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권-chapter 44. 산트렘의 기사들 (47/62)

목차

chapter 44. 산트렘의 기사들

chapter 45. 발톱섬

chapter 46. 각자의 최선

chapter 47. 용의 둥지 가장 깊은 곳

chapter 48. 심장의 향방

chapter 49. 인과(因果)

chapter 50. 별종 혹은 선구자

epilogue

chapter 44. 산트렘의 기사들

「하랄이 일 년 내내 살뜰하게 보살핀 그의 땅이 마침내 풍성한 수확을 앞두었을 때, 호기심 많고 변덕스런 페즈날이 그의 땅을 홀라당 집어먹고 말았다. 잠시 한눈을 판 사이 황금빛 밀 이삭이 빛나던 땅이 푸른 바다가 된 풍경을 보고 크게 노한 하랄이 페즈날에게 이를 따지러 가자, 페즈날이 사과의 표시로 큰 물고기 아홉 마리를 내놓았다. - 쉽고 재미있게 신화 배우기 中」

오드리는 혼란에 빠진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달렸다. 어디로 도망가야 할지 몰라 허둥대는 사람의 무리는 그 자체로 거대한 벽이었으나, 동시에 오드리를 괴물로부터 멀어지게 해주는 방패 역할을 겸했다.

귀청 따갑게 울리는 비명, 자꾸 발에 채이는 가면, 매캐한 연기 냄새. 체구는 작아도 타고난 힘이 있어 밀리지는 않았지만, 등에 업은 동생의 무게는 그녀의 발을 자꾸만 잡아끌었다.

목덜미는 땀으로 흥건하고 팔은 한계에 달해 부들부들 떨렸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 입에서 단내가 났다. 괴롭다. 등에 멘 짐을 던져 버리고 싶다.

“누나…….”

어린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먹거렸다. 지쳐 무너져 가던 정신이 바짝 들었다. 오드리는 이를 악물고 동생을 추어올렸다. 땀으로 미끈거리는 손이지만 풀리지 않기를 바라며 깍지를 꼈다.

“목에 팔이나 잘 둘러. 떨어지면 큰일이니까.”

“누나, 그냥 내 발로 뛸게. 응?”

“넌 발이 느려서 안 돼. 어리고 힘도 없어서 사람들에게 치이면 순식간에 잃어버릴 거야. 하델, 그만 울고 팔이나 잘 두르라고 했지!”

울음소리가 잦아들었다. 우유 냄새 나는 팔이 목을 끌어안았다. 컥, 숨이 막혔다. 오드리가 견디지 못하고 얕은 기침을 하자 팔이 느슨해진다. 그녀는 숨을 돌리자마자 농담을 건넸다.

“네 발로 뛴다더니, 팔에 힘이 장난이 아닌걸.”

“누나!”

“그래, 내가 네 누나다. 믿고 매달려 있어.”

후들거리는 다리를 채찍질해 걸음을 옮겼다. 어디로 갈까. 어디로 가야 하나. 괴물에 쫓기는 지금, 저택으로는 갈 수 없는데. 입으로는 나만 믿으라며 기세 좋게 장담을 했지만 눈앞이 깜깜하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쉽사리 목적지를 정하지 못하고 허우적대던 중, 여린 팔이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광장 구석에 우뚝 서서 인간들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는 건물, 시계탑이었다.

“누나, 저기로 가자.”

“시계탑……. 그래, 그거 괜찮네.”

이 난리통에도 시계탑에 매달린 괴물은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저긴 안전할지도 모른다. 희망이 솟자 힘도 함께 솟았다. 씩씩해진 걸음으로 사람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밀어대는 사람들을 뚫으며 얼마나 걸었을까. 한계에 이른 육체를 의지가 억지로 움직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을 때쯤, 훌쩍 키가 크고 몸이 단단한 사내가 나타나 오드리의 어깨를 잡아챘다.

잔뜩 긴장하고 있던 오드리가 경기하듯 팔을 뿌리쳤다.

“놔!”

“아가씨!”

아가씨, 정신 차리십시오, 귀에 익은 음성이 오드리를 달랬다. 그럼에도 오드리는 쉽사리 진정하지 못해서, 비슷한 공방이 몇 번이나 더 오가고 나서야 상대를 똑바로 볼 여유가 생겼다.

평생 검을 쥐느라 단련된 몸, 걱정과 괴로움을 한 가득 담은 눈. 오드리를 꽉 잡지도 못해 몇 번이고 두드려 맞은 팔에는 벌써부터 걱정이 맺혀 있다. 하지만 한계에 거의 다다른 오드리는 호의에 호의로 답하기보다 제 잘못보다 그가 왜 거기에 있을까를 의심스러워했다.

“베텔 경? 경이 왜……!”

“어째 거리 분위기가 심상치가 않기에 나와봤습니다. 아가씨, 도련님을 제게 주십시오. 몸이 무거우면 빨리 뛸 수 없습니다.”

두터운 손이 오드리에게 죽자 사자 매달린 하델을 떼어냈다. 오드리는 어깨를 짓누르던 무게가 사라지는 걸 상실 대신 기쁨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했다. 괴물이 등을 쫓아오는 지금, 몸이 가벼워지면 기뻐야 하는데, 창백하게 질린 하델의 얼굴을 보노라니 어째 큰 죄라도 지은 것 같았다.

하델에게 몇 마디 말이라도 걸어보려는데, 카프러스가 하델을 고쳐 안으면서 오드리의 시야에서 하델의 얼굴을 감췄다.

“아가씨, 어디로 가실 셈이었습니까?”

“시계탑으로 가려고 했어요. 괴물을 끌고 헨젤가로 갈 순 없으니……. 저 괴물들, 이유는 모르겠지만 날 따라와요.”

말을 끝내기 무섭게 괴물 한 마리가 오드리의 옆에서 목을 삐죽 내밀었다가 카프러스의 칼에 목을 관통당해 죽었다. 순간이나마 오드리의 얼굴이 빳빳하게 굳었다.

“괴물이 아가씨를 따라오는 게 확실합니까?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야 당연히…….”

날 쫓아오는 게 당연하다, 라고 말하려던 오드리는 치미는 위화감에 입을 다물었다.

그게 왜 당연하지?

카프러스가 침착하게 오드리를 다독였다.

“아가씨께서 이런 상황에 처해본 적이 없으셔서 당황하신 겁니다. 전장에 처음 나선 신병은 사방의 적이 다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것처럼 느끼곤 하죠.”

“하지만…….”

“그건 공포가 불러온 착각입니다. 인간으로서 자연스러운 일이니 부끄러워하실 것도 없습니다. 하물며 아가씨는 따로 군사교육을 받은 적도 없는 보통 사람이잖습니까.”

오드리는 그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카프러스가 워낙 확신에 차서 말하니 자신감이 쪼그라들었다. 생각해 보니 괴물 전부가 자신을 따라오는 건 아니었던 것 같기도 했다. 그녀는 가슴에 얹혔던 돌덩이를 조금이나마 내려놓았다.

하지만 시계탑에 대한 미련은 끈덕지게 남아서 그녀를 잡아끌었다. 불쑥 솟아오른 탑이 혼란으로 가득 찬 이 광장에서 유일한 안전지대로 보였다. 꼭 저기로 가야 할 것만 같은 충동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베텔 경, 어디로 갈 건지 정했나요? 시계탑은 어때요? 곧 치안대가 괴물을 정리할 텐데 그때까지 버티기에 충분한 장소잖아요?”

“시계탑은 사전에 허가받은 사람이 아니면 들어갈 수 없습니다.”

“지금은 비상상황이잖아요. 그리고 난 헨젤가의 영애예요. 문제가 되더라도 어떻게든 넘길 수 있어요!”

그토록 싫어하는 가문의 이름까지 팔아먹겠다니, 오드리로서는 정말 큰마음을 먹고 한 말이었다.

하지만 카프러스에겐 조금도 먹히지 않았다. 그는 왜 자신에게 팔이 하나 더 없는지 아쉬워하는 표정을 지었을 뿐이었다. 만약 팔이 하나 더 있었으면 하델과 오드리를 양쪽으로 안아들고도 검을 쥘 수 있었을 텐데, 하고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한 사람이 어디 아가씨뿐이겠습니까? 한데도 시계탑이 저리 조용한 걸 보십시오. 안 들어가는 게 아니라 못 들어가는 겁니다.”

오드리는 초조함에 발을 굴렀다. 저 시계탑에 올라가야 했다. 올라갈 수 있었다. 예전에도 시계탑 꼭대기에서 잘 버텼……. 물 흐르듯 이어지던 생각이 툭, 끊겼다. 그녀는 입을 틀어막았다.

카프러스는 조용해진 오드리가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그는 인형처럼 얌전히 안긴 하델을 추어올리며 오드리를 설득했다.

“귀족가 저택이 모여 있는 곳은 상대적으로 혼란이 적을 겁니다. 예전에 비해 많이 줄었다지만 기사를 둔 가문들이 있으니까요. 다들 실력도 좋고 충성심도 강하니 이곳과는 다를 겁니다.”

오드리는 무의식적으로 카프러스의 표정을 훔쳐보았다. 이를 악문 탓에 턱선이 두드러진 얼굴에서 긴장과 확신이 흘러넘쳤다.

왕실의 권위가 높아지고 치안대의 권한이 강력해지는 과정에서 귀족가에 딸린 기사의 숫자는 극적으로 줄었다. 전방위적인 압박을 견뎌내며 가문의 기사를 유지한 곳은 얼마 되지 않았으나, 그만큼 남아 있는 기사들의 충성심과 실력은 의심할 바가 못 되었다.

‘베텔 경은 예외에 속하겠지.’

그녀는 카프러스가 헨젤가에 뚜렷한 충성심을 비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그의 실력은 나무랄 데 없었으나, 그의 마음이 어딜 향하고 있는지는 늘 안개에 잠긴 표지처럼 흐릿하기만 했다. 사고뭉치 아가씨의 에스코트를 하는 일 따위는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을 텐데 충실하게 임하고 있는 게 오히려 이상하게 여겨질 정도였다.

카프러스가 멍하니 넋을 놓은 오드리를 재촉했다. 혼란의 와중에 가만히 서 있는 게 못마땅하다는 기색이었다.

“아가씨께서 저를 놓치시면 안 됩니다. 제가 최대한 아가씨를 챙기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아가씨께서도 적극적으로 움직여 주셔야 합니다.”

“알겠어요.”

오드리가 고개를 끄덕이는데, 카프러스가 대뜸 손을 내밀었다.

“그럼 가면부터 벗으십시오.”

“가면? 웬 가면?”

“아가씨께서 지금 쓰고 계신 가면 말입니다. 분명 고급일 테고 착용감도 좋겠지만, 역시 시야 확보에 방해가 될 겁니다. 벗는 게 좋겠습니다.”

내가 가면을 쓰고 있었나? 오드리는 반신반의하며 제 얼굴을 더듬었다. 그러자 폭신폭신하고 부드러운 털이 만져졌다. 일단 가면의 존재를 인지하고 나자 가면 때문에 제한된 시야와 뒤통수를 가로지르는 끈의 존재가 느껴졌다.

“그렇게 뛰면서도 영 몰랐네요…….”

가면의 끈을 풀면서도 어쩐지 민망했다. 오드리는 몇 번이나 헛손질을 하고서야 제가 쓰고 있던 가면을 벗을 수 있었다. 얼룩덜룩한 고양이 가면이 몹시 낯익었다.

‘내 가면 취향이 이랬던가? 그래도 귀엽긴 하네.’

오드리는 가면을 접어 품에 넣으려 했지만, 그 전에 카프러스가 가면을 낚아채 갔다.

“제가 보관하겠습니다.”

“어…….”

“따라오십시오.”

오드리가 따질 틈도 없었다. 카프러스가 사람들을 밀어내고 길을 내기 시작했다. 오드리는 그의 거친 태도에 당황하면서도 서둘러 뒤를 따랐다.

카프러스의 실력은 출중했고, 아까 오드리 혼자 뚫고 나갈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속도로 길이 열렸다. 과연 헨젤 백작이 온갖 예외를 붙여가며 잡아둔 기사다웠다.

오드리는 머지않아 카프러스의 뒤를 따르는 것만으로도 벅찬 상황에 이르렀다. 아무리 단출한 드레스를 입고 낮은 굽의 구두를 신었대도 승마복을 입었을 때처럼 마음껏 움직이기는 어려웠고, 카프러스의 보호가 이뤄지는 공간은 몹시 좁았다. 몇 번이나 부딪친 어깨가 멍이 든 것처럼 욱신거렸다.

치안대는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차마 뱉지 못한 불만이 입안에 고였다. 그때, 가만히 눈을 감고 인형처럼 안겨 있던 하델이 입모양으로 오드리를 불렀다.

“누나!”

“응?”

하델은 소리 내 말하는 대신 제 손가락을 가리켰다. 오른손 검지로 왼손 약지를 툭툭, 두드린 것이다. 하델의 손가락은 비어 있었으니, 오드리는 자연스레 제 왼손을 쳐다보았다.

루비처럼 붉지만 루비가 아닌 보석이 당당히 존재감을 발휘하는 반지가 왼손 약지에 끼워져 있었다.

‘나한테 이런 반지가 있었던가?’

반지의 소유 여부를 따지기 이전에, 왼손 약지는 결혼반지를 위해 남겨놓는 손가락이다. 오드리는 그 손가락을 차지한 반지에 당황했다.

‘내가 왜 약지에 반지를 끼고 있지?’

하늘에서 내리꽂힌 햇빛 한 줄기가 반지의 보석을 비췄다. 붉은 보석 안쪽에서 눈꽃 결정 문양이 선명하게 떠오른 순간, 오드리 주변의 풍경이 그대로 박제됐다. 바닥을 구르는 가면, 넘어진 장대에서 떨어진 곡물자루, 푸드득 날아오른 비둘기……. 모든 것이 풍경화의 일부분처럼 납작해졌다.

오드리와 카프러스, 단 두 사람만 빼고.

카프러스가 뒤돌아섰다. 당혹스러워하는 표정이었다. 그가 안고 있던 하델은 생기 하나 없는 인형이었다.

“아가씨,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연기 잘하네. 곧장 무대에 올라도 되겠어.”

“예? 그게 무슨…….”

시간이 나면 가끔 연극을 보러 가는 게 취미인 무뚝뚝한 기사가 민망해하며 턱을 긁적거렸다. 아주 자연스러웠다. 주변이 이렇게 변한 상황만 아니라면 깜빡 속아 넘어갔을 테다.

오드리가 피식 웃으며 그, 혹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샤를레아.”

카프러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바닥에 떨어질 듯 고개를 숙였던 그가 머리를 들어 올렸을 때, 카프러스가 있던 자리엔 불꽃처럼 붉은 머리칼의 미녀가 서 있었다.

“……어떻게 알았어?”

“계속 이상했어. 네가 아무리 상황을 잘 짜 맞추더라도, 결국엔 내가 겪었던 일을 약간 변형하는 것에 불과하잖아. 위화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지.”

“웃기고 있네. 그 반지 덕분이잖아.”

“이 반지 덕분이면 뭐 어때서? 이건 내 거야.”

샤를레아가 신경질적으로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오드리를 납치할 때의 여유로움은 다 어디로 갔는지, 지금의 그녀는 몹시 초췌하고 피곤해 보였다.

“인간이란……. 그게 왜 네 거지? 마법은 용의 것이야. 너희는 도적의 후손이다.”

“남의 몸뚱이를 뺏으려고 안달을 하고 있는 너보다는 내가 훨씬 더 깨끗한 것 같은데.”

오드리는 대놓고 샤를레아를 비웃었다.

한때 그녀는 샤를레아에게 몸의 주도권을 거의 다 빼앗겼었다. 하지만 샤를레아가 마법망을 망가뜨리기 위해 작정하고 반지에 담긴 권능을 사용하려는 순간, 반지는 그녀를 거부하고 의식 아래 묻혀 있던 오드리를 불러냈다.

샤를레아가 미리 본체의 비늘 아래에 그려놓았던 마법진이 효력을 잃은 것도 그때였다. 그녀는 본체를 조종할 조종간을 잃고 말았다.

게다가 오드리의 몸을 채우고 있는 마력은 두 자아의 명령을 동시에 따르지 않았다. 어느 쪽이 우위에 있느냐는 상관이 없었다. 명령을 내리는 머리가 하나이길 요구하는 것이다. 샤를레아는 본체를 조종하기 위해서라도 오드리의 육신을 완벽하게 차지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마법망에 손을 대려하지만 않았더라면 무사히 육신을 차지했을 것을, 욕심이 화를 불렀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오드리가 정신을 차리고도 순순히 몸을 내줄 리 없으니, 오드리의 자아를 눌러 죽이려는 샤를레아와 몸뚱이 하나로 버티는 오드리의 다툼이 끈질기게 이어졌다.

유리한 쪽은 단연 샤를레아였다. 그녀는 오드리가 가진 기억을 죄다 들여다볼 수 있었고, 그녀의 입맛대로 환경을 꾸밀 수도 있었다. 오드리는 몇 번이고 함정에 빠졌고 좌절했고 포기 직전에 이르렀지만, 그때마다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가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방금도 마찬가지였다.

빼앗기지 않으려 버티는 건 오드리인데 초조해 뵈는 건 샤를레아 쪽이 더 했다. 반복되는 실패가 그녀를 좀먹고 있었다.

“흥, 네 몸뚱이 따위로는 티끌만 한 갚음도 어렵다는 걸 알아야지.”

샤를레아는 이를 갈며 오드리의 손가락을 노려보았다. 저놈의 반지만 아니었어도 연약한 인간의 자아 따위는 진즉에 잡아먹고도 남았는데! 매번 고지 바로 앞에서 미끄러지더니만 이젠 그 근처도 못 가 들키고 있었다.

“갚을 필요가 뭐 있나……. 훔친 것도 아니고 받은 것인데. 마법의 주인이 직접 공언한 것을 네가 무슨 자격으로 부정하지?”

오드리는 보란 듯 왼손을 들어 올려 제 턱을 받쳤다. 붉은 보석이 만들어진 햇살 아래에서 찬란하게 반짝였다.

“마법의 종족으로 태어나고도 정작 마법은 쓰지도 못하는 반쪽짜리가.”

때로는 한 점의 가공 없는 날 것 그대로의 사실이 무엇보다 깊은 상처를 줄 때가 있다. 마법을 쓸 때마다 제 몸뚱이 일부를 잘라내 제물로 써야 하는 샤를레아에게, 오드리의 비웃음은 예리한 상처를 입혔다.

빼앗긴 상실에 대한 비웃음은 오히려 타고난 결여에 대한 무시보다 더욱 견디기 어려웠다.

발톱섬을 감싼 바다처럼 푸르던 눈동자에 난폭한 살기가 어렸다. 오드리는 심장이 죄이는 느낌에 입술을 깨물었다. 한 점의 흔들림 없이 의연하고 싶건만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오드리……. 너야말로 왜 이렇게 구질구질할 정도로 버티는 거지? 도대체 네게 무슨 희망이 있다고?”

“내 몸을 내가 지키는 것에 이유가 필요한가?”

“무의미한 발버둥으로 괜한 고통을 늘리지 말란 친절한 충고지.”

샤를레아가 오드리의 어깨를 잡아챘다. 잔뜩 화난 표정, 시퍼런 불길을 머금은 눈동자를 하고도 그녀의 손길은 부드럽고 사근사근했다.

“네가 내게 끌려온 지 얼마나 지났는지 알고 있어?”

“시계라도 하나 가져다주고 그런 말을 하는 게 어때.”

샤를레아는 기세 좋은 대답이 아주 마음에 든다는 것처럼 웃었다. 살벌한 웃음이었다.

“시계가 아니라 달력이 필요할 거야. 다섯 달이야. 넌 내게 자그마치 다섯 달이나 잡혀 있었어. 인간의 기준으론 대단히 긴 시간이 아닌가? 한데 내 둥지 근처에 나타나 널 내놓으라 요구한 자가 아무도 없어. 널 구하러 올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거야.”

“다섯 달, 다섯 달이라……. 신년제는 한참 전에 지났을 테고 슬슬 성미 급한 꽃들이 피어날 시기네. 하델은 열넷이 되어서 저택을 벗어났을 테고…….”

아득한 눈빛으로 중얼중얼 시간을 가늠하던 오드리가 돌연 샤를레아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오 년도 아니고 다섯 달쯤이야. 내가 로렐라이를 만들려고 준비할 때도 이 년은 걸렸는데 용을 상대함에 있어 준비 기간 다섯 달이면 지나치게 짧지. 안 그래?”

가장이든 아니든, 오드리가 드러낸 여유가 샤를레아의 심기를 매우 불편하게 만들었다는 건 확실했다. 오드리의 어깨를 쥔 손마디가 하얗게 도드라졌다. 오드리는 어깨를 짓누르는 통증 속에서도 계속 조잘거렸다.

“뭘 믿고 버티느냐고 했지? 그야 당연히 너를 믿고 버티는 거야.”

“뭐?”

“네 말이 사실이라면, 너는 자그마치 다섯 달 동안이나 나에게 매달려 있었던 거야. 그만큼 내 몸뚱이의 주도권을 쥐는 게 중요한 거겠지. 이대로 현상유지만 해도 다섯 달이 뭐야, 일 년, 삼 년, 십 년도 널 붙들어놓을 수 있을 성싶은데 내가 버티지 못할 이유가 대체 뭐지?”

샤를레아의 뾰족한 송곳니가 입술을 파고들어 피를 냈다. 오드리는 그 피를 훔쳐내 제 입에 날름 집어넣었다. 민트향에 가깝도록 시원한 향기 속에 유황 냄새가 어렴풋하게나마 맡아졌다. 역겨운 희망의 맛이었다.

“구출되리라는 희망? 그런 거 없어도 돼. 인간의 동기 중에는 복수라는 것도 있다는 걸 알아둬, 이 반편이 용아.”

오드리는 시원하게 악담을 퍼붓고 깔깔 웃었다. 샤를레아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생각해 보면 그녀는 발톱섬에 온 탐사대를 통째로 잡아먹고 이 시대의 지식을 흡수한 용이었다. 불같은 성질머리와 인간을 깔아보는 못된 버릇만 아니었어도 오드리에게 휘둘리지 않았을 것이다.

“당당하고 자신만만하구나.”

돌연 발밑이 사라졌다. 휘청, 흔들린 오드리가 무의식적으로 샤를레아의 팔을 붙들었다. 샤를레아가 그녀에게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코가 닿을 듯 가까이 다가온 새하얀 동공이 거울처럼 오드리를 비췄다.

“인간의 정신은 연약하기 짝이 없어서, 정도 이상의 자극이 가해지면 쉽게 깨지고 말지. 수준 높은 마법사도 그럴진대 너 같은 일반인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난…….”

“웬만하면 온전한 상태로 삼키고 싶어서 살살 대해줬더니, 정도를 모르고 기어올라.”

샤를레아가 오드리의 어깨를 놓고 제 팔을 붙든 그녀의 손마저 잡아뗐다. 오드리의 얼굴에서 혈색이 싹 사라졌다. 뱃속의 내장이 죄다 떠오르는 것 같은 끔찍한 부유감이 그녀를 덮쳤다.

‘셰비언!’

별빛 한 줌 없는 어둠 속으로 곤두박질치는 오드리의 머릿속에 떠오른 이름은 하나뿐이었다.

* * *

달튼 제도 봉쇄가 시작된 후, 멜브란트 남부의 작은 항구도시들은 천천히 말라 죽는다는 말이 어떤 건지 몸으로 체감했다. 그나마 봉쇄에 동원된 배들이 종종 들러 먹고 마시며 돈을 풀어주었기 망정이지, 하마터면 그물 대신 쟁기 쥐고 농사를 지을 뻔했다. 아니면 어디 마법도구 만드는 공장에라도 들어가서 마력을 쪽쪽 빨리든가.

차마 군함에는 못 오르겠다는 몇몇 뱃놈들만 빼면, 짐을 나르는 인부와 소모품을 대는 소상공인, 여관의 운영자와 창고가 가득 차 골치였던 양조장의 주인장 모두가 해군을 환영했다.

칼 같은 기세의 정예군이라지만 해군도 결국엔 뱃놈이라, 마을의 주민들은 그들을 낯설거나 어렵게 여기지 않았다. 배에서 든 물은 쉽게 빠지지 않는다던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니, 보기 드물게 얌전하고 매너 놓은 뱃놈이라 생각하면 무서울 것도 없다고 다들 입을 모았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마을의 유일한 여관이자 술집인 검은 고래 턱뼈에서 이른 음주를 즐기던 마을 사람들은 온갖 핑계를 다 주워섬기며 무거운 엉덩이를 뗐다.

“내가 감기 기운이 있어서 오늘은 좀 일찍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

“깜빡 했는데, 오늘이 마누라 생일이야.”

“허흠! 왜 이렇게 배가 아프지…….”

“실은 내가 오늘부터 금주를 실천하기로 했어.”

검은 고래 턱뼈의 주인, 테니아는 이웃이자 단골들의 뻔한 핑계에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혔다. 빅은 감기기운은커녕 얼굴이 불그스름하고 기운이 넘쳤고, 카벨 녀석의 마누라는 생일이 넉 달이나 남았다. 콴티타의 금주 선언은 들을 가치도 없었다. 그나마 봐줄 만한 건 크리지 녀석의 배탈 핑계였다. 크리지는 애인의 아버지를 만나러 나간 자리에서도 화장실을 찾았던 놈이니까.

어쨌건 저 손님인지 웬수인지 모를 인간들은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빠져나갈 수 있었지만, 주인 테니아에겐 선택권이 없었다. 아무리 무서워도 가게를 팽개치고 도망갈 수는 없지 않은가.

그녀는 입맛 까다로운 낯선 손님들을 위해 고이 보관했던 위스키와 포도주를 모조리 꺼냈다. 제발 이 술이 그들의 날카로움을 조금이나마 누그러뜨려 주길 바라면서.

피올은 후하게 사례하고 술을 받아들었다. 술을 건네는 주인의 눈빛이 이것마저도 싫다고 하면 그냥 쫓아낼 거라고 말하는 듯해 등에서 땀이 다 났다.

“제발 이 정도로 끝내줘.”

사정하는 듯한 어조에 사나운 웃음이 터졌다. 작은 여관의 1층을 가득 채운 산트렘의 기사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잔에 술을 따랐다. 몇 병 안 되는 위스키가 순식간에 동났다.

기사 한 명이 일어나 잔을 높이 들었다. 길게 길러 둘둘 말아놓은 구리색 머리칼 사이로 희게 바랜 머리칼이 드문드문 섞여 있었다. 세월에 낡은 눈매에 유쾌한 웃음이 담겼다.

“우리 막내가 사는 술이다! 남기는 놈은 내 손에 죽을 줄 알아!”

그녀의 외침이 끝나자마자 기사들이 일제히 술을 목구멍으로 부어 넣었다. 빈 잔이 아쉬워 쩝쩝대던 이들이 투덜대기 시작했다.

“대장! 이거 술이 너무 적은 거 아닙니까? 남기는커녕 목구멍 적실 것도 못 됩니다!”

“맞습니다! 아베드 자식, 우리한테 연락도 없이 결혼한 거 만회하려면 이 정도론 어림도 없는데!”

“결혼식 다시 해라!”

“어떤 미친놈이 결혼식을 다시 하래?”

“결혼식이 안 되면 피로연이라도 한 번 더 해라!”

“그건 좋다!”

사방에서 동조의 목소리가 터졌다. 뒤쪽에 물러나 팔짱을 끼고 있던 피올이 냅다 접시 한 장을 집어던졌다. 목표물이 된 기사가 능숙하게 접시를 받아냈다. 눈가에 새겨진 흉터가 인상적인 사내였다.

“막내야, 그깟 피로연 한 번 더 하라는 게 그렇게 꼽냐!”

“당연하지! 가난뱅이한테 뭘 바라? 내가 기사단 나오면서 거기서 벌었던 돈 다 토해놓고 나온 거 뻔히 알면서 무슨 피로연이야, 피로연은! 술 받아 처먹는 걸로 만족해!”

“아, 그랬지. 아베드, 네 덕에 새 검 맞췄다. 고마워!”

아무렇지 않게 피올의 속을 홀라당 뒤집어놓고는 눈을 찡긋거린다. 잔을 비우며 낄낄대던 다른 이들이 보란 듯 허리춤의 검을 두들겼다. 피올이 산트렘 기사단을 떠나며 내놓은 재산이 산트렘의 기사 전원에게 새 검을 맞춰줄 정도였던 것이다. 비록 그사이 전투를 치르느라 이제는 반짝반짝한 신품은 아닐지라도 새 검은 새 검이었다.

피올은 무심결에 제가 던지고 나온 재산을 헤아려 보고, 익숙하지 않은 가사노동에 거칠어져가는 네이기스의 손을 생각하고, 기름때 절은 낮은 천장을 한 번 바라본 뒤에, 바닥에서 나뒹구는 나이프를 걷어차 날렸다.

피올의 약을 올리던 기사가 날아드는 나이프를 아슬아슬하게 잡아채고 투덜거렸다. 저 자식은 기사 때려치우고도 실력이 늘었어. 와 빌어먹게 불공평한 세상 같으니. 기사 때려치운 김에 나도 치안대에나 들어갈까?

“누가 아베드야! 그 이름 내버린 지 오래됐어!”

우우-. 버린 이름으로 우릴 불렀냐! 터지는 야유 속에서 피올이 뻣뻣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내가 아베드든 피올이든 부른 이상 왔을 거면서 말이 많아!”

작은 여관이 통째로 무너질 것 같은 웃음이 쏟아졌다. 피올이 오래전에 버린 이름으로 산트렘의 기사를 호출한 건, 조금이라도 빨리 소식이 닿기를 바라서였다. 다른 의도는 없었다.

그러니까, 산트렘 기사단 정예 멤버를 죄다 사직시킬 의도 같은 건.

정말 예상하지 못했느냐며, 뒷감당을 해주던 라디아타가 거짓말 말라며 울컥해서 따지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생생했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더러운 손에 깨끗한 피를 묻히며 진창을 걷는 동안 쌓인 전우애는 그만큼 끈끈했으니까. 그러니 제 욕심 때문에 묻었던 과거를 끄집어낸 자로서 최소한의 책임은 져야 할 것이다.

“피로연 받아먹으려면 살아 돌아와.”

오 역시 우리 막내! 믿었다, 막내야! 피올은 쏟아지는 막내 타령에 넌덜머리를 내며 여관을 빠져나왔다. 이른 여름을 물고 온 남부의 태양이 정수리를 쪼아댔다. 어디에선가 아카시아 향기가 났다.

셰비언이 몸소 나서 샤를레아와 싸우는 동안 붉은 용의 둥지에 진입해 오드리를 빼내는 임무를 맡은 ‘전직’ 산트렘의 기사들.

그들이 출정하기까지 딱 아흐레 남은 날의 하늘은 파랗고 청명했다.

오드리가 납치당한 후로 쭉 그랬듯이.

* * *

살론은 배와 마법사를, 두프트는 식량을, 카펠로는 무기를. 미리 합의한 지원의 내용은 이러했으나, 각국은 처음 약속한 것 이상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초기에는 내부에서 꽤 거센 반발이 있었으나, 멜브란트의 왕궁마법사들이 마법망 강화 및 복구 작업을 한다는 정보가 전해진 시점에서 싹 사라졌다. 그러고도 약간 남아 있던 불만은 셰비언이 몸소 나서서 해결했다.

용의 모습으로 각국의 왕궁 위를 맴도는 광대 짓을 한 것이다.

그는 딱히 큰 마법을 쓴다거나 수도를 파괴한다거나 하는 짓을 저지르지는 않았다. 그저 왕궁의 하늘을 몇 바퀴 돈 뒤, 가장 높은 첨탑에 잠시 내려앉아 마법망을 가시화시켰다.

낡아빠져 너덜거리는 마법망을 수도의 모든 사람들의 눈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낸 뒤, 마법망 복구 작업을 한 다음, 유지하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사람들은 완벽한 아름다움을 뽐내던 마법망이 급격히 무너지는 꼴을 실시간으로 목격했다.

그 이상 효과적인 협상카드는 없었다. 가스트로는 셰비언에게 진작 나서줬으면 오죽 좋았겠냐는 식으로 투덜거렸다가 라디아타와 부부싸움을 크게 한 뒤에야 입을 다물었다.

어쨌건 진짜로 마법문명이 끝장날 수 있다는 위기감과 용에게 호감을 사야 한다는 절박함, 타국에 뒤쳐질 수 없다는 경쟁 심리는 전쟁과 다툼이 끊이지 않던 나라들 사이에 일시적인 평화를 부여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갑판에서 오가는 일상적인 인사.

“야, 여기 해몽 할 줄 아는 사람 있어?”

“뭐가 나왔는데 새삼 해몽을 찾고 그래? 혹시 페즈날이 벗고 나오기라도 했어? 그럴 땐 찐한 레몬즙에 설탕을 조금 타서 마시면 악운이 떨어져!”

“뭐야, 악몽 꿨어? 나한테 끝내주는 부적 있는데 살래?”

미신 좋아하는 뱃사람들답게 근거 없는 비법과 부적이 부지런히 오간다.

“제기랄, 내 카드에 장난질 친 새끼 나와!”

“와, 저 새끼 지가 당한 거 이제 알았나 보다.”

“당한 놈이 등신이지. 당한 지 며칠이나 지나서 찾으면 찾아지냐, 그게. 다른 놈들 다 알 때 혼자 모르더니……. 쯧쯧.”

“내버려 둬, 저 새끼는 멀쩡한 카드로 놀아도 지는 새끼야. 카드가 조작됐다니 얼마나 마음이 편하겠냐. 야야, 말하지 마, 저런 놈이 있어야 나 같은 놈도 돈을 따지. 오늘 밤에 기대해라!”

“얼빠진 새끼. 그래가지고 결혼자금은 언제 모을래? 제시인지 네시인지 지금 네 꼴을 보면 신발 벗겨지는 줄도 모르고 도망갈 거다. 근데 그 약혼녀 진짜 있긴 한 거냐?”

서로 다른 군복을 입은 선원들이 자연스럽게 뒤섞여 담배를 피우고 낚시를 하고 수다를 떤다. 그러다 소소하게 주먹다짐도 좀 하고.

국적은 달라도 다들 살론어 한두 마디 정도는 할 줄 알았던지라, 얼굴 맞대고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자 손짓발짓 대신 제대로 대화를 나누는 이들의 비중이 늘어났다.

생각 이상으로 빠르게 친밀해지는 선원들은 라비린에게 곤혹스러움을 안겼다. 마법사를 제외한 승선원 모두를 멜브란트인으로 채우려 했던 초기 계획이 어그러진 것도 곤란한데, 언젠가는 적으로 마주쳐야 할 이들이 지나친 친밀감을 쌓는 게 달갑지 않았다. 당장 지금 문제행동을 하더라도 모른 척 눈감아줄 확률이 있었다.

노르드 제독은 라비린의 우려를 일축했다.

“태워만 준다면 어느 나라 배든 상관없이 올라타는 게 뱃놈이오. 벨키스 경은 육지에서 주로 활동했으니 잘 모르겠지만.”

“제독, 제가 우려하는 건…….”

“왕실에서 경에게 맡긴 건 갑판 위의 일이 아니잖소. 경은 엉뚱한 곳에 마음 쓰지 말고 주민 소개에 좀 더 힘쓰든가, 아니면 빈 마을 정리에 관심을 좀 기울이든가 하시오. 밤이 되면 도적떼가 나타나 빈 마을을 들쑤시며 값나가는 걸 챙겨간다는 소문이 돌고 있어 민심이 흉흉하오. 이대로 가다간 기껏 피난시킨 사람들이 도로 고향을 찾아갈 기세요.”

“제독…….”

“경, 멜브란트의 사자가 영리하고 용맹하다지만, 사자는 들짐승이잖소. 물짐승은 내가 더 잘 아니 어린 사자께서는 괜한 걱정일랑 말고 편히 쉬시오. 출정까지 고작 보름밖에 안 남았소.”

라비린은 제독의 선실에서 단박에 쫓겨났다. 하려던 말의 절반도 꺼내지 못한 상태였다. 라비린이 타우레드의 성을 달고 태어나 군의 깃발이 휘날리는 곳에서 이렇게까지 무시당한 적이 없건만, 노르드 제독은 좀처럼 라비린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타우레드의 이름값이 부족해서는 아니었다. 아무리 사자가 들짐승이라지만 긴긴 역사 속에서 해군에 투신한 타우레드가 한 명도 없을 리가 있나. 게다가 전장의 무대가 들판에서 바다로 옮겨가는 지금, 현 타우레드 후작인 클로드 역시 해군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한데도 라비린이 이런 취급을 받는 건, 육군과 해군의 오랜 알력도 알력이지만 무엇보다도 라비린이 내세울 전공 하나 없는 젊은이이기 때문이었다. 평생을 바다에서 보낸 제독은 타우레드의 이름값 말고는 내세울 것 없는 젊은 기사에게 충고를 듣길 원하지 않았다.

라비린으로서는 갑갑한 노릇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마법사가 선원으로 가장하고 선원 무리에 끼어 있는데 믿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하긴 로렐라이의 대리인으로 뼈가 굵은 라비린조차 마법사는 당연히 허약하고 체력이 달리는 게 정상이라는 편견을 벗느라 한참 고생을 했는데, 어린애 허벅지만 한 팔뚝에 근육이 울끈불끈하고 시커멓게 탄 피부에서 광택이 흐르는 선원이 마법사라는 걸 누가 믿어주겠는가.

그들이 빈 마을에 몰래 들어가 측량작업을 하다가 문장을 띄우는 것을 우연히 보지 못했더라면, 라비린도 선원 사이에 마법사가 끼어있다는 의심은 꿈에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밤이 되면 빈 마을에 도적떼가 나타난다니, 우스운 얘기지.’

소개 작업은 마을의 주민들이 재산을 챙기기에 충분한 시간을 들여가며 진행됐다. 주민들은 정든 고향을 떠나기 싫어했지만 군까지 동원해 밀어내는 것에 저항할 정도로 고향을 사랑하진 않았다.

라비린은 그 도적떼가 선원으로 가장한 마법사를 포함한 일단의 무리일 것을 짐작했다. 당분간 영업을 뛰지 못하고 숨죽이고 있어야 하는 살론의 사략선 무리가 주민의 눈이 없는 틈을 타 멜브란트 내부의 지도를 그리고 다니는 게 틀림없다고 말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빈 마을에 뭐 털어갈 게 있다고 들쑤시나.

몇 번이고 보고했지만 매번 무시당했고 이젠 출정마저 얼마 남지 않았다. 일단 셰비언이 하늘을 날고 배가 바다에 뜨고 나면 라비린이 움직일 수 있는 범위는 더 좁아질 게 분명했다. 그러니 아직 기회가 남았을 때 움직여야 했다.

라비린은 밤을 기다렸다. 그는 아직 도적떼가 나왔다는 말이 없는 마을 중 한 곳을 골라 마을회관의 지붕에 엎드려 몸을 숨겼다. 작은 마을에서 그나마 가장 높은 곳이었다. 가로등의 뚜껑을 벗기는 사람이 없는 탓에 마을은 조용한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가로등의 발치만 점점이 밝았다.

인간이 떠난 땅은 동물의 영역이라, 평소 볼 일 없는 짐승들이 거리를 배회했다. 달이 움직이며 마을회관 지붕에 설치된 종탑 그림자도 서서히 위치를 옮겼다. 라비린은 그에 맞춰 자세를 바꿨다. 굳은 관절에서 뚜두둑 소리가 났다.

‘젠장, 나는 여기서 왜 이러고 있는 거지.’

밤이슬을 맞으며 올지 안 올지 모를 도적떼를 기다리고 있으려니 회의감밖에 드는 게 없다. 나름 소문을 분석해서 예상 출몰지를 뽑아내긴 했지만 꼭 이곳일 거란 보장도 없고, 설령 이곳이더라도 오늘일 거란 확신도 없는데 계속 이러고 있어야 하나?

하지만 브란젤에서 소식을 기다리며 피가 마르는 것보단 해군기지에서 도토리처럼 굴러다니는 게 낫고, 노르드 제독에게 어린 사자 소리를 들으며 참기만 하는 것보단 뭐라도 시도를 하는 쪽이 낫다.

‘딱 한 시간만 더 참아보자.’

다행히 라비린의 인내는 보답 받았다. 거리를 배회하던 버려진 개들이 컹컹대며 짖는 소리가 밤공기를 찢었다. 경계심을 드러내는 맹렬한 짖음, 그리고 이어진 부자연스러운 침묵. 라비린은 누군가 개를 죽였음을 알아채고 몸을 긴장시켰다.

과연 오래지 않아 일단의 무리가 라비린의 눈에 띠었다. 그들은 대여섯 명으로 이루어진 일행으로, 버려진 배를 주워 타고 마을의 해변을 샅샅이 훑으며 주변지형의 생김새와 바다의 깊이 따위를 측량했다. 마법도구를 쓸 때마다 빛이 번쩍거렸다. 감춘다고 감췄을 텐데도 그랬다.

‘저놈들, 마을 안쪽으로는 들어오질 않네.’

라비린은 조금 초조해졌다. 어촌마을답게 마을회관이 해안가에 치우쳐 있어 그들이 하는 짓을 낱낱이 볼 수는 있었지만, 혼자서 그들 전부를 상대하기엔 탁 트인 주변 지형이 너무 불리했다. 아무래도 자신은 혼자고 저들은 여럿이잖은가.

‘끌어들여 볼까?’

저렇게 주의 깊게 행동하는 걸 보면 경계심도 상당해 보이고, 다들 몸놀림도 괜찮은 것 같지만……. 저놈들이 정말 마법사가 끼어 있는 일행이라면 싸우기보다 피하기를 선택할 것이다. 아무리 몸을 잘 단련했더라도 마법사는 마법사지 검사가 아니니까.

라비린은 지붕을 눌러놓은 돌멩이 하나를 떼어내 해변가의 가로등을 겨냥하고 던졌다.

캉-! 거친 쇳소리가 나고 뚜껑이 벗겨졌다. 일대가 확 밝아졌다. 마침 배에서 내리고 있던 이들이 화들짝 놀라 주변을 경계했다. 라비린은 미간을 좁히고 집중했지만, 아직 어두운 곳에 있는 데다 후드를 하도 푹 뒤집어쓰고 있어 얼굴이 뵈질 않았다.

뭐, 안 보이면 보이게 만들면 되지. 라비린은 연속적으로 돌멩이를 던졌다. 돌멩이 하나가 날아갈 때마다 가로등 하나의 뚜껑이 벗겨졌다.

먼 곳에서부터 차례차례 가로등이 밝혀지며 빛이 다가오자 그들은 서둘러 어두운 곳으로 몸을 피했다. 그러나 빛이 닿지 않는 곳에 이르러 안심한 것도 잠시, 그림자에 몸을 감추고 내도록 기다리고 있던 라비린의 검이 길을 선도하던 자의 목을 꿰뚫었다.

“컥!”

좁은 골목과 어둠, 그리고 신속한 칼질은 기습의 효과를 확실하게 극대화시켰다. 마법사는 라비린이 예상했던 그대로 짐덩이였고, 좁은 공간에서 아군끼리 얽힌 검사들은 제대로 된 실력을 내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의 필사적인 저항은 라비린에게서 마법사가 도망칠 여유를 주는 데에 성공했다.

다른 놈들은 다 죽어도 되니 마법사 한 놈만 살려서 자백을 받아내야지, 하고 여유를 부렸던 라비린에겐 낭패스러운 일이었다.

“젠장!”

밤은 라비린뿐만 아니라 마법사에게도 은폐의 장막이 되어주었다. 뒤쫓는 것이 좀 늦었대도 어차피 빈 마을이니 금방 잡을 수 있을 거라 여겼는데, 괜히 몸을 단련한 게 아닌 듯 마법사는 좀처럼 꼬리를 잡히지 않았다.

하나 라비린은 기사고, 상대는 마법사였다. 마법사는 꼬리를 떨쳐 내는 방법을 제대로 배운 듯한 움직임을 보여주었으나, 마을이 비어 있어 섞일 사람도 없는 데다 체력 싸움에 있어서는 상대가 안 되었다.

라비린은 죽을 것처럼 헐떡거리면서도 끝끝내 도주를 포기하지 않는 마법사에게 나름 높은 점수를 주었다. 심문을 하더라도 너무 가혹하게 하진 말아야지. 불구가 되는 결말은 피하게 해주어야겠다.

“헉, 헉……. 커흑! 컥!”

거친 숨소리 끝에 비명이 섞였다. 주먹으로 인간을 두들기는 게 분명한 소리는 덤이었다. 라비린은 다급하게 속도를 높여 마법사가 뛰어든 골목에 진입했다.

“……하?”

온몸을 검은 옷으로 감싼 사람 서넛이 쓰러진 남자를 둘러싸고 걷어차고 있는 장면은 흔해빠진 뒷골목 린치를 연상케 하는 바가 있었다. 그들이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데다 허리춤에 검을 차고 있으며, 이곳이 진즉 소개 작업이 이뤄진 빈 마을만 아니라면 말이다.

라비린은 그들 한가운데 널브러진 마법사의 생사부터 눈으로 확인했다. 달빛에 비친 얼굴은 그 짧은 새에 엉망진창이 되었지만 다행히 죽진 않은 것 같았다. 그가 뱉은 이빨 몇 개가 핏물 고인 바닥에 나뒹굴었다.

이를 저렇게 뽑아놨으니 심문할 때 발음이 줄줄 새게 생겼다. 외국어는 발음이 새면 알아듣기 힘든데. 라비린은 짜증스레 목을 꺾으며 물었다.

“당신들 뭐야?”

“너 따위가 알 거 없……. 메이즈 대리인?”

싸가지 없게 대꾸하던 괴한이 생각지도 못했던 호칭으로 라비린을 불렀다. 검을 고쳐 쥐던 뒤쪽의 흑의인은 물론이고 느슨해진 긴장을 팽팽하게 끌어 올리던 라비린까지 흠칫 몸을 굳혔다.

“기절시켜.”

마법사는 실컷 뛰어 체력을 소진한 끝에 옴팡 두들겨 맞고 기절하는 불쌍한 신세가 되었다. 라비린은 축 늘어지는 몸뚱이를 보며 혀를 찼다. 옮기기 힘들 게 분명했다.

“저놈은 내 건데.”

“알아. 가로챌 생각 없으니까 안심해.”

“그걸 어떻게 믿지?”

우두머리 격으로 보이는 괴한이 라비린에게 무언가를 던졌다. 얇고 반짝이는 것. 라비린은 독 묻은 단검이라도 잡아채는 듯 신중하게 받았으나 그 정체가 너무 당혹스러워 하마터면 떨어뜨릴 뻔 했다.

“……로렐라이?”

도무지 믿을 수 없어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로렐라이의 금속 명함이었다. 용과 꽃이 새겨진 명함이 달빛에 희게 빛났다.

라비린은 로렐라이에서 호위로 용병을 고용한다는 말은 들어봤어도 무력집단을 양성한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귀족도 사병을 못 기르는데 일개 상단에서 그런 짓을 했다간 간부진부터 말단 짐꾼까지 모조리 참수당하고도 남았다.

“로렐라이의 금속 명함은 아무에게나 뿌려지는 게 아닐 텐데. 누구에게서 훔쳤지?”

“거 너무 경계하는군. 가시 세운 호저도 메이즈 대리인보다는 얌전하겠어.”

괴한이 얼굴을 가렸던 복면을 끌어내렸다. 매끄러운 꿀색 피부와 그 뺨에 새겨진 흰 튤립 문신이 달빛에 드러났다.

“그야 당연히 경애하는 단주에게서 받은 거지. 오드리 랄리우스 가넷, 그분에게서.”

오드리의 이름을 말하는 목소리가 꿀처럼 달콤했다. 라비린은 선 채로 기절하고 싶어졌다. 오드리는 로렐라이로 나랍에서 도대체 뭔 짓을 한 건가?

* * *

테이블 부근만 간신히 밝힐 정도로 광량이 적은 램프, 별빛도 새어들지 못하게 작은 창문을 덮은 두꺼운 커튼, 자욱한 담배 연기 속에서 현란한 솜씨로 펼쳐지는 카드.

얼핏 보면 밑바닥 인생을 사는 치들이 모여드는 도박장의 풍경 같겠지만, 여긴 메리디에스 해군기지에서 ‘전직’ 산트렘 기사단원들을 위해 내준 숙소였다. 그중에서도 대장 스트라스티의 방.

피올은 자꾸 얼굴을 덮치는 담배 연기를 휘휘 손을 내저어 밀어냈다. 매캐하고 독한 담배 연기를 예전부터 싫어했는데, 이건 향마저도 낯설기 그지없었다.

“담배는 안 피우시나 봅니다.”

꿀색 피부의 팔을 거침없이 드러낸 여자가 피올을 향해 말을 건넸다. 그녀가 숨을 내쉴 때마다 회색 연기가 퐁퐁 솟아났다. 피올이 대놓고 미간을 찌푸리자 마치 비웃는 것처럼 씩 웃는다.

“한 대 드릴까요?”

마디마다 박인 굳은살이 선명한 손이 담배를 권했다. 얼핏 보아도 퍽 좋은 담배였다. 피올은 그녀가 자신을 비웃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바꿨다.

“담배 안 피웁니다.”

“돛대인데.”

“돛대면 아껴뒀다 본인이 피우시죠.”

“생명의 은인이신데 돛대쯤은 드려야죠.”

여자가 씩 웃었다. 매끄러운 뺨에 새겨진 흰 튤립 문신이 어두침침한 실내에서 선명하게 떠올랐다. 피올은 한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돌렸다.

‘비웃는 게 아니긴. 오지게 비웃고 있구만.’

피올은 이 묘하게 낯익은 여자가 말브레 극장 습격 사건의 범인 중 한 명이라고, 정의와 약속의 신 하티의 앞에서 맹세도 할 수 있었다. 그래봤자 죄를 뒤집어쓰고 죽은 자가 따로 있는 마당에 누가 믿어주겠느냐마는.

“그쪽의 생명의 은인은 제가 아니라 로렐라이가 아닙니까. 당신들이 나랍으로 돌아간 뒤에도 밥 굶지 않고 멀쩡히 산 건 다 로렐라이 덕분일 텐데요.”

로렐라이는 나랍에서 원활한 설탕 사업을 한다는 명목으로 온갖 종류의 사업을 벌였다.

사탕수수 농장을 정비하고 설탕정제공장을 세우고 제값을 주고 일꾼을 고용한 건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그 외에도 수도를 깔고 길을 닦아 주거지를 조성하고 목욕탕과 병원을 세웠으며, 일부러 하자 있는 B급 마법도구를 매우 싼 값에 보급하여 마법도구 사용 인구를 늘렸다.

그리고 위험한 야생동물이 많은 환경에서 직원을 보호해야 한다는 핑계로 용병을 고용했다. 얼굴에 흰 튤립 문신이 있는 용병이라도 가리지 않았다.

멜브란트에서 처형당하지 않고 나랍으로 송환되었지만 의뢰가 뚝 끊기는 바람에 정글에서 사냥으로 먹고 살아야 하는 처지에 놓였던 이들에겐 그야말로 하늘에서 밧줄이 내려온 격이었다. 의뢰의 내용 또한 만족스러웠다. 동족의 안온한 생활을 지키고 돌보는 일인데 싫을 리가 있나. 이용당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던 걱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옅어졌다.

그래도 끝내 로렐라이를 믿지 못한 자들은 일 년의 계약 기간이 끝나자마자 다른 곳으로 떠났지만 그런 자들은 소수였다. 흰 튤립의 문신을 새긴 용병들 태반은 로렐라이와 장기 계약을 맺고 안정된 생활을 누리기를 선택했다.

로렐라이에게서 날름날름 뇌물을 받아먹으며 편의를 봐주던 지방관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늦었다. 로렐라이가 조성한 설탕사업단지는 로렐라이의 영지나 다름없는 곳이 되어 있었고, 나랍인 대부분의 머릿속에 ‘마법도구=로렐라이’의 공식이 세워진 다음이었다.

로렐라이의 행보를 알게 된 라비린은 오드리와 이디케의 통 큰 씀씀이에 몹시 감탄했다. 설탕은 핑계일 뿐이고 나랍의 마법도구 시장에서 절대적 우위를 차지하는 것이 로렐라이의 진짜 목표라는 건 알았지만, 그걸 위해서 아예 도시 하나를 만들어낼 정도로 초기 투자금을 부었을 줄은 몰랐다. 정말이지 순진한 건지 배포가 큰 건지 모를 아가씨들이었다.

하지만 피올은 라비린처럼 속 편하게 마냥 감탄하지는 못했다. 말브레 극장 습격 사건 당시 오드리도 그 현장에 있었던 걸 생각하면, 그저 실력에 비해 싸다는 이유로 흰 튤립의 용병들을 고용한 무신경함이 놀랍기만 했다.

“정작 그 로렐라이의 주인인 레이디 오드리는 당신들 손에 죽을 뻔했지만.”

“…….”

“아, 혹시 몰랐습니까? 그날, 말브레 극장에는 레이디 오드리도 있었습니다. 당신들을 막았던 그 고지식한 기사가 아니었다면 틀림없이 죽었겠죠.”

여자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고, 덕분에 피올은 조금이나마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여자의 뻔뻔함은 그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었다. 담배 한 대를 다 태우기도 전에 표정을 수습한 것이다.

“당신, 정말로 내 생명의 은인이었군요. 아까는 그냥 농담한 거였는데.”

“……농담?”

“당신만 한 실력자가 아니었으면 사로잡히지 않고 죽었을 거란 의미로 한 말이었습니다. 다 알아봤는데 숨겨서 뭐 하겠나 싶어서.”

“하…….”

죽이는 것보다 살려서 사로잡는 게 훨씬 어렵다. 그것도 한쪽이 죽음을 각오하고 덤비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좁고 어두운 계단, 체계적이진 않아도 날렵한 검 솜씨, 뜨겁게 내뱉는 숨, 악에 받쳐 빛나는 눈동자.

피올은 잊고 있던 기억이 새삼 떠올라 여자를 흘끗 바라보았다. 모처럼의 호의를 거절당한 여자의 시선은 더 이상 피올에게 있지 않았다. 그녀는 여상히 담배를 빨며 눈앞의 카드판을 보고 있었다.

“멜브란트어가 아주 능숙해졌습니다. 그때는 뭔 말을 하는지 알아듣기도 힘들 정도였는데.”

“뭐어……. 살다 보니까 이렇게 됐습니다. 생활에 쓸모 있는 건 빨리 익히기 마련이라.”

왕과 기사와 사제의 그림이 그려진 카드들이 펼쳐졌다 뒤집히기를 반복했다. 카드 뒷면에 활짝 피어난 꽃다발이 구경꾼의 눈을 현혹했다.

“나랍인도 참여할 거란 말은 들었지만 그게 설마 당신들일 줄은 몰랐습니다. 윗대가리들은 생각이라는 걸 할 줄 아는지 모르겠어. 두개골 안에 뇌가 아니라 푸딩이 들었나?”

피올의 악담에 여자가 낄낄 웃었다.

“뭐 어때요. 그 사건의 범인은 잡혀 죽었고 우린 공식적으로 로렐라이 상단에 고용되어 일하는 용병일 뿐인데. 상단이 용에게 잡혀간 주인을 위해 용병을 동원했다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어요.”

“얼굴에 문신을 새기는 건 나랍 용병의 전통이고 흰 튤립은 유행하는 도안이라는 변명 따위가 먹히니까 뇌 대신 푸딩이 들었단 욕을 먹는 겁니다. 돼지 피 푸딩 정도면 딱 맞겠군요.”

“오호, 그 변명을 생각해 낸 사람은 당신의 형인데 그런 식으로 악담해도 됩니까?”

여자가 한창 카드가 날아다니는 테이블에서 카드 서너 장을 손에 쥐고 팔락팔락 부채질 중인 라비린을 향해 턱짓했다. 턱없이 부족한 광량 때문에 라비린의 굵직한 이목구비에 드리운 그림자가 계곡처럼 깊었다.

피올은 그와 자신이 몹시 닮지 않은 형제라는 사실에 새삼 감사했다. 저 도박꾼의 얼굴에서 자신이 보이기라도 했으면 정말 참기 어려웠을 것이다. 나랍인 용병들을 보고 검을 뽑았을 때처럼 스트라스티가 막아주지도 않을 테니 분명 피바람이 불었을 테고.

“저는 형제가 없습니다.”

“동생이라던데?”

“누가 그런 개소리를 합니까.”

“당신 대장이. 듣자하니 당신 결혼식에서 증인도 서줬다던데……. 사이가 안 좋은가 보죠? 의외네요.”

일찍 올걸. 괜히 밤 산책 따위를 하겠답시고 싸돌아다니다 전령을 늦게 받은 죄가 이렇게 클 줄이야. 할 말이 없어진 피올이 라비린의 맞은편에 앉은 스트라스티를 매섭게 노려보았지만, 그녀는 펼쳐든 카드 너머로 라비린의 얼굴을 보느라 바빴다. 어디 눈만 바쁜가? 머리도 바쁘고 입도 바빴다.

“그러니까, 벨키스 경이 원하는 건 이런 거로군요. 발톱섬에 인간이 오르는 걸 두려워한 노르드 제독은 해적과 손을 잡았고, 해적은 산트렘의 기사들이 탈 배 밑바닥에 구멍을 냈다. 다행히도 산트렘의 기사들은 이를 출정 전에 알아차리고 제독의 모가지를 쳤다.”

“네, 비슷합니다.”

“경. 제독쯤 되는 이가 배에 구멍낼 제 사람 하나 없어서 해적과 손을 잡았다니, 핑계치고는 진절머리 나게 조야한 거 아닙니까? 아무리 산트렘의 기사라도 이 정도로는 제독 모가지 못 땁니다.”

“목까지 따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적당히 추궁하고 일에 방해나 안 되게 출정일에 앓아누울 정도만 해주셔도 충분하죠. 그것도 어렵다면 그냥 허수아비 노릇이나 하게 팔다리만 잘라주셔도 됩니다. 제독의 부관인 티치아가 그의 일을 훌륭하게 백업해 줄 겁니다.”

“…….”

“노르드 제독을 본격적으로 갈아치우기엔 시기가 좋지 않습니다. 출정일이 코앞인데 누가 나서서 그를 대신하겠습니까. 발톱섬에 발을 디디면 재앙이 일어난다는 헛소문이 사방에 짜하게 퍼지다 못해 제독마저 넘어간 마당에. 티치아가 조건부로 나서준 것만으로도 고맙다고 절해야 할 수준입니다.”

라비린의 목소리에서 짙은 피로가 묻어났다. 피올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저 인간이 저렇게 제 상태를 흘릴 때는 뭔가 이유가 있는데.

“벨키스 경이 있지 않습니까. 산트렘의 기사가 나선 마당에 멜브란트의 사자가 임시로 자리를 메우는 것에 반발할 만큼 간덩이 큰 자가 이 메리디에스에 있습니까?”

“카론 경이 아시다시피 저는 내세울 경력이랄 게 없는 애송이라서요. 그 말에 반박할 수도 없는 게, 저는 해전 쪽에 대해서 아는 게 쥐뿔도 없습니다. 이런 제가 갑자기 제독의 자리를 메우겠다고 하면 다들 납득하지 못할 겁니다.”

“어차피 진짜 싸움은 용의 몫이고, 발톱섬에 진입하는 건 산트렘의 기사들과 소수의 군사뿐입니다. 티치아라는 자가 대행을 하겠다는 게 거짓말이 아니라면 경이 노르드 제독의 빈자리를 메우는 건 그리 어렵지도 않을 텐데요. 그런데도 제독을 그 자리에 그냥 두겠다니, 그게 말이나 됩니까?”

“…….”

“경, 자비를 베풀지 마세요. 화근이 될 뿐입니다.”

“그건 경험에서 우러나온 조언입니까?”

존재감을 죽이고 관망하던 피올이 벌떡 일어났다. 그가 앉아 있던 의자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뒤로 넘어갔다. 당장에라도 덤벼들려는 것을, 스트라스티가 손을 뻗어 막았다.

라비린이 카드를 내려놓고 양손을 들었다. 마치 항복이라도 하는 듯한 동작이었다. 나랍인 용병이 라비린을 보호하려는 듯이 뒤를 받치고 섰다.

“이모님.”

스트라스티의 표정이 조금이나마 부드러워졌다. 그녀는 열셋에 가출해서 산트렘으로 온 피올을 옆구리에 끼고 가르치며 키운 장본인이었고 한때는 라비린의 검술 스승이었다. 오랜만에 친근한 호칭을 듣자 그동안 쌓인 정이 어쩔 수 없이 드러났다.

피올은 입안의 여린 살을 잘근잘근 씹으며 생각했다. 저 약아빠진 새끼가 이러려고 힘든 티를 냈구나.

“이모님, 이게 제 최선입니다.”

“사자의 후계자가 먹잇감을 그냥 놔준다고? 나중에 이런 식으로 일을 묻어버렸다는 게 밝혀지면 무슨 꼴을 당할지 알고 이러는 거냐?”

“뭐 어떻습니까. 제 능력이 여기까지인 것을요. 저는 이런 비상시국에 노르드 제독의 자리를 메울 만한 능력도 없고, 싫다는 사람 을러대며 자리에 앉혀놓고 철저히 감시할 만한 성격도 못 됩니다.”

“…….”

“작전이 실패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 정도가 제가 할 수 있는 전부입니다.”

스트라스티가 그때까지도 쥐고 있던 카드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다른 모양의 왕관을 쓴 왕이 둘, 서로 다른 장식물을 든 사제가 둘, 검을 쥔 기사가 셋. 그대로 냈다면 라비린은 반드시 졌을 것이다.

“라비린, 네가 모든 걸 말하지 않았다는 걸 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냐?”

라비린은 쓴웃음을 지었다. 과연 스트라스티, 감이 좋고 머리도 좋고 거기에 경험까지 풍부한 산트렘 기사단장이었다.

“솔직히 말해라. 나는 곧장 국왕전하께 말을 올릴 수 있고, 타우레드를 짓밟을 수도 있어. 산트렘의 기사는 본래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이라는 거, 너도 잘 알 텐데?”

“잘 알죠. 하지만 이모님, 이모님은 지금 ‘전직’ 산트렘의 기사잖습니까? 현직이실 때도 그다지 애정은 없던 직장인 거 압니다.”

“……흐음, 더 말해보련?”

“우선, 노르드 제독이 끌어들인 건 해적이 아니라 살론의 첩자입니다.”

스트라스티의 미간이 왈칵 구겨졌다. 뒤로 물러나 있던 피올마저 신음성을 흘렸다.

“동기는 말씀드린 그대롭니다. 발톱섬에 인간이 발을 디디면 재앙이 일어난다는 민간의 소문을 철석같이 믿고 있더군요. 미신도 못 될 헛소문에 연연하는 자가 제독이라는 게 믿기지 않긴 합니다만, 아무래도 우리의 적은 용이니까 아주 이해 못 할 바는 아닙니다.”

뱃사람들이 사랑하고 증오해 마지않는 바다의 신 페즈날은 여인의 상반신에 물고기의 꼬리가 달린 모습으로 주로 표현된다. 그녀의 비늘 달린 꼬리는 종종 용의 하반신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노르드 제독은 살론의 첩자가 멜브란트의 해안선을 탐사하고 수심을 측량하는 것에 협조하는 대가로 살론에서의 안락한 노후를 약속받았습니다.”

“살론은 마법망 강화 및 복구 작업에 꽤 관심이 많은 나라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거기 마법망이 아주 걸레짝이었다며. 그런데 발톱섬에 인간이 들어가는 걸 막겠다는 치와 손을 잡아?”

“살론은 뱃사람과 마법사의 나라잖습니까. 나름대로 복잡한 사정이 있겠죠. 거기까지 알아내는 건 제 몫이 아닌데 구태여 힘 뺄 이유가 있습니까? 세상 모든 사람이 이성적인 사고과정을 거쳐서 결론을 내는 건 아니잖습니까. 마법사도 사람이니 비슷하겠죠.”

“흠…….”

“이모님. 무려 제독씩이나 되는 자가 살론의 첩자와 손잡은 사건입니다. 연루된 자가 그 혼자일 거란 추측은 현실도피에 가깝습니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첩자를 낱낱이 골라낼 만큼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니 사자의 이름만 있지 애송이 딱지는 떼지도 못한 제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습니까?”

라비린이 우는 소리를 하며 쌓여 있던 카드를 뒤집었다. 마침 검을 쥔 기사 카드가 나왔다. 그는 그 카드를 스트라스티가 내려놓은 카드에 더했다. 기사 넷이 모두 모인 패가 휘황찬란했다.

“저는 이모님이 도착하시기를, 산트렘의 기사들이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누구도 부정 못할 권위와 명예로 노르드 제독을 압박하는 걸 공개적으로 보여주려고요. 그러면 잔챙이 협조자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행동을 삼갈 테고, 작전의 성공률은 자연히 오르지 않겠습니까.”

쿵, 스트라스티가 테이블에 발을 올렸다. 낡았어도 튼튼한 의자가 삐걱삐걱 비명을 질렀다.

“우린 ‘전직’인데? 안 하면 어쩌려고. 야아, 솔직히 말해 산트렘의 기사는 멜브란트 왕실에 그다지 충성스럽지도 않아. 그거 말곤 길이 없어서 이러고 있는 거지.”

피올은 순간적으로 나랍인 용병의 눈치를 살폈다. 귀를 닫고 도넛 모양 연기를 내뿜는 것에 열중하던 여자가 보란 듯 코웃음을 쳤다. 흥, 나는 너네 나라 내부사정에 관심 없어. 딱 그런 표정이었다.

“이모님이야 원할 때면 언제든 전직에서 현직으로 돌아가실 수 있는 분이고, 거기에 어떤 문제도 없으시겠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도 계실 거 아닙니까. 그분들을 위해 조카가 준비한 선물보따리라고 생각해 주시면 안 됩니까?”

“아하, 그런 거였냐? 대뜸 사직서 낸 거 이걸로 만회하라고? 하긴 막내 녀석은 그런 세심함이 부족하긴 해. 우릴 부를 때 뒷일까진 생각 안 했겠지.”

라비린이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피올이 할 말 많은 표정으로 나섰지만, 스트라스티의 제지에 막혀 입을 떼지 못했다.

“매력적인 제안이긴 해. 한데, 아베드 녀석과 산트렘의 기사가 얻을 이득은 명확해도 네가 얻을 이득은 영 보이질 않네. 그런 손해만 보는 거래는 사자 새끼 성미에 안 맞는 걸 내가 아는데, 혹시 내가 엉뚱한 짐작을 하고 있는 걸까?”

“이모님. 받을지 못 받을지 모를 답례품을 기대하고 선물을 준비하는 얼뜨기도 있습니까?”

“그게 왜 얼뜨기냐? 무조건 답례품을 받아낼 자신을 가지고 선물을 준비하는 놈이니 아주 머리가 팽팽 돌아가는 재간둥이지. 라비린, 네 재간은 저 멍청이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라는 걸 안다. 이 이모가 자비를 베풀어 기회를 줄 때 순순히 불어라.”

“몇 년 만에 만나는 조카를 이렇게 몰아붙이시다니, 이모님도 너무하십니다.”

“나한테 조카가 너 하나밖에 없는 건 아니거든. 안 그래도 너네 형제를 너무 편애하는 거 아니냐고 불만들이 많다.”

“하하……. 사자는 손해만 보는 거래를 하지 않는다는 건 저도 동의합니다. 저도 이 일로 얻는 이득이 있죠. 하지만 이모님, 그걸 지금 이 자리에서 논하기엔 밤이 너무 짧지 않습니까?”

자정은 한참 전에 넘겼고 몇 시간만 더 있으면 새벽별이 뜰 것이다.

스트라스티는 라비린이 자신이 이 제안을 거절하지 않으리라는 걸 예상하고 준비 작업까지 모조리 마친 뒤 찾아왔음을 짐작했다. 하다못해 놀자며 가져온 카드마저 공들여 조작한 물건이었다. 시기를 놓치면 조야한 선물조차 받지 못하고 손가락만 빠는 신세가 될 것이다.

그녀는 깊은 한숨을 쉬며 일어섰다. 허리춤에 매달린 검이 묵직했다. 하, 진짜 은퇴할 때가 됐나.

“괘씸한 조카 녀석 같으니라고. 이 늙어빠진 이모를 못 부려먹어 안달이 났어.”

“이모님이 워낙 대단하신 분이라 그런 거지요. 진짜 뒷방 늙은이가 되시면 그때는 일을 하고 싶어도 쉬기만 하셔야 할 겁니다.”

“어릴 적에는 그나마 좀 귀여운 감이 있더니, 크고 나서는 입이 아주 매워. 도대체 넌 누굴 닮았냐?”

“그야 이모님을 닮았죠. 제 덩치를 보세요, 이게 어디 중부인의 골격인가. 남쪽 동네에 갔더니 저더러 북부의 광부는 다 그렇게 몸이 크냐고 묻더군요.”

스트라스티는 라비린을 위아래로 쭉 훑어보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로샨이 라비린을 낳다가 죽을 고비를 넘긴 건 지금 생각해도 치가 떨리지만, 조카의 훤칠한 키와 당당한 골격은 보기만 해도 만족스러웠다.

“그렇지. 산트렘의 핏줄을 이은 사내라면 이쯤은 되어야지.”

울컥한 피올이 튀어나와 반박했다.

“대장, 그게 말이 돼요? 저 자식은 예외 중의 예외라고요!”

“네가 작은 거야. 어휴, 분명 내 딸이랑 똑같은 거 먹이며 키웠는데 넌 왜 키가 안 컸냐? 걘 여자앤데도 너랑 키가 비슷해. 클로드 놈을 닮아서 그런가? 쯧쯧, 하필 닮아도 그런 걸 닮았냐.”

피올을 향해 쯧쯧 혀를 차는 스트라스티는 라비린과 눈높이가 거의 같았다. 지금이야 군화를 신고 있지만 굽이 높은 여성용 구두를 신으면 라비린을 내려다볼 수도 있을 것이다.

어디 가서 작다 소리 들어본 적 없는 건 피올도 마찬가지이건만, 자신과 피가 이어진 두 사람이 이렇게 월등히 키가 크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는 좌절해서 고개를 숙였다.

내내 방관자적 태도를 고수하고 있던 나랍인 용병은 충격 속에서 그릇된 선입견을 하나 적립했다.

‘산트렘의 피를 이은 사람들은 다 키가 큰 모양이야.’

산트렘의 기사치고 키 작은 이 없고 그렇다고 그녀가 산트렘 지방에 갈 일도 없으니, 그녀의 편견이 깨질 날은 아마도 요원할 것이다.

‘전직’ 산트렘 기사단원들은 짐꾸러미 속에서 포도송이 문장이 새겨진 망토를 꺼내 두르고 메리디에스 해군기지를 가로질러 장교숙사로 향했다. 허리엔 검을 차고 발소리를 조금도 죽이지 않은 채 당당히.

불침번을 서던 병사들, 소변보러 나왔던 선원들 모두가 입을 헤 벌리고 산트렘의 기사들을 구경했다. 이틀 전에 기지에 도착했을 땐 거지꼴이 따로 없더니, 잘 먹고 푹 쉬어 반드레해진 얼굴에 똑같은 망토를 두르고 척척 소리 내어 걷는 걸 보니 정체 모를 위압감마저 느껴졌다.

“이렇게 보니까 멋지네……. 괜히 국왕전하의 검이라고까지 불리는 게 아니야. 근데 왜 이 밤에 자지도 않고 나와서 저러고 돌아다닌다냐. 씁, 놀라서 나오려던 오줌도 쏙 들어갔다.”

“지저분한 얘기는 왜 하냐? 더러운 새끼. 어, 장교숙사 쪽으로 간다. 보고 안 해도 되나?”

“음……. 산트렘의 기사잖아? 괜찮지 않을까? 검을 차고 있긴 해도 딱히 칼질하겠다고 날뛰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아 씨, 메리디에스는 내 앞마당 같은 곳인데 남의 집 새끼들이 검차고 돌아다니는 거 보니까 기분 이상하네.”

“그러니까 말이야. 출정일까지 며칠 남지도 않았는데 찝찝하게스리. 안 되겠다, 나 보고 좀 하고 올게.”

평소 산트렘의 기사니 뭐니 해 봤자 다 땅강아지 새끼들이라고 욕을 해대며 자존심을 챙기던 게 해군 장교들이었다. 움츠러든 병사들은 기댈 곳 찾는 아이처럼 간부진을 찾았으나, 그들은 병사들의 사기를 일일이 챙길 정도로 여유가 있지 않았다.

라비린과 공모하여 산트렘의 기사들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장교들은 기꺼이 그들의 안내역을 자처했다. 자세한 사정을 몰랐던 이들 대부분은 산트렘의 기사의 등장에 침묵과 방관을 선택했다.

일부 장교들이 배신감과 적대감을 드러내며 앞길을 막았으나, 산트렘의 기사들은 그들의 목숨을 아껴 걸음을 멈출 만큼 자비롭지 않았다. 속도가 조금 늦춰졌다 싶을 때마다 어김없이 피가 튀었다.

“배신자 새끼들!”

라비린은 웃옷자락에 튄 피를 탁탁 털어내며 한숨을 쉬었다. 허벅다리에 구멍이 뚫린 장교가 죽일 듯 노려보는 시선이 아주 따가웠다. 검을 쓴 사람은 산트렘의 기사인데 왜 적의는 자신이 사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카론 경……. 이렇게까지 피를 보지 않아도 됩니다.”

“피를 보긴 뭘 봤다고 잔소립니까? 병신을 만든 것도 아니고 죽인 것도 아닌데. 얘들아, 안 그러냐?”

“맞습니다!”

“산트렘의 기사가 된 뒤로 이렇게 손속에 자비를 둔 적이 없습니다.”

어느 장교가 이끌고 온 병사들을 죄다 쓰러뜨린 산트렘의 기사들이 휘파람을 불며 그녀의 말에 동조했다. 흰 얼굴에 튄 피가 문신처럼 보일 정도로 선명한데도 말이다.

“죽이지는 않았지만 곧 죽을 것 같잖습니까…….”

“전쟁터도 아니고 기지 안에서 치료 못 받아 뒈지는 놈들은 언제 죽어도 죽을 놈들입니다.”

길을 안내하던 장교들이 스트라스티의 대답을 듣자마자 라비린에게 사나운 시선을 보냈다. 이렇게까지 할 거라고 하진 않았잖아, 뭐 이런 내용이 담긴 눈빛이었다. 라비린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문질렀다.

피올은 안쓰러움 반, 고소함 반을 섞어 라비린의 어깨를 두들겼다.

“대장이 나서서 피를 안 본 때가 없어. 뒷감당하려면 좀 힘들겠지만……. 기운 내!”

“흥, 이 일 뒷감당을 내가 할 것도 아닌데 기운 낼 게 뭐 있냐.”

생각지도 못한 말에 놀란 피올이 라비린을 붙들었지만, 그는 솜씨도 좋게 빠져나가 스트라스티의 옆에 섰다. 그들은 어느새 노르드 제독의 방 앞에 다다른 상태였다. 문에 붙은 아홉 마리 물고기의 문장을 확인한 스트라스티가 눈살을 찌푸렸다.

“제독이 이 안에 있는 게 확실해? 이렇게 시끄럽게 왔는데도 열어보지도 않잖아. 앞을 막아서는 놈도 없고.”

“앞을 막을 만한 놈들은 경들이 다 처리하지 않았습니까……. 열어보지 않는 거야 열어볼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니까 그런 겁니다. 카론 경, 설마 제가 산트렘의 기사만 믿고 일을 진행했겠습니까?”

라비린이 얄밉게 웃으며 손잡이를 돌렸다. 당연히 잠겨 있을 거라 생각했던 문이 매끄럽게 열렸다. 마법등 불빛이 핏물 묻은 복도로 쏟아졌다.

제독은 혼자 있지 않았다. 카프러스가 꽁꽁 묶이고 재갈까지 물린 노르드 제독의 목에 검을 들이대고 있었다.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문 방향을 바라보던 노르드 제독이었지만, 들이닥친 사람들의 면면을 보자 결국 눈이 검게 죽었다.

“역시 베텔 경은 철두철미하군요. 포박하고 재갈 물려놓은 걸로 모자라 검까지 들이대고 있는 겁니까?”

“벨키스 경이 약속보다 많이 늦어서 말이죠. 하마터면 못 기다리고 확 죽여 버릴 뻔했습니다. 제독씩이나 되는 자가 미신에 홀려서 타국의 첩자에게 해안선 측량을 허가하다니! 이런 놈에겐 숨 쉬는 공기도 아깝습니다.”

“경, 설마 진심으로……. 아 예, 진심이군요. 안 죽여줘서 고맙습니다…….”

“아아, 반가움의 인사는 나중에 해. 지금은 내 시간이잖아?”

스트라스티가 두 사람 사이에 불쑥 끼어들었다. 그녀는 노르드 제독 앞에 서서 보란 듯 제 망토를 펼쳐 포도송이의 문장을 드러냈다.

퍽 얌전하게 앉아 있던 노르드 제독이 갑자기 격렬하게 몸을 흔들며 소리를 질러댔다. 그래봤자 재갈 물린 입에선 신음 소리밖에 안 나고 몸은 꽁꽁 묶인 상태라 곧 바닥을 기는 지렁이 신세가 되었지만, 기세만은 대단했다. 하나 스트라스티는 지겨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턱을 긁적거렸을 뿐이었다.

“어딜 가나 머리통 굳은 놈들이 하는 말은 다 똑같단 말이지. 입을 막아놨는데도 알겠네. 제독, 들어봐. 나는 이 ‘전직’ 산트렘의 기사들을 이끄는 대장이 맞고, 보다시피 여자인 것도 맞고, 결혼은 했고, 슬하에 자식도 있어. 내 남편은 어디 모자란 등신이 아니라 사지 멀쩡하고 정신 똑바른 멋진 남자야. 기가 막힌 포도주를 빚어내는 장인이지. 그리고 내 성은 카론이고, 그 카론 남작가의 일원이 맞고, 산트렘 지방에서는 여자가 말 타고 검잡는 게 그리 흠이 아니야. 이만하면 궁금증은 풀렸겠지?”

“우으으으읍! 우우웁! 웁웁!”

“벨키스 경. 혓바닥 움직이는 데 쓰는 열량도 아까운 이 작자에게 아까 우리가 나눴던 대화를 복기해 줘야 하는 건가? 설마, 아니지?”

다행히 그러지 않아도 괜찮았다. 성실하고 꼼꼼한 카프러스가 미리 말을 해뒀기 때문에. 스트라스티는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확인 작업마저 건너뛰었다.

“딱 봐도 이야기책에나 나올 법한 기사가 그렇다는데 그렇겠지.”

오래도록 산트렘의 기사를 동경해 왔던 카프러스가 몹시 형용하기 어려운 표정을 지었지만, 스트라스티에겐 익숙한 일이었다. 기사대장이 여자라는 사실에도 반발하거나 의심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카프러스는 존중받을 자격이 있었다.

“티치아는?”

“옆에 달고 계십니다.”

“오? 네가 티치아였냐?”

가장 먼저 나서서 산트렘의 기사들을 안내했던 장교가 바로 티치아였다. 라비린의 포섭대상 1순위였고 포섭된 뒤에는 그가 다른 장교들을 장악하는 데에 큰 도움을 주었던 티치아. 노르드 제독을 허수아비로 만든 뒤에는 그의 역할을 대신해 줄 제독의 보좌관.

“네, 제독 대행 티치아 몰크스입니다. 산트렘의 기사분들께서 보여주신 정의감과 단호한 행동력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조금 전까지 라비린을 향해 무언의 항의를 보내고 있던 티치아가 스트라스티를 향해 깔끔하고 박력 있는 경례를 올려붙였다. 묵묵히 검에 묻은 피를 닦고 있던 산트렘의 기사들이 일제히 눈을 굴려 티치아를 바라보았다.

“이런. 아까도 분명 말했지만 우린 지금 ‘전직’이야. 포도송이의 문장을 쓸 자격은 있지만 산트렘의 기사로서 가진 특권을 쓸 수 있는 상황은 아니지.”

“잘 알고 있습니다. 깊은 배려심으로 저희의 자정작업을 도와주셨을 뿐이라는 것을요. 덕분에 진짜 큰일이 벌어지기 전에 막을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오호. 이런 식으로 얘기가 된 건가.”

라비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전직에서 현직이 된 산트렘의 기사들이 노르드 제독의 매국 행위를 제대로 건져 올려 실적을 쌓을 예정이지만, 티치아에게도 거기까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그 기회를 잡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티치아의 역량에 달린 일이었다.

“눈치도 빠른 자식. 위에는 너 같은 놈들이 올라가더라.”

스트라스티는 칭찬이랍시고 한 말이었는데, 티치아가 그걸 알아들었을지는 의문이었다. 아까부터 좀처럼 노르드 제독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이리저리 눈을 굴리던 그는, 대충 상황이 정리되는 듯하자 병사들의 혼란을 수습하려면 자신이 직접 가봐야 한다며 훌쩍 나가 버렸던 것이다.

“냉큼 제독 대행이라고 자기소개를 하기에 싹수가 노랗게 잘 자랄 녀석인 줄 알았더니 그건 또 아닌 것 같네. 라비린, 네가 뭔 수로 저치를 설득했는지는 모르겠는데, 감시 잘 해야겠다. 꼭 저런 놈들이 갑자기 꼭지가 돌아서 배신을 때리거든.”

“알고 있습니다. 꼭 말해두고 가도록 하죠.”

“……뭐?”

“이모님, 전직 산트렘의 기사들과 현직 산트렘의 기사들 사이에 뭔가 연결고리가 있어야 남들 보기에 자연스럽지 않겠습니까? 산트렘의 기사 한두 명이 남아서 저들의 행태를 감시하면 딱 맞겠습니다.”

라비린이 산트렘의 기사들 중 한 명을 콕 집어 가리켰다. 지목 당한 기사, 발레리가 있는 대로 미간을 찌푸렸다. 나요? 왜요?

“발레리 경이 남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습니다. 오스미다 전하의 측근 시녀로 몇 년을 지냈으니 관련된 경험도 풍부하고 잘 해낼 겁니다.”

납검하고 쉬고 있던 발레리가 벌떡 일어났다. 주변의 다른 기사들이 냉큼 달려들어 그녀의 팔다리를 붙들고 매달렸다. 발레리, 참아! 대장님 앞이야! 아악, 대장님, 구경만 말고 말려줘요!

“이놈의 조카 새끼가 진짜……. 산트렘의 기사에 의지할 생각은 없었다더니만, 이제 보니까 그게 영 빈말이었네? 명분도 감시도 우리에게 맡기고 너는 뭐 할 건데? 우아하게 실적 올리기?”

“설마요. 그런 건 성질에 안 맞아서 못 합니다.”

“그럼?”

“발레리 경과 그녀를 도울 기사를 빼내면 전력에 구멍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그걸 메워야죠.”

라비린이 자기 자신, 그리고 제 뒤를 받치고 선 나랍인 용병을 가리켰다. 스트라스티는 뻐근해지는 뒷목을 주물렀다.

“야 인마. 혹시 너……. 발톱섬에 상륙할 인원에 끼워주지 않는다고 이런 짓 벌인 거냐? 아니지? 제발 아니라고 해라!”

“예, 아닙니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상큼하게 웃으며 아니라고 하는데, 조금도 믿음이 가지 않는다. 그건 스트라스티만의 감상이 아닌 듯, 난리를 치면서도 입은 다물고 있었던 발레리가 줄줄이 욕을 뱉기 시작했다.

“발레리 경이 왕궁에서 지내는 동안 화가 많이 쌓였나 봅니다.”

“널 보고 있으면 없던 화도 치솟을 지경인데 그럼!”

스트라스티가 홱 검을 휘둘러 노르드 제독의 재갈을 끊었다. 축축하게 젖은 천 덩어리를 뽑아 내던지고 제독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이제 와서 물어보려니 좀 민망하긴 한데, 제독 당신 진짜 첩자와 손을 잡았나?”

“땅개 새끼 주제에 감히 어디서……! 컥!”

노르드 제독의 명치에 스트라스티의 무릎이 꽂혔다.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컥컥거리는 꼴이 몹시 불쌍했지만 상대가 나빴다. 스트라스티는 평생 동정심이라는 미덕을 발휘해 본 일이 손가락에 꼽을 정도인 사람이었다.

“이 갯강구만도 못한 새끼가 제 처지도 모르고 입을 함부로 놀리고 있어. 잘 들어라, 산트렘의 기사가 한 일은 어떤 상황에서도 되돌려지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우린 전직 산트렘의 기사이기에 네놈에게 변명할 기회를 주는 거야. 아까운 목숨이나마 부지하고 싶으면 똑바로 말해!”

“큭……. 발톱섬에 발을 들이면…… 어차피 다 죽어. 다 죽을 거라고! 메리디에스의 병사들, 선원들, 저 멀리서 자기들은 안전할 줄 알고 있는 멍청한 국왕까지, 전부 다! 모조리 뒈져 버릴 거다!”

“이 미친 새끼가!”

스트라스티가 노르드 제독의 머리통을 세차게 후려쳤다. 일격에 뽑혀나간 이빨 서너 개가 바닥을 굴렀다.

“이 마녀야, 네가 네 부하와 동족을 사지로 밀어 넣는 거다. 이제부터 죽는 사람은 다 네 책임……!”

“이빨 빠진 영감탱이가 발음도 좋아.”

조금 전 노르드 제독의 멀쩡한 이빨을 뽑아내 이빨 빠진 영감탱이로 만든 장본인이 그의 뒷덜미를 쳐서 기절시켰다. 스트라스티는 화끈하게 머리를 달구는 열을 식히려 고개를 흔들었다. 배에 탄 것도 아닌데 눈앞의 풍경이 일그러졌다.

“후, 이런 미친놈이 어떻게 제독 자리에까지 올라왔지?”

“그야, 남부엔 산트렘의 기사가 없잖습니까.”

“이놈의 조카 새끼, 예쁘지도 않은 게 말은 잘하지. 로렐라이 대리인 노릇하는 몇 년 동안 혓바닥만 단련했냐?”

라비린의 과거 경력이 갑자기 폭로됐다. 일찍부터 사정을 알고 있었던 나랍인 용병만 빼고 다들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가운데, 가장 깊은 배신감을 느낀 사람은 바로 피올이었다. 가문을 버리고 이름을 지운 건 자신이 먼저였고 따져 보면 굳이 알려줄 필요도 없는 일인데도 이상하게 속이 울렁거렸다.

라비린이 쏟아지는 시선을 받으면서 멋쩍게 웃었다.

“알고 계셨습니까?”

“그럼 모르겠냐? 타우레드의 사자 새끼들은 죄다 고위험군 인물이다. 감시하는 게 당연하지. 내가 네 성격을 빤히 아는데, 넌 발톱섬 따위에 기어들어 가기보다는 여기서 노르드 제독을 감시하는 쪽이 훨씬 적성에 맞는 놈이야.”

“글쎄요……. 상황이 위중한데 저는 미신을 믿지 않으니, 조그마한 도움이라도 되고자 내린 결정이라고 생각되진 않으십니까?”

“웃기고 있네. 그렇게 앞뒤 안 가리고 날뛰는 건 아베드 놈이나 그러는 거지. 네 행동엔 반드시 계산이 있다. 너는 한 가지만 노리고 움직이지 않아. 네 형제 중에서도 로샨을 채간 사자 새끼를 제일 많이 닮은 게 너다.”

“이모님께서 부족한 조카를 너무 높게 평가하시는 거 아닙니까. 편애가 심하다 원망을 들으신다더니 그럴 만도 합니다.”

“편애는 편애고, 평가는 평가다. 그런데 얻을 것은 없고 위험부담만 큰 발톱섬 입도에 함께하겠다니 이놈 새끼가 돌았나 싶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

“솔직히 말해 제독 대행을 하기엔 네 역량이 부족하다는 말 같은 건 눈곱만큼도 믿어지지 않는다만, 그 변명을 십분 받아들여 주마. 발레리를 남겨줄 테니 같이 일해라. 대리인 노릇하느라 비어버린 경력을 채우는 데에 충분한 업적을 쌓아.”

대장님, 믿었는데! 발레리가 애처롭게 울부짖었다. 다른 기사들이 허겁지겁 그녀의 입을 막았다. 스트라스티가 어디서 개가 짖나, 싶은 표정으로 귀를 후볐다.

“이모님의 배려는 감사합니다만, 저는 발톱섬에 갈 겁니다. 이제나저제나 소식만 기다리고 있는 거야말로 제 성질머리에 안 맞는 일입니다. 혓바닥만큼이나 검도 날카로우니 제 목숨은 그리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라비린의 태도는 굳건했다. 반드시 같이 가고야 말겠다는 각오가 시퍼렇게 빛났다. 젊은 기사 하나쯤은 눈빛만으로 찍어 누를 수 있을 듯하던 스트라스티의 기세가 살짝, 아주 살짝 꺾였다.

“뒤를 받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등을 찌르는 칼이야말로 가장 위험해.”

“이모님……. 이번에 발톱섬에 가지 않으면, 이렇게 좋은 기회가 왔는데도 가지 않으면 저는 평생 후회할 겁니다. 살면서 선택의 기로에 설 때마다 이 순간을 떠올릴 겁니다.”

“……사랑이 그리 좋든? 꼭 네 손으로 구해야 만족하겠어?”

라비린은 조금도 표정을 바꾸지 않았지만, 그의 귓불이 살짝 붉어지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크게 한숨을 내쉰 스트라스티가 양손에 얼굴을 파묻고 웅얼거렸다.

“이런 점까지 제 아비를 닮다니……. 하여간 사자 새끼들이란…….”

“이모님.”

“시끄러워. 생각 중이야, 방해하지 마.”

“방해하려는 게 아니라, 당장 밖에 나가보셔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밖은 왜? 용이라도 온대?”

“네.”

발레리와 몸싸움을 하던 산트렘의 기사들도, 조카의 불쌍한 짝사랑을 응원해야 하는 것인가 고민하던 스트라스티도 넋 빠진 표정을 지었다. 라비린은 슬금슬금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소매로 가리고 창문을 가리켰다.

“사랑에 눈멀어 동족살해의 죄를 저지를 각오를 마친 용이 곧 도착할 예정입니다. 어디보자, 용의 속도를 생각하면…….”

으아아아악! 용이다! 용이야! 용이 진짜 있는 거였어? 설마 우리 진짜 용이랑 싸우는 건가? 미친, 나는 안 믿었는데! 페즈날이시여! 등신아, 용은 하늘을 나는데 바다의 신한테 기도해서 뭐 해!

라비린이 말끝을 흐리기를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창 밖에서 비명이 울렸다. 노르드 제독에게 새로 재갈을 물리고 꼼꼼하게 포박을 확인하던 카프러스가 피식 웃었다.

“과연 멜브란트 해군의 정예병이 다 모여 있다는 메리디에스 기지답습니다. 비명을 지를 정신이 있군요. 아르젠 백작이 너무 시끄럽게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용은 포식자라 때때로 인간이 먹이로 보인다는데, 혹여 누가 공격하기라도 하면……. 카프러스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스트라스티가 신속하게 밖으로 뛰쳐나갔다. 산트렘의 기사들 역시 그녀의 뒤를 따랐다.

순식간에 휑뎅그렁해진 방에서 라비린이 어깨를 떨며 웃었다.

“베텔 경, 많이 늘었습니다.”

“누구 덕분입니다.”

“딱히 가르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어쩜 이렇게 잘 배우셨습니까?”

“저는 언제나 우수한 학생이었습니다.”

새침한 대답으로 라비린을 다시 웃긴 카프러스는 노르드 제독을 침상에 집어던지고 깊게 심호흡했다. 용의 존재감 때문에 손가락 끝이 저릿했다.

셰비언은 라비린과 약속한 날짜를 정확하게 지켜 메리디에스에 도착했다. 시간은 좀 늦었지만 너무 이르게 오는 것보단 나았다. 덕분에 용이 아니라 산트렘의 기사의 권위를 빌려 일을 해결할 수 있었으니까.

메리디에스 해군기지에 필요한 이들이 모두 모인 시점은 아카시아는 모두 지고 장미가 피어나기 시작한 5월 중순. 예정된 출정일까지는 고작 나흘, 나흘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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