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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2. 신화시대의 재림 (45/62)

chapter 42. 신화시대의 재림

「인간 외 종족을 숭배하고 그들의 마력을 연구하느라 인체실험마저 마다하지 않은 위험한 마법사들의 집단이 있었다. 위대한 마법사들이 이르기를 그런 시도를 하는 자들이 바로 ‘마녀’이니, 인간에게 대단히 위험한 존재라 모조리 잡아 죽어야 한다 하였다.」

셰비언은 품에 안은 오드리의 체온이 몹시 뜨겁다는 걸 ‘문득’ 깨달았다. 자신의 체온이 낮은 편이라 그렇게 느끼는 게 아니었다. 오드리는 조금도 아파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의 체온은 고열에 시달리는 환자와 다를 게 없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불길한 직감이 그를 꿰뚫었다.

“……오드리, 오늘은 옐로 다이아몬드 장신구를 하나도 착용하지 않았군요?”

“작위수여식에서는 장신구를 하지 않는 게 전통이거든. 남부식 예복을 입었으니 그런 거라도 지켜야 군말이 없지.”

“하지만 반지는 꼈잖아요.”

“이거?”

셰비언의 지적에 오드리가 그제야 깨달았다는 것처럼 제 왼손을 살폈다. 반지를 보는 눈길 속에는 사랑스러움이나 기쁨 같은 감정은 조금도 담겨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귀찮은 방해물을 보는 것에 가까웠다.

셰비언은 오드리를 바닥에 내려놓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마침 영광의 길이었다. 그 큰 거리를 지나던 행인들의 눈에 오드리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들의 눈에 오드리는 허공에서 갑자기 나타난 사람이었다. 몹시 낯선 형태의 옷을 입었으면서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존재감이 넘치는 사람.

오드리를 둘러싼 빈 공간이 생겼고 그녀를 흘끔대며 손가락질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하지만 셰비언은 주변의 반응에 일일이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 걸었던 마법도 풀어버리고 한껏 감각을 곤두세웠다.

“너, 누구야?”

오드리가 입술을 길게 늘이며 웃었다.

“알면서, 뭘 물어?”

“……몰라!”

“모르기는.”

오드리가 입을 삐죽였다. 그녀는 돌연 반지를 잡아 빼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반지는 손가락에 딱 달라붙은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역시 안 빠지네.”

“너, 너…….”

“내가 말했지. 날 거절했다간 네 소중한 아가씨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잘 생각하라고.”

사랑스러운 얼굴에 낯익은 얼굴이 겹쳐졌다. 오드리의 동공 주변에 금빛이 어른어른 번지기 시작했다. 셰비언의 등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오드리에게서 용의 마력이 폭발적으로 흘러나왔다. 그들을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이 허겁지겁 뒤로 물러났다. 셰비언은 더 이상 외면하지 못하고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샤를레아!”

“그렇게 비통하게 부르지 않아도 돼. 아, 이럴 땐 간절하다는 표현을 쓰는 게 더 적합하려나?”

“너는 내가 직접 봉인구에 처넣었는데!”

셰비언이 세피아 항구의 바다에서 봉인구를 확인하고 온 지 한 달도 되지 않았다. 그때 그는 봉인구의 상태를 엄밀하게 살폈고, 적어도 오백 년은 무사할 거란 결론을 내렸었다. 급하게 맺은 봉인이라 혹여 문제가 생기더라도 오드리 생전에는 아무 일도 없을 거라 여겼는데.

샤를레아가 웃었다. 오드리의 얼굴인데도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걸 확실히 알 수 있을 만큼 차이가 났다. 기이한 일이었다.

“그 봉인구에 갇힌 게 정말 나일까?”

셰비언의 기억이 그날로 돌아갔다. 자신과 교미를 해서라도 아이를 갖겠다며 막무가내로 잠자리를 요구하던 샤를레아를 봉인했던 날.

그날, 샤를레아가 자신의 귀가를 기다리며 얌전히 있지만은 않았던 걸 이렇게 깨닫게 되다니.

“네 아가씨가 걱정되면 얌전히 있어.”

날갯죽지가 뻐근하게 당기고 아파왔다. 샤를레아가 그에게 집어넣었던 마력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 그 빌어먹을 유황 냄새 나는 마력은 죄다 빼냈는데도.

셰비언은 흔들렸던 얼굴 표정을 매끄럽게 다듬었다. 갑작스런 사태에 대한 놀람도, 오드리에 대한 걱정도, 그녀를 잃을까 두려워하는 마음도 모조리 안쪽으로 욱여넣고 평정을 가장했다. 참고할 만한 예시는 주변에 아주 많았다. 그가 입을 뗐을 때엔 목소리마저 침착했다.

“내 마법을 걸고 맹세하는데, 그건 분명히 너였어.”

셰비언이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샤를레아가 풀어낸 마력 끄트머리를 밟았다. 안개처럼 살랑거리며 범위를 넓히던 마력이 그대로 멈춰 섰다. 샤를레아가 흘려낸 마력의 통제권은 한순간에 셰비언에게로 넘어갔다.

통제권을 잃은 샤를레아의 웃음이 싹 사라졌다. 그녀는 어떻게든 마력을 다시 움직이려 애썼다. 하나 애초 오드리가 갖고 있던 마력은 셰비언과 성질이 아주 비슷했고, 유독 셰비언에게 고분고분했다.

안개 같던 마력은 단단한 강철이 되어 샤를레아를 감쌌다. 순식간에 그녀를 중심으로 하는 원형 마법진이 생겨났다. 가느다란 선 수십 가닥이 그 안을 종횡무진 가로질렀다. 샤를레아는 감히 한 발짝 떼지도 못하고 셰비언을 노려보기만 했다.

희고 긴 손가락이 느긋하게 허공을 더듬었다. 마법망이 그가 연주하는 대로 흔들리며 영롱한 종소리를 사방으로 퍼뜨렸다.

“기껏 마련해 둔 보호 장치를 써먹을 수 없게 된 건 아쉽지만…….”

“마법진 기세가 너무 흉흉한 거 아냐? 너, 네 아가씨의 몸에 무슨 일이 생길지 겁나지도 않아?”

샤를레아가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셰비언에게선 조금 전의 당황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도리어 샤를레아를 비웃듯 한쪽 입가를 들어올렸다.

“아무 일도 안 생겨.”

“말은 잘 하지. 근데 넌 내가 이 몸을 야금야금 먹어치우는 것도 몰랐잖아.”

“글쎄?”

셰비언은 코웃음을 쳤다. 억지로라도 침착함을 가장하는 건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머리가 차가워지면서 그동안 놓쳤던 단서들이 한순간에 이어졌다.

오드리가 가진 마력의 성질과는 다르게 체온이 계속 올랐던 이유는 뭔지, 마력량이 기존의 몇 배나 되는 수준으로 늘어난 이유는 뭔지, 잦은 두통과 건망증을 겪은 이유는 뭔지. 그리고 아이샤가 목격한 화룡의 환상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지.

“정말 몰랐을까?”

셰비언이 샤를레아의 말투를 고스란히 흉내 내 샤를레아의 약을 올렸다.

“정말 몰랐으면 내가 왜 오드리에게 옐로 다이아몬드 장신구를 꼭 착용하고 다니라고 당부했을까? 머리색을 바꾼 뒤로는 그다지 어울리지도 않았는데.”

“그건…… 우연히…….”

“우연이 여러 번 겹치면 필연이 되는 거야.”

인간의 속담 중에서 셰비언이 가장 좋아하는 말이었다. 몇 마디 말을 나누는 사이 완성된 마법진이 금빛으로 반짝였다.

“자부심 높은 화룡 샤를레아가 인어의 수법을 흉내 내다니, 오래 살고 볼 일이야.”

마법진이 일어나 샤를레아를 덮쳤다. 샤를레아는 잽싸게 몸을 빼 피하려 했으나, 오드리의 몸은 그녀의 본래 육체처럼 단련되어 있지 않았다. 그녀는 긴 예복자락을 밟고 꼴사납게 넘어져 마법진에 꽁꽁 묶이고 말았다.

샤를레아의 반항은 짧은 비명과 몇 번의 몸부림으로 끝났다. 본래 성체가 되기 전의 인어는 연약했다. 인어가 혐오의 대상이 된 건 성체가 될 때까지 철저하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주변인을 속인다는 점에서 기인했으니, 일단 정체가 드러나면 잡는 거야 어렵지 않았다.

얌전해진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산발이 되어 쏟아진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는 선명한 초록색이었다. 대로에 주저앉은 자신과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의 물결에 당황한 게 온몸에서 드러났다.

“……셰비언? 내가 왜 이러고 있는 거지?”

셰비언이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오드리, 일단 일어나요.”

“어, 응.”

그녀가 선뜻 그의 손을 맞잡았다. 그녀의 손은 아직도 뜨거웠다. 마치 방금 끓는 물에서 빼낸 것 같았다. 셰비언은 흠칫 놀라 손을 놓으려 했지만, 그녀의 손이 나무뿌리처럼 단단히 얽혀들었다. 당혹스러움 속에 확인한 눈동자는 여전히 선명한 초록색이었다.

“오드리?”

초록색 눈동자에 햇빛이 떨어졌다. 초록은 금빛이 되고, 의아함과 당혹이 섞여 있던 얼굴엔 득의양양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러게 인간을 사랑하지 말라고 했잖아.”

셰비언의 등에 소름이 쭉 돋았다. 날갯죽지 부근에서 타들어가는 듯한 통증이 밀려들었다. 맞잡은 손을 통해 대량의 마력이 빨려나가는 감각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악다문 잇새로 신음이 새어나갔다.

“큭…….”

“터무니없이 연약하고 이용당하기도 쉬워. 이런 거에 마음을 주다니……. 어리석기는.”

“샤를……레아!”

“킥, 어른의 충고를 무시하면 이렇게 되는 거야.”

셰비언이 이를 악물고 자유로운 손을 뻗었다. 가느다란 목을 한 손에 틀어쥐었다. 마음만 먹으면 한 번에 꺾어버릴 수도 있는 연약한 목에서 두근두근 가쁘게 뛰는 맥이 전해졌다. 손에 힘이 들어갔다.

조여드는 손가락이 무섭지도 않은지 샤를레아가 히죽 웃었다.

“좋은 판단이야. 숙주에게 기생하여 자라는 어린 인어를 떼어놓는 데 실패하면, 남은 방도는 숙주를 죽이는 것뿐이지. 자, 확인해 봐.”

“…….”

“다만, 이 몸은 네 아가씨의 것이라는 걸 잊지 말고.”

줄줄 읊더니 어서 죽여보라는 듯 목을 길게 뺀다. 거기에 눈까지 감으니, 태연자약한 표정이 얼핏 오드리와 닮았다. 잠시 멈칫대던 셰비언의 손에서 기어이 힘이 빠졌다.

이 잠깐의 공방 중에도 셰비언의 마력이 대량으로 빨려나가고 있었다. 셰비언은 오드리의 몸을 입은 샤를레아를 어찌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손을 억지로 떼어내지도 못한 채로 마력을 빼앗겼다. 숨 몇 번을 더 쉬는 동안 눈앞이 어질어질해졌다. 숨이 찼다.

“기껏…… 마법사를 잡아먹고 힘을 회복해서 한다는 짓이 이런 거라니…….”

“그러게 내가 새끼를 달라고 할 때 줬으면 됐잖아.”

“네 손에 죽은 인어들이…… 지금 네 꼴을 보게 되면, 너무 웃은 나머지 한 번 더 죽을 수도 있을걸……. 화룡 샤를레아가 인어의 고명한 수법을 흉내 낸다고…… 말이야.”

말 몇 마디 하기가 왜 이리 힘든가. 입을 열 때마다 핏덩이가 올라왔다. 셰비언은 피를 툭툭 뱉으면서도 빈정대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샤를레아가 얼마나 유능한 인어 사냥꾼이었는지, 경계를 침범하고 어린 용의 육신을 노리는 인어를 얼마나 잔혹하게 살해해 왔는지 구구절절 읊었다.

샤를레아는 셰비언의 빈정거림 같은 건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행동했지만, 그의 말은 그녀의 자존심에 확실한 상처를 남겼다. 말이 길어질수록 그녀의 평정도 흐트러졌다.

“기왕 자존심을 내려놓을 거면…… 다나인지 뭔지 하는 마법사가 살아 있을 때 하지 그랬어……. 그 마법사는 용의 마력도 마법사의 재능도…… 윽, 가지고 있었는데.”

“닥쳐!”

샤를레아가 사납게 으르렁댔다. 셰비언이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그녀의 분노를 비웃었다.

“아니, 그렇잖아. 이왕이면 다 가진 몸이 좋지……. 아, 하긴……. 내가 너에게 마법을 허락하지 않았으니…… 마법사의 재능이 있거나 없거나 무슨 소용이겠어! 마법을 못 쓰는 건, 하아, 똑같을 텐데! 하하하! 하하…… 컥!”

잠깐 통쾌함을 즐긴 대가는 컸다. 샤를레아의 마력이 머물렀던 자리 곳곳이 갈라지며 피가 터졌다. 기껏 아물어가던 상처들이 다시 벌어졌다. 안 그래도 진창이 된 속에 이어 겉가죽까지 갈라져 피를 흘렸다.

셰비언이 고통에 허덕이며 바닥을 긁었다. 어찌나 힘이 많이 들어갔는지 손가락 관절마다 허옇게 뼈가 도드라졌다. 뒷면에 마법진을 그린 단단한 포석이 그의 손에 진흙처럼 뭉그러졌다.

샤를레아는 그의 고통을 즐겁게 들이마셨다. 들끓던 분노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비루함을 참고 인어의 수법을 빌린 보람이 있었다. 샤를레아가 들어앉은 몸이 오드리의 것이었기에, 셰비언은 그녀에게 손가락 하나 대지 못했다.

“뒷일이…… 두렵지 않아? 나는 이 정도로 안 죽어…….”

“네 심장을 내준 이를 내가 가질 건데 뒷일이 두려울 리가 있나.”

어린아이를 달래는 것처럼 다정한 어조였다. 샤를레아가 손을 뻗어 셰비언의 눈가를 어루만졌다. 울고 싶어서인지, 화가 나서인지 붉게 물든 눈가를 매만졌다.

“이래서 사랑을 하면 안 돼. 너 나 할 것 없이 죄다 등신이 된다니까.”

샤를레아의 이마에 문장이 떠올랐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와 그 위를 날아가는 바닷새의 문장. 불이라곤 티끌만큼도 없는 문장이지만, 그게 화룡 샤를레아의 문장이었다. 셰비언의 눈이 더 커질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설마 내가 고작 이 몸뚱이 하나 차지하려고 이런 더러운 짓까지 한 줄 알았니?”

단단히 얽혀 있던 손이 풀어졌다. 샤를레아가 가볍게 손을 턴 것만으로도 셰비언은 뒤로 몇 걸음이나 물러났다. 셰비언은 곧장 샤를레아에게 돌아가려 하였으나, 몸이 마음을 따라주지 못했다.

그는 그대로 바닥에 엎어져 남은 피를 토했다. 한바탕 토하고서야 가까스로 일어났지만 겉가죽에 상처가 생겼다 아물었다를 반복하며 피를 흘린 탓에 핏물에 목욕이라도 한 듯 온몸이 피 칠갑이었다.

“샤를레아!”

“응, 그리 부르지 않아도 내 이름은 내가 잘 알아.”

“이 미친년!”

“하하, 넌 욕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지! 하하, 하하하!”

셰비언의 눈에 핏발이 섰다. 샤를레아를 죽이고 싶어 이를 갈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그의 무력함이 그녀의 흥을 돋웠다.

샤를레아가 춤이라도 출 것처럼 발을 구르며 콧노래를 불렀다. 이마에 떠오른 문장이 붉게 빛나고 그에 따라 주변의 마력도 함께 춤을 췄다. 그녀를 구속하던 마법진이 산산이 깨져 바닥에 나뒹굴었다.

영광의 길에 난데없는 그림자가 졌다. 갑자기 어두컴컴해진 사위에 놀란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누군가 하늘을 바라보고 비명을 질렀다.

용이다! 붉은 용이 다시 왔어!

2차 괴물 사태를 겪었던 사람들에게 붉은 용은 악몽과 같은 기억이었다. 가까스로 잊었던, 혹은 깊숙한 곳에 묻어두었던 공포가 단박에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들은 도망치고 싶어 했으나, 주변에 자욱하게 퍼져 나간 용의 마력은 도주를 허락하지 않았다. 털썩 주저앉는 이들이 늘어났다.

샤를레아가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영광의 길을 덮은 그림자가 짙어졌다. 그녀가 방출하는 마력이 주변을 휩쓸며 바람을 일으켰다. 화룡의 마력 특유의 유황 냄새는 조금도 없었다. 서늘하고 차가운 빙룡의 마력이었다.

꾸역꾸역 몸을 일으킨 셰비언이 턱을 더럽힌 피를 닦아냈다. 그는 자신이 흘린 피를 매개로 다시금 마법진을 얽어냈다.

샤를레아가 이크, 하며 마법진을 걷어찼다. 마법진이 흔들리자 셰비언의 입가에서 또 피가 흘렀다. 그를 보며 그녀가 웃었다. 오드리인지 샤를레아인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맑은 미소였다. 셰비언의 발아래에 둥그렇게 고여 있던 피가 통제를 잃고 포석 사이로 흐르기 시작했다.

그녀가 그 피를 향해 손가락질했다.

“셰비언, 피를 잘 통제해야지.”

붉은 용의 형체가 가까워졌다. 영광의 길에 있는 사람들이 용의 가슴팍에 남은 험악한 흉터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였다. 아이를 데리고 나온 부모들이 아이의 눈을 가렸다.

“자칫하면 3차 괴물사태가 일어나잖아.”

그녀의 발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셰비언은 악착같이 피를 그러모아 흔들린 마법진을 복구했다. 마법진이 떠오르는 발을 잡아채려는 듯 빛을 뿌리며 솟아올랐다. 빠르게 올라가는 그녀를 잡아채 바닥으로 처박기에 모자람 없는 기세와 속도였다.

바로 아래까지 다가온 마법진이 두려운 듯, 그녀가 살짝 발을 움츠렸다. 붉은 예복 자락 아랫단이 썩둑 잘려나갔다. 지금 셰비언은 화가 잔뜩 난 나머지 뵈는 게 없었다.

“올해의 퍼레이드는 화려할 거라고 했는데……. 용이 또 나타났으니 축제는 글렀겠어.”

한탄하는 내용과 달리 목소리는 그저 담담하고 차분했다. 비웃음도 빈정거림도 없었다. 샤를레아의 말투가 아니었다. 셰비언의 집중력이 흔들렸다. 맹렬히 솟아오르던 마법진이 우뚝 멈춰 섰다.

“……오드리?”

“이 년 연속으로 수확제가 망하다니, 기가 막힌 일이야.”

“오드리!”

셰비언의 고함과 함께 마법진의 빛이 훅 꺼졌다. 사방에서 잔뜩 억눌린 비명이 새어나왔다. 붉은 용의 몸뚱이가 너무 가까이에 내려와 있었다.

용의 접근은 이상하리만치 고요하고 빨랐다. 거대한 날개를 펄럭이지도 않았고, 긴 목을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 농밀한 마력만은 확실하게 영광의 거리를 포함해 브란젤이라는 도시 전체를 내리눌렀다.

충분히 가까워진 용이 앞발을 뻗어 공중에 뜬 오드리의 몸을 소중하게 움켜쥐었다. 뻣뻣하게 굳어 있던 머리를 아래로 내려 셰비언을 바라보았다. 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눈을 휘며 소리를 질렀다.

“내가 말했지? 네 전부를 잃게 될 거라고! 내 복수를 망쳐 놓은 주제에 유일한 부탁도 들어주지 않아놓고 소중한 걸 만들었을 땐 이런 사태 정도는 각오했어야지!”

머리 위에서 천둥이 내리꽂히는 듯한 목소리였다.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하던 사람들마저 귀를 틀어막았다. 하나 용의 앞발에 잡힌 오드리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백치처럼 멍하니 눈만 깜빡이던 그녀가 셰비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열이 올라 붉어진 입술을 달싹거렸다.

“퍼레이드 같이 못 가서 미안해.”

“오드리!”

상처도 출혈도 피의 통제도 더 이상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셰비언은 곧바로 용의 모습으로 몸을 바꿨다. 상처투성이 날개가 가장 먼저 솟아올랐고, 피를 닦던 손이 용의 앞발로 바뀌었다. 손에서 시작한 변화가 채 끝나기도 전에 세차게 날갯짓해 몸을 띄웠다.

신경을 하얗게 태우는 고통이 밀어닥쳤지만 상관없었다. 당장 샤를레아를 죽일 수 없더라도, 오드리를 떨어뜨리게 할 수만 있으면 충분했다. 붉은 용의 앞발에 잡혀 정신을 잃은 듯 축 늘어진 오드리의 모습이 시야 전부를 채웠다.

조금만 더!

붉은 용의 움직임은 어색했다. 날개를 퍼덕이지도 못하는 데다 느리고 둔해빠져 상승하는 속도가 셰비언에 비할 바 아니었다. 셰비언은 자신이 오드리의 육신을 구할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의 날개 한쪽이 부러지기 전까지는.

뼈가 부러지고 피막이 찢기는 소리가 섬뜩했다. 허공에서 몸이 기울었다. 그는 자신이 아직도 용의 모습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반쯤 용의 앞발로 변했던 팔도 빠르게 인간의 팔로 바뀌고 있었다.

다급히 비행마법을 쓰려 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샤를레아에게 너무 많은 마력을 빼앗겼다. 용의 모습으로 몸을 바꾸는 것조차 못하는 마력량으로 비행마법 따위는 당치도 않았다.

셰비언은 그대로 추락했다.

시계탑의 배는 될 법한 높이에서 바닥으로, 쿵.

강화마법이 걸린 포석은 셰비언의 추락을 너끈히 받아냈다. 흥건하게 고여 있던 피가 사방으로 튀었을 뿐이었다.

겉모습은 인간이라도 실상은 용인 셰비언이다. 그는 이 정도 추락은 별것 아니라는 듯 벌떡 몸을 일으켰다. 경악한 사람들이 신음성을 뱉었지만, 그의 시선은 오로지 멀어지는 붉은 용에게만 꽂혀 있었다.

부러진 날개가 가엾게 퍼덕거리다 사라졌다. 셰비언은 다시 날아오르지 못했다. 그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붉은 용이 사라진 하늘을 망연히 바라보기만 했다. 탐스러운 은발이 온통 피에 젖어 붉었다.

피구덩이에 앉아 넋을 놓은 셰비언을 보는 사람들의 속은 복잡했다. 누구는 그를 안쓰러워했고, 누구는 동정했으며, 누구는 두려워하고 누구는 용 때문에 이게 무슨 꼴이냐 욕했다.

그 많은 사람들 중 감히 움직이거나 입을 떼는 이는 없었으니, 첫째는 샤를레아가 남겨두고 간 마력이 여전히 그들을 구속하고 있기 때문이었고 둘째는 포식자를 앞에 둔 피식자로서 가진 본능적인 공포에 짓눌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디에나 예외는 있기 마련이었다. 옷가게의 마네킹처럼 빳빳하게 굳은 사람들 사이를 힘겹게 헤치고 나온 비니타처럼 말이다.

“셰비언님!”

비니타는 셰비언을 보자마자 그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셰비언이 피투성이라는 것도, 그가 풍기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도 전혀 개의치 않고.

“대체 무슨 일이에요? 저 붉은 용은 예전에 셰비언님이 두들겨 패서 쫓아내지 않았어요? 다시는 안 올 줄 알았는데 왜 온 거예요? 어, 설마 셰비언님 다치셨어요? 피가, 피가 계속 나는데…….”

셰비언의 등을 끌어안았던 손이 피로 흥건하게 젖은 걸 확인한 비니타의 낯이 창백해졌다. 비니타는 2차 괴물사태 당시 괴물에게 부모를 한꺼번에 잃었다. 안 그래도 하늘에 뜬 붉은 용을 보고 한 차례 기절했다 깨어난 소녀는 뒤늦게 셰비언의 부상을 알아보고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어, 어떡하죠? 피가, 피가 이렇게……. 의사를 부를까요? 네? 어떤 의사를 불러야 해요? 셰비언님! 인간의 의사도 셰비언님을 치료할 수 있나요? 혹시 용의 모습으로 돌아가셔야 하나요?”

셰비언은 비니타가 달라붙어 조잘대거나 말거나 밀어내지도 않고 내버려 두었다. 그저 새삼스럽다는 눈으로 비니타를 슥 훑어볼 뿐이었다. 그런 그의 동공은 한낮의 고양이처럼 날카로운 세로선이었다.

용의 마력을 타고난 데다 셰비언을 자주 접해 겁이 없던 비니타지만, 지금 자신을 바라보는 셰비언의 눈은 어딘지 섬뜩한 데가 있었다. 그렁그렁하게 맺혔던 눈물이 깨끗하게 말라 버릴 정도였다.

“그…… 셰비언님? 괜찮으신 거죠?”

“비니타.”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꿀처럼 달았다. 감정이라고 부를 만한 게 죄다 사라진 얼굴에서 나왔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너는 용의 마력을 가진 마법사지. 그렇지?”

비니타는 손끝발끝이 저릿저릿해지는 걸 느꼈다. 2차 괴물사태 당시, 하늘이 어두워지기 직전에 느꼈던 것과 비슷한 감각이었다. 바로 도망가야 한다는 본능과 셰비언은 믿어도 된다는 이성이 격렬하게 부딪쳤다. 잠시 망설이던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미숙하긴 하지만……. 네, 저는 마법사예요. 그건 왜 물으…….”

“비니타!”

다급한 비명이 비니타의 말을 끊었다. 무심결에 뒤를 돌아본 비니타는 곧장 아이샤의 품에 끌어 안겨졌다. 어찌나 급하게 뛰어왔는지 심장 뛰는 소리가 천둥소리 같았다.

아이샤는 겁도 없이 셰비언에게 달라붙어 있던 비니타를 제 품에 안고 떼어냈다. 허겁지겁 외투를 벗어 피 칠갑이 된 아이를 감쌌다. 비니타를 꽁꽁 싸매고 나서야 셰비언을 정면으로 마주볼 정신이 들었다. 아이샤는 비니타를 제 뒤로 감추고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바늘처럼 날카롭게 곤두선 동공이 전신을 훑어보는 감각이 선뜩했다.

“셰비언님?”

“인어로군.”

이건 비상사태다. 아이샤는 지금 셰비언에게 자신은 먹잇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로 보일 거라는 것에 어제 주문한 장식장을 걸 수도 있었다. 등줄기에서 찬 기운이 흘렀다. 용은 최상위 포식자라던 말을 이런 식으로 실감하고 싶진 않았는데.

“셰비언님, 저는 인간이지 인어가 아닙니다.”

이 말 한 마디를 꺼내놓는 것도 힘겨운 일이었다. 브란젤 전체에 자욱하게 깔린 용의 마력을 헤치고 비니타를 따라온 것만으로도 아이샤의 체력은 바닥을 달리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바람은 언제나 바람으로 끝나고 마는 것인지, 셰비언의 동공은 예전으로 돌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먹잇감을 눈앞에 둔 육식동물처럼 반질반질 빛나는 것이 당장이라도 아이샤를 꿀꺽 잡아먹고 몸을 회복할 심산이라는 게 눈에 보였다.

아이샤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셰비언님, 제가 회복마법을 써드릴게요.”

“인어가?”

인어 아니라니까! 셰비언이 어찌나 얄밉게 자신을 비웃는지, 아이샤는 발작처럼 소리를 지를 뻔했다.

“인어는 다 만든 도시를 때려 부수고 어린 물고기를 키우는 데엔 재주가 있지만 다른 곳엔 영…….”

때려 부수길 잘하는 거야 파괴마법이 몸에 착착 달라붙는 걸 보면 안다. 하지만 치어를 잘 키운다니, 생각해 본 적도 없는 특기였다. 아이샤는 자신도 모르는 특기를 짚어주는 셰비언이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자신은 인간이지 인어가 아니잖은가.

“셰비언님이 직접 회복마법을 가르쳐 주셔놓고 까맣게 잊으면 어떡해요? 그거 익힌다고 죽을 고비 몇 번을 넘겼는데!”

“인어의 마력은 성질이 고약하지만……. 양은 제법 넉넉하니까…….”

셰비언이 휘청거리며 일어섰다. 아이샤는 제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게 빠른지, 아니면 이대로 기절하는 게 빠른지 재어보고 싶을 지경이 되고 말았다.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비니타를 질질 끌고 뒷걸음질을 했지만 거리는 속절없이 줄어들었다. 도망칠 구석을 찾아 눈을 굴렸지만, 그들을 둘러싼 사람들이 제자리에서 움직이질 못하니 빠르게 도망가는 건 애초 그른 일이었다.

아이샤는 그새 외투에서 머리를 빼꼼 내민 비니타를 붙들고 다다다 말을 쏟아냈다.

“비니타, 지금 당장 레이디 오드리를 찾아서 이리 좀 와달라고 해. 셰비언님이 크게 다쳐서 제정신이 아니라고!”

“어, 어디로 가야 해요?”

“그거야 네가 알아서 할 일이지! 평소엔 그렇게 잘 찾더니만 이럴 때 못하겠다고 엉덩이를 빼면 어쩌잔 거니! 빨리 가!”

다투는 사이 두 걸음이나 가까워졌다. 가까이 다가오는 셰비언을 아이샤의 어깨 너머로 확인한 비니타의 안색이 시체처럼 허예졌다. 아이샤가 비니타를 사람들 틈으로 쑤셔 넣었다.

“잡아먹히고 싶어? 가!”

비니타가 떨어지지 않는 발을 억지로 한 걸음 떼었을 때, 이변이 일어났다. 셰비언이 딛고 있던 포석에 수십 가닥의 실금이 생기더니, 그대로 부서져 버린 것이다. 시계탑 높이의 두 배는 되는 곳에서 떨어진 셰비언을 받아내고도 멀쩡하던 포석이 고작 걸음 한 번에 망가졌다.

‘마법이 효력을 다했나?’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전부가 그렇게 생각했다. 포석에 걸려 있던 마법이 끝날 때가 되었나보다고. 그러나 그 다음에 벌어진 건 고작 마법이 효력을 다했다 따위로 치부할 수 없는 일이었다.

첫 번째로 깨진 포석 주변에 깔린 다른 포석에도 연달아 금이 갔다. 높고 날카로운 쨍 소리가 연속적으로 터져 나왔다. 평평하던 도로가 순식간에 돌투성이 진창처럼 변했다. 빳빳하게 서 있던 사람들이 넘어져 나뒹굴었다.

그 다음은 가로등이었다. 대낮이라 뚜껑이 덮여 있을 뿐, 계속 빛을 내고 있어야 할 가로등이 눈을 감았다. 동일한 간격으로 늘어선 가로등이 차례차례 빛을 잃어갔다. 넘어진 김에 도망가려던 사람들이 놀라 주저앉았다.

영광의 길에 늘어선 상점들도 난리가 났다. 팔려고 내놓았던, 그리고 상점에서 사용 중이었던 마법도구들이 마법을 잃었다.

마법의 상실은 마치 밀물 같았다. 눈으로 볼 때는 천천히 다가오는 것 같지만 사실은 눈 깜짝할 새에 밀려들어 사위를 채우듯이, 수습하거나 막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일이 벌어졌다.

상황을 모르는 이들은 오로지 샤를레아를 원망하였으나, 영광의 길에 있던 사람들은 두려워하는 눈으로 셰비언을 바라보았다. 그가 용이라는 게 밝혀진 뒤 스스로를 칭했던 호칭이 새삼스럽게 생각난 탓이었다.

마법의 주인, 셰비언 절벽의 지배자.

전설에 의하면, 인간의 마법은 대도 로렐라이가 용에게서 훔쳐온 것이다. 마법은 장물이었고 인간은 장물로 번영을 이룬 파렴치한이었다. 다만 워낙 오래전에 있었던 일이고 다행히 주인이 너그러워 무사히 넘어갈 수 있을 줄 알았건만, 늦게라도 도둑맞은 장물을 되찾아가려 하는가.

마법 없이 살 생각을 하니 모골이 송연하고 두려움에 눈앞이 캄캄하지만, 누구도 감히 셰비언에게 항의를 한다거나 질문을 하지 못했다. 마법 없는 내일이 두렵기는 하지만 오늘 입을 잘못 놀리면 그 내일을 맞이하지 못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왕궁마법사로서 브란젤의 기반시설을 관리했던 아이샤는 달랐다. 망가지는 포석이며 가로등이며 지하의 상하수도관까지 죄다 그녀의 일이었다! 그녀는 자신도 의식하지 않은 사이 몸을 옥죄어오는 용의 마력을 뿌리치고 셰비언의 앞에 나아갔다. 그렇게 용기를 낸 보람도 없이 가까이 가자마자 목을 잡히고 말았지만 말이다.

사자의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민 토끼 같은 제 신세에 한숨이 나왔지만, 어쨌거나 닿기는 했으니 되었다. 적어도 즉사는 면했으니 다행이었다. 목을 조르는 손을 잡고 회복마법을 최대한으로 쏟아 부었다.

새하얀 빛이 셰비언을 감쌌다. 이대로 죽어도 어쩔 수 없다는 각오로 마력을 때려 넣은 보람이 있었는지, 자잘한 상처는 거의 다 아물었고 큰 상처도 대충 수습이 됐다. 과연 죽기 직전에 발휘한 집중력이라 효과가 대단했다.

흰 빛이 사라질 쯤이 되자 셰비언의 기세가 약간 누그러졌다. 바늘처럼 뾰족한 동공은 여전했지만, 목을 틀어진 손에 약간이나마 여유가 생긴 걸 보면 당장 아이샤를 죽일 것 같진 않았다.

“인어 주제에 회복마법이라니……. 놀라운걸.”

“커흑……. 저, 저는 인간…… 인간이에요…….”

“그럴 리 없어.”

셰비언이 딱 잘라 아이샤의 정체성을 부정했다. 아이샤는 그만 엉엉 울고 싶어졌다. 오로지 당장 필요하다는 이유에서 제 마력을 갈음한 게 누군데 이제와 인간이 아니니 어쩌니 하는가.

훗날은 걱정하지 말고 지금 당장 셰비언에게 발길질이라도 해서 이 손에서 벗어나야 하나 고민하는데, 셰비언이 갑자기 그 자리에서 푹 쓰러졌다. 맑은 공기가 폐로 확 밀려들었다. 쓰러질 듯 휘청거리는 아이샤를 단단한 팔이 받쳐 부축했다.

“괜찮습니까?”

“……보티안 씨?”

아이샤와 피올은 오드리의 소개로 서로 안면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그에게 도움을 받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터라, 아이샤는 얼떨떨한 기색을 숨길 수가 없었다.

“어떻게…….”

목이 상했는지, 그새 목소리가 형편없이 갈라져서 나왔다. 아이샤 자신이 듣기에도 무슨 말인지 못 알아먹겠다 싶을 정도였지만, 피올은 단박에 알아듣고 영광의 거리 한쪽을 가리켰다.

“치안대 사무실이 이 근처입니다. 아이샤 씨, 똑바로 설 수 있습니까?”

아이샤는 피올의 도움을 받고서도 제 발로 서질 못해 가로등에 기대고서야 그의 부축에서 벗어났다. 그녀는 상한 목을 쓰다듬으며 쓰러진 셰비언에게 시선을 주었다. 라비린이 셰비언의 목에 손을 대고 맥을 짚고 있었다.

“벨키스 경은 또 어떻게…….”

“상처 입은 채로 자꾸 말을 하면 목소리가 완전히 상합니다. 어차피 나중엔 치안대 사무실에서 질리도록 말하게 해드릴 테니, 지금은 제가 먼저 묻기 전엔 말씀하지 마십시오.”

피올은 아이샤의 입을 간단히 막아놓고 라비린에게로 돌아왔다. 몰래 접근해서 검집째 뒤통수를 후려갈길 땐 호쾌하기만 하더니, 맥을 짚는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왜 그래? 설마 죽었어?”

“내가 사람 쳐 본 게 얼만데 실수를 했겠냐. 그냥……. 아, 모르겠다. 네가 짚어봐.”

“하, 사람 많이 쳐 본 게 무슨 자랑이라고……. 비켜.”

아마 라비린의 경험 중 사분지 삼은 피올 자신일 터다. 피올은 입을 삐죽대며 셰비언의 맥을 짚었다. 체온이 낮은 거야 익히 알고 있었지만 손가락에 닿는 싸늘한 살갗이 영 산사람 같지 않아 진저리가 났다. 잠시 숨을 죽이고 집중하던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안 뛰는데? 체온도 낮고 진짜 죽은 거 아니……. 아, 뛴다. 무슨 맥이 이따위야? 공백이 왜 이리 길어?”

“인간이 아니잖냐.”

“아무리 인간이 아니라도 그렇지. 자칫하면 시체가 걸어 다닌다고 착각하겠…… 읏!”

번쩍 눈을 뜬 셰비언이 곧장 팔을 휘둘렀다. 피올은 반사적으로 검을 들어 셰비언의 공격을 막고 신음성을 터뜨렸다. 상대는 누워 있고 자신은 앉아 있는데도 충격이 만만찮았다. 하마터면 꼴사납게 날아갈 뻔했다.

바늘처럼 뾰족한 동공을 확인하고 쌍욕을 뱉으려는 순간, 라비린이 셰비언의 목에 검날을 들이댔다. 흰 목덜미에 붉은 선이 생겼다. 짐승처럼 적의로 반들대는 눈이 라비린에게 꽂혔다. 색색대는 숨소리가 거칠었다.

“허, 이러려고 나더러 맥 짚어보라 시킨 거네. 젠장, 나만 병신 꼴이 됐잖아? 치안대원 씩이나 되어서 기습이나 당하고! 예나 지금이나 기회는 잘도 챙겨먹는다니까.”

피올이 투덜대거나 말거나, 라비린의 신경은 오로지 셰비언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목을 잘라 버릴 것처럼 위협적으로 검을 누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오드리가 잡혀가서 눈이 돌아간 건 알겠는데, 인간 잡아먹고 회복할 생각은 꿈에도 마라.”

라비린의 목소리는 주변의 다른 이들이 듣기 힘들 정도로 작았다. 귀가 좋은 피올은 그 내용에 기겁을 했지만 셰비언은 대답이 없었다. 목에 닿은 검날과 라비린을 번갈아가며 바라보는 게, 마치 자신의 목이 날아가는 것과 라비린을 죽이는 것 중 어느 쪽이 빠를까 재보는 것 같았다.

“혹시 아까 그 마법사 잡고 있던 것도 먹잇감으로 생각하고 잡고 있었던 건가?”

“아마도.”

피올의 낯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지체 없이 검을 뽑아 셰비언의 심장을 겨눴다. 그가 갑자기 몸을 일으키면 그대로 찔러 버릴 듯 기세가 흉흉했다. 용은 심장 반쪽이 날아가고 옆구리가 갈라져도 죽지 않는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잠시나마 행동을 멈출 수는 있을 것이다.

“하, 그 아가씨는 무슨 생각으로 이런 미친 짐승하고 연애를 하는 거래? 하여간 간덩이 큰 건 알아줘야 돼.”

“셰비언, 네가 인간을 잡아먹는 순간 오드리와는 끝이야. 그땐 그녀가 간절히 널 원해도 안 돼.”

셰비언에게서 마력이 왈칵 흘러나왔다. 용의 마력을 정면으로 뒤집어쓴 라비린과 피올의 낯빛이 살짝 창백해졌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도리어 검 끝이 좀 더 날카로워졌다.

“오드리를 인간사회에서 유리시켜서 네 둥지에서만 지내게 할 셈이라면 그래도 돼.”

“……그건 안 돼.”

“그나마 아직 생각할 머리가 남아 있어서 다행이군. 난 또, 오드리의 마법사를 그렇게 취급하기에 아예 정신이 나간 줄 알았지. 그래, 일단 앉아서 이야기하자고.”

라비린이 피올에게 검을 치우게 하고 셰비언을 일으켜 앉혔다. 피올은 또 한바탕 욕을 퍼부으며 검을 치웠지만 그렇다고 검집에 넣지는 않았다. 그는 언제든 셰비언을 찌를 수 있도록 긴장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그건 라비린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검은 여전히 셰비언의 목에 닿아 있었다.

“네게 오드리의 입장을 헤아릴 머리가 있다면 지금 당장 마법을 돌려줘. 지금이라면 사태를 수습할 여지가 있어.”

바늘 같은 동공이 흰색이 되었다가 검은색이 되었다가 하며 번득거렸다. 라비린은 셰비언이 터지려는 화를 눌러 참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는 자신의 초조함을 누르며 인내했다. 목에서 새로 흘러내린 피가 찻잔 하나는 족히 채울 수 있을 정도가 되어서야 셰비언이 입을 열었다.

“……내가 한 게 아니야.”

“네가 아니면 누군데? 네가 바로 마법의 주인이잖아?”

“하지만 내 주인은 오드리지.”

“그건…… 연인끼리 흔히 하는 말이잖아. 그런 말은 갑자기 왜 꺼내는데?”

라비린은 셰비언의 말을 얼른 알아듣지 못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오드리는 웬만한 마법사는 훌쩍 압도할 정도로 풍부한 마력을 타고났지만 마법사의 재능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셰비언이 느릿느릿 말을 이었다.

“오드리에게 선물한 청혼반지에 붉은 보석이 박혀 있잖아.”

“봤어. 루비 같긴 한데 루비는 아닌 이상한 보석이었지.”

“그거, 내 심장의 피로 만든 거야. 마법을 다루는 주인의 권능을 넣어서 선물했어.”

라비린은 잠시 말을 잊었다. 오드리가 즐겨 입는 흰 케이프 코트가 용의 가죽으로 만들어진 거란 말은 익히 들었지만, 본인이 직접 심장에서 피를 내어 보석을 만들다니 이야기를 따라갈 수가 없다. 하긴 손발톱 뽑아서 마법망을 강화했다는 말은 어디 이해가 갔었던가. 그는 어차피 이해하지 못할 것, 그냥 머릿속에 쑤셔 박았다.

“……그래서? 설마 오드리가 그 청혼반지의 보석을 이용해서 마법을 거두기라도 했단 건가? 그럴 리가 없잖아, 오드리는 로렐라이의 주인인데!”

“맞아. 오드리가 그럴 리 없지. 하지만…….”

셰비언이 허공에 손을 뻗었다. 그의 손끝에서 마법망이 가시화됐다. 마법망은 끓는 물처럼 펄떡거리고 뒤엉키며 제멋대로 물결쳤다. 이래서야 마법도구에 걸린 마법이 견디질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모르는 사람들은 찬란하게 빛나는 마법망을 보고 아름답다 감탄사를 터뜨리겠지만, 라비린과 아이샤처럼 조금이라도 마법에 지식이 있는 사람은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바로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브란젤은 마법망이 안정적이기로 첫손에 꼽히는 곳이었다.

“이게 무슨…….”

“지금 오드리는 샤를레아의 지배 아래 들어갔으니까, 이게 당연한 거야.”

셰비언이 손을 휘저어 마법망 가시화를 집어치웠다.

“샤를레아는 예전부터 인간에게 마법을 주는 건 반대했어. 내가 준 반지에 권능이 깃들어 있다는 걸 모를 리 없는데 그냥 내버려 두겠어? 그녀는 분명히 마법망을 붕괴시키려 시도할 거야.”

라비린은 입술을 깨물고 화를 참았다. 검을 쥔 손아귀에 지나치게 힘이 들어간 게 느껴졌다. 누군가 뱃속에 모닥불이라도 피워둔 것처럼 속이 절절 끓었다. 자제하느라 입을 못 떼는 라비린 대신 피올이 화를 냈다.

“그런 중요한 걸 청혼반지로 주면 어쩌자는 거야?”

“중요한 거니까 청혼반지로 준 거야.”

“그럼 뭔가 안전장치를 해뒀어야지!”

“했어. 그런데 오늘 오드리가 그 안전장치를 모조리 벗었더군. 인간사회의 전통과 관습을 지키기 위해서란 명목으로 말이야. 오드리의 몸속에서 기생충처럼 자라고 있던 샤를레아는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없었겠지. 기껏 덩치를 키웠는데 망설였다간 또 짓눌릴 테니까.”

말을 늘어놓는 동안 셰비언은 평소의 날카로운 모습으로 돌아왔다. 어떻게든 마력을 채워 샤를레아를 쫓아가고 싶은 충동은 속 깊은 곳에 눌러두었다. 부상을 우습게 봤다가 또 당하는 건 사양이었다. 샤를레아가 오드리를 데리고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는 몰라도 갈 곳은 뻔했다.

“내가 선물한 반지가 마법망을 이 꼴로 만드는 것에 일조했다는 건 인정해. 하지만 그거라도 남아서 오드리를 지킬 거라고 생각하니까 따로 사과하고 싶지는 않군.”

라비린의 얼굴이 무참히 일그러졌다.

* * *

2차 괴물 사태 당시, 두 용의 싸움에 휘말린 브란젤의 마법적 기반시설의 상당수가 파괴되었다. 가스트로는 거금을 들여 기반시설을 수리하거나 교체했고, 데멘사는 복구 과정에 슬쩍 끼어들어 브란젤 전체에 전보선을 깔았다.

셰비언은 거미줄처럼 깔린 그 전보선을 마법망 안정화를 위한 매개물로 삼았다. 마법망을 통해 메시지를 전하고자 했던 초기 개발 방향이 아직 남아 있는 전보선의 마법수식은 절절 끓어오르는 마법망을 안정시키는 데에 제격이었다. 그의 손바닥에서 어린아이 머리통만 한 문장이 떠올랐다.

인간은 오래전에 잊어버린, 이젠 알아듣는 이 없는 주문이 그의 입을 타고 흘러나왔다. 맑은 종소리 같고 거친 바람소리 같고 깊은 바다의 한숨 소리 같은 주문이 길게 이어지며 브란젤 전체를 휘감았다.

땅 밑에 묻혀 있는 전보선에서 흘러나온 빛이 지상에까지 드러났다. 아지랑이처럼 솟아오른 빛무리가 하늘을 향해 하늘하늘 올라갔다. 빛무리는 셰비언이 읊는 주문에 따라 격렬해졌다가 얌전해졌다가 하며 절절 끓고 날뛰는 마법망을 어르고 달랬고, 때로는 제압했다.

평생 마법망을 열댓 번 열어볼까 말까 하는 저급 마법사부터 마법사협회장쯤 되는 고위 마법사, 그리고 마법을 쓸 줄 모르는 보통 사람들까지도 절절 끓고 펄떡거리던 마법망이 단정하게 변해가는 걸 눈으로 볼 수 있었다. 솜씨 좋은 직조장이 가느다란 실을 한 올 한 올 엮어 작품 같은 천을 짜듯, 셰비언은 주문과 마력을 엮어 마법망을 복구해 낸 것이다.

눈 닿는 곳 전부를 채우고 환상처럼 빛나던 마법망이 서서히 흐려지다 마침내 자취를 감췄을 때, 셰비언의 옆에서 우울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던 가로등에 빛이 들어왔다. 그게 시작이었다. 조금 전까지 마법을 잃고 폐기처분될 위기에 처해 있던 마법도구들이 차례차례 마법을 회복했다.

아직 해가 높아 퍼렇게 빛나는 하늘, 이르게 모습을 드러낸 낮달 아래에 인간이 만들어낸 별이 총총히 떠올랐다.

“쿨럭!”

셰비언은 크게 기침하며 핏덩이를 뱉었다. 전보기계에 설치된 마력구슬에서 마력을 뽑아 쓰고 전보선을 매개물로 삼으며 좀처럼 쓸 일 없던 주문까지 끄집어냈는데도 속이 죄다 뒤집혀 눈앞이 어지러웠다. 다리에서 힘이 빠졌다. 마구 금이 간 포석이 코앞으로 달려들었다.

“셰비언!”

라비린은 쓰러지는 셰비언을 황급히 붙들어 앉혔다. 영광의 길 가로등에 기댄 셰비언은 본래도 하얗던 얼굴에서 생기마저 빠져나가 숫제 정교하게 빚어낸 인형 같았다. 입가와 턱을 붉게 물들인 피가 비현실적이었다. 어떤 장인이 제 작품에 피를 끼얹겠는가.

“야, 일어나!”

피올은 제 형의 신경줄과 담력에 몹시 감탄하고야 말았다. 한 점 망설임 없이 셰비언의 뒤통수를 후려갈길 때도 놀랐지만, 이적에 가까운 마법을 눈으로 목격하고도 멱살을 쥐고 반말을 하며 소리를 지를 수 있다니……. 대단했다. 과연 타우레드의 후계자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다.

어쨌거나 라비린의 고함은 나름 효과가 있어서, 셰비언이 굳게 닫혀 있던 눈꺼풀을 꾸역꾸역 들어올렸다. 새카만 동공이 날카롭게 섰다가 둥그렇게 퍼지다가를 반복하며 억지로 초점을 맞췄다.

“시끄러워……. 바라던 대로 마법망 복구했잖아…….”

“마법망이 브란젤에만 있는 거 아니잖아. 이대로 쓰러져 버리면 다른 곳은 어쩌라고? 흉내만이라도 좋으니 인간 마법사들이 할 수 있는 거 없어? 아, 도로 눈 감지 말고! 빨리! 야!”

다급해진 라비린이 셰비언의 뺨이라도 쳐야 하나 갈등하기 시작했을 무렵, 셰비언이 마법망을 복구하는 내내 눈을 감고 쉬고 있던 아이샤가 나서서 회복마법을 썼다. 비록 한줌에 불과한 마력으로 발휘한 회복마법이었고 효율은 여전히 거지같아 결과물도 그리 흡족하진 않았지만, 워낙 셰비언의 상태가 안 좋다 보니 그것만으로도 나름 괜찮은 효과가 났다. 그는 이제 정교한 인형이 아니라 숨 쉬는 시체 정도로는 보였다.

“대단해! 과연 회복마법사로군. 아이샤 씨, 혹시 왕궁마법사 그만두고 타우레드에 올 생각 없습니까? 왕궁마법사장이 제정신이면 종신계약을 했겠지만 어떻게든 빼내 드리죠. 의식주는 물론이고 연구비 걱정도 할 것 없이 풍족하게…….”

라비린이 급박한 상황도 잊고 대뜸 아이샤를 꼬시기 시작했다. 아이샤의 회복마법은 영 효율이 안 좋다는 말을 들었고 실제로 그녀는 당장 쓰러질 듯 안색이 푸르고 식은땀을 흘리고 있지만 이 정도가 어디인가? 마법을 도구에 깃들어 쓰게 하는 현 시대에서 방어마법을 담은 레펙치오가 왜 그리 높은 평가를 받는가 말이다.

하지만 아이샤는 라비린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 상태였다. 그녀는 위 속의 내용물을 죄다 게워낼 기세로 구토를 했지만 나오는 거라곤 멀건 위액이 전부였다. 마력을 소진하고 쉬는 동안 점심으로 먹었던 음식물은 다 소화된 지 오래였다. 바늘로 위를 쿡쿡 찌르는 것처럼 쓰리고 입 안에 시큼한 냄새가 가득 찼다.

“어윽……. 속 쓰려. 이 빌어먹을 회복마법, 쓸 때마다 수명이 십 년은 줄어드는 느낌이라니까! 회복마법사 등록한 걸 파버리든가 해야지……! 아, 벨키스 경. 뭐라고요? 제가 토하느라 못 들어서요.”

“……아뇨, 됐습니다. 아이샤 씨, 그럼 셰비언을 좀 돌봐주면서 인간 마법사가 할 수 있는 일이 뭔지 좀 캐물어주십시오.”

“걱정 마세요. 확실하게 알아낼 테니까.”

라비린은 굳게 다짐하는 아이샤를 몹시 미덥게 바라보았다. 마법사가 쓰는 마법의 대가는 본인의 수명과 건강이며, 마력을 바닥까지 끌어 쓰면 쓸수록 끝은 이르게 찾아온다. 그를 알면서도 필요한 순간 몸을 아끼지 않고 나섰으니, 그녀는 충분히 믿을 만한 사람인 것이다.

그렇게 셰비언을 아이샤에게 맡기고 조금이나마 정신의 여유를 확보한 라비린은 바쁘게 움직였다. 영광의 길에 잡혀 있던 사람들 사이에 혼란이 퍼지는 것을 수습하고, 구경꾼 사이에 섞여 있던 기자들을 골라내 협박과 회유를 적절히 섞어가며 입을 막았다. 미리 파악하고 관찰 중이던 타국의 정보원을 싹 잡아들여 감금했으며 성문의 검문을 강화할 것을 지시했다.

놀라운 일이었다. 아무리 처음보다 옅어졌다지만 아직 용의 마력이 공기 중에 남아 있는데, 어떤 영향도 받지 않는 것 같았다. 움직임이 아주 활발하고 신속했다. 작위는 있어도 직위는 없는 라비린이 지시할 수 없는 일도 있었지만 누구도 그를 따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홀린 듯 그의 명령을 받아들였다.

하긴, 피곤하다며 그냥 길바닥에 드러누워 버리려는 셰비언의 멱살을 잡고 흔들며 지금 당장 마법망을 복구하지 못하면 로렐라이가 망하는 건 둘째 치고 오드리가 돌아올 자리 자체가 사라질 거라고 속삭였던 사람이 바로 라비린이었다. 셰비언이 피를 토하는 무리를 하면서까지 브란젤의 마법망을 복구하게 만든 장본인인 것이다.

그리고 몇 시간 뒤, 라비린은 하늘이 붉게 물들기도 전에 멜브란트의 마법사협회장과 아이샤, 왕궁마법사장, 그리고 셰비언을 굴비 엮듯 줄줄이 엮어 가스트로 앞에 데려다놓는 유능함을 발휘했다. 헨젤 백작을 성공적으로 배제한 것도 모자라 그새 대략적인 사건 개요를 정리한 서류도 첨부했으니, 그야말로 빛나는 유능함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다음 대 사자는 헨젤의 빈자리를 메우기에 흡족할 것 같군.’

가스트로는 제 소꿉친구를 절대 멀리 보내지 않고 옆에 두어야겠다는, 당사자가 알면 피를 토할 결심을 하며 서류를 읽었다.

“마법망 붕괴의 원인에 대해서는……. 음, 따로 따지지 않는 게 낫겠군. 이미 지나간 일인데. 안 그런가, 음……. 음, 아르젠 백작?”

“전하, 꼭 따져야겠다고 하셔도 저는 별로 상관없습니다.”

셰비언이 완벽하리만치 깔끔한 예의를 갖춰 말했다. 아름다운 얼굴에 사교적이라고 할 만한 미소도 띠운 채였다.

인간에게 어떤 예의도 취할 필요 없는 종족, 인간사회에서 가장 강대하고 고귀한 권위를 손톱으로 짓밟아 으깨도 인간은 감히 항의할 수 없는 종족이 인간의 왕에게 인간의 예의를 차린 것이다.

그건 흡족하다기보다는 괴상하고 소름끼치는 광경에 가까웠다. 어떤 호칭을 골라 써야 할지 몰라 아르젠 백작이라고 불러보았던 가스트로마저 잠시 말을 잊었다. 옷자락으로 둘러싼 살갗에 삐죽삐죽 소름이 돋는 게 느껴졌다.

급히 마련된 작은 회담장에 내려앉은 침묵이 만년설처럼 차갑건만, 눈보라 몰아치는 셰비언 절벽의 지배자는 그런 냉기가 느껴지지 않는 듯 산뜻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지금 마법망의 완전한 붕괴를 막고 있는 건 일전에 제가 뽑아내 박아놓은 비늘과 그때 쏟아 부은 피니까요.”

셰비언이 마법망 강화를 위해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녔는지는 이 자리의 모두가 알았다. 셰비언이 멜브란트를 가장 우선으로 돌보아 주었기에, 가스트로는 오드리의 무례를 웃으며 넘겼던 것이다.

“전하께서는 제 피와 비늘이 멜브란트에 집중되어 있는 이유를 분명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건 마법망 붕괴의 책임을 오드리에게 돌릴 생각은 꿈에도 말라는 협박이었다. 그랬다간 아슬아슬하게 붕괴를 막고 있는 피와 비늘을 회수해 버릴 거라는 경고였다.

가스트로는 라비린을 곁눈질했다. 감히 용의 뒤통수를 후려갈기고 멱살을 잡아 흔들 정도의 친분이 있으면 친구 좀 도와달라는 뜻이었는데, 라비린은 완벽한 방관자의 태도로 가스트로의 시선을 피했다.

‘저놈의 사자 새끼가 진짜……. 사랑에 눈이 멀면 장님이 되는 건 선대나 저놈이나 똑같군. 저 자식은 자기가 차였다는 것도 잊어버렸나?’

마법사들의 반응은 굳이 살필 필요도 없었다. 무조건 셰비언이 옳다고 고개를 끄덕대고 있을 게 뻔했다. 셰비언이 용이라는 게 밝혀졌을 때, 가스트로는 셰비언의 정체를 알기도 전에 그에게 작위를 내린 아버지가 신탁이라도 받았던 게 아닐까 의심했었다.

결국 가스트로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하나뿐이었다.

“아르젠 백작은 연인의 안위에 대해 걱정하지 마시게. 가넷 남작은 내게 변하지 않는 충성을 맹세했으니, 나도 그에 맞는 보호를 제공하는 게 마땅하지 않은가?”

라비린은 남들에겐 보이지 않게 한숨을 삼켰다. 아무리 셰비언이 장단을 맞춰준다고 한들, 그의 앞에서 아르젠 백작 따위의 호칭을 쓰는 가스트로의 간덩이와 뻔뻔함이 새삼 놀라웠다. 하긴 그 정도로 낯짝이 두꺼우니 셰비언 성벽의 일부를 아르젠 백작의 영지로 내려주는 쇼를 성공적으로 해낸 것일 테다.

‘하긴 저 용 새끼가 저만큼 맞춰주는 것도 대단하긴 하지. 눈치만 는 게 아니라 말솜씨도 늘었어.’

그는 찻잔을 들어 마른 입술을 축였다. 조금 전까지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던 것 같은데, 어느새 차갑게 식어 떫고 썼다. 잔뜩 녹인 설탕의 단맛이 들쩍지근하게 혓바닥에 들러붙었다. 생긋생긋 웃고 있는 셰비언이 터지기 직전의 풍선처럼 보였다.

“전보선을 이용하면 보통 마법사들도 광범위하고 강력한 마법망 안정화를 시도할 수 있습니다. 전하께서 허락하시면 제가 왕궁마법사와 마법사협회 소속 마법사들에게 방법을 가르치겠습니다.”

“레이디 오드리가 그리 필사적으로 전보선을 깔더니만……. 그걸 이렇게 써먹게 될 줄이야. 데멘사의 직원들이 깜짝 놀라겠군. 몸담고 일하던 직장이 하루아침에 문명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가 되다니.”

“데멘사는 오드리의 것이니, 그녀를 위해 일하는 게 마땅합니다.”

가스트로는 문명을 말했지만 셰비언은 오드리를 말했다. 데멘사는 오드리의 것이니 그들의 공은 곧 그녀의 공이라고 못 박는 셰비언의 어조는 강경하기 이를 데 없었다. 훗날 혹시라도 오드리에게 책임을 추궁하는 자가 나왔을 때를 대비한 방어적 발언이라는 걸 모를 수가 없건만 그를 지적하기엔 다른 대안이 없었다.

가스트로는 이기지도 못할 말에 굳이 반론하여 체력과 심력을 낭비하는 대신 식어빠진 차를 후루룩 마시며 화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레이디 오드리에게 훈장을 주기로 했었는데, 작위 수여에 정신이 팔려서 그걸 잊어버렸군.”

헨젤 백작이 오드리에게 작위를 주자는 의견을 반대하며 제시했던 대안이 핑곗거리로 떠올랐다. 가스트로가 오드리 본인도 잊어버렸을 게 분명한 훈장을 언급하며 뻔뻔하게 미소를 지었다.

“레이디 오드리가 돌아오는 대로 훈장을 주어야겠어.”

“전하, 제가 미리 알아보았는데 십자월계훈장의 생김새가 제법 괜찮더군요.”

라비린은 셰비언의 낯짝도 제법 두껍다는 걸 알게 됐다. 셰비언이 생긴 게 예뻐서 좋다고 말한 십자월계훈장은 훈장 중에서도 가장 등급이 높은 1급 훈장이었다.

* * *

살론의 마법사협회장, 데블로프망은 좀처럼 자리에 앉아 있질 못하고 좁지 않은 방을 뱅뱅 맴돌았다. 브란젤의 하늘에 내려앉았던 용의 존재를 눈으로 보고 나니 마음이 가라앉질 않았다.

멜브란트에서 괴물이 나타났다는 말을 들었을 때, 살론의 마법사들은 하나같이 그들을 비웃었다. 얼마나 마법사 관리를 못했기에 인체 실험 따위의 짓을 하는 놈들이 활개를 쳤느냐고. 옛 마법을 쓰는 마법사로서 작위를 받은 아르젠 남작의 소식에 흥미를 보이는 이들이 몇 있었지만, 말 그대로 흥미에 그쳤다.

2차 괴물사태가 벌어지고 용의 출현이 소문났을 때도 그들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역시 멜브란트의 허풍선이 놈들은 미신에 미친 데다 촌스럽기까지 해서, 우연히 큰 새 몇 마리가 뒤엉켜 싸운 걸 가지고 호들갑을 떤다 여겼다.

살론의 마법사들이 흥미를 보인 건 데멘사의 전보였다. 실용성을 최고의 가치로 치는 것이 살론 마법계의 기풍이라, 정체도 모호한 옛 마법과 용보다는 확실한 이득과 변화를 가져올 전보를 훨씬 가치 있게 여긴 것이다.

하니 데블로프망이 바일런 섀덤의 마법동력을 미끼로 셰비언을 꼬드긴 것은 충분히 그럴 만한 일이었다. 본래 대어를 잡으려면 미끼도 고급을 써야 하는 법이고 옛 것은 새 것에 자리를 내주어야 하는 법이었다.

이 계획은 전보를 발명할 정도의 마법사라면 당연히 살론의 마법 수준에 흥미를 느낄 거라는 자신감을 바탕으로 성립되었다. 셰비언이 비록 멜브란트에서 작위를 갖고 있다고 하나 살론의 왕은 작위 수여에 옹색한 자가 아니었고, 요란하게 연애를 한다지만 살론의 귀족 영애들도 아름답고 상냥하며 매력적이었다.

살론의 마법사 중 누구도 데블로프망의 계획이 허황되다 생각하지 않았다. 이 시대의 마법사치고 바일런 섀덤의 마법동력에 관심을 갖지 않는 자가 어디에 있을까.

살론의 마법사들은 셰비언의 정체가 용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다. 신화시대는 끝났고 이종족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지금, 어딜 봐도 보통 사람인 그가 실은 용이라니 그걸 어떻게 믿는단 말인가.

하지만 데블로프망은 봤다. 보아버렸다. 브란젤의 하늘에 붉은 용이 나타난 것도, 셰비언이 용의 날개를 펼치고 날아올랐다가 추락하는 것도, 마법망이 붕괴하는 끔찍한 장면과 붕괴됐던 마법망이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하는 장면도.

아지랑이처럼 솟아오른 금빛 마력이 마법망을 복구하던 장면은 실로 장관이었다. 그걸 살론의 마법사 중에서 데블로프망 자신 혼자서만 보았다는 게 안타까워 미칠 지경이었다.

쉴 새 없이 방을 맴돌던 데블로프망의 눈에서 빛이 번쩍였다. 그는 구석에 팽개쳐 두었던 짐을 뒤져 살론 마법사협회의 인장이 찍힌 편지지를 찾아냈다. 이곳에서 새로 구입한 만년필이 편지지 위를 내달렸다.

“그래……. 전보고 나발이고, 마법망이 제일 중요하지.”

살론은 마법이 발달한 나라였다. 정책적으로 마법사를 길러냈고, 대륙적으로 마법도구 개발의 선두에 서 있었으며, 자연히 마법도구의 사용량과 범위가 넓었다. 그 대가로 살론의 마법망은 멜브란트에 비해 불안정했다. 다른 나라의 협회들이 아는 것보다 ‘조금 더’ 불안정했다.

전통적으로 살론의 마법계에선 소수에 불과하던, 옛 마법과 마법진을 연구하는 이들이 최근 목소리를 높일 수 있게 된 배경이 그 불안정한 마법망이었다. 대체 언제까지 다음을 기약할 거냐며, 그런 날이 오기는 하는 거냐고 따져 묻는 소수의 마법사들.

데블로프망은 달튼 제도의 발톱섬에 가지 못해 안달을 하는 그들과는 견해가 다르다못해 사사건건 대립하는 입장에 있었지만, 마법망을 안정화시키는 걸로 모자라 붕괴한 마법망을 복구하고 강화할 수 있는 방법이 눈앞에 나타났는데 외면하고 지나칠 정도로 편협한 인물은 아니었다.

“빌어먹을 멜브란트 놈들, 어떻게 마법망 안정화 스크롤을 만들어냈을까 했더니만 저런 괴물을 옆에 두고 있었어…….”

정보가 부족하긴 했다. 사건이 터지자마자 멜브란트에 심어놓았던 정보원 대부분이 단숨에 쓸려나갔는지 소식이 끊긴 데다가 충분히 구슬려 놓았다고 생각했던 치들도 갑자기 입이 무거워졌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블로프망은 이 일이 일으킨 파장이 비단 멜브란트에서 끝나지 않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그건 어쩌면 예지에 가깝다고 할 정도의 확신이었다. 그는 너무 늦기 전에 끼어들어서 부스러기 같은 이익이라도 주워 먹기로 결심했다.

그저 걱정인 것은, 살론의 마법사들 중 이 사건의 목격자가 오로지 자신 혼자라는 점이었다. 젊고 개혁적인 살론의 마법사협회장에겐 적이 많았다. 살론이 아닌 멜브란트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는 지금, 그가 쓰는 편지가 얼마나 먹힐지 스스로도 장담할 수 없었다.

“코르보 경이 잘해줘야 할 텐데.”

데블로프망은 자신이 마법사협회장이 될 수 있도록 물심양면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살론의 왕실마법사장, 코르보 경에게 기대를 걸었다. 그녀라면 협회 소속 마법사들의 목을 콱 졸라서라도 어떻게든 일을 성사시킬 것이다.

그렇게 셰비언에게 업힐 생각을 한 인물은 데블로프망만이 아니었다. 대관식에 참석하러 왔다가 그와 같은 경험을 한 외국의 귀빈들은 생각 끝에 대개 비슷한 결론을 내렸다.

아무리 비마법의 위상이 커지고 일상에서 기계의 비중이 높아진다고 한들 아직 세상의 주류는 마법이었다. 당연히 타국의 대관식에 참석할 수 있을 정도의 고위급 인사들이 마법에 대해 무지한 일반인일 리가 없었다.

그들은 마법의 상실이라는 문명 최악의 상황을 경험했으며, 거의 동시에 마법이 복구되는 과정을 눈으로 직접 보았다. 무도회를 취소한 멜브란트 왕실은 상황을 파악하고 대책을 세울 때까지 그들에게 외부와의 접촉 없이 숙소에서 얌전히 있어줄 것을 요청했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새로이 카즈네 공작이 된 히엠스의 살벌한 미소와 협박도 그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들은 귀빈이지 죄수가 아니었다. 통제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셰비언이 정확히 뭘 할 수 있는지 몰랐다. 철통같은 보안을 위한 상식대로 당연히 마법도구를 동원한 그들의 서신은 하나도 남김없이 셰비언에게 잡혀 가스트로에게 전해졌다. 그 과정에서 미처 파악하지 못했던 첩자와 정보원을 잡아들인 것은 부가적인 효과였다.

“제멋대로들 썼군. 말이 다 달라. 하하, 소설을 쓰면 제법 유명해질 자도 보여. 재미없게 외국에 사절로 나돌기엔 아까운 재능인걸!”

가스트로가 먼 길을 떠나지 못하고 중간에 멈춘 서신을 훑어보며 낄낄댔다. 그의 옆에선 셰비언이 연신 마법도구의 봉인을 풀고 있었고, 히엠스는 새로 추가된 첩자의 명단을 확인했으며, 라비린은 열심히 다과를 축내고 있었다.

셰비언도 라비린도 굳이 가스트로의 말에 반응하지 않는 가운데 히엠스가 보던 명단도 접고 나섰다.

“왕궁에서 영광의 길은 붉은 용을 보는 데는 충분하지만 그 앞발에 잡힌 게 무엇인지까지 알아보기엔 먼 곳입니다. 아무래도 용에 관련된 얘기라 사람들도 입을 조심하고 있어서 자세한 내용을 알아내는 것에도 한계가 있는 듯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결론은 엇비슷하다는 게 재미있지 않나? 멜브란트의 용이 하려는 일이 뭔지는 몰라도 그에 협조하고 마법망 안정화, 강화 기술을 전수 받자……. 그를 자국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면야 좋겠지만 강력한 적이 있는 이상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 아르젠 백작은 어떻게 생각하나?”

가스트로는 자연스럽게 셰비언의 입을 열려고 시도했지만 헛수고였다. 가스트로에게 장단을 맞춰주며 대화했던 건 다 꿈이라도 되는 양, 그는 그저 무심한 낯을 하고 남은 마법도구를 해체하는 데에 열중했다. 결국 이번 질문에 대한 대답도 히엠스의 몫이 되었다.

“손이야 하나라도 많은 쪽이 좋습니다. 물론 멜브란트의 전력만으로도 안 될 건 없습니다만…….”

히엠스는 셰비언을 곁눈질했다. 그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차분했다. 꼭 필요하다며 인간의 참여를 당당히 요구했던 것치고는 묘한 태도였다.

“그랬다가 어느 정도의 희생을 치러야 할지 예측할 수 없다는 점이 걸립니다. 마법을 지키려다 나라가 망해서는 곤란하잖습니까. 그리고 발톱섬이 있는 곳이 달튼 제도인데, 살론 놈들이 자신들은 끼워주지 않은 것에 불만을 품고 사략선을 보내 방해라도 하면 큰일입니다. 거긴 아무래도 지형이 복잡해서요. 평소라면 별것 아닐 테지만 이번에 싸워야 하는 적은 인간이 아니라 용이니 방해 같은 것에 신경 쓸 정신이 없습니다.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건 그렇지. 카즈네 공작은 해전을 경험해 본 적도 없으면서 잘 아는군?”

“브란젤에 바다는 없지만 바다로 흘러가는 큰 강은 있지 않습니까.”

“하하, 그렇지. 그렇지 참.”

라비린은 가스트로와 히엠스의 대화를 한 귀로 흘리며 셰비언에게 집중했다. 일단은 부상을 치료하는 게 가장 우선이라고 하더니, 본체로 돌아가지 않고 서신을 봉인한 마법도구 따개 노릇을 자청한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하긴 뭐, 그렇게 따지면 나도 여기에 있으면 안 되는 인물이긴 하지…….’

아무리 가스트로의 소꿉친구이며 히엠스, 셰비언과 친분이 있는 데다 사건의 목격자이며 현장에서 일차 수습을 담당했더라도 라비린은 고작 벨키스 남작이었다. 기사 작위는 있지만 공식적인 직위는 없고 로렐라이에서 일했던 걸 감췄으니 내세울 만한 경력도 없었다.

지금 라비린이 이곳에 있는 건 오로지 그가 타우레드 후작의 후계자이기 때문이었다.

본래 가스트로와 함께 대책을 세우고 히엠스와 함께 외국의 귀빈들에게 압박을 가해야 할 타우레드 후작은 지금 세피아 항구로 긴급 출장을 간 상태였다. 셰비언이 봉인했던 샤를레아의 본체가 세피아 항구의 앞바다에서 뛰쳐나온 덕분이었다.

뱃사람이란 미신에 약한 족속이었고, 세피아 항구는 온갖 국적의 뱃사람이 우글거리는 곳이었으며, 그들에게서 바다에서 화룡이 튀어나온 사건을 무마하는 건 치안대만으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되는 큰일이었다.

세피아 항구가 아니라 다른 항구였으면 그나마 나았을 텐데, 하필 세피아 항구는 브란젤과 전보로 연결된 곳이었다. 덕분에 데멘사의 협조를 받아 소식을 통제하는 업무도 타우레드 후작의 몫이 됐다. 타우레드 후작은 하루 세 번, 혹은 네다섯 번씩 셰비언에게 욕설을 퍼붓는 전보를 보냈다. 수신인은 라비린이었다.

‘은근히 소심한 영감 같으니.’

라비린은 욕설 전보를 모아다가 셰비언에게 선물하는 자신을 상상했다. 그러자 지쳐 늘어진 몸뚱이에 조금 활력이 도는 것 같았다. 각설탕 다섯 개를 처넣은 차에서도 드디어 단맛이라는 게 느껴지는 것 같았고.

“벨키스 경, 보안은 잘 되고 있나?”

가스트로의 한 마디에 입맛이 싹 사라졌다. 라비린은 도로 맹물이 되어버린 차를 내려놓았다.

“일단 제가 아는 한은 잘 되고 있습니다. 어차피 지상군보다는 해군을 주로 써야 해서 크게 주의할 만한 정보를 내주지도 않았고……. 전하께서 우려하시는 일은 없을 겁니다.”

“경은 타우레드 후작에 비해 장악력이 떨어지는 걸로 아는데, 그렇게 확신하는 근거는?”

그러게 내 통제력 떨어지는 걸 그렇게 잘 알면서 왜 굳이 나한테 군의 정보 통제를 맡겼냐? 라비린은 이 순간 가스트로와 단둘이 아닌 게 몹시 아쉬워졌다. 기사 작위만 따고 홀랑 사라진 자신을 아니꼬워하는 시선에 종일 시달리는 기분이 어떤지 말로라도 퍼부어주고 싶건만,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제가 사자의 후계자라 그런지 다들 협조적입니다.”

“흠, 역시 그렇군.”

가스트로는 만족스럽게 눈을 휘며 웃었다. 라비린이 죽을 고생을 하고 있는 거야 차에 들어가는 각설탕 개수만 봐도 알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군의 일은 타우레드 후작가의 일원이 맡아 하는 게 제일 간단하고 확실했다. 하물며 라비린은 로렐라이에서 대리인 일을 하면서 비슷한 경험을 쌓아오지 않았던가.

그러니 가스트로의 걱정은 라비린이 아니라 히엠스에게로 기울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돌아오라고 그리 재촉을 했건만, 떠맡은 전장과 동료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마지막까지 미적거리다 한계에 이르러서야 브란젤로 돌아온 기사.

적은 준비에도 불구하고 카즈네 공작으로서의 업무를 충실히 잘하고 있는데도 왠지 미덥지 못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단순히 불안 때문이길 바랄 뿐이었다.

“카즈네 공작은 부디 정보 통제에 좀 더 힘을 기울여 주게. 아무리 생각해도 보는 눈이 너무 많았어. 조금이라도 말이 퍼지는 시기를 늦춰야 하네.”

“예.”

“레이디 오드리는 참……. 미워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좋아할 수도 없는 사람이로군. 적이 되지 않기를 바랄뿐이야.”

가스트로의 입가에 고소가 머물렀다 사라졌다. 셰비언은 모른 체했고 비슷한 미소를 지은 라비린은 찻잔으로 얼굴을 가렸다.

히엠스는 강철새 시연회에서 스치듯 보았던 오드리를 떠올렸다. 브란젤 출신치고는 이상하리만치 가무잡잡한 피부와 선명한 초록색 눈동자가 인상적인 귀족 영애였다. 해괴한 차림과 당당한 말투, 자신감 넘치는 매너가 돋보였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1, 2차 괴물 사태를 글로만 접했던 히엠스는 몰랐다. 괴물 사태를 겪은 사람들이 왜 오드리를 현세의 벨트람이라고까지 부르며 사랑하는지, 그리고 그 사랑이 얼마나 지극한지. 알 리가 없었다.

하긴 본인도 모르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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