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0. 나와 결혼해 주세요
「크고 질 좋고 희귀한 보석은 옛날부터 구애의 상징이었죠.」
본래 수확제가 있는 시기는 일 년 중 가장 풍요롭고 인심이 넉넉한 때였다. 가뭄이 2년이나 지속된 탓에 연달아 흉작이 들었지만 여긴 브란젤이었다. 강이 말라가는 와중에도 대중목욕탕엔 물이 떨어지지 않았고 광장의 분수는 활기차게 노래했다. 적어도 브란젤의 시민들에게 가뭄은 남의 일이었다.
대관식도 겹쳤겠다, 브란젤에서 올해의 수확제는 어느 때보다 풍요롭고 화려하게 준비되었다. 곡식자루를 매단 장대가 광장을 넘어 큰 거리의 초입까지 세워졌고, 가면장수와 풍등장수들은 그 어느 때보다 의욕적으로 장사 준비를 마쳤다.
비록 전국적인 흉작에다 달튼 제도 봉쇄령까지 겹쳐 곡물값이 지속적으로 오르고 있긴 하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다. 곡물값 상승에 대한 불안과 불만이 밑바닥에 잔잔하게 깔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의 표정은 아주 밝았다.
일단 왕세자가 대관식을 치르고 왕이 되고 나면 모든 게 다 잘될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이 사람들 사이에 아주 팽배했다. 그저 왕위계승자일 때도 나라를 이렇게나 잘 꾸렸는데, 왕좌에 앉으면 얼마나 잘하겠냐는 것이다.
‘새로운 왕이 새 시대를 열리라!’
사람들은 그 믿음에 맞춰 모든 것을 좋게 해석했다. 이십여 년 만에 수확제를 앞두고 내린 장대비는 더는 가뭄이 없으리라는 하랄의 약속이고, 두 차례나 발생한 괴물 사태는 용이 멜브란트에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치른 대가라는 식이었다. 브란젤 시민들은 머리가 두 개 달린 물고기가 잡혀도 박수를 쳐 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앞으로 멜브란트는 더욱 발전할 것이며, 식탁은 풍요로워질 것이고, 주머니는 두둑해질 것이다!’
이런 무한히 긍정적인 분위기는 오드리의 작위 수여 소식을 들은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마음이 한껏 너그러워진 사람들은 그녀가 나이가 차지 않은 미혼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작위를 수여 받는다는 사실에 크게 반감을 드러내지 않았다. 여론을 신경 쓰는 가스트로의 성향 상, 이런 반응은 오드리에겐 정말 다행인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 와중에도 오드리의 신경을 긁는 일이 생겼으니, 조금 잠잠해졌던 네이기스의 포스터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는 것이다.
“빌어먹을 놈의 포스터.”
오드리는 읽던 신문을 박박 찢어 내던졌다. 현세에 등장한 벨트람에게 어떤 작위가 어울릴지에 대한 고찰 따위를 특집기사랍시고 실은 신문이 불티나게 팔린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브란젤에 글을 읽을 줄 아는 인구가 이렇게 많았어?! 사람들이 돈 쓸 데가 그렇게 없대? 왜 이따위 종이쪼가리 사는 데 돈을 쓰는 건데!”
다이앤은 특별히 컬러로 인쇄된 포스터가 갈가리 찢기는 걸 보고 아쉬움을 금치 못했다. 새로운 버전의 포스터가 실린 신문이라 일부러 사온 건데 이 꼴이 날 줄이야.
“보티안 부인이 들으면 서운하시겠어요…….”
“서운하라 그래! 진짜 서운한 게 누군데 서운하다 어떻다 혓바닥이 길어!”
“그래도 일부러 검은색으로 머리카락 색도 바꿔서 칠해주셨는데.”
“그게 더 싫은 거야!”
머리카락 색을 바꿔서 칠하면 뭐 하나, 얼굴이 똑같고 화풍이 똑같은데. 누구를 모티브로 한 건지 모를 수가 없는 그림이었다.
“미리 준비한 게 아니면 나한테만 늦게 통보한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당사자에게 통보한 지 이틀 만에 특집 기사가 실리고 새 포스터가 튀어나와? 젠장할, 라비린! 이 빌어먹을 자식!”
오드리는 화가 가라앉을 때까지 욕을 퍼부었다. 성실하게 심부름한 라비린이 들으면 억울해서 가슴을 쳤을 텐데, 그녀의 성질을 감당한 사람은 애꿎은 다이앤이었다. 다이앤은 익숙하게 오드리의 욕설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그러다 오드리가 조금 진정하자마자 얼른 다른 용건을 꺼내놓았다.
“아가씨, 오늘 강철새 시험비행 있는 날이에요. 나갈 준비하셔야죠.”
“젠장, 젠장, 젠장!”
“앉으세요. 머리 올려드릴게요. 하나로 묶어서 늘어뜨려 달라고 하셨죠? 하는 거야 어렵지 않은데 사람들이 수군대지 않을까요?”
“괜찮아. 어차피 말 타고 갈 건데 전부 올려봐야 흐트러지기만 하지.”
“뭐 얼마나 달리시려고 머리가 흐트러질 걱정을 하시는가 몰라…….”
다이앤이 머리 손질을 하는 내내 오드리의 미간은 펴질 줄을 몰랐다. 오드리는 수확제 첫날인 어제 사방팔방 돌아다니며 강철새 시험비행을 보러 오라고 초대장을 돌렸다. 초대장을 받는 사람들마다 내일 당장 참석하라는 거라며 황당해하면서도 꼭 가겠노라 약속을 해주었는데, 거기서 또 벨트람 어쩌고 하는 소리를 듣게 생겼다.
‘네이기스 녀석, 내가 검은색으로 머리 바꿨다는 말을 듣자마자 새로 그리기 시작한 건가?’
정말 그랬다면 감탄스러울 정도의 정성이었다. 따로 모델을 서준 적도 없는데 이렇게 생생한 그림을 그려내다니 말이다. 오드리는 포스터가 퍼지는 걸 막을 이런저런 방법을 떠올렸지만 하나같이 마음에 안 들었다.
그러다 아예 머리칼을 빨갛게 물들이고 나가볼까 하는 미친 생각을 떠올렸을 때쯤 다이앤의 머리 손질이 끝났다. 오드리가 미리 골라놓은 옷을 끌어안은 다이앤이 울 듯한 얼굴로 물었다.
“아가씨, 정말 승마복을 입고 가실 거예요?”
“드레스를 입고 강철새에 탈 순 없잖니.”
“으음……. 아가씨께서 강철새에 타신다고요?”
“그럴 거야. 강철새의 가장 큰 후원자가 바로 나인데, 설마 조종석에 앉지도 못하게 하겠어?”
오드리는 이제까지 사교모임에 참석할 때 한 번도 승마복을 입고 나간 적이 없었다. 숱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그러나 싶을 정도로 드레스를 고집했다. 그런 그녀가 검은 머리칼의 벨트람 포스터가 뿌려진 날에 승마복을 입고 말을 탄 채로 야외에 나타난다면, 어떤 소동이 벌어질까.
다이앤은 자신의 상상이 상상으로만 끝날 것 같지 않아 식은땀을 흘렸다. 카프러스가 호위 겸 에스코트를 위해 따라갈 예정이라는데 그에게 따로 각별히 당부를 해둬야 하나 싶을 정도였다.
한데 오드리는 한껏 구겨진 얼굴을 하고도 다이앤보다 한술 더 떴다. 벨트람 포스터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아이템인 흰 케이프 코트를 가져오라고 시킨 것이다. 다이앤의 안색이 희게 질렸다.
“그……. 진짜요? 진짜 그거 입으시게요? 그거 너무 길지 않나요? 아가씨, 좀 짧은 게 어때요? 며칠 전엔 비가 내렸다지만 오늘은 해가 쨍쨍한데요!”
“이왕 하는 거 화끈하게 해야지. 승마복 입고 윈디를 타고 갈 건데 흰 케이프 코트가 빠지면 되겠어?”
이거 화끈해도 너무 화끈한 거 아닌가. 다이앤의 불안에도 불구하고 오드리는 꿋꿋하게 흰 케이프 코트를 걸쳤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긴 코트자락이 경쾌하게 찰랑거렸다. 말채찍을 쥔 그녀의 얼굴에 결연한 빛이 떠올랐다. 그야말로 전장에 나가는 장수와 같은 얼굴이었다.
수확제 둘째 날에 벌어진 강철새의 시험비행은 성공적이었다. 강철새는 조종사를 태우고 곡예와도 같은 비행을 선보였다. 이착륙이 부드럽고 방향 전환은 자유로웠으며, 속도마저 자유자재로 제어했다.
워커가 언젠가는 강철새를 타고 바다를 건널 거란 말을 입버릇처럼 하더니만, 정말 그게 가능할 것 같은 물건이었다. 단순히 하늘에 오래 떠 있기만 하는 게 다가 아니었다. 개발기간이 그토록 길었던 이유를 알 만했다.
오드리는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목을 빼고 강철새를 구경하는 구경꾼들을 보면서 그동안 강철새 때문에 마음 고생한 것을 모두 보상받는 기분을 느꼈다. 이 순간만큼은 다들 현세에 나타난 벨트람을 잊어버렸으니까 말이다. 내일 신문 1면에 실릴 기사는 포스터 속의 차림을 한 오드리 헨젤이 아니라 하늘을 정복한 마법사에 대한 놀라움과 찬양의 기사가 될 것이다.
‘로렐라이에는 셰비언만이 아니라 워커도 있다는 걸 세상이 알아줄 때가 됐지.’
강철새는 2인승으로 제작됐다. 내내 혼자 비행을 선보이던 조종사가 구경꾼 중에서 동승자를 모집했다. 망설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디케가 번쩍 손을 들고 나섰다. 젊은 아가씨의 용기에 사람들의 박수가 쏟아졌다.
함께 박수를 치고 환호를 쏟아내던 오드리에게 마법사협회의 심부름꾼이 찾아왔다. 평소라면 하녀로 따라온 이디케가 대신 편지를 받아뒀다가 나중에 줬을 텐데, 지금 이디케는 치맛자락을 모아 쥐고 강철새의 뒷자리에 올라타느라 고생하는 중이었다.
“아가씨, 제가 받아두겠습니다.”
“아니. 기다리던 거니 바로 줘.”
오드리가 편지를 받자마자 봉투를 열었다. 카프러스가 당황하며 몸으로 주변의 시선을 차단했다.
바로 어제, 오드리는 마법사협회에도 강철새 시험비행 초대장을 보냈다. 그들이 자존심 상해할 걸 알면서도 그렇게 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인간 마법사라면 당연히 알아야 한다는 무언가를 자신에게도 말해줘야 할 당사자인 셰비언이 내내 자느라 눈을 못 뜨고 있다는 게 첫째이고, 발톱섬을 때려 부순다는 계획이 어떤 경위에서 나온 건지 알고 싶었던 게 둘째이고, 그 계획이 정말로 실현된다면 협회에선 얼마만 한 피해를 예상하는지 알고 싶었던 게 셋째였다.
솔직히 자세한 답변은 별로 기대하지 않았다. 셰비언과 함께 협회에 들락거린 전적이 있고 그때마다 귀빈 대접을 받긴 했지만 그거야 셰비언과 함께 갔으니 그런 것이고, 본래 마법사협회는 상대를 가리지 않고 오만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한데 슬쩍 건드리고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답변이 온 데다 내용마저 기대와 다르게 정중하고 충실했다. 숨도 쉬지 못하고 편지를 읽은 오드리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재빠르게 편지를 착착 접어 품에 집어넣었다. 안주머니가 있는 승마복을 입고 와서 천만다행이었다.
“베텔 경, 바로 돌아갈 거예요. 이디케, 준비를…….”
“아가씨, 락시 양은 강철새를 타고 있습니다.”
“아, 그랬지. 그랬군요.”
흘끗 하늘을 보니 강철새가 크게 원을 그리며 날고 있었다. 강철새에서 예쁘게 포장한 각설탕이 눈처럼 떨어졌다. 조종사는 바쁠 테니 뒷자리에 앉은 이디케가 손을 보태고 있는 것일 테다.
“금방 내려오지는 않겠어요. 얼마나 기다려야 할까요? 경, 아무래도 이디케는 초보자니까 금방 내려오…….”
“설령 락시 양이 바로 내려오더라도 이대로 돌아가실 순 없습니다. 아가씨, 이 행사는 아가씨께서 주최하신 겁니다. 중간에 멋대로 빠졌다간 뒷수습이 심하게 곤란해지실 겁니다.”
오드리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동안 사교모임을 다니며 친해진 귀부인과 귀족영애들, 에이쉬를 통해 안면을 튼 예술계 인사들, 왕립 기계 연구소의 직원들, 강철새 제작에 협조한 장인들, 오늘의 성공을 퍼뜨려 줄 취재기자들, 워커의 성공을 두고 제 일처럼 흥분한 로렐라이의 마법사들, 그리고…….
‘사람이 이렇게 많았나?’
정신이 아득해졌다. 어느새 반쯤 일어나 있던 오드리는 그대로 의자에 주저앉았다. 다리가 무거웠다. 무언가 다리를 꽁꽁 얽어매고 놓아주지 않는 것만 같았다.
당장 내일 나와달라는 무리한 초대장을 받고도 기꺼이 참석해 준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다. 한데 자신의 영향력과 위치가 예전과는 현저히 달라졌다는 걸 눈으로 확인하고도 즐겁기는커녕 숨이 턱턱 막혔다. 사람들의 웃는 얼굴이 너무 성가셨다. 죄다 집어치우고 달려 나가고 싶은 충동으로 몸이 떨렸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물이라도 한 잔 드릴까요?”
“경, 물은 시종에게 맡기고 라비린을 불러줘요.”
카프러스는 할 말이 많은 표정을 하고도 순순히 물러났다. 그만큼 오드리의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기 때문일 터다. 라비린은 오드리가 포도주 석 잔을 연달아 마시고 난 다음에야 도착했다.
“오드리, 내가 지금 누구랑 얘기하고 있었는지 알아? 히엠스, 무려 차기 카즈네 공작님이 될 히엠스 놈하고 얘기하고 있었단 말이야. 한데 네 기사가 당장 따라오지 않으면 죽여 버릴 거란 얼굴로 날 재촉하는 바람에…….”
시선이 마주쳤다. 들으라는 듯 요란하게 투덜거리던 라비린의 표정이 싹 바뀌었다. 그가 오드리의 손에 있던 포도주 잔을 단번에 빼앗았다. 빈 손을 쥐었다 폈다 하던 오드리가 픽 웃었다.
“오, 솜씨 좋다. 넌 이쪽 길로 나가도 되겠어.”
“왜 이래? 웬만큼 마셔봐야 취하지도 않으면서. 무슨 일이야?”
“이거라도 마셔야 버틸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래.”
오드리는 제 품에서 편지를 꺼내 라비린에게 넘겼다. 라비린의 안색도 곧 새하얘졌다.
“이런 미친 용 새끼 같으니라고.”
“라비린,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지금 당장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아. 남은 행사는 네가 맡아서 마무리를…….”
“너 나랑 결혼하고 싶어?”
오드리가 눈을 부릅떴다. 라비린이 부드득 이를 갈았다.
“이 행사의 호스트는 너야. 불가피한 상황에 처한 호스트가 중간에 자리를 넘기고 갈 수 있는 사람은 가족 아니면 가족에 준할 만한 친척 정도가 다야. 그런데 날 지명하겠다고? 우리 약혼이 아직 살아 있다고 외치는 것밖에 더 돼?”
“나는 셰비언과…….”
“약혼하지 않았지. 너희 둘이 연인인 거 사람들이 다 안다고? 그게 뭐 어때서? 정식으로 약혼한 것도 아니고 결혼한 것도 아니고 약혼반지를 주고받은 것도 아닌데! 종족적 차이를 끝내 넘지 못했다고 하면 그만이야.”
“…….”
“아, 물론 내 꼴이 좀 우습게 되긴 하겠지. 한데 나는 널 얻을 수만 있다면 그런 거 조금도 신경 안 쓸 거거든. 오드리, 네가 호스트를 넘기고 뜨기만 해봐. 곧바로 저어기 구경꾼 사이에 몰래 앉아 있는 가스트로 옆구리를 찔러서라도 혼인명령서를 받아낼 테니 그리 알아. 덤으로 작위 수여도 없던 일로 만들어주지.”
이 자리에 가스트로가 온 줄은 몰랐던 오드리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포도주 때문에 홍조 오른 뺨만 발그레했다. 언뜻 부끄러워하는 것만 같은 얼굴색이 되었지만 그리 착각하기엔 표정이 너무 노골적이었다.
“셰비언이 용이면 어쩔 거야, 네가 인간이고 인간 사회에서 살 건데. 작위 수여까지 얼마나 남았다고 치명적인 상처를 내려고 들어? 오드리, 이제까지 네가 해내고 이뤄온 것들을 전부 물거품으로 만들고 싶은 게 아니라면 이 자리 떠날 생각은 꿈에도 마.”
라비린의 협박은 제대로 먹혔다. 오드리는 입술이 찢어질까 무섭게 짓씹어대면서도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워커와 사하스바티를 치하하고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대화하고 인터뷰 약속까지 잡은 뒤 뒷정리까지 말끔하게 마친 뒤에야 헨젤 저택으로 돌아간 것이다.
고작 이틀 만에 또 차인 꼴이 된 라비린은 몹시 가슴 아파했지만, 이번엔 그야말로 자업자득이라 누굴 탓할 수도 없었다.
한데 라비린을 버려놓고 급히 돌아간 오드리라고 그다지 사정이 좋지만은 않았다. 헨젤가 정문에서 서관 옆의 숲 공터까지 윈디를 타고 내달릴 정도로 서둘렀건만, 공터는 텅 비어 있었다. 용이 본체로 며칠이나 머물렀으니 만큼 풀이라도 꺾여 있어야 정상일 텐데 공터엔 어떤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셰비언!”
윈디가 푸르르 투레질을 했다. 말발굽 소리에도 버티고 있던 새들이 더 견디지 못하고 우르르 날아 자리를 피했다. 나뭇가지 사이에 고여 있던 빗방울이 우수수 떨어졌다.
“셰비언!”
여기가 산꼭대기라도 되었다면 메아리라도 돌아왔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습기가 가시지 않은 숲은 오드리의 목소리를 고스란히 빨아들이기만 할뿐, 아무것도 돌려주지 않았다.
‘떠난 거야? 작별 인사도 없이,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오드리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뭔가 단단한 것에 머리를 얻어맞은 것만 같았다. 꼿꼿하게 머리를 들고 있던 풀이 사방으로 꺾였다.
어젯밤만 해도 이곳에 셰비언이 잠들어 있었다. 심각해 보이던 상처들이 이제 거의 다 아물어서, 흰 비늘이 달빛을 머금고 반짝거렸다. 이제 곧 일어나겠구나 싶어서 마력을 붓는 내내 마음이 설렜다. 어쩌면 작위수여식을 보여줄 수도 있을 거란 기대도 있었다.
인간의 실수는 인간이 수습하게 둘 것이지 왜 몸을 상하게 하면서 나섰느냐고 따지러 올 때만 해도, 이런 광경을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뒷수습 같은 건 생각하지 말고 조금이라도 더 빨리 올 걸 그랬다는 후회가 계속 밀려와 견디기 힘들었다. 고작 몇 시간 차이로 뭐가 달라졌겠느냐마는, 그렇게 합리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아가씨! 헉, 아가씨!”
오드리보다 기마술이 떨어지는 이디케가 뒤늦게 도착했다. 이디케는 오드리 앞에 같이 쪼그리고 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강철새의 시험비행에 동승했던 여파가 이제야 몰려오는 건지 갑자기 멀미가 났다.
“후, 아, 으으……. 죽겠다. 아가씨, 여긴 왜 오신 거예요? 맨바닥에 이렇게 앉으시면 찬 기운이 올라와서 안 좋아요. 감기 걸린단 말예요. 네? 아가씨!”
이디케가 쫑알대거나 말거나 오드리는 대답이 없었다. 표정도 이상했다. 꼭 넋이 나간 사람처럼 생기가 없었다. 그냥 멍하니 앉아 있는 것과도 달랐다.
이디케는 영 평소 같지 않은 오드리의 모습에 더럭 겁을 집어먹고 그녀의 눈앞에 대고 손을 흔들었다. 아가씨, 이거 몇 개인지 알아보시겠어요?
“이디케…….”
“네? 네?”
“셰비언이 어디로 갔는지 아니?”
“네에? 전 오늘 아가씨와 같이 강철새 시험비행에 나갔는데 그걸 어떻게 알겠……. 아가씨, 일단 일어나세요.”
“…….”
“공터가 빈 걸 보면 이제 본체로 있지 않아도 괜찮으신 거예요. 남작님이 인간의 모습을 할 수 있게 되셨다면 당연히 집 안으로 들어가셨겠죠. 계속 여기에 계실 리가 없잖아요.”
마른 풀처럼 고개를 수그리고 있던 오드리가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숲길을 뛰는 시간조차 아깝다는 듯 윈디의 등에 올라타 바람처럼 숲을 빠져나갔다. 허리 높이의 덤불을 훌쩍 뛰어넘는 윈디를 통제하는 기마술이 보는 것만으로도 감탄스러울 정도였다. 뒤따라가는 이디케는 죽을 맛이었지만 말이다.
오드리는 곧장 셰비언이 머물던 손님방부터 확인했다. 기대와 달리 방은 비어 있었다. 하녀들이 깨끗하게 청소해 먼지 한 톨 보이지 않는 방이 어딘지 이질적으로까지 느껴졌다. 마침 걸레질을 하고 있던 하녀를 붙잡고 셰비언의 행방을 물었지만, 아는 게 없었다.
“아르젠 남작님은 오늘 서관에 오신 적이 없으세요.”
“그래? 지금 그 말, 책임질 수 있니?”
따져 묻는 오드리의 말투와 눈빛이 당장 잡아먹기라도 할 것처럼 사나웠다. 별 생각 없이 말을 꺼냈던 하녀는 겁을 먹고 고개를 떨궜다. 딱히 다정하진 않아도 그렇다고 포악하지도 않았던 그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다행히 사태가 더 악화되기 전에 상황을 파악한 다이앤이 달려와 오드리를 챙겨갔다. 다이앤은 지금 알아보고 있다, 곧 소식이 들어올 거다 따위의 말을 주문처럼 읊으며 오드리를 달랬다.
“아가씨, 그렇게 화내지 마세요. 아르젠 남작님이 아가씨를 얼마나 사랑하시는데 설마 말도 없이 떠났겠어요? 절대 그럴 리 없어요. 잠깐 볼일이 있어 나가신 걸 거예요.”
“그걸 어떻게 장담해?”
“어머, 저는 남작님이 아가씨를 보는 눈빛만 봐도 알겠던데 아가씨는 모르세요? 어떻게 그런 눈빛을 받으면서 모를 수가 있어요? 우리 아가씨가 그렇게 둔한 분이었어요?”
초조하게 방을 맴돌던 오드리가 제자리에 멈춰 섰다. 다이앤은 그런 오드리를 거울 앞에 끌어다 앉히고 머리를 빗어주며 말을 이었다.
“남작님이 아가씨를 바라보는 눈빛을 한 스푼 떠서 맛을 보면 만탈락 특산 시럽보다 달콤할 거예요. 장담할 수 있어요. 가끔은 보기만 하는 제가 다 소름을 돋을 정도라고요.”
“그런데 왜 갑자기 행방을 감춘 걸까. 내가 그런 거 싫어한다고 분명 얘길 해뒀는데, 어떻게 또…….”
“세상에,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람. 아가씨, 그런 말은 적어도 내일 이 시간까지 아무 연락이 없을 때에나 할 만한 말인 것 같은데요? 남작님이 납치를 걱정해야 할 만큼 가녀린 분은 아니잖아요.”
오드리는 어쩔 줄 모르고 얼굴을 붉혔다. 다이앤의 말을 듣고 있다 보니 자신이 너무 앞서서 좌절하고 흥분한 것 같았다.
‘내가 성급했던 건지도 몰라. 그래, 성급했어. 다르게 생각하면 본체 상태로 잠들어 있지 않아도 될 정도로 회복했다는 건데 기뻐해야지.’
헤어지잔 말에 셰비언이 크게 당황해서 팔을 붙들던 걸 떠올리자 기분이 약간 나아졌다.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후회와 불안도 조금이나마 가셨다. 심장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뛰는 건 여전하지만 아까보다는 훨씬 견딜 만했다.
다이앤은 평온한 표정으로 눈을 감는 오드리를 보고 남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조금 전의 오드리는 정말이지 살벌하기 그지없어서, 말 한 마디 할 때마다 수명이 줄어드는 기분마저 들었다. 아무리 만난 기간이 짧다지만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이디케, 이 계집애는 왜 이렇게 늦어? 어쩐지 발로 뛰어 알아보겠다고 자기가 먼저 나서더니만, 설마 아가씨 기분이 이렇게 오락가락할 줄 알고 일부러 피한 건가?’
본래 미운 상대는 아무리 예쁜 짓을 해도 미운 법인데, 안 그래도 다이앤과 이디케는 사이가 나빴다. 성가시고 힘든 일을 자청해서 맡은 이디케에게 고마워하던 마음은 오드리를 달래는 동안 깡그리 사라지고 말았다.
나쁜 일은 겹쳐서 온다고 했던가. 오드리의 평정심이 다시 위태로워지기 시작했을 무렵, 릴리가 잔뜩 긴장한 기색으로 찾아와 헨젤 백작이 오드리를 찾는다는 말을 전했다. 오드리는 흘끗 창문을 바라보았다. 유리창으로 늦은 오후의 황금빛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오늘은 수확제 둘째 날이야. 그런데 아버님이 이 시간에 집에 계시다고?”
“방금 돌아오셨어요.”
“나만 불렀니? 하델은?”
“도련님은 찾지 않으셨어요.”
오드리의 얼굴에도 긴장이 어렸다. 그녀가 파악한 재무국의 상황으로는 지금 헨젤 백작이 집으로 돌아올 수가 없었다. 어쩌다 숨을 돌릴 만한 시간이 생겼다고 해도, 그런 금쪽같은 시간을 하델이 아닌 자신을 보는 데 쓴다는 게 어쩐지 불길하게만 느껴졌다.
“가기 싫다고 안 갈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니……. 어쩔 수 없지.”
별일 아닐 거예요. 다이앤이 위로하듯 말을 건넸지만 별로 도움이 되진 않았다. 그들이 별일이 아니면 서로 얼굴 마주치지 않으려 애쓰는 부녀 사이라는 걸 이 집에서 모르는 사람이 있던가.
과연 헨젤 백작이 오드리를 부른 데에는 확실한 용건이 있었다. 그는 오드리의 인사조차 받는 둥 마는 둥 하고 대뜸 서류부터 내밀었다.
“서명해라.”
오드리는 말꼬리를 두 번, 세 번 잡고 싶은 걸 참고 잠자코 서류를 받아들었다. 이 바쁜 때에 굳이 직접 얼굴을 보고 서명을 받으려는 서류가 뭔지 궁금했다. 한데 채 한 장을 넘기기도 전에 숨이 턱 막혔다.
“아버님, 이건……. 만탈락의 소유권 양도 서류로군요.”
“네 작위 수여 전에 끝내야 하는 거다. 급한 거니 빨리 서명해.”
작위 수여, 라는 말을 내뱉는 헨젤 백작의 목소리가 바르르 떨렸다. 그게 어찌나 흡족한지, 바짝 긴장한 상태가 아니었다면 얄밉게도 히죽 웃을 뻔했다.
“이 서류에 서명하면 만탈락이 정말로 제 것이 되나요? 일반적인 영지의 주인과 똑같은 권리를 갖게 되는 거 맞죠?”
“그렇다. 권리뿐만 아니라 의무 또한 함께 지게 되지.”
“귀족으로 태어나 자랐으니 의무를 부담스럽게 여겨서는 안 될 일이죠. 휴……. 아, 이런. 죄송해요. 아버님이 하시는 일에 틀림이야 있으려마는, 도무지 믿어지질 않아서요. 제가 성인이 되면 만탈락은 가문의 것이 될 거라고만 생각했었거든요.”
오드리가 놀란 기색을 감추지 않고 드러냈다. 가슴이 뛰어 견딜 수가 없다는 듯 연신 한숨을 내뱉는 모습이 사뭇 연약하고 사랑스러웠다. 비록 헨젤 백작의 눈에는 가증스럽기 짝이 없는 연기로 보였지만 말이다.
“그게 퍽이나 진심이겠구나.”
“진심이었어요. 성공보다 실패를 염두에 둬야 작은 실패에 쉽게 좌절하지 않는 법이잖아요.”
“내가 했던 말은 죄다 귓등으로 들었던 모양이지.”
오드리는 부정하지 않았다. 헨젤 백작은 2차 괴물 사태 때 오드리가 세운 공을 생각해서 그녀에게 만탈락을 떼어주겠다고 한 적이 있었다. 로렐라이에 대해서도 더는 간섭하지 않겠다고도 했다. 하나 그게 어디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었겠는가.
“푸른 피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지만, 그 말 자체가 거짓말이라는 걸 모르는 푸른 피가 있던가요?”
“내가 네게 거짓을 말한 적이 있더냐?”
“아버님은 제게 언제나 솔직하셨죠. 그저 제가 의심이 많은 탓인 걸 어쩌겠어요.”
오드리가 생각하기에도 자신에 대한 헨젤 백작의 태도는 퍽 일관된 면이 있었다. 어린 자신이 멋대로 기대하고 실망하고 다시 기대하기를 반복했을 뿐이었다. 그를 놓아버리고 난 뒤로는 놀랍게 편해졌지만, 그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좋은 자세다. 어딜 가더라도 헨젤 출신이 덜떨어졌다는 소리는 안 듣겠구나.”
“감사합니다, 아버님. 정말 오랜만에 듣는 칭찬이에요.”
“하나 이번 일은 네 공이 아니다.”
“압니다. 가스트로 전하께서 제게 과하게 신경을 써주시네요.”
오드리가 쓴웃음을 지었다. 본래 오드리와 가스트로 사이에 작위에 대한 약속은 있었어도 영지에 대한 약속은 없었다. 그러니 만탈락을 가져오려면 새 작위를 받더라도 몇 년은 더 헨젤 백작과 줄다리기를 해야 할 거라 여겼는데, 설마 가스트로가 헨젤 백작을 직접 압박해서 만탈락을 넘기게 할 줄이야.
“앞으로 뭘 드려야 할지 걱정이에요.”
“입 몇 번 떼는 걸로 많은 걸 챙기셨으니 네가 따로 또 챙길 건 없다.”
헨젤 백작이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오드리는 가스트로가 대체 뭘 챙겼을까 속으로 가늠해 봤다가 폭소를 터뜨릴 뻔했다.
오드리가 이 서류에 서명을 하기만 하면, 만탈락은 헨젤 백작가의 영지 한가운데에 동떨어진 섬이 된다. 지금 오드리는 제대로 공표되지만 않았을 뿐이지 랄리우스 후작위를 계승한 상태이니, 만탈락을 영지로 가지는 정당성 또한 갖고 있었다.
결국 가스트로는 왕실의 재산은 한 푼도 손해 보지 않으면서 오드리에게 영지를 내림과 동시에 헨젤 백작가를 견제하는 쐐기를 성공적으로 박게 되는 것이다.
“바쁘다. 빨리 서명이나 해.”
“중요한 일인데 바쁘다고 읽지도 않고 서명할 수야 있나요. 꼼꼼히 봐야지요.”
탕! 헨젤 백작이 거칠게 책상을 내려쳤다.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던 필기구가 흐트러졌다. 침착하고 차가워 뱀이라는 별명이 딱 어울리던 사람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헨젤 백작도 사람이었네.’
오드리는 얼른 서류에 집중하는 척 고개를 숙여 표정을 감췄다. 밀려드는 일거리,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권한, 당연히 제 손발이 되어줄 줄 알았던 자들의 일탈……. 이 모든 것들이 그를 몰아붙이는 게 느껴졌다.
“쓸데없이 시간 끌지 마라. 내가 이 시기에 얼마나 바쁜지 너도 알고 있을 텐데!”
헨젤 백작이 연신 오드리를 재촉했다. 손톱으로 책상을 두들기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울렸지만, 오드리는 들은 체 만 체 흘려듣다 대뜸 하델을 부르자 청했다. 이런 서류를 들여다보는 건 하델에게도 크게 도움이 될 거라고 말이다.
“가문을 나가겠다고 사방팔방 날뛰고 다닐 때는 언제고 동생이 걱정되긴 하느냐?”
“사실은 그냥 해 본 말이에요. 하델이 잘하면 좋지만 못한다고 크게 걱정되진 않거든요. 아버님이 곁에 계신데 제가 하델을 걱정해서 뭐 하겠어요. 알아서 잘 챙겨주시겠죠.”
헨젤 백작은 여유롭게 서류를 넘기는 오드리를 두들겨 패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이번에도 충동은 충동으로 끝났지만, 정말이지 얼굴만이 아니라 체질과 말버릇까지 죽은 밀리나를 꼭 닮은 딸이었다.
하델은 헨젤 백작이 하녀에게 심부름을 시켜 내보내자마자 집무실에 들어왔다. 오드리가 헨젤 백작에게 불려간 이후 계속 집무실 근처를 배회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헨젤 백작은 그런 하델이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지었다.
“너는 뭐가 그리 걱정이 되어 이 앞에서 서성댔던 거냐? 내가 네 누이를 잡아먹기라도 할까봐?”
“설마 그럴 리가요. 그냥 궁금해서 그랬어요.”
하델은 헨젤 백작의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흘리고 서류부터 확인했다. 라비린은 물론이고 신문기사를 보면서도 어쩐지 현실감이 없었는데, 만탈락이 오드리에게 넘어가는 걸 헨젤 백작 앞에서 확인하게 되자 손이 다 떨렸다.
“누나, 정말로 새 작위를…….”
“잘 봐둬. 이런 걸 볼 일이 앞으로 또 있을지 모르겠지만, 경험을 쌓아서 나쁠 건 없지. 아, 다 읽었으면 여기에 서명 좀 해줄래? 아직 열셋밖에 안 됐지만 헨젤 공자 정도면 증인으로 부족하지 않지. 안 그래요, 아버님?”
“왜 하델을 굳이 불렀나 했더니……. 오냐, 네 마음대로 해라.”
거의 포기 상태에 이른 헨젤 백작이 두 손을 들었다. 하델은 졸지에 서류의 내용을 확인하고 효력을 증명하는 증인이 되어 서명했다. 마지막에 오드리가 만탈락에 밀리나가 하델의 몫으로 남겨둔 재산이 있음을 확인시켜 주었지만, 머리가 어지러워 아무 생각도 안 들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모든 일이 끝나고 오드리와 단둘이 남아있었다. 하델은 일어나려는 오드리를 붙들고 새 작위 받는 일을 없던 걸로 하는 게 어떠냐고 다시 설득했지만, 이미 다 끝난 일인데 왜 자꾸 잡고 늘어지느냐는 핀잔만 들었다.
“누나!”
“이젠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니 더는 보채지 마. 안 그래도 심란한데 왜 자꾸 귀찮게 굴어?”
“제발, 랄리우스 후작위로 만족할 순 없어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하잖아요!”
“둘을 가질 수 있는데 하나만 가져야 할 이유가 대체 뭐지?”
“그 하나가 가문의 명예를 상관치 않을 정도로 중요한 것도 아니잖아요!”
언젠가의 다툼과 대화의 흐름이 똑같았다. 더 말을 나눠봤자 그때와 똑같은 질문과 답변을 반복하게 될 게 뻔했다.
오드리는 하델과 자신의 차이를 새삼 실감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입이 닳도록 설명했는데도 하델은 끝내 오드리의 욕망을 이해하지 못했다. 차라리 라비린이 나을 지경이었다.
하델 역시 오드리와 자신 사이에 놓인 깊은 고랑을 실감했다. 넘어갈 엄두도 안 나는 깊은 계곡 같은 고랑이었다.
“하델, 우리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시는 얘기하지 말자. 그게 낫겠어. 우린 입장이 너무 달라.”
“……네.”
하델이 오드리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새빨간 노을이 빈자리를 채웠다. 그 순간, 남매는 앞으로 완전히 다른 입장에 서게 될 것을 예감했다. 어쩌면 평생을 다투며 살게 될지도 모른다고.
오드리가 돌아오길 애가 닳아 기다리던 하녀들은 오드리가 곧 만탈락을 정식으로 양도 받을 거란 소식에 환호성을 질렀다. 어찌나 기뻐하는지, 내일도 일이 있다는 걸 까맣게 잊은 채 오드리의 방에서 밤새 파티라도 벌일 기세였다.
하델에게 말했듯 마음이 심란한 오드리로서는 반길 수 없는 사태였다. 그녀는 머리가 아프다, 잠이 쏟아진다, 온갖 변명을 주워섬기며 하녀들을 내보냈다. 어릴 적부터 같이 자라 눈치가 빤한 이디케가 어떻게든 남으려 용을 썼지만 그마저도 쫓아냈다.
오드리는 조용해진 방에 홀로 앉아 어두워져 가는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 하델과 말다툼할 때만 해도 노을이 벌겋게 타고 있더니, 벌써 땅거미가 내렸다. 가을이 깊어지면서 해가 짧아졌다는 게 실감이 났다.
“후…….”
폐를 전부 비워버릴 것처럼 깊은 한숨이 터졌다. 바로 조금 전에 짧은 평생 내내 바라왔던 것 중 하나를 드디어 손에 넣은 사람이라곤 믿을 수 없이 깊은 한숨이었다.
오드리는 자신이 한숨을 쉬었다는 걸 믿을 수 없다는 듯 제 얼굴을 더듬었다. 그러다 피식 헛웃음을 지었다.
“내가 미쳤나 봐.”
만탈락을 전부 가질 수 있게 되면 미칠 듯이 좋을 줄 알았다. 랄리우스 후작위를 얻어냈을 때 그랬듯이, 아니 그보다 더한 성취감에 취해 마냥 행복할 줄 알았다. 한데 이상했다. 가슴은 커다란 돌덩이가 얹힌 듯 답답하고 며칠 굶은 사람처럼 뱃속이 허했다.
침대에 웅크리고 앉아 무릎에 턱을 괴었다. 아직 모든 게 손에 들어온 것도 아니고 세상엔 마지막 성공을 앞두고 미끄러지는 일이 왕왕 벌어지니 긴장해야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는데, 허무했다. 당장 내일부터 해야 할 일을 목록으로 만들라면 몇 뼘이라도 만들 수 있는데도 그랬다. 그 일들을 해야 할 의미를 찾을 수가 없었다.
“이유가 뭘까…….”
분명한 건, 오늘 낮에 강철새를 소개할 때만 해도 이러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때 그녀는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고 의욕도 넘쳐났다. 앞날에 어떤 장애물이 나타나더라도 가뿐히 밟고 가 줄 자신이 있었다.
고작 반나절 만에 이 꼴이 날 줄은 정말 몰랐다. 더 기가 막힌 건 이유를 모른다는 것이다. 갑자기 세상이 회색으로 보이는 이유를, 만탈락을 얻어내고도 그리 기쁘지 않은 이유를, 무려 헨젤 백작을 심부름꾼처럼 쓰면서도 웃음이 나지 않는 이유를, 하델이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걸 보면서도 쫓아가 잡을 마음이 안 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오드리가 자신의 상태를 점검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때, 창문이 달각거리더니 활짝 열렸다. 주먹만 한 흰 새가 포르르 날아들어 오드리 주변을 맴돌았다. 꼬리 깃은 긴데 날개는 짧고 몸은 통통해서 귀여운 새였다.
“새?”
오드리가 새에게 손을 내밀었다. 새는 훈련이라도 받은 것처럼 오드리의 손 위에 내려앉아 부리를 쩍 벌렸다. 분명 아무것도 물고 있지 않았던 부리에서 편지봉투 하나가 툭 떨어졌다.
‘편지? 이런 걸 보낼 수 있는 사람이 대체 누구……. 아, 셰비언!’
오드리의 눈에 광채가 어렸다. 그녀는 조금 전 의기소침해 있던 사람답지 않게 재빠른 동작으로 봉투를 뜯었다. 밀랍 봉인을 떼어내자 짧은 편지가 나왔다. 향수를 뿌렸는지 은은한 꽃향기가 났다.
<오드리, 우리 내일 데이트해요. 내가 데리러 갈 테니 기다려요. - 셰비언>
웃음이 났다. 재미있거나 좋아서 웃는 게 아니라 어처구니가 없어서 나는 웃음이었다. 갑자기 말도 없이 사라지는 바람에 누구는 지옥을 맛보았는데, 아무렇지 않게 데이트 신청이라니.
“하, 하하하…….”
홧김에 편지를 찢어버리려 양 끝을 쥐었지만 손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찢을 수가 없었다. 오드리는 몇 번이고 헛손질을 하다가 그냥 포기하고 편지를 내동댕이쳤다. 그래도 분이 안 풀려 몇 번이나 더 내던졌다.
카펫을 구르던 편지가 침대 아래로 굴러 들어가기 직전, 오드리는 얼른 편지를 구출했다. 편지에 얼굴을 묻고 꽃향기를 들이마시자 야생화 꽃밭 한가운데에 앉아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젖은 빨래처럼 가라앉아 있던 기분이 갑자기 두둥실 떠올랐다. 몸 전체에 활력이 돌았다.
“세상에, 이게 뭐람. 언제 올 거고 어딜 갈 건지 말도 없는 데이트 신청 하나에 내가 이렇게 들떠서…….”
어째 입으로 말하고 나니 갑자기 민망해졌다. 오드리는 벌떡 일어나 창문을 활짝 열었다. 제법 쌀쌀한 바람이 얼굴과 목을 문지르고 지나가는 느낌이 상쾌하기 그지없었다. 내일 셰비언이 데리러 오기 전에 해내야 할 일들의 목록이 머릿속에서 줄을 섰다.
셰비언이 자신을 떠난 게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자마자 기분이 이렇게나 좋고 모든 일에 의욕이 넘쳤다. 뭐든지 다 잘될 것 같은 근거 없는 자신감이 밑바닥에서 솟아올랐다.
‘사랑이 대체 뭐라고.’
오드리는 드디어 이디케의 소박한 소원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사랑하는 남자와 가정을 꾸려서 많은 아이를 낳고 기르며 오래도록 함께 살고 싶다던 그 작은 소원이, 이디케에게는 정말 가치 있는 바람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인생의 우선순위에 사랑은 첫째가 되지 못한다…….”
굳게 믿어 의심치 않았던 기준이 흔들렸다. 오드리는 편지를 품에 안고 침대에 누워 생각했다.
‘어쩌면, 사랑을 뒤로 미루고 사는 게 그리 현명한 삶의 방식은 아닐지도 몰라.’
오드리는 이리저리 뒤척거리다 눈을 감았고, 깨어보니 아침이었다. 그리고 멍한 정신으로 눈을 몇 번 감았다 뜨니 치장이 끝났고, 또 몇 번 눈을 감았다 뜨니 오전 업무가 끝났다. 점심 식사를 하다가 깜빡 졸았던 것까진 기억나는데 지금은 익숙한 마차 안이었고, 심지어 카프러스도 함께 타고 있었다. 어찌된 일인지 어안이 벙벙했다.
“……베텔 경.”
“네. 말씀하시지요.”
“우리가 방금 어디에 다녀오는 길이죠?”
“그야……. 왕궁에서 왕세자비 전하를 뵙고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서두르라 하셨는데 워낙 길에 사람이 많아서 좀처럼 속도가 붙질 않습니다. 죄송합니다.”
카프러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착착 대답했다. 오드리는 남들의 눈엔 자신이 아주 멀쩡하게 굴고 있는 모양이라고 짐작했다. 그래도 그렇지, 이런 상태로 왕궁에 들어갔다 나왔다니 가슴이 철렁했다.
“경, 내가 오늘…… 꺅!”
마차가 갑작스럽게 멈춰 서는 바람에 몸이 앞으로 홱 쏠렸다. 오드리는 다행히 꼴사납게 바닥을 구르는 것만은 면했는데, 누군가 옆에서 그녀를 안고 받쳐 주었기 때문이었다. 오드리를 위해 반사적으로 팔을 내밀었던 카프러스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아르젠 남작?”
“셰비언?!”
카프러스도 오드리도 기절초풍하게 놀랐다. 조금 전만 해도 없던 사람이 어느새 마차 안에 들어와 있다니 말이다. 태연한 건 오로지 셰비언뿐이었다. 셰비언이 오드리의 옷에 생긴 주름을 펴주며 웃었다.
“오드리, 이틀 만에 만나는 건데 어쩐지 굉장히 오랜만에 만나는 것 같아요.”
“나, 나는…….”
“난 오드리가 아주 많이 보고 싶었는데, 오드리는 어때요? 반갑지 않아요?”
셰비언이 투정이라도 부리는 듯 눈을 접으며 아양을 떨었다. 색실을 넣고 땋아서 장식적으로 늘어뜨린 은발이 봄 버드나무 가지처럼 살랑거렸다. 금편을 엮어 만든 화려하고 특이한 귀걸이가 짤랑짤랑 소리를 냈다.
오드리는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얼른 대답을 해줘야 하는데 말이 나오질 않았다. 멍하니 눈이나 깜빡이고 있다니 바보 같은 꼴일 걸 알지만 이건 다 갑자기 나타나 얼굴을 들이민 셰비언 탓이지 자신의 잘못이 아니었다.
‘내가 왜 이러지?’
인간 모습의 셰비언을 간만에 봐서 그런지, 아니면 이렇게 제대로 치장하고 나타난 그를 처음 봐서 그런지 심장이 너무 뛰어 시끄러웠다. 이 정도로 심장이 크게 뛰면 비단 셰비언만이 아니라 카프러스까지도 들을 수 있겠다 싶을 정도였다.
“대답 잘 들었어요. 역시 오드리도 나 보고 싶었군요!”
활짝 웃은 셰비언이 오드리의 뺨에 입을 맞췄다. 풋풋한 산딸기 같으면서도 청량한 향기가 훅 들어왔다가 멀어졌다.
“남작님! 뭐 하는 짓입니까!”
카프러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셰비언에게 그는 안중에도 없었다. 셰비언은 카프러스에겐 대꾸도 않고 품에서 가면을 꺼내 오드리에게 내밀었다. 코 아래만 남기고 얼굴 절반을 가리는 디자인의 고양이 가면이었는데, 얼룩덜룩한 털이 인상적이었다.
“이건…….”
“수확제에서 가면 쓰고 돌아다니는 거, 오드리랑 하면 재미있을 것 같아서 준비했어요.”
“아르젠 남작!”
가차 없이 무시당한 카프러스가 울컥 화를 냈지만, 어째 오드리는 웃음이 나는 걸 참느라 무진 애를 먹었다. 제 기사가 수모를 당하니 응당 같이 화를 내줘야 하는데 이거 참 곤란한 일이었다. 가까스로 진지한 표정을 사수하고 셰비언에게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셰비언, 수확제에서 가면을 쓰는 건 마지막 날에만 하는 거야.”
“그래요? 하지만 밖에는 지금도 가면을 쓴 사람들이 많던데요. 가면장수도 많이 나왔어요.”
“벌써부터 퍼레이드의 분위기를 즐기고 싶어 하는 성급한 이들이 있나 보지. 많아봐야 절반이 안 될걸.”
“절반이나 되네요. 오드리, 이제 남은 일정 없죠? 나랑 놀아줘요.”
“음……. 있어.”
그럴 리가 없는데? 락시 양에게 확인 받고 온 건데? 셰비언이 충격받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중얼거림을 들은 오드리가 셰비언에게 눈을 흘겼다.
‘이거, 아무래도 셰비언의 난입에 손을 빌려준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닌 모양인데? 마차가 이렇게 오래 멈춰 있는데 마부가 아무 말이 없는 것만 하더라도…….’
오드리는 카프러스를 살폈다. 카프러스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보지 않으려고 결심한 듯, 아예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평소처럼 충직한 모습이지만 화가 났다는 게 전신으로 느껴졌다. 아무래도 카프러스는 한패가 아닌 것 같았다. 그녀는 한껏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경, 셰비언이 어쩌다 이렇게 나타났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남작님, 방금은 아가씨께서 농담을 하신 겁니다. 아가씨께서는 이 시간부터 내일 아침까지 통째로 쉬는 시간입니다. 일정 같은 건 없습니다.”
카프러스가 잔뜩 미간을 찌푸린 채로 단숨에 오드리의 남은 일정을 고백해 버렸다. 심지어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마차 좌석 아래에서 걷기 편한 굽 낮은 신발을 꺼내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있는 오드리에게 내밀었다.
“그동안 너무 일에 매여 계셨습니다. 하루쯤은 일탈을 즐겨보셔야죠.”
“그……. 경, 내가 아는 베텔 경 맞아요?”
“아가씨께서 베텔이란 이름의 다른 기사를 거느리고 계신 게 아니라면 제가 맞습니다.”
“하하, 하하……. 베텔 경의 이름은 카프러스잖아요.”
오드리는 시답잖은 농담을 시도했지만 카프러스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는 마차의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오드리의 신발을 갈아 신겼다. 보물을 다루는 듯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깜짝 놀란 오드리가 빳빳하게 굳었다.
셰비언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오드리에게 가면을 씌웠다. 대체 뭘로 만든 건지, 고양이 가면은 아주 부드러워 피부에 닿아도 거친 곳이 하나도 없었다. 냄새도 포근하고 따뜻했다.
카프러스가 무릎 꿇은 자세 그대로 오드리를 올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아가씨는 아직 어리십니다. 수확제의 열기에 취해 조금 놀고 싶어졌다고 해도 누가 이상하게 여기겠습니까.”
“경……. 귀족 영애들은 늦어도 열여섯에는 데뷔탕트를 치르고 결혼시장에 나와요. 네이기스만 해도 벌써 유부녀라고요. 내가 그 애 결혼에 증인을 섰어요.”
“일찍 결혼한다고 소녀가 갑자기 어른이 된답니까. 그런 거면 법률에 정해진 성년 연령이 왜 스무 살입니까. 저는 예전부터 귀족사회의 조혼 풍습이 싫었습니다.”
카프러스가 사회적 관습에 대해 개인적인 호오를 밝히는 걸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오드리는 오늘이 대체 무슨 날인지 머릿속으로 확인했지만 오늘은 그냥 수확제 셋째 날이었다.
“열여덟이면 아직 소녀입니다. 그러니 완벽하지 않은 게 당연합니다. 아가씨, 뭐든 잘하려 애쓰지 마십시오. 가끔은 고삐를 풀고 놀아도 됩니다. 아무도 나무라지 않을 겁니다.”
카프러스가 허리에 찬 검을 툭툭 두드리며 누구든 나쁜 말을 하면 강제로 입을 닥치게 만들어주겠다는 의지를 비췄다. 어째 그 ‘누군가’에는 오드리 본인도 들어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라, 오드리는 붕어처럼 뻐끔대다 그만 입을 다물었다.
셰비언이 오드리의 귓가에 입을 맞추고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따스한 숨결이 피부에 닿자 허리께가 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오드리, 저 얄미운 베텔 경이 가끔은 맞는 말을 하네요. 항상 바쁜 오드리가 어쩌다 조금 노는 걸 가지고 뭐라고 하는 녀석이 있으면 내가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오드리가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셰비언이 마차 문을 열었다. 왁자지껄 시끄러운 거리가 문 앞에 확 펼쳐졌다. 웃는 얼굴의 사람들, 풍성한 음식 냄새. 오드리는 순간적으로 거리의 풍경에 눈길을 빼앗겼다.
“오드리, 우리 놀러가요.”
오드리는 무의식중에 고개를 끄덕였다. 셰비언이 오드리의 어깨를 강하게 감싸 안았다. 그제야 정신이 든 오드리가 약하게 비명을 질렀지만 물은 이미 엎어진 다음이었다. 어느새 사람들 틈에 서서 뒤돌아보니 카프러스가 태연스레 마차 문을 닫는 게 보였다.
‘다 한패였잖아! 속았어!’
셰비언은 오드리가 따질 틈을 주지 않았다. 그는 오드리의 손을 잡고 축제의 소란 속으로 뛰어들었다.
두 사람은 노점상이 파는 빵을 먹고, 분수대에서 손을 씻은 뒤 떠돌이 악사의 연주를 들었다. 악사에게 동전을 던져 주다 동네 꼬맹이들에게 잡혀 덩달아 춤을 췄다. 체력이 아무리 좋아도 어린애들과 놀아주는 건 너무 힘든 일이라, 오드리는 금세 지쳐 늘어졌다.
오드리가 벤치에 앉아 쉬는 동안 셰비언이 꽃장수에게 가서 꽃을 사왔다. 선명한 노란색이 예쁜 들꽃이었다.
“가만히 있어봐요.”
셰비언이 오드리의 머리에 들꽃을 꽂았다. 어떤 장신구를 가져와도 영 못마땅하다는 낯을 감추질 않더니, 꽃 한 송이가 그리 마음에 드는 듯 입술이 만족스러운 호선을 그렸다. 오드리는 어색하게 머리에 꽂힌 꽃을 만지작거렸다.
“그……. 이게 예뻐?”
“예쁘죠. 아주 잘 어울려요.”
셰비언이 눈을 접어가며 웃었다. 가면에 가려진 오드리의 뺨이 발그레 물들었다. 벨트람 포스터가 브란젤을 휩쓴 이후 예쁘다 아름답다 소리를 수십 번도 더 들었건만, 어째 셰비언이 해주는 말은 몹시 특별하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그대의 은발이 그렇게 예쁜데 장식이 너무 없잖아. 아쉬운걸.”
“색실을 넣어 땋았잖아요. 이거 이렇게 얇고 가늘게 땋기가 얼마나 힘든 건지 아세요?”
“그대가 땋지도 않았을 거면서 항의는. 다이앤 솜씨인 거 다 알아.”
셰비언은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였다. 오드리의 말대로 다이앤이 열의를 불태우며 꾸며준 머리였다. 가만히 앉아 있는 것도 고역이었다 항의를 해 봐야 먹힐 리가 없었다.
오드리가 제가 앉아 있던 자리에 셰비언을 잡아 앉히곤 잠깐 앉아 있으라 하더니, 보따리를 펼쳐 놓은 방물장수에게서 나비 모양의 은제 머리핀을 사왔다. 마감이 깔끔하고 색도 고왔다. 떠돌이 방물장수가 파는 것 중에서는 가장 귀한 물건이지만, 귀금속에 대한 안목이 하늘 끝에 닿은 셰비언에게는 영 부족한 물건일 테다.
오드리는 그걸 뻔히 알면서도 셰비언의 머리에 머리핀을 얹었다. 푸른색과 보라색 유리로 장식된 얇은 날개가 셰비언의 은발과 잘 어울렸다. 마침 그가 은여우 가면을 쓰고 있었기에 더더욱.
“내가 꽃이라면 그대는 나비인 게 마땅하겠지.”
손을 뻗어 나비를 만져 본 셰비언이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찼다.
“너무 조잡해서 별로인가? 마음에 안 들면 굳이 하고 있지 않아도 돼.”
오드리가 머리핀을 떼어주려 손을 뻗었다. 한데 셰비언이 오드리의 손을 걷어내 잡고는 오드리와 눈을 맞췄다. 눈빛이 몹시 진지했다.
“꽃에 찾아드는 게 나비만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이왕이면 벌로 해주면 안 돼요?”
“벌? 웬 벌?”
“경쟁자를 물리치려면 힘 센 벌이 좋잖아요. 아니면, 오드리가 나만 받아주고 다른 벌과 나비는 다 거절해 줄 건가요?”
“……풋!”
나비와 벌이 꽃을 선택하는 게 아니라, 꽃이 마음에 드는 나비와 벌을 고르는 거라니. 오드리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관점이었다. 그녀는 낭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대가 내 꽃술에 앉기만 하면, 피었던 꽃잎을 닫아서라도 가둬두고 안 내보낼 거야.”
“그거 좋네요. 그럼 나비나 벌이나 별 상관없겠어요.”
셰비언이 씩 웃으며 오드리를 잡아당기더니 그대로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오드리는 화들짝 놀라 떨어지려 했지만, 셰비언이 그런 그녀의 허리를 낚아채 제 무릎 위에 앉히는 바람에 실패로 돌아갔다.
벤치에 남는 공간도 많은데 하필 셰비언의 무릎에 앉게 되었으니, 오드리의 얼굴과 목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아무리 가면을 썼다지만, 무릎에 앉는 것보다 더한 것도 많이 한 사이라지만, 여긴 둘만 있는 침실이 아니라 사람이 많이 다니는 도로가의 벤치였다.
“셰비언!”
“듣기 좋아요.”
셰비언이 오드리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오드리는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는 느낌에 바르르 떨었다.
“그, 뭐, 뭐가?”
“심장 소리.”
셰비언의 속삭임이 신호라도 되는 듯, 이제까지는 인지하지도 못하고 있던 심장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주변의 소음이 죄다 묻힐 정도로 시끄러웠다. 오드리는 셰비언의 팔에서 벗어나려 몇 번 바르작대다 포기하고 그의 어깨에 얼굴을 처박았다. 누가 용 아니랄까 봐 힘이 세다. 온몸이 뜨끈뜨끈한 게, 불덩이라도 삼킨 것 같았다.
“셰비언……. 여기 지나다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
“뭐 어때요, 가면도 썼는데.”
“이깟 가면 한 장이 우릴 가려주면 얼마나 가려준다고…….”
오드리의 한탄엔 일리가 있었다. 두 사람은 신문에 몇 번이고 초상화가 실린 유명 인사였다. 게다가 모자를 쓰고 눈동자를 감추면 그럭저럭 사람들 사이에 녹아들어 가는 오드리와는 달리, 셰비언의 은발은 비교할 대상을 찾기 힘들 정도로 특징적이었다. 흰색도 회색도 아닌, 금속성의 은빛을 띠는 머리카락은 염색약 따위로는 흉내 낼 수가 없었다.
“수확제에서 가면을 쓰고 있는 사람의 이름은 묻지 않는 게 불문율이라면서요. 먼저 말도 걸지 않는다고 들었어요.”
“이름은 묻지 않지만 우리가 누군지는 다 알고 있을걸.”
아까부터 그들 주변을 지나던 사람들 중 열에 아홉은 셰비언의 머리칼에 시선을 빼앗겼다. 그리고 오드리의 녹안을 굳이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지나갔다. 이쯤 되면 알고도 모른 체 해주는 것에 가까웠다.
오드리는 부끄러워서 온몸이 타버릴 것 같은데, 셰비언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었다. 오드리가 기댄 가슴팍이 들썩거렸다.
“그거 좋네요. 우리가 누군지 알면서도 달라붙어 말을 걸지 않는다는 거잖아요.”
“소문은 다 날 거야.”
“어쩌죠, 실은 그거야말로 제가 바라는 바인데.”
“뭐?”
오드리는 놀라 고개를 들려고 했지만, 셰비언이 그녀의 정수리에 턱을 올려놓고 누르는 바람에 그럴 수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어쩐지 목과 허리에 둘러진 팔이 뻣뻣해진 것도 같았다.
“질투는 참 성가신 감정이에요.”
“…….”
“지나간 일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참을 수가 없다니요.”
오드리는 셰비언의 가슴에 기대 그의 심장 뛰는 소리를 들었다. 느리게 맞춰놓은 메트로놈처럼 느긋하던 박동이 점점 빨라졌다.
“오드리, 올해 수확제의 풍등은 나와 보는 거예요.”
“그……. 라비린이 무슨 말이라도 했어? 아무 말이나 했을 테니까 딱히 신경 쓸 것도 없어.”
“라비린은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셰비언은 더 말하기가 싫은 듯, 입을 다물어 버렸다. 오드리는 영문을 모르고 고개를 갸웃대다 정말 고양이처럼 그의 품에 머리를 기댔다.
“작년에 났던 스캔들 기사가 신경 쓰여?”
“……아무렇지도 않다면 거짓말이겠죠.”
“그거 죄다 거짓말 기사인데도?”
“알아도 신경 쓰여요. 나야말로 오드리의 진짜 연인인데, 우리 기사는 그때에 비하면 반도 안 되잖아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오드리는 잽싸게 입을 틀어막았다. 하마터면 크게 소리 내어 웃을 뻔했다. 하지만 몸을 바짝 붙이고 있는데 셰비언이 그런 기색을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다. 불만스럽게 혀를 찬 그가 오드리의 옆구리를 간지럽혔다.
“하하하하! 간지러워! 하하!”
“웃을 거면 그냥 웃어요.”
“하하, 하하하! 하하하! 웃어서 미안! 그런데 어떻게 안 웃을 수가 있겠어? 당연한 걸 가지고 이렇게 귀엽게 고민하는데!”
오드리는 셰비언의 목을 끌어안고 그와 이마를 맞댔다.
“헨젤과 타우레드, 그리고 타우레드 후작부인의 친정인 카란 남작가는 멜브란트 역사에 굵직한 흔적을 남긴 명문가들이라 당연히 쌓인 이야기가 많아. 그리고 기자들은 자식들의 애정사를 가지고 상상력을 좀 발휘한 정도로는 이 가문들이 화내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어. 그래서 멋대로 펜을 놀릴 수 있었던 거야.”
“귀족의 위세가 당당한데 다들 대담하네요.”
셰비언이 입을 삐죽거렸다. 오드리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다 경험이 쌓인 게지. 하지만, 그대는? 셰비언, 그대는 전설 속에나 등장하던 용이야. 심지어 말로만 정체를 밝힌 것도 아니고 본체를 드러내고 다른 용과 치고받고 싸우기까지 했어. 그날을 잊을 수 있는 인간이 있을 것 같아?”
“글쎄요……. 다들 잊은 것 같던데요.”
“설마! 잊은 게 아니라, 두려워 말하지 못하는 거야. 아무리 그대가 인간의 작위를 받고 평범한 마법사처럼 일하며 인간 틈에 끼어 산다고 해도, 그날의 기억이 머리 한구석에 들러붙어서 입을 다물게 하는 거야.”
“두려워 말하지 못한다?”
“감히 용을 두고는 씹고 뜯고 즐기며 말할 엄두가 안 난다 이거지. 그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르니까. 그러니 무서워서 스캔들 기사에 상상력을 발휘할 수가 있겠어? 진짜야, 날 믿어.”
셰비언의 팔이 느슨해졌다. 오드리가 원하면 얼마든지 풀고 내려갈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오드리는 단번에 내려가는 대신 가면 아래로 드러난 그의 뺨에 살짝 입을 맞췄다. 셰비언이 놀라 움찔거렸다.
“사실 난 그대가 얼마나 다정하고 상냥한 용인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
“어……. 왜요?”
“그래야 감히 그대에게 눈길 주는 이가 없지.”
셰비언은 활짝 웃는 오드리의 눈과 입술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당장이라도 가면을 벗기고 웃는 얼굴 전체를 보고 싶은 충동이 밀려왔다. 가면이 있어서 햇빛 비치는 거리에서 여유롭게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걸 뻔히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움찔거리던 그의 손이 사고를 치기 직전, 오드리가 그의 무릎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무게감이 사라지자 겨우 정신이 들었다.
“그런데 말이야, 생각해 보니 소문나는 걸 딱히 두려워하거나 피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
“오드리?”
“그대가 내 것이라고 사방에 알리고 싶은 마음은 내게도 있거든.”
이 기회를 놓칠세라, 말이 끝나기 무섭게 셰비언이 오드리의 손을 낚아채 쥐고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옅은 푸른색 눈동자가 형형한 빛을 품고 반짝였다.
“말 바꾸기 없기예요.”
“당연하지.”
오드리는 호기롭게 대답해 놓고도 자신이 실수한 건 아닐까 고민했다. 하지만 그런 고민은 셰비언에게 이끌려 다니는 동안 송두리째 뽑혀 사라졌다.
셰비언은 작정하고 나온 것처럼 사람이 많이 몰리는 곳을 골라 다녔다. 먹거리 노점이 몰린 골목을 헤매고, 길거리 화가에게 동전 몇 개를 주고 나란히 앉은 초상화를 받았으며, 올해 수확한 과일이 잔뜩 쌓인 시장에서 군것질을 했다. 찰싹 붙어 앉아 노상 연극도 관람했다.
사람이 늘어난 만큼 가면을 쓴 사람도 늘어났다. 그만큼 오드리와 셰비언에게 쏟아지는 시선과 관심도 줄어들었다. 그러다 가로등의 뚜껑이 하나둘씩 벗겨지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누구도 그들을 신경 쓰지 않는 상황에 이르렀다.
딱히 아쉽지는 않았다. 오히려 즐거웠다. 어디에서 뭘 하든 따라붙던 시선이 싹 사라지고 난 자리엔 해방감과 자유로움만 남아서 오드리의 발을 가볍게 만들고 가슴에 웃음을 불어넣었다.
오드리는 만탈락에서 이름 자자하던 말썽꾸러기 시절로 돌아가 셰비언의 입술에 연지를 발랐다. 새끼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기자 셰비언의 입술이 빨갛게 물들었다.
“아이고, 아가씨! 멀쩡한 사내 입술에 연지를 바르면 어쩝니까! 어이고, 벌게진 거 봐! 이거 잘 지워지지도 않는 건데……!”
싸구려 화장품을 파는 노점의 주인이 당황해 말렸지만 정작 셰비언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는 용이었다. 그에겐 인간이 나눠놓은 남녀의 영역이 별 의미가 없었다. 만약 오드리가 드레스를 입으라고 했어도 과연 사이즈가 맞을까 하는 게 그의 유일한 고민이었을 것이다.
오드리가 입술에서 손을 떼자 셰비언이 거울을 들여다보며 진지하게 품평했다.
“냄새는 정말 별로인데 색은 괜찮네요. 그렇지만 오드리에겐 안 어울릴 것 같아요. 주인장, 좀 더 무겁게 느껴지는 색은 없나? 붉은색이 짙고 어두울수록 좋은데.”
“예? 예?”
“없나 보군. 그럼 색을 배합해야 하나? 주인장, 마법등 좀 여기 더 가까이 비춰보게. 이것 참, 빛이 왜 이렇게 약한가? 색이 잘 안 보이잖나. 앞으로도 계속 밤에 장사할 거면 등 좀 좋은 걸로 쓰게.”
노점 주인은 당황했고 오드리는 실망했다. 그녀는 의욕적으로 연지의 색을 고르기 시작한 셰비언을 질질 끌고 화장품 노점에서 멀어졌다.
“연지 같은 건 다이앤이 수십 개나 갖춰놨어. 계절마다 자꾸 사들여서 줄지도 않아. 향도 색도 일품이니 이런 싸구려 노점에서 굳이 고르지 않아도 돼.”
“아, 그래요? 난 또 색을 보려고 일부러 발라준 줄 알았죠.”
“나는 그냥 그대가 당황하는 걸 보고 싶었던 거야…….”
“이런, 내가 잘못했네요. 펄쩍 뛰며 싫다고 할걸.”
오드리는 맥이 빠져 웃고 말았다. 반응을 보아하니 다이앤에게 맡겨 여장을 시켜도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았다.
셰비언이 그런 그녀를 붙들고 입술을 살짝 쪼았다. 바른 지 얼마 안 된 연지가 금세 오드리의 입술을 붉게 물들였다.
“잘 지워지지 않는 거라더니, 번지긴 굉장히 잘 번지네요.”
셰비언이 손가락으로 오드리의 입술을 가볍게 문질렀다. 오드리는 그의 손가락이 닿은 입술에 화끈 열이 오르는 걸 느꼈다. 고개를 돌리고 싶었지만 셰비언이 다른 손으로 턱을 잡고 있어서 그럴 수도 없었다.
웃음기 어린 눈을 마주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미끄러뜨렸다. 갖가지 그림이 그려진 풍등을 들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 밤이 깊지 않았는데 벌써 불을 붙인 성급한 사람들도 있었다.
“우, 우리도 풍등 사야 하지 않아?”
셰비언이 소리 죽여 웃었다. 오드리는 자신이 가면을 쓰고 있다는 것에 깊이 감사했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을 게 분명했다.
“풍등……. 오드리와 함께 만들러 가려고 했는데 깜빡 잊어버렸네요. 이런, 워커가 화내겠어요. 기껏 공방도 가르쳐 주고 재료도 준비해 줬는데.”
오드리는 셰비언에게 협조한 인물 명단에 워커를 추가했다. 명단 생각을 해서 그런지 얼굴의 열도 좀 내린 것 같았다.
“풍등을 직접 만들 생각이었어?”
“직접 만든 풍등을 날리면 더 각별할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시간이 이렇게 늦어서야 어림도 없겠어요.”
“그리 늦은 시간도 아닌데 지금부터 만들면 되지. 어디서 만드는 거야? 재료는 사가야 하나?”
이제까지 풍등을 사서 날리기만 했지 만들어본 적은 없었던 오드리의 눈에 확 빛이 들어왔다. 가면을 썼는데도 맨얼굴일 때보다 더 감정표현이 솔직했다. 그만큼 긴장이 풀린 것이리라.
셰비언은 가면 위로 흐트러진 오드리의 머리칼을 집어 귀 뒤로 넘겨주었다. 들떠서 발을 움찔거리던 오드리가 살짝 어깨를 움츠렸다.
“늦었어요. 오드리나 나나 초보자인데 지금부터 만들어봐야 쓰레기만 만들다가 시간을 다 보낼 게 뻔해요.”
“…….”
“뒤늦게 풍등을 사려고 하면 예쁘고 좋은 건 다 팔리고 없을 테니, 차라리 지금부터 풍등을 고르는 게 낫죠. 안 그래요?”
오드리는 좀처럼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반박할 수 없이 맞는 말인데 아쉽고 서운했다. 그녀는 셰비언의 옷자락을 붙들고 어린애처럼 떼를 썼다.
“망치면 어때. 같이 만들면 좋잖아…….”
“그랬다가 오드리랑 같이 풍등을 못 날리면 어떡해요?”
“그럼 풍등은 지금 골라 사고 만들기도 하면 되지.”
셰비언이 자신은 아무래도 오드리를 당해낼 수가 없다며 웃었다. 오드리는 얼굴이 화끈거리는 걸 무시하고 풍등장수가 모인 골목으로 뛰어들었다.
대목을 맞은 골목은 풍등으로 빼곡했다. 달 수십 개가 좁은 골목에 동시에 머무르는 것 같았다. 풍등에 그려진 그림이 잘 보이도록 미리 불을 붙여놓은 풍등장수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작년 수확제에 참석했을 때, 오드리는 북적대는 사람들 틈에서 풍등을 고르는 게 싫어서 가장 가까운 풍등장수에게서 그림 없는 풍등을 샀다. 어차피 한번 날리고 나면 깨끗하게 잊어버릴 물건에 그리 애를 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오드리는 셰비언의 손을 잡고 골목을 걸으며 아주 신중하게 풍등을 골랐다. 종이에 색을 입혀 은은한 보랏빛이 나는 것, 화려한 꽃이 그려진 것, 온갖 동물이 그려진 것, 역사 속의 위인이 그려진 것, 담백하게 글씨만 써진 것…….
“직접 만든 풍등을 날릴 거면서 뭘 그렇게 애를 써요?”
“혹시 모르잖아. 사놓은 걸 날릴 일이 생기면 어떡해.”
오드리는 진작 민무늬 풍등을 고른 셰비언이 그녀의 옆구리를 쿡쿡 찌른 뒤에야 마음에 드는 풍등을 골랐다. 귀가 크고 뾰족하고 꼬리털이 풍성한 여우가 그려진 풍등이었다. 셰비언은 딱히 말을 보태지 않고 그저 웃기만 하는데, 오드리만 귀까지 빨개진 채로 값을 치렀다.
다행히 워커가 소개해 준 공방은 이 시간까지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만 직원의 마음이 몹시 급했을 뿐. 직원은 홍수에 떠내려가는 통나무처럼 빠르게 풍등 만드는 법을 읊고 사라져버렸고, 두 초보자는 얇은 종이와 매끄럽고 가느다란 나뭇가지와 풀과 기타 등등의 재료를 끌어안고 악전고투했다.
“으, 또 풀이 묻었어. 종이가 다 울어버렸네.”
“처음에 바를 때 너무 많이 발라서 그래요. 조금만 떠서 써야죠.”
“분명 조금만 떴어. 앗, 여기 찢어졌다!”
“오드리의 마음이 많이 넉넉하네요. 조금만 야박해져 봐요.”
놀랍게도, 손재주에 있어서는 오드리가 셰비언을 영 따라가지 못했다. 펜을 쥐고 서류를 처리하거나 피아노를 연주할 때는 더없이 섬세하게 움직이던 손인데, 뭔가를 만들어내려고 하니 영 결과물이 처참했다.
오드리는 나란히 앉은 셰비언의 자리를 훔쳐보았다. 그녀가 연달아 세 개를 실패하는 동안 그는 벌써 풍등 두 개를 완성하고 세 개째 만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뒤에 만든 것일수록 모양새가 괜찮았다. 당장 나가 띄워도 잘 뜰 것 같은 셰비언의 풍등을 보자 자신의 실패작이 더 서러워졌다.
“인간으로 산 시간은 내가 훨씬 긴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어릴 적엔 나도 제법 손재주가 좋았던 것 같은데 어떻게 이렇게 됐을 수가 있어!”
“안 쓰면 퇴보하고, 자주 쓰면 느는 거예요. 전보 만들면서 내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손재주가 모자라면 안 되죠. 장인길드에 전보선의 대량 생산을 맡기기 전까지는 내가 직접 마법진을 새겨서 실험했다고요.”
“세상에……. 아까는 초보자라 쓰레기만 만들 게 분명하다고 해놓고? 이게 뭐야, 쓰레기는 나만 만드네.”
“그야 풍등 구조가 단순하다는 걸 몰랐으니까 그랬죠. 오드리, 그렇게 침울하게 있지 말고 이 풍등에 그림이라도 그리는 게 어때요? 솜씨도 어설픈데 무늬도 장식도 없으면 썰렁하잖아요.”
셰비언이 다 만든 풍등을 오드리에게 떠밀었다. 오드리는 여우 그림 풍등과 나란히 놓여 있는 민무늬 풍등을 흘끗 바라보았다. 아까 그는 장식과 무늬가 많이 들어간 풍등은 영 취향이 아니라고 했었다.
“싫으면 안 해도 돼요. 재료도 아직 남았으니까 더 도전할래요?”
“아냐, 내가 손대면 재료 낭비가 될걸. 그대가 써.”
오드리는 황급히 셰비언 작 풍등을 제 자리로 끌어왔다. 사려 깊은 공방 주인은 그림을 그릴 재료도 준비해 뒀는데, 오드리는 뭘 어떻게 그려야 할지 몰라 멍하니 붓을 쥐고 있기만 했다.
‘내가 그림을 그려본 적이 있어야지…….’
상류계급에 속하는 귀족에게 그림은 어디까지나 감상의 대상이었다. 당연히 오드리도 마찬가지였다. 네이기스가 특이한 것이다.
“너무 잘 그리려고 애쓰지 않아도 돼요. 예비가 있는데 뭐가 걱정이에요? 정 그릴 게 없으면 낙서라도 하세요.”
셰비언이 툭 던진 말이 오드리에게 용기를 주었다. 오드리는 망친 풍등에 동그라미와 세모 따위를 그리며 연습했다. 그녀가 새로운 작업에 몰두하느라 옆에서 꼼지락대는 셰비언을 까맣게 잊어버리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셰비언은 마지막 풍등 재료를 소진하고 풀이 마르기를 기다리며 오드리를 구경했다. 오드리는 연습은 충분히 했다 싶은지 셰비언이 만든 풍등에 직접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잔뜩 집중한 나머지 미간에 잡힌 주름이 깊었다. 그마저 예뻐 보이니 큰일이었다.
‘내 눈에만 예쁘면 좋겠는데, 그건 그냥 욕심이겠지.’
내 눈에 보석은 남들 눈에도 보석이고, 내 눈에 꽃이면 남들 눈에도 꽃이다.
셰비언은 오드리와 수확제를 돌아다니며 그 말을 온몸으로 실감했다. 가면으로 얼굴을 가렸는데도 활기차게 웃고 떠들며 사방으로 생기를 뿌리는 오드리에게 눈을 떼지 못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다. 정작 본인은 수확제를 즐기느라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말이다.
‘큰일이야. 갈수록 난이도가 높아지네.’
셰비언이 한숨을 푹 내쉬는데, 마침 그림을 끝낸 오드리도 똑같이 한숨을 내쉬었다. 가진 집중력을 다 발휘해서 그렸는데 결과물이 영 마음에 안 들어서다.
“음……. 꽃과…… 어……. 나비?”
셰비언은 어떻게든 칭찬을 해주려 노력했지만, 대체 뭘 그린 건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천 뭉치를 뭉쳐 놓은 것처럼 생긴 건 아무래도 꽃 같은데, 거기에 매달린 무언가의 형상이 참 난해했다.
오드리가 한숨처럼 말을 뱉었다.
“용.”
“아, 용이요……. 용이요?”
그림도 처음 그려보는 사람이 왜 용처럼 난이도 높은 것에 도전했어요? 오드리는 셰비언이 하지 않은 질문이 귀에 들리는 것만 같아 얼굴을 붉혔다. 그러게, 내가 왜 그랬을까.
“로렐라이의 상징이 용과 꽃이잖아. 다알리아를 그릴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내가 쓸데없이 포기를 못해서……. 그대의 풍등은 성공작인데 내 그림 때문에 실패작이 됐네.”
그림을 그린 풍등은 하나뿐이지만 다시 시도하기엔 시간이 너무 늦었다. 주인이 나가라고 재촉하지 않는 게 용한 시간이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이 까맣고 깊었다. 성질 급한 풍등 몇 개가 둥둥 떠다니는 게 보였다.
“그대가 열심히 만든 걸 망쳐서 미안해. 이만 나갈까? 더 늦으면 정말 풍등을 못 날리게 될 거야.”
오드리는 멀쩡한 풍등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여우 그림 풍등 하나, 민무늬 풍등 세 개. 도합 네 개나 됐다. 뒤따라 나온 셰비언이 그중 두 개를 가져가고 나니 손이 가벼워졌다.
“어디서 날릴까? 작년엔 적당히 광장 구석에서 날렸는데.”
“라비린과 함께 날렸던 거죠?”
셰비언이 갑자기 라비린의 이름을 꺼냈다. 살짝 날이 선 듯한 목소리였다. 얼른 대답하지 못하는 오드리를 잠시 바라보던 셰비언이 풍등 두 개를 한 손에 모아 쥐고 오드리를 번쩍 들어 올려 제 팔에 앉혔다.
오드리가 깜짝 놀라 셰비언의 목을 붙들고 매달렸다.
“셰비언? 왜 이래?”
“오드리는 의외로 사람 많은 곳을 싫어하잖아요. 조용한 곳으로 가려고요.”
셰비언이 말을 끝내자마자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당황해서 얼굴의 가면을 다시 확인하던 오드리는 몇 걸음 가지 않아 누구도 그들에게 시선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지런한 풀잎 가운데에 혼자 웃자란 잡초 같은 꼴인데도 말이다.
뿐만 아니라, 풍등을 띄우러 나온 사람들이 스스로 의식하지도 못한 사이 셰비언의 앞에서 비켜섰다. 길은 저절로 열렸다가 닫혔다. 셰비언은 아무런 방해 없이 편안하게 광장을 가로질렀다.
“이, 이게 뭐야? 마법이야?”
“네. 기초 마법 중의 하나예요. 비록 적용범위가 좁고 같은 용에겐 반드시 들킨다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남들의 시선을 피하기엔 아주 좋은 마법이죠.”
셰비언의 목을 안고 있던 팔에 힘이 들어갔다.
“……마법 써도 돼? 아무렇지도 않아?”
“기초 마법인걸요. 이쯤은 아무 것도 아니에요.”
셰비언의 태연한 대답에도 오드리는 쉽게 마음을 놓지 못했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좀 치이더라도 같이 걸어가는 게 어떠냐고 쉴 새 없이 말했지만, 셰비언은 기어이 시계탑의 정상에 오르고 나서야 그녀를 내려주었다.
“역시 시계탑 정상엔 사람이 없네요.”
셰비언은 몹시 흡족한 듯 말했지만, 오드리는 경치를 즐길 정신이 없었다.
“상처가 덧나면 어쩌려고 이래!”
“덧날 상처 같은 거 없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그 말을 믿으라고? 인간 모습을 하는 것도 버거워서 상처가 벌어지는 걸 내 눈으로 봤는데 그게 며칠 만에 다 나았다는 게 말이 돼?”
“나는 용이잖아요. 인간과는 낫는 속도가 다르죠.”
“용이라고 다치지 않는 건 아니잖아! 아프지 않은 것도 아니고!”
오드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잘게 떨리는 눈동자와 손에서 그동안 잘 눌러 감춰왔던 불안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나중에 이성을 찾으면 부끄러워 어쩔 줄을 모를 테지만, 지금은 침착함도 평정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었다. 빗속에서 하얗게 숨을 내쉬며 잠든 용과 벌겋게 벌어진 상처를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한 지 닷새도 채 되지 않았다. 하룻밤이 지날 때마다 상처가 사라지는 걸 보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새 다 나았다는 말을 덜컥 믿기는 어려웠다.
“내가 오드리에게 거짓말을 한 적이 있었던가요?”
“……하!”
풍등을 팽개친 손이 셰비언의 앞섶을 움켜쥐었다.
“이 거짓말쟁이.”
오드리가 어찌나 이를 갈며 말하는지, 누가 들었으면 오드리가 셰비언에게 사기라도 당한 줄 알 것이다. 셰비언도 깜짝 놀라 자신이 했던 말을 되짚었다.
‘내가 거짓말을 했던 적이…… 있네.’
왜 달튼 제도에 가려고 하느냐는 물음에 사파이어를 찾으러 간다고 뻔한 거짓말을 했었다. 오드리가 의심스러워하면서도 캐묻지 않기에 조용히 넘어가려는 줄로만 알고 신경 쓰지 않았을 뿐.
“음, 한두 번 정도는 했을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거짓말쟁이라는 말까지 들을 정도인지는 모르겠네요.”
“진실을 말할 기회를 줄게.”
“오드리가 원하는 진실이라는 게 어떤 건지 알아야 말을 하죠. 아, 혹시 그건가요? 인간 마법사라면 당연히 알아야 할 일이라고 했던 그거. 안 그래도 바로 말해주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자꾸 미뤄져서 이렇게…….”
“달튼 제도, 발톱섬, 샤를레아, 마법망 강화.”
오드리가 단숨에 말을 쏟아냈다. 셰비언은 불이라도 삼킨 듯 이글대는 눈빛을 정면으로 받고 돌덩이처럼 굳었다. 뭐라 표현하기 힘든 침묵이 그들 사이에 내려앉았다.
“……내가 잠들었던 사이에 알아낸 건가요?”
“알아냈다는 표현은 너무 분에 넘치는걸. 나는 그저 물었을 뿐이고, 그들은 내게 대답했을 뿐이야.”
“이런…….”
셰비언이 쓴웃음을 지었다. 입막음을 좀 더 잘할걸, 뭐 이런 말을 할 것 같은 얼굴이었다. 오드리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대가 발톱섬을 때려 부수든 말든, 샤를레아를 잡아 족치든 말든, 그건 내가 간섭할 일이 아니라는 걸 알아. 하지만…… 마법망 강화는 얘기가 다르지.”
글쎄, 그게 왜 얘기가 다를까. 셰비언은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오드리가 아직 말을 끝내지 않았다.
“인간이 저지른 일을 왜 그대가 책임지지? 그대는 인간에게 마법을 줬어! 그걸 제대로 간수하지 못한 건 인간의 책임이야! 마법의 주인이 비늘과 피를 뽑아내서까지 인간을 위해 희생할 필요는 없단 말이야!”
“인간을 위해 희생한 적 없는데…….”
“이유가 나라면 그건 더 싫어!”
오드리가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자신의 흥분이 좀체 감당이 안 되는 듯 비틀거리기까지 했다. 셰비언은 얼른 그녀의 등을 받쳐 자신에게 기대게 했다. 오드리는 반항하지 않고 셰비언의 옷자락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녀의 등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줘. 그날 그렇게 다쳤던 이유를 내게 털어놓을 마음은 있었어?”
“오드리, 난 딱히 희생을 한 게 아니에요. 그냥 내가 하고 싶어서 그렇게 했던 거지. 그러니까 오드리가 그렇게까지 신경 쓰지 않아도 괜…….”
“내 질문에 대답부터 해주겠어?”
말 돌리기에 실패한 셰비언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말했을 거예요.”
“……정말이지?”
“그럼요. 내가 오드리를 속여서 뭘 하겠다고요. 다 나았다는 것도 진짜고, 마법망 강화를 위해 이 한 몸 희생한 게 아니라는 것도 진짜예요.”
오드리가 고개를 들었다. 그새 울기라도 했는지, 가면이 조금 젖은 것 같았다.
셰비언은 차마 눈 주변은 만지지 못하고 드러난 뺨만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잔뜩 힘이 들어가 굳어 있던 오드리의 어깨가 점차 내려갔다. 거칠던 숨도 조금은 진정됐다.
“내가 본체로 있을 때 회복력이 얼마나 좋아지는지 오드리도 눈으로 봤잖아요. 지금은 아주 말끔해요. 새로 돋아 말랑말랑한 비늘이 예전만큼 단단해지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겠지만요. 정 못 믿겠으면 아이샤라도 불러다가 회복 마법이라도 쓰게 할까요?”
“…….”
“마법망 강화도 마찬가지예요. 그냥 내가 하고 싶어서 그렇게 한 거예요.”
“그냥 하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그 지경이 되도록 스스로 비늘을 뽑고 피를 짜냈다는 게 말이 돼? 그것도 남의 이익을 위해서? 용의 기준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인간들은 그걸 두고 희생이라고 해.”
“오드리에게 딱히 용의 기준을 말해준 적은 없지만, 나의 기준을 말해준 적은 있어요. 오드리가 바로 나의 기준이에요. 그럴 것 같다고 생각은 했는데, 어느새 그렇게 됐더라고요.”
셰비언의 눈매와 입술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하지만 오드리는 셰비언의 미소를 확신할 수 없었다. 얼굴 반쪽을 가린 가면을 벗겨 버리고 그의 진짜 표정을 보면 좀 나아질 것 같았다. 손가락이 자꾸 움찔거렸다.
“지금 인간의 문명이 무너지면 오드리가 큰 타격을 입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마법망을 가만히 내버려 둘 수가 없더군요. 인간에게서 마법을 돌려받아야겠다는 선택지는 머리에 떠오르지도 않았어요.”
“…….”
“내 행동의 첫 번째 기준은 오드리의 안전과 안녕이에요. 오드리의 몸과 마음이 안녕해야 나도 안녕해요. 결국 난 나를 위해 그렇게 한 거고, 그러니 희생이 아니에요.”
“피……. 처음부터 끝까지 궤변이야.”
“궤변이라니요? 내게는 엄연한 사실이고 진리예요.”
셰비언이 진지하게 같은 주장을 반복했다. 오드리는 그런 그에게서 다시는 자신에게 사실을 숨기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다시는 자신을 이유로 다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는 것엔 실패했다.
“앞날이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어서 그런 약속을 하나요?”
“말이라도 해주면 좋잖아.”
“오드리 앞에서 거짓말쟁이가 될 순 없어요.”
본인이 했던 말로 반박당하니 차마 더 질러댈 수가 없다. 오드리는 잔뜩 흥분해서 셰비언에게 소리를 질렀던 자신을 거하게 나무랐다. 아무리 그날의 충격이 남아 있다고 해도 그렇지, 이런 식으로 몰아붙이는 게 아니었다.
그때, 셰비언이 몹시 의기소침해진 오드리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바깥쪽을 보라 손짓했다. 사람들이 풍등을 날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하늘의 달처럼 은은한 빛을 뿌리는 풍등 수십, 수백여 개가 두둥실 떠올랐다.
시계탑 꼭대기는 퍽 높아서, 두 사람은 선두 그룹을 차지한 풍등들이 서서히 떠올라 높은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다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장관을 처음부터 끝까지 볼 수 있었다.
“무슨 등부터 띄울까요?”
“잡히는 대로 띄우는 거지 뭐.”
민무늬 풍등 세 개, 여우 그림 풍등 한 개. 정성들여 고른 풍등과 애써서 만든 풍등이 밤바람을 타고 훨훨 날았다.
오드리는 셰비언의 가슴에 등을 기대고 서서 풍등을 구경했다. 매년 봐온 익숙한 풍경인데 어째 올해는 특별하게만 느껴졌다. 그 이유가 풍등을 직접 만들어보려는 시도를 해서인지, 장소가 장소라 그런 건지, 아니면 셰비언과 함께 있기 때문인지 가늠이 어려웠다. 아마도 세 개 다일 것 같았다.
“오드리, 풍등이 많으니까 어때 보여요?”
“예뻐.”
“예쁘기만 해요?”
“그럼 뭐가 더 필요해? 미사여구 잔뜩 넣어서 감상문이라도 써줘? 땅의 달이 하늘의 달을 찾아 올라가는 수확제의 밤, 뭐 이런 거?”
“잡고 싶지는 않아요?”
난데없는 말에 오드리가 깜짝 놀라 몸을 돌렸다. 그녀를 놓아준 셰비언이 훌쩍 뛰어올라 시계탑 난간 위에 아슬아슬하게 올라섰다. 소슬한 가을바람이 셰비언의 머리칼을 헤집고 지나갔다. 오드리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빠져나갔다.
“셰비언, 다치지 말라고 한 지 아직 한 시간도 안 지났어.”
“설마 잊었을까요.”
셰비언이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어쩔 줄 모르고 망설이던 오드리지만, 셰비언이 이름을 부르며 재촉하자 굳게 결심하고 그의 손을 잡았다. 몸이 쑥 딸려 올라간다는 느낌이 든 다음 순간, 오드리는 그에게 안겨 좁은 난간 위에 위태롭게 서 있었다.
축제의 소란을 품은 바람이 드레스 틈으로 스며들었다. 얇은 옷자락이 마구 펄럭거렸고, 두려움에 자꾸만 몸이 움츠러들었다.
“오드리, 뭘 그렇게 긴장해요? 내가 옆에 있는데.”
“그대의 옷자락을 쥐고 안쪽으로 구르면 어떨까, 뭐 이런 생각 중이야.”
“하하, 그럼 안 돼요. 내가 밟고 싶은 건 탑이 아니라 저 풍등인걸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셰비언이 난간을 박차고 훌쩍 뛰어내렸다. 그것도 오드리를 끌어안은 채로!
오드리는 차마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셰비언의 목만 와락 끌어안았다. 한데 아무리 기다려도 추락하는 감각이 느껴지지가 않았다. 질끈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자마자 탄성이 나왔다. 셰비언이 허공을 딛고 서 있었다. 그에게 안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이, 이게 무슨 일이야?”
“풍등을 잡고 싶어서요. 자, 오드리도 서볼래요?”
셰비언이 오드리를 안은 팔에서 살짝 힘을 뺐다. 처음에는 셰비언의 목을 안고 내려가지 않으려 애를 쓰던 오드리도 시도가 반복되자 결국 조심스레 허공에 발을 디뎠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바닥이 발밑을 받쳐 주고 있는데도 좀처럼 진정하지 못하고 몸을 떨었다.
“오드리, 공간에서는 같이 우주를 걷기도 했잖아요. 별이 잠긴 호수에서 찰박찰박 발장구도 쳐 봤으면서 왜 이렇게 무서워해요?”
“그건 공간이었고! 여긴 현실이잖아! 적어도 공간에서는 사람들 떠드는 소리도 안 들렸고, 이런 바람도 없었어!”
“아하, 그런 이유라면 납득이 가요. 하지만 계속 이러고 있을 수는 없는 거잖아요?”
셰비언이 오드리의 손을 잡고 크게 한 걸음을 내디뎠다. 오드리는 제자리에 서 있지 못하고 그를 따라 엉거주춤 발을 디뎠다. 놀랍게도 아무 생각 없이 내딛은 곳에도 바닥이 있었다.
“……어?”
“하하, 내가 말했잖아요. 풍등을 잡을 거라고요. 그러려면 허공을 밟는 것쯤이야 별것도 아니어야죠.”
어딜 밟아도 떨어지지 않는다는 걸 반복학습을 통해 알게 되자 오드리의 발걸음도 몹시 대담해졌다. 그녀는 천천히 날아오르는 풍등을 잡으러 팔짝팔짝 뛰어다녔다. 그런 그녀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셰비언이 동쪽 하늘 어딘가를 가리켰다.
“오드리, 저길 봐요. 별빛 고래가 별을 마시러 달려왔어요.”
셰비언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겼던 오드리가 놀라 입을 벌렸다. 밤하늘 일부를 떼어내 그 몸에 입힌 듯 찬란하고 우아한 고래가 별의 바다를 헤엄쳐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고래라곤 그림책에 그려진 것만 보았던 오드리지만, 셰비언이 가리킨 별빛 고래가 특별한 걸 알아보는 데엔 무리가 없었다.
“내 눈이 틀리지 않았다면 고래 등에 범선용 돛이 달려 있는 거 같은데……?”
“밤하늘을 누비는 고래니까요.”
밤하늘과 돛 사이에 무슨 상관이 있다고? 오드리는 더 설명을 듣고 싶었지만, 셰비언은 고래를 부르느라 바빴다. 고래는 군더더기 없이 매끈한 동작으로 두 사람 앞에 멈춰 서서는 거대한 지느러미를 슥 내밀었다. 오드리는 홀린 듯 지느러미를 타고 고래의 등에 올라탔다.
별빛 고래의 등은 널찍하고 쾌적했으며, 무엇보다 아름다웠다. 등 가운데에 찰랑찰랑 고인 별빛에 눈이 부셨다.
오드리는 별빛을 손에 쥐고 위에서 아래로 떨어뜨렸다. 모래 장난을 하는 아이가 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예쁘게 반짝이는 모래는 왕성에서도 구할 수 없을 게 분명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셰비언이 장난삼아 별빛을 튀겼다. 오드리의 옷 곳곳에 별빛이 묻었다.
“풍등 잡으러 왔다더니 별빛만 들썩대다 가려고?”
“설마요. 제가 잡고 싶은 풍등은 따로 있어서 그래요.”
셰비언이 씩 웃으며 별빛 고래를 한쪽으로 몰았다. 그는 풍등 사이에 긴 작대를 낚싯대처럼 늘어뜨렸다. 통통한 풍등이 이리저리 떠밀려 다니며 뒤엉켰다. 오드리는 낚시꾼의 아내라도 된 듯한 기분으로 그의 어깨에 기대앉아 풍등을 고르는 장대를 구경했다.
“이얍!”
셰비언이 긴 장대를 빠르게 걷어 올렸다. 그 끝엔 정말로 풍등 하나가 대롱대롱 걸려 있었다. 참 못생긴 꽃과 용이 그려진 풍등이었다.
오드리는 그게 아까 자신이 그림을 그렸다가 공방에 버려두고 나왔던 풍등이라는 걸 알아보고 어이가 없어 입을 떡 벌렸다.
“분명 안 챙겼는데, 이게 왜 여기에 있어?”
수확물(?)을 거둔 셰비언이 풍등을 거꾸로 들고 탁탁 털었다. 그러자 그 안에서 다알리아 꽃송이가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흰색, 노란색, 빨간색, 검은색 바탕에 노란 점이 있는 것……. 별빛 고래에 앉은 오드리 주변이 갖가지 색의 다알리아로 가득 찼다.
머리 위 하늘엔 달과 별, 치맛자락과 발치엔 다알리아 꽃송이와 별빛, 바로 옆에서 두둥실 떠가는 수십, 수백 개의 풍등……. 꿈처럼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셰비언은 오드리가 무슨 말을 할까, 혹시 감동받았을까 기대했지만 돌아온 건 분위기를 홀랑 깨는 걱정이었다.
“이렇게까지 마법을 많이 써도 돼?”
“오드리, 내가 아직도 마법 서너 번 쓰고 며칠씩 드러눕는 다른 마법사들처럼 보이나요? 이쯤은 아무 것도 아니에요. 정말 힘든 일이었으면 시도도 안 했을걸요.”
“하긴 그렇겠지……. 응, 늦었지만 정말 예뻐. 내가 동화책의 삽화 주인공이 된 것 같아.”
솔직해진 오드리는 굉장히 귀여웠다. 셰비언은 아직도 빨간 입술에 살짝 입을 맞추고는, 맛없는 연지를 핥아먹는 동안 몰래 가면의 끈을 풀어버렸다. 오드리가 깜짝 놀라 그를 밀어냈다. 가면이 벗겨졌어!
“내가 푼 거예요.”
“왜?”
“오드리의 온전한 얼굴이 보고 싶어서요.”
셰비언이 봄바람처럼 웃었다. 오드리는 또 화끈거리는 뺨에 가면을 갖다 대고 열기를 식혔다. 아까부터 얼굴의 홍조가 영 조절이 되질 않으니 곤란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호기롭게 셰비언에게 손을 뻗었다.
“얼굴은 나도 보고 싶어. 셰비언, 가만히 있어봐.”
오드리가 얼굴을 보겠다는데 셰비언이 거절할 리가 있나. 오드리는 손쉽게 셰비언의 가면을 벗기고 그의 맨얼굴을 마주했다. 살짝 붉은 것 같기도 하고, 약간 긴장한 것 같기도 한 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낯선 표정에 오드리조차 조금 놀랐다.
“셰비언? 왜 그렇게 긴장했어? 별빛 고래 다루는 게 힘들어서 그래?”
“크흠, 흠. 그런 게 아니라……. 으음.”
셰비언의 시선이 갈 곳을 찾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는 오드리의 시선에 어쩔 줄을 모르고 안절부절못하는 이상한 모습을 보이더니, 갑자기 뭔가 결심한 듯 자세를 고쳤다.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것이다.
“어……. 셰비언?”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오드리의 목소리가 떨렸다. 오늘 낮에 마차에서 카프러스도 똑같은 자세로 신발을 갈아 신겨 줬지만, 그때는 이렇게 가슴이 뛰지 않았다. 도저히 피할 수 없는 무언가가 코앞에 닥친 것처럼 무섭지도 않았다.
“오드리.”
셰비언이 고개를 똑바로 들고 오드리와 시선을 맞췄다. 그가 허공에 가볍게 손을 젓자 작고 네모난 상자가 나타났다. 인간들은 청혼할 때 반지를 준다기에 그에 맞춰 준비한 것이다.
“오드리가 지금 당장은 결혼하기 싫어하는 거 알아요. 약혼도 부담스러워하는 것도 알고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욕심을 부리고 싶어요.”
“…….”
“나 셰비언이 오드리의 유일하고 정당한 짝이라고 사방에 말하고 싶어요.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오드리를 지키고 싶어요. 오드리가 내게 끈을 매어줬으면 좋겠어요.”
“…….”
“오드리, 부디 나와 결혼해 주세요.”
셰비언은 오드리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는 걸 보았다. 매끈하던 미간에 주름이 잡혔고, 고민스럽다는 듯 신음성을 흘렸다. 긴 속눈썹이 나비의 날개처럼 팔랑거렸다.
‘뭔가 말을 더 해야 했던 걸까?’
하도 긴장을 한 탓에 목은 바짝 말라 타들어가고 팔은 벌써 뻣뻣해져 자꾸 떨렸다. 숨 한 번 쉴 때마다 백 년의 시간이 흐르는 것만 같았다.
한참 침묵하던 오드리가 반지 상자를 가져갔다. 하지만 열지는 않고 그저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반지 상자가 그녀의 손에서 구를 때마다 셰비언의 심장도 함께 굴렀다. 오드리가 표정 없는 얼굴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이 안 갔다.
‘망했나? 나 진짜 망한 건가?’
셰비언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 오드리는 오드리대로 심경이 복잡했다. 셰비언이 반지 상자를 내밀었을 때, 오드리의 머릿속은 하얗게 비었다. 당장 집어 들지 않은 건 단지 너무 놀랐기 때문이었다.
‘어쩐지, 한두 명이 도와준 게 아니더라니……. 작정하고 나왔구나.’
지금 내가 보는 게 꿈은 아닌가 의심하며 반지 상자를 집어 들고 나자 다른 생각들이 퐁퐁 떠올랐다.
작위 수여를 눈앞에 둔 지금, 셰비언의 청혼을 받아들여도 괜찮은가? 셰비언과 약혼하는 것이 만탈락의 소유권 이전에 뭔가 영향을 끼치지는 않을까? 그거 아직 처리가 안 끝났을 텐데. 조만간 로렐라이의 주인이 자신임을 밝힐 생각인데 혹시 모든 공이 내가 아니라 그에게 집중되면 어쩌지? 과연 셰비언의 이름값은 작위를 가진 미혼 여성이 가진 유리함을 뛰어넘을…….
이마와 뺨에 닿는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자 셰비언과 눈이 마주쳤다. 순간 숨이 막혔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반지 상자를 쥔 손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손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나는 로렐라이의 주인이야. 데멘사의 주인이고, 만탈락의 주인이며, 랄리우스 후작위의 주인이야. 소유물에 휘둘리는 주인은 없어!’
목표물을 향해 달려온 시간과 일궈온 결과물이 아무리 아깝다고 한들, 그게 자기 자신보다 중요하진 않다. 그 목표물이라는 것도 스스로를 위한 수단이고 도구라는 걸 잊어선 안 된다. 도구는 어디까지 도구일 뿐이니, 도구에 휘둘려 중심을 착각하면 남는 건 후회뿐이라는 걸 이미 경험하지 않았던가.
‘셰비언. 나는…….’
달콤하게 사랑을 속삭이고, 순진하게 영원을 말하며, 기적 같은 운명을 믿고 싶게 만드는 남자.
습관처럼 주판을 튕기던 머리가 계산을 멈췄다. 자신이 처한 상황이며 재고 따지던 조건 따위는 새카맣게 잊혔다. 그저 눈앞의 사람을 갖고 싶었다. 그를 제 옆에 꼭 붙들어 앉히고 자신만 바라보게 하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이 솟아올랐다.
스스로 날개를 접고 묶여서 옆에 머물겠다는 용을 굳이 쫓아 보낼 이유 따위는 어디에서 찾을 수 없었다. 텅 빈 공터를 마주했을 때의 아득한 절망감을 다시 반복하는 건 사양이었다. 이대로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면 됐다.
하지만…….
“셰비언. 이거 반지지?”
“네? 네.”
“내가 그대의 청혼을 받아들이기 전에 확실히 해둬야 할 게 있어.”
말을 많이 한 것도 아닌데, 오드리의 목소리는 잔뜩 잠겨 있었다. 몇 마디만 더 하면 바로 쉬어버릴 것 같았다. 표정도 어두웠다.
셰비언은 심장이 갈비뼈를 부술 것 같다는 관용어구가 사실은 굉장히 노골적이고 단순한 표현이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예전에 내가 했던 말을 바꿔야겠어.”
“어떤…….”
“내가 죽고 나면 새로운 사랑을 만나라고 했던 거, 취소해야 할 것 같아.”
“…….”
“아무리 생각해도 안 되겠어. 나 죽었다고 나랑 나눠 꼈던 반지를 빼고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는 그대를 상상하니까 피가 거꾸로 흐를 것 같아.”
“그럴 일 없어요. 말했잖아요, 내 사랑은 한 번으로 충분해요.”
셰비언이 다급히 대답했다. 오드리가 배시시 웃었지만 지극히 짧은 미소였다.
“인간의 시간은 용에 비해 터무니없이 짧아.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따라잡을 수 없지. 난 곧 늙고 약해지고 병들고 용모도 추해질 거야……. 그래도 그대가 나만을 봐준다면, 그러겠다 약속을 해준다면 이 반지를 받고 싶어.”
“…….”
“셰비언……. 그대가 그 부분을 생각 안 해 봤다면 이건 못 받아. 인간의 젊은 시절은 너무 짧거든. 얼렁뚱땅 넘어가면 그대에게 너무 손해잖아.”
오드리는 셰비언의 표정을 보는 게 무서워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다시 생각해 봐야겠다고, 알려줘서 고맙다는 말을 들을까 봐 겁이 났다. 세상에 무서운 것 없던 천방지축이 소심한 소녀가 되었다. 반지 상자를 꽉 움켜쥔 손에 땀이 잔뜩 고였다.
그랬기에 셰비언이 문장을 띄운 손을 내밀었을 때, 얼른 그 의미를 알아채지 못하고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오드리, 내 손 좀 잡아줄래요?”
“손……?”
셰비언이 직접 오드리의 왼손을 잡고 문장을 띄운 자신의 오른손에 겹쳤다. 서늘하고 차가운 마력이 오드리의 손등을 파고들었다.
“마법의 주인, 셰비언 절벽의 관리자, 셰비언의 일생에서 유일한 사랑이 바로 그대일 것을 맹세합니다.”
오드리가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랄리우스가 모아온 고서를 섭렵한 그녀는 마법사가 문장을 띄우고 하는 맹세가 얼마나 위험하고 무거운 건지 잘 알고 있었다. 마법을 다루는 재능 그 자체를 담보로 걸고 하는 짓이었다.
“하지 마!”
“만약 이를 어길 시, 시간은 나의 적이 되고 마법은 나를 버릴 것이며…….”
“셰비언, 그만하라니까!”
“살아서도 죽어서도 평안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말이 통하지 않자 황급히 손을 빼려 했지만, 셰비언이 워낙 단단히 잡고 있어서 그럴 수가 없었다. 덕분에 오드리는 문장이 재조립되고 맹세가 성립되는 걸 뻔히 봐야만 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기쁘거나 감격해서가 아니라 너무 화가 나서.
맹세를 마친 셰비언은 좋다고 생글생글 웃으며 어서 반지 상자 열어보라 재촉하는데, 정작 맹세를 받은 오드리는 자신이 이대로 기절하지 않는 게 이상해서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머리뚜껑을 열면 김이 펄펄 날 것 같은데 어떻게 이렇게 멀쩡하단 말인가.
“이게 뭐야! 누가 문장씩이나 걸고 맹세하래? 그냥, 그냥…… 말로만 해도 되는 거잖아!”
“말로만 하라니요? 맹세는 당연히 문장을 띄우고 하는 거예요.”
“셰비언!”
오드리는 벌떡 일어나려고 했다. 셰비언이 갑자기 다가와 어깨를 끌어안지만 않았어도, 정말로 그랬을 것이다. 코끝에 스치는 향기와 서늘한 체온을 자각한 순간, 몸이 덜컥 멈췄다.
“운명이라고 했잖아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화가 허무하게 녹아내렸다.
“봄이 아무리 짧다 한들, 그 아름다움을 부정하는 이가 있던가요?”
바짝 긴장했던 몸에서 힘이 풀렸다.
“오드리는 긴 겨울 끝에 만난 나의 봄이에요. 우리는 함께 여름을 지낼 거예요.”
다정하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웃음기가 어렸다.
“이거야말로 운명인데 맹세가 대수인가요?”
눈앞이 흐려졌다. 고개를 치켜들었다. 별빛 고래 주변을 떠다니는 풍등과 잔뜩 부푼 돛, 이슬비처럼 떨어지는 별빛들이 잠깐 선명해지는가 싶더니 또 흐려졌다. 형태가 뭉그러지고 색만 남아 뒤섞였다. 코끝이 찡하게 울렸다.
“그저 짧은 계절이 지나가 버리기 전에 깨달아서 다행일 뿐이에요. 오드리는요?”
오드리는 대답 대신 셰비언의 등에 손을 둘러 그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녀의 심정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알아봐서 다행이었다. 그때 그냥 지나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었다.
그녀는 어린 짐승처럼 그의 어깨에 머리를 처박고 웅얼거렸다.
“하지만 이래서는 그대만 너무 손해를 보잖아. 내가 백 번을 맹세해도 그대와 같은 무게는 되지 않을 텐데…….”
“백 번이나 맹세할 필요가 뭐가 있죠? 한 번이면 족해요. 오드리는 그 한 번을 백 번으로 여기고 지킬 테니까.”
오드리는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자신이 대체 언제부터 셰비언에게 이런 믿음을 주는 사람이 되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짧은 인생 동안 거짓말은 수도 없이 해 봤고 약속도 실컷 어겨봤건만, 그리고 그걸 딱히 부끄럽게 여긴 적도 없건만, 셰비언에겐 도저히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셰비언이 조용해진 오드리를 품에서 떼어놓고 그녀의 눈가에 촘촘히 입을 맞췄다. 속눈썹에 매달려 있던 눈물이 셰비언의 입술에 닦여 사라졌다. 오드리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셰비언…….”
“설마 맹세만 받고 청혼은 거절하는 거 아니죠?”
책망하는 말투에 장난기가 배어 있다. 민망해진 오드리는 몇 번이나 헛손질을 해가며 상자를 열었다.
피처럼 새빨간 보석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영롱한 붉은색이며 광채가 심상치가 않은데, 어째 루비 같지는 않았다. 반지의 몸체도 소재가 기이하긴 마찬가지였다. 언뜻 봐서는 은 같은데, 손으로 만져 보니 솜털이 쭈뼛 설 정도로 싸늘한 기운이 흘렀다.
특이한 소재를 제외하고 보면 몹시 단순한 디자인의 반지였다. 여성용 반지치고는 조금 두껍다 싶은 은빛 몸체에 붉은 보석이 하나 박혀 있을 뿐이니까. 하지만 바람을 형상화한 세공 장식이 보석을 감싸며 그 단순함을 매력으로 뒤바꾸었다.
셰비언이 반지를 오드리의 손가락에 끼웠다. 약간 헐렁한 듯했지만, 끝까지 밀어 넣자 딱 맞아 들어갔다. 오드리는 늘 비워두었던 손가락을 채운 반지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마음에 들어요?”
“응……. 내가 어떤 차림을 해도 잘 어울릴 것 같아. 어디의 누구에게 맡긴 거지?”
“내가 만들어준 다알리아 머리핀을 머리에 달고 다니면서 세공 장인을 찾아요? 당연히 내가 만든 거예요.”
“아.”
오드리는 붉어진 얼굴로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겨우 반지 하나일 뿐인데, 낯선 무게감과 존재감이 상상 이상으로 컸다. 끼기 전에는 소름 끼치도록 차갑던 것도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랬구나……. 엄청 예뻐. 아주 마음에 들어. 정말, 정말로…….”
“그렇게 기뻐하다니, 만든 보람이 있는걸요. 오드리, 신기한 걸 보여줄 테니 손 좀 들어볼래요?”
셰비언이 끌어들인 풍등의 빛이 반지의 붉은 보석을 비추자, 보석의 안쪽에서 화려한 눈꽃문양이 떠올랐다. 사방으로 뻗어나간 가느다란 가지가 빛을 품고 하얗게 반짝였다.
“세상에……! 이런 건 들어본 적도 없어!”
“오드리에겐 세상에 딱 하나만 있는 걸 주고 싶었어요.”
경탄하는 오드리를 보는 셰비언의 얼굴에 만족감이 어렸다. 로렐라이의 주인으로서 온갖 신기하고 귀한 물건을 다 접해본 오드리를 저리 놀라게 하다니,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
“꼭 끼고 다녀야 해요.”
“그럼, 당연하지. 절대 빼지 않을게.”
굳게 약속하는 오드리의 뺨이 붉었다. 그녀는 보석 안에 떠오른 눈꽃이 너무나 마음에 든 나머지 반지의 소재가 뭔지 물어볼 생각 같은 건 깨끗하게 잊어버렸다.
“오드리, 나 아직도 대답 못 들었어요. 나랑 결혼해 줄 거예요?”
“반지 낀 걸로는 대답이 안 돼? 당연히 좋지!”
셰비언이 오드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오드리가 웃음을 터뜨리며 그의 가슴에 머리를 묻었다. 셰비언은 오드리의 정수리에 키스의 비를 뿌리며 다시 한번 당부했다.
“반지, 절대 빼지 말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