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43. 포르티투도 (46/62)

chapter 43. 포르티투도

「검을 잡는 것만이 용기라던가?」

역사 깊은 극장과 전시장, 갤러리가 밀집된 리즈비아 거리. 눈 높은 관객의 심미안을 만족시킬 우아한 조각과 글귀가 새겨진 건물 사이를 뚫고 뒤쪽으로 들어가면, 진한 잉크 냄새가 진동하는 골목이 나타난다. 신문사와 출판사, 그리고 그들을 상대하는 인쇄업자들의 작업장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황혼이 완전히 사그라지고 나서야 조용해지고 동쪽하늘이 어슴푸레 밝아지기 전부터 시끄러워지는 곳이지만, 달이 하늘 한가운데를 가로지르고 별이 차갑게 타오르는 시간에는 그 어느 거리보다 조용한 곳이었다.

그런데 오늘 밤은 예외가 있었다. 두꺼운 커튼을 내려 창문으로 새어나가는 빛을 감춘 작은 사무실에 잔뜩 긴장한 사람들 대엿이 모여 앉아 서로의 눈치를 본다. 그들 가운데, 누가 봐도 상석인 자리에 앉아 있던 초로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날의 진실을 신문에 실어서…….”

“글쎄요.”

“저도 별로……. 제보자가 이름을 밝히지 말아달라고 했잖습니까. 사장님은 소스가 확실하다고 말씀하시지만, 경험 상 그런 건 별로 믿을 만한 제보가 못 됩니다.”

“솔직히 굳이 해야 할 이유도 없는 거잖습니까? 왕실에서도 싫어할 거고……. 자칫 치안대에게 걸리기라도 하면…….”

치안대 얘기가 나오자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보통 사람들은 소매치기를 단속하고 빈집털이를 잡으러 다니는 일이 치안대의 주 업무라고 생각한다. 어쩌다 살인사건이 나고 치안대가 그를 해결하는 모습을 보면 그제야 좀 놀라워하다가 금세 잊어버린다.

하지만 이들은 기자였고 신문사의 사장이었고 인쇄업자였다. 남들은 모르는 정보를 엿보기에 충분한 위치에 있었다.

1차 괴물 사태가 있기 전까지 치안대가 얼마나 많은 괴물 사건을 묻어왔는지, 2차 괴물 사태가 있기 전에 얼마나 잔인하고 끈질기게 괴물 찌꺼기를 소탕해 왔는지, 그리고 그들이 왕의 검이 되어 움직일 때 뿌리는 피가 얼마나 붉고 짙은지.

그리고 그 치안대는 수확제 마지막 날에 있었던 붉은 용 사건에 대해 침묵하길 요구했다. 용이 나타났다는 사실 자체는 숨길 수 없으니 그 부분에 대해서는 보도하더라도, 그 내막을 캐려 한다거나 진짜 목격자들에게서 목격담을 모은다거나 하는 행위는 금지라고 말이다.

언론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모욕적이라고 느낄 만한 일이지만, 그들은 이런 행태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이번에도 비슷했다. 잠깐 눈 감고 귀 막고 광대 노릇하며 원하는 글을 써주면 무사히 넘어갈 수 있을 게 분명했다.

서로 눈치를 보며 고개를 주억거리는 사람들이 하고 있는 생각이야 뻔했다. 이 모임을 주선한 남자가 깊은 자괴감 속에서 한숨을 삼키는데, 구석자리에 존재감 없이 앉아 있던 젊은 기자가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하지만……. 레이디 오드리가 끌려갔다지 않습니까.”

오드리의 이름이 나오자 둘러앉은 이들의 안색이 푸르죽죽하게 변했다.

바로 몇 시간 전, 황혼을 뒤집어쓴 조그마한 마법사 소녀가 초로의 남자가 운영하는 신문사의 문턱을 넘었다. 그리고 자신이 알아낸 진실을 모조리 토해냈다.

“제가 하는 말은 전부 진실이에요. 문장을 띄워놓고 맹세할 수도 있어요. 붉은 용이 레이디 오드리를 납치했어요!”

마법사의 맹세가 아무리 무겁다 한들, 그는 모른 척해야 했다. 그에겐 가족이 있었고, 친구도 있었고, 책임져야 할 신문사와 직원이 있었다.

하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평소 친하게 지내던 기자와 신문사 사장들, 인쇄업자들에게 심부름꾼을 보내놓은 뒤였다. 제정신이라면 마땅히 없던 일로 해야 할 것을, 그는 그러지 않았다.

가로등이 픽픽 꺼지는 어두운 골목에서 괴물을 이끌고 달리던 흰 망토의 잔영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만날 장소와 시간을 지정한 것뿐인 메시지에서 어떤 불길함이라도 느껴졌는지 초대에 응한 이들은 절반도 되지 않았다. 그 절반도 치안대의 위협에 두려움을 느끼고 엉덩이를 뺐다. 그래도 양심은 있어서, 오드리의 이름 앞에서 죄책감과 부채감 비스무리한 걸 느끼기는 하는 모양이었다.

“아르젠 백작이 레이디 오드리를 구하려면 인간의 도움이 꼭 필요하다고 그랬답니다.”

왕실이 알아서 잘하겠지, 용이 그녀의 연인인데 우리 주제에 무슨 걱정을 하나, 따위의 말을 주워섬기던 사람들이 크게 놀라 몸을 기울였다. 어떻게든 발을 빼고 싶어 하던 조금 전과는 분위기 자체가 달랐다.

“인간의 도움? 레이디 오드리는 작위를 받았으니 당연히 왕실에서…….”

“잠깐, 용이 왜 인간의 도움이 필요합니까? 용들의 싸움에 인간이 무슨 역할을 할 수 있고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다고?”

“붉은 용이 근처에 있는 것만으로도 몸이 죄다 굳어 움직이질 못했다는데 방패막이로 쓰겠다는 겁니까?”

“아, 다들 흥분하지 말고 말 좀 들어봅시다. 왜 인간의 도움이 필요하단 겁니까? 무슨 이유로?”

남자의 가슴이 희망으로 두근거렸다.

“붉은 용을 상대하는 건 아르젠 백작 혼자서 할 수 있지만, 싸우는 와중에 레이디 오드리를 빼내는 건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그 부분을 인간에게 맡기고 싶은 모양입니다. 인간이라면 할 수 있다고 말이죠.”

그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 모두가 아찔한 충격을 경험했다. 그저 혼자서는 치안대가 무서우니 같이 선을 넘어보자고 사람을 불러 모은 게 아니었다. 단순히 그날 있었던 일을 싣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인간에게 마법을 도둑맞은 용이 인간에게 도움 요청을 한 것이다. 그에게 충분한 도움을 줄 수만 있다면, 그리하여 그가 도둑맞은 마법에 대한 보상을 할 수만 있다면 인간은 훔친 마법으로 번영을 이뤘다는 자책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왕실은 뭐랍디까?”

배불뚝이 인쇄업자가 흥분해서 일어났다가 눈총을 받고 주섬주섬 자리에 앉았다. 남자는 흐릿하게 웃었다. 기대에 찬 눈빛들이 따가웠다.

“흔쾌히 도와주겠다고 했답니다.”

“오……!”

둘러앉은 사람들의 얼굴에 모처럼 화색이 돌았다. 그들은 순수하게 기뻐했다. 왕실이 오드리를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했다는 사실이 그들을 기쁘게 만들었다.

참으로 공교롭게도, 이 자리에 둘러앉은 이들 모두가 2차 괴물 사태를 몸으로 겪어보았다. 더불어 오드리의 질주를 직접 눈으로 본 사람들이기도 했다.

흰 케이프 코트를 걸치고 검은 말을 타고 괴물을 이끌며 질주하던 초록 머리칼의 벨트람은 그들에게도 더없이 인상적인 장면으로 남아 있었다. 그건 잔뜩 겁먹어 찾아온 화가가 건넨 포스터를 돈도 받지 않고 신문에 실어줄 정도의 호감이 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오드리에 대한 호감이 치안대의 위협을 극복할 정도로 지극하지는 않았다. 남자는 여전히 꼬리를 말고 있는 지인들에게 좀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여러분, 달튼 제도 기억합니까? 봉쇄령이 내려져서 난리가 난 그 항로에 붉은 용의 둥지가 있다더군요. 아르젠 백작이 그 둥지를 가라앉혀 버릴 생각으로 봉쇄령을 요구했던 거라고 합니다. 전에는 다른 배가 휘말리지 않도록 막기만 하는 게 해군의 임무였지만, 이젠 레이디 오드리를 구출하는 것도 임무로 추가될 겁니다.”

“세상에, 듣기만 해도 흥분되는 얘기입니다……!”

“무슨 옛날이야기 같습니다. 나쁜 용에게 납치된 공주를 구하는 용감한 기사는 이제 동화책으로도 안 나오는데!”

“요즘 동화책 유행은 신화의 재구성입니다. 초록 머리의 벨트람이 특히 인기 있죠.”

“오, 그거 저도 봤습니다. 죽음의 신 칼레이의 머리칼은 은발이더군요!”

둘러앉은 사람들이 낄낄 웃으며 농담을 주고받았다. 한차례 웃음이 지나간 후, 아까 오드리의 이름을 꺼냈던 젊은 기자가 문득 생각난 것처럼 물었다.

“그런데 이 얘길 왜 굳이 감춥니까? 설마 레이디 오드리를 구하는 걸 사람들이 반대할까 봐서요?”

마치 그런 사람은 있을 리가 없다는 듯한 말투였다. 만약 메너트가 들었으면 그런 사람 여기 있다고 화를 냈을 게 분명했다. 기자보다 좀 더 세상을 오래 살아본 사람들이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젊은 기자는 아주 진지했다.

“구하지 않을 거라면 모를까, 레이디 오드리를 구하기로 약속해 놓고 사실을 감추는 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상대는 보통 사람도 아니고 용인데요. 무려 마법의 주인이잖습니까.”

당연히 이상하다. 하지만 왕실이 하는 짓 중에 이상한 것이 어디 한두 가지였던가? 이상한 걸 이상하다고 말했다가 치안대에게 쓱싹 당하는 것보다는 모른 체하는 게 더 낫다. 목숨은 귀한 것이니까.

배불뚝이 인쇄업자가 세상물정 모르는 젊은 기자에게 점잖은 훈계를 하려 하는데, 이 모임의 주최자가 덥석 끼어들었다.

“여러분……. 마법망 붕괴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습니까?”

기자, 신문사 사장, 인쇄업자……. 이들은 마법도구를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보통 사람들이었다. 마법사가 아니었으니 당연히 마법망 붕괴에 대해서는 몰랐다. 채 감추지 못한 호기심이 그들의 시선에서 얼핏 드러났다. 남자는 자신이 설득 당했듯이 이들도 설득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배불뚝이 인쇄업자는 꽤 오래된 형식의 인쇄기를 갖고 있었다. 마법의 힘을 빌리지 않고 순수하게 사람의 손으로 활자를 끼워 맞추고 레버를 돌려가며 인쇄해야 하는 구식이었다. 번거롭기도 하거니와 쓰기도 까다로워 먼지만 뒤집어쓰고 있는 물건이지만, 어떤 기사를 찍어냈는지 추적당할 염려가 없어 비밀스러운 작업에 아주 적격이었다.

인쇄업자가 두툼한 살집이 잡힌 손가락으로 섬세하게 인쇄기를 닦으며 한탄했다.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이게 내 행운의 부적이 될 거라 그랬는데……. 빌어먹을 영감탱이, 행운의 부적은커녕 내 목에 걸릴 밧줄이 되겠네.”

젊은 기자는 인쇄업자의 한탄은 들리지도 않는 듯, 마지막으로 기사를 다듬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인쇄기에 넣을 종이를 챙기던 신문사 사장이 픽 웃으며 인쇄업자의 말상대를 해주었다.

“밧줄이 되든 망나니의 칼이 되든 인쇄 해줄 거면서 무슨 잔말이 그리 많습니까?”

“인쇄기에 들어가는 잉크 냄새 맡는 게 오늘이 끝일 것 같아 그럽니다.”

“기사 다 썼습니다!”

“어휴, 내 팔자야.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보겠다고 이런 걸 하겠다고 했을까……. 그것도 이런 야밤에!”

인쇄업자가 레버를 한 바퀴 돌릴 때마다 두툼한 팔뚝에 굵은 힘줄이 솟아올랐다가 가라앉았다. 신문사 사장은 눈길을 확 끌어당기는 자극적인 제목과 그에 맞지 않게 확신으로 가득 찬 어조의 기사를 후루룩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걸리면 치안대에게 목을 내놔야 할 신문의 탄생입니다. 오늘 돌아가면 다들 목부터 닦아두십시오. 잘릴 때라도 깔끔해야지.”

“어휴휴…….”

“사장님……. 말이라도 좋으니까 안 들킬 거라고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거짓말을 못하는 사람입니다.”

“오, 방금 그 거짓말 제법 그럴듯했습니다. 사장님이 젊은 시절에 거짓말을 얼마나 많이 하고 다녔는지 내가 아는데!”

금지된 일을 한다는 흥분과 들키면 죽을 거라는 공포는 시답잖은 농담 따먹기 따위로 해소되지 않았다.

기자는 제 기사가 종이에 찍히기 시작하자마자 갑자기 머리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사라졌다. 인쇄업자는 계속 보고 있다간 마음이 바뀔 것 같다며 신문을 신문사 사장에게 떠맡기고 도망쳤다. 신문사 사장은 평소 늘 오던 신문팔이 소년들이 아닌 뒷골목의 빈민 아이들에게 신문을 넘겼다.

사람들에게 돈을 받을 필요는 없고, 소리를 질러가며 이목을 끌 필요도 없으나, 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퍼지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당부하면서, 누가 시켰는지 입을 열면 가족들이 끔찍한 일을 당할 거라는 협박을 곁들였다.

빈민 아이들도 눈치가 있어 이 일이 위험하다는 걸 알았지만, 위험하고 더러운 공장에서 일주일은 꼬박 일해야 벌 수 있는 금액의 일당은 지나치게 큰 유혹이었다.

“나중에 또 불러주겠다고 약속만 해주시면 최고로 열심히 뿌릴게요.”

“오냐. 오늘 일을 제대로 해준다면, 다시 부를 땐 일당을 두 배로 주마.”

통 크게 제시한 보상은 빈민 아이들의 사명감을 자극했다. 발 빠르고 손 빠르고 눈치도 빠른 아이들은 브란젤 구석구석에 열성적으로 신문을 뿌렸다. 그게 어느 정도였느냐면, 교대 근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피올이 영광의 길에 막 발을 딛자마자 신문을 받았을 정도였다.

아니, 받았다기보다는 떠맡았다. 아이들은 신문을 피올의 품에 내던지고 순식간에 달아났다. 피올은 가슴을 때리고 떨어지는 종이를 반사적으로 움켜쥐고 뒤를 돌아보았다.

“야, 인마!”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그새 사람들 사이에 섞여 버린 아이들을 뒤통수로 구분하는 건 무리였다. 피올은 미간에 콱 잡힌 주름을 손가락으로 북북 문질러 폈다. 젊다 못해 어린 아내가 있는 놈은 지금부터 관리를 해야 한다며 쏟아지는 잔소리가 소낙비 같았다.

“호외를 돌리는 것도 아닌 것 같고, 무슨 쓰레기라도 뿌리는 것처럼 주고 가네. 요즘은 광고를 이렇게 하나?”

투덜대며 싸구려 황색 신문에서나 쓸 법한 거친 종이를 내려다본 순간, 기껏 문질러 폈던 미간에 도로 주름이 잡혔다. 붉은 용의 앞발에 잡힌 처녀의 그림이 1면 가득 채워져 있었다.

황급히 신문을 펼쳤다. 기사는 무려 세 면에 걸쳐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내용도 자극적이었다.

붉은 용이 브란젤에 내려앉은 날 영광의 길에서 있었던 사건의 구체적 정황, 레이디 오드리가 납치당한 이유에 대한 추측, 셰비언 아르젠 백작이 마법망의 유지를 위해 치른 희생, 레이디 오드리가 깔아놓은 전보선이 마법망 복구와 강화에 가지는 가치…….

종이는 싸구려라도 편집은 세련된 것이 전문가의 냄새가 났고, 기사에 쓰인 어휘도 상당히 고급이었다. 무지렁이 평민 몇이 되는 대로 상상력을 발휘해 휘갈긴 게 아니었다.

하지만 신문에는 이름이 없었다. 기자도, 편집자도, 삽화를 그린 화가도, 하다못해 신문을 인쇄한 인쇄소조차 이름을 남기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치안대에서 금지하는 자료를 배포하는 짓이라는 걸 분명히 의식하고 찍어낸 간이신문이었다.

“씨발, 어떤 새끼들이 또……!”

어찌나 화가 나는지 대뜸 쌍욕부터 튀어나왔다. 그날의 목격자 중 입을 함부로 놀렸다가 치안대 감옥에서 죽은 자가 벌써 서넛인데 어떤 미친놈이 또 입을 나불댄 건지!

피올은 신문을 움켜쥐고 돌아섰다. 당장 사무실로 돌아가 동료들에게 보여줄 셈이었다. 하지만 그는 채 세 걸음도 가지 못하고 발을 멈췄다.

브란젤에서도 유동인구가 많기로 손꼽히는 영광의 거리, 그 거리를 채운 사람들이 저마다 신문을 들고 기사를 읽느라 넋을 놓고 있었다. 신문 하나에 사람 두셋이 달라붙어 있는 경우도 있었다. 보아하니 브란젤 전체에 뿌린 모양이었다.

“애새끼들이 손은 빨라서!”

늦었다. 그날엔 사람들이 용의 마력에 발을 잡혀 있는 상태라 간신히 통제할 수 있었던 거였다. 한데 오늘은…… 치안대원인 피올을 보고 슬금슬금 발을 빼는 사람들이 벌써부터 보였다.

피올은 이 신문의 내용이 얼마나 빨리 브란젤을 휩쓸까 가늠해 봤다가 그만 눈앞이 아찔해져 휘청거렸다. 이름 모를 누군가가 작정하고 정보를 뿌렸으니 하루도 안 걸릴 게 분명했다. 차라리 알려지지 않는다면 모를까 새빨간 거짓말이어도 문제가 될 판에 이건 죄다 사실이었다. 왕실의 운신의 폭이 확 좁아질 게 뻔했다.

이제 야근과 철야의 나날이 도래할 것이다. 경고를 씹힌 치안대는 주동자를 잡아들여 본보기를 보이고자 눈이 벌게질 테니까.

‘리즈비아 거리가 뒤집히겠군.’

이만한 인쇄를 해낼 수 있는 인쇄기를 갖춘 곳은 리즈비아 거리의 인쇄소들뿐이었다. 어디의 누가 이런 깜찍한 짓을 했는지 알아낼 때까지 큰 인쇄소 작은 인쇄소 가릴 곳 없이 풍비박산 나는 광경이 눈에 훤했다.

어디 인쇄소뿐일까. 기사를 쓴 기자, 편집자, 인쇄기술자와 종이를 대준 업자, 잉크 공급자, 하다못해 조금 전 피올에게 신문을 내던지고 달아난 아이들까지도 죄다 잡혀 고역을 치를 것이다. 뭐든지 뿌리를 뽑으려면 확실하게 뽑고 본을 보이려면 밑바닥까지 헤쳐 보여야 하는 법이었다.

치안대의 눈을 피하려고 이름을 감춘 것 외에도 이런저런 꼼수를 썼겠지만, 그런 것 하나 찾아내지 못할 치안대가 아니었다. 치안대를 어떻게 보았기에 이런 짓을 했는지 배를 갈라 간덩이의 크기를 확인해 보고 싶을 정도였다.

요란하게 혀를 차며 옆머리를 긁던 피올은 주섬주섬 신문을 다시 폈다. 1면에 실린 그림이 눈에 콱 박혔다. 용의 앞발에 붙들린 소녀는 터무니없이 작고 연약해 보였다.

“……어쩐지, 이런 짓을 한 이유가 뭔지 알 것 같기도 하고.”

피올은 깨끗하게 면도한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2차 괴물 사태 당시, 피올은 마력을 뿌리며 내달리는 오드리의 곁에서 괴물을 쳐 내며 함께 달렸다. 어지간한 군마보다 더 덩치가 큰 검은 말을 타고 새하얀 케이프 코트자락을 날리며 달리던 오드리를 바로 옆에서 보았던 것이다.

예전부터 알고 지냈던 자신조차 그날의 오드리를 보며 벨트람을 떠올렸는데, 다른 사람들이야 오죽하겠는가. 그녀의 얼굴을 딴 벨트람 포스터가 선풍적인 인기를 누린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한데 그 벨트람이 난폭하게, 품위고 뭐고 없이, 요구사항조차 없는 일방적 납치를 당했다. 그럼에도 왕실은 사건을 덮기 급급하고-실제로야 구출 계획을 세우기 위해 바쁘지만 일단 겉으로는 그렇다- 헨젤 백작가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다.

‘화가 난 거지. 레이디 오드리가 받는 대우가 부당하다고 여겨서……. 하긴, 그날의 레이디 오드리는 기사보다 더 기사다웠으니까.’

버릇대로 각 맞춰 신문을 접던 손이 우뚝 멈췄다. 신문 마지막 면 하단에 크게 박힌 문구가 눈에 띠었다.

<진실을 말하는 펜은 때로 기사의 검보다 날카롭다.>

피올은 평생 검에 의지해 살아온 사람이었다. 타우레드 후작가는 용맹한 사자였고, 카론 남작가는 산트렘에 박힌 멜브란트의 쐐기였다. 그는 한때 산트렘의 기사였으며 지금은 치안대원이었다. 그의 목숨은 언제나 날카로운 칼 한 자루에 달려 있었다.

그런데 저 우스운 문구가 피올의 마음 한 구석을 두드렸다. 그는 신문을 다시 펴서 1면부터 4면까지 빼곡한 기사를 다시 정독했다. 이 간이신문을 쓴 기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확했다.

레이디 오드리가 우리에게 어떤 일을 해주었는지 기억하라. 만약 당신이 레이디 오드리에게 갚을 은혜가 없다고 생각된다면, 그녀를 구출함으로써 얻을 이익에 대하여 생각하라.

피올은 퍼뜩 깨달았다. 치안대가 초인적인 유능함을 발휘해서 오늘의 해가 넘어가기 전에 모든 관련자를 색출하더라도, 그래서 내일 아침에 주동자들의 목이 광장의 교수대에 매달리더라도, 이와 비슷한 간이신문은 계속 발행되리라는 것을.

칼날처럼 뚜렷한 직감이 찾아왔다.

치안대는 이번 일의 수습에 실패할 것이다.

피올은 1면의 절반을 차지한 삽화를 노려보았다. 낯설면서도 낯익은, 묘한 느낌이 드는 그림이었다. 그리 공들인 그림은 아닌데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술렁거렸다. 어쩔 수 없다 생각해 포기했던 것들, 자신도 몰랐던 울분 따위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그는 신문을 쥔 채 망연히 서서 이른 아침의 브란젤 풍경을 구경했다. 정확히 말하면 영광의 거리에서 눈에 보이는 마법도구의 개수를 셌다. 순식간에 세 자리 숫자가 넘어가는 걸 확인했을 때 결심이 섰다.

피올은 치안대 사무실이 아니라 가까운 데멘사 사무실을 찾아갔다. 급작스레 늘어난 업무에 시달려 눈 밑이 새카매진 직원이 치안대원의 망토를 보고 잔뜩 어깨를 움츠렸다.

“뭐, 뭐 때문에 오셨어요? 안 그래도 셰피아 항구에서 오는 전보는 다 한 번씩 확인하고 드리고 있는데요……. 정 필요하시면 걸러내는 작업장을 보여드릴 수도 있…….”

“전보 한 통 보내러 왔습니다.”

직원의 표정이 눈에 띄게 환해졌다. 그는 곧장 몸에 배인 기계적인 친절함을 발휘했다. 어디로 보내실 거죠?

“산트렘의 카론 남작가에 보낼 겁니다. 가능합니까?”

“당연히 가능합니다. 이 종이에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 내용을 적어주세요. 글자 수와 거리에 따라 요금이 다르고, 요금표는 이걸 참고하시면 됩니다.”

카론 남작가. 피올이 산트렘 기사단을 그만두고 뛰쳐나왔을 때, 그리고 쓰던 이름을 버리고 치안대원이 되어 새 이름을 얻었을 때, 다시는 연락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외가였다. 하지만 지금 메시지를 적는 피올의 손에는 한 점의 망설임도 없었다.

돈과 종이를 받아든 직원이 아까와는 딴판으로 호의적인 미소를 지으며 피올을 바라보았다.

“산트렘의 기사분들과 친분이 있으신가 봅니다.”

“그리 깊은 친분은 아니지만……. 의리를 지킬 때가 왔다고 성질 낼 정도는 됩니다.”

그 정도면 아주 친한 거 아닌가? 직원은 브란젤의 치안대원과 산트렘의 기사 사이에 무슨 친분과 의리가 있는 걸까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감히 더 캐묻지 못했다.

피올이 데멘사 사무실에서 전보를 보내고 있던 그 시각, 문제의 간이신문은 가스트로의 손에도 들어간 상태였다.

“하…….”

가스트로는 신경질적으로 머리칼을 헤집었다. 밤새 두프트의 대사와 입씨름을 하고 이제 막 잠들기 직전이었는데, 이런 걸 봐버렸으니 이제 잠은 다 잤다. 침실까지 쫓아온 일거리가 지긋지긋했다.

“전하…….”

“내가 깨웠소? 미안하군. 더 주무시오.”

“저는 일어날 때가 됐습니다.”

침대 한쪽에서 시체처럼 누워 있던 라디아타가 몸을 일으켰다. 가스트로는 길게 드리운 캐노피 너머에서 사르락 움직이는 그림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흐릿한 불빛에도 그녀의 금발은 눈부시게 반짝거렸다.

일어날 때가 됐습니다…….

거짓말이다. 가스트로가 두프트의 대사와 입씨름을 할 때, 라디아타는 대사의 아내와 술을 마시고 주사위 게임을 하며 호의를 사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가스트로보다는 일찍 자리를 파하기는 했지만 그래봤자 고작 몇 시간 차이였다.

당신은 왜 나에게 그런 거짓말을 하는가.

기대하고 싶어지게.

나는 왜 당신에게 기대를 하는가.

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

가스트로가 다른 생각을 하는 잠깐 사이 라디아타는 벌써 침대에서 벗어나 그의 곁에 섰다. 그는 제가 들고 있던 신문을 뒤로 감췄다.

“주무시오. 당신이 필요한 순간은 지금이 아니니.”

“아뇨, 지금이 맞습니다.”

바짝 다가선 라디아타에게선 짙은 라일락 향기가 풍겼다. 팔을 붙드는 체온에 가스트로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라디아타는 자연스럽게 그에게서 신문을 빼앗아 펼쳤다. 인형사가 박아 넣은 자수정처럼 무기질적이던 눈에 선명한 이채가 번졌다.

“현세의 벨트람이니 뭐니, 거창한 별명을 지어주더니 그 애정이 마냥 거짓말은 아니었나 봅니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데?”

“아무렴, 당연하지 않습니까. 내 친구가 목숨을 걸고 지킨 이들이 은혜도 모르는 쓰레기가 아니었다는 걸 이렇게 확인받았는데 기쁘지 않을 수가 있나요.”

“치안대 감옥에서 소리소문 없이 죽은 자가 서넛이나 되는데 그 정도로는 성에 차지 않았나 보오.”

“광장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 것도 아니고, 고작 술에 취해 몇 마디 나불대다 죽은 것에 무슨 진심이 있다고 만족하겠습니까. 그에 비하면 이 신문을 찍어낸 자들은 참으로 성의가 있습니다.”

“왕비는 몹시 냉정한 사람이군.”

라디아타가 흘끗 눈을 치떴다. 마치 너도나도 뻔히 알고 있는 걸 왜 굳이 입 밖으로 꺼내느냐고 묻는 것만 같은 시선이었다. 하긴 이런 문답이 어디 한두 번이었어야지. 가스트로는 능숙하게 말을 돌렸다.

“우리가 발을 뺄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게 이렇게 퍼져 버린 이상 타국과의 협상에서 우위를 점하기 어렵게 되었소. 어차피 마법망 강화 및 복구에 대한 기술은 모든 왕국이 공유해야 하는 것이니 다들 손실을 최소화하고 싶어 할 테지. 부디 왕비가 벗을 생각하는 마음의 절반만이라도 남편을 생각해 주면 고맙겠소.”

“전하께서 너무 피곤한 나머지 부정적인 쪽으로만 생각이 흘러가시는 모양입니다. 전하, 용의 비늘과 피를 써서 마법망 붕괴를 막는 방법은 멜브란트나 가능한 일이에요. 다른 나라들은 전보선을 이용해야 마법망 강화를 할 수 있다는 걸 잊지 마세요.”

“…….”

“마법망은 세계를 엮는 커다란 그물과 같은 것이니, 어느 곳이든 구멍이 나서는 안 되죠. 마법망 강화를 위한 방법이야 당연히 공유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재료는 오드리가 갖고 있지요. 어느 나라에 얼마만큼의 전보선을 배분할지도 오드리의 결정에 달려 있어요. 잊으신 건 아니죠? 오드리는 데멘사의 주인이고 전하 휘하의 귀족입니다.”

가스트로는 머릿속을 뿌옇게 가리고 있던 안개가 싹 가시는 느낌에 헛웃음을 지었다. 간이신문의 제작자들이 오드리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것이 그에게도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푸르죽죽하던 안색도 조금이나마 밝아졌다. 그때 라디아타가 갑자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 하지만 살론은 좀 예외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무슨 말이오?”

“오드리가 살론에서의 전보 사업권을 살론의 마법사협회장에게 넘겼습니다. 상황이 급박한 데다 반 연금 상태라 지금은 열심히 숙이고 있지만, 마법망 안정화에 꼭 필요한 게 전보선이라는 걸 확신하고 나면 평소와 똑같이 거드름을 피워댈 게 분명합니다.”

“사업권을 넘겨? 데멘사의 주인답지 않은 행보인데?”

“사랑하는 애인에게 좋은 선물을 하고 싶었던 소녀의 마음이죠. 살론에서 바일런 섀덤의 첫 번째 마법동력을 분해할 예정인데, 거기에 아르젠 백작도 끼워주기로 했다고 들었습니다.”

“데멘사의 초기 투자금에는 내 지분도 상당한데 레이디 오드리는 정말 너무하는군. 고작 그런 것 때문에 사업권을 넘겼다고? 나한테는 말도 안 하고?”

가스트로가 진심을 다해 투덜거렸지만 라디아타는 맞장구 쳐 주지 않았다. 그저 이렇게까지 머리가 안 돌아가는 상태로 대책회의에 들어가 봐야 좋을 게 없다며, 조금이라도 잘 것을 종용했다.

멍청하게 굴었던 조금 전의 자신을 생각하면 참 맞는 말이라, 가스트로는 순순히 침대에 드러누웠다. 라디아타가 그에게 이불을 끌어당겨 덮어주고 어린애라도 재우는 듯 가슴팍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당신의 눈에는 내가 아이로 보이나 보군.”

“아이면 차라리 편할 겁니다.”

라디아타가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가스트로는 하하, 열없는 웃음을 흘리다가 얼마 가지 않아 잠 속으로 굴러 떨어졌다. 널따란 침실은 이내 조용해졌다.

라디아타는 가스트로가 잠에 빠지자마자 미련 없이 그의 곁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이른 하루를 시작하는 대신 몇 번이고 간이신문을 정독했다. 신문의 제작자들이 오드리에게 퍼부은 애정이 기사 한 줄 한 줄마다 선명하게 느껴졌다. 질투가 날 만도 한데 그보다는 기분이 좋았다. 마치 막냇동생이 칭찬을 받은 듯 뿌듯했다.

그녀는 커튼을 걷고 1면에 실린 그림을 햇살에 비춰가며 자세히 살폈다. 급하게 그린 티가 나긴 해도 좋은 그림이었다.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겠다는 목적에 충실하느라 너무 자극적인 구도를 썼다는 게 조금 아쉬울 뿐이었다.

“그 흰 양 같은 레이디에게 이만한 배짱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평소와는 화풍의 차이가 심하지만 라디아타의 눈썰미는 자신이 한눈에 반한 화가의 특징을 정확하게 집어냈다. 이건 네이기스의 그림이었다.

간이신문 제작자들의 배짱이 감탄스러울 따름이었다. 네이기스가 아무리 그 유명한 벨트람 포스터를 그린 화가라도 그렇지, 귀족 출신이고 치안대원의 아내인데 이런 위험한 일에 손을 대게 만들다니 말이다.

어차피 네이기스 본인이이야 가출하고 결혼해서 더 망칠 평판도 없다지만 자칫하면 피올의 앞날이 끝장날 수도 있는데, 평생을 검 한 자루에 기대어 살면서도 용병으로 떨어지진 않은 자존심을 부러뜨리는 결말을 맞으면 어쩌려고 이랬을까.

“하긴, 순수한 사람이니까. 사실을 알려주는 것만으로도 움직일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

예술가들이 자신의 뮤즈에게 얼마나 집착하는지 숱하게 보아왔다. 심지어 오드리는 네이기스의 뮤즈이자 친척이며 든든한 보호막이었다. 이해하고자 하면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다만, 라디아타는 피올의 반응이 궁금했다. 따져 보면 피올이야말로 네이기스의 재능을 알아본 첫 번째 사람이었다. 그는 이 삽화의 작가가 네이기스라는 걸 알아보았을까?

그날 오후, 로렐라이 상단에서 충격적인 발표가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단주가 레이디 오드리임을 밝히고 단주의 실종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간이신문의 내용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인간에게는 상상력이라는 게 있다.

사람들은 왕실에서 레이디 오드리를 구하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자 로렐라이 상단이 이런 식으로 압력을 가하는 거라고 쑥덕거렸다. 그게 아니라면 숨겨진 주인의 정체가 왕족일 거라는 소문이 날 정도로 왕실과 친밀하던 상단에서 왜 미운 털이 박힐 짓을 하겠느냐고.

설마 로렐라이가 오드리의 이름을 시원하게 까버릴 줄은 몰랐던 헨젤 백작은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아 안 그래도 심각한 상태였던 위장병이 더욱 악화됐지만, 가스트로는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어쩔 수 없었다. 한 명의 군인이 움직이려면 열 명의 행정지원이 필요하다는데 혼자서 다섯 명 몫을 하는 사람을 어떻게 놓아주겠는가.

밀어닥치는 낯선 업무는 헨젤 백작에게 극심한 과부하를 안겼지만, 동시에 그가 사실을 알아볼 틈을 제공했다. 그는 이 고생스러운 시간을 교묘하게 재무국의 정보를 빼내고 있는 부하들을 솎아낼 기회로 삼기로 결심했다.

“이럴 줄은 몰랐는데.”

헨젤 백작은 결과물을 들고 신음했다. 정보가 줄줄 새고 있었던 만큼 상당한 숫자가 나오리라 예상하긴 했다. 하지만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새로 뽑은 직원들 전부가 외부와 어떤 형태로든 끈이 있었고, 심지어 끈 대부분이 현재진행형이었다.

예전이라면 보좌관인 일랑 선에서 모조리 처분했을 인물들이 멀쩡히 숨을 붙이고 있다는 게 무얼 의미하는가.

“하……. 바로 옆에 승냥이를 키우고 있었어.”

헨젤 백작은 사람을 씀에 있어 무정하고 냉정하다는 평을 받는 이였다. 하나 곁에 두고 중용했던 보좌관의 배신은 그에게도 충격적이었다. 술을 진탕 마신 날처럼 손이 덜덜 떨렸다.

“애초 목적을 갖고 사람을 채용하고, 정보가 새는 걸 눈감아주고, 조각내기 좋게 재무국의 구조를 분석해 주고, 치안대가 사무실을 뒤집어엎도록 허가하고, 빈 서랍에 뤼나소를 넣고…….”

지독한 배신감은 분노나 투쟁심 대신 허탈함을 몰고 왔다. 헨젤 백작은 의자에 몸을 파묻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이 모든 것들이 누구의 작품인지는 굳이 더 파고들지 않아도 뻔했다. 오드리, 그의 딸이었다. 무엇을 꿈꾸건 결국 저도 헨젤의 그늘 아래 있으니 적당히 할 거라 여기고 방치한 결과가 이거였다.

‘내가 너무 관대하게 굴었다.’

다 컸으니 알아서 할 거라 여기지 말고, 체면치레는 해야 한다고 뻣뻣하게 굴지 말고, 그래도 일은 잘하니 쓸 만하다 기특하게 여기지 말고, 멀리서 홀로 자랐으니 곁의 하녀가 바뀌면 힘들겠지 배려하지 말았어야 했다.

오드리 랄리우스 가넷.

간이신문에서 언급하는 오드리의 이름에는 헨젤의 성이 빠져 있었다. 오드리 본인이 쓴 건 아니라지만 그렇기에 더욱 노골적이다. 사람들은 오드리에게서 헨젤을 보지 않았다. 꾸역꾸역 그녀를 참아온 대가가 고작 이런 것인가?

더 화가 나는 건, 이런 회의를 느끼면서도 당장은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는 현실이었다. 업무가 밀려드는 와중에 겨우 일이 손에 익은 직원을 대량으로 해고할 수도 없고, 효과적으로 일을 덜어주는 일랑을 다른 곳으로 보낼 수도 없다.

환부를 도려내겠다고 칼을 들었다가 목숨을 잃으면 그 무슨 허망한 결과인가.

바닥없는 늪에 빠진 기분이었다. 발버둥치면 칠수록 바닥으로 가라앉을 것을 알기에 가만히 버티고는 있지만, 구원을 바랄 수도 없는 상황에서 조금씩 차오르는 진흙을 견디는 시간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숨 쉬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늘려보겠다는 무의미한 발악일 뿐인데.

그때 일랑이 집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야근에 시달릴 대로 시달린 그의 얼굴은 피로가 쌓여 거뭇했고 수염도 며칠이나 깎지 못해 턱이 지저분했다. 그럼에도 안고 들어온 서류가 한 짐이나 됐다.

“백작님, 카즈네 공작님께서 치안대 예산 증액을 요청하셨습니다.”

“병아리도 못된 계란 나부랭이가 돈 쓸 줄만 아는군.”

일랑은 헨젤 백작의 기분이 평소보다 훨씬 가라앉은 상태라는 걸 눈치채고 바짝 긴장했다. 그가 아는 헨젤 백작은 뤼나소 문제로 난리를 겪고 돌아와서도 차분했었다.

“간이신문 제작자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피해를 본 업주들이 보상을 청구하나 봅니다. 전례가 없던 일이지만 이번엔 꽤 거세게 요구해서…….”

“그러니 병아리도 못 되는 게지. 감히 보상 따위를 청구하게 만들어? 예산은 한 푼도 더 늘려줄 수 없으니 알아서 하라고 해. 하여간, 이런 가십 따위에 왜 일일이 화를 내며 덤비는지……. 고지식하게 굴면 얻을 수 있는 것도 못 얻는 것을.”

헨젤 백작은 말 몇 마디로 간이신문을 삼류 가십지 홍보 수단 정도로 취급했다. 일랑은 돈을 내주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느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가십지에 돈을 주면 버릇이 나빠지니, 아예 처음부터 무시하는 게 상책이라는 게 평소 헨젤 백작의 지론이었다.

‘근데 사람들이 이걸 가십으로만 생각할까?’

일랑은 기분이 안 좋은 상사의 눈치를 봤고, 그러느라 레이디 오드리를 사랑하는 보통 사람들에게 간이신문의 내용은 가십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거라는 말을 꿀꺽 삼켰다. 어차피 뚜렷한 근거 따위 없는 직감에 불과했다.

하지만 일랑의 직감은 적중했다. 술 몇 잔, 차 한 잔, 담배 한 대, 사탕 한 알……. 일상 속에서 잠시 숨을 돌리는 시간, 사람들이 얼굴을 마주보고 지지배배 떠드는 시간이 쌓이는 동안 간이신문의 내용은 진실이 되었다.

리즈비아 거리의 주민들은 용감하게 진실을 밝힌 간이신문 제작자들을 치안대에게서 보호했다. 누군가 뒤에서 도와주는 것도 아니고 시킨 것도 아닌데도 그랬다. 때문에 치안대는 간이신문의 제작자를 알아내겠다며 리즈비아 거리를 부지런히 뒤지고 다니면서도 그다지 소득이 없었다.

도무지 진척이 없는 일처리, 자꾸 집안에서 돈을 빼다 쓰는 행동 때문에 히엠스가 전대 카즈네 공작에게 불려가 호되게 야단을 맞던 날, 새로운 간이신문이 발행됐다.

더 많은 지면에 더 많은 필자가 더 깊이 있는 기사로 참여했기에, 그저 간이신문이라고 폄하하기엔 좀 면구스러울 정도로 퀄리티가 좋았다.

치안대의 단속에도 불구하고 간이신문은 빠르게 브란젤 전역으로 번졌다. 일부 사람들은 재기를 발휘해 브란젤 밖으로 신문을 유출했다. 다른 도시에 도착한 신문은 새로이 인쇄되어 대량으로 뿌려졌다.

첫 번째 간이신문이 브란젤의 시민들을 설득하고 호소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었다면, 두 번째 간이신문이 노리는 독자는 좀 더 넓었다. 두 번째 간이신문은 마법도구를 사용하는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발간됐다.

본래 타 도시의 사람들은 용의 등장과 오드리의 납치사건을 새롭고 흥미로운 스캔들 정도로 소비했었다. 어디까지나 남의 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마법망의 붕괴되어 마법도구를 사용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도시가 어떤 모습이 되겠는가를 조목조목 짚어낸 기사까지 무시하지는 못했다. 익명을 요구한 마법사가 묘사한 풍경이 지독히 생생하고 참혹했던 탓이었다.

두 번째 간이신문이 퍼지는 속도는 첫 번째에 비할 바 없이 빨랐다. 신문이 퍼질 만한 크기의 도시라면 마법도구 없는 삶에 대해 두려움 섞인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혼란 속에 멈춰선 한 명은 그저 점에 불과하지만, 그 뒤에 한 명이 더 생겨나면 점은 선이 된다. 길게 늘어진 선을 아무리 잘라내 봐야 흩어진 선은 다시 점이 되고 흩어진 점은 다시 선이 되어 처음보다 더 몸집을 불렸다.

그렇다고 다 태워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니, 어떻게든 소문을 잠재우려 시도하던 도시 관리자들은 진절머리를 내며 끝내 손을 놓았다.

그즈음, 셰비언에게서 마법망 강화 및 복구 방법을 배운 왕궁마법사들이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하지만 퍼져 나간 왕궁마법사들이 하는 일에는 지역마다 차이가 있었으니, 전보의 유무가 그걸 가름했다.

전보가 깔린 지역으로 간 왕궁마법사는 곧장 마법망 강화와 복구를 시작했다. 셰비언처럼 단번에 모든 걸 해낼 수는 없었기에, 매일 아침마다 조금씩 마법망 강화 및 복구 작업이 이뤄졌다.

도시의 주민들은 새벽 어스름이 밝아오는 시간이 되면 도시 전체를 휘감고 반짝이는 금빛 안개를 볼 수 있었다. 여기저기 구멍 나고 헤진, 낡아빠진 마법망이 방금 만든 거미줄처럼 정교하게 변해가는 모습은 볼 때마다 감탄사를 불러일으켰다.

그 장면이 단순히 눈요기 거리가 아니라는 걸 눈치채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마법사가 그 작업을 하고 난 뒤에는 마법도구의 성능이 크게 올라갔다. 수명이 다해 오늘내일 하던 마법도구가 새 것처럼 기능을 회복했고, 가끔은 이미 사라졌던 마법을 되찾는 경우도 생겼다.

마법도구는 소모품인 동시에 필수품이었다. 더 오래 쓸 수 있다는데 그걸 마다할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그러나 세상 모든 일은 한 가지 결과만 가져오지 않는다.

마법이 사라진 고물 마법도구를 취급하던 고물상의 재산은 몇 배로 뛴 반면, 마법도구를 취급하는 상단들은 갑작스러운 매출 저하에 직면했다. 취급 상품에 따라서는 절반 이하로 떨어진 곳도 나왔다.

개중 단 한 곳, 로렐라이 상단만이 흑자를 기록했다. 그들이 판매하는 마법도구가 특별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로렐라이는 마력구슬을 팔았다.

데멘사는 로렐라이에서 마력구슬을 구입해서 전보기계에 끼워 넣었다.

왕궁마법사들은 전보기계에 장착된 마력구슬의 마력을 십분 이용해서 마법망 강화 및 복구 작업에 사용했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서 마력구슬의 수명은 극도로 단축됐다. 본래 마력구슬은 재충전이 가능하게 설계됐지만, 왕궁마법사들은 재충전한 마력구슬은 출력이 처음 같지 않다며 불만스러워했다. 데멘사는 왕궁마법사들의 의견을 존중했고, 로렐라이에서 새 마력구슬을 구입한 뒤 왕실에 비용을 청구했다.

헨젤 백작은 마력구슬 구입대금을 결재해 줄 때마다 피를 토하는 심정이었다. 그나마 데멘사에서 다 쓴 마력구슬을 왕실에 공짜로 넘겼으니 망정이지, 그마저도 없었다면 진작 뒷목을 잡고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왕궁마법사들 중 일부는 그 마력구슬을 샘플로 해서 복제 작업에 동원됐다. 관례대로 마력구슬의 설계도 60%가 외부에 공개되어 있었으니, 초기 투자금이라 생각하면 그럭저럭 견딜 만 했다.

하지만 용이 직접 참여한 마력구슬의 설계도를 인간이 다시 짜맞춰 낸다는 게 그리 쉬울 리 없다. 왕실마법사 연구팀은 마법동력을 연구하는 마법사들의 고통을 새삼 실감했다. 실패작이 쌓일수록 자괴감은 커져 가고 분노도 덩달아 덩치를 불렸다.

“빌어먹을 용 새끼. 어쩌자고 이런 걸 만들어선!”

“야아, 셰비언 님이라고 해야지…….”

“알 게 뭐야, 듣고 있는 것도 아닌데! 가르칠 거면 다 가르치든가! 만들지도 못하고 써먹기만 하게 하다니, 바일런 섀덤이랑 뭐가 달라!”

“어……. 그 말 들으니까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어쨌건 로렐라이며 데멘사며 모두 오드리의 것이다 보니, 관련 지출이 쌓일수록 헨젤 백작이 딸을 이용해 돈을 착복한다는 헛소리를 하는 자들이 지치지도 않고 튀어나왔다. 그때마다 헨젤 백작은 아끼는 딸을 납치당해 더없이 슬픔에 잠긴 아버지 연기를 해야만 했다.

어떻게 딸의 목숨과 돈을 맞바꿀 수 있겠느냐며, 말도 안 되는 소릴랑 말라고. 탄핵 시도를 하는 자들과의 입씨름에서 딸의 돈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말만이 진실이었다.

“돈 많아도 하등 쓸데없어.”

이디케가 소파에 모자를 내던지며 이를 갈았다. 한창 신문을 읽고 있던 릴리가 도무지 이디케답지 않은 말에 놀라 입을 벌렸다.

“세상에……. 너 이디케 맞아? 혹시 이디케 흉내 내는 괴물이라든가 그런 거 아니지?”

“나 맞거든? 3차 괴물 사태가 바로 여기, 가넷 남작가에서부터 시작되길 바라고 하는 말이야?”

오드리가 납치된 후, 이디케는 로렐라이와 데멘사를 맡고 릴리는 가넷 남작가의 하녀장을 겸업하게 됐다. 지금 두 사람이 만나는 곳은 가스트로가 오드리에게 내린 가넷 남작가의 저택이었다.

“아니이……. 너무 이디케 같지 않은 말을 하니까 놀라서 그러지. 무슨 일 있어?”

“아무 일도 없어.”

아무 일도 없는데 왜 그렇게 짜증이 났니. 릴리는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을 꿀꺽 삼켰다. 이디케는 오드리가 납치된 후, 그녀를 대신해 로렐라이와 데멘사 양쪽을 모두 움켜쥐고 관리 중이었다. 하녀에 불과한 이디케가 임시 단주라는 것에 반발한 대리인들 중 일부가 이탈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는 했지만, 미처 시도하기도 전에 꼬리를 잡혔다.

“대리인 노릇하면서 내 존재를 몰랐다니 뭐 그런 병신 같은 변명이 다 있담? 예전에도 당신들이 받았던 명령 중 절반은 내 선에서 내려졌던 거예요. 어휴, 진짜 몰랐던 새끼는 손 들어보세요. 용서해 드릴게요.”

그때 이디케를 몰랐다고 순순히 자백한 놈들은 능력 부족으로 모가지가 잘렸고, 이디케를 알고 있으면서 반항한 놈들은 모가지가 잘린 것에 더불어 온갖 죄를 뒤집어쓰고 감옥에 처박혔다. 다들 혀를 내두를 정도로 과감한 손속이었다.

다이앤은 그 계집애의 사나운 천성이 드디어 드러난 거라며 코웃음을 쳤지만, 릴리는 그때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을 맛봤다. 이디케의 방식은 오드리와 아주 흡사하면서도 우아함이 부족하고 자비가 없었다.

“단주 이름도 밝혔겠다, 어차피 이젠 대리인 필요 없다는 거 아시죠? 계속 상단에 발붙이고 살고 싶으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 거라고 믿어요. 다들 그 정도 머리는 되잖아요? 그쵸?”

이디케는 하녀 출신이라는 자신의 한계를 잘 알았다. 그녀는 라비린을 등에 업고 대리인을 제압했다. 오드리가 어떤 일이든 이디케를 전폭적으로 믿고 맡긴다는 걸 잘 알고 있었던 라비린은 이디케에게 기꺼이 이름을 빌려주었다.

하지만 그런 라비린도 이디케가 정말 중요한 회의에 참석할 수 있게 해주지는 못했다. 왕실과 군의 움직임이 어떤지 전해들을 수는 있었지만 의견을 내는 건 허락되지 않았다. 이디케는 말이라도 전해달라고 계속 부탁했지만 라비린은 곤란하다는 말밖에 하지 않았다.

결국 이디케는 다른 쪽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휘청거리는 상단이 많은 만큼 그들과 연계된 귀족들 중에도 자금난을 겪는 이들이 많았다. 로렐라이와 데멘사가 돈을 긁어모으다시피 하는 지금, 뇌물로 쓸 돈은 넘치도록 많았다.

하지만 이디케가 미처 몰랐던 것이 있으니, 새로운 카즈네 공작은 귀족들이 뇌물을 받는 걸 용납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이전과 다르게 적극적으로 감시의 눈길을 번뜩이는 치안대를 두려워한 귀족들은 이디케가 건네는 돈을 필사적으로 피했다.

이디케 역시 경고를 받았다. 자꾸 뇌물수수를 시도했다간 재미없을 줄 알라는 내용이었다. 언제는 재미가 있었던 사이냐고 따지고픈 마음이야 굴뚝이었지만, 하필 그 말을 전한 사람이 피올이라 성질도 반밖에 부리지 못했다.

“개같은 치안대 새끼들. 나 아니라니까 믿지를 않고!”

릴리는 이디케가 무슨 일을 겪고 왔는지 짐작했다. 그녀는 열심히 보고 있던 신문을 착착 접어 이디케에게 내밀었다.

“자. 아직 안 읽었지?”

“뭐야, 또 새로운 버전이 나왔어? 제기랄, 방금 나왔는데 또 불려가게 생겼네!”

이디케가 반색을 하고 신문을 낚아챘다. 입으로는 불평을 하면서도 기사 타이틀을 보는 눈이 별처럼 반짝거렸다.

“와우, 지면이 또 늘었네?”

“익명의 후원자가 자꾸 늘어난다나 봐. 아예 감사 페이지까지 만들었다니까. 미친놈들, 세상 무서운 줄도 모르고.”

릴리가 욕을 하거나 말거나, 이디케는 신문을 읽느라 바빴다. 그들이 읽는 건 석 달 전에 처음으로 발행되기 시작했던 간이신문으로, 이젠 포르티투도라는 거창한 이름까지 붙어 있었다.

그래봤자 여전히 허가받지 않은 신문이고 발간일도 들쭉날쭉했지만, 기사의 질이 나날이 좋아지고 지면도 넉넉해서 인기가 좋았다. 익명의 후원자란에 기재되는 이름들이 나날이 늘어났다.

이디케는 치안대로부터 그 후원자 중 한 명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포르티투도는 처음이나 지금이나 레이디 오드리를 옹호하고 그녀의 구출을 위해 왕실이 나설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오? 산트렘 기사단이 남하 중이래. 왕실의 명령……은 아니고……. 미친, 국왕의 명령도 없는데 왜 내려와?”

“마저 읽어. 현직 산트렘의 기사는 아니고, 그들 대부분이 은퇴자래. 아직 입단하지 않은 후보생들도 좀 섞여 있고. 포도송이의 문장을 쓸 자격이 있어서 산트렘의 기사라고 불러주기는 하지만 국왕전하의 명령에서는 자유롭대.”

“그래도 그렇지이……. 굳이 이럴 때 남하하는 이유가 뭐래? 개인으로 온다면야 이런 기사가 날 일도 없잖아. 왜 뭉쳐서 다니냐고. 그리고 이걸 왜 하필 포르티투도가 주목하고 보도하는데?”

이디케와 릴리의 시선이 맞부딪쳤다. 두 사람은 그들이 알고 있는 산트렘 기사단 출신자, 피올을 떠올렸다. 이젠 당당히 밝힐 수 있는 이름이 있건만, 그의 망토 안쪽에는 여전히 포도송이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이디케……. 산트렘 사람들은 의리가 대단하다며?”

“살면서 친구를 단 한 명만 사귈 수 있다면 산트렘 사람으로 하라는 말이 있긴 하지……. 근데 그건 그냥 속설이잖아.”

“다이앤한테 물어보라고 하자. 보티안 부인과는 예전부터 친하게 지냈잖아.”

친분 뒀다 어디다 쓰나, 이런 데 쓰지. 이디케와 릴리의 등쌀을 이기지 못한 다이앤은 비장한 각오로 피올의 집을 찾아갔다. 그것도 일부러 피올이 집에 있을 시간을 고른 기습적인 방문이었다.

피올은 다이앤의 얼굴을 보자마자 자리를 피하고자 했지만, 네이기스가 순진한 얼굴로 그를 붙들고 몰리 양이 당신에게 꼭 묻고 싶은 게 있대요, 하는 통에 도망가지 못하고 꼼짝없이 다이앤과 마주앉았다.

“음……. 몰리 양, 내가 치안대원이라는 거 잊은 건 아니죠?”

“설마 그럴 리가 있나요.”

“그런데 나한테 포르티투도에 나온 기사를 물어봐요?”

“제가 잡혀가면 부인께서 무척 슬퍼하실 거예요. 보티안 씨는 부인이 슬퍼하는 일을 하지 않으실 거구요.”

“내 부인은 몹시 귀족적인 사람이라, 내가 자신 때문에 임무를 팽개치기라도 하면 몹시 실망하고 못 견뎌 할 겁니다.”

네이기스가 아무리 물러도 귀족 출신이었다. 가출하듯 집을 나와 피올과 결혼했다고 해도 아직 상류계급의 때가 다 빠지려면 한참 멀었기도 하고. 하지만 다이앤에겐 믿는 구석이 있었다.

“포르티투도에 매번 삽화를 제공하는 화가가 누구일까요?”

“…….”

“저는 부인의 아주 열렬한 팬이거든요. 화풍이 조금 바뀐 정도로 못 알아보다니 말도 안 되죠. 그건 보티안 씨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하는데, 부인께 말씀드려도 될까요?”

“…….”

“다른 곳도 아니고 치안대에 예술적 소양을 갖춘 분이 한 명도 없을까요? 아마 다들 보티안 씨를 생각해서 입을 다물고 있는 거라 짐작되는데……. 새로운 카즈네 공작님께서는 굉장한 원칙주의자라고 들었어요.”

피올은 네이기스와 다이앤이 친분을 나누는 걸 막지 않은 과거의 자신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네이기스가 다이앤을 통해 상류사회의 소식을 듣는 걸 아무리 좋아해도 단호하게 막았어야 했다.

“몰리 양은 굉장히…… 레이디 오드리를 닮았군요. 그녀와 화법이 아주 비슷해요.”

“어머, 과분한 칭찬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는 아가씨 발끝도 못 따라가는걸요.”

“그런 식으로 웃는 것마저도 비슷해서 짜증납니다. 몰리 양, 지금부터 내가 말하는 걸 외부에 발설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줄 수 있습니까?”

“백 번 천 번도 약속할 수 있어요.”

“레이디 오드리의 이름을 걸고?”

다이앤이 혀를 씹은 듯 표정을 구겼다.

“……이디케와 릴리에겐 말해도 된다고 해주세요.”

“그 정도야 참아드리죠. 하지만 그 두 사람의 입단속은 몰리 양이 해주셔야 합니다.”

피올은 몇 번이고 다이앤의 입단속을 하면서 그녀의 인내심을 갉아먹었다. 그러다 다이앤이 왈칵 짜증을 내기 직전에 이르러서야 솔직히 고백했다.

“내가 불렀습니다.”

“……네?”

“내가 불렀다고요. 창피스럽긴 하지만, 과거의 동료들에게 나 좀 도와달라고 불렀습니다.”

산트렘 기사단이 무슨 개예요? 부른다고 오게? 다이앤이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한 말이 그녀의 표정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피올이 쓴웃음을 지었다.

“살론은 배와 마법사를 지원하기로 했고, 두프트에서는 식량을, 카펠로에서는 무기를 지원할 겁니다.”

“네……?”

“몰리 양, 석 달입니다. 레이디 오드리가 납치된 지 석 달이나 지났어요. 셰비언이 부상을 거의 회복했는데 계속 웅크리고 있을 이유가 없죠. 왕실이 곧 움직일 겁니다. 포르티투도의 집필진이 기뻐 날뛰겠군요.”

다이앤은 갑자기 쏟아지는 정보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공을 세워 귀족이 되려는 자,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있겠습니까? 동원할 수 있는 인맥은 다 동원해 봐야죠.”

피올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다이앤을 쫓아냈다.

다이앤은 혼자 찾아온 것을 깊이 후회했다. 이 자리에 이디케가 있었더라면, 하다못해 릴리라도 곁에 있었더라면 이렇게 쉽게 쫓겨나지 않았을 텐데. 표면적인 정보 이상의 것도 쉬이 알아냈을 텐데. 그러나 후회는 언제 해도 늦은 것이고, 지금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하는 때였다.

과연 다이앤에게서 말을 전해들은 이디케는 곧장 나랍으로 급전을 보냈다.

얼마 안 가 멜브란트의 왕실은 발톱섬의 성공적인 공략을 위해 전격적으로 협조하겠다는 나랍의 메시지를 받았다. 가스트로는 연이은 재촉에도 무거운 엉덩이를 뭉그적거리던 나랍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를 몹시 의심스러워했지만, 일단 겉으로는 그들의 협조적인 자세에 매우 감사하다는 답변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10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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