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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9. 인과(因果) (52/62)

chapter 49. 인과(因果)

「오래된 가문치고 비밀이 없는 곳이 있던가?」

멜브란트 남부의 유서 깊은 도시 만탈락은 아주 오랫동안 랄리우스의 도시였다. 도시의 주민들은 멜브란트의 탄생부터 함께했던 랄리우스 후작가에 깊은 애정과 자부심을 품고 있었고, 그만큼 랄리우스의 직계인 오드리에 대한 관심과 호의도 대단했다.

용에게 납치당했던 오드리가 만탈락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이 만탈락 전체에 퍼지는 데엔 사흘도 걸리지 않았다. 오드리의 원기가 크게 상해 요양이 필수라는 이야기도 함께 퍼져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락시 부인은 매일 찾아오는 손님을 치르느라 얼굴이 반쪽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손님이 없는 지금은 지낼 만하냐 물으면 그건 아니라고 할 테지만.

“아, 아가씨?”

나무와 꽃 화분으로 가득 찬 유리 온실, 습한 공기 속에서 바닥에 엎어져 있는 오드리를 발견한 락시 부인의 손에서 쟁반이 미끄러져 떨어졌다. 달콤한 과자와 따뜻한 차 따위가 햇볕에 데워진 바닥에 와르르 쏟아졌다.

한달음에 오드리에게 달려온 락시 부인이 바들바들 떨며 오드리의 코 아래에 손을 가져다 댔다. 건강하고 규칙적인 숨을 느끼자마자 안심이 되어 맥이 탁 풀렸다. 그녀는 걱정했던 만큼 화를 담아 오드리의 등을 철썩 후려쳤다.

“악!”

따끈따끈한 햇볕을 즐기며 졸고 있던 오드리는 오랜만에 느껴보는 손맛에 비명을 지르며 몸을 떨었다. 하필 피부를 태우느라 걸친 것 없는 맨몸이었던 탓에 충격이 더욱 컸다.

“유, 유모……. 날 죽일 셈이야?”

“아가씨야말로 이 늙은 유모를 심장마비로 죽일 셈이세요? 제가 오는 걸 뻔히 아셨을 거면서 그렇게 꼼짝도 안 하고 계시면 어떡해요?”

“못 들었어……. 난 졸고 있었다고.”

“제가 쟁반 떨어뜨릴 때는 깨셨을 거 아녜요!”

“……크흠. 한동안 혼자 있을 거라고 했는데 왜 왔어?”

할 말이 없어진 오드리가 슬그머니 딴청을 피우며 일어나 앉았다. 그러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뽀얀 가슴이 훤히 드러났다. 락시 부인이 질색을 하며 가져온 숄을 오드리에게 둘렀다. 만탈락에서 쓰기엔 좀 두꺼운 재질인 데다 크기도 커서 거의 이불처럼 느껴지는 숄이었다.

“유모, 더워. 여긴 유리 온실이라고. 햇빛이 쨍쨍 들어오고 있는 거 안 보여?”

“잘 보이죠. 그래서 챙겨온 거예요. 아가씨가 기껏 멀쩡해진 피부를 또 태우고 있을 게 뻔해서요! 흙냄새 나무 냄새가 맡고 싶으면 정원으로 가도 되는데 굳이 유리 온실을 고집하시니 그 속셈을 누가 몰라요?”

락시 부인이 이를 갈며 오드리를 꽁꽁 포장했다. 아직 팔다리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오드리는 그다지 반항다운 반항도 하지 못하고 입으로만 나불대다 둘둘 말린 햄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게 뭐야, 창고에 매달린 햄 같잖아.”

“햄은 먹을 수나 있죠. 제 생각에는요, 넉 달 전에 태어난 새끼돼지 무게가 딱 아가씨와 비슷하겠어요. 햄으로 먹을 수 있는 살점은 그 녀석이 훨씬 많겠지만 말이에요!”

“유모……. 난 대체 언제가 되어야 유모의 입담을 당할 수 있게 되는 거지?”

“이디케부터 이기고 오세요.”

“이번 생에는 글렀군.”

“역시 우리 아가씨. 잘 알고 계시네요. 알고도 모른 척,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짓만 그만두시면 완벽해지실 텐데!”

“유모, 그런 헛된 꿈은 버려. 세상에 완벽함이라는 건 없어. 그런 건 소설이나 그림 속에서만 나오는 거야.”

오드리는 브란젤로 떠나고 한 번도 만탈락에 돌아오지 않았지만, 그녀의 방은 여전히 완벽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다른 점이라면 이전에는 없던 화분이 방 곳곳을 가득 채우고 있다는 점이랄까. 덕분에 창문을 꼼꼼하게 닫고 있음에도 실내 공기가 아주 쾌적했다.

오드리는 락시 부인의 성화에 못 이겨 실내복을 챙겨 입고 방에 비치된 긴 의자에 드러누워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조금 전 온실에서도 꾸벅꾸벅 졸았는데, 방에 와서도 잠이 쏟아졌다.

‘먹고 자고 먹고 자고……. 이거 원, 가축이 따로 없잖아.’

구출된 오드리가 돌아온 후, 락시 부인을 비롯한 이 저택의 고용인들은 마치 그녀를 설탕공예로 만들어진 인형으로 취급하기로 합의한 듯했다. 인형에게는 멋대로 움직이는 건 물론이고 너무 많은 생각을 하는 것도 금지였다. 당연히 오드리의 의견은 눈곱만큼도 반영되지 않은 합의였다.

오드리는 그에 불만이 아주 많았지만, 열흘 내내 침대에 누워서 잠만 자다가 간신히 깨어난 뒤다 보니 자신은 괜찮다는 말의 신뢰성이 매우 떨어졌다. 일단 몸의 근육이란 근육은 죄다 시들어 버린 게 제일 문제였다. 뭘 해도 쉽게 지치고 나른해졌다.

‘계속 이렇게 지낼 수는 없어.’

설탕공예인형 취급을 더는 견딜 수 없었던 오드리는 이런저런 궁리를 시작했다. 이 저택에는 그녀가 브란젤로 떠나기 전까지 몰래 관리해 왔던 개구멍들이 있었다. 아마 락시 부인이 모조리 찾아서 막아버렸을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하나쯤은 남아 있지 않을까?

본래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어지는 게 사람이고, 오드리는 만탈락 최고의 말썽쟁이라는 별명으로 불려본 전적이 있는 인물이었다. 눈꺼풀을 끌어내리던 잠 같은 건 들키면 혼날 궁리를 하는 동안 싹 사라져 자취를 감췄다.

그때, 락시 부인이 잘 잠가놓았던 창문이 벌컥 열리고 뜨거운 바람이 밀어닥쳤다. 남부의 태양에 어울리지 않는 흰 얼굴이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만년설을 닮은 은발이 햇살을 등지고 찬란하게 반짝거렸다.

“오드리!”

“셰비언? 왜…….”

왜 멀쩡한 문을 두고 창문으로 출입하는가. 셰비언은 오드리의 의문을 간단하게 풀어버렸다. 오드리를 들쳐 안고 냅다 창문 밖으로 뛰어내린 것이다. 일찍이 겪어본 적 있는 부유감에 오드리가 비명을 질렀다.

“이게 무슨 짓이야!”

“그렇게 소리 지르면 들켜요. 몰래 나가려면 조용히 해야죠.”

“몰래? 지금 몰래라고 했어?”

오드리는 셰비언의 목을 끌어안고 그의 등 뒤를 넘겨다보았다. 엄청나게 놀란 표정의 고용인들이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몰래라는 말을 쓰기엔 좀 어폐가 있는 광경이었다. 그녀는 앞으로 5분이 채 지나기 전에 락시 부인이 모든 전말을 알게 될 것에 남작 작위도 걸 수 있었다. 팔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이왕 나온 거 잡히지 말자.”

“그럼요. 제 발로 돌아갈 때까지 안 잡히면 성공적인 외출인 거죠.”

둘로 늘어난 말썽쟁이는 순식간에 의기투합했다. 이왕 저지른 일, 시간을 돌이킬 수도 없으니 그냥 실컷 즐기는 게 좋겠다고.

어디까지나 락시 부인의 손에 잡히지 않아야 가능한 일이지만, 셰비언은 수확제로 북적거리는 브란젤의 중앙광장에서도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 않는 마법을 부린 전적이 있었다. 오드리는 행적을 들켜 잡혀갈 걱정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이왕 저택에서 나온 것이니만큼 오드리는 셰비언에게 만탈락의 명소를 보여주고 싶어 했지만, 셰비언이 목표로 삼은 장소는 따로 있었다. 바로 만탈락의 옆에 있는 산 중턱에 자리한 양떼 목장이었다. 제 발로 걸을 수 없는 오드리는 꼼짝없이 셰비언의 주장에 따라야만 했다.

양떼 목장은 오드리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과 그다지 달라진 게 없었다. 양치기 개가 엎드린 채로 길게 하품하고, 방목 중인 양들이 느긋하게 풀을 뜯는 광경은 몹시 평화롭고 한가했다. 저절로 몸에 긴장이 풀리고 하품이 나올 것만 같은 풍경이었다.

“여기서 뭘 하자고 날 데려온 거야?”

“워커에게 자주 들어서 궁금했거든요. 그가 초기 형태의 강철새를 타고 시험 비행을 하다가 들이박은 곳이 바로 이 목장이라면서요? 마침 그때 오드리와 이디케가 이곳에 놀러와 있었고요. 한 번쯤은 오드리와 함께 여기 와보고 싶었어요.”

“그런 이유라면 장소 선정이 이해가 되긴 하는데, 굳이 지금 와야 할 필요는 없는 거잖아.”

오드리는 어이가 없었다. 이 한가로운 풍경이 싫은 건 아닌데, 굳이 락시 부인의 노여움을 사면서까지 즐기러 올 만한 곳이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마음이 불편해지자 모든 게 다 불만이 되었다. 언덕을 휩쓰는 바람은 마법도구로 조절되는 저택 내부의 공기만 못한 것 같았고, 엉덩이를 쿡쿡 찔러대는 억센 풀도 불편했다. 은은하게 풍기는 양 냄새도 싫고, 풀숲 어딘가에 숨어 있을 벌레들도 신경 쓰였다.

“굳이 여기 오고 싶었으면 깔고 앉을 천이라도 챙겨왔어야지.”

“그런 게 왜 필요해요? 날 깔고 앉으면 되지.”

셰비언이 자꾸 엉덩이를 들썩거리는 오드리를 번쩍 안아들어 제 무릎 위에 앉혔다. 오드리는 셰비언을 깔고 앉자마자 단박에 편하게 늘어지는 제 몸이 우습고 어이가 없었다. 심지어 편해지기만 한 것도 아니고, 잠이 쏟아지며 눈꺼풀이 무거워지기까지 했다.

“이게 뭐야……. 나 왜 이래…….”

“졸리면 자요.”

“내가 돼지인 줄 알아? 왜 다들 나한테 뭘 먹이려 하거나 재우려고 드는 거야?”

오드리가 불평했지만 셰비언은 그저 웃었다. 그 역시 오드리를 먹이고 재우려고 애쓰는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바람에 헝클어진 곱슬머리를 손가락에 감고 장난치던 그가 별안간 오드리에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 맞닿은 입술을 통해 대량의 마력을 흘려 넣었다.

오드리는 마력이 넘어오는 줄도 모르고 입맞춤에 응했다. 입술과 혀가 서로 얽히고 숨이 섞일 때마다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입술이 떨어지고 난 뒤에도 몽롱한 감각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 오드리를 잡아끌었다.

“으음……. 셰비언, 나 이상해…….”

“졸려서 그래요. 괜히 깨어 있으려고 노력하지 말고 얼른 자요.”

“싫어. 깨어 있을 거야.”

“힘들걸요.”

셰비언의 웃음이 얄미웠다. 오드리는 어떻게든 눈을 뜨려고 노력했지만, 마지막까지 저항하기엔 너무 짙은 졸음이었다. 그녀는 셰비언의 가슴에 기댄 채 잠들었다.

셰비언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오드리의 등을 토닥였다. 마력을 넘겨줄 때부터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 오드리의 몸이 급작스레 불어난 마력을 소화할 시간이 필요했다.

셰비언이 오드리에게 마력을 넘기는 건 순전히 샤를레아 때문이었다. 마력은 곧 생명력이건만, 오드리가 샤를레아에게 빼앗긴 마력이 너무 많았다. 탈출 과정에서 오드리가 샤를레아의 심장에 남아 있던 마력의 상당부분을 흡수해 오긴 했어도 성질이 워낙 달라 별 도움이 되질 않았다. 그건 있어도 없는 거였다.

그런고로 오드리는 그녀의 마력 근원을 이루는 숲의 마력이 어지간히 회복될 때까지 쭉 먹고 자고를 반복하는 돼지의 삶을 살게 될 예정이었다. 최근 셰비언이 비율을 맞춰가며 마력을 넘겨주고 있긴 하지만 그런 방식의 회복에는 한계가 있었다. 뭐든 너무 지나친 건 좋지 않았다. 하물며 그게 남의 마력이라면 더더욱.

‘계산보다 마력 회복이 느려. 환경 문제인가?’

발톱섬을 가라앉힌 직후, 셰비언이 오드리를 브란젤이 아닌 만탈락에 데리고 온 것은 만탈락이 오드리가 자란 곳이기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을 보낸 익숙한 저택, 익숙한 사람들, 익숙한 환경……. 그 모든 요소가 오드리의 회복에 도움이 될 거라고 여겼다.

그 결정은 확실히 오드리의 정신적인 안정에는 도움이 됐다. 셰비언이 마법을 거뒀는데도 내내 잠들어 있던 오드리는 만탈락에 와서도 계속 자다가 열흘 만에야 일어났는데, 일어난 직후 며칠간은 셰비언이 곁을 비우는 걸 견디지 못했다. 그가 보이지 않으면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아 불안하다나. 다행히 락시 부인을 비롯해 익숙한 고용인들과 부대끼며 시간을 보내고 난 요즘엔 저택 어디에서나 꾸벅꾸벅 졸고 쉽게 잠들었다. 만약 브란젤이었다면 이보다 훨씬 느리게 회복했을 것이다.

하지만 정신적인 안정을 찾는 속도는 빠를지언정 오드리가 마력을 회복하는 속도는 셰비언의 예상보다 훨씬 느렸다. 만탈락은 물과 나무는 적은 데 비해 압도적으로 태양이 뜨거운 도시였다. 락시 부인이 셰비언의 조언에 따라 온실에 있던 나무와 풀 상당수를 화분에 옮겨 심어 오드리의 방을 채웠지만 어림도 없었다. 정말 환경 문제라면 요양 장소를 옮겨야 했다.

‘오드리의 어머니가 살아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셰비언은 이전에 오드리가 지나가듯 랄리우스 가문의 특징을 언급했던 걸 떠올렸다. 랄리우스의 직계, 그중에서도 여자는 유독 빨리 단명한다고 했던가? 만약 랄리우스가 대대로 숲의 마력을 속성으로 하는 용의 마력을 가지고 태어나 이런 도시에서 지냈다면 일찍 말라 죽는 건 당연한 일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마력은 부모에게서 물려받는 게 아니었다. 어떤 종류의 마력을 얼마나 타고 태어나는가 하는 건 순전히 우연의 산물이었다. 마침 오드리에겐 같은 부모를 둔 형제가 있었으니, 셰비언은 조만간 하델을 만나 그의 마력을 살펴봐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다행히 셰비언이 아직 요양이 필요한 오드리를 두고 브란젤까지 쫓아가 하델을 만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어떤 면에 있어서는 오드리보다 랄리우스 가문을 잘 알고 있는 락시 부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대로 단명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건 랄리우스 후작가의 숙원과도 같은 일이었다. 락시 부인은 그동안 랄리우스가 쌓아온 의료기록을 셰비언에게 공개했다.

“돌아가신 부인께서는 별 의미 없는 짓이라고 하셨죠. 그토록 오랫동안 연구했는데도 진전이 없으니 이제 그만 포기할 때도 되었다고도 하셨고. 그래도 언젠가는 필요할지 모른다고 우겨서 자료를 남겼는데, 이제야 그 보람을 느끼네요.”

“이만한 자료를 받고도 성과가 없으면 큰일이겠어요.”

“성과에 그리 마음 쓰지 마세요. 하루아침에 될 일이 아니라는 것쯤은 저도 잘 알고 있답니다. 아르젠 백작께서 아가씨의 마력 균형을 맞추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셨는지 아는데 너무 많은 걸 바랄 수는 없는 노릇이죠.”

“그래도요. 랄리우스의 일은 오드리의 일이니 잘 해내고 싶네요.”

락시 부인을 대하는 셰비언의 태도는 근자에 보기 드물게 사근사근하고 친절했다. 락시 부인은 오드리를 기른 사람이었고, 평소에도 오드리 대신 만탈락을 책임지다시피 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셰비언은 그녀에게 호되게 점수를 잃은 입장이었고 말이다.

사실, 셰비언이 오드리를 만탈락으로 막 데려왔을 때만해도 락시 부인은 그에게 아주 호의적이었다. 오드리가 정말 편하게 쉴 수 있는 곳이 형식적인 가족이 있는 브란젤이 아니라 유년 시절을 보낸 만탈락이라는 걸 알고 있다니 그것 참 괜찮은 남자라며 높은 점수를 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오드리가 눈을 뜨지 못하는 날들이 하루 이틀 쌓여가면서 셰비언의 점수는 수직으로 하락했다. 게다가 오드리가 곧 일어날 거라고 너무나 확신한 셰비언은 그녀를 걱정하며 초조해하는 대신 자신의 회복에 집중했으니, 그 느긋한 태도 때문에 거하게 미운털이 박히고 말았다.

더구나 오드리를 설탕공예인형처럼 소중하게 다루고 싶어 하는 락시 부인의 마음을 뻔히 알면서도 수시로 오드리를 데리고 외출을 했으니, 그 미운털이 빠질 날이 없었다. 오드리의 얼굴이 조금씩 그을릴 때마다 셰비언을 보는 락시 부인의 눈빛은 점점 더 차가워졌다.

정 락시 부인에게 점수를 따겠다면 외출을 그만두면 될 텐데, 셰비언은 오드리의 욕망을 외면하지 못했다. 셰비언이 점수 회복을 위해 야심차게 시도한 미인계는 별 효용을 보지 못했으니, 그는 다른 수단을 쓸 수밖에 없었다. 랄리우스의 단명 문제 해결은 그 다른 수단 중 하나였다.

“락시 부인은 너무 까다로워요.”

셰비언의 귀여운 불평을 들은 오드리는 숨이 넘어갈 듯 웃었다.

락시 부인은 까다로운 사람이 맞았다. 자신만의 기준이 너무 명확한 나머지 때로는 오드리의 의견마저 꺾어버리는 패기를 부릴 때가 있을 정도로 꿋꿋한 사람이기도 했다. 오드리는 락시 부인의 그런 점을 좋아하고 신뢰했지만, 그렇다고 셰비언이 그녀의 기준에 맞춰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리 잘 보이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어. 유모는 어디까지나 고용인이지 내 어머니는 아니니까. 그대는 내게만 잘 보이면 돼.”

“내가 오드리에게만 잘 보이면 되는 거야 알죠. 하지만 락시 부인이 그냥 고용인이라는 말은 믿어지지가 않는데요? 오드리, 그거 알아요? 오드리는 락시 부인과 있으면 표정부터가 달라요.”

셰비언이 눈꼬리를 살짝 늘어뜨리고 대신 양쪽 입꼬리를 올려 순하게 웃는 표정을 만들었다. 오드리를 흉내 내는 것이다. 오드리는 약간 민망한 기분이 되어 제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전혀 의식하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내가 그랬어?”

“그럼요. 어찌나 사르르 풀어지는지, 열두 살짜리 오드리를 보는 것 같다고요.”

“열두 살 때의 나는 본 적도 없으면서 이상하게 나이가 구체적이네.”

셰비언의 눈에 파문이 일었다. 최근에 안 것이지만, 마력이 회복되면서 오드리는 샤를레아의 심장에서 겪었던 환상을 잊어가고 있었다. 좋았던 기억도 아니니 잊어버린대도 나쁠 건 없었다. 그저…… 이제는 드디어 나까지 잊었구나 싶어 조금 서운할 뿐이었다.

“……안 봐도 알아요.”

오드리가 간신히 멈췄던 웃음을 다시 터뜨렸다. 그녀는 과자를 집어먹던 손으로 셰비언의 뺨을 쿡 찔렀다. 만탈락 곳곳을 그리 함께 나돌아 다녔는데도 여전히 우유처럼 뽀얗고 예뻐 자꾸 만지고 싶어지는 뺨이었다.

“그대가 락시 부인과 잘 지내고 싶은 거라면 방향은 잘 잡았어. 랄리우스의 단명 문제는 유모에게 아주 중요한 일이야. 근본적인 해결까지는 무리라도 대대로 마력 균형이 무너진 이유만이라도 밝혀내면 그동안 쌓인 작은 앙금 같은 건 순식간에 날아가 버리겠지.”

“락시 부인은 성의만 보여도 된다고 했지만 역시 제대로 결과를 내야겠네요. 랄리우스의 일은 곧 오드리의 일이니 대충 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지만요.”

“뭐어……. 기대하고 있을게.”

어째 오드리는 묘하게 열의가 없는 눈치였지만 셰비언은 열성적으로 문제에 파고들었다. 그러나 별로 유의미한 소득을 올리지는 못했다. 그저 몇 가지 규칙을 찾아냈을 뿐이었다.

방계보다 직계의 수명이 짧되 어렸을 적부터 재능을 드러낸 사람은 직계와 방계를 가리지 않고 수명이 짧았으며, 남자보다 여자의 수명이 짧았다. 특히 직계 여자들의 수명이 짧았는데, 아이를 낳은 뒤 안 그래도 약한 몸이 급격히 약해져 병석에 누워 있다 죽은 경우가 많았다.

감기 몸살과 두통 외에도 다양한 증세가 기록되어 있었는데, 셰비언이 보기에 원인으로 짐작되는 건 마력 균형의 문제 딱 하나였다. 사망, 사망, 사망……. 족보에 기록된 수명이 점점 짧아지는 걸 확인한 셰비언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이거 참, 누가 보면 핏줄에 저주라도 내린 줄 알겠어.’

어쨌거나 이렇게 온갖 사례를 모아놓고 보니 오드리가 얼마나 특이한 사례인지가 더 두드러졌다.

일단 다른 가문으로 시집간 랄리우스의 여자들이 낳은 아이들은 마력 균형의 문제를 겪은 경우가 거의 없었다. 만탈락과의 물리적 거리가 멀수록 그런 경향은 더욱 확실해졌다. 하델이 바로 그 전형적인 예였다.

“대대로 마력 균형에 문제가 생기는 이유가 뭔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이 땅이 오드리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는 건 확실해요. 오드리와 맞지 않아요. 계속 만탈락에 있으면 마력 회복이 계속 더딜 거예요.”

“음, 그렇군. 고생했어, 셰비언.”

말을 꺼낸 셰비언은 꽤 오랫동안 고민한 끝에 비장한 각오를 다지고 찾아온 것인데, 정작 놀라야 할 오드리는 그저 태연자약했다. 그런 결론이 나올 줄 미리 알았다는 듯한 태도였다. 셰비언은 별안간 찾아온 깨달음에 입술을 깨물었다.

“……본 적이 있군요.”

“내 일이잖아. 어떻게 무심할 수 있었겠어. 유모 몰래 보느라 고생 좀 했지.”

손수 오드리의 식사 시중을 들던 락시 부인이 수프를 뜨던 숟가락을 툭 떨어뜨렸다. 시간 속에 파묻었던 말썽을 제 손으로 들춰낸 말썽쟁이가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유모, 이디케는 몰라.”

“당연하죠. 알아도 몰라야 할 거예요. 일이 바쁘더라도 한 번은 내려오라고 해야겠네요.”

“아이쿠……. 살살해. 이디케가 날 잡아먹으려 들 거야.”

오드리는 어깨를 움츠리며 우는 소리를 했다가 조금 전보다 두 배는 더 매서워진 시선을 받고 슬그머니 눈을 피했다.

“아르젠 백작님. 말 꺼내기 어려웠을 텐데 이렇게 말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일부러 제가 있는 자리를 골라서 말씀하신 거 맞죠?”

“아뇨, 딱히 그런 건…….”

“이럴 땐 아니어도 맞다고 하는 거예요. 이렇게 어리광을 부리는 아가씨는 오랜만에 보는 거라 반갑긴 하지만, 그게 건강과 연관되어 있다니 더 바랄 수는 없겠네요. 어디로 가실 건가요? 브란젤? 셰비언 성벽? 말씀해 주시면 바로 맞춰서 짐을 싸도록 하죠.”

락시 부인이 어찌나 시원시원하게 결정하는지, 오드리가 끼어들 틈은 조금도 없었다. 과연 오드리를 길러낸 사람다운 추진력이었다. 모녀 사이도 아닌데 둘이 꼭 닮았다.

“셰비언 절벽 옆의 원시림 쪽으로 갈 겁니다.”

“역시 나무와 풀이 필요한 거군요……. 알겠습니다. 어지간한 건 마법으로 해결할 수 있으실 거라고 믿고 식료품 위주로 준비하도록 하죠. 기간은 얼마 정도로 예상하시죠?”

“길어도 한 달이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 달. 오드리는 셰비언이 태연히 입에 담은 말에 크게 경악했다. 발톱섬에서 구출되어 만탈락에서 돼지처럼 먹고 자며 보낸 시간만 벌서 두 달인데, 여기서 한 달을 더 추가하라고? 그녀는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얌전히 있던 태도를 바로 집어치우고 대화에 끼어들었다.

“브란젤! 브란젤로 가겠어!”

“안 됩니다.”

“안 돼요.”

단박에 반대가 튀어나왔다. 브란젤은 사람이 너무 많아서 편히 쉴 만한 곳이 못 된다, 거기 녹지가 있어봐야 얼마나 있느냐, 담벼락에 기자가 매미처럼 까맣게 매달린 꼴이 그리 그립냐, 회복 기간이 한 달이 아니라 두 달, 세 달 이어지길 바라냐…….

브란젤이 안 되는 이유는 끝도 없이 이어지는데 오드리가 댈 수 있는 타당한 이유는 별로 없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아무도 당해내지 못할 고집이 있었으니, 사흘 밤낮을 이어진 말다툼 끝에 오드리의 행선지는 끝내 브란젤이 되었다.

브란젤로 가지 않고 유유자적 만탈락에 머물며 요양하던 아이샤가 푹 퍼져 좌절한 셰비언을 향해 비웃음을 날렸다.

“거 봐요, 만탈락에 못 있게 하면 레이디 오드리는 틀림없이 브란젤로 가려고 할 거라 그랬잖아요.”

“좀 쉰다고 로렐라이나 데멘사가 망하지는 않을 텐데……. 지금도 이디케와 라비린이 잘 하고 있고.”

“레이디 오드리가 그걸 몰라서 브란젤을 고집하는 거겠어요? 그 둘이 워낙 잘하니까 위기감을 느끼신 거겠죠. 수장이 몇 달을 자리를 비웠는데도 멀쩡히 잘 굴러가잖아요. 봐요, 기사도 났네.”

아이샤가 셰비언에게 신문 한 부를 내던졌다. 브란젤 내에서 인기가 하늘을 찌르는 불법 신문, 포르티투도였다. 비록 물리적 거리가 있어 최신호는 아니었지만 만탈락에서 받아볼 수 있는 것 중엔 가장 최근에 발간된 것이었다.

“‘수장이 몇 달째 부재중인 로렐라이, 이대로 2인자 체제 굳어지나?’ ……이게 뭐야?”

“뭐긴요. 로렐라이의 주인이 진짜 레이디 오드리가 맞는지 의심하는 기사죠. 이대로라면 레이디 오드리의 복귀는 힘들지 않을까 예상될 만큼 이디케 락시 양과 벨키스 경의 존재감이 커졌다는 거예요. 락시 양이 억울하겠어요, 몇 달이나 로렐라이를 책임졌는데 겨우 두 달 남짓 일한 벨키스 경과 이렇게 대등하게 비교되다니.”

“이디케의 소원은 일 그만두고 가정주부가 되는 거니까 별 생각 없을걸. 그나저나 포르티투도는 오드리에게 호의적인 신문 아니었어? 왜 이런 기사를 썼지?”

“호의적이니까 그런 우려 섞인 기사를 써준 거예요. 솔직히 다들 너무했어요. 아무리 레이디 오드리에게 요양이 필요하다고 해도 그렇지, 전보 한 장 못 보게 하는 게 말이 돼요? 시간은 훌훌 흘러가지, 신문에선 이런 기사를 써 갈기지, 레이디 오드리 마음이 얼마나 급하겠어요. 만탈락에 못 있게 되면 당연히 브란젤로 가겠다고 할 게 뻔한 걸 정말 몰랐어요?”

“쉬어야 되는데 서류를 쥐어주면 일을 하려고 들 게 뻔하니까 그랬지. 정보 수집만 하고 끝낼 사람이면 처음부터 막지도 않았어. 젠장, 이 신문은 네가 오드리에게 보여준 건가?”

셰비언의 눈이 번쩍였다. 동시에 위협적인 기세가 살갗을 찔러대는 통에 아이샤는 혀를 차며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레이디 오드리의 회복에만 관심을 쏟을 게 아니라 본인 몸뚱어리에도 신경 좀 써요. 감정이 조금만 흔들리면 마력이 줄줄 새잖아요. 으, 따가워.”

“어차피 너 정도로 민감하지 않으면 몰라. 이거 오드리에게 보여줬냐니까?”

“설마요, 저도 제 목숨 아까운 줄은 알아요. 끝내주는 도시에서 인생에 다시없을 게 분명한 호화로운 휴가를 보내는 중인데 그런 물건을 레이디 오드리에게 들이밀 리가 있나요? 이건 레이디 오드리의 방에 갔다가 보이기에 슬쩍한 거예요. 어휴, 이런 도둑질을 얼마나 오랜만에 해 본 건지 손이 다 떨리네.”

“뭐?”

셰비언은 그만 아연해져 제 손에 들린 신문을 바라보았다. 몇 번이나 들춰 읽었는지, 그리 좋지도 않은 종이 곳곳에 손때가 묻어 있었다. 그동안 잘 막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다 착각이었다니. 오드리가 어리광을 부리고 있다는 락시 부인의 말이 이제야 이해가 갔다.

“아무리 락시 부인이 저택을 장악하고 있다고 해도 이 도시의 진짜 주인은 레이디 오드리잖아요. 그분의 입김이 닿는 사람이 설마 한 명도 없겠어요? 그러니 그렇게 침울해하실 것 없어요.”

“거 참 고마운 위로긴 한데……. 웬일로 네가 이렇게 듣기 좋은 소릴 해? 무슨 속셈이야?”

셰비언이 눈을 가늘게 뜨고 아이샤를 노려보았다. 아이샤가 배시시 웃으며 셰비언에게 매달렸다.

“하하, 하하하……. 셰비언님, 브란젤에 가면 왕궁마법사 쪽에서 사람이 나와서 물어볼 텐데, 그때 말 좀 잘해주세요. 네?”

아이샤는 이 꿀 같은 휴가를 일찍 끝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마력이 아직 회복되지 않았다고 말해주길 부탁했다. 아직은 좀 더 요양이 필요하다고.

“지금 브란젤로 돌아가면 사방팔방 불려 다니면서 죽겠다 싶을 때까지 부려 먹힐 게 분명하거든요? 네? 제발요! 저 잘 써먹으셨잖아요! 이 정도 편의는 봐줘야죠!”

“그 정도는 어렵지 않은데……. 비니타는 어쩌고? 비니타는 곧장 브란젤로 돌아갔잖아.”

셰비언치고는 꽤 조심스럽게 물은 것인데, 정작 아이샤의 대답은 아주 시원시원했다.

“비니타야 뭐……. 스승이 둘이나 있는데 잘하겠죠. 혼자서 발톱섬까지 날아올 정도로 담 크게 잘 자랐는데 제가 계속 싸고돌아서 뭐 하겠어요. 내 앞가림부터 잘해야 후견인 노릇도 계속할 수 있죠.”

아이샤가 일부러 애쓰지 않아도 비니타의 소식은 여러 경로를 통해 계속 들려왔다. 혼자 강철새를 조종해서 발톱섬까지 갈 정도로 대담한 데다 거기서 괜찮은 활약을 했다는 게 산트렘의 기사들을 통해 알려지면서, 다들 비니타를 멜브란트 마법계를 이끌어갈 샛별로 보는 듯 주목도가 대단했다.

워커와 사하스바티라는 걸출한 인물 두 사람이 합심해서 방패막이 노릇을 하고 있기에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비니타의 인생 전부가 기사화되어 멜브란트 전역에 퍼졌겠구나 싶을 정도였다.

“내가 비니타에게 비행을 가르친 게 아직도 마음에 안 드나 보지?”

“제가 비니타의 스승도 아닌데 마음에 들고 안 들고를 따져 봐야 무슨 소용이겠어요. 스승 둘이 알아서 잘하는데 괜히 끼어들어서 잡음 일으켜 봐야 좋을 것도 없고…….”

“그렇게 마음 쓰이면 네가 가르치지 그랬어.”

“인간 사회에서는 아끼지 않아야 지킬 수 있는 것도 있는 법이에요. 뭐, 셰비언님 정도 되면 그런 걸 일일이 고려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저는 고작 평범한 인간이라서 말이죠.”

역시 셰비언은 아이샤의 말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다. 아이샤는 쓴웃음을 지으며 확답을 요구했다.

“아무튼 약속하신 거예요. 어기시면 안 돼요. 전 아직 몇 달 더 쉬어야 되는 거예요.”

“알았다니까.”

셰비언은 다 회복하고도 남은 것처럼 보이는 아이샤를 보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사실 물과 나무가 부족한 만탈락의 환경과 맞지 않는 건 인어의 마력을 가진 아이샤도 마찬가지인데, 그녀의 회복 속도는 오드리와 비할 바가 아니었다.

‘역시 오드리의 경우는 좀 이상해. 아니, 이 경우엔 랄리우스가 이상하다고 해야 하나.’

셰비언은 의료 기록을 넘어서서 랄리우스의 역사 전체를 파악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지만, 이제 와 그쪽을 파고들기엔 좀 늦은 감이 있었다. 손 빠른 락시 부인이 오드리를 만탈락에서 내쫓을 준비를 거의 다 마쳐 가고 있었던 것이다.

오드리는 락시 부인의 유능함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새삼 서운함을 감추지 못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셰비언이 만탈락의 환경 자체가 오드리에게 맞지 않는다는 진단을 내렸으니만큼 언제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 모르는데, 이런 순간까지 유능함을 발휘할 이유가 대체 뭐란 말인가.

유능한 락시 부인은 오드리의 서운함을 풀어줘야 할 필요성을 느꼈고, 그를 위해 셰비언을 이용하기로 했다. 덕분에 매번 락시 부인의 감시망을 피해 오드리를 데리고 도망치곤 했던 셰비언은 당당히 오드리의 손을 잡고 외출을 할 수 있게 됐다. 처음으로 허락받고 하는 데이트였다.

지금은 8월 초순, 만탈락이 한창 뜨거울 때였다. 거리를 나다니기엔 좀 힘겨운 때이지만 오드리는 또 목장에 갈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럴 거였으면 굳이 애써서 치장하지도 않았을 거였다. 대충 편하게 입고 말지.

다행히 셰비언도 그 정도 눈치는 있었다. 그는 외출복을 예쁘게 차려입고 머리장식까지 충실하게 갖춘 오드리의 손을 잡고 만탈락 시내를 걸었다. 마침 아침나절에 비가 좀 내려서 공기가 촉촉하니 걷기에 좋았다.

“날씨 좋다. 여름 같지가 않아. 꼭 가을의 초입에 들어선 것 같은 날씨인데?”

“지금은 시간이 일러서 그렇죠. 정오를 지나면 정수리가 뜨거워서 아뜩해질걸요.”

“그때는 어디라도 들어가 쉬면 되지. 그 전까지는 돌아다닐 거야. 미리부터 걱정해서 뭐 해?”

모처럼 만탈락 시내를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게 된 오드리의 의욕은 아주 대단했다. 그녀는 셰비언의 우려에도 불구, 만탈락의 거리를 모조리 밟아볼 기세로 걸었다. 도저히 그럴 수 없는 규모의 도시인데도 말이다.

“그대에게 내가 사랑하는 만탈락을 소개시켜 주려고 했는데 이곳저곳 많이 바뀌었네……. 전체적으로 길이 넓어지고 나무가 많이 늘었어. 자연스럽게 이렇게 됐을 리는 없는데. 유모의 정책 방향이 언제 이런 쪽으로 변했지? 보아하니 최근에 옮겨 심은 것 같은데.”

데이트 중인데도 오드리는 셰비언이 아니라 만탈락을 보느라 바빴다. 그대로인 듯 아닌 듯 많이 변한 만탈락이 너무 신기해서 견딜 수 없는 것처럼. 셰비언은 자신이 아니라 만탈락에 집중하는 오드리에게 서운함을 느끼면서도 유달리 반짝거리는 눈에서 좀처럼 시선을 떼지 못했다.

“왜겠어요? 오드리에게 필요하니까 그렇게 한 거죠. 락시 부인은 추진력이 좋은 사람이에요. 오드리의 방이 화분으로 가득 차기까지 이틀도 안 걸렸어요.”

“크흠. 그래도 이렇게 큰 나무들을 옮겨 심으려면 수고가 컸을 텐데…….”

“오드리, 입가의 웃음부터 지우고 얘기해요. 그렇게 기뻐할 거면서 나더러 락시 부인은 그냥 고용인이라는 말은 어떻게 했어요? 어휴, 내가 괜히 락시 부인의 눈치를 보는 게 아니라니까요.”

오드리는 민망해하며 뺨을 문질렀다. 모든 걸 놓아버리고 두 달이나 쉬었던 여파가 얼굴에서부터 나타나는지, 요즘 들어 셰비언에게 표정을 읽히는 일이 잦아졌다.

“만탈락의 물 사정은 괜찮으려나? 나무가 갑자기 늘어난 걸로 문제가 생기면 안 되는데.”

“괜찮아요, 가뭄은 끝났잖아요. 그제도 비가 내렸고, 오늘 오전에도 비가 내렸어요.”

아, 그랬지. 조금 전에도 물웅덩이를 밟을 뻔해서 셰비언이 잡아줬었지. 민망한 나머지 아무리 아무 말이나 떠들고 싶었어도 그렇지, 어떻게 그걸 잊었을까.

오드리는 머리에 쓴 모자를 끌어내려 얼굴을 가리고 싶어졌다. 얼굴 전체가 따끈따끈해지는 게 부끄러워서 그런 건지 점차 강해지기 시작한 햇살 때문인지 모를 일이었다.

“그거 알아요? 오드리가 구출되던 날, 멜브란트 전역에 비가 내렸대요. 가뭄에 시달리던 사람들이 요즘 오드리를 두고 하랄의 천사라고 불러요. 날씨의 신이 총애하는 사람이라고요. 축하해요, 현세의 벨트람에 이어 별명이 하나 더 생겼네요.”

오드리의 얼굴과 목덜미가 홍당무처럼 붉게 물들었다. 셰비언이 따로 자세히 말해준 적은 없었지만, 오드리는 샤를레아와 가뭄 사이의 연관성을 상당 부분 짐작해 낸 상태였다. 그렇기에 더더욱 듣기 민망한 찬사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건 그냥…….”

“오드리가 아니었다면 내가 샤를레아와 대립하는 일은 없었을 거예요. 그녀의 둥지를 부숴 버릴 생각을 할 일도 없었겠죠. 적어도 그런 마음이 생기려면 아주 오랜 시간이 흘렀어야 할 거예요. 그러니 가뭄을 해결한 건 오드리의 덕분이 맞아요.”

“음…….”

“쓸데없는 죄책감은 갖지 말아요. 덧나기 전에 고름을 짜낸 격이니까. ……발톱섬을 가라앉히고 난 뒤 가뭄이 해결됐단 소식을 들으며 처음으로 생각했어요. 그 옛날에 용이 죽어 나갔던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고요.”

오드리는 너무 놀란 나머지 숨 쉬는 것마저 잊어버렸다. 셰비언이 멈춰선 오드리의 어깨를 감싸 안고 이마에 입을 맞췄다.

“고작 제 둥지 하나를 위해 기후를 주물러댈 정도의 생물이었어요. 그런 용 수백 마리가 바글대는 세상은 어땠을 것 같아요? 이 세계가 감당하기 버겁다 여겼대도 이상하지 않아요.”

“셰비언…….”

“다만 나 하나 정도는 어떻게든 감당할 만하길 바라고 있을 뿐이에요.”

오드리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잊고 벌컥 화를 내려고 했다. 하지만 셰비언의 웃는 얼굴을 코앞에서 보자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저놈의 얼굴이 뭐라고!

“예상치 못했던 싸움일망정 다행히 나는 승리자가 되었고 오드리의 남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정도는 가능할 것 같으니, 오드리는 그저 지금 이 시간을 즐기는 것에 집중했으면 좋겠어요.”

“…….”

“오드리가 그런 표정을 짓고 있으면 사람들이 겁먹어요.”

“지금 내 표정이 어떤데?”

“킥……. 내 손에 거울이 있었으면 꼭 보여줬을 텐데 아쉽게 됐어요. 심술이 잔뜩 쌓여서 터지기 직전인 표정이에요. 봐요, 저기 말을 걸고 싶은데 머뭇거리는 사람들을. 오드리, 웃어줘야죠. 오드리를 걱정하느라 밤잠을 설친 사람이 이 도시에 얼마나 많은데요.”

오드리는 정작 만탈락의 주인인 자신보다 더 주민들을 배려하는 셰비언을 향해 입술을 삐죽거렸다.

“이젠 상황에 맞춘 연기도 주문할 줄 알게 됐네. 그대, 인간 사회에 너무 잘 적응한 거 아냐?”

“이게 다 내 잘난 연인을 따라가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 결과물이죠. 오드리, 칭찬까지는 바라지도 않을게요. 근데 내게 만탈락을 소개시켜 주겠다고 해놓고 설마 이대로 돌아갈 거예요?”

“……축하해. 날 말로 이겨먹는 몇 안 되는 사람 목록에 올랐어. 그런데 말이야, 내 생각에 저 사람들은 내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그대 때문에 다가오지 못하는 것 같아.”

“네? 제가 왜요? 옷도 남부식으로 제대로 입었고 딱히 이상한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을 텐데.”

오드리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서슴없이 미인계를 쓰는 주제에 이상한 곳에서 눈치가 없다. 그렇다고 그게 싫다는 건 아니지만.

“모르면 됐어. 부디 앞으로도 몰라주길 바라.”

그날부터 브란젤로 향하는 기차를 타는 마지막 날까지 오드리는 셰비언과 함께 만탈락을 돌아다녔고, 만탈락의 주민들은 더 없이 보기 좋은 선남선녀 연인에 대한 기억을 오래도록 간직하게 되었다.

오드리가 자신이 일을 하지 않아도 로렐라이와 데멘사가 망하지는 않는다는 걸 새삼 체감한 두 달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충분히 긴 시간이었다.

일단, 스트라스티를 위시한 산트렘의 기사들은 기사단으로 복귀하자마자 노르드 제독을 고발했다. 메리디에스 해군기지는 통상적인 산트렘 기사단의 활동 영역을 많이 벗어난 곳이었지만 상황의 엄중함과 명백한 증거가 모든 장애물을 이겼다.

뇌물 수수, 직권 남용, 해적과의 내통 혐의……, 그리고 그 외에도 손에 꼽기도 어려운 자잘한 죄목들은 발톱섬에 들어가지 못한 발레리가 이를 갈며 내놓은 결과물이었다. 결국 노르드 제독은 역대급이라도 해도 좋을 정도로 단시간에 옷을 벗었다.

사실은 살론 마법사의 사주를 받고 해안의 측량을 허가한 일이 가장 큰 문제가 되었지만, 해일을 막아내는 과정에서 살론의 배와 마법사가 입은 피해가 워낙 막심했기에 그 부분에 대해서는 조용히 묻어두는 걸로 결론이 났다. 멜브란트와 살론이 서로의 낯을 챙겨준 셈이었다.

스트라스티는 그 결론을 굉장히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이 맛도 저 맛도 아닌, 수프에 소금을 치다 만 듯한 맹숭맹숭한 결과라나.

“나 참, 옷을 벗기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진짜 큰 죄는 묻지를 못했다니 이게 무슨 개같은 경우랍니까? 그러니 사람들이 산트렘 기사단이 너무 간이 커서 낄 데 안 낄 데 구분도 못하고 나선다고 떠들어대잖습니까. 아니 그럼 우리가 나서지 않게 잘하든가.”

“그렇다고 살론에게 네놈들은 마법사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거냐고 따질 수도 없잖은가. 파견한 마법사의 절반이 죽거나 폐인이 되었는데.”

“으음…….”

“멜브란트의 이득을 위한 결정이기도 하니 자네가 이해하게.”

스트라스티가 눈을 세모꼴로 떴다. 오스미다는 쓴웃음을 지었다.

살론의 마법사 자원이 아무리 풍부하다 한들, 파견한 마법사의 절반을 잃은 건 참혹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결과였다. 쓸 만한 마법사를 길러내기까지 걸리는 시간과 자원을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덕분에 요즘 살론의 마법사협회장 데블로프망의 입지는 심각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파견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만큼 책임도 지라는 목소리가 높았다. 줄곧 데블로프망의 뒷배가 되어주던 왕실마법사 코르보가 사퇴라는 강수를 쓰면서까지 그를 보호했지만 효과는 미미했다.

셰비언이 파견의 대가로 약속했던 마법망 안정화 기술을 제때 전수해 주었다면 데블로프망과 코르보가 이런 위태로운 상황에 몰리지는 않았을 텐데, 그는 오드리의 요양을 돕기 위해 만탈락에 처박힌 이후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비싼 목숨을 외상으로 팔아먹었다.’

보통이라면 값을 치르지 않고 미루는 구매자에게 쏟아질 비난이건만, 용에게 빚을 갚으라고 따질 만큼 담력이 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 모든 화살이 데블로프망에게 쏠릴 밖에.

멜브란트 왕실은 이런 상황에 파견 반대파 마법사들이 노르드 제독과 내통하여 작전을 실패로 만들려고 시도했던 게 드러나면 데블로프망에게 힘이 실릴 것을 우려했다. 데블로프망은 젊고 개혁적인 성향에 추진력까지 갖춰 앞날이 기대되는 인물이었으니, 이 기회를 놓치면 앞으로 타격을 입히기 힘들 게 분명했다. 꺾을 수 있을 때 꺾어야 했다.

“너무 서운해 말게나.”

“예, 충분히 알아들었습니다. 산트렘 기사단의 명예가 조금 실추되더라도 실리를 챙기는 쪽이 낫다 이거 아닙니까. 우리가 가진 건 그놈의 명예밖에 없지만 어쩌겠습니까, 그 명예라는 것도 다 왕실이 준 것이니 감수해야죠.”

스트라스티가 불경한 말을 툭툭 내뱉었지만 오스미다는 그저 웃으며 들었다. 새삼 거슬리는 말 몇 마디 했다고 빈정이 상할 만한 사이는 아니었다.

“이해해 주어 고맙군. 코르보 경을 실각시킬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어. 지금 살론의 왕실엔 데블로프망을 비롯한 개혁파 마법사의 입장을 대변할 만한 힘 있는 사람이 없다네. 마법사의 나라라는 살론의 명성이 끝장날 날이 머지않았어.”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더 투덜댈 수도 없군요. 적어도 한 달쯤은 실컷 욕할 생각이었는데.”

“이런, 말만 들어도 무섭군.”

오스미다는 처음부터 계속 차분했으니, 일방적으로 씩씩대던 스트라스티가 차분해지자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마법계의 유명인사인 코르보의 앞날과 거취에 대해 한창 이야기를 나누던 중, 오스미다가 불쑥 화제를 돌렸다.

“발레리 경이 속이 많이 상했는가?”

갑작스러운 공격이었다. 오스미다는 딱히 공격이라고 생각하고 한 말은 아닐 테지만, 스트라스티는 하마터면 혀를 깨물 뻔했다.

“……이를 말입니까. 다시는 브란젤로 고개도 안 돌린다는 거 설득하느라 고생 좀 했습니다.”

“내가 수석 시녀 자리를 비우고 기다리고 있다고 전해주게.”

“말씀하시니 전하긴 하겠습니다만, 발레리가 다시 시녀 노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일단 한번 사표를 냈던 데다가 기사복을 입고 있는 모습이 많이 노출되지 않았습니까.”

“이런, 뭔가 오해가 있었나 보군. 애초 나는 발레리 경의 사표를 수리하지 않았어. 공식적으로 시녀 발레리는 휴가를 간 걸로 되어 있다네.”

스트라스티는 내심 혀를 찼다.

‘어쩐지, 오스미다가 그리 쉽게 발레리를 놓아줄 리 없는데 잘도 나왔다 싶더니만.’

서류를 붙들고 이를 갈던 발레리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놈의 책임감이 뭔지, 스트라스티는 한 번 더 구제를 시도했다.

“하지만 전하, 발레리는 암중호위고 그건 정체를 노출하지 않아야 의미가 있…….”

“말이야 바른 말이지, 당당한 산트렘의 기사와 대비의 시녀가 동일 인물일 거라고 상상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있다면 자네들과 이전부터 친분이 있던 사람이겠지. 보통은 자매지간인가 보다 하고 말걸세.”

“세상 사람들의 눈썰미가 다 그렇게 바닥이진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눈을 가리기 위해 서류작업을 잘 해두었다네. 원한다면 보여줄 수도 있어.”

“알겠습니다. 곧 복귀시키겠습니다.”

반박할 구석이 조금도 없었다. 스트라스티는 깔끔하게 발레리를 버렸다. 오스미다를 상대로 이만하면 애썼다. 발레리가 복귀 명령을 들으면 오스미다 전하는 자신을 너무 험하게 굴린다며 울고불고 난리를 치겠지만, 그게 다 마무리를 깔끔하게 하지 못한 발레리 본인의 업보였다.

“그리고 왕비에게도 기사 몇 명을 붙여줄 때가 된 것 같은데, 여기사의 수는 충분한가?”

“충분합니다.”

산트렘 기사단에는 전통 아닌 전통이 있었다. 여기사가 시녀로 위장해서 비밀리에 왕실 여성들의 호위를 맡는 일이었다. 전란의 시대에 생겨났지만 필요성이 사라지며 서서히 유명무실해져 파견 기사의 숫자도, 호위 대상의 범위도 함께 줄어들었다.

하나 그건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이유였다. 암중호위니 뭐니 이름은 근사하지만 그 본질은 인질이었다. 유독 끈끈한 유대감을 자랑하는 산트렘의 기사 중 일부를 브란젤에 잡아두기 위한 핑계인 것이다. 호위 대상이 줄어든 건 산트렘 기사단에 대한 왕실의 통제력이 강화된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시녀로 변장한 여기사는 검 한 번 뽑을 일이 없이 잡무만 하다 임기를 마치는 게 보통이었다. 오스미다처럼 암중호위를 다른 방면으로 굴리며 능력을 써먹은 사례는 대단히 드물었다. 그렇다고 발레리가 잘 써먹어줘서 고맙다는 생각을 하진 않겠지만.

스트라스티는 여동생 로샨이 내팽개친 의무를 충실히 대행해 준 조카 라디아타에게 상당한 부채감을 갖고 있긴 했지만, 그게 금쪽같은 기사단원의 인생 몇 년과 바꿀 정도로 거대하진 않았다. 다행히 호위를 받아야 할 라디아타의 견해도 그녀와 비슷했다.

“하지만 일전에 라디아타 왕비께서 말씀하시길, 산트렘의 기사를 암중호위로 쓰는 건 별로 내키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인재 낭비도 그런 낭비가 없다는 게 왕비님의 견해셨고 저도 그에 동의하는 바입니다.”

“그런가?”

오스미다가 씩 웃었다. 스트라스티의 등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저 웃음을 예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그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났더라? 일테니아 후작위를 두고 나라가 한바탕 뒤집혔었다.

“왕비가 현명하군. 아무리 전통이라지만 산트렘의 기사 같은 고급인력을 시녀로 쓰는 건 지나친 낭비지. 나도 동의하네.”

“저기, 전하……?”

“시녀 말고 정식 호위기사로 쓰지.”

스트라스티의 시야가 순간 까맣게 물들었다. 여기사를 호위로 쓰겠다고 공식적으로 밝혔을 때 라디아타가 얼마나 많은 구설수에 휘말릴지 상상하자 숨이 턱 막혔다. 생각이 깊어지기 전에 입이 먼저 떨어졌다.

“안 됩니다.”

“안 되긴 뭘 안 돼?”

“라디아타를 로샨 꼴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세상에 쇠로 만든 칼보다 더 날카로운 게 사람 혓바닥입니다!”

“이런, 이모가 조카를 못 믿는군. 그 정도로 연약한 아이는 아닐세. 그랬으면 타우레드 후작부인의 빈자리를 메우지도 못했어. 왕비가 레이디 타우레드일 적에 얼마나 많은 공격을 받았는지 아나? 그 시절도 잘 헤쳐 나왔는데 고작 여기사를 호위로 두는 게 뭐 어떻다고?”

스트라스티는 할 말이 없어졌다. 로샨이 루머에 시달리며 고통스러웠던 시기에도, 훗날 라디아타가 보호막 없이 내던져진 사교계에서 고생할 때도, 그녀는 그들에게 어떤 유의미한 도움도 주지 못했다.

스트라스티는 카론의 일원이자 산트렘의 기사로서 명예로운 위치에 있었지만, 그녀가 성취한 것들은 자매와 조카에게 약점이 되면 됐지 이점이 되진 못했다.

“왕비는 결혼 전부터 여성 화가만 골라서 후원하기로 유명했었어. 그웬 영애의 작품 활동을 공식적으로 후원한 전적도 있고. 나도 깜짝 놀랄 정도로 여성의 사회 진출에 관심이 많다네. 게다가 왕비의 핏줄 절반은 산트렘에서 온 것이니, 내 생각에는 매우 기뻐하며 동의할 것 같군.”

“그야 그렇겠지만…….”

“산트렘 출신도 슬슬 브란젤에 발을 들일 때가 됐어. 자네도 거기엔 동의하지? 언제까지 차별받으며 살 건가? 이왕이면 여기사로 첫발을 떼어보게. 그래야 내가 돕겠다고 나서도 이상하지 않고 자연스럽지.”

“정 필요하다 싶거든 전하가 먼저 나서시지 왜 라디아타에게 떠맡기는…….”

“때맞춰 물러나는 것도 중요한 미덕이라네. 이제는 새로운 세대가 전면에 나서야지. 그거 아는가? 사람들이 레이디 오드리라고 부르며 사랑하는 가넷 남작도 나와 함께하기로 오래 전부터 약속되어 있다네.”

“…….”

“산트렘의 기사가 가넷 남작을 구하느라 치른 희생을 생각해서라도 가넷 남작은 그대들을 외면할 수 없을 거야. 가넷 남작이 나서면 아르젠 백작도 나서겠지. 이런 기회를 이용하지 않으면 바보일세.”

오스미다의 말은 정말 그럴듯하게 들렸다. 스트라스티는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빠르게 오스미다에게 설득당했다. 그녀는 기사 파견 요청 동의서에 사인을 마치고 궁을 나온 다음에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젠장, 또 당했잖아?”

피올은 대놓고 스트라스티를 비웃었다.

“대장은 오스미다 전하를 못 이겨요. 그분이 브란젤에서 버텨낸 세월이 얼만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기사에게 말로 지겠어요? 그렇다고 대장 말솜씨가 현란한 축에 속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에게 하는 것처럼 막무가내로 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글렀다니까요. 꿈도 꾸지 마요.”

“잔인한 자식. 한 번은 이길 수 있을 거라고 희망을 주면 안 되겠냐……. 근데 진짜 여기사를 공식적인 호위기사로 쓸 수 있긴 한 거야? 나 또 사기 당한 거 아냐?”

“왕족으로서 헛된 약속을 하는 분은 아니니까 무슨 결과든 나오겠죠. 라디아타가 그걸 견딜 수 있느냐는 또 다른 얘기지만, 분명 잘할 거예요……. 대장은 라디아타가 아직도 애로 보이나 본데, 걔 다 컸어요. 근데 사기라뇨? 대장 사기 당했어요? 와, 브란젤에 고작 두 달 있었는데 그 사이에 사기를……. 당장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려주…… 억!”

피올이 명치를 끌어안고 주저앉아 끙끙거렸다. 솔직히 피할 수도 있는 걸 스승에 대한 예의로 한 대쯤 맞아준 거였는데 아파도 너무 아팠다.

“지, 진심으로 때렸어……. 대장, 진짜 사기 당했어요?”

“그래, 이 사기꾼 새끼야.”

피올은 하늘에 맹세컨대 스트라스티에게 거짓말을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스트라스티는 몹시 진심이었다.

“레이디 오드리와 친하다며? 네가 구출을 거들면 절대 섭섭하지 않게 할 거라더니 이게 뭐야. 너 작위 받는 데에 왜 보증인이 모자라?”

“아, 그거…….”

오드리의 구출 과정에 산트렘의 기사들이 기여한 부분은 대단히 컸다. 피올은 그들을 발톱섬으로 부르는 구실을 제공한 것과 본인의 활약을 인정받아 작위 수여의 대상이 되었다. 최근에 새로 작위를 받은 귀족이 둘이나 있는데 과한 포상이라는 의견도 있었지만, 적당히 무마하고 넘어가기엔 피올의 배경이 너무 든든했다.

그러나 결정이 나고도 작위 수여는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못했는데, 그건 피올의 보증인이 되어줄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피올은 스트라스티의 사나운 표정에 위기감을 느꼈다. 그는 여유를 부리지 못하고 다급히 변명을 시작했다.

“대장, 거기엔 사정이 있어요. 그게…….”

이름과 함께 과거를 버리고 치안대원이 된 이가 어디 피올 한 명뿐이겠느냐마는, 그들 중 작위를 받고 다시 치안대의 통제 밖의 인원이 되는 자는 역사적으로 봐도 드물었다.

첫째, 이름을 버린 이들치고 그럴 의욕이 있는 자는 거의 없다고 봐도 좋았고, 둘째, 새로 작위를 받는 일 자체도 대단히 힘들었다.

설령 이 두 가지를 극복하더라도 큰 장애물이 남아 있었으니, 바로 이름을 주는 카즈네 공작의 동의 여부였다. 사실 그의 동의가 꼭 필요한 건 아니었지만, 그의 비위를 거스를 만큼 용기 있는 자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스트라스티도 이런 사정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피올을 위해 사표를 던지고 용의 둥지에 들어갔다 나온 입장이었고, 그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부하도 있었다. 한데 일이 지지부진하게 밀리니 짜증이 안 날 수가 없다. 그녀는 피올의 변명을 중간에서 턱 잘라냈다.

“카즈네 공작에 관련된 걸 내가 몰라서 이러는 줄 알아? 솔직히 말해서, 타우레드의 족속들에겐 나도 눈곱만큼도 기대 안 해. 가계도에서 네 이름을 지우지 않은 것만으로도 할 일 다 했다고 하는 놈들인데 설마하니 네 보증인을 해줄까. 하지만…….”

“하하, 하하하……. 대장, 진정하고……. 켁!”

스트라스티가 덥석 피올의 멱살을 잡았다.

“레이디 오드리는 랄리우스 후작이자 가넷 남작이고, 그 흰 용 새끼도 아르젠 백작이라는 작위가 있어. 그 둘만 나서도 이렇게 일이 뒤로 밀릴 이유가 없는데, 이게 무슨 사태지?”

“그건 레이디 오드리가 요양 중이라…….”

“만탈락에 처박힌 건 두 달 전이고 깨어났단 소식 들은 건 한 달도 더 됐어. 한데 전보도 깔린 곳에서 편지 한 통도 안 왔지. 그런데, 뭐, 친해? 섭섭하게 하질 않아? 인마, 나는 지금 네 아내가 레이디 오드리와 사촌지간이 맞는지도 의심스러워.”

“대장, 그 말 네이기스가 들으면 엄청 서운해할걸요.”

피올의 변명은 들은 체 만 체 하던 스트라스티였지만, 네이기스의 이름이 나오자 어딘가 찔리기라도 한 것처럼 손에서 힘을 풀었다. 여긴 피올부부의 신혼집이었다.

“네 부인은 왜 그렇게 레이디 오드리를 좋아하는 거야?”

“그건 저도 좀 알고 싶네요. 네이기스는 레이디 오드리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마음에 들었다는데, 이유는 말해준 적이 없거든요.”

“레이디 오드리가 전보는커녕 편지 한 장 안 보내는데도 여전하다니 대단한 순정이야.”

“믿고 있는 거죠. 지금은 레이디 오드리가 아파서 잠시 소홀할 뿐이지, 돌아와선 다를 거라고.”

피올은 네이기스의 믿음을 말하고 있었지만, 그 대답 안에는 그의 믿음도 함께 담겨 있었다. 스트라스티는 잔뜩 미간을 찌푸리고 혀를 찼다. 그녀는 오드리의 침착함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만큼, 중요한 결정을 셰비언에게 미뤄 버린 회피에도 깊은 인상을 받았다.

“왜 다들 레이디 오드리를 그리 믿는지 모르겠다. 아무리 예전에 약속을 했다지만 레이디 오드리가 오스미다 전하를 정말 도울 건지도 의심스러운 게 솔직한 내 심정이거든.”

“……음.”

스트라스티는 피올이 곧장 반박할 줄 알았다. 아니면 변명이라도 좀 늘어놓거나. 한데 피올은 입을 열지 않고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어쩐지 등골이 서늘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슬그머니 뒤를 돌아보았고, 뜻밖의 인물과 눈이 마주쳤다.

“이모님.”

“……어, 라비린. 오랜만……이다?”

“예. 어제 저녁 식사를 함께했으니 무려 열 시간도 넘게 못 뵈었군요.”

“크흠.”

빙긋 웃는 얼굴이 어찌나 살벌한지, 스트라스티조차 기가 눌릴 정도였다. 어디 공식적인 업무라도 하다 왔는지 단추 하나까지 깔끔하게 채운 정장 차림이라 더욱 그랬다.

“고용인을 따로 두지 않는 조카의 집이라 마음이 편하신 건 이해합니다만, 그래도 입을 조심하셔야죠. 들으면 서운해할 사람이 많습니다.”

“세상 사람 전부가 레이디 오드리를 좋아할 순 없는 거 아니냐. 내 부하들 장례 치른 보람도 못 느끼고 있는데 불만 좀 가질 수도 있지.”

“피올 자식의 인맥이 부실한 건 오드리의 탓이 아닙니다, 이모님. 저놈이 치안대원 일을 하며 사방에서 미움을 사고 다닌 덕분이죠.”

난데없이 두드려 맞은 피올이 잔뜩 억울한 표정을 지었지만 라비린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그는 성큼성큼 실내로 들어와 모자를 벗은 뒤 소파를 차지하고 앉았다. 그 태연함이 마치 제집에 들어온 사람 같았다.

“귀족이 일개 치안대원을 기억할 일이 뭐가 있겠느냐마는, 피올 저 녀석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꽤 있더군요. 웬만하면 좋게 봐주길 바랐는데, 하나같이 평이 나빴습니다.”

피올은 즉시 항의했다. 나한테까지 넘어오는 놈들은 죄다 진상이라 그래! 어지간한 놈이 아니면 나한테 안 맡긴다고! 물론 라비린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스트라스티마저 그럴듯하다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오드리와 셰비언이 도움을 주길 바란다고 하셨죠. 마침 오늘 전보를 받았는데, 오드리의 몸 상태가 많이 회복되어 브란젤로 돌아오기로 했다는군요. 이모님의 의심은 곧 풀릴 것이라 기대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아, 그래…….”

“그보다 이모님께서는 강철새 주문 쪽에 더 신경을 쓰는 게 좋을 듯합니다. 군사적 목적에 맞는 구조를 따로 주문하셨다고 들었는데……. 아실지 모르겠지만 강철새의 지분 절반 이상이 로렐라이의 몫이거든요. 오드리가 노골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시하면 사하스바티의 반대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게 될 겁니다.”

“뭐?”

스트라스티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녀가 산트렘으로 돌아가지 않고 브란젤에 남아 있는 이유의 구 할은 강철새 때문이었다. 그녀는 발톱섬에서의 경험으로 강철새의 군사적 가능성에 대해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클로드에게 자신의 의견을 강력하게 피력했다.

마침 클로드도 강철새의 군사적 활용에 많은 관심이 있었던지라, 합의는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클로드가 자금을 대기로 했고 스트라스티와 산트렘의 기사들은 군사적 활용을 위한 개조 작업의 실험쥐를 자청했다. 강철새의 제작자인 워커는 돈과 시간만 여유롭게 준다면 뭐든 상관없다 했고, 로렐라이는 별다른 제스처를 보이지 않았다. 거기까지는 그야말로 일사천리였다.

문제는 다른 곳에서 발생했다. 사하스바티가 결사적인 반대 의사를 표시한 것이다. 본래 사하스바티는 타우레드 후작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사람이었으나, 최근 왕립 기계 연구소의 위상이 오르면서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는 일이 많아졌다. 그를 왕립 기계 연구소장 자리에 앉힌 사람이 클로드라는 걸 생각하면 거 참 재미있는 일이었다.

어쨌거나 강철새는 워커와 사하스바티 두 사람의 합작품이었다. 비록 워커가 시대에 남을 천재이긴 하지만 사하스바티도 그에 만만치 않은 천재였다. 워커가 아무리 용을 쓴들 사하스바티의 영역을 송두리째 대신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그 둘 수준의 강철새 전문가를 어디에서 또 찾는단 말인가?

좀처럼 진척되지 않는 강철새 문제 때문에 짜증이 나 있던 스트라스티에게 라비린의 말은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다. 그녀는 피올의 작위 문제 같은 건 새카맣게 잊어버렸다.

“로렐라이는 이미 동의했어.”

“락시 양은 어디까지나 부단주고 임시 수장이죠. 로렐라이가 별말을 하지 않았던 건, 진짜 수장인 오드리가 요양 중이라 의견을 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한데 이젠 오드리가 오는군요.”

“아무리 락시 양이 임시이고 레이디 오드리가 진짜 수장이라도 이미 결정된 사항을 멋대로 뒤엎을 순 없어. 그래서는 수뇌부의 결정에 무게가 실리지 않아. 락시 양과 함께 로렐라이와 데멘사의 경영을 대리하고 있는 네가 그런 말을 하다니, 어이가 없구나. 라비린, 정 내 성질을 긁고 싶다면 다른 것을 찾아보는 게 어때?”

“이모님. 해당 건에 대한 로렐라이의 결정은 유보 상태입니다. 어떻게 할 건지 입장을 정한 적이 없다는 거죠. 아직 오드리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니 수뇌부의 권위에 흠집이 날 일은 딱히 없습니다.”

“워커는……!”

“워커도 강철새에 개인적인 지분을 갖고 있는데 의견을 제시하는 것 정도야 얼마든지 할 수 있죠. 다만 이모님이 알아두셔야 할 게 있는데, 워커는 오드리의 의견에 반대 의사를 표시한 적이 거의 없습니다.”

라비린이 평온하게 말을 이을수록 스트라스티의 분위기는 점점 흉흉해졌다.

피올은 이 대화가 이루어지는 곳이 왜 하필 제집인가 원망하기 시작했다. 모처럼 맞이한 비번인데 초대받지 않은 손님들이 들이닥친 걸로 모자라 자기들끼리 멋대로 싸우기까지 하다니 이게 무슨 일인가. 네이기스가 작업실에 가느라 집을 비워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만탈락을 그렇게 키워놓은 걸 보면 레이디 오드리는 영리하고 이문에 밝은 사람이야. 강철새는 군용으로 썼을 때 가장 이득이 많다는 것쯤은 알 거다. 반대할 리 없어.”

“그거야 짐작일 뿐이죠. 혹시 압니까? 오드리가 경제적 이득이 아니라 강철새의 평화로운 보급에 더 관심이 많을지. 애초 오드리는 작위를 위해 돈을 벌었던 건데 그 목적은 이미 성취했잖습니까. 이젠 명예에 눈을 돌릴 때죠.”

“야, 라비린! 너 누구 편이야!”

“지금 이모님은 뒤에서 투덜대며 오드리의 욕을 하실 게 아니라 락시 양을 찾아가 그녀를 설득하셔야 합니다.”

로렐라이의 부단주, 이디케 락시가 오드리의 하녀 출신이라는 건 유명한 사실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그녀가 독단적으로 의사결정을 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믿지 않았다. 라비린이 얼굴마담으로 나서자마자 크게 주목받은 이유가 그래서였다.

하지만 그건 모르는 사람들의 착각이었다. 라비린이 없던 시기에 이디케가 얼마나 훌륭하게 상단을 꾸려왔는지 아는 사람들은 절대 그녀를 무시할 수 없었다.

라비린은 스트라스티에게 이 점을 분명하게 주지시켰다. 오드리가 돌아오기 전까지 로렐라이의 진짜 결정권자는 이디케라고 말이다.

“아버지가 락시 양의 동의를 받는 게 가장 좋지만, 아마 그건 힘들 겁니다. 락시 양은 아버지를 싫어하거든요.”

“왜? 클로드는 꽤 오랫동안 로렐라이를 지원했잖아?”

“예전에 오드리더러 양녀로 들어오라고 한 적이 있어서요. 하필 오드리가 한창 힘들 적에 그 얘길 해서……. 그 앙금이 아직 남았나 보더군요.”

“……로샨은 왜 그런 미친놈과 결혼한 걸까. 그놈이 내 제부가 된 뒤부터 두통이 가실 날이 없어. 재앙을 몰고 오는 사자 새끼 같으니라고.”

스트라스티가 시원하게 욕을 퍼붓는 동안 미친놈의 아들들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이모님……. 제가 지금 로렐라이의 내부 기밀을 유출하는 중이라는 사실을 좀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락시 양이 알면 저를 잡아먹으려고 들 겁니다.”

라비린은 군용 강철새 개발에 퍽 긍정적이었다. 그게 무엇이든, 새로 태어난 기술이 군사적 유용성을 가진 이상 언젠가 반드시 군사적 목적에 이용되기 마련이었고, 강철새도 그 운명을 피할 수 없을 게 분명했다. 그럴 바엔 이득이라도 챙겨야 하지 않겠는가.

“빌어먹을. 레이디 오드리에게 싫은 소리 하는 게 듣기 싫다는 라비린 네 속셈이 빤하긴 하다만 정보는 고맙다. 당장 가봐야겠군. 브란젤에 두 달이나 엉덩이를 비비고 있었는데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으니.”

“하하……. 행운을 빕니다.”

“재수 없으니까 웃지 마라. 생긴 것만 멀끔한 염병할 조카 새끼 같으니라고.”

폭풍처럼 쳐들어왔던 스트라스티가 걸쭉한 욕설을 남기고 사라진 뒤에야 형제는 긴장을 풀고 의자에 축 늘어졌다. 스트라스티가 휘두른 건 혓바닥뿐인데 구석구석 몽둥이로 두들겨 맞은 것처럼 피곤했다.

“야……. 오드리 아가씨가 온다는 거 진짜야?”

“그럼 거짓말이겠냐. 내가 마침 데멘사에 있어서 가장 먼저 받아봤을 뿐이야. 지금쯤이면 락시 양도 소식을 들었을걸.”

“너보다 대장이 먼저 찾아가면 락시 양이 금방 사정을 알아차릴 텐데. 뒷감당할 수 있겠어? 안 그래도 약혼 파기한 걸로 아직까지 미운털이 콱 박혀 있으면서 대담하네.”

“아, 그건 생각 못 했군. 이거 진짜 잡아먹히게 생겼는데.”

“등신 새끼.”

“됐어, 어차피 오드리 오면 내가 락시 양과 부딪칠 일도 없어.”

“하여간 의외로 긍정적이야. 여긴 뭐 하러 왔어?”

“받아.”

피올이 라비린이 던진 물건을 얼결에 받고 보니 왕립 은행의 계좌 열쇠였다. 열쇠 머리가 정교하게 조각된 데다 번쩍번쩍하게 금으로 도금까지 한 걸 보니 등급이 퍽 높아 보였다.

“사람 좀 고용하고, 집도 좀 바꿔라. 제기랄, 천장이 하도 낮아서 머리가 닿게 생겼잖아. 그래도 먼저 받은 돈으로 네 부인에게 작업실을 따로 마련해 준 건 잘했지만.”

“미친……. 내가 왜 네 돈을 받아? 당장 갖고 꺼져!”

“네놈이 아니라 화가 네이기스의 원활한 작품 활동을 위해 투자하는 거니까 허세 떨지 말고 받아.”

피올은 라비린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만큼 순진하지 않았다. 하지만 라비린이 네이기스를 걸고넘어지자 갈등이 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라비린은 피올이 무의식적으로 열쇠를 움켜쥐는 걸 보고서야 일어나 모자를 챙겼다.

“네 작위 보증인은 곧 나타날 거다. 굳이 오드리를 기다릴 필요 없어.”

“…….”

“내가 가을 전시회를 몹시 기대하고 있다고 전해줘.”

발톱섬이 가라앉은 지 두 달 만에, 라비린은 드디어 빚을 갚을 수 있게 되었다. 정작 받는 사람은 라비린이 왜 이런 걸 주는 걸까 의문에 빠져 있긴 했지만 상관없었다. 멋대로 진 빚이니 멋대로 갚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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