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9. 대화의 중요성
「진정한 대도(大盜)는 미래를 훔쳐야 한다. - 대도(大盜) 로렐라이」
브란젤은 지독한 인구밀도 때문에 고층 밀집거주시설이 흔한 도시였다. 적당한 정원이 딸린 주택은 크기에 상관없이 상당히 가격이 나갔다. 웬만한 서민은 평생을 모아도 정원 딸린 집을 구입하기 어려웠다. 닭장 같은 작은 집에서 월세를 내며 사는 게 보통의 브란젤 서민이었다.
하물며 아이샤는 왕궁마법사였다. 일은 많은데 월급은 그저 그런 마법사와 엇비슷하다는 왕궁마법사. 당연히 왕궁마법사를 그만두는 날까지 왕궁마법사 숙소에서 지내게 될 줄 알았건만, 스크롤과 레펙치오 판매 수수료가 그녀의 손에 떨어지기 시작하자 얘기가 달라졌다.
아이샤는 그동안 악착같이 모아온 돈과 새로 벌어들인 돈을 합쳐 집을 구입했다. 조금 외곽에 있긴 해도 정갈한 정원이 예쁘고 저택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건물이 큰 집이었다. 비록 대형 살인 사건이 난 데다 불에 타기까지 한 전력이 있긴 하지만, 덕분에 터무니없이 값이 쌌다. 살해당한 사람들이 귀신이 되어 나온다나 뭐라나.
평소 영혼의 존재는 믿어도 귀신은 믿지 않는 아이샤이기에, 그녀는 그런 소문은 다 사람들의 입방아에 불과하다며 코웃음을 치며 넘겨 버렸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소문에 조금은 귀를 기울였어야 한다는 후회가 들었다. 그랬다면, 그래서 집을 빨리 사지 않고 숙소에서 버텼다면 이런 꼴을 안 봤을 텐데.
‘내가 회식에서 술을 너무 마셨나? 눈 뜨고 꿈이라도 꾸는 건가?’
새하얀 용이 저택의 거실을 죄다 차지하고 웅크려 자고 있었다. 용이 숨을 쉴 때마다 은빛 갈기털이 천장의 샹들리에를 스쳤고, 어쩌다 움찔거리기라도 하면 비늘이 닿은 모서리의 벽지가 벗겨졌다.
천장이 높은 데다 아직 가구를 채워놓지 않아 거대한 공동 같던 거실이 이렇게 좁아 보이는 날이 올 줄은, 정말이지 꿈에도 몰랐다. 본래 몸집의 절반도 되지 않는 작은 크기라는 걸 아는데도 압박감이 어마어마했다.
“셰비언님?”
제발 대답하지 마라. 그냥 환상이어라. 꿈이어라. 제발!
간절한 바람을 담아 불렀는데, 동그랗게 몸을 말고 자는 고양이처럼 있던 용이 반짝 눈을 떴다. 얼음 낀 강처럼 옅은 하늘색 눈동자가 아이샤를 비췄다. 아이샤는 눈물이라도 흘리고픈 심정이 되고 말았다.
“왜 내 집에서 이 꼴로 있는 거예요?”
“잠깐만…… 쉴게…….”
“쉴 거면 인간 모습으로! 레이디 오드리의 집에서 쉬어요!”
셰비언이 귀찮다는 듯 눈을 감았다. 긴 꼬리가 바닥을 불만스럽게 두드렸다. 반질반질하게 새로 깔아놓은 대리석 타일 모서리가 부스러지는 걸 본 아이샤가 대경실색했다.
“레이디 오드리께 연락할 거예요!”
“해 봐.”
셰비언이 아이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까맣던 동공은 우유처럼 새하얘졌고, 숨소리 섞여 부드럽던 음색은 강철처럼 단단하고 차가워졌다.
아이샤의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묵직한 압박감이 어깨와 가슴을 마구 눌러댔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숨을 쉴 때마다 폐 속의 공기가 모조리 빠져나가는 것만 같은 통증이 밀려왔다. 그녀는 술기운을 빌어 마지막 한 줌 남은 용기를 모조리 끌어 모아 소리를 질렀다.
“아, 안 해요, 안 한다고요! 제 몸에 흐르는 마력에 맹세코, 안 해요!”
“잘 생각했어.”
압박감이 씻은 듯 사라졌다. 아이샤는 헐떡대면서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머리가 빙빙 돌았다.
“그, 그런데 셰비언님이 여, 여기 계시면 전 어, 어떡해요? 밖에서 자요?”
셰비언이 한심해하는 눈빛을 보냈다. 거실 말고 방 많은데 왜 밖 운운하느냐는 듯한 눈빛이었다. 아이샤는 몹시 억울해졌다.
“셰비언님이 여길 막고 계시니까 제가 방에 들어갈 수가 없잖아요. 창문은 죄다 안에서 잠가놨다고요.”
“쯧…….”
셰비언이 몸을 꿈지럭대며 자세를 바꿨다. 아이샤가 게걸음을 쳐야 간신히 통과할 만한 틈이 생겨났다. 그 틈이 곧바로 방으로 통하면 좋으련만, 2층으로 가는 계단으로 가려면 셰비언이 몇 번이나 더 움직여야 했다.
아이샤는 벽지가 계속 찢어지는 사태를 감내하느니 그냥 2층에 방을 정한 자신을 원망하기로 했다. 지금 거실을 점거하고 있는 저 생물은 천재지변이었다. 자신이 뭔가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됐어요. 지붕 있어서 밤이슬 안 맞고 문 있어서 도둑 안 맞으면 그만이지. 여기서 잘게요. 다행히 누울 자리 정도는 있네요.”
“마음대로 해.”
셰비언이 관심 없다는 듯 다시 눈을 감았다. 아이샤는 자기 집 현관에 마법사 로브를 깔고 드러누워 잠을 청했다. 제발 이 모든 게 내가 술에 취해 술주정을 한 거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당연히 아이샤의 소박한 소원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녀는 아침햇살을 맞으며 우아하게 빛나는 흰 용의 거체를 앞에 두고 좌절했다. 전날 밤에 진탕 퍼마신 술 때문에 머리가 지끈대는 건 별로 큰 문제도 아니었다.
“셰비언님……. 대체 여기서 뭐하는 거예요?”
“쉰다니까.”
그냥 한탄이었는데 쉰다면서 꼬박꼬박 대답은 잘 한다. 불신에 가득 찬 아이샤의 눈빛을 본 셰비언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아이샤가 온 정성을 다해 고른 커튼이 요란하게 펄럭거렸다.
“며칠이면 돼……. 둥지에 다녀와야 할 정도로…… 큰 부상은 아니라서 여기에 있는 거야.”
부상? 아이샤는 그제야 새하얀 몸 곳곳에 불그레한 상처가 있다는 걸 눈치챘다. 비늘이 벗겨져 여린 살이 고스란히 드러난 게 몹시 아파 보였다. 며칠 전 문턱에 발톱을 부딪쳐 펄쩍펄쩍 뛰었던 게 생각났다. 새삼 동정심이 일었다.
“화룡이 다시 나타난 건가요?”
“아니.”
“그럼 어쩌다 이런 상처를 입으신 건데요? 셰비언님을 해칠 수 있는 생물이 화룡 말고 또 있다니 믿어지지 않는데요.”
“인간.”
아이샤는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귀를 파고 다시 물었다. 하지만 셰비언의 대답은 역시 같았다. 인간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고.
“자세한 건…… 다 낫고 나면 얘기해 줄게. 어차피 인간 마법사는 다 알아야 하는…… 얘기니까. 지금은…… 힘들어……. 조금만…….”
셰비언은 띄엄띄엄 말을 잇다 그만 눈을 감았다. 축소하긴 했어도 본체는 본체라 하룻밤 새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아직도 길게 말하는 건 힘들었다. 목 안쪽에서 찝찔한 피 맛이 났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셰비언의 사정이고, 마법의 주인을 상처 입힌 원인이 인간이라는 충격적인 대답을 들은 아이샤에겐 셰비언이 다 나은 다음을 기다릴 인내심이 없었다.
아이샤는 손을 펼치고 문장을 띄웠다. 파도가 출렁거리는 푸른 바다의 수평선 위로 별이 총총 떠올랐다. 유독 밝게 빛나는 별에서 뻗어 나온 금빛 선이 별과 별을 이어 별자리를 만들었다. 폭발하듯 팽창한 문장이 주변을 모조리 집어삼켰다.
셰비언은 낯익은 감각에 눈을 떴다. 아침을 맞아 환하게 빛나던 집은 어디로 갔는지 없고, 주변은 온통 어둠뿐이었다. 손을 들어 확인해 보니 자신은 용의 모습이 아니라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가르쳐 준 적도 없는 의식 분리를 해내다니……. 아이샤, 기대 이상인걸.”
“마법의 주인에게서 그만큼 배웠는데 이 정도는 해내야죠.”
“하지만 아직 어설퍼. 감각이 불완전하군. 촉각, 청각, 시각……. 그 외에도 전부 다. 보아하니 원하는 심상을 구현하는 것도 어려운가 보지? 자기 자신조차 만들어내지 못하다니. 이래서 공간은 언제 만들어?”
“차차 나아지겠죠. 타인을 끌어들일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엄청난 발전이에요. 셰비언님, 제 집중력이 깨지기 전에 사정을 설명해 주세요. 인간 마법사는 다 알아야 하는 얘기라니 뭔가 심상치가 않은데, 제가 듣자마자 곧장 왕궁마법사장에게 가서…….”
“지금은 안 돼.”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셰비언의 발밑이 출렁거렸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아이샤의 감정이 널을 뛰면서 그에 반응한 것이다. 여러모로 어설퍼도 한참 어설픈 의식 분리였다.
“안 되지만……. 난 앞으로 나아가는 마법사를 좋아하지. 회복 마법을 가르쳐 줄 테니까 잘 배워서 써먹어 봐라. 혹시 알아? 네 마법 덕분에 내 회복이 빨라질지?”
“회복 마법이요? 왕비 전하의 레펙치오에만 걸려 있다는 그거요?”
“내가 빨리 나으면 사정도 빨리 듣게 될 거다.”
어둠 가운데에서 흰 빛줄기가 생겨나 회복마법 수식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의식 분리를 한 건 난데 어떻게 셰비언님이……. 어, 어어? 젠장, 이게 뭐야? 용이면 다야? 남의 의식에 대고 뭐하는 짓이에요 지금? 미쳤나 봐! 저기요? 환장하겠네! 당장 그만두지 못해? 이 미친 용새끼! 그만두라고!”
“마음의 소리 조절도 못하는군. 날 끌어들이는 데에 성공한 것만도 천운이야. 매번 느끼는 건데, 넌 되도 않는 실력을 믿고 너무 무모하게 덤비는 경향이 있어.”
“미친놈아아아악!”
“감당 못할 상대를 의식 세계에 끌어들였다간 이런 일을 당할 수도 있다는 거 몰랐나? 오늘의 일을 교훈으로 삼고 다신 이런 멍청한 짓을 하지 말도록.”
“내가 미쳐도 신경도 안 쓸 거면서 이게 뭔 짓이야아악!”
“이게 다 제자를 아끼는 스승의 마음으로 베푸는 거다.”
“용은 제자 안 둔다며! 한 입으로 두말하는 새끼야! 꺄아아아악! 나 죽는다!”
셰비언은 비명을 질러대는 아이샤를 내버려 두고 의식 세계에서 빠져나왔다. 현실의 아이샤는 텅 빈 눈을 하고 셰비언의 앞에 서 있었는데, 그가 새겨 넣은 회복마법 수식이 그녀의 주변을 빙빙 맴돌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아이샤를 잡아먹을 것처럼 수식의 기세가 흉흉했다.
‘이겨내면 회복 마법사가 되는 거고……. 못하면……. 음……. 어떻게든 하겠지.’
잠재의식에 강제로 마법을 새겨 넣는 거친 방식이라 위험도가 높긴 하지만, 일단 이겨내기만 하면 단시간에 강력한 마법을 쓸 수 있게 된다. 좋은 의도로 쓰이는 일이 거의 없었던 방식이라는 건 잠들기 직전에야 생각났지만, 어쩌겠는가. 벌써 저질러 버렸는걸. 새겨 넣은 마법이 회복마법이라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이샤는 정오가 다 되어서야 깨어났다. 그녀는 자신이 햇빛을 받으며 서 있다는 걸 깨닫자마자 눈물을 펑펑 흘려가며 울었다. 그리고 눈물이 마르기도 전에 셰비언에게 달려들어 발길질을 했다.
“익! 이이익!”
연약한 마법사의 몸으로 용을 걷어차 봤자 무슨 타격이 있겠는가. 셰비언은 아이샤의 기척을 느끼자마자 잠에서 깼지만, 양심상 적당히 밟혀준 다음에야 눈을 떴다. 아이샤를 살펴보니 사지 멀쩡하고 마력도 괜찮아 보였다. 눈에 이지(理智)도 살아 있었다.
“멀쩡하네.”
“와, 말하는 본새 봐! 전 진짜 죽는 줄 알았거든요? 최소한 미치기라도 할 줄 알았어요!”
“그러게 어설픈…… 의식 분리 따위…… 시도하지 말았어야지. 회복마법 써봐.”
“누가 이런 일을 당할 줄 알았나요? 의식 분리 자체가 거의 사장된 기술인데! 그보다 셰비언 님, 솔직히 말해보세요. 그거 가르치는 게 아니라 고문할 때나 쓰는 거죠? 맞죠? 회복마법이 아니라 공격마법이나 정신계마법이었으면 전 지금쯤 죽어서 바닥에 널브러져 있을 게 아주 확실하거든요?”
쉴 새 없이 투덜대는 아이샤의 손끝에서 새하얀 눈송이가 피어났다. 그녀가 셰비언의 상처 부근에 눈송이를 가져다 대자 붉은 기가 조금 가셨다.
“오!”
아이샤의 목소리가 확 높아졌다.
“세상에, 이게 바로 옛 마법이군요? 세상에, 세상에!”
오전 내내 고생했던 건 까맣게 잊어버린 듯, 아이샤의 눈에서 기쁨이 흘러넘쳤다. 그녀는 셰비언이 시키기도 전에 다음 눈송이를 피워내 셰비언의 상처를 돌보았다. 계절에 안 맞는 흰 눈송이가 집 안에서 흩날렸다.
“누가 들으면 내가 옛 마법을 처음 가르쳐 준 줄 알겠어.”
“흥, 파괴마법을 어디다 써먹어요? 그래도 옛 마법이고 가르쳐 주니까 배우긴 했지만 영 써먹을 곳 없는 마법이라 솔직히 별로였어요.”
“왜 쓸 곳이 없어? 인간들은 지금도 전쟁 중이잖아.”
“전쟁터에 제 발로 기어들어가기엔 제가 아직 덜 미쳐서요. 그렇게 궁색하지도 않고요. 아으, 근데 이거 왜 이렇게 힘들죠? 회복이 파괴보다 서너 배는 더 힘드네!”
아이샤는 이마를 흠뻑 적신 땀을 닦아내며 투덜거렸다. 연달아 서너 번까지는 괜찮았는데, 그 이상을 넘어가니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손이 덜덜 떨리고 속이 메슥거렸다. 바늘이 명치를 쿡쿡 찌르는 것만 같은 통증이 일었다. 거기에 잠까지 쏟아져서 눈이 막 감겼다.
“밥도 안 먹고 마법 써서 이런가?”
“아니, 그냥 마법이 안 맞는 거다. 본래 인어의 본질은 파괴에 가까워. 파괴마법을 쓰는 게 훨씬 쉬운 게 당연해.”
“인어의 마력을 대량으로 타고나서 좋다고 생각했는데……. 뭐, 좋은 점이 있으면 나쁜 점도 있는 게 세상사죠. 근데 도저히 안 되겠다. 한숨 자야겠어요.”
셰비언이 말릴 틈도 없었다. 치료를 하겠답시고 셰비언의 본체를 타고 등산을 하던 아이샤는 그의 갈기털에 머리를 파묻은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곤히 자는 잠에는 전염력이라도 있는지, 셰비언에게도 졸음이 몰려왔다. 아이샤의 회복마법 덕에 통증이 한층 가셔서 몸이 나른하기도 했다. 느릿하게 깜빡거리던 눈꺼풀이 굳게 닫혔다.
그렇게 황금빛 햇살과 먼지만 떠다니는 정적 속에서 평화롭게 잠든 둘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게 있었다. 바로 비니타의 존재였다.
비니타는 아이샤와는 달리 입막음 따위를 당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아침수련을 하다 셰비언의 마력을 느끼자마자 곧장 오드리에게 그의 위치를 알렸다. 사탕 다섯 개와 이마 키스 한 번으로 이뤄진 거래가 성과를 발휘하는 순간이었다.
* * *
오드리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진지하게 의심했다. 업무에 너무 시달린 나머지 훤한 대낮부터 헛것을 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아무리 팔뚝을 꼬집어봐도 눈앞의 광경은 변하질 않았다.
넓은 거실을 꽉 채운 채 웅크려 잠든 흰 용, 그리고 그 용의 갈기털에 파묻혀 자고 있는 여자.
‘셰비언과 아이샤.’
둥지에서 몇 달을 함께 지냈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안다. 뒤통수만 봐도 아이샤였다. 픽 웃음이 났다.
‘아이샤, 소원 성취했네.’
오드리가 셰비언의 본체에 파묻혀 잠들 때마다 아이샤가 얼마나 부러워했던가. 인간 모습일 때는 그래도 괜찮은데, 용의 본체를 볼 때면 자신도 모르게 심장이 오그라들고 등에서 땀이 난다며 발을 굴렀었다. 마법의 주인을 똑바로 보고 싶은데 그게 참 어렵다고 아쉬워했었다.
비록 브란젤에 돌아와 레펙치오 제작에 투입되고 나서는 이렇게 고생할 줄 알았으면 그때 눈 딱 감고 꼬랑지라도 한번 밟아볼 걸 그랬다고 땅을 치는 걸로 방향이 바뀌었지만 말이다. 아플 때가 아니면 자신이 용의 몸을 건드려 볼 수나 있겠느냐는 게 그녀의 한탄이었다.
한데 용이 제 집에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고 기어이 기어 올라가다니, 박수라도 쳐 주고 싶을 정도의 정신력이었다. 입으로는 셰비언을 욕하고 일이 많다 마구 불평을 쏟아내면서도 누구보다 열심히 그의 뒷모습을 좇던 마법사인 걸 알아서 그런지 화도 안 났다.
오드리의 평정을 뒤흔드는 건 셰비언이었다.
그가 갑자기 곁을 비웠을 땐 황당했고, 달튼 제도 봉쇄라는 사태를 맞닥뜨렸을 땐 화가 났다. 그 외에도 자신에게 말하지 않은 것들이 얼마나 많을까 생각하자 분노에 서운함이 추가됐다. 그러나 그건 그의 부재가 길어지자 걱정으로 변했다.
혹시 샤를레아 말고도 살아남은 용이 더 있어서 그에게 종족의 멸망에 대한 책임을 물은 건 아닐까.
혹시 자신에게 숨겼던 부상이 악화돼서 남몰래 치유하고 있는 건 아닐까.
혹시 인간 사회에 맞춰주며 사는 게 지겨워져서 그대로 떠난 건 아닐까.
그가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악몽이 되어 잠자리를 찾아든 지가 벌써 며칠이라, 소용없을 거라 생각하면서도 비니타에게 마력 감지를 부탁했었다.
한데 기대하지 않았던 연락을 받고 생각지도 못했던 장소를 찾아왔다가 상상도 못 했던 광경을 맞닥뜨렸다.
‘셰비언……. 그대는 왜 이런 모습을 하고 있는 거지?’
오드리는 셰비언의 본체가 얼마나 큰지 알고 있었다. 손이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서는 실체를 한눈에 담을 수 없어 그저 비늘무늬가 새겨진 흰 벽처럼 보이곤 했었다. 손바닥만 한 비늘이 규칙적으로 늘어선 모양이 신기해서 종일 들여다보며 소일한 기억이 생생했다.
갈기털에도 추억이 있었다. 머리부터 꼬리 끝까지 이어진 갈기털은 최고급 비단실처럼 매끄럽고 탄력이 있었다. 사람의 머리칼이나 말총과는 느낌이 완전히 달라서 만지는 재미가 있었다. 틈이 날 때마다 손가락 장난을 하고 놀았었다.
때때로 거대한 저택이나 작은 동산이 움직이는 듯 느껴지곤 했던 용이 이렇게 작아지다니, 보면서도 믿을 수 없었다.
‘왜 여기에 있어?’
그저 단순히 본체로 쉬고 싶었을 뿐이라면 헨젤 저택의 정원에도 좋은 장소가 있었다. 서관 옆의 숲 가운데에 조성된 작은 공터는 이렇게 작아진 용이 잠시 머물기에 완벽한 장소였다. 적어도 이 거실보단 면적이 넓었고 좁다 싶으면 나무 몇 그루 베어내면 그만이었다.
어차피 셰비언이 용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브란젤에 없고, 그가 아르젠 남작으로서 헨젤 백작가에 머물고 있다는 것도 유명한 사실이었다. 새삼 용의 모습으로 저택의 숲에서 쉰다고 해서 놀라워할 사람은 없었다.
꼭 실내를 고집해야겠다면 오드리가 따로 구입한 저택도 있었다. 기분 전환을 위해, 그리고 중요한 서류를 보관하기 위해 마련한 곳이었다. 가구를 거의 들이지 않은 것도, 상주하는 고용인이 없는 것도 이 집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셰비언은 헨젤 저택도, 오드리가 따로 구입한 저택도 선택하지 않았다. 그는 아이샤의 거실을 차지했다. 마음만 먹으면 수백 수천의 눈을 피하는 것 따위 아무것도 아닐 이가, 굳이.
‘왜 내게 오지 않았어?’
비니타의 연락은 아침 일찍 받았지만 오드리가 헨젤 백작저를 나선 시간은 정오가 넘어서였다.
돌아왔다니 다행이다, 브란젤이라니 다행이다. 얼굴을 보면 무슨 말을 할까, 어디에서 뭘 했나 물어볼까 말까, 다음에 또 자리를 비울 땐 꼭 수시로 연락을 하라고 해도 괜찮겠지, 그런 고민을 걱정이 쌓였던 자리에 대신 쌓았다. 곧 자신을 찾아오리라 기대하며 오전 내내 기다렸다.
한데 설마 기다림에 지쳐 나선 끝에 보게 된 것이 평화롭게 잠든 용과 마법사일 줄은 몰랐다. 기껏해야 아이샤에게 새 마법을 가르치다가 시간을 까먹은 셰비언을 보게 될 줄 알았는데.
“으음…….”
셰비언이 잠투정이라도 하는 것처럼 몸을 들썩였다. 나름 안정적인 자세로 갈기털에 파묻혀 있던 아이샤가 주르르 미끄러져 셰비언의 품 안으로 떨어졌다. 아이샤는 몇 번 뒤척거리더니 이내 편하게 자세를 잡았다. 셰비언의 둥지에서 오드리가 그랬듯이.
오드리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억지웃음을 지을 여력조차 사라지고 나자 다리에서 힘이 쭉 빠졌다. 오드리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현관 바닥에 깔려 있던 왕궁마법사 로브가 한쪽으로 밀려났다.
큰 창문에서 들어온 풍성한 햇빛이 용의 비늘에 부딪쳐 부서졌다. 빛이 너무 강해 눈이 시렸다. 눈물이 뺨을 타고 굴러 떨어졌다.
“아, 왜 이래…….”
손등이 축축해지고 나서야 얼굴이 눈물로 흥건하다는 걸 알았다. 오드리는 허겁지겁 얼굴을 닦아냈다. 깨끗하던 손수건은 멍을 가렸던 화장이 묻고 눈물에 젖어 금세 지저분해졌다. 짜증이 났다.
“이게 무슨 남편 외도 현장 발견한 아내도 아니고……. 꼴사납게…….”
셰비언은 친분 있는 마법사의 집에서 본체 크기를 줄이고 한숨 잠든 것뿐이고, 그가 거실을 죄다 차지한 탓에 집 안에서 이동이 불가능해진 아이샤가 갈기털에 신세를 좀 지는 거다. 겨우 그것뿐이다.
오드리는 몇 번이고 그리 속삭이며 자신을 달랬지만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도리어 그 속삭임이 단단한 응어리가 되어 가슴을 눌렀다. 안 좋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자신도 모르게 가슴을 쥐어뜯었다. 허억, 숨이 막혔다.
“아가씨!”
밖에 있으라고 했는데 기어이 들어온 카프러스가 오드리를 안아 들고 현관 밖으로 옮겼다. 나뭇잎이 빨갛고 노랗게 물든 나무 아래에 그녀를 앉혀놓고 어색하게 등을 쓸었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내가 괜찮지 못할 게 뭐가 있어서?”
걱정해 주는 걸 알면서도 뾰족하게 가시 돋친 말이 튀어나왔다. 실수했다, 생각하면서도 입을 떼기조차 싫어 그냥 눈을 감았다.
“용을 코앞에서 보셨잖습니까. 음, 제가 기억하는 것보단 좀 작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한 압박감이었습니다. 문 밖에 있던 제가 그런데 아가씨는 오죽하셨겠습니까.”
“…….”
“숨은 잘 쉬어지십니까? 갑갑하거나 어지럽거나 한 건 없으십니까?”
무뚝뚝한 말투 속에 꼬깃꼬깃 접어둔 다정함이 오드리를 감쌌다. 오드리는 어쩐지 얼굴이 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괜찮아요. 예전에 말했잖아요? 난 용의 마력을 타고나서 용의 본체를 가까이 하더라도 어떤 영향도 받지 않는다고요.”
“그랬습니까? 제가 우둔해서 잊어버렸나 봅니다. 죄송합니다.”
카프러스가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칼질만 잘해서는 기사가 될 수 없다는 걸 증명하는 듯한 능청스러움이었다.
“웃으시니까 보기 좋습니다.”
오드리는 제 입가를 더듬었다. 입꼬리가 올라간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내가…… 웃었나요?”
“그러고 보니 요즘 아가씨는 너무 서류에 파묻혀 계셨습니다. 이왕 나온 거, 소풍 나왔다 생각하시고 편히 쉬다 가시죠. 마법사의 집이지만 정원이 나름 괜찮군요.”
“베텔 경, 내가…….”
“단풍이 예쁘게 들었습니다. 하늘은 파랗고 구름도 적군요. 바람도 선선하니 좋습니다.”
“내 말이 안 들리나 봐요?”
기가 막힌 오드리가 따지고 묻는데도 카프러스는 전혀 들은 체를 하지 않았다. 그가 어깨에서 망토를 끌러 오드리에게 둘러주었다.
“그래도 가을 날씨를 우습게보면 안 됩니다. 방심하면 감기에 걸리기 십상입니다.”
“…….”
“한숨 주무시지요. 제가 옆에서 지키겠습니다.”
카프러스가 오드리에게 등을 보이고 서서 그녀에게 떨어지는 햇볕을 가로막았다. 늘어진 그림자가 그늘을 드리웠다. 오드리는 나무에 등을 기대고 망토를 추어올려 덮었다.
“이러고 주저앉아 있으면 안 되는데…….”
현관문을 다시 열 자신은 없고, 그렇다고 이대로 돌아가 일거리에 파묻히고 싶지도 않다. 처음 느껴보는 무기력이 몸을 바닥으로 잡아끌었다. 색색으로 물든 정원의 풍경이 조금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왜 내게 오지 않았을까?”
“남작에게도 나름 이유가 있을 겁니다.”
그냥 뱉은 말에 대답이 돌아왔다.
“막연한 짐작만으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
“남작이 일어나거든 직접 물어보시지요. 분명히 대답해 줄 겁니다.”
오드리는 조금 신기한 기분으로 카프러스의 등을 바라보았다. 카프러스가 이렇게 나서서 말하는 건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곁에 있다는 것조차 잊어버릴 정도로 말이 없어졌던 기사가 오늘은 웬일로 말이 많았다.
“대답 안 하면요?”
“다신 안 만날 거라고 하시면 됩니다. 아가씨는 약속을 지키는 분이니, 바로 실토할 겁니다.”
“뭐예요, 그게…….”
“사랑에 빠진 사내는 다 똑같습니다.”
바람에 팔랑팔랑 날아다니던 단풍잎이 카프러스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빨갛게 물든 색이 고왔다.
“용이든 인간이든, 결국 사내입니다. 사랑하는 여자가 내 곁을 떠나는 게 제일 무섭습니다. 그를 막을 수만 있다면 못 할 짓이 없죠.”
“거짓말을 할 수도 있잖아요.”
“아가씨가 진심으로 물으시면 남작도 진심으로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과연 기사님이네요. 하지만 진심엔 진심으로 답하는 게 세상이치면 세상에 사기꾼은 왜 있겠어요? 날 봐요, 난 진심에도 거짓말로 대답 잘해요.”
카프러스가 소리 없이 웃었다. 들썩거리는 어깨에서 단풍잎이 떨어졌다.
“글쎄요? 제가 보기에, 아가씨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아르젠 남작에게만은 늘 솔직하셨습니다.”
“경이 본 게 다가 아니에요. 나는…….”
“말은 입으로만 하는 게 아닙니다. 때로는 말보다 행동이 솔직한 순간이 있죠. 아가씨가 일거리를 죄다 하녀들 손에 미루고 지금 이 정원에 앉아 계신 것처럼 말입니다. 남작의 대답을 기다리고 계신 거잖습니까?”
자신도 몰랐던 속내를 들킨 오드리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일어나려 했지만, 카프러스가 어깨를 누르는 통에 그 자리에 도로 주저앉고 말았다. 가볍게 누르는 건데도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아르젠 남작은 아가씨를 사랑합니다. 아가씨도 그를 사랑하시죠. 두 분 모두가 진심이시고요. 아가씨, 인생에 이만 한 행운도 드뭅니다.”
“…….”
“부디 의심하기 전에 믿어주시고, 절망하기 전에 손을 내미시고, 미워하기 전에 마음을 다시 들여다보십시오. 두 분을 갈라놓거나 막을 수 있는 건 두 분 자신들뿐입니다.”
놀라울 정도로 다정한 말투였고 상냥한 충고였다. 오드리는 이제껏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어떤 가능성을 떠올렸다. 혹시 카프러스가 자신에게 마음을 둔 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 가능성은 떠오른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자취를 감췄다.
카프러스는 그림책에서 빠져나온 듯 기사다운 기사였다. 그가 그럴 리 없었다.
“혹시 그래도 아르젠 남작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거든 제게 말씀하십시오. 제가 흠씬 두드려 패서라도 진짜를 말하게 하지요.”
카프러스가 호기롭게 장담했다. 마치 말 안 듣는 말의 궁둥이를 대신 때려주겠다는 듯 가벼운 말투였다.
“셰비언은 용이에요. 마법은 말할 것도 없고, 요즘은 보티안 씨에게 체술도 배워서 많이 늘었는데…….”
“저는 아가씨의 기사입니다.”
그게 뭐? 오드리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카프러스가 개구쟁이 소년처럼 웃었다.
“남작이 아가씨를 사랑하는 한, 아가씨를 등에 업은 제가 더 세다는 얘깁니다. 용이 무슨 대수입니까? 아가씨가 제 편을 들어주실 텐데.”
“아하.”
“악용하지 않겠습니다. 그래야 용보다 센 기분을 계속 누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풋! 알겠어요. 경이 선을 넘지 않는 한, 경의 편을 들어줄게요.”
“이제야 제대로 웃으시는군요. 보기 좋습니다.”
“아까 한 말은 거짓말이었군요?”
카프러스는 배신감을 거침없이 표출하는 오드리의 시선을 피해 그녀에게서 등을 돌리고 섰다. 등이 따끔따끔했다.
“쉬었다 가실 걸로 알고 있겠습니다.”
옷자락을 정돈하느라 부스럭대는 소리가 대답 대신 들려왔다. 카프러스는 가을의 햇볕을 온 몸으로 맞으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피부를 태우는 햇살과 과실이 익어가는 달콤한 향내, 말라가는 풀잎이 바스락대는 소리와 고른 숨소리가 뒤섞인 가을이 아름다웠다.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야? 내 마법도구들은 죄다 고장 났나? 돈값을 못하고 사람을 들였네!”
그림자가 충분히 길어진 늦은 오후, 주린 배를 움켜쥐고 나온 아이샤는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 정원을 차지하고 있는 걸 발견하고 비명을 질렀다. 한데 미안해하는 게 마땅할 손님이 되레 아이샤를 나무랐다.
“아이샤 씨, 아가씨는 주무시는 중이니 조용히 해주시죠.”
“와……. 살인 사건 난 집은 재수가 없다더니 진짜네.”
아이샤가 울상을 지었다. 괜한 욕심 부리지 말고 그냥 작은 집을 살 걸 그랬다. 정말로.
* * *
사람은 잠을 자야 한다. 오드리는 그 평범한 진리를 몸으로 체감했다. 달콤한 낮잠 두어 시간이 수시로 뒤척이는 긴 잠보다 훨씬 효과가 좋았다. 머리를 깨부술 듯하던 두통이 한결 가셨고, 몸에도 활력이 넘쳤다.
하지만 달콤한 낮잠 뒤에 겨우 마주한 셰비언은 그리 상태가 좋지 않았다. 햇빛과 눈물, 이성을 앞선 감정에 가려서 보지 못했던 상처들이 눈에 띄었다. 아직 분홍빛이 남은 신선한 상처들이었다.
오드리는 굳게 닫힌 눈꺼풀을 살며시 더듬었다. 매끄러운 감촉과 함께 서늘한 한기가 느껴졌다. 연약하고 예민한 부분을 건드리는데도 움찔거리기만 할 뿐 깨지 않는 게 몹시 불안했다.
“이것보다 더 심했다고요?”
“네. 이것도 제가 큰 상처들을 치료한 뒤라 이 정도인 거예요.”
아이샤는 필사적으로 제 공을 주장했다. 그녀는 오드리에게 제 상태를 들킬까 저어하던 셰비언을 똑똑히 기억했다. 오드리에게 현관문을 열어주었다는 걸 알게 된 셰비언에게서 그녀를 지켜줄 사람은 오드리밖에 없었다.
“셰비언님이 레이디 오드리께는 절대 알리지 말라고 했어요. 마력까지 동원해서 위협하시는데 일개 마법사인 제가 어떻게 그걸 거역할 수 있었겠어요?”
“…….”
“며칠만 쉬면 낫는다고, 둥지까지 갈 필요는 없다고 하셨어요. 오래지 않아서 깨어나실 거고…….”
정신없이 변명을 주워섬기던 아이샤는 말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초록색 눈동자가 보내는 시선이 흡사 창처럼 묵직하고 날카로웠다. 혀가 얼어붙었다.
‘이게 열여덟 살 먹은 아가씨의 눈빛이야? 숫제 용이래도 믿겠네.’
오드리가 가진 용의 마력이 마법사인 자신에게 무슨 영향을 미치기라도 하는 건지, 심장이 오그라드는 듯 무섭고 등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어디로든 도망치고 싶어 머리가 빙빙 돌았다.
“그러니까……. 여기엔 쉬러 왔다는 거군요.”
“네, 네. 그렇죠.”
“그리고 아이샤 씨가 의식분리를 선보이니까 나름 노력했다며 칭찬하면서 회복마법도 가르쳐 줬고요.”
“칭찬하신 건 맞는데 그걸 가르쳐 줬다고 하기엔 좀…….”
아무리 무섭더라도 아닌 건 아닌 것이다. 저승개에게 목덜미를 물렸다가 도망 나온 듯한 경험을 한 지 하루도 안 지났다.
“진짜 죽을 뻔했어요. 회복마법이 아니었다면 분명 그랬을 거예요. 시체나 온전히 남겼을지 의심스러운걸요.”
“하지만 회복마법이었고, 아이샤 씨는 살았군요. 결과적으로 인간으로서는 유일한 회복마법사가 되었고.”
오드리가 아이샤를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쭉 훑었다. 품평하는 시선이 노골적이었다. 아이샤는 제 목덜미에 꼬리표가 달리는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품명 회복마법사, 가격은 왕궁마법사 연봉에 보너스 약간, 남은 사용 기한은 아마도 10년에서 20년 사이.
“축하해요.”
아이샤는 숨을 훅 들이마셨다. 우아하게 미소 짓는 오드리의 얼굴 위로 전혀 다른 생물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반들반들 빛나는 붉은 비늘로 덮인 머리가 흡족하게 웃고 있었다. 푸른 홍채 안쪽에 뾰족하게 선 하얀 동공이 또렷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했다. 오드리에게서, 인간인지 용인지 구분이 안 가는 저 생물에게서 조금이라도 더 멀어지고 싶었다. 그러나 몇 걸음 가지 못해 카프러스에게 가로막히는 바람에 그마저도 무산되고 말았다.
“어젯밤 이후로 아직까지 아무것도 못 먹었다고요. 많이 배고프겠군요. 식사하고 돌아오세요.”
“아, 네, 네…….”
“베텔 경, 같이 다녀오세요. 아이샤 씨가 아무리 왕궁마법사라지만, 로브가 이래서는……. 쯧.”
오드리가 엉망으로 구겨져 발밑에서 뒹구는 왕궁마법사 로브를 가리키며 눈짓했다. 불량배가 섣불리 접근하지 못하게 막아주는 방패가 없으니 기사로서 젊은 아가씨를 지켜주란 뜻이었다.
“하지만 아가씨…….”
“다녀오세요.”
카프러스는 감히 더 반론하지 못하고 아이샤를 잡아당겼다. 아이샤는 그의 팔에 의지해 도망치듯 집을 빠져나왔다. 처음 걸음마를 배운 아이처럼 다리가 휘청거렸다. 정원을 절반이나 가로지르고 나서야 막혔던 숨이 터졌다. 그녀는 햇살 쏟아지는 포석에 털썩 주저앉아 덜덜 떨리는 몸을 추슬렀다.
“레, 레이디 오드리는……. 인간 맞아요? 저게 어떻게 인간이야? 왜 용이 아닌 거죠?”
“전 아이샤 씨가 더 이해가 안 갑니다. 어떻게 용을 그리 가까이에 두고도 멀쩡합니까?”
카프러스가 아이샤를 일으켜 세웠다. 다리가 풀린 아이샤가 똑바로 서지 못하고 자꾸만 흘러내렸다.
“용은 용이니까 차라리 나아요! 아예 다른 종족이니까 그러려니 하면 되죠! 익숙해졌기도 하고요! 하지만 레이디 오드리는, 인간이잖아요? 분명 인간 어머니에게서 태어나 인간 틈에서 자란 사람인데, 어떻게…….”
아이샤는 카프러스가 오드리의 기사라는 것도 잊어버린 듯했다. 쏟아내는 말이 횡설수설 두서가 없었다.
“개의 몸뚱이에 갇힌 사자를 보는 것 같아요. 물고기가 날짐승 흉내를 내며 하늘을 나는 꼴을 보는 것 같다고요.”
“아이샤 씨.”
“이상해요, 이상해. 아무리 껍데기만 똑같지 속은 다 다른 게 인간이라지만, 레이디 오드리는 정도를 넘어섰어요. 아무리 용의 마력을 가졌어도 그렇지……! 이종족의 마력이라면 나도 만만치 않지만 그렇다고 다리 대신 물고기 꼬리가 보이진 않는다고요!”
“아이샤 씨! 정신차려요!”
“예전엔 안 이랬어요. 그럼요. 난 레이디 오드리와는 둥지에서 몇 달을 함께 지냈잖아요. 그땐 그냥 마력이 많은 보통 아가씨였다고요. 어린 나이에 머리가 너무 좋아서 섬뜩하긴 했지만 그거야 이해 가능한 범위 내에 있는 거고요!”
마른 손가락이 카프러스의 팔뚝을 꽉 움켜쥐고 매달렸다. 허기져 쓰러질 것 같다던 사람이라기엔 믿어지지 않는 힘이었다.
“레이디 오드리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아무 일도 없었…….”
“거짓말!”
아이샤가 비명 같은 고함을 지르며 오드리가 있는 쪽을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경은 레이디 오드리의 기사라며 왜 그것도 몰라요? 아가씨는 마법사를 자주 만날 텐데, 이제까지 나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나요? 어째서요? 저렇게 눈에 보이도록 이상한데!”
“아이샤 씨……. 아르젠 남작이 당신에게 저지른 짓이 몹시 잔인하군요. 아무리 회복마법이 필요했다지만 멀쩡한 마법사를 이 꼴로 만들다니……. 그것 참…….”
카프러스가 이루 말할 수 없이 안쓰러워하며 혀를 찼다. 그게 딱 미친 사람을 대하는 듯한 동정적인 태도라, 아이샤는 진짜로 미칠 지경이 되고 말았다. 사실을 말하는데 왜 믿질 않는 건가.
“안 미쳤어요! 난 멀쩡하다고요! 셰비언님은 왜 모르죠?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분은 알아야 하는 거 아닌가?”
이대로 뒀다간 큰일을 내겠다. 카프러스는 표정을 바꾸고 아이샤를 살살 달래기 시작했다. 여기가 길바닥이 아니고 수십 개의 마법도구가 설치된 마법사의 집이라 천만다행이었다.
“미안합니다. 내가 말을 잘못했군요. 아이샤 씨, 당신이 잘못 본 겁니다. 어젯밤부터 굶었으면 거의 하루를 꼬박 굶은 셈이지 않습니까.”
“굶어서 헛것을 본 거라고요? 내가요?”
“굶기만 했습니까? 물 한 모금 못 마시고 거친 방식의 마법전수를 감당했고 큰 마법을 연달아 썼습니다. 말이 지쳐서 잠든 거지, 사실은 쓰러진 것 아닙니까. 거기에 깨자마자 용을 앞에 두고 아가씨의 마력에 노출됐습니다. 착각할 만합니다.”
“나, 난 건강해요. 다른 마법사들보다 훨씬 더 건강하다고요. 겨우 하루 굶었다고 헛것을 볼 정도는 아니란 말예요!”
“예, 알겠습니다. 그러니 일단 먹고 쉬고 그 뒤에 아가씨를 다시 뵙죠. 그때도 그 이상한 게 보이면 그때 정식으로 말씀드리는 걸로 하는 게 좋겠습니다.”
“…….”
“정 안심이 안 되거든, 이따 다시 뵐 땐 워커라도 불러서 대동하면 되잖습니까.”
“워커를…….”
불안해하며 입술을 잡아 뜯던 아이샤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카프러스는 한시름 놓고 아이샤를 번쩍 안아 들었다. 놀란 아이샤가 버둥거렸지만 그래봤자 마법사였다. 어린애 제압하는 것보다 쉬웠다. 그는 이 골치 아픈 마법사의 배를 얼른 채워줘야 한다는 이상한 의무감에 휩싸여 성큼성큼 집을 나섰다.
한편, 오드리는 정원에서의 소동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아이샤가 집에 가구보다 마법도구를 먼저 설치한 덕분에 집은 무덤처럼 조용했다. 그녀는 오로지 셰비언에게만 집중했다.
“어쩌다 다쳤지?”
대답이 없을 걸 알면서도 물을 수밖에 없었다. 반투명하게 연한 비늘 아래로 비치는 분홍빛에 속이 쓰렸다. 무슨 상처가 흰 눈밭에 꽃이 흐드러진 듯 아름다운지, 억장이 무너진다는 표현을 이럴 때 쓰는 거구나 싶었다.
“옛 마법을 통째로 전수하는 일은 없을 거라더니……. 회복마법을 그리 급히 가르쳐야 할 정도로 사정이 급했나?”
내게 마법사의 재능이 있었다면 좋았을걸. 그랬다면 내가 직접 그대를 치료할 수 있었을 텐데. 그대가 내게 와서 쉴 수 있었을 텐데.
“그랬으면 차라리 둥지에서 회복할 것이지, 이렇게 계속 부상을 쌓아서 어쩌자는 거야…….”
며칠만 쉬면 된다는 말 따위는 조금도 안 믿겼다.
애초 둥지에서 나올 때도 부상을 다 회복하지 못한 상태였다. 오로지 오드리를 위해 이르게 둥지를 나왔는데 샤를레아와 싸우다가 부상을 더했다. 솔직히 그게 다 나았는지도 의심스러운 상황에 또 부상을 입었는데 둥지도 아닌 인간의 도시에서 고작 며칠로 해결될 리가 있겠는가.
보나마나 며칠 쉬고 겉모습만 대충 정상으로 회복되면 제 옆으로 돌아와 시침을 뚝 떼고 감쪽같이 숨길 셈이었던 게 뻔했다.
“‘나는 용이라 이 정도 상처쯤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대는 또 이렇게 말하겠지……. 그 말을 듣는 내 기분은 생각도 안 하고.”
오드리의 얼굴에 멍이 생겼을 때, 셰비언은 오드리보다 더 속상해했다. 그녀가 마법치료를 하지 않고 천천히 낫도록 내버려 둘 거라고 하자 세상이 무너진 듯 아픈 표정을 지었다. 그래놓고 이유도 말해주지 않고 곁을 비웠지만 말이다.
갑자기 심술이 났다. 오드리는 입을 삐죽 내밀고 셰비언의 콧잔등을 때렸다. 워낙 넓은 콧잔등이라 주먹으로 쥐어박아도 공간이 남았다. 얼굴을 보면 왜 날 찾아오지 않았느냐고 마구 화를 낼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아픈 걸 보니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내 마력을 주면 도움이 될까?’
마력은 곧 생명력이라고 했던가. 망망대해에 물 한 바가지 추가한다고 뭐가 달라지겠느냐마는, 뭐라도 해주고 싶은 마음이 오드리를 움직였다.
오드리는 용의 이마에 손을 얹고 마력을 밀어 넣었다. 마력의 성질이 비슷하기 때문인지 어떤 반발도 없이 부드럽게 스며들었다.
‘마력을 너무 썼다간 또 저번 같은 꼴이 날 거야.’
도움이 되려다가 되레 짐이 되는 사태는 피해야 했다.
‘뭐, 죽지만 않을 정도면 되겠지!’
그 죽지 않을 정도의 기준은 오드리 자신이었다. 그녀는 한번 바닥까지 긁어 써봤던 경험을 살려 마력을 들이부었다. 보통 사람들의 몇 배나 되는 마력이 아무렇지 않게 쏟아졌다.
오드리는 몰랐지만, 그녀의 마력은 확실히 도움이 됐다. 아이샤가 미처 손대지 못했던 상처들이 빠르게 아물었다. 만약 아이샤가 봤다면 자신은 왜 그 고생을 해서 회복마법을 익힌 거냐고 따져 물을 일이었다.
오드리가 슬슬 피로를 느낄 때쯤,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셰비언이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오드리?”
“응, 나야. 깨어났네. 기분은 어때? 괜찮아?”
“오드리가 왜 여기 있어요?”
너무 당황한 나머지 불쑥 속마음이 튀어나왔다.
“아직 만날 때가 아닌데!”
셰비언이 안타까워 마음이 아리던 오드리의 이마에 불끈 힘줄이 솟았다. 다친 모습에 마음이 아픈 건 아픈 것이고, 화가 나는 건 나는 것이다. 분홍빛으로 칠한 입술이 부드러운 미소를 그렸다.
“그대가 생각한, 우리가 만나기에 적절한 때가 언제인지 말해보겠어?”
셰비언은 불길한 예감을 받았다. 오드리의 미소가 진짜 미소가 아닌 것 같았다.
“어, 적어도 제가 인간 모습을 할 수 있을 때……?”
“아, 그래? 그 말인즉슨, 인간 모습을 할 수도 없을 정도로 다쳤다는 거군. 며칠 쉬면 될 정도가 아니잖아.”
정답은 아니지만 정곡을 찔린 셰비언이 눈을 데구루루 굴렸다. 오드리가 이를 드러내며 더욱 환히 웃었다.
“왜 다쳤지?”
“그게…….”
“내가 여기에 있다는 건, 그대가 입 밖에 꺼낸 말은 전부 알고 있다는 뜻이야. 남들 앞에서 어떻게 행동했는지도 전부 알고 있다는 뜻이고.”
셰비언에게는 은근한 압박을 알아들을 만한 재주가 없었다. 오드리는 노선을 수정했다. 좀 더 직선적으로, 그리고 노골적으로.
“아이샤한테 다 들었어.”
“분명 알리지 말라고 했는데…….”
셰비언이 불쾌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오드리는 울컥하는 마음을 담아 셰비언의 콧잔등을 철썩 때렸다. 별로 아프지도 않을 텐데 셰비언이 깜짝 놀라 몸을 움찔거렸다. 비늘에 닿은 벽지 곳곳이 찢어졌다.
“아이샤가 알고, 비니타가 알고, 그러다 브란젤의 마법사들 전부가 알아도 나한테는 안 알려줬겠군.”
“그런 게 아니라……!”
“그런 게 아니면, 뭐지? 내게 원인을 제대로 알려줄 생각은 있었어? 다쳐서 쉬어야 한다는 것조차 숨겼잖아. 내가 소식이 끊긴 그대를 얼마나 걱정했을지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나 봐?”
셰비언은 민망해하며 시선을 피했다. 오드리를 걱정시키기 싫어서 행방을 숨긴 건데, 이렇게 허무하게 들킬 줄 알았으면 그냥 둥지에서 쉬다 올 걸 그랬다. 오가는 데 걸리는 시간을 아까워할 게 아니었다.
“……어차피 오드리는 마법사도 아니고…….”
오드리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누군가 머리를 세게 때리기라도 한 듯 어질어질했다. 심장이 쿵쿵 뛰고 눈앞이 흐려졌다.
‘셰비언은 화술이 좋지 않아, 진짜 이유를 제대로 설명한 게 아닐 거야. 울지 말자, 이럴 때 울면 안 돼……. 화날수록 냉정해야 해.’
나는 지금 속상하고 서운한 게 아니라 화가 난 거다, 그러니 울지 말자. 아무리 자신에게 되뇌어도 소용없었다. 좀 전에 머리끝까지 치밀었던 화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엔 스스로에 대한 좌절만 남았다.
눈앞이 흐려졌다. 쥐고 있던 모자가 찢어져 폐물이 되도록 참고 참았지만 소용없었다. 주르르 흐른 눈물이 오드리의 뺨을 적시고 툭툭 떨어졌다. 꽉 깨문 입술이 하얗게 질렸다.
셰비언은 여전히 오드리를 보지 않고 있었기에, 오드리의 눈물도 몰랐다. 그는 벽지에 새겨진 무늬를 하나하나 헤아리며 말을 덧붙였다.
“오드리가 알아봐야 걱정만 하게 될 텐데 굳이 알릴 필요가 있나요. 오드리는 안 그래도 바쁘잖아요. 할 일도 많고…….”
“…….”
“난 용이에요. 이런 상처쯤 아무 것도 아니라고요.”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오드리는 최대한 담담하게 말하려고 노력했지만, 목소리에 어린 물기까지 감추진 못했다. 셰비언은 의아해하며 시선을 돌렸다가 오드리의 눈물에 크게 당황하고 말았다.
“왜, 왜 울어요? 오드리, 내가 또 뭔가 실수했어요?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았을 뿐인데, 그게 그리 나쁜 거였어요?”
“셰비언……. 난 그대에게 대체 뭐지?”
“그야 오드리는 내가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이죠. 뭐가 더 필요한가요? 그게 지금 우는 것과 관계가 있어요?”
셰비언은 주인의 칭찬을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목을 뺐다. 한 걸음 물러서 있는 오드리에게 치대면서 눈을 가늘게 뜨고 애교를 부렸다. 둥지에서 지내던 날들에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오드리의 기분이 풀렸으면 했다.
과연 기대했던 대로 오드리가 손을 뻗어 셰비언의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따스하고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셰비언은 곧 그녀가 화를 풀고 웃으리라 확신했다.
“그대가 지쳤을 때, 쉬고 싶을 때, 다쳤을 때, 아플 때, 회복할 때, 종족의 일을 처리할 때…….”
말을 읊조릴수록 눈물이 늘었다. 오드리의 뺨이 비라도 맞은 듯 흥건하게 젖었다. 셰비언이 놀라 움찔거렸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난간이 그의 꼬리에 스쳐 부서졌다. 꽤 큰 소리가 울렸지만 오드리도 셰비언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럴 때 난 그대에게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이군.”
셰비언은 불안으로 심장이 조여드는 걸 느꼈다. 오드리가 바로 옆에 있는데, 심지어 손으로 쓰다듬고 있기까지 한데도 그녀가 한없이 멀게만 느껴졌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재갈처럼 그의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오드리가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셰비언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일으켰다. 쿵! 일어서려는 시늉만 했을 뿐인데 등이 천장에 부딪쳤다. 가엾은 샹들리에가 용과 천장 사이에 끼어 납작해졌다. 남의 집을 무너뜨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는 도로 엎드렸다.
오드리가 한 발짝 더 물러났다. 이제 그녀는 셰비언과 현관 사이 어중간한 곳에 서 있었다.
“미안해, 내가 마법사가 아니라서. 하지만 어쩌겠어, 랄리우스의 핏줄에선 마법사가 태어나지 않는걸.”
“오드리?”
“게다가 그대를 이용하겠다고 공언하기까지 했으니 얼마나 미덥지 못했겠어. 이해해.”
“오드리,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일단 눈물부터 그쳐요. 울지 마요. 오드리가 그렇게 울면 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요.”
셰비언이 다급하게 하소연하자 오드리가 눈물을 닦아냈다. 그나마 남아 있던 화장이 마저 지워지면서 완전히 가시지 않은 멍 자국이 드러났다. 거의 사라지긴 했지만 눈가에 아직 흔적이 남아 있었다.
셰비언은 그 멍 자국이 너무 싫어 쯧, 혀를 찼다. 가해자가 오드리의 아버지만 아니라면 가만 두지 않았을 텐데, 복수도 치료도 하지 못하고 얌전히 물러나야 했던 걸 다시 떠올리니 속이 절절 끓었다.
“아직도 멍이 다 안 빠졌네요. 역시 마법으로 치료를…….”
“셰비언.”
오드리가 셰비언의 말을 단칼에 잘라냈다. 그 칼이 어찌나 서늘하고 차가운지, 화제를 돌리려던 셰비언의 시도는 초장에 잘려나갔다. 셰비언은 두 번 시도하지 못하고 살금살금 오드리의 눈치를 봤다.
“나는 애완동물처럼 사랑받고 싶지 않아.”
“오드리……?”
“오로지 받기만 하는 사랑은 못하겠어. 내가 그대에 비하면 반딧불만도 못한 존재라는 건 진즉 알고 있었지만, 그대에게 정신적인 보탬조차 될 수 없다는 걸 이렇게 깨닫게 되다니……. 너무 괴로워서 참을 수가 없어.”
셰비언은 오드리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에게 오드리는 너무나 필요한 존재였다. 어둠 속에서 홀로 빛나며 그를 이끄는 등불이자 판단의 기준이었다.
“다른 애완동물을 찾아.”
깨끗하게 닦아냈던 뺨에 또 물줄기가 생겼다. 오드리는 눈물도 훔치지 않고 돌아섰다. 쇠징을 박은 구두가 그녀의 걸음을 따라 또박또박 소리를 냈다.
눈치라곤 약에 쓸래도 없는 셰비언이지만, 오드리의 뒷모습에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그는 황급히 인간의 모습으로 몸을 바꿔 오드리의 어깨를 잡아채 끌어안았다.
“오드리!”
“놔!”
오드리가 버럭 소리를 지르거나 말거나, 셰비언은 그녀를 꽉 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뾰족한 구두코가 정강이를 연신 걷어차고 있었지만 아픔 같은 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대로 그녀를 놓치면 큰일이 날 거라는 예감이 사실이 되는 쪽이 훨씬 두려웠다.
“가지 마요, 난 오드리가 없으면 안 돼요. 어느새 내 기준은 오드리가 되어버렸단 말이에요.”
“놓으라니까!”
“내가 다 잘못했어요. 미안해요. 오드리가 걱정하는 게 싫었어요. 오드리는 안 그래도 힘든데 나까지 걱정을 얹어주면 내가 지긋지긋해지는 건 아닐까 무서웠어요. 제발 용서해 줘요…….”
쉴 새 없이 속삭이는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떨리고 있었다. 오드리의 발버둥이 점차 약해졌다. 간절한 속삭임, 애원, 눈물……. 그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셰비언이라, 결국 그녀는 반항을 멈추고 얌전해졌다.
“만약……. 내가 마법사였다면 그대는 내게 와서 쉬었을까?”
“아니요. 그건 오드리가 마법사든 아니든 상관없는 얘기예요. 난 오드리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던 거지, 마법사를 찾아 여기 온 건 아니니까요.”
“단호하네.”
“사실이니까요. 내가 마법사 얘길 꺼낸 건 다른 것 때문이에요. 인간의 마법사라면 반드시 알아야 할 얘기가 있어서……. 물론 오드리를 빼놓을 생각은 없어요. 꼭 가르쳐 줄게요.”
오드리가 얌전히 품에 안겨서 말을 들어주고 대답을 해준다. 셰비언은 그것만으로도 죽을 고비를 간신히 넘긴 것처럼 안도했다. 오드리가 정말로 모든 걸 끝내기로 마음먹지는 않았다는 증거 같았다.
“그럼 왜 하필 이 집에 온 거지?”
“그냥……. 제가 아는 집 중에서 몸을 숨기기에 딱 좋은 집이 여기라서 이리 왔어요. 가구는 적고 공간은 널찍하잖아요. 잘 숨어 있으면 다 나아서 오드리에게 걱정 끼치기 전까지 안 들킬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설마 아이샤가 이 집의 주인이 됐을 줄은 몰랐어요. 빈 집일 줄 알았죠…….”
셰비언이 기어들어가듯 말꼬리를 흐렸다.
이 집은 한때 라디아타가 자신이 후원하는 화가들에게 생활공간 및 작업공간으로 제공하던 곳이었다. 대형 강도살인사건(사실은 괴물에 의한 사건이지만 공식적으로는 강도살인사건이다)이 발생한 후 머물려는 화가가 없어 팔려고 내놓았다.
좋은 집인데 사고 물건이라 좀처럼 팔리지 않는다며 라디아타가 한탄을 하기에, 오드리는 셰비언과 함께 이 집에 온 적이 있었다. 헨젤 백작 몰래 사용할 저택으로 쓸 만할까 싶어서 살펴보러 왔었다. 중심가에서 너무 떨어진 데다 내부 구조가 마음에 들지 않아 사지 않았지만.
함께 살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같이 집을 쓸 만큼 절친한 친구나 애인도 없는 아이샤가 왜 이렇게 큰 집을 골랐는지는 아이샤 본인만 알았다.
“이 집을 몰랐다면 어디에서 쉬었을 것 같아?”
“글쎄요……. 헨젤 백작저의 숲은 너무 눈에 띄고, 그렇다고 오드리의 다른 집으로 가면 들키는 건 시간문제니……. 아마 그냥 둥지로 갔을 거예요.”
오드리는 셰비언의 대답을 듣고 좋아해야 할지 싫어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괜히 이 집을 가르쳐 줘서 내 발등을 찍었구나 싶다가도, 연락 한 통 없이 둥지로 돌아가 버렸으면 몇 배나 되는 시간 동안 그를 걱정하느라 속이 까맣게 타들어갔겠구나 싶어 안도가 되었다.
“그럼 회복마법은? 제자를 들일 생각은 없다더니 아이샤 씨에게 회복마법은 왜 가르쳤어?”
“……음, 솔직히 그걸 가르쳤다고 할 수 있나요? 강제로 새겨 넣은 거지. 뒤늦게 생각났는데, 선한 의도로 쓰이는 수법은 아녜요. 천재는 아니라도 노력하는 인재를 보고 흥이 나서 준 거긴 하지만요. 글쎄, 아이샤가 가르쳐 준 적도 없는 의식분리를 하지 뭐예요.”
“…….”
“오드리도 영리하고 심성 바른 인재만 보면 바로 낚아채서 로렐라이와 데멘사에 집어넣잖아요. 모자란 부분이 있다 싶으면 가르쳐서라도 어떻게든 자기 사람으로 만드는 거 내가 한두 번 봤나요?”
“결국 내 탓이란 거네?”
오드리가 울컥해서 고개를 번쩍 들었다. 셰비언은 드디어 오드리가 자신을 바라보았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그녀의 미간에 입을 맞췄다.
“설마요. 오드리는 내게 그런 걸 가르친 적이 없어요. 그냥 나 혼자 보고 배운 거지. 그러니 이건 내 탓이에요.”
“……이렇게 말을 잘하는데, 아깐 왜 그랬을까……. 인간이 아니라 용의 모습을 하고 있으면 사회성이 퇴화되기라도 하는 건가?”
“막 잠에서 깨서 정신이 없었나 봐요. 헛소리를 한 거죠!”
오드리는 셰비언의 회피에 억지웃음을 지었다. 계산하기 전에 무의식중에 튀어나온 말은 대부분 진실을 담고 있게 마련이고, 아직 인간의 모습을 할 수 없는 것처럼 본체 상태로 애교를 떨더니 지금은 버젓이 인간의 모습이다.
한데 도저히 추궁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애써도 다른 말만 나왔다. 사실 오드리는 아까 다른 애완동물을 찾아보라며 돌아섰을 때 이미 최대한의 용기를 썼다. 지금 그녀의 내부에 용기라고 부를 만한 것은 실오라기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남은 건 발가벗겨진 진심뿐이었다.
오드리는 이곳저곳 비늘이 돋고 생채기가 있는 셰비언의 얼굴을 살그머니 쓰다듬었다. 다른 손으로는 그의 등을 매만졌다. 손가락 끝에 이전엔 없던 상처들이 걸렸다.
“셰비언, 나는 앞으로 그대가 다치거나 아플 때, 슬플 때, 지쳤을 때, 그때 그대가 날 떠올리길 바라. 내 옆에서 쉬고 회복하며 날 의지하길 바라. 내가 그대의 고통을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어.”
“오드리, 나는……. 오드리가 아프길 원하지 않아요. 즐겁게 웃기만 했으면 좋겠어요. 사랑하기에도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아요.”
“그대도 내 고통을 나눠 갖길 원하잖아. 어떻게든 내 일을 돕고 싶어 하잖아. 나도 그럴 거라곤 생각 안 해 봤어?”
셰비언의 눈이 흔들렸다. 하도 울어서 눈가가 벌겋게 달아오른 오드리가 셰비언의 뺨에 키스했다. 그리고 얼굴 전체를 새빨갛게 물들인 채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대에게나 짧은 시간이지, 내겐 충분히 긴 시간이야. 나는 지금 인생의 끝에 대해서 생각하기엔 너무 이른 나이라고.”
머리가 굵어진 후 랄리우스의 단명을 늘 의식하고 살았던 오드리였다. 그녀는 셰비언을 만나고 그의 도움으로 마력균형을 이룬 후 ‘끝’을 너무 겁내며 살지 않아도 된다는 해방감을 맛보았다.
“난 적어도 백 살까지는 살 거야. 엄청나게 노력해서 아주 오래오래 살 거야. 하지만 그대에게 백 년은 사랑만 하기에도 부족한 짧은 시간이겠지……. 그러니 그대는 내가 살아 있는 동안만은 절대 말없이 날 떠나지 마. 날 불안하게 하지 마. 알겠지?”
셰비언은 문득 깨달았다. 오드리는 자신의 마음이 변할 걸 두려워하지만, 정말 두려워해야 하는 쪽은 자신이라는 걸. 백 년은 인간의 마음이 변하기에 충분히 긴 시간이었다.
워커는 오드리의 마력을 구석구석 살폈다. 이상한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일반인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많은 마력량을 새삼 다시 확인했을 뿐이었다.
“이상 없는데요.”
“다시 봐요! 분명 뭔가 있다니까요!”
아이샤가 반발했다. 정작 본인은 무서워서 오드리의 손도 못 잡으면서, 전공분야가 아니라서 자신 없다는 워커만 달달 볶아댄다. 흰자위에 핏발이 곤두선 모습이 섬뜩했다.
‘왜 하필 날 끌어들여서.’
워커의 원망스런 눈빛을 받은 카프러스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그의 실수였다. 적당히 배를 채우고 살살 달래주면 진정할 줄 알았던 아이샤가 강철 같은 의지로 워커를 끌고 나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워커, 나는 괜찮아. 좀 더 살펴보는 게 어때? 아이샤 씨가 영 납득하질 못하잖아.”
오드리가 다정한 말투로 워커를 격려했다. 그 예쁜 미소가 워커를 더욱 두렵게 했다. 나중에 어떤 보복을 하려고 저런 미소를 짓는담.
“아뇨, 됐어요. 몇 번을 해 봐도 달라지는 게 없는데 뭐 하러 또 해요? 해 봐야 힘만 들지.”
워커는 무익한 노동에 정성을 쏟는 대신 오드리의 뒤에 앉은 셰비언을 흘끔거렸다. 매끄러운 피부 곳곳에 돋아난 비늘이며 은발 사이로 삐죽 솟아오른 뿔……. 용도 인간도 아닌 꼴인데도 묘한 아름다움이 있어서 자꾸만 시선을 잡아끌었다.
게다가 그는 상처투성이였다. 풍성한 옷자락으로 가려놓긴 했지만 드러난 목덜미와 팔뚝에만도 찰과상이 가득했다. 계속 코에 맴도는 피비린내가 강렬했다. 보이지 않는 옷 안쪽은 어느 정도일지 상상하기가 두려울 지경이었다.
“셰비언도 아무 말 안 하는데 내가 계속 붙들고 있을 필요가 있겠어요?”
“그럼 셰비언님이 좀 봐주세요.”
지금은 눈에 보이는 게 없는 아이샤가 덥석 셰비언을 끌고 들어왔다. 오드리가 그녀에게 무시무시한 눈빛을 보냈지만 아이샤는 꿋꿋했다.
“분명히 봤단 말예요. 피처럼 붉은 비늘에 푸른 눈동자, 무엇보다 동공이 하얗고 뾰족했어요! 그리고…….”
아이샤가 늘어놓는 특징들은 샤를레아의 본체와 일치했다. 그러나 여기서 그걸 알아차린 사람은 오로지 셰비언 한 명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샤를레아와 맞대면한 카프러스조차 그녀의 본체를 제대로 본 적은 없었으니까.
“아무튼 용이었어요! 용의 머리가 레이디 오드리를 통째로 삼키고 웃고 있었다니까요?!”
“언제부터 그렇게 구체적이 되었죠? 아깐 그냥 이상한 게 있다는 식이었잖아요.”
의심스러워하는 시선들이 아이샤를 찔렀다. 아이샤가 화들짝 놀라 몸을 세웠다.
“제 몸에 흐르는 마력과 절 이끌어준 스승의 이름에 맹세코, 거짓말 아니에요. 제가 거짓말을 했다면 마법사의 재능을 잃고 당장 고꾸라져 죽어도 좋아요.”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내가 계속 빠져 있을 수가 없네요. 오드리, 손 좀 내밀어봐요.”
결국 내내 뒤로 빠져 있던 셰비언이 나섰다. 오드리는 영 내켜 하지 않는 얼굴로 셰비언에게 손을 맡겼다. 한겨울 찬바람 같은 마력이 오드리에게 스며들었다. 갑자기 찾아온 추위에 오드리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흠……. 딱히 이상은 없는데…….”
워커가 거 보란 듯 아이샤에게 눈을 흘겼다. 아이샤가 그럴 리 없다며 항변했지만 셰비언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아무 이상 없음.
“달라진 점이 있긴 해요. 오드리의 마력이 예전에 비해 크게 늘어났어요. 오드리의 마력은 용의 마력과 매우 흡사하니, 아이샤는 아마 그것 때문에 헛것을 봤을 거예요. 무의식에 마법을 새겨 넣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예민한 상태라 그랬을 테죠.”
마법에 문외한인 카프러스만 빼고 모두가 놀랐다. 오드리는 조금 전에 셰비언에게 마력을 실컷 쏟아 부었는데도 마력이 늘었다는 진단을 받고 놀랐고, 워커와 아이샤는 마력량이 늘어났다는 말에서 놀랐다.
“마력이 늘어요? 그게 말이 돼요? 마력량은 타고나는 거예요! 이상이 없긴 왜 없어요? 마력이 늘었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데!”
“아이샤 씨 말이 맞아요. 아가씨가 다른 마법사에게서 마력을 갈취했다면 모를까……. 하지만 아가씨는 마법사가 아니잖아요. 헛것 따위보다 훨씬 확실한 이상증세예요.”
“레이디 오드리, 혹시 최근에 직접 마법사를 죽인 적 있어요? 만약 레이디 오드리에게 마법사의 재능이 있었다면 본의 아니게…… 아야! 왜 때려요! 남자가 여자를 이렇게 막 때려도 돼요?”
“미친 소릴 하니까 때렸죠. 아이샤 씨, 설마 비니타 앞에서도 그렇게 할 말 못 할 말 못 가리고 주절대요? 어쩐지 애가 자꾸 이상한 걸 배워오더라니!”
워커와 아이샤가 서로 다투기 시작했다. 셰비언과 오드리가 앞에 앉아 있다는 건 까맣게 잊은 듯했다.
셰비언이 피곤하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긴 옷자락이 그의 얼굴 절반을 가렸다. 퍽 자연스러운 동작이었지만, 관자놀이 부근에 돋은 비늘이 들떠 피가 흘러내리는 바람에 그의 노력은 헛수고가 되었다. 옷자락에 배어드는 피를 발견한 오드리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셰비언, 피가!”
“괜찮아요. 금방 나아요.”
정말로 피는 금방 멎었다. 셰비언은 오드리의 손수건을 사양하고 제 옷자락으로 얼굴에 묻은 피를 꼼꼼하게 닦아냈다. 그리고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오드리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부드럽게 웃었다.
“인간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용은 나이를 먹고 경험이 쌓이면서 마력이 늘어요. 오드리는 순수한 용의 마력을 대량으로 가지고 태어났으니 보통 인간들과 좀 다르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어요.”
“셰비언님!”
워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거렸지만, 아이샤는 셰비언의 견해에 동의할 수 없었다.
세상에 용의 마력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 오드리 한 명인 것도 아닐 텐데, 길고 긴 마법의 역사에서 기록 한 줄도 없다는 게 말이 되는가. 적어도 마력량이 늘어난 케이스에 대한 언급 정도는 있어야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뒷말을 더 이을 수는 없었는데, 그건 워커가 냅다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기 때문이었다.
“으으읍!”
“마법의 주인이 그렇다는데 토 좀 그만 달죠?”
“으읍! 읍! 으으으으읍!”
“자꾸 발버둥 치면 베텔 경더러 기절시켜 달라고 할 겁니다.”
등 뒤에서 소란이 일어나든 말든, 셰비언은 오로지 오드리에게만 집중했다. 그녀의 눈에 가득 담긴 눈물이 떨어지지 않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러니 오드리가 불안해할 건 아무 것도 없어요. 자연스러운 변화일 테니까요. 난 오드리의 마력량 증가 따위보다 오드리의 체온이 높은 게 신경 쓰여요. 어디 아픈 곳이 있는 건 아니죠? 바빴을 텐데 의사에게 진료는 받아봤어요?”
“난 멀쩡해. 나보단 그대가…….”
“아까 오드리가 왜 화를 냈는지 알겠어요. 아무렇지 않다는 말이 이렇게 속상한 거였군요. 난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서 그렇게 말했던 건데……. 이것 참,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걸 그랬어요.”
셰비언은 오드리의 눈물을 훔치려다 흠칫해서 손을 거뒀다. 다섯 손가락 전부에 비늘이 빽빽하게 덮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슬쩍 확인해 보니 양손이 다 그 모양이라, 그는 슬그머니 옷자락에 손을 숨겼다.
오드리가 그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하던 눈물은 깨끗하게 말라 있었다.
“지금 제 꼴이 좀 흉해서요.”
다급한 변명이었다. 셰비언은 당장 일어날 것처럼 자세를 바꿨지만, 오드리가 손을 뻗어 그의 뺨을 어루만지는 바람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온기가 뺨, 턱, 관자놀이를 더듬었다.
“용은 어느 종족의 모습을 하든 아름답게 보인다고 내게 자랑을 하더니만.”
속삭이는 목소리엔 웃음기가 담겼는데, 그 말을 하는 오드리는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다. 셰비언은 어쩐지 초조해졌다. 땀인지 피인지 모를 무언가가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지금은 인간도 용도 아니니 예외죠.”
“아니, 지금도 아름다워. 그저…… 내 마음이 그대의 아름다움을 맘껏 즐길 수 있을 만큼 여유롭지 않을 뿐이지.”
“오드리, 방금 발언 되게, 음, 호색한 같았던 거 알아요?”
“호색한이라는 말도 알고, 많이 배웠군. 심지어 그럴듯하게 잘 썼어. 역시 그대는 용이 아니라 인간일 때에 더 말을 잘해. 똑같은 셰비언인데 대체 이유가 뭔지 모르겠다니까.”
오드리의 손가락이 셰비언의 눈두덩을 더듬었다. 셰비언이 가만히 눈을 감았다. 살짝 미소 지은 표정이 마치 오드리의 손길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오드리는 입술을 꽉 깨물고 숨을 참았다. 기껏 눈물을 삼켰는데 또 울고 싶지는 않았다.
‘모르는구나.’
지금 셰비언의 얼굴은 절반 가까이가 비늘로 덮여 있었다. 조금 전, 관자놀이에서 피가 흐른 자국을 따라 작은 비늘이 돋아났기 때문이었다. 옷자락으로 피를 닦아내느라 피가 번졌던 곳도 예외는 아니었다. 단지 비늘이 돋는 속도가 느릴 뿐이지.
‘이래서 인간 모습을 하길 꺼렸던 거였어.’
셰비언이 용의 모습일 때는 상처가 얼마나 있는지, 얼마나 심각한지 잘 몰랐다. 덩치를 줄였다고는 해도 오드리에 비하면 너무 컸으니까.
하지만 셰비언이 인간으로 몸을 바꾸자 그가 입은 상처가 고스란히 보였다. 쓸리고, 까지고, 움푹 팬 상처들. 그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움직일 때마다 다 아문 것 같던 상처가 다시 벌어져 신선한 피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걱정시키는 게 싫어서 본체 상태로 있었다는 말이 충분히 이해가 갔다.
‘왜 다쳤는지부터 물어볼걸.’
오드리는 자신이 지독히 이기적인 인간이라는 걸 새삼 실감했다. 다친 셰비언을 앞에 두고도 자신의 서운함과 분노를 풀어내는 게 먼저였으니. 그녀는 몹시 진지하게 반성했다.
“내 체온이 높은 건 피곤해서 그런 걸 거야. 로렐라이고 데멘사고 대충 넘길 수 있는 게 없는데 수확제까지 겹쳐서 일이 아주 많았거든.”
“아무리 일이 중요해도 건강만큼 중요하진 않아요. 살아 있는 생물인 이상 적정한 수준의 휴식은 필수…… 잠깐, 오드리는 하루를 거의 일에 쓰고 휴식은 내 공간에서만 취하곤 했었죠. 이런, 나 때문이네요. 오드리가 바쁜 시기에 내가 자리를 비웠군요.”
다다다 잔소리를 하던 셰비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젠 내가 브란젤에 있으니 오드리도 내 공간에서 쉴 수 있을 거예요. 당장 오늘부터……. 읏!”
오드리가 입을 삐죽 내밀고 셰비언의 코끝에 손가락을 튕겼다. 하얗던 코가 발그스레해졌다.
“그대는 날 어떻게 보는 거야? 그대가 없으면 일과 휴식의 균형도 못 맞출 정도로 내가 무능해 보이나?”
“설마요……. 하지만 이렇게나 피곤하잖아요.”
“그야 그대 때문이지. 볼일이 있으니 금방 다녀오겠다며 훌쩍 떠나서는 연락 한 통 없이 하루하루 날짜만 지나가니 내가 걱정으로 앓을 밖에. 기껏 잠들어도 계속 악몽을 꿨어.”
셰비언은 코를 문지르던 자세 그대로 굳었다. 단지 연락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오드리가 그리 걱정할 거라곤 생각해 보지 않았던 탓이었다.
“이젠 그대가 브란젤에 있다는 것도, 날 떠나지 않았다는 것도 알았으니 악몽 같은 건 없을 거야. 그러니 굳이 날 그대의 공간으로 부를 필요 없어. 셰비언, 그대는 내 휴식보다 그대의 건강에 더 신경 쓰도록 해. 빨리 나아야지.”
“괜찮아요. 며칠만 쉬면 돼요.”
“껍데기만 대충 회복하고 돌아와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려는 걸 내가 모를 줄 알고? 이번엔 제대로 나아서 돌아와. 이젠 눈감아주지 않을 거니까.”
들켰구나. 잘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대체 언제 어떻게 들킨 거지? 셰비언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오드리가 나직한 웃음을 흘리며 그의 뺨에 키스하고 속삭였다.
“제대로 쉴 거지?”
“……네. 그럴게요.”
목과 어깨에 잔뜩 들어가 있던 힘이 쭉 빠졌다. 셰비언은 어리광부리는 아이처럼 오드리에게 기댔다. 어쩐지, 이제야 돌아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워커는 다른 사람들의 존재는 까맣게 잊은 듯 둘만의 세계에 빠진 오드리와 셰비언을 보며 혀를 찼다. 눈감고 귀 막은 아이샤나 카프러스처럼 굴어야 하는데 너무 닭살이라 참아줄 수가 없었다. 그리 연애를 하고 싶으면 제발 남들 눈 없는 데서 할 것이지!
“아가씨,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오드리가 눈만 굴려 워커를 바라보았다. 귀찮다는 뜻이 가감 없이 전해졌다. 아이샤가 옷자락을 잡아당겼지만 워커는 굴하지 않았다.
“강철새를 곧 완성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뭐?”
“가장 최근의 시험비행에서 이착륙을 다 성공했거든요. 약간 불안정한 감이 있긴 한데, 그 부분만 조금 손대면 될 것 같아요.”
워커가 의기양양하게 콧대를 세웠다. 강철새가 곧 완성될 거라는 셰비언의 전망을 대단히 비관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오드리는 너무 놀란 나머지 잠시 말을 잊었다. 쿵쿵쿵, 심장이 미친 듯이 뛰면서 온몸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워커, 난 불확실성을 싫어해. 같아요 따위의 어미 대신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할 수는 없어?”
“미래에 대해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건 더하죠. 다만 며칠 내로 시험비행을 한 번 더 할 생각인데, 아마도 그게 마지막 시험비행이 될 거란 장담은 할 수 있어요.”
“마지막?”
“그 다음부터는 시제품을 가지고 비행해야 할 테니까요.”
씩 웃는 워커에게선 자신감이 흘러넘쳤다. 매번 강철새에 관련한 질문을 할 때마다 시간과 예산 타령을 하며 움츠러들던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오드리는 시험비행을 성공하고도 보고하지 않은 워커를 탓하는 대신 마지막 시험비행 일정을 물었다.
“아가씨는 바쁘시잖아요. 일단 성공하면 하나도 빠짐없이 보고를 올릴 테니까…….”
“기념비적인 사건이야. 분명 역사에 남을 거라고. 내 눈으로 보고 축하하고 싶군.”
“그러시다면야! 수확제 이틀째 날에 비행할 건데 초대장 보내드릴게요!”
“초대장이라! 그거 좋지! 나만 초대하지 말고 이왕이면 사람을 많이 초대하는 쪽이 좋겠어. 그동안 널 보고 미친 마법사라고 부르면서 무시하던 사람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줘야지. 성대하게 해야겠군. 마침 수확제 기간이라니 날짜도 좋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워커가 성공을 장담한 시험비행이었다. 오드리는 눈을 반짝거리며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사람을 부르고, 음식을 차리고, 기자들에게 연락을 하고, 기념품을 제작하고……. 역사에 남을 한 페이지를 꾸밀 생각에 가슴이 떨렸다.
‘이 손으로 세상을 바꿔봐야지.’
그 어린 시절의 꿈은 데멘사로 이미 성취했건만, 그런 꿈을 꾸게 만들었던 강철새가 정말 하늘을 날 거라고 하니 감회가 남달랐다. 워커가 아니라 자신이 꿈을 이룬 듯 기분이 좋았다.
그제야 충격에서 벗어난 아이샤와 카프러스가 워커에게 축하의 말을 건넸다. 설마 진짜로 성공할 줄은 몰랐는데, 따위의 말이 붙기는 했어도 진심 어린 축하였다.
“워커 씨, 나도! 나도 초대해 줘요. 왕궁마법사 일이 아무리 바빠도 그날은 반드시 시간을 낼 테니까!”
“당연히 제 몫의 초대장도 있을 거라고 기대하겠습니다. 워커 씨, 우리 그 정도 친분은 있지 않습니까?”
워커의 기분은 매우 좋아졌다. 그는 구름을 탄 듯 들떠서 그동안 사하스바티와 어떤 협력을 했는지, 어떤 발전이 있었는지 줄줄 늘어놓기 시작했다. 카프러스는 금세 질리고 말았지만 아이샤와 오드리는 진지하게 들으며 고개를 끄덕거리기도 하고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셰비언은 잔뜩 들뜬 오드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도 강철새의 성공을 기대하고 있었으니만큼 무척 기쁘긴 한데, 오드리가 이렇게나 좋아하는 걸 보니 이상하게 가슴이 답답하고 심술이 났다.
‘전보 때도 이랬나……?’
그는 무의식적으로 전보의 성공을 전했던 날을 되짚었다. 침착하게 전보의 미진함을 꼬집고 추가 연구를 주문하던 오드리를 떠올리자 어쩐지 워커에게 진 것 같아 묘한 패배감마저 들었다.
분명히 말해두는데, 오드리는 전보가 성공했을 때도 굉장히 좋아했다. 이건 세상을 바꿀 물건이라며 쌈짓돈 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좋은 것은 빨리 잊히고 나쁜 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법이다. 셰비언의 기억 속엔 기뻐하는 오드리의 얼굴보다 전보에 관련된 예산과 보급의 난항 때문에 얼굴이 반쪽이 됐던 오드리가 훨씬 많이 남아 있었다.
‘전보는 내 바람이었지 오드리의 바람은 아니었구나.’
하지만 오드리는 침울해진 셰비언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워커와 화기애애하게 농담을 나눴다.
“사실은 내가 죽는 날이 되도록 강철새가 하늘을 나는 걸 못 보면 어쩌지 했었어. 평생 연구비를 대야 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던 거지.”
“하하, 아가씨도 참! 아가씨보다는 제가 먼저 죽을 텐데 설마 그랬겠어요? 아무리 길어도 중년까지만 고생하셨으면 됐을 거예요.”
웃고 있던 얼굴들이 그대로 굳었다. 다들 알다시피 마법사의 수명은 그리 길지 않고, 강력한 마법사일수록 요절로 생을 마감하는 일이 잦았다.
심지어 워커는 강철새를 연구하고 로렐라이의 신제품을 개발하느라 어린 시절부터 쭉 몸을 혹사해 왔다. 평범한 마법사로 산 세월이 훨씬 긴 아이샤조차 쉰 살 이상 나이 먹은 자신을 상상하지 못하는데, 워커는 어떻겠는가.
다들 말을 쉽게 꺼내지 못하고 눈치만 보는 가운데, 아이샤가 박수를 쳐서 사람들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뭐야, 다들 표정이 왜 그래요? 예상 개발기간을 절반으로 줄인 천재에게 박수는 못 쳐 줄망정!”
“맞아! 아이샤 씨, 웬일로 이렇게 내 맘에 쏙 드는 말을 해줬어요?”
“마법사의 심정을 마법사 말고 누가 또 헤아리겠어요.”
일찍 죽는 게 무섭다면 애초 마법사가 되지 말았어야 하고, 나중에라도 죽음이 두려워졌다면 마법사를 그만두고 평범하게 살면 된다. 그러나 일단 마법의 길에 들어선 자들은 부나방처럼 마법에 생명을 태우면서도 다른 길로 눈을 돌리지 못했다. 재능의 크기나 성취의 수준과는 상관없이 공통적으로 보이는 열망이었다.
“선배들이 닦아놓은 길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벅차서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는 자들이 수두룩한데, 마법사史에 이름을 남길 정도의 업적을 세울 수 있다면 남은 시간이 일 년이든 십 년이든 그게 무슨 상관일까요.”
아이샤의 눈이 기묘한 열기에 젖어 반짝거렸다.
“적어도 스와디는 내 의견에 동의할 거예요. 그 애 이름은 마법사뿐만 아니라 멜브란트 역사서에도 남게 됐잖아요.”
1차 괴물 사태를 일으킨 다나 트왈릿을 살해함으로써 2차 괴물 사태가 일어나게 만든 원흉이지만, 2차 괴물 사태에서 자신의 생명을 다 바쳐서 브란젤을 지킨 영웅, 마법사 스와디.
복수를 긍정하는 멜브란트인들은 스와디가 다나를 살해했다는 것에 개의치 않았다. 도리어 용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범인을 처벌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그 때문에 2차 괴물 사태가 일어난 건 불행한 일이지만, 스와디가 자신의 목숨으로 브란젤을 지켰으니 충분한 대가를 치렀다는 식이었다. 법과는 상관없는, 심정적인 용서였다.
오드리는 스와디의 명성을 퍼뜨리는 데에 적잖은 수고를 들였다. 다나와 관련된 치부를 끝까지 감추고 싶어 하던 왕궁마법사장을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설득했고, 스와디에 호의적인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 뿌린 돈도 엄청났다.
그럼에도 자신의 수고가 만들어낸 결과물을 맞닥뜨린 건 처음이었다.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기쁘고 흡족해야 하는데 뭔가 잘못된 일을 저지른 것처럼 마음 한쪽이 켕겼다. 그녀는 워커가 아이샤에게 동조하기 전에 서둘러 끼어들었다.
“아이샤 씨가 잘못 알고 있는 게 있어요. 워커가 처음에 제시했던 예상 개발기간은 겨우 일 년이었다고요. 그게 벌써 칠 년 전의 일이니, 절반으로 줄인 게 아니라 일곱 배로 늘어난 거죠.”
아이샤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오드리의 기대대로였다.
“일 년이요? 워커 씨, 진짜 일 년이면 된다고 그랬어요?”
“크흠, 흠, 흠. 그땐 일 년이면 충분할 줄 알았어요. 내가 직접 강철새를 타고 시험비행을 하고 있을 때라고요.”
“세상에……. 뻔뻔하게 거짓말하는 거 봐. 레이디 오드리, 칠 년 전이면 열한 살 때죠? 레이디가 어리다고 거짓말한 거예요! 일 년은 무슨, 본인도 십 년은 생각했을 거면서! 이런 사기꾼! 어쩐지 레이디 오드리를 만나기 전에 여기저기 엄청 떠돌아다녔더라!”
“아이샤 씨가 뭘 알아요? 난 그때 진짜 성공을 목전에 두고 있다고 생각했다고요.”
아이샤와 워커가 아웅다웅 싸우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부드럽게 풀렸다. 한바탕 소란이 가라앉고 나자 오드리가 아이샤를 걱정했다.
“그나저나 아이샤 씨, 집이 이렇게 엉망이 되어서 어쩌죠? 셰비언이 저지른 일이니 배상은 내가 하겠지만, 수리하는 동안 지낼 곳은 있어요?”
아이샤는 납작해진 샹들리에와 금이 간 천장, 부서진 계단, 벗겨진 벽지 등등을 살폈다. 처음으로 산 집이 가구를 들이기도 전에 이 꼴이 된 걸 보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주저앉은 바닥에서 갑자기 차가운 기운이 올라오는 것 같기도 했다.
“레이디 오드리께서 배상을 해주신다니 정말 다행이에요……. 잠이야 뭐, 동료들에게 가서 신세지면 되죠. 좁다고 난리치기야 하겠지만 설마 쫓아내겠어요?”
“그럼 서로 불편하잖아요. 아이샤 씨, 내가 호텔을 잡아줄 테니까 거기서 지내요. 이 기회에 시중드는 사람이 있는 생활이 어떤 건지 체험도 해 보고요. 어느 호텔이 좋을까……. 지금 가서 골라볼래요? 베텔 경이 도와줄 거예요.”
오드리가 아이샤를 일으켜 세웠다. 아이샤는 어어 하는 사이 그녀에게 휘말려 일어났다. 하지만 채 한 걸음을 떼기도 전에 셰비언이 그들의 발목을 잡았다.
“오드리, 내가 아이샤와 워커에게 할 말이 있으니까 팔 놔주고 먼저 돌아가요.”
“응? 뭐라고?”
“인간 마법사들에게 전해야 할 말이 있어요. 오드리와 베텔 경이 듣기엔 적절하지 않으니 지금은 자리를 피해줘요.”
아이샤는 자라처럼 목을 움츠렸다. 나는 왜 하필 이런 순간에 오드리와 딱 붙어 있는 걸까! 자신의 운 없음이 한탄스러웠다. 찌푸리지도 않고 화내지도 않는 조용한 얼굴 너머에서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것만 같았다.
“그 말, 내게도 해주기로 했던 것 같은데? 그런데 지금은 자리를 피해달라고?”
“당사자에게 먼저 전하는 게 인간의 예의잖아요.”
아이샤가 슬그머니 오드리에게 잡혔던 팔을 빼냈다. 오드리의 시선이 점점 험악해지고 있음에도 셰비언은 차분하기만 했다.
“내가 정말 감출 거였으면 오드리 몰래 공간을 열어서 이 둘만 데리고 얘길 했을 거예요. 이런 얘길 굳이 꺼내서 오드리 기분을 상하게 할 이유가 없어요.”
기분이 상하는 걸 알면서도 이러냐! 비록 당사자지만 나중에 들어도 괜찮은데요! 워커와 아이샤는 비명을 지르고 싶은 걸 참고 구석으로 슬슬 물러났다. 조금이라도 두 사람의 시선이 안 닿는 곳에 있고 싶었다.
“나중에 얘기해 줄 테니까 지금은 일단 돌아가요. 가서 잠도 좀 자고, 간식도 먹고, 좀 쉬고 있어요. 지금 오드리에겐 휴식이 제일 중요해요.”
“그대는……. 이럴 때만 말을 잘해.”
셰비언이 까딱 고개를 끄덕였다. 오드리는 깊은 소외감 속에서 카프러스의 부축을 받으며 돌아섰다.
“참, 말하는 걸 깜박했네. 오드리, 돌아가는 대로 옐로 다이아몬드 장신구를 찾아서 착용해요. 내가 선물했던 거요.”
“…….”
“잘 때도 빼지 말아요.”
“충고 고마워. 내 꼭 그대의 말대로 하지.”
싸늘하게 내뱉는 말은 얼음을 품은 듯 차가웠다. 누구도 더 말을 보태지 않았기에, 오드리는 그대로 한 마디도 하지 않고 현관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때까진 자신의 대처가 나름 괜찮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녁노을에 젖은 정원을 보고 얼굴을 때리는 바람을 맞자마자 후회가 들었다. 좀 더 상냥하게 말할걸, 나중에라도 말해주겠다고 했으니 굳이 화낼 필요도 없는데 내가 왜 그랬을까, 내가 로렐라이의 주인이니 들을 자격 정도는 있다고 좀 뻔뻔하게 우겨볼걸…….
홱 돌아서서 현관 손잡이를 돌렸다. 하지만 손잡이는 장식품이라도 되는 양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오드리가 나가자마자 셰비언이 마법으로 잠근 것이다. 가라앉았던 화가 확 치솟았다.
“이게 무슨 짓거리야! 셰비언!”
오드리는 현관문을 거세게 걷어찼지만, 문은 꼼짝도 않고 발만 아팠다. 카프러스가 깡충깡충 뛰는 오드리를 챙겼다.
“아가씨, 아르젠 남작이 나중에 알려준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조금만 기다리면 됩니다. 그리 초조해하지 마세요.”
카프러스가 셰비언의 편을 들었다. 그의 공정함이 오드리의 심술에 불을 붙였다.
“경이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요. 그게 정론이라는 것도 알고. 그냥 이런 거에 일일이 반응하는 내가 너무 한심스러워서 그래요.”
“사랑을 하면 다 이렇게 됩니다. 상대방을 속속들이 알고 싶어지죠. 자신의 나쁜 점은 죄다 감추고 싶어지고요. 자연스러운 거니 그리 한심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서로를 더 잘 알아가는 게 연애 아니겠습니까.”
“그러게요, 나도 연애를 좀 많이 해 볼 걸 그랬어요. 그럼 참고할 만한 경험이 내 안에도 쌓여 있었을 텐데.”
“연애를 많이 한다는 건 그만큼 헤어짐도 많이 겪는다는 얘기죠. 굳이 그런 아픔을 자처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아르젠 남작이 아가씨를 많이 아끼고 사랑하니 그걸로 된 겁니다.”
“아 알겠어요, 알겠어. 오늘 보니 베텔 경도 말을 참 잘하는 사람이네요. 진작 알았으면 좋았을 걸 그랬죠. 아, 다른 남자라도 만나서 연애가 뭔지 좀 배울까 보다.”
쿨럭, 쿨럭! 내내 침착하던 카프러스가 갑자기 기침을 했다. 마신 것도 없으면서 사레가 들렸다나, 뭐라나.
“아무리 정식 약혼은 아니라지만 연인에게 신의를 지키셔야지 않습니까.”
“신의라……. 가볍게 만나면 되죠. 내 마음만 안 주면 그만 아니겠어요? 예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나랑 가볍게 연애하고 싶어 하는 남자 많아요. 사교모임에서 추파를 얼마나 많이 받는데요.”
오드리는 비뚤어질 대로 비뚤어진 마음으로 용의 연애방식을 설명했다. 용은 연인의 마음만 확실하게 가진다면 그가 누구와 결혼하더라도 상관하지 않는다고, 그래서 그런지 셰비언이 자신에게 너무나 당당하게 불륜을 제안한 적도 있었다고 말이다.
“그, 그게 말이 됩니까?”
놀라라고 한 말이지만 너무 놀라니까 미안하다. 오드리는 뒤늦게 말을 덧붙였다.
“경도 어이없죠? 하하, 그때 내가 얼마나 어이가 없던지……. 셰비언이 나중에 말해줬는데, 용의 사회에선 결혼이 없대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아가씨는 인간인데 어떻게 그렇게 제멋대로……! 설마 정식으로 약혼하지 않으시는 이유가 그것 때문입니까?”
불똥이 엉뚱한 곳으로 튀었다. 카프러스가 당장이라도 셰비언을 튀겨먹을 것처럼 화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오드리는 생각지 못한 결과에 이마를 짚었다.
“설마요. 셰비언 절벽에서 지내는 동안 아이샤 씨가 셰비언에게 인간 사회의 규칙과 상식을 가르쳤어요. 특히 결혼 제도에 관련된 것에 있어서는 대학의 강의 못지않았고요. 아이샤 씨는 자신이 셰비언의 스승이라고 자부해도 돼요.”
그러나 오드리의 열성적인 설명에도 불구하고 셰비언에 대한 카프러스의 호감도는 바닥으로 추락한 뒤였다. 닫힌 문을 바라보는 눈초리가 몹시 사나웠다.
“약혼도 결혼도 하지 않는 이유는 오로지 내 사정 때문이에요. 그러니 이 얘기는 여기서 끝! 이렇게 된 거 빨리 돌아가죠, 할 일도 많은데!”
오드리는 대충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 카프러스의 입을 막았다.
“강철새가 성공했다는 말을 들으면 이디케가 엄청 좋아할 거예요. 얼마나 좋아할지 기대되지 않나요?”
“네, 몹시 기대됩니다.”
대답은 성실한데 어째 영혼이 없다. 오드리는 남몰래 식은땀을 흘렸다. 아무래도 제 무덤을 판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셰비언은 오드리가 나가자마자 현관문과 창문에 마법을 걸었다. 대화가 새어나가지 않고 출입이 불가능하게 막는 마법이었다. 그 여파로 팔뚝의 상처가 다시 도져 옷자락에 피가 번졌다. 그는 혀를 차며 옷자락을 붕대 삼아 팔을 동여맸다.
“거기 구석에서 뭐 하는 거야? 마법사가 아니라 가구가 되기로 했나 보지?”
두 인간 마법사는 비처럼 쏟아지는 짜증을 묵묵히 견뎠다. 나는 지금 수련 마법사다, 제자를 받을 나이가 아니다, 내 앞에 있는 건 빌어먹게 존경하옵는 스승놈이다 등등의 자기 최면을 걸면서.
셰비언은 한바탕 성질을 부리고 나서야 본론을 꺼냈다. 그가 본 것을 바탕으로 마법망이 낡아가는 이유에 대한 추측을 늘어놓자 두 마법사의 안색이 점점 파리해졌다. 특히 워커의 충격이 컸다.
“그, 그런 걸 어떻게 이제까지 아무도 몰랐던 거지? 마법도구가 일상화된 지가 벌써 몇 백 년인데……! 셰비언, 네가 잘못 안 거 아니야? 어떻게 하룻밤 만에 그런 결론을 낼 수가 있어? 지역에 따라 마법망의 상태가 다른 건 공식적인 사실인데, 그 부분을 너무 허술하게 넘긴 거 아냐?”
워커는 셰비언의 말을 믿고 싶어 하지 않았다. 대신 어떻게든 셰비언이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는 말을 듣고 싶어 이런저런 시도를 했다. 그러나 어떤 시도도 소용이 없었고, 도리어 셰비언의 화만 돋웠다.
“네게 이득이 되는 걸 가르칠 땐 위대한 용이고 마법의 주인이더니, 인간이 제 미래를 깎아가며 현재를 살고 있다고 하니 앞뒤 구분 못하고 속단하는 칠푼이 용이 되는군.”
“하지만 너는 내가 말하기 전까지는 마법망이 엉망이라는 사실조차 몰랐잖아.”
“그래, 그 부분에 대해선 고맙게 여기고 있어. 네가 아니었다면 아직까지도 마법망의 상태를 전혀 몰랐을 테니까.”
“마법 시대가 끝날 때가 됐다는 내 추측이 틀렸다고 말한 건 너야. 그런데 이제 와서……!”
“워커, 너는 내게서 다른 말을 들으려 하기 전에 내가 사실을 알자마자 인간에게서 마법을 거두지 않은 걸 고맙게 여겨야 해.”
“마법을 거둔다고요?!”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아이샤가 크게 놀라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것이, 셰비언에게서 마법망에 대해 들을 때보다 더 놀란 것 같았다.
“난 매번 말해왔어. 나는 마법을 도둑맞은 게 아니라 그냥 꺼내준 거라고 말이야. 설마 들은 적 없나?”
“듣기야 들었지만……! 그래도 그렇지, 무슨 수로 어떻게 마법을 거둬요?”
“누가 마법사 아니랄까 봐 둘 다 말이 많아.”
셰비언이 짜증스럽게 미간을 찌푸리고 손가락을 튕겼다. 그 순간, 워커와 아이샤는 마법을 ‘잃었다’. 보고 듣고 맛보는 등 타고난 감각 중 하나가 사라진 것처럼 그렇게 마법에 대한 감각이 사라졌다.
“어어, 어어……?”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문장을 띄우려 했지만, 손바닥에선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빈 손바닥이었다. 일찍이 느껴본 적 없던 상실감이 밀려들었다. 하루아침에 장님에 벙어리, 귀머거리가 되면 이런 기분일까 싶었다.
“동족에게서도 마법을 거두는데, 인간에게서 마법을 거두는 게 뭐가 어려울까.”
셰비언이 다시 손가락을 튕겼다. 망연자실하게 앉아 있던 두 마법사는 감각을 되찾고 아이처럼 울었다. 셰비언은 그들의 울음소리를 배경음악처럼 깔고 느긋하게 설명했다.
“인간은 많지만 마법사는 적어. 마법도구에 걸어둔 마법은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사라질 테니, 마법사에게서 재능의 씨앗을 거두면 그만이지. 마법망은 복원력이 있으니 시간이 지나면 점점 나아질 테고.”
아이샤의 눈에 경계의 빛이 떠올랐다. 셰비언이 입버릇처럼 말하던 ‘마법의 주인’이 대체 어떤 건지 온몸으로 체감하였으니,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뭘 하든 셰비언에게 위협이 되진 않겠지만 말이다.
“맞아요……. 수고스럽게 마법도구 전부를 망가뜨릴 필요는 없어요. 모든 마법사가 마법을 잃으면 그게 인간에게서 마법을 거두는 거죠. 마법도구는 영원하지 않으니까 마법망을 위해서라면 그게 가장 좋은 해결책일 거예요. 그런데 왜 그렇게 하지 않으신 거죠?”
셰비언은 아이샤의 경계심을 퍽 가상히 여겼다. 개처럼 꼬리를 내리고 뭐든 하겠다고 벌벌 떠는 것보다는 훨씬 보기 좋았다. 그래서 솔직하게 대답해 줬다.
“오드리가 있으니까.”
용감한 왕궁마법사 아이샤는 잠시 말을 잃었다. 셰비언의 대답이 어찌나 어이가 없는지, 눈에선 눈물이 나는데 입에선 웃음이 났다.
“레이디 오드리가 다치거나 죽지 않도록 세심하게 살펴야겠네요. 덕분에 인간의 문명이 무너지지 않게 되었으니.”
“오호, 의외야. 오드리를 미끼로 협박할 줄 알았는데.”
“레이디 오드리가 오래 살아봐야 얼마나 오래 살겠어요. 기껏해야 백 년인데 문명 전체를 걸고 도박을 하느니 레이디 오드리를 설득해서 셰비언님더러 마법망을 고쳐 달라고 부탁하게 만드는 쪽이 낫죠.”
“마법사는 사회를 이끄는 엘리트 지식인이라더니 과연 영리해. 샤를레아가 네 영리함의 절반만이라도 따라갔다면 봉인구에 갇힐 일도 없었을 텐데.”
“그 영리함을 조금만 더 발휘해 볼까요. 셰비언님이 입은 부상은 인간 때문이라고 하셨죠. 뭘 하고 오신 거죠? 레이디 오드리를 위해 마법망을 보수하기라도 하셨나요?”
셰비언이 쓴웃음을 지으며 옷자락을 걷어 팔뚝의 상처를 드러냈다. 비늘이 빠진 자리에 허연 살이 반쯤 차오른 상처는 보기만 해도 처참했다. 워커가 숨을 삼켰다.
“정답. 마법망이 하루라도 더 멀쩡하라고 비늘이며 피며 잔뜩 쓰고 왔지.”
“……용의 신체는 주변의 마력을 어지럽히고 망가뜨려요. 3차 괴물 사태가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을 해주실 수 있나요?”
“그거야 목적 없이 뿌려진 것일 때나 그렇지. 자, 받아.”
하얗게 빛나는 비늘이 아이샤와 워커에게 각각 한 장씩 돌아갔다. 손바닥만 한 앞뒷면 가득히 마법진이 빽빽하게 새겨져 있었다. 마법진을 들여다보던 아이샤가 감탄사를 뱉었다.
“마법망 안정화 수식을 개량해서 마법진으로 바꾸셨군요. 이거…… 일종의 레펙치오네요. 보석이 아니라 용의 비늘이 재료일 뿐이지.”
“인간은 너무 많은 곳에 퍼져 살고 있는데 내 몸뚱이는 하나뿐이니까. 내가 급한 불을 껐으니 나머지는 인간이 책임져야지.”
아이샤가 굳은 얼굴로 끄덕이며 비늘을 품에 넣었다. 하지만 워커는 비늘을 챙기지 않고 셰비언에게 도로 내밀었다.
“끝날 때가 왔다면 끝을 맞을 준비를 해야지. 이건 책임을 뒤로 미루는 짓에 불과해. 셰비언, 네가 급한 불을 꺼주고 사실을 알려줬으니 그걸로 충분해. 고맙다.”
“워커 씨, 미쳤어요?”
아이샤가 놀라 비늘을 빼앗으려 들었지만, 워커는 미리 대비한 것처럼 피했다. 아이샤는 재차 시도하다 워커에게 멱살을 잡혔다.
“아이샤 씨가 괴물 사태를 언급한 덕분에 생각난 게 있어요. 왕궁마법사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마법망 안정화에 관심이 많았더군요. 대체 왜죠?”
숨이 막힌 아이샤가 기침을 하며 밀어내는데도 워커는 조금도 손을 늦추지 않았다.
“그땐 마법망이 불안정한 지역에도 수도는 깔려야 하고 마법등은 들어가야 하니 연구한다고 했었죠. 아이샤 씨, 그게 정말이에요?”
“다, 당연히…….”
“가당찮은 거짓말! 내가 얼마나 떠돌았는지는 아이샤 씨도 알 거예요. 마법망이 불안정한 지역엔 수도가 거의 들어가지 않아요. 만탈락? 만탈락은 대단한 예외죠! 거긴 한때 랄리우스 후작령의 중심도시였으니까!”
아이샤가 기어이 워커를 떨쳐 내는 데 성공했다. 볼품없이 바닥을 구른 워커가 아이샤에게 삿대질을 하며 소리를 질렀다.
“알고 있었잖아! 왕궁마법사라는 집단 전체가! 실속도 없는 마법망 안정화 연구에 공을 들이고, 스크롤 계약을 맺자 마법망 안정화 스크롤을 대량으로 양산해서 비축했어! 지금은 마법망 안정화 스크롤을 마법도구 수명 연장에 효과가 있다며 판매하고 있지! 내가 바본 줄 알아?”
“그러게, 바보가 아니네. 마법만 아는 바보면 그나마 좋았을걸.”
워커고 아이샤고 셰비언은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셰비언은 두 마법사의 싸움을 흥미진진하게 관망했다.
“알고 있었으면서 왜 내버려 뒀지? 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아무것도 안 했다니, 이런 섭섭할 데가. 마법망 안정화 연구를 했고 마법망 안정화 스크롤을 양산해서 비축했고 지금은 사방에 퍼뜨리고 있지. 이런 걸 했으니까 당신 같은 멍청이도 알아챈 거잖아.”
“왜 너희만 알고 있었냐고! 협회에 알렸어야지! 마법 없는 삶을 진작 대비했어야지! 이러다 어느 날 갑자기 끝이 오면 그때의 혼란을 어떻게 책임지려고?”
“협회가 정말 몰랐을 거 같아?”
워커가 놀라 눈을 부릅떴다. 아이샤는 텅 빈 집이 너무 아쉬웠다. 뭐라도 손에 잡히는 게 있으면 저 멍청이의 머리를 후려쳐 줄 텐데.
“협회의 고위직은 다 알고 있어. 괜히 새로운 마법도구를 개발할 때마다 협회에 설계도와 수식을 넘기라고 압박하는 게 아니야. 그들은 설계도와 수식을 분석해서 마법망에 지나친 부하를 주는 마법도구는 왕궁마법사 쪽에 통보하고, 연락을 받은 왕궁마법사는 어떤 트집을 잡아서라도 그것들의 판매를 막아.”
“그, 그런…….”
“왕궁마법사 쪽도 비슷해. 오로지 왕궁마법사 종신 계약을 한 마법사만이 이 사실을 알지. 젠장, 내가 돈을 이 정도나 벌게 될 줄 알았으면 종신 계약 따위 절대 안 하는 건데.”
원래 아이샤는 종신 계약을 할 자격이 없었다. 그녀는 성취욕은 있으나 탐구심이 그리 강하지 않고, 멜브란트 왕실에 대한 충성심도 부족했다. 하지만 셰비언과 얽히면서 왕궁마법사 쪽에선 그녀를 붙들어둘 필요성이 생겨났고, 마침 아이샤는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 약점을 갖고 있었다.
아이샤가 성질을 부리며 워커를 걷어찼다. 워커가 비명을 지르며 다리를 감쌌다.
“뭐? 끝을 대비해? 꼴같잖은 소리 하고 있네. 말이 쉽지, 그게 그렇게 간단한 일인 줄 알아? 문명의 끝을 뭐 어떻게 대비하잔 건데? 여러분, 문명의 종말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편리를 내려놓으세요! 마법도구를 쓰면 안 됩니다! 이러면 사람들이 네, 하고 얌전히 따라줄 것 같아?”
마법도구가 마법망을 망친다는 걸 처음부터 알고 썼겠는가. 문제를 알아챘을 땐 이미 상황이 심각해진 뒤였다. 내리막길을 구르기 시작한 눈덩이를 붙잡을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시도한 사람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하나같이 끝이 좋지 않았다.
“마법 없는 삶이 어떻게 문명의 끝이 돼? 이제껏 쌓아온 지식이 있고 제도가 있는데! 마법 없이도 충분히 삶을 유지하는 지역은 얼마든지 있어!”
“그러니까 네가 멍청이인 거야.”
아이샤가 바닥을 가리켰다.
“마법이 사라지면 바로 여기, 멜브란트의 심장이라는 브란젤부터 무너질 거야. 당장 수도가 끊기고 물이 말라 버릴 텐데 그걸 어떻게 감당할 거지? 작년 여름에 이미 비슷한 상황을 경험해 봤잖아.”
“그건……. 땅을 파서 우물을 만들면……. 호수가 있는데 샘이 나지 않을 리 없어.”
“중앙공원의 호수는 인위적으로 강줄기를 옮긴 흔적이라는 걸 모르는군. 옛 마법이 아직 남아 있던 시절, 마법사들은 왕국의 새 수도를 위해 강줄기를 옮기고 도시의 샘은 호수로 흘러들어가도록 조절했어. 홍수와 가뭄을 막기 위해서였다는데 마법 역사상 가장 멍청한 짓 중 하나로 꼽히지. 옛 마법이 사라진 지금은 되돌릴 방법이 없거든. 브란젤은 마법 없이 유지될 수 없는 도시야. 당신이 사는 도시가 어떤 곳인지 정도는 공부해, 자칭 천재 마법사 씨.”
아이샤가 통렬하게 빈정댔다. 역사와 지리에 관심이 없었던 워커는 할 말이 없었다. 설령 지금의 마법을 기계로 전부 대체한다고 해도 물이 나지 않는 도시를 유지하는 건 불가능했다.
“멜브란트의 심장이 무너지면 왕국도 함께 무너져. 국경을 지키는 군인은 월급이 나오지 않으면 창검을 내팽개칠 테고, 치안대의 명예는 빛바랜 깃발이 될 테지. 울타리가 사라진 세상에 제도? 헛소리지! 오로지 개인의 양심에만 기대야 하는 무법지대가 될 거야.”
“너무 과장해서 말하는 거 아냐? 수도가 무너진다고 왕국이 무너진다니. 설령 멜브란트가 무너진대도 다른 나라가 있…….”
“어쩌면 나랍은 괜찮을지도 몰라. 거긴 본래 마법도구를 적게 쓰는 나라니까. 하지만 멜브란트는 나랍이 아니지. 이 왕국은 브란젤에 너무 많은 것들을 집중해 왔고 왕실은 브란젤을 놓을 생각이 없어. 이건 마법도구에 의존해 온 나라들 전부가 비슷한 상황이야. 각 나라의 협회 윗대가리들 전부가 마법망 과부하 문제에 협력하고 있다는 걸 내가 굳이 설명해야 아나?”
“용이 경고하면 생각이 바뀔 거야. 이젠 기계도 많이 발전했어. 예전처럼 마법에만 의존할 필요가 없다고!”
“그거 참 장밋빛 전망이네. 인간을 너무 이성적인 동물로 생각하는 거 아냐?”
“인간과 동물이 같아?”
“뭐가 다른데? 다를 게 대체 뭔데? 배고프면 사람이나 짐승이나 다 똑같아져.”
나랍과 멜브란트의 혼혈아. 아이샤는 나랍에서 태어났지만 하필 멜브란트인에 가까운 외형을 타고났다. 그게 그녀의 불행이었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친척에게 버려진 그녀가 멜브란트에 건너와 스승을 만나고 끝내 왕궁마법사가 될 때까지 겪은 이야기를 엮으면 브란젤의 귀부인들을 한 달쯤 울릴 수도 있을 것이다.
아이샤는 인간의 양심을 믿었지만, 동시에 인간의 이기심과 욕망도 믿었다.
“당신이 브란젤에 살고 있어서 체감이 잘 안 되나 본데, 지금 멜브란트의 다른 지역에선 연이은 흉작으로 먹을 게 없어서 난리야. 물 정화도구와 담수저장고를 제대로 갖추고 활용한 지역만이 가뭄을 이겨냈고, 저장고의 온도조절도구에 투자한 지역은 그나마 입에 풀칠을 하는 정도지.”
“그 정도라고……?”
“바닷가에 있는 도시 중에는 급한 대로 바닷물을 정화도구에 넣어서 민물로 바꿔서 식수로 쓰는 곳도 있어. 이런 상황에 놓인 사람들에게 마법 없는 삶을 대비하세요! 마법도구에 너무 의존해선 안 됩니다! 이런 말이 먹힐 것 같아? 그 잘난 비마법이, 기계가 지금의 마법을 대신할 수 있을 것 같아?”
워커는 차마 입을 떼지 못했다. 의기양양해진 아이샤가 목소리를 높였다.
“어차피 찾아올 끝이라면, 어떻게든 미뤄야지.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뤄야지! 그래야 희망을 볼 수 있는 것 아니겠어?”
아이샤가 셰비언을 향해 돌아섰다. 그녀는 지극히 정중한 태도로 셰비언에게 인사했다.
“감히 제가 대표를 자청할 순 없겠지만, 인간 마법사의 한 사람으로서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나 말고 오드리에게 감사해.”
“당연히 레이디 오드리께도 감사드려야죠. 레이디 오드리가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왕궁마법사 전체가 그분을 지킬 겁니다.”
“네가 그런 약속을 턱턱 할 수 있을 정도인가?”
“어제까진 할 수 없었지만 오늘부터는 할 수 있게 됐습니다. 저는 이제 인간으로서는 유일무이한 회복마법사니까요.”
아이샤는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마법 전수가 거칠어 수명이 십 년쯤 줄었다고 해도 그게 무슨 상관인가? 살아 있는 동안 영광을 누리면 되는 것이다. 더불어 죽어서 이름을 남길 수 있다면 더욱 좋겠지만 그건 좀 어려울 듯하니 하나라도 해야지.
“워커. 당신이 정말로 셰비언님이 고맙고 책임을 미룬 것에 죄책감을 느낀다면, 끝을 대비하느니 하는 헛소리는 말고 그 비늘을 협회에 가져가. 협회의 고집쟁이들을 설득해서 마법 시대가 끝나지 않게 하는 게 당신의 책임이야.”
워커가 비척거리며 일어섰다. 그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이 짙었다.
“당신의 강철새를 위해서라도 그래야 하지 않겠어? 설계는 비마법…… 아니, 기계를 기반으로 했다지만 동력은 어쩔 수가 없어서 결국 마력구슬을 썼다며.”
비마법 대신 기계라는 단어가 퍼진 지도 한참인데, 아이샤는 여전히 비마법이라는 단어를 즐겨 썼다. 하긴 그런 사람이 어디 아이샤뿐일까. 마법사 중 열에 아홉은 기계가 아니라 비마법이라는 말을 고집하는걸. 그나마 아이샤는 워커와 친분이 있어서 단어를 고쳐 쓰는 예의라도 보이는 것이다.
워커가 끝내 해결하지 못했던 부분을 짚어내는 아이샤는 몹시 즐거워 보였다. 그녀는 허리에 손을 얹고 도도하게 지시했다.
“혹시 누가 셰비언님이 마법망을 보수한 이유를 묻거든, 그저 인간에게 마법을 전해준 용으로서 인간을 아껴서 그런 거라고 해. 셰비언님이 레이디 오드리를 위해 마법망을 보수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누군가는 반드시 그녀를 이용하려 할 거야. 어쩌면 죽는 게 나은 상황에 놓일 수도 있어.”
“……그 정도는 나도 알아.”
워커가 심호흡을 하고 자세를 가다듬었다. 조금 전 아이샤의 기세에 눌려 형편없이 움츠러들었던 사람답지 않게 눈빛이 좋았다.
“일단 네 말에 따르긴 할 거지만, 그렇다고 네 말에 동의한 건 아니야. 인간은 마법 시대의 끝을 준비해야 돼.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뤄야 희망을 볼 수 있다니, 후대에게 책임을 미루려는 얄팍한 속셈에서 나온 말이 아니고 뭐야?”
아이샤의 이마에 핏줄이 섰다. 그녀가 막 소리를 지르려는 순간, 워커가 아주 단정적인 어투로 말을 이었다.
“언젠가는 기계와 마법의 위치가 뒤바뀔 날이 올 거야. 앞뒤 꽉 막힌 마법사들은 좀처럼 인정하지 않겠지만.”
“워커!”
“잘 들어, 인간은 마법을 빌린 거야. 빌려 쓰는 주제에 진짜 주인인 것처럼 거들먹대면 안 되지. 마법 없이 사는 세상을 미리 대비하지 않으면 언젠가 큰 낭패를 당하게 될걸.”
워커는 그렇게 아이샤의 속을 한바탕 긁어댄 다음에야 저택을 나갔다. 다리를 절룩거리면서도 문을 어찌나 세게 닫는지 저택이 흔들릴까 겁날 정도였다. 소음에 놀라 귀를 막았던 아이샤가 이를 갈았다.
“저게 자기 집 아니라고 막 나가네. 마법은 언제 거두신 거예요?”
“안에서 문을 열어서 자동으로 깨진 거야. 그리고 워커는 자기 집에서도 저러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어.”
“그게 무슨 자기 집이에요? 로렐라이에서 임대해 준 집이지.”
아이샤는 몇 마디 투덜거리는 걸로 워커에 대한 관심을 끊고 셰비언을 향해 눈을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그보다 셰비언님, 샤를레아가 봉인구에 들어갔다고요? 잡아 죽일 거라고 하시더니 언제 봉인한 거예요? 용을 잡을 땐 저도 한몫해야 한다고 그리 단단히 겁을 주시더니만!”
“용 잡으러 갈 거라고 하니까 요샌 자살하란 말을 그런 식으로 하느냐고 비꼬더니, 태도가 바뀌었군.”
아이샤가 민망해하며 얼굴에 부채질을 했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시선은 피에 젖은 셰비언의 옷자락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용 한 마리를 통째로 써서 마법망을 안정시키면 시간을 얼마나 벌 수 있을까요? 비늘과 피 뿐만 아니라 뼈도 살점도 쓸 수 있다면…….”
아이샤의 눈에서 불길이 이글거렸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 셰비언을 통째로 잡아 살점을 발라내기라도 할 기세였다.
“네가 이런 녀석인 줄 몰랐는데.”
“그야 미룰 수 있을 때까지는 미뤄야 하니까요. 마법 시대의 끝이라니, 워커 씨는 진짜 재수 없는 말만 골라서 한다니까요. 자기도 마법의 혜택을 받으며 자랐으면서!”
아이샤는 샤를레아의 본체 크기를 머릿속으로 가늠했다. 웬만한 저택보다 큰 몸뚱이가 하늘을 날던 걸 떠올리니 짜릿한 흥분이 몰려오면서 몸이 부르르 떨렸다. 예전엔 기억 속의 그 모습이 그저 두렵기만 했는데, 지금은 찬란히 빛나는 보물처럼 느껴졌다.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제 입으로 말해놓고 이제와 안 된다고 하진 않겠지.’
셰비언은 아이샤가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욕망이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지었다. 사실 그는 샤를레아가 오드리만 위협하지 않으면 굳이 그녀를 죽이기 위해 노력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샤를레아는 앞으로 오백 년은 바다 속에 처박혀 있을 테고 말이다.
하지만 오드리의 따뜻한 체온이 마음에 걸렸다. 안 그래도 이유 없이 조금씩 따뜻해지는 게 이상했는데, 아이샤가 샤를레아의 환영까지 봤다고 하니 더더욱. 샤를레아가 오드리를 들먹이며 자신을 협박했던 게 잊히질 않았다.
“당장은 안 돼. 일단 둥지부터 부숴야 하는 데다 내 몸도 회복시켜야지.”
“그렇죠. 인간 마법사 백 명, 천 명 있으면 뭐 하겠어요. 셰비언님이 계셔야지.”
아이샤가 입에 꿀이라도 바른 듯 아부했다. 하나 그 아부는 아부로 취급하기엔 너무나 사실이라서, 셰비언은 당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목이 부러질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무리하게 몸을 바꾼 탓에 안 아픈 곳이 없었다.
“회복마법 좀 써봐.”
“아, 네!”
잠도 실컷 잤고, 배도 채웠고, 상대가 용이긴 해도 본체가 아니라서 부담감도 덜했다. 처음보다는 훨씬 조건이 좋았다. 아이샤는 잔뜩 신이 나서 회복마법을 썼다. 따스한 빛이 그녀의 손에 맺혔다가 셰비언의 상처로 스며들었다. 스며들기만 했다.
“……어? 어어?”
아이샤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아무리 회복마법이 체질에 맞지 않는다지만 어제에 비하면 너무 회복이 안 됐다. 비효율적이다 싶을 정도로 마력을 때려 넣고 마법을 쓰자 겨우 피가 멎고 살갗이 조금 아물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비볐다. 믿을 수가 없었다.
“이런 것도 회복마법사라고……. 이래서야 아까 했던 말 지킬 수는 있겠어?”
셰비언이 아이샤를 보며 혀를 찼다. 불신이 가득 담긴 눈빛을 받은 아이샤는 충격에 휩싸였다. 애초 다 낫지도 않은 상태에서 대뜸 인간으로 몸을 바꾼 쪽이 누군데!
“제가 치료해서 셰비언님이 이만큼이라도 나은 거거든요?”
“본체 상태로 있다 보니 자연히 나은 게 아니고?”
“맙소사! 이럴 수가! 죽도록 마법 쓰고 이런 취급을 받다니 억울해서 살 수가 없네!”
아이샤가 연극적으로 가슴을 치며 억울해했다. 셰비언은 그런 아이샤는 내버려 둔 채 본체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몸 상태가 평소와 같았다면 단번에 몸을 바꿨을 테지만, 지금은 상태가 좋지 않아 준비 시간이 필요했다.
셰비언에게서 마력이 부풀어 오르는 걸 느낀 아이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녀는 앞뒤 가릴 것 없이 셰비언의 옷자락을 잡고 매달렸다.
“설마 지금 당장 본체로 돌아가시게요? 아니죠?”
“왜? 네 회복마법 효율이 너무 별로라서 아무래도 본체로 있어야 할 것 같으니 네가 이해해.”
아이샤가 제 머리를 쥐어뜯었다.
“레이디 오드리한테 행적도 들켰는데 왜 여기에 머무른단 건데요? 당장 헨젤가로 가세요!”
“이미 들킨 마당에 뭘 이리저리 옮겨 다니래? 게다가 이 꼴로 어딜 나가란 건데. 놔, 불편해.”
셰비언은 가볍게 손을 터는 것만으로도 아이샤를 떨쳐 냈다. 아이샤는 마법 외엔 멍텅구리처럼 구는 셰비언과 자존심 강한 오드리가 열애 중인 연인이라는 게 믿어지지가 않았다. 사귀다 열흘 만에 헤어져도 그러려니 할 만한 성격 조합이 아닌가.
“어, 어, 어떻게 그런, 그런 말을……! 계속 이러다간 레이디 오드리한테 헤어지잔 말을 들을걸요!”
기세 좋게 퍼져 나가던 마력이 뚝 움직임을 멈췄다. 셰비언이 흘끔, 아이샤의 눈치를 봤다. 아이샤는 용이 일개 마법사인 자신의 눈치를 봤다는 사실을 꼭 오늘 일기장에 적기로 마음먹었다. 일기장이 없긴 하지만 그거야 사면 된다.
“레이디 오드리가 진짜 헤어지자고 했어요?”
“……화해했어.”
“화해가 아니라 용서를 받으셨겠죠! 세상에, 레이디 오드리는 속도 좋지! 다친 주제에 연락도 않고 다른 여자 집에 누워 있던 애인을 용서해 주다니! 나라면 팔다리를 분질러 버렸을 텐데!”
아이샤는 일부러 호들갑스럽게 감탄했다. 어디로 들어도 셰비언 기분 상하라고 하는 말이었다. 앞으로 할 일 때문에라도 셰비언이 자신을 죽이지 않을 거라는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자꾸 간덩이만 커졌다
한데 죽이지는 않아도 화는 낼 줄 알았던 셰비언은 어째 말이 없었다. 오히려 이제 깨달았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이샤는 셰비언이 자신의 놀림을 극복하는 방법을 깨우친 게 아닐까 의심했다.
“셰비언님이 여기서 동의를 하면 어떡해요?”
“내가 여기에 있었던 게 딱 그런 상황이었던 건가? 충분히 화낼 만한?”
“그럼요. 셰비언님은 로맨스 소설도 많이 읽었다면서, 그걸 왜 본인에게 적용을 못해요?”
이번엔 아이샤가 셰비언을 바보 취급할 차례였다. 그녀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쌓인 억울함을 놀림으로 바꿔 분출하려는 순간, 현관문이 벌컥 열렸다. 놀란 아이샤가 사레가 들려 컥컥거렸다.
“쿨럭! 쿨럭쿨럭! 베, 베텔 경……? 베텔 경이 여긴 왜 왔어요? 젠장, 내 마법도구 중엔 제 몫을 하는 게 하나도 없네!”
“아직도 이러고 있었군.”
현관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카프러스가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셰비언을 바라보았다. 셰비언은 꽤 오래전부터 마음에 들지 않던 카프러스가 제 앞에 선 게 싫어 미간을 찌푸렸다. 다 아물어가던 상처가 다시 벌건 속살을 드러냈다.
“남작님, 다친 상태에서 그런 식으로 몸에 힘을 주면 피가 안 멈춥니다.”
카프러스는 셰비언이 보이는 이유 모를 적의에는 관심이 없는 듯 무심히 그의 시선을 흘려냈다.
“상태가 아무리 엉망이라도 남작님은 여기에 있으면 안 됩니다. 아가씨의 연인이 아닙니까.”
카프러스는 셰비언에게 챙겨온 로브를 입히고 후드를 씌웠다. 계절에 맞지 않게 두껍고 큰 로브라, 셰비언의 큰 키와 보기 드문 은발이 여유롭게 감춰졌다. 그는 점점 통증이 심해지는 통에 반항도 못하는 셰비언을 부축하고 아이샤에게 정중한 작별인사를 건넸다.
“아이샤 씨, 고생 많았습니다. 골칫덩이 손님은 제가 모셔갈 테니 편히 쉬시죠.”
아이샤는 빈말로도 아니라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무슨 보상이 있든지 오늘 같은 일을 또 겪는 건 사양이었다.
카프러스는 셰비언을 헨젤 저택 서관 옆에 있는 숲 공터에 데려다 놓았다.
좋은 곳이었다. 동그랗게 뚫린 하늘에서 쏟아진 달빛이 마차의 흔들림에 지친 셰비언의 머리와 어깨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신선한 풀 냄새와 바삭바삭하게 마른 낙엽 냄새, 가을꽃 향기가 뒤섞여 코를 간지럽혔다. 인기척에 놀라 도망치는 새의 날갯짓 소리가 들렸다.
“둥지라는 곳의 환경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여기도 지내기에 나쁘지는 않을 겁니다.”
“글쎄……? 소낙비라도 쏟아지면 고스란히 맞아야 할 것 같은 장소로군. 지붕 있는 곳은 안 되나?”
셰비언이 괜한 투정을 쏟아냈다. 카프러스는 표정 관리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수확제가 있는 시기엔 비가 안 옵니다. 괜한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걸 어떻게 장담하지? 네가 하랄이라도 돼?”
“용이 인간의 신을 언급하니 신선하군요. 어차피 인간 꼴로 계실 것도 아니잖습니까? 몸뚱이가 비 맞고 녹스는 철제 장난감도 아닐진대 굳이 장담이 필요하십니까? 정 필요하시다면 방수포라도 준비해 두겠습니다.”
카프러스는 단정한 얼굴로 상대방의 화를 돋우는 의외의 재주가 있었다. 안 그래도 카프러스를 거슬려하던 셰비언의 눈빛이 험악해졌다. 뭐라 꼬집기 힘든 긴장감이 두 남자 사이에 조용히 차올랐다.
“내가 인간 모습으로 있을지, 아니면 본체로 있을지 네가 어떻게 아는데?”
“얼른 나으셔야죠. 내일모레가 수확제 첫날입니다. 설마 수확제마저도 아가씨께서 저와 함께 나다니게 두실 셈입니까? 본체로 있을 때 부상이 빨리 낫는다고 하셨잖습니까. 마침 이곳은 사람의 출입도 뜸하고 공간도 충분히 널찍하니 편하게 쓰시면 됩니다.”
“매번 널 볼 때마다 생각했는데, 너 진짜 재수 없는 놈이구나.”
“남작님, 그런 험한 꼴을 하고 서관에 들어와서 바쁜 아가씨의 심기를 어지럽히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아까 낮에 자리를 비운 것만으로도 아가씨께는 굉장한 부담이었습니다.”
“이……!”
카프러스는 셰비언이 할 말을 찾는 틈을 타서 잽싸게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는 충분히 숲에서 멀어진 뒤에야 꽉 움켜쥐고 있던 손을 폈다. 검을 수련하느라 단단한 굳은살로 덮인 손이건만, 그의 손바닥엔 벌건 손톱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카프러스의 장담은 괜한 헛소리가 아니었다. 분명 수확제가 있는 시기에는 비가 드물었다. 적어도 최근 이십 년 이내로 수확제가 있는 때에 비가 온 적은 없었다.
한데 올해는 달랐다. 카프러스의 장담이 채 몇 시간도 못 가 깨지고 만 것이다. 자정 무렵부터 심상치 않은 구름이 몰려온다 싶더니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돌바닥에 부딪친 빗방울이 무릎까지 튀어오를 정도로 빗줄기가 거셌다.
좀처럼 잠들지 못하고 이불 속에서 뒤척거리던 오드리는 창문을 두들기는 빗소리에 주의를 빼앗겼다. 그녀는 이불을 걷어치우고 창문 앞에 섰다. 하지만 시간이 시간인 데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어서 창문 밖의 풍경이 잘 보이지 않았다.
매끄러운 유리창이 커다란 거울이 되어 오드리의 얼굴을 비췄다. 어딘지 불안하고 초조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오드리는 입꼬리를 올려 빙긋 미소를 지었지만 억지미소라는 게 확연히 드러났다.
“날씨가 왜 이 모양이지?”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 방에는 지금 오드리 혼자뿐이니까 당연했다.
“여름에는 태풍 한 번 안 보내더니 이 가을에 장대비……. 하랄이 미쳤나 봐.”
창문을 열자 차가운 빗방울이 방 안으로 들이쳤다. 얼른 닫기는 했지만 얇고 가벼운 잠옷 상의가 순식간에 축축하게 젖었다. 젖은 곳에서 썰렁한 냉기가 올라왔다.
“옷을 갈아입어야겠어. 젖은 채로 잠들 수는 없잖아.”
오드리는 들어줄 사람 없는 변명을 늘어놓으며 드레스룸을 뒤졌다. 하지만 그녀는 잠옷이 아니라 승마복을 꺼내 입고 흰 케이프 코트를 걸쳤다. 그리고 달처럼 은은한 빛을 내는 작은 휴대용 마법등을 찾아 꺼내들었다. 그러자 당장이라도 길거리에 나갈 수 있는 차림이 됐다.
그러나 오드리가 향한 곳은 길거리가 아니라 서관 옆에 있는 숲이었다. 정원 대신 조성된 곳이고 크기도 작다지만 엄연한 숲이고 숲 안쪽엔 마법등도 하나 없어 어두컴컴한데, 그녀는 겁도 없이 밤의 숲에 발을 디뎠다.
단단히 각오했던 것과는 달리 숲길은 쾌적했다. 한껏 팔을 뻗은 나뭇가지가 비를 막아주어 계속 깊게 눌러쓰고 있던 후드를 벗을 수 있을 정도였고, 정원사가 관리한 오솔길은 웃자란 풀 없이 깔끔해서 몸에 풀이 스치지도 않았다.
그저 실내에서는 충분해 보이던 마법등의 광량이 이 숲에선 형편없이 모자라게 느껴지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멀리까지 비추질 못하고 팔이 닿는 곳 정도만 간신히 밝히니 말이다. 숲의 어둠 속에서 흔들거리는 마법등의 빛이 여름밤의 반딧불 같았다.
하지만 앞이 잘 보이지 않아서 오드리가 길을 잃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는 몇 번 와보지도 않은 숲길을 용케 찾아내 숲의 공터에 다다랐다.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커다랗고 새하얀 용이 비를 맞으며 자고 있었다.
마법등을 든 손을 한껏 위로 치켜 올렸지만 보이는 거라곤 굳게 닫힌 눈꺼풀과 단단한 콧등 정도였다. 그 이상은 힘들었다. 그저 보이는 윤곽만으로 그 크기를 짐작할 뿐이지. 야외라 그런지, 아이샤의 집에 있을 때보다 덩치가 큰 것 같았다.
한 걸음 더 다가가자 그만큼 매끄러운 비늘이 또렷하게 보였다. 푹 패여 피가 고인 상처까지도 아주 잘 보였다. 오드리는 셰비언에게 바짝 붙어 상처에 마법등을 들이댔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아까까지는 없던 상처잖아.’
오드리는 왜 이런 상처가 생겼는지 짐작하고 질끈 눈을 감았다. 셰비언이 인간의 모습으로 몸을 바꾸면서 몸 이곳저곳에서 상처가 벌어지는 걸 똑똑히 본 지 대엿 시간이 지났을 뿐이니, 모를 수가 없었다.
‘내가 몰아붙인 탓이야. 나 때문에…….’
다리에서 힘이 풀렸다. 오드리는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후드를 벗은 채로 공터 안쪽으로 진입한 탓에 거칠 것 없이 쏟아지는 세찬 비가 그녀를 고스란히 적시고 있건만, 그런 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듯했다.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던 오드리가 셰비언의 콧등에 손을 얹었다. 셰비언 특유의 차가운 숨결이 팔목을 간지럽혔다. 안 그래도 비에 젖어 싸늘해진 몸이 부르르 떨렸다.
“셰비언.”
말한 것도 없는데 목소리가 갈라졌다. 오드리는 몇 번 더 이름을 부르다가 그만 입을 다물었다. 본체 상태로 회복에 집중하고 있는 셰비언에게 들릴 것 같지도 않거니와, 그가 깨어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대신 마력을 셰비언에게 들이부었다. 마력이 늘어났다고 셰비언이 확인도 해줬겠다, 마음껏 쏟아냈다.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몰라서 망설여지는 게 있긴 하지만, 어쨌건 쓰러지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다.
‘이래봐야 별 효과도 없겠지만……. 으음? 나아지네?’
오드리가 손을 댄 곳 바로 옆에 흉하게 벌어져 있던 상처가 눈에 띄게 아물었다. 시간에 따라 자연스럽게 나은 것처럼 봉합되어 흔적만 남았다.
바다에 물 한 바가지 쏟아서 티가 나길 바라면 그게 도둑놈 심보다. 오드리는 그걸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셰비언의 상처가 확연히 나아지는 걸 눈으로 확인하고 나니 기쁨과 설렘에 가슴이 떨렸다.
‘설마 내 마력 때문은 아니겠지.’
랄리우스의 핏줄에는 마법사가 태어나지 않고, 오드리도 재능의 씨앗을 타고나지 못했다. 마력 자체에 어떤 마법이 깃들어 있단 말도 들어본 적 없었다. 그러니 이 불가사의한 회복은 순전히 셰비언 스스로 하는 치료에 살짝 손을 얹은 일에 불과할 것이다.
오드리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을 진정시켰다. 그건 몹시 쉬운 일이었다. 아직도 한참 많이 남은 상처를 보는 동안 살짝 솟아올랐던 기쁨 따위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어디서 뭘 하느라 이렇게 다쳐왔는지 모르겠다 생각하자 불안이 왈칵 몰려왔다.
‘나는 뭐가 이렇게 불안할까…….’
이 불안이 하룻밤 푹 자고 나면 싹 사라지는 악몽이었으면 좋겠다. 셰비언의 마음이 손에 잡힐 듯 선명한데도 이렇게나 불안하다니 정상이 아니었다.
‘목걸이라도 채워서 매어놓으면 될까?’
오드리는 제 생각이 하도 우스워 픽 웃었다. 설령 셰비언의 목에 목줄을 건다 한들, 그래서 자신이 그 목줄을 단단히 쥐고 있다 한들 이 불안이 사라질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언제든 자신이 원하는 때에 목줄을 끊을 수 있는 존재이니까 말이다.
목이 탔다. 사방에 물이 이렇게 많은데 마실 수 있는 물이 없었다. 아무리 두들겨도 열리지 않던 문이 떠올랐다. 그때 치솟았던 화가 커다란 돌덩이가 되어 가슴에 들어앉은 듯 갑갑했다.
‘그대는 마법의 주인이니만큼 그에 맞는 책무가 있겠지. 마법사가 아닌 나는 거기에 끼어들지 못하고 그저 나중에 듣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할 거고……. 오늘 같은 일은 앞으로도 몇 번이나 생겨나겠지. 그게 당연하겠지.’
머리로는 이렇게나 냉정하게 생각할 수 있는데, 문제는 감정이었다. 웬만한 일에는 흔들리지 않는다고 자부해 왔던 게 우스울 정도였다. 사랑이라는 게 이렇게까지 파괴력이 있는 감정이었나 싶어 놀라울 정도였다. 머리와 가슴이 따로 논다는 흔한 말에 이렇게까지 공감이 될 줄은 몰랐다.
“차라리 내 쪽에서 놓아버리면……. 그럼 이렇게 불안해하지 않아도 될 텐데…….”
그녀는 무심결에 말을 뱉었다가 제가 더 놀라서 입을 틀어막았다. 마음에도 없는 말을 굳이 입 밖에 내서 좋을 게 뭐가 있던가. 게다가 상대가 자신을 떠나는 게 두려워 먼저 떠나겠다니, 멍청한 소리였다.
오드리는 허겁지겁 일어섰다. 젖은 머리칼이 수초처럼 얼굴과 목덜미에 달라붙었다. 그녀는 그제야 자신이 후드도 쓰지 않고 비를 고스란히 맞고 있었다는 걸 자각했다. 온몸이 비에 젖어 축축했다. 부츠 안쪽은 홍수가 났고 엉덩이와 허벅지엔 진흙과 풀이 잔뜩 묻었다.
“셰비언, 내일도 올게.”
내팽개쳤던 마법등을 들었다. 숲의 어둠에 비하면 나무나 조악하고 연약한 빛이지만, 지금은 이것만큼 의지되는 게 없었다.
하늘엔 먹장구름이 끼었어도 땅에 내린 달을 흉내 낸 마법등은 제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오드리는 마법등을 이리저리 휘두르며 아까 걸었던 길을 되짚어 돌아갔다. 흰 케이프 코트는 금세 숲에 묻혀 보이지 않게 되었다.
혼자 남겨진 셰비언이 슬그머니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좀처럼 초점을 잡지 못하는 눈동자가 오드리가 떠나간 쪽을 향해 이리저리 흔들렸다.
다음 날 아침, 다이앤은 평소보다 일찍 오드리를 깨우러 왔다. 그녀는 오드리가 허물처럼 벗어놓은 젖은 옷가지를 수습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아가씨, 어제 비를 얼마나 맞은 거예요?”
오드리는 다이앤의 질문에 대답할 정신이 없었다. 새벽에 실컷 비를 맞은 덕분에 감기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물……. 목말라…….”
“네, 이거 다 드시면 물 드릴게요.”
다이앤이 오드리를 일으켜 앉히고 약을 먹였다. 하지만 오드리는 약을 한 숟가락도 채 넘기지 못하고 토할 것처럼 기침했다. 죽어가던 사람도 벌떡 일어날 만큼 썼다. 혀를 잘라내고 싶을 정도였다.
오드리가 원망스러운 눈으로 다이앤을 바라보았지만, 다이앤은 왜 그러느냐는 눈빛으로 마저 마실 것을 종용했다.
“한참 남았어요. 마저 드세요.”
“이거 무슨 약이야? 뭔데 이렇게 써?”
“그야 당연히 감기약이죠. 그렇게 의심스러운 눈으로 보지 마세요. 새벽에 아가씨가 외출하시는 걸 봤거든요. 우산도 안 쓰고 나가시기에 딱 봐도 앓아누우시겠구나 싶어 미리 만들어왔어요.”
오드리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봐, 봤어? 얼마나? 얼마나 봤어?”
“별거 없어요. 우산도 없이 코트만 덜렁 걸치고 서관 옆 숲에 들어가시는 걸 본 정도? 따라가지 않은 걸 용서하세요, 전 용의 본체 같은 건 감당 못할 것 같아서 안 갔어요. 제가 따라가 봐야 별로 좋아하실 것 같지도 않았고.”
오드리는 얼굴을 감싸고 신음했다. 얼굴이 너무 뜨거운데, 이게 감기 때문인지 부끄러워서 그런 건지 구분이 안 갔다.
“으……. 잘했어…….”
“이디케와 릴리에겐 비밀로 했어요. 하지만 이 약을 안 드시면 더는 비밀이 아니게 되겠죠. 수확제 내내 드러누워 계셔야 할 테니까요.”
다이앤이 담담한 말로 오드리를 때렸다. 오드리는 차마 더 반항하지 못하고 군말 없이 쓴 약을 전부 마셨다. 다이앤은 컵 바닥을 확인하고서야 오드리에게 사탕을 물려주었다.
“진작 주면 좋았잖아. 입에 물고 마시면 한결 나았을 텐데.”
“애초 비를 안 맞으셨으면 더 좋았겠죠.”
“…….”
“급한 서류는 어제 다 정리해 뒀으니까 너무 걱정 말고 더 주무세요. 정오까지 푹 자고 일어나면 가뿐해지실 거예요.”
“일해야 하는데…….”
“오후에 하셔도 돼요. 강철새 시험비행 관련된 일은 제가 처리할 테니까 아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고요. 크게 아프기 전에 잡아야 가볍게 넘길 수 있는 거예요.”
“실컷 잤어.”
“그럼 그냥 누워 계시기라도 하세요.”
환자의 반항은 용납할 수 없다는 듯 어깨를 누르는 손이 단호했다. 결국 오드리는 얌전히 누워서 다이앤이 방을 정리하는 걸 구경했다. 물 자국을 지우고 젖은 옷가지를 정리하는 솜씨가 아주 야무졌다. 예전의 어설픈 하녀가 아니었다.
“다이앤, 우리가 만난 지 얼마나 됐지?”
“올해로 사 년째예요.”
“벌써 그렇게 됐나……. 너 처음 왔을 땐 이런 잡일은 하나도…… 못했었는데, 이젠 아주…… 다른 사람이야. 많이 변했어. 그런데 이 사탕…… 사탕 주제에…… 왜 이렇게 써? 깨물어도 써…….”
오드리의 말이 느려졌다. 그녀는 입에 넣은 사탕을 절반도 먹지 못하고 잠들었다. 살짝 벌어진 입에서 반쯤 으깨진 사탕이 굴러 떨어졌다.
“아가씨도 많이 변하셨어요.”
잠든 오드리는 대답이 없었다. 고른 숨소리가 평화로웠다.
“예전 같으면 제가 드리는 걸 이렇게 덥석 받아먹지 않으셨을 텐데 말이에요. 그게 약이든 사탕이든 꼭 확인을 하고 드셨는데 지금은…….”
다이앤은 사탕을 수습해 제 주머니에 넣고 젖은 옷가지를 챙겨 일어섰다. 효과가 아주 좋다는 걸 눈으로 확인하고 나니 마음이 아주 뿌듯했다. 그동안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
오드리가 감기에 걸려 드러누웠다는 소문은 순식간에 저택 전체로 퍼져나갔다. 작년 가을과 올해 봄을 무사히 넘겼던 오드리의 행운이 다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사람들을 자극했다. 평소 아무리 건강했다고 해도 오드리는 단명하기로 유명한 랄리우스의 핏줄이 아닌가.
헨젤 가에 익숙한 라비린은 저택의 이런 분위기를 예민하게 알아차렸다. 당장 그를 대접하기 위해 나온 하델조차 표정관리를 잘 못하고 있었다.
“오드리가 어디 아프기라도 한 모양입니다. 모처럼 친구가 왔는데 나와보지도 않고.”
“아무래도 전 약혼자와 얼굴을 마주하는 게 누나에겐 부담이 되는 거죠. 대신 제가 나왔으니 벨키스 경은 아쉽다 생각 말고 제게 주고 가시면 됩니다.”
“하하, 얼굴 맞대고 얘기한 게 바로 얼마 전의 일인데 오드리가 새삼 그럴 리가요. 기다리겠습니다.”
“그때 오죽 뻔뻔하게 굴었으면 이런 대접을 받겠습니까? 그리고 이젠 약혼자도 아닌데 누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시죠. 대단한 무례입니다.”
“오드리도 절 이름으로 부릅니다. 친구끼리 그럴 수도 있죠. 공자야말로 그렇게 가시를 세워서야 어디 사람을 사귀겠습니까? 내년이면 사교계에 얼굴도 내밀고 일도 배워야 할 텐데 사교성을 좀 길러야겠습니다.”
라비린이 눈을 한껏 휘며 꿀처럼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 저절로 호감을 불러일으키는 웃음이었지만, 하델은 하마터면 욕을 뱉을 뻔했다.
예전에 오드리와 연애를 하겠답시고 저택에 들락거릴 때도 마음에 안 들었는데, 일방적인 파혼으로 오드리의 평판을 바닥으로 떨어뜨려 놓고도 당당하게 찾아와 친구라고 말하는 게 꼴 보기 싫어 미칠 것 같았다.
저번에 오드리와 악을 쓰며 싸운 이후로 데면데면하게 지내고 있긴 해도 피를 나눈 남매였다. 기르는 개도 밖에서 맞고 들어오면 화가 나는 법인데 남매는 오죽할까.
그나마 하델이 이렇게 참고 있는 건, 라비린이 왕실의 초청장을 들고 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하델이 직접 나와서 오드리가 만남을 거절했노라, 그러니 초청장은 내게 주고 가면 된다 몇 번을 밝혀도 계속 엉덩이를 붙이고 오드리를 보겠다 우기고 있으니 점점 인내심이 줄어들었다.
“헨젤 공자는 백작님을 참 많이 닮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드리는 전 백작부인을 쏙 빼닮았는데 말입니다.”
한마디로 너네 남매 되게 안 닮았다는 소리렷다. 하델은 코웃음을 치고 싶은 걸 꾹 참았다.
사실, 까마귀 깃처럼 검은 머리칼을 빼놓고라도 그들 남매는 눈이 참 많이 닮았다. 깊고 그윽한 눈매는 물론이고 둘 다 초록색 계통의 눈동자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하델이 눈동자색이 어쩌고저쩌고 미주알고주알 떠들어대면 라비린이 그걸 꼬투리 삼아 한바탕 놀려먹을 게 분명했다. 실컷 당해본 패턴이었다. 제대로 반격하지 못할 거면 그냥 흘려야 한다는 걸 알긴 하는데 화가 치솟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테이블 아래 숨겨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바로 그때 구원자가 나타났다. 일어나자마자 다이앤의 닦달을 받아가며 단장한 오드리가 응접실에 나온 것이다. 아직 감기 기운이 남은 탓에 혈색이 창백하긴 있긴 해도 잘 자고 일어난 덕에 피부에서 윤기가 흘렀다.
오드리가 하델의 어깨를 짚고 서서 피식 웃었다. 빈말로도 단정한 숙녀답다고 말하기 어려운 자세고 미소였다. 반가워하며 고개를 들었던 하델이 놀라 딱딱하게 굳었다.
“아직 어리잖아. 크면 달라질지 누가 알아? 아들은 어머니 닮는다고 흔히들 그러잖아.”
“글쎄……? 네 어머니는 랄리우스의 특성이란 특성은 죄다 딸에게만 몰아준 것처럼 보이는걸. 얼굴, 머리, 체질…….”
“내 머리는 검은색이야.”
“그 머리 말고. 이거 말하는 거야, 이거. 이 안에 들은 거. 알면서 모른 체하기는.”
라비린이 씩 웃으며 제 머리통을 톡톡 두드렸다. 오드리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아, 이런 나쁜 놈 같으니라고. 남의 동생 놀려 먹으니까 좋아? 계속 그런 식으로 굴면 라디아타에게 일러바칠 거야. 라비린이 감히 내 동생을 놀렸으니 복수해 달라고 해야지.”
“라디아타는 네 언니가 아니라 내 동생이거든?”
“어쨌거나 너보단 내가 더 친해. 라디아타한테 우리 둘이 싸우면 누구 편을 들 건지 물어볼까? 내기할래? 나는 화염 방어 레펙치오 한 세트 걸 건데 넌 뭐 걸래?”
“물어보는 게 딱히 무섭진 않은데, 내기 물품이 너무 거창한 거 아냐? 나 같은 일개 기사에게 레펙치오 한 세트 내기라니 그거 너무하잖아.”
“남작 작위에 영지까지 있으면서 일개 기사는 무슨……. 네 재산 목록을 내가 다 아는데 그런 변명이 잘도 통하겠다. 말 걸어, 말. 네 목장에 윈디 정도는 아니어도 좋은 말 많잖아?”
하델은 라비린과 편하게 대화를 나누는 오드리의 모습에 1차 충격을 받았고, 그 내용이 참 경박하고 예의라곤 찾아볼 수 없다는 점에 2차 충격을 받았다. 적어도 하델이 알고 있는 오드리의 모습 중에 이런 길거리 건달패 같은 면은 없었던 것이다.
라비린이 히죽 웃으며 하델을 가리켰다.
“네 동생 놀란 거 봐라. 공자, 누님의 새로운 면모를 보게 된 소감이 어떻습니까?”
“어, 아, 그게…….”
“그만 좀 놀려! 한참 어린애 붙들고 뭐 하는 짓이야?”
오드리가 하델을 제 뒤로 감췄다. 하델은 아주 안심되면서도 어딘지 씁쓸한 이중적인 감정을 맛보았다. 오드리의 등은 생각보다 훨씬 작고 좁았다.
“농담 따먹기나 하자고 온 거 아니잖아. 왕실의 초청장을 네가 들고 왔다던데 그거나 꺼내봐.”
“짐작했겠지만 수확제 기념 무도회 초청장이야.”
“안 가.”
“그럴 줄 알았지.”
라비린이 짐작했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무도회 초청장 위에 새로운 봉투를 올렸다. 그것 역시 왕실에서 보낸 듯, 수사슴과 사자, 백합으로 이뤄진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문장이야 특별할 게 없다지만 봉투의 도안이 조금 특이했다.
“이런 양식은 처음 봐. 이건 뭐지? 무도회 초청장은 아닌 것 같은데?”
“작년에 셰비언이 받은 후론 네가 처음으로 받는 거야. 다음 사람은……. 글쎄, 모르겠군. 몇 십 년 안에 나오긴 할까?”
오드리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녀는 어린아이처럼 신나서 봉투를 집었다가 갑자기 근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이걸 왜 네가 전달해? 가짜 아냐?”
“아, 정말 의심도 많다. 내가 뜯어줘?”
“아니, 됐어. 내가 뜯을 거야.”
하델은 오드리고 라비린이고 자신을 까맣게 잊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파혼한 사이라곤 믿어지지 않게 자기들끼리 떠들어대더니, 냉큼 초청장의 봉인을 뜯어버렸다. 반투명한 백합이 봉투 안에서 피어났다가 사라졌다.
‘나도 저렇게 사라지고 싶다.’
하필 환절기에 쓰러진 오드리를 걱정하느라 쓴 심력이 아까웠다. 이럴 바엔 라비린이고 뭐고 직접 나오지 말고 집사나 보낼 걸 그랬다.
“역시! 작위 수여식 날짜가 잡혔군. 어디 보자, 날짜가……. 날짜가 뭐 이래?”
작위 수여식? 하델은 제 귀를 의심했다. 오드리가 제멋대로 떠들어대는 거야 무시하고 흘려버리면 그만이지만, 왕실에서 정식으로 통보가 왔다니 도저히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누나, 그게 무슨…….”
“날짜가 뭐 어떤데? 너무 늦어?”
라비린이 하델의 말을 썩둑 잘라먹었다. 어디로 봐도 고의였다. 하델은 이를 악물고 다시 말을 꺼내려 했지만, 이번엔 오드리가 먼저 선수를 쳤다.
“수확제 마지막 날이야. 이 날은 수확제 무도회가 있는 날이잖아. 젠장, 이러면 무도회에 빠질 수가 없잖아.”
“누나…….”
“너는 춤도 잘 추면서 무도회를 왜 싫어하는지 모르겠다니까.”
“왜 일 거 같아? 다 그놈의 벨트람 취급이 싫어서 그런 거야. 설마 진짜 모르고 물은 건 아니겠지?”
라비린은 오드리의 사나운 눈초리를 피해 다른 쪽으로 말을 돌렸다.
“대관식 다음 날이니까 타국의 왕족들도 대거 참석할 거야. 넌 새로 작위를 받은 신흥 귀족으로서도 참석해야 하고, 로렐라이와 데멘사의 주인으로서도 참석해야 해. 언제까지 그늘에만 있을 거야?”
라비린이 자연스럽게 로렐라이의 주인을 언급했다. 덕분에 하델은 3차 충격을 받았다. 아무리 약혼관계였다지만 서로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거 아닌가? 하고.
라비린과 오드리는 여전히 하델의 충격에 관심이 없었다.
“그거야 알지만……. 아, 괜찮은 드레스가 있는지 모르겠다. 시일이 너무 촉박하잖아. 작위 수여식을 열흘도 안 남기고 알려주다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셰비언 때는 안 이랬잖아? 그땐 한참 전부터 신문에 기사도 엄청 나고, 호외도 뿌리고…….”
“작위를 주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축소할 수 있을 만큼 축소하고 싶다 이거겠지. 대관식 다음 날이니 카즈네 공작의 작위 계승식이 있는 날이기도 하잖아. 약속을 지키면서도 파장은 어떻게든 줄여보겠다는 노력이 가상하지 않아? 좀 봐줘, 애쓰잖아.”
“존경해 마지않는 전하의 분부이신데 내가 뭐라고 봐주고 말고 하겠어. 하라면 하는 거지. 당장 내일 나오라고 해도 냉큼 달려가야 할 판에. 으, 옷 어떡하지…….”
“너무 비꼬지 마. 가스트로에겐 내가 가서 사정을 알아볼 테니 넌 준비나 잘 하고 있어. 뭐, 네 하녀들이 미리미리 준비해 둔 것 같으니까 크게 신경 쓸 일은 없을 거다.”
준비? 무슨 준비? 오드리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라비린은 의심 많고 꼼꼼한 오드리에게 전적인 신뢰를 받는 하녀들이 문득 부러워졌다. 그 역시 로렐라이의 대리인으로 몇 년을 지냈지만 저런 신뢰를 받아본 적은 없었다.
“네 하녀들이 보석상과 재봉점을 휩쓸다시피 다니며 쇼핑하고 있는 거 몰랐어? 장담하는데, 네 무도회 드레스는 지금 완성 직전일걸.”
“……나는 치수도 안 쟀는데?”
“넌 집중하면 바로 옆에 벼락이 떨어져도 모르잖아. 그 틈에 하녀들이 알아서 잘 했겠지. 난 오히려 다른 게 궁금하다. 네 하녀들이 중부식 버슬 드레스와 요새 유행하는 남부식 드레스 중 뭘 골랐을지. 넌 뭘 것 같아?”
“알아서 잘 했겠지…….”
승마복이라면 모를까, 오드리가 드레스를 고르는 기준은 단순했다. 예쁜 것도 좋지만 되도록 편한 것. 브란젤에 머무르게 되면서 때에 따라 중부식 버슬 드레스를 입는 일이 늘기는 했지만, 그녀는 기본적으로 가볍고 장식이 적은 남부식 드레스를 좋아했다.
“보석은 셰비언더러 골라달라고 해. 안목이 높잖아.”
“너무 높아서 탈이야. 뭘 보여줘도 다 성에 안 찬다고 하니까.”
“평소 머리에 달고 다니는 다알리아 꽃 머리장식 괜찮던데? 그 공방에 따로 만들어둔 물건 있나 확인해 봐. 정말 뛰어난 장인 중엔 주문이 들어오지 않을 때도 작품을 만드는 경우가 있거든.”
오드리는 셰비언의 손바닥 위에서 옥 덩어리가 꽃처럼 피어나던 순간을 떠올렸다. 직접 머리 장식을 달아주며 웃음 짓던 얼굴이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얼굴에 화르륵 불이 붙었다.
라비린은 예상치 못한 반응에 미간을 찌푸렸다. 대화를 나누다가 갑자기 얼굴을 붉히며 좋아하다니, 보기 싫은 건 아닌데 너무 뜬금없다.
“뭐야, 왜 그래?”
“이건 셰비언이 직접 만들어 준 거야. 내 생일 선물이라면서.”
“……아, 그래서 그렇게 좋아했던 거군. 젠장, 마음에 상처가 났어.”
라비린이 과장되게 가슴을 붙들고 아픈 시늉을 했다. 오드리는 서둘러 손등을 뺨에 가져다 대어 식히려 했지만 손이 따끈따끈한 탓에 별로 효과는 없었다. 그녀는 아예 얼굴에 부채질을 했다.
“벨키스 경 마음에 상처 날 게 뭐가 있습니까?”
로렐라이의 주인이 언급된 이후 아예 입을 다물고 있던 하델이 불쑥 끼어들었다. 라비린을 바라보는 눈빛엔 노골적인 경멸마저 섞여 있었다.
“벨키스 경은 일방적인 파혼으로 누나의 평판을 바닥으로 처박은 장본인이 아닙니까.”
“하, 하하……. 공자, 그땐 사정이 있어서…….”
“멜브란트의 사자가 약혼녀 하나 지키지 못했던 사정에 대해선 신문을 통해 상세하게 접했으니 굳이 제게 따로 설명하실 필요 없습니다. 딱히 듣고 싶지도 않고요.”
하델은 의식하지도 않고 라비린에게 치명상을 입혔다. 표정을 잃어버린 라비린이 어찌나 딱해 보이는지, 오드리는 이럴 때 나서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라비린을 두둔할 뻔했다.
“벨키스 경과 누나가 여전히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는 게 제겐 너무나 놀라울 따름입니다. 분명 누나의 도량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겠죠. 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다 그런 도량과 이해심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니, 부디 경이 분수와 도리를 지켜서 누나의 명예를 지켜주시길 부탁드립니다.”
“…….”
“누나, 난 이만 가볼게요. 너무 충격적인 얘길 많이 들어서 그런지 머리가 다 어지럽네요. 쉬어야겠어요.”
하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응접실을 떠났다. 오드리는 동생의 새로운 면에 놀라 그의 뒷모습에 대고 작게 박수를 쳤다. 라비린이 신경질적으로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핀잔했다.
“너는 박수를 치고 싶냐. 형식적으로야 나한테 하는 말이지만 실은 너랑 나 다 싸잡아서 까는 거였는데.”
“애들은 빨리 큰다더니, 일 년 사이 다 컸잖아. 놀랍다. 열넷이 머지않았는데 어떻게 밖에 내놓지 싶어 걱정했는데 영 쓸모없는 걱정이었어. 역시 아버님 아들이네.”
오드리가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듯한 모습에 라비린의 입매가 조금 누그러졌다.
“저 나이 때의 너와 비교하면 아직 한참 멀었어.”
“흥, 온실에서 귀하게 키워진 꽃과 들판에서 자란 잡초가 같아? 내가 더 질기고 독한 게 당연하지. 쟤가 저 나이 때의 나와 같으면 내가 너무 비참해지잖아.”
“비유가 영 조악한데……. 뭐, 네가 아무렇지 않다면 된 거겠지. 아무튼 크게 한 소리 들은 게 너무 아파서 도저히 못 있겠다. 이만 갈게.”
라비린은 가겠다며 일어나 놓고도 좀처럼 걸음을 떼지 못하고 망설였다. 수없이 연습하고 왔는데, 그가 꺼낼 말을 가만히 기다리는 오드리가 앞에 있으니 오히려 말이 안 나왔다. 기사 시험을 앞두고 있을 때보다도 더 긴장됐다.
“혹시 시간이 있으면 수확제 때 나랑…….”
“아, 맞다. 내가 할 말이 있었는데 까먹었네. 내일모레 시간 있으면 강철새 시험비행 하는 거 보러 와. 워커가 확실히 성공할 거라고 하도 장담을 해서 좀 크게 벌려볼까 하는 중이거든. 오늘 내로 초대장 보내줄게.”
산뜻하게 웃는 얼굴이 눈부시게 환했다. 라비린은 꺼내려던 말을 꿀꺽 삼키고 마주 웃었다. 부디 웃는 얼굴이 어색하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그래. 꼭 갈게. 초대장 잊지 말고 꼭 보내.”
오드리는 훤히 들여다보이는 라비린의 마음을 모른 척 외면했다. 어쩔 수 없었다. 그게 호구를 자처한 친구를 위한 그녀의 최선이었다.
그날 밤, 오드리는 일정을 마치자마자 셰비언을 보러 또 숲의 공터에 갔다. 셰비언은 어제 새벽보다 훨씬 상태가 좋아 보였지만 여전히 굳게 눈을 감은 채 잠들어 있었다. 오드리는 셰비언에게 아낌없이 마력을 퍼붓고 나서야 그의 곁을 떠났다.
셰비언은 오드리가 완전히 숲에서 벗어난 뒤에야 눈을 떴는데, 어제보단 훨씬 눈빛이 선명하고 초점도 뚜렷했다. 하지만 그가 눈을 뜨고 있었던 건 아주 잠시였다. 그는 곧 다시 잠들었다.
수확제 시작 전야, 하늘의 달이 부지런히 몸을 불리는 밤에 있었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