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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8. 심장의 향방 (51/62)

chapter 48. 심장의 향방

「가장 간절한 것이 가장 위험한 함정이 된다.」

공기는 물기 하나 없이 메말랐고 햇살은 폭력적으로 뜨겁다. 사방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키 작은 가시나무 몇 그루가 고작, 초록은 찾아볼 수가 없다. 그나마 다행인 건, 태양으로부터 몸을 숨길 만한 바위는 드물게나마 있다는 것이다.

라비린은 바위가 만들어준 그늘에 주저앉아 제 손을 바라보았다. 두툼하고 커다란 짐승의 앞발이 그가 원하는 대로 움직였다. 발톱을 넣고 빼는 것도, 발가락을 움직이는 것도 자유자재였다. 누렇고 짧은 털에서 반드르르 윤기가 흘렀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고개를 젓자 풍성한 갈기털이 함께 흔들렸다. 불안한 마음을 반영하는 듯 쫑긋 섰던 귀가 뒤로 젖혀지고 긴 꼬리가 좌우로 홱홱 움직였다.

꼬리를 흔들고, 귀를 움직이고, 발톱을 넣고 빼는 모든 감각이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그러고 보면 그늘로 들어오기 위해 네 발로 걸을 때도 딱히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본래 그렇게 태어났던 것처럼 말이다. 자리를 잡아 앉고 나서야 제 몸이 인간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흠……. 이게 그 안개의 효과인가? 현실처럼 생생한 환상을 보는 것? 앞뒤 가리지 않고 돌진하다 이 꼴이 났으니 이모님이 날 잡아 죽이려 하시겠어.’

나중에 스트라스티가 얼마나 화를 낼지 상상하면 조금 무섭긴 하지만, 그때 오드리에게 손을 뻗었던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어차피 마음을 따르기로 작정하고 나선 길이었다.

‘오드리도 이곳에 있을까? 찾으러 가봐야 하는데……. 지금은 너무…….’

라비린은 그늘에 털썩 엎드려 앞발에 무거운 머리를 얹었다. 자신이 어쩌다 짐승이 되어버렸는지는 몰라도, 지금은 잠이 쏟아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대로 잠들었던 라비린은 해질녘이 다 되어서야 깨어났다. 앞발을 모아 쭉 내밀고 기지개를 켜서 딱딱하게 굳은 관절을 풀고 크게 하품까지 하고 나서야 좀 정신이 들었다. 그는 네 발로 땅을 딛고 슬렁슬렁 걸었다.

허공에 아지랑이가 생길 정도로 뜨겁던 한낮에, 이 자갈사막은 그저 거칠고 척박한 땅이었다. 눈 닿는 곳 모두가 우울하고 황량했다.

하지만 저물어가는 해는 이곳에 특별한 마법을 부렸다. 하늘은 불타고 땅은 황금으로 뒤덮였다. 바닥을 구르는 돌멩이와 바위, 가시나무 아래를 쏘다니는 작은 도마뱀과 사막쥐 모두가 황금을 녹인 외투를 걸쳤다.

풍채 당당한 사자가 큰 나무도, 낭창한 뿔을 가진 사슴도 없는 사막을 걷는다. 멋들어진 갈기와 등을 황금빛으로 물들인 사자는 태양신이 기르는 짐승처럼 신성해 보였다.

사막을 헤매던 소녀는 이 사막에 있을 리 없는 짐승을 발견하고 제 눈을 비볐다. 너무 지친 나머지 자신이 헛것을 보는 게 아닌가, 하고. 하지만 사자는 헛것이 아니었다. 가까이 다가오는 사자에게서 느껴지는 압도적인 중량감과 위압감은 착각일 수가 없었다.

‘도망쳐야 하나?’

머리로는 안다. 저 사자가 진짜라면 지금 당장 도망쳐야 한다는 걸. 사자는 강력한 육식동물이고 어린 자신은 잡기 쉬운 먹잇감이니까.

하지만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번뜩이는 눈빛도, 낮은 숨소리도. 오히려 손을 뻗어 빽빽한 갈기털을 만져 보고 싶다니, 아무래도 너무 목이 마른 나머지 머리가 어떻게 된 모양이었다.

라비린 역시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긴 마찬가지였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어린 시절의 오드리였다. 그가 막 만탈락에 내려가서 봤을 때와 엇비슷한 연배로 보이니, 아마 열한두 살쯤일 것이다.

그는 지금 자신이 사자라는 것도 잊고 오드리에게 다가갔다. 어린 오드리와 눈을 맞추고 그녀에게 제 머리를 들이밀었다. 작은 손이 그의 콧잔등을 쓸고 턱을 어루만졌다. 소녀의 손은 보드랍고 따뜻했다.

“실렌다 사막에 사자가 산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는데…….”

라비린은 오드리의 말을 듣고서야 이 장소가 어디인지를 알았다. 실렌다 사막은 만탈락의 근처에 있는 사막으로, 이종족의 옛 유적지가 있는 걸로 유명했다. 동시에 만탈락 특산 시럽의 원료가 되는 선인장이 자라는 곳이기도 했다.

라비린은 한 번도 실렌다 사막에 관심을 가진 적이 없었지만, 그곳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에 대한 잔소리는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메이즈로서 만탈락에 정착해 적응할 때, 만탈락 토박이들이 외지인인 그를 놀려먹은 단골 소재가 실렌다 사막이었다.

오드리.

오드리는 라비린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암만 만져도 순하게 가만히 있던 사자가 갑자기 으르렁대니 놀라 팔을 움츠릴 뿐이었다. 하나 그것도 잠깐, 라비린이 움직이지 않으니 금세 다시 용기를 내어 갈기를 쓰다듬는다. 그런 오드리의 눈은 어린아이 특유의 호기심으로 빛나고 있었다.

이건 네가 꾸는 꿈이야?

“왜 자꾸 으르렁거려? 배고파서 그래?”

정말 네가 열두 살 어린애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난 배고픈 것보단 목마른 게 더 큰데.”

여기 온 건 뭔가 이유가 있어서겠지?

“우물 위치는 확실히 외워 왔으니까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크흠, 내가 이렇게 길을 못 찾을 줄은 몰랐어. 큼, 큼. 솔직히 어디 가서 길 헤맨 적은 없는데 여긴 정말 장난이 아니지 뭐야. 내가 직선으로 가고 있는 게 맞는 줄도 모르겠더라.”

오드리는 말을 하는 내내 몇 번이고 헛기침을 하고 침을 삼켰다. 가지고 온 물통이 빈 후로 마신 게 없어 목이 심하게 말랐다. 목소리가 자꾸 작아졌다.

“사자야, 넌 여기 어디에 물이 있는지 아니? 알겠지? 동물은 물을 잘 찾는다고 하니까 넌 분명 알고 있을 거야. 나 좀 안내해 줘!”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라비린은 조금 어처구니가 없어져서 대꾸했다. 대화가 전혀 안 되고 있는 데다 오드리의 말투가 정말 어린애 같았다. 등가죽이 저릿하도록 불길했다.

넌 대체 여기 왜 들어온 거야? 설마하니 시럽 만들 수액이라도 채취하러 온 거야? 아니면, 옛 유적지라도 탐방하려고?

“뭐라고 한 거야? 난 네 말 못 알아들어. 길게 말해봤자 모르니까 그냥 데리고 가주면 안 돼? 우물도 좋고, 오아시스도 좋아.”

나 참…….

대화가 되지 않는다는 건 역시 갑갑하다. 오드리는 한숨을 쉬는 사자를 보며 낄낄거렸다. 정말 자신의 말을 다 알아듣는 것 같았다.

“너 정말 똑똑한…… 사자……구나.”

오드리? 괜찮아?

말을 하던 오드리가 갑자기 머리를 붙들고 주저앉았다. 깜짝 놀란 라비린이 오드리를 툭 건드리자, 그녀는 인형처럼 힘없이 쓰러졌다.

이런 장난 재미없어. 당장 일어나!

오드리는 라비린과 만났을 때 이미 지독한 갈증과 피로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런 상태로 그와 대화 아닌 대화를 한 것만으로도 상당한 무리를 한 것이라, 말 몇 마디 한 것으로 체력을 모두 쓰고 정신을 잃은 것이다.

젠장, 이놈의 짐승 앞발! 아무리 내가 타우레드라도 진짜 사자가 되는 건 바란 적 없다고!

두툼한 사자의 발은 이런 자갈 사막을 걷는 데에는 유리해도 사람을 섬세하게 운반하는 데에는 심각할 정도로 쓸모가 없었다. 라비린은 몇 번의 시도 끝에 간신히 오드리를 등에 업는 데 성공했다.

짐승의 코는 발에 비해 훨씬 쓸모가 많았다. 라비린이 실렌다 사막에 대해 아는 건 떠도는 풍문 외엔 쥐뿔도 없었지만, 훌륭한 후각은 그를 수액으로 가득 찬 선인장으로 인도했다. 비록 선인장 수액을 오드리에게 먹이는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당장은 그저 기뻤다.

오드리는 선인장의 수액을 실컷 마시고 나서야 간신히 눈을 떴다. 밤하늘 가득히 채워진 별, 코를 스치는 싸늘한 밤공기, 그리고 바로 곁에 엎드려 체온을 나눠주는 사자가 그녀를 맞이했다.

“나, 안 죽었네. 꼼짝없이 죽는 줄 알았는데…….”

죽을 정도로 위험한 일이라는 거 알면서 혼자 나오다니 제정신이 아니야.

살짝 고개를 돌려 살펴본 사자는 앞발에 박힌 선인장 가시를 빼내느라 한창 고생 중이었다. 고기를 찢기에 적합한 송곳니는 가시를 뽑는 데에는 영 쓸모가 없어 보였다.

“내가 빼줄게.”

사자가 순순히 발을 내밀었다. 오드리는 짧고 억센 털 곳곳에 박힌 가시를 뽑아내며 이상한 감상에 사로잡혔다.

“지금 꼭 신화의 한 장면 같지 않아?”

네가 용과 마주친 것부터가 신화의 한 장면 같은 일이야.

“신화시대는 한참 전에 끝났는데 말이야.”

용이 다시 등장했으니 신화시대도 다시 시작이지.

“넌 대체 정체가 뭐야? 실렌다 사막은 사자가 살기에 적합하지 않은 곳이야. 난 실렌다 사막에 여우보다 큰 동물이 살 거라곤 상상도 못했어. 정말 태양신의 애완동물이라도 돼?”

그게 이제야 궁금해졌어?

라비린이 바싹 마른 코로 오드리의 이마를 살짝 밀었다. 나무라는 듯한 동작이었다. 오드리도 그를 느꼈는지, 코가 닿았던 제 이마를 붙들고 웃음을 터뜨렸다.

“하긴, 그걸 궁금해해서 뭐 하겠어. 네가 사람의 말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네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너 정말 일부러 이러는 거야? 넌 열한 살에 워커를 만났고, 열세 살에 로렐라이 운영을 시작했어. 진짜로 지금 자기가 어린애인 줄 알더라도 우리 아버지는 만나봤을 시기라고. 한데 날 보고도 타우레드의 사자 생각이 안 나?

“긴 설명 고마워. 내가 알아듣지 못해 다 미안하네. 사자야, 가시 다 뽑았어.”

오드리는 사자에게 앞발을 돌려주었다. 사자가 앞발을 싹싹 핥았다. 그 모습이 마치 고양이 같았다. 동물이란 동물은 죄다 피해 가는 자신에게 거리낌 없이 다가와 안겼던, 만탈락에서 친해진 단 한 마리의 고양이는 며칠 전에 죽어버렸는데. 갑자기 코가 시큰해졌다.

어린 오드리는 충동적인 성격이었다. 소녀는 사자의 목을 와락 끌어안고 매달렸다. 두꺼운 목은 두 팔로 감싸도 손끝이 닿지 않았고, 딱 기분 좋을 정도로 뜨거웠으며, 심장박동에 맞춰 두근거렸다. 풍성한 갈기털에선 거친 모래 냄새가 났다.

“구해줘서 고마워. 네가 아니었으면 난 정말 죽었을지도 몰라.”

오드리가 라비린의 이마에 키스했다. 그리고 눈꺼풀에, 콧잔등에, 앞발에도 키스했다. 라비린은 지나치게 친밀한 감사 인사에 놀라 몸을 빳빳하게 굳혔다.

사자에게 뽀뽀할 비위와 담력이 있으면 얼른 깨어나란 말이야. 이왕 받을 키스면 인간 모습으로 받고 싶다고.

“사자야, 넌 모르겠지만 네 눈은 정말 멋진 초콜릿색이야. 털색도 고운 밀색이고 갈기털도 이렇게나 멋져. 사자의 미추 기준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내 생각에 넌 정말 잘생겼어. 네가 만약 사람이었다면 대단한 미남이었을 거야.”

나도 나 잘생긴 거 알아.

“그러니 멋지고 잘생긴 데다 마음까지 고운 사자야, 길 잃은 불쌍한 소녀에게 오늘 밤 체온 좀 빌려줘.”

그 말 하려고 칭찬한 거구나?

사자가 자신을 해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한 오드리는 거침이 없었다. 라비린이 투덜대거나 말거나 그의 이곳저곳을 찔러가며 자세를 바꾸게 만들더니 온기를 찾아 그의 옆구리로 파고든다. 밤의 추위를 걱정한 라비린은 그녀가 자신의 갈기를 담요로 쓰도록 내버려 두었다.

“아, 따뜻하다.”

따뜻하다니 그나마 다행이네. 너, 준비도 제대로 안 하고 혼자서 사막에 들어온 이유가 대체 뭐야?

알아듣지 못할 걸 알면서 끊임없이 질문하는 걸 보면 라비린도 참 어지간한 인사였다. 하지만 그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오드리가 알아듣지 못하는 틈을 타 낯부끄러운 소리를 마구 해버릴 것 같았으니까.

너에게 충직한 그 하녀들이 널 여기에 혼자 보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 혹시 일행과 헤어지기라도 했어?

“여기서 이렇게 밤을 새우게 될 줄은 몰랐어. 조금만 구경하고 몰래 들어가려고 했는데……. 돌아가면 어머니에게 혼나겠다. 아, 이번엔 좀 크게 사고 쳤으니까 아버지에게도 혼날지도 몰라. 헨젤과 랄리우스의 후계자가 제 목숨 귀한 줄도 모르고 어쩌고저쩌고.”

라비린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이놈의 짐승 귀는 사막쥐 발소리까지 들을 수 있으면서 정작 사람의 말은 제대로 못 알아듣는구나.

“그러게 누가 금지목록을 그렇게 길게 만들래? 정작 어머니는 별 말씀 없으신데 아버지는 잔소리가 너무 많아! 이럴 줄 알았으면 여름휴가를 같이 보내자고 조르지 말 걸 그랬어. 어차피 돌아가면 볼 건데 내가 왜 그랬을까?”

라비린은 제게 몸을 기댄 오드리는 자신이 아는 오드리와 좀 다른 성장과정을 거쳤다는 걸 알게 됐다.

그녀에겐 자상하면서도 엄격한 어머니와 한없이 다정한 아버지가 있었다. 부모가 짊어진 두 가문의 이름을 모두 이어받게 될 귀한 후계자로서 대우받고 사랑받으며 성장했다.

다섯 살 터울의 남동생, 비마법 비행도구에 미친 마법사, 군마보다 더한 체격과 체력을 자랑하는 말, 독과 약에 모두 능한 하녀, 백작가 영애를 양녀로 삼고 싶어 하는 괴상한 후작, 멜브란트의 마법도구 시장 판도를 바꾼 상단 같은 건 없었다.

대신 상실도 울분도 없었다. 소녀는 그 나이에 맞게 반짝였다.

‘오드리. 네가 사랑하는 부모님이, 네가 살아온 인생이, 사실은 허상이라고 알려주는 게, 과연 좋은 일일까?’

라비린은 그만 눈을 감았다. 제게 기댄 소녀의 체온과 재잘재잘 떠드는 목소리가 그저 슬펐다. 그는 이 환상이 조금이라도 오래가길 바라고 말았다.

* * *

아이샤가 기어이 마지막 포인트를 부수는 데에 성공한 순간, 셰비언은 이제껏 억눌러 왔던 힘을 모조리 끌어냈다. 수십 개의 마법이 샤를레아를 옭아매고 그녀를 꿰뚫었다.

샤를레아가 보이지 않는 창에 꿰여 땅바닥에 처박혔다. 날개와 팔다리, 목을 고정당한 채 눈만 굴리는 그녀는 마치 핀에 박혀 고정된 나비 같았다.

“셰비언……!”

샤를레아는 옴짝달싹 할 수도 없는 제 처지는 생각지도 않고 몸부림을 쳤다. 꿰뚫린 상처가 계속 벌어져 그녀가 누운 땅이 뻘겋게 물들어갔다.

“넌 네가 원하는 걸 절대 가질 수 없을 거야, 영원히 잃게 될 거다, 너는……!”

“아까부터 같은 말을 계속 하네. 꼭 사하스바티의 자동인형 같잖아?”

“네 심장은 날 위해 쓰일 거야, 네가 건질 수 있는 건 핏물 한 방울도 없어!”

셰비언은 샤를레아가 뭐라고 떠들든 조금도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는 무심한 손짓으로 샤를레아의 목을 쓸었다. 샤를레아의 목덜미부터 척추, 꼬리까지 이어지는 비늘이 일제히 뒤집히며 속살을 드러냈다. 끔찍한 비명이 터졌다.

구석에 주저앉아 숨을 고르던 아이샤가 견디지 못하고 귀를 막았다. 샤를레아의 비명이 어찌나 처절한지, 자신도 모르게 동정심이 일어날 지경이었다.

하나 그건 어디까지나 아이샤에게나 해당하는 말이었다. 셰비언은 시끄럽다며 샤를레아의 긴 주둥이에도 창을 꽂고 비명이 되지 못한 신음소리를 배경음악처럼 흘려들었다. 그는 재미없는 책의 책장을 넘기듯 무심한 시선으로 뒤집힌 비늘에 새겨진 마법을 읽었다.

“역시 꼭두각시였네. 그래, 상대하기 쉬웠던 데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지.”

“네에? 상대하기 쉬웠다고요?”

아이샤가 경악하며 물었다. 따지고 싶은 말이 하늘에 닿아 있는 듯한 얼굴이었지만, 셰비언은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싸우는 와중에 다른 곳에 정신 팔 여유가 있었잖아. 충분히 여유로웠지.”

“세상에…….”

“이게 진짜 샤를레아였으면 내가 감히 널 보호할 여유가 있었을 것 같아? 넌 강철새에서 뛰어내리자마자 죽었어.”

아이샤는 살짝 부아가 났다. 저런 사람, 아니 용을 돕겠다고 내가 마력을 바닥까지 긁어 쓰고 이렇게 늘어진 건가? 나도 내 목숨 귀한 줄 아는 사람인데!

“연기력이 대단하시네요. 저는 진짜 밀리는 줄 알았다고요.”

“적을 속이려면 아군부터 속여야 하는 법이지.”

“세상에, 도움이 필요하다더니 그게 이런 도움을 말하는 걸 줄이야.”

“정말 도움이 되긴 했으니까 그렇게 한탄할 것까진 없다.”

셰비언이 지켜보는 가운데 샤를레아의 숨이 점점 가늘어지다 기어이 끊어졌다. 눈에서도 생기가 사라졌다. 셰비언은 샤를레아가 정말 죽었다는 확신이 설 때까지 기다린 다음에야 그녀에게 꽂았던 창을 뽑아냈다. 끈적끈적한 피가 마구 헤집어진 상처를 따라 흐르는 걸 무시하고 시신을 훌렁 뒤집었다.

샤를레아의 가슴과 배에는 오래된 상처와 새로운 상처가 뒤섞여 엉망진창이었다. 셰비언은 대강 피를 걷어내고 심장이 있는 곳을 노려 헤집었다. 검은 피가 픽 치솟았다.

“……이럴 줄 알긴 했지만…….”

셰비언이 깊이 탄식했다. 아이샤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샤를레아의 시신 구경을 갔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거대한 갈비뼈 안쪽, 심장이 있어야 할 곳이 텅 비어 있었다. 검은 피를 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얇은 피막만 비참하게 너덜거렸다.

“어, 용은 심장 반쪽을 날리고도 죽지 않는 종족이라고 듣긴 했지만……. 아예 없어도 될 정도인 줄은 몰랐는데요.”

“말했잖아, 꼭두각시라고. 이 미친년, 몸뚱이를 이따위로 굴리면서 새끼 운운하다니 양심도 없지.”

용족은 양심이 없는 게 특징 아니었어요? 아이샤는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을 꿀꺽 삼켰다. 시답잖은 농담을 하기엔 셰비언의 표정이 너무 무서웠다. 당장 몸보신이 필요하다며 자신을 꿀꺽 삼켜도 올 게 왔구나 하게 될 것 같았다.

‘용의 표정을 읽어봐야 쓸 곳도 없는데 눈치만 늘었어.’

쯧쯧 혀를 차던 중 돌연 몸이 둥실 떠올랐다. 혹시 속내를 들켰는가 싶어 지레 겁을 먹고 눈치를 살폈지만 그건 아닌 듯했다. 함께 날고 있는 셰비언의 눈은 땅에 남겨진 샤를레아의 시신에 고정되어 있었다.

“어차피 섬에 오르는 건 소수인데 왜 그리 많은 배와 마법사가 필요하냐고 물었었지?”

샤를레아와 싸울 땐 정신이 없어 보지 못했던 것이 눈에 들어왔다. 발톱섬에 정박한 배는 고작 세 척이지만, 그 외에 백여 척에 가까운 배와 그만한 수의 마법사가 섬을 둘러싸고 대기 중이었다. 햇살에 빛나는 바다에 흰 돛이 점점이 퍼진 풍경이 몹시 아름다우면서 견고한 느낌이 들었다.

“마법진……?”

“잘 봐. 이럴 때 써먹으려고 그 미숙한 놈들을 억지로 가르쳐서 끌고 온 거니.”

셰비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땅에 남겨진 샤를레아의 육신이 급격히 무너지더니 새카만 연기가 피어올랐다. 연기는 그냥 하늘로 날아가 사라지는 대신 의지라도 가진 것처럼 섬 전체를 휘감아 돌며 마법진을 그렸다.

용의 마법진은 마법 자체를 형상화하는 것. 마법을 잃은 샤를레아지만 그래도 마법의 종족인 용이었고, 제 몸뚱이를 제물로 써서 그려낸 마법진은 강력한 힘과 드넓은 범위를 자랑했다. 마법진이 삽시간에 섬을 죄다 집어삼키고 인근의 바다로 뻗어나간다. 발톱섬을 감싸는 급류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거친 파도 위에서도 존재감이 뚜렷했다.

아이샤는 자꾸 몸이 떨리는 걸 주체하지 못했다. 온몸의 털이 다 곤두서고 입이 바싹바싹 말랐다.

“제가 마법진에 조예가 깊지 못해서 확신할 수는 없지만……. 저거 위험해 보이는데요.”

“위험하지. 용의 내전 때에나 쓰이던 거거든. 잘 봐둬, 네가 저 마법진을 고스란히 익혀서 재현할 수 있다면 날 죽이는 것도 꿈은 아니니까. 용 살해자! 한때는 명예로운 칭호였어.”

“나 참……. 용이 제 육신을 죄다 제물로 써서 만드는 마법진을 저 혼자 만들라고요? 제가 하려면 골수를 다 뽑아 써도 모자랄걸요. 농담도 정도껏 해야 웃겨요.”

셰비언이 코를 울리며 웃었다.

“그보다 보통 마법사들로 저 마법을 막을 수는 있나요?”

“기다리면 알게 되겠지.”

이제나저제나 바다에서 대기하던 마법사들이 활약할 시간이었다. 거친 바다에서 파도와 싸워가며 제자리를 벗어나지 않고 대기하던 뱃사람들의 노고가 비로소 보답 받는 것이다.

삐이이이이―!

셰비언이 사전에 약속한 신호를 올렸다. 곧 바다에 떠 있던 배들에서 흰 빛이 솟구쳤다. 서로를 잇고 이어 만들어진 흰 마법진이 검은 마법진과 힘겨루기를 시작했다. 과연 마법의 주인이 만들어낸 마법진이라, 비록 시전하는 주체가 연약하고 수준 떨어지는 인간마법사라도 모자람 없이 제 역할을 한다.

“대단하네요. 저걸 막아내다니……. 한데 왜 직접 상대하지 않고 인간마법사를 쓰시는 거죠? 셰비언님이 나선다면 훨씬 빨리, 확실하게 정리할 수 있으실 텐데요.”

“아니. 난 오드리를 데리러 가야지. 저런 거랑 드잡이질 할 시간 없어.”

셰비언이 아이샤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이샤는 딸꾹질을 시작했다.

“저, 저는 왜 보세요? 셰비언님? 저기요?”

강력한 보호마법이 아이샤를 몇 겹으로 둘러쌌다. 아이샤는 미처 항의할 틈도 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그것도 새카만 안개가 꿈틀거리는 마법진의 중심에.

“이 튀겨먹어도 모자랄 용 새끼가!”

셰비언이 들을까 말조심할 여유도 없었다. 안개가 보호막을 사납게 물어뜯었다. 아이샤는 다급히 파괴마법부터 때려 박았다. 다행히 안개가 조금이나마 옅어지는 걸 보니 파괴마법에 영향을 받긴 하는 모양이었다.

“내가 이러다 제 명에 못 살지!”

효율이 끝내주는 파괴마법인데도 마력이 달려 눈앞이 깜빡거렸다. 하지만 여기서 쓰러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마법사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무병장수의 꿈은 버린 것이나 다름없지만, 적어도 죽을 땐 침대에 누워 죽고 싶었다.

한데 금방 바닥을 드러낼 것 같았던 마력은 의외로 오래 버텼다. 이제 끝장이다 싶은 순간이면 신기하게 새로운 마력이 솟아났다. 바다에 둘러싸인 섬이라는 지리적 이점이 그녀에게 힘을 보태는 것이지만, 그를 알 리 없는 아이샤는 그저 자신이 의외로 마력이 많았나 보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사위가 아득해지도록 마법을 썼다. 쓰고 또 쓰고, 새로이 채워지는 마력마저 아끼지 않고 퍼부어 마침내 바닥을 보았다. 아이샤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고서야 주변에 가득하던 검은 안개가 사라지고 없다는 걸 깨달았다. 마법진이 깨진 것이다.

히죽 웃음이 났다. 세상에, 내가 용의 마법진을 깼어! 보호마법을 뒤집어쓰고 중심부에서 직접 타격한 데다 수십 명의 다른 마법사들이 바깥에서 보조를 해줬지만……. 그게 다 무슨 상관이람, 결국 해낸 건 나인데!

조금만 더 기운이 남아 있었다면 펄쩍펄쩍 뛰었을 것이다.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자축했을 것이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다는 게 그저 아쉬울 따름이었다.

“……나 죽네…….”

기분 좋은 건 좋은 것이고, 안도감과 함께 잠이 쏟아졌지만 여기서 잠들 수는 없었다. 이곳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무인도라, 고기 뜯는 짐승 중 사람을 무서워하는 놈이 없었다. 누군가 데리러 올 때까지 깨어 있어야 했다.

하나 잠을 참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라면,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것이 눈꺼풀이라는 농담이 왜 나왔겠는가? 용케 형체를 유지하고 있는 바위에 기대어 웅크리고 있던 아이샤의 머리가 기어이 툭 떨어졌다.

그래서 아이샤는 제 앞에 사뿐히 내려앉은 강철새를 보지 못했다. 워커가 제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아이샤와 마법사를 너무 험하게 부려먹는 셰비언에게 욕을 퍼붓는 것도 듣지 못했다. 강철새의 조종석 옆자리에 단단히 묶여 해안가에 정박한 배에 실려 간 건 더더욱 모르는 일이었다.

셰비언은 아이샤를 마법진 한가운데에 던져 놓고 곧장 샤를레아의 둥지를 찾아 들어갔다. 샤를레아의 마력으로 가득 찬 둥지는 완강하게 셰비언을 배척했다. 인간에겐 그저 맡기 거북한 유황 냄새 정도였지만 셰비언에겐 실질적인 위협으로 작용했다.

“징그럽게도 막아놨네.”

남의 집에 멋대로 들어가는 주제에 말이 많다. 셰비언은 연신 투덜대면서도 계속해서 전진했다. 처음에는 그저 피부가 따끔할 정도였던 통증은 점차 심해져, 그가 동족의 관으로 가득 찬 방에 들어섰을 무렵엔 뾰족한 바늘 수십 개가 피를 따라 몸을 헤집고 돌아다니는 듯했다.

하나 그는 전신을 헤집는 통증보다 희미하게 느껴지는 오드리의 마력에 정신이 팔렸다. 머리로는 자신이 선물한 반지가 그녀를 지킬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까닭 없는 불안에 가슴이 뛰었다.

온갖 안 좋은 상상이 쏟아졌다. 발걸음이 급해졌다. 그가 걸어간 길을 따라 피에 젖은 발자국이 도장처럼 남았다.

셰비언이 알이 있는 가장 안쪽 방에 들어섰을 때, 인간들은 그를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검은 안개를 감싸며 치솟아 오른 난백이 자아내는 괴물을 상대하느라 바빴기 때문이었다. 좁지 않은 공동 전체가 피비린내로 가득했고 괴물의 시체가 카펫처럼 깔려 질척거렸다.

전체 상황을 지휘하던 스트라스티가 그를 알아보고 반색했다.

“아르젠 백작! 다행이로군, 우리 수고가 헛일은 되지 않은 것 같아서!”

난백에서 튀어나오는 괴물들은 숫자가 많고 재빨랐다. 인간이 아닌 것들의 움직임은 기묘했고 생각지도 못한 기술을 썼다.

아무리 산트렘의 기사들의 검술이 고명하고 나랍인 용병들의 임기응변이 뛰어나다고 한들, 고작 사십여 명의 인원이서 해결하기엔 벅찬 감이 있었다. 중상자의 숫자가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집단전과 난전에 익숙한 스트라스티의 지휘가 있어서 그나마 이만큼 버티고 있는 거였다.

그런 상황에서 셰비언이 나타난 것이니, 어찌 반갑지 않을 수 있을까. 파산 직전에 돈 빌려주겠다는 사람을 만났어도 이처럼 반갑진 않았을 것이다. 비록 그 상대가 실망스러워하는 기색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을지라도 말이다.

“인간들 사이에서 하도 유명하기에 뭔가 좀 다를 줄 알았는데.”

“안타깝게도 우리가 평생 배워 익힌 건 사람을 상대하는 법이지 저런 괴물을 잡는 방법은 아니어서 말이야. 그나저나 바깥 상황은 어떻소?”

그때쯤엔 싸우느라 정신없던 다른 사람들도 셰비언을 발견했다.

“샤를레아는 죽었어.”

“오!”

“대단한데!”

지쳐 어깨를 늘어뜨렸던 사람들의 사기가 확 올랐다. 내딛는 걸음이 가볍고 검에도 힘이 실렸다. 기분 탓인지 난백에서 나오는 괴물의 숫자도 좀 줄어든 것 같았다.

“도와줄까?”

“그래준다면야 대단히 좋겠지만……. 부상자에게 그런 걸 바랄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소.”

셰비언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제 몸을 살폈다. 그리곤 발아래에 고이는 피를 그제야 발견하고 놀란 표정을 짓는다. 피가 흐르는 줄도 몰랐다는 얼굴이었다. 하나 그것도 잠시, 그는 냅다 후방에 자리를 잡고 편안히 주저앉았다.

“쉬라는데 사양할 것 없지.”

이렇게 넙죽 받아들일 줄 몰랐던 스트라스티는 당황했고, 셰비언의 성격을 익히 알고 있던 피올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대장, 셰비언한테는 그냥 말해도 돼요.”

“대장이 언제부터 그렇게 예의가 넘치고 체면을 차리는 사람이었다고 엉덩이를 뒤로 빼요?”

“그러게! 그냥 도와달라고 하지!”

“대장이 경어 쓰는 거 진짜 오랜만에 본다. 아, 소름 끼쳐! 대장, 왜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래요? 카론 백작님께도 반말 찍찍 하시던 분이!”

와하하하―. 웃음이 터졌다. 스트라스티가 얼굴을 붉히고 소리를 질렀다. 시끄러워, 이놈들아!

“간만에 미남이 옆에 오니까 마음이 설레서 그랬다, 왜!”

“세상에, 남편도 있으면서!”

“부군께 이를 겁니다!”

“일러라, 일러! 괜찮아! 내 남편은 얼굴에 관한한 나보다 더 객관적인 남자니까!”

“저걸 자랑이라고…….”

“야, 너네도 미녀 보면 설레잖아! 다 알거든!”

“그건 그렇지만 굳이 떠들지는 않습니다!”

오른 사기만큼이나 말들도 많아졌다. 스트라스티는 자신도 어색한 존대를 집어치우고 셰비언에게 뒤늦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하고 말았다,

“아, 왜! 아깐 도와준다며!”

“몸 상태가 나빠. 입으로 도와주지.”

“맙소사, 얼굴로 번 점수를 다 깎아먹는 대답 잘 들었어.”

결론적으로 말하면, 셰비언이 입으로 도와주는 건 크게 도움이 됐다. 이제껏 마구잡이로 상대해 왔던 괴물들의 약점과 효율적인 사냥법을 고스란히 읊어주었으니까. 인간들은 한결 여유롭게 괴물을 상대할 수 있게 되었다.

셰비언은 숨을 깔딱대는 중상자를 적당히 운신 가능할 정도로 회복시키며 거대한 알처럼 치솟은 난백의 크기를 가늠했다.

세상에 대가 없이 태어나는 결과물이 없는 것처럼, 난백이 괴물을 자아내는 것에도 한계는 있었다. 난백은 인간들이 괴물을 제거하는 만큼 줄어들었고, 그만큼 안에서 꿈틀거리는 검은 덩어리의 형체는 점점 뚜렷해졌다.

셰비언은 그를 보며 조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제 새끼에 집착하더니만, 필요하다 싶으니 아낌없이 재료로 썼어. 태어나지 못하고 썩어 문드러졌대도 제 새끼인 것을…….’

어쨌거나 셰비언과 샤를레아는 동족이었고 같은 시대를 살았다. 필요하다는 이유만으로 인간마법사를 잡아먹은 것도, 섬 전체에 마법진을 그려 넣고 방문하는 인간의 마력을 빨아먹은 것도, 단 한 명의 인간의 복수를 위해 난리를 치는 것도, 용납할 수는 없을지라도 이해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태어나지 못한 새끼의 시신을 제 육신을 재구성하는 양분으로 쓰다니, 이건 좀 너무하지 않은가. 내전 중에 죽은 동족의 시신은 정성스레 관까지 만들어 둥지 안에 안치했으면서 말이다.

이 공동에 셰비언 혼자만 눈이 달린 건 아니었다. 괴물을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던 사람들도 슬슬 난백이 줄어들었다는 걸 알아채고 셰비언에게 해명을 요구했다. 동족의 미친 짓을 자세히 설명하기 싫었던 셰비언이 미간을 구겼다.

“내가 만든 것도 아닌데 왜 나한테 설명을 요구해?”

“본인 입으로 자신은 마법의 주인이라고 그랬잖아? 뭐라도 알겠지. 게다가 동족이잖아. 설마 백작 당신은 난생이 아니라 태생인가?”

“아, 씁……. 난백은 알 속의 새끼를 지키는 역할을 해. 새끼가 커지면 그에 맞춰 점점 사라지지.”

사람들의 표정이 나빠졌다. 검은 안개는 이제 완연한 검은 덩어리가 되었고, 심지어 맥동하는 듯 꿈틀거리기까지 했다. 만약 겉도 속처럼 붉었다면 영락없이 거대한 심장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피올은 저 덩어리에 갇혀 있을 오드리와 라비린을 생각했다. 그들이 아직까지 살아 있을까? 솔직히 회의적이었다. 가슴이 답답해졌다.

“샤를레아는 죽었다며. 그런데도 저게 자란다고?”

“본래 알은 환경만 맞으면 모체와 상관없이 성장해.”

“그거야 알지. 하지만 난백은 있어도 난황은 없고, 마력을 공급하는 마법진도 깨버렸는데 어떻게 새끼가 자란다는 거야?”

“난황이 왜 없어? 마력을 실컷 빨아들인 시체가 다섯 구나 있는데 그걸 쓰면 되지.”

사람들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그중에서도 스트라스티가 유독 싸늘했다. 제게 덤비는 괴물의 머리통을 밟아 빠개는 군홧발에 감정이 잔뜩 실려 있었다.

“이 알……. 샤를레아의 알 아니었어?”

“맞아.”

“난황은 알 속의 새끼를 위한 밥주머니라고 들었어. 백작의 말 대로면, 샤를레아는 태어나기 전의 자기 새끼를 밥주머니로 썼다는 건가?”

“정확히 말하자면, 태어나지 못하고 썩어버린 새끼의 사체를 먹이로 쓴 거지.”

“그거 참 합리적이면서 소름끼치는 답변이야. 태어나지 못했으니 그저 고깃덩어리라는 거군.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그 이성적이고 냉정한 판단력은 용의 종족적 특성인가?”

설명서를 읽듯 건조한 스트라스티의 어조가 더없이 굴욕적이다. 셰비언은 화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샤를레아는 미쳤다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을 거지?”

“미쳤다는 말이 무색할 냉정함에 새삼 감탄했을 뿐이야. 백작, 뭘 그리 예민하게 반응해?”

“종족적 특성 따위의 말을 입에 담고도 예민하지 않길 바라는 건가? 내가 비록 인간의 어법에 익숙하지는 않지만, 경이 방금 나와 샤를레아를 한데 묶어 빈정댄 걸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니라서 말이야.”

“그러게 그 생각 자체가 착각이라니까 그러네.”

아직 괴물을 다 잡은 것도 아닌데 분위기가 살벌해졌다. 제게 달라붙는 괴물을 걷어차 떨어뜨린 피올이 두 사람 사이에 다급히 끼어들었다.

“아니, 진짜 적을 앞에 두고 둘이 왜 싸우는 건데요? 대장 사정은 알지만 괜히 시비 좀 걸지 마요. 셰비언 너도 그렇게 예민할 이유가 뭐가 있어? 레이디 오드리를 구하러 온 건 둘 다 똑같은데! 적당히 합시다, 적당히. 정 싸우고 싶거든 일 다 끝나고 나서 싸워요. 혹시 그때 참관인 필요하면 나 부르고.”

말리는지 부추기는지 모를 중재였다. 그래도 오드리의 이름을 꺼낸 것만으로도 둘의 기세가 한결 누그러졌다. 스트라스티가 피올의 어깨를 퍽 소리 나게 쳤다.

“말재간이 이따위인데 치안대 일은 대체 어떻게 하는 거냐? 모르긴 몰라도 중재해야 할 일이 꽤 많을 텐데 사람들이 네 말을 들어주든?”

“법은 멀어도 주먹은 가깝죠. 검 한 자루에 치안대의 권위를 더하면 웬만한 건 다 해결돼요.”

“카즈네 공작이 골치 좀 썩겠는걸. 어쩌다 너 같은 걸 받아가지고…….”

“대장,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아무리 저라도 좀 상처가 되거든요? 제 연락 한 통에 여기까지 달려와 줬으면서 그렇게 말하고 싶어요?”

“안 그래도 후회 중이니까 기름 붓지 마라. 그놈의 의리가 뭐라고 내가 여기서 이 고생을 하고 있지? 젠장!”

피올은 그냥 웃었다. 부르면 언제든 와줄 거였으면서 괜히 해 보는 말이라는 걸 빤히 아는데 거기다 말을 보태봤자 욕만 더 먹을 게 뻔했다. 모르겠는 건 다른 쪽이었다.

“셰비언! 샤를레아가 죽은 제 새끼를 양분으로 삼아서까지 키우려던 저거, 대체 정체가 뭔지 알아? 처음엔 그저 좀 거무스름한 안개였는데 지금은 뽑아놓은 심장 같아.”

“정확히 봤어.”

셰비언은 제 몸 상태를 점검했다. 샤를레아의 둥지 가장 깊은 곳에 들어와 있는 것치고 이 정도면 나쁘지 않았다. 적어도 출혈은 막았으니까.

“샤를레아를 죽이고서 가슴을 갈라봤는데 심장이 없더군. 어디다 뒀나 했더니 저기다 처넣어 둬서 없던 거였어.”

“……뭐?”

“아까 나와 싸우던 건 꼭두각시더라는 얘기야. 저걸 내버려 두면 샤를레아가 새 몸을 갖고 다시 태어나게 될걸.”

피올은 스트라스티도 자신과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보고 적이 안심했다. 자신이 멍청해서 못 알아듣는 게 아니었다. 셰비언이 하는 말이 그만큼 비상식적인 거였다.

“마력을 공급받을 알은 깨져 버렸는데 저 마법진이 왜 빛나고 있다고 생각한 거야? 어두우니까 조명 대용으로? 아니면 보기 좋으라고?”

“……하긴, 이 섬에 올라온 이후로 상식적이라고 할 만한 일이 없긴 했지. 그렇게 생각하면 이건 되게 자연스러운 흐름 같기도 하고……?”

“샤를레아의 육신을 재구성하는 재료 중 하나가 오드리야. 저 심장 안에 있을 테지……. 내가 직접 들어가서 끄집어내야 해.”

“저기, 좀 자세히 설명해 주면 안 될까?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거든?”

“잠깐 설명한다고 알아들으면 네가 마법사지 검사겠냐. 내가 돌아올 때까지 괴물이나 열심히 잡고 있어. 중상자들 대충 치료해 놨으니까 잘 굴려보고.”

셰비언이 전력 외 인원이 되었던 중상자들을 치료해 준 건 마력이 썩어 넘치거나 마법을 쓰기 편해서 따위의 이유가 아니었다. 계속 난백을 소모시켜 줄 전력은 한 명이라도 많은 게 좋았기 때문이었다.

이런저런 주의사항을 읊고 마지막 당부까지 마친 셰비언이 마법진을 밟기 직전, 피올이 다급히 그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라비린! 저 안에 라비린도 있어!”

“……라비린? 라비린이 저기 왜 있어?”

“안개가 잠깐 벌어졌을 때, 오드리 아가씨를 꺼내려다가 그대로 끌려 들어갔어. 재수 없는 자식이긴 하지만 그래도 아가씨를 구하려던 성의를 봐서 데리고 나와줬으면 좋겠는데!”

놀려먹을 때는 쉽게도 튀어나오던 형이란 말이 이럴 땐 도무지 나오질 않는다. 셰비언이 눈살을 찌푸리고 침묵한 잠깐 동안 피올의 머릿속은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해졌다.

“내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아서 장담할 수가 없는데. 한 명과 두 명은 난이도가 전혀 달라.”

“벨키스 경은 내 결혼식의 증인이야. 네이기스를 봐서라도…….”

“노력은 해 볼게.”

피올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형제를 가져 본 일이 없는 셰비언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감정변화였다.

* * *

사자를 두고 흔히 백수의 왕이라 한다. 날카로운 이빨, 두툼하고 강력한 앞발, 전신을 덮은 근육, 예민한 코와 귀……. 햇살을 두르고 사막에 선 라비린에게선 최상위 포식자다운 위엄이 흘러넘쳤다.

하지만 어디 위엄이 밥을 먹여주던가? 지난 며칠 동안, 라비린은 사막에 여우 이상으로 큰 짐승이 살지 않는 이유를 여실히 깨달았고 오드리는 육식동물이라고 다 사냥을 잘하는 건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사자야. 너 정말로 태양신의 짐승이니?”

무슨 말을 하려고 그래?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사냥을 못할 수가 없어. 그 덩치는 대체 뭘 먹고 키운 거야? 선인장 수액? 땅쥐?”

빵이랑 고기 먹고 컸다, 왜.

“뭐라도 잡아봐. 배고프지 않아?”

……나라고 사냥 못하고 싶어서 못하는 게 아니라고. 이 덩치로 이렇게 트인 곳에서 사냥을 잘하면 그게 더 이상한 거야.

라비린은 불만스럽게 투덜거렸지만 오드리는 진심으로 걱정하는 거였다. 인간인 자신이야 선인장 수액과 과육으로도 어느 정도는 견딜 수 있지만 사자는 거의 굶다시피 했다. 우물을 찾지 못해서 물도 마시지 못했는데도 수액은 질색하고 외면했다.

아, 안 먹는다니까. 너나 실컷 마셔.

“끼니는 굶어도 되지만 물을 안 마시면 죽어. 풀내가 나더라도 좀 참고 먹으면 안 돼?”

됐거든. 너나 먹어, 너나.

오드리가 자꾸 권하는 수액은 라비린이 몇 번 핥으면 다 사라질 것처럼 적었다. 라비린은 몇 모금 안 되는 수액을 탐하는 대신 자꾸 걸음이 느려지는 오드리를 등에 태우고 사막을 걸었다. 버석거리는 공기 속에서 달콤하고 시원한 물 냄새가 맡아졌다.

조금만 더 가면 되니까 참아.

오드리는 사자의 등에 엎드려 모든 걸 맡겼다. 사자의 움직임은 우아하고 부드러워 흔들림이 적었고, 갈기에 얼굴을 처박고 있으니 햇살이 눈을 찌르지 않아 좋았다. 따끈따끈한 체온이 온몸으로 전해지자 배고프고 목마른데도 잠이 쏟아졌다. 고삐 대신 갈기를 움켜쥐고 있던 손이 툭 떨어졌다.

자냐? 자? 잠이 와?

라비린은 제 등에서 잠들어 버린 오드리 때문에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지경이었다. 아무리 해치지 않을 거라고 확신을 했다고 해도 그렇지, 며칠을 굶은 육식동물의 등에서 태평하게 잠을 자다니.

어떤 환경에서 자라든 그 굵직한 신경줄은 그대로인가 보네. 타고난 건가.

만탈락이 어느 방향에 있는지도 모르고, 자신을 찾으러 와야 할 사람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데도 이만큼 태평하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러고 보면 처음 만났을 때도 사자를 보고 놀라기는커녕 대뜸 손부터 내밀었었다.

내가 비록 네 대담함을 사랑하긴 하지만 이렇게까지 대담할 필요까진 없는 거 같은데 말이야……. 이러다 큰일 난다, 너. 아무나 턱턱 믿고 그러지 마.

듣는 사람 없는 잔소리를 구시렁대는 라비린의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아까부터 그의 코를 끌어당기던 물 냄새가 점점 진해지고 있었다.

앞도 뒤도 매양 똑같기만 한 사막을 한참 동안 걸은 끝에, 라비린은 마침내 말로만 들었던 오아시스에 도착했다.

모래와 돌이 흩어진 자갈사막 한가운데에 불쑥 솟아난 나무와 거짓말처럼 무성한 풀숲, 그리고 그 가운데에 담긴 호수……. 뜨거운 햇살은 나뭇잎에 걸러져 한풀 기세가 꺾였고 열기를 품고 코를 괴롭히던 바람은 싱그러운 풋내로 사각거렸다. 호수의 수면이 바람결에 흔들리며 반짝거렸다.

뭐가 이렇게 비현실적이야?

라비린은 오아시스를 두고 사막의 진주라고 떠들어대던 호사가들의 머리통을 후려치고 싶어졌다. 그런 말로 표현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풍경이지 않은가. 하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찬사를 가져다 붙여도 모자랄 게 틀림없으니 오롯이 그 사람들의 잘못이라고만 할 순 없을 것이다.

오드리, 일어나.

“우으응…….”

계속 이렇게 잘 거야? 일어나, 일어나라고.

라비린이 이리저리 몸을 흔들었지만 오드리는 칭얼거리기만 할 뿐 좀체 일어나질 않았다. 도리어 가만히 있으라는 것처럼 목을 콱 끌어안기까지 하니, 결국 라비린은 오드리를 등에 태운 채 나무그늘에 엎드리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사자 등에서 떨어지지도 않고 잘 자던 오드리는 땅거미가 내릴 때가 되어서야 잠에서 깨어났다. 비몽사몽 눈을 깜빡이다 슥슥 눈을 문지른다.

“내가 혹시 죽은 걸까?”

녹아내린 황금으로 가득 찬 것 같은 호수도, 화가가 거친 붓으로 그려 넣은 듯 무성한 검은 숲도, 불타는 듯 붉은 하늘과 황금원반 같은 태양까지도 현실이 아닌 환상 같았다. 어쩌면, 제 밑에 침대처럼 깔린 사자를 만났을 때 이미 죽은 상태였던 건지도 모른다. 죽고도 죽은 걸 몰라서 망령이 되어 떠돌고 있는 건지도.

물론 라비린이 듣기엔 그렇게 멍청한 소리가 또 없었지만.

죽긴 누가 죽었대? 깼으면 비키기나 해.

겨우 오드리를 떼어놓은 라비린은 아까부터 구경만 하고 있던 물을 허겁지겁 들이켰다. 황금을 녹여 채운 듯한 호수의 물은 차갑고 달았다.

오드리는 라비린이 목을 축이는 동안 멍하니 주변을 구경하느라 넋을 빼놓고 있었다. 그러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돌연 옷을 벗어던지고 속옷 차림으로 호수로 뛰어들었다. 그것도 모자라 라비린에게 마구 물을 튀기니, 코에 물이 들어간 라비린이 거하게 재채기를 한다.

“하하하하!”

뭐 하는 짓이야!

푸르릉, 푸르릉, 덩치만큼 거센 콧바람에 수면이 마구 흔들렸다. 호수에 담겼던 나무와 태양도 형태를 잃었다. 머리까지 호수에 담가 모조리 젖은 오드리가 무방비하게 웃으며 손짓했다.

“사자야, 너도 들어올래?”

미쳤어!

“아, 혹시 사자도 물을 싫어하나?”

아무데서나 옷을 훌렁훌렁 벗고!

“그래도 한 번쯤은 물로 씻는 것도 나쁘지 않아. 들어와, 내가 꼼꼼하게 잘 씻겨줄게.”

물에서 머리만 내밀고 있던 오드리가 기슭으로 걸어 나왔다. 뽀얀 목덜미를 따라 흐른 물방울이 어깨와 등을 따라 미끄러졌다. 풀어헤친 머리칼이 해초처럼 몸에 감겨 위험한 부위를 아슬아슬하게 가렸다.

나오지 마!

라비린은 차마 계속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오드리가 어린 소녀의 모습이었기에 더더욱. 그는 그 자리에서 꽁지가 빠지게 도망치고 말았다.

선의로 가득 차서 사자를 씻겨주고 싶었던 오드리는 라비린의 도주를 아쉬워하며 혀를 찼다.

“앞발 핥는 것도 고양이 같더니 물 싫어하는 것도 똑같네.”

오드리는 만탈락의 말썽꾸러기들과 어울리면서 그네들에게 수영을 배웠다. 물살이 거센 강도 아니고 이렇게 잔잔한 호수는 그녀에게 욕조에 받아놓은 물과 다를 바 없었다. 작은 몸이 능숙하게 물을 헤집으며 헤엄쳤다.

이 호수는 사막의 오아시스라곤 믿어지지 않게 수량이 풍부했다. 가장 깊은 곳의 수위가 어느 정도인지 감히 가늠이 되지 않았다. 숨이 허락하는 한계까지 잠수하며 내려가던 오드리는 결국 바닥을 확인하지 못하고 수면 위로 솟구쳤다.

싸늘해지기 시작한 공기가 폐를 적셨다. 오드리는 물 밖으로 나가는 대신 그대로 수면에 드러누웠다. 눈에 보이는 하늘은 화가의 팔레트만큼이나 다채로운 색으로 물들어 화려한데 귀가 물에 잠겨서인지 세상은 먹먹하리만치 조용하기만 했다. 이 세상에 남은 사람은 혼자뿐인 것만 같은 아득함이 밀려왔다.

‘졸립다.’

조금 전까지 실컷 잤는데도 잠이 쏟아졌다. 눈꺼풀이 어찌나 무거운지, 이대로면 물에 뜬 채로 잠들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물고기도 아닌데 그럴 수 있을 리 없으니 얼른 나가야지 생각은 했지만 생각으로 그칠 뿐이었다.

귓가에서 찰랑대던 물이 점점 수위를 높여갔다. 아니, 사실은 물이 차오르는 게 아니라 몸이 아래로 가라앉는 것이다. 바닥없는 늪에 끌려 들어가는 것처럼, 그렇게.

두렵다거나 하진 않았다. 기묘한 행복감, 일체감이 느껴졌다. 빛이 일렁거리는 수면을 아래에서 바라보면서도 당연히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좀 이상한 거 같은데…….’

자신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걸 자각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간신히 팔다리를 휘저어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떠오르기는커녕 점점 더 아래로 가라앉기만 한다. 사위가 점점 어두워졌다. 머릿속에 안개가 끼는 것처럼 사고가 뿌옇게 흐려지고 아득히 멀어져, 누군가를 불러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기 어려워졌다.

느릿하게 깜박이던 오드리의 눈꺼풀이 기어이 감겼다. 용케 참고 있던 숨이 새어 나와 수면을 향해 올라갔다. 마냥 가라앉던 몸이 호수의 바닥에 닿았다. 그녀는 깊고 안락한 침묵에 잠겼다. 일찍이 경험해 본 적 없었던 편안함이었다.

쿵!

침묵이 깨졌다.

쿵!

누군가 귓가에 대고 커다란 북을 치는 것만 같았다.

쿵!

오드리는 소음을 견디지 못하고 눈을 떴다.

쿵!

물 전체가 요동쳤다. 거센 충격이 몸을 휩쓸고 둔하게 굳었던 머리를 두드려 깨웠다. 오드리는 당황해 주변을 살폈다. 자신이 빛이 거의 닿지 않을 정도로 깊은 물속에 있다는 걸 깨달은 순간, 당장 올라가야 한다는 위기감이 솟구쳤다. 수마는 순식간에 날아갔다.

오드리는 있는 힘껏 팔다리를 휘저으며 수면을 향해 상승했다. 조금 전까지 이루 말할 수 없이 안락하고 편안하게 느껴졌던 물이 팔다리를 마구 잡아당겼다. 젖 먹던 힘까지 모조리 짜내어 쓰고 있는데도 수면이 너무 멀었다.

‘안 돼.’

숨이 모자랐다. 갈비뼈 아래에서 심장이 힘겹게 팔딱거리는 게 느껴졌다. 시야가 까맣게 점멸하고 목구멍이 조여들었다. 아득한 절망감이 밀려왔다.

이런 끝을 맞이하려고 실렌다 사막에 발을 들인 게 아니었는데!

오드리의 팔다리에서 힘이 빠져 늘어지려던 순간, 누군가 호수로 뛰어들었다. 어둔 수중에서도 빛나는 은발을 길게 늘어뜨리고 내려온 그가 곧장 오드리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물속에 한참이나 있었던 오드리만큼이나 차가운 손이었지만, 그녀는 그런 건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자신을 바라보며 미소 짓는 옅은 푸른색 눈동자에 완전히 사로잡혔기 때문이었다. 조금 전까지 그녀를 지배하고 있었던 절망감이나 기이한 일체감 같은 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심장이 거세게 뛰는 이유가 과연 숨이 모자라서일 뿐일까?

그는 차가운 손으로 오드리의 뒷목을 감싸고 자신에게로 끌어당겼다. 입술이 맞물리고 달콤한 숨이 밀려들었다. 오드리는 허겁지겁 숨을 받아 마셨다.

숨을 건네받는 중에 누구도 눈을 감지 않았기에, 두 사람은 서로의 눈을 계속해서 볼 수 있었다. 아름다운 색상의 홍채, 가느다랗게 떨리는 촘촘한 속눈썹, 웃음을 담고 살그머니 휘는 눈매 같은 것들을.

푸하! 마침내 수면으로 올라왔건만, 오드리는 밤이 내린 오아시스의 풍경을 감상할 정신이 없었다. 그녀는 저를 안은 남자의 미모를 황홀해하며 바라보았다.

별빛을 머금은 것만으로도 우아하게 반짝이는 은발과 테이블에 엎지른 우유처럼 희고 잡티 없이 매끄러운 피부, 조각가가 정성을 다해 빚어낸 듯한 섬세한 이목구비. 무엇보다 얼어붙은 강처럼 옅은 푸른색의 눈동자가 남자의 차가운 미모를 완벽하게 만들었다.

“당신은……. 요정님인가요?”

“네?”

“아니면, 천사님?”

셰비언은 어깨를 떨며 웃음을 참았다. 오드리는 본래도 솔직한 편이었지만, 이곳의 어린 오드리는 그녀보다도 훨씬 솔직하고 직선적이었다. 어느 쪽이든 사랑스럽다는 것은 같았지만 말이다.

그는 언젠가 그랬듯이 어린 오드리에게도 기꺼이 미인계를 썼다. 오드리가 충분히 볼 수 있도록 느릿하게, 하지만 너무 유혹적으로 보이진 않도록 주의하며 얼굴의 물기를 닦아내고 젖은 머리칼을 넘겨주었다. 농밀하되 은근한 접촉 같은 것과는 아직 거리가 있었던 소녀의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글쎄요……. 내가 누구일까요?”

“마, 말해주지 않으면 멋대로 생각할 거예요.”

“이런, 그 말을 들으니 갑자기 심술이 나네요. 멋대로 생각할 내용이 뭔지 듣고 싶어졌어요. 꼬마 아가씨, 내게 당신의 생각을 들려주겠어요?”

오드리는 속절없이 미인계에 휩쓸렸다. 모양 좋은 손가락으로 다정하게 뺨을 쓸고 전설 속의 인어를 떠올릴 만큼 아름다운 목소리로 귓가에서 속삭여 대니 어디 배겨날 수가 있나.

“요정님이라고 생각했어요……. 눈 내린 들판을 지키는, 설원의 요정님.”

“여긴 사막인데요?”

“눈이 녹으면 물이 되잖아요. 태양이 너무 뜨거워서 녹아내린 것 아닌가요? 요정님?”

아름다운 눈매와 입술이 한껏 휘어 곡선을 그렸다.

아, 내가 틀렸구나. 오드리는 제 오답을 겸허히 받아들였다. 어쨌거나 그가 웃었으니 되었다.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숙녀라면 미남의 웃는 얼굴을 아낄 줄 알아야 한다고.

“제 이름은 셰비언이에요. 오드리 아가씨를 구하러 왔답니다.”

“아버지께서 보내신 분인가요?”

오드리가 기대에 차서 눈을 빛냈다. 지난 며칠 간, 겉으로 티를 내진 않았지만 사실 오드리는 많이 불안했더란다. 실렌다 사막이 아무리 넓고 자신이 아무리 길을 헤맸더라도 어린애의 걸음은 한계가 있는데 수색하는 사람을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는 게.

“사자가 사람을 피해서 움직인 건 아닐까 의심도 해 봤지만, 그렇게 의심하기엔 미안할 정도로 영리한 짐승이었거든요. 너무 늦은 감이 있긴 해도 이제라도 만나서 다행이에요.”

오드리의 미소는 찬란할 정도로 눈부셨지만, 셰비언의 표정은 살짝 굳고 말았다. 제 이름을 듣고도 이런 반응일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던 탓이었다.

“……그런가요. 일단 나갈까요? 계속 물에 있을 순 없잖아요.”

셰비언은 본래 그러려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오드리의 손을 잡았다. 왼손이었고, 반지 같은 건 흔적도 없었다. 그는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하다는 걸 깨달았다.

‘빌어먹을 샤를레아……. 오드리에게 뭔 짓을 해놓은 거야? 어쩌다 여기까지 진행이 됐지?’

오드리가 손을 잡아 뺐다.

“머, 먼저 나가세요.”

“왜요? 사막의 밤은 추우니 계속 물에 있으면 안 돼요. 감기에 걸린다고요.”

“그게…….”

오드리는 셰비언에게 속옷 차림의 자신을 도저히 내보일 수가 없었다. 사실 속옷 차림은 물속에서 실컷 보여주었고 단단히 끌어안긴 데다 그도 모자라 입까지 맞추었지만 그건 어쩔 수 없었던 상황 탓이라고 우기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뭍에 올라 홀딱 젖어 벗은 거나 다름없을 몸을 내보이는 건 완전히 다른 얘기였다.

사막의 밤, 오아시스 구석에서 모닥불이 탁탁 소리를 내며 타올랐다. 고기를 찢는 데에나 적합한 앞발로 용케 쓸 만한 나뭇가지와 마른 잎을 모아온 사자가 점잖게 꼬리를 흔들었다.

너는 인간의 예의를 공부할 필요가 있어.

“뭐라는 거야.”

다 알아들으면서 모른 체하지 마라.

“글쎄, 뭐라는지 영 모르겠네.”

셰비언은 딴청을 부리며 모닥불에 나뭇가지를 대강 던져 넣었다. 불티가 화르르 날리고 연기도 한층 짙어졌다. 라비린이 질색을 하며 머리를 돌렸다. 그래봤자 그에게 기대어 자고 있던 오드리가 불만스럽게 웅얼거리며 갈기를 잡아당기는 통에 금세 본래 자세로 돌아와야 했지만 말이다.

진짜 못 알아듣는 건가?

“사자야, 좀 조용히 하는 게 어때. 오드리가 깨면 어쩌려고 그래?”

좋아, 계속 못 알아듣는 척 해 봐.

푸르릉. 모닥불이 크게 흔들렸다.

내가 만탈락에 간 건 오드리가 열두 살일 때야. 그때 그녀는 말썽꾸러기 노릇을 접고 성실하고 착실한 아가씨로 변모한 상태였어. 하지만 만탈락의 주민들은 오드리가 얼마나 대단한 말썽쟁이였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지. 어딜 가든 오드리에 연관된 에피소드가 있었어. 그중에서도 제일 유명한 건 역시 만탈락의 개구멍 지도를 만든 일인데…….

줄줄 말을 늘어놓던 라비린이 돌연 말을 멈추고 셰비언을 바라보았다. 집중해서 듣고 있던 셰비언은 자신도 모르게 뒷말을 재촉했다.

“왜 말을 하다 말아?”

못 알아듣는다며.

“…….”

잘만 알아듣네.

민망해진 셰비언이 괜히 모닥불을 쑤석거렸다. 라비린은 그런 그를 향해 물에 젖은 숙녀를 대할 때의 예의에 대해서 길고 긴 잔소리를 늘어놓았고 셰비언은 죄다 한 귀로 흘렸다.

이런 공방은 몇 번이고 반복된 일이었고, 라비린은 이제껏 그랬듯 이번에도 제 잔소리는 그저 잔소리로 끝날 걸 알았다. 그는 반쯤은 자포자기한 상태로 제 앞발에 턱을 얹었다.

……됐다, 듣지도 않을 말은 그만하고 다른 거나 물어보자. 넌 멀쩡하게 사람 모습인데 왜 나는 사자인 거야?

“오드리가 생각하기에 넌 사자인가 보지.”

그게 말이 돼?

“사자 꼴로라도 무사한 걸 다행으로 여겨. 적어도 오드리의 안에 네 자리가 이 정도는 있다는 뜻이니까.”

그래도 그렇지, 왜 하필 사자인데……. 백수의 왕이니 뭐니 해 봤자 짐승이잖아.

라비린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는 듯 투덜거렸지만 이유가 짐작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는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오드리보다 가문을 우선했고, 그가 우선한 타우레드의 상징은 사자였다.

이제 어쩔 거야?

“어쩌긴, 데리고 나가야지. 넌 여기서 오드리와 며칠이나 지냈다면서 그동안 뭘 한 거야? 상태가 심각하잖아. 좀 전엔 오드리가 물에 빠져 죽을 뻔했어. 진짜 죽는 건 아니라도 엄청 큰 타격이 있었을 거라고.”

셰비언의 시선이 몹시 사납다. 라비린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난 사자라고. 오드리는 내 말을 알아듣지도 못하는데 하필 사막이라 목마르고 배고프고……. 며칠 동안 먹여 살리는 것도 힘들었어. 내가 여기서 뭘 더 했어야 한다는 거야?

“보아하니 앞발을 꽤 자유자재로 쓰는데, 설마 네 이름자도 못 써서 사자야 따위로 불리고 있었다고 할 셈이야?”

…….

“여긴 샤를레아가 오드리를 삼키려고 만들어낸 곳이야. 그녀의 심장으로 만들어졌지. 오래 있으면 있을수록, 이곳의 상황에 오드리가 몰입하면 할수록 위험해. 그런데 오드리를 그냥 내버려 두다니, 제정신이야?”

……난 몰랐어.

“몰랐다는 건 많은 경우에 면죄부가 되어주지만, 이번엔 그게 안 될 것 같지 않아? 넌 여기 들어오기 전의 상황이 어떤지 충분히 알고 있었어. 그런데 대체 무슨 생각으로 장단을 맞춰준 거야?”

라비린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가 이 환상이 조금이라도 오래 가길 바란 건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마냥 야단만 맞기엔 억울했다.

그렇게 말하는 너는 왜 바로 말하지 않았는데?

“…….”

같이 모닥불을 피우고, 사냥감을 손질해서 구워 먹고, 그러면서 오드리가 조잘조잘 떠들어대는 걸 가만히 듣기만 했잖아. 설마 내가 왜 가만있었는지 이유 따위를 들으려고 그러진 않았을 테고……. 결국 너도 나와 같았던 거 아냐?

상실을 겪지도 않고 쌓인 울분도 없이, 구김살 없이 밝은 미소를 짓는 오드리의 표정이 보기 좋지 않더냐.

행복해 보였어. 오드리에겐 본래의 자신을 송두리째 잊을 정도로 빠져들 만한 꿈이라는 거잖아. 어차피 깰 꿈인데, 조금이라도 더 오래 즐기게 해주고 싶었어. 그뿐이야.

“……무슨 뜻인지는 나도 알아.”

라비린이야 몰라서 그랬다지만, 위험에 대해서 제대로 인지하고 있는 셰비언도 곧장 오드리의 꿈을 깨뜨리기를 망설였다.

만탈락으로 돌아가 부모님을 뵐 것을 기대하는 웃음이 너무 눈부셨다. 과연 사자를 집에서 기르도록 부모님이 허락하실까 걱정하는 모습은 천진난만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셰비언의 얼굴을 보며 홀린 듯 황홀해하던 기색은 집으로 돌아갈 거란 가능성 앞에서 금세 사라져 버렸다. 그만큼 귀환을 고대하는 것이리라.

“헨젤 백작에 대해 그렇게 유화적으로 말하는 오드리는 처음 봤어. 항상 빈정대는 것처럼 꼬박꼬박 아버님이라고 불렀는데…….”

셰비언의 화가 누그러질 기미를 포착한 라비린이 황급히 자신을 변호했다.

그렇지? 어린 시절이 구멍 나지 않았더라면 오드리는 이렇게 자랐겠구나 싶더라고. 저절로 연민하는 마음이 들었달까.

셰비언은 고개를 저었다. 라비린의 말에 동조할 수 없었다. 그와 자신은 처지가 달랐다.

“하지만 그 꿈엔 내가 없잖아. 그걸 어떻게 참아? 난 말이야, 만약 이게 꿈이 아니고 정말 시간이 과거로 돌아간 거더라도 포기 못 해. 어떻게든 시간축을 본래대로 돌려놓을 거야. 자랑스러운 부모님? 행복한 일상? 창창한 미래? 알 게 뭐야, 그런 거.”

너…….

“나더러 이기적이라고 할 거면 해. 그치만…… 라비린, 생각해 봐. 나는 용족이고, 그중에서도 퍽 젊은 축에 속하는 용이야. 설령 내가 오드리의 평생을 독점한다고 하더라도 내 삶 전체에서는 정말 짧은 순간에 지나지 않을 거야. 그런데 그 시간 속의 오드리에게 내가 없는 걸 어떻게 견딜 수 있겠어? 함께 쌓은 추억은 어쩌고, 아직 이루지 못한 약속들은 또 어떡하라고? 난 상대의 행복을 위해 나 혼자 아픔을 감당하는 류의 사랑은 못 해.”

…….

용과 인간의 수명 차이가 그리 크던가? 용이면 그저 막연하게 오래 살겠거니 했던 라비린은 셰비언이 설핏 비춰낸 아득함에 압도당하고 말았다.

찰나의 반짝임을 생의 유일한 위안으로 삼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하지만 때때로 그 어리석음이 생을 밝히는 등불이 되면, 찰나는 영원과도 바꿀 수 없는 시간이 되어 일생을 지배하고야 마는 것이다.

내가 널 싫어하면서도 왜 미워하지는 못하는 건지 예전부터 쭉 궁금했는데……. 아마 무의식적으로나마 알고 있었나 보다.

“뭘 알아?”

네게 남은 시간이 길 거라는 거. 너무, 너무 길 거라는 거.

셰비언의 표정이 단단히 굳었다. 생기가 사라진 정교하고 섬세한 이목구비는 잘 만든 밀랍인형처럼 보였다. 그가 손을 뻗어 라비린의 콧잔등을 눌렀다.

“계속 떠들어봐. 사자 꼴로 죽게 해줄 테니.”

라비린은 머리가 납작해질 것만 같은 압력 속에서 함부로 입을 놀린 것을 후회했다. 이렇게 예민하게 반응할 줄 알았으면 말하지 말걸.

“지금은 일단 자.”

급하달 땐 언제고 갑자기 잠이나 자래? 그냥 바로 깨워. 빨리 나가자.

그렇지만 후회한다는 게 말을 하지 않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셰비언은 라비린과 피올이 형제라는 걸 새삼 실감했다. 같이 자란 시간은 극히 짧고 사이도 나쁜데 어떤 상황에서도 입으로는 지지 않으려 드는 성질머리가 똑같았다.

“나가는 데에도 체력과 정신력이 필요해. 며칠 내내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잠도 제대로 못 잤다며? 급해지면 너는 냅다 버리고 도망칠 거니까 네 몸은 네가 알아서 챙겨.”

셰비언의 엄포에서 상당한 진정성이 엿보였다. 인간도 아닌 사자 꼬락서니로 죽고 싶진 않았던 라비린은 얼른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쌓였던 피로가 순식간에 그를 집어삼켰다.

밤은 금세 지나갔다. 싸늘하게 식었던 자갈과 모래에 다시 태양빛이 흩뿌려졌다. 라비린은 이마를 적시는 이슬방울에 잠에서 깨어났다. 무의식적으로 얼굴을 문질러 이슬을 닦아내던 그는 옆구리에 걸리는 무게가 한결 무거워졌다는 걸 깨달았다.

‘이게 무슨 조화야?’

어젯밤까지만 해도 열두 살쯤이었던 오드리가 지금은 족히 열다섯은 되어 보였다. 이제껏 어린 소녀에게 충분히 넉넉한 담요가 되어주었던 라비린의 갈기는 오드리의 상체를 덮어주는 게 고작이었다.

하지만 오드리 본인은 자신의 몸에 전혀 위화감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라비린의 옆구리에 기대어 앉아 잡히는 대로 갈기를 갖고 노는 손길에선 느긋함마저 묻어났다.

“사자야, 잘 잤어? 네가 이렇게 푹 자는 건 처음 봐.”

너야말로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난 거야? 아침에 깨울 때마다 일어나기 힘들어서 아주 죽으려고 그랬었잖아.

“하긴 그동안은 계속 굶었으니까 배고파서 잠이 안 왔을 수도 있었겠다. 그치만 어제 먹은 것도 그다지 변변치는 못했는데……. 사자야, 나랑 같이 갈 거지? 절대 배곯지 않게 해줄 테니까 넌 꼭 나랑 가야 해.”

오드리가 나름 진지하게 으름장을 놓았지만, 라비린이 듣기엔 그만큼 어이없는 말이 또 없었다. 푸르릉, 그는 요란하게 코웃음을 쳤다. 정신을 차리고 나면 제일 먼저 취소할 말에 일희일비해 봐야 자신만 손해였다.

셰비언이 듣기에도 어이없는 말이긴 마찬가지였다. 그는 오드리가 터무니없는 약속을 하기 전에 얼른 그녀의 관심을 제게로 돌렸다. 고운 얼굴을 냅다 들이대고 머리칼을 정리해 주길 부탁한 것이다. 귀족가의 영애로서 금지옥엽으로 자란 오드리에겐 황당한 요구였다.

“내가 왜 당신의 머리를 정리해 줘야 하죠?”

“만져 보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내가?”

“네. 어젯밤에 그러셨잖아요? 머리가 다 마르거든 한번 만져 보게 해달라고요.”

오드리는 자신이 정말 그랬던가 혼란스러워하면서도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달빛을 녹여 색을 입힌 듯 아름다운 머리칼은 서늘한 데다 매끄러워 감촉이 좋았다.

“그런데 셰비언 씨는 무슨 무기를 쓰시나요?”

“저는 마법사랍니다.”

오드리는 깜짝 놀랐다. 그녀가 아는 마법사는 이런 사막에 혼자 들어올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셰비언은 오드리의 호기심 넘치는 시선을 충분히 즐긴 뒤에야 문장을 띄웠다. 눈 덮인 산과 흰 용의 문장을 본 오드리가 입을 벌리고 감탄했다.

“문장이 움직이네요? 이런 건 처음 봐요.”

“한번 받아볼래요?”

“네, 네?”

셰비언이 오드리의 손을 쥐고 그녀의 손 위로 문장을 넘겨주었다. 오드리는 바짝 굳어 제 손에 올려진 문장을 바라보기만 했다.

“이, 이걸 어쩌라고 나한테 줘요?”

“아가씨의 마력을 조금 넣어보세요.”

도대체 왜 이러나, 하면서도 오드리는 순순히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러자 새하얗게 반짝이던 문장이 옅은 초록색으로 물들며 깊은 숲에서나 맡을 수 있는 청량한 향기를 흘렸다. 놀라운 변화였다. 그녀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문장을 꼼꼼하게 관찰하기 시작했다.

한편 셰비언은 씁쓸한 미소를 숨기지 못했다. 그게 언제였더라……. 오드리에게 문장을 넘겨주었다가 돌려받았을 때, 희미하게나마 숲의 향기가 배어 있었던 적이 있었다. 다만 워낙 향이 옅어서 자신이 예민했던 거라 생각하고 잊어버렸었다.

하나 숲의 향기를 풍기는 저 마력이야말로 오드리의 마력을 이루는 가장 근본이었다. 만약 오드리가 품고 있던 셰비언의 마력을 샤를레아가 죄다 뽑아간 지금이 아니었다면, 가장 안쪽에 숨겨져 있던 저 마력을 볼 일은 아마도 없었을 것이다.

‘샤를레아, 이 빌어먹을 화룡이 아주 작정하고 준비했어. 내가 꼭두각시를 잡아 죽이고 제 심장 안까지 들어오는 사태가 있을 것까지 대비해서 무대를 마련하다니, 오랜만에 제대로 머리를 썼군. 어쩌면 날 여기로 끌어들인 것 자체가 노림수였던 건지도 모르겠어.’

셰비언은 샤를레아가 오드리를 왜 사막에 던져 놓았는지 이해했다. 제대로 된 물과 흙이 없는 사막은 셰비언과 오드리의 원기를 빼앗기에 적합한 장소였다.

‘하지만 변수가 생길 줄은 몰랐나 보지.’

샤를레아의 계산이 제대로 적중했다면, 이 사막에 오아시스는 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계산이 틀어진 이유는 뜻밖의 인물이 개입했기 때문이었다. 바로 라비린 말이다.

‘솔직히 나도 그리 많은 도움은 기대하지 않았는데…….’

라비린의 개입은 오드리의 마력이 샤를레아에게 모조리 흘러 들어가는 것을 막고 이 사막에 오아시스를 만들어냈다. 더불어 탈진 상태에 이른 오드리를 구해내 선인장 수액과 과육을 먹이며 며칠을 버텨내면서 샤를레아의 계산과 노림수를 죄다 망쳐 놓기까지 했다. 왜 기억하지 못하는 오드리에게 장단을 맞춰주었느냐고 짜증을 냈던 걸 사과해야 할 판이었다.

흘끗 돌아보니 라비린은 셰비언의 미인계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연신 콧방귀를 뀌고 있었다. 위엄 있게 잘생긴 생김새에는 썩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지만, 예전부터 라비린은 제 얼굴을 제대로 써먹지 못했으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멀쩡한 사내자식이 징그럽게…….

셰비언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미인계가 여자의 전유물이라는 건 고루한 사고방식이었다. 로렐라이가 남녀 불문하고 용모가 수려한 이들만 골라 접객 직원으로 뽑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아가씨, 그 문장보다 더 멋진 것을 보여드릴까요?”

속삭이는 목소리는 꿀이라도 발라놓았는가 싶게 달콤했다. 오드리는 목소리에 홀려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가 뒤늦게 당황했다. 셰비언이 그녀의 등과 무릎 아래에 손을 넣어 달랑 들어 올렸기 때문이었다.

“제 목에 팔을 감으세요.”

“어, 어, 뭘 보는 건데 안기까지 해야 해요?”

“사실, 꼭 잡지 않아도 상관은 없어요. 제가 잘 안고 있으면 되니까요.”

오드리는 문장이 떠 있는 손을 가슴팍으로 끌어당기고 셰비언에게 얌전히 몸을 맡겼다. 그에게서는 언젠가 어디선가 맡아본 것만 같은 향기가 났다. 설원을 휩쓰는 바람처럼 차가운 향기였다. 괜히 귀가 화끈거리는 통해 고개를 숙이고 딴청을 부렸다.

‘내가 왜 이러지? 설마 반했나? 아냐, 얼굴이 아무리 잘났더라도 그렇지 만난 지 하루밖에 안 됐는데 그럴 리가!’

어린 오드리가 심상치 않은 자신의 반응에 당혹스러워하는 동안에도 셰비언은 제 할 일하기에 바빴다. 그는 오드리를 안은 채 휙 뛰어올랐다. 그리고 허공을 딛고 또 디디며 몸을 높이 띄웠다. 오드리는 뺨을 스치는 바람에 놀라 숙였던 고개를 홱 치켜들었다.

“지금 날고 있는 거 맞죠? 어떻게 이럴 수가 있죠? 마법사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다고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요!”

놀란 건 놀란 것이고, 궁금한 건 궁금한 것이다. 급격한 태도 변화에 셰비언이 어이없어 하거나 말거나 오드리는 질문을 쏟아내기 바

+빴다. 얌전히 안겨 있는 숙녀 노릇은 한참 전에 집어치웠다.

“그리 몸을 내밀면 위험한데요. 아가씨는 무섭지도 않아요?”

“잘 안고 있을 거라면서요. 혹시 긴장해야 하나요?”

셰비언은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럴 리가요. 아가씨는 그저 즐겨주시는 걸로 충분하답니다.”

셰비언은 충분한 높이에 이르러 오드리를 살짝 내려놓았다. 오드리는 깜짝 놀라 셰비언의 팔에 매달렸지만, 곧 보이지 않는 바닥이 있어 발을 디딜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겅중겅중 뛰었다.

“이게 무슨 일이죠? 내가 지금 꿈을 꾸나요?”

하늘을 고스란히 담은 호수와 그 주변의 무성한 나무, 풀숲, 그리고 사막에 영 어울리지 않는 사자까지도 모든 게 장난감처럼 작아보였다. 우와우와, 연신 감탄사를 쏟아내던 오드리가 돌연 셰비언의 옷자락을 쥐고 물었다.

“셰비언 씨, 당신은 누구죠?”

“아가씨를 구하러 온 마법사죠.”

“난 지금 당신의 정체를 묻는 거예요.”

“정체라…….”

오드리는 셰비언이 자신의 뺨을 쓰다듬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의 손끝은 부드럽고 상냥했으며, 살짝 서늘했다. 어쩐지 심장이 뛰었고 숨이 가빠졌다.

“아가씨는 이미 알고 있어요.”

“안다고요?”

“네.”

불안에 젖어 떨리는 눈꺼풀, 애써 미소 짓는 입술, 그러나 긍정적인 대답이 돌아올 것을 확신하는 눈동자. 순간 기시감이 들었다. 저 얼굴을 어디서 보았더라? 오드리는 고개를 저어 자신을 부정했다.

“내가 당신 같은 사람을 이전에 보았다면 잊었을 리가 없어요.”

“맞아요. 아가씨가 날 잊었을 리 없어요. 그러니 떠올려 주세요.”

셰비언은 오드리의 왼손을 제게로 끌어당겨 약지에 입을 맞췄다. 비어 있는 손가락이 아쉽고 씁쓸했다.

“내가 누굴까요?”

오드리는 자신이 미친 것 같았다. 손가락에 차가운 입술이 닿은 순간, 경험한 적 없는 기억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지고 느껴본 적 없는 감정들이 샘처럼 솟아났다. 눈물 나도록 아련하고 가슴 벅차게 뿌듯하고 짜릿하게 통쾌하며 세상을 다 가진 듯 기뻤다. 함께 찾아온 울분, 좌절, 미움, 증오, 분노, 상실감 등은 압도적인 행복에 파묻혀 설 자리를 잃었다.

“셰비언…….”

“오드리, 날 기억해 줘요. 외면하지 말고요.”

셰비언의 미소는 그야말로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건만, 오드리는 쉬이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무서웠다. 제 것 같지 않은 기억이, 감정이, 지금의 자신을 모조리 휩쓸어 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오드리는 도망치지 않는 사람이죠.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회피한 적이 없어요. 정면으로 부딪쳐 깨뜨리기를 즐기지만 그렇지 못한다고 실망하지 않고, 어떤 일도 묻어두지 않아요.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그래요.”

“…….”

셰비언이 오드리의 눈높이에 맞춰 무릎을 꿇었다. 여전히 오드리의 손을 잡은 그대로였다.

오드리는 감히 손을 빼지 못했다. 그러면 나중에 굉장히 후회할 것 같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랬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셰비언은 오드리의 혼란을 전부 알고 있는 사람처럼 굴었다.

“오드리, 내가 틀렸나요? 오드리를 잘못 알고 있나요?”

“……난 그런 거 몰라. 난 그냥 어린애인걸…….”

평소에는 자신이 다 컸다고 말하면서 불리할 땐 어린애임을 내세우는 건 오드리가 극히 경멸하는 비겁한 짓 중 하나였다. 말하면서도 부끄러워 얼굴이 붉어졌다.

“어린애요?”

셰비언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웃었다.

“오드리의 어디가 어린애라는 거죠?”

“그야 나는 아직 열두 살……. 어?”

오드리는 자신이 쑥 자랐다는 걸 깨달았다. 통통하게 살이 올라 귀엽던 손은 우아한 선을 그리고 있었고, 잘 맞던 소매는 깡총하니 짧았다. 당황해서 이리저리 더듬어보니 가슴이 봉긋하니 부푼 데다 허리가 잘록했다. 거울은 없어도 열두 살의 몸매가 아니라는 걸 알기는 쉬웠다.

“내가 몇 살로 보여?”

“글쎄요? 적어도 열두 살이 아닌 건 확실하네요.”

“장난치지 말고!”

셰비언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오드리는 모르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녀의 말투는 점점 이전과 흡사해지고 있었다. 존대가 반말로 바뀌었고, 당신이라고 부르던 것이 그대로 바뀌었다.

“글쎄요……. 정확한 나이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열다섯 살은 되어 보이네요.”

“……내가 진짜 꿈을 꾸나……? 사막에는 신기루라는 게 있다던데 거기에 휩쓸린 것 같기도 하고. 혹시 사자를 만난 것부터 꿈인가? 그렇지, 다른 곳도 아니고 사막에서 사자라니, 말도 안 되지. 오아시스도 사자도 이 아름다운 마법사까지도 모조리 꿈의 일부일지도 몰라. 여기가 꿈이라면 몸이 이렇게 갑자기 쑥 자란 것도 이해할 만한 일이고…….”

셰비언은 열심히 자기합리화를 하는 오드리를 퍽 재미있게 구경했다. 이렇게까지 문제를 회피하려 애쓰는 오드리는 정말이지 처음이라서, 조금만 더 보면 안 될까 싶어졌다. 하지만 계속 이랬다간 샤를레아에게 좋은 일만 시켜주는 꼴이 될 것이다. 그는 독하게 마음먹고 오드리를 몰아세웠다.

“정말 꿈이라고 생각해요? 꿈이라면, 어느 쪽이 꿈일까요?”

“…….”

“오드리. 날 버리고 가지 말아요. 부디 오드리의 인생에 날 초대해 줘요.”

간절한 부탁이 결국 오드리의 마음을 움직였다. 오드리는 두려움을 접고 고개를 끄덕였다. 셰비언이 다시 한번 그녀의 왼손 약지에 입을 맞췄다.

“본래 인사는 손끝에 입 맞추는 거라고. 한데 아까부터 왜 하필 왼손 약지야? 여긴 결혼반지를 끼는…… 손가락…….”

오드리는 제 손가락에 본 적 없는 반지가 생겨나는 걸 멍하니 바라보았다. 단순한 디자인이지만 핏물처럼 새빨간 보석과 그 안에 담긴 흰 눈송이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녀의 몸은 순식간에 자라났다. 열여덟 살의 몸이었다.

급격한 변화를 겪은 스스로가 낯선 듯 가만히 서서 눈을 깜빡거리던 오드리가 갑자기 셰비언의 품에 뛰어들어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이렇게 될 줄 알았지……. 이럴 줄 알았어……. 그래서 무서웠던 건데…….”

“오드리…….”

셰비언의 옷자락이 젖어들었다. 오드리는 셰비언의 품에 안겨 소리 없이 통곡했다. 다정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던 풍족한 유년 시절은 모조리 환상에 불과했다. 진실을 맞닥뜨리자마자 순식간에 무너져 조각이 되고 마는 환상. 그녀는 방금 부모를 잃었고, 어머니를 잃은 건 무려 두 번째였다.

“모든 게 꿈이었어…….”

셰비언은 감히 오드리에게 위로를 건네지 못했다. 가늘게 떨리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고 가볍게 토닥이는 게 고작이었다.

“후회하지 않아요. 오드리의 인생에 내가 없는 것 따위는 못 견뎌요.”

“후회할 일도 아닌데 후회하면 안 되지. 잘했어.”

비록 훌쩍대느라 코맹맹이가 되긴 했지만 오드리의 대답은 단호하고 시원했다. 셰비언이 알고 있던 오드리로 돌아온 것이다. 셰비언은 그런 오드리가 반가우면서도 가슴이 아렸다.

“구해줘서 고마워. 그대를 앞에 두고도 계속 몰랐다니 나도 참 너무하지.”

“오드리는 내 사람인걸요. 당연히 구해야죠. 오드리는 내가 이런 함정에 빠져 있으면 안 구할 건가요?”

“당연히 구하러 가야지.”

“거 봐요. 도리어 내가 너무 미안한걸요. 조금만 빨리 왔으면 좋았을 걸 그랬죠……. 그랬다면 지금처럼 괴롭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잘했다니까 왜 갑자기 미안하대? 그대는 나한테 사과할 필요 같은 거 없어. 괜한 죄책감 같은 거 가질 필요도 없고.”

“알아요, 알지만 그런 마음이 드는 걸 어쩌겠어요.”

오드리는 남은 눈물을 셰비언의 옷자락에 모조리 닦아내고 홀로 섰다. 눈도 코도 벌겋게 달아올라 엉망일 게 뻔했지만, 셰비언에게 계속 기대기엔 너무 면구스러웠다.

“샤를레아가 보여주는 환상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다니, 멍청했어. 그대를 눈앞에 두고도 깨닫지 못하고 아버님이나 찾고……. 어휴.”

오드리는 어렸잖아요. 셰비언이 오드리의 눈가에 입 맞추며 위로했지만, 오드리에겐 별로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녀는 스스로를 비웃었다.

“어렸다는 건 변명이 안 돼. 뭔가 이상하다는 걸, 나는 분명히 알고 있었어. 멀쩡히 일상을 살다가도 문득문득 위화감을 느꼈단 말이야. 나를 뺀 다른 사람들이 몽땅 연극배우 같았어. 가끔이긴 해도 세상이 나한테 이렇게 친절할 리 없다고 생각했었던 게 똑똑히 기억나.”

“오드리…….”

“이상하면 바로 말을 해 버리면 되지, 그게 뭐가 부끄럽다고 입을 다물었는지…….”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착각하는 멍청이가 될 것 같아 감히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래도 그렇지, 잠 못 이루는 밤을 견디다 생각해 낸 것이 고작 실렌다 사막이라니 실로 어린아이답게 어리석은 결론이었다.

“사람들에게 벗어나 혼자가 되어보면 이 위화감의 정체를 알 수 있을 것 같았어. 그래놓고 준비는 허술해서 하룻밤도 버티지 못하고 탈진했지. 사자가 아니었다면 그대가 오기 전에 죽었을 거야. 하, 생각할수록 멍청해서 말이 안 나오네.”

“그렇게 자책하지 않아도 돼요. 오드리가 실렌다 사막에 온 건 샤를레아의 안배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크니까. 준비가 허술했던 것도 마찬가지일 거고요.”

셰비언이 사막과 하늘이 맞닿은 지평선을 가리켰다. 새파랗게 반짝여야 할 하늘이 칙칙한 회색이었다. 오드리는 모래바람인가 싶어 순간 긴장했지만, 셰비언은 고개를 저었다.

“알 껍질이에요. 샤를레아는 우릴 알에 가두고 천천히 소화시킬 작정인가 봐요.”

“그게 무슨……. 자세한 설명이 필요해.”

“내 동족의 미친 짓을 읊는 게 부끄럽긴 해도, 오드리를 위해 내가 무슨 일을 했는지를 떠드는 건 그 또한 대단한 즐거움이겠죠. 하지만 지금은 시간이 부족하니까 설명은 다음으로 미루도록 해요. 일단 내려갈까요?”

셰비언이 팔을 내밀었다. 익숙하게 그에게 안긴 오드리는 문득 아래를 내려다보았다가 오아시스의 범위가 두 배는 더 넓어진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오아시스가 넓어졌어. 아니, 지금도 넓어지는 중인가? 무슨 일이지?”

“라비린이 애쓰고 있는 거죠. 본래 오드리의 마력으로 만들어진 거긴 하지만, 라비린의 지분도 커요. 내려가면 칭찬 한 마디 정도는 해주세요.”

오드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라비린? 웬 라비린?

“정말 너무한 거 아냐? 멀쩡한 사람을 사자로 만들어놓고는 눈치채지도 못하다니!”

라비린은 성대하게 불평했다. 나갈 때까지 꼼짝없이 사자로 으르렁대야 할 줄 알았거늘 사람으로 돌아왔으니 그건 다행이지만, 오드리가 끝내 사자의 정체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건 꽤 충격이었다.

“어떻게 날 앞에 두고 사자를 찾아? 타우레드라고 대뜸 사자로 바꿔놓은 게 누군데!”

“아 글쎄, 미안하다니까…….”

“사과에 성의가 없어!”

“대체 뭘 어떻게 해야 성의가 있는 건데?”

라비린이 얼굴을 쑥 내밀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눈에서 장난기가 흘러넘쳤다.

“성의 있게 키스 어때?”

“야, 이…….”

“사자일 때는 잘 해줬잖아.”

사자와 인간이 같냐. 오드리는 어이없어하면서도 차마 라비린의 요청을 묵살하진 못했다. 멍청하게 사막 한가운데에서 탈진한 자신을 구하느라 라비린이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선인장 가시가 빼곡하게 박혔던 앞발이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후……. 가만히 있어봐.”

라비린이 냉큼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오드리는 그에게 다가가 어깨를 짚고 그의 뺨에 살짝 자신의 뺨을 대고는 입으로 쪽 소리를 냈다. 살론식 볼인사였다. 라비린이 제 뺨을 쓸며 어이없어 했다.

“뭐야, 이게. 아침인사로나 할 법한 걸 해놓고 이게 성의 있는 거라고 우길 셈이야?”

오드리는 그만 코웃음을 쳤다. 볼 뽀뽀를 아침인사로 쓰는 건 살론이나 그렇지, 멜브란트는 아니잖은가.

“돌아가면 앞에 기자들 쫙 세워놓고 입술에 찐하게 키스해 줄게. 그럼 되지?”

“어, 야, 그건 좀…….”

오드리가 농담을 어찌나 진짜처럼 말하는지, 라비린은 더 우길 의욕을 잃었다.

“왜? 성의를 보이라며. 브란젤의 신문들 1면을 죄다 장식하게 해줄게.”

“됐어. 그랬다간 라디아타가 날 죽이려고 들걸.”

“뺄 거면서 성의 타령 하기는.”

라비린은 그만 서러워져 입을 삐죽댔지만, 한번 놓친 기회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호수 가운데에 얼음으로 된 섬을 만들던 셰비언이 대놓고 고소해하며 오드리에게 속삭였다.

“라비린이 계속 사자였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에요.”

라비린이 울컥한 표정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사실 속삭였다기엔 셰비언의 목소리가 좀 크긴 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지 또 들은 체도 안 하려고 그러지, 너?”

“보기 드물게 잘생긴 사자였는데 말이죠. 오드리를 태우기에도 좋고 정말 딱이었을 텐데.”

“사람을 탈것 취급하고 있어. 야, 너 내 말 듣고는 있냐?”

“오드리, 안쪽에 서세요. 되다 만 사자는 내 반대편에 서.”

“아, 예. 난 사자가 아니라 사람이라고 말해봤자 듣지도 않겠지만 너 진짜 너무한다. 무사히 챙겨서 데려가 주는 걸 고맙게 여겨야 하는 거냐? 야, 나도 오드리 구하는 데에 한몫했거든?”

셰비언은 라비린이 뭐라 떠들든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는 오드리와 라비린을 얼음섬에 그려 넣은 마법진에 세워놓고 상황을 관찰했다. 지평선 부근의 하늘을 잠식한 회색빛깔은 아까보다 훨씬 색이 뚜렷했고, 범위도 점점 넓어지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라비린.”

셰비언이 살짝 흘려낸 긴장은 몹시 뚜렷한 형태를 가지고 라비린에게 가 닿았다. 라비린은 셰비언이 더 말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일단 검부터 뽑았다. 사자가 되었다가 돌아왔지만 옷도 검도 멀쩡히 있어서 다행이었다. 셰비언이 라비린의 준비 태세를 보고 씩 웃었다.

“역시 눈치가 좋아.”

“너한테 그런 칭찬 들어봐야 별로 기쁘지 않거든?”

“샤를레아가 예상하지 못했던 변수가 바로 너야. 그 점 명심하고, 잘 부탁해.”

“써먹을 때만 아는 척하기는.”

대량의 마력이 마법진으로 흘러들어 갔다. 사막에 생겨난 얼음섬은 세 사람을 태우고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전신을 짓누르는 압력을 견디지 못한 오드리가 그 자리에 주저앉을 정도로 엄청난 속도였다.

하지만 알 껍질이 하늘을 잠식해 가는 속도는 셰비언의 마법진보다 더 빨랐다. 푸른 빛깔이 급격히 바래가고 그들을 가둔 알 껍질이 뚜렷한 형태와 질감을 가지고 모습을 갖췄다. 보는 것만으로도 그 견고함이 짐작이 갈 정도였다.

‘역시 처음부터 날 여기로 끌어들일 셈이었어. 하긴 용을 만들기에 오드리의 마력만으로는 조금 부족한 면이 있긴 하지. 동족 어쩌고 하더니 제 새끼 사체에 이어 나까지 잡아먹을 셈인가……. 정말 돌았군.’

셰비언이 뽑아낸 벼락이 껍질을 때렸다. 주변이 새하얗게 물들고 거센 폭음이 귀청을 때렸지만 알 껍질에는 희미한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저거 좀 단단한데?”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알아. 오드리는 귀 막고 있어요. 아마 좀 시끄러워질 것 같으니까.”

셰비언의 주변에 무수히 많은 빛이 떠올랐다. 오드리는 순순히 귀를 막고 웅크렸고, 그 옆의 라비린은 바짝 긴장해서 검을 고쳐 쥐었다. 곧 세상이 쪼개지는 듯한 굉음이 울렸다.

* * *

셰비언이 마법진으로 뛰어든 후, 난백은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는 것처럼 괴물을 쏟아냈다. 산트렘의 기사들과 나랍인 용병들은 죽을힘을 다해서 괴물을 잡았다. 조각난 시신과 흐른 핏물이 카펫처럼 공동의 바닥을 장식했다. 시신 위에 시신을 쌓는 동안 인간의 피도 그 사이에 섞여 흘렀다. 셰비언이 중상자들 대부분을 치료해 주고 가지 않았더라면 분명 벅찼을 것이다.

“끝이…… 보인다!”

“아, 이 징그러운 놈들!”

피올은 시야를 가리는 핏물을 거칠게 닦아냈다. 괴물은 여전히 많았고 끈질기기도 한결같았다. 스트라스티의 독려가 순 거짓부렁으로 생각될 정도였다. 하지만 괴물 너머로 보이는 난백의 크기는 눈에 띄게 줄어 있었다.

“거의 다 끝나간다! 으아아아!”

“눈이 셋인 놈들은 특히 주의해라! 피가 산성이니 차라리 몽둥이처럼 패! 목을 가격하면 쓰러진다!”

“제기랄, 그걸 이제 알려주면 어쩝니까? 예비검도 다 쓰고 남아나는 게 없는데!”

“그걸 말해줘야 아냐? 머리는 뒀다가 모자나 걸려고 달고 있어? 멍청함이 감당이 안 되면 검이나 부지런히 휘둘러!”

스트라스티마저 최전선에 뛰어들어 괴물을 베어내고 있으니 감히 불평하는 자가 없었다. 다들 눈에 독기를 품고 괴물을 베어낼 뿐이었다. 반면 나랍인 용병들은 상대적으로 몸을 사리는 편이었는데, 괴물을 잡다 열 중 둘이 죽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어쨌거나 피를 뿌려가며 싸운 보람이 있어, 그들은 마침내 난백을 완전히 소모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반투명하게 인간들을 막아서던 벽이 사라지자 난황 역할을 하는 썩은 시체와 심장처럼 맥동하는 검은 덩어리가 무방비상태로 드러났다.

“으…….”

여전히 빛나는 마법진, 피에 절은 코로도 맡을 수 있는 썩은 내. 꿈틀거리는 검은 덩어리에서 느껴지는 본능적인 거부감과 혐오스러움에 이제껏 온몸을 피로 적셔가며 시체를 쌓아온 노련한 이들마저 저절로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스트라스티는 수하들이 뒤로 물러나는 걸 쉬이 용납하지 않았다.

“지금부터 난황을 걷어낸다! 몸 식기 전에 움직여! 빨리빨리!”

썩은 시체를 만지는 게 기꺼울 사람은 없겠지만, 검은 덩어리를 가르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래도 불쾌함은 어쩔 수가 없어서 산트렘의 기사들과 나랍의 용병들은 우거지상을 하고 새끼 용의 사체를 밖으로 빼냈다.

마력이 강제로 빨려나가는 불쾌한 감각을 견디며 작업을 진행하던 중, 나랍인 용병은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알껍데기가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을 발견했다.

‘핏물에 휩쓸린 건가?’

다들 핏구덩이를 철벅거리며 걷고 있으니 조금 움직이는 거야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발로 툭 건드려 본 알껍데기는 조금 고인 핏물 따위에 휩쓸려 움직일 정도로 가볍지 않았다. 그것들은 스스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의 안색이 싹 변했다.

“카론 경! 알껍데기가 멋대로……!”

“나도 봤어! 다들 나와! 즉시 마법진 밖으로 빠진다!”

스트라스티의 지시는 아주 시의적절했다. 인간들이 들고 나르던 시신마저 내던지고 뛰쳐나오자마자 알껍데기의 움직임이 격렬해지더니, 일제히 검은 덩어리로 몰려들어 저들끼리 엉겨 붙으며 새로운 껍데기를 형성했다. 알을 감싼 마법진도 함께 구조를 바꿨다.

새로 만들어진 알의 표면은 매끄럽지 못하고 울퉁불퉁했다. 미처 떨어지지 않은 살점과 피가 곳곳에 묻어 있어 보기에 몹시 불쾌한 몰골이었다. 여기저기에서 한숨이 터졌다.

“난백을 다 없앴더니 새로운 껍데기가 생겼네.”

“그러게요…….”

“아, 분위기 왜 이래? 괴물이 또 나온 것도 아니고, 고작 알껍데기 한 번 더 생긴 것뿐이잖아. 도로 깨면 되지.”

“대장……. 뭘 어떻게 하면 대장처럼 세상을 긍정적으로 살 수 있는 거죠? 난 산트렘 기사단에 있을 때 세상이 회색으로 보였는데. 특별한 비법 있으면 혼자만 알지 말고 공유 좀 하고 그래요.”

“닥쳐라, 썩을 막내놈아. 네놈 머리통이 물렁물렁한 걸 표준으로 삼지 마.”

“대장, 이번엔 나도 막내 말에 동의합니다. 대장은 정상적인 인간의 좌절감을 이해할 필요가 있어요!”

“방금 떠든 새끼는 빨리 이름 대라. 진짜 좌절이 뭔지 가르쳐 줄 테니.”

“크흐흠!”

성공적으로 수하들의 입을 틀어막은 스트라스티는 솔선해서 알을 후려쳤다. 하지만 아까 단박에 쪼개졌던 것과는 달리 이번엔 미세한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뒤이어 산트렘의 기사 몇몇이 나서서 같은 자리를 두들겼지만 결과는 같았다.

“으음…….”

스트라스티는 미간을 찌푸리고 고민했다. 사실 마법진에 뛰어들기 전에 셰비언이 늘어놓았던 당부 중에는 알껍데기가 다시 생성되는 상황을 대비한 것도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이런 황당한 상황을 맞닥뜨리고도 그다지 당혹스럽다거나 하진 않았다. 다만 그의 요청대로 알을 깨기가 힘들 것 같아 곤혹스러울 뿐이었다.

그때, 다들 존재조차 잊고 있었던 비니타가 불쑥 손을 들고 목소리를 냈다.

“저어……. 제가 저거 깰 수 있을 것 같아요.”

“음? 비니타 양이?”

스트라스티는 번들대는 눈빛을 숨길 생각도 않고 비니타를 훑었다. 처음부터 비전투 인원으로 분류되어 보호받은 비니타는 어디 한 군데 긁힌 곳도 없이 멀쩡했다. 눈이 맑았고 자세도 발랐다. 적어도 처참한 광경을 눈앞에서 본 충격으로 헛소리를 지껄이는 것 같지는 않았다.

스트라스티의 눈빛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비니타가 다급히 말을 이었다.

“용의 마법진을 쓰면 될 것 같아요. 용의 마법진은 마법 자체를 형상화하는 것이니까, 저도 얼추 흉내를 낼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사하스바티님이 연구실에서 개량 대포의 설계도를 그리는 걸 본 적이 있는데, 그걸 마법으로 치환해서…….”

“비니타 양, 그렇게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 없어요. 내가 알고 싶은 건 딱 하나예요. 자신 있어요?”

비니타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어차피 지금 당장 카론 경에게 무슨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지친 기사님들과 용병님들이 쉬고 계시는 동안 제가 시도해 볼 수 있게 해주세요.”

아무리 어려도 마법사는 마법사다. 스트라스티는 실컷 도움을 받았으면서도 무의식중에 비니타를 무력한 어린아이 취급했던 자신을 반성하며 비니타가 자신의 이론을 실험해 볼 기회를 주었다. 그녀답지 않게 몹시 너그러운 처사였다.

본래 비니타는 마법진에 대한 조예가 깊지 않았다. 하지만 셰비언과 아이샤가 용의 마력을 가까이에서 접하면서 영향을 받은 것처럼 비니타도 영향을 받았다. 비니타는 즉석에서 만들어낸 마법진을 거침없이 그려 나갔다. 어떻게 할 수 있는 건지 스스로도 몰랐지만 자신이 틀렸을 거란 생각은 눈곱만큼도 들지 않았다.

“비니타 양, 대단하네요. 마법진은 잘 모른다더니 그건 빈말이었어요?”

“그럴 리가 있나요. 저는 진짜로 마법진에 대해 잘 몰라요. 지금도 제가 무슨 과정을 거쳐서 기계 설계도를 마법진으로 바꾸고 있는지 모르는걸요.”

“……그게 말이 돼요?”

피올은 어이가 없어 혀를 찼다. 비니타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태평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그 얘길 듣자마자 거품을 물 마법사가 얼마나 많은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치안대의 단골손님 중에서는 새 마법을 만들어보겠다고 헛짓거리를 하다가 신고 당하는 마법사의 비중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비니타는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다는 말을 반복할 뿐이었다.

“보티안 씨는 걸을 때 팔다리의 각도와 숨의 깊이까지 전부 생각하고 걸어요? 어쩌다 신경 쓸 때가 있긴 하겠지만 대부분은 아닐 거잖아요. 근데 누군가 왜 그렇게 하는 건지 일일이 설명하라고 하면 무척 곤란해지겠죠. 지금 제가 딱 그래요. 누군가 저더러 이게 왜 이렇게 되는 거냐고 물으면 대답 못할 거예요.”

비니타가 이해한 용의 마법진에는 제물이 필요했다. 아주 많은 마력 말이다. 비니타는 무식하게 제 마력을 때려붓는 대신 조금 전에 마법진 밖으로 걷어냈던 새끼 용의 사체를 제물로 삼았다. 썩어가는 고깃덩이를 들어나르느라 손이 온통 핏물로 더러워졌다.

“제가 마법진에 대해 좀 더 잘 알았더라면, 이걸 남들도 알아보고 쓸 수 있게 수식으로 풀어서 정리할 수도 있었을 거예요. 제물을 이렇게나 필요로 하지도 않았을 거고요. 그런데 지금 제 꼴을 보세요. 어휴, 전 아직 멀었나 봐요.”

“어, 그래요……. 난 영 이해하기 힘들지만 본인이 그렇다는데 뭐 할 말은 없군요. 그보다 비니타 양. 그렇게 고깃덩이를 쥐고 돌아다니면 손이 찝찝하지 않아요?”

“네? 제 손이 뭐 어때서요? 어머!”

비니타가 제 손을 들여다보곤 그 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마법진을 그리는 것에 너무 정신을 쏟은 나머지 제 꼴이 어떤지에 대해서는 아예 인지를 못한 모양이었다. 그녀가 은근슬쩍 옷자락에 손을 닦아냈다.

“하하, 제가 너무 집중해서……. 미처 몰랐어요.”

피올은 비니타가 워커의 제자라는 걸 새삼 실감했다. 사제가 쌍으로 괴짜였다. 어쨌거나 비니타가 즉석에서 만들어낸 마법진은 제대로 작동했다. 굉음도 반동도 없는, 마법으로 만들어진 대포가 알을 향해 보이지 않는 포탄을 날린 것이다.

비록 파괴력이 부족해 알을 깨지는 못했지만, 표면에 꽤 유의미한 흠집이 났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제물로 썼던 사체의 마력을 삼분지 일 가까이 써버리긴 했지만, 비니타는 제 시도가 성공했음에 대단히 흥분했다.

“세상에, 해냈어! 진짜 됐어!”

반면 짧은 휴식을 즐기고 있던 기사들과 용병들은 장탄식을 터뜨렸다. 언젠가 저 마법진이 수식으로 정리되어 마법도구에 적용되는 날이 온다면, 과연 그때에도 검사가 필요하겠는가? 심지어 비니타는 아직 나이 스물도 되지 않은 어린 마법사였다.

“검 따위 집어치워야지, 진짜. 안 그래도 기사 취급 더러운데 앞으로는 발붙일 곳도 없겠어.”

“마침 사표 내고 왔으니까 일 하나는 줄었네.”

“돌아가면 어머니 농장에서 포도 농사나 지을까.”

“농사는 뭐 쉬운 건 줄 아냐. 이래서 기사 가문에서 검만 잡고 자란 놈들은 안 된다니까.”

“너도 나랑 다를 바 없이 자란 거 알거든? 막상 밭에 나가면 나처럼 단순노동이나 할 놈이 잘난 척하기는.”

“시끄러워, 이놈들아. 입 놀릴 힘이 있거든 저기 흠집 난 곳에 검이라도 한 번 더 찔러.”

“아이고, 대장은 저런 거 보고도 자괴감도 안 들어요?”

“그런 건 아베드 놈을 가르칠 때 실컷 맛봐서 이젠 아무 맛도 안 난다. 네놈들도 열여섯 살짜리한테 지고 바닥을 굴러보면 저런 마법진에 느낄 자괴감 같은 건 남아 있지 않게 될걸. 일어나, 이 엉덩이 무거운 놈들아!”

스트라스티는 산트렘의 기사들을 뻥뻥 걷어차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일부는 비니타의 마법진에 마력을 불어넣게 하고, 일부는 알을 직접 두들기게 했다. 그런 노력에 힘입어 흠집은 점점 깊어졌다.

그렇게 피폐한 몰골로 알을 공략하던 어느 순간, 흠집이 균열로 진화했다. 처음에는 가느다란 선처럼 보이던 것이 몇 번의 충격이 더 가해지자 금세 범위도 깊이도 처음과 비할 수 없어졌다.

“조금만 더 하면 된다!”

균열이 퍼져 나가는 것을 목격한 사람들의 얼굴에 희망이 어렸다. 그때부터는 스트라스티의 독려도 필요 없었다.

알에 생겨난 균열은 곧 오드리 일행이 있는 실렌다 사막 하늘에 생겨난 균열이었다. 샤를레아는 셰비언의 마법만으로는 절대 알이 깨지지 않도록 철저히 대비했지만, 설마 제 새끼의 마력을 이용한 마법진이 바깥에서 알을 공격할 줄은 몰랐다. 알은 그녀가 예상한 것보다 이르게 깨지고 있었다.

셰비언은 마침내 하늘의 가운데에 생겨난 구멍에 눈을 빛냈다. 그는 얼마 남지 않은 소량의 마력을 싹싹 긁어모아 구멍 부위를 타격했다. 구멍에서 뻗어 나온 균열이 하늘을 가득 덮었다.

“이제 곧 나갈 수 있어요. 이 지긋지긋한 사막과는 곧 안녕할 거란 얘기죠.”

셰비언의 말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하늘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회색 하늘 조각은 하나하나가 사람 하나를 통째로 뭉개 버릴 듯이 크고 단단했다. 그런 것들이 우박처럼 쏟아지는 가운데에도 셰비언은 태연했다.

“마지막 풍경이 영 보기가 별로네요. 그래도 하늘이 무너지는 광경은 좀처럼 보기 드문 거니까…….”

“오드리!”

셰비언은 계속 하늘을 향해 고개를 꺾고 있었던지라 오드리가 그 자리에 주저앉은 그대로 정신을 잃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 그는 라비린이 놀라 오드리를 부르는 걸 듣고서야 축 늘어진 오드리를 발견하고 경악했다.

“라비린, 움직이지 마!”

셰비언의 경고는 늦은 감이 있었다. 마법진의 한 축을 담당하던 라비린이 자리를 이탈하면서 마법의 보호가 깨졌다. 축 늘어진 오드리를 안아 올리던 라비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셰비언은 그 순간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다해 두 사람에게 새로운 보호마법을 걸었다. 그 이상은 할 수 없었다. 몇 마디 말을 늘어놓던 말을 채 맺기도 전에 눈앞이 아득하게 흐려졌으니까.

“망할, 자식, 이제부턴 네 몫…….”

“셰비언, 이게 무슨……!”

본능처럼 셰비언을 부르던 라비린은 셰비언이 그 자리에서 허물어지는 광경을 목도하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번개를 다발로 부리며 거칠 것 없는 위용을 과시하던 이가 무력하게 무너지는 걸 보는 건 어딘지 섬뜩한 구석이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기대고 있었던 무언가가 조각나 깨지는 것을 보는 듯한 충격이었다.

샤를레아는 오드리와 셰비언 모두가 정신을 잃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조각난 하늘이, 드넓게 펼쳐진 지평선이, 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모조리 씹어 삼켜 소화시켜 버리겠다는 듯이.

무너져 가는 세계는 제게 영양을 공급해 줄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찾았고, 난황의 상당수를 잃은 상황에서 기댈 만한 건 당연히 오드리였다. 환상에서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오드리는 마법진의 보호가 살아 있는 상황에서도 자신을 지키지 못했다. 그녀의 정신은 암흑 속에 잠겼다.

반면 셰비언은 정신을 잃고도 오드리처럼 편안하지 못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이 깨어 있다는 착각 속에서 환청과 환시에 시달렸다.

이미 오래전에 끝난 용의 내전 한가운데에 내던져져 핏물 속에서 헤매기도 했고, 죽어 사라진 동족들과 새 마법에 대한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기차에서 처음 만난 오드리에게 먼저 다가가 말을 건 적도 여러 번이었고, 오드리가 그를 걷어차고 다른 이를 선택하는 장면은 수도 없이 보았다.

그게 어떤 것이든 죄다 셰비언의 마음을 헤집기에는 아주 충분하고도 남았다. 게다가 통제를 잃어버린 몸뚱이에 샤를레아의 마력이 파고들면서 지독한 통증을 선사하였으니, 그는 정신을 잃고도 간헐적으로 몸을 떨며 고통스러워했다.

한편 라비린은 여전히 멀쩡한 마법진 가운데에 서서 스스로를 지키고 있었다. 셰비언과 오드리가 쓰러진 가운데 자신만 멀쩡하다는 게 영 이상하게 느껴지긴 했지만, 셰비언이 말하지 않았던가. 라비린은 샤를레아가 예상치 못했던 변수라고.

라비린은 제 품에 안긴 오드리의 얼굴을 훑었다. 굳게 닫힌 눈꺼풀과 창백한 입술, 그럼에도 평온한 표정을 보자 마음에 칼날이 섰다. 그는 오드리를 내려놓고 대신 검을 단단히 쥐었다. 감히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고 라비린의 주위를 맴돌던 세계가 부르르 떠는 게 느껴졌다.

“흠, 솔직히 내가 뭘 잘못했는지는 모르겠는데……. 일 돌아가는 꼴을 보아하니 어쨌거나 내 탓이 큰 것 같아. 그렇다면 만회를 해야겠지.”

라비린이 아무리 변수라고 해도 모든 마법의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그새 라비린에 대한 파악을 끝낸 세계가 그에게도 달려들었다.

라비린은 무수히 많은 손이 자신을 잡아당기는 것만 같은 착각에 빠졌다. 아니, 착각이 아니었다. 원하는 건 뭐든지 줄 테니 바라기만 하라는 속삭임, 달짝지근하고 유혹적인 목소리가 형태를 가지고 그를 옭아맸다. 발목에서 시작된 덩굴이 그를 휘감고 자라나며 덩치를 키웠다.

“이거 참……. 뭐든지 줄 수 있다니, 자신감이 대단한걸.”

라비린의 검은 그 날카로움을 조금도 잃지 않았다. 덩굴은 자라나는 것보다 빠르게 썰려 토막 났다. 그는 잘려 나가고도 꿈틀거리는 덩굴을 걷어차 제 주변에서 떨어뜨렸다.

“근데 말이야, 인간은 그리 단순한 존재가 아니거든. 나도 내 마음을 종잡기가 힘든데 넌 인간도 아닌 게 내가 원하는 게 뭔 줄 알고 다 줄 수 있다고 주절거려? 신 흉내라도 내게?”

오드리마저 홀렸던 환각과 환청이건만, 라비린에게는 그저 잘 짜인 연극에 불과했다. 그것도 제 속을 지나치게 잘 읽은 나머지 저절로 불쾌해지는 연극 말이다.

“정 수렵의 기쁨을 느끼고 싶거든 차라리 낚시를 해라. 굶주린 물고기는 보잘것없는 미끼라도 마다하지 않으니 제법 손맛을 볼 수 있을 거야.”

후회라면 지긋지긋하게 했고, 바보짓도 할 수 있는 만큼은 다 했다. 너는 자존심도 없느냐는 힐난도 숱하게 들었다. 하지만 자신이 하고 싶다는 이유로 한 일에 상대의 보상을 바라는 것만큼 본새 없는 짓이 또 있던가?

오드리와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고 도움을 주면서도 그녀에게 보답을 강요하지 않는 것이 라비린이 지킬 수 있는 최소한도의 자존심이었다. 그 사실을 똑똑히 인지하고 있는 그는 샤를레아의 세계가 제공하는 환상이 지독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 눈치코치 없는 셰비언도 아는 것을 왜 넌 모르지? 멍청해서 그런가?”

라비린은 자신을 공격하는 덩굴의 움직임에서 기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언뜻 무작정 달려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게 아니었다. 분명히 지시를 내리는 머리가 존재하고 있었다.

피올만 한 천재는 아니었지만, 라비린도 수재라고 불리기에 부족함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머리의 존재를 인지하자마자 빈틈을 노려 검을 내질렀다. 덩굴에 꼭꼭 감겨 숨겨져 있던 새하얀 열매가 쩍 갈라지며 새빨간 과육을 쏟아냈다.

그건 작은 용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바들바들 떠는 날개가 가련하고, 피리처럼 높고 가느다란 숨소리가 안쓰러운 새끼 용. 호흡이 버거운지 코와 입에서 작은 거품이 끓었다.

고작해야 중병아리 수준의 크기밖에 되지 않는 새끼 용의 눈은 선명한 금색이었다. 라비린은 금색 눈에 담긴 증오와 분노를 정면에서 받아내곤 히죽 웃었다.

“연극에선 이럴 때 뭔가 멋진 대사를 하거나 마지막 유언을 듣던데…….”

“끼이이……!”

“이건 연극이 아니니까.”

덩굴은 열매가 갈라진 순간부터 민활한 움직임을 잃었다. 자유로워진 라비린이 단숨에 새끼 용의 목을 쳤다. 새끼 용의 머리가 툭 떨어지고 머리 잃은 몸이 펄떡거리며 피를 뿜었다.

세계가 들리지 않는 비명을 질렀다. 라비린을 휘감던 덩굴이 순식간에 말라비틀어져 떨어졌다. 샤를레아의 집념과 원망이 라비린에게로 쏟아졌다.

“뭐 이런…….”

새끼 용에게서 튄 피가 묻은 옷자락이 타들어갔다. 라비린은 황급히 옷을 벗어 던지려고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팔다리를 붙들고 늘어지는 덩굴도 없는데 커다란 족쇄가 걸린 듯했다.

옷을 다 태운 피는 살갗도 거침없이 태웠다. 눈앞이 하얗게 변하는 고통이 라비린을 후려갈겼다. 라비린은 이를 득득 갈며 쓰러진 셰비언을 걷어찼다.

“일어…… 일어나! 언제까지 드러누워 있을 건데?”

꽤 아프게 때렸는데도 셰비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라비린은 몇 번 더 시도하다 그만 포기하고 그 자리에 벌렁 드러누웠다. 때리는 것도 상당한 체력이 소모되는 일이었다. 숨이 찼다.

멍하니 누운 채로 하늘을 구경했다. 하늘을 뒤덮은 균열 곳곳에 커다란 구멍이 나 있는 걸 보니 셰비언이 너무 늦지 않게 일어나기만 한다면 탈출은 확실히 가능할 것 같았다.

‘설마 샤를레아 목까지 따줬는데 못 깨어나는 건 아니겠지.’

통증은 여전한데 점점 의식이 아득해졌다. 뭔가 억울했다. 이렇게나 아플 거면 정신이나 멀쩡하든지, 이왕 정신을 잃을 거면 아프지나 말든지 할 것이지, 고통은 고통대로 받으면서 정신도 못 지킨다니.

‘이대로 죽나?’

하마터면 오드리가 익사할 뻔했다며 셰비언이 이를 갈던 걸 생각하면, 자신이 여기서 죽는 것도 가능한 일 같았다. 벌써 하늘의 균열과 구멍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걸 보면 그게 그리 먼 일이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손끝발끝이 차갑게 식어가는 게 느껴졌다.

죽음이 코앞이라도 딱히 두렵지는 않았다. 되레 살짝 웃음이 났다.

‘아버지가 알면 뒤집어지겠는데.’

타우레드 후작이 둘째 아들인 피올을 쉽게 놔준 것은 라비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족스러운 후계자가 있었기에 규격 외 인생을 살고 싶어 하는 다른 자식에게 집착하지 않았다.

한데 하필 라디아타가 왕비가 된 지금에 결혼도 하지 않고 자식도 남기지 않은 라비린이 이런 곳에서 죽어버린다면, 그는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새삼 피올을 가문으로 데려오기엔 자존심이 많이 상할 것이고, 아마 전통대로 방계에서 아이 하나 데려다 양자로 삼겠지만 그 속이 편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예전부터 한 번쯤은 아버지 뒤통수를 제대로 쳐 보고 싶었는데……. 이런 방식으로 해낼 줄은 몰랐지. 할 수만 있다면 그 얼굴을 꼭 한 번 보고 싶은데 아쉽게 됐어.’

시야는 이미 까맣게 변한 지 오래였다. 라비린은 별 의미도 없이 눈꺼풀을 깜빡대다 그만 눈을 감았다. 귓가를 자극하던 바람 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졌다.

오드리는 멍하니 눈을 깜빡거렸다. 하늘이 마구 무너지기 시작하던 시점에 정신을 잃고 쓰러졌던 게 마지막 기억이었다. 무섭긴 했어도 셰비언이 있으니 무사히 넘어갈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거늘, 그 뒤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셰비언과 라비린 모두가 쓰러져 있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셰비언?”

오드리가 셰비언을 흔들었지만, 셰비언은 신음성을 흘리며 뒤척거릴 뿐 눈을 뜨지 않았다. 창백한 안색과 이마와 목을 가득 적신 땀이 심상치 않았다. 오드리는 그의 서늘한 손을 쥐고 제 이마를 식혔다.

‘냉정해져야 해……. 지금 남아 있는 건 나뿐이야. 젠장, 토할 것 같아.’

셰비언은 일단 겉으로나마 멀쩡한 상태인 반면, 라비린은 언뜻 봐도 중상자였다. 어깨는 뼈가 드러나도록 패인 데다 가슴팍에선 피가 흐르고 반쯤 벗겨진 옷자락에서는 탄내가 났다. 피범벅인 상체에서 눈을 떼기가 어려웠다.

“……라비린.”

일부러 귓가에 바싹 붙어 불러도 라비린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오드리가 무슨 말을 하든 허투루 듣지 않고 귀 기울여 주던 사람 같지 않았다. 하긴 중상자에게 그런 걸 바라면 안 된다. 알면서도 속이 울렁거렸다.

“라비린, 눈 좀 떠봐.”

엉엉 운 것도 아니고 소리를 지른 것도 아닌데 목소리가 형편없이 쉬어서 나왔다. 바닥에 고인 피에 옷이 젖어드는 걸 보자 가슴이 선뜩해졌다.

오드리는 라비린의 가슴팍을 덮은 피를 정신없이 손으로 걷어냈다. 그러자 검고 작은 덩어리들이 쉴 새 없이 살점을 파먹고 있는 게 드러났다. 덕분에 상처는 계속해서 심각해지고 있었다.

“이, 이게 뭐야……?”

탄내가 나기에 화상이라도 입은 줄 알았는데, 벌레가 달라붙어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오드리는 다급히 벌레를 잡아 뜯었다. 벌레는 물컹하고 미끈거려서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러다 오드리의 손끝에 남아 있던 상처가 벌어져 피가 흐르자 기다렸다는 듯 먹이를 바꿨다.

“읏!”

따끔한 통증과 함께 손끝이 불타는 듯한 감각이 찾아왔다. 오드리는 제게로 옮겨온 벌레를 보고도 차마 라비린의 상처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매정하게 물러나기엔 라비린의 상태가 너무 위중했다. 가냘픈 숨이 끊어질 듯 가느다래질 때마다 심장이 펄떡거렸다.

벌레를 모두 떼어내고도 라비린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오드리는 피가 흐르는 가슴팍의 상처를 손으로 틀어막고 어쩔 줄을 몰랐다. 평소 다이앤이 나불대던 응급처치 요령이 머릿속 어딘가에 잘 보관돼 있을 텐데, 어째 실마리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2차 괴물 사태 때는 대체 무슨 정신으로 윈디를 타고 브란젤을 달렸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때 브란젤은 시신과 피로 덮여 있었는데 말이다. 그저 그런 타인과 가까운 사람의 상처 사이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다는 걸, 오드리는 뼛속 깊이 실감했다.

‘내 잘못인가? 내가 태도를 좀 더 분명히 하고 선을 그었으면 라비린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텐데, 내가 어중간하게 굴어서…….’

손가락 사이로 넘쳐나는 피를 막는 동안 자괴감과 죄책감이 차올랐다. 라비린이 바라는 사랑을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면서 그와 나누는 우정이 좋아 붙들고 있었던 대가를 이런 식으로 치르는 것만 같았다.

‘다쳐도 내가 다치는 게 공정할 텐데.’

사람을 이용해 놓고 이렇게까지 후회를 해 보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뒤엉켰다.

그때, 희고 서늘한 손이 오드리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란 오드리가 파드득 몸을 떨었다.

“걱정 마요, 라비린을 죽게 두진 않을 테니.”

“셰비언! 언제 일어난 거지? 정말 라비린을 살릴 수 있…….”

자신도 모르게 기뻐 묻던 오드리의 입술이 싸늘하게 굳었다. 미소 짓는 셰비언의 얼굴이 아직 혈색 없이 창백했다. 아까 누워 있던 그대로였다.

“셰비언……. 만약, 라비린을 살리는 게 그대에게 부담스럽다면…….”

오드리는 차마 말을 끝내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라비린은 자신을 위해 왔다가 죽을 위기에 처했는데, 그런 그의 상처를 손으로 막고 있으면서 셰비언을 먼저 걱정하는 자신이 혐오스러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라비린을 외면할 수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살릴 수 있다는데, 어떻게 포기할 수 있겠는가?

“울지 말아요.”

셰비언의 입술이 오드리의 눈에 맺힌 눈물을 닦아냈다. 오드리는 그의 입맞춤을 받고서야 제가 울고 있다는 걸 알았다.

“오드리, 날 뭘로 보는 거예요? 이깟 상처쯤 없던 일로 만드는 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셰비언이 눈을 휘며 웃었다. 그는 오드리의 뺨에 남은 눈물을 마저 훔치고는 라비린의 상처에 손을 얹었다. 피가 멎고 부러진 뼈가 붙었다. 패였던 살점이 차오른 뒤 마지막으로 피부가 재생되어 붉은 근육을 덮고 나자 처참하던 부상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 정도야 아무 것도 아니라고요.”

“하지만 지금 그대의 안색이…….”

“나는 마법의 주인이에요. 이 정도도 못하면 말이 안 되죠. 체력이라면 아직 팔팔하게 남았으니 오드리는 쓸데없는 걱정은 말고 얼른 손이나 내놔요.”

오드리의 표정이 그제야 풀렸다. 잔뜩 힘이 들어갔던 어깨가 편안하게 늘어지고 안도의 한숨도 길게 흘러나왔다. 파랗게 질렸던 뺨에도 드디어 혈색이 돌았다.

“정말 다행이야, 라비린이 여기서 죽기라도 했으면…….”

“피, 쓰러진 건 나도 마찬가지인데 라비린만 걱정하는 거예요?”

“그게 아니라는 거 알잖아.”

“알죠, 알지만 괜히 지는 기분이 든다고요.”

오드리가 황급히 변명을 늘어놓았다. 라비린은 말이 잘 통하는 드문 친구이고, 그가 이런 곳에서 죽으면 라디아타의 얼굴은 어찌 보고, 피올과도 관계가 어색해질 텐데 그럼 네이기스는 어떡하고……. 하지만 오드리의 변명 중 어느 것도 셰비언을 설득하지는 못했다.

셰비언은 피범벅이 된 오드리의 손끝에 입을 맞추며 세상모르게 자고 있는 라비린을 살짝 흘겼다. 라비린의 활약은 그의 기대 이상이었지만, 처참한 꼴로 죽게 해서 그를 오드리의 마음에 남겨둘 수는 없었다. 죽은 사람에게 진 빚은 갚을 수도 없었다.

“손은 어쩌다 이랬어요? 엉망이잖아요.”

“피를 막느라 그랬지. 내버려두면 과다출혈로 죽을 것 같았…….”

셰비언이 오드리의 손가락 하나하나에 입을 맞추니, 상처를 헤집으며 살을 파먹던 검은 벌레들이 툭툭 떨어졌다. 오드리는 그때마다 잊고 있었던 통증이 밀려와 입술을 깨물며 신음을 참았다.

“……으.”

“그렇게 참지 말고 아프면 아프다고 해요.”

“일부러 참으려 하는 게 아니…… 윽.”

오드리는 좀처럼 편하게 아픈 티를 내지 못했다. 남들 앞에서 고통을 드러내지 않은 세월이 너무 길었다. 이에 눌린 입술에 상처가 났다.

“계속 그렇게 입술을 깨물면 내가 입으로 막아버릴 거예요.”

“이런, 그거 좋은데?”

“먹을 때랑 잘 때만 빼고 다 붙어 있어도 괜찮은 거죠?”

오드리가 피식 웃었다. 그새 창백해진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농담은.”

“진짠데. 라비린을 위해서 오드리가 손에 이렇게 상처를 입었다고 생각하니까 짜증이 확 난단 말이죠. 오드리, 그렇게 붙어 있지 않는 대신 라비린에겐 이 상처 비밀로 해도 돼요? 되게 으쓱거리며 좋아할 거라 꼴 보기 싫어요.”

오드리는 셰비언이 질투하는 게 좋았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 자신이 있는 아래로 추락한 용을 보는 건 특별한 만족감을 주었다. 그녀는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셰비언이 돌려주는 미소가 손끝의 고통쯤은 아무것도 아닐 정도로 달콤했다.

셰비언의 미소에 홀려 있는 사이 치료가 끝났다. 오드리는 애초 상처 입은 적도 없는 것 같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정말 신기해.”

“치유마법은 만능이 아니에요. 돌아가면 요양을 꽤 해야 할 거예요.”

“겨우 손가락을 조금 치료한 것뿐인데도?”

“결코 일반적인 상처가 아니니까요. 육신만이 아니라 마력에도 상당한 손상이 있었을 거예요.”

셰비언은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벌레를 발로 밟아 짓이겼다. 샤를레아의 심장 조각은 그녀의 본신만큼이나 끈질기고 집요해서, 파먹을 살점이 없는데도 핏물을 퍼마시며 버텼다. 끔찍했다.

“정말이지, 샤를레아는 살아 있을 때나 죽었을 때나 마음에 드는 게 없네요.”

“샤를레아?”

“네에. 바로 이게 샤를레아의 사체고, 이 벌레는 샤를레아가 남긴 미련의 조각이에요. 우릴 잡아먹고 이 안에서 쑥쑥 자랄 생각이었나 본데, 둘 다 끌어들이는 데에 성공해 놓고 이런 끝을 맞게 될 줄은 몰랐겠죠. 그토록 하찮게 보던 인간에게 죽다니 그야말로 딱 들어맞는 끝이에요.”

“라비린이 샤를레아를 죽였다고?”

오드리는 당황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셰비언이 그린 마법진은 용의 본체에 비하면 손바닥만 한 크기인데도 피와 덩굴 조각으로 더럽혀져 용의 흔적을 찾기 어려웠다.

“굳이 눈으로 확인할 필요가 있나요. 별로 보기 좋은 것도 아닌데.”

셰비언은 오드리가 찾아내기 전에 얼른 샤를레아의 사체를 걷어차 마법진 밖으로 떨어뜨렸다. 피에 젖은 덩굴 조각도 모조리 밖으로 밀어냈다. 마법진 위에 좀 둔다고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겠지만, 이건 기분 문제였다.

“오드리, 라비린을 잘 붙들고 있어요. 기껏 살려냈는데 미끄러져 떨어지면 아쉬울 테니까.”

셰비언은 말을 끝맺기 무섭게 번개를 쥐고 구멍 난 하늘을 때렸다. 안 그래도 균열로 가득하고 듬성듬성 구멍이 나 있었던 하늘이 와르르 무너졌다.

* * *

마법진으로 만들어낸 대포는 내구성이 그리 좋지 않았다. 알에 구멍 서너 개를 내고 나자 불안정하게 깜빡거리더니 더 이상 작동하지 않았다. 비니타는 그 원인을 마력 부족에서 찾았고, 스트라스티는 새끼 용의 사체를 쓰고도 극악인 효율에 질색하며 마력을 더 보태달라는 요청을 거절했다. 자연히 남은 알껍데기를 부수는 작업은 기사들과 용병들의 몫이 되었다.

“대장, 그냥 마력을 붓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러게요. 저도 어디 가서 마력 딸린다는 말은 안 들어봤는데…….”

대포에 비하면 형편없이 더딘 작업 속도에 불만이 폭주했지만 스트라스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제 마력이 정확이 얼마나 되는지도 모르는 놈들이 마력을 붓다가 탈진하는 꼴을 보느니 좀 느리더라도 손으로 하는 게 나았다.

“시끄러워, 이놈들아. 구시렁댈 기운이 있거든 알이나 두들겨!”

“대장, 다른 게 아니라 팔이 떨어질 것 같아서 그럽니다.”

“이거 우리가 두들긴다고 뭐 진척이 있는 것 같지도 않고…….”

“꼭 밖에서도 쳐 줘야 합니까? 내버려 둬도 알아서 나오지 않을까요? 이건 알이잖습니까.”

스트라스티는 자신이 부하들을 너무 편하게 대해준 건 아닐까 고민에 빠졌다. 말이 사표지, 돌아가면 다시 기사단에 복귀해야 하는 현실을 다 잊은 것 같았다. 그나마 입으로만 딴소리고 몸으로는 열심히 일해서 망정이지, 그마저도 아니었으면 화가 머리끝까지 났을 것이다.

“계속 그런 식으로 입 털어봐. 산트렘에서…… 아니, 산트렘까지 갈 것도 없지. 이 빌어먹을 섬에서 나간 뒤가 두렵지 않다는 뜻으로 알아듣고 잘 기억해 둘 테니까.”

스트라스티의 으름장은 분명한 효과를 발휘했다. 입으로만 구시렁거리던 것도 못 하게 된 산트렘의 기사들이 이를 악물고 알을 깨는 데에 집중했기 때문이었다. 그게 정말 도움이 되긴 했는지, 한동안 흠집도 나지 않던 알이 갑자기 무너지듯 부서졌다.

바싹 마른 검은 먼지가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그 안에서 길쭉한 그림자가 휘청거리며 걸어 나오니, 산트렘의 기사들과 나랍인 용병들이 일제히 긴장해 뒤로 물러났다.

그림자는 모두 셋이었다. 길쭉하니 키가 큰 라비린과 셰비언, 그리고 셰비언에게 파묻혀 안겨 있다시피 한 오드리. 셋 다 혈색이 좋고 다친 곳 없이 멀쩡해 보였다. 옷 여기저기가 찢어진 데다 먼지를 잔뜩 뒤집어쓰곤 있었지만, 이곳저곳 부상을 입지 않은 자가 드문 산트렘의 기사들과 나랍인 용병들에 비하면 아주 상태가 좋았다.

두 다리를 딛고 선 사람들의 머릿수를 재빠르게 세어본 라비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기사고 용병이고 가릴 것 없이 피해가 컸다. 더 이상의 회복마법은 어렵다고 셰비언이 분명히 말하지 않았더라면, 염치 불고하고 매달렸을지도 몰랐다.

라비린이 사람들을 훑는 동안 스트라스티는 오드리 일행의 상태를 살폈다. 정확히는, 셰비언이 폭 싸고도는 오드리에게 신경을 집중했다. 초록색 눈동자에서 느껴지는 힘이 대단한 아가씨라는 풍문은 익히 들었지만, 멀쩡히 눈을 뜨고 있는 오드리를 보는 건 처음이었다.

“레이디 오드리!”

오드리가 휙 고개를 돌려 정확하게 시선을 맞춰왔다. 맑고 분명한 눈빛이 인상적이었다.

‘아베드의 평가가 정확하군.’

들은 대로 담이 크고 침착했다. 피와 시체로 엉망인 공동의 풍경을 보고도 비명을 지르거나 기절하지 않은 것만 해도 대단한데, 눈을 크게 뜨고 상황을 파악하려 애쓰는 걸 보니 데리고 나가는 과정에서 쓸데없는 고생을 추가로 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깨끗하게 백지로 남겨두었던 첫인상에 호감이 가장 먼저 밑그림을 그렸다.

“카론 남작가의 스트라스티, 예하 전 산트렘의 기사 스물아홉 명과 함께 아가씨를 모시러 왔습니다.”

“……카론 경이로군요. 설마 사는 동안 제가 산트렘의 기사에게 호위를 받을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말이에요. 경, 무례라는 건 알지만 정말 궁금해서 그러는데, 보티안 씨의 요청만으로 여기까지 오셨다는 게 진짜인가요?”

“산트렘의 기사는 동료의 지원 요청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그게 바로 의리라는 거죠. 그리고 지금은 무직이니 그리 부담스럽게 여기지 않으셔도 됩니다. 자, 제게 오시죠. 모시겠습니다.”

스트라스티가 싹싹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귀족의 영향력이 날로 약화되는 요즘 시대에도 산트렘 지역을 지배하는 카론 남작가의 성을 단 기사가 내미는 손이었다. 그녀는 오드리가 곧장 응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오드리는 바로 그 손을 잡는 대신 얼굴에 흰 튤립을 새긴 일련의 사람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용맹무쌍하게 괴물을 잡던 나랍인 용병들은 어디로 갔는지, 그들은 첫사랑을 마주친 수줍음 많은 아가씨처럼 뺨을 붉게 물들이고 오드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들은…… 나랍인인가?”

“예, 단주님. 저희는 로렐라이와 장기 계약을 맺은 나랍인 용병입니다. 이디케 락시 씨의 명령을 받고 왔습니다.”

오드리는 제 앞에 나선 나랍인 용병의 얼굴을 기억했다. 셰비언이 만든 구속마법도구를 차고 마차에 오르던 여자였다. 말브레 극장 습격 사건의 주인공 중 한 명이었다.

“……이디케가? 아니, 아무리 이디케라도 상단의 인력에게 멋대로 이런 위험한 임무를 맡기면 어떡…….”

“모두 자원해서 왔습니다. 여기서 목숨을 잃은 동료들도 있긴 합니다만, 처음부터 각오한 바였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는 어떤 보상도 요구하지 않을 거고, 나중에라도 이 일로 문제를 일으키지도 않을 겁니다.”

별을 박아 넣은 듯 빛나는 눈과 다소 긴장한 듯 어색한 미소, 떨리는 목소리……. 오드리의 기억과는 완전히 다른 인상이었다. 손에 무고한 피를 묻히고 멜브란트의 모든 것이 증오스럽다고 외치던 사람과 동일인물이라곤 믿어지지 않는, 가히 충격적이라고 할 만한 변화였다.

오드리의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 쿵쿵 뛰는 심장 소리가 밖에 들릴까 두려워졌다. 뭔가 큰 뜻을 품고 그들의 고용을 결정한 게 아니었다. 그저 실력에 비해 몸값이 싸다는 단순한 이유로 내렸던 결정이 이런 결과를 낳을 거라고 어디 상상이나 했던가.

‘처음에 로렐라이를 만들 거라 결심할 때에는 내가 이런 책임감을 짊어지게 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어쩌겠어, 이미 벌어진 일인걸.’

오드리는 흐릿한 기억을 더듬었다.

“당신의 이름을 기억해. 탈린, 탈린 진……. 맞지?”

“제 이름을 알고 계시다니 그저 놀랍습니다.”

용병 나부랭이 이름은 알아서 뭐 하냐며 라비린은 물론 스트라스티에게 자기소개도 않았던 탈린이지만, 오드리가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자 숨김없이 기쁨을 드러냈다. 담배를 물고 독설을 내뱉던 입술이 예쁜 호선을 그렸다. 탈린이 경애로 눈을 반짝이며 오드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단주님, 부디 저희와 함께 나가주시겠습니까?”

피를 뒤집어쓴 건장한 용병이 자그마한 아가씨에게 진심을 건네는 장면에는 보는 사람의 숨을 죽이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뭐랄까, 양피지에 기록되어 오래도록 남아야 할 것 같은 장면의 목격자가 된 듯한 착각에 휩싸이게 만든다고 해야 할까.

스트라스티 역시 어울리지 않는 침묵 속에서 멍하니 구경꾼이 되어 있었지만, 카론의 성을 달고 왕실과 미묘한 줄다리기를 해왔던 세월이 그녀를 깨웠다. 예의범절을 지킬 의지가 부족한 거지 정치 감각은 부족하지 않은 스트라스티는 황급히 탈린의 옆에 서서 질세라 손을 내밀었다.

“레이디 오드리! 역시 용병보다는 기사가 더 믿음직스럽지 않겠습니까? 귀하와 로렐라이의 인연은 잘 알고 있습니다만, 역시 지금은 제 손을 잡으시는 게 맞지 않나 싶습니다.”

오드리는 제 앞에 내밀어진 손 두 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하나는 희고 하나는 꿀처럼 노르스름한 손이었지만, 둘 다 손가락과 손바닥에 굳은살이 잔뜩 박여 거칠고 주름 사이에 피가 묻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떤 손을 잡아야 하지?’

오드리는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했다. 하늘이 무너지자마자 밖으로 나올 수 있을 줄 알았거늘, 세 사람은 껍질 파편으로 가득한 길을 한참이나 걷고 나서야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 길을 걷는 동안 깨어난 라비린에게 간략한 설명을 듣고 나름 생각을 정리해 두었지만, 막상 둘을 눈앞에 두니 마음이 파도처럼 술렁거렸다.

그때, 셰비언이 망설이는 오드리를 번쩍 들어 올리며 두 여자와 오드리 사이에 끼어들었다. 갑작스런 개입이었기에, 스트라스티와 탈린은 졸지에 셰비언의 등을 향해 손을 내민 꼴이 되었다. 셰비언은 황당해하는 두 사람에겐 눈곱만큼의 관심도 없었다. 그가 오드리의 이마와 뺨에 키스하며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오드리, 내가 골라도 돼요?”

“그대가?”

“네에. 오드리는 안 그래도 피곤할 텐데 굳이 귀찮은 일을 도맡을 필요가 있나요. 작은 일은 내게 맡기고 푹 쉬어요.”

셰비언의 해맑은 말투가 스트라스티와 탈린의 성질을 긁었다. 오드리는 셰비언의 뒤통수를 향해 사나운 시선을 보내는 두 사람을 흘끗 바라보았다. 눈앞에 있는 사람이 사실은 용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저런 눈빛으로 쏘아볼 수 있다니, 확실히 둘 다 난사람이긴 난사람이었다.

셰비언이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둘 중 어느 쪽을 택하더라도 문제가 생기는 거 맞죠?”

“이젠 그런 것도 알아?”

“그럼요. 그동안 얼마나 공부했는데요.”

셰비언이 뻐기듯 어깨를 으쓱였다. 오드리는 셰비언의 호언장담이 그다지 미덥지는 않았지만, 그대로 그에게 판단을 유보하고 싶은 유혹을 느꼈다. 용이 골랐다는데 설마 자신에게 와서 따지겠는가? 게다가 애써 제 힘으로 서 있다가 편안하게 안기니 피곤이 몰려온 것도 한몫했다. 그녀는 망설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대의 마음대로 해.”

“좋아요. 오드리는 이제부터 한숨 자고 있어요. 그럼 모든 게 끝나 있을 테니.”

셰비언의 속삭임은 마치 일상어로 이루어진 주문 같았다. 오드리는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잠에 빠졌다. 누가 봐도 정상적인 수면은 아니었다.

“어쩌죠, 오드리가 잠들어 버렸네요.”

스트라스티와 탈린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을 잊었다. 하지만 셰비언은 뻔뻔하게 굴기로 작정한 사람 같았다. 그는 구석에 없는 사람처럼 서 있던 라비린에게 대뜸 오드리를 떠밀었다.

“자, 받아.”

“어어? 내가 왜?”

“그야 너라면 어떤 순간에도 오드리를 우선해서 지킬 테니까. 오드리를 잘 부탁해. 지금 믿을 건 용 살해자 너밖에 없네.”

용 살해자. 탈출하는 내내 놀림을 받았던 라비린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말도 못하는 새끼 용 목을 자르니까 기분 좋냐고 물을 땐 언제고 새삼 용 살해자 같은 소리 하기는…….”

라비린은 구시렁대면서도 조심스럽게 오드리를 받아들었다. 북부인으로 오인 받을 만큼 키도 덩치도 큰 그에게 남부인치고도 작은 편인 오드리는 푹 파묻히듯 안겼다. 그녀는 자세가 불편한지 뒤척이면서도 깨지 않았다.

“셰비언 씨, 이게 무슨 짓이죠? 멀쩡히 잘 깨어 있던 사람들 갑자기 재우는 걸로도 모자라 외간남자에게 덥석 안겨주다니요!”

“우리 둘 중 누구도 안 된다면 차라리 아르젠 백작이 안고 가는 게 낫다고 생각하지 않아? 설마 라비린 녀석은 레이디의 옛 약혼자였던 걸 잊어버리기라도 했어? 백작, 저 둘이 저러고 있는 게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면 어마어마한 스캔들이 날 거야.”

닭 쫓던 개 꼴이 된 탈린과 스트라스티의 원망과 항의가 셰비언에게 쏟아졌다. 물론 셰비언은 그들의 항의를 깡그리 무시했다.

“오드리의 호의를 받아낼 욕심에 정신줄 놓지 말고 각자 동료들부터 챙겨. 혹시 이번에도 내가 치료해 줄 거라는 기대를 하고 있었다면 얼른 접도록 해.”

중상을 입고 전력 외 인원이 되었던 사람들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인간은 시신에도 특별한 의미를 두잖아. 저 시신들이 이대로 섬과 함께 바다 속에 처박혀도 괜찮은 게 아니라면 챙겨서 나가. 되도록 빨리 섬을 탈출하는 게 좋을 거야. 난 곧장 이 섬을 가라앉힐 생각이라, 당신들에게 그리 많은 시간을 줄 수 있을 것 같지 않거든.”

셰비언의 사나운 미소에서 그의 진심을 읽어낸 스트라스티가 크게 탄식했다.

“맙소사, 해달라는 대로 다 했고 최선을 다해 알 껍질도 깨줬는데 고맙다는 말은 못 듣고 레이디 오드리에게 붙은 기생충 취급을 당할 줄이야.”

“걱정 마, 제대로 일해준 값은 잊지 않고 톡톡히 치러줄 테니까 지금은 당신들 목숨이나 챙겨.”

“세상에서 제일 못 믿을 말이 차용증 없이 돈 빌려가면서 나중에 갚겠다는 말인 거 아나?”

“외상이면 소도 잡아 먹는댔는데 이렇게 농땡이 피우다가 갚아야 되는 사람이 줄어들면 나야 좋지.”

셰비언의 어휘 구사력은 예전과는 비할 수 없이 발전한 상태였다. 하지만 애초 어휘 구사력이 일곱 살 어린애 수준이라도 이길 수 없는 상대다. 스트라스티는 더 추궁하기를 포기하고 상황 수습을 우선으로 삼았다. 피올더러 라비린을 호위하도록 해서 먼저 내보냈고, 남은 이들은 서둘러 부상자를 챙기고 시신을 수습한 뒤 공동에서 철수했다.

수하를 모두 내보내고 나서야 마지막으로 공동을 나가던 스트라스티는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셰비언이 알껍데기 무더기 앞에 망연하게 서 있었다.

그는 이제 정말 이 세계 이 시대에 마지막으로 남은 용이 되었다.

* * *

발톱섬에 정박하고 대기 중인 검은인어호는 철저히 군함으로 건조된 배였다. 선실은 좁고 창문은 작았으며, 문은 견고했다. 카프러스가 마구 두들겨대도 조금도 틈이 생기지 않을 정도였다.

“워커! 당장 나와봐요! 워커!”

“아으……. 아으으…….”

“워커, 계속 버티면 그냥 부수고 들어갈 겁니다. 셋까지 세겠습니다. 하나, 둘…….”

“아, 진짜!”

워커가 벌컥 문을 열었다. 조금 전까지 누워 있었는지 검은색과 노란색이 섞인 특이한 머리카락은 엉망으로 눌린 산발이었고, 눈 밑은 시커멓게 그늘이 져 있었다.

“왜요, 왜! 이만큼 부려먹었으면 됐지! 이제 나도 좀 쉽시다!”

연달아 대형 강철새를 운전한 일은 워커의 체력을 완전히 바닥냈다. 아이샤를 태우고 메리디에스까지 갈 엄두도 못 내서 검은인어호에 처박힌 것만 봐도 알 만했다. 벌집처럼 다닥다닥한 선실 어딘가에서는 아이샤가 뱃멀미에 시달리며 악몽을 꾸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휴식이 절실한 워커의 사정을 배려하기엔 지금 카프러스의 마음이 몹시 급했다. 그는 비협조적인 워커를 설득하려 시도하는 대신 달랑 들어 어깨에 얹고 갑판으로 뛰쳐나갔다.

곡식자루처럼 뒤집혀 선원들에게 배운 질펀한 욕을 쏟아내던 워커는 생각지도 못한 손님의 등장에 눈을 크게 떴다. 피가 살벌하게 묻은 옷을 입은 비니타가 갑판에서 발을 동동거리고 있었다.

“스승님!”

“……내가 멀미를 하나?”

“워커 스승님!”

비니타가 워커를 붙들고 늘어졌다. 워커는 생전 못 들어봤던 스승님이라는 호칭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비니타가 타고 온 걸로 추정되는 시연용 강철새가 갑판에 앉아 있었다. 크기가 서로 다른 강철새 두 대가 나란히 있는 걸 보니 머리가 다 어지러웠다.

“세상에……. 비니타 네가 왜 여기 있어? 대체 누가 너한테 비행 연습을 시킨 거야? 어떤 자식이야? 내가 아주 그냥 요절을 내버려야지!”

“스승님, 셰비언님이 곧 이 섬을 가라앉힐 거라고 하셨어요. 시간을 얼마 주지 못할 거라고도 하셨고요. 벨키스 경께서 레이디 오드리를 모시고 오고 있는데 아무래도 늦을 것 같아요! 스승님, 급해요!”

“무슨 소리야, 차근차근 얘기해!”

워커는 비니타보다 훨씬 낙천적으로 상황을 바라보았다. 어쨌거나 오드리를 구해냈으니 셰비언이 미쳐 날뛸 일은 없을 것이고, 그러니 시간을 많이 주지 못하니 어쩌니 해도 크게 걱정할 일은 없을 것이라고.

그러나 알껍데기 무더기 앞에 서 있던 셰비언의 뒷모습을 기억하는 비니타의 의견은 달랐다. 그녀는 셰비언이 산트렘의 기사나 나랍인 용병의 안전을 고려해 주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셰비언님에게 다른 인간들의 목숨은 레이디 오드리를 구출하기 위한 도구 중 하나에 불과해요. 쓸모를 다했는데 계속 안전을 고려해 줄 이유가 없죠. 정 늦었다 싶으면 레이디 오드리만 달랑 건져낼 게 분명해요!”

“비니타……. 네가 셰비언에게 어떤 인상을 받았는지는 모르겠는데, 그 녀석 그렇게까지 매정하지 않아. 시신을 챙길 여유도 줬다면서.”

“아녜요, 아니라니까요. 정말 자비롭게 굴 생각이셨다면 섬을 가라앉히기보다 중상자를 치료하는 걸 우선으로 하셨을 거예요. 스승님, 우리가 구해야 돼요! 그리고 빨리 벗어나야 해요! 여기에 계속 있는 건 너무 위험하다고요!”

“네 느낌 말고 대체 무슨 근거가 있어서 그렇게 생각하는 건데? 설마 카론 경이나 벨키스 경이 구조 요청을 하라고 널 보내기라도 했다는 거냐?”

“지금 당장 출발해야 해요. 중상자들의 부상이 계속 악화되고 있을 거예요.”

비니타는 도무지 설득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표정이며 말투가 어찌나 결연한지, 처음엔 웃으며 보던 선원들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예민하게 주변을 살피던 카프러스가 워커의 옆구리를 찔렀다.

“웬만하면 들어줘요.”

“어린애 투정에 장단 맞춰줄 필요 없어요. 쟤도 세상일 전부가 자기 생각대로 돌아가지는 않는다는 걸 알아야 돼요. 저가 뭐라고 브란젤에서 여기까지 강철새를 몰고 와? 미쳤지, 정말.”

“워커, 주변 사람들 얼굴 좀 봐요……. 저 사람들이 듣기엔 비니타나 우리나 근거 없기로는 똑같습니다.”

“젠장, 저 뱃놈새끼들은 왜 그렇게 귀가 얇은 건데요? 국적불문하고 똑같아! 사내답기는 개뿔, 시장바닥에서 소꿉놀이하는 어린애들이 저놈들보다 더 기개가 있을 거예요.”

“워커, 목소리 좀 죽여요.”

“내 속이 터져 죽을 것 같은데 목소리 죽일 여유가 어디 있어요?”

워커는 잔뜩 투덜대면서도 결국 대형 강철새의 조종간을 잡았다. 엉덩이를 걷어차 실컷 두들긴 다음에 선실에 가둬두고 싶었던 비니타를 부조종사로 삼아 옆에 태운 채였다.

짐을 죄다 내버리고 정신없이 섬을 질주하던 라비린 일행은 뜻밖의 마중에 몹시 기뻐했지만, 비니타의 등장에는 경악했다.

“세상에, 비니타가 왜 여기 있어?”

“먼저 돌아가랬잖아!”

“워커 씨, 분명히 말하는데 우리가 보낸 거 아닙니다.”

“오, 카론 경. 그렇게 사과하지 않으셔도 돼요. 안 그래도 그럴 줄 알았거든요. 비니타, 너 돌아가서 보자. 사하스바티가 뭐라고 할지 벌써부터 기대되지 않아?”

비니타가 워커의 잔소리에 시달리며 남몰래 구원 요청을 보냈지만, 그녀를 부추겼던 범인인 피올은 야멸차게 그 시선을 외면했다. 워커가 강철새에 태우고 온 의사가 정말로 쓸모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피올, 오드리 아가씨는 멀쩡해? 왜 눈을 못 떠?”

“셰비언이 일부러 재운 거야. 아마 한참 잘걸. 그나저나 워커, 이대로 메리디에스로 가는 건가?”

“내 얼굴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못 가, 못 가. 중간에 바다에 빠져 죽고 싶지 않으면 배 타고 가.”

워커는 지금도 죽을 것 같았다. 화산의 정상 부근이 폭삭 내려앉는 것도, 셰비언이 본체 상태로 화산 위로 날아오르는 것도 보았지만, 피곤에 눅진하게 절은 머리는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어떤 위기감도 느끼지 못하고 강철새를 검은인어호에 착륙시켰다. 몇 시간 뒤의 자신에게 죽도록 욕을 먹을 줄은 꿈에도 모르고.

나랍인 용병들은 강철새에서 내리자마자 화산의 상태를 보고 기겁했다.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회색 연기, 연기 속에서 툭툭 튀어나오는 바위와 자갈, 금방이라도 넘쳐흐를 듯 정상에서 넘실거리는 용암…….

“당장 도망쳐야 돼요! 지금 당장!”

“예?”

“이 답답한 인간들 같으니!”

나랍인 용병들이 보기에, 검은인어호 선원들의 동작은 속이 터지도록 답답하고 굼뜬 것이었다. 화산이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 모르니 당연한 일이지만, 그렇구나 하고 가만히 있다간 먼 바다에 나가보기도 전에 죽을 게 분명하다. 그들은 바로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섰다.

선원들의 정신을 반쯤 지배하다시피 하는 미신에 따르면 여자들이 뱃일을 하는 건 불길한 일이었다. 하지만 카프러스는 물론이고 전신을 피로 물들인 흉흉한 꼴의 스트라스티도 나랍인 용병들의 뒷배가 되어주었으니, 감히 나랍인 용병들에게 싫은 소리를 하는 자가 없었다.

그러다 화산이 뱉은 연기로 하늘이 어두워지고 난 후부터는 선원들의 몸놀림도 두 배는 빨라졌다. 코를 찌르는 유황 냄새와 간간이 흩날리는 회색 재가 그들의 위기감을 자극했기 때문이었다.

“빨리, 빨리!”

밧줄을 잡아당기는 탈린의 이마에서 땀이 뚝뚝 떨어졌다. 마음은 벌써 발톱섬을 떠난 지 오래인데, 바람도 파도도 그들의 편이 아니었다. 파도가 자꾸 배를 섬으로 밀어냈다. 이런 상황에서 섬이 가라앉기 시작하면 어떻게 될지 상상만 해도 불안해서 심장이 입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셰비언은 샤를레아의 둥지를 바닥부터 철저하게 부쉈다. 알을 품고 있던 공동은 물론이고 시신을 안치한 관이 보관된 공동도 남기지 않았다. 너무 많은 공간이 사라진 탓에 화산의 정상 부근이 움푹 꺼지고 그 여파로 용암이 다시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샤를레아가 적절하게 제어했던 이전과는 사뭇 다른 양상이었다.

흐르는 용암과 날리는 화산재에 속이 타들어가는 인간들의 마음을 알 리 없는 셰비언은 섬을 감싸고 있는 샤를레아의 마법을 해체하는 것에 집중했다. 오랜 세월 그녀의 둥지였던 만큼 마법의 개수도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마법이 하나씩 해체될 때마다 발톱섬을 둘러싼 주변의 환경이 바뀌었다. 달튼 제도의 다른 바다와는 확연히 다르게 거칠던 파도는 점점 얌전해졌고, 제멋대로 날뛰던 바람도 일정한 방향으로 불었다. 화산재로 가득할망정 구름은 없던 하늘에도 구름이 끼며 공기가 축축해졌다.

‘마법의 영향력이 이 정도였나?’

예전의 셰비언이었다면 파도의 세기나 바람의 방향, 구름의 유무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는 인간과 어울려 살고 있었다. 아예 비가 내리지 않는 지독한 가뭄을 몇 달이나 겪었는데, 샤를레아의 둥지에서 마법 몇 개를 풀자마자 구름이 끼는 것을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생각해 보면 샤를레아가 깨어 있는 동안에는 기후가 멀쩡했던 날이 없었다. 샤를레아가 눈을 뜬 후 멜브란트에는 가뭄이 들었고 나랍에는 홍수가 났다. 그러다 그녀가 본체를 봉인당했을 때엔 잠시 평년과 같아졌다가, 오드리를 납치해 둥지에 틀어박힌 후로는 멜브란트고 나랍이고 가릴 것 없이 지독한 가뭄에 시달렸다.

‘그동안 어떻게 의심하지 않을 수가 있었지?’

사실 용이 자신의 둥지를 위해 마법을 쓰는 건 셰비언에게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게 주변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따위에는 관심을 둔 적이 없었다. 그러니 샤를레아의 둥지가 가뭄의 원인일 거라고 어디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셰비언은 내심 깊이 탄식했다. 이래서야 샤를레아가 미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충돌했을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때는 지금처럼 쉽게 상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내 둥지도 뭔가 영향을 미치고 있겠지. ……알아봐야 하나?’

셰비언도 자신의 둥지에 수십 개의 마법을 걸어두고 있었다. 마법의 주인에게 대대로 내려오는 영지인 셰비언 절벽 전체에 걸린 마법의 개수는 셀 수가 없었다. 애초 어떤 마법이 얼마나 걸려 있는지 파악하려고 한 적도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외면할 수가 없다. 셰비언은 오드리와 함께 인간들의 사회에 녹아들어 살기로 마음먹었으니까. 샤를레아가 말했던 그대로, 오드리는 그의 심장이었다.

셰비언이 마법을 전부 해체하자 화산재와 뒤섞인 구름이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묵직한 빗방울이 화산재를 품고 툭툭 떨어져 초록색이었던 나뭇잎이 짙은 회색으로 변해갔다. 섬을 감싸고 자리를 지키고 있던 배들의 흰 돛도 우중충한 회색이 되었다.

그리고 몇 시간 뒤, 마침내 섬은 몇 조각으로 갈라져 조금씩 가라앉았다. 화산이 용암과 화산재를 뿜어내며 발악했지만, 마법의 주인이 작정하고 섬의 기반을 무너뜨리는 데에는 당할 수가 없었다.

파도가 크게 출렁거렸다. 파도는 서로 부딪치고 잡아먹으며 점점 덩치를 불렸다. 거기에 장대비까지 쏟아지니, 가까스로 자리를 지키는 배의 선원들이 시야를 가리는 회색 빗물을 닦아내며 걸쭉한 욕을 퍼부었다.

“빌어먹을,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돼?”

“마법사들이 됐다고 할 때까지라잖아! 귓구멍에 소라를 처박았나!”

“누가 몰라서 물어봤냐? 이러다 바다 밑바닥에 처박혀서 물고기랑 안녕할 것 같아서 그러지!”

“어쨌거나 버텨, 새끼야. 여기서 못 버티면 뒈진다.”

“버티다 뒈지나, 튀다가 뒈지나……. 어휴, 해일을 막아야 한다는 사명감만 아니었어도 여기에 절대 자원 안 했을 건데, 내가 무슨 영웅이라고 자원을 했나 그래!”

“지랄한다. 네가 짝사랑하는 그 여자 집이 해안에 있어서 잘 보이려고 지원한 거면서.”

“커흐흠! 커흠!”

아까 샤를레아의 마법진을 성공적으로 막아낸 배와 마법사들이 계속 그 자리를 고수한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섬의 붕괴에 따라 필연적으로 발생할 해일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점차 거세지는 파도를 두려워하면서도 꿋꿋하게 그 자리를 지켰으니, 섬의 상공을 맴도는 새하얀 용이 해일보다 더 무서웠다.

물론 용보다 해일과 파도가 더 무서운 사람도 있긴 했다. 예를 들자면, 기어이 잠에서 깨어나 지독한 뱃멀미를 호소하는 아이샤와 같은 마법사란 이유로 그녀를 감당해야 하는 처지가 된 워커 같은 사람들 말이다.

큰 파도에 올라탄 검은인어호의 뱃머리가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가 바다로 곤두박질쳤다. 선실의 물건들이 사방으로 굴러다녔다. 워커는 위액을 토하는 아이샤의 등을 두들겨 주다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일이 전부 끝날 때까지도 못 나가고 근처 해역에서 뱅뱅 도는 거 아냐?’

사실 검은인어호는 해일을 가라앉히는 마법진이 펼쳐지기 직전에 발톱섬 근처의 바다를 빠져나왔다. 하지만 작은 창문을 통해 거친 파도와 굵직한 빗줄기를 보고 있는 워커는 그런 실감은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마침 배가 쓰러질 듯 옆으로 휘청 기울었다가 간신히 평형을 되찾았다. 코앞까지 달려들었던 새까만 바다가 다시 멀어졌다.

“이 등신 새끼들아! 늬들이 그러고도 뱃사람이냐아!”

탈린의 목소리가 두꺼운 문을 뚫고 들려왔다. 벌써 몇 번이나 들은 고함이었지만 이번 건 유독 악에 받친 것 같다. 뒷배가 되어주는 스트라스티에게 민폐가 될까 조심스레 굴던 태도는 높은 파도 속에 처박은 지 오래였다.

셰비언이 발톱섬에서 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위협적인 기운이 확 끼쳐 왔다. 일부러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도 아닌데 마법망이 마구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갑자기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돋고 기분이 나빠졌다.

‘역시 아까 메리디에스로 직행했어야 했어.’

아무리 체력이 바닥을 기더라도, 착륙하자마자 기절하는 한이 있더라도 메리디에스로 갔어야 했다. 그랬다면 이 흉험한 기운 속에서 배의 흔들림을 견디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뒤늦은 후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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