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7. 용의 둥지 가장 깊은 곳
「개미들끼리도 전쟁을 한다. 식량이 부족한 겨울이 오면 연약한 무리는 보다 강한 무리에게 정복당해 비축한 식량과 애벌레를 빼앗기고 초토화되는 경우가 잦다. 대체 누가 인간만 전쟁을 한다 그랬나? 자네인가?」
통로는 어둡고 길었다. 경사는 점차 가팔라졌고 발밑은 거칠어졌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발목을 삐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정도였다.
“이거, 길이 점점 험해지는데…….”
“제대로 가고 있어요. 조금만 더 가면 돼요.”
공동에서의 일이 있은 후, 비니타의 말엔 상당한 권위가 실렸다. 버릇처럼 투덜대려던 피올마저 냉큼 입을 다물고 내려가는 것에 집중했다.
긴장을 억누른 숨소리, 턱을 타고 땀이 떨어지는 소리, 짓밟힌 경사면에서 돌 부스러지는 소리가 통로를 채웠다. 이 통로는 얼마나 더 가야 끝날까, 신화 속에 내던져진 인간은 과연 제 몫을 할 수 있을까, 무사히 돌아갈 수 있기는 할까.
한껏 부풀어 오른 불안과 긴장이 형태를 갖춰 사람들을 찌르기 직전, 새로운 공동이 나타났다. 이번에도 입구에 들어서고 나서야 통로가 끝났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러나 이번 공동은 아까 마주쳤던 곳과는 조금, 아니 많이 달랐다.
일단 천장에 광구가 없었다. 그럼에도 공동 전체가 은은한 조명을 밝힌 것처럼 밝아서 앞을 보는 데에 무리가 없었다.
무엇보다 비어 있지 않았다. 공동의 한가운데에 마법진으로 보이는 무언가가 그려져 있고, 그 위에 커다란 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하나하나의 크기가 웬만한 사람의 머리를 훌쩍 넘어가는 저걸 정말 알이라고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마는, 일단 생김새는 알이었다. 비록 알 스스로 빛을 발하고 있긴 해도 말이다.
일행은 반사적으로 몸을 굳히고 나갈 출구를 찾았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출구는 없었다. 시야를 가로막는 알 뒤쪽을 확인해야 했다. 그들은 내키지 않는 발을 떼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왠지 기분이 나쁜 곳입니다…….”
나랍인 용병이 불쾌감을 호소했다. 발이 무겁고, 어깨가 굳고, 심장이 빨리 뛴다면서. 착각이 아니라고도 강조했다. 반면 라비린과 피올은 몸의 감각이 살아나는 느낌을 받았다. 꽉 묶이기라도 한 듯 둔감하던 사지 말단에 피가 돌고, 녹슬었던 관절 구석구석이 매끄러워졌다.
혹시 샤를레아의 마력이 옅어진 걸까, 싶었지만 자욱한 유황 냄새는 여전했다. 그녀의 마력이 풍기는 냄새는 아무리 맡아도 코가 마비되지 않아 괴로움이 가시지 않았다.
“냄새 한번 지독하군. 뒷골목을 제 집처럼 돌아다는 걸 봤을 때 좀처럼 씻지 않는 레이디인 걸 알아봤어야 했는데.”
“이 냄새를 빼려면 웬만한 성능의 비누로는 어림도 없을 겁니다. 특제 세제가 필요할 테죠.”
악담 겸 농담을 나누면서도 일행의 걸음은 신중하기 그지없었다. 앞이 밝아도 마법등을 끄지 않았고, 실수로라도 마법진을 밟지 않도록 주의했다. 그러면서도 알과 너무 멀어지지 않도록 거리를 유지했다.
그렇게 애써서 알 뒤쪽의 공간을 눈에 담았는데, 실망스럽게도 출구는 보이지 않았다.
“여기가 끝인가 봅니다.”
“가장 안쪽 방에 알이 있다니, 과연 개미굴답습니다. 용이나 개미나, 땅 속에 둥지 짓는 녀석들의 심리는 다 엇비슷한 걸까요?”
“비록 날개의 유무와 알의 산란력에는 큰 차이가 있지만 나머지는 비슷할지도 모릅니다.”
나랍인 용병과 피올은 주거니 받거니 나눈 말 몇 마디로 용족 최고의 전사인 샤를레아를 여왕개미로 격하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시시각각 바뀌는 몸 상태와 여기까지 와서도 오드리를 찾아내지 못했다는 허탈함을 견디기가 힘들었다.
그때, 아까부터 홀린 듯 알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비니타가 불쑥 입을 뗐다.
“저 알들 근처에서 레이디 오드리의 마력이 느껴져요.”
“……음. 짐작하긴 했지만 별로 듣고 싶었던 말은 아니었어요.”
라비린은 은은하게 빛나는 알을 보며 혀를 찼다. 자꾸 시선을 끌어당겨서 오히려 보지 않으려고 애썼건만, 저 근처에서 오드리의 마력이 느껴진다니 그저 암담했다. 본능적인 거부감이 목을 간질였다.
“비니타, 틀렸을 가능성은 없나요? 오드리의 마력이 저기서 느껴진다고 해서 꼭 오드리가 저기에 있으리란 법은 없잖아요.”
“벨키스 경의 말씀이 맞아요. 마력이 느껴진다고 늘 본인이 거기에 있으리란 법은 없죠. 하지만 마력도 느껴지지 않는 곳에 그 사람이 있을 리는 없거든요. 전 저 안쪽에 레이디 오드리가 계실 거라고 확신해요.”
비니타의 말을 믿고 여기까지 왔는데 새삼 믿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검을 쥔 사람들은 밀려드는 거부감을 씹어 삼키고 저마다 몸을 풀었다.
“전 벨키스 경과 보티안 씨의 컨디션이 좋아진 이유가 레이디 오드리의 마력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이제까지와는 비교도 안 되게 기척이 강하니 그게 영향을 미쳤을 거예요.”
“확실해요?”
“……어, 어쩌면요. 저는 그렇다고 생각하지만, 그게 백 퍼센트라는 뜻은 아니고요…….”
라비린이 떠보듯 묻자 비니타의 자신감은 급격히 하락했다. 그는 덩달아 침울해지는 기분에 더 확인하는 걸 그만두었다.
“비니타는 워커에게 가르침을 받았으니 마법진에 대해서도 잘 알겠죠. 분석을 부탁합니다.”
워커의 제자지만 아직 마법진에 대한 조예가 부족한 비니타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지만, 라비린은 그런 사소한 것까지 신경 써주지 못했다. 셰비언이 어엿한 마법사라고 인정했으니 당연히 어느 정도는 할 수 있겠거니, 그리 여기고 제 일에 집중했다.
주변을 돌며 세어본 바, 알은 총 다섯 개였다.
그중 둘은 빛을 잃어 그냥 알 모양의 회색 바위처럼 보였다. 얼룩덜룩한 무늬만 아니었더라면 빛을 잃은 알이라고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미친 화룡은 돌을 알처럼 품는다고 비웃었을지도 모른다.
남은 셋은 알 안쪽에서부터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수확제의 풍등처럼 은근하고 부드러운 빛이라, 정면으로 보고 있어도 눈이 아프지 않았다. 만지면 따스한 온기가 흘러나올 것만 같았다.
꼼꼼하게 관찰하면서도 감히 알에 다가가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기엔 알 아래쪽에 깔린 마법진의 존재감이 너무 컸다. 어지러이 뒤엉킨 선이 스스로 움직여 관과 같은 기둥들을 꺼냈던 걸 경험하고 나니 저렇게 제대로 형식을 갖춘 마법진은 더더욱 건드릴 엄두가 안 났다.
결국 라비린 일행의 기대는 자연히 비니타에게로 쏠렸다. 비니타는 마법진 주변을 뱅글뱅글 돌며 관찰 중이었다. 어찌나 집중했는지 이름을 불러도 알아듣지 못했다.
골초 나랍인 용병은 틈새를 놓치지 않고 담배를 입에 물었다. 회색 연기가 까칠해진 입술을 적시며 피어올랐다. 몇 명은 물을 마셨고, 한둘은 그녀에게서 여분의 담배를 얻어갔다.
도넛 모양의 연기를 구경하던 라비린은 예의상 권하는 게 뻔한 담배를 정중히 사양했다. 나랍인 용병은 한 번의 거절로 만족했고 더 권하지 않았다. 기사와 용병은 기묘한 교감 속에서 비니타를 구경했다.
“경……. 역시 마법사 한 명쯤은 데려오는 게 좋았다는 생각 안 듭니까? 시간이 아무리 촉박해도 한 명 정도는 걸러낼 수도 있었을 텐데요.”
“이제와 후회해 봤자 무슨 소용입니까, 시간을 돌릴 수도 없는데. 그때는 그게 최선이라고 여겼을 뿐입니다.”
라비린은 화술 교과서에 나올 법한 정석적인 대답을 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이 여자는 자신이 스트라스티를 꼬드기며 부디 평생에 걸쳐 후회할 일 없게 해달라 부탁하던 때에 자신의 뒤에 서 있었다는 걸. 불현듯 얼굴이 뜨거워졌다.
“……크흠. 덕분에 당신들 전부를 데려올 수 있지 않았습니까. 레펙치오의 수량이 좀 더 많았다면 모를까, 그런 것도 아닌데 첩자일 수도 있는 자를 일행에 끼우고 싶진 않았습니다. 용은 마법의 종족이라는데 인간 마법사가 과연 얼마나 역할을 할까 의심스럽기도 했고……. 어차피 셰비언이 있으니까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예.”
길어진 변명과 달리 짧기만 한 대답이 더욱 면구스럽다. 라비린은 도넛 모양 담배 연기가 그날의 기억을 죄다 날려주길 빌었다.
“그보다 비니타를 붙들어 매주어서 감사합니다. 당시의 판단을 후회하지는 않지만, 비니타마저 없었으면 정말 고생할 뻔했습니다.”
“멜브란트 마법계의 미래를 제 손으로 끊은 건지도 모르는데 감사 인사를 듣다니 황공합니다.”
그걸 다 듣고 있었냐. 나랍인 용병에게는 브란젤 사교계의 숙녀들처럼 뒷담화를 듣고도 모른 체 하는 예의는 없다는 걸 아는데도 어쩐지 억울해졌다. 뭐가 억울하냐면, 그때 자신이 혼잣말을 한 것도 아닌데 이 순간의 민망함은 혼자서 감당하고 있다는 게.
“비니타에겐 좋은 경험이 될 겁니다. 제가 생각이 짧아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좋은 경험이 되느냐 못 되느냐 하는 건 살아서 돌아간 다음에 따져 봐야 할 문제죠. 저야말로 그쪽으론 전혀 생각하지 않은 게 사실이라 경의 공치사는 듣기가 민망합니다.”
“…….”
“그런데 경, 저 알이 아까도 저랬던가요?”
라비린은 나랍인 용병이 가리킨 알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알이 뿜어내는 빛이 아까보다 확연히 약했다. 이상을 눈치챈 건 두 사람만이 아니었다. 비니타만 뺀 나머지 사람들 모두가 알을 주목하고 있었다.
알의 빛은 시시각각 약해졌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밝아졌다 어두워졌다를 반복하니, 그건 마치 심장박동을 눈으로 보고 있는 것 같았다. 한 번, 두 번, 세 번……. 필사적으로 깜빡거리던 알은 어느 순간부터 다시 빛나지 않았다. 돌처럼 보이는 다른 두 알과 마찬가지로 커다란 바위가 되었다.
“죽은 걸까요?”
“일단 보기에는 그래 보입니다. 갑자기 왜 저렇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내내 마법진만 보고 있던 비니타도 뒤늦게 알의 죽음을 확인하고 놀란 표정이 됐다. 그녀는 입술을 질겅질겅 씹으며 뭔가를 고민하더니, 돌연 마법진에 손을 얹고 마력을 불어넣었다. 마력을 마신 마법진이 금빛으로 황홀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물러나 계세요, 확인할 게 있어서 그러니까.”
비니타는 침착하게 마법진을 관찰했다. 거대한 마법진 안에 자리 잡은 다섯 개의 작은 마법진과 그들을 이어주는 보조 마법진들의 구조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자세한 원리는 몰라도 그것들이 서로 독립적이면서도 유기적인 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건 알 것 같았다.
기본적으로 알 하나에 마법진 하나였다. 빛을 품은 알은 제 짝인 마법진이 품은 마력을 빨아들여 한층 더 반짝반짝하게 빛났지만, 돌이 된 알과 짝을 이루는 마법진은 받아들인 마력을 어쩌지 못하고 계속 품고 있기만 했다.
“용의 마법진은 인간의 마법진과 많이 다르네요. 인간의 마법진은 기계의 대용에 가까운데, 용의 마법진은 마법을 원하는 형태로 가공해서 형상화한 것에 가까워요.”
비니타가 빛나는 마법진에 발을 디뎠다. 그녀는 빛이 꺼진 선을 밟지 않으려 주의하며 한 걸음씩 돌이 된 알로 다가갔다.
“정말 다행이죠……. 샤를레아가 인간의 마법진을 썼다면 전 전혀 못 알아봤을 거예요. 뭐, 인간의 마법진으로 이런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지만요.”
“무슨 마법진인지는 알아냈어요?”
“정확하게는 몰라요. 하지만 알에게 마력을 공급하는 마법진이라는 건 알겠어요. 그런데 이 마법진에는 마력을 모으는 기능이 없어요. 아마 다른 마법진으로 마력을 뽑아내고, 이건 그 마력을 쓰기만 하는 것 같은데……. 어디서 마력을 조달하는 걸까요?”
사람들은 섬 전체에 그려져 있다는 샤를레아의 마법진을 떠올렸다. 분화구에 들어오기 전에 열심히 부수고 다녔고 지금은 산트렘의 기사들에게 맡긴 마법진 말이다. 자세한 내용을 들은 적 없는 비니타는 짐작도 못하고 있었지만.
“그건 아마…….”
“아무래도 마력을 모아서 이 알들에게 보내주던 마법진이 망가진 모양이에요. 빛이 꺼진 알은 마력을 공급받지 못해서 죽은 거고요.”
비니타가 빛이 꺼진 알 앞에 섰다. 그녀는 마치 시장에서 잘 익은 과일을 고르는 듯 가벼운 손짓으로 알을 두들겼다. 퉁, 퉁, 퉁. 묵직한 소리가 울렸다.
“생긴 건 이래도 알이니까 당연하겠지만……. 뭔가 꽉 찬 느낌이에요. 고체는 아니고……. 그렇지만 액체라기엔 좀 무거운 느낌이 있고.”
“어쨌거나 죽은 알이다 이거지.”
피올이 휙 뛰어들었다. 어찌나 몸놀림이 가벼운지 마법진을 거의 밟지도 않았다. 알의 표면을 슬슬 어루만지던 그가 불쑥 검을 뽑아들었다.
“어차피 죽은 거, 뭐가 들었는지는 깨서 확인해 보면 되지.”
“보티안 씨, 안 돼요!”
비니타의 비명은 지나치게 늦은 감이 있었다. 검자루 끝에 찍힌 지점에서부터 퍼져 나간 균열이 알을 가득 덮고 퍼져나갔다.
* * *
산트렘의 기사들은 지친다는 게 뭔지 모르는 사람들 같았다. 그들은 숲을 가로지르고 늪을 건너, 더불어 심심찮게 덤벼드는 짐승까지 상대해 가며 아이샤를 마법진 해체 포인트로 업어 날랐다.
처음에는 멀미에 시달리면서도 정신이 맑았던 아이샤지만, 업힌 등이 몇 번 더 바뀌고 나자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누군지 모를 기사의 목에 팔을 감고 업혀서 정신없이 흔들리다가, 내리라면 내려서 파괴마법을 쓰고 또 업히기를 반복했다.
“우욱…….”
아이샤는 이름 모를 나무둥치를 붙들고 속을 게워냈다. 위를 후벼 파는 통증과 함께 신 위액이 후드득 떨어졌다. 그녀는 머리가 핑핑 돌도록 위액을 토해내고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다리가 후들거려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씨? 아이샤 씨!”
뜨거운 손이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아이샤는 흔드는 대로 흔들리다 말하는 것도 귀찮아 그냥 팔을 내밀었다. 알아서 업고 가란 뜻이었다. 곧 몸이 붕 떠올랐다. 지긋지긋한 흔들림이 다시 찾아왔다. 다만 이번에는 그 시간이 지극히 짧았다.
‘벌써 도착했나?’
아이샤는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올렸다. 가느다란 틈을 통해 폭력적인 햇살이 스며들어 눈이 부셨다. 너무 눈이 부신 나머지 헛것이 보였다. 눈을 벅벅 비비고 다시 보는 걸로는 해결이 안 되어 눈꺼풀을 손으로 잡아 벌리기까지 했지만, 헛것은 사라지지 않고 더욱 또렷해졌다.
“……강철새?”
그리 넓지 않은 공터였다. 대형 강철새가 내려앉기엔 지나치게 좁은 곳인데, 강철새는 나무 몇 그루를 몸뚱이로 깔아뭉개기까지 하며 억지로 착륙한 상태였다. 조종석의 문은 열려 있었다.
아까 분명 돌아가는 걸 봤는데? 하지만 우글우글한 기사들 사이에서 마법사 로브는 지나치게 눈에 띄었다. 워커는 스트라스티와 한창 대화중이었다.
‘저 인간이 여긴 왜 왔어? 그것도 강철새까지 끌고!’
워커의 얼굴을 본 순간, 어딘지 멍하던 머리에 피가 몰리고 기력 없이 늘어져 있던 팔다리에도 불끈 힘이 들어갔다. 아이샤는 만류하는 기사를 뿌리치고 제 발로 섰다. 기분만으로는 워커의 멱살을 잡아 내동댕이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멀미로 다 죽어간다더니, 카론 경이 허풍을 떨었나 보네요. 멀쩡하네.”
“아이샤 씨! 마침 잘 왔습니다. 이것 좀 보겠어요?”
워커는 냉담한 반응이었지만 스트라스티는 아이샤를 매우 환영했다. 아이샤가 미처 입을 떼기도 전에 발톱섬 지도부터 펼쳐 들이민다.
그 지도는 마법사 협회에서 분석한 마법진이 겹쳐 그려진 지도로, 반드시 파괴해야 할 포인트가 표시되어 있는 물건이었다. 포인트 대부분에 ‘X’ 표시가 되어 있었고, 남은 것은 고작 세 개에 불과했다.
“워커 씨가 우릴 강철새에 태워서 포인트로 이동시켜 주겠다는데, 아이샤 씨는 어떻게 생각해요? 강철새에 탄 채로도 정확하게 파괴마법을 쓸 수 있겠어요?”
아이샤는 반짝반짝 빛나는 스트라스티의 간절한 눈을 한번 보고, 강철새를 한번 보고, 얼굴을 굳히고 있는 워커를 한번 보고, 마지막으로 지도에 눈을 떨어뜨렸다. 독도법을 따로 배우지는 않았지만, 남은 포인트끼리의 거리가 상당하고 그 사이의 지형도 험하다는 건 알아볼 수 있었다. 지도에 그려진 기호가 아주 빽빽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멀미가 난다. 시큼한 위액 냄새가 코 안쪽을 적시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물어보시는 걸 보니 카론 경은 타고 싶으신 모양이죠?”
“체력을 크게 아낄 수 있는데 사양할 이유가 없긴 하죠. 아이샤 씨만 가능하다고 하면 바로 강철새를 탈까 합니다.”
스트라스티가 공을 아이샤에게 넘겼다. 아이샤는 신맛 나는 입술을 핥으며 생각에 잠겼다. 솔직히 말해 멀미로 제정신이 아닐 때도 잘만 쓴 파괴마법인데, 강철새에 탔다고 해서 못 쓸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워커를 이 난리통에 끌어들여도 괜찮을지에 대해서는 영 확신이 안 섰다.
‘레이디 오드리를 못 구하면 셰비언 님이 몸소 마법망을 때려 부술 거야. 마법이 사라진 시대를 대비하려면 워커가 있어야 돼.’
아이샤는 워커와 대화를 해 봐야겠다는 핑계를 대고 그와 함께 강철새 조종실로 들어갔다. 긍정적인 대답을 바라는 시선들에서 벗어나고 나니 숨이 좀 트였다.
“워커 씨가 여기에 올 줄은 몰랐어요. 내 고집에 휘말려 그 고생을 했으니 곧장 메리디에스 기지로 가서 한숨 푹 잘 줄 알았는데요.”
“안 그래도 푹신한 침대에서 푹 자는 걸로 눈뜨고 사기당한 더러운 기분을 어떻게든 풀어보려고 했는데, 안 되더라고요. 나도 끼어야겠어요.”
아이샤가 순순히 납득하기엔 생략된 것이 너무 많은 설명이었다. 워커가 침이라도 뱉고 싶다는 표정으로 덧붙였다.
“임무 완료 보고도 하고 왔고, 강철새 관련 자료 보관해 둔 장소도 믿을 만한 사람에게 알려주고 왔으니까, 강철새가 천재의 실수 따위로 남을 걱정은 안 해도 됩니다. 난 바일런 섀덤 같은 바보짓은 안 해요.”
“여전히 이해가 안 가는데요.”
“나는 당신 같은 자살 희망자가 아니고, 명성이라면 강철새만으로도 이미 충분하지만, 용 두 마리가 맞붙어 싸우는 현장에 마법사 아이샤의 이름만 남겼다간 자다가도 일어나서 이를 득득 갈 것 같아서 온 거예요.”
“…….”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단순하게 사실만 말해봐요. 멀미 심하게 하던데 강철새가 떠 있는 상태에서 파괴마법 쓸 수 있겠어요?”
“그건…….”
“못 쓴다고 해도 물러날 생각 없으니까 잘 생각해서 말해요. 강철새가 할 수 있는 일은 당신이 상상하는 이상으로 많으니까.”
워커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일에 끼어들 작정이었다. 입술을 질겅대는 아이샤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그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아이샤 씨……. 못 해요? 정말로?”
다른 사람도 아니고 셰비언에게서 직접 마법을 배워놓고? 워커가 생략한 말이 아이샤의 귓가에 메아리쳐 울렸다. 오기와 신경질이 북받쳐 올라왔다.
“누가 못 한대요? 당연히 할 수 있어요!”
“카론 경, 들으셨죠? 바로 출발할 거니까 저기 앉으세요.”
깜짝 놀라 돌아선 아이샤는 소리도 기척도 없이 조종실에 들어와 있는 스트라스티를 발견했다. 그녀의 짓궂은 미소를 보는 순간 기가 막힌 가정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서, 설마 처음부터 둘이 짜고…….”
“왜요, 속아보니까 억울해요? 알았으면 귀중한 교훈으로 삼고 앞으론 정직하게 살아요.”
아이샤는 난데없이 사기꾼 취급을 당한 것에 몹시 분개했지만, 강철새가 곧장 떠오른 탓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조종실 구석의 간이침대에 처박혀 다시 치밀어 오른 멀미 기운을 가라앉히는 데에 힘썼다.
한편, 스트라스티는 뛰어가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빠르게 이동하는 강철새의 속도에 만족하고 있었다. 지형에 구애받지 않고 최단거리로 이동한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이거 그 사자 새끼가 의뢰하고 투자한 거라고 했지? 하여간 보는 눈은 징그러울 정도로 확실한 놈이라니까.’
그녀는 돌아가자마자 클로드에게서 대형 강철새 한 대를 뜯어낼 결심을 했다. 물론 공짜로. 사돈이라고 있는 게 매번 골칫덩이만 안겨줬으니, 한 번쯤은 좋은 것을 받을 때도 됐다.
첫 번째 포인트로 이동하는 동안 워커가 무척 안정적으로 강철새를 운전했음에도 아이샤는 좀처럼 멀미 기운을 다스리지 못하고 허우적대서 스트라스티의 걱정을 샀다. 하나 막상 나서야 할 순간이 오자 아이샤는 스스로 용의 제자를 자처했던 만큼 훌륭한 파괴마법을 선보였다.
까마득한 아래쪽에 정확하게 마법을 꽂아 넣은 솜씨에 워커가 휘파람을 불며 감탄했다.
“대단하네요. 여기서 그게 보여요?”
“목표물을 정확하게 잡을 필요가 없다는 걸 새삼 깨달았을 뿐이에요. 사람이 사는 것도 아니고 재산을 물어줄 필요도 없는데 대충 다 태워 버려도 상관없잖아요.”
“그러다 샤를레아에게 들키면…….”
“셰비언 님이 때려 박은 마법도 엄청나게 많거든요? 바다에 물 한 컵 붓는다고 티 안 나요.”
어휴, 속 시원해라. 그렇게 중얼거리는 아이샤의 눈이 무서울 정도로 번들거렸다. 멀미에 시달리는 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파괴마법을 쓰는 걸로 풀고 있는 것이다.
“워커 씨야말로 지도 똑바로 보고 운전 잘해요. 하늘에 길이 있는 것도 아닌데 하나는 용케 찾았다지만 남은 두 곳도 제대로 찾아갈 수 있을지 몹시 걱정되니까.”
“난 아이샤 씨와 달리 연습비행시간이 엄청나게 길거든요? 괜한 걱정 사서 하지 말고 컨디션 관리나 잘…….”
태평하게 아이샤를 공격하던 워커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마법사 로브를 걸친 등이 빳빳하게 굳고 조종간을 잡은 어깨가 경직됐다. 마법을 쓰자마자 간이침대에 풀썩 드러누웠던 아이샤도 상체를 벌떡 일으키고 입을 벙긋댔다.
“방금……. 뭔가…….”
“드, 들킨…… 들킨 것 같은데?”
당황한 나머지 워커의 말이 짧아졌다. 하나 아이샤는 그런 워커를 나무랄 정신이 없었다. 온몸의 마력이 죄다 끓어오르며 심장을 향해 달려가는 감각이 생경했다.
“왜, 왜 들켰지?”
“빌어먹을! 뻔하잖아! 다 깨부수고 달랑 두 개 남았는데 계속 모르기를 바라?”
“마법진 다 깰 때까지는 셰비언님이 감춰주겠다고 했단 말이야!”
“이젠 셰비언도 벅찬가 보지!”
워커가 그리 소리를 지르며 속도를 올리려는 순간, 하늘과 바다와 숲으로 채워져 있던 전면창이 불쑥 나타난 샤를레아의 머리로 가득 찼다. 길쭉한 백색 동공이 거울처럼 조종실의 풍경을 비추는 동안, 용의 마력에 익숙한 워커와 아이샤 둘 모두 고양이 앞의 쥐처럼 얼어붙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샤를레아가 입을 쩍 벌렸다. 시커먼 목구멍은 동굴처럼 커다랗고 셰비언의 피가 묻어 얼룩덜룩한 이빨은 끔찍하게 빼곡했다. 마법사들이 억눌린 비명을 질렀다.
천만다행으로, 셰비언이 아까 강철새에 걸어준 보호마법은 아직도 작동하고 있는 중이었다. 샤를레아의 이빨은 방어막에 막혀서 주르르 미끄러졌다. 끼이이이- 신경을 박박 긁어대는 섬뜩한 소리가 등골을 후벼 팠다.
샤를레아는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씹어보겠다는 듯 다시 입을 벌렸지만, 셰비언이 샤를레아에게 몸통박치기를 하는 바람에 시도는 무위로 돌아갔다. 셰비언은 거리를 확보하고 마법으로 타격하던 걸 그만두고 몸으로 덤벼들었고, 두 용은 다시 뒤엉켜 싸우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육탄전이 재개되면서 셰비언과 아이샤가 함께 싸워 기껏 확보했던 우위는 순식간에 허물어지고 말았다.
“계속 그러고 있을 겁니까!”
두 마법사에 비해 상대적으로 영향을 덜 받았던 스트라스티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워커는 화들짝 놀라 조종간을 다시 잡았다. 셰비언이 샤를레아를 죽기 살기로 끌어낸 덕분에 강철새의 전면이 텅 비어 있었다.
“꽉 잡아요!”
강철새의 속도가 확 뛰어올랐다. 동시에 방향까지 홱 꺾어버리니, 급격히 무거워진 중력이 강철새 승객들의 몸뚱이를 짓눌렀다.
스트라스티는 우당탕 소리를 내며 제 앞까지 굴러온 아이샤를 붙들어 품에 안았다. 멀미에 한참 시달린 데다 한바탕 구르기까지 한 가엾은 마법사의 안색은 백지보다 창백했다. 놀라서 깔딱깔딱 숨이 넘어가는 것을, 가슴을 후려치자 겨우 숨을 뱉는다.
“워커 씨! 아이샤 씨가……!”
“죽었어요?”
“그건 아니지만! 조만간 죽게 생겼습니다! 좀, 살살……! 윽!”
그 순간, 길고 굵은 꼬리가 힘 있게 허공을 갈랐다. 공기 갈라지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려 퍼졌다. 강철새의 조종석 전면 창 가득히 붉은 비늘이 닥쳐 왔다.
워커는 거의 본능적으로 조종간을 꺾었다. 강철새가 날렵하게 몸체를 뒤틀었고, 꼬리는 아슬아슬하게 강철새 옆을 스쳐 지나갔다. 직격은 피했지만 강렬한 여파가 강철새를 뒤흔들었다. 스트라스티마저 이마에 땀이 맺혔다.
“안 죽었으면 됐죠!”
대담한 곡예운전을 성공시킨 워커는 어딘지 들뜬 기색이었다. 조금 전 샤를레아에게 눌려서 꼼짝도 하지 못했던 게 거짓말 같았다. 그가 마법사의 로브를 훌렁 벗어던졌다.
“경, 로브 옷자락 안에 멀미약 있습니다! 찾아서 먹여요!”
“아니, 그걸 왜 이제 줍니까?”
“흥, 들키지만 않았으면 돌아갈 때 줬을 겁니다. 아니면 땅에 내리고서 줬거나.”
죽은 듯이 눈을 감고 있던 아이샤가 으득 이를 갈았다. 열심히 로브를 뒤지던 스트라스티는 그 작은 소리를 들었지만, 모른 체했다. 그녀는 끼어들지 않아야 할 때를 똑똑히 구분할 연륜이 있는 사람이었다.
“멀미약 효과가 아주 좋네요.”
제아무리 즉효성 약이라도 섭취 후 약효가 퍼지려면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아이샤는 약을 삼키자마자 죽을힘을 다해 일어나 워커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워커는 그녀의 인사에 급격한 방향 전환으로 대답했다. 간신히 일어나 앉았던 아이샤는 맥없이 나동그라졌다.
“젠장! 좀 제대로 조종할 수 없어?”
“내 강철새 조종 실력은 멜브란트에서 한 손에 꼽히거든!”
“당연히 그렇겠지! 강철새를 조종할 수 있는 사람 자체가 한 손에 꼽힐 테니까!”
워커는 아이샤의 도발을 코웃음으로 넘겼다. 그는 자신의 조종 실력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고, 거기에 기계를 무시하는 마법사의 인정 따위는 필요 없었다.
“됐고, 그렇게 떠들어댈 기력이 있거든 이리 와서 조작이나 도와줘요. 뒤쪽의 상황을 좀 봐야겠으니까.”
비록 워커의 공간에 신세지어 급하게 배운 거긴 해도, 아이샤는 엄연한 부조종사였다. 그녀는 능숙하게 버튼을 조작해서 전면 창 구석에 새로운 화면을 띄웠다. 강철새 양옆과 뒤쪽의 풍경이 동시에 떠올랐다. 뒤에서 구경하던 스트라스티가 놀라 참견했다.
“이거 참 유용하군요. 이런 상황이 올 줄 알고 만들어둔 겁니까?”
“내가 예언가도 아니고, 그럴 리가 있나요. 타우레드 후작이 하도 닦달을 해서 달아놓은 겁니다. 만드느라 개고생을 했는데 써먹을 일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영 모르겠네요.”
셰비언과 샤를레아는 그들의 근처에서 격렬하게 싸우고 있었다. 마법의 종족이라는 자부심은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순전히 물리적인 힘만을 이용해 원시적으로 뒤엉켰다. 비늘과 발톱이 부딪칠 때마다 고막을 긁는 소리가 울리고 피가 튀었다.
셰비언은 어떻게든 샤를레아를 강철새 반대편으로 끌고 가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샤를레아는 좀처럼 그의 의도에 넘어가지 않았다. 오히려 강철새에 지속적으로 공격 의사를 보이는 것으로 셰비언을 제 옆에 붙들어 맸다. 두 용과 강철새 간의 거리는 점차 좁혀지고 있었다.
그들이 일으키는 바람과 진동을 이기지 못한 강철새가 휘청거렸다. 아이샤의 낯이 딱딱하게 굳었다. 멀미약 때문인지 긴장 때문인지 그녀의 입술이 핏기 없이 허옜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셰비언에게 우리는 짐이야.”
“나도 알아. 빨리 이 자리에서 피해주는 게 도와주는 거겠어.”
워커가 속도를 올렸다. 심상치 않은 속도에 놀란 샤를레아가 강철새를 향해 휙 고개를 돌렸다가 셰비언에게 목을 물리고 비명을 질렀다. 붉은 비늘 몇 개가 송두리째 떨어져 나가고 흰 비늘에 피가 튀었다. 샤를레아가 꼬리로 셰비언의 배를 후려쳤다. 셰비언의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샤를레아는 셰비언에게서 놓여나자마자 곧장 강철새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허공에서 나타난 금빛 창 두 자루가 교차하며 그녀의 앞길을 막았다. 미처 멈추지 못하고 창에 들이박은 샤를레아의 정수리가 쭉 찢어졌다.
목적을 이룬 금빛 창은 곧장 십여 갈래로 갈라져 그물처럼 샤를레아를 감싸려고 시도했다. 비록 샤를레아의 발길질에 간단히 끊어지고 말았지만. 그래도 아주 허사는 아니었다. 그 틈에 다가온 셰비언이 그녀의 꼬리를 물고 제 뒤로 던져 버린 것이다.
강철새와 거리가 확 벌어진 샤를레아가 분에 겨워 날뛰며 셰비언에게 덤벼들었다. 셰비언은 샤를레아를 정면으로 상대해 주는 것으로 강철새를 지켰다. 아까 샤를레아의 이빨에 꿰뚫렸던 보호마법 대신 새로운 마법으로 한층 더 견고하게 강철새를 감싸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 난리가 벌어지는 동안 강철새는 폭풍에 휩쓸린 낙엽처럼 흔들렸다. 그런데도 뒤집히지도, 속도를 잃지도 않고 나는 게 대단할 정도였다. 비록 방향을 좀 잃는 바람에 엉뚱한 하늘에서 몇 바퀴를 돌았지만, 그건 워커만 아는 비밀이었다.
그래도 천만다행인 것이, 두 번째 포인트 부근에 이르자 싸움의 영향이 확연히 줄어들었다. 강철새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워커는 겨우 만난 여유를 틈타 목을 축였다. 스릴 넘치는 조종 끝에 마시는 물이 꿀처럼 달았다. 물 몇 모금을 마신 것만으로도 생존본능으로 꽉 차 있던 머리가 삐걱대며 돌아간다.
“넌 이제 쉬어. 포인트에 도착하면 부를 테니까.”
“안 그래도 쉴 거야.”
아이샤가 그의 손에서 물통을 낚아채 제 입에 들이부었다. 어지간히 갈증이 심한 모양인지, 물의 절반이 흘러내려 앞섶이 축축하게 젖는데도 상관하지 않았다. 그녀는 금세 물통을 비우고 그 자리에 사지를 쭉 뻗고 드러누웠다.
스트라스티도 상당히 지친 상태였지만 승객석의 부하들을 챙기지 않을 수 없었다. 강철새가 흔들리는 동안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비명이 상당했다. 승객석엔 창도 없으니, 무슨 상황인지도 모르고 날벼락을 맞았으리라.
과연 예상대로였다. 스트라스티는 잠깐 사이 눈 아래가 쑥 들어간 부하들을 다독이고 간단히 상황 설명을 하는 데에 휴식시간을 다 썼다. 토한 사람이 없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너희 중 하나는 조종실에 데려다놓을 걸 그랬다.”
“왜요? 기사 주제에 마법사와 비슷하게 멀미한다고 놀리시려고 그럽니까?”
스트라스티가 낄낄 웃으며 반항적인 기사의 이마에 손가락을 튕겼다. 딱! 그을린 이마에 붉은 자국이 생겼다.
“멀쩡한 기사를 꼬챙이 같은 마법사와 비교하면 쓰나. 용의 목구멍은 어떻게 생겼는지 볼 수 있는 기회를 날렸구나 생각하니 아쉬워서 그러지. 혹시 알아? 무려 산트렘의 기사가 애처럼 바지를 적시는 광경을 구경할 수 있었을지.”
“안 봐도 됩니다, 그런 거. ……내릴 수 있으면 지금이라도 내리고 싶습니다.”
기사가 되어서 약한 말을 한다고 타박할 수도 있었지만, 스트라스티는 다 이해한다는 듯 기사의 어깨를 두드렸다. 모르는 사이 목숨이 간당간당했으니 무력감과 거부감을 느끼는 것도 당연했다.
“땅에 있었으면 우린 벌써 다 죽었어. 그나마 강철새를 타고 있어서 피할 여지라도 있었던 거다. 나중에 워커 씨에게 고맙다고 인사나 해. 여기 오지 않아도 괜찮았을 사람이, 오로지 우리 돕겠다고 와서 고생 중이니까.”
수면 아래에서 뭉근하게 끓어오르던 불만이 조용히 가라앉았다.
그러나 만약 스트라스티가 진실을 알았더라면, 그녀는 워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라는 당부 뒤에 피올을 만나거들랑 다리를 부러뜨려 놓으라는 말을 꼭 보탰을 것이다.
셰비언의 위장마법이 깨진 건 순전히 피올 탓이었다. 그가 알을 깨뜨렸기 때문에.
* * *
바위처럼 굳건한 겉모습은 그저 위장이었던 듯, 알은 허무하리만치 간단하게 깨져 버렸다. 산산조각 난 알껍데기와 내용물이 마법진 위로 질펀하게 쏟아졌다. 안 그래도 고약한 유황 냄새로 가득 차 있던 공동에 고기 썩은 내와 싱싱한 비린내가 퍼졌다.
고기 썩은 냄새는 알껍데기 무더기 아래쪽에서 났다. 아쉽게도 쌓인 껍데기가 많아 그것의 형체를 알아볼 수는 없었다. 게다가 껍데기에 눌려 짓뭉개지기라도 했는지 시커먼 죽은피가 껍데기 아래에 고이고 있었다.
어쨌건 정체가 뭐였든 알에서 자라던 것은 썩은 고기가 되었는데, 투명하고 점도 높은 난백(卵白)에선 싱싱한 비린내가 났다. 닭이 금방 낳은 알을 깨뜨렸을 때에나 맡을 수 있는 냄새였다.
“우욱…….”
상반된 냄새에 속이 뒤집힌 비니타가 뒤돌아서서 구역질을 했다. 하마터면 알의 내용물을 고스란히 뒤집어쓸 뻔했던 것을, 몸이 날랜 피올이 데리고 나온 덕에 한 방울도 묻지 않았다.
한편 피와 시체에 익숙한 다른 사람들은 지독한 냄새에 코를 틀어막고도 깨진 알 관찰에 열을 올렸다. 가축을 기르는 데 익숙한 나랍인 용병들의 눈이 특히 예리했다. 그들은 빠르게 이상한 점을 알아냈다.
“난백의 양은 충분한데……. 난황이 안 보입니다. 껍데기 부피를 고려해서 새끼의 크기가 얼추 이 정도라고 치면, 알의 크기를 봐선 적어도 난황의 크기가 이 정도는 되어야 하는데요.”
나랍인 용병이 손짓발짓하며 설명했지만 라비린과 피올은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당연했다, 그들은 암탉이 계란을 낳는다는 것만 알아도 용한 신분으로 태어나 생계 걱정은 하지 않고 자랐다. 계란 먹을 줄은 알아도 닭이 며칠이나 알을 품어야 병아리가 태어나는지, 그동안 알 속에선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는 모르는 것이다.
나랍인 용병이 한숨 끝에 간단히 요약했다.
“노른자가 없습니다.”
“저기 새끼가 깔려 있을 텐데 노른자는 없는 게 당연한 거 아닙니까?”
별 생각 없이 반문했던 라비린은 세상에서 제일 한심한 놈을 보는 듯한 시선을 받고 말았다. 그는 어릴 적부터 자신의 빼어남을 의심하지 않고 살았으나, 이 순간 처음으로 자신의 지적 수준을 의심했다. 설마 내가 공부에 관심을 두지 않은 기간 동안 상식적인 지식의 내용과 범위가 바뀌었나?
“노른자를 난황이라고 부르는데, 난황이 자라서 새끼가 되는 게 아닙니다. 그건 그냥 새끼의 밥주머니라, 새끼가 커지면 줄어듭니다. 한데 알의 크기를 생각해 볼 때 새끼는 저리 작은데 난황이 안 보이니 이상한 겁니다. 어떤 새의 알이든 난황과 난백의 비율은 엇비슷하거든요.”
“아…….”
“벨키스 경도 삶은 계란의 단면 정도는 아실 거 아닙니까. 상상을 해 보세요.”
“아마 마법진으로 공급하는 마력이 노른자 역할을 했을 거예요.”
간신히 비위를 진정시킨 비니타가 끼어들어 답을 내놓았다. 얼굴엔 여전히 혈색이 없었다.
“‘마력은 생명력이며, 마법은 종족의 번영을 위한 것이다.’ 예전에 셰비언님이 지나가듯 해주셨던 말이에요. 그땐 그냥 그렇구나, 하고 흘려들었는데 이렇게 눈으로 보니까 그게 무슨 뜻이었는지 바로 알겠어요. 용은 마법과 마력이 있어야 태어나는 생물이에요. 과연 마법의 종족답네요.”
알 하나에 마법진 하나. 깨진 알에 마력을 공급하던 마법진은 부서진 알껍데기와 투명한 난백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법진 테두리에 보이지 않는 벽이라도 있는 듯, 쓰레기가 된 부산물은 마법진 밖으로 조금도 흘러 나가지 않았다.
“왜 용이 자신의 집을 두고 둥지라고 부르는지 이제 알겠어요……. 저건 용의 알이에요. 분명 샤를레아의 알일 거예요.”
모두들 짐작하면서도 입 밖으로 꺼내기 싫어하던 말이 기어이 나왔다. 피올에게 원망의 눈길이 쏟아졌다. 피올이 뻔뻔하게 턱을 긁적거렸다.
“다들 왜 그렇게 긴장합니까? 샤를레아는 셰비언이 잘 붙들고 있습니다. 셰비언은 예전에 샤를레아의 심장 반쪽을 뜯어낸 전적도 있습니다. 그리고 샤를레아는 마법도 제대로 못 쓰는 반푼이 용이라는데, 셰비언의 방해를 뚫고 알이 깨진 걸 알 정도는 아닐 겁니다.”
“……샤를레아는 알이 깨진 걸 알았을 거예요.”
자신도 모르게 피올의 말에 넘어가려던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 비니타를 바라보았다. 비니타가 제 양손을 가슴 앞에 모아 손가락끼리 겹쳐 산 모양을 만들었다.
“알이 저 가운데에 모여 있잖아요. 당연히 마법진도 일부가 겹쳐져 있어요. 아직 살아 있는 알의 마법진에 난백이 쏟아진 셈이라고요. 셰비언님이 아무리 방해를 했더라도 알이 깨진 충격은 느꼈을 거예요.”
피올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다고 저 알을 그냥 둘 순 없잖아요, 꼬마 마법사님? 저 알 근처에서 레이디 오드리의 마력이 느껴진다면서요. 비록 내 재주가 좀 대단하긴 해도 날개를 달고 태어나진 못 했어요. 저 매끈매끈한 알을 타고 넘어가서 사람을 업고 나오는 건 무리예요.”
만약 샤를레아에게 쫓기느라 정신없이 흔들리는 강철새에서 멀미에 시달리고 있는 아이샤가 이 말을 들었다면, 이성을 잃고 피올의 정수리에 파괴마법을 꽂아버렸을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재수 없는 태도였다.
한데 비니타는 나무라는 대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씀이에요. 이미 저질러 버린 거, 어쩔 수 없죠. 다 깨버려요.”
그녀는 사람들의 깜짝 놀란 눈빛을 정면으로 보면서 분명하게 말했다.
“알이 깨져서 생긴 틈으로 레이디 오드리의 마력이 줄줄 새어나와요. 집중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분명해요.”
망설이던 사람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이미 젖은 옷이고 더럽힌 신발인데 물에 들어가는 걸 새삼 겁낼 필요가 뭐가 있을까. 비니타가 다급히 첨언했다.
“아, 빛이 꺼진 마법진은 밟지 마세요. 아직 살아 있는 알도 건드리지 마시고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잖아요.”
“꼬마 마법사님께서는 걱정 마시지요, 남은 것들도 곧 죽을 테니.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제일 먼저 마법진 안으로 뛰어든 피올이 유쾌하게 웃으며 검을 뽑았다.
“산트렘의 기사는 임무에 실패하는 일이 없거든요.”
* * *
땅 깊은 곳에 뭐든 먹어치우는 입이 생긴 것만 같았다. 지면에 있는 바위, 흙, 나무 등 가리는 것 없이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는 입. 끝이 보이지 않는 구멍 속으로 모든 게 빨려들어 갔다.
보는 사람의 등골이 다 오싹해지는 그 풍경을 보는 사람들의 감상은 각기 달랐다. 스트라스티는 역시 공격마법사는 없는 게 낫다고 생각했고, 아이샤는 포인트를 망가뜨리는 데에는 번개를 쓰는 것보다 땅을 건드리는 쪽이 훨씬 효율적이라고 느꼈고, 워커는 아이샤의 건강을 걱정했다.
“이런 짓을 하고도 멀쩡하다니, 이게 말이 돼? 너 당장 드러눕지 않아도 돼? 진짜?”
비록 그 걱정이 고운 말로 나오지는 않았지만 그럴 만도 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아이샤는 워커와는 비교하기도 민망한 마법사였다. 한순간에 따라잡힌 기분은 과히 좋지 않았다.
“젠장, 셰비언 자식, 인간에게 파괴마법은 위험하니까 적당히 가르쳐 줄 거라더니……. 순 거짓말이었잖아? 이런 건 언제 가르쳐 준 거야?”
“배운 게 아니라 그냥 할 수 있게 된 거야.”
“그게 말이 돼?”
“말이 안 될 건 또 뭔데. 본래 기본을 잘 배우고 나면 응용도 할 수 있게 되는 법이지. 난 셰비언님에게 파괴마법을 제대로 배웠다고. 아무래도 용 둘이 근거리에서 부딪치는 것에 영향을 받은 것 같아……. 마력의 수발이 점점 자유로워져. 넌 어때?”
“음……. 그런 거라면 말이 되긴 하는데…….”
워커는 미간을 찌푸리며 손을 털었다. 대형 강철새는 짧은 개발 기간을 극복하기 위해 그가 신념을 꺾고 마법을 듬뿍 넣어 만들어낸 물건이었다. 곳곳에 새겨 넣은 마법들이 조종간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졌다. 팔다리가 여러 개 생겨나고 뒤통수에도 눈이 달린 것만 같은 기묘한 감각이었다. 날개를 떠받치는 바람의 기척까지도 생생하게 느껴졌다.
“강철새가 내 수족 같을 정도로 일체감이 느껴져. 만약 이 감각이 계속 유지된다면, 돌아가서 대형 강철새에 부여한 마법들을 상당히 수정할 수 있겠어. 수식을 어떻게 고쳐야 할지 훤히 알겠어.”
“과연 문명세계의 마법사다운 발전이야. 근데 난 그런 건 눈곱만큼도 생각 안 나. 죄다 때려 부수고 싶은걸.”
아이샤는 셰비언이 왜 그리 끔찍한 선생이었는지 이제 알 것 같았다. 물고기에게 수영하는 법을 배우려고 했으니 말이 안 통할 밖에. 이해가 가지 않아도 억지로 밀어 넣었던 것들이 비로소 소화되는 기분이 났다.
쿵, 육중한 소리와 함께 강철새가 거세게 흔들렸다. 어느새 근처에 다가온 샤를레아가 강철새를 아예 머리로 들이받았기 때문이었다. 그 한 방에 셰비언이 걸어주었던 보호마법이 단숨에 절반은 날아가 버렸다. 그 다음 공격은 셰비언이 직접 막아주었지만, 위험한 순간이었다.
“제기랄, 언제 여기까지 온 거야?”
워커가 급격히 속도를 올리며 그 자리에서 내뺐다. 부서진 마법조각이 긴 꼬리가 되어 강철새의 궤적을 따라 늘어졌다.
샤를레아의 집요한 방해만큼이나 강철새의 흔들림도 심해졌다. 멀미약은 다행히 제 역할을 하고 있었지만, 아이샤는 제 힘으로 버티기보다 스트라스티의 품에 얌전히 안겨 있는 쪽을 택했다. 비록 중년의 나이라도 기사의 육체는 마법사와는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튼튼했다.
“경, 마법진을 다 깨고 나면 진짜 둥지로 들어갈 건가요?”
“당연하죠. 지금은 무사히 내릴 수 있을지부터 걱정해야겠지만 말이에요.”
스트라스티의 걱정은 애매한 형태로 맞아들었다. 기껏 샤를레아를 뿌리치고 도착한 마지막 포인트에서는 먼저 도착한 두 용이 맞붙어 싸우고 있었다. 워커가 크게 탄식했다.
“어쩐지, 금방 떨어져 나간다 했다. 하긴 어디로 갈지 뻔한데 쫓아가느니 먼저 가서 기다리는 게 맞지. 맞는데, 아, 성질나네.”
워커는 신들린 솜씨로 두 용 사이를 파고들었다. 어떻게든 포인트 근처에 접근하려는 시도였고 실제로 성공하기도 했지만, 문제는 아이샤였다. 그녀는 뒤집혀 회전 중인 강철새에선 죽어도 마법을 쓸 수가 없었다.
“멀미는 많이 가라앉았다면서!”
“내가 포인트가 아니라 셰비언님 등짝에 마법 꽂아도 되면 시켜보든가!”
조금 전 오싹한 마법을 본 워커는 아이샤의 대꾸를 무시하지 못했다. 설마 셰비언이 인간 마법사 따위에게 당하겠나 싶지만, 아이샤의 마법은 셰비언이 직접 가르친 것이었다.
결국 워커는 마지막 포인트를 눈앞에 두고 빠져나왔다. 근처를 빙빙 돌며 기회를 노렸지만 아이샤가 마법을 쓸 수 있을 만한 환경 조성은 여전히 불가능했다.
상황은 점점 더 안 좋아졌다. 샤를레아가 어찌나 굳건히 포인트를 지키는지, 셰비언조차 포인트를 망가뜨리지 못하고 있었다. 셰비언의 마법이 약해진 건지 아니면 샤를레아의 방어력이 어마어마한 건지, 몇몇 마법은 샤를레아가 직접 몸으로 막아 때우기까지 했다.
“안 되겠다. 카론 경, 분화구로 먼저 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이대로면 마법진은 깨지도 못하고 기사님들의 체력만 소모됩니다.”
“좋습니다, 뭐가 됐든 여기서 힘 빼고 있는 것보단 낫겠죠!”
용 두 마리가 포인트 위에서 엉켜 싸우는 상황에서 산트렘의 기사들이 마법진을 깨뜨릴 방도는 없는 거나 다름없었다. 스트라스티는 워커의 제안에 시원하게 동의했고 아이샤도 그에 반대하지 않았건만, 변수는 다른 곳에 있었다. 샤를레아는 강철새가 싸움터에서 이탈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샤를레아는 제 비늘과 피로 포인트를 덮어 보호하며 셰비언을 상대했고, 그와 동시에 강철새의 진로를 틀어막는 놀라운 무용을 보여주었다. 마법을 잃지 않았더라면 어땠을지, 상상만으로도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였다.
반면 셰비언은 강철새를 보호하느라 포인트 파괴를 우선하지도, 샤를레아에게 유의미한 상처를 입히지도 못했다. 그는 흰 비늘이 온통 피에 젖어 시뻘겋게 번들거리는 와중에도 강철새에 연달아 보호마법을 걸었다.
“……이거 아무래도 아르젠 백작이 우리를 포기하는 쪽이 더 효율적일 것 같은데.”
무심결에 속마음이 새어나온 듯 작은 목소리였다. 아이샤는 자신이 잘못 들은 건 아닐까 생각했지만, 그 생각은 스트라스티의 얼굴을 바라본 순간 싹 사라졌다.
스트라스티가 맑고 차분한 표정으로 워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차갑고 냉정한 시선이 그를 조종간에서 떼어낼 최적의 기회를 노리는 것 같아 소름이 돋았다. 전면 창으로 보이는 상황은 여전히 위급했다.
아이샤는 워커만큼 강철새를 다룰 자신이 없었다. 그녀가 자신 있는 건 다른 쪽이었다. 이를 테면, 셰비언을 도와 샤를레아를 공격하는 것. 결심은 빨랐다.
“경, 셰비언님이 강철새를 이렇게까지 감싸는 건 분명 강철새에 탄 인간들에게 바라는 바가 있는 거예요. 나한테 방법이 있어요. 반드시 강철새를 살리고 산트렘의 기사들을 용의 둥지로 보낼 수 있어요. 그러니까 지금은 잠깐 참고 내 편을 들어줘요.”
스트라스티의 시선이 워커에게서 떨어진 순간, 아이샤는 그녀를 밀치고 조종간으로 달려들어 조종실의 문 열림 버튼을 콱 눌렀다.
워커가 곧장 반응했다. 그는 버튼을 누르고 있는 아이샤의 손을 치우려 했다. 하지만 아이샤는 워커의 손을 밀쳐 내며 문을 닫지 못하게 했다. 공기가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소음이 조종실을 가득 채웠다.
“아이샤! 네가 지금 무슨 실수를 했는지 알아? 당장 닫아!”
“실수는 무슨. 카론 경, 내가 나가서 셰비언님과 함께 싸우면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어요. 적어도 강철새가 이 자리를 빠져나가는 데에는 문제없을 거예요.”
“당장 문 닫아, 이 자살희망자! 인간 주제에 무슨 힘이 있다고 용들의 싸움에 끼겠다고 난리야!”
워커는 문을 닫으려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시시각각 변하는 상황에 맞춰 강철새를 조종해야 하는 데다가 아이샤가 결사적으로 버티고 있어 쉽지 않았다. 식은땀이 쏟아져 손이 미끄러웠다.
“자살희망자는 무슨? 난 아까도 잘 싸웠어! 셰비언님이 마법진 쪽을 우선하지만 않았어도 샤를레아는 진작 잡아 죽이고도 남았다고!”
“입으로야 무슨 말을 못해? 카론 경! 아이샤 좀 챙겨줘요! 그렇게 마법을 쓰고도 용케 체력이 멀쩡하다 싶더니만 머리가 맛이 갔나 봐요!”
“맙소사, 이 앞뒤 꽉꽉 막힌 놈이 누굴 미치광이 취급하는 거야? 경, 날 믿어요!”
두 마법사가 입으로 떠들고 어깨로 서로 밀어내는 와중에도 문은 느리고도 착실하게 열렸다. 문의 3분의 1 정도가 열렸을 때쯤, 마디마다 굳은살 박인 손이 아이샤를 대신해서 열림 버튼을 눌렀다.
아이샤는 안색이 환해져 곧장 문으로 달려가 매달렸고, 워커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카론 경!”
“워커 씨는 조종에 집중하세요. 아까부터 아르젠 백작이 몇 번이나 공격을 막아줬는지 압니까? 도움은 못 되어도 부담은 되지 말아야죠.”
“아이샤만 날뛰지 않았으면……!”
“워커 씨의 조종만으로 이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면 진작 그랬겠지요. 아이샤 씨의 의견은 충분히 타당하고, 시도할 가치가 있습니다. 아까 아르젠 백작과 멀쩡히 합을 이뤄 싸웠던 걸 제가 보았습니다.”
“아까는 괜찮았더라도 지금은 안 돼요. 마법은 마법사의 수명과 건강을 재료로 이뤄지는 기적이라고요.”
“글쎄, 그 건강과 수명을 어디다 쓸지는 내 마음이라니까 그러네.”
“마법문명의 미래는 걱정하면서 제 목숨은 안 챙기는 멍청이가 말이 많아. 카론 경! 셰비언이 샤를레아에게 밀릴 리 없어요. 조금만 더 버티면 분명 빠져나갈 수 있을 겁니다. 조금 일찍 이탈하겠다고 아이샤를 사지로 몰면 안 된다고요!”
워커가 뭐라고 떠들든, 스트라스티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막연하기만 한 워커의 추측에 기대기보다 아이샤의 제안을 시도해 보는 쪽에 더 큰 매력을 느꼈다.
마법사인 워커가 기사인 스트라스티를 밀어낼 수 있을 리 없다. 수시로 문을 확인하던 그가 분통에 차서 소리를 질렀다.
“젠장, 이쪽이고 저쪽이고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지!”
“이제 뛸 건데 재수 없게 욕하지 마. 아, 바람 진짜 좋다.”
아이샤는 짭짤한 바닷바람을 마음껏 들이마셨다. 대체 무슨 이유에서인지 딱 맞는 상자 안에 갇혀 있다가 널찍한 들판으로 풀려나온 듯한 해방감이 밀려왔다. 지금이라면 눈 한 번 깜빡일 때마다 마법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대로 땅에 뛰어내려도 제 한 몸 정도는 지킬 수 있겠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솟아났다. 가슴이 부풀었다.
“야호─!”
아이샤는 망설임이라곤 한 줌도 없이 훌쩍 뛰어내렸다. 바람이 몸을 집어삼키고 짜릿한 부유감이 복부를 관통하는 순간, 셰비언의 마법이 그녀를 감싸 안았다. 반응 속도가 놀라우리만치 빨랐다. 머릿속에서 구상했던 마법을 꺼낼 틈도 없이 보호받은 아이샤는 그저 어안이 벙벙했다.
“뭐야, 밀리고 있는 거 아니었어요? 여유가 넘치시네요?”
“왜 나온 건데? 설마 승객을 덜어야 할 정도로 강철새 상태가 나쁜 건가?”
“그럴 리가 있겠어요? 당연히 셰비언님을 도와주러 온 거잖아요!”
아까 셰비언과 함께 싸울 때의 아이샤와 지금의 아이샤는 격이 다른 마법사였다. 아이샤가 손짓하자마자 강력한 파괴마법이 샤를레아를 파고들었다. 마법을 이기지 못한 비늘이 산산조각으로 깨져 사방으로 흩어졌다.
큰 상처를 입은 샤를레아의 주의는 단박에 아이샤에게로 쏠렸다. 셰비언이 혀를 차며 아이샤에게 보호막을 몇 겹이나 덧씌웠다.
“손에 날카로운 칼을 쥐고 있으면 뭐 해? 몸뚱이는 썩은 과일만치 물러빠진걸. 방어는 생각도 못하는 녀석이 냅다 그렇게 강력한 공격을 갈기다니 죽고 싶어 안달 났어?”
“설마요. 저도 제 목숨 아까운 줄은 알아요. 그저 셰비언님이 지켜주실 거라고 믿은 것뿐이죠.”
과연 아이샤가 태평하게 대답하는 그 짧은 사이에 쏟아진 공격을 막는 건 죄다 셰비언의 몫이었다.
“귀찮게! 뒷감당을 나한테 떠맡기니까 좋아?”
셰비언은 공격을 막는 데에서 끝내지 않았다. 그는 샤를레아의 주둥이를 후려쳐 이빨 몇 개를 뽑아내고 앞발을 헤집었으며 꼬리 끝을 절반으로 쪼갰다. 슬금슬금 밀리는 양상을 보이던 조금 전과는 확연히 다른 기세였다.
아이샤가 불만스레 입을 삐죽였다.
“힘을 아껴두셨군요. 대체 왜 얻어맞는 체를 하고 계셨던 거예요? 카론 경은 셰비언님에게 부담이 되는 것 같으니까 아예 강철새를 추락시킬 생각까지 했다고요!”
“쯧, 하여간 인간들은 성질이 급해. 그거 잠깐을 못 참고.”
“하? 준비가 늦다고 사람을 콩 볶듯 볶아댄 게 누군데……! 계획이 있으면 미리 알려줬어야죠!”
“마법진부터 깨라고 했잖아. 행동으로 보여줬을 텐데? 강철새에 보호마법은 괜히 걸었던 건 줄 알아?”
셰비언은 자세한 설명을 해주지 않았다. 아이샤는 입을 삐죽대며 포인트에 공격을 집중했다. 대체 언제 빠져나갔는지, 강철새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 * *
알을 깨는 건 갈수록 어려워졌다. 첫 번째 알은 피올이 검자루로 가볍게 찍은 것만으로도 깨졌지만, 네 번째 알은 서넛이 번갈아가며 두들기고 걷어차고 찍어댄 끝에 간신히 금을 내는 데 성공했다.
“물러나요!”
나랍인 용병들을 죄다 물린 피올이 마지막 일격을 가했다. 가느다란 금이 순식간에 크게 벌어지면서 내용물이 쏟아졌다. 그는 투명한 난백을 뒤집어쓰기 직전에 마법진을 빠져나왔다.
“젠장, 밟을 곳이 없네!”
“투덜댈 시간에 바지자락부터 수습해. 탄다.”
“씁. 이건 또 언제 튄 거야?”
피올은 재빨리 난백이 묻은 옷자락을 잘라 내버렸다. 제때 빠져나왔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아슬아슬했던 모양이었다. 팔과 등에 이어 바지까지 덥석 잘라내고 나니 거지꼴이 따로 없었다.
제일 몸이 날랜 피올이 이 모양이니, 다른 사람들은 오죽할까. 다 같이 너덜너덜한 와중에 중상자도 있었다. 나랍인 용병 중 한 사람은 어깨와 가슴에 난백을 뒤집어쓰고 큰 화상을 입었고, 다른 사람은 발을 잘못 디딘 탓에 다리 한쪽을 날렸다. 본격적인 전투 같은 건 치른 적도 없는데 전력 외 인원이 둘이나 발생한 것이다.
불이 아닌 산(酸)이기에 화염방어 레펙치오는 소용이 없었다. 미리 알았더라면 좀 더 조심했을 거라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골초 나랍인 용병이 담배에 불을 붙였다. 벌써 다섯 대째였지만 말리는 사람은 없었다.
“그보다……. 저 안에 진짜로 뭐가 있긴 하군요.”
고개를 젖혀야 끝을 볼 수 있었던 알을 네 개나 깼다. 하지만 껍질 무더기 너머에 뭐가 있는지는 여전히 알 수가 없었다. 알 다섯 개가 감싸고 있던 공간에 거무스름한 안개처럼 보이는 무언가가 웅크리고 있다는 것만 확실해질 뿐이었다.
“이거 아무래도 마지막 알을 깬다고 일이 다 해결될 것 같지가 않습니다.”
“동감입니다.”
라비린은 난백 아래에서 빛나고 있는 마법진을 노려보았다. 2차 괴물사태가 있던 날, 브란젤의 하늘을 뒤덮은 마법진도 딱 저렇게 빛이 났었다. 불길했다. 다섯 개의 마법진이 다 빛나기 시작하면 그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짐작되는 게 없었다.
“마지막 마법진은 깨는 게 쉽지 않은가 봅니다. 오래 걸리네요.”
“샤를레아가 난동을 부리고 있을 텐데 당연하죠. 그래도 둥지에 돌아와 날뛰지 않는 걸 보니 셰비언이 잘 붙들고 있나 봅니다.”
“부디 저 통로로 들어오는 게 붉은 용이 아니길 바라야겠습니다.”
농담처럼 말했지만 그에 담긴 마음은 진짜였다. 나랍인 용병은 고운 빛을 내는 알을 흘겨보며 그새 짧아진 담배를 퉤, 뱉고 새 담배를 꺼내 물었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막 한 모금 빨아들이려는데, 라비린이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뭡니까?”
“누군가 옵니다. 숫자가 꽤 되는데……. 적어도 열은 넘겠습니다.”
나랍인 용병은 그제야 희미한 발소리를 알아차렸다. 그녀는 한숨을 쉬며 담배를 비벼 껐다. 하지만 한 모금도 빨지 못한 담배를 버리긴 너무 아쉬워 품에 챙겨 넣었다.
“산트렘의 기사들이군요. 열이 뭡니까, 스물도 넘을 겁니다.”
“샤를레아가 난장을 쳤을 텐데 그 정도나 살아남았겠습니까?”
“아르젠 백작이 보호해 주었겠지요. 용맹하고 영리한 사냥개는 귀합니다.”
나랍인 용병은 산트렘의 기사대장이 라비린의 친척이라는 걸 말을 뱉고 나서야 떠올렸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눈치를 살폈지만 라비린은 물론이고 피올까지도 그에 반박하거나 불쾌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피올은 히죽 웃기까지 했다.
발소리의 주인은 오래지 않아 모습을 드러냈다. 산트렘의 기사들은 장막을 걷고 나타나는 것처럼 갑자기 공동에 나타났다.
피올은 재빠르게 그들의 머릿수를 세었고, 서른 명 모두가 무사하다는 걸 확인하고 안심했다. 스트라스티 역시 라비린 일행의 머릿수를 세었지만 표정이 밝지는 못했다. 붕대를 칭칭 감고 구석에 빠진 사람이 둘이나 되니 당연했다.
“대장, 마법진은 다 깨고 왔어요?”
“아니. 그건 아르젠 백작과 아이샤가 알아서 할 거다.”
피올과 비니타가 동시에 경악했다.
“산트렘의 기사가 임무를 타인에게 맡겼다고요?”
“아이샤? 아이샤가 왜 튀어나와요?”
“사표 낸 지가 언젠데 임무 같은 소릴 하고 있어? 누구든 나보다 잘 할 사람 있으면 맡기는 거지.”
스트라스티가 비니타를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그보다, 도중에 합류했다던 마법사가 설마 저 꼬마 아가씨냐? 아베드 너, 표식에 너무 성의가 없었던 거 아냐?”
“크흠! 그만하면 열심히 남긴 건데요. 자세한 내용은 지금부터 얘기하면 되잖습니까? 서로 듣고 싶은 얘기가 많을 것 같은데.”
강철새, 워커의 선택, 아이샤, 마법진과 알의 상관관계, 비니타, 난백의 위험성과 난황의 부재, 알껍데기 밑에 깔려 있을 태어나지 못한 용의 사체, 도무지 알 수 없는 셰비언의 의도, 거무스름한 안개의 정체…….
서로가 교환해야 할 정보는 많고 많았다. 비니타는 워커가 마법이 사라진 분화구에 강철새를 끌고 와서 산트렘의 기사를 내려주고 가버렸다는 말에 크게 안타까워했다.
“스승님이 오셨으면 저 마법진을 해석해 주실 수도 있었을 텐데요.”
“저 마법진은 인간의 마법진이 아니라면서요? 워커 씨가 어떻게 알겠어요.”
“그래도 저보다 백배는 나을 거예요.”
자신만만하게 일행을 이끌던 꼬마 마법사는 퍽 의기소침해져 있었다. 난백의 위험성을 미리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게 이유였다. 상처를 깨끗이 씻길 만큼 많은 물을 조달하는 공을 세우고도 얼굴에 그늘이 짙었다.
가만히 비니타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스트라스티가 돌연 라비린의 옆구리를 찔렀다.
“딸이냐?”
라비린의 얼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이런 장난을 하는 저의는 알겠다. 무거워졌던 공기에 웃음이 섞이며 분위기가 확 가벼워졌으니까. 하지만 그걸 받아들이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이모님, 미리 용서를 구해도 되겠습니까? 제가 지금 욕을 참기가 몹시 어렵습니다.”
“하는 짓이 너 어릴 때랑 똑같아서 한번 물어봤다. 양딸도 딸인데 네 생각은 어때?”
“그보다 아이샤 씨가 그렇게 대단했습니까? 감히 용의 싸움에 끼어들 정도라니 어째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말 돌리기는. 하긴, 양딸로 삼으려면 본인의 동의가 중요한데 괜히 내가 먼저 말을 꺼내서 일을 망치면 안 되겠지. 비니타 양, 라비린은 책임이 뭔지 아는 녀석이니 딸이 되면 아주 잘해줄 거예요. 내 조카라서 하는 말은 아니니까 새겨들어요.”
비니타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스트라스티가 흡족한 미소를 짓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굳은살 박인 손은 따뜻했다.
“어휴, 예쁘기도 하지.”
“이모님, 저 진짜 욕할 겁니다.”
“할 거면 그냥 하면 되지, 그런 식으로 경고하는 게 무슨 소용이냐? 하여간 재미없는 녀석. 수작부린 카드로 날 휘둘러 대는 걸 보고 융통성이라는 게 좀 생겼나 했더니만……. 하긴 그러니까 다 잡은 여자를 놓쳤겠지. 제 손으로 떠밀어 보내놓고 이게 무슨 청승이야?”
“…….”
라비린은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오드리와의 약혼을 깬 걸 이런 식으로 공격당하는 건 너무 오랜만이었다. 심장이 삐걱거렸다.
“아이샤 씨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말로 하는 것보다 눈으로 보는 게 빠를 거다. 민담에 등장하는 공격마법사도 그 정도는 아니었어.”
“아깝네요. 종신계약 전에 빼왔어야 하는 건데.”
“아까워할 것 없다. 타우레드에 마법사를 영입할 생각이면 아이샤 씨가 아니라 워커 씨를 노려.”
“워커요?”
“뛰어난 개인은 전장의 판도를 바꾸지만 진짜 천재는 세상을 바꾸지. 비마…… 아니, 기계와 마법을 그리 능숙하게 융합하는 마법사는 정말이지 처음 봤다. 강철새는 아직 불안정하고 단점도 많지만, 세상을 바꾸기에 충분한 물건이야.”
“안타깝게도 워커가 충성하는 대상은 따로 있어서요.”
“그러니까 네가 얼른 비니타 양을 딸로 삼아서……. 알았다, 농담은 그만하고 일하라 이거지. 몇 마디만 더 하면 아주 잡아먹겠네. 어휴, 내가 이 나이를 먹고도 조카 새끼 눈치가 보여서 농담을 못해요.”
스트라스티의 지휘는 라비린보다 훨씬 과감했다. 그녀는 벽을 두들겨 돌을 떼어내도록 했고, 떼어낸 돌덩이를 난백으로 가득 찬 마법진에 내던져 징검다리를 만들었다. 그것도 마지막 알은 물론이고 거무스름한 안개가 일렁대는 껍질 무더기에도 닿을 수 있도록 여러 개나.
“마법진을 훼손하면 레이디 오드리께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
“비니타 양, 진정해요. 용이 만든 마법진입니다. 대충 던진 돌 몇 개로 마법진을 훼손할 수 있었으면 우리가 그 고생을 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조금 전까지 용의 마법진을 파괴하다 온 사람치고는 용에 대한 믿음이 지나치게 충만한 말이지만, 스트라스티는 나름 진심이었다. 거기에 산트렘의 기사들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기까지 하니 비니타도 더는 말을 보태지 못했다.
귀찮은 참견도 막았겠다, 스트라스티는 훌쩍 징검다리 위에 올라섰다가 불쾌한 감각에 미간을 찌푸렸다. 소량이긴 해도 지속적으로 마력이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올라오지 마라. 특히 마력 적은 놈들, 징검다리 밟을 엄두도 내지 마.”
“음? 설마 마력이 빨립니까? 대장, 안 됩니다! 대장이야말로 나이를 생각해야죠!”
“야, 내 나이가 어때서! 네놈 새끼들보다 내 마력이 더 많아!”
누가 말릴 틈도 없었다. 펄쩍펄쩍 징검다리를 건너뛴 스트라스티는 울분을 담아 거무스름한 안개를 횡으로 베어냈다. 안개답지 않은 무게감이 손목을 통해 전해지더니 검이 지나간 자리가 쩍 벌어졌다. 거무스름한 안개의 속은 잘 익은 과일처럼 새빨갰다.
“세상에, 이게 뭐지?”
마법진 밖의 사람들이 경악하든 말든, 스트라스티는 호기심부터 드러냈다. 급히 뛰어든 기사 한 명이 그녀를 낚아채 빼내지 않았더라면 안개에 손을 넣어보았을 게 분명했다.
“대장, 내가 대장을 못 믿는 건 아닌데, 어떻게 그 나이 먹고도 십대 애들처럼 호기심은 많아가지고 매번…….”
“부하는 뒀다가 술 담그는 데에 쓸 거예요? 혼자도 아니면서 왜 대장이…….”
“아, 이 귀찮고 썩을 놈들.”
“돌아가면 부군께 죄다 일러바칠 겁니다!”
한바탕 소란이 일어난 산트렘의 기사들을 바라보던 나랍인 용병이 품에서 담배를 꺼냈다. 불붙이지 않은 담배를 입에 물고 잘근잘근 씹는다. 살짝 타들어간 담배 끄트머리가 고개를 끄덕댔다.
“다른 건 모르겠는데, 보티안 씨가 카론 경의 제자라는 사실은 확실히 알겠습니다.”
“으음…….”
라비린은 차마 반박하지 못하고 마른세수를 했다. 민망해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스트라스티가 잡혀 내려온 후, 누구도 감히 징검다리 위에 오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징검다리 너머의 거무스름한 안개가 점점 짙어져 선명한 검은색이 되었을 때쯤, 갑자기 알이 빛을 잃었다. 다른 알처럼 깜빡이는 과정 같은 건 없었다.
하지만 알 아래에 깔려 있는 마법진이 알 대신 빛을 내기 시작했으니, 알이 죽었다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알게 모르게 긴장하고 있던 사람들의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마지막 알은 제 손으로 깨겠다며 벼르던 이들 중 가장 먼저 징검다리에 올라선 사람은 스트라스티였다. 그녀는 알의 정면에 서서 검을 역수로 쥐었다.
“이번 알은 몇 대나 쳐야 깨지려나?”
“글쎄요? 다른 알 깰 때 들었던 수고를 생각하면 아마 못해도 십 분은 족히 쳐야……. 허.”
스트라스티의 검은 수월하게 껍질을 뚫었다. 검신 대부분이 알에 파묻혀 검자루가 껍질에 닿을 듯했다. 순식간에 생겨난 거미줄 같은 균열이 알 표면을 덮었다. 스트라스티는 감히 검을 뽑을 엄두도 내지 못하고 마법진 밖으로 빠져나왔다.
“뭐야, 오래 걸릴 거라며?”
“마지막 알이라 뭔가 달랐는지도 모르죠……. 깜빡거리지도 않고 그냥 죽었잖습니까.”
“이거 참, 어이없이 검을 잃었네. 아베드, 넌 어떻게 젊다 못해 어린 녀석이 이런 거 하나 못 깨서 사람들 다 달라붙게 만들었냐?”
피올은 너무나 억울했지만 지금은 해명하기에 적당한 때가 아니었다.
서로 겹쳐져 빛나는 마법진 다섯 개 위에 난백이 쏟아지자 여직 빛나지 않던 다른 마법진도 함께 빛나기 시작했다. 깨진 알껍데기 무더기 다섯에 둘러싸여 웅크리고 있던 검은 안개가 눈에 띄게 꿈틀거렸다. 스트라스티에게 베여 한번 벌어졌던 틈이 점점 더 커지다 아예 쫙 벌어졌다.
붉은 안개에 사람이 잠겨 있었다. 별을 품고 빛나는 새카만 머리칼을 마구 흐트러뜨리고 새빨간 입술을 꾹 다문 채로 누운 여자였다. 피부는 뽀얗게 희었지만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전부가 여자의 얼굴을 알았다.
“오드리……?”
“벨키스 경! 침착해요!”
나랍인 용병이 라비린을 불렀다. 하지만 라비린의 귀에 그녀의 만류는 들리지 않았다. 그는 단숨에 징검다리를 건넜고, 안개에 잠긴 오드리에게 망설임 없이 팔을 뻗었다.
그 순간, 고요히 고여 있던 난백이 치솟아 오르며 따라 들어오려던 사람들을 막았다. 난백으로 이뤄진 벽은 마치 색이 들어간 유리 같았다. 덕분에 마법진을 둘러싸고 있었던 사람들은 검고 붉은 안개가 라비린을 통째로 집어삼키는 광경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