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사고뭉치 말썽쟁이에도 급이 있다
2. 꿈★은 이루어진다
3. 숨겨진 이야기(秘話)
4. 수사슴과 사막의 상관관계
5. 목에 걸린 가시는 빼내야 한다
6. 헨젤 백작
7. 셰비언의 생일
8. 어느 멋진 날
9. 1차 사료의 중요성
1. 사고뭉치 말썽쟁이에도 급이 있다
가위. 옷감이나 종이 따위를 자르는 도구. 두 개의 쇠를 교차시켜 고정하고 날을 세운 물건. 뾰족한 끝이 위험해서 어린아이들에게는 절대 들려주지 않는다. 하지만 세상의 사고뭉치 말썽쟁이들에게 금지된 물건은 언제나 매력적인 대상이 되기 마련이다.
이디케는 제 손에 들린 가위와 단정하게 하나로 묶인 오드리의 머리칼을 번갈아 바라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브란젤에 있을 때와는 완전히 달라진 오드리에게 충분히 적응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이건 좀 너무하지 않은가.
“아가씨, 저더러 아가씨 머리칼을 자르라고요?”
“으응, 그리 어렵지도 않아. 이 끈 아래에서 자르면 돼. 한 번에 싹둑!”
맙소사. 이디케의 낯이 하얗게 질렸다. 오드리가 가리킨 곳에 가위질을 했다간 다시는 묶을 수조차 없게 될 것이다. 안 그래도 다루기 힘든 곱슬머리인데 사내애처럼 머리가 짧아지면 아침마다 전쟁을 치를 테다. 과연 오드리가 그 전쟁에 참전할 것인가부터가 문제긴 하겠지만.
“내 머리카락인데 네가 왜 손을 떠는 거야?”
“그야 당연히 아가씨 머리카락이니까 손을 떨죠! 제가 아가씨 머리칼에 손을 댔다는 걸 어머니가 아시면……. 저는…….”
이디케의 목소리가 쩍쩍 갈라졌다. 희게 질린 낯빛과 달달 떨리는 손을 거울을 통해 구경하던 오드리가 멋쩍게 제 뺨을 긁적였다.
“유모가 알면 화내려나.”
“당연하죠. 설마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생각하신 건 아니죠? 어머니가 아가씨 머리칼을 얼마나 애지중지……. 안 되겠다. 저는 도저히 못 하겠어요.”
그때 이디케는 좀 순진한 면이 있었다. 자신이 못하겠다고 가위를 내던지면 오드리가 그냥 포기할 줄 알았으니까. 하지만 어린 오드리는 그리 만만치 않았다. 이디케가 내던진 가위를 번개같이 낚아채서는 제 머리칼에 들이댄다.
“안 돼요!”
탐스러운 긴 머리채가 썩둑 잘려 바닥에 나뒹굴었다. 이디케는 바닥에 흩어진 머리칼을 붙들고 오열을 하는데 정작 머리카락 주인은 세상 시원한 얼굴로 머리를 흔들었다.
“가벼워! 진짜 가볍다!”
“어흑, 난 이제 어머니에게 맞아 죽을 거예요…….”
“왜 애들이 죄다 단발인지 알 것 같아! 이래서 다들 머리를 자르고 다녔구나?”
“걔들은 남자애들이고요! 아가씨는, 아가씨는……!”
이디케는 어쩌다 일이 이 지경이 되었는가 생각했다. 대체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던 걸까?
오드리가 만탈락의 아이들과 어울려 노는 걸 그냥 두었던 것? 자꾸 수업을 빼먹고 나가는 걸 방관했던 것? 선생을 골리는 데에 협조했던 것? 막 살겠다던 오드리의 결심을 말리지 않았던 것? 선생의 이상한 칭찬을 참아 넘기도록 오드리를 달래지 못했던 것?
만약 락시 부인이 이디케의 생각을 알았더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딸아, 네가 생각한 모든 게 문제란다.’
그러나 이 작은 골방에는 오드리와 이디케뿐이었고, 이디케는 오드리를 당할 수 없었다. 어린 이디케는 오드리의 간사한 혓바닥을 버텨낼 만한 강단도 경험도 부족했다.
“너무 걱정 마. 이 가위를 훔쳐 온 건 나고 머리카락을 자른 것도 나야. 너한테 무슨 책임이 있다고 그렇게 혼날 걱정을 해?”
“못 막았잖아요!”
“내가 진짜로 마음먹으면 유모도 나 못 막아. 그런데 네가 날 막길 바라는 것 자체가 너무한 것 아닌가? 혹시 유모가 널 야단치려고 하면 내가 막아줄게.”
“……지, 진짜죠?”
어머니에게 혼나는 게 세상에서 제일 무서웠던 소녀는 주인의 믿음직한 말투에 홀라당 넘어가고 말았다. 오드리는 이디케와 새끼손가락을 얽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진짜지. 그나저나 계속 이 다락방에 처박혀 있을 거 아니지? 오늘 날씨 좋은데 놀러 가자! 하늘이 이렇게나 파랗잖아!”
“만탈락의 하늘은 거의 매일 파랗잖아요.”
오드리를 타박하고는 있었지만 이디케의 마음도 저 밖으로 향해 있긴 마찬가지였다. 찔끔 흘렸던 눈물을 닦자마자 금방이라도 나갈 듯 엉덩이를 들썩거린다. 두 소녀는 능숙하게 고용인을 따돌리고 저택을 탈출했다.
온종일 만탈락을 헤집고 돌아다니며 어울려 놀던 말썽쟁이들은 새 둥지 같은 머리꼴을 하고 나타난 오드리에게 크게 감탄했다. 허리까지 내려오던 머리채를 하루아침에 썩둑 잘라 버리는 용기는 찬사를 받아야 마땅했다.
만탈락의 말썽쟁이들 사이에서 대장 노릇을 하던 아이가 대표로 나섰다.
“속여서 미안해. 수영하려면 머리가 짧아야 한다는 건 거짓말이었어.”
오드리가 태연히 대꾸했다.
“나도 알아. 머리카락은 그냥 내가 자르고 싶어서 자른 거야. 시원하고 좋은걸.”
“속아놓고 거짓말하기는.”
“내가 진짜 속았으면 이디케의 머리카락도 잘랐겠지.”
과연! 너 진짜 대단한걸! 아이들이 오드리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그날, 오드리와 이디케는 만탈락의 말썽쟁이들에게서 수영을 배웠다. 얕은 강이라더니 의외로 물살이 세고 수량이 풍부해서 엄청나게 물을 먹기는 했지만, 역시 어려서 그런지 배움도 빨랐다. 둘은 서너 시간 만에 대충 자맥질 흉내를 낼 수 있게 되었다.
몰래 저택을 빠져나간 오드리와 이디케를 찾으러 나왔던 락시 부인은 사내애처럼 머리칼이 짧은 오드리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칠 뻔했다가, 물에 빠진 쥐새끼 같은 꼴을 하고 놀고 있는 이디케를 알아보고 기함했다.
“이디케! 너 지금 꼴이 그게 뭐니! 옆엔 누구……. 헉!”
락시 부인은 아직 강가 근처에서 멀리 가지 못하는 오드리와 이디케를 단숨에 붙들고 끌어 냈다. 홀딱 젖은 옷은 그렇다 쳐도 사내애처럼 짧게 자른 오드리의 머리칼을 보니 현기증이 일었다.
까맣게 윤이 나도록 매일 밤마다 공을 들인 머리카락이! 곱슬거리는 머리칼이 엉키지 않도록 얼마나 애를 썼는데! 어찌나 짧게 잘라놓았는지 대충 묶을 수조차 없을 것 같다.
“내가, 내가……. 내가 못 살아, 정말!”
오드리 본인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그 체면 때문에, 락시 부인은 차마 오드리의 이름을 소리 높여 부르지도 못하고 가슴을 쳤다.
그런 그녀의 앞에 선 두 소녀의 태도는 몹시 달랐다. 이디케는 고개를 숙이고 손가락발가락을 꼼질거리며 어쩔 줄을 몰라 했지만, 오드리는 까짓 잔소리 좀 들어주겠다는 듯 고개가 빳빳했다.
“잘라 버린 머리칼을 도로 붙일 수도 없고……. 어휴……. 일단 들어가서, 들어가서 얘기하자.”
혹시나 어울려 놀았던 불똥이 튈까 물속과 바위 뒤, 갈대 틈에 숨어 지켜보던 아이들에겐 정말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락시 부인은 몰랐을 것이다. 공개적인 곳에서 오드리의 신분을 드러내며 야단칠 수 없어 끝끝내 참아넘긴 그 행동 덕분에 오드리가 말썽쟁이들 사이에서 나름 높은 서열을 차지하게 될 줄은, 그리고 이디케가 오드리 방패의 유용성을 깨닫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이후로도 오드리와 이디케는 종종, 아니, 꽤 자주 저택을 탈출했다. 어린아이 특유의 팔팔한 체력과 영리한 머리, 거기에 두둑한 배짱까지 곁들여지자 어른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는 재앙이 되었다.
저택을 탈출한 두 소녀는 주로 강가와 시장통, 과수원 등지에 출몰해서 만탈락의 말썽쟁이 아이들과 어울려 놀았고, 락시 부인은 오드리의 정체가 공개적으로 밝혀지지 않기만을 소원하게 됐다. 밀리나의 어린 시절과 꼭 닮은 오드리의 이목구비 때문에 아는 사람은 벌써 다 알게 된 모양이었지만.
그렇게 락시 부인은 어느새 포기의 영역에 발을 디디고 있었지만, 일찌감치 하녀장 자리를 노리며 야심을 불태우고 있던 릴리는 두 소녀의 일탈을 참아 넘기지 못했다. 릴리는 두 소녀가 저택을 탈출한 것을 가장 먼저 알아차리는 사람이었고, 사방팔방 돌아다니며 노는 둘을 가장 잘 찾아내는 사람이었다. 그 둘을 가장 잘 잡아 오는 사람이기도 했다.
바로 오늘 아침까지는 그랬다.
가장 고운 염료로 물들인 것처럼 새파란 하늘, 한가로이 흘러가는 새털구름, 뺨을 간질이는 풀잎. 눈에 보이고 피부에 느껴지는 모든 게 다 한가로운데, 릴리의 심장은 쿵쾅쿵쾅 뛰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녀는 도망치는 두 소녀의 뒤를 쫓다 지쳐 그만 그 자리에 드러누워 헐떡거렸다. 저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왜 하필 여기인데에……. 이 망할 꼬맹이들……!”
만탈락의 복잡한 골목이 차라리 나았다. 릴리는 시장바닥을 뒹굴며 자랐고, 만탈락의 골목이라면 모르는 곳이 없었으니까. 영리한 두 말썽쟁이는 골목길로는 안 되겠다는 판단을 하자마자 도망치는 장소를 바꿨다.
풀밭에 벌렁 드러누워 있는 릴리가 이상해 보였는지, 양치기 개가 다가와 릴리에게 코를 들이밀고 킁킁거렸다. 쫓아내는 것도 귀찮아 내버려 두었더니 축축한 혓바닥으로 얼굴을 쓱 핥는다.
“으악!”
릴리가 진절머리를 내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저 멀리 나무 뒤에 숨어서 릴리를 보고 있던 두 소녀가 깔깔 웃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양치기 개는 릴리를 지키려는 것처럼 그녀의 옆에 얌전히 엎드렸지만, 오드리가 다가오자 부리나케 꽁무니를 빼고 달아났다.
오드리가 서운함을 감추지 못했다.
“어우, 쟤는 나한테 간식만 실컷 얻어먹지 가까이 오질 않아.”
릴리는 이대로 몸을 날려 오드리의 옷깃을 잡아챌까 말까 고민했지만, 도망칠 준비 만만인 오드리의 자세를 보자 이내 모든 게 귀찮아졌다. 그녀는 풀밭에 도로 드러누웠다.
“양치기 개는 영리해요. 아가씨께 잡혔다가는 엄청나게 괴롭힘당할 걸 잘 아는 거죠.”
“내가 뭘 괴롭힌다고 그래? 그냥 만탈락의 짐승들이 죄다 겁이 많은 거야. 어떻게 여긴 개, 말, 새 할 것 없이 죄다 날 슬슬 피한다고.”
“만탈락의 짐승들은 개, 말, 새 할 것 없이 죄다 영리하네요. 아가씨. 그렇게 슬슬 물러나지 않으셔도 돼요. 앞으로는 저도 짐승들의 지혜를 본받기로 마음먹었거든요.”
점잖은 포기 선언이었다.
만탈락으로 내려온 지 5개월. 오드리는 저택의 모든 고용인들로부터 공인된 말썽쟁이이자 막을 도리 없는 재앙이 되는 것에 성공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저는 아가씨한테 붙어야겠어요.”
“으응?”
릴리의 태도 변화는 극적이었다. 그녀는 적극적으로 오드리와 이디케의 말썽에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도움이 필요한 순간이 오면 거침없이 손을 빌려주었다. 때때로 새로운 말썽에 대한 소재나 기발한 발상을 공유하기도 했다.
예를 들자면, 만탈락의 개구멍 지도에 대한 아이디어 같은 것 말이다.
“지도로 그릴 수 있을 정도로 개구멍이 많다고?”
“정확히 말하자면……. 개구멍 지도라기보다는 숨겨진 길 지도죠. 아가씨도 만탈락 옛 중심가에 버려진 건물이 꽤 되는 거 아시죠? 개구멍을 통해 그런 건물들을 가로질러 다닐 수 있게 되면 큰길로 다니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빨리 다니는 것도 가능하거든요.”
“어쩐지, 옛 중심가에서 술래잡기를 하면 릴리를 이길 수가 없더라……. 그렇게 길을 잘 알면서, 한 번쯤은 져 주지 그랬어.”
“아가씨랑 이디케가 기가 막힐 정도로 제가 아는 길로만 도망가는 걸 어떡해요. 아가씨, 승부의 세계는 냉정한 거예요.”
“릴리……. 그거 알아? 너 방금 되게 재수 없었어.”
릴리의 잘난 척하는 태도는 재수 없어도 그녀가 제시한 말썽의 주제는 흥미로웠다. 그다음 날부터 오드리와 이디케의 주요 출몰 장소는 만탈락의 옛 중심가가 되었다. 큰 도시였던 만탈락이 서서히 몰락하며 버려진 건물들과 이젠 다니는 사람 없는 쓸쓸한 길이 그들의 놀이터이자 탐험 장소였다. 당연히 다른 말썽쟁이들도 함께였다.
만탈락의 기존 지도에 새로이 찾아낸 길을 추가하는 기쁨을 누리고 있던 어느 날, 오드리는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고양이를 만났다. 털이 얼룩덜룩하고 머리가 커다란, 못생긴 길고양이였다. 몇 주 동안 눈치를 보며 가까이 다가가다가 마침내 등을 쓰다듬는 데에 성공한 날, 오드리는 너무 기쁜 나머지 제 말썽꾸러기 친구들에게 간식을 돌렸다.
“그 고양이는 이 구역의 대장이었던 거야. 대장의 체면을 생각해서 차마 도망치지 못한 거지.”
“오, 그거 그럴듯하다. 대장은 대장 나름의 체면이 있는 법이니까.”
간식의 효과는 미미했다. 울컥한 오드리가 정강이를 걷어찼지만 아이들은 말을 바꾸지 않았다. 진실은 폭력보다 힘이 셌다.
말썽쟁이들의 대장으로 통하는 아이가 늘어져 하품하는 얼룩 고양이를 가리키며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곡물창고의 수호신 벤은 고양이로 몸을 바꿔서 세상을 떠돈다잖아. 저 고양이가 바로 벤의 화신일지도 몰라.”
“야!”
“하하하하!”
“그게 진짜다! 맞다!”
“웃지 마!”
“어떻게 안 웃냐!”
“역시 대장은 달라!”
그쯤엔 오드리의 진짜 신분이 슬슬 알려지고 있던 상태였다. 말썽쟁이들의 부모 중 일부는 말 안 듣는 자식을 붙들고 아가씨에게 무례하게 굴지 마라, 잔소리를 해댔지만 별로 효과를 보지는 못했다. 아이들에게 오드리와 이디케는 아무리 봐도 자신들과 똑같은 말썽쟁이였다. 종일 함께 강에서 첨벙대다 해질 때쯤 락시 부인에게 귀를 잡혀 끌려가는 걸 한두 번 봤어야 말이지. 솔직히 말해서, 있던 존경심도 다 사라질 판이었다.
하나 오드리를 평범한 또래로 대하는 건 함께 어울리는 말썽쟁이들 뿐이었다. 차마 오드리를 나무라거나 막을 수 없었던 어른들 덕분에 말썽쟁이들의 활동 범위는 점점 더 넓어졌고, 그건 대형사고로 이어졌다.
보이에라의 마구간에서 돌보던 말 수십 마리가 탈출하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보이에라의 마구간을 가로지르는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임무를 맡은 오드리가 마구간 앞마당에 발을 디딘 순간, 흥분한 말들이 날뛰다 마구간을 부수고 뛰쳐나가고 말았다.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었고 잃어버린 말도 없었지만 짐말 두 마리의 다리가 댕강 부러지고 말았다.
이번만은 그냥 넘길 수 없었던 보이에라가 락시 부인을 찾아와 항의했고, 락시 부인은 창피해 죽을 것 같은 심정으로 보상금을 지급했다.
“아가씨께서 다치지 않은 건 백번 생각해도 다행이에요. 상상만 해도 가슴이 떨려요. 그렇지만 마구간의 문을 함부로 연 것에 대해선 말을 꺼내지 않을 수가 없군요.”
오드리는 억울했다. 그녀는 자신은 마구간의 문을 열기는커녕 건드린 적도 없으며, 앞마당을 지나가려고 한 것뿐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부서진 나무 담장 아래의 구멍을 넓히고 들어가느라 한참 고생했는데 갑자기 말이 날뛰어서 얼마나 놀랐는지 아느냐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니까……. 아가씨가 직접 개구멍을 팠다고요?”
이크. 오드리가 제 입을 찰싹 때렸다. 락시 부인의 눈 밑이 파르르 떨렸다. 곧 벼락이 떨어졌다.
“애초 안 들어갔으면 됐을 일을! 하지 말란 짓을 해놓고 뭐가 그렇게 당당해서! 아가씨 덕분에 제가 흰머리가 얼마나 늘었는지 아세요? 네? 브란젤에선 그렇게 의젓하고 어른스러우시던 분께서 이게 무슨 일이에요!”
“악, 유모! 유모! 아파!”
“아프라고 때리는 거예요! 세상에, 아가씨가 내 자식이었으면 적어도 이틀은 쫄쫄 굶겼을 거라고요!”
“차라리 굶겨! 악! 엉덩이를 때리다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악, 유모! 아프다니까!”
“아직도 잘못했다는 말이 안 나오시죠? 좋아요, 누가 이기나 해 봅시다!”
그날, 락시 부인은 반쯤 이성을 잃고 매를 들었고 오드리는 생전 처음으로 엉덩이를 맞았다. 락시 부인은 며칠 지나지 않아 그날의 일을 몹시 후회하며 오드리에게 사과했는데, 오드리는 잔뜩 골을 냈던 게 무색하도록 시원하게 그녀를 용서했다.
“잘 생각해 보니까 내가 맞을 짓을 하긴 했어. 그 지도는 있는 길을 찾아내는 거였지 없는 길을 만들어내는 건 아니었는데.”
보이에라는 락시 부인의 노고를 이해했다. 이렇게 귀엽고 고집 센 말썽쟁이를 키우는 건 정말 보통 일이 아닐 것이다.
“그리 생각하시면서 저한테는 왜 오신 겝니까? 말의 부상이 얼마나 심각한지 눈으로 확인하시려고요?”
“아니, 그런 못된 마음으로 오진 않았어. 날 뭘로 보는 거야? 맹세컨대 나는 정말 마구간 근처에는 발도 디디지 않았는데 말이 왜 날뛰었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되어서 왔어. 들어보니 당신은 말에 대해서라면 모르는 게 없는 전문가라며? 뭐 짐작 가는 거 없어?”
“뭐어……. 없지는 않죠.”
오드리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대대로 랄리우스의 직계들은 동물에게서 그리 사랑받지 못했다는 거였다. 말은 당연하고 개, 고양이, 새, 하다못해 벌과 나비 같은 곤충까지도 그들을 피한다고.
“나는 거기에 해당되지 않아. 일단 나는 브란젤에 있을 때 어떤 동물이든 만질 수 있었고, 만탈락에서도 만질 수 있는 고양이가 있어!”
“브란젤의 동물에 대해선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가씨께서도 만질 수 있다는 그 얼룩 고양이는 알겠네요. 머리 크고 못생긴? 그놈은 대장고양이잖습니까. 이 근방에서 그놈을 이기는 녀석이 없어요. 그 녀석이 왔다 가면 근방 쥐새끼들의 씨가 마르는지라 사람들이 그놈은 진짜 벤의 화신일지도 모른다고 수군거릴 정돕니다.”
오드리가 눈에 띄게 낙담했다. 보이에라는 낙담한 오드리를 보며 웃지 않기 위해 자신의 모든 자제력을 끌어모아야 했다.
비록 원하는 답변을 듣지는 못했지만, 오드리가 일부러 보이에라를 찾아간 보람은 있었다. 그가 자신이 특별히 관리하는 말이 있는 마구간을 소개시켜 주었던 것이다.
손바닥만 한 마구간이었고 거기에 있는 말은 고작 두 마리에 불과했지만, 그 말들은 오드리를 보고도 놀라 달아나거나 경기를 일으키지 않았다. 오히려 가까이 다가오는 오드리에게 호기심을 보였다. 말의 콧잔등에 손을 얹고 따스한 숨결을 느낀 순간, 오드리는 송두리째 마음을 빼앗겼다.
“이 두 마리, 내가 살게.”
“안 팝니다.”
“안 팔 거면 뭐 하러 보여줬어?”
“자랑하려고요. 이 두 마리는 제 비장의 말이고 종마인데 아가씨께 보내서 산책이나 하는 놈으로 만들 순 없잖습니까. 그건 너무 불쌍하지요.”
“나 말 잘 타. 브란젤에 있을 때도 망아지가 아니라 이렇게 다 큰 말을 탔다고.”
“아가씨께서 사실은 랄리우스가 아니라 산트렘의 숙녀라고 하셔도 안 팝니다. 대신…….”
보이에라는 미래의 고객이자 당장의 후원자를 그렇게 확보했다. 오드리에게서 마구간 운영자금을 일부 지원받는 대신, 몇 년이 걸리더라도 좋으니 이 마구간에 넣을 수 있을 만한 싹수가 보이는 망아지를 확보하거든 반드시 오드리에게 팔기로 한 것이다.
훗날 락시 부인은 이 밑도 끝도 없는 약속에 대해 알자마자 대노하여 오드리에게 엄청난 양의 잔소리를 퍼부었지만, 오드리는 이날의 약속을 후회한 적이 없었다. 그 결과로 얻은 말이 바로 윈디였기 때문이었다.
“누나가 어렸을 때 말썽꾸러기였다는 말은 들은 적 있어. 하지만 그 내용에 대해서는 들은 적이 없더라니, 어쩐지. 이건 그냥 말썽꾸러기라고 하기엔 좀…….”
하델이 차마 말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여긴 만탈락, 오드리의 도시였고 그는 도시의 토박이들이 주로 이용하는 주점에 앉아 있었다. 그가 삼킨 말이 무언지 알면서도 사람들은 와하하 웃었다.
“괜히 만탈락 최고의 말썽쟁이라는 별명이 있었던 게 아니라니까요.”
하델은 오드리가 브란젤로 돌아오던 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자신은 누나를 가장 먼저 마중하겠다고 나무 위에 매달려 있기까지 했는데, 멍청한 동생은 싫으니 당장 수업 들으러 가라며 혼쭐부터 났었다.
“……이거 억울한걸.”
“네?”
“억울하다고.”
“도련님, 뭐가 그렇게 억울하세요?”
“나도 어릴 적엔 제법 말썽쟁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누나에 비하면 아주 양호했던 것 같은데, 만나자마자 수업에 빠지지 말라고 혼이 났으니…….”
주변의 웃음이 한층 더 커졌다. 하델은 진심으로 억울해했다. 만약 알렉스가 곁에 있었더라면 억울하긴 뭐가 억울하냐고 했을 텐데, 안타깝게도 그는 다른 일로 바빴다. 하지만 알렉스의 얼굴은 몰라도 그와 같은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여기 아주 많았다.
“아가씨께서 다 생각이 있으셨겠지요.”
“암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가씨이신데요. 어디 보자, 아가씨께서 말썽쟁이 노릇을 딱 그만두셨던 게 열한 살이 되셨을 때니까…….”
“도련님은 아가씨를 다시 만났을 때 몇 살이셨어요?”
“……열두 살.”
에헤이, 이거 감싸 드릴 수가 없군요! 열한 살이었다면 모를까! 누군가의 과장된 한탄에 사방에서 웃음이 터졌다. 장난스럽게 한숨을 푹푹 쉬는 하델에게 건배 요청이 수없이 들어왔다.
하델은 남부 특유의 시끄럽고 열정적인 음악과 달콤하고 향긋한 술에 차곡차곡 물들었다. 만탈락은 오드리의 도시이지만 동시에 어머니의 도시이기도 한데 하루라도 빨리 와보지 않은 게 아쉬워졌다.
다음 날, 머리가 깨질 것 같은 숙취 속에서 깨어나자마자 혀가 마비될 것처럼 달콤한 죽을 해장음식이라며 받기 전까지는. 어떻게 이 지역은 해장음식까지도 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