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6. 각자의 최선
「기록되지 않은, 혹은 기록될 수 없는 역사는 때때로 신화와 전설의 형태로 전승되어 살아남는다.」
모처럼 햇살이 좋은 날이었다. 따끈따끈한 햇살에 데워진 뺨이 발그레하게 익었다. 소녀는 머리를 묶은 리본이 다 풀어지는 것도 모르고 봄날의 정원을 내달렸다. 단정하게 정리한 길옆의 풀잎들이 치맛자락에 스치며 몸을 굽혔다.
“어머니!”
햇살을 즐기며 책을 읽고 있던 귀부인이 고개를 들었다. 소녀는 어머니가 일어날 틈도 주지 않고 그녀의 품에 뛰어들었다.
“오드리, 이렇게 갑자기 달려들면 안 된다고 했잖니.”
입으로 타박을 놓으면서도 밀리나는 오드리를 떼어놓지 않았다. 허리춤에도 오지 않는 머리를 쓰다듬고 복숭아처럼 말랑한 뺨에 입을 맞춘다. 오드리의 눈이 기쁨으로 물들었다.
“무슨 좋은 일이 있어서 이렇게 달려온 거니?”
“그야 어머니가 이렇게 밖에 나와 계실 수 있을 정도로 몸이 좋으시다는 게 기쁜 거지요!”
고작 예닐곱 살, 예뻐해 달라 조르기에도 모자란 나이인데도 오드리는 제법 달콤한 말을 할 줄 알았다. 과연 밀리나의 창백하던 뺨에도 불그스레한 온기가 돌았다.
“어휴, 내가 병자도 아닌데 그리 마음 쓸 필요가 뭐가 있담. 우리 귀한 딸, 내가 가르친 것도 아닌데 어쩜 이리 예쁜 말을 할까?”
“어머니만 기뻐하신다면 전 언제든 예쁜 말을 할 수 있어요.”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예쁜 말을 해야지.”
소녀가 배시시 웃었다. 여름날의 햇살을 한 조각 잘라 넣어둔 것 같은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을 냈다. 밀리나는 오드리를 더 야단치지 못하고 의자에 앉혔다.
“내가 이렇게 무르게 굴면 안 되는데……. 오늘 수업은 다 하고 온 거니?”
“물론이죠! 선생들이 더 가르칠 게 없다고, 그냥 가라고 했어요.”
“그랬니?”
“네!”
밀리나의 눈이 어두워졌다. 영리하긴 해도 아직 어린 오드리는 어머니의 속내까지는 짚어내지 못하고 그저 잘했다는 칭찬을 바라며 눈을 빛냈다. 밀리나가 빙긋 웃으며 오드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럼 다른 선생을 구해봐야겠구나. 오드리에게 가르쳐 줄 것이 아주 많은 사람으로. 오드리, 괜찮겠지?”
“그럼요, 전 이번에도 금방 배울 거예요!”
오드리가 자신만만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밀리나가 어깨를 떨며 웃었다. 그녀는 오드리를 의자에 앉히고 산발이 된 머리칼을 손으로 빗어 땋았다.
“락시 부인이 새 망아지를 사왔단다. 미리 주는 네 생일 선물이야.”
“세상에, 진짜요? 진짜 제 망아지예요? 어머니, 저 당장 보러 가면 안 돼요?”
얌전히 앉아 있던 오드리가 엉덩이를 들썩대기 시작했다. 밀리나는 오드리의 어깨를 때려가며 딸을 진정시켰다.
“머리만 깔끔하게 묶으면 보러 가게 해줄 테니 조금만 참으렴.”
“네, 네!”
“승마는 적당히 운동이 될 정도로만 하면 그만인데, 넌 어쩜 그렇게 승마를 좋아하니? 왕비 전하께서도 내게 타박을 놓았단다. 열 살도 안 된 어린애에게 망아지 선물이라니, 큰일이라도 나면 어쩌느냐며 야단이셨어.”
비록 오스미다의 권위를 빌렸지만 사실은 밀리나가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하지만 씩씩하고 자신감 넘치는 어린 오드리는 밀리나의 만류는 듣는 둥 마는 둥, 마음이 벌써 마구간에 가 있었다.
“어머니, 락시 부인은 무슨 색 망아지를 사 왔을까요? 검은색? 흰색? 갈색? 아니면 얼룩이? 사실 전 새카만 털에 흰 구두를 신은 말이 좋은데, 락시 부인도 이런 제 취향을 아실까요?”
“내 딸……. 새삼 느끼는 거지만 말을 참 잘하는구나. 누가 널 두고 여덟 살이라고 하겠니.”
“락시 부인이 본래 여자애는 빨리 자란다고 그랬어요. 남자애들보다 말도 빨리 트이고, 걸음마도 먼저 한다고요. 머리 여무는 것도 빠르대요. 뭐, 저는 여자애들 중에서도 유달리 빠른 것 같지만요.”
“그러니? 네 생각에도 넌 좀 빨리 자라는 것 같아?”
“네.”
오드리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아이들은 몇 살을 먹었든 자신이 다 자랐다고 여긴다더니, 지금의 오드리가 딱 그랬다. 땋은 머리칼에 리본을 묶어주던 밀리나는 폭소해서 딸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넌 이 저택에서만 자라느라 비교할 사람도 없는데 그걸 어찌 아니?”
“비교할 사람이 왜 없어요? 이디케도 있고, 하델도 있는데.”
“이디케는 누군지 알겠는데, 하델은 또 누구니?”
오드리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어머니, 또 절 놀리려고 그러시는 거죠? 하델은 제 동생이잖아요. 저랑 비슷한 연두색 눈동자가 예쁘…….”
“동생? 세상에,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아이를 낳은 줄은 몰랐구나.”
밀리나의 목소리엔 엷은 웃음기가 묻어 있었다. 오드리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네가 예전부터 동생을 갖고 싶어 했던 건 알지만, 아버지 앞에서 동생 얘긴 실수로라도 꺼내지 말렴. 속상해하실 거다.”
“…….”
“오드리, 이번 여름휴가철엔 우리 가족 다 같이 만탈락에 가는 게 어떠니? 넌 아직 만탈락에 가본 적 없잖니. 랄리우스의 도시가 얼마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지, 내가 일일이 알려주마.”
“어머니 몸이 괜찮으실까요?”
“내 몸이 뭐 어때서? 좀 약하긴 해도 기차 여행도 못 할 정도는 아니란다.”
머리 손질이 끝났다. 밀리나가 오드리의 정수리에 입 맞췄다. 냉큼 뒤돌아 앉은 오드리가 젖먹이 아이처럼 어리광을 부리며 밀리나의 품에 파고들었다.
“어머, 망아지를 보러 간다더니 웬 애교니?”
밀리나가 웃었다. 그녀에게서는 청량한 나무 향기가 났다. 짙고 깊은 숲의 향기였다. 오드리는 눈을 감았다.
* * *
워커는 대형 강철새를 능숙하게 조종했다. 수십 개나 되는 버튼을 능숙하게 조작하는 손에는 망설임이 없고, 앞을 보는 시선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대형 강철새는 첫 비행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안정적으로 날았다.
밖이 보이지 않으면 불안해서 견딜 수 없다는 핑계를 대고 조종실에 들어왔던 피올은 제가 보고 있는 사람이 진짜로 자신이 알던 워커가 맞는지 믿을 수가 없었다. 만약을 대비해서 함께 탔다는 아이샤는 조종실 구석에 간이침대를 펴놓고 누워 일어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이렇게 잘 몰면서 아까는 왜 그랬어요?”
“쌈질하는 용 피하는 거랑 그냥 날기만 하면 되는 거랑 같아요?”
“음……. 그렇게 말하니까 할 말 없긴 하네. 그치만 지금도 나무 바로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나는데 아까랑 다를 게 뭐가 있…….”
“자꾸 말 걸지 마요, 정신 산만하니까!”
워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강철새 조종에 아는 게 없는 피올은 그만 입을 다물고 바깥 풍경 구경에 집중했다. 수증기를 뿜어내는 검은 바위, 꼿꼿이 선 꼬챙이 같은 나무, 그 너머로 보이는 새파란 하늘에 내리꽂히는 마른번개. 아, 마음이 심란해졌다.
애초 라비린이 워커에게 부탁한 건 협곡을 건너게 해주는 일뿐이었다. 하지만 사정을 알게 된 워커가 어떻게 매정하게 협곡만 건너주고 그냥 갈 수 있겠냐며 금빛 길의 끝까지 데려다주겠다고 나선 것이다. 라비린이나 나랍인 용병들이나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었다.
문제는 땅에서 볼 때는 퍽 선명하던 금빛 길이 공중에 떠서 보니 그렇지 않더라는 것이다. 덕분에 대형 강철새의 속도는 기대 이하로 떨어졌고, 샤를레아의 눈에 띌 가능성은 그만큼 올라갔다.
‘이럴 바엔 걸어가는 게 나았겠는걸.’
피올은 차마 속마음을 털어놓지 못하고 끙끙거렸다. 입이 간질거렸지만 자신을 비롯해 멀쩡한 산목숨 십여 개가 워커에게 달려 있다 보니 싫은 소릴 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안 보는 게 낫다, 생각하며 질끈 눈을 감자 불쑥 솟아오른 나무 꼭대기가 강철새 밑바닥을 긁는 감각이 선명하게 전해졌다.
‘빌어먹을.’
이런 건 다리를 스치는 풀잎과 다를 바 없다는 설명은 들었지만, 단박에 받아들이고 넘기는 건 불가능했다. 신경이 올올이 곤두섰다.
“이거 봐, 내가 괜한 오지랖이라고 했잖아요.”
그때, 내내 드러누워 꼼짝도 않던 아이샤가 불쑥 워커에게 핀잔을 주었다. 워커는 조금도 지지 않고 대꾸했다.
“할 능력이 있고 피할 이유가 없는데 오지랖 좀 부리면 안 돼요? 아이샤 씨는 멀미 가라앉았으면 이리 와서 금빛 선 좀 찾아봐요. 혼자 다 하려니까 벅차서 그래요.”
“혼자하기 벅차면 할 능력이 있는 게 아니죠.”
“부조종사로 와서 멀미난다고 드러누운 주제에 일 좀 하라는 게 그리 아니꼬워요?”
두 마법사는 입에 칼을 물고 서로를 헐뜯었다. 때마침 라비린이 조종실로 건너왔고, 피올은 그를 잡아당겨 바닥에 앉혔다. 금방 상황을 파악한 라비린이 피올과 함께 벙어리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물웅덩이 피하려다 진창에 발이 빠진다고, 벙어리 흉내의 끝에는 원숭이 흉내가 기다리고 있었다.
라비린은 기가 막힌 심정으로 조종석 너머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용케 용암을 피해 살아남은 꿋꿋한 덩치의 나무들 꼭대기에 달린 나뭇잎이 조종석 창문에 닿아 살랑거리고 있었다.
“여기서 내리라고요?”
라비린의 말 속에 담긴 어이없음과 분노를 알아채기엔 워커의 사회성이 몹시 바닥이었다. 워커는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밧줄 내려 드릴게요. 나무도 있겠다, 이 정도는 내려갈 수 있으시죠? 거창하게 갑옷을 입은 것도 아니니까 딱히 부상 위험이 높을 것 같지도 않고.”
“아니, 분화구까지 가려면 아직 남았잖아요. 금빛 선이 저기까지 이어져 있는데 왜 벌써 이래요?”
“나도 저 분화구 정상에 딱 내려드리고 싶어요. 근데 어쩌겠어요, 강력한 마법이 막고 있어서 진입이 안 되는데. 억지로 더 올라갈 수는 있지만, 그러면 진짜 나무도 없는 비탈에서 풀쩍 뛰어내려야 할걸요.”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라비린이 버럭 소리를 지르기 직전, 미간에 주름을 잡고 입술을 질겅대던 아이샤가 끼어들어 그를 재촉했다.
“시간 없다면서요.”
“빨리 가요, 빨리. 강철새를 한 자리에 가만히 떠 있게 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아요? 어차피 여기 아니더라도 이 근처에 착륙시킬 만한 곳은 한 군데도 없어요. 죄다 비탈에 숲에……. 어디 평평한 곳이 있어야 착륙을 시키죠.”
“워커 씨 말이 맞아요. 여기서 내릴 게 아니면 한참 뒤로 돌아가야 해요.”
“그럼 진작 착지가 가능한 곳에서 내려줬으면 되는 거잖아요? 그런데 왜 여기서…….”
“그야 그때는 이런 마법이 막고 있는 줄을 몰랐죠. 알았으면 진작 내려드렸지.”
망할 놈의 마법사들! 라비린은 잠깐 편하자고 워커의 제안을 받아들였던 자신에게 욕을 쏟아 부었다. 워커고 아이샤고 결국 똑같은 마법사고, 마법사치고 어딘지 미쳐 있지 않은 사람은 없다는 걸 잘 기억해 뒀어야 하는데.
“그럼 적어도 고도라도 좀 더 낮춰줘요. 나랍인 용병을 사람이 아니라 원숭이로 생각하는 게 아니면 이 높이에서 내리라는 말은 할 수가 없어요.”
“흠, 원숭이는 아니지만 이 정도 높이는 우리에게 별거 아닌데요.”
라비린은 경악해서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조종실에 들어온 나랍인 용병이 그의 시선을 받으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아까 짐승들을 잡는 내내 느꼈던 건데, 이 발톱섬이라는 곳의 식생이 나랍의 정글과 상당히 비슷했습니다. 저 아래 있는 건 평화로울 때도 열매 따고 새 둥지 터느라 숱하게 탔던 나무들인데 이럴 때 못 탄다는 건 말이 안 되죠. 밧줄도 필요 없습니다.”
라비린이 너무 경악한 나머지 말을 잃은 사이, 아이샤와 워커는 그녀의 참견을 몹시 기뻐하며 강철새 승객석의 문을 열어젖혔다. 유황 냄새 섞인 공기가 강철새 안쪽으로 밀려들었다.
나랍인 용병이 라비린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눈으로 쭉 훑으며 불붙인 담배를 빨아들였다. 미소 짓는 입술 사이에서 회색 담배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포도나무는 키가 작죠. 아무리 개구쟁이로 자랐대도 이렇게 큰 나무를 타본 경험은 없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벨키스 경이 불안해하는 것쯤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
“그래도 안 내려갈 수는 없으니까요. 경, 정 불안하시면 업어서 내려드릴 수도 있습니다만, 그건 어떠신지?”
훅, 내뱉은 연기가 라비린의 얼굴을 두들기고 흩어졌다.
차마 나랍인 용병의 등에 업혀 내려갈 수는 없었던 라비린은 허리에 밧줄을 감고 문 옆에 섰다. 뺨에 와 닿는 시선이 몹시 따가웠지만, 피올도 밧줄을 매고 저와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사실이 눈곱만 한 위안을 주었다.
나랍인 용병들은 정말 원숭이처럼 몸이 날래고 가벼웠다. 그들은 밧줄조차 걸지 않고 훌쩍 강철새 밖으로 뛰어내렸다. 한 명 한 명 내려갈 때마다 무성한 나뭇잎이 와르르 흔들렸다.
“젠장, 자살 체험은 질색인데…….”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나 먼저 간다!”
“아, 씨! 야!”
꼴찌로 내려가는 건 괜찮지만 저놈에게 지는 건 괜찮지 않다. 슬금슬금 서로의 눈치를 보던 라비린과 피올은 질세라 강철새를 박차고 뛰어내렸다. 징그럽도록 윤기 나는 초록색 나뭇잎과 유연한 나뭇가지가 그들을 받아줄 듯 팔을 벌렸다. 구멍이 숭숭 뚫린 어설픈 안전장치였다.
이만하면 대형 강철새의 시험비행은 가히 성공적이라 할 수 있었다. 한껏 들뜬 워커는 곧장 발톱섬을 벗어나 메리디에스로 돌아갈 경로를 잡았지만, 아이샤의 의견은 달랐다. 그녀는 한창 몸싸움을 벌이는 용들의 아래를 관통해서 지나가길 원했다.
“굳이 거길 지나갈 필요가 있어요? 아까처럼 급한 것도 없는데…….”
“정 힘들 것 같으면 근처에서 나만 내려주고 가면 돼요.”
워커는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하지만 아이샤는 태연한 표정으로 같은 말을 반복했다.
“내려주고 가면 된다고요.”
“미쳤어요? 멀미가 너무 심하면 죽고 싶어지는 모양이죠? 이젠 도와줄 필요도 없으니까 가서 드러누워 있어요.”
멋모르고 싸움박질하는 용들의 근처로 경로를 잡았다가 추락할 뻔했던 기억이 아직 생생한데, 어딜 기어들어 가잔 건가. 워커는 아이샤의 말을 깡그리 무시하고 조종간을 잡았다. 하지만 아이샤의 목소리가 그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마력구슬에 손을 좀 댔어요. 이대로 가면 달튼 제도의 바다 한복판에서 추락할걸요.”
“개소리는 적당히 해요. 출발 전에 내가 다 확인했어요.”
“알아요, 제일 먼저 확인했죠. 하지만 한 번 더 살펴보는 게 좋을걸요. 아까 당신이 조종실을 비웠던 걸 기억하고 있다면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황급히 마력량 표시기를 확인한 워커의 안색이 허옇게 질렸다. 남은 마력은 처음의 삼분지 일에도 미치지 못했다.
“당신……. 미쳤어? 이게 무슨 짓이야!”
워커가 아이샤의 멱살을 잡았다. 눈이 벌게지고, 마른 손등에는 핏줄이 섰다. 쏟아지려는 말이 너무 많아서 혓바닥이 갈피를 잡지 못했다.
워커가 흔드는 대로 흔들리면서도 아이샤의 신색은 여전히 태평하고 태연했다. 그녀는 워커와는 달리 말하는 게 그리 어렵지도 않은지 조잘조잘 잘도 떠들었다.
“이 대형 강철새는 반드시 살아 돌아가야 하는 거 알아요. 시험비행 겸 실전 투입에 연구책임자인 당신이 동원될 정도니까. 임무는 무사히 마쳤다지만 돌아가는 길에 추락해 버리면, 그리고 강철새 연구의 일인자인 당신이 구조 받지 못하고 죽으면 강철새는 천재가 남긴 발자국에 불과한 존재가 되겠죠. 안타까워라.”
“왜……! 왜 그랬어!”
“날 용들의 싸움터에 데려다놔요. 그럼 빼냈던 마력을 도로 채워드리죠.”
“그게 가능하긴 해? 당신이 가진 마력 전부를 털어도 이 대형 강철새의 마력구슬은 다 못 채워! 자살자가 죽고 싶은 곳을 고르는 걸 막을 생각은 없지만, 그럴 거면 적어도 남에게 민폐는 끼치지 말아야 할 거 아냐!”
“가능하니까 하는 말이에요. 워커 씨, 당신이 대형 강철새를 개발하는 동안 나는 뭐 밥 처먹고 놀기만 한 줄 알아요?”
아이샤가 작고 얇은 은판을 꺼내 흔들었다.
“마력을 담는 게 꼭 수정구슬일 필요는 없잖아요.”
“은판 쪼가리에 마력을 담았다고?”
“왜요? 이상해요? 보석에 마법을 담아 레펙치오도 만드는데 귀금속인 은에다 마력을 못 담을 이유는 뭔데요?”
“…….”
“편견을 깨는 게 오로지 워커 씨 당신만의 몫은 아니죠. 받고 싶으면 손 놔요.”
워커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아이샤는 그에게 은판을 넘겼다. 워커는 은판에 진짜로 마력이 담겨 있다는 걸 확인했지만, 동시에 몹시 심란한 표정이 되었다. 그는 이 은판의 사용법을 몰랐다.
“담긴 마력이 너무 적은데…….”
“날 데려다주면 사용법도 가르쳐 주고 남은 은판도 전부 줄게요.”
“……대체 왜 이러는 건데요? 어차피 마법사는 얼마 못 사니까 죽을 자리라도 마음대로 고르겠다는 거예요?”
“나 참……. 워커 씨는 아까부터 날 자살희망자로 몰고 있는데,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거기가 내가 있어야 할 자리라 그런 거예요.”
아이샤가 상큼하게 웃었다.
“셰비언님은 나에게 파괴마법을 가르쳤어요. 적성에 잘 맞더군요. 회복마법 따위보다 훨씬 더요.”
마법사가 전장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였던 시절이 있었다. 땅을 뒤집고 하늘에서 별을 떨어뜨리는, 피를 끓게 하고 수천 군사가 피아를 구분하지 못해 혼란에 빠지게 만드는 마법사에 대한 이야기는 이젠 전설로만 남아 있지만, 한때는 그게 사실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마법은 마법사의 생명력과 수명을 대가로 하는 것이라, 공격마법의 성행은 전체적인 마법사의 질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불러왔다. 지식의 계승이 채 이루어지기도 전에 사망하는 마법사가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줄어드는 숫자와 실전되는 지식들은 마법사들이 스스로 전장을 떠나도록 만들었다. 전장에서 공포로 군림하던 마법사의 위용은 초라하게 시들었고 공격마법은 마법사들에게서 철저한 배척을 받으며 사멸했다.
하나 공격마법과 기계를 결합하면 큰 대가를 치르지 않고 강력한 무기를 만들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지금, 공격마법을 복구해 활용하려는 시도가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멜브란트 왕궁마법사들이 만들어낸 대포가 그 좋은 예였다.
워커는 무기는 만들기 싫다며 허구한 날 제 연구실로 도망 오는 사하스바티에 익숙했다. 그는 무의식중에 아이샤를 쭉 훑으며 낯선 마법도구가 보이는지 확인했다. 하지만 아이샤에겐 아무것도 없었다.
“마법도구는 안 써요. 용이 쓰는 마법에 마법도구가 무슨 필요람.”
“진짜 죽고 싶은가 보네요.”
아이샤가 울컥 짜증을 냈다.
“아니라니까요. 죽고 싶은 거랑 죽어도 해야 할 일이 있는 거랑은 엄연히 다른 거예요. 워커 씨가 못 가겠거든 나한테 조종간 넘겨도 돼요. 내가 직접 갈 테니까…….”
“벼락치기 조종사 주제에, 조종간? 꿈도 꾸지 마요!”
워커는 더 이상 간섭하고 싶지 않았다. 자기 목숨 자기가 원하는 곳에 쓰겠다는데, 그가 뭐라고 끼어들어 이래라저래라 한단 말인가.
“데려다줄 테니까, 내리기 전에 이 은판 쓰는 법이나 확실히 가르쳐 주고 가요.”
곧장 화산을 지나쳐 발톱섬을 빠져나가려던 강철새가 머리를 틀었다. 벌레 씹은 표정의 워커와 웃음기가 사라진 아이샤만 남은 조종실은 침묵에 잠겼다.
워커의 비행은 거칠었다. 어쩔 수 없었다. 샤를레아에 비해 육탄전 능력이 모자란 셰비언이 마법으로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눈먼 마법에 맞지 않으려니 워커는 온갖 기교를 부리며 날아야 했고, 덕분에 아이샤는 멀미가 재발하고 말았다. 아이샤는 시퍼런 안색으로 목구멍까지 올라온 토사물을 되삼켰다.
“젠장, 이래서야 문을 열기는커녕 잠깐 서지도 못하겠네!”
간신히 낙뢰를 피한 워커가 신경질을 냈다. 그의 등은 한참 전부터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그렇게 몇 번이고 마법을 피하며 셰비언에게 다가가던 어느 순간, 두 마법사는 이제 안전하다는 걸 깨달았다. 누가 알려준 건 아니었지만 본능적인 직감이 그렇게 말한 것이다. 과연 불과 바람과 번개가 강철새를 피해 비껴 지나갔다.
강철새는 더 이상 요동치지 않고 평온하게 그 자리에 머물렀다. 워커는 조종간에서 손을 떼고 축 늘어졌고, 아이샤는 무릎에 머리를 처박은 자세로 멀미를 진정시켰다.
“셰비언님일까요?”
“셰비언이겠죠.”
“다행이네요……. 강철새 신경 쓸 정신도 있는 거 보니까 아주 밀리는 건 아닌가 봐요.”
“나중에 욕을 한 사발 먹을 수도 있으니까 지금부터 각오해요.”
워커의 핀잔에 아이샤가 히히 웃었다. 그러더니 휘청거리는 다리를 끌고 조종실 문 앞에 섰다. 문을 툭툭 두들기는 게, 당장 열라는 것 같았다.
기껏 여기까지 와놓고, 워커는 좀처럼 문을 열지 못하고 망설였다. 아이샤는 싸가지가 없는 데다 기계를 무시하고 마법에 지나치게 의지해서 자신과는 영 성격이 맞지 않았다. 비니타의 교육 문제로도 몇 번이나 부딪친 전적이 있었다. 어쩌다 만나기만 하면 서로 악담을 하며 헤어졌다. 솔직히 얼굴 안 보고 살 수 있으면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그게 저 여자가 제 발로 죽을 자리를 찾아가는 걸 내버려 둘 충분한 이유가 되나? 본인도 죽을 생각은 없다는데 말 몇 마디만 더 하며 설득하면 마력구슬을 채워주지 않을까? 그럼 그때 같이 돌아가면 되는데.
손톱만 한 양심이 칼보다 날카롭게 가슴을 긁었다. 하도 멀미에 시달린 나머지 화낼 힘도 없어서 문 옆 벽에 이마를 박고 숨을 고르는 여자의 뒷모습이 화인처럼 눈에 남아 두고두고 떠오를 것 같았다.
워커는 머뭇대며 말을 꺼냈다.
“아이샤 씨, 보아하니 셰비언이 그리 밀리는 것 같지도 않은데 굳이…….”
“바다가 아니라 여기서 추락하고 싶은 모양이죠? 실낱같은 생존가능성마저 스스로 없애는 길을 선택할 줄은 몰랐는데 의외네요.”
양심은 개뿔. 워커는 곧장 열림 버튼을 눌렀다. 착륙상태가 아니라서일까? 문은 아주 천천히 열렸다. 세찬 바람이 가느다란 틈을 비집고 들어와 아이샤의 머리칼을 마구 헤집었다.
“워커 씨, 혹시 내가 여기서 죽으면 내 집은 워커 씨가 받아가요. 내가 남기는 것 중에 돈 될 만한 건 그것밖에 없네요.”
“……네?”
“실은 비니타에게 주고 싶은데, 애가 아직 어리잖아요? 국적 문제도 있고. 잘 갖고 있다가 비니타가 성년이 되면 물려줘요.”
워커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손이 다 떨릴 지경이었다. 죽을 생각 없다던 사람에게서 갑자기 유언 비슷한 걸 듣게 된 것도 어이없는데, 그 내용도 참 문제적이다. 웬 집? 웬 재산 상속?
“내가 강철새 연구하다가 그나마 있던 재산도 다 말아먹었다는 얘기, 유명하지 않아요? 무슨 정신으로 나한테 재산을 맡겨요? 비니타가 성년이 될 때까지 그 집이 무사히 있을 거 같아요? 물려줄 때가 되면 보나마나 현관문 손잡이 하나만 달랑 남아 있을걸요!”
“워커 씨가 비니타의 스승인데 그럼 누구한테 맡겨요? 만약 성년 전에 집이 없어지면……. 뭐, 그것도 비니타의 운명이겠죠.”
아이샤가 워커를 돌아보고 씩 웃었다. 흥분으로 붉게 물든 뺨이 잘 익은 자두 같았다.
“하지만 그러기 쉽지 않을걸요. 내가 그 집을 비니타에게 물려주고 싶어 했던 걸 아는 사람이 워낙 많아서.”
“그냥 변호사에게 맡겨두는 게 제일 속 편하겠어요.”
“그러시든가요. 워커 씨는 로렐라이의 마법사니까, 레이디 오드리에게 부탁하면 괜찮은 변호사를 소개시켜 주시겠네요. 그래도 비니타의 스승인 워커 씨가 최종 관리를 맡게 될 가능성이 제일 높지만요!”
“나 참……. 그렇게 비니타가 걱정됐으면 진작 후견인이라도 구해주지 그랬어요?”
아이샤의 눈썹이 꿈틀거리며 위로 치솟았다. 워커는 슬그머니 뒷걸음질을 쳤다. 닿을 수 있는 거리가 아닌데도 어쩐지 등과 어깨가 아파왔다.
“내가 바로 그 후견인이었어요.”
“……아, 그랬죠. 그랬지. 참. 젠장, 자신 없는데! 아이샤 씨, 동문은 없어요? 설마 스승이 아이샤 씨 하나만 제자로 받진 않았을 거 아니에요?”
아이샤는 웃는 얼굴로 대답하려 했지만, 워커가 한 발 먼저 입을 뗐다.
“아, 맞다. 마녀 계파는 제자를 하나만 두죠? 깜빡했네요. 어휴, 진짜 방법이 없나, 이거?”
아이샤의 입술에서 혈색이 사라졌다.
“언제 알았어요? 어떻게?”
“어쩌다 보니까 알게 됐죠. 친한 동료…… 보다는 스승이 낫겠네요. 결국 나구나.”
아이샤는 제 마법사 인생 최대의 비밀을 아무렇지 않게 입에 담는 워커를 짜증스럽게 바라보았다. 마녀 계파의 마법사를 조금도 개의치 않는 마법사라니, 꿈에도 상상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감격스러우면서도 어쩐지 억울했다. 화도 났다.
워커가 오랜만에 눈치를 발휘했다.
“혹시 마녀 계파 얘기를 꺼낸 게 불편해요? 에이, 요새 누가 그런 거 신경 쓴다고 그래요. 다 옛날 일인데.”
“…….”
“사실이 드러난다고 해도 비니타한테 불이익이 가진 않을 거예요. 사정이 어찌됐든 걘 내 제자니까 내가 보호할 거예요. 그러니까 아이샤 씨는 괜히 비니타한테 재산 남길 생각 말고 무사히 살아 돌아오는 거에만 집중…….”
“워커 씨, 되게 재수 없는 거 알아요?”
“네?”
“사람들이 다 당신 같지는 않아요. 당신 같은 사람은 명백한 소수라고요. 내 계파가 알려지면 천금을 줘도 싫다고 할 사람이 수두룩해요.”
워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아이샤는 절반쯤 열린 문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엉망으로 헝클어진 머리칼이 또 뒤집혀서 새둥지가 되었다. 쿵쿵쿵, 심장 뛰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워커 씨, 내가 뛰어내리면 그때 은판을 마력량 표시기에 대고 두드려요.”
워커는 아이샤가 뛰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곧장 은판을 꺼내 표시기를 두드렸다. 은판에 담긴 마력이 쑥 사라진다 싶더니, 표시기의 마력량이 급격히 올라갔다. 그제야 속았음을 알아챈 워커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아이샤!”
“하하하하하하!”
아이샤가 절반쯤 열린 문에 기대어 서서 배꼽을 잡고 웃었다.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위태위태해 보는 사람의 심장은 덜컥 내려앉을 것 같은데 본인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아, 정말이지. 사람이 어쩜 그리 순진하담? 워커 씨, 이 일이 끝나면 셰비언 님에게 도와달라고 해서 조종실 계기판에 보호 마법이라도 좀 걸어놔요. 조종실에 아무나 들이지도 말고요.”
“날 속이다니! 사기꾼!”
“그러게 누가 속으래요? 보호 장치가 하나도 없어서 내가 더 놀랐네.”
속아서 분통터진 사람을 앞에 두고 얄밉게 혀를 내민다. 아이샤는 덤비는 워커를 걷어차 안으로 밀어넣고 정작 자신은 훌쩍 허공으로 몸을 던졌다. 셰비언의 마법이 떨어지는 그녀를 가뿐히 받아냈다.
“돌았나 보지? 감히 용의 싸움에 끼어들게?”
“그런가 보죠. 근데 이럴 때 써먹으려고 날 가르친 거 아닌가요? 그러니 용의 제자라는 명성에 맞는 활약을 해야죠.”
“누가 제자야?”
“어허, 파괴마법도 배우고 회복마법도 배우고 레펙치오 만드는 법도 배웠는데 이만하면 인간 마법사로서 배울 건 다 배운 거죠. 방해는 안 할 테니 걱정 마세요. 저 강철새는 멀쩡히 돌려보내 주시고요.”
“바빠 죽겠는데 요구사항이 많아.”
셰비언은 투덜거리면서도 착실하게 강철새에 보호막을 씌웠다. 샤를레아가 작정하고 후려치지 않는 한 깨지지 않을 보호막이었다. 아이샤가 기수를 돌리는 강철새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 * *
분화구에서 꾸역꾸역 흘러나온 용암은 셰비언의 마법을 뒤집어쓰고 차갑게 식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올라오는 열기는 조금도 가시지 않았으니, 굳었던 용암이 다시 흐물거릴 징조가 보였다.
라비린 일행은 그런 용암을 밟고 전진했다. 부츠가 용암을 밟을 때마다 검은 표면이 깨져 붉은 속살이 드러나고 그 위에 발자국이 찍혔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용암이 부츠와 옷에 진흙처럼 튀었지만 무엇도 태우지 못했다. 달아오른 공기 때문에 눈앞의 풍경이 일렁거리지만 이마와 목덜미에선 땀 한 방울도 흐르지 않았다.
온몸에 두른 화염방어 레펙치오의 위력을 실감하자 사람들의 움직임은 한결 대담해졌다.
분화구에 고인 용암 한가운데에는 마치 빨대를 꽂았던 구멍처럼 뻥 뚫린 구멍이 있었다. 나랍인 용병들은 망설이지도 않고 테두리를 짚고 내려갔다. 던져 버린 밧줄을 아쉬워한 건 라비린과 피올뿐이었다.
잡을 것도, 디딜 곳도 없어 뵈는 암벽을 능숙하게 타고 내려가는 나랍인 용병들의 솜씨는 피올의 감탄을 불러일으켰다.
“다들 대단합니다. 산양도 이만큼 날래지는 못할 텐데……. 아까 나무타기도 그렇고, 나랍의 용병은 다 이런 재주를 갖춰야 하는 겁니까?”
“있으면 좋은 재주죠. 귀한 약초는 그만큼 캐기 힘든 곳에서 자라는 경우가 많아서.”
“이해가 안 가네. 당신들, 도대체 왜 나랍 구석에 처박혀 있는 겁니까? 대형 상선에서 쓸 만한 용병을 얼마나 애타게 구하는지 몰라요? 배에서도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용병이라고 하면 몸값이 몇 배로 뜁니다.”
나랍인 용병들이 웃음을 흘렸다. 마치 멋모르고 떠드는 아이를 보는 듯한 웃음이었다. 그리고 자기들끼리 몇 마디 말을 나누는데, 라비린과 피올은 알아들을 수 없는 나랍어였다.
“뭡니까? 사람 앞에 두고 자기들끼리 수군수군.”
“아, 너무 기분 나빠하지 마세요. 다들 멜브란트어를 알아들을 수는 있어도 말하는 건 서툴러서 그런 거니까. 나만 계속 말하는 이유가 뭐겠어요?”
우습지도 않은 변명이지만 그렇다고 따지기 들기도 어려운 변명이었다. 피식 웃은 나랍인 용병이 담배를 꺼내 물었다. 암벽에 달라붙어 내려가는 와중에도 굳이 담배를 피워야겠다니, 어지간히 담배를 좋아하는 인사였다.
“보티안 씨가 좋은 뜻으로 하는 말인 건 알겠는데…….”
후우, 담배 연기를 뿜어내며 제 뺨을 톡톡 두드린다. 그새 익숙해져 거의 잊고 있던 흰 튤립 문신이 불쑥 도드라졌다.
“돈 버는 게 전부였으면 이런 거 새기지도 않았습니다.”
“…….”
“그리고 나랍 아닌 다른 곳에서 여자 용병을 누가 받아줍니까? 배에서 일하라고요? 그것도 대형 상선에서? 하, 미친년 소리나 안 들으면 다행입니다.”
피올은 그만 입을 다물었다. 현실을 몰랐던 것도 아닌데, 아무래도 로렐라이와 산트렘의 기사에 지나치게 물들었던 모양이었다. 라비린이 피올의 옆구리를 찔렀다.
“이분들은 이미 로렐라이에 고용된 상태인 거 잊었어? 배도 없는 놈이 왜 자꾸 배에서 일을 하란 거야? 데려가지도 못하면서 꼬드기지 마라, 소중한 장기 계약 용병이야.”
어딘지 엄숙하기까지 한 나무람이었다. 나랍인 용병들이 와하하 입을 모아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약속이라도 한 듯 일시에 잦아들었고, 일행은 침묵 속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것에만 집중했다.
하늘은 동그랗게 작아지고 발밑에선 어둠이 아가리를 벌렸다. 그러다 옆 사람 얼굴 윤곽도 알아보기 힘들어졌을 때쯤, 누군가 휴대용으로 나온 작은 마법등을 ‘켰다’.
눈이 부족한 빛에 의지해 제 역할을 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동안, 귀는 점점 예민하게 곤두섰다. 부스러진 돌가루를 밟는 소리, 규칙적으로 내쉬는 숨소리, 침 삼키는 소리, 돌조각이 통로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소리, 얄팍한 돌 벽 너머에서 굳지 않은 용암이 흐르는 소리, 불안이 커지는 소리.
일행은 다시 입을 열었다. 별거 아닌 말들을 떠들었다. 멜브란트어를 잘 못한다는 용병들도 몇 마디 말이나마 끼어들어 말참견을 했다. 화제는 자연스럽게 발톱섬 상공에서 싸우고 있는 용들에게로 옮겨갔다.
“샤를레아가 나랍인 용병 흉내를 내면서 브란젤에 있었다는 건 압니까?”
“들어는 봤습니다. 별로 믿기지는 않습니다만, 아르젠 백작이 마법사로 로렐라이에서 일하고 있는 걸 보면 안 믿기도 어렵고…….”
“제가 직접 봤습니다. 괴물이 나온다는 소문이 무성한 뒷골목을 돌아다니는 게 수상해서 불러 세워본 적이 있거든요. 머리칼은 피처럼 새빨갛고, 눈은 바다처럼 파랗던 게 기억납니다. 로렐라이의 패를 보여주더군요. 누가 로렐라이 아니랄까 봐 별 희한한 사람을 다 고용한다고 욕했었죠.”
낮은 웃음소리가 울렸다. 로렐라이에서 이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은 용 둘을 다 고용했었다고 생각하니, 흰 튤립 문신의 나랍인 용병과 장기 계약을 하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닌 듯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샤를레아는 어때 보였어요? 정말 나랍인 같았습니까?”
“일단 겉으로는 영락없는 나랍인이었죠. 꿀색 피부도 그렇고, 얼굴 윤곽도 그렇고……. 셰비언과 친척이라고 해서 뭐 이렇게 안 닮은 친척이 있나 했습니다.”
“어쨌든 동족이니까 거짓말은 아니네요. 적어도 피 한 방울 정도는 섞여 있겠지요.”
용은 혼자서도 알을 낳아 자손을 만들 수 있다는 걸 생각하면, 셰비언과 샤를레아 사이엔 정말 피 한 방울도 섞여 있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를 알 리 없는 인간들은 당연히 자신들의 기준으로 그들을 재단했다.
“우리만 해도 나랍인과 멜브란트인이지만 똑같은 인간이니까……. 거슬러 올라가면 같은 조상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에이, 설마. 이렇게 다르게 생겼는데요!”
“왜요? 옛날이라고 혼혈이 없었겠습니까? 아이샤 씨만 해도 나랍인인지 멜브란트인인지 구분하기 애매하게 생겼잖습니까.”
“적어도 당신 형제는 나랍과 연관이 없을걸요. 당신들은 남쪽이 아니라 북쪽과 피가 섞인 게 확실해요.”
“누가 형제예요?”
“저한테 형제라곤 여동생 하나밖에 없습니다.”
라비린과 피올이 동시에 질색했다. 그마저 마음에 들지 않아 서로를 보고 눈살을 찌푸리니, 나랍인 용병들이 다 이해한다는 듯 키득거렸다.
그렇게 수다를 얼마나 떨었을까, 그들은 드디어 바닥에 도달했다. 수직에 가까운 암벽에 달라붙어 내려오는 동안 혹사당한 팔다리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누가 그러자고 말을 꺼내지도 않았는데 다들 주저앉아 팔다리를 주무르며 체력을 회복했다. 한결 불안이 가신 덕인지 쉴 새 없이 종알대던 입들도 얌전해졌다.
라비린이 가장 먼저 일어나 제 몫의 마법등을 켰다. 그의 큰 덩치가 충분히 들어가고도 남을 만한 동굴이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있었다.
“계속 갑시다. 통로가 이어져 있어요.”
동굴 탐험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본 적 없는 짐승이나 위험한 독충이 사는 것도 아니고 완만한 경사를 이루는 길은 걷기 어렵지도 않았지만, 문제는 냄새였다. 짙은 유황 냄새가 동굴 전체에 가득했다.
코는 자극에 약한 기관이니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맡지 못해야 하는데, 도무지 그럴 기미가 없었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쉴 때마다 유황 냄새가 켜켜이 쌓여 코 안쪽이 헐어버릴 것 같았다.
“이거, 평범한 유황 냄새가 아닙니다…….”
“당연히 그렇겠죠. 아까부터 팔다리가 무겁고 속이 답답한 게, 꼭 물에 빠진 채로 걷는 기분입니다.”
“그래요? 난 전혀 아닌데. 오히려 가뿐해요. 위에 있을 때보다 활력이 넘치는 것 같습니다.”
물에 빠진 듯한 감각에 힘겨워하는 건 라비린과 피올뿐이었다. 나랍인 용병들은 몸이 점점 가벼워지는 것 같다며 즐거워했다. 이쯤 되니 유황 냄새의 정체를 모를 수가 없다. 동굴 전체에 샤를레아의 마력이 가득 차 있는 것이다. 용의 둥지에 들어왔다는 실감이 났다.
체면 따지지 않고 저릿한 팔을 주무르던 라비린이 쓴웃음을 지었다.
“산트렘의 기사들만 왔으면 큰일 날 뻔했다.”
“……그러게.”
피올은 차마 반박하지 못했다. 팔다리가 몸뚱이에 매달린 짐처럼 느껴지는 것이, 과연 검을 휘둘러야 하는 일이 생겼을 때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 스스로도 장담할 수가 없었다. 나랍인 용병들이 곁에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짐 덩어리 둘, 잘 부탁드립니다.”
“덩치가 너무 큰 짐이라 고이 업어서 간수하지 못하는 점을 용서하세요.”
나랍인 용병들은 라비린의 농담을 가뿐히 받아치며 웃을 수 있을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 하나 그 여유는 오래지 않아 사라지고 말았다. 그들 앞에 무려 네 갈래 길이 나타난 것이다.
“아무래도 일행을 나눠야겠습니다. 일단 빠르고 간결하게 탐색하고 정한 시간 내에 돌아오는 걸로 하죠. 어느 길로 갈지는 그 뒤에 정합시다.”
“괜찮은 발상이에요. 다들 마법등 켜!”
마침 일행은 열 명이었다. 나랍인 용병은 둘씩 짝을 지어 조를 짜고, 짐 덩어리 둘은 억지로 끼워 넣은 사은품처럼 다른 조에 끼워졌다.
“이거야 원, 여왕개미 찾으러 개미굴에 들어가는 기분인걸.”
“진짜 개미가 쏟아지면 어쩌려고 그런 말을 해요? 재수 없게.”
“개미 무서운 줄 모르는 분이네.”
“맞기 전에 닥쳐.”
“산트렘에는 개미 안 삽니까?”
피올은 농담 한 마디 했다가 사방에서 욕을 먹고 입을 다물었다. 멜브란트어로 말하는 게 서툴다던 말은 아무래도 거짓말이 분명했다.
조를 나눈 일행은 일제히 각각 맡은 길로 들어갔다. 폭이 약간 좁아진 것 말고는 이제까지 지났던 동굴과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완만하던 경사가 좀 급해진 것만이 다를 뿐이었다.
하지만 어깨에 짊어진 긴장감의 크기는 조금 전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빠르고 간결하게 탐색하자고 사전에 이야기했음에도, 앞으로 나가는 속도는 지렁이처럼 느렸다. 앞도 뒤도 컴컴한 어둠이라, 괴물의 창자 속을 걷는 듯한 착각이 엄습했다. 평정을 유지하는 게 쉽지 않았다. 더위를 느끼지도 않는데 이마에서 흐른 땀이 턱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그러다 약속했던 시간의 절반을 넘기고 되돌아오던 중, 일행은 낯선 기척을 느꼈다. 고요한 수면에 던져진 돌이 일으키는 파문처럼 묘한 파동이 몸을 스치고 지나간 것이다. 그걸 정말 기척이라고 불러도 좋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느낀 이상 무시하는 건 불가능했다.
열 명의 일행은 거의 동시에 출발점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두 번째 파동이 그들을 휩쓸고 지나갔다. 아까보다 강렬했다.
“방금…….”
“저도 느꼈습니다. 착각은 아닌 것 같군요.”
긴장감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그때, 사방을 경계하며 곤두선 사람들 사이에서 갑자기 피올이 튀어나왔다. 그는 말릴 틈도 없이 지나온 길을 되짚어 뛰어갔다.
“보티안 씨!”
“야!”
다급한 부름이 메아리로 되돌아왔다. 그 메아리가 잦아들 때쯤엔 피올도 돌아왔다. 그것도 한쪽 팔에 조그만 어린애를 끼워든 채로.
양 갈래로 땋아 늘어뜨린 머리칼은 옅은 갈색, 영리해 보이는 눈동자는 예쁜 하늘색, 피부는 뽀얀 우유색, 분해서 앙다문 입술은 어여쁜 붉은색. 뺨 한가득 뿌려진 주근깨가 귀여운 소녀였다.
라비린은 소녀를 한 번에 알아보았다.
“비니타!”
라비린을 발견한 비니타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비니타는 곧장 라비린에게 달려가려고 했지만, 피올이 워낙 단단하게 뒷덜미를 붙들고 있어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 피올은 제자리에서 버둥대는 비니타를 힘으로 눌러 제압했다.
“아는 애야?”
“워커 씨의 제자야. 셰비언이 보증한 꼬마 마법사지. 브란젤에 있어야 할 애가 왜 여기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벨키스 경!”
피올의 손에서 놓여난 비니타가 구르듯이 달려와 라비린에게 달려들었다. 라비린의 허리를 꽉 끌어안고 엉엉 눈물을 쏟는 게, 영락없이 무서운 곳에서 유일하게 안심되는 사람을 만난 아이 그 자체였다.
피올이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언제 낳았어?”
경박한 말투였다. 누가 들어도 놀리는 것이었다. 나랍인 용병이 재빨리 피올의 말을 받았다.
“벨키스 경, 딸에게 기사명을 부르게 시킨 겁니까? 쯧, 아무리 제도 밖에서 낳은 아이라도 그렇지, 너무한 거 아닙니까? 애들에게 부모가 얼마나 중요한데요. 인지했으면 마땅히 잘 돌봐야죠.”
“농담도……!”
“타우레드의 핏줄에서도 마법사가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지 뭐야. 아버지가 알면 엄청 좋아하시겠어.”
라비린을 놀리기 위해서라면, 피올은 마음에도 없는 형제 노릇쯤 기꺼이 할 수 있었다. 비니타를 달래느라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는 라비린의 눈에서 살기가 흘렀다.
“비니타, 이제 적당히 울고 말 좀 할래요? 계속 놀림을 받으면 내 입이 무슨 말을 할지 나도 모르겠거든요.”
“기사가 되어서 딸에게 협박을 하다니!”
“벨키스 경,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건 자식 교육에 좋지 않습니다.”
“형, 근데 애가 좀 크다. 형이 조숙했던 건 알지만 대체 몇 살에 사고를 친 거야?”
“난 보티안 씨 같은 동생은 둔 적 없습니다.”
“이런, 벨키스 경은 형제의 자격으로 보티안 씨의 결혼식 증인이 되었던 게 아니었던 겁니까? 보티안 씨,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끙…….”
주거니 받거니 라비린을 놀리는 솜씨가 아주 대단했다. 그들의 입놀림 속에서 라비린은 어린 나이에 생긴 아이를 책임지지 않고 방치하다 아이가 쓸 만한 마법사가 되자 그제야 거두는 시늉을 한 쓰레기가 되어 있었다. 그뿐인가? 딸린 아이가 있는 걸 숨기고 멀쩡한 처녀인 오드리와 연애하고 약혼까지 하다니 세기의 파렴치한이라는 소리도 들었다.
산들바람 같은 연애는 많이 해 봤어도 진짜 사고는 친 적 없는 라비린이 폭발하기 직전, 계속 그의 옷자락에 머리를 파묻고 있던 비니타가 머리를 쏙 빼냈다. 펑펑 흘리던 눈물을 라비린의 옷에 다 닦아냈는지 얼굴이 아주 말끔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제 아버지는 벨키스 경처럼 잘생기지 않았어요.”
피올도 나랍인 용병도 심지어 라비린까지도 모두 말을 잊었다. 비니타가 눈두덩을 눌러 남은 눈물을 마저 짜냈다.
“저는 비니타 아쥬시예요. 비니타라고 부르시면 돼요. 나랍인 어머니와 멜브란트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고, 닮기는 아버지를 닮았지만 성은 어머니를 따랐어요. 나랍에서 태어났지만 마법사의 재능이 있다고 해서 가족 전체가 멜브란트로 왔고요. 제 스승님은 마법사 워커 크라티우스님과 왕립 기계 연구소장 사하스바티님 두 분이세요.”
딱 부러지는 자기소개였다. 피올과 나랍인 용병을 노려보는 눈매에선 안쓰러워 동정을 불러일으키는 어린애의 그림자를 찾아볼 수 없었다.
“벨키스 경은 사하스바티님의 소개로 절 알게 되셨을 뿐이에요. 아무렴, 제 나이가 몇인데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를까요.”
라비린을 놀리려다 비니타를 모욕한 셈이 된 피올과 나랍인 용병이 머쓱하게 사과의 말을 건넸다. 비니타는 새침하게 턱을 치켜들고 라비린을 향해 눈짓했고, 덕분에 라비린은 기대하지도 않았던 사과를 받았다. 그는 흐뭇하게 웃으며 비니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역시 비니타는 경우가 밝군요. 과연 오드리의 눈에 들 만한 인재예요.”
“레이디 오드리는 다정한 분이시죠. 제게 그분의 기대에 보답할 만한 재능이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피올과 나랍인 용병은 나란히 생각했다. 진짜 딸 아냐? 마침 머리색도 비슷하고, 이목구비도 우기면 닮았다고 해줄 수 있을 법한데. 남자는 나이가 어릴 때도 충분히 씨를 뿌릴 수 있으니까…….
라비린이 그들의 머릿속을 열어볼 수 있었다면 대단히 화를 냈겠으나, 그에겐 그런 재주가 없었고 당장 급한 건 비니타가 어쩌다 이런 곳에 와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비니타는 라비린의 집요한 추궁을 버티지 못하고 기어이 입을 열었지만…….
“오고 싶어서요.”
실망스러운 대답이었다. 라비린은 여전히 미소 짓고 있었지만, 그의 전신에 감돌던 온기는 싸늘하게 식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비니타는 쏟아지는 시선의 압박에 가느다랗게 몸을 떨면서도 꿋꿋하게 자신의 쓸모를 주장했다. 짐덩이로 전락하고 싶지는 않았다.
“저, 저 할 줄 아는 거 많아요. 용의 마력에도 별로 영향 안 받고, 셰비언님에게서 창고마법도 얻어왔어요! 담아온 것도 많아요!”
비니타가 가볍게 손짓하자 허공에 가느다란 틈이 열렸다.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놀란 사람들이 굳어 있는 동안, 비니타가 그 안에 손을 쑥 집어넣었다.
“뭐가 필요하세요? 마법등? 물? 요깃거리? 약?”
“물.”
시험 삼아 대답했던 나랍인 용병은 비니타가 꺼내준 물병을 받고 잠시 숨을 멈췄다. 물병 표면엔 물방울이 맺혀 있었고, 물이 가득 들어 묵직했다.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고 기울이자 얼음처럼 차가운 물이 쏟아져 바닥을 적셨다.
“벨키스 경……. 멜브란트에는 이런 마법사가 흔합니까?”
“그럴 리가 있습니까. 이런, 이런 건……. 비니타, 이게 뭔지 말해주겠어요?”
“이건 셰비언님의 창고예요. 셰비언님께서 써도 좋다고 허락해 주셨어요.”
이 창고마법은 샤를레아가 쓰는 걸 보고 영감을 얻은 셰비언이 새로이 만들어낸 것으로, 비니타는 그저 창고를 여닫을 수 있는 권리를 얻은 것에 불과했다.
로렐라이의 대리인으로 일하며 마법적 지식을 쌓았고 셰비언과 친하게 지냈던 라비린은 금세 사정을 파악했다. 하지만 그가 알기로 셰비언이 만들던 창고마법은 공간을 쓸 수 있어야만 열고 닫을 엄두라도 낼 수 있는 것이었다.
“비니타. 공간을 다룰 수 있나요? 셰비언이 가르쳐 주었습니까?”
“네, 제가 강철새의 비행훈련을 해야 했거든요.”
이야기가 갑자기 강철새로 튀었다. 비니타는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을 의심스럽게 바라보는 것도 모르고 제 모험담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워커가 클로드의 후원 겸 의뢰를 받아 대형 강철새 개발에 전념하는 동안, 비니타의 교육은 온전히 사하스바티의 몫이 되었다. 안 그래도 기계에 대한 비니타의 이해력과 응용력을 높이 사고 있었던 사하스바티는 중간 과정을 죄다 건너뛰고 강철새를 집중해서 가르쳤다.
그리고 강철새의 성공 이후 배포가 커진 워커는 사람들 앞에서 시연을 보이는 데 썼던 강철새를 비니타에게 호쾌하게 내주었다. 자료용, 실습용으로 유용하게 쓰라며.
피올은 그만 혀를 찼다. 소금보다 더 짠 이디케가 멀쩡한 강철새를 그냥 줬을 리가 없었다. 거기에 들어간 로렐라이의 투자금이 대체 얼마이던가.
“워커, 그 미친놈이 진짜……. 그러니까 백날 벌어도 돈이 없지.”
비니타는 피올의 한탄을 귓등으로 흘렸다. 강철새를 떠올린 소녀의 뺨에 불그레하게 혈색이 돌았다.
“저는 마법이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건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 강철새는 진짜 엄청나게 재밌는 거더라고요.”
잘하는 걸 좋아하게 되는 건 인간의 당연한 심리다. 거기에 흥미까지 더해지자 비니타는 사하스바티도 놀랄 정도로 빠른 속도로 지식을 빨아들였다. 마른 땅이 물을 삼키듯이 탐욕스러웠다.
문제는 이론수업이 적당히 궤도에 오른 다음이었다. 비니타는 당연한 수순으로 직접 하늘을 날아보길 원했지만, 스승 사하스바티는 위험하다는 이유로 비행을 엄금했다. 혹시라도 추락해서 어린 나이에 불구라도 되면 어쩌느냐는 무시무시한 협박도 곁들였다.
하지만 비니타는 편법을 쓸 용의가 아주 충만했고, 그만한 행동력도 갖추고 있었다. 그녀는 곧장 셰비언을 찾아갔다.
“셰비언님은 제게 공간을 다루는 법을 가르쳐 주셨고, 거기서 비행훈련을 할 수 있게 도와주셨어요. 비록 창고를 쓸 수 있게 된 건 최근이지만요.”
라비린은 몹시 충격을 받았다. 그 워커조차 공간을 열고 자유자재로 쓸 수 있을 때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는데, 이 작은 소녀는 고작 몇 개월 만에 그와 비슷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하스바티, 이 자식은 천재 마법사를 데리고 왜 기계 따위를 가르치고 있는 거야? 오드리는 왜 그걸 용납하고 있고?’
라비린은 천재의 재능을 진흙탕에 처박은 꼴에 경악했다. 하지만 셰비언의 기준에서 보았을 때, 용의 마력을 짙게 타고난 마법사는 다른 마법은 못해도 공간을 다루는 건 숨 쉬는 것처럼 당연히 할 수 있어야 했다. 그리고 비니타는 그의 기준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그렇게 감탄한 듯한 눈으로 보지 마세요. 저는 용의 마력을 타고난 마법사고 운 좋게 마법의 주인에게 가르침을 받았으니, 그 정도 결과는 당연히 내야죠. 대수로울 것도 없어요.”
자신의 재능에 자신감이 있으면서도 교만하지 않은 태도를 갖춘 꼬마 마법사는 순식간에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 모두의 호감을 샀다.
“본래는 워커 스승님의 부조종사로 대형 강철새에 타려고 했어요. 하지만 단박에 거절당했지 뭐예요. 제 공간에서 충분히 비행해 봤다고 말씀드렸지만 소용없었어요.”
“당연하죠.”
“그래서 몰래 따라붙었어요. 내가 가진 강철새가 있는데 못 갈 것도 없겠다 싶어서요. 혼자 먼 거리를 비행해야 해서 몇 군데 손을 봐야 했지만, 다 잘 작동했어요. 그리 힘들지도 않았고요. 그보다는 발톱섬 상공에 접어들어서 워커 스승님의 눈을 피하는 게 훨씬 힘들었죠.”
대체 무슨 깜냥으로 강철새를 개조했을까? 나이 열셋에 브란젤에서 산트렘으로 가출을 감행한 피올조차 비니타의 무모함엔 혀를 내둘렀다.
“어린 시절의 내가 사고뭉치이긴 했어도 저 정도는 아니었어.”
“그래, 개구리는 올챙이일 적의 기억을 까맣게 잊는다더라. 비니타, 타고 온 강철새는 어디 있죠? 멀쩡하긴 해요? 음, 창고에 넣어뒀다니 다행이에요. 여기까지 혼자 왔으니 돌아가는 것도 혼자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도 되겠지요? 당장 돌아가세요.”
“네에?”
“비니타의 능력과 의지는 충분히 알았어요. 하지만 우린 어린애의 도움이 필요할 정도로 연약하지 않습니다. 돌아가요.”
“전 그냥 어린애가 아니에요!”
라비린은 비니타의 고함을 들은 체 만 체하며 피올에게 눈짓했다.
‘당장 분화구 통로 바닥에 데려다 놔.’
피올이 어깨를 으쓱이고 비니타에게 손을 뻗었다. 비니타는 화들짝 놀라 나랍인 용병의 뒤에 숨었다.
“우린 이미 충분히 지체했어요. 비니타를 보호하느라 전력을 약화시킬 순 없어요. 괜히 떼쓰지 말고 순순히 나와요.”
“전 한 사람 몫을 충분히 할 수 있는 마법사예요!”
“알아요. 하지만 아직은 보호가 필요한 어린애죠.”
비니타는 바늘 찌를 곳도 없어 뵈는 라비린의 냉담함에 치를 떨었다. 처음 만났을 땐 유들유들하고 융통성 있는 인물이라는 인상을 받았었는데, 아무래도 그땐 제 눈이 삐었던 모양이었다. 그녀는 곧장 나랍인 용병의 옷자락을 잡고 매달렸다.
[도와주세요!]
나랍어였다. 오랜만에 듣는 모국어에 나랍인 용병들이 자동으로 반응했다. 비니타는 유창한 나랍어로 떠들어대기 시작했고, 라비린과 피올은 귀머거리 아닌 귀머거리 신세가 됐다. 그리고 조금 뒤, 나랍인 용병들은 죄다 비니타의 편이 되었다.
“비니타가 충분히 한몫을 할 수 있는데 굳이 돌려보낼 이유가 있습니까? 도움을 받죠.”
“제정신입니까? 비니타가 몇 살인지는 알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열넷입니다, 열넷!”
“나랍에서 열넷이면 충분히 자라서 제 몫을 시작할 나이입니다. 비니타는 나랍에서 나고 자란 아이인데 멜브란트의 기준을 적용하는 건 부당하지 않습니까?”
당신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리다는 말에 동의했었잖아? 라비린과 피올은 피를 토할 듯한 심정으로 설득했으나 나랍인 용병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비니타를 자신들 무리 가운데에 넣어두고 보호하기까지 했다.
“비니타는 스스로 결정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마법사이니만큼 이곳이 얼마나 위험한지 모를 리 없는데도 그리 하였으니, 그 판단을 존중해 주는 게 옳습니다.”
“어려서 판단을 그르친 겁니다. 어린애의 잘못을 교정해 주는 거야말로 어른의 할 일입니다. 미숙한 판단을 이용해서 이득을 취하는 건 비겁한 짓입니다.”
나랍인 용병이 씩 웃었다. 어쩐지 스트라스티를 떠올리게 하는 웃음이었다.
“그건 기사의 논리죠. 우린 용병입니다.”
“이…….”
“들어보니 레이디 오드리는 비니타의 생명의 은인이었더군요. 복수를 막을 수 없듯 은혜갚음도 막을 수 없습니다. 생명의 은인을 구하는 일에 감히 미숙함을 따져서는 안 되지요.”
돌처럼 굳은 라비린의 뒤에서 피올이 오만상을 짓고 혀를 찼다.
“세상에, 산트렘의 기사들이나 할 법한 말을 나랍인 용병이 하고 있네.”
“지금은 명예로운 기사의 표본으로 통하는 산트렘의 기사이지만, 오래전엔 용병으로 돈을 벌어 고향을 먹여 살렸다고 들었습니다. 통하는 면이 없잖아 있겠죠.”
“유리한 것만 똑똑 떼다가 갖다 붙이는 말솜씨가 비범하군요. 당신, 정말 용병 맞습니까? 혹시 귀족 출신이라든가 하는 거 아니에요?”
“벨키스 경의 상상력은 제 말솜씨만큼이나 비범하시네요. 감탄했습니다. 물론 현실인식도 그 상상력만큼이나 비범하시겠죠?”
지금 두 형제는 샤를레아의 마력 때문에 평소보다 몸이 무겁고 감각이 둔해진 상태였다. 그럼에도 라비린의 솜씨는 아주 나쁘지 않고 피올의 기량은 나랍인 용병 이상이었지만, 문제는 숫자였다. 다굴 앞에 장사 없는 것은 고금에 통하는 진리다.
두 명의 멜브란트인은 여덟 명의 나랍인에게 어쩔 수 없이 항복했고, 비니타는 정식으로 일행에 합류했다.
비니타는 아주 만족한 듯 생글생글 웃었지만 라비린은 도저히 웃을 마음이 안 났다. 빠끔히 입을 벌린 갈림길 중 어떤 길을 골라야 하는지도 모르는데 멜브란트의 미래를 걸어볼 만한 마법사를 데리고 가야 한다는 게 기가 막혔다. 거짓말 같은 현실이었다.
“멜브란트 마법계를 크게 발전시킬 새싹을 짓밟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드는데…….”
“새싹? 새싹 좋아하네. 비니타는 이미 성목이야. 우린 지금 아름드리나무로 자라야 할 성목에 도끼질을 하고 있는 거라고. 빌어먹을 용병 놈들.”
어째 라비린보다 피올의 짜증이 더 심했다. 멜브란트어를 알아듣는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주절주절 욕을 해댔다. 라비린은 그를 말리지 않았다. 자기 대신 화도 내주고 짜증도 내주고 반감도 받아주는데 막을 이유가 없었다.
나랍인 용병들에게 어화둥둥 안겨 있던 비니타가 고개를 쑥 내밀었다.
“이 미로 같은 통로 어딘가에 계신 레이디 오드리를 찾아가야 하는 거죠? 그런데 어디로 가야 하는지 길을 못 찾고 계시는 거고요.”
라비린은 하늘색 시선을 피하며 답을 피했다. 지금 입을 떼었다간 고운 말이 나올 것 같지 않았다. 웬만하면 비니타와는 대화를 하지 않는 게 좋을 성싶었다.
“저, 레이디 오드리께서 어디에 계신지 알 것 같아요.”
조금 전의 결심은 순식간에 날아갔다. 어떻게? 라고 묻는 라비린의 목소리는 본인이 듣기에도 퍽 다급했다.
“저는 타인의 마력을 감지하고 구분하는 데 몹시 예민하거든요. 그게 셰비언님의 마력이라면 더더욱 그렇고요.”
셰비언을 꼭 닮은 하늘색 눈동자가 영리하게 반짝거렸다.
“그리고 레이디 오드리의 마력은 셰비언님과 아주 비슷하거든요. 이곳엔 화룡의 마력이 가득해서 그런지, 레이디 오드리의 마력이 아주 이질적이고 뚜렷하게 느껴져요. 이 정도면 길 안내를 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 같아요.”
“……기왕 쓸모를 주장할 거면 처음부터 그 얘길 하지 그랬어요? 그럼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을 텐데.”
“그야 당연히 뭔가 대책을 갖추고 있을 줄 알았죠. 설마 하나씩 다 뒤질 생각을 하고 계신 줄 제가 알았겠어요? 세상에, 다시 생각해도 말이 안 돼. 어떻게 용의 둥지에 오르면서 마법사를 한 명도 데리고 오지 않을 수 있죠?”
다른 사람도 아닌, 열네 살 소녀에게 일처리 못한다는 비난을 들은 라비린은 입이 너무 써서 침도 안 넘어갈 지경이었다.
‘노르드 제독 이 개만도 못한 자식……. 산트렘의 기사들이 아니더라도 너는 내가 반드시 지옥에 처박아 버린다.’
본래 마법사 지원은 살론의 몫이었다. 메리디에스에는 살론에서 보내온 마법사들이 충분히 있었다. 발톱섬의 마법진을 지도 없이도 술술 외우고 수십 개의 마법도구를 다뤄도 쓰러지지 않을 만큼 마력이 풍부한 자들이었다.
그런데 빌어먹을 노르드 제독이 살론의 첩자와 내통하면서 일이 틀어졌다. 일정은 다급했고 그 짧은 시간 내에는 살론의 마법사 중 첩자와 끈이 닿은 자를 골라내는 것도, 그렇다고 브란젤에서 새로운 마법사를 보내주기를 기다리는 것도 불가능했다.
마법사가 빠진 덕분에 나랍인 용병 전원이 섬에 들어갈 수 있게 되어 망정이지, 그 정도 이점마저 없었다면 라비린은 배의 마법도구를 관리하는 마법사라도 끌고 왔을지도 몰랐다.
“마법사는 없어도 레펙치오를 비롯해 마법도구는 충분히 챙겨 왔고, 일행 중에는 마력이 특히 부족하다든가 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사용에도 문제가 없……. 잠깐. 비니타, 뜨겁지 않아요? 숨 쉬는 것은 괜찮습니까?”
라비린의 시선을 피해 눈을 굴리던 비니타가 셔츠의 옷자락을 쭉 잡아당겨 목덜미를 드러냈다. 반질반질 윤이 나는 검은 돌이 낡은 가죽 끈에 감겨 여린 목에 매달려 있었다.
“흑요석 레펙치오는 처음 봅니다. 비니타가 만든 건가요?”
“아뇨, 이건 아이샤가 연습 삼아 만들던 레펙치오인데, 마침 화염방어라서…….”
훔쳤다는 얘기였다. 아이샤는 비니타를 아껴 언제든 집에 드나들 수 있도록 했으니 기회는 넘치도록 많았다.
“흑요석으로 만든 거라 내구도는 영 별로지만 그래도 기능은 떨어지지 않으니까 챙겼어요.”
라비린은 레펙치오의 재료로는 보석과 귀금속만이 가능하다는 세간의 상식을 떠올리고 오드리의 장사 수완에 헛웃음을 지었다.
“……준비성이 좋군요.”
흑요석처럼 싸고 흔한 재료로도 레펙치오를 만들 수 있다는 게 알려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라비린은 제가 차고 있던 팔찌 형태의 레펙치오를 풀어 비니타의 손목에 채웠다.
“그 흑요석 레펙치오는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지 마세요. 말하지도 말고.”
라비린의 머릿속을 들여다 볼 수 없는 비니타는 그저 도둑질을 하고 들은 칭찬에 민망해하며 마력 추적을 시작했다.
샤를레아조차 오드리를 셰비언과 헷갈린 적이 있건만, 비니타는 그 둘의 미묘한 차이점을 민감하게 구분했다. 오드리의 마력은 셰비언의 마력처럼 차갑고 투명하면서도 그와는 달리 미묘한 싱그러움을 품고 있었다.
“이쪽이에요.”
어두컴컴한 내리막길을 내려가는 동안 유황 냄새가 점점 지독해졌다. 코가 마비될 것 같은 기분에 다들 미간을 찌푸리건만, 비니타만은 유황 냄새가 짙어질수록 뚜렷하게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오드리의 마력에 정신이 팔려 힘든 줄도 몰랐다.
몇 갈래의 갈림길을 만나든 비니타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길을 골랐다. 조금의 의심도 용납하지 않는 단호함이었다. 라비린 일행은 홀린 듯 앞으로 전진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던 길이 끝나고 거대한 공동이 그들을 맞이했다. 왕궁의 무도회장을 통째로 집어넣을 수 있을 것 같은 넓이보다 인상적인 건, 까마득한 천장 꼭대기에 매달려 빛을 뿜어내는 광원이었다.
“으……. 너무 밝군요.”
나랍인 용병은 눈두덩을 짓누르며 마법등을 껐다. 갑작스럽게 쏟아진 빛에 적응하지 못한 눈이 통증을 호소했다.
“통로에서는 이런 빛이 전혀 보이지 않았는데……. 신기하군요. 보이지 않는 문이라도 달려있어 빛을 차단한 것 같아요.”
“명색이 용의 둥지인데 뭐가 있든 이상하지 않죠. 조심하세요, 침입자를 막을 함정이나 인형이 튀어나올지도 모릅니다.”
진지한 농담이 경직된 분위기를 풀었다. 바짝 굳어 발도 떼지 못하던 사람들은 헛웃음을 흘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일단 눈이 빛에 적응하고 나자 공동의 내부 모습이 눈에 잘 들어왔다.
공동은 어떤 장식도 없이 그냥 빈 공간이었다. 드높은 천장에서 쏟아지는 빛이 어지러운 선이 얽힌 바닥과 벽을 은근하게 밝혔다. 출구처럼 보이는 곳은 반대편에 딱 하나 있었다.
“음, 일단 저기로 가야 할 것 같죠?”
“이상하게 불안합니다. 그래도……. 에이, 아무리 성질 더러운 용이라도 설마 자기 집에 함정 설치해 놓고 살진 않겠죠.”
일행은 불안해하면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처음에는 한 걸음 한 걸음이 조심스러웠지만, 삼분의 일에 해당하는 지점을 지나고도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자 다들 긴장이 풀렸다.
한결 편안해진 그들이 공동의 정중앙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공동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랍인 용병이 넘어지려는 비니타를 잽싸게 낚아채 안아 올렸지만, 지진에 익숙한 그녀도 제자리에 버티고 서 있는 게 고작이었다.
“이거, 지진이 아닙니다!”
“아무래도 여기 둥지의 주인이 미친 나머지 자기 집에도 함정을 파놓고 사나 봅니다.”
실없는 소리를 하며 서로에게 기대어 서서 버티던 사람들은 공동의 바닥과 벽에 어지러이 그어져 있던 선들이 멋대로 움직이는 걸 보았다. 그것들은 비온 뒤에 길에 고인 물웅덩이처럼 바닥 곳곳에 모여들어 문양을 만들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추측하기도 전에 문양 찍힌 바닥이 솟아올랐다. 어떤 것은 천장에 닿을 듯 높이, 어떤 것은 피올의 머리 높이와 엇비슷할 정도로 낮게. 잠깐 사이 높이도 둘레도 제각각인 둘 기둥 수십 개가 공동을 가득 채웠다.
돌기둥의 표면에는 어떤 장인의 작품인지 궁금할 정도로 훌륭한 솜씨의 조각이 양각돼 있었다. 소재는 단 하나, 용이었지만 언뜻 봐도 생김새가 같은 건 하나도 없었다. 거대한 돌기둥은 마치 조각된 용을 가둬놓은 관처럼 보였다.
“가만히 서서 뭐 하는 거예요? 빨리 나가요!”
비니타가 빽 소리를 질렀다. 일행은 엉덩이를 맞은 말처럼 정신없이 달려 공동을 벗어났다. 통로로 뛰어들자마자 눈앞이 확 어두워졌고, 동시에 안도감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 자리에 주저앉아 숨을 골랐다.
누구도 마법등을 켜지도, 입을 떼지도 않았다. 긴장되는 순간마다 억지로 우스갯소리를 짜내던 라비린마저도 말이 없었다. 그저 눈을 감고 거세게 뛰는 심장 소리와 옆 사람이 내쉬는 숨소리를 듣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인 것만 같은 어둠과 침묵이 일행을 짓눌렀다.
용의 둥지, 인간의 상식이 통하지 않는 공간에 들어왔다는 걸 처음으로 실감한 순간은 상상 이상으로 공포스럽고 기이했다.
그 기이한 경험에 짓눌리지 않은 사람은 딱 한 명, 비니타뿐이었다. 비니타는 셰비언의 창고에서 잘 마른 장작을 꺼내 제 앞에 차곡차곡 쌓았다. 안타깝게도 부싯돌은 챙겨두지 않았기에 자신을 끌어안은 나랍인 용병에게서 마법도구를 슬쩍 빌렸다.
불쏘시개 없이 불을 피우는 건 고생스러웠다. 한참이나 숨을 불어넣고서야 장작에 불이 붙었다.
빨갛고 노란 불이 장작을 살라 먹고 너울너울 춤을 추며 회색 연기를 피워 올리자 동상처럼 굳어 있던 사람들이 차례로 정신을 차렸다. 비록 레펙치오를 차고 있어 온기는 느껴지지 않아도 익숙한 모닥불의 형태를 보는 것만으로도 편안해졌다.
“육포라도 한 덩이 있으면 좀 주시면 안 돼요?”
비니타가 부지깽이로 장작을 쏘삭거릴 때마다 탁탁 소리와 함께 새빨간 불티가 화르르 피어올랐다가 사라졌다. 소녀는 춤추는 불길만큼 그림자도 함께 춤추는 얼굴들을 바라보며 배시시 웃었다.
“제가 배가 고파서요…….”
누군가 커다란 육포 한 덩이를 내놓았다. 모닥불과 한바탕 왈츠를 춘 육포가 고소하고 달큰한 냄새를 사방으로 퍼뜨렸다. 여기저기에서 침 넘어가는 소리가 났다.
비니타는 딱 적당하게 말랑해진 육포를 결대로 쭉쭉 찢어 고루 나눠주고 제 입에는 제일 큰 조각을 물었다. 기름지고 짭짤한 맛이 혓바닥에 닿자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짜릿했다. 목구멍을 넘어가는 물이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달았다.
“배도 채웠겠다, 슬슬 일어나죠.”
“……그럽시다. 왔으면 끝을 봐야지.”
모닥불의 불빛, 소리, 냄새, 그리고 한 덩이의 육포가 부린 마법은 강력했다. 조금 전까지 무기력하게 앉아 어둠과 침묵에 짓눌리던 사람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마법등을 켜는 손길들이 단정했다. 차가운 빛줄기가 어두컴컴한 통로를 꿰뚫었다.
“잘했다.”
두껍고 뜨거운 손이 비니타의 머리를 툭, 두드리고 멀어졌다.
비니타는 금세 사라진 온기를 아쉬워하며 자꾸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단속했다. 앞뒤로 자신을 보호하듯 감싸고 움직이는 어른들이 더할 나위 없이 든든했다. 조금 전에 마주쳤던 게 무엇이든, 그리고 무엇이 이 앞에 기다리고 있든, 결국엔 모든 게 잘 풀릴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 * *
뜨거운 햇살, 건조한 공기, 자욱한 먼지와 온종일 시끄러운 벌레. 만탈락의 여름은 딱 이 네 가지로 정의되는 게 틀림없다. 좋은 거라곤 경계심 없이 설렁설렁 다가오는 길고양이뿐인데, 그것도 고작 한 마리밖에 안 된다.
오드리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에 감자를 갈아 붙이고 누워 쉴 새 없이 투덜거렸다. 어린 딸의 얼굴에 느긋하게 부채질을 해주던 밀리나가 숨죽여 웃었다.
“그렇게 싫어하면서 왜 매번 따라오는 거니?”
“싫어하지 않아요. 제가 어떻게 만탈락을 싫어하겠어요?”
“왜? 싫어할 수도 있지. 네가 만탈락에서 태어나 자란 것도 아닌데.”
오드리는 멍하니 밀리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밀리나가 자신에게 왜 이런 걸 묻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것처럼.
“……어머니가 만탈락을 사랑하잖아요.”
“나야 만탈락이 고향이니 그렇지. 태어나 자란 곳을 무작정 싫어하는 사람이 있겠니?”
“어머니가 만탈락을 사랑하니까 저도 만탈락이 좋아요.”
“쬐끄만 녀석이 입 발린 소리는 참 잘해. 올 때마다 투덜거리기 바쁘면서 그렇게 말한다고 내가 기뻐하겠니? 이런, 움직이지 말렴. 기껏 발라놓은 감자가 흘러내리잖아.”
막 일어나려던 오드리는 도로 얌전한 인형이 되었다. 하긴 하녀를 시키지 않고 손수 부채질을 해주는 밀리나의 정성을 생각하면 아무리 답답해도 참아야 했다.
“얼굴 같은 거, 좀 까매져도 괜찮은데.”
“큰일 날 말을 하는구나. 락시 부인이 잔소리할 게 무섭지도 않니?”
“뭐 어때요? 남부에서 가무잡잡한 피부는 태양의 축복이라고 하잖아요. 어머니도 예전에는…….”
“그거야 결혼 전 얘기지. 계속 남부에서 지낼 게 아니라면 아무래도 뽀얀 게 좋아. 브란젤 사람들은 흰 피부를 좋아하잖니.”
오드리가 입을 삐죽거렸다. 밀리나는 불평을 가득 담은 입술을 톡톡 두드려 집어넣었다.
“세상엔 어쩔 수 없는 것도 있는 법이란다.”
“제가 남자애가 아니라 여자애로 태어난 것처럼 말이죠? 역시 남자애로 태어났어야 했어요. 그러면 얼굴 좀 익었다고 이렇게 누워 있는 일은 없었을 텐데 말이에요.”
“그러면 내가 이렇게 손수 부채질을 해주는 일도 없었겠지.”
밀리나의 어조가 엄격해졌다. 또박또박 말대꾸를 하던 오드리는 불길한 징조를 느끼고 재빨리 눈을 내리깔았다.
“어쩔 수 없는 일에 미련을 두지 말고, 그때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 하고 지난 일을 후회하지 말고…….”
“지금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한다. 맞죠?”
눈만 내리깔면 뭐 하나, 자주 듣던 훈계의 뒷말을 잡아채는 태도는 얌전함과 거리가 멀었다. 밀리나가 심술궂은 표정으로 오드리의 귀를 쭉 잡아당겼다.
“알면서 그런 말을 했니? 혼나야겠네.”
“아야! 아야야!”
오드리가 엄살을 떨며 몸을 비틀었다. 장난기가 도진 밀리나가 오드리의 옆구리를 간질이기 시작했다. 오드리는 온몸을 떨며 크게 웃었고, 덕분에 얼굴에 발랐던 감자가 죄다 흘러내려 옷이 엉망진창이 됐다.
“락시 부인이 화내겠네.”
“이게 다 어머니 때문이라고 이를 거예요.”
“어머……. 내가 락시 부인에게 혼나는 걸 보고 싶은 거니? 이디케가 잘못해서 혼날 땐 온 힘을 다해서 감싸주더니 어째 나한테는 가차 없구나.”
락시 부인은 오드리의 유모인 동시에 밀리나의 젖형제였다. 가까운 혈족이 없는 밀리나에게 잔소리를 퍼부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이디케는 아이고 어머니는 어른이잖아요. 똑같이 취급하는 건 불공평해요.”
“이런, 부모보다 친구가 좋을 나이가 되려면 아직 몇 년 더 남은 줄 알았는데, 언제 이렇게 컸니? 서운하기도 해라!”
밀리나가 우는 소리를 하며 손수건으로 오드리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그러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돌연 오드리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드러누워 작은 몸을 꼭 끌어안았다. 친밀한 접촉에 놀란 오드리가 품에서 벗어나려 바르작대도 놓아주지 않았다.
어린 오드리는 금세 지쳐 늘어져 한탄했다.
“어머니,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힘이 좋아지셨어요? 역시 만탈락의 뜨거운 날씨가 어머니의 회복에 좋은 영향을 끼치나 봐요,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네요.”
“오드리, 넌 날 병자 취급하는 걸 언제쯤에야 그만둘 거니? 네 걱정을 듣고 있으면 내가 아주 오래 앓다가 이제야 자리를 털고 일어난 사람이거나, 죽을 날 받아놓고 오늘내일 하는 노인이라도 되는 것 같아.”
“그야…….”
당연하지 않나요, 대꾸하려 고개를 들었던 오드리는 그만 말문이 막혀 입을 다물었다. 밀리나는 오드리를 보며 웃고 있었는데, 살짝 그을린 피부에 뺨에는 빨갛게 혈색이 돌아 더할 나위 없이 건강하고 활기차 보였다. 어느 모로 보나 병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오드리, 귀엽고 사랑스러운 내 딸.”
따뜻한 입술이 이마에 내려앉았다. 오드리는 숨이 멎을 듯한 기분으로 밀리나의 키스를 받았다. 계속 눈을 마주하고 있을 자신이 없어 밀리나의 품에 머리를 들이밀었다. 꽉 안긴 몸에 쏟아지는 체온이 만탈락의 햇살보다 뜨거웠다.
“선대 랄리우스 후작께서는 내게 늘 말씀하셨지. ‘꼭 너 같은 딸 낳아서 고생 좀 해 봐라!’ 그 말씀 그대로 나와 꼭 닮은 딸을 낳았는데, 나는 어째 조금도 수고스럽지가 않구나.”
“…….”
“얼굴이 타는 건 안 돼. 큰 말을 타는 것도 아직은 안 돼. 내의만 입고 강에 뛰어들어 첨벙대는 것도 안 돼. 나무 타기도 안 돼. 개구멍 지도를 만들겠다고 시장 뒷골목을 돌아다니는 것도 안 돼. 야밤에 귀신 분장을 하고 하녀들을 놀래어도 안 되고…….”
만탈락에서 오드리가 저질렀던 장난과 불가피하게 맞이했던 사고들이 연달아 언급됐다. 설마 밀리나가 전부 알고 있을 거란 생각은 꿈에도 못하고 있었던 오드리의 손발이 바짝 오므라들었다. 열 살 어린애가 시도한 입막음은 서글프리만치 힘이 없었다.
“어, 어머니…….”
“마저 들어.”
조금도 수고스럽지 않다더니 밀리나의 안 돼 목록은 그 뒤로도 한참이나 이어졌다. 듣던 오드리의 목이 점점 줄어들어 이러다 사라지는 게 아닐까 싶어졌을 때쯤, 밀리나가 뜻밖의 말을 속삭였다.
“그 외에는 다 괜찮아. 하고 싶은 대로 하렴.”
“네?”
“여긴 만탈락이야. 왕실에 조세권을 빼앗기지 않은 몇 안 되는 도시고, 넌 이 도시의 주인이 될 사람이다. 나이가 차지 않았다고 사소한 자유조차 누릴 수 없다는 건 말도 안 되지.”
“하지만, 방금은…….”
“한 번 해 본 걸 두 번 할 필요는 없는 거잖니? 자유엔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잊지 말고 조심히 즐겨야 해.”
밀리나는 오드리의 등을 차분히 쓸었다. 잔뜩 움츠러들었던 오드리의 등이 서서히 펴졌다. 이만하면 충분하다 싶어져 그만 일어나려는데, 오드리가 그녀의 옷자락을 붙들고 늘어졌다. 보기 드문 응석이었다.
“왜? 뭔가 어려운 부탁이라도 하려고?”
“그게 아니라…….”
오드리의 목소리는 개미처럼 작았고, 데굴데굴 굴리는 눈동자는 눈물에 젖은 듯 촉촉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럴까 밀리나는 바짝 긴장했지만, 질문은 생각보다 싱거웠다.
“아무리 깨기 싫은 꿈이라도 거기에 사로잡히면 안 되는 거겠죠?”
“당연한 말을 하는구나. 꿈은 꿈일 뿐이야.”
“아무리 긴 꿈이어도 때가 되면 반드시 깨어나야 하고요?”
“그렇지. 그런 건 왜 묻니? 요새 꿈자리가 뒤숭숭하기라도 해? 혹시 악몽을 꾸더라도 너무 무서워하지 말렴. 보통은 꿈인 걸 알자마자 바로 깨기 마련이야.”
오드리가 벌떡 일어났다. 어딘지 아련하기까지 하던 좀 전의 분위기는 깨끗하게 사라진 채였다.
“그러게요. 뭐든 해도 된다는 어머니 말씀이 하도 꿈같아서 깨면 어쩌지 걱정했는데, 안 깨는 거 보니까 꿈은 아닌 모양이에요.”
“요 녀석이 날 놀려?”
아야! 밀리나에게 꿀밤을 맞은 오드리가 이마를 붙들고 과장되게 아픈 시늉을 했다.
“뭐든 해도 된다니,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어? 안 된다고 늘어놓은 것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건 다 없던 것처럼……! 오드리! 지금 도망가는 거니!”
“옷이 더러워졌으니까 갈아입고 올게요!”
오드리는 밀리나를 피해 후다닥 방을 빠져나왔다. 복도로 나오자마자 뜨거운 공기가 훅 밀려들었다. 머리가 핑 돌았다.
그녀는 쉽게 눈에 띄지 않는 복도 구석에 주저앉아 숨을 참았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숨이 모자란 몸뚱이가 툭툭 경련할 때까지 입과 코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그러다 더 참지 못하고 공기를 들이마시자 코와 목 안쪽이 따끔따끔하고 비릿한 피 냄새가 났다. 쿵쿵 뛰는 심장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가슴이 뻐근하고 아팠다.
“이게 꿈이면……. 진짜 너무한 악몽인 거야.”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깨지 않는데, 그럼 이쪽이 현실인 거 아닐까? 용과 괴물이 튀어나온 쪽이 꿈일 수도 있는 거잖아. 안 그래? 신화시대는 오래전에 끝났단 말이야.
열 살 먹은 오드리는 단풍잎처럼 자그마한 제 손을 가만히 바라보다 그만 그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머릿속이 너무 뒤죽박죽이라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 * *
짧은 읊조림, 그리고 의미를 알 수 없는 손짓. 이것만으로 아름드리나무에 벼락이 떨어졌다. 어디 시골마을에 있었으면 마을의 자랑이 되었을 법한 나무는 거대한 모닥불이 되어 활활 타올랐다.
“대단합니다. 우리가 저 나무를 베어서 처리하려고 들었으면 한참이나 걸렸을 텐데……. 아이샤 씨 덕분에 금세 끝내는군요.”
스트라스티는 이 기적적인 마법을 만들어낸 마법사, 아이샤를 향해 솔직하게 찬탄했다. 그녀를 비롯해 산트렘의 기사들 전부가 브란젤에서 대포의 시연을 보았을 때보다 훨씬 유화적인 태도로 아이샤를 대했다. 당연했다.
대포는 조만간 전장의 주역이 되어 기사의 설 자리를 빼앗겠지만, 공격마법이 전장에 등장할 일은 없을 테니까.
아이샤만 해도 눈 밑 그늘이 한층 검어진 데다 안색이 창백해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인상이었다.
“아이샤 씨, 버틸 수 있겠습니까?”
“못 버틸 건 또 뭐겠어요.”
아이샤의 목소리는 결코 작지 않았고 발음도 또렷했다. 주변을 살피는 눈은 여전히 예리했고 걸음을 옮기는 다리에도 힘이 있었다. 그게 정말 멀쩡하다는 증거가 될 수 있을지는 본인만 알 테지만, 일단 조금 전의 인상을 지워 버리기엔 충분했다.
“파괴마법은 내 적성에 아주 딱 맞는 거라서 몇 번 쓴 걸로는 지치지도 않아요.”
“하지만 안색이…….”
“안색만 그런 거니까 그리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보다 이렇게 여유를 부려서야 쓰겠어요? 빨리 다음 위치로 가죠.”
아이샤는 조급한 마음을 감추지 않고 드러냈다. 주변을 지키는 기사들을 이끌기라도 하려는 듯 앞으로 나섰다.
조금 전까지 아이샤는 셰비언과 함께 샤를레아를 상대하고 있었다. 팽팽하던 균형은 아이샤라는 변수 하나가 끼어든 것만으로도 급격히 기울었고, 셰비언은 금세 확연한 우위를 점했다.
‘마법진부터 깨뜨려야 돼.’
우위를 점했으니 확실히 밀어붙여 샤를레아를 죽일 줄 알았는데, 셰비언은 마법진부터 깨뜨리라며 아이샤를 산트렘의 기사들에게 보냈다. 이유를 짐작하기 힘든 처사였다. 마법진 파괴가 아무리 중요한들 그게 샤를레아를 완전히 제압할 기회를 스스로 놓아버릴 정도로 중요했던가?
그러나 아무리 궁금해도 날개가 돋은 것도 아닌데 하늘의 전장에 다시 끼어들 방법은 없었다. 아이샤는 빨리 마법진을 깨고 셰비언의 속내를 듣고 싶어 몸이 달았다.
“실례합니다.”
기척도 내지 않고 다가온 기사가 아이샤를 휙 들어 등에 업었다. 아이샤는 깜짝 놀라 목부터 끌어안고 나서야 뒤늦은 부끄러움이 밀려와 얼굴을 붉혔다.
“이, 이게 무슨……!”
“부디 무례를 용서하시길. 다급한 상황인지라 이것저것 가릴 수가 없군요.”
산트렘의 기사들은 그야말로 날듯이 달렸다. 아이샤가 효율을 따져 짚어준 다음 목적지를 향해서 거침없이 바위를 뛰어넘고 개울을 건넜다. 덕분에 아이샤는 강철새를 타지 않고도 멀미를 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우욱……. 욱…….”
“아이샤 씨, 토하면 안 됩니다. 안 돼요!”
그들은 금세 다음 위치에 도달했지만, 아이샤가 또 파괴마법을 쓰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스트라스티는 아이샤의 안색이 다 죽은 송장 꼴인 이유는 마법이 아니라 멀미 때문인 게 틀림없다고 확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