼은 산발 직전인 지금? 뭣보다 우리가 그렇게 사이가 좋았던가? 아니, 매번 만날 때마다 독촉하고 화냈던 기억밖에 없는 것 같은데.
“장난이라면 그만둬요.”
“장난 아니에요!”
냉담한 반응에 다급해진 워커가 줄줄 제 짝사랑의 역사를 읊었다. 언제부터인지 자신이 가장 인정받고 싶은 사람은 오드리가 아니라 이디케가 되었다며, 마법사로서 충분히 의미 있는 성과를 내서 로렐라이의 대리인인 이디케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고.
몇 단계나 되는 과정을 훌쩍 뛰어넘은 고백이지만 워커의 진심을 알기엔 충분한 고백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디케는 냉담하게 그의 구애를 거절했다.
“난 평온하고 예쁜 가정을 꾸리는 게 꿈이에요. 오랫동안 사이좋은 부부로 살면서 아이를 많이 낳아 키우고, 나중에 늙어서는 사랑스러운 손자손녀들에게 둘러싸여 죽고 싶어요.”
“난…….”
“워커 씨는 마법사잖아요. 저는 마법사와 그런 가정을 꾸릴 수 있을 거라 기대하지 않아요. 그건 너무 큰 꿈이잖아요.”
중매쟁이들 사이에서 통하는 농담이 있다. 가난하고 재산 없는 집의 처녀에게 가장 좋은 혼처는 바로 마법사라고. 왜냐하면, 그들은 잘 벌고 일찍 죽으니까.
“난 이른 나이에 과부가 되는 건 딱 질색이에요.”
“…….”
“미안해요, 워커 씨. 마법사가 내 남편이 되는 상상은 한 번도 해 본 적 없어서 애인부터 시작하자는 말도 못 받아들이겠어요.”
어떻게 변명해 볼 여지도 없는 거절이었다. 빈말로도 마법사를 때려치우겠다는 말은 할 수 없었던 워커의 코끝이 빨갛게 물들었다. 차갑게 워커를 밀어내던 이디케가 당황해서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물론 워커 씨는 좋은 사람이에요. 마법사로서도 그렇고, 동료로서도 그렇고. 설마 내가 청혼을 거절했다고 해서 더는 로렐라이에 있지 못하겠다거나 그런 비슷한 생각을…….”
“안 그래요!”
“안 그런다니 다행이네요. 워커 씨는 로렐라이의 핵심이라, 놓치고 싶지 않거든요. 부디 내 거절에 너무 상심하지도, 악감정을 가지지도 않았으면 좋겠어요. 나 말고도 워커 씨의 진가를 알아줄 여자는 어디든 또 있을 거예요.”
“…….”
“난 이만 아가씨를 모시러 가야 해서요. 아가씨께 뭔가 전할 말 있으면 얘기하세요.”
이디케가 한 마디 한 마디 말을 뱉을 때마다 워커의 어깨가 축축 늘어졌다.
“없어요…….”
“그래요. 알겠어요.”
워커는 매정하게 돌아서는 이디케의 등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꼿꼿하게 허리를 편 단정한 뒷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솔직히 예상했던 결과인데도 이렇게 단호하게 거절당하고 나니 속이 쓰렸다. 강철새를 타고 나는 동안 한껏 부풀었던 자신감이 급격히 쪼그라들었다.
“아, 참. 이 말 하는 걸 깜빡했네.”
멀어지던 이디케가 돌아와 워커 앞에 섰다. 또 무슨 말을 들으려나. 워커는 잔뜩 긴장해서 어깨를 움츠렸다.
“워커 씨, 당신은 진짜 천재예요. 강철새는 정말 대단한 물건이고, 앞으로 세상을 바꿀 거고, 전 그 미래를 위해 최선을 다할 거예요.”
“어…….”
“말도 없이 곡예비행 한 것 때문에 놀라긴 했는데, 그래도 재미있긴 했어요. 진심이에요. 하늘에서 본 풍경은 내 인생에서 본 것들 중에 최고였고요. 강철새의 마법사, 하늘의 정복자! 마법사 워커 크라티우스! 대단해요! 최고!”
이디케가 히죽 웃으며 양손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워커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표면을 뚫고 지하에 처박혔던 자신감이 활짝 일어나 어깨를 폈다. 좀 전까지 우중충하기만 하던 세상이 환히 빛나고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우쭐거리며 턱을 치켜들었다.
“그래요, 나는 하늘을 정복한 마법사죠!”
“그럼요!”
사하스바티는 그날 워커와 이디케 사이에 있었던 일을 고스란히 보고 들은 단 한 사람의 목격자였다. 그는 대뜸 반지를 꺼내는 워커의 행동에 기함했고, 다르게 생각할 여지라곤 손톱 밑의 때만큼도 남기지 않는 이디케의 분명한 거절에 혀를 내둘렀다.
이디케가 매정하게 뒤돌아섰을 때, 사하스바티는 풀죽은 워커에게 다가가 그와 어깨동무를 하고 맥주라도 한잔하러 갈 생각이었다. 세상엔 여자가 많고 워커 정도 되는 마법사면 좋다는 여자 많을 테니 너무 상심하지 말라고, 거절당한 충격은 술로 잊으라고 말이다.
하지만 사하스바티가 나서기도 전에 이디케가 돌아와 워커의 성과를 칭찬했고, 워커는 언제 풀이 죽었느냐 싶게 쌩쌩해졌다. 사하스바티는 그에게 술을 사주려던 계획을 깨끗하게 폐기처분했다.
“워커가 단순한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어. 마법도구와 강철새, 딱 두 가지 영역에만 날카로운 천재성을 발휘하는 건 알고 있었는데……. 설마 그렇게 등신이었는 줄은 몰랐지.”
“그래요?”
“그렇다니까. 대뜸 고백하는 것까지는 그렇다 쳐. 그런데 뭐, 결혼? 반지는 대체 언제 준비한 거야? 락시 양은 생각도 않고 있더만 혼자 들떠서는…….”
“그러게요. 워커 스승님이 영 경솔했네요.”
“내 말이. 워커 놈 말이야, 눈치가 없어도 어떻게 그렇게 없을 수가 있나? 락시 양이 칭찬을 잘 해주기는 하지만 그게 어디 이성으로서 호감이 있어서 해주는 칭찬인가? 그냥 일 잘하라고 해주는 칭찬이지. 워커 놈이 마감을 잘 지키면 그 칭찬보다 몇 배는 되는 칭찬을 들을 수도 있을걸, 말 몇 마디에 홀라당 넘어가서는 우쭐대기나 하고 말이야!”
사하스바티가 연신 투덜거렸다. 비니타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며 스승에게 맞장구를 쳐 주었지만, 내심 의구심을 거둘 수가 없었다. 그녀가 알기로, 이디케는 워커에게 확실히 호감이 있었다.
‘이상하다……. 내가 아는 거랑 다른데. 스승님이 뭔가 착각한 거 아닌가? 잘못 들었다거나?’
비니타의 의심과는 달리, 사하스바티는 제대로 봤다. 이디케는 강철새 시험비행이 있던 날만 해도 워커에게 별생각이 없었다. 워커의 난데없는 청혼이 그저 부담스럽고 곤란할 뿐이었다.
그랬던 이디케의 마음이 흔들린 건 오드리의 납치 사건 이후였다. 오드리를 구하겠다고 노력을 거듭하던 워커가 기어이 대형 강철새를 만들어내서는 발톱섬에서 사람들을 실어나르며 활약했다고 하니 자꾸 눈길이 갔다. 분명 이디케에게 워커는 마법사지 남자가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이디케는 자신의 흔들림을 꽤 잘 숨기고 있었지만, 한창 남의 연애에 관심이 많을 나이인 비니타의 촉은 정확했다. 사하스바티와 워커는 그녀의 변화를 아직 모르고 있을 뿐이었다.
“하여간 말이야, 마법사란 족속들은 답이 없어. 만날 마법망과 마법 수식만 들여다보고 있어서 그런가 다들 사회성이 떨어진단 말이야.”
근거 없는 비난의 수위가 점점 높아졌다. 언제쯤 대꾸를 하는 게 좋을까 비니타가 눈을 굴리며 기회를 노리던 그때, 마침 이야기의 당사자인 워커가 연구실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그는 순식간에 조용해진 연구실을 보자마자 상황을 파악하고 미간을 좁혔다.
“방금 내 욕했지.”
“안 했어.”
“안 하긴 뭘 안 해, 딱 보니까 내 욕하다가 당사자가 나타나서 찔끔한 거고만. 사하스바티, 너지? 하긴 내 욕 할 사람이 너밖에 없긴 하지. 뭐라고 떠들었냐?”
“무슨 소리야. 너 날 뭘로 보고 그런 의심을 해? 내가 언제 쓸데없는 말, 밖에 퍼 나른 적 있어?”
“아주 많지. 예를 들면…….”
워커가 말끝을 흐리며 비니타를 향해 턱짓했다. 사하스바티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비니타의 시선을 외면했고, 비니타는 몹시 충격을 받았다. 설마, 그 징그럽게 반복되어 나오던 인터뷰의 출처가 사하스바티였던 건가! 이제까지 틀림없이 워커인 줄 알았는데!
“나는 수다쟁이이긴 해도 할 말 못 할 말 정도는 가려. 인터뷰 작작 해라, 이 기름쟁이 자식아. 출처를 밝히지 않는다고 정말 다들 모르는 줄 알아? 정 떠들고 싶거든 연습이라도 좀 하고 해.”
정말 몰랐던 비니타 본인만 빼고 다 알고 있었나 보다. 한 명은 입을 털고 한 명은 그걸 알면서도 아무 말 안 해줬다 이거지. 비니타는 새삼스러운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이디케가 워커를 맘에 들어 한다고 내가 말해주나 봐라.’
비니타의 이런 결심을 알 리 없는 워커는 비니타를 붙들고 도움을 요청했다. 그 내용인즉슨, 이디케가 며칠 뒤에 밥 먹으며 일 얘기를 하자고 사람을 보냈기에 냉큼 수락을 했는데, 그때 무슨 옷을 입고 가야 할지 영 모르겠다는 거였다.
“이디케와 같이 밥 먹는 게 처음도 아닐 거면서 새삼스럽게 웬 옷차림 걱정이에요?”
“새삼스럽게 옷차림 걱정을 좀 해 볼 수도 있지. 나라고 뭐 만날 마법사 로브만 뒤집어쓰고 다녀야 하나?”
“다른 사람들에게 부탁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왜 하필 저인데요?”
멋대로 강철새를 끌고 나갔던 일 때문에 호되게 혼이 났으면서도 비니타의 기는 여전히 팔딱팔딱 살아 있었다. 워커는 면구스러워 뺨을 긁으면서도 용건을 달성하려 들었다.
“내가 이런 걸 부탁할 만큼 친근하게 지내는 여자가 너 말고 또 있냐.”
“으음…….”
비니타가 신음을 흘렸다. 요즘 그녀는 군용 강철새 연구 개발의 핵심 멤버로 참여하고 있었다. 마법진에 대한 감각이 아주 예민한 데다 마법과 기계 양쪽을 다 아우르는 시각을 가진 터라 어딜 가도 환영받았고, 거기에 사교성까지 좋아 아는 사람이 아주 많았다.
강철새 제작에 손을 보태는 장인들, 왕궁마법사를 위시한 마법사들, 왕립 기계연구소의 연구진들까지, 죽은 사람 빼고 산 사람은 전부 얼굴을 알았다. 그렇게 발이 넓은데 선뜻 워커의 말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워커의 인간관계는 비참할 지경이었다.
기껏 친하다고 할 법한 사이의 여자는 아이샤뿐인데, 그녀도 일 년 내내 마법사 로브를 입고 다니는 사람이었다. 함께 쇼핑을 가면 새로운 색상의 마법사 로브를 추천해 줄 것이다.
“도와주면 용돈을 줄게.”
“저 이젠 옛날처럼 궁핍하지 않…….”
“이디케가 내 옷차림을 칭찬하기라도 하면 앞으로 한 달 용돈을 세 배로 올려줄게.”
“지금 당장 가죠. 만약 이게 공식적인 맞선이면 필리아 거리 의상실의 정통적인 스타일이 제격이겠지만 그건 아닌 거죠? 시엘라 거리로 가야겠네요. 개성을 살리면서도 깔끔하게 입는 게 좋겠어요.”
강철새가 성공하면서 워커는 예전의 그 가난한 마법사가 아니었다. 비니타는 제한 금액 없는 쇼핑이 이렇게 황홀한 것인 줄 처음 알았다. 이디케의 씀씀이에 맞춰야 한다는 조건만 아니었다면, 비니타는 워커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가장 비싼 맞춤옷 가게의 제품으로 휘감아 버렸을 것이다.
비니타는 제 노력의 결과물을 흡족하게 바라보았다. 몇 시간에 걸친 쇼핑 결과, 꼬질꼬질하고 어딘지 궁상맞아 보이던 마법사는 퍽 패션 감각 있어 뵈는 단정한 신사로 탈바꿈했다.
워커가 영 미덥지 않았던 의상실의 점원은 옷에 번호까지 매겨서 코디 책자를 제공했으니, 비니타는 그 섬세한 배려에 몹시 감동받고 말았다. 적어도 저 책자의 페이지가 다 넘어가기 전까지는 워커에게 다시 불려올 일이 없을 테니까.
‘제발 워커와 이디케가 잘되게 해주세요. 그래서 워커가 앞으로 짜증을 덜 내고 일도 성실하게 하도록…….’
손을 모아 기도하던 비니타는 문득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랑과 예술의 신 볼린과 정의와 규율의 신 하티 중 누구에게 빌어야 자신의 소원이 이뤄질지 헷갈려서였다. 결론은 금방 나왔다.
‘둘 다 빌자.’
일단 불꽃이 튀어야 하티의 신전에 가고 말고 할 것 아니겠는가. 비니타는 최근 몇 년에 한 기도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간절하게 기도했다. 제발 그냥 밥만 먹고 끝나지 않기를, 멋진 옷을 골라 입혀 보낸 보람이 있기를, 잠깐이라도 좋으니 이디케가 사랑에 눈이 멀기를!
기도하는 본인도 이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며 빌었건만, 그녀의 기도는 놀랍게도 효력을 발휘했다. 워커가 이디케와 일 얘기 없이 식사만 하는 다음 약속을 잡고 돌아온 것이다. 그 약속은 계속해서 다음, 또 다음으로 이어졌고 마침내 둘은 연인이 되었다.
둘을 알고 지내던 모든 사람들이 이 커플의 탄생에 경악했다. 개와 고양이가 사랑에 빠졌다고 해도 이렇게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두 사람은 외부의 시선이 어떻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지만 말이다.
워커와 이디케가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브란젤의 거리를 산책하게 되었다고 해서 비니타의 처지가 딱히 더 좋아졌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되레 워커에게 연애에 관련된 책을 추천해 준다거나, 이디케의 취향을 몰래 알아다 준다거나, 둘이 사나흘에 한 번씩 싸울 때마다 그 사이에서 등이 터지는 일이 추가됐을 뿐이었다.
두 사람의 연애는 꽤 오랫동안 이어졌다. 워커는 종종 안달을 내며 이디케에게 반지를 선물했지만 이디케는 매번 망설이며 받지 않았다. 연애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워커를 제 마음에 들인 것은 사실이지만, 워커가 마법사라는 것이 커다란 가시처럼 이디케의 목구멍에 걸려 빠지지 않는 탓이었다.
볼린과 하티 둘 다에게 소원을 빌던 비니타가 하티의 신전에만 기부금을 내기 시작했을 무렵, 이디케는 워커에게 특별한 초대를 받았다.
장소는 브란젤 성밖에 마련된 비행장, 시간은 자정에 가까운 늦은 밤, 옷차림은 편하면서도 활동성 있고 따뜻하게.
이디케는 이 초대를 사양치 않고 받아들였다. 그녀는 솜을 넣어 누빈 바지를 입고 양털로 속을 댄 부츠를 신은 뒤 두툼한 모직 망토까지 두른 실용성 만점의 차림으로 약속 장소에 나타났다. 널찍하고 쓸쓸한 비행장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워커가 기뻐하며 손을 흔들었다.
“이디케! 기다렸어. 안 올까 봐 얼마나 초조했는데.”
“내가 간다고 했잖아. 정말이지, 워커 너는 이상한 곳에서 걱정이 많다니까. 그런데 여긴 왜 불렀어?”
이디케가 이렇게 물어본 건 어디까지나 워커를 배려해서였다. 보나마나 새 강철새를 가장 먼저 소개시켜 주려고 부른 게 뻔하지만, 이렇게 모르는 척 한 뒤에 소개받고 놀라 감탄하면 그가 몹시 기뻐할 테니까.
“이걸 타라고?”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로 놀랐다. 이디케는 멋진 빨간색으로 도색된 예쁜 강철새를 손가락질하며 물었다. 처음 보는 기종인데 비행사도 아닌 내가 정말로 타도 되느냐고 말이다. 워커는 자꾸 의심하는 그녀를 위해 손수 문을 열어주었다.
“새 강철새 타는 거 좋아하잖아.”
“그게 그렇게 표가 났어? 하 참, 그나마 내가 낡은 강철새도 좋아하는 건 표가 안 났다니 다행이네.”
“하하하! 사실은 그것도 알고 있었어! 넌 강철새를 타고 나는 것 자체를 좋아하잖아. 그런 것치고는 계속 비행사 자격을 따지 않는 게 이상하지만. 네가 말만 하면 내가 직접 가르쳐 줄 텐데, 왜 안 따는 거야?”
“그래서 시도를 안 하는 거야. 배우다가 싸울까 봐.”
“그거 너무 그럴듯해서 반박할 말이 없는 변명이네.”
뭐가 그리 웃긴지 워커가 깔깔거리며 조종석에 앉았다. 그리고 재빠른 손놀림으로 이디케에게 안전벨트를 채우니, 이디케가 어색해하며 벨트를 만지작거렸다. 그동안 워커와 함께 숱하게 많은 강철새를 타보았지만 이렇게 어두운 시간에 강철새에 앉아본 건 처음이었다. 밤은 강철새의 시간이 아니었다.
‘또 청혼하려고 이러나?’
고요한 비행장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울렁울렁했다. 밤은 사랑과 예술의 신 볼린이 지배하는 낭만의 시간이라더니, 그 말이 괜히 나온 건 아니구나 싶었다. 만약 오늘 이 순간 이 풍경 앞에서 워커가 다시 한번 청혼을 해 온다면, 이번엔 거절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으니까.
“마음의 준비는 됐어?”
워커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리고 대답을 듣기도 전에 조종간을 잡아당기니, 강철새가 그 자리에서 둥실 떠올랐다. 고도가 빠르게 높아졌다. 밤이 주는 묘한 분위기에 젖어 있던 이디케는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것 같은 공포를 경험했다.
“뜨, 뜨기만 하는 거지? 금방 내려갈 거지?”
“설마. 그럴 거면 내가 널 왜 불렀겠어?”
“뭐?”
“밤의 브란젤이 얼마나 멋진지 보여줄게. 기대해도 좋아.”
이 미친 마법사 놈이! 이디케가 욕을 하지 않은 건, 어디까지나 극심한 긴장 때문이었다. 밤하늘에 빼곡한 별 때문에 머리가 다 어지러웠다. 금방이라도 방향을 잃고 추락할 것만 같았다.
이디케가 쉴 새 없이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어머니, 아버지, 저 사실은 왕립은행에 두 분도 모르는 비밀계좌 있어요. 열쇠는 사무실 간이침대 매트리스 아래에 있고 비밀번호는 막내 생일이에요. 아가씨, 셰비언 성벽에 같이 휴가 가기로 약속했는데 못 지키게 됐어요, 죄송해요. 다이앤, 이 망할 기집애야. 대학은 무슨 대학이야. 넌 로렐라이에서 일이나 해. 벨키스 경, 데멘사에 더 이상의 추가 예산은 무리예요. 탈린 씨, 앞으로도 나랍 지부를 잘 부탁해요.
“이디케, 진정해.”
“워커, 내가 너무 자주 화냈지, 미안해,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이 강철새는 밤에도 날 수 있어!”
동급의 다른 강철새보다 좁은 콕핏 안에 숨 막히는 침묵이 가득 찼다. 워커는 잔뜩 긴장해서 옆자리의 이디케를 흘끔거렸다. 가슴에 양손을 얹고 입술을 꽉 다문 표정이 아주 흉흉하기 그지없었다.
“똑바로…… 설명을…… 해줄래……?”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면 이대로 추락할 줄 알아. 말하지 않은 협박이 귓가에 들리는 것만 같다. 워커는 황급히 변명했다.
“이 강철새에는 시야가 안정적으로 확보되지 않아도, 눈으로 봐서 이정표로 삼을 만한 게 딱히 없더라도 방향을 잃지 않도록 해주는 시스템이 실려 있어. 물론 아직 초기 단계고 완벽해지려면 멀었지만……. 이렇게 텅 빈 밤하늘에서 별과 마법등의 빛을 감상하기엔 충분하고도 남아.”
“…….”
“깜짝 놀라게 해주고 싶었어. 아무래도 너무 놀라게 한 것 같긴 하지만 말이야. 미안해, 결코 고의는 아니었어.”
“……만약 고의로 이런 거였으면 넌 내일 아침 해를 못 봤을 거야.”
이디케는 오드리를 대신해서 로렐라이를 이끌고 있었다. 충분한 실행 능력이 있는 사람이 살벌하게 눈을 흘기는데도 불구, 워커는 조금도 두려워 않고 그저 낄낄거렸다. 사실 두 사람 사이에서 이런 식의 말다툼은 아침 인사만큼이나 흔한 것이었다.
“아래를 봐, 아름답잖아.”
길을 따라 가지런하게 늘어선 가로등 불빛, 늦은 시간에도 깨어 있는 사람들의 창문에서 흘러넘친 빛, 시계탑을 비추는 거대한 마법등의 빛, 그리고 검은 뱀처럼 구불구불한 강을 오가는 수십 척의 배가 선상에 걸어놓은 마법등 불빛……. 손톱보다 작은 빛이 모이고 모인 브란젤은 별이 빼곡한 하늘과는 다른 느낌으로 화려하게 반짝였다.
이디케는 브란젤의 야경에 홀린 듯 집중했다. 풍등 행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평범한 날의 평범한 밤 풍경일 뿐인데 도무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예쁘긴 예쁘네.”
“그렇지? 내가 말이야, 시험비행이 필요해서 날았다가 풍경에 취하는 바람에 약속했던 착지 시간을 깜빡 잊어버리기까지 했다니까.”
“또 네가 직접 시험비행을 한 거야? 위험하게! 이제 그만 다른 사람들한테 맡기라니까!”
“어쩌겠어, 내가 제일 잘하는걸. 세계 최고의 비행사가 바로 이 몸이시다, 이거야.”
워커가 어깨를 으쓱이며 자랑했다. 이디케는 다른 비행사들이 제대로 실력 발휘를 하고 있긴 한 건지, 혹시 강철새의 아버지에게 경의를 표하느라 지는 척하는 건 아닌지 의심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허약한 마법사가 몇 년이나 계속해서 최고의 비행사라는 명예를 유지하고 있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반드시 네게도 이 풍경을 보여주겠다고 생각했었어. 다짐을 지킬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
“이디케, 앞에 좀 봐봐. 텅 비었어. 신기하지 않아?”
“하늘은 본래 비어 있어.”
“그건 그래. 그렇지만 적어도 브란젤의 하늘은 아니라는 거 알잖아. 아침 해가 뜰 때부터 저녁놀이 질 때까지 수십 대의 강철새가 우글거리지. 셰비언마저 질색할 정도잖아. 아, 이렇게 고요한 하늘을 날아본 게 대체 얼마 만인지…….”
두 사람은 동시에 추억에 잠겼다. 새로운 강철새의 성능을 테스트 해 본답시고 빈 하늘을 몇 시간이나 날았던 것, 분해 폐기를 앞둔 강철새를 마지막으로 타고 곡예비행을 했던 것, 정비가 덜 된 강철새를 탔다가 추락하는 바람에 죽을 고비를 넘겼던 것…….
“이디케, 우리 결혼할까?”
“좋아.”
“……뭐? 어어? 어?”
이번에도 거절당하겠지, 큰 기대 없이 가볍게 말을 꺼냈던 워커는 선뜻 돌아온 대답에 놀란 나머지 조종간을 놓치고 말았다. 이디케는 조종간을 놓친 줄도 모르고 숨만 몰아쉬고 있는 워커를 대신해 조종간을 붙들었다.
“기껏 청혼을 수락했더니 날 추락사시킬 셈이야?”
“아, 아냐!”
워커는 황급히 조종간을 붙들었다. 강철새는 안정적으로 날고 있는데 심장은 요란하게 뛰고 눈앞은 빙글빙글 돌았다. 별의 바다를 머리에 이고 날고 있는 이 순간이 꿈만 같았다.
“왜 수락했어?”
너무 흥분한 나머지 속마음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고 말았다. 워커는 뒤늦게 제 입을 때렸지만, 이미 흘러나온 말을 주워 담을 방법은 없었다. 이디케가 키득거리고 웃었고 워커의 얼굴은 시뻘겋게 물들었다.
“마법사는 싫다며…….”
“그걸 생각하고 있으면서 나랑 연애는 어떻게 한 거야?”
크흠. 워커는 헛기침을 했고 이디케는 바깥을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별무리를 품어 가둔 듯 반짝이는 브란젤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까 정말 죽겠구나 싶었을 때, 너랑 결혼 안 한 거 조금은 후회했어.”
“어어…….”
“설령 결혼생활이 겨우 사흘밖에 안 되더라도 그 사흘 동안 잘 살면 된다고 생각하기로 했어. 따져 보니까 말이야, 내가 너랑 연애한 기간만 해도 몇 년이나 되잖아. 애를 낳아도 셋은 낳았겠더라.”
“이디케에…….”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해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사는 게 내 꿈이었어. 설마 상대가 네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이디케는 어린 시절의 자신에게 저 괴짜 마법사 워커 크라티우스가 네 남편이 될 거라고 말해주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상상했다가 그만 키득대고 웃고 말았다. 뺨이라도 맞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나, 나는, 내 꿈은…….”
“강철새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 거지. 축하해, 밤에도 날 수 있게 됐으니 대양 한복판에서도 길을 잃지 않고 갈 수 있겠어. 조만간 이뤄지겠네.”
“아냐, 그건 그냥 아무렇게나 떠들고 다닌 거고……. 사실 내 꿈은 꽤 오래전에 이뤄졌어.”
“응?”
“널 내가 만든 강철새에 태우고 나는 거! 그게 내 진짜 꿈이었어. 하하하, 이건 몰랐지?”
아까 놀란 이후로는 쭉 차분한 신색을 유지하고 있던 이디케의 얼굴이 기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도망칠 곳 없는 좁은 콕핏에서 어쩔 줄 몰라 하던 이디케가 손에 얼굴을 묻고 긴 한숨을 토했다.
워커는 이디케의 부끄러워하는 반응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그는 자신이 야간 비행을 가능케 하는 장치의 이름을 ‘이디케’라고 지었다는 건 다음의 즐거움을 위한 비밀로 남겨두기로 했다.
여담이지만, 워커가 사랑을 담아 로맨틱하게 지은 장치의 이름을 알게 된 이디케는 너무 부끄러운 나머지 불같이 화를 내며 그의 등짝을 때렸다. 하지만 돌이키기에는 너무 늦은 시점이었고, 그 장치의 이름은 결국 이디케가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