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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5. 발톱섬 (48/62)

chapter 45. 발톱섬

「……마법도구의 한계를 깨달은 마법사들이 새로이 개척한 분야가 바로 마법진이다. 비마법의 역할을 마법진으로 대신하고 그 위에 다른 마법을 불어넣겠다는 획기적인 발상은 마법의 사용범위를 크게 늘리는 데에 성공했다. 하지만 익히기가 지극히 까다로운 데다 일반적인 마법도구의 배는 되는 마력 사용량이 문제가 되어……. - 마법진의 활용 中」

새파란 하늘에 새하얀 용이 날개를 펴고 떠 있었다. 거대한 날개를 펼치고 작은 섬의 하늘을 맴돌았다. 구름이라도 있었으면 용의 자취가 남았을 텐데, 햇살로 매끈하게 다져진 하늘엔 아무 자국도 남지 않았다.

대신 땅에 남은 그림자가 발톱섬에 오른 이들을 스치고 지나갔다. 사람 잡아먹는 마법진을 구성하는 샘에 돌멩이를 쏟아 붓던 라비린은 잠시 손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셰비언이 계속 혼자서만 하늘을 맴맴 도는 게 어쩐지 불길했다. 발톱섬에 상륙한 지 시간이 좀 된 것 같은데 이상하게 방해가 없었다. 까닭 없는 불안을 느끼는 건 그뿐만이 아닌 듯, 스트라스티의 독촉이 심해졌다.

“서둘러라! 빨리 치워야 해!”

기사들의 움직임이 더욱 민첩해졌다. 라비린 역시 하늘을 보고 있을 여유가 싹 사라졌다. 땀이 후드득 떨어졌다.

하지만 작업은 좀처럼 속도가 나지 않았다. 일단 기사들이 바위를 뽑고 샘을 메우는 막일에 익숙하지 않았을뿐더러, 발톱섬의 짐승들은 이상하리만치 사납고 호전적이라 인간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건 들짐승과 날짐승 가리지 않고 똑같았다.

“하! 빌어먹을 짐승새끼!”

나랍인 용병은 뒤에서 달려든 짐승의 목덜미에 단검을 쑤셔 넣고 욕을 퍼부었다. 목덜미에서 피를 흘리며 바닥에 드러누운 짐승은 무려 표범이었다. 야행성 짐승이 해가 이리 쨍쨍한 한낮에 튀어나와 덤벼든 것이다.

야생짐승에 익숙한 나랍인 용병들 사이에 뭐라 형용하기 힘든 불안감이 퍼져나갔다. 표범을 잡은 나랍인 용병이 아직 살아 헐떡대는 표범의 눈꺼풀을 뒤집고 이빨을 확인했다. 잘 먹고 잘 자란 성체였다.

나랍인 용병들이 머리를 맞대고 수군거렸다. 스트라스티가 보기엔 일손도 안 보태고 뭐 하나 싶은 작태였다. 그녀가 이유를 물으려는데, 돌연 나랍인 용병 중 한 명이 고개를 빼고 소리를 질렀다.

“기사대장님! 짐승 쫓는 약초를 태우는 게 좋겠습니다! 반 묶음만 태워도 적어도 삼십여 분은 멀쩡할 겁니다!”

“안 돼. 그거 쓰면 감각이 둔해져.”

“니미, 감각이고 나발이고 둥지 찾기도 전에 마법진 깨다 다 죽습니다! 여기 짐승들이 죄다 미쳐서 이렇게 덤벼대는데……!”

발밑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악에 받쳐 소리를 질러대던 나랍인 용병들이 흠칫 놀라 입을 다물었다. 등에서 수증기가 오르도록 움직이던 산트렘의 기사들도 일제히 움직임을 멈췄다. 얇은 얼음판에 새하얀 금이 퍼지는 걸 보는 듯한 긴장감이 그들의 목과 어깨를 굳혔다. 누군가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발톱섬, 활화산…….”

그 순간, 땅이 와르르 흔들렸다. 기껏 파두었던 구덩이에 흙이 쓸려 들어가고 샘을 메웠던 돌멩이는 날개 돋친 듯 뛰쳐나갔다. 뿌리 얕은 나무들이 넘어지며 웅크린 사람들의 등을 후려치는 가운데, 둥지 잃은 새들이 비명을 지르며 일제히 날아올랐다.

흥분한 스트라스티가 몸을 일으켜 화산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폭음도 없고 날리는 화산재도 없건만, 머리가 뭉툭한 산꼭대기에서 붉은 용암이 흘러넘치는 게 뚜렷하게 보였다. 그 속에서 기어 나온 붉은 용이 날개를 펴는 것까지도.

“나왔다!”

스트라스티의 목소리는 환희에 들떠 있었다. 그러나 덩달아 고개를 들고 화산을 확인한 산트렘의 기사들은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설마, 용암이 흘러넘치는 저 산꼭대기가 둥지의 입구인 건가?

셰비언은 마구 날뛰고 싶은 마음을 다독이며 마력을 섬세하게 조정했다. 발톱섬에는 샤를레아의 둥지로 들어갈 인간들이 있었고, 그들은 용의 마력을 견디지 못했다. 나름 방비를 해주긴 했지만 샤를레아의 마력을 견디는 것만으로도 힘겨울 게 분명했다.

꼬물꼬물 느리게 움직이는 인간들의 반대편에서 연달아 마법진을 파괴하던 셰비언은 샤를레아의 움직임이 없다는 것을 이상하게 여겼다. 섬을 보호하듯 둘러싼 마력이 징그러울 정도로 촘촘한 걸 보면 자신이 근처에 접근하자마자 알아챘을 게 분명한데, 마법진을 깨면서 도발해도 좀처럼 반응이 없다. 마력의 혈기왕성한 움직임이 눈속임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잠잠했다.

‘설마, 죽었나?’

셰비언은 잠시 희망적인 관측을 했다가 금세 머릿속에서 그 생각을 지웠다. 심장 반쪽을 떼어먹히고도 안 죽고 버텼던 샤를레아다. 반지의 방해 정도로 어떻게 될 용이 아니었다. 그녀가 그렇게 쉬웠으면 봉인구에 가두는 차선책을 궁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돌연 짜증이 솟구쳤다. 셰비언은 매끄럽게 반짝이는 마법망을 그러쥐고 크게 흔들었다. 섬에 살던 짐승들, 용의 마력에 적응하고 살던 짐승들이 비명을 질러대고 난폭하게 날뛰었지만 그는 알지 못했다. 큰 짐승의 행방을 찾아내길 기대했거늘 그러지 못해 화가 날 뿐이었다.

“샤를레아! 당장 나와!”

어그러진 마법망에 대고 소리쳐 불렀다. 몇 번이고, 계속해서. 인간은 듣지 못하더라도 샤를레아는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깊은 잠에 빠져 있더라도 반드시 들릴 것이다. 그녀는 마법종족인 용족이니까.

“당장 나오지 않으면, 다나의 무덤을 파헤치겠어.”

꽉 움켜쥐고 있던 마법망이 파르르 떨렸다. 너무나 미약해서 발신원을 찾아낼 수는 없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셰비언의 기분은 아까보다 퍽 나아졌다. 다른 건 몰라도 다나를 언급하면 반응이 있을 줄 알았다.

“살은 예전에 다 짓물러 썩고 남은 건 백골뿐이겠지만, 그거라도 끄집어내 가루를 내면 내 속이 조금이나마 풀리겠지.”

발톱섬을 둘러싼 바다가 거세게 출렁거렸다. 안 그래도 험하고 난폭해서 고기잡이배는 물론이고 대형 무역선도 다니지 않는 해역인데, 태풍 한 자락 없는 지금에 해일이라도 일어나려는 듯 파도가 심상치 않았다.

산트렘의 기사들과 나랍인 용병을 실어 나르고 해안가에 정박해 있던 배들이 우르르 휘청거렸다. 배를 지키던 선원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배를 수습하려 애쓰고, 멀리서 대기하던 멜브란트 해군들도 일제히 동요했다.

하지만 셰비언의 눈에 그런 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악담의 수위를 한층 높였다.

“그 뼛가루를 마구간에 뿌리고 말 오줌을 받게 할 거야. 그러다 눈뜨고 못 봐줄 정도로 더러워지면 짚더미와 함께 태워 버릴 거고. 냄새가 심해서 모기 쫓는 데에도 못 쓰겠지만, 타고 난 재를 밭에 뿌리면 그나마 작물이 자라는 데 손톱만 한 도움이 되겠지.”

마법망이 거칠게 흔들렸다. 발톱섬 중앙에 자리한 화산이 꿈틀거리며 용암을 쏟아냈다. 용암과 함께 고개를 내민 붉은 용의 머리통을 확인한 셰비언의 뾰족한 동공이 하얗게 변했다.

“셰비언……. 셰비언!”

“드디어 기어 나오는구나!”

“죽여 버리겠어!”

샤를레아가 산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그녀의 발길질에 산모퉁이가 갈라지며 용암이 왈칵 쏟아졌다.

셰비언은 홱 몸을 뒤집어 샤를레아를 피하곤 산꼭대기에 마법을 쏟아 부었다. 나무와 흙을 집어삼키며 타오르던 용암이 순식간에 식어 검은 돌멩이가 되었다. 흰 수증기가 안개처럼 피어올라 산등성이를 둘러쌌다.

“한참 전에 죽은 시체 가지고 분풀이 좀 하겠다는데, 그게 뭐 어때서 그렇게 흥분해?”

“의무도 모르고 염치도 모르는 자식아! 죽은 자를 모욕하지 마!”

“모욕? 죽었으면 끝이지, 무슨 모욕을 따져? 하긴, 그러니까 네가 아직도 과거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이 모양 이 꼴인 거겠지! 죽은 알을 깨뜨리질 못하고 싸고돌다가 썩혔던 게 몇 번이더라?”

샤를레아가 분노에 차 울부짖었다. 셰비언은 활짝 날개를 펴고 연달아 대엿 개나 되는 마법을 펼쳤다. 금빛 마법 수식들이 사슬의 형상을 띠고 일부는 샤를레아에게, 그리고 일부는 발톱섬의 어딘가를 향해 떨어졌다.

“이 빌어먹을 애송이가!”

날아드는 마법을 앞발로 잡아 부서뜨리고 입으로 물어 깨뜨린 샤를레아가 셰비언을 향해 달려들었다. 부상에서 완벽하게 회복한 셰비언은 샤를레아의 이빨과 발톱을 피해 현란하게 비행하면서도 끊임없이 마법을 쏘아 보냈다. 조각난 마법들이 우박처럼 떨어져도 개의치 않았다.

두 용은 하늘을 전장 삼아 빙글빙글 돌며 싸웠다. 셰비언은 수십 개의 마법을 구사했고, 그때마다 샤를레아는 몸으로 부딪쳐 깨뜨리거나 그냥 견뎠다. 샤를레아의 비늘 곳곳에 금이 가고 피가 고였다.

“셰비언, 셰비언! 잘난 애인이 어찌 될까 무서워서 날 제대로 공격하지도 못하네. 이럴 줄 알았어!”

“오드리를 내놔. 그럼 조용히 물러가 주지.”

“웃기시네! 남의 둥지에 찾아와서 이만큼 휘저어놓고, 원하는 걸 내놓으면 조용히 물러가겠다고?”

“그것만으로도 많이 봐준 거지. 적어도 목숨은 살려주겠다는 거잖아?”

“약점이 있는 쪽이 지는 거야. 네 심장은 내게 있는데, 어디서 목숨 운운이야!”

쉴 새 없이 날아들던 마법이 잠시나마 멈춰서니, 샤를레아의 눈이 희번득 빛났다. 그녀는 셰비언의 마법을 두려워 않고 덤벼들었다. 과연 당장 죽일 듯 달려들던 마법들의 세기가 절반으로 꺾여 있었다.

비늘 몇 개쯤이야, 아끼지 않고 내어주지.

두 용의 간격이 확 줄어들었다. 셰비언이 황급히 거리를 벌리려 시도했지만, 샤를레아 쪽이 조금 더 빨랐다. 셰비언의 꼬리에 깊은 자상이 생겼다. 새하얀 몸뚱이에 벌건 피가 번졌다.

“마법의 주인이니 뭐니 해도 넌 애송이야. 이 어르신이 친히 애송이에게 가르침을 내려주지!”

“어르신 좋아하네, 시대도 읽지 못하는 노망난 늙은이가 주제를 알아야지! 내가 그때처럼 널 봐줄 줄 알아?”

“입만 살아서! 봐줄 수 있으면 봐줘봐라! 네 옆구리를 누가 갈랐는지 벌써 잊은 건 아니겠지?”

셰비언의 흰 동공에서 금빛이 번뜩였다 사라졌다. 그 순간, 샤를레아의 발톱에 묻어 있던 셰비언의 피가 날카로운 창의 형태를 갖추고 그녀의 발을 헤집었다. 창이 박혀 들어간 상처는 순식간에 얼어붙어 피 한 방울 떨어지지 않았지만, 연약한 살점을 파고드는 얼음조각이 안기는 통증은 샤를레아에게서 끔찍한 비명을 끌어냈다.

“멍청한 샤를레아, 네가 쓰는 수법은 나도 쓸 수 있다는 걸 알아야지. 피로 쓰는 마법은 기본 중의 기본이라고!”

셰비언이 제 꼬리를 타고 흐르는 피를 샤를레아를 향해 흩뿌렸다.

샤를레아는 황급히 뒤로 물러나 피를 피했다. 혹여 눈이나 목덜미에 닿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그렇게 몇 번이고 뒤로 밀린 뒤에야 셰비언이 히죽히죽 웃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비늘이 죄다 일어나는 듯 소름이 끼쳤다.

샤를레아가 쉬이 덤벼들지 못하고 숨을 고른 잠깐 사이, 셰비언을 감싸는 방어마법이 서너 겹이나 더 생겨났다. 이제 조금 전 같은 요행은 바랄 수도 없게 되었다. 셰비언이 삐죽삐죽 비아냥댔다.

“내 옆구리 가른 게 누군지 그걸 어떻게 잊겠어. 하지만 샤를레아, 너도 네 심장 절반을 뽑아낸 게 누군지 잊으면 안 되지.”

셰비언이 오드리를 구하러 올 때까지 걸린 일곱 달은, 인간들이 제몫을 하길 기다린 시간이기도 하지만 그가 부상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위한 시간이기도 했다. 이제까지 셰비언은 샤를레아와 몇 번이고 맞붙었지만, 지금처럼 몸 상태가 완벽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셰비언이 오만하기 짝이 없는 어조로 샤를레아를 도발했다.

“솔직히, 그때 네가 기습한 것만 아니었어도 옆구리 따위는 갈라지지도 않았어.”

“흥, 나는 그때 마법을 빼앗긴 걸로 모자라 네가 만든 방어 마법을 몸으로 깨고 들어가느라 부상을 입고 시작했었어. 그것만 아니었어도 내가 너 따위에게 심장 반쪽을 잃었을까!”

“그럼 오늘, 지금 이 순간부터 2차전을 시작해 볼까?”

“오드리는 내가 갖고 있다는 걸 또 잊은 모양이지? 넌 날 못 죽여.”

샤를레아가 꼬리를 휘둘러 등 뒤로 접근하던 마법을 모조리 깨뜨렸다. 셰비언이 아쉬워하는 기색을 감추지도 않고 대꾸했다.

“튼튼하기도 하지. 분이 풀릴 때까지 팰 수 있겠어.”

“그런 꿈은 죽어서 꾸도록 해!”

샤를레아가 제 손으로 상처를 헤집어 피를 내곤 그 피로 셰비언의 방어마법을 깨뜨렸다. 한데 당연히 물러나 몸을 아끼며 마법 위주로 싸울 줄 알았던 셰비언이 오히려 샤를레아에게 적극적으로 덤벼드니, 두 용은 뒤엉켜 싸우다 순식간에 피투성이가 되었다.

그들이 흘린 피가 마치 비라도 되는 것처럼 땅으로 떨어졌다.

* * *

나랍에는 활동 중인 활화산이 많았다. 화산에 익숙한 나랍인 용병들은 산트렘의 기사들보다 훨씬 예민하게 반응했다. 어느새 주변을 자욱하게 메운 유황 냄새를 느낀 것도 그들이 먼저였다.

때때로 무지는 용기의 원천이 된다. 스트라스티는 나랍인 용병들이 드러낸 불안감과 공포를 산트렘의 기사들에게 전염시키고 싶지 않았다.

“원한다면 배로 돌아가도 된다. 기다리지 않고 철수해도 상관없다.”

“돌아가도 된다고요?”

“어차피 너희는 용병이지 군인이 아니다. 굳이 목숨을 걸 필요는 없어. 로렐라이 쪽에는 내가 좋게 말해주겠다.”

스트라스티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린 것처럼 화산 꼭대기에서 붉은 용이 뛰쳐나왔다. 용이 날아오르며 지지대로 쓴 분화구 일부가 무너지면서 용암이 왈칵 쏟아졌다. 흘러내린 용암에 닿은 나무들이 연기를 무럭무럭 피워 올리며 타들어갔다.

숲에 숨어 있던 짐승들이 놀라 날뛰고 새들이 비명을 지르며 나는 가운데, 인간들 사이에선 작은 속삭임마저 사라졌다. 스트라스티가 어깨를 으쓱이고 덧붙였다.

“……음, 물론 여기서 살아 돌아가야 해줄 수 있겠지만.”

뒤에 붙인 말 때문에 앞의 말까지 농담처럼 들리긴 해도, 무려 산트렘의 기사단 기사대장이 해준 약속이었다. 스트라스티는 나랍인 용병들이 곧장 돌아설 줄 알았다.

하지만 나랍인 용병들은 쉴 새 없이 분화구를 흘끔대고 몸을 떨면서도 뒤돌아서지는 않았다. 오는 내내 대표로 말을 하던 여자가 창백해진 입술을 질겅대며 앞으로 나섰다.

“저희는 단주를 구하러 온 겁니다. 용의 둥지에 갈 거라는 건 처음부터 알고 왔는데 이제와 도망치지는 않을 겁니다.”

“오호. 정말 죽을 수도 있는데?”

“어차피 여기서 도망치면 다음 일 못 받습니다. 굶어죽느니 시도라도 해 봐야죠.”

딱 잘라 대답하는 얼굴엔 두려움과 공포, 그리고 단단한 각오가 공존하고 있었다. 딱히 상의할 시간을 준 것도 아닌데 모두가 같은 표정이었다. 용병에게 목숨을 건 의리를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스트라스티는 나랍인 용병들이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가짐은 마음에 들었다. 저런 표정을 하는 이들은 어떤 참혹한 꼴을 마주하더라도 전장에서 도망치지 않는다.

“좋아, 마음에 들어. 칼레이의 마차에 올라탈 동지가 늘었군. 자칫하면 비좁겠는데.”

스트라스티가 웃으며 악담한 그 순간, 셰비언의 마법이 용암에 쏟아졌다. 절절 끓는 쇳물 같던 용암은 순식간에 식어 검은 돌이 되었고 무럭무럭 피어오른 수증기가 산등성이와 분화구 주변을 새하얗게 덮었다.

산트렘의 기사들과 나랍인 용병들이 모여 선 곳에서도 그 장면이 똑똑히 보였다. 내내 조용하던 피올이 휙, 휘파람을 불었다.

“음, 아까보단 살 확률이 조금 더 높아진 것 같은데?”

“틈틈이 도와주겠다더니, 그게 빈말은 아니었나 봅니다. 내내 조용하기에 우릴 아주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말이죠. 셰비언이 부디 앞으로도 그 말을 잘 기억하고 있어야 할 텐데요!”

라비린과 피올의 농담이 분위기를 풀었다. 알게 모르게 긴장하고 있던 사람들의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작게 웃는 이들도 있었다.

용암을 식히며 뿜어져 나온 수증기도 뜨겁고 위험하긴 매한가지지만, 발톱섬에 상륙한 인원들 모두가 화염방어 속성의 레펙치오로 온몸을 도배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용암은 몰라도 수증기쯤은 견딜 수 있을 터였다.

“좋아, 그럼 사전에 예정했던 대로 패를 둘로 나눈다. 구출조는 이쪽에 서고, 처리조는…….”

아아아아악―!

샤를레아가 분노에 차 내지르는 비명이 하늘을 갈랐다. 이제껏 두 용이 떠들어대는 말은 인간의 귀에 들리지 않았거늘, 이 비명만은 선뜩하리만치 선명하게 인간들의 귀청을 때렸다.

침착하게 대열을 정돈하던 사람들 모두가 흠칫 놀라 발을 멈췄다. 스트라스티는 순간 등이 뻣뻣해지는 느낌에 미간을 찌푸린 정도로 끝났지만, 기사 중 몇몇은 구토를 시작했고 몇몇은 아예 주저앉았다.

그러나 비명으로 끝이 아니었다. 벼락이라도 치는 듯 새파란 하늘이 번쩍번쩍 하더니, 빛줄기 중 하나가 인간들의 앞에 내리꽂혔다. 깜짝 놀란 사람들이 분분이 뒤로 물러나는데, 빛줄기는 스르르 녹아내리더니 뱀처럼 땅을 기어 화산 쪽으로 사라졌다. 그 뒤를 따라 금빛 마력이 길게 이어졌다.

아무리 봐도 길 안내 용도로 쏘아 보낸 마법이었다. 목적지도 빤했다.

두 마리 용이 공기를 찢어발기며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까마득히 먼 하늘에서 싸우는데도 계곡의 폭포소리만큼이나 소음이 컸다. 부서진 마법 조각이 우박처럼 떨어졌다. 비현실적인 광경의 한복판에 선 사람들은 현실감을 잃었다.

“신화시대는 끝난 거 아니었어?”

“괴물도 튀어나오고 용도 튀어나왔는데 신화시대가 끝났다고 하면 안 될 거 같은데.”

“레이디 오드리 별명이 현세의 벨트람이라며…….”

“그럼 우린 뭐야. 신화 속에 내던져진 인간인가?”

때와 장소에 맞지 않는 대화를 하는 수다쟁이들을 책임져야 하는 스트라스티가 가장 먼저 정신을 차렸다. 한눈에 상황을 파악한 그녀가 낮게 혀를 찼다.

나랍인 용병과 라비린은 멀쩡해 보였지만, 산트렘의 기사들은 거의 대부분 상태가 좋지 않았다. 셰비언이 충분한 대비를 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샤를레아의 마력에 예민한 반응을 보인 것이다. 셰비언이 미리 걱정하며 말해줬던 그대로였다.

‘어쩐지, 미리 인원을 나눠봤자 의미 없을 거라고 하더니.’

샤를레아가 울부짖는 소리를 들은 것만으로도 토하고 쓰러지는 놈들을 어떻게 그녀의 둥지로 보낼 수 있겠나. 마음이 정해지자 판단은 빨랐다.

그런 이유로, 산트렘의 기사들은 마법진을 파괴하는 처리조가 되었고 라비린과 나랍인 용병들은 용의 둥지에 잠입할 구출조가 되었다.

라비린은 자신이 나랍인 용병들을 이끌어야 한다는 점에는 동의했지만 피올을 처리조에 넣는 것엔 크게 반발했다. 용의 마력에 사람들이 죄다 얼어붙어 있을 때에도 그럭저럭 움직인 녀석을 어떻게 샘 메우고 나무 베는 데 쓸 수 있느냐면서.

“벨키스 경의 말이 맞습니다. 저 같은 천재는 그에 맞는 쓰임이 있는 법이죠.”

피올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구출조에 있던 나랍인 용병과 자리를 바꿨다. 차마 부정하지 못한 스트라스티가 미간을 구겼다.

“아베드, 제발 조금이라도 겸손해질 수는 없냐? 네가 아무리 사자 새끼라지만 겸손은 좋은 미덕이거든?”

“죄송하지만, 대장님. 저를 키운 건 팔 할이 산트렘이라서요. 겸손 같은 거 배운 적 없습니다. 보고 배울 사람이 어디 있었어야죠.”

피올이 혀를 끌끌 차며 스트라스티를 놀렸다. 구출조에서 제외되어 우중충해져 있던 산트렘의 기사들이 왁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결국 스트라스티는 형제를 갈라놓으려던 시도를 그만두었다. 둘 중 하나라도 해안 근처에 두고 싶은 의도를 뻔히 알면서 저리 나오는데 꾸역꾸역 우겨봐야 시간낭비였다.

“그럼 가라. 마법진을 최대한 빨리 부수고 쫓아갈 테니까 길목마다 표시 남기는 거 잊지 말고.”

스트라스티의 속을 실컷 썩인 조카이자 제자 둘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미덥지 못한 용병들과 함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그녀는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다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에, 자식새끼들 전장에 보낼 때도 이렇게 마음이 약해진 적이 없었는데……. 진짜 나이 먹었나 봐. 아무래도 돌아가면 은퇴해야겠어.”

“감사합니다, 대장님. 물려주시는 자리는 제가 잘 받아먹겠습니다.”

“어허, 그건 내가 한참 전에 예약해 둔 자리야. 어딜 넘봐?”

“둘 다 시끄러워. 어디 발레리 앞에서도 그렇게 떠들어보지 그래?”

“은퇴 안 할 거다, 이 망할 놈들아!”

라비린과 피올이 나랍인 용병들과 따로 떨어져 나간 시점에서, 비현실적인 풍경 앞에서 넋을 놓았던 산트렘의 기사들은 완전히 제 페이스로 돌아왔다. 머리 위에서 두 마리 용이 싸우고 눈앞에선 부서진 마법 조각들이 눈발처럼 흩날리거나 말거나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빨리빨리 하고 가자고! 설마 나랍인 용병에게 모든 영광을 양보할 건 아니지?”

“당연한 말씀을!”

기왕 신화의 한복판에 뛰어들었다면, 마땅히 주인공의 자리를 차지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산트렘의 기사인데!

어지러운 지도를 읽고 낯선 식물을 짓밟고 달리면서, 산트렘의 기사들은 의욕과 경쟁심으로 활활 타올랐다. 그들을 위해 격렬한 싸움 중에도 착실하게 마력을 조절하고 있는 셰비언이 보았다면 몹시 흡족해했을 광경이었다.

라비린과 피올, 그리고 나랍인 용병들은 셰비언의 마법이 남긴 길을 따라 빠르게 나아갔다. 화산에 가까울수록 부서진 마법 조각은 더 많이 떨어지고 그만큼 유황 냄새도 진해지건만, 걸음이 느려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법이 안내하는 길은 신비했다. 분명 조금 전까지 잎이 넓적한 나무와 물기 많은 풀을 키워내는 비옥한 흙을 밟으며 걷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불탄 나무와 못생긴 돌멩이가 굴러다니는 비탈길이었다. 바위틈에서 솟아난 끓는 샘물이 주변의 마른 땅을 적시며 흘렀고, 산 것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홀린 듯 뒤를 돌아본 피올은 자신들이 산중턱에 이르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몸에 밴 감각은 그가 걸은 거리가 고작해야 영광의 거리와 중앙광장 사이의 거리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훈련을 통해 얻은 감각과 눈으로 보이는 풍경의 괴리에 목이 빳빳하게 굳었다. 광장 한복판에서 왈츠를 추는 물고기를 보았더라도 이만큼 놀라진 않았을 것이다.

라비린이 피올의 어깨를 짚고 속삭였다.

“일일이 신경 쓰지 마.”

“이걸 어떻게 신경을 안 써? 이래서야 표식을 남겨도 소용이 없…….”

“머리 위에서 용이 날고 있는데 이런 걸로 놀랄 여유가 있단 말이야? 앞이나 봐, 넘어지지 말고.”

비아냥대는 어조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피올은 반발하지 않고 참아냈다. 다만 어깨에 닿은 체온이 짜증스러운 것만은 어쩔 수 없어서, 조금 거세게 쳐 냈다. 라비린도 그 정도 짜증은 봐주기로 마음먹었는지 별말이 없었다.

나랍인 용병들도 그들과 다르지 않았다. 한 번씩 뒤를 돌아보았다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는 일이 반복됐다. 미묘한 긴장감이 일행 전체를 감쌌다.

“벨키스 경, 주변이 조금 흐릿해진 것 같지 않습니까?”

“흐릿하다니?”

라비린은 그 말을 듣고서야 주변을 뒤덮은 안개를 깨달았다. 아니, 그건 안개가 아니라 수증기였다. 몸에 걸친 레펙치오 때문에 더위를 느끼지 못해 안개라고 착각한 것이다. 왜 몰랐을까 싶을 정도로 시야 방해가 심했다.

“빌어먹을……. 수증기가 이렇게 짙은 걸 왜 모르고 있었지? 감각이 엉망입니다. 나만 이런 겁니까?”

“글쎄요.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마 일행 전부가 엉망진창일 겁니다. 저도 조금 전에야 간신히 알아챈 거라. 이봐, 나는 멀쩡한데 싶은 사람 있으면 손들어 봐.”

이 무슨 멍청한 감별 방법이냐 싶긴 했지만, 라비린은 딱히 지적하지 않았다.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부디 눈은 멀쩡했으면 좋겠군. 길을 보며 온 것도 아니니 마법이 우릴 안내하는 걸 그만두면 그땐 내려가지도 못하고 헤맬 거야.”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 못 들어봤어? 그런 말이나 지껄일 거면 닥쳐.”

“농담이야, 농담. 뭘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해? 수증기가 짙어서 시야가 많이 제한되니 다들 옆 사람을 잘 챙기시고…….”

당부하던 라비린이 갑자기 피올에게 손을 뻗었다. 피올이 질색하고 뒤로 물러섰지만 라비린은 재빠르게 따라붙어 그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왜 이래?”

“피가…… 내리고 있어.”

“미쳤어? 드디어 돌았나 보지?”

피올이 짜증스레 쏘아붙였다. 하지만 일행은 금세 라비린의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 하늘에서 붉은 피가 비처럼 떨어져 일행의 머리와 어깨를 적시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지금 발톱섬에 발 딛고 선 사람치고 피를 보는 것에 두려움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하나 붉은 피가 흰 수증기를 밀어내는 광경은 어지간히 담이 큰 사람이라도 등골이 오싹해질 만한 것이었다.

라비린의 옅은 갈색 머리칼에 붉은 물방울이 맺혔다. 그는 축축하게 젖어가는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습도가 높아져서 그런지 주변에 자욱하던 유황 냄새가 조금이나마 옅어지는 듯했다.

“이런……. 피의 비가 내린다는 표현은 소설에나 등장하는 건 줄 알았는데. 돌아가서 사람들에게 솔직하게 얘기해도 믿어주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사실을 말하고 허풍선이가 되는 건 달갑지 않은데 말이죠.”

웃음기마저 어린 말투였다. 진저리를 치며 핏물을 털어내던 사람들 모두가 얼이 빠져 라비린을 바라보았다. 그가 태연히 바닥을 가리켰다. 그들을 이끌어주었던 마법이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아직 둥지 입구에도 못 갔는데 벌써 의욕이 떨어지면 됩니까? 우리가 체력을 아낄 수 있게 셰비언이 이렇게 마음을 써줬는데요.”

셰비언의 이름이 나오자 나랍인 용병들의 표정이 뻣뻣해졌다. 산트렘의 기사들이 샤를레아의 마력에 유독 예민하게 반응하듯이, 나랍인 용병들은 셰비언의 마력에 예민했다. 이름만 듣고도 굳는 건 거의 트라우마에 가까운 반응이긴 하지만 어쩌겠는가, 셰비언이 그들을 가혹하게 굴린 탓인걸.

라비린은 그들의 반응을 모른 척 외면하며 발을 뗐다.

“싸우는 와중에도 우릴 챙기는 걸 보면 여유가 있다는 겁니다. 분명 섬 곳곳에 있는 마법진에도 손을 썼을 테죠. 그럼 마법도 남아 있겠다, 산트렘의 기사들이 금방 따라올 텐데, 먼저 출발하고도 따라잡힐 셈입니까?”

용병에게도 자존심이라는 게 있다. 나랍인 용병들은 몸에 맺히는 핏방울을 터는 것도 그만두고 발을 재촉했다.

빗방울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가늘어져 결국 부슬비가 되었다. 부슬비는 짙은 수증기를 밀어내지 못하고 도리어 수증기와 자연스레 섞였고, 그러자 허옇던 사방이 붉게 변했다.

“이거 꼭 괴담의 한 장면 같지 않습니까.”

“…….”

“사랑하는 남자와 야반도주를 결심한 용감한 처녀가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밤마다 안개가 자욱하게 끼는 골짜기에서 만나 도망치기로 했죠. 그 골짜기는 밤마다 유령이 나온다는 소문이 있는 곳이었지만, 두 사람은 조금도 무섭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사람이 오지 않는 장소라서 예전부터 데이트 장소로 종종 써먹던 곳이었거든요. 그런데 두 사람이 야반도주하기로 약속한 그날 밤,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여자는 골짜기에 붉은 안개가 끼는 걸 보게 됩니다…….”

피올은 실없는 소리를 지껄이는 라비린의 뒤통수를 후려갈길까 말까 고민을 시작했다. 그의 의미 없는 수다가 나랍인 용병들이 긴장을 푸는 데에 도움이 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계속 듣고 있으려니 짜증이 났다.

‘내가 아직도 어린애인 줄 아나.’

피올이 아직 코흘리개 어린애이던 시절, 왕궁에서 자라며 어쩌다 한 번씩 집에 돌아오던 라비린은 밤이 되면 피올을 붙잡아놓고 무서운 이야기를 들려주며 겁을 주곤 했다. 낮에는 목검으로 때리고, 밤에는 괴담으로 울리고. 어른이 되어 생각해 봐도 참 못돼먹은 꼬마였다.

라비린은 수다를 떨고, 피올은 속으로 투덜거리고, 나랍인 용병들은 말없이 들으며 얼마나 걸었을까. 농밀하던 수증기가 점점 옅어지며 코앞만 보이던 시야가 멀리 트이기 시작했다.

“……뒤늦게 도착한 남자는 겁을 먹었습니다. 왜 이렇게 안개가 붉을까, 혹시 소문대로 유령이 나온 게 아닐까……. 망설이던 남자는…… 이런, 곤란해졌네요.”

라비린이 돌연 이야기를 끊고 혀를 찼다. 이루 말할 수 없이 낭패한 기색이 가득했다. 그도 그럴 것이, 갑자기 나타난 협곡이 그들의 길을 끊어먹고 있었던 것이다. 깊이는 신이 도끼질을 한 듯 깊고 넓기는 어지간한 말로는 뛰어넘을 엄두도 못 낼 정도로 넓었다. 그런데 그들을 이끄는 마법은 그 협곡을 가로질러 반대편으로 이어져 빛나고 있었다.

“산중턱을 넘겼는데 이게 도대체……. 화산에서는 이런 지형이 자주 나타납니까?”

“그럴 리가요. 지진으로 산이 무너져도 이런 협곡이 생길 일은 거의 없습니다.”

“이거 참…….”

이 마법은 거리를 뛰어넘어 목적지로 갈 수 있게 해주는 것이었다. 정확히 산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마당에 감히 돌아서 갈 엄두도 안 났다.

피올은 일말의 희망을 품고 협곡을 가로지르는 금빛에 돌멩이를 던졌다. 돌멩이는 매정하게도 협곡 바닥으로 추락했다. 햇살에 반짝이는 마법을 보는 사람들 모두가 똥 씹은 표정이 됐다.

수증기가 걷혀 드디어 볼 수 있게 된 하늘에서는 두 마리 용이 여전히 뒤엉켜 싸우고 있었다. 맑은 하늘에 치는 벼락과 수원 없이 쏟아지는 물, 장작 없이 타오르는 불 때문에 눈이 다 아플 지경이었지만 희고 붉은 용은 대비가 뚜렷했다. 비록 흰 용의 몸뚱이 절반이 피로 덮여 있다고 해도 말이다.

“셰비언 녀석, 우리 신경 쓸 정신이 없어졌나?”

“그럴지도. 본래부터 육탄전으로 붙으면 자신 없다고 했던 상대잖아. 그런데 신경 쓸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니니…….”

부정적인 전망을 늘어놓으면서도 라비린은 태연하고 침착했다. 그는 오는 내내 등에 지고 있던 짐을 드디어 내려놓았다. 갓난아이 크기의 낯선 기계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게 뭔데? 마법도구? 다리라도 압축해 놓은 건가?”

“그보다 더 좋은 거지.”

라비린이 능숙하게 기계를 조작했다. 기대에 찬 시선이 그와 기계에 쏟아졌다. 어떤 마법도구를 가져왔기에 이런 난관에서도 침착할 수 있는 건가. 뭔지는 몰라도 특별한 거겠지?

하지만 라비린은 조용히 앉아 한참 시간을 보낸 다음 기계를 도로 싸서 등에 졌다. 라비린을 제외한 일행 모두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뭘 한 거야?”

“기다려.”

“대체 무슨…….”

“기다리라고.”

“빌어먹을 벨키스 경, 일행을 통솔하는 입장에 있으면 설명을 좀 해주시지?”

“행보가 갈대 같은 보티안 씨는 인내심을 가지고 결과를 기다려 줬으면 좋겠어. ‘기다려’가 뭔지, 예전에 충분히 가르쳤던 것 같은데 설마 부족했나?”

태연하고 침착했던 건 그저 꾸며낸 겉모습뿐인 듯, 라비린이 날카롭게 받아쳤다. 피올은 순간적으로 검자루를 움켜잡았지만 그뿐이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돌아서서 분을 참았다.

“보티안 씨, 담배 한 대 피울래요?”

“담배 안 피웁니다.”

“알지만 그냥 한번 물어봤어요.”

피올에게 담배를 권한 나랍인 용병은 메리디에스에서 라비린의 등을 지켰던 그 여자였다. 그녀는 대단한 애연가인 듯, 잠깐 틈이 생기자마자 또 담배를 입에 물고 있었다. 도넛 모양 연기가 허공으로 흩어졌다.

“저 새끼 제 형 아닙니다. 결혼식 때는 제가 잠깐 미쳤던 겁니다.”

“네. 누가 물어봤나요?”

“묻고 싶어 하는 것 같아 보여서. 궁금하셨던 거 아닙니까?”

여자가 픽 웃으며 담뱃재를 털었다.

“결혼한 주제에 외간여자 마음 읽지 마요. 오해하잖아요.”

“내 알 바입니까, 그게.”

“형제가 똑같네요.”

피올의 얼굴이 무참히 일그러졌다. 들으라는 듯 키득대던 여자의 미간이 확 좁아졌다. 그녀는 반절이나 남은 담배를 내던지고 눈썹 부근에 손을 갖다 대어 저 먼 하늘을 응시했다. 두꺼운 얼굴가죽이 뻣뻣하게 긴장해 있으니, 피올이 놀라 물었다.

“뭡니까?”

“새…….”

새? 여자가 보는 방향을 바라보았던 피올은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곧 써먹을 수 있겠다고 말로만 들었던 대형 강철새가 그들을 향해 날아오는 중이었다.

“어이, 벨키스 경. 기다리라는 게 이거였어?”

“그래.”

“하……. 뭔 수를 썼는지는 몰라도 미리 말해주면 좋았잖아? 왜 그따위로 말해서 사람 기분을 잡치게 만들어?”

“…….”

사실 라비린은 셰비언이 갑자기 떠안긴 무선 전보기계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기에 미리 말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무선 전보기계가 전보의 원형이라고는 해도 무선이 유선으로 바뀐 것엔 나름의 이유가 있기 마련이었고, 그는 유선 전보를 먼저 접했다.

피올은 대강의 사정을 짐작하면서도 히죽히죽 웃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라비린이 아까 그 기계로 뭔 짓을 한 건지는 몰라도 아주 신통방통했다. 지금 마음 같아서는 끌어안고 뺨에 뽀뽀도 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저거 운전이 좀 미숙한 거 같은데? 재수 없으면 용꼬리에 맞고 날아가겠어. 아니면 마법에 적중당하거나.”

아닌 게 아니라, 강철새는 퍽 힘겹게 날아왔다. 하늘을 찢어발길 듯한 용들의 싸움 범위를 아슬아슬하게 피하면서 일행의 애간장을 태웠고, 착륙 직전에는 넘어질 듯 기우뚱거린 통에 사람들의 간덩이는 콩알만 하게 졸아붙었다. 그래도 무사히 협곡의 갈라진 틈 바로 옆에 착륙했으니, 그때까지 사람들이 쏟아낸 한숨을 모두 모으면 강철새를 도로 띄울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였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눈 밑 그늘이 시커먼 워커가 운전석에서 폴짝 뛰어내려 인사했다. 피올은 자신도 모르게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저 미친놈, 이걸 직접 운전했어?”

워커는 난데없이 욕을 들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다섯 달을 연구해서 한 달 만에 완성해 낸 대형 강철새가 시험 비행 겸 실전 투입에 방금 성공한 참이었다. 지금 그는 욕으로 케이크를 구워준대도 양껏 퍼먹을 정도로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싱글벙글 웃는 얼굴이 아주 밝았다.

“벨키스 경, 부르셔서 오긴 왔는데 뭣 때문에 부르신 겁니까? 엇, 얼굴이 아주 허옇습니다. 어디 아프세요?”

“……그게 진짜로 연락이 가는 거였군요.”

“그럼 가짜로 갈까요. 본래 전보는 마법망을 이용하는 걸 전제로 하는 기계로 기획됐습니다. 번거롭게 선을 까는 건 초기 계획에 없던 일이지만 전보의 안정성과 정확도를 위해…….”

“그만!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듣겠습니다. 저거, 딱 봐도 덩치가 커다란 게 여객용으로 만든 강철새인데 한 번에 몇 명이나 됩니까? 승객을 태우고도 무사히 저 협곡 너머로 날아갈 수는 있겠죠?”

라비린이 다급히 워커의 수다를 끊었다. 워커는 아쉬워 입맛을 다셨지만, 그는 때와 장소를 가릴 줄 아는 이였다. 어차피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들은 그의 업적을 이해할 수 없는 자들이기도 하고.

워커는 라비린의 질문에 행동으로 답했다. 그가 뭘 어떻게 조작한 건지, 강철새의 배 한쪽이 벌컥 열리면서 커다란 빈 공간이 드러났다. 널따란 공간에 두툼한 방석 여러 개가 늘어서 있었다.

“적어도 쉰 명은 가뿐하고, 일흔 명이면 적정 인원입니다. 백 명쯤 되면 마법을 정비해야 합니다. 기껏해야 열 명 남짓인 여러분을 태우고 협곡을 건너는 건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죠! 쉬운 일입니다!”

나랍인 용병들은 미친 것처럼 낄낄대는 마법사, 워커를 몹시 거북하게 여겼으나 강철새에 대한 호기심을 이겨내지는 못했다. 그들은 마법도구의 편리함을 이제 막 맛보고 있는 시점의 사람들인 것이다.

라비린은 나랍인 용병들을 다 태우고 난 뒤, 온몸으로 피하고 싶어 하는 피올의 멱살을 움켜잡고 질질 끌면서 강철새의 배에 올라탔다.

“자, 갑니다!”

대형 강철새가 사뿐히 떠올랐다. 그들은 아주 쉽게 협곡을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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