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41. 오드리 랄리우스 가넷 (44/62)

chapter 41. 오드리 랄리우스 가넷

「혼란 속에 멈춰선 한 명은 점에 불과하지만, 그 뒤에 점 하나가 더 보태지면 점은 선(線)이 된다.」

불행은 한꺼번에 온다는데, 그렇다면 행운도 한꺼번에 오는 걸까? 셰비언에게 반지를 받은 수확제 셋째 날의 밤 이후, 오드리에겐 연이어 낭보가 날아들었다.

브란젤에서 만탈락까지 이어지는 전보가 개통됐다. 아무리 셰비언이 종종 거들어줬다지만 해를 넘길 것을 각오했던 걸 생각하면 경이적인 속도였다. 오드리는 그에 만족하지 않고 만탈락을 기점으로 삼아 남부지방을 거미줄처럼 잇는 작업에 들어갔다. 그 역시 앞날이 밝았다.

또한, 강철새에 대한 여론이 아주 긍정적으로 형성됐다. 인간이 하늘을 누빈다는 사실 자체에 거부감을 느끼는 목소리가 없잖아 있긴 하지만 호기심과 찬사가 훨씬 더 컸다. 군사무기로서의 가능성을 알아본 타우레드 후작의 치근거림을 피하는 게 조금 번거로울 뿐이었다.

만탈락의 소유권 이전 작업이 잡음 없이 진행되고 있는 것도 큰 즐거움이었다. 관료귀족들에게 수확제와 대관식이 겹친 이 시기는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로 일이 많을 텐데도 그런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고 성심성의껏 일을 처리했다.

그도 그럴 것이, 카즈네 공작이 대관식을 치르기 5일 전에 가스트로에게 치안대 통솔권한을 돌려주었기 때문이었다. 대관식을 치르고 새로운 카즈네 공작을 임명하기 전까지 산트렘 기사단과 치안대는 가스트로의 양손에 쥐어져 있었다. 가스트로는 유일한 왕자이니 그를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은 없는 거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이 시기의 왕세자가 휘두르는 검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것이 암묵적인 관례이자 규칙이라, 감히 그의 심기를 건드리는 사람이 없었다.

가스트로가 만탈락의 소유권 이전 문제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을 아는 관료귀족들은 이런 시기에 그에게 미운털이 박히고 싶지 않았다. 예전이었다면 헨젤 백작의 눈치를 약간이라도 봤을 테지만, 요즘 헨젤 백작의 세가 전 같지 않음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니 모든 일이 빙판 위를 미끄러지는 것처럼 순조로울 밖에.

오드리가 오스미다와 가스트로의 비호를 받는다는 건 이제 비밀이 아니었다. 그에 더해 그녀가 로렐라이의 주인일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상류사회의 구성원들 사이에 은밀히 퍼지고 있었으니, 오드리의 몸값은 하루가 다르게 뛰어올랐다.

훌륭한 혈통, 왕족의 비호, 부유한 재산, 영리한 머리, 의무를 버거워하지 않는 성품, 높아져가는 명성, 좀 까맣다 뿐이지 충분히 봐줄 만한 용모.

셰비언이 그녀의 곁을 단단히 지키고 있지만 않았어도 청혼서가 무더기로 쌓였을 게 분명했다.

라비린이 남부식 드레스를 차려입은 오드리를 살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노골적으로 훑어보는 시선에 화를 낼 만도 하건만, 오드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시선을 받아넘겼다. 도리어 여봐란 듯 그의 앞에서 빙글 돌기도 했다. 남부식 드레스의 얇은 옷자락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해 지면 추워지는 계절에 이런 옷을 골라 입히다니.”

“괜찮아, 이 머리장식이 레펙치오거든. 이걸 꽂고 있으면 더위도 추위도 느끼지 않는다 이 말씀.”

오드리가 다알리아 머리 장식을 가리키며 웃었다.

“뭐, 이게 없었어도 남부식 드레스를 입었을 거야. 랄리우스 후작으로서 대관식에 참석하는 건데 중부식 드레스를 입을 순 없지.”

오드리의 전신에서 뿌듯함이 흘러넘쳤다. 오늘 낮, 그녀는 가스트로가 왕이 되는 대관식에 랄리우스 후작으로서 참석했다. 헨젤 백작 영애나 레이디 오드리의 명성 따위로는 발끝도 못 들이밀 자리에 그녀가 나타났을 때 다들 얼마나 놀란 표정을 지었던가 생각하니 자꾸 웃음이 났다.

지금 오드리와 라비린이 참석한 연회는 대관식에 참석한 자들만을 위해 왕궁에서 특별히 베풀어준 자리였다. 위세 있는 가문의 가주와 각 분야에서 명망 있는 인사들, 외국에서 온 귀빈들이 연회장에 바글거렸다.

“너도 놀랐지?”

“솔직히.”

라비린은 테라스 입구의 두꺼운 커튼이 잘 여며져 있는지 곁눈질을 했다. 웃음소리와 음악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오긴 하지만, 이만 하면 괜찮았다.

“랄리우스 후작위는 대체 언제 상속한 거야?”

“얼마 안 됐어.”

대답은 몹시 무성의했다. 라비린이 화난 표정을 지었지만 오드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곤 접시에 담아온 음식에 관심을 쏟았다. 아침을 거른 데다 대관식이 진행되는 내내 굶은 탓에 이게 첫 끼니였다. 고상하고 우아한 척 연회 음식을 외면하기엔 너무 허기졌다. 다행히 라비린은 딱히 체면 차릴 필요가 없는 상대였다. 그녀는 기쁨에 차 포크를 들었다.

“적어도 나한테는 말을 해줬어야지.”

“깜빡 잊었어.”

“오드리!”

“정말이야. 작위수여식이 너무 일러서 입고 갈 옷이 없다고 투덜댔던 거 기억 안 나? 대관식에 랄리우스 후작으로서 참석해야 한다는 것조차 까먹고 있었는데 뭘 어쩌라고.”

오드리는 버터에 구워 껍질을 벗긴 새우를 허겁지겁 입에 밀어 넣었다. 탱글탱글한 살을 씹을 때마다 고소한 향기가 입안 가득 퍼지는 게, 세상에서 제일가는 별미였다.

“어제 저녁에 오스미다 전하께서 사람을 보내 확인하지 않으셨다면 오늘 내 자리는 비어 있었을 거야.”

“이제까지 네가 한 온갖 헛소리 중에서도 가장 못 믿을 헛소리야.”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어쩌겠어, 정말 그런 걸.”

“네 옷을 준비한 하녀들조차 일정을 몰랐다는 걸 나더러 믿으라고?”

오드리가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저작운동을 하느라 제대로 된 대답을 하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다.

“사실이야. 초대장을 받은 게 아니라 구두로 통보받은 거라……. 근데 내가 한동안 많이 바빴잖아. 말을 한 줄 알았는데 안 했더라고. 그래놓고 나중엔 아예 잊어버리기까지 했으니 별 수 있나. 내 하녀들이 옷을 여러 벌 준비하지 않았다면 정말 난처할 뻔했어.”

말을 끝내자마자 포크가 다시 바빠졌다. 와인에 졸여 소스를 뿌린 소고기, 소금만 뿌려 구운 닭고기, 구웠어도 아삭한 아스파라거스, 동그랗게 뭉쳐 튀긴 생선살……. 접시를 가득 채웠던 음식이 오드리의 입으로 끊임없이 들어갔다.

라비린이 혀를 차며 오드리에게 제가 갖고 들어왔던 잔을 주었다. 오드리는 사양하지 않고 받아 마셨다. 도수가 낮고 상큼한 샴페인이라 부담스럽지 않았다.

“기가 막히는군. 그동안 사교모임에서 작위 상속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던 건 오늘의 충격을 노리고 한 짓이야?”

“그랬다면 대관식 참석을 잊었겠어? 쓸데없는 혼담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을 뿐이야. 내가 랄리우스 작위를 갖고 있다는 게 알려지면 용도 눈에 안 보일 분들이 오죽 많아야지.”

맞는 말이었다. 이제까지 여자가 가문을 계승한 경우는 단 하나, 일테니아 후작뿐이었다. 그녀의 성공에 고무된 이들이 줄지어 소송을 걸었지만 그 결과가 어떠하였던가? 결코 부러지지 않을 것처럼 저항하던 이들 모두가 결국 남편에게 작위를 주었다.

오드리가 접시를 내려놓았다. 목이 가느다란 크리스털 잔이 오른손에서 왼손으로 옮겨갔다.

“내일 전하께서 주실 작위는 고작해야 남작, 잘하면 자작 수준일 거야. 용의 심기를 거스르면서까지 도전하기엔 좀 부족하지. 하지만 랄리우스는 무려 후작이잖아. 나와 결혼하면 랄리우스 후작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믿는 멍청이들이 수두룩하게 튀어나올걸.”

“용의 연인을 빼앗을 마음을 먹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닌데 멍청이라는 말을 들을 것까지야.”

“여자 작위에 눈이 멀어서 헐떡대는 놈들의 용기 따위 내가 알 게 뭐야? 그래서 알려지는 게 싫었어.”

이제는 알려져도 괜찮고?

라비린은 나오려던 말이 목에 턱 걸리는 느낌을 오랜만에 느껴보았다. 잔을 쥔 오드리의 왼손 약지에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온갖 장신구를 아끼지 않고 착용하면서도 늘 비워져 있던 손가락이었다.

“……나는? 나도 그 멍청이들 중 하나인가?”

가까스로 뱉어낸 말엔 꾸며낸 장난기가 듬뿍 묻어 있었다. 오드리가 잔을 내려놓고 접시를 들었다. 반지 낀 손가락이 접시에 가려졌다.

“넌 경우가 다르잖아. 난 한때 네 약혼녀였어. 한데 널 멍청이라고 부르겠어? 내 얼굴에 내 손으로 먹칠할 것도 아닌데.”

“호구라고는 부르겠지.”

“그건 네가 자청한 거니까 어쩔 수 없는 거고. 호구 되기 싫으면 지금이라도 탈출하세요~.”

오드리의 포크가 접시 위를 다시 누비기 시작했다. 아까 남겼던 콩뿐만 아니라 소스에 잠긴 고기 부스러기까지 싹싹 긁어먹을 기세였다.

“왕궁에서 베푸는 연회에서 음식은 장식이라는 걸 몰라? 접시 몇 개를 털어온 거야?”

“연회장에서 싸늘하게 식어버리기엔 너무 맛있는 음식인걸.”

“나 참……. 먹어도 디저트 몇 개 집어먹고 마는 게 보통인데……. 넌 내가 그렇게 편하냐. 갈수록 하는 짓이 내 기사 동기들 같아지는 게……. 조금은 의식해 주면 안 되겠어? 이래봬도 너에게 구애 중인 불쌍한 남자인데.”

“이 정도만 해도 나름 특별대우라는 걸 알아줬음 좋겠는데? 이 연회장에서 날 이름으로 편하게 부르는 남자는 아버님을 제외하면 너밖에 없어.”

“내 이름을 편하게 부르는 여자도 너밖에 없어.”

테라스의 공기가 묵직해졌다. 포크가 접시를 긁는 날카로운 소리가 커튼을 넘어 들어온 소음을 가렸다.

“남부식 드레스는 코르셋을 안 차도 돼서 정말 다행이라니까. 중부식 드레스를 입었으면 절반도 못 먹었을 거야.”

화제를 아예 다른 곳으로 바꾸고 싶었던 시도는 통하지 않았다. 라비린이 눈 깜짝할 사이 오드리에게서 접시를 빼앗았다. 정말이지, 프로 소매치기가 무릎 꿇고 한 수 배우고 싶다 청할 만한 솜씨였다. 갈 곳을 잃은 오드리의 시선이 흔들렸다.

“카즈네 공작의 임명식도, 아르젠 남작의 승작식도 내일이지. 다들 바쁠 테고 헨젤 백작님은 참석하지 않을 게 뻔하니 네 작위수여식엔 내가 동행할게. 시간 맞춰 준비하고 있으면 내가 데리러…….”

“필요 없어.”

라비린은 어쩐지 상처받은 것 같았다. 오드리는 다급히 말을 덧붙였다.

“내가 데릴사위를 들여서 랄리우스를 잇게 만들 생각 없다는 거 너도 알잖아. 나 자신을 신붓감으로 전시하고 싶지 않아. 왕궁 출입도 랄리우스 후작으로서 하면 그만이니 굳이 에스코트 해주겠다고 나서지 않아도 돼. 남자는 필요 없어.”

“……네 뜻이야 알지. 하지만 네가 아무리 랄리우스 후작위는 내 것이라고 외쳐도 사람들은 전혀 듣지 않을 텐데? 쓸데없는 입방아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에스코트를 받아. 네게서 얻어낼 게 있다고 생각하는 동안에는 다들 입과 행동거지를 조심할 테니. 셰비언도 이유를 잘 설명하면 이해할 테니까 그에게 너무 미안하게 생각하지 말고…….”

라비린의 어조는 차분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답지 않게 조근조근한 말투로 오드리가 아직 약혼조차 하지 않은 미혼 여성이라는 걸 주변에 인식시켜야 할 필요성을 늘어놓았다. 그의 논리는 완벽했다.

하지만 오드리가 그걸 몰라서 셰비언의 청혼을 받아들였던가. 그녀는 왼손 약지에 낀 반지가 라비린에게 잘 보이도록 손을 들어올렸다. 라비린의 시선이 반지에 꽂혔다.

“수확제 셋째 날에 받은 거야. 받고 나선 뺀 적 없고, 앞으로도 뺄 생각 없어. 볼 사람들은 이미 다 봤을걸. 너에게 에스코트를 받으면 오히려 모양새가 이상해질 거야.”

라비린이 입술을 깨물고 한숨을 참았다. 그리곤 아까 오드리가 마시다 말고 내려놓은 잔을 들어 남은 샴페인을 한 번에 들이켰다.

“미혼이라는 입장이 주는 이점을 취하려고 약혼하지 않고 버텼던 거 아니었어? 왜 갑자기 이런 바보 같은 짓을 해?”

“그런 계산은 처음부터 한 적 없어. 용의 목줄이 되기 싫어서 버텼을 뿐이고, 상품처럼 팔리기 싫어 모른 체하고 있었을 뿐이야. 그렇게 버티다 보니 미혼이 주는 이점이 있었고……. 와, 말하고 보니 되게 애 같네. 엄청 감정적이었잖아?”

라비린은 오드리가 아직 열여덟 살에 불과하다는 걸 새삼스럽게 떠올렸다. 내가 그 나이 때는 뭘 했더라? 아, 워커의 강철새 기획서를 반려했다가 만탈락으로 쫓겨났지.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에서 깔깔 웃으며 말을 달리는 소녀를 보았었다.

“이득이고 뭐고 이제 계산하지 않기로 했어. 내 인생은 내 거니까 난 날 위해 살 거야.”

오드리가 테라스 난간 밖으로 길게 몸을 뺐다. 차가운 바람으로 얼굴을 식히려나 본데, 드러난 목덜미까지 죄다 붉다는 건 아직 모르는 모양이었다. 목소리가 살짝 들떠 있는 걸 보니 살짝 취한 것 같았다.

“……그래, 너 알아서 해라.”

“라비린?”

“사람들과 어울려 주는 건 적당히 하고 일찍 들어가. 남은 건 내가 메울 테니 그렇게 알고.”

라비린은 오드리를 내버려 둔 채 연회장으로 돌아갔다. 술과 꽃의 향기, 마구 뒤섞인 향수 냄새, 귀를 찌르는 음악 소리, 그리고 가면 같은 웃음을 지은 얼굴들이 그를 반겼다. 그가 절대 벗어나지 못할 세계였다.

* * *

카즈네 공작의 임명식, 아르젠 남작의 승작식, 오드리 헨젤의 작위수여식.

대관식 다음 날에 한꺼번에 해치우기엔 지나치게 덩치가 큰 행사들이지만, 일정은 변함이 없었다. 가스트로는 앞의 두 행사가 오드리 헨젤의 작위수여식에 대한 관심을 조금이라도 줄여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강철새가 비행에 성공하고 새로운 버전의 벨트람 포스터가 배포된 데다 로렐라이의 주인이 오드리일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그의 바람은 그냥 바람으로 끝나고 말았다. 앞의 두 식이 만만치 않게 많은 시간을 잡아먹었는데도 자리를 뜨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가스트로는 지끈대는 이마를 짚고 한숨을 쉬었다. 카즈네 공작의 임명식에 참석했던 인사들 대부분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니 앞으로 들을 말이 무성하겠구나 싶어 눈앞이 아찔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따로 할 걸 그랬어.”

“솔직히 말해서, 따로 하나 같이 하나 다를 바 없었을 겁니다. 의도와 달리 기자의 숫자가 지금의 배는 되는 꼴을 보셨겠지요. 그나마 카즈네 공작과 아르젠 백작에게 몰려가서 이만큼만 남은 겁니다.”

“라비린, 그 존댓말 좀 집어치우면 안 돼? 들을 때마다 소름이 돋아.”

“대관식까지 치렀는데 제가 어떻게 감히 그럴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참으시지요.”

“그 말이 퍽이나 진심이겠어. 뭣 때문에 그렇게 속이 꼬여 있는 건데?”

“진심으로 한 말이니, 괜한 추측은 하지 않아주셨으면 합니다.”

가스트로가 라비린의 속을 살살 긁어댔지만, 라비린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늘 웃음을 머금고 있던 눈동자를 차갑게 얼린 채로 식순을 확인할 뿐이었다.

“혹시 레이디 오드리의 작위수여식에 오기 싫었어?”

“…….”

입에 기름칠이라도 한 것처럼 따박따박 말대꾸를 하던 사람이 갑자기 말이 없다. 라비린은 뒤늦게 그럴 리 있느냐며 부정했지만, 그 잠깐의 침묵이 곧 대답이었다.

“오, 그냥 찔러봤는데 반응이 확실하군. 진짜인가? 두 사람은 서로 서신도 주고받으면서 친구로 잘 지내고 있는 줄 알았는데……. 라비린이 친구의 출세를 질투하는 소인배였다는 건 이제 알았네.”

“아닙니다. 그저 어제 연회에서 술이 과했던 탓에 몸이 좋지 않아서 이럽니다.”

라비린이 거듭 부정했다. 신빙성이 몹시 떨어졌다.

가스트로는 오드리가 혼기의 막바지에 이른 친구의 전약혼녀였다는 걸 뒤늦게 떠올렸다. 두 사람이 워낙 스스럼없이 잘 지내는 데다 셰비언의 존재감이 대단해 까맣게 잊고 있었다.

친구의 상한 마음을 생각하는 예의바르고 착한 친구이라면 마땅히 입을 다물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가스트로는 라비린에게 그다지 좋은 친구였던 적이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악우에 가까웠다. 가스트로의 신분이 높아 라비린이 참고 지내는 것이지.

그는 거침없이 입을 놀렸다.

“그러고 보니 레이디 오드리가 아주 신기한 보석이 박힌 반지를 사람들 앞에서 자랑했다지? 아주 소문이 자자해. 피처럼 붉은 광채가 아름다운데 루비는 아니고, 어두운 곳에서 빛을 비추면 흰 눈송이가 떠오르는 보석이라고.”

라비린은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어딘지 재미있어 하는 기색마저 엿보이는 말을 듣고 있으려니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타우레드 후작가는 멜브란트의 사자라 불리는 가문이라, 어딜 가더라도 가문의 위세가 부족한 일이 없었다. 왕실의 피가 섞여 있기까지 한 명문가니 외국에 나가더라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눈앞의 친구를 후려칠 수도 없고 걷어찰 수도 없는데.

라비린이 눈을 이글거리거나 말거나 가스트로는 계속 재미있어 했다. 마음이 표정으로 드러났다. 라비린은 가스트로가 라디아타에게 냉대를 당하던 시절 그를 놀려먹었던 과거를 처절하게 후회했다.

“천 가지 약초를 캐려면 남쪽으로 가고 백 가지 보석을 캐려면 북쪽으로 가라는데……. 인간은 불가능하더라도 셰비언 절벽의 주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용이라면 그런 보석을 캐올 수도 있겠지.”

“전하.”

“반말. 그런데 말이야……. 마음에 품은 여자가 다른 남자가 준 반지를 끼고 있는 게 그리 속상할 일인가?”

“전하.”

“반말. 어쨌거나 내 처지보다는 낫지 뭘 그래. 좋게 생각해.”

라비린의 눈에서 들끓던 열기가 서서히 식었다. 그는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눈을 떨궜다. 왕비의 관을 쓰고 있는 라디아타가 악우와의 대화에서 화제에 오를 때면 그는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타우레드 후작가가 라디아타를 생각해서 왕실에 거액의 돈을 융통해 줌으로써 빚에 쫓기던 가스트로의 숨통이 트였다고? 우스운 얘기였다. 오로지 빚 청산을 위해서라면 라디아타의 죄상을 밝히고 타우레드의 재산을 몰수하는 쪽이 훨씬 나았다.

“도저히 놓을 수가 없어서 반지를 끼우고 내 옆에 앉혀놓았는데……. 그러지 말 걸 그랬어. 침대에 눕힐 때마다 불덩이를 삼킨 것 같은 표정을 짓는데, 그 얼굴을 보고 있으면 그녀가 아니라 내가 죄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그게 견딜 수가 없으면서도…….”

“전하, 라디아타는 제 동생입니다. 아무리 저라도 그런 얘기까지는 못 들어드립니다.”

“네가 아니면 누구한테 얘기해? 내 손으로 증거와 증인을 죄다 뭉개 버렸는데.”

가스트로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고개를 젖혔다. 드높은 천장은 멜브란트의 건국왕이 나라의 기틀을 세우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는 장면을 그린 그림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다분히 신화적인 표현 방식을 빌린 터라 그림 구석구석까지 호화로웠다.

“라비린……. 가문은 대체 뭘까?”

“전하께서 하실 말씀은 아닌 것 같습니다. 또한 제게 묻기에도 적절치 않습니다.”

“사랑은 또 뭐고?”

사랑이 대체 뭐냐고? 그러게, 그게 뭔지 나도 참 알고 싶다. 마음 같아서는 천상에 있을 볼린의 멱살을 잡아다가 물어보고 싶어.

라비린은 툭 튀어나올 뻔한 말을 목구멍으로 삼켰다. 그걸 알고 싶은 건 자신뿐만 아니라 가스트로도 마찬가지일 게 분명했다. 그가 라디아타에게 죄를 묻지 않고 결혼을 강행하겠다고 결정했을 때, 타우레드 전체가 안심하면서도 경악했었다.

“하긴, 네가 그걸 알면 오늘 여기 오지도 않았겠지. 올 때야 레이디 오드리 혼자 왔다지만 돌아갈 땐 아르젠 백작과 함께 갈 텐데, 그 꼴을 눈뜨고 어떻게 봐?”

가스트로가 채신머리없이 낄낄거렸다. 라비린은 그에 반응하지 않고 식순만 죽어라 들여다보았다. 외워도 한참 전에 외웠을 종이 안에 신비하고 위대한 비밀이라도 숨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열렬하게.

“그보다 헨젤 백작은 좀 불쌍하게 됐어. 그토록 오래 노력했는데 결국 랄리우스도 만탈락도 지키지 못하게 됐으니.”

“전하께서 손수 처리하신 일이잖습니까. 반발하는 이들을 일일이 찍어눌러가며 레이디 오드리를 밀어주셨으면서. 새삼 헨젤 백작이 불쌍하게 여겨진다니 뭐 잘못 드셨습니까?”

“라비린, 방금 말투 괜찮았어. 분명 존댓말인데 아주 경박하고 무례한 게 꼭 반말 같군.”

“…….”

“레이디 오드리는 정말 대단한 일을 했어. 그녀가 있어서 용이 인간 사회에 섞여 살 결심을 하고 멜브란트에 머무는 건데 작위든 재산이든 뭐가 아까울까. 한데 헨젤 백작은 그런 그녀의 아버지인데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잃기만 하잖아. 일반적인 경우는 아니지.”

“……일반적으로는 가문이 함께 빛나겠죠.”

“맞아. 헨젤 백작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커져서 잘라낼 시점이 된 데다 뤼나소 유통에 개입했던 게 드러나서 봐줄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고는 하지만, 지금의 몰락 속도는 지나치게 빠른 감이 있어. 레이디 오드리의 이름값과 공로가 가문의 빈틈을 메워줘야 하는데 오히려 벌리고 있지.”

“그러니 어린애에게 미움을 사면 안 되는 겁니다. 살이 연하고 마음이 여릴 때 입은 상처는 큰 흉터를 남기는 법이니까요. 헨젤 백작이 왜 어린 오드리를 만탈락으로 보내서 혼자 자라게 했는지 영 모르겠습니다. 이건 제 짐작이지만, 아마 오드리는 자신을 헨젤이라고 여기지도 않을 겁니다.”

“그럴지도 몰라. 레이디 오드리는 헨젤을 공격하는 데에 망설임이 없거든. 도리어 아주 날카롭고 정확하게 약점을 헤집어대고 있어. 행정개편을 급박하게 시작했는데도 차근차근 진행되는 데에 레이디 오드리의 공이 적어도 3할은 될 거야. 그녀가 뽑아서 추천해 준 인물들이 참 괜찮더라고.”

가스트로가 별안간 몸을 일으켜 라비린이 들여다보던 종이를 빼앗았다. 라비린은 더는 피하지 못하고 가스트로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의 얼굴은 서리가 내린 듯 싸늘했다. 라디아타 이야기를 하며 가슴 아파하던 사람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레이디 오드리는 앞으로도 헨젤 백작가를 자신의 가문으로 여기지 않을 게 분명한가?”

“그걸 왜 제게 묻습니까. 전하의 말씀대로 저는 전 약혼자에 불과합니다.”

“짝사랑 중이잖아. 관찰력과 분석력이 최고조에 달했을 텐데 대답하기 어려워?”

라비린은 가스트로가 자신을 절친한 소꿉친구로 여긴다는 사실이 몹시 서러워졌다. 그래도 왕자일 때는 재수 없는 걸로 끝났는데 왕이 되고 나니까 정말로 감당이 어렵다.

“그게 중요합니까?”

“당연히 중요하지. 레이디 오드리는 랄리우스 후작위를 상속했어. 그리고 곧 만탈락을 영지로 삼게 될 거야. 기껏 헨젤에게서 분리해 냈는데 도로 돌아가 버리면 내 수고가 다 헛것이 된다고.”

“오늘 받을 작위에 셰비언과 결혼해서 아르젠 백작위까지 가지고 돌아가면 더 큰일이고 말이죠?”

“정답. 그래서 네 생각은 어때?”

“제가 레이디 오드리를 사랑한 나머지 그녀에게 유리한 대답을 하면 어쩌려고 제게 물으십니까?”

“네 동생이 내 아내인데 내가 그런 걱정을 하겠어? 네가 핏줄을 외면할 수 있는 인물이었으면 레이디 오드리와 파혼하지도 않았을걸.”

가스트로는 라비린이 제 연약한 동생을 얼마나 아끼는지 잘 알았다.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어머니의 버팀목이 되고 가문의 얼굴이 되어 버틴 동생에게 깊은 부채감을 갖고 있다는 것도. 과연 이제까지 잘 버티던 라비린의 가면이 기어이 산산조각 났다.

“망할 자식. 내가 이런 걸 친구라고……!”

“하하, 그 욕도 오랜만에 들으니까 되게 반갑다.”

“반가워할 걸 반가워해라! 오드리는 절대 헨젤로 돌아가지 않을 거다. 그러기엔 부녀 사이에 파인 골이 너무 깊어. 동생 쪽이 어떻게 잘 해 본다면 또 모르겠지만, 글쎄……. 내가 보기엔 헨젤 공자는 아버지와 성정이 비슷해.”

“어떤 면에서?”

“헨젤을 지극히 아끼고 사랑한다는 면에서. 아직 어려서 갈팡질팡하긴 하는데, 역시 헨젤 백작에게 길러져서 그런지 핏줄보다 가문에 무게가 실리는 타입이야. 그런데 이런 걸 왜 이제 와서 물어? 진작 알아봤어야 하는 거 아냐?”

“진작 알아보면 뭐해? 용 때문에라도 달라는 대로 줘야하는 걸. 용에게 목줄 잡혀 끌려 다니는 불쌍한 왕이 바로 나라고, 나. 아무튼 솔직한 대답, 아주 좋아. 앞으로 어째야 할지 대충 알겠어.”

빙긋 웃은 가스트로가 벗어놓았던 망토를 두르고 나갈 준비를 시작했다. 구석에서 없는 사람처럼 숨만 쉬고 있던 시종이 부리나케 달려와 그의 옷매무새를 고쳤다.

“라비린, 너도 나갈 준비해야지.”

“제기랄…….”

“네가 레이디 오드리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도저히 눈뜨고 볼 수가 없다면 어쩔 수 없는 거지만.”

라비린은 재미 삼아 제 속을 뒤집는 가스트로를 향해 이를 득득 갈았다. 안타깝게도 할 수 있는 게 그것뿐이었다.

“볼 거야. 오드리의 평생 소원 중 하나가 이뤄지는 순간인데 어떻게 안 볼 수 있어?”

“불쌍한지고.”

“글쎄? 적어도 결혼하고도 잠자리를 가질 때마다 강간범이 된 기분을 느끼고 있다는 네놈에게는 들을 말이 아닌 것 같은데? 적어도 나는 친구잖아.”

“친구보다는 부부가 낫지. 나는 기분만 그런 거지 진짜는 아니잖아? 관계가 나아질 가능성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코앞에서 이뤄지는 격의 없는 대화에 당황한 시종이 뒷걸음질을 쳤다. 라비린과 가스트로는 그런 시종에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눈싸움을 했다. 눈싸움의 마지막 즈음, 그들은 머나먼 어린 날에 그랬던 것처럼 서로의 배에 주먹을 한 대씩 날리고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차림을 가다듬었다.

휴식 시간은 끝났다. 파격적인 의식의 주인공인 오드리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 * *

오드리는 남부식 예복을 차려입었다. 오래된 전통에 따라 잡다한 장식은 배제하고 붉은색과 검은색이 적절히 섞인 것이었다. 상의와 하의가 통으로 붙은 원피스 형태였고, 상체는 딱 붙이되 치마는 크게 부풀리지 않았다.

까맣게 윤나는 머리는 뒤통수 아래에서 단정하게 하나로 묶었고, 귀걸이나 목걸이 따위의 장신구는 하지 않았다. 느슨하게 걸어놓은 끈 형태의 허리띠에 박힌 호박 정도가 그나마 호화로운 장식이었다.

장신구를 착용하지 않은 데다 색이 어둡고 묵직한 광택이 흐르는 중부식 천을 썼는데도 오드리는 초라해 보이지도, 그렇다고 옷에 밀리지도 않았다. 오히려 가무잡잡한 피부와 어울려 자연스러운 위엄을 드러냈다. 나이를 생각하면 기이한 일이나, 그녀가 몇 년이나 한 도시의 주인으로 지냈다는 걸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어쨌건 가장 까다로운 예법 선생이라도 트집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격식을 차린 차림이었다. 한데 오드리가 걷기 시작하자 겉치마의 긴 트임이 갈라지며 그 안에 챙겨 입은 바지가 드러났다. 본래대로라면 색이 다른 속치마가 보여야 할 것인데, 속치마 대신 통 넓은 바지가 경쾌하게 펄럭거렸다. 가만히 서 있을 땐 치마처럼 보였지만 걷기 시작하자 속일 수 없었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오드리를 구경하던 관객들이 술렁거렸다. 남부식 예복을 입고 나온 것만으로도 대담하다 할 것인데, 멋대로 예복을 변형해서 입고 나오다니! 대담함이 지나쳐 불경함을 잊었다는 질책을 받아도 어쩔 수 없으리라.

그러나 이런 일탈은 오드리가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 코앞에 닥친 작위수여식 일정에 맞춰 급히 맞출 수 있었던 옷이 비교적 단순한 형태인 남부식 예복뿐이었던 걸 어쩌란 말인가. 한참 전에 주문했음에도 중부식 예복은 완성까지 한 달도 더 남았고 전에 입던 예복들은 죄다 몸에 맞지 않았다.

그나마 간신히 만든 남부식 예복도 온갖 편법을 다 동원했다. 겹쳐 입어야 하는 속치마까지 제대로 제작하기엔 도저히 시간이 안 되어 임기응변으로 승마드레스의 바지를 수선했다든가, 철저히 장식을 배제한 건 시간도 모자랐지만 재봉사의 솜씨도 부족해서 그런 거라든가.

오드리는 정해진 자리에 서서 가스트로의 표정을 살짝 곁눈질했다. 다행히 그리 불쾌해하는 것 같진 않았다. 그녀는 냉큼 한쪽 무릎을 꿇고 자세를 잡았다.

“그대의 이름과 출신을 고하라.”

“저는 뉴터 헨젤과 밀리나 랄리우스 헨젤의 딸, 오드리 헨젤입니다. 태어나기는 브란젤에서 태어났고…….”

작위수여식의 절차는 간단했다. 이름과 출신을 확인하고, 작위를 줘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수여받는 이가 변치 않는 충성을 서약하면 새로운 성과 작위를 내려준다. 또한 영지를 준다면 영지의 이름과 위치를 읊어 준 다음, 왕의 인장이 찍힌 문서에 수여자 본인, 그리고 증인이자 보증인 두 명이 서명한다. 마지막으로 왕이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망토를 손수 작위수여자의 어깨에 둘러주는 과정이 있는데, 이는 때에 따라 생략됐다.

오드리 랄리우스 가넷 남작.

오드리가 새로이 받은 성은 가넷이며, 작위는 남작이었다. 더불어 오드리가 랄리우스 후작위를 상속했음이 다시 한번 공식적으로 언급되었다. 가스트로는 최근 왕실의 기조에 따라 가넷 남작에게 영지를 주지 않았지만, 대신 브란젤의 저택을 하사했다.

오드리가 랄리우스와 가넷 중 어떤 성을 쓰든 상관없다는 배려였다. 그녀가 지난 며칠 간 손가락에 끼고 다닌 반지를 떠올린 사람들이 짙은 아쉬움에 혀를 찼다. 소수의 사람들이 오드리는 아직 정식으로 약혼한 게 아니라며 정신승리를 했지만, 오드리는 작위수여식에도 청혼 반지를 끼고 왔다. 반지가 오늘 착용한 유일한 장신구였다.

“보증인은 서명하게.”

가스트로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두 사람이 오드리의 옆에 와서 섰다. 한 명은 셰비언이었고, 다른 한 명은 라비린이었다. 조금 전에 백작으로 승작한 셰비언은 물론이고, 라비린도 타우레드 후작가의 후계자이면서 벨키스 남작이라는 작위를 갖고 있었으므로 보증인으로서의 자격은 충분했다.

하지만 보증인으로 두 사람이 나타나자 소곤대는 목소리가 족히 두 배로 커졌다. 어쩔 수 없었다. 셰비언과 라비린 모두 오드리와 스캔들 기사를 뿌리며 요란한 연애를 한 당사자가 아닌가. 당연히 부친인 헨젤 백작이 나설 줄 알았던 사람들은 부녀 사이가 영 별로라던 소문이 사실인 모양이라고 수런거렸다.

귀가 좋은 셰비언과 라비린은 물론이고 오드리에게도 사람들의 동요가 전해졌다. 본래 셰비언은 사람들이 떠드는 것에 관심이 없었지만, 오드리와 라비린이 한데 엮여 오르내리는 건 불쾌하게 여겼다. 오드리와 라비린이 미리 말을 해두지 않았더라면 분명 뭔 짓을 했어도 했을 것이다.

오지랖 넓게 지난 스캔들을 꺼내 나불대는 사람들의 목숨은 오드리와 라비린이 구한 셈이었다. 본인들은 영 모르겠지만.

가스트로는 축사 등의 군더더기를 죄다 빼버리고 정말 필요한 것들만 챙기며 작위수여식을 진행했다. 어떻게든 빨리 끝내고 싶다는 의지가 아주 대단했다. 그러니 망토를 둘러주는 절차 따위는 당연히 생략할 줄 알았건만, 새하얀 망토가 오드리를 위해 준비돼 있었다.

“가넷은 진실한 우정을 통한 승리와 성공을 상징하는 보석이지. 가넷 남작, 그대의 승리와 성공을 위해 문장을 선물하노라.”

가스트로가 망토를 탁 털어 펼치곤 오드리의 어깨에 둘렀다. 날개를 편 용과 수사슴의 머리가 겹쳐진 문장이 공개됐다. 오드리의 출신이 어딘지, 그녀가 누구의 덕으로 작위를 받았는지 한눈에 보여주는 문장이었다.

‘와, 이런 식으로 사람을 약 올리네. 굳이 문장까지 직접 주겠다고 우기더니만 이러려고 그랬구나.’

정식으로 확정된 가넷 남작의 문장을 본 건 오드리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현세의 벨트람이라는 별명을 의식한 게 분명한 가넷이라는 성을 준 것도 모자라서 망토를 흰색으로 고르고 문장에까지 장난질을 치다니 어이가 없었다. 데멘사 문제로 몇 번 들이받힌 것에 아직까지 꽁해 있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하여간 속이 좁아요. 이거야 원, 문장에 뱀은 안 들어가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오드리가 내심 욕을 하고 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가스트로는 퍽 뿌듯한 표정으로 망토를 고정시킨 것도 모자라 장식용 사슬까지 손수 달아주었다.

“아름답군. 아주 잘 어울려.”

가스트로의 칭찬은 빈말이 아니었다. 짙은 붉은색과 검은색으로 이뤄져 묵직하다 못해 어두컴컴한 느낌을 주던 예복에 금도금된 가느다란 사슬이 둘러지자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장식이 됐다. 그에 흰 망토까지 쓰고 있으니 색의 대비가 확실했다.

“가넷 남작은 아까부터 표정이 굳어 있군. 혹시 보석 이름을 성으로 주어서 마음에 안 드는 건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이게 다 제가 너무 긴장해서 그런 게지요. 가넷은 한 해의 첫 달을 상징하는 보석이니, 초심을 잃지 말라는 뜻으로 알고 충성하겠습니다.”

오드리는 깊게 고개를 숙이고 몸을 낮추며 입 발린 소리를 했다. 가스트로가 자신에게 가넷이라는 성을 붙인 이유야 뻔하지만, 솔직히 마음에 들었다. 승리와 성공을 제 성으로 쓰라는데 싫을 사람이 있겠나.

가스트로는 오드리의 노골적인 아첨을 불쾌하게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아첨이라는 걸 전혀 알아듣지 못한 척, 너그럽게 웃기까지 했다.

“나는 그대의 승리와 성공을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네.”

보증인이 나타난 이래로 속닥거림과 수선거림이 끊이질 않던 홀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귀가 달리고 생각할 머리가 있는 모두가 알았다. 저건 진심으로 하는 말이라고. 수십 쌍의 눈이 오드리에게 꽂혔다.

호의와 적의가 뒤섞인 시선은 퍽 날카로워 아프기까지 했다. 식을 끝낸 가스트로가 사라지고 난 후, 오드리는 칼날 같은 시선과 질문을 웃으며 받아넘기느라 등에서 땀을 한 바가지나 흘렸다. 축하를 건네는 이들이 원하는 답이 너무나 뻔한데, 답을 내어줄 수가 없었다.

‘가스트로 놈이 왜 저러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나도 몰라!’

가스트로와 얼굴을 맞대고 입씨름을 하는 건 수고스럽고 힘든 일이었다. 그는 유능한 자였고, 오드리는 매번 만약의 만약까지 생각해서 준비하고 맞서야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그랬던 사람이 갑자기 봄바람처럼 너그럽게 구니, 불안함에 등골이 오싹해지긴 오드리도 마찬가지였다. 가스트로가 뭘 바라고 이런 번잡한 자리에서 귀한 진심을 내비쳤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행히 오늘 저녁엔 수확제 무도회가 있었다. 옷을 갈아입고 무도회에 참석할 준비를 해야 하니 지금은 돌아가야 한다는 건 훌륭한 핑계였다. 심히 애석하게도, 라비린에겐 통하지 않았지만.

“지금 네 표정을 보니 무도회에 절대 안 나올 것 같은데, 핑계는 잘도 대네.”

오드리는 잽싸게 주변을 살폈다. 라비린을 아예 공기처럼 무시하는 셰비언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눈치 따위 본 적 없는 것처럼 도도하게 허리를 폈다.

“낮에 작위를 받고 저녁에 수확제 무도회를 거절하는 건 이치가 아니지.”

라비린이 코웃음을 쳤다. 어제의 대화는 깡그리 잊은 듯, 평소와 똑같은 얼굴이었다.

“그 말, 내가 해줬던 말이라는 거 기억은 하고 있어? 네가 이치 따져 가며 행동할 사람이었으면 내가 퍽이나 충고를 했겠다. 아무리 싫고 귀찮아도 오늘 무도회는 꼭 참석해. 내가 도와줄 테니 너무 걱정은 하지 말고…….”

내내 라비린을 무시하던 셰비언이 갑자기 끼어들었다.

“보아하니 몸이 달아 말을 붙이고 싶어 하는 쪽은 오드리가 아니라 저쪽이던데, 굳이 오드리가 무도회에 참석하는 수고를 할 필요가 뭐 있어?”

사실 사람 무시하는 기술로는 라비린이 셰비언보다 훨씬 나았다. 그는 그제야 셰비언의 존재를 알아챈 것처럼 놀라는 체를 했다.

“오, 아르젠 백작! 드디어 눈치라는 게 생겼네. 기대한 적 없었는데.”

본래 서로 이름을 부르는 사이였던 라비린이 조롱이라도 하는 것처럼 성에 작위까지 붙여 부르니 셰비언의 미간에 깊은 고랑이 생겼다. 자기가 먼저 무시했다는 건 까맣게 잊은 듯한 태도였다. 라비린의 기분이 상하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 터다.

라비린이 팔짱을 끼고 셰비언을 내려다보며 빈정거렸다.

“하지만 눈치만 생겼지 머리는 한참 모자라는군. 아무리 높은 파도라도 언젠가는 가라앉기 마련이고 달도 차면 기우는데, 지금 오드리에게 유리하다고 멋대로 굴면 나중에 입장이 바뀌었을 때 어디다 도움을 청할 셈이야? 미래를 생각해야지.”

“내가 있는데 오드리의 입장이 바뀔 일이 있을 것 같아? 너야 저 왕에게 절절매겠지만 난 그럴 필요 없어.”

셰비언이 코웃음을 쳤다. 그가 은연중에 흘려낸 용의 마력이 라비린을 자극했다. 겁을 먹고 물러나는 게 정상일 텐데, 오드리와 붙어 다니며 익숙해진 건지 라비린의 표정이 대번에 사나워졌다. 사실 마력뿐만 아니라 말의 내용까지도 지극히 자극적이었다. 멜브란트의 사자를 구속한 고삐가 누구에게 쥐어져 있는지 모르는 사람이 왕국 내에 있던가 말이다.

“오호, 그래. 과연 용이야. 그런 말도 막 할 수 있고. 한데 오드리는 용이 아니거든! 오드리 입장은 생각해 봤어? 섬을 때려 부술 생각도 아무렇지 않게 하는 무력을 가진 용이 왕실을 무시하는 언사를 하면 어쩌잔 거야. 네 멋대로인 행동이 죄다 부담이 되어 오드리의 무릎을 꺾을 수도 있다는 걸 몰라?”

“그래서 너는 무릎 꺾지 않게 할 수 있고? 내가 보기엔 영 아닌 것 같은데? 조금 전에도 벌써 실컷 무릎 꿇다 왔잖아?”

두 남자의 기세가 사나워졌다. 체면 차릴 것 없이 당장 이 자리에서 싸울 것처럼 험악하니, 곤란해진 건 그 둘 사이에 있는 오드리였다. 그녀가 뜨끈뜨끈하게 열이 올라오는 이마를 짚고 한숨을 쉬었다.

“이럴 거면 그냥 둘 다 꺼져.”

오드리는 까맣게 잊은 것처럼 서로에게 불꽃을 튀겨대던 남자들이 화들짝 놀라 그녀를 돌아보았다. 잔뜩 찡그린 미간과 화장으로도 감출 수 없이 피곤해 뵈는 안색을 알아챈 순간, 으르렁대던 사자와 용이 순식간에 비 맞은 강아지가 됐다.

“둘 다 시끄러워. 난 피곤하고, 당장 집으로 돌아가 쉬고 싶어. 가면 쓰고 퍼레이드를 보러 가든 수확제 무도회에 참석하든, 그건 한숨 자고 나서 결정할 거야.”

두 남자의 반응이 확연히 갈렸다. 셰비언은 기뻐했고, 라비린은 침울해졌다. 셰비언은 성급하게 오드리를 데리고 나가려고 했지만 오드리는 꿈쩍도 하지 않고 오히려 셰비언의 손을 뿌리쳤다.

“일단 셰비언은 라비린에게 사과해. 라비린은 내게 맞는 말을 했어. 그의 말대로 나는 인간이고, 지지 않는 해는 없는 법이니 멋대로 굴어선 안 돼. 마음 써서 해준 충고를 그런 식으로 되갚으면 어떡하자는 거야? 게다가 이 마력은 뭐야. 내 옆의 다른 사람이 그대와 다른 의견을 낼 때마다 용의 마력으로 위협이라도 할 셈이야?”

셰비언의 어깨가 축 처졌다. 오드리가 그에게서 팩 고개를 돌렸다. 셰비언이 혼나는 걸 보고 내심 고소해하던 라비린이 부리나케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라비린, 너도 사과해. 이번엔 정말로 간섭이 지나쳤어. 난 더 이상 네 약혼녀가 아니라는 걸 자꾸 까먹기라도 하는 거야? 너야말로 나와 같은 인간이니 사회적으로 용납되는 선이 어디까지인지 잘 알고 있을 텐데, 왜 자꾸 선을 넘으려 들어? 네가 이런 식으로 구니까 셰비언이 점점 날카로워지잖아.”

“난 지극히 상식적인 권유를 했을 뿐이야. 꼬아서 들은 건 셰비언이지.”

“내가 귀머거리인 줄 알아? 조롱은 네가 먼저 시작했어. 평소의 너라면 같은 말을 해도 좀 더 부드럽고 유연하게 할 수 있었을 거라 생각되는데, 오늘은 왜 이래? 어디 불편한 곳이라도 있어? 어젯밤까지도 괜찮았잖아. 그새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거야?”

라비린은 오드리에게 술에 취하면 기억을 잊어버리는 주사라도 있나 싶어졌다. 구애 중인 자신에게 청혼반지를 자랑한 게 바로 어젯밤인데,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묻는 건 너무하지 않은가.

더 기가 막힌 건, 네가 셰비언이 준 반지를 끼고 있는 게 싫어서 이런다는 말은 죽어도 못하겠다는 것이다. 그랬다간 선 근처에서 얼씬거리기는커녕 저 멀리 쫓겨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확신이라도 불러도 좋을 만한 예감이었다.

연인이 안 된다면 친구라도 좋으니 옆에 있고 싶다던 결심은 왜 이리 지키기가 힘든가.

라비린은 잔뜩 찌푸린 오드리의 얼굴을 한 번 보았다가, 조금 전의 자신과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는 셰비언을 한 번 보았다가, 다시 오드리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이만하면 포기할 때도 됐지. 포기해야……. 빌어먹을.’

그새 입술이 말라붙어 떼기가 힘들었다.

“……아무 일 없었어.”

“그런데 왜 이래? 전하께서 무슨 말이라도 하신 거야? 휴식 시간에 굳이 널 부르셨잖아. 설마 나한테 작위 주는 거 싫다고 투덜대기라도 하셨어?”

“그런 거 아니야. 그냥…… 살살 긁혀서 신경이 좀 곤두서 있었어. 내가 예민했던 거야.”

라비린이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얼굴에 내려앉았던 그늘을 한순간에 걷어치운 듯 멀끔하고 경쾌한 미소였다. 굵직하고 시원스런 이목구비에 햇살이 머물렀다.

“전하께서는 긴장을 하면 소꿉친구를 괴롭히는 못된 버릇이 있거든. 최근에는 그런 일이 없어서 고친 줄 알았는데, 아니라는 걸 오늘 내 몸으로 확인했지 뭐야. 다행이지, 의식을 앞둔 상태라 검 들고 설치지는 않아서.”

라비린의 태연한 미소와 그에 어울리지 않는 어색한 시선 처리가 오드리의 마음, 혹은 양심이라 부를 만한 것의 언저리를 건드렸다. 동시에 어젯밤 연회장 테라스에서 라비린에게 셰비언에게 받은 청혼반지를 자랑했던 게 생각났다. 기억을 잃는 주사 같은 게 있었으면 차라리 나았으련만, 뒤늦게 떠올린 기억은 생생하기도 했다.

오드리는 잔뜩 미간을 찌푸리고 벙어리처럼 벙긋거리다 답지 않게 어색한 자세로 인사했다.

“오늘 와줘서 고마워. 내 보증인을 하는 게 마냥 달갑지만은 않았을 텐데. 네가 없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

라비린이 돌멩이는커녕 먼저 한 톨 뵈지도 않는 바닥을 공연히 걷어찼다.

“큰일은 무슨. 내가 아니어도 일테니아 후작님이 계셨을 걸 아는데. 후작으로 채울 수 있던 자리를 남작으로 메웠으니 오히려 네가 손해를 본 거지.”

“일테니아 후작님은 어디까지나 어머니의 인연이야. 너하고는 달라.”

하하하…….

가벼운 웃음소리가 잔뜩 어색해진 분위기를 깨뜨렸다. 눈을 휘며 웃은 라비린이 가만히 서 있는 오드리를 셰비언에게로 슬쩍 떠밀었다.

“내가 로렐라이가 아니라 데멘사 일만 챙겨도 원망 마라.”

“흥, 둘 다 내 거거든.”

“갑자기 멍청이 흉내 내기는……. 데멘사야 만들 때 나도 일조를 했으니 말을 꺼내도 이상하지 않지만, 너도 없는데 내가 대뜸 로렐라이를 챙기는 건 좀 이상하잖아. 안타깝게도 나한테는 챙겨야 할 사회적 체면이라는 게 있거든.”

라비린이 두 사람을 내버려 둔 채 휙 돌아섰다. 못 박힌 듯 제자리에 선 두 사람을 뒤에 두고 성큼성큼 걷던 그가 뭔가 생각난 것처럼 멈춰 섰다.

“아, 참. 올해 퍼레이드는 아주 성대할 거라더라.”

잠깐 돌아보고 씩 웃는 얼굴이 화사했다. 오드리는 지독한 기시감에 혀를 찼다. 라비린의 웃음은 어린 날의 자신이 거울을 보고 매일 연습하던 미소와 꼭 닮아 있었다.

“아무리 사교용 웃음이라도 진심 한두 푼은 섞어야 한다더니……. 선생의 말을 이제야 이해하게 되다니, 나도 그리 훌륭한 제자는 아니었던 것 같아.”

“그럴 리가요. 오드리만 한 제자가 어디에 있다고요. 오드리는 자신을 너무 낮춰 보는 경향이 있어요.”

오드리는 나름 진심을 담아서 한 말인데, 셰비언이 곧바로 반박했다. 오드리는 쓴웃음을 지으며 셰비언의 코를 잡고 살짝 비틀었다. 눈처럼 희던 코가 발긋해졌다.

“대뜸 편부터 들면 어떡해? 그리고 자꾸 추켜세우지도 마. 버릇 나빠질 것 같으니까. 아무리 고모님의 노력이 있었다지만 헨젤 백작가의 위상이 있는데 내 평판이 그렇게까지 떨어졌던 이유를 이제 알 것 같아.”

셰비언은 충실한 청자의 의무를 다했다.

“왜요?”

“인간은 모순적인 존재라, 감춰놓으면 찾고 싶고 드러내 놓으면 보기 싫어하거든. 만탈락 같은 소도시에서 왔으면서 꽁꽁 싸매고 진심을 비추지 않으니 얼마나 궁금했겠어. 그렇게 재미가 없으면 차라리 안 나오면 될 텐데 꼬박꼬박 초대에 응해선 가면 같은 미소만 짓고 있었으니 그쪽 입장에선 재수 없기도 했겠지.”

오드리의 대답을 듣고도 셰비언의 표정은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답을 들었는데도 영 모르겠어요.”

“몰라도 돼. 알아봐야 좋을 것도 없고 재밌을 것도 없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속삭인 오드리가 까치발을 세우고 셰비언의 예복자락을 잡아당겼다. 그는 자그마한 연인을 위해 기꺼이 허리를 굽혔다. 향긋한 입술이 짧게 닿았다 떨어졌다. 정말이지, 너무 짧은 키스였다.

셰비언이 오드리의 등과 허리를 감싸 안고 그녀를 바짝 끌어당겼다. 두근거리는 심장이 맞닿고 어둡고 밝은 머리칼이 뒤섞였다. 당황한 오드리가 셰비언의 어깨와 가슴을 때렸다.

“그만, 그만……. 여긴 집이 아니야. 시녀나 시종이 불쑥 튀어나오면 어쩌려고 이래?”

“아.”

짧은 한탄에 셰비언이 채 감추지 못한 아쉬움이 고스란히 담겼다.

결박 같은 포옹에서 벗어난 오드리가 셰비언의 뺨을 가볍게 쓸었다. 악기를 익히고 펜을 쥐느라 굳은살이 박인 손끝으로 부들부들한 피부를 만지작대며 속삭였다.

“일단 돌아가자. 집에 가면 준비해 뒀어.”

셰비언의 눈에 기쁨이 넘실거렸다.

“저녁엔 무도회에 가야 하니까 그 전까지 실컷 놀자.”

넘실거리던 기쁨이 싹 사라졌다. 푸른 하늘에 먹구름이 드리우는 극적인 변화를 눈앞에서 목격한 오드리가 키득거렸다.

“……그거 진짜 가시게요?”

“라비린 혼자서만 고생시킬 순 없잖아. 그대와 내가 무도회에 나란히 불참하면 우리가 감당해야 할 몫이 죄다 그 녀석에게 돌아갈 거야.”

“글쎄요? 고생 좀 해 봐라,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인데요.”

셰비언이 입술을 삐죽거리며 투덜댔다. 질투라는 감정에 제대로 눈을 뜨게 된 이후, 그는 라비린을 예전처럼 대할 수가 없었다.

오드리가 친구라는 이름으로 그에게 내어준 거리가 지나치게 좁은 것 같아 신경 쓰였고, 자신은 이해할 수 없는 대화를 즐겁게 나누는 둘의 모습이 싫었고, 매번 오드리는 인간이라 너와 다르다고 강조하는 입버릇을 견딜 수가 없어졌다.

“너무 심술부리고 그러지 마. 친구로 지내기로 했다면서?”

“친구는 무슨…….”

친구는 무슨 친구. 셰비언이 툴툴대거나 말거나, 오드리는 그저 웃기만 했다. 셰비언은 그런 그녀에게 라비린과 인연을 끊으면 안 되겠느냐고 물어보려다가, 그가 맡고 있는 부분은 자신이 채울 수 없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자신은 라비린처럼 유연하게 사람을 대하지도 못하고, 오드리가 필요로 하는 귀한 정보를 찾아오지도 못하며, 상류사회 구성원들의 심리와 행동방식을 꿰뚫어보며 효과적인 방책을 논의하지도 못했다.

라비린은 여러 면에서 확실히 오드리에게 도움이 됐다. 셰비언 본인보다 훨씬 더.

셰비언 자신은 마법의 주인이고 셰비언 절벽의 주인이며, 세상에서 못하는 게 더 드물다는 용이었다. 무력도 지혜도 모자람 없이 충분하다고 늘 생각해 왔건만, 오드리의 곁에 서기엔 언제나 모자라기만 했다. 이만하면 됐겠지, 싶어지면 새로운 구렁텅이와 낯선 벽을 마주하는 일이 반복됐다. 이런 무력감은 오랜만이었다.

“정말 청혼을 받아줄 거냐고? 반지를 받은 걸론 대답이 안 돼?”

“반지, 절대 안 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셰비언은 스스로를 타일렀다. 괜찮아, 난 용이잖아, 마법의 주인이잖아. 나는 라비린처럼 할 수 없지만, 라비린도 나처럼은 할 수 없어. 어쨌거나 오드리는 날 택했어.

그는 오드리의 손을 붙들고 그 손등에 깊게 입 맞췄다. 붉은 보석이 박힌 반지가 싸늘한 한기를 뿌리는 게 느껴졌다. 미묘한 만족감과 깊은 안도가 동시에 밀려왔다.

“……오늘이 지나기 전에 사과하러 갈게요.”

“사과만 하지 말고 꼭 받기도 하고 와.”

셰비언을 먼저 나무랐던 건 잊기라도 했는지, 라비린도 잘못했다 강조하는 목소리는 그저 다정하였다. 그 다정함이 셰비언의 무력감을 지우고 처진 어깨에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셰비언은 오드리의 손을 잡고 천천히 걸었다. 무도회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았죠? 뭘 하는 게 좋을까요? 가면을 쓰고 당당하게 돌아다닐 생각에 목소리가 들떴다. 오드리가 못 말리겠다는 듯 웃었다.

그렇게 재잘재잘 떠들며 왕궁을 나온 두 사람은 난처한 상황에 빠지고 말았다. 왕궁 입구에서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던 기자들이 헨젤가의 마차를 와르르 둘러싼 것이다. 놀란 말이 거칠게 투레질을 하고 마부가 채찍을 휘둘러 대며 화를 내는데도 기자들은 비키기는커녕 더욱 달라붙으며 목소리 높여 질문을 퍼부었다.

“레이디 오드리! 작위수여식은 무사히 마치셨나요?”

“보증인이 되어주신 분은 누구죠? 아르젠 남, 아니 백작님 말고 다른 분이 더 계셨을 것 아닙니까? 설마 벨키스 경입니까? 레이디는 두 분과 어떤 관계로 지내고 계신 거죠?”

“어떤 성을 받으셨습니까? 영지는요? 작위 등급은 어떻죠? 사람들의 예상대로 남작입니까?”

“여인의 몸으로 작위를 받는 건 처음 있는 일인데, 기분이 어떠십니까?”

“레이디 오드리, 아르젠 백작이 랄리우스 후작으로 바뀌는 날이 대체 언제죠? 대략적인 시기만이라도 괜찮습니다!”

“얼굴 좀 보여주세요!”

기자들 때문에 갑작스럽게 시작된 소란이지만, 레이디 오드리에게 호기심과 호감을 보이는 사람은 상상 이상으로 많아 인파가 자꾸 늘어났다. 소란이 커졌다. 얼마 되지도 않던 그럴듯한 질문마저 사라지고 저열한 호기심이 그 자리를 채웠다. 대담한 사람 몇몇은 마차를 두들기기까지 했다.

‘왕궁 출입도 허락받지 못한 삼류들이 감히…….’

오드리는 관자놀이를 짚고 두통을 견뎠다. 맞은편에 앉아 안절부절못하고 오드리만 살피던 셰비언이 그녀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서늘한 마력이 흘러들어오며 아픔이 한결 줄어들었다.

“오드리, 우리 도망갈까요?”

“도망?”

“시계탑에 오드리를 데리고 갔을 때 썼던 그 마법을 쓰면 돼요. 나중에 당황할 마부에게는 미안하지만 계속 여기에 묶여 있을 수는 없잖아요.”

잠시 망설이던 오드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셰비언은 냉큼 오드리를 품에 꼭 끌어안고 마차의 문을 열었다. 수십 쌍의 눈이 마차의 내부에 집중됐다.

“어어?”

“없잖아! 비었어!”

당황한 사람들이 한마디씩 말을 보탰다. 혹시 말을 타고 나오려는 건가? 이 마차가 아닌가? 어이, 마부! 여기 레이디가 안 계시면 진작 말을 했어야지! 무슨 말이야, 마차가 비었으면 누가 문을 열었는데? 그걸 어떻게 알아? 설마 귀신이라도 붙어서 저게 저절로 열렸겠어? 누군가 몰래 열었겠지!

소란의 틈새에서 혹시 오드리의 얼굴을 볼 수 있을까 고개를 기웃대던 보통 사람들은 빈 마차를 보고 금세 실망해서 그 자리를 떠났다. 하지만 아침나절부터 왕궁 문 앞에서 진을 치고 기다렸던 기자들은 좀처럼 포기하질 못하고 미적거리며 다시 기회를 엿봤다.

셰비언은 오드리를 팔에 앉히고 밀집된 군중 가운데를 유유히 걸어 통과했다. 오드리는 셰비언의 목에 팔을 감고 월등히 높아진 시야를 즐겼다. 몰려든 사람들의 머리꼭지가 훤히 내려다보였다.

“만년필 복제품이 나온다는 말을 듣기는 했는데, 보니까 쓰는 사람이 꽤 많네.”

“그야 구조 자체는 간단하잖아요. 로렐라이의 만년필이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굳지도 않고 번지지도 않는 마법 잉크죠. 만년필 내부에 걸어놓은 마법과 완벽하게 호응해서 작동하잖아요.”

“세상에, 그 말을 사하스바티가 들으면 울겠어. 그 간단한 구조 설계를 하느라고 엄청나게 고생했는데.”

“뭐든지 처음이 어려운 법이에요. 나는 만들어진 걸 가지고 분석하는 입장이니까 쉬운 거고요. 그런 의미에서 바일런 섀덤은 진짜…….”

셰비언이 지극히 마법사다운 얼굴로 투덜거렸다. 워커와 사하스바티가 강철새의 동력으로 마력구슬을 이용한다는 발상을 해냈을 때, 셰비언의 관심은 기차를 움직이는 마법동력에 쏠렸다. 그가 인간의 마법에 처음으로 흥미를 느끼도록 만들었던, 요절한 천재의 위대한 유산 말이다.

비록 오드리는 마법사가 아니었지만, 무려 마법의 주인마저 감탄하는 인간 마법사의 존재에 절로 마음이 뿌듯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어쨌거나 동족이 아닌가.

“바일런 섀덤이 연구일지만 제대로 남겼어도 이렇게 막막하진 않았을 거예요.”

“그래? 그 정도야?”

오드리가 웃음을 참는 게 느껴졌는지, 셰비언이 심술궂게도 오드리를 안은 팔을 휙휙 흔들었다. 하지만 승마에 능숙한 오드리는 무서워하기는커녕 오히려 깔깔 웃어서 셰비언의 약을 올렸다.

“마법동력의 설계도라도 남겨서 다행이에요. 그거라도 있었으니 기차를 계속 만들었지, 그마저 없었다면 바일런 섀덤 사후에는 새 기차가 나오지 않았을걸요. 지금 같은 물류운송과 지역이동은 꿈도 꿀 수 없었을 거예요.”

오드리는 손으로 챙을 만들어 햇살을 가리고 저 멀리 브란젤역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워낙 먼 데다 사이에 자리한 높은 건물 때문에 이곳에선 보이지 않았지만, 새하얀 지붕에 햇살이 떨어지는 광경이 눈앞에 선하게 그려졌다.

‘처음으로 기차를 도입한 살론의 왕은 자신의 결정이 세상을 바꿨다는 걸 알고 있을까?’

기차가 살론을 얼마나 무섭게 발전시켰는지, 기차의 등장이 경직된 사회구조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경제적인 변화는 얼마나 컸으며 사람들의 의식은 얼마나 빠르게 바뀌었는지.

바일런 섀덤과의 당구 내기에서 지고 그 대가로 서명을 해준 그 한량 왕은 기차를 본격적으로 도입한 업적만으로 훗날 현왕으로 평가받았다.

“사람은 한번 편하고 빠른 것을 경험하고 나면 다시는 그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해.”

“그런가요?”

“강철새도, 전보도 마찬가지야.”

셰비언은 고개를 들어 오드리를 바라보았다. 오드리가 아득히 먼 곳을 보는 듯 아련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붉은 입술 사이로 드러난 이에 부딪친 햇살이 하얗게 빛났다. 셰비언은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오드리가 고개를 돌려 셰비언과 눈을 마주했다. 셰비언을 사로잡았던 초록색 눈동자가 그 어느 때보다도 생생하게 반짝거렸다. 그는 시간의 강 한복판에 서 있던 그녀를 현실로 끌어낸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두고 봐. 그 두 가지가 세상을 어떻게 바꾸는지.”

오드리는 확신이 있었다. 아무리 작은 눈덩이라도 눈 덮인 비탈을 실컷 굴러서 기슭에 도달하면 덩치가 배로 커지기 마련인데, 강철새와 전보는 처음부터 커다란 눈덩이였다. 그것들은 역사에 기차 못지않은 충격을 입힐 것이다.

“바일런 섀덤의 이름 옆에 워커와 셰비언이 남게 될 거야.”

“사하스바티도 빼놓지 마세요. 그가 없었으면 강철새와 전보 모두 나오지 않았을 테니까.”

“마법의 주인께서는 몹시 공정하시군! 물론 그의 이름도 남을 거야. 로렐라이와 데멘사, 오드리의 이름도 빼놓으면 안 되지. 모두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되어서 길이 전해지는 이름이 될걸!”

오드리가 어린아이처럼 발을 흔들었다.

“셰비언, 마법동력을 연구하는 게 즐거워?”

“네. 자료가 없어도 너무 없어서 좀 짜증나긴 하지만, 솔직히 흥미로워요. 그가 살아 있었다면 적어도 한 달쯤은 잠을 재우지 않고 토론했을 거예요.”

“정말 솔직하네. 그럼……. 셰비언, 죽은 마법사와 대화할 방법이 있다면? 흥미 있어?”

셰비언은 미간을 찌푸리고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용이라도 결국엔 살아 있는 생물이고 현세에 얽매인 존재였다. 그는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

“죽은 건 그냥 죽은 거예요.”

“나도 영혼이니 뭐니 하는 거 안 믿어. 신화시대는 한참 전에 끝났다구. 하지만 바일런 섀덤이 최초로 만들었던 마법동력을 분해해 볼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죽은 마법사와의 대화 아니겠어?”

셰비언은 너무 놀란 나머지 숨 쉬는 것도 잊었다. 마법동력에 대한 보안은 지독할 정도였다. 셰비언의 말이라면 죽는 시늉도 할 멜브란트 마법사협회조차 마법동력을 실제로 보고 싶다는 요청은 거절했다. 대신 사적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조건을 달아 설계도를 보여주었을 뿐이었다.

“그건……. 정말 놀라운 얘기인데요. 진짜 그럴 수 있어요? 일반 마법동력도 아니고, 바일런 섀덤이 직접 만든 최초의 마법동력을 분해한다고요? 그리고 거기에 내가 참여해요? 어떻게요? 그건 살론에 있는 거잖아요?”

오드리는 셰비언이 이렇게까지 놀라는 건 처음 보았다. 바짝 붙은 몸에서 느릿하던 심장이 바쁘게 뛰는 게 느껴졌고, 눈을 어찌나 크게 떴는지 눈동자가 굴러 떨어질 것 같았다. 어쩐지 질투가 날 지경이었다.

“가능할 것 같아.”

“오드리, 내가 알기로 그 말은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지 가능하다는 말은 아니잖아요? 괜히 안 되는 거 말로만……. 아으아아야!”

오드리는 얄미운 말을 하는 셰비언의 뺨을 잡고 쭉 잡아당겼다. 손을 떼자 창백하던 얼굴에 혈기가 올라와 아까보다 더 보기 좋아졌다.

“살론의 마법사들은 대담하기가 전장의 장수 못지않던걸. 그대가 용이라는 걸 영 믿지 못하면서도 마법동력 분해를 함께할 생각을 하다니 말이야.”

“어어……. 난 그런 얘기 들어본 적 없어요.”

“어제 참석했던 연회에서 나눈 얘기니까.”

셰비언은 대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왕실은 용의 참석을 부담스러워했고, 셰비언은 오드리가 랄리우스 후작으로서 조금이라도 더 많은 주목을 받길 원했다. 서로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좋은 거래였다.

하지만 오드리에게 연회 얘길 들은 순간, 셰비언은 조금 아깝다고 생각했다. 까짓 거, 용의 모습으로 왕궁 위를 한번 날아주기라도 해서 참석할 걸 그랬다.

“살론에서 온 귀빈이 자국의 마법사협회장을 대동하고 왔더라고. 젊어서 그런가, 아주 패기가 넘치는 인물이었어. 마법동력을 보물 상자에 담아서 창고에서 썩히느니 뛰어난 마법사들과 함께 해체해서 연구해야 발전이 있는 법이라고 오히려 날 설득하던걸. 전보를 만들어낸 마법사라면 충분히 자격이 있다고 말이야.”

오드리는 살론의 마법사협회장과 대화하면서 왜 살론이 한때나마 대륙의 최강자 자리를 차지했던 건지 이해하게 됐다.

자칫하면 타국의 마법사에게 귀중한 비밀이 흘러나갈 수도 있다는 오드리의 지적에, 사소한 위험도 감수하길 꺼리며 몸을 사리다간 마법의 발전은 바랄 수 없다고 답하던 그는 파격적일 정도로 열린 인물이었다.

그런 사람을 꼭대기에 앉혀놓을 수 있는 집단은 절대 현재에 머무르지 않는다. 잠깐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것 같아도 어느새 차이가 확 벌어지기 마련이었다. 먼저 손을 내밀어왔다면 절대 놓치지 말아야 했다.

오드리가 셰비언의 귓가에 속삭였다.

“셰비언……. 그대가 수락하기만 하면, 가능성이 있다는 말을 가능하다로 바꿔줄게. 참여할 거지?”

달콤한 말이었다. 셰비언은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일 뻔했지만, 라비린이 칭찬할 정도로 열심히 길러온 눈치와 사회성이 그를 막았다.

“그걸 위해 오드리가 지불해야 하는 게 있군요. 그게 뭐죠?”

“살론에서의 전보 사업권.”

셰비언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그는 단번에 거절하려 했으나, 오드리가 목을 꽉 끌어안는 바람에 대답을 하지 못했다.

“별거 아니야. 나는 멜브란트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것 같은데 살론까지 어떻게 챙기겠어. 살론에서 알아서 전보를 퍼뜨리겠다는데 막을 이유가 없지.”

“오드리, 별거 아니라니요? 내가 아무리 인간사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고 한들, 이게 오드리에게 지나치게 큰 손해인 건 알아요. 확실한 이득을 포기하고 무슨 결과가 나올지 예측할 수도 없는 쪽을 택하다니요? 그건 지나친 도박이에요!”

“난 운이 좋아. 이 도박에서도 분명히 이길 거야.”

“나는 오드리의 그런 자신감을 정말 좋아하지만, 이번만은 동의할 수 없네요. 그게 바로 도박꾼의 심리라는 거고, 패가망신으로 가는 지름길이에요. 오드리가 어떤 마음으로 전보개발에 매달렸는지 뻔히 아는데 내가 어떻게…….”

오드리가 셰비언의 목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이번엔 정말 제대로 목이 졸린 셰비언이 컥, 하고 숨을 뱉었다.

“이건 그대가 내게 준 청혼반지에 대한 답례야.”

오드리가 팔을 느슨하게 했음에도 셰비언은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코에 닿은 그녀의 머리칼에서 달콤한 아카시아 꽃향기가 났다. 거리의 가로수 잎은 빨갛고 노랗게 물들어 가을이 무성한데, 그는 늦봄과 초여름 사이의 숲에 서 있는 것만 같았다.

“그대가 내게 세상에 하나뿐인 보석을 주었으니, 나도 그대에게 비슷한 걸 주고 싶었어. 하지만 내가 어떤 물건을 구해오더라도 이 기회를 잡는 것보다 값지진 않겠더라.”

“오드리…….”

“나는 정말로 운이 좋아. 그대에게 이런 기회를 선물할 수 있게 되었잖아. 그것도 이토록 딱 맞는 시기에. 진짜 내 등에 포모스가 업혀 있는 걸까?”

셰비언은 이 선물을 거절할 수 없게 되었다는 걸 알았다. 오드리에게 도움은커녕 방해물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더라도 거절해선 안 됐다. 이건 오드리의 성의이자 기쁨이었다.

그는 오드리를 고쳐 안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자신을 내려다보며 웃는 얼굴이 눈부셨다. 비단 오후의 태양이 그녀의 머리 뒤에 있어서만은 아니었다. 술을 마신 것도 아닌데 취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마법의 주인이며 용이에요. 그러니 나의 신부를 위해 마땅한 승리를 쟁취해 오도록 할게요.”

오드리가 이가 보이도록 웃었다. 언제나처럼 숙녀답지 않은 미소였다.

“그래, 나는 정말 운이 좋다니까! 이 도박은 나의 승리야.”

초록색 눈동자 가운데에 선명한 금빛이 짧게 스쳐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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