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0. 별종 혹은 선구자
「첫 번째가 있다는 건 두 번째, 세 번째도 있다는 뜻이다. - 나랍 속담」
후끈하게 뜨거운 공기에 눅진한 습기가 배어 있다. 바람이 얼굴을 적시는데도 조금도 시원하지가 않다. 오드리는 무의식적으로 손부채질을 하다 미간을 찌푸렸다. 가뭄이 없는 브란젤의 여름은 징그럽게 덥고 습했다.
“어쩐지, 여름휴가 기간에 브란젤의 귀족들이 만탈락에 휴가를 온다 했지.”
태양이 뜨겁기로는 만탈락이 더한데 왜 브란젤에서 만탈락까지 오는가 했더니 다 이 습기를 피해 온 거였구나. 새삼스러운 깨달음이었다.
“지금이라도 다른 곳으로 가는 건 어때요?”
“자꾸 꼬시지 마, 넘어가고 싶어지잖아.”
오드리는 레펙치오를 견디지 못하는 제 몸 상태가 원망스러워졌다. 생일 선물로 받았던 머리장식을 달고 있으면 이런 더위쯤은 아무 것도 아닐 텐데 말이다. 완벽하게 온도가 조절되던 기차에서 오랫동안 있었던 탓인지 더 견디기 힘들었다. 벌써부터 후회가 조금씩 고개를 들었다.
“이런 덥고 습한 도시는 버려두고 시원한 곳으로 가요. 리가 항구는 어때요?”
셰비언은 포기하지 않고 몇 번 더 시도했다. 때맞춰 오드리를 마중 나온 다이앤이 없었더라면, 오드리는 정말 그의 유혹에 홀라당 넘어가 버렸을지도 모른다. 북적대는 사람들 틈에서 오드리를 찾아낸 다이앤이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달려왔다.
“아가씨! 이게 대체 얼마 만에 뵙는 거죠? 건강해 보이셔서 기뻐요!”
“이런. 다이앤, 내가 반가운 건 알겠는데……. 내가 아직도 아가씨야?”
“하하……. 어떻게 불러드릴까요? 랄리우스 후작님? 가넷 남작님? 아니면, 사람들이 흔히 부르는 것처럼 레이디 오드리?”
다이앤이 발음한 레이디 오드리, 라는 말에는 뭔가 마력이 실려 있는 것 같았다. 북적이는 브란젤역에서 제 갈 길을 가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들에게 꽂혔다.
오드리는 그들이 자신을 알아보았다는 걸 단박에 깨달았다. 뜨거운 시선이 얼굴을 마구 핥아대는 게 느껴졌다. 비니타를 처음 만났던 그날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서로 눈치를 보느라 바로 달려들지 못해 유지 중인 평화가 아슬아슬했다.
“음……. 다이앤, 실수한 것 같지 않니?”
다이앤은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요? 굳이 이름이 불리지 않았어도 결국엔 비슷했을 거예요. 지금 브란젤엔 아가씨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없거든요.”
인파에 파묻혀 한 걸음 걷기도 어려웠던 기억을 떠올린 오드리가 셰비언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빨리 앞장서서 길을 열라는 뜻이었다. 셰비언이 반사적으로 오드리의 앞을 가로막았다. 눈을 이글대면서도 썰물처럼 물러나는 사람들을 보며 다이앤이 크게 감탄했다.
“아르젠 백작님께 이런 재주가 있는 줄은 몰랐어요.”
“아주 예쁜 모기향 같지 않니?”
“아가씨, 좋은 농담이긴 한데 아무래도 당사자 앞에서 하기엔 좀 부적절하지 않나요?”
“뭐 어떠니. 본인이 저렇게 뿌듯해하는데. 즐기게 두렴.”
오드리는 성능 좋은 모기향을 앞세우고 한껏 여유를 부리며 역을 나왔다. 마차의 창문으로 내다보는 브란젤은 오드리의 기억 그대로였다. 여전히 크고 바쁜 도시였다. 이렇게 더운 날씨에도 거리를 나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다.
“남부식 드레스는 올해도 유행인가 보지?”
“날이 워낙 더웠잖아요. 여름 초입까지도 계속 가뭄이라 건조하기도 했고요. 남부식 드레스를 입기에 제격인 날씨였죠. 아무래도 남부식 드레스가 브란젤에서 아예 여름옷으로 정착할 것 같기도 해요.”
“남부의 포목상들이 좋아하겠어. 만탈락의 상인들에게도 수매량을 늘리라고 해 볼까.”
오드리는 경제적 이득부터 계산했다. 만탈락이 로렐라이가 먹여 살리다시피 하는 도시인 건 맞지만, 그렇다고 다른 장사가 아주 없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다이앤의 기쁨은 오드리와는 좀 다른 곳에 있었다.
“이제 아가씨께서 무슨 양식의 옷을 입고 다니든 떠들어댈 사람은 없을 거예요.”
“내가 언제 그런 걸 신경이나 썼다고 그러니.”
“아가씨……. 아가씨의 평판과 곧장 연결되는 일인데 신경을 좀 써주시면 안 될까요?”
“내가 그런 걸 신경 쓰지 않게 하는 것이 바로 네 일이란다.”
다이앤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성을 흘렸다. 오드리의 차림새를 책임지는 사람으로서 겪어온 고뇌가 가득 담긴 신음이었다.
오드리에게 있어 의복이란 뭐든지 편하고 실용성 있는 것이 첫 번째 기준이고 과연 자리에 맞는 차림새인가 하는 건 두 번째 기준이다. 의복과 보석의 아름다움이나 유행 같은 건 도대체 몇 번째에 있는지 헤아리기조차 두렵다.
요즘 브란젤에서 남부식 드레스는 여름 드레스로 바뀌어 불리고 있었다. 다이앤은 단순히 유행시키는 걸 넘어서 아예 지역의 옷 양식 자체를 바꿔 버렸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떠들고 싶어 입이 간질거렸지만, 입 아프게 떠들어봤자 정말 자신의 입만 아플 거란 생각에 체념하고 말았다. 덕분에 마차는 오드리가 충분히 만족할 정도로 조용해졌다.
마차는 오드리를 가넷 남작저로 데려다놓았다. 작위와 함께 받았지만 한 번도 들어가지 못했던 저택은 널찍한 정원이 인상적인 좋은 집이었다. 비록 헨젤 백작저의 정원에 익숙해진 오드리의 성에는 영 차지 않는 정원이었지만 말이다.
안타깝게도 오드리에겐 그 부족한 정원일망정 천천히 돌아볼 시간이 없었다. 그녀가 오기를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던 릴리와 이디케를 위시한 하녀들이 산더미 같은 업무를 떠안겼기 때문이었다.
셰비언이 매우 불만스러워하는 티를 냈지만 오드리를 등에 업은 하녀들은 무서운 게 없었다. 오드리만 괜찮으면 다 괜찮았다. 다만 그들이 예상하지 못했던 게 있었으니, 바로 오드리의 체력 문제가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거였다.
오드리는 급한 서류 몇 가지를 해치우자마자 집중력을 잃고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녀의 강철 같은 체력에 익숙해져 있던 이디케는 앉은 채로 조는 오드리의 모습에 경악한 나머지 셰비언의 멱살을 잡을 뻔했다.
“다 나았다면서요?”
“누가 그래?”
“전보로는 그랬잖아요.”
“그거야 전보니까. 남들도 읽을 수 있는 전보에 오드리의 건강을 미주알고주알 적어 보냈다가 또 신문에 기사가 실리면 어떡해?”
셰비언이 이디케에게 신문 한 부를 내던졌다. 아이샤에게 받았던 그 신문이었다. 머리기사를 확인한 이디케의 낯이 딱딱하게 굳었다.
“오드리는 브란젤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갔어야 했어. 이 기사만 아니었어도 내 말을 들었을지도 모르지.”
“치안대는 이 빌어먹을 불법 신문 하나 못 잡고 뭐 하는지 모르겠네요.”
“잘 써먹을 땐 언제고 이제 와서 불평이야? 오드리의 회복에 만탈락이 영 도움이 안 되어서 온 거지 다 나아서 온 거 아니니까 일 시킬 생각 말고 쉬게 해줘.”
“큰일이네요.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이디케가 그녀답지 않게 당황해서는 발을 굴렀다. 웬만한 문제로는 아직 회복이 덜 됐다는 오드리에게 부담을 지우지 않았을 텐데, 요즘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오는 스트라스티는 이디케 선에서 감당이 안 됐다.
“아침마다 승마를 할 정도는 돼요?”
“승마보다 산책이 나아.”
한창 일에 치여 죽을 것 같을 때에도 아침 승마를 빼먹지 않으려 아등바등하던 오드리였다. 한데 시간이 있음에도 승마조차 하지 못할 정도라고 하니 어느 정도로 몸이 나쁜지 알 만했다. 겉모습만으로는 조금도 아픈 곳이 없는 것 같은데 말이다.
“……그래요, 그게 차라리 나을 수도 있죠. 네. 이해했어요. 아르젠 백작님, 당분간 아가씨가 대문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막아주실 수 있죠?”
“해줄 수야 있지만……. 왜?”
“손님 거절에 와병 중이라는 것만큼 좋은 핑계가 없어요.”
“좋아. 협조하지.”
셰비언은 기꺼이 이디케에게 협력을 약속했고, 한숨 자고 일어난 오드리는 책상 가득 쌓였던 업무가 송두리째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셰비언, 이거 그대의 소행이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오드리는 몹시 화를 냈지만 그런다고 도망친 업무가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오드리를 등에 업고 셰비언을 무시했던 하녀들은 이제 셰비언의 뒤에 숨어서 오드리의 화를 피했다.
릴리는 일이 많다며 헨젤가에서 돌아오질 않았고, 이디케도 예전에 업무용으로 구입했던 집에서 나오지 않았다. 다이앤은 그 둘에게 오드리의 말을 전하러 다녔지만 좋은 결과를 가지고 돌아오는 일은 거의 없었다.
기껏 브란젤로 돌아왔건만 만탈락보다 더 무료한 날들이 이어졌다. 찾아오는 손님도, 업무도, 아무것도 없었다. 승마도 외출도 금지라 할 수 있는 거라곤 정원 산책 정도인데 읽을거리도 없었다. 신문 한 장 들어오지 않았다.
“셰비언, 제발!”
“안 돼요.”
“내가 이렇게 부탁하는데도?”
“네, 안 돼요.”
“……그 얼굴로 웃지 마, 얄미워지려고 하니까.”
만탈락에서는 오드리를 데리고 수시로 저택 탈출을 감행했던 셰비언은 브란젤에 오자 락시 부인의 화신이 된 것처럼 굴었다. 갑갑함과 지루함에 미치기 직전에 이른 오드리가 담벼락을 타 넘을 시도까지 하는 데도 꿈쩍도 않았다. 거기에 적극적으로 오드리를 막기까지 하니, 오드리의 탈출 시도는 매번 허사가 되었다.
그렇게 이레가 지나고 나서야 오드리는 드디어 첫 번째 방문객을 맞았다. 라비린이었다. 그는 오드리의 하소연을 들으며 숨이 넘어가도록 웃었다.
“그래서, 효과는 있었어?”
“……분하게도.”
효과가 있다는 게 더 기막혔다. 운동이랍시고 한 건 숨쉬기 운동과 산책이 고작인데 고작 며칠 만에 기력이 돌고 근육이 살아났다. 분명 좋은 일이었지만, 그럴수록 만탈락이 얼마나 자신의 회복에 좋지 않았는지가 실감나서 입이 씁쓸해졌다.
“갑갑하더라도 견뎌. 어차피 기자들 때문에라도 너 못 나가. 이 집 담벼락에 기자가 얼마나 많이 달라붙어 있는지 알면 기겁할걸. 지금 브란젤의 신문사들은 네 소식을 한 줄이라도 더 싣지 못해서 안달이 나 있어.”
“젠장……. 넌 왜 온 거야? 날 놀리러 왔어?”
“설마. 널 놀리는 게 재미있긴 하지만, 오로지 그것 때문에 락시 양의 방어를 뚫는 건 좀 비효율적이지.”
라비린은 이디케의 방어를 도무지 뚫을 수 없었던 스트라스티 대신 온 거였다. 이디케는 오드리의 결정이 필요하다며 강철새에 대한 대답을 차일피일 미루기만 하고 있었다.
“카론 경이 불만이 많더라. 결정권은 너에게 있다고 하면서 왜 만나게 해주진 않느냐고.”
“카론 경? 카론 경이 왜 날 만나? 결정권 얘기는 또 뭐고?”
달콤한 과자와 꽃, 향기로운 차. 아직 뜨거운 늦여름의 햇살과 슬슬 찬바람이 섞이기 시작한 바람, 그에 사각사각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 언뜻 완벽하게 느껴지던 오후의 풍경은 연약한 도자기 접시처럼 깨지고 말았다.
라비린의 낯이 딱딱하게 굳었고 오드리의 눈썹은 파르르 떨렸다. 오드리는 뜨거운 차 한 모금을 꿀꺽 삼키고 나서야 말을 할 정신이 들었다.
“아무래도 내가 들어야 할 말이 꽤 많을 것 같은데……. 시간은 충분해?”
“필요한 만큼은 있어.”
입천장을 훌렁 벗겨 버릴 정도로 뜨거웠던 차가 싸늘하게 식고 찻주전자를 세 번이나 다시 채운 뒤에야 이야기가 끝났다. 그쯤엔 뜨겁게 달아올랐던 오드리의 머리도 식은 차만큼 차가워진 상태였다.
“이디케가 의사표시를 아주 제대로 했군. 내게 아예 정보를 주지 않는 선택을 하다니……. 강철새 군용화에 반대하는가 보지.”
“고작 그런 말로 넘길 생각이야?”
“못 넘길 건 또 뭐겠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디케인데.”
라비린은 너무나 차분한 오드리의 반응이 납득되지 않았다. 가장 신뢰하던 부하에게 뒤통수를 맞은 거나 다름없는데 어떻게 저리 멀끔한 표정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놀라운걸. 이디케라서 더 용납하지 못할 줄 알았는데 말이야.”
“별로……. 내가 없을 땐 이디케가 로렐라이의 수장이야. 그리고 난 아직 복귀를 안 했고. 수장이 수장으로서 판단한 건데 거기에 내가 무슨 말을 하겠어. 나는 나중에 복귀할 때 보고나 받으면 돼.”
“맙소사. 고작 두 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네 욕심은 다 만탈락에 버리고 오기라도 했어?”
“사람이 변하려면 두 달까지 필요하지도 않아. 그저 계기만 있으면 되지. 알다시피 내게 계기가 될 만한 일은 충분히 많았잖아.”
오드리가 순하게 웃었다. 치켜 올라간 눈꼬리가 아래로 떨어져 둥그런 호선을 그렸다. 큰일을 겪고 정말 성정이 바뀐 것처럼 보이는 미소였다. 목소리마저 산들바람처럼 부드러웠다.
“만탈락에서 쉬는 동안 느낀 건데 말이야, 내가 좀 쉰다고 로렐라이와 데멘사가 망하지는 않더라. 이디케도 있고, 너도 있고……. 그렇게 악을 쓰고 일하지 않아도 되는 거더라고. 내가 인복이 많아.”
“정말이지…….”
라비린이 한숨과 함께 쯧, 혀를 찼다. 그는 오드리의 변명을 조금도 믿지 않았다.
“거짓말은 통할 만한 사람에게 해.”
“응? 거짓말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난 아주 솔직한데.”
“임시일망정 락시 양이 단주이기 때문에 그녀의 결정을 존중하는 게 아니잖아. 락시 양의 결정이 네 뜻과 맞으니까 아무 말 안 하는 거지.”
“어머나……. 들켰나.”
배시시 웃는 얼굴이 얄밉기 그지없다. 라비린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왜 반대하는 거야? 강철새가 군용으로 쓰이는 건 피할 수 없는 결과야. 당장을 무사히 넘기더라도 단지 하나의 파도를 넘는 것에 불과해. 그럴 바엔 이득이라도 챙겨야지. 경제적인 면 외의 다른 이득도 많아. 잘 알고 있잖아.”
“알아. 지금 해야 그나마 이득을 챙길 수 있는 거. 억지로 뺏길 바엔 기회가 있을 때 협조하는 쪽이 훨씬 모양도 낫고 대우도 낫겠지.”
“근데 왜?”
“이 일에서 진짜 결정권자는 내가 아니니까.”
오드리는 차게 식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순한 척 짓던 미소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너 말이야, 공략 대상이 틀렸어. 넌 나나 이디케가 아니라 사하스바티를 설득했어야 해.”
이디케는 이상주의자가 아니다. 평화를 위해서는 무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고, 때로는 싫은 일도 해야 한다는 것도 잘 안다. 평범한 가정주부를 꿈꾸는 사람이니만큼 역사에 오명을 남기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그녀가 압박을 견뎌내며 사하스바티의 편을 들어주는 이유는 딱 하나였다.
억지로 시켜봤자 안 될 걸 아니까.
공교롭게도 워커도 사하스바티도 하기 싫은 일을 시키면 효율이 극악이 되는 경향이 있었다. 하고 싶은 일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버리고 쬐끔 남은 찌꺼기로 일을 하려니 그리 되는 것인데, 이디케가 아무리 닦달을 하고 쥐어짜도 조금도 변하질 않았다.
‘누가 천재 아니랄까 봐 못된 버릇이 든 거죠. 남들은 죽을 둥 살 둥 전력을 다해야 할 수 있는 일을 숨 쉬듯 쉽게 해내니 에너지를 자꾸 다른 곳에 쏟아요. 그렇다고 정말 일을 못하냐 하면 그것도 아니니 야단도 못 하겠고…….’
라비린도 로렐라이에서 보낸 시간이 있으니만큼 두 천재의 그런 습성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디케처럼 싫다니 어쩔 수 없지, 어차피 안 될 거 천재들의 호감이나 사야지 하고 손을 놓아버리기엔 그의 시선이 너무 먼 곳까지 닿아 있었다.
“사하스바티를 설득하는 게 제일 좋다는 거야 나도 알지. 하지만 그가 너무 완강하니까 너한테 온 거잖아. 미적대다 시기를 놓치면 이도저도 아니게 돼.”
“고집불통 천재를 어르고 달래며 설득하는 게 귀찮은 건 아니고? 그렇게 열심히 말하지 않아도 나는 너와 같은 풍경을 볼 수 있을 거라고 계산한 거잖아?”
“이크……. 내 속에 들어갔다 나오기라도 했어? 잘 아네.”
사하스바티는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일이니 이득이라도 챙겨야 한다는 얄팍한 말에는 조금도 설득되지 않았다. 그는 피할 수 있을 때까지 피하고, 정 피할 수 없는 순간이 오더라도 제 손으로는 하지 않겠다고 버텼다. 강철새 설계 및 제작에서 자신을 빠뜨릴 수 없다는 걸 잘 아는 터라 협박도 먹히지 않았다.
그러니 남은 방법은 챙겨야 할 이득이 단순히 경제적인 것만은 아님을 강조해서 그의 생각을 돌려놓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라비린이 군용 강철새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나올 기술이 바꿀 세상에 대해 열 가지를 말하면 사하스바티는 그에 대응하는 반박 열두 가지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솔직히 말해, 그와 입씨름할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지극히 피곤해졌다.
오드리는 이디케가 만들어준 퇴로를 사양치 않고 써먹었다.
“사하스바티를 설득해 내기만 해. 그럼 로렐라이는 군말 없이 협조할 거야.”
“아, 정말이지…….”
라비린은 잔뜩 미간을 구기고 한숨을 쉬었다. 반질반질하게 웃고 있는 오드리의 방어가 몹시 단단했다. 사실 억지로 깨려면 깰 수 있을 것 같기도 했지만 굳이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오드리는 긴 요양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비록 조건부이긴 해도 로렐라이의 협조 약속도 얻었겠다, 이 정도면 스트라스티에게 잡아먹히진 않을 것이다. 문제는 사하스바티가 제 말을 듣지 않을 게 뻔하다는 거였다.
“사하스바티와 나는 이미 한번 거하게 부딪쳤어. 이젠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귀를 막고 듣지 않을 게 뻔해. 오드리 네가 설득해 주면 안 될까? 사하스바티가 아무리 고집불통이라도 네 말은 들은 척이라도 할 텐데.”
“군용 강철새를 만들고 싶은 건 너지 내가 아닌데?”
“군용 강철새에 목을 매는 건 카론 경과 내 아버지지 내가 아냐.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기는 것과 피할 수 없다면 이득이라도 챙겨야 한다는 게 어떻게 같아? 너도 나랑 같은 생각이면서 괜히 까다롭게 굴지 마.”
“음…….”
“악명도 명성이야. 세상에 나쁜 면만 있는 사업이 어디 있어? 하물며 그게 군수산업이면 더하지.”
웃으며 동의하려던 오드리는 꿀꺽 말을 삼켰다. 예전 같으면 라비린의 의견에 완전히 동의했을 텐데 지금은 그렇다고 말하기가 약간 껄끄러웠다. 왜 그러느냐 물으면 무엇 때문이다 딱 잘라 대답할 수는 없지만 어쩐지 그랬다.
탈린의 반짝이는 눈이 자꾸 아른거렸다. 바란 적도 의도한 적도 없는 신뢰와 경모이지만, 그녀를 실망시켜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굳이 그 감정에 이름을 붙이자면 책임감에 가까울 것이다.
라비린은 오드리의 망설임을 의아하게 여겼지만, 그녀의 머릿속에 무엇이 들었는지는 짐작하지 못했다. 탈린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어버린 상태라 더더욱 그랬다. 그저 자꾸 뒤로 빠지려는 오드리의 태도가 불만스러울 뿐이었다.
“네가 이렇게 미적지근하게 굴면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사하스바티가 들을 리 없어. 직접 설득하는 게 영 내키지 않으면 조금만 도와줘. 아주 편을 들어달라고는 안 할 테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는 척만 살짝 해주면 돼. 그 정도면 사하스바티도 막았던 귓구멍을 좀 뚫겠지.”
“…….”
“그것도 싫어?”
오드리는 미묘한 죄책감에 라비린의 시선을 피했다. 애초 호구가 될 것을 자청한 건 라비린이고 오드리는 그에게 무엇도 요구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게 어떻게 모든 외면의 변명이 될 수 있겠는가?
“너무하네, 그래도 내가 네 목숨을 구했는데 그 정도도 할 수 없다니. 내가 너무 큰 걸 바라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말이야.”
“내 목숨을 구한 게 어디 너뿐인가? 내가 이번에 여기저기에 빚을 많이 졌지. 셰비언, 나랍인 용병들, 워커, 아이샤, 살론의 마법사들, 산트렘의 기사들…….”
“그래도 알 속에 들어가서 널 구한 건 나 하나뿐이잖아. 셰비언도 인정했어, 나야말로 샤를레아가 예상하지 못했던 단 하나의 변수라고. 내가 없었으면 아무리 셰비언이라도 널 구하는 게 그리 쉽지만은 않았을걸.”
라비린이 느긋하게 던진 말은 오드리의 평안을 와장창 깨뜨렸다. 처음에 오드리는 라비린이 농담을 한 줄 알았지만, 이내 진담이라는 걸 깨닫고 몹시 당혹하고 말았다. 그 동요가 어찌나 컸는지, 혼란이 오드리의 얼굴에 얼룩을 남겼다.
라비린이 오드리에게 손을 뻗었다. 크고 따뜻한 손이 오드리의 이마를 부드럽게 짚었다.
“안색이 왜 이래? 아직 회복이 덜 됐다더니 정원에 나와 있는 것도 힘든 거야? 얘기를 너무 오래 나눴나? 정 힘들면 들어가서…….”
“괜찮아!”
오드리가 라비린의 손을 쳐 냈다. 그 손에 힘이 어찌나 들어가 있었는지, 라비린의 손등이 금세 벌겋게 물들었다.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식은 차만큼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 미안해. 내가 당황해서…….”
“……아니. 멋대로 숙녀의 얼굴에 손을 댄 내 잘못이지. 나는 이만 가볼 테니까 넌 들어가서 쉬어. 힘겨웠을 텐데 티도 안 내고 내 상대 해주느라 고생했어.”
라비린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모자를 쓰는 손길이나 빙긋 올라가는 입꼬리나 매끄럽기 그지없었다. 미리 준비했던 것처럼 꺼내 낀 흰 장갑이 눈에 박혔다.
“사하스바티는 카론 경에게 맡길 테니 넌 신경 쓸 것 없어. 군용 강철새에 대한 열망을 수치로 따지면 난 카론 경에게 갖다 대지도 못하니, 진심인 사람이 나서야지. 그 두 사람이 동향인 거 알지? 카론 경이 알아서 잘 할 거야.”
“라비린…….”
“쉬어. 나오지 말고.”
오드리는 배웅은 됐다며 사양하는 라비린을 억지로 배웅하고 돌아와 셰비언을 찾았다. 셰비언은 넓은 정원 구석에 있는 연못가에서 몸을 웅크리고 자고 있었다.
가을이 머지않은 늦여름인데도 불구하고, 셰비언이 있는 연못 근처의 풍경은 한겨울을 연상케 했다. 연못 장식으로 쌓아둔 바위와 아직 초록색이 선명한 나뭇잎과 풀잎엔 하얗게 서리가 내렸고, 연못물은 둥그런 연잎을 품에 안은 채 얼어 있었다. 하녀들이 갖다 둔 게 분명한 요깃거리는 얼음덩이가 된 지 오래였다.
오드리는 살얼음이 끼어 버석거리는 흙을 밟으며 셰비언의 곁으로 다가갔다. 가까이 갈수록 공기마저 차가워져 입에서 하얀 입김이 나왔다. 레펙치오를 쓰고 있지 않아 선뜩한 추위가 느껴졌다.
셰비언은 미동도 없이 바위에 기대어 앉은 자세 그대로 잠들어 있었다. 오드리는 그의 옆에 바짝 붙어 앉아 햇살이 아롱진 긴 속눈썹을 구경했다.
당장 기억의 구멍을 채워야 한다는 조급함에 쫓겨 달려왔는데, 잠든 셰비언을 보자 돌연 마음이 간질간질해지며 여유가 생겼다. 까짓 기억의 구멍 따위 좀 늦게 메우면 어떤가. 오늘의 해가 아직도 기운차게 햇빛을 뿌리고 있는데 뭐가 그리 급하단 말인가.
‘만지면 깨겠지?’
손가락이 간질간질했지만, 오드리는 꾹 참아냈다. 셰비언은 숨도 쉬지 않는 것처럼 자는 것답지 않게 은근히 감각이 예민했다.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뺨을 찌른다거나 속눈썹을 쓰다듬으면 단박에 깨어날 것이다.
저명한 조각가가 공들여 만들어낸 듯한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시간은 잘도 흘러갔다. 입 한번 떼지 않고 조용히 구경하던 오드리의 눈꺼풀에도 졸음이 내려앉기 시작할 무렵, 옅은 분홍빛 입술이 달싹거리며 숨을 뱉었다.
“……오드리.”
오드리는 부름에 답하지 않고 숨을 죽였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볼 때, 눈꺼풀을 열지 않고 제 이름만 부르는 건 백발백중 잠꼬대였다. 이때 깨우지 않고 조금만 더 기다리면 낯간지러운 사랑 고백도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좀 달랐다. 셰비언이 눈을 감은 그대로 씩 미소를 지은 것이다. 기대에 차 설레는 가슴을 누르고 있던 오드리의 낯이 부끄러움으로 시뻘겋게 물들었다.
“깨, 깨어 있었어?”
“네.”
셰비언이 자던 자세 그대로 눈만 뜨고 웃었다. 얼음 낀 강처럼 아름다운 눈동자가 오드리를 비추며 부드럽게 휘어졌다. 오드리는 차게 식은 손으로 열심히 얼굴의 열기를 가라앉히려고 노력했지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언제부터?”
“흙 밟는 소리가 들렸을 때부터요.”
“뭐야, 처음부터 깨어 있었네……. 그런데 자는 척은 왜 하고 있었던 거야? 날 놀리려고?”
볼을 퉁퉁 부풀리고 불만스레 묻는 얼굴이 어찌나 귀여운지. 셰비언은 충동적으로 팔을 뻗어 오드리의 목을 휘감고 제게 끌어당겼다. 오드리는 끌려가지 않으려고 버텼지만 체력도 근력도 부족한 몸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그녀는 속절없이 끌려가 그의 위에 쓰러졌다. 맞닿은 가슴에서 심장이 뛰었다. 셰비언이 쯧, 혀를 찼다.
“오드리 몸이 너무 차요……. 이럴 줄 알았으면 장난은 치지 말고 그냥 일어날 걸 그랬어요.”
“그러게. 그대가 정말 자는 게 아니라 자는 척만 하는 거란 걸 진작 알았으면 그냥 구경만 하진 않았을 텐데 아쉽게 됐지.”
“어라. 뭐가 아쉬운지 물어봐도 돼요?”
빤히 짐작하면서 모르는 척 묻는 표정이 앙큼하기 짝이 없다. 오드리는 꾸물꾸물 자세를 바꿔 셰비언의 허벅지를 깔고 앉아서는 그의 턱을 잡아 고정했다. 오드리가 몸을 기울이자 두 사람의 코가 닿을 듯 가까워졌다. 기대에 찬 숨결이 뒤섞였다.
“그야 뻔하잖아. 이 예쁜 입술을 확 훔쳐 버렸을 텐데.”
“도둑이 오드리라면 언제든 환영인데요. 지금이라도 훔쳐 갈래요?”
만약 목소리에도 맛이 있다면, 셰비언의 목소리는 씁쓸하면서도 새콤달콤한 자몽 맛에 가까울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먹은 것도 없는데 갑자기 침이 고일 리 없다. 하지만 살짝 핥아본 입술은 자몽 맛보다는 달달한 설탕 맛에 가까웠다. 너무 달콤한 나머지 쓴맛이 약간 느껴지는 진한 설탕물 맛.
맡아질 리 없는 단내, 느껴질 리 없는 단맛.
단단히 홀렸구나, 오드리는 스스로에게 한탄하며 셰비언의 눈을 가렸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셰비언의 휴식을 방해한 최초의 목적을 까맣게 잊어버릴 것 같았다. 그래봤자 손으로는 미처 가려지지 않는 코와 입술이 하도 예뻐 자꾸 눈길이 갔지만 적어도 아까보단 나았다.
셰비언이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느슨하게 묶어놓은 은발이 한쪽 어깨를 타고 흘러내렸다. 오드리는 아예 그의 어깨 너머에 시선을 고정하고 헛기침을 했다.
“조금 전에 라비린이 다녀갔어.”
“음? 이디케가 막지 않았어요? 초대받지 않은 손님은 죄다 거절할 거라고 분명히 얘기했었는데?”
“지금 라비린은 로렐라이와 데멘사를 책임지는 2인자 역할을 하는 중이잖아. 단순히 명목상의 직위라 하는 일이라곤 얼굴마담에 가깝긴 하지만 아주 손님이라고 할 수는 없는 상태지. 이디케도 막을 구실이 없었을 거야.”
“이런. 사자가 이빨이 아니라 머리를 썼군요. 상단에 임시로나마 자리를 마련해 줬으면 그걸로 만족할 것이지 퍽 귀찮게 구네요. 오드리가 빨리 나아서 복귀하는 게 제일 좋은 대책이라고 하던 게 이제 이해가 가요.”
“왜 왔는지는 안 물어봐?”
“내가 궁금해해야 하는 일인가요? 오드리, 내가 필요하면 그냥 필요하다 말만 해요. 그게 뭐든 나는 기쁘게 협력할 테니까요.”
“그대의 입술이 왜 그리 달짝지근한가 했더니, 듣기 좋은 달콤한 말을 줄줄이 뱉는 입술이라 그랬던 모양이야.”
오드리는 남는 손으로 셰비언의 입술을 쭉 잡아당겼다가 놓았다. 모양 좋은 입술이 정원에 남은 장미처럼 붉어졌다.
“라비린이 그러더라. 자신은 샤를레아가 예상하지 못했던 단 하나의 변수라, 자신이 아니었다면 아무리 그대라도 날 구하기는 힘들었을 거라고.”
“어허, 라비린 그 녀석 낯짝이 많이 두꺼워졌네요.”
“그대야말로 낯이 많이 두꺼워졌어. 내게 둥지의 일은 기억할 필요가 없다고 누누이 말한 게 누구였더라? 덕분에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오드리는 샤를레아의 둥지에서 겪었던 일, 그중에서도 알에 끌려 들어가 겪은 일들은 거의 기억하지 못했다. 어쩌다 떠올리려 하면 책장 대부분이 뜯겨나간 책을 펼치고 내용을 짐작하려 시도하는 것처럼 아득해졌다.
“좋은 일도 아닌데 그걸 뭐 하러 기억하나요? 잊어버려요.”
“그래도 알 일은 알아야지. 내 목숨을 구해줬는데 몰라서야 되겠어? 라비린은 그런 걸로 내게 거짓말하지 않아.”
셰비언은 오드리가 라비린에게 비추는 신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드리가 셰비언의 미간을 꾹꾹 눌러 폈다.
“라비린은 그대를 친구로 여기는데, 그대는 왜 그리 라비린을 싫어해? 둘이 친구 맞아?”
“싫어하지 않아요. 라비린은 좋은 친구죠. 성격도 시원하고, 말도 잘 통하고. 하지만…….”
“질투도 적당히 해야 예뻐 보인다는 걸 내가 굳이 설명해 줘야 할까?”
“감정은 그리 쉽게 통제되지 않는다는 말로 대답할게요.”
오드리는 일취월장한 셰비언의 말주변에 몹시 감탄했다. 하지만 감탄은 감탄이고, 대답은 대답이다. 등줄기를 살살 간질이자 셰비언이 몸을 떨며 웃었다. 그는 오래지 않아 두 손을 들고 항복했다.
“내가 아는 건 오드리가 겪은 일들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할 거예요. 하지만 그거야말로 오드리가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겠죠.”
셰비언의 이야기는 현실성이 없었다. 마치 어린 시절 침대에 누워 유모에게 듣던 옛날이야기나 소설 속 용사의 모험담 같았다.
못된 용의 함정에 빠져 열두 살 소녀가 된 인질과 인질을 구하기 위해 용감하게 검을 든 기사와 마법사, 소녀를 등에 태우고 석양이 불타는 사막을 걷는 사자, 그들을 환영하듯 품을 열고 맞아준 오아시스.
자진해서 함정에 걸어 들어온 마법사는 물에 빠진 소녀를 건져 내고 하늘을 무너뜨렸으며, 사자의 모습에서 벗어난 기사는 마지막 힘을 다해서 못된 용의 숨통을 끊었다.
온 정신을 집중해 듣던 오드리는 세 사람이 마침내 무사히 함정에서 빠져나오는 대목에 이르러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기억이 없다 보니 이야기를 들어도 영 남의 얘기 같기만 하고 실감이 안 났다. 그녀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자신이라는 걸 퍼뜩 생각해 내고 식은땀을 흘렸다.
“……이 얘기, 나만 몰랐던 거야?”
“글쎄요……. 나는 어디 가서 떠들고 다니지 않았어요. 하지만 라비린도 그랬을지는 모르겠네요. 딱히 입막음을 한 적도 없고, 할 필요도 느끼지 못했고……. 아마 왕실에 보고 정도는 했겠죠. 오드리, 왜 그래요?”
셰비언이 제 위에 엎어진 오드리를 살살 흔들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오드리는 팔다리를 늘어뜨리고 기운 없이 중얼거렸다.
“셰비언……. 멜브란트는 말이지, 타우레드 후작 부부의 연애담이 로맨스 소설로 변주되어 몇십 년 동안 팔리는 나라야.”
“네, 그건 나도 알아요. 근데 그게 왜요?”
“그대가 내게 들려준 이야기는 이제 멜브란트의 어린아이들이 어머니와 유모에게서 밤마다 들을 얘기가 됐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얘기지.”
오드리는 자신의 이름을 딴 소녀가 겪는 흥미진진한 모험담이 멜브란트의 서점에서 팔리는 광경을 상상했다. 잠자리에 누워 이야기를 보채는 아이를 위해 그 모험담을 꺼내드는 어른들의 모습도. ……놀랍도록 현실감 넘치는 상상이었다.
장담하는데, 조만간 오드리가 겪은 적 없는 이야기도 시리즈로 출간되어 팔릴 것이다. 셰비언, 라비린, 오드리. 사랑과 우정으로 얽힌 이 세 사람의 관계도가 복잡하기 그지없으니 어쩌면 막장 연극의 소재가 될 수도 있다. 이걸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멜브란트 전역이 다 아는 이야기를 나만 몰랐군.”
“그 정도인가요?”
“그 정도야.”
오드리의 설명에도 셰비언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오드리는 그런 셰비언의 코를 잡고 살짝 비틀었다.
“내가 알아야 할 일 맞았잖아. 잊어도 좋을 만한 게 아니었어. 그대와 라비린 두 사람이 날 위해 목숨을 걸었는데 어떻게 그냥 잊으라고 한 거야?”
“알아주길 바라고 한 일이 아니었는걸요. 오드리가 이렇게 무사한 걸로 충분해요.”
“내 마음이 충분치 않아.”
오드리는 매끄럽게 미소짓던 라비린의 얼굴을 떠올렸다. 한숨이 났다. 아무래도 조만간 사하스바티를 설득하러 가야 할 성싶었다. 그 고집불통 천재는 동향 사람이라고 특별히 무른 태도를 보일 사람이 아니니, 스트라스티는 문간에서 걷어차이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다시는 이러지 마.”
“네?”
“내가 알아야 할 일의 범위를 네 멋대로 판단해서 제한하지 마.”
조금 전의 다정함은 간데없이 엄격한 태도였다. 셰비언은 곧장 유순한 양처럼 눈을 내리깔고 네, 하고 대답했다.
오드리는 곧장 마음이 약해졌다. 더 야단치려던 마음은 눈 녹듯 사라지고 풀죽은 모습이 그저 안쓰럽게만 느껴졌다. 그녀는 그런 자신을 향해 쓴웃음을 지었다.
“……이거 큰일이야.”
“뭐가요?”
“그대가 대상이 되면 내 기준이 흐물흐물해져. 그대를 저울에 올릴 수가 없어. 예전부터 그런 기미를 느끼긴 했는데, 이렇게 상황을 맞닥뜨리니 더욱 잘 알겠어.”
사랑에 눈이 멀어 나라를 말아먹은 왕의 심정을 이렇게 이해하게 될 줄이야. 오드리는 셰비언이 무슨 사고를 치든 사과 한 번, 눈웃음 한 번에 사르르 녹아버리는 자신을 상상하고 몸을 떨었다. 헛된 망상으로 치부하기엔 너무나 그럴듯했다.
“나는 그대에게 너무 약해.”
“나 참, 누가 할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나야말로 오드리에게 너무 약해서 큰일이에요.”
오드리가 흥, 코웃음을 쳤지만 셰비언은 한점 거짓 없는 진심이었다. 지금도 보라, 브란젤에 온 지 겨우 이레 만에 편안한 휴식은 멀리 날아간 것 같은데도 다른 지역으로 가자는 말은 꺼내지도 못하고 있는걸.
다음 날, 오드리의 지시를 받은 다이앤이 브란젤의 서점가 일대를 돌며 대량의 책을 구입했다. 장르는 매우 다양했다. 흥미진진한 모험담부터 고전적인 로맨스, 성공적인 장사 요령과 자금운영을 가르치는 실용서, 여름 드레스를 멋지고 예쁘게 입기 위한 지침서……. 전부 오드리를 소재로 한 것들이었다.
오드리는 제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양과 범위에 완전히 기가 질리고 말았다. 표지에 제 얼굴을 박아넣은 책이 이렇게나 많은데 왜 진작 알지 못했는지 어이가 없었다. 만탈락에서 받아보던 신문에도 분명 광고가 실려 있었을 텐데 말이다.
“전부 사 오지는 못했고, 분야별로 잘 팔리는 것만 추려서 사 왔어요.”
“날 이렇게 잘 써먹고 있을 줄은 몰랐어. 내가 이렇게 잘 팔리는 소재였나?”
“옛날이야기 속에서 용에게 납치당한 공주님 포지션인데 어떻게 인기가 없어요? 심지어 구출에 나선 용사 둘 모두와 연애를 해 본 인물이잖아요. 물론 오스미다 전하와 라디아타 왕비님의 탓도 있지만요.”
다이앤이 몇 권의 책을 골라 내놓았다.
“두 분께서 공개적으로 추천하거나 읽는 모습을 노출한 책이에요.”
“미친.”
“아가씨, 고운 말 쓰셔야죠!”
“지금 나한테 그럴 정신이 있을 것 같니?”
왕족이 외부에 자신의 행보를 노출할 때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기 마련이다. 하물며 일찌감치 오드리를 제 아래로 끌어들인 오스미다의 행보인데 어떻게 오드리가 긴장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오스미다는 오드리의 일리 있는 걱정과 긴장을 아주 귀여워하며 웃었다.
“남작에게 해 되는 일을 해서 내게 무슨 이득이 있다고?”
“이득이 있으면 해 되는 일도 기꺼이 하실 것 같아 그러지요.”
“말하는 것만 보아서는 오히려 담이 더 커진 것 같은데 말이지. 남작이 생각하기에도 그렇지 않은가?”
오드리는 얼른 대답하지 않고 딴청을 부렸다. 다이앤이 기껏 골라 내민 책을 펼쳐 보지도 못하고 불려온 참이었다. 라비린이 다녀가고 하루밖에 지나지 않아 부른 걸 보면 그동안 얼마나 애를 끓이며 부를 기회를 노려왔는지 알 만했다. 이런 때가 아니면 언제 이런 객기를 부려보겠는가.
“다른 게 아니고, 그동안 남작이 내게 지원받은 것들에 대한 값을 치러야 할 때가 되어서 불렀다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까맣게 잊고 있던 어음의 만기가 코앞에 닥쳤다는 걸 깨달았을 때의 심정이 이런 것일까 싶었다.
“남작이 사람들의 시선을 좀 끌어줘야겠어. 다른 화제를 죄다 묻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크고 성대하게 부탁하네. 기간은 길수록 좋아. 여러 가지 일을 연달아 터뜨려 주게.”
“네?”
“예를 들자면, 레펙치오의 보급화 발표라든가.”
“…….”
“발톱섬에 상륙했던 이들이 레펙치오의 성능을 몸소 증명했잖나. 용암 위를 걸어도 멀쩡했다지? 덕분에 요즘 레펙치오에 대한 관심이 아주 뜨거워. 이럴 때 가격을 낮춰 보급하겠다는 발표를 하면 대단한 관심을 받을 수 있을걸세.”
“일단 발표를 하면 지켜야 하는데요. 거짓말쟁이 이미지를 뒤집어쓸 수는 없어요.”
“지키면 되지.”
“싸구려 보석, 질이 나빠 상품 가치가 떨어지는 보석을 재료로 쓴다면 어느 정도 가격 인하는 가능할 거예요. 장신구로서의 세공도 그만둔다면 더 떨어질 수도 있겠죠. 과연 전격적인 보급화 발표를 할 수 있을 정도가 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요.”
“흑요석으로 레펙치오를 만들 수 있다면 당연히 도자기로 만들 수도 있을 것이고, 어쩌면 유리로도 만들 수 있겠지. 아닌가?”
오드리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부채를 쥔 손등에 푸른 핏줄이 곤두섰다. 커다란 망치로 얻어맞은 것처럼 뒤통수가 얼얼했다. 가스트로에게조차 숨긴 사실이 어디에서 어떻게 새어나갔는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자투리 시간에 제집에서 연구에 매진하던 아이샤가 흑요석 레펙치오를 만들어냈고, 비니타는 우연히 발견한 흑요석 레펙치오를 훔쳐서 착용했으며, 비니타를 눈여겨보았던 스트라스티는 제가 본 것을 오스미다에게 흘렸다.
이 일련의 흐름 모두가 기막힌 우연으로 이뤄진 것이었다. 오드리는 당연히 알 수 없었다.
“……재료로 보석을 고집한 건 내구성을 담보하기 위해서…….”
“일회용 레펙치오가 나오면 좋아할 사람 많을걸세. 용도가 엄청나게 다양해질 테니 찾는 곳도 그만큼 많을 것이고.”
“그야 그렇겠죠…….”
오드리는 조만간 로렐라이의 단주로 복귀하려던 계획을 슬쩍 뒤로 미뤘다. 늘 인력 부족에 시달리고 있는 로렐라이지만, 이디케라면 자신이 부재하더라도 충분히 잘할 것이다.
“분명한 차이를 두고 판매한다면 보석 장신구 형태를 띤 기존의 레펙치오의 가치를 지금과 비슷하게 유지하는 것도 그리 어렵진 않을 거야. 만약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면 개인적으로 노하우를 전수해 줄 용의도 있다네. 언제든 말만 하게.”
오스미다는 일테니아 후작이었고, 동시에 멜브란트 전역에 다양한 도자기를 공급하는 거대 사업자였다. 그런 그녀에게서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면 마땅히 기뻐해야 하거늘, 오드리는 그리 내키지 않았다. 달콤한 말 속에 칼을 품은 사람이 오죽 많던가.
“무얼 위해 그렇게까지 하시나요? 제가 시선을 끄는 와중에 무엇을 하시려고?”
“젊은 시절의 내가 끝내 해내지 못한 것들을 위해 반석을 깔까 하네.”
오드리는 그저 혼란스러웠다. 오스미다의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왕비에게 산트렘의 기사 일부를 공식적인 호위로 붙여줄걸세. 산트렘의 기사들 중 여기사 몇 명이 그 역할을 맡게 되겠지. 행정절차는 이미 끝내두었고 이제 실행만 남았어.”
“……네?”
“남작조차 놀라는 걸 보니 내 결심이 파격적으로 들리기는 하는 모양이야.”
오드리는 오스미다에 얽힌 전설 같은 일화를 떠올렸다. 귀족 상속법 개정에 끝내 실패하자 크게 화를 내며 손수 도끼를 들고 와 회의장 탁자를 쪼개버렸다던가. 처음 들었을 때는 사람들이 참 과장이 심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제 앞에서 빙긋 웃고 있는 오스미다를 보니 어쩌면 그것조차 순화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패로부터 배우는 사람만이 실패에서 벗어날 수 있는 법이지. 나는 혼자였기에 실패했다네. 그래서 이번엔 혼자가 아니라 여럿으로 도전해 볼 생각이야.”
“송구합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나라고 처음부터 일테니아 후작위를 갖고 싶어 하고 귀족 상속법을 뜯어고쳐야겠다고 생각했겠나? 뭐든지 브란젤이 최고인 줄 알았던 꽉 막힌 고집쟁이를 바꿔놓은 사람들이 바로 산트렘의 기사들이라네. 그들과의 접촉이 늘어날수록 변하는 사람들도 늘어날 거야.”
“그건 너무…….”
“너무 꿈같은 소리라고 하고 싶은가?”
오드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스미다는 그런 그녀를 나무라지 않고 그저 웃었다. 이를 데 없이 관대한, 세간에 알려진 평판과는 전혀 다른 태도였다.
“두고 보게. 인간은 묘한 짐승이야. 다 같이 모자란 건 참을 수 있어도, 나만 모자란 건 참지 못하거든. 산트렘의 여기사들이 당연히 가문을 잇고 검을 익히고 재산을 모으는 걸 보면서 왜 나는? 이라고 생각할 사람은 아주 많을 거야.”
“타우레드 후작부인은요? 한때 그분의 별명은 산트렘의 공주였어요.”
“후작부인이 겪은 일은 안타깝게 생각한다네. 하지만 말이야, 후작부인과 산트렘의 여기사들의 처지가 같은가? 그들은 결혼해서 정착하러 온 게 아니라 명예로운 임무를 수행하러 온 것이고 돌아갈 곳도 마련되어 있어. 그리고 무엇보다 레이디 오드리, 그대가 있지.”
오드리를 꼬박꼬박 가넷 남작이라고 불러주던 오스미다가 처음으로 언급한 별명이었다. 그저 별명일 뿐인데 어쩐지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산트렘의 기사들과 레이디 오드리의 사고방식을 이루는 바탕은 놀랍도록 공통적이야. 출신지가 확실하고 외견상의 차이점이 두드러지지 않았다면 동향이라 의심했을지도 모를 정도라네.”
“…….”
“레이디 오드리에 대한 사람들의 호감은 산트렘의 기사들에게 훌륭한 방패가 되어줄걸세.”
“함께 욕받이로 전락할 수도 있죠. 저는 이쪽이 더 현실성 있게 느껴집니다. 사랑보다 미움이 쉽고, 공감보다 혐오가 쉽지 않던가요. 아래에서 기어 올라가는 이야기만큼이나 인기 있는 것이 높은 자리에 있던 사람이 굴러떨어지는 이야기죠.”
“사람들에게 가문의 성이나 누군가의 부인이 아니라 이름으로 불리는 여자는 레이디 오드리가 처음이야.”
“그건 그냥 별명일 뿐이에요. 그것도 나랍 출신 아이가 멋모르고 붙인 거고요.”
“그 나랍 출신 아이가 바로 비니타 아쥬시 양이지. 레이디 오드리가 재능을 알아보고 거리에서 주워와 스승을 만나게 해준, 멜브란트 마법계의 앞날을 걸어볼 만한 천재.”
“그건 셰비언이…….”
“아르젠 백작은 오로지 레이디 오드리를 위해서만 움직인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어. 그대의 관심이 아니었으면 비니타 양은 여태 길바닥을 헤매고 있었을지도 몰라. 비니타 양도 그걸 아주 잘 알고 있다네. 내게 아주 선언하듯 말하더군, 자신은 언제든 레이디 오드리의 편이 되어줄 거라고. 그러니 그대는 너무 걱정 말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하게나.”
“비니타 양은 아직 어린애인데 대체 언제 만나신 건가요…….”
오드리는 오스미다가 대체 어느 정도까지 준비를 마치고 자신을 불러들인 것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무슨 말을 꺼내든 다 대비가 되어 있을 것 같았다. 체념 섞인 한숨이 흘러나왔다.
“알겠습니다. 생각해 보면 저는 진작 전하의 체스말이 되기로 약속한 몸이라 이리저리 따지고 잴 처지가 아닌데 주제넘게 굴었습니다. 전하께서 필요하신 대로, 마음대로 쓰시지요.”
“쯧……. 왜 그리 심통 난 표정인가? 누가 보면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시키는 줄 알겠군.”
그럼 이게 억지가 아니고 무언가? 오드리는 너무 기가 막혀 할 말을 잊었다.
“왕비는 그대의 절친한 친구가 아니었던가? 호위기사로 산트렘의 여기사를 쓴다는 걸 공식화하면 굉장한 공격이 들어올걸세. 나는 그대가 왕비를 위해서라도 기꺼이 하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말이야.”
“저는 제 친구를 믿습니다. 왕비님은 저를 방패로 삼아서 몸을 피할 생각은 안 하셨을 거예요. 버틸 수 있다 생각하셨으니 동의하셨겠죠. 만약 거기에 제 도움이 꼭 필요하다 싶었으면 진작 얘기하셨을 테고요. 그러니 이건 전적으로 전하의 의견……. 설마 왕비님의 동의를 얻지 않고 진행하시는 일이었나요?”
“그럴 리가. 왕비의 동의는 확실히 얻었다네. 그나저나 정말 절친한 친구가 맞긴 맞군. 서로를 아주 잘 알고 있어.”
“글쎄요. 저는 좀 자신이 없어지려고 해요. 왕비님께서 이렇게 손해는 확실하고 이득은 적어 뵈는 일에 동의한 이유를 영 모르겠거든요.”
“글쎄……. 나로서는 그대가 그 부분을 모르겠다고 하는 게 놀랍군.”
오스미다가 자세를 고치고 오드리와 눈을 맞췄다. 몹시 부드럽고 다정한 시선이었으나, 오드리는 단단한 사슬에 꽁꽁 묶인 듯 꼼짝할 수가 없었다.
“나랍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네. 첫 번째가 있다는 건 두 번째, 세 번째도 있다는 뜻이라고. 하지만 그 말은 틀렸어. 두 번째가 없다면 첫 번째는 첫 번째가 될 수 없어. 그건 그저 유일함으로 끝나는 거라네. 유일하다는 건 좋게 말해 특별하다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유별난 별종이라는 것이지.”
“…….”
“이런 말 들어본 적 없나? 혼란 속에 멈춰 선 한 명은 점이지만, 그 뒤에 누군가가 서면 점은 선이 된다고.”
“…….”
“나는 멜브란트에서 여성으로서 작위를 받은 첫 번째 사례일세. 그대가 가넷 남작이자 랄리우스 후작이 되어주었기에 첫 번째가 될 수 있었어.”
오드리는 생각했다. 이 말은 앞뒤가 바뀌었다고. 오스미다라는 선례가 있었기에 자신이 그나마 쉽게 작위를 얻은 것이다. 만약 그녀의 선례가 없었다면 랄리우스 후작위를 두고 가스트로와 흥정을 벌이는 일도, 헨젤 백작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조용히 작위를 물려받는 일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레이디 오드리가 두 번째가 되었으니 앞으로 세 번째, 네 번째도 나올 수 있겠지. 나와 왕비는 그때가 오기를 즐거이 기다리고 있다네. 호위기사 문제는 그 즐거운 기다림을 맞이하기 위해 놓는 디딤돌 같은 것이지.”
“전하, 저는…… 그런 일에는 관심이 없어요. 저는 고작 저 하나만을 생각하기에도 벅찬, 작은 사람입니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엔 그대는 너무 많은 것들을 바꾸어놓았네만.”
“제가 의도한 게 아니에요.”
“그런가?”
오스미다는 새침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오드리를 귀엽게 바라보았다.
“강철새 연구에 대한 후원이나 로렐라이의 자금 유동성을 바닥까지 떨어뜨리면서까지 단행한 전보 보급도 변화를 의도한 행동이 아니었다고 할 텐가?”
“…….”
“그럼 좀 다른 이야기를 해 볼까. 겉모습이 아무리 인간과 같더라도 아르젠 백작은 용이야. 용은 자손을 남길 수 없는 모양이던데, 그를 반려로 맞이해서 가넷 남작가는 무슨 수로 이어나갈 건가? 헨젤가와 사이가 대단히 나쁜 걸로 아는데 과연 그쪽 집안에서 아이를 내어주겠나? 만약 핏줄에 관계없이 적당해 뵈는 아이를 입양하겠다고 하면 어마어마하게 큰 폭풍이 몰아닥칠 텐데 어쩔 셈이야?”
“후계 일은 제가 알아서 합니다. 무슨 폭풍이 오든 헨젤가의 아이는 받지 않을 거고요. 하나가 아니라 열을 준대도 싫습니다. 한데 갑자기 그 얘기는 왜 꺼내시나요?”
“그대가 두 번째로서 혜택을 입기도 했지만 첫 번째이기에 감당해야 할 일도 많다는 걸 친절히 일러주는 거라네. 유별난 별종이 되겠는가, 아니면 시대를 앞선 선구자가 되겠는가? 이게 그대의 앞에 놓인 유일한 선택지라네.”
당연히 별종보다는 선구자가 낫다. 감당해야 할 일이 몇 배는 많고 힘들어서 그렇지. 오드리는 벌써 반 이상 오스미다에게 넘어간 자신을 깨달았다.
“전하께서 귀족 상속법 개정에 실패하셨던 이유를 모르겠어요.”
오스미다가 소녀처럼 웃었다.
“분명 제 인생인데, 어째 한 번도 상상해 보지 않았던 방향으로 흘러가네요.”
“본래 그런 게 인생이라네. 뭐 하나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없지. 하지만 그게 바로 인생을 사는 재미가 아닌가?”
“저는 제가 계획한 대로 살고 싶었는데 말이에요.”
“세상에서 제일 쓸모없는 게 바로 인생 계획일세. 살면서 정말 중요한 것만 놓치지 않아도 성공적인 인생이야. 이를테면, 정략결혼을 해치워 버리기 전에 진짜 사랑을 만난 행운을 그냥 흘려버리지 않았다든가 하는 일 말일세.”
오스미다가 오드리의 반지를 보며 눈을 찡긋거렸다. 발갛게 뺨을 물들인 오드리가 슬그머니 제 손가락을 가렸다.
“전하, 저는 무도회장이 아니라 국왕전하의 정전에 서기를 원해요. 랄리우스 후작이자 가넷 남작으로서 작위에 어울리는 역할을 하길 원합니다. 제 꿈이 이뤄질 수 있을까요?”
“맙소사. 헨젤 백작이 들으면 뒤로 넘어가겠구나 싶은 포부로군 그래? 정전에서 백작을 만나는 게 두렵지는 않은가?”
“그런 게 무서웠으면 제가 남작 작위는 어떻게 받았겠으며 로렐라이는 어찌 만들고 운영했겠어요?”
“과연. 납득할 수밖에 없는 대답이야. 아마 알고 꺼낸 말이겠지만, 국정회의 탁자에 일테니아 후작의 자리가 있다네. 계속 참석하지 않을 거면 슬슬 내놓으라는 걸 어찌해야 하나 했는데 마침 잘되었군. 레펙치오 보급화 발표 정도의 공훈이면 내 대행으로 추천하기에 부끄럽지 않겠어.”
화제가 다시 레펙치오로 돌아왔다. 오드리는 한숨을 내쉬었으나, 아까보다는 표정이 훨씬 밝고 화사했다. 손에 넣으려면 아직 멀었다고 생각했던 꿈이 코앞에 다가온 셈이다. 의욕이 솟구쳤다.
더구나 오스미다가 제시한 목표는 오드리가 강철새에 투자를 시작한 첫 번째 동기와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었다. 그때 오드리는 헨젤 백작에게 본때를 보여주고 싶었다. 그가 무시한 여자의 손으로 세상을 바꾸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전하. 저는 제 몸뚱이 하나만의 안위와 영달을 바라는 사람이라, 때때로 전하의 뜻에 어긋나는 짓을 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어느 때든 저를 첫 번째로 만들어줄 두 번째 사람을 생각하며 움직이겠다고 약속하겠습니다.”
“그 약속, 아주 마음에 들어.”
그때 오드리는 아직 몰랐다. 그 약속이 그녀의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원칙이 될 줄은. 만약 그녀에게 앞날을 예지하는 재주가 있었더라면, 범위는 줄이지 못했더라도 적어도 기간 제한 정도는 걸었을 것이다.
오스미다는 헨젤 백작이 오드리의 포부를 들으면 뒤로 넘어갈 거라고 말했으나, 소식을 접한 그는 의외로 몹시 차분한 태도를 보였다. 자신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 오드리가 끝내 남작위를 받을 때 이미 이런 날이 올 줄 짐작했다는 거였다. 화를 참지 못한 건 헨젤 백작이 아니라 하델이었다.
이디케의 방어를 뚫어낸 하델이 가넷 남작저에 들어왔을 때, 하필 오드리는 오랜만에 윈디를 타고 정원을 산책하던 중이었다. 옷을 갈아입을 시간도 아까워 승마복을 입은 채 뛰어나갔던 오드리는 잔뜩 화가 난 표정의 동생을 맞닥뜨렸다.
“하델, 오랜만에 보는데 표정이 아주 대단하구나. 무슨 일로 그렇게 화가 났어?”
“그걸 몰라서 물어요?”
“응, 나는 전혀 모르겠는데.”
사근사근 웃으며 대답하는 오드리는 대단히 안색이 좋았다. 가무잡잡하게 그을린 뺨에는 불그스름한 핏기가 돌고 입술은 반질반질 윤이 났으며, 하나로 모아 올려 묶은 검은 머리칼에선 광택이 자르르 흘렀다. 몸에 붙는 승마복을 입은 몸은 날씬하고 탄력이 넘쳤다.
“아직 요양이 필요하다더니, 다 거짓말이었네. 아침 승마도 못 한다기에 걱정했는데 괜한 짓을 했어요. 담장 안 정원에서 이렇게 멀쩡하게 즐기고 있었는데 말이에요.”
잠깐이나마 좋았던 분위기는 해를 만난 안개처럼 사라졌다. 몇 달 만에 만난 오누이는 서로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어머. 네가 내 걱정을 하긴 했었구나? 난 또, 편지 한 통 전보 한 통 없기에 날 까맣게 잊은 줄 알았지.”
“시답잖은 편지 한 통 없었다는 것에 마음이 상해서 집이 아니라 여기로 온 거예요?”
“응, 내가 좀 소심하고 뒤끝이 길어서 말이야. 그리고 말이 나와서 말인데, 헨젤가가 나한테 어떻게 집이니? 집은 좀 마음이 편하고 그런 곳이어야 하는 것 아니니?”
“누나가 헨젤가에서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고요? 하긴 아버지가 누나를 그리 좋아하진 않았죠. 하지만 난 누나가 그런 걸 신경 쓰는 사람인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누난 뭐든지 내키는 대로 다 하고 살았잖아요!”
하델이 오드리의 승마바지를 가리켰다. 오드리가 붉어진 얼굴로 반박했다.
“내가 헨젤가에 있었으면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오는 손님 때문에 헨젤가 문턱이 다 닳았을 거야! 과연 여기에서처럼 마음껏 사람을 멀리하고 마냥 쉬는 게 가능했을 것 같니?”
“쉴 필요도 없어 보이는데요 뭘!”
“겉으로는 멀쩡해 뵈는 게 당연하지! 난 몸을 다친 게 아니라 마력을 뺏긴 거니까!”
하델이 흠칫 입을 다물었다. 오드리도 가쁜 숨을 내쉬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한바탕 화부터 쏟아낸 오누이는 서로 어색한 시간을 꿋꿋하게 견딘 다음에야 겨우 미뤄뒀던 안부를 묻는 등 형식적인 인사를 나눴다. 그래봤자 어색하긴 마찬가지였지만.
“마력 회복에는 셰비언 성벽이 제일 좋다고 하지 않았어요? 왜 브란젤에 있는 거예요?”
“브란젤을 너무 오래 비워두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랬지.”
“브란젤이 누나 거예요? 비워두긴 뭘 비워둔대. 여기 사람 징그럽게 많거든요.”
“크흠. 넌 이제 열네 살이 넘었겠구나? 열네 살 생일은 성대하게 축하해 주고 싶었는데, 어쩌다 보니 그냥 지나가 버렸네.”
“됐어요, 누나 생일도 그냥 지나갔잖아요.”
“그러네. ……당연히 재무국에 들어갔겠지? 어때, 일은 할 만하니?”
“아뇨. 힘들어요.”
“으응? 몇 달이나 지나지 않았니? 그런데 아직도 힘들어?”
“일을 하면 할수록 알겠더라고요. 누나가 얼마나 공들여 재무국을 손에 넣었고 교묘하게 아버지의 일을 방해해 왔는지. 그 많은 사람들 중 아버지에게 충성하는 사람이 한 명도 남아 있지 않다니, 충격적이었어요. 덩달아 저도 고생을 좀 했죠. 사실은 지금도 고생하는 중이고요.”
오드리는 하델의 시선을 피해 딴청을 부렸다. 본래 그녀의 계획대로라면 하델이 열네 살 생일을 맞이하기 전에 헨젤 백작은 재무국을 떠났어야 했다. 헨젤 백작은 그만큼 가스트로의 신뢰를 잃은 상태였고 가스트로의 과감한 행정개편은 마무리를 코앞에 두고 있었다.
한데 중간에 오드리가 샤를레아에게 납치를 당하면서 모든 게 틀어져 버렸다. 마법 문명의 위기라는 초유의 사태 덕분에 자리를 보전한 헨젤 백작은 제 능력을 양껏 펼쳐 보였고, 그로써 가스트로의 신뢰를 일부 회복하기까지 했다.
헨젤 백작을 실각시키고 하델의 뒷받침은 직접 해줄 생각이었던 오드리로서는 아쉽기 그지없는 결과였다. 하지만 그런 얘길 하델에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오드리가 진행하다 멈춰 버린 계획의 잔해를 발견한 것만으로 크게 충격받은 모양이었으니까.
“누나. 그렇게까지 아버지가 미웠어요?”
“…….”
“아예 헨젤이라는 가문의 뿌리를 뒤흔들어야겠다 마음먹을 정도로?”
“어쩌겠니, 아버님께서 아끼시는 거라곤 헨젤뿐이었는걸.”
“누나도 헨젤이에요.”
“말은 바로 하자. 아버님께 나는 헨젤이 아니라 헨젤의 소중한 후계자를 위협하는 방해물이었지. 그렇지 않고서야 나를 괜히 만탈락에 처박았겠니? 어머니의 생전 부탁을 지켜야 한다니, 핑계는 좋지. 지키기 싫다고 유언장도 뭉개 버렸으면서 그건 왜 꼭 지켜야 했다니?”
“누나…….”
하델은 머리를 싸매고 무릎에 처박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아버지와 누나 사이에 패인 골이 너무 깊고 넓어 감히 메워볼 엄두가 안 났다.
“다음 대 헨젤 백작은 나예요. 내 얼굴을 봐서라도 적당히 해주면 안 돼요?”
“응? 적당히 뭘 해달라는 거니? 내가 하려던 일들은 그 빌어먹을 붉은 용이 다 깨부숴놨는데 이제 와서 뭘?”
“랄리우스 후작위는 본래 누나의 것이었고, 가넷 남작위는 이미 받은 거니 어쩔 수 없다 쳐요. 하지만 일테니아 후작의 자리를 채워서 국정회의에 참석하는 건 얘기가 다르잖아요. 제발 부탁이니 그것만은 그만둬 줘요. 공개적으로 딸이 아버지의 뺨을 갈기는 거나 마찬가지인 행위라고요.”
“와우, 충성하는 사람이 없어 고생 중이라더니 다 거짓말이었네. 그 얘긴 어디에서 들었니? 오스미다 전하께 아랫것 단속을 잘하셔야겠다고 알려야겠는걸. 그것 때문에 화가 잔뜩 나서 뛰어왔구나? 이제야 알았네.”
오드리가 하델의 이마에 손가락을 튕겼다. 아직 힘이 돌아오지 않아 아프지도 않을 텐데, 하델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이마를 문질렀다.
“내가 새로 작위를 받을 거라 했을 때도 너는 이렇게 날 말렸었지. 그때와 같은 대답을 해주마. 주사위는 던져졌고 화살은 쏘아졌다.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을 수 없듯이 그 일도 이미 돌이킬 수 없어.”
“이번만은 어떻게든 돌이켜 봐요. 이대로면 아버지가 누나를 가문에서 제명할 거예요. 가계도에서 지워 버릴 거라고요.”
“으음?”
“누나, 농담이 아니에요. 위협도 아니고요. 아버지는 누나에게 따로 경고할 생각도 없는 것 같아요. 이대로면 누나는 수확제 전에 쫓겨날 거예요.”
오드리는 웬일로 헨젤 백작이 자신의 마음에 쏙 드는 짓을 하는가 싶었다. 하긴 오드리가 나서서 절연을 선언하는 것보다는 그쪽에서 먼저 내쫓는 형식을 취하는 게 그나마 한 줌 남은 체면이라도 지키는 길일 것이다.
“아버님은 뤼나소 문제로 치안대에 소환당하는 치욕을 겪고도 버틴 분이야. 내가 국정회의에 참석하는 게 창피스럽다는 건 그저 핑계일 테지.”
“네?”
“아버님께서 헨젤가의 후계자가 누구인지를 명확하게 하고 싶다 하시니 그렇게 해드려야지. 혹여 네가 죽고 나 혼자 남는 사태가 발생하더라도 헨젤가를 이을 생각은 꿈에도 말란 의사를 이렇게 고상하게 돌려서 표현하시는데 자식이 되어서 어떻게 따르지 않을 수 있겠니? 나도 가끔은 자식다운 일도 해야지.”
“누나!”
“너는 나더러 아버님을 너무 미워한다 하지만, 나야말로 묻고 싶구나. 아버님은 왜 그렇게 나를 미워하시는 걸까? 네가 가서 한번 여쭤보겠니?”
하델이 금붕어처럼 입을 뻐끔대다 끝내 침묵했다. 오드리는 그런 하델의 뺨을 살살 쓰다듬었다. 기억보다 조금 야윈 동생에게서 익숙한 향기가 풍겼다. 아카시아 꽃향기.
“날 걱정해서 여기까지 와줘서 고맙다. 아버님의 감시가 만만치 않았을 텐데 용케 뚫고 왔어.”
“누나를 걱정해서 온 거 아니에요. 헨젤가의 체면이 떨어지면 내가 고생을 하게 되니까 그런 거지. 누나는 내가 다음 대 헨젤 백작이라는 걸 너무 잊고 사는 것 같아요.”
“서로 상관없는 사람이 되면 체면 상할 일도 없어. 아버님은 날 헨젤에서 쫓아내고 나면 입이 닳도록 하던 변명을 하지 않아도 돼서 많이 편해지실 거다. 뭐, 귀에서 피가 나도록 내 소문을 듣게 되기는 하겠지만 그거야 지금도 마찬가지 아니니.”
상관없는 사람. 오드리가 무심코 입에 담은 말이 하델을 상처 입혔다.
“그 말인즉슨……. 누나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논란이 될 만한 행보를 걸을 거다 이거네요. 국정회의에 참석하는 정도로 끝나지 않을 거란 뜻이에요. 거기서도 연신 파란을 일으키겠죠. 그렇죠?”
오드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델이 오드리의 손을 걷어냈다.
“아버지는 역시 현명하시네요. 누나가 일탈할 때마다 내가 누나의 옷자락을 붙들고 부탁하지 않아도 되도록 해주시려는 거니까. 어쩌면 내가 해야 하는 일을 대신 해주시는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어요.”
“착하구나.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누나를 이해할 수가 없어요. 누나가 아무리 부정해도 누나의 피 절반은 헨젤에서 왔는데 어떻게 이렇게 태연할 수가 있죠? 가문에서 버려지는 게 두렵지 않은가요?”
“헨젤은 내게 고작 절반의 피를 주었을 뿐인데 어째서 두려워해야 하는 거니? 나머지 절반이 없는 것도 아닌데, 내가 왜?”
하델은 문득 생각했다.
‘누나의 절반은 나의 절반이기도 하지 않나?’
하지만 한 번도 궁금해한 적 없는 만탈락의 풍경은 어린아이용 동화책의 삽화처럼 어렴풋했고, 랄리우스의 이름은 한없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이래서야 랄리우스 후작위는 오드리가 잇는 것이 참으로 마땅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랄리우스 후작위는 당연히 자신의 것이라고 믿고 살았는지, 사정을 모두 알고 나서도 가끔은 빼앗긴 것 같아 억울한 기분이 들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무서운 거 없단다. 아버님께 전하렴. 가계도에서 날 파내겠다고 결심하셨다니 그 결정에 깊이 감사드리고, 되도록 빠른 시간 내에 실천하시길 추천드린다고. 그렇지 않으면 내가 먼저 나서서 절연을 선언할 테니까 말이야. 호외로 만들어서 브란젤 전체에 뿌려 버릴 테니 각오하시라고 해.”
“누나…….”
“그래도 우리가 같은 피를 나눈 남매인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긴 하지. 하델, 내가 결혼할 때 증인 서줄 거지?”
오드리가 장난스럽게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하델은 그만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지가 그걸 허락할 것 같아요? 난 누나가 아니라고요.”
“이런. 그럼 난 내 증인을 어디서 구하지? 쭉 너만 믿고 있었는데. 랄리우스의 방계 쪽을 찾아봐야 하나……?”
“랄리우스의 방계라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쪽은 피가 흐려질 대로 흐려져서 부모님이 결혼하실 때도 나서지 못했는데 어떻게 누나의 증인을 서요?”
그럼 난 어쩌라고? 나더러 평생 결혼하지 말란 거니? 오드리가 눈을 멀뚱멀뚱 떴다.
“내가 아버지의 허락이 필요치 않은 나이가 되면 결혼하면 되잖아요. 그땐 당당하게 가서 증인 서줄게요.”
“하델, 그건 좀 아니지 않니? 너 올해 열넷이야.”
“대귀족 간의 혼약에서 약혼 기간 육 년이 그리 드문 것만은 아니잖아요?”
“그건 어릴 적에 미리 약혼한 경우에나 그런 거고. 육 년이나 지나면 난 스물다섯이나 되는데?”
열아홉의 오드리는 결혼하기 딱 좋은 적령기의 처녀였다. 하델은 그를 빤히 알면서도 무조건 오드리가 약혼 기간을 길게 잡아야 한다고 우겼다. 그래야 자신이 증인을 설 수 있다면서 말이다.
“택도 없는 소리지.”
오드리의 입장은 단호했다. 택도 없는 소리, 어림도 없는 꿈. 하델을 보낼 땐 다정하게 어르고 달래며 알았다고 해놓고, 뒤에서 하는 말은 이렇게나 냉정하다. 셰비언은 귀를 활짝 열고 오드리의 다음 말을 재촉했다.
“그래도 증인이 필요한 건 사실이잖아요. 어떻게 할 거예요?”
“글쎄……. 정 안 되겠다 싶으면 증인 없이 예식하는 나라로 가서 식 올려 버리지 뭐.”
“오, 그래도 되는 거였어요? 그런데 왜 다들 증인을 찾는 거죠?”
“멜브란트에선 증인 없는 결혼을 인정하지 않거든. 어찌어찌 부부로 인정을 받더라도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사생아가 되어서 상속권을 인정받지 못해. 그렇지만 우린 그쪽으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잖아? 양자를 들일 거니까.”
셰비언의 안에서 무언가가 파사삭 소리를 내며 깨졌다. 그는 미처 몰랐으나 보통 사람들은 그걸 두고 남자의 자존심이라고 불렀으며, 깨졌을 경우 소유자로 하여금 하등 쓸데없는 짓에 쓸데없이 진지하게 임하게 만드는 특성이 있었다. 가끔은 세상이 놀랄 만한 결과를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그런 경우는 드물었다.
“……오드리.”
“응?”
“삼 년 정도는 기다려 줄 수 있죠?”
오드리는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셰비언이 근래 보기 드물었던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속내가 하도 뻔해 모른 체하기도 어렵지만, 아는 체했다간 두고두고 토라질 것이다.
“뭐어…….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삼 년 정도면 하델의 간덩이를 적당히 키우기도 충분할 것 테고. 다만 그 삼 년 뒤에도 그대가 지금처럼 예쁠까가 문제인데.”
“당연히 예쁘죠. 난 용이라고요. 삼 년이 아니라 십 년이 지나도 예쁠걸요.”
셰비언이 어이없어 하며 코웃음을 쳤다. 그는 차라리 아침이 밝지 않을 것을 의심하지 제 미모를 의심하진 말라는 듯한 표정으로 오드리에게 약속을 요구했다.
“삼 년 뒤에 결혼하는 거예요.”
오드리는 셰비언이 여전히 눈치가 없다는 사실에 즐거워하며 손가락을 내밀었다.
“알았어. 삼 년 뒤에 하자. 그대야말로 그때 가서 발 구르지 말고 미리미리 증인 구해놔.”
“약속했어요.”
“그대도 내게 약속해야 해. 무모한 짓을 저질러서 날 슬프게 하지 않겠다고.”
셰비언이 샤를레아와 비슷한 결말을 맞는 꼴을 보느니, 아이 없이 단둘이 평생을 사는 쪽이 훨씬 나을 것이다. 셰비언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오드리와 얽은 새끼손가락에 단단히 힘이 들어갔다.
“약속할게요.”
셰비언은 약속을 지키려면 건강해야 하고, 건강하려면 잘 쉬어야 한다며 오드리의 머리를 제 무릎 위에 올려놓고 눕게 만들었다.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지 알 수 없는 주장이었지만 오드리는 기꺼이 따랐다. 크고 서늘한 손이 이마를 짚어주니 저절로 마음이 즐거워졌다.
“오드리, 그동안 고생 많았어요.”
“응.”
“앞으로는 좋은 일만 있을 거예요.”
그럴 리가. 오드리는 제 앞길이 얼마나 험할지 벌써부터 훤히 보였다.
이제까지 들은 욕과 비방은 우습게 여겨질 날들이 이어질 것이다. 발치에는 커다란 돌이 굴러다닐 것이며 길 곳곳에 놓인 늪이 호시탐탐 발을 노릴 것이다. 햇살은 미약할 것이며 끝은 언제나 되어야 찾아올는지 짐작도 되지 않고, 가끔은 동료라 생각한 이들이 등을 찌를 것이다. 지난날 오스미다가 겪고 견뎌온 모든 것들이 이제 자신의 몫이 되리라.
“오드리?”
그 모든 것들을 짐작하고도 오드리는 웃었다. 애초 그녀는 안온하고 평화로운 인생을 꿈꾼 적이 없었다. 길이 험하면 어떤가, 그 끝이 화려하면 그만이지. 제 손으로 세상을 바꾸려면 그만한 고난이 따르는 건 당연했다.
게다가 오드리의 주변에는 정말 좋은 사람들이 많았다. 즐거운 여행을 위한 가장 좋은 준비물은 말이 통하는 친구라는데, 그녀의 곁에는 좋은 친구는 물론이고 있는 힘껏 등을 밀어주는 연인도 있었다.
“맞아. 그대가 내 옆에 있으니까 좋은 일만 있을 거야.”
“뭐예요, 그게. 내가 행운의 부적인가요?”
“그보다 더 좋은 거지.”
셰비언은 눈부시게 미소짓는 오드리를 보며 확신했다. 하필 자신이 마법이 마법 같지 않은 이런 시대에 깨어난 것은 분명 오드리를 만나기 위해서임이 틀림없으리라고.
“우린 역시 운명이에요.”
뜬금없이 운명 얘길 꺼내는 셰비언의 머리 위로 늦여름의 햇살이 떨어졌다. 매끄러운 이마에, 긴 속눈썹에, 살짝 상기된 뺨에……. 황금빛 햇살이 콧대를 타고 미끄러졌다.
오드리의 눈에 닿는 모든 것들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 빛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려니 얼룩덜룩하던 지난 인생마저 찬란하게 빛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낯선 충족감이 가슴을 가득 채우고도 모자라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그녀는 동의하고 말았다. 운명이 아니고서야 이런 인연, 이런 만남은 있을 수가 없다고.
epilogue
생명을 유지하고 종족을 번영케 하는 것이야말로 마력과 마법의 본질.
이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 셰비언이 만들어낸 건, 피임약이었다. 아이를 가질 수 있게 해주는 마법약을 만들겠다고 이 년이나 연구하더니 왜 나온 결과물이 피임약이냐 물어보면, 그가 몹시 슬픈 표정을 지을 테니 아무 말도 하지 말자.
셰비언의 슬픔과는 별개로, 오드리는 피임약을 두고 기적의 약이라 평했다. 남자든 여자든 한 번 먹기만 하면 성별을 가리지 않고 약 석 달 동안 피임 효과를 볼 수 있는 약이었다. 심지어 여자의 경우 그 약의 효과가 지속되는 동안 월경이 멈추기까지 했다.
“부작용은 없어?”
“있죠. 효과가 지속되는 동안 마력 보유량이 늘어나요.”
“부작용 같지도 않은 부작용이네. 마법사들은 오히려 좋아할지도 모르겠어. 실험 보고서는? 임상시험에서는 어땠지? 짐승과 인간 사이의 비교분석자료도 좀 줘봐……. 좋아, 충분해! 대량으로 만들어서 팔자! 가격은 싸게, 구매는 쉽게! 지금 당장 허가를 받으러 가보실까!”
기세등등하게 보건국의 문을 걷어차고 들어갔던 오드리는 약 다섯 시간의 설전 끝에 어깨를 늘어뜨리고 돌아 나왔다. 보건국에 포진한 전문가들은 물론이고 평범한 보통 사람인 직원들을 설득하는 것마저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낙태약보다 훨씬 안정성이 높은데, 뭐? 생명 탄생의 가능성을 차단해서는 안 돼? 고상하지 못한 직업을 가진 뒷골목의 숙녀들이 오남용할 우려를 금할 수가 없어? 빌어먹을, 그 뒷골목의 숙녀들에게서 본 사생아를 줄줄이 달고서 그런 말을 하면 부끄럽지도 않나? 아, 하긴 부끄러운 줄을 모르니까 고개를 들고 다니는 거겠지! 하, 그런 놈이야말로 고자가 되어야 하는데!”
“오드리, 진정하고 정신 차려요.”
“내가 진정하게 생겼어? 셰비언, 미안해. 그대가 정말 열심히 연구해서 만들어준 기적의 약인데. 이건 널리 뿌려서 세상 사람들을 널리 이롭게 만들어야 하는 물건인데! 하여간 사내새끼들이란!”
주량 이상으로 포도주와 브랜디를 퍼마신 오드리가 주절주절 횡설수설을 시작했다. 셰비언은 오드리의 술 시중을 들며 그 약 별로 만들고 싶지 않았어요, 의도해서 만든 건 아니에요, 피임약이 퍼져 봤자 사람들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 등등의 말로 그녀를 위로했지만 별로 도움이 되진 않았다. 오드리가 입에 쏟아붓는 술의 양과 종류만 늘어났을 뿐이었다.
그가 만족스럽게 해낸 일이라곤 뻗어버린 오드리를 침대에 무사히 올려놓는 일에 불과했다. 좋은 술이 생기면 혼자 마실 것이지 꼬박꼬박 오드리에게도 보내주는 라디아타가 원망스러웠다.
“기적의 약은 무슨.”
셰비언은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그저 우연히 만들어낸 피임약일 뿐인데 그게 어떻게 기적의 약이 되겠느냐, 오드리의 눈에 콩깍지가 좀 심하게 끼었나 보다, 줄이라고 그리 말했거늘 술을 그렇게나 퍼마시다니 절대 숙취 해소는 시켜주지 말아야지, 이렇게.
하지만 셰비언의 생각이 틀렸다는 건 바로 다음 날부터 증명됐다. 발레리가 술병이 나 드러누운 오드리를 병문안이랍시고 찾아와서는 테스트용 피임약을 잔뜩 털어서 돌아갔기 때문이었다. 발레리는 왕궁에서 함께 일하는 시녀들에게 피임약을 뿌렸고, 피임약은 이내 대단한 인기를 얻었다.
보건국의 허가를 받지 못한 약임에도 불구, 가넷 남작가를 들락거리며 피임약을 찾는 사람들의 면면은 점점 화려해졌다. 점차 다양해지는 자칭 임상지원자들 중에서도 라디아타의 호위를 맡고 있는 산트렘의 기사들이 특히 피임약을 좋아했다. 안 오면 불안하고 오면 짜증나는 월경을 의식적으로 안전하게 미룰 수 있다니 정말 최고라면서.
오드리는 임상시험용 피임약을 계속 만들어내며 날로 늘어나는 수요를 감당했다. 대담하고 무모한 짓이었다. 과연 그녀의 이런 행보는 오래가지 않아 들키고 말았고, 대형 기삿거리가 되어 브란젤 전체에 화제를 제공했다.
피임약에 대한 여론은 의외일 정도로 비등하게 반반이었다. 찬성 반, 반대 반. 찬성도 반대도 나름의 논리가 있어 쉽사리 물러나지 않았다. 신문의 구독자들이 의견을 담아 보내는 편지가 신문사의 사서함을 넘치도록 채웠고, 각계각층의 명사들도 저마다 한 번씩은 관련된 글을 썼다.
당연한 수순으로 오드리에게도 관심이 쏟아졌다. 사실 오드리에 대한 관심은 레펙치오의 보급화와 헨젤가와의 절연 선언 이후로 사라진 적이 없었고 그녀는 신문 1면의 단골 모델이었다. 하지만 요즘처럼 뜨거운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임상시험은 허가받지 않았습니까. 저는 시험을 자청한 이들에게 약을 주고 협조를 구한 것뿐입니다. 돈이라곤 한 푼도 받지 않았으니 절대 판매한 게 아닙니다.”
오드리의 발언은 폭풍처럼 브란젤을 휩쓸었다. 하필 국정회의에서, 하필 헨젤 백작을 상대로 한 말이라는 특수성이 더해지자 파급력이 어마어마했다. 그게 어느 정도였느냐면, 어지간해선 오드리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않는 카프러스마저 슬쩍 입을 뗄 정도였다.
“남작님, 사람들이 말이 많습니다.”
“사람들이 내 얘기하는 거야 늘 있는 일이죠. 내 욕 할 게 없으면 맥주 마시러 모일 핑계도 없는 것처럼 구는 게 어디 하루 이틀이었나요. 경이 염려해 줘서 고맙기는 한데, 그리 신경 쓸 필요는 없어요.”
“그래도……. 말세라고까지 하던데…….”
“하하, 그 말이 기어이 경의 귀에까지 들어갔나요? 확실히 이번엔 말이 좀 많긴 한가 보네요. 말세니 뭐니, 살기 힘든데 불만 토할 곳이 없으면 제일 먼저 튀어나오는 말이에요. 까짓거 말로 좀 두들겨 맞는다고 뼈가 부러지는 것도 아닌데 익숙한 제가 몰아 맞는 걸로 왕실의 권위를 지켜 드리는 걸로 하죠.”
카프러스는 명랑하게 미소 짓는 오드리에게 더 이상 나쁜 말을 옮길 수 없었다. 스물한 살이 된 오드리는 샤를레아의 납치 사건이 있기 전보다 더 밝고, 화사하고, 긍정적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국정회의에 참석하며 얻은 악명과 매일 쏟아지는 악담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 이유는 명확했다. 셰비언이 오드리를 든든하게 지탱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떤 순간에도 자신을 의심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사랑을 쏟는 한 사람의 존재가 그렇게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을, 카프러스는 셰비언과 오드리를 보며 알았다.
다만 바람이 있다면, 이제 제발 결혼을 했으면 좋겠다는 것. 반지를 서로 나눠 낀 건 한참 전의 일이고 한집에 살면서 아침저녁으로 얼굴을 맞대고 있으면서 왜 결혼은 안 하는 걸까? 반대하는 부모가 있는 것도 아니고 증인으로 나서줄 사람도 많은데.
“오드리, 베텔 경은 오늘도 일을 잘했나요?”
“베텔 경만큼 믿음직한 호위 또 없어. 트집거리 찾지 마.”
셰비언과 오드리 사이에 있는 삼 년의 약속은 아직 다 끝나지 않았다. 아직 일 년의 시간이 남아 있는 것이다. 요즘 셰비언은 하루하루 시간이 지나갈수록 점점 더 예민하게 곤두서서는 사방팔방 경계의 눈빛을 쏘아 보내곤 했다.
사정 모르는 카프러스는 셰비언의 칼날 같은 시선을 견디며 식은땀을 흘렸다. 해바라기처럼 피었던 어린 연심은 오래전에 싹싹 거둬서 달튼 제도의 바다 아래에 던져 버렸거늘, 저 용의 눈에는 뭔가 다른 게 보이는 모양이었다.
오드리 랄리우스 가넷. 나이를 스물한 살이나 먹고도 아직 미혼인 그녀는 로렐라이와 데멘사의 주인이며, 만탈락의 주인이다. 또한 랄리우스 후작이자 가넷 남작으로서 일테니아 후작을 대신해 국정회의에 참석한다. 그녀는 멜브란트에서, 아니 어쩌면 전 대륙에서 가장 유명한 모험담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보통 그녀를 레이디 오드리라고 불렀으며, 그녀만큼 제멋대로 사는 사람은 멜브란트 역사에 또 없을 거라고 얘기하곤 했다.
오드리는 어린 시절 결심했던 그대로 막 살고 있었다.
조금도 숙녀답지 않게, 막.
<레이디 오드리의 인생>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