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chapter 38. 랄리우스
chapter 39. 대화의 중요성
chapter 40. 나와 결혼해 주세요
chapter 41. 오드리 랄리우스 가넷
chapter 42. 신화시대의 재림
chapter 43. 포르티투도
chapter 38. 랄리우스
「랄리우스의 핏줄에서는 마법사가 태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랄리우스 직계의 수명은 강력한 마법사만큼이나 짧다. 대체 무슨 이유일까? - 밀리나 랄리우스의 일기 中」
하델은 오드리가 막 정문을 통과하자마자 그녀를 끌고 정원 구석으로 자리를 피했다. 그리고 다다다 말을 쏟아냈다.
헨젤 백작이 오드리의 서재와 집무실을 죄다 뒤집어엎고, 서류란 서류는 다 종류별로 나눠 거두고, 혹시 비밀장치가 있는 건 아닌가 책장을 훑고, 따로 담아두었던 백지 편지를 상자째 챙겼다. 그리고…….
“천천히 말하렴. 숨넘어가겠다.”
“누나! 어쩜 그렇게 태평해요? 누날 찾아간 하녀가 얘기 안 전했어요? 릴리가 누나를 찾겠다고 하녀 절반을 내보냈는데 설마 못 만나고 온 거예요? 아니, 그래도 이젠 내가 말했는데……. 누난 위기감이라는 게 없어요?”
“다 들었으니까 태평한 거란다.”
오드리가 손가방에서 입가심용 사탕을 꺼내 씹었다. 상큼한 향이 주변에 퍼졌다.
“아버님이 돌아오신 지 두 시간도 넘게 지났어. 아버님이라면 지금쯤 서류 검토 한 바퀴는 다 하셨을 거다. 이제와 허둥대 봤자 소용없어.”
“허둥대라고 하는 말이 아니잖아요. 빨리 대책을 세우라고요. 누나, 누나가 아직 미성년이라는 거 잊었어요? 약혼도 안 했는데 대체 누가 누날 지켜줘요? 누나, 이러다 만탈락은 물론이고 로렐라이까지 뺏겨요!”
하델이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답답해했다. 아침에 단정하게 묶었던 머리칼이 이젠 사자 갈기처럼 덥수룩했다. 오드리는 쯧쯧 혀를 차며 하델을 돌려세웠다. 잠시 반항하는가 싶던 하델은 오드리가 머리칼을 만지기 시작하자 곧장 얌전해졌다.
“하델, 이렇게 걱정할 거면서 왜 유언장 원본을 오스미다 전하께 드리지 않았니?”
“그건……!”
“아버님께 원본을 드린 건 아니니까 괜찮다고? 하델, 한 번에 쳐 내지도 못하면서 어설프게 아버님을 자극한 결과가 바로 이거란다.”
“…….”
“내가 만탈락과 로렐라이를 빼앗기게 생겼으니 기쁘겠구나. 고스란히 네 것이 될 테니까.”
탁! 하델이 오드리의 손을 뿌리치고 돌아섰다. 오드리를 보는 눈에 화가 가득 담겨 있었다.
“만탈락도 로렐라이도 관심 없다고 분명 얘기했을 텐데요. 난 그거 감당 못 하는 거 안다고요! 욕심 안 내요! 그때 아뉴람브 성에서 얘기 다 끝냈던 거 아니에요? 왜 그런 식으로 말해요? 설마 누나가 가진 대책이라는 게 고작 내 화를 돋우는 것뿐이에요?”
“네 화를 돋워서 뭐가 해결된다고 그게 대책이 되겠니? 그냥 화풀이 좀 한 거지. 오스미다 전하께 유언장 원본이 들어갔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건데, 내가 이 정도 짜증도 못 내니?”
“어쩔 수 없었어요, 어쩔 수 없었다고요! 오스미다 전하와 아버지가 대립하는 입장인 걸 뻔히 아는데 어떻게 그쪽에 원본을 넘겨요? 가문에 무슨 일이 날 줄 알고요? 잠금장치를 풀어주지 않는 것만으로도 내가 엄청 노력하는 건데, 그건 생각지도 않고……!”
하도 억울한 나머지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하델은 소맷부리로 눈을 벅벅 문질러 닦았지만 눈물을 그칠 줄을 모르고 솟아났다. 오드리의 얼굴이 눈물에 흐려져 잘 보이지 않았다.
“누나 입장 말고 내 입장도 좀 생각해 달라고요!”
오드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새삼 두통이 밀려왔다.
“어중간하게 가운데에 끼어서 입장을 정하지 못하니 힘든 거 아니니. 날 아주 미워하든지, 아니면 포기하고 내 편을 들든지. 유언장을 전한 것도 아니고 안 전한 것도 아니니 이런 꼴이 나지.”
“누가 입장을 못 정했대요? 난 당연히 아버지 편이에요. 누나랑 한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한다는 게 곧 누나 편이라는 뜻은 아니잖아요? 누나가 알신다를 살려낸다면 모를까, 내가 왜요!”
“그럼 왜 날 붙잡고 이러쿵저러쿵 말을 늘어놓는 거니?”
“나는 그저……. 아버지가 더 추락하는 걸 보고 싶지 않을 뿐이에요. 누나가 오기 전까지 아버지는 완벽한 내 우상이었는데……. 지금은…….”
하델이 얼굴을 가리고 웅얼거렸다.
“이게 다 누나 때문이에요.”
오드리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관자놀이 누르던 것도 잊어버렸다.
“그게 왜 나 때문이니? 아버님은 본래 그런 분이었어. 그런 분이니 어머니의 유언장을 조작했던 거지. 네가 못 봤던 걸 엉뚱한 곳에 책임전가 하지 마.”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신화 속의 신조차 단점과 약점이 있는데, 땅에 발붙이고 사는 인간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말이다.
“이거 참, 편지로만 대화할 땐 제법 영리하고 귀여운 동생이었는데……. 결정적인 순간마다 아둔하게 구는 이유를 모르겠다니까.”
“나도 누나랑 편지로만 대화할 땐 누나가 아주 다정하고 마음 넓고 상냥한 사람인 줄 알았어요. 이렇게 속이 검고 못된 말을 잘하는 사람이라곤 상상도 못 했다고요.”
“그래, 이렇게 똑같이 제멋대로인 걸 보면 우리가 남매긴 남매인가 보다. 떨어져 자랐는데도 아주 똑 닮았네.”
오드리가 하델의 이마를 쿡 찔렀다. 하델의 등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차가운 물에 머리부터 던져진 것처럼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펑펑 솟아나던 눈물이 순식간에 말라 버렸다.
“하델.”
“…….”
“이왕 아버님 편에 서기로 했으면 확실하게 서. 그래야 내가 너에게 덜 미안하지 않겠니?”
하델은 연거푸 이마를 찌르는 손을 쳐 내고 뒤로 물러섰다. 후다닥 남은 눈물을 닦고 확인한 오드리의 얼굴엔 차갑고 서늘한 한기만 담겨 있었다.
“너무 늦기 전에 날 좀 더 미워하는 편이 좋을걸.”
“……뭐, 뭘 하려고요?”
“내가 그걸 왜 말해주니? 이러고 있을 시간에 수업을 듣든지 비레직 영지 일을 보든지 하렴. 아둔한 동생아, 시간은 금보다 비싸단다.”
오드리는 하델에게 마지막 충고를 전해주고 뒤돌아서서 정원을 빠져나갔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하델이 오드리의 등에 대고 고함을 질렀다.
“누나, 그게 뭐든 가문에 해가 되지 않게 하겠다고 했던 거 잊지 마!”
오드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 * *
두 시간. 오드리의 예상대로, 두 시간이면 충분했다. 헨젤 백작은 두 시간 만에 오드리의 서재와 집무실에서 찾아온 서류를 전부 다 검토했다. 단, 백지 편지의 내용만 빼고.
백지 편지는 정말 희한하고 이상한 물건이었다.
기껏 데려온 마법사는 편지에 걸려 있다는 마법을 풀기는커녕 그게 어떤 마법인지 어렴풋한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마법등에 비춰보면 펜 자국이 분명하게 드러나는데도 얇은 종이를 깔고 목탄을 발라 글씨를 따려 하면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결국 편지지를 마법등에 비춰 보며 펜 자국을 눈으로 확인해 일일이 손으로 옮겨 쓰는 무식한 짓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곧 난관에 봉착했다.
내용을 전혀 알아볼 수가 없었다. 마치 서너 개가 넘는 문장을 토막 내어 제멋대로 뒤섞어 놓은 듯했다. 뭔가 규칙이 있는 건 아닐까 이런저런 시도를 해 보았지만 영 소용이 없었다.
‘이걸 알아야 하는데……. 대체 뭔 짓을 해놓은 건지 모르겠군.’
백지 편지지를 노려보는 헨젤 백작의 미간에선 주름이 사라지질 않았다. 재질도 크기도 전부 다른 편지지들의 공통점은 발신인을 특정할 만한 특이점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어디서든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들이었고 종이에 새겨진 문장이나 장식은 일절 없었다.
“설마 별 의미도 없는 것에 매달리고 있는 건가…….”
불안한 속마음이 소리가 되어 흘러나왔다. 헨젤 백작이 불안해하면서도 백지 편지에 목을 매는 이유는 간단했다. 다른 서류에서 원하는 내용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드리가 국고에 금을 쌓고 있다는 가스트로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 돈이 대체 어디서 났을까.
만탈락과 데멘사, 헨젤가의 살림에 대해서는 헨젤 백작이 늘 주의를 기울여 보고 있었던 데다가 국고를 채울 정도로 큰돈을 쉬이 융통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다.
그러니 의심이 가는 건 당연히 로렐라이인데, 어째 서재에서도 집무실에서도 로렐라이 운영에 관련된 서류는 한 장도 없었다. 오드리가 만탈락의 주인이기에 어쩔 수 없이 엮이는 수준의 서류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생각해 보면, 오드리가 이 집 안에 로렐라이와 자신을 연결할 만한 증거를 두는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없었다. 어딘가에 차명으로 다른 집을 구입해 두고 그쪽에서 일처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쪽이 훨씬 합리적이었다.
여기서 그가 찾아낸 거라곤 기껏해야 오드리가 로렐라이의 알짜 재산을 깔고 앉아서 로렐라이에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정황 정도에 불과했다.
‘내가 성급했어.’
헨젤 백작은 지끈거리는 미간을 꾹 눌렀다. 출처를 알 수 없이 추가되던 예산은 로렐라이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규모가 컸다. 가스트로의 말에 발끈해서 대뜸 서재와 집무실을 뒤질 게 아니라 정교하게 계획을 세워서 한 번에 엎었어야 했다.
화가 치밀어서 그런가, 숨이 가쁘고 머리가 띵하게 울렸다. 그는 더듬거리며 책상 서랍에 설치된 이중구조의 바닥을 열고 약을 꺼냈다. 막 입에 넣으려는 순간, 누군가 그의 손에서 약을 빼앗아갔다.
“아버님. 웬 약을 다 드시나요?”
약을 뺏기고도 어지럽게 흔들리던 시야가 귀에 익은 목소리를 듣자마자 번쩍 돌아왔다. 헨젤 백작은 책상 바로 앞에 서 있는 오드리에게 손을 내밀며 물었다.
“이리 내라. 두통약이니 신경 쓸 것 없다. 언제 왔느냐?”
“한참 전에 왔지요. 제가 책상 앞에 앉아도 전혀 반응이 없으시기에 일부러 무시하시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군요.”
“내가 생각에 빠져 있으면 먼저 기척을 냈어야지. 대뜸 약을 빼앗아 가는 게 무슨 예의냐? 어서 이리 내!”
헨젤 백작이 책상을 두들기며 재촉했지만 오드리는 약을 줄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다. 그녀는 도리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두통약이라면 다이앤이 잘 만들어요. 제 고질병도 두통이거든요.”
“아무리 잘난 약이라도 당장 필요할 때 없으면 아무 소용없지. 은근슬쩍 아비의 약을 훔치려 들지 마라.”
“설마 두통약이 한 알밖에 없는 건 아니실 테니 다른 약을 드세요. 이 약은 기념으로 제가 가져갈게요.”
“하……. 기념? 뭘 기념할 생각이냐? 내가 치안대에 끌려간 날을 기념할 셈이냐?”
“아버님이 제 서재와 집무실을 뒤집어엎은 기념으로 하죠. 저는 서류를 다 털렸는데 두통약 한 알도 못 얻어 가면 좀 서럽지 않겠어요?”
헨젤 백작이 폭발할 듯한 화를 꾹 누르고 있다는 게 느껴지지도 않는지, 오드리는 오히려 빙긋 웃으며 약을 손가방에 넣었다.
“브란젤의 뉴터가 취급하는 두통약이 얼마나 대단한 효과가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요.”
“……!”
“아버님. 그날 아뉴람브 성에 있었던 사람은 하델 혼자가 아니랍니다.”
헨젤 백작이 벌떡 일어났다. 그가 성큼성큼 걸어 오드리 앞에 섰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눈에서 불길이 일었다.
“……똑바로 말해라. 전부! 말해!”
“하델은 아버님을 믿었어요. 아주 굳게 믿은 나머지 진실을 확인하는 작업을 할 땐 저도 함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하델이 본 건 저도 본 것이고, 제가 본 건 하델도 본 것이죠. 다만 저는 하델보다 조금 더 알고 있을 뿐이고요.”
헨젤 백작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오드리는 그의 인내심이 몹시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작은 진주 귀걸이를 착용하길 잘했다고도 생각했다.
“『셰비언 성벽, 그 황홀한 아침 산책』. 그 유명한 지리서 마지막 장엔……. 윽!”
철썩! 끝내 참지 못한 헨젤 백작이 오드리의 뺨을 후려쳤다.
오드리는 몇 걸음이나 뒤로 물러났다. 입 안쪽에 피가 고이고 얼굴 반쪽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깔깔 실컷 웃고 싶은데 생리적인 눈물이 주륵 흘러내렸다.
“이거 참…….”
입을 떼자 피가 흘러 입가를 더럽혔다. 오드리는 눈살을 찌푸리며 손수건을 꺼냈다. 연보라색 손수건이 금세 붉게 물들었다.
“놀랍네요. 아버님이 연약한 소녀에게 손을 대는 분이었다니.”
“…….”
“정말 놀라워요.”
그러나 놀란 건 오드리만이 아니었다. 더럽혀진 손수건을 보는 헨젤 백작의 얼굴 역시 무섭게 굳어 있었다. 늘 뒤집어쓰고 있던 무표정한 가면이 얼핏 벗겨진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오드리는 화끈거리는 뺨에 손을 올리고 열기를 식혔다. 손이 평소처럼 차갑지 않아 만족스럽지는 못했지만, 그럭저럭 도움이 되긴 했다.
“전부 말하라 하셔놓고 이리 때리시면, 무서워서 어떻게 말을 하죠?”
“……겨우 따귀 한 번이다.”
“제가 이 얼굴로 하델에게 가서 아버님이 날 때렸다 울며 얘기하면 일이 재미있어질 것 같은데, 아버님 생각은 어떠세요?”
오드리는 좀 전에 다투고 온 하델의 이름을 냉큼 팔아먹었다. 헨젤 백작의 거듭된 회유와 설득에도 하델이 고집을 부리며 유언장의 보안장치를 해제하지 않고 있으니, 하델의 진짜 심정이야 어떻든 충분히 먹힐 거라고 생각하면서.
예상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헨젤 백작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오드리는 드디어 미소를 지을 수 있게 됐다. 뺨이 부풀어 왼쪽 입꼬리가 잘 올라가지 않는 게 아쉬울 뿐이었다.
헨젤 백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오드리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동시에 마치 못 볼 걸 본 사람처럼 멀어지고 싶어 했다. 그러나 고작 한 걸음을 걷고 나자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고, 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그 자리에 못 박혔다.
“하델은…….”
“한동안 셰비언을 왕세자 전하께 빌려 드렸답니다.”
헨젤 백작이 기껏 뱉은 말은 오드리의 목소리에 고스란히 묻혀 버렸다. 오드리는 그를 눈치채고도 고의적으로 무시했다.
“멜브란트에서 마약을 뿌리 뽑겠다는 전하의 굳은 결심을 외면하기가 어렵더군요. 어쩌겠어요, 왕국의 신민으로서 마땅히 도와드려야지요. 지도 한 장쯤 못 드릴 게 뭐가 있겠어요?”
“너였구나.”
“전하께서 빠르고 확실하게 마약상을 잡길 원하시니 최대한 노력할 밖에요. 셰비언의 옛 마법이 검거에 큰 도움이 되어 몹시 기뻐하셨다고 들었어요.”
헨젤 백작은 이를 악물고 숨을 참았다. 오드리가 무슨 변덕으로 이렇게 순순히 말을 해주는지 모르겠지만, 화를 내다가 흘려보내기엔 아까운 기회였다. 들어야 할 게 많았다.
“그래……. 아직도 믿어지진 않지만, 네가 운이 좋아 기껏 숨겨둔 지도를 찾아냈다고 치자. 그럼, 그게 지도인 줄은 어떻게 알았느냐?”
“의외의 질문이네요. 아버님, 그게 그리 중요한가요?”
“…….”
“이미 지난 일인데.”
“지난 일? 그 지도만으로는 절대 지도라는 걸 알 수 없다. 넌 다른 자료를 얻어냈어. 누구의 협조를 받았는지 알아야겠다.”
쯧쯧쯧. 오드리가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다는 듯 혀를 찼다.
이번 일엔 라비린과 오드리뿐만 아니라 피올, 오스미다, 일랑, 가스트로와 타우레드 후작까지 고루고루 얽혀 있었다. 그들 중엔 일랑처럼 헨젤 백작의 몰락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선 이도 있었지만, 피올처럼 자신이 무대에 올랐는지도 모르고 역할을 맡은 이도 있었다.
헨젤 백작은 전혀 모르겠지만 말이다.
“설마 그게 한 명이겠어요? 헨젤의 몰락을 바라는 이가 어디 저뿐이겠어요? 오늘의 결과가 저 혼자 이룬 일이라곤 생각하시는 건 아니죠?”
“대체 누가……!”
헨젤 백작은 울컥 화를 내려다 멈칫했다. 짚이는 곳이 너무 많았다. 헨젤이 랄리우스를 밀어냈듯 헨젤을 밀어내고 싶어 하는 가문이 수두룩했다.
‘아예 이용당할 여지를 만들어선 안 됐는데…….’
그는 처음으로 후회했다. 왕세자에게 견제 받을 걸 알면서도 태업이라는 수단을 사용한 것을, 욕심껏 끌어안은 업무를 감당하기 위해 뤼나소에 손을 댄 것을, 만탈락을 포기하지 못한 것을, 마지막으로 밀리나 랄리우스와 결혼한 것을.
‘모든 건 내 선택이었을 텐데.’
도무지 잊혀지지 않는 얼굴이 눈앞에서 또 어른거렸다. 무표정할 땐 얌전하고 조용해 보이지만, 미소를 지으면 싸늘하고 냉정한 성품이 고스란히 드러나던 여자. 머리칼도 눈동자도 피부까지도 따스하고 부드러운 색인데 막상 끌어안으면 얼음으로 빚은 조각처럼 한기가 느껴지곤 했다.
헨젤 백작은 자꾸 오드리의 얼굴에 겹쳐지는 밀리나 때문에 미간을 찌푸렸다. 이목구비가 어찌나 어미를 빼닮았는지, 밀리나 혼자 낳았대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머리칼이 검은 걸 보면 헨젤의 피가 섞여 있긴 한 모양인데, 헨젤 특유의 검은 머리칼은 도리어 거부감만 부추겼다.
“오드리, 잊고 있나 본데 너도 헨젤이다.”
“네에, 저도 헨젤이지요. 그래서 망설였답니다. 만약 아버님께서 태업까지 해가며 제가 작위를 받는 걸 방해하지만 않으셨다면 그 지도는 영원히 잠들었을지도 몰라요.”
정말이었다. 모든 것이 순조로울 때, 오드리는 지도와 자료를 상자에 고이 담아 절대 열지 않기로 다짐했었다. 자료를 전한 라비린의 꿍꿍이속을 알지도 못할뿐더러, 굳이 멀쩡한 가문에 평지풍파를 일으켜 제 배경을 더럽힐 이유가 없었다.
“전부 내 탓이란 거냐?”
“아니라곤 말할 수 없죠. 제가 조용히 가문을 나가도록 내버려 두셨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 아닌가요?”
헨젤 백작은 기가 막혀 헛웃음을 지었다.
“조용히 나간다? 그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고 하는 말이냐? 네가 작위를 받는 일 자체가 역사에 남는 소란이다. 내가 그걸 내버려 두길 바랐다니, 네가 그렇게 멍청한 줄은 미처 몰랐다.”
“저야말로 아버님이 태업 따위의 어리석은 짓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답니다. 막을 수 없는 일이 되었다는 걸 빨리 인정하고 다른 방법을 궁구하실 줄 알았죠.”
“다른 방법? 하, 다른 방법을 찾았어야 했던 건 너다. 내가 태업까지 해가며 막겠다고 나섰을 때, 너는 날 찾아왔어야 해. 가문 내에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을 왜 이렇게 키우는 거냐? 저번 약혼 때도, 아기손님 때도 그러더니, 네 재주는 상단이 아니라 일을 키우는 쪽에 특화되어 있는 것 같구나.”
“아하하……. 아버님 스스로 헨젤가의 영향력을 줄이려 하시는데 딸이 되어 도움은 못 될망정 재를 뿌려서야 쓰나요. 단지 그것뿐이에요.”
오드리가 생긋 웃었다.
“그리고 제가 바라는 걸 주실 분은 아버님이 아니라 왕세자 전하이신걸요.”
한번 벗겨진 가면은 좀처럼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았다. 헨젤 백작은 표정 다스리기를 포기했다. 그의 얼굴에 짙은 혐오가 떠올랐다.
“너는 정말 너밖에 모르는구나.”
“…….”
“유언장은 오스미다 왕비에게 전하고, 지도는 왕세자에게 전하고……. 가문이 어떻게 될지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거냐? 너 혼자서만 작위를 받아서 가문을 나가면 그만이라는 거냐? 어려서, 철이 없어서 따위로 설명할 수 있는 범위를 지나치지 않았느냐!”
오드리는 헨젤 백작이 이토록 자제력을 잃은 모습은 처음 보았다. 그녀는 몹시 신기한 동물을 보는 듯한 기분으로 제 아비의 낯선 얼굴을 구경했다.
“헨젤이 그리 싫었으면 결혼을 하면 되는 걸, 곧 죽어도 작위를 받아서 나야겠다는 이유가 대체 뭔지 설명해 봐라. 왜 그토록 가문에 먹칠을 하고 싶은 건지!”
“그러게요. 대체 왜 그럴까요?”
자못 순진하게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양새가 헨젤 백작의 화를 돋웠다. 그는 또 뺨을 칠 것처럼 손을 치켜들었지만, 차마 내려치지는 못했다. 피하려는 기색도 없이 가만히 서 있던 오드리가 히죽 웃었다.
“제가 아버님을 닮아서 그런가 봐요.”
“닮은 곳이라곤 머리색밖에 없는데 그게 무슨……!”
“욕심이 아주 많잖아요. 내 것을 빼앗기곤 못 사는 성격인 거죠.”
오드리는 헨젤 백작의 회색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늘 온기 한 점 없이 차갑기만 하던 눈이 지금은 온통 혼란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치 비를 잔뜩 품은 먹장구름 같았다.
“만탈락도 랄리우스도 모두 어머니께서 제게 남겨주신 제 것이잖아요. 하나쯤은 놓아도 괜찮겠지 싶었는데, 방해를 받고 나니 다 가져야겠더라고요.”
“개소리! 만탈락을 네게 준다고 해서 랄리우스까지 탐내다니, 그건 너무한 욕심이다! 정당하게 헨젤이 받은 지참금을……!”
“지참금? 정말요? 정말 랄리우스 후작위가 헨젤의 몫이라고 생각하세요? 이런, 우리 같이 확인해 보죠. 두 분의 결혼계약서는 어디에 있나요? 아직도 하티의 신전에 잘 보관되어 있나요?”
오드리가 정말 궁금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증스러울 정도로 순진한 표정이었다.
“아버님, 설마 아직도 하델에게 결혼계약서에 대한 얘기는 못 들으셨어요? 하긴, 보여준다고 해놓고 제가 다치는 바람에 그러지 못하긴 했죠. 지금이라도 어머니의 지참금 내역을 보여줘야겠어요. 그 애는 정직하고 바르니까 좋은 판결을 내려줄 거예요. 아버님도 동의하시죠?”
헨젤 백작은 그만 입을 다물었다. 오드리가 허세를 부리는 거라고 무시하기엔 셰비언이 걸렸다. 전설에나 등장하던 용이 현세에 나타났으니, 그가 어디부터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좀체 가늠이 어렵다.
“……당연히 신전에 있어야 할 물건인데……. 그 물정 모르는 용이 네게 빼돌려 주기라도 했느냐?”
“물정을 모른다니요. 방금 그 말씀, 셰비언이 들으면 화낼걸요. 음, 그치만 결혼계약서는 셰비언이 가져다 준 게 아니니 신경 안 쓸지도 모르겠네요.”
순간이나마 헨젤 백작의 시선이 집무실 문을 향했다. 오드리가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었다.
“궁금하면 찾아가 보셔도 돼요. 수확제 준비 기간이라 귀족들이 자선을 베푸는 시기이니, 신전에 후원하러 왔다고 하면 의심받지도 않을 거예요.”
“날 놀려먹으니 재밌나 보구나.”
“그럼요, 재미있죠. 아버님 앞에서 이렇게 멋대로 입을 놀리는데 어떻게 즐겁지 않을 수 있겠어요?”
오드리가 정말 즐거운 듯 키득거렸다. 뺨은 아까보다 더 부었고 눈꼬리엔 푸르스름한 멍이 들기 시작하는데도 아픔 같은 건 느껴지지 않는 듯했다.
“헨젤은 랄리우스의 자리를 빼앗으며 성장했어요. 랄리우스는 제대로 된 반항조차 못하고 자리를 빼앗겼고요. 하지만 랄리우스가 그 몰락을 순순히 받아들였을까요?”
헨젤 백작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버님. 뤼나소 따위가 아니어도 헨젤에 큰 타격을 입힐 증거는 제게 아주 많이 있어요.”
“무슨…….”
“아주, 많아요.”
“무슨 소릴 하는 건지 영 모르겠구나. 말을 하려거든 똑바로 해라.”
오드리는 주변을 휘 훑었다. 집무실엔 단둘뿐이었다.
“본디 왕실의 금고는 랄리우스가 지키고, 금고 열쇠는 헨젤이 지켰는데……. 어느 순간부터 랄리우스는 금고 지킴이의 역할을 헨젤에게 빼앗겼죠.”
“어느 가문이든 흥할 때가 있으면 쇠할 때도 있는 법이다. 랄리우스가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른 것이 헨젤의 탓이더냐?”
“맞아요. 그건 랄리우스의 탓이죠. 부정할 생각은 없어요. 그런데……. 헨젤의 뱀은 왕실의 신뢰에 충분히 보답하고 있나요? 랄리우스가 제게 남겨준 것들로 보아선 영 아니던데 말이에요.”
“허풍 떨지 마라. 그런 게 정말 있었다면 랄리우스가 그렇게 쉽게 밀려났을 리가 없다.”
“없어서 못 쓴 게 아니라 갖고도 쓸 수 없었던 거예요.”
오드리가 헨젤 백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한 발짝 다가올 때마다 헨젤 백작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오드리의 뺨을 후려치던 기세는 깡그리 사라지고 없었다.
“모두가 알다시피 랄리우스는 단명하니까요. 몸도 약하고 자손도 적어요. 격한 싸움을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이었어요.”
“…….”
“빨리 죽을 걸 알기에 자식을 낳고 기르는 일에 공을 들였어요. 언젠가 단명하지 않는 자손이 나와 입장을 뒤집어주길 바라면서 끊임없이 자료를 쌓고 증거를 모았죠. 어머니도 마찬가지였어요.”
계속 물러나던 헨젤 백작이 책상에 부딪쳐 멈춰 섰다. 높이 쌓여 있던 서류 몇 장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만탈락의 수도시설 정비에 관련된 서류였다.
오드리는 그 서류를 태연히 밟아 뭉갰다. 만탈락이고 데멘사고, 어차피 이 집에 남겨둔 서류 중 진짜로 중요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방심은 하델에게 한 번 들켰던 걸로 충분했다.
“아버님, 만탈락의 비고에는 헨젤의 비리를 증명할 증거가 잔뜩 쌓여 있답니다. 왕실의 비자금이 곧 헨젤의 비자금이 되는 과정이 아주 상세하지요. 제가 열다섯이 되어 그 비고를 열고 얼마나 놀랐는지 아버님은 상상도 못할 거예요.”
“그게 랄리우스의 입장이면 밀리나가 나와 결혼했을 리가 없다.”
“왜요? 할 수도 있지. 어차피 정략결혼인데.”
“그때 그녀는 신랑감을 얼마든지 고를 수 있는 입장이었다.”
오드리는 처음 듣는 얘기였다. 유모인 락시 부인은 밀리나의 결혼에 얽힌 이야기는 절대 말해주지 않았으니까. 그녀는 여유로운 표정 그대로 귀만 쫑긋 곤두세웠다.
“세상 사람들은 밀리나가 빚 때문에 나와 결혼했다고 하지만……. 어림도 없는 소리다. 가문의 빚? 헨젤이 남부 대평원을 압수당하지 않게 할 수 있을 정도의 공로를 세운 가문인데 빚 따위가 무슨 문제라고? 적당히 괜찮은 놈을 데릴사위로 들여 자식에게 랄리우스 후작위를 물려주면 그만이었다.”
“…….”
“하지만 밀리나는 나를 택했어. 네 말대로 랄리우스가 헨젤을 찔러 죽일 칼을 쥐고 있었다면 그녀는 나와 결혼해서 헨젤이 남부대평원을 지키게 하지 않았을 거다. 헨젤이 영지를 잃을 절호의 기회였으니, 곧바로 헨젤을 치고 그 자리를 차지하려 했겠지. 단명하는 집안이니 더더욱 기회를 잡으려 들었을 거다.”
말을 하면 할수록 헨젤 백작의 눈빛이 점점 살아났다. 그는 처음처럼 당당한 모습으로 돌아와 오드리를 꾸짖었다.
“만탈락의 비고? 헨젤의 비리? 하, 있지도 않은 것으로 상대를 위협하는 짓도 사람을 봐가며 해야지.”
“…….”
“오드리, 넌 아직도 네가 우위에 서 있는 것 같으냐? 어림도 없는 소리다. 원본 유언장이 내게 있는데 결혼계약서가 뭐 어떻단 말이지? 하델이 뭐라고 그 어린애가 판결 따위를 내린단 말이냐?”
오드리는 마음속으로 하델에게 사과했다. 미안, 하델. 최소한 네게만은 좋은 아버지였는데 이젠 그것도 아닐 것 같다.
헨젤 백작이 오드리에게 다가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고개를 꺾은 오드리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네가 왕세자에게 돈을 퍼붓는 걸 안다. 그 돈이 널 얼마나 지켜줄 것 같으냐? 왕세자가 당장 사정이 급하니 지금은 네가 바라는 대로 다 해주겠지만, 한숨 돌리자마자 제일 먼저 너를 내칠 거다. 그때 널 지켜줄 건 같잖은 작위 따위가 아니라 헨젤 가문이다.”
“아주 자신만만하시네요. 왕세자 전하는 헨젤을 잘라낼 작업을 벌써 시작했는데, 아직 소식을 듣지 못하셨나 보죠? 제 집무실과 서재를 뒤지느라 많이 바쁘셨나 봐요?”
오드리가 노골적으로 비웃었지만 헨젤 백작의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그가 부풀어 오른 오드리의 뺨을 톡톡 두드렸다.
“그런 시도가 이번이 처음이겠느냐? 지금이야 왕세자가 의욕에 차서 개혁이니 뭐니 떠들어대지만, 막상 왕위에 오르고 나면 결국 날 다시 찾게 될 거다. 헨젤의 영향력이 줄어든다고 해도 그건 잠깐에 불과해.”
“그걸 어찌 그리 확신하세요?”
“멜브란트에서 날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대단한 자신감이었다. 오드리는 헨젤 백작이 짓는 미소가 마치 거울 속의 자신 같아 부르르 몸을 떨었다. 어머니를 쏙 빼닮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자랐는데, 괴상한 곳에서 공통점을 발견하다니 새삼 소름끼쳤다.
오드리가 몸을 떨며 팔을 끌어안는 걸 어떻게 해석했는지, 헨젤 백작의 태도가 약간 부드러워졌다.
“오드리, 지금까지 저지른 멍청한 짓은 전부 눈감아주겠다. 아르젠 남작과의 결혼도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고, 만탈락과 로렐라이도 네 몫으로 남겨주마. 그러니…….”
“작위 받는 일은 포기하라고요?”
“그래. 사내도 아닌 네가 작위를 받는 건 가문에 먹칠을 하는 짓이고, 명예를 잃는 거야말로 귀족가에 치명적인 상처가 된다. 헨젤 백작가가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계속 네 뒤를 봐줄 수 있다는 걸 너도 알지 않느냐? 네 고모가 그리 위풍당당하게 다닐 수 있는 이유의 절반 이상이 바로 친정의 위세라는 걸 생각해 봐라.”
“그러니 얌전히 결혼이나 해라?”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느냐. 오드리, 네가 아르젠 남작과 죽고 못 살 듯 공개적으로 연애를 하는데 그럼 아버지로서 그걸 내버려 두란 거냐? 사실 마법사 따위에게 딸을 보내기는 싫지만, 네가 워낙 좋아하니까 결혼시키겠다는 거다.”
“하…….”
오드리는 헛웃음을 지었다. 말만 들으면 정말 다정한 아버지였다. 말만 들으면. 하지만 지금 오드리는 가면이 벗겨진 헨젤 백작과 얼굴을 마주 보고 있었다. 오드리를 보는 그의 눈빛에서 경멸과 거부감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보아하니 아르젠 남작이 계속 결혼을 미루려고 하는 것 같은데, 그 부분에 대해서도 걱정하지 마라. 그가 적극적으로 결혼을 원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주마.”
“…….”
“일정 기간 내에 결혼하지 않으면 널 다른 남자에게 보내겠다고 하면 된다. 그는 널 몹시 아끼는 것 같으니, 분명 펄쩍 뛰며 달려올 것이다.”
“…….”
“혹 그렇지 않더라도 걱정 마라. 괜찮은 남자로 붙여줄 테니……. 안 그래도 카즈네 공작이 네게 관심이 많더구나. 아르젠 남작 때문에 가만히 있는 것이지, 히엠스와 널 짝지어주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히엠스 카즈네 하루마키스. 카즈네 공작의 아들로서 차기 카즈네 공작이자 치안대 수장이 될 남자였다. 본래 카즈네 공작위와 치안대 수장 자리는 새로 즉위하는 왕의 친형제가 이어받아야 하지만, 가스트로는 외동이었기에 자연히 사촌인 히엠스의 몫이 되었다.
“일이 잘 안 풀리더라도 공작부인이다. 그만하면 충분한 보상 아니냐?”
“…….”
그리고 그 히엠스는 기혼이었다. 이르게 결혼한 덕에 자식도 있었다. 부인과 사이도 좋다고 들었다. 오드리는 하도 어이가 없어 대꾸도 잊었다.
“오드리, 네가 헨젤이란 성을 싫어하는 걸 안다. 만탈락에서 자랐으니 랄리우스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겠지. 하지만 어쩌겠느냐? 네 몸에 헨젤의 피가 흐르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데.”
헨젤 백작의 시선이 오드리의 머리칼에 가 닿았다.
오드리는 당장이라도 다이앤을 불러 염색약을 내놓으라 하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침착하고 싶은데 손끝발끝에서 저릿저릿한 기운이 올라왔다. 두통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멜브란트 역사에서 여자가 작위를 받은 사례는 일테니아 후작전하 한 분뿐이에요. 그렇죠?”
“그렇지. 하지만 그건 너와 경우가 다르지 않느냐. 일테니아 후작은 직계가 모두 죽은 상황에서 가문을 이어받은 거지, 너처럼 아예 새로 가문을 만들겠다고 나선 게 아니…….”
말을 잇던 헨젤 백작이 흠칫 입을 다물었다. 오드리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용은 본질적으로 포식자의 위치에 있는 생물이죠. 아버님, 셰비언이 이 저택을 완전히 때려 부수는 데 시간이 얼마나 들지 가늠해 보시겠어요? 희생자가 좀 생기긴 하겠지만, 전 한 시간이면 충분할 것 같아요.”
“너…….”
“아버님께서는 제가 헨젤이란 성을 싫어한다고 굳게 믿고 계신 것 같은데……. 그건 착각이에요. 전 헨젤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절 옭아매는 사슬이 싫은 거예요. 헨젤이 제 것이 된다면 독립보다 그쪽이 훨씬 더 낫죠.”
“…….”
“일테니아 후작전하의 선례가 있는데, 같은 상황에 놓였을 때 제가 헨젤 백작이 되지 못할 이유가 없잖아요? 안 그래요?”
헨젤 백작의 얼굴이 회색빛으로 변했다. 시체처럼 창백한 입술에선 어떤 말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오드리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꽉 누르며 말을 이었다.
“제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게 해주세요. 저는 셰비언이 인간사회에 무리 없이 녹아들 수 있도록 해주고 싶거든요.”
빠득. 헨젤 백작이 이를 갈았다.
“하녀 하나 죽이는 것과 아비와 동생을 죽이는 건 다른 일이다. 그건 패륜이야!”
“네? 패륜이라니요? 저는 아주 잠시 용의 목줄을 놓치는 것뿐이에요.”
오드리가 허공에 대고 손을 쫙 펴는 시늉을 했다. 누가 봐도 일부러 놓은 것에 가까운 동작이지만, 정말 그런 일이 벌어졌을 때 대체 누가 오드리를 탓할 수 있겠는가? 움직이는 재난을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사람을 문 개는 당연히 죽임을 당할 테지만, 용은요? 누가 감히 용에게 벌을 내릴 수 있죠? 상도 벌도 그가 용납하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걸, 아버님은 영 모르시는 것 같네요.”
오드리는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두통은 여전하지만 손끝발끝이 저릿저릿하던 건 거의 다 사라졌다. 역시 사람은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살아야 했다.
“이런 제가 끔찍하거든 당장 밖에 나가 떠드세요. 요즘 브란젤의 벨트람이라고 불리는 오드리 헨젤이, 내 딸이, 작위 욕심에 눈이 멀어 용을 이용해 아비와 동생을 죽이려 한다고 말이에요.”
“…….”
“하지만 아버님은 그렇게 못하시겠죠. 그랬다간 저뿐만 아니라 가문 전체의 평판이 떨어질 테니까요. 오로지 헨젤만을 아끼는 아버님께서 그런 짓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죠.”
“당신이 아끼는 건 오로지 헨젤뿐이야.”
오래된 기억이 헨젤 백작의 가슴 한가운데를 뚫고 지나갔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가슴팍을 더듬었다. 다친 곳도 없는데 뻐근한 통증이 몰려왔다.
“오드리 너는…… 약혼자도 뭣도 아니면서 아르젠 남작을 멋대로 부리는 데에 거부감이 없구나. 그러다 그가 네게 싫증이라도 나면 너는 네가 얻은 이득의 배 이상을 토해야 할 거다.”
겨우 숨을 가라앉혔던 오드리가 도로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헨젤 백작은 오드리의 표정 하나하나를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벗겨진 가면을 도로 주워 쓰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그는 변하지 않아요.”
“착각하고 있구나. 세상에 영원한 사랑을 노래하는 시와 전설이 그리 많은 것은, 사랑만큼 연약하고 덧없는 감정이 또 없기 때문이다.”
오드리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는 이토록 감정적으로 흔들리는 헨젤 백작을 본 일이 없었다. 마치 같은 얼굴을 한 다른 사람을 보는 듯 낯설었다.
“착각은 아버님이 하고 계세요. 셰비언을 계속 아르젠 남작이라고 부르다 보니 그가 정말 인간 같은가요?”
“…….”
“셰비언은 용이고, 인간의 한평생이라 봐야 용에겐 일 년여의 시간에 지나지 않아요. 그가 변할 것을 걱정하느니 내 짧은 수명을 걱정하는 쪽이 더 나을 거예요.”
“일 년……? 고작 일 년이라고?”
“뭘 그렇게 놀라시죠? 나비의 한평생은 인간에겐 고작 한 계절이잖아요. 그가 변하기 전에 내 수명이 다할 텐데, 그 정도면 영원한 사랑이죠.”
“…….”
“충분히 알아들으신 것 같으니, 이제 이걸 보여드려도 괜찮겠네요.”
오드리가 챙겨온 서류를 꺼내 내밀었다. 반사적으로 서류를 받아든 헨젤 백작은 그만 헛웃음을 지었다.
“어쩐지 늦게 돌아온다 했더니, 이걸 준비하느라 늦었구나. 이런 식으로 찍어 눌러 처리할 거면서 유언장 원본은 뭐 하러 찾았던 거냐?”
작위상속증명서.
오드리가 헨젤 백작이 집에 돌아왔다는 소식을 전해 듣자마자 가스트로를 찾아가 받아낸 서류였다. 헨젤 백작이 거부하든 말든 밀리나의 유언장에 조건이 있건 없건, 랄리우스 후작위 상속에 관련된 절차가 완료되었음을 알리는 서류이기도 했다.
서류 하단에 이를 확인하는 가스트로의 서명이 들어 있었다.
‘날 가지고 놀았군. 스물도 안 된 계집아이가 날 갖고 놀았어.’
이 집무실에 오드리가 들어오기 전, 그 전에 이미 모든 일이 끝나 있었다. 랄리우스를 이미 얻었는데 헨젤 백작의 회유와 설득 따위가 먹힐 리 없었다.
“왕세자 전하께서 헨젤의 힘을 빼놓아야겠다는 결심을 하지 않았더라면 받을 수 없었을 작위예요.”
오드리의 목소리에서 웃음기가 묻어났다.
“아버님 스스로 발등을 찍어주신 덕분에 제가 몹시 수월했어요. 그렇지 않았더라면 아무리 오스미다 전하께서 보증한 거라고 해도 유언장 사본 따위가 작위 상속의 근거로 채택될 리가 없잖아요?”
“…….”
헨젤 백작은 그만 이마를 짚었다. 머리가 아찔했다. 그가 비록 유언장 원본을 갖고 있긴 해도 그건 세상에 공개할 수 없는 문서였다.
“헨젤, 랄리우스, 비레직. 왕세자 전하께서는 왕실과 혈연도 아니고 백합도 없는 가문에 작위가 세 개나 되는 건 위험하다고 판단하셨답니다.”
작위가 많아 위험하다 생각했으면 적당히 핑계를 대고 몰수를 하든지 아니면 백합문양을 하사할 것이지, 대뜸 귀족가의 후계자 문제에 끼어들어 상속을 진행시키다니.
헨젤 백작은 가스트로가 이런 무리수를 둘 정도로 오드리와의 연결이 공고하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서류를 보고 또 보아도 마법으로 찍어낸 금빛 인장은 사라지질 않았다.
“대체……. 대체 뭘 한 거냐? 그 왕세자가 단순히 국고를 채운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후하게 굴 리 없다.”
“아버님, 왕세자 전하를 높이 평가하시는군요? 하긴 영리하고 대담한 분이긴 해요.”
“그래서 뭘 했느냐고 묻잖느냐!”
“급하시긴. 다이아몬드를 영원의 보석으로 만들어 드렸지요.”
“……?”
“단단한 보석일수록 강력한 마법이 담기고 실패 확률도 적거든요. 레펙치오 때문에 다이아몬드 수요가 폭발했어요.”
“레펙치오……. 그렇군. 유행을 타지 않는 보석 수요의 등장인가. 왕실은 다이아몬드 광산이 주 수입원이니, 기분이 좋을 만도 하겠어.”
오드리의 대답은 매우 불친절했지만, 헨젤 백작은 그것만으로도 사정을 쉬이 짐작했다. 로렐라이만으로는 감당이 안 되는 거액의 출처가 셰비언이었다는 걸 깨닫고 나자 허탈함마저 몰려왔다.
“어이가 없군. 왜 짐작하지 못한 거지? 레펙치오 제작에 아르젠 남작이 끼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
“그야 당연하죠. 아버님은 무엇도 나누지 않는 분이니까요. 킥, 설마 셰비언이 재산을 통째로 제게 넘겼을 거라 상상이나 하실 수 있었겠어요?”
오드리의 웃음이 헨젤 백작을 자극했다. 서류가 그의 손에서 마구 구겨졌다.
“어차피 사탕껍질 같은 작위다. 왕세자는 네게 중책을 맡길 의사가 없고, 네 의견을 귀 기울여 들을 생각도 없다. 그건 네가 랄리우스가 되든, 아니면 다른 작위를 얻든 마찬가지일 거다. 그리 좋아할 것 없다.”
“상관없어요.”
오드리가 팔짱을 끼고 턱을 치켜들었다. 헨젤 백작은 자신만만하게 미소 짓는 오드리의 얼굴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화들짝 놀랐다.
“저를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
“하…….”
“로렐라이도, 셰비언도, 데멘사도, 모두 제 손안에 있어요. 이제 거기에 레펙치오도 추가됐죠. 왕세자 전하도 곧 깨닫게 될 거예요. 절 사탕 취급해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요.”
헨젤 백작의 눈이 어두워졌다.
“좋다. 듣고 보니 네가 가진 게 많긴 하구나. 하지만 말이다……. 넌 아직 열여덟 살에 불과하다는 걸 잊었구나. 내가 부모로서 가진 권리를 백분 활용하겠다면 어쩔 거냐?”
“뭘 어쩌시게요?”
“살론 유학을 보내주마. 그웬가의 첫째와 계속 어울리는 걸 보니 너도 예술에 관심이 있는 모양인데, 그쪽 계통으로 보내주면 되겠지. 그게 싫다면 신학도 좋겠다. 벨트람 흉내를 제법 잘 내고 다닌 걸 보면 기본 지식이 상당한 듯하니 금방 적응하겠지.”
“살론이라……. 대뜸 외국 얘기가 나올 줄은 몰랐는데요.”
“살론어를 배울 목적으로 유학을 가는 어리숙한 놈들도 있지만, 넌 그 정도는 아니잖느냐? 일상회화 정도야 지금도 능숙하게 하니 고급 지식을 쌓고 오너라. 살론의 대학은 여자도 받아준다니 잘됐지.”
오드리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헨젤 백작이 하는 말이 우스워 견딜 수가 없다는 듯이 손부채질을 했다.
“기껏 생각해 냈다는 게 멀리 쫓아내는 건가요? 하긴 아버님은 예전부터 그랬죠. 제가 열 살이 되던 해엔 만탈락으로 보냈고, 라비린과 약혼하자 북부로 보낼 계획을 짜셨죠.”
“…….”
“저를 멀리 보낸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닌데 그를 뻔히 아시는 분께서 왜 매번 그런 선택을 하시는 건지 이해가 안 가요.”
“…….”
사실 헨젤 백작 본인도 궁금했다. 자신이 오드리에게 매번 이렇게 무르게 구는 이유가 뭔지.
“유학은 안 가요. 살론도 좋고 공부도 좋지만 그것도 제가 하고 싶을 때 해야 의미가 있죠.”
“그렇게 나오면 나도 말을 바꿀 수밖에 없다. 당장 다음 달부터 네 재산을 내가 직접 관리할 테니 계좌 열쇠를 가져오…….”
“아버님. 제가 어머니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는데, 랄리우스가 헨젤의 비리를 모아온 건 사실이에요. 열다섯 살을 넘겨 비고를 열 수 있게 된 다음부터는 제가 모았고요.”
“그런 게 진짜 있었으면 밀리나가 나를 선택할 이유가 없지 않느냐.”
“어머니가 아버지를 선택한 이유요? 그야 랄리우스의 후계자가 충분히 자랄 때까지 보호해 줄 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겠다 싶어 선택하지 않았겠어요? 설마 이름 높은 헨젤이 아내의 유언장을 고치는 쓰레기 짓을 할 거라고는 생각 못 하셨겠죠.”
“…….”
“안타까워요. 제 기억 속의 어머닌 안목이 대단히 높은 사람이었는데……. 인생의 가장 중요한 선택에서 쓰레기를 고르다니요.”
오드리가 헨젤 백작을 밀어냈다. 헨젤 백작이 힘없이 뒷걸음질 쳤다.
“저는 어머니가 아니에요. 어머니가 쓰지 않았던 무기라고 앞으로도 쓰일 일 없으리라고 생각하는 건 대단한 착각이라는 걸 잘 알아두셔야 할 거예요.”
“…….”
“그러니 아버님, 절 방해할 생각은 꿈에도 마세요. 서류 다 보셨으면 이만 제자리로 돌려놓으시고요.”
오드리는 그대로 돌아섰다. 그녀는 경쾌한 걸음걸이로 집무실을 가로질렀다. 그녀가 막 문고리를 잡으려는 순간, 헨젤 백작이 그녀를 불렀다.
“넌 나를 닮았다.”
오드리의 손이 허공에 뜬 상태 그대로 멈췄다. 무시하면 된다는 걸 뻔히 아는데 가슴께 어딘가에서 덜컹 소리가 났다. 발이 바닥에 착 달라붙었다.
“전 어머니를 닮았어요.”
“아니, 넌 나를 닮았어. 곧 네가 세운 가문과 네가 얻은 작위와 네가 번 돈이 너의 전부가 될 거다.”
“……지금 저주하시는 거예요?”
“사실을 말하는 거다.”
“나 참, 도무지 들어줄 수가 없네…….”
마주 볼 때도 느끼지 못했던 압박감이 묵직하게 전신을 짓눌렀다. 등 뒤에서 헨젤 백작이 던지는 시선이 강렬하게 느껴졌다. 이를 악물고 문고리를 잡아 눌렀다.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거다. 내가 왜 이런 말을 했는지.”
집무실의 두꺼운 문이 빼꼼 열렸다. 대리석 복도에 질펀하게 쏟아진 햇살이 눈부셨다. 창가에 기대어 꾸벅꾸벅 졸던 셰비언이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오드리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셰비언의 얼굴에 묻어 있던 졸음이 싹 달아났다.
오드리는 배부른 고양이처럼 나른한 기분이 되어 웃었다.
“아뇨, 전 쭉 모를 거예요.”
“…….”
“저는 분명 아버님을 닮았지만, 닮았다는 게 같다는 건 아니니까요.”
말을 하면 할수록 어깨를 짓누르던 압박감이 사라졌다. 성큼성큼 다가온 셰비언이 손을 내밀었다. 오드리는 기꺼이 그 손을 잡았다. 서늘한 체온이 기분 좋았다. 돌아볼 마음이 싹 사라졌다.
“적어도 저는 사랑을 가졌잖아요. 가문과 작위와 돈이 아무리 좋아도 어떻게 그것들이 제 전부가 될 수 있겠어요?”
쿵, 문이 닫혔다. 아니, 완전히 닫히진 않았다. 평소 관리가 소홀했는지 문이 약간 어긋났다.
서서 졸 정도면 가서 자지 그랬어. 오드리가 걱정되는 걸 어떡해요. 얼굴 봐,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 별거 아냐.
연인이 속삭이는 소리, 까르르 웃는 소리, 자박자박 햇살 밟는 소리가 어긋난 문틈으로 흘러들었다.
헨젤 백작은 집무실 의자에 풀썩 주저앉아 사위가 조용해질 때까지 그저 기다렸다. 그러다 마침내 원하는 수준의 정적이 찾아왔을 때, 오드리가 주고 간 작위상속증명서를 쭉쭉 찢어버렸다.
“아직 어리고 힘이 없을 때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수십 번도 더 생각했지만 끝내 실행은 못 했던 생각. 헨젤 백작은 이번에도 차마 하지 못할 걸 알면서 또 헛된 꿈을 꾸었다.
오드리는 방에 돌아오자마자 완전히 지쳐 늘어졌다. 헨젤 백작과 얼굴을 마주 보고 대화하는 건 상상 이상으로 심력 소모가 큰일이었다. 푹신한 안락의자에 파묻혀 눈을 감고 있으려니 약간 거칠고 작은 손이 뺨과 눈가를 조심조심 만지작거리는 게 느껴졌다.
“셰비언은 아까 나갔고……. 약초 냄새가 안 나는 걸 보니까 다이앤은 아니고. 누구야?”
“……나예요, 누나.”
“끙…….”
오드리는 꾸역꾸역 몸을 일으켰다. 지쳐서 흐릿해진 시야에도 하델의 무표정한 얼굴이 선명하게 들어왔다.
“노크 소리도 못 들은 거 같은데, 무슨 일로 여기까지 들어와서 자려는 나를 깨우니?”
“어떻게 들어왔는지는 안 물어봐요?”
“뻔하지. 비밀통로 썼겠지.”
하델이 어렴풋한 미소를 지었다. 오드리가 그의 방에 있는 비밀통로에서 튀어나온 이후, 하델은 온갖 공을 들여 방을 뒤졌다. 그러다 이 정도 정성이면 모래밭에서 바늘도 찾을 수 있겠다 싶은 수준이 됐을 때 겨우 비밀통로를 찾아낼 수 있었다.
“다시 물을게. 왜 왔어?”
“누나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앗, 눕지 마요! 꼭 지금 물어봐야 해요!”
“누워서도 귀는 다 들려. 얘기해.”
별일 아니라고 생각한 오드리가 도로 의자 속으로 파묻혔다. 하델이 발을 동동 굴렀다. 심호흡을 하며 숨을 가다듬다 어쩔 줄 모르고 마구 마른세수를 했다. 그러다 굳게 결심한 듯 오드리를 마구 흔들어 깨웠다.
“누나, 왜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아요?”
“……응? 무슨 말이야?”
“나랑 약속했잖아요. 가문에 해가 가지 않는 선에서 일하기로! 그런데 왜 굳이 누나가 직접 작위를 받아야겠다는 거죠? 그게 가문에 크게 문제가 된다는데 왜요?”
잠이 확 깬다. 오드리는 하델의 손을 뿌리치고 일어나 앉았다. 초록색 눈동자가 불길처럼 일렁거렸다.
“너, 누구에게 그런 말을 들었어? 누가 네게 말을 전했지?”
“내가 직접 들었어요.”
“뭐?”
“이왕 비밀통로의 존재를 알았으니까 다 써먹어봐야죠. 누나와 아버지가 대화할 때, 나도 아버지의 집무실에 있었어요.”
하델이 어찌나 당당하게 나오는지, 오드리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말을 잊었다.
“아버지가 누나를 그렇게 잘 챙기는데, 누나는 왜 조금도 순종하지 않아요? 가문을 나가고 싶으면 그냥 결혼해서 나가면 되잖아요. 공작부인까지 할 수 있게 도와준다는데 왜요? 꼭 아르젠 남작이어야 돼요? 아르젠 남작이 누나가 작위가 없으면 싫대요?”
“…….”
“랄리우스는 본래 누나 거니까 그렇다고 쳐요. 하지만 아버지가 로렐라이를 가져가겠다고 하지 않으면 누나도 성의를 보여야 하는 거잖아요?”
오드리는 헨젤 백작이 입으로는 다정한 말을 뱉으면서 눈으로는 경멸을 쏟아내는 걸 똑똑히 보았다. 하지만 비밀 통로 안에 있었던 하델은 헨젤 백작의 목소리만 들었지 다른 건 전혀 보지 못했으니, 사실 왜곡은 바로 이런 게 사실 왜곡이다.
“너 지금……. 내가 헨젤에 상처 입힌다고 생각해서 화내는 거 맞지?”
“실제로 그러고 있잖아요. 누나가 랄리우스 후작위 상속을 하는 것도 난리가 날 게 뻔한데 뭐? 가문을 나가서 작위를 따로 받고 새 가문을 세워요? 누나 미쳤어요?”
“난 지극히 정상이고, 미친 건 내가 아니라 너 같구나.”
이제 잠은 완전히 달아났다. 오드리는 아예 일어서서 팔짱을 끼고 하델과 마주 섰다. 하델이 뱉은 말이 잘못 삼킨 커다란 가시처럼 가슴 윗부분을 마구 찔러댔다.
배신감.
이 고통에 이름을 붙인다면, 아마 배신감이라는 단어가 가장 잘 어울릴 것이다.
헨젤의 후계자인 하델이 헨젤을 상처 입히는 오드리를 비난하는 건 당연한데, 이런 상황을 생각해 보지 않은 것도 아닌데, 그럼에도 이렇게나 짙은 배신감이라니.
‘날 좀 더 미워하는 게 좋을걸.’
하델에게 그리 말하면서도 마음 한편에서는 조금이나마 기대를 했던 모양이었다. 어쩌면 하델이 자신을 이해하고 편들어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우스운 것은, 오드리를 비난하는 하델의 표정도 그녀와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누나, 세상에 어떤 사람이 제 살을 파먹어 허기를 면하죠? 누나가 아무리 부정해도 누난 오드리 헨젤이에요. 헨젤이라고요!”
“그렇게 해야 살 수 있다면 내 살점 따위 못 먹을 게 뭐가 있니?”
“누나!”
“순종? 성의? 어머니께서 내게 남겨주신 것들을 아버님에게 고스란히 바치고 정해주는 남자와 군소리 없이 결혼하는 것이 순종이고 성의다. 넌 괜찮을지 몰라도, 난 그렇게는 억울해서 못 살아.”
그럴 바엔 차라리 죽고 말지. 한숨 섞인 중얼거림 속에 진심이 가득했다.
“내 이름이 오드리 헨젤이라도, 이 몸에 흐르는 피의 절반은 랄리우스다. 더구나 나는 랄리우스의 땅에서 자랐어. 내가 꼭 헨젤을 택해야만 하는 이유가 대체 뭐니? 그저 아비가 헨젤이니까? 정작 그 아비는 나를 반기지 않는데 왜?”
하델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서 아무렇지도 않게 내 이름을 팔았나 보죠? 난 어쨌거나 헨젤이고, 누나는 랄리우스니까?”
“…….”
“내 이름을 들먹이며 아버지를 압박하는 게 아주 자연스럽더군요.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었어요. 매번 아버지와 다툼이 생길 때마다 날 팔았던 거죠?”
“부정하지는 않으마.”
오드리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다 들었다는데 무엇을 더 감추겠는가?
“아버님이 널 아끼는 만큼 내가 이용하기도 좋았던 건 사실이니까.”
하델의 입술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꽉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하델은 내심 아니라는 말을 기대했던 자신이 너무 한심해서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다.
“아뉴람브 성에 누나를 데려가는 게 아니었어요……. 아니, 애초 누나가 하는 말 따위에 귀를 기울인 것부터가 잘못이었어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가 아버지를 궁지로 몬 거예요! 내가……!”
“거 잘난 척이 아주 심하구나.”
오드리가 하델의 비명을 단칼에 잘랐다. 그도 모자라 호되게 하델의 이마를 콱 쥐어박았다. 악! 난데없이 얻어맞은 하델의 눈에 눈물이 잔뜩 고였다.
“꼬리가 길면 잡힌다는 말이 왜 나왔는지 몰라? 아버님이 뤼나소에 손을 댄 이상, 언제가 되어도 벌어졌을 일이야.”
“변명은…….”
“괴물 사태를 두 번이나 겪고 즉위하는 왕, 그것도 치안대의 수장이 친형제가 아닌 왕에겐 눈에 확 띄면서도 치안대의 인심을 얻을 만한 업적이 필요하고, 치안대의 오랜 골칫거리를 해결하는 건 그에 딱 어울리는 일이지.”
“…….”
“하델, 아버님은 뤼나소를 사용한 것만이 아니라 유통경로를 정비하기까지 했어. 이건 단순 소지와는 차원이 다른 일이야. 마약류 유통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무거운 처벌을 받는다는 걸 너도 잘 알 텐데?”
막연히 짐작만 하고 있던 것을 정면으로 듣게 된 하델의 눈이 흔들렸다. 고였던 눈물이 툭 떨어졌다.
“내가 끼어들어 시기가 조금 빨라졌을지는 몰라도, 언제까지고 피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어. 내가 이걸 일일이 설명해 줘야 알겠니?”
“…….”
눈물을 머금은 속눈썹이 아래로 떨어졌다. 한껏 날이 섰던 오드리의 기세가 사뭇 부드러워졌다. 그녀는 하델의 뺨을 적신 눈물을 조심스레 거뒀다.
“헨젤의 몰락을 바라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니? 아버님은 내가 그걸 써먹었다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해. 네 말대로 내가 헨젤이기 때문에, 일종의 내부고발로 쳐서 이 정도에서 끝난 거야.”
하델은 오드리의 손길을 거절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입에서 나온 건 납득이 아니라 원망이었다.
“……내가 아직도 누나가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어린애로 보여요? 왕세자는 누나가 내부고발을 해서 가볍게 넘어간 게 아니에요. 누나를 이용해서 헨젤을 약화시키고 이번의 선처를 빌미 삼아 아버지를 마음대로 부리려고 그런 거지.”
이것 봐라. 언제 이렇게 컸지? 오드리의 눈에 반짝 흥미가 돌았다.
“누나는 자신을 위해 그걸 써먹을 게 아니라 아버지에게 드렸어야 했어요. 위험을 경고하고 그 잘난 머리를 써서 가문을 보호했어야죠. 진정 피할 수 없는 일이면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루고 축소할 수 있는 데까지 축소했어야죠. 그 공로로 아버지에게 랄리우스 후작위를 달라고 했어야죠.”
“하델, 내 얼굴 좀 볼래?”
“랄리우스 후작위면 충분하잖아요. 그게 누나의 몫이잖아요. 왜 굳이 새 작위를 원해요? 왜 새 가문을 원해요? 어떻게…… 어떻게 그렇게 가족을 팽개치고 누나의 이익만 따져요? 어떻게!”
하델이 바닥으로 떨어진 고개를 들지도 못한 채 버럭버럭 악을 썼다. 오드리는 그런 하델의 턱을 잡고 억지로 고개를 들어올렸다. 하델이 황급히 눈을 피했지만 상관없었다.
“과연 아버님이 내 공로를 인정해 주셨을까? 랄리우스를 갖겠다는 내 요구를 받아주셨을까? 아니, 애초에 내 말을 듣기는 하셨을 것 같니? 이 얼굴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으…….”
하델은 오드리의 상처를 보고 싶지 않았다. 이전처럼 완벽하진 않아도 바닥으로 떨어지진 않았다고 믿고 싶은 아버지가 저지른 짓을 정면으로 마주하기엔 아직 마음의 준비가 덜 되었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상처를 보지 않으려 애를 썼다.
“놔요!”
“똑바로 보고 대답하면 놓아줄게.”
빠져나가고 싶었지만 오드리는 힘이 셌다. 아무리 몸을 흔들어도 어깨와 턱을 잡은 손은 강철같이 단단했다.
하델은 자포자기하고 부풀어 오른 뺨과 푸르게 멍든 눈가를 바라보았다. 생각 이상으로 선명한 상처를 보는 순간, 전신의 피가 싸늘하게 식고 오물 한 양동이를 뒤집어쓴 듯 기분이 더러워졌다.
“어떻게 생각하니?”
“어, 어쩌면…….”
“거 보렴. 너도 당연하다는 말이 안 나오잖니. 나는 확실한 길을 택한 것뿐이야.”
“…….”
“나는 아버님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단다.”
너는 그분에게 사랑스러운 자식이고 앞날이 기대되는 후계자지만 나는 아니야. 그걸 나만 알고 있지는 않을 텐데?
작은 속삭임이 하델의 죄책감을 불러일으켰다. 노골적으로 하델과 오드리를 차별하는 헨젤 백작을 보면서도 모른 척 외면했던 날들이 눈앞을 스쳤다. 뭐든 잘하는 누나를 거들떠보지 않는 아버지를 보며 미약하게나마 승리감을 맛보았던 순간들도 떠올랐다.
“맞아요……. 아버지는 날 편애해요. 그동안 누나가 억울했을 거란 거 이해해요. 복수하고 싶어 하는 마음도 알겠고, 기대하지 않는 마음은 안타까워요.”
“오, 알고 있었니? 말이야 했지만 영 모르는 줄 알았지.”
“하지만 난 하델의 후계자예요. 내가 하델의 후계자인데, 그런데 내가 어떻게 누나의 행동을 용납해요?”
“…….”
“내, 내가, 어떻게…….”
멈췄던 눈물이 흘러넘쳐 오드리의 손을 흥건하게 적셨다. 오드리는 얼굴을 고정시킨 손을 놓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끌어안지도 못한 채 하델의 얼굴을 가만히 보기만 했다. 그러다 깊은 한숨과 함께 하델의 눈물을 닦아냈다. 별 소용은 없었다.
“울라고 한 말은 아냐……. 그만 울어.”
“누, 누나도 내가 랄리우스를 상처 입히는 꼴은 모, 못 볼 거잖아요.”
“그래, 맞아. 그 꼴은 못 보지. 내가 잘못했다. 그래, 내가 잘못했어. 그치만 이미 저질러 버린 걸 어쩌겠니? 쏟아버린 우유는 도로 주워 담을 수 없고 흘러가 버린 물은 다시 돌아오지 않아. 왕세자 전하는 내게 작위를 주시기로 했고 네가 이리 악 써봐야 그건 변하지 않아. 내가 무를 수도 없는 일이야.”
오드리는 하델을 돌려 세우고 머리칼 곳곳에 달라붙은 먼지와 거미줄을 떼어냈다. 돌아가는 길에 또 엉망이 되겠지만 그걸 알면서도 마음이 쓰였다. 하델은 훌쩍거리면서도 반항하지 않고 얌전했다.
“좋게 생각해. 나중에 아버님이 정적에게 공격을 당할 때, 작위를 가진 내가 아버님에게 힘을 보태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퍽이나 그렇겠어요. 같이 신나서 돌이나 안 던지면 다행이지. 킁.”
“날카롭기는. 하지만 말이야, 아버님은 몰라도 너는 도울 거야. 네가 헨젤의 수장이라면 도와주는 수고가 아깝지 않지.”
말의 내용은 다정해도 어투는 전혀 다정하지가 않다. 수고는 아깝지 않지만 대가는 받아야겠다, 뭐 그런 말이 뒤에 따라와야 할 것만 같다. 한데 머리를 다시 묶어주는 손은 더없이 다정하니, 하델은 오드리에게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 건지 혼란스럽기만 했다.
마냥 미워하기엔 적잖이 마음이 쓰이고, 그렇다고 덮어놓고 사랑하기엔 너무 밉고 원망스럽다. 그러니 입에서 나오는 거라곤 고작 이런 말뿐이다.
“이왕 가진 거, 잘 지켜요. 여기저기에 이용당하지 말고.”
“너나 잘하렴.”
오드리는 열과 성을 다해 하델의 머리를 묶었다. 전 같으면 엉망진창이 되었을 텐데, 셰비언의 둥지에서 보낸 시간이 있어서 그런지 제법 봐줄 만했다. 그녀는 하델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제 작품을 흡족하게 감상했다. 하지만 하델의 표정은 영 좋지가 않았다.
“왜? 마음에 안 드니? 나름대로 열심히 묶었어. 더 잘하지는 못해.”
“그게 아니라요……. 누나, 아르젠 남작이 누나랑 결혼 안 할 거래요?”
“셰비언 얘긴 갑자기 왜 나와? 왜, 화동 하고 싶었는데 못할까 봐 걱정되니?”
오드리의 장난 같은 질문에 하델이 어깨를 으쓱였다.
“설마요. 브란젤 전체에 다 알려질 만큼 진한 연애를 해놓고 아르젠 남작이 훌쩍 떠나 버리면 어쩌나 싶어서 그래요. 그땐 혼담도 안 들어올 게 뻔한데, 그럼 누나는 애인도 없이 평생 미혼이 되잖아요.”
“무슨 말을 해도……!”
“인간의 일평생은 용의 일 년이니까 그럴 일은 없다고요? 에이, 누나. 세상에는 평생 가는 사랑은 드물어도 일 년도 못 가는 사랑은 흔하잖아요. 알만 한 사람이 왜 그렇게 태평해요?”
“너……. 꼭 사랑을 해 본 것처럼 말한다?”
“해 본 적은 없어도 구경은 많이 해 봤거든요. 당장 작년 수확제 때 누나가 누구랑 데이트를 나갔었는지도 잘 기억하고 있어요. 그중 며칠은 새벽이 다 되어서 들어왔던 것도요.”
오드리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하델은 말 몇 마디로 오드리의 평정을 깨뜨리는 데에 성공하고 뿌듯함에 입술을 끌어올렸다.
“라비린이랑은 딱히 사랑해서 만난 거 아니었어!”
“아하, 그래요? 사랑이 아니면 정략이었어요? 하지만 타우레드 영지에서 돌아오고서 며칠을 제정신이 아니었던 걸 정확히 기억하는데……. 이상하네요. 아, 베텔 경에게 가서 물어볼까요? 그때 베텔 경이 누나를 걱정하느라 아주 난리도 아니었거든요. 베텔 경은 분명 잘 기억하고 있을 거예요.”
“으……!”
내가 그때 왜 그랬을까! 오드리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었다. 아니면 저 망할 동생 놈의 입을 콱 틀어막아 버리든가. 그녀는 재갈로 쓸 만한 걸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하델은 오드리의 흉흉한 눈빛에서 몹시 구체적인 신변의 위협을 느꼈다. 이대로 있다가 잡히면 며칠 동안 침대에서 일어나기도 싫을 정도로 엉덩이를 두드려 맞을 것만 같은 느낌이랄까. 그는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쳐서 비밀통로를 열고 발을 담갔다.
“누나, 그러니까 아르젠 남작이 아직 누나에게 푹 빠져 있는 동안에 얼른 결혼해요. 혹시 싫다고 했으면 협박이라도 해서 잡아요. 남자가 말이야, 이만큼 연애했으면 책임을 질 줄 알아야지, 차일피일 미루기나 하고, 못됐다!”
“내가 거절한 거야, 내가!”
“우와, 누나가요? 무슨 배짱으로? 누나, 누나는 나이 먹고 늙고 병들 거예요. 꽃 같은 젊음은 금세 시들어서 흔적도 안 남을걸요. 인간 부부라면 함께 늙어가겠지만 아르젠 남작은 용이잖아요. 누나 말대로라면 그는 고작 일 년여 사이에 누나가 빠르게 늙어가는 걸 보는 거예요. 정말 순식간이겠죠. 마음이 식지 않을 거라고 어떻게 확신해요? 그는 아직 누나가 늙은 걸 보지도 못했는데!”
비밀통로에 숨어서 머리만 쏙 내밀고 하는 말이라기엔 지나치게 진지한 감이 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나 틀린 말은 아니라는 게 오드리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하델은 머리를 조준하고 날아오는 손가방을 홱 피하고 다시 입을 놀렸다.
“빨리 질리면 그나마 다행이죠. 누나 나이 한 오십 되어서 질리면 그땐 진짜 어떡해요? 아르젠 남작은 늙지도 않을 텐데……. 누나, 뭔 짓을 해서라도 빨리 결혼해요.”
“당장 꺼져! 한마디만 더하면 그땐 진짜 다리를 분질러 버릴 거야!”
드디어 오드리의 입에서 험한 말이 나왔다. 하델은 더 까불지 않고 냉큼 비밀통로 저편으로 줄행랑을 놓았다.
“이, 빌어먹을, 자식! 귀엽다, 귀엽다 해주니까 아주……!”
오드리는 낑낑대며 소파를 끌어다 비밀통로의 문 앞에 배치했다. 그냥 내버려 뒀다간 자다 말고 벌떡 일어나서 하델을 때리러 갈 것 같았다. 이마에 맺힌 땀을 대충 손등으로 문질러 닦으려는데, 누군가 불쑥 손수건을 내밀었다. 다이앤이었다.
“아가씨, 저는 도련님 의견에 찬성이에요.”
“다이앤, 나 이사 갈까?”
“…….”
“…….”
두 사람은 동시에 말했고,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말을 하는 동안 귓구멍이 자동으로 막히는 건 아니었으니까. 오드리는 땀을 닦는 척 다이앤의 시선을 피했다.
“어…… 언제 왔니?”
“아가씨께서 화동 운운하실 때요.”
다 들었구나. 왜 기척을 눈치채지 못했을까. 셰비언 얘기가 나오자마자 신경이 완전히 그쪽으로 쏠려 버렸나. 오드리는 손수건에 얼굴을 파묻었지만 이내 다이앤에게 빼앗겼다.
“아르젠 남작님은 언제 돌아오세요?”
“……일을 마치면 오겠지.”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빨리 오셔서 아가씨 얼굴을 치료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세상에, 아까보다 더 부었어.”
다이앤이 오드리의 얼굴에 치덕치덕 약을 발랐다. 코를 찌르는 싸한 약 냄새가 주변을 물들였다. 오드리는 콧잔등을 찡그리며 웃었다. 일부러 말을 돌리는 다이앤의 배려가 고마웠다.
“뭐야, 다이앤 몰리. 약에 자신 없어?”
“설마요. 흔적도 없이 깨끗하게 낫게 해드릴 수 있어요. 하지만 제 약은 오래 걸리고, 아르젠 남작님의 마법은 빠르잖아요.”
“그러니까 약으로 치료해야지. 아버님은 내 상처를 볼 때마다 오늘의 대화를 떠올릴 텐데, 빨리 낫게 해 버리면 아쉽잖아. 할 수 있는 한 오래오래 즐겨야지.”
다이앤이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쉬었지만 오드리는 진심이었다. 아까 방을 나가기 직전에 보았던 표정을 계속 볼 수만 있다면, 이 정도 통증쯤이야 얼마든지 견딜 수 있었다. 몇 년 묵힌 체증이 한순간에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이 얼굴은 아버님을 위한 거니 챙 넓은 모자를 다양하게 준비해 줘. 내일부터 재무국에서 좀처럼 나오지 못할 아버님께 내가 직접 매일 간식을 챙겨드릴 예정이니까.”
“역시 우리 아가씨.”
오드리는 다이앤의 영혼 없는 맞장구를 들으며 눈을 감고 콧노래를 불렀다. 다이앤은 그녀가 헨젤 백작을 약 올리는 상상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오드리의 콧노래는 그저 셰비언의 부재를 견디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녀의 끈질긴 설득과 강요에도 달튼 제도로 가야 하는 진짜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던 그의 부재가 너무 크게 느껴졌다. 다알리아 머리 장식을 하고 있는데도 어쩐지 추운 기분이었다.
* * *
세피아 항구는 예전부터 멜브란트에서 손꼽히는 항구도시였다. 큰 소비도시인 수도 브란젤이 지척에 있고 제스본강과 기찻길이 원활한 물류를 책임지니, 살론, 나랍, 두프트, 카펠로 등 온갖 나라를 오가는 무역선이 세피아 항구에서 짐을 부렸다.
폭풍이 밀어닥치는 계절만 아니면 매일 수십 척, 많게는 수백 척의 배가 들락대는 세피아 항구처럼 큰 무역항에는 배의 입출항 허가를 내주고 입출항 순서를 정해주는 감독관이 있었다. 때로는 밀수품과 무역금지물품을 잡아내는 감찰관보다 더 어깨에 힘을 줄 수 있는 관리가 감독관이었다.
마침 세피아 항구의 감독관은 융통성이라는 걸 아는 인물이었고, 그렇다보니 급히 출항해야 하는 배의 선장이 감독관에게 약간의 성의를 보이고 특혜를 받는 일이 잦았다. 조금 아니꼽기는 해도 먹고 탈이 날 정도로 많은 걸 요구하지는 않아 그리 평판이 나쁘지 않았다.
한데, 어느 날 갑자기 그 융통성이 사라져 버렸다.
펄럭거리던 안주머니가 꾹 닫히고, 술이 찰랑거리던 잔엔 먼지가 앉았다. 감독관은 성의 표시를 하러 찾아온 선장들의 엉덩이를 두들겨 죄다 사무실 밖으로 내쫓아 버렸다. 마치 하루아침에 사람이 바뀐 것 같았다.
그 뒤에 벌어진 일은 더욱 기막혔다. 적당히 돈을 찔러주고 술과 요리를 대접하면 쭉쭉 당겨지던 출항일은 뿌리 내린 나무처럼 고정됐고, 날씨를 봐서 늘고 줄던 출항 허가는 최소로 줄어들었다.
하늘은 파랗고 바다도 잔잔한데 부두에 정박한 채 옴짝달싹 못하고 노는 배가 점점 늘어나면서 손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더불어 배에 오르지 못하고 계속 항구에서 머무르게 된 선원이 늘어나면서 그들이 치는 사고도 늘어났다. 덕택에 세피아 항구의 치안대는 하루 온종일 바빴다.
이런 상황이니 사방에서 불만이 쏟아졌다. 본격적으로 나서서 압력을 넣는 이들도 생겨났다. 그러나 감독관은 꿈쩍도 하지 않고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했다.
나랍을 향하는 무역선에 관련된 것만 빼고.
탕! 어찌나 세차게 잔을 내려놓는지, 반쯤 남은 럼주가 사방으로 튀었다. 변변찮은 안주가 럼주를 홀랑 뒤집어썼지만, 테이블에 둘러앉은 이들 중 안주의 안위를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번엔 뭐라던가?”
“안 된대! 무슨 일이 있어도 달튼 제도를 피해서 항해하라는구만!”
“에에이, 빌어먹을, 개가 듣고 웃겠네! 나랍으로 가면서 어떻게 달튼 제도를 피해서 가?”
“그냥 출항하지 말란 거지. 나랍하고 무역을 끊을 셈인가? 씨발, 끊을 거면 그냥 그렇다고 할 것이지 달튼 제도만 피해서 가면 허가된다 어쩌고저쩌고……. 염병!”
숨을 죽이고 대답을 기다리던 사람들이 욕지거리를 쏟아냈다. 이 테이블에 모여 앉은 이들은 모두 나랍으로 향하는 배를 모는 선장들이었다. 그들은 마냥 놀고 있는 배를 보며 까맣게 타들어가는 속을 술로 달래는 중이었다.
“아니 뭐, 달튼 제도에 대해적이라도 나타났대?”
“진짜 그런 거면 용병이라도 대거 고용하든지 하겠는데, 이건 그런 말도 없고. 달튼 제도에 배 드나든 게 내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아무튼 그런데 왜 갑자기 처막고 지랄이래?”
답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중충한 분위기 속에서 누군가 걸쭉하게 욕을 뱉었다.
“염병, 보름 내에 출항 못 하면 난 파산이야.”
“누군 다른가? 씨발,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가라는 대로 갈걸…….”
“그 길로 가면 뭐 남는 건 있고? 게으름뱅이 새끼인지 선원인지 모를 놈들 처먹이고 나면 빈주머니만 남을걸. 재수 없으면 해적에게 싸그리 털리고 상어 밥이 될 수도 있고.”
달튼 제도는 나랍과 멜브란트 사이를 오가는 무역선의 주요 통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독관은 항해 계획서에 달튼 제도가 들어 있는 배의 출항을 모조리 막았다. 대안이랍시고 제시한 뱃길은 적어도 한 달 이상 늦어질 수밖에 없는 데다 해적 출몰 지역과도 밀접해서, 그에 응한 이들은 거의 없었다.
“혹시 성의가 부족했던 거 아닐까? 우리가 다 같이 돈을 더 모으면…….”
“로렐라이 상단에서 나섰다가 찌그러진 거 몰라? 더는 못 미룬다고, 단주한테 보고한댔으니까 조금만 더 기다리면 어떻게든 되겠지.”
“흥, 상단에서 월급 받고 배 타는 네놈 새끼야 기다릴 여유가 있겠지만 나 같은 개인사업자는 얘기가 달라요. 그 짠돌이 상단에서 뭐 좋은 거 줬겠어? 보나마나 겉모양만 그럴 듯한 마법도구 몇 개 주고 구슬리려다 실패했겠지.”
“아냐, 이번엔 진짜래. 산트렘의 포도주, 그것도 카론 남작가의 인장이 찍힌 걸로 구해다 줬는데 라벨은 흘끗 보기만 하고 돌려보냈다더군.”
“미친……. 그게 얼마짜린데! 돼지새끼가 갑자기 하티의 사제가 되기로 마음먹기라도 한 건가? 저가 뭐 언제부터 그렇게 청렴했다고 그걸 거절하고 지랄이야?”
한때 산트렘의 지배자였던 카론 남작가는 기사단 관리만큼이나 포도주 관리에도 공을 들였다. 카론 남작가의 인장이 찍혀 유통되는 포도주는 같은 무게의 금보다 비쌌다. 이 거친 바다사나이들이 포도주의 맛은 몰라도 비싼 건 알았다.
카론 남작가의 포도주가 통하지 않았다니 믿어지지 않지만, 정말 그랬다면 뇌물로는 희망이 없다. 안 그래도 어둡던 테이블의 분위기가 더 우중충해졌다.
“씨발……. 속일 수만 있으면 항해계획서 따위 대충 써 갈기고 배 띄워 버리겠는데 이건 그러지도 못하고.”
여기저기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항구만 떠나면 내가 이 드넓은 바다 어느 뱃길로 가는지 네놈들이 어떻게 알겠느냐 싶은 게 솔직한 마음이지만, 일정 규모 이상의 배엔 반드시 항로기록장치라는 마법도구가 설치된다는 게 문제였다.
항해 중 보급을 위해 항구에 정박할 때마다 기록을 제출해야 했고, 그 기록은 항해계획서와 일치해야 했다. 특별한 이유 없이 장치 설치 및 기록 제출을 거부하거나 항해계획서와 영 딴판인 항로로 항해한 게 드러나면 곧장 해적선이나 밀수선으로 간주되어 험한 꼴을 당하게 된다.
물론 어디에나 구멍은 있게 마련이고 할 놈들은 해적질도 밀수도 다 한다지만, 이 테이블에 모여 앉은 선장들은 선량한 일반 시민이었다. 비록 배에서는 절대군주처럼 군림하지만 치안대의 무력 앞에서는 꼬리 내린 얌전한 개가 된다는 점에서 특히.
“그냥 고장 낼까? 마력 잔뜩 넣으면 고장 날 거 아냐. 그리고 마법이 사라졌다고 하면…….”
“아서라. 소송으로 파산할 일 있어? 보장된 사용기한이 남아 있는데 고장 났다고 하면 상단의 마법사들이 다 달려들어서 까보자 그럴걸. 마법사협회까지 올라가면 그냥 망하는 거야.”
“조작 시도 정도는 해 볼 수도 있지. 어차피 기록 따위 열심히 보지도 않잖아? 실력은 괜찮은데 연구하다 파산한 마법사를 꼬드겨서…….”
제법 그럴듯한 말에 다들 혹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로렐라이에 고용된 선장이 찬물을 뿌렸다.
“장치 조작에 성공하더라도 배는 못 숨긴다는 게 더 큰 문제야.”
“뭔 말이야?”
“인심 쓴다. 봐, 오늘 아침에 받은 전보야.”
달튼 제도로 들어가는 주요 길목마다 군함이 깔렸고, 제도 내로 진입하려는 배는 죄다 나포 대상이고, 어쩌다 진입에 성공한 배는 섬 사이에서 숨바꼭질 놀이를 하다 끌려오는 중이며, 중간에 보급할 만한 항구마다 치안대가 죽치고 앉아 선장들을 구속하고 있다고.
믿기 싫은 내용이었다.
“이, 이거 믿을 수는 있어? 데멘사의 공사 속도가 미친 것 같다는 말은 들었지만 벌써 달튼 제도 근처까지 전보를 깔았을 리가 없잖아. 안 그래? 이거 가짜 아냐?”
“야, 머리를 써라. 가장 가까운 데멘사 지점까지 우편을 보내고 거기서 전보를 치면 시간이 반으로 줄잖아. 벌써 만탈락 근처까지 전보가 깔렸다는 기사 못 봤어? 지금쯤이면 만탈락에 닿고도 남았을걸. 쯧쯧, 신문 좀 보고 살아라. 모처럼 뭍에 올라왔는데 술이나 처먹지 말고.”
“거드름 작작 피워, 새끼야. 네놈 새끼 입에 들어가는 건 술 아니면 뭔데? 아무튼 이거 순 미친놈들 아냐? 군함이라니……. 달튼 제도에서 전쟁이라도 할 셈인가? 나랍이랑?”
“설마. 작년에 브란젤에서 그 개난리가 났을 때도 이따위 짓은 안 했어. 오히려 무역량이 늘었던 거 기억 안 나? 분명 다른 이유가 있는데……. 그게 뭔지 모르겠단 말씀이야.”
“뭔지는 몰라도 내가 파산할 건 확실해졌네. 빌어먹을…….”
한 마디씩 하던 선장들이 일제히 침묵했다. 하긴, 나랍이랑 전쟁이 나든 말든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설탕과 약초 대신 무기를 실으면 그만인데. 하지만 그 전에 파산해 버리면 전쟁 특수 따위는 꿈도 꿀 수 없게 된다.
그때, 불콰하게 취해서 잔에 술을 가득 따라놓고 구경만 하던 선장이 인상을 찌푸리고 제 눈을 비볐다.
“이상하네……. 내가 잘못 봤나? 아닌데, 분명 흔들렸는데.”
“무슨 소리야?”
“방금 잔에 따라놓은 술이 흔들렸어. 누가 테이블을 친 것도 아닌데, 막 이렇게…….”
바닷물에 절어 껍질이 쩍쩍 갈라진 두툼한 손이 날렵하게 물의 흔들림을 흉내 냈다. 술에 취했다곤 생각되지 않는 움직임이었지만, 다른 선장들이 보기엔 취한 놈이 헛소리하는 것에 불과했다.
“미친놈.”
“술도 못 이기는 새끼가 뭘 저렇게 처먹었대.”
“그러게 눈알 좀 잘 씻고 다니라니까. 아무리 가짜 눈알이라지만 취급이 너무 험한 거 아냐?”
“아 진짜라니까!”
“차라리 네 잔에만 지진이 났다고 해라, 이 쪼다 새끼야! 하하하!”
이상 현상의 유일한 목격자는 제 증언의 진실함을 소리 높여 주장했지만, 돌아온 건 비웃음과 조롱이었다. 잔뜩 술에 취한 데다 기분도 영 더러운데 조롱까지 당했으니 이어지는 건 당연히 주먹다짐이다. 의자가 넘어지고 술잔이 엎어졌다.
워후, 싸운다! 잘한다! 더 해라! 억, 방금 나 때린 놈 어떤 새끼야? 나다! 네놈 새끼 본래 마음에 안 들었어! 나도 마찬가지다!
흥분과 열기가 끓어오르자 대낮부터 술을 퍼마시던 다른 테이블의 손님들까지도 주먹다짐에 동참했다. 구석에 앉아 밥값 대신 악기 연주를 하던 악사는 슬그머니 도망을 쳤고, 주인은 하루도 멀쩡히 넘어가는 날이 없다며 한숨을 쉬었다. 요즘 세피아 항구의 일상적인 모습이었다.
술잔에 이상 현상을 일으킨 장본인은 땅이 아니라 하늘에 있었다. 셰비언은 거대한 본체를 새하얀 구름 속에 몸을 숨기고 세피아 항구의 바다를 노려보았다.
조금 전 그는 세피아 항구 바다의 마법망을 잡고 힘껏 흔들었다. 구멍이 숭숭 뚫려 너덜거리는 마법망이지만 그것도 마법망이라고, 그 충격이 사방으로 퍼지면서 단숨에 파고가 높아졌다. 부두에 매어놓은 배들이 요란하게 흔들렸고, 출항을 앞두고 바삐 움직이던 사람들 중 몇이 바다에 떨어졌다. 그중엔 마법사도 있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머릿수가 딱 맞는군.’
용의 날카로운 눈은 바다에 빠졌다가 뭍으로 올라오는 사람들을 정확하게 잡아냈다. 크게 다친 사람도, 빠져 죽은 사람도 없었다.
‘그래……. 괜찮아. 물은 샤를레아와 완전히 반대되는 속성인 데다 바다의 수압도 만만치 않아. 무슨 일이 난다는 건 말도 안 돼. 제기랄,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하지?’
머리부터 꼬리까지 이어지는 뼈를 따라 찌르르한 통증이 흘렀다. 뭔가 중요한 걸 놓치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세피아 항구의 앞바다에 봉인구를 던져 넣을 때만 해도 잘한 결정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에 와서 왜 이렇게 불안한지 모를 일이었다.
‘직접 눈으로 보고 올까?’
불현듯 찾아온 충동이 셰비언을 부추겼다. 지금이 밤이 아닌 낮이고 눈 뜬 사람이 수백 수천이라도, 자신을 감추기로 마음먹은 그를 볼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온몸이 새하얀 용은 순식간에 물을 가르고 바다 아래 깊은 골짜기로 헤엄쳐 들어갔다.
바다 속을 비추는 햇빛이 줄어들고 주변이 점점 새카매지는 가운데, 기이하게 생긴 물고기들이 희미한 빛을 뿜으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는 무거운 수압을 견디며 내려가고 또 내려간 끝에 깊고 무거운 침묵과 고요만이 존재하는 골짜기 아래쪽에 다다랐다.
날카로운 바위 사이에 낀 봉인구는 어둔 바다 밑에서도 맥동하는 심장처럼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바닥 곳곳에서 누군가 일부러 만든 것처럼 꼬리를 물고 솟아오르던 공기 방울이 빛을 반사하다 흩어지는 광경이 아주 장관이었다.
봉인구의 빛에 끌려왔다가 셰비언에게 놀라 도망친 물고기들이 그 주변을 빙빙 맴돌았다. 허옇거나 투명한 몸뚱이가 물살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게, 마치 심해의 유령 같았다.
‘그때도 이랬었나?’
모를 일이었다.
셰비언이 봉인구를 여기에 두기로 결정했던 건 샤를레아의 마력을 채 반도 밀어내지 못했을 때였다. 지독한 통증과 수압을 동시에 견디기가 너무 버거워서, 봉인구가 떠내려가지 않게 대충 조치를 마치자마자 바로 수면으로 올라가 버렸었다.
하지만 지금 셰비언은 그때보다는 훨씬 여유로웠다. 아직 화룡의 마력이 남아 있어 어깻죽지가 욱신거리긴 해도, 봉인구를 샅샅이 살피고 주변의 마력망을 점검하는 게 그리 어렵지 않을 정도였다.
보아하니 봉인구는 아주 멀쩡했다. 심장처럼 맥동하는 게 껄끄럽긴 해도, 예정했던 것보다 훨씬 팔팔한 상태로 봉인했던 걸 생각하면 넘어갈 수 있을 만한 수준이었다. 봉인구를 그 자리에 고정해 둔 마법도 괜찮았다. 오백 년은 족히 버틸 수 있었다.
다만 마법망이 마음에 걸렸다. 세피아 항구의 마법망은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 연약하더니, 이 심해의 마법망은 셰비언이 잠들기 전을 연상시킬 만큼 견고했다.
‘바다 속이라고 딱히 마법망의 상태가 다를 이유가 없는데……. 혹시 마법망을 약화시킨 이유가 세월이 아닌 건가?’
셰비언은 그 일대를 돌아다니며 마법망의 상태를 확인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바다가 깊을수록, 인간이 주변에 없을수록 마법망의 상태가 좋았다. 정확히는 마법도구가 근처에 없을수록 마법망이 안정적이었다. 가끔 마법도구와 상관없이 엉망인 곳이 있긴 해도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기막힌 일이었다. 용끼리 내전을 벌이면서 마법을 장맛비처럼 쏟아부을 때도 마법망이 상하는 일은 없었는데, 고작 인간이 만들어낸 마법도구 따위에 이 꼴이 나다니 말이다.
‘혹시 셰비언 절벽도 비슷한 경우이려나? 광산과 마을이 있는 절벽 아래쪽과 인간이 접근할 수 없는 위쪽은 극단적일 정도로 마법망의 상태가 달랐으니……. 그저 위쪽에 내 둥지가 있어서 그런 거라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게 아닐지도 모르겠어.’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수면 근처까지 올라왔던 셰비언은 마침 머리 위로 큰 배가 지나가는 걸 보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용골이 파도를 헤치고 나아가며 마법망을 일그러뜨리는 과정이 생생하게 보였다. 견디지 못하고 바스러진 마법망 조각이 배가 남기고 간 흰 포말에 섞여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러나 마법망은 계속 너덜너덜한 상태로 있지 않았다. 떨어져 나간 조각을 끌어모으고 스스로 구멍을 메워서, 포말이 완전히 사라졌을 즈음에는 배가 지나가기 전과 흡사한 상태로 돌아왔던 것이다. 연약해 보이는 마법망이지만 복원력이 대단했다.
‘배에서도 마법도구는 쓸 테니까 마법망에 영향을 끼치는 게 이상하진 않지만……. 마법망이 복원력을 갖고 있다는 건 듣도 보도 못 했어.’
셰비언은 마법의 주인이었다. 하지만 마법망이 이렇게 망가지는 과정을 본 것도, 마법망이 스스로 복원력을 발휘하는 걸 본 것도 처음이었다. 아무리 자세히 보지 않았다지만 브란젤의 마법망도 이랬다면 몰랐을 리가 없는데 말이다. 손상과 동시에 복구되는 거라 몰랐다면 모를까…….
셰비언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잇새로 공기 방울이 부글부글 새어 나왔다.
‘브란젤의 마법망은 대단히 안정적인 축에 속한다더니, 그게 틀린 말은 아니었군그래. 이거 워커에게 사과해야겠는걸.’
워커의 말은 헛소리가 아니었다. 도시 전체에 마법도구가 빽빽하게 깔려 있는 데다 주민들의 마법도구 사용량이 어마어마한 곳이 브란젤이었다. 브란젤이 멜브란트 왕국의 수도로 기능한 지가 삼백 년이 넘었다고 하니, 브란젤의 마법망은 그 많은 마법도구를 감당하면서도 삼백 년을 넘게 버틴 것이다.
그러나 지금 브란젤의 마법망은 너덜너덜했다. 작은 상처라도 지속적으로 쌓이면 목숨을 위협하는 큰 부상이 되듯이, 아무리 마법망이 안정적이고 복원력이 좋아도 상처 입은 시간이 너무 길었다.
셰비언과 워커가 만들어낸 마법망 안정화 수식이 마법망에 도움이 되긴 하겠지만, 이제 막 세상에 나온 수식이 이제껏 쌓인 시간을 얼마나 상쇄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상처는 깊은데 약은 터무니없이 모자란 상황인 것이다.
곤란했다.
지금 인간의 문명은 마법과 마법도구를 기반으로 해서 유지되고 있었다. 마법도구가 마법망을 손상시킨다는 셰비언의 추측이 사실이라면, 인간은 제 미래를 도려내어 현재를 살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마법망이 아직은 괜찮아 보인다지만, 풍선은 터지기 직전이 가장 크고 호화로운 법이었다. 마법망의 복원력이 한계에 이르면 마법망은 한순간에 붕괴할 것이고, 그땐 인간의 문명도 함께 무너질 게 분명했다.
그건 내일이 될 수도 있고, 내년이 될 수도 있고, 백 년 뒤가 될 수도 있었다.
용인 자신이야 마법망이 다시 복원될 때까지 둥지에 처박혀 잠이나 자면 된다지만, 인간은? 마법을 잃은 인간은 지금 같은 삶은 꿈도 꿀 수 없는 처지가 될 것이다. 마법망이 낡아가는 것이 세월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이 셰비언을 조급하게 만들었다.
‘마법의 주인인 나도 몰랐던 걸 두고 인간에게 따질 수는 없으니……. 일단 수습부터 하자. 너무 늦기 전에 알아챈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겨야 돼.’
셰비언은 곧장 비늘을 한 장 떼어냈다. 안정화 수식을 즉석에서 개량해 빽빽하게 새겨 넣고 마력을 잔뜩 불어넣자 하얀색이던 비늘이 은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그는 적당한 곳을 골라 그 비늘을 숨겼다.
세피아 항구의 명물이라는 큰 바위 아래에, 그리고 등대를 떠받치는 바위섬에 딸린 암초 사이에.
용의 비늘을 매개로 한 마법은 확실히 범위가 넓었다. 비늘 두 장만으로도 세피아 항구 전체를 감당하고도 남았다. 하늘에서 확인하니 금방이라도 찢어질 듯 아슬아슬하던 마법망이 그럭저럭 튼튼해진 게 느껴졌다. 어디까지나 비상조치에 불과하지만 한숨 돌릴 정도는 됐다.
‘오드리가 알면 화를 내려나…….’
생각할 것도 없었다. 머리끝까지 화가 나선 얼굴이 벌게지도록 소리를 지르고 책상을 두들기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인간이 저지른 일이니 뒷감당도 인간이 해야 하는 것을, 왜 용인 셰비언이 비늘을 뽑아가며 대신 대가를 치르느냐고 할 것이다.
하지만 셰비언은 자신이 인간을 위해 이러는 게 아니라는 걸 잘 알았다. 만약 오드리를 알기 전에 마법도구와 마법망의 문제를 알았다면, 자신은 단번에 인간에게서 마법을 거둬 마법망을 보호하는 쪽을 택하지 마법망을 강화하겠다고 비늘을 뽑는 짓 따윈 절대 하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그는 웃는 듯 우는 듯 한탄했다.
“내 기준이 이상해졌다는 건 이걸로 확실해졌는데……. 싫지 않다는 게 문제야.”
오드리가 있는 브란젤 쪽을 바라보던 셰비언의 머리가 남쪽으로 꺾였다. 만탈락이 있는 방향이었다.
‘만탈락은 마법망이 불안정하기로 손에 꼽히는 도시야. 브란젤이라면 육 개월을 버틸 마법도구가 만탈락에서는 고작 두 달이라니까. 로렐라이의 상품이 마법과 비마법을 균등하게 결합해서 만드는 거라 그나마 오래가는 거야.’
워커는 만탈락 얘기만 나오면 말이 많아졌다. 로렐라이 초기에 워낙 고생을 많이 해서 이야깃거리가 많은 것도 있지만, 마법사로서 만탈락만큼 흥미로운 도시도 드물다고 말이다.
마법망이 불안정해 마법도구가 빨리 망가지는 지역에선 마법도구 대신 기계가 널리 쓰이는 게 일반적인데 만탈락은 예외라고 했다. 랄리우스 후작 영지의 중심도시로서 영화로운 시기를 보낸 기억 때문인지 기계보다 마법도구의 수요가 더 많다고. 마법사가 돈을 벌면서 마법연구도 하고 싶다면 딱 좋은 도시라나.
‘내 둥지는 셰비언 절벽이지만, 오드리의 둥지는 만탈락이겠지.’
오드리는 여름 내내 만탈락 특산 냉차를 입에 달고 살았다. 사교모임에 가서는 자신은 만탈락 출신이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그녀가 말하는 어린 시절의 추억 태반은 만탈락에서 있었던 일들이었다.
‘셰비언, 나중에 내 일이 마무리되면 같이 만탈락에 가자. 내가 자란 곳이 어떤 곳인지 자세히 보여줄게.’
‘제 공간을 이용하면 지금도 가능한데요? 권한을 드릴 테니까 직접 만들어서 보여주시면 되잖아요.’
‘나 참……. 난 그대처럼 기억력이 좋지 않아. 기껏 만들어봤자 곳곳이 비어 있을 게 분명하다고. 그리고 직접 보는 것과 공간을 통해서 보는 건 다르다고 한 건 그대였어.’
‘아, 제가 그랬나요? 요즘 기억이 가물가물해서요.’
‘얼버무리기는……. 아무튼 기대해도 좋아, 만탈락은 정말 좋은 곳이거든.’
꽃을 문 듯 환하게 웃던 얼굴이 떠올랐다. 셰비언은 마음을 정했다. 그는 브란젤이 아닌 만탈락을 향해 날갯짓했다.
* * *
가스트로가 오드리에게 훈장과 함께 새로운 작위를 수여할 것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헨젤 백작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하는 그의 태도는 얼핏 곧 왕이 될 왕세자에게 힘을 실어주려는 의도처럼 보였지만, 강경히 반대하던 예전의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겐 이상하게 보일 뿐이었다.
“헨젤 백작이 갑자기 조용해진 이유가 뭔지 짐작 가는 사람 없소? 마를리안 남작, 혹시…….”
“내가 그걸 어찌 압니까? 헨젤가고 재무국이고 바늘 하나 들어갈 틈도 없는데. 헨젤 백작이 미치기라도 했나 보지요.”
“며칠 전 새벽에 치안대가 헨젤 백작가에 들이닥쳤다는 소문을 듣긴 했습니다.”
“치안대요? 세상에…….”
치안대는 근본적으로 왕실의 검이었다. 왕실에 반하는 귀족을 감시하고 처단하기 위해 만들어진 무력집단이었다. 치안대의 수장을 대대로 카즈네 공작이 맡는 것도, 치안대의 문장이 백합에 휘감긴 검인 것도 그래서였다.
정쟁의 시대가 끝나고 귀족의 숫자가 급감한 지금에는 그 검이 제대로 휘둘러지는 일이 몹시 드물어졌지만, 일단 그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면 귀족의 머리조차 썩은 과일 신세가 되곤 했다. 그만큼 무력을 행사할 수 있는 범위가 넓고 권한도 강력했다.
작년만 해도 치안대는 나랍과의 무역에서 엉덩이를 깔고 앉아 장난질을 치던 상단과 귀족들을 떨어진 낙엽 치우듯 치워 버렸고, 두 차례에 걸친 괴물사태 대처를 통해 검의 예기가 여전히 살아 있음을 증명했다.
소매치기와 드잡이질 하고 도둑을 잡으며 순찰을 돌아도 백합에 감긴 검은 여전히 명예로웠다.
켕기는 게 있는 사람들은 치안대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안색이 나빠졌다. 누군가는 다리를 떨기 시작했고, 누군가는 갑자기 파이프에 불을 붙였다. 가발을 쑤석거리기 시작한 자도 있었다.
“이유가 뭔지는 들었소?”
“모릅니다. 떠들어대는 치들을 데려다 치도곤을 쳐 봤는데, 그저 그랬다는 것만 알지 정확히 며칠 전인지는 모르더군요. 정황을 봐서는 치안대가 재무국에 들어갔던 그날이 아닐까 싶긴 합니다만 확실하진 않습니다.”
“진짜 치안대로군…….”
“아닐 수도 있습니다. 치안대가 나선 것치곤 헨젤 백작이 너무 멀쩡하지 않습니까? 미뤘던 업무에 시달려서 그런지 좀 마르기는 했습니다만, 긁힌 상처 하나 없습니다.”
“멀쩡하긴 뭐가 멀쩡하단 거요? 백작 영애가 결혼도 아니고 작위를 받아서 가문을 나가는데도 입도 벙긋 못하는데. 분명 뭔가 큰 걸 걸린 거요. 아주 큰 거.”
잔뜩 낮춘 목소리가 의미심장했다. 모여 앉은 이들이 바쁘게 눈빛을 교환했다.
“이거, 잘하면 헨젤 백작이 실각하는 걸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일이 많고 바쁘기는 하지만……. 재무국만큼 보람이 큰 곳도 드물지요.”
“속편한 소리들 하십니다. 헨젤 백작이 그리 쉽게 무너지겠습니까? 전하께 무슨 약점을 잡혔는지는 몰라도 재무국 수장 자리는 지킨 거 보십시오. 대체 누가 그를 대체할 수 있다는 겁니까? 자신 있는 분은 손 들어보시지요. 일단 저는 못 들겠습니다.”
“흠, 흠. 크흐흠.”
“그건 그렇소만…….”
“전하의 입장에서 생각해 봐도 마찬가지긴 하오. 모처럼 뱀을 조종할 수 있게 됐는데 바구니를 엎어버릴 까닭이 뭐가 있겠소?”
“무엇보다 그 바구니가 진짜 엎어질 상황이 되면 헨젤 백작이 우릴 가만히 두겠습니까? 그러길 바라느니 내일 해가 서쪽에서 뜨길 빌겠습니다.”
잠시나마 들떴던 분위기가 급속도로 우중충해졌다. 그들 모두가 헨젤 백작에게 약점을 잡힌 자들이었다. 약점 잡힌 줄도 모르는 머저리였으면 차라리 나았을 것을, 목줄 걸린 자신의 처지를 알기에 헨젤 백작을 무시하지 못했다.
그들은 움직이지 못하는 헨젤 백작을 대신해서 그의 입장을 대변해 주기로 결정했다. 멍청한 결정이었다.
대관식이 치러지지 않았기 때문에 가스트로의 머리엔 아직 왕관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실질적인 왕이었다. 단 한 명의 왕자이면서 외가인 일테니아 후작가의 재력을 등에 업고 있던 그가 결혼을 통해 타우레드의 군사적 영향력마저 확보하고 나자 젊은 왕을 휘둘러보겠노라 감히 나서는 이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헨젤 백작은 단순한 태업만으로도 가스트로의 뜻을 거의 꺾을 뻔했다. 뤼나소 사건만 아니었다면, 모든 일은 헨젤 백작의 의도대로 흘러갔을 터였다.
그걸 잘 알고 있는 가스트로는 오드리의 작위 수여에 반대하는 움직임을 몹시 불쾌하게 여겼다. 그게 퍽 조직적이라는 점에서 특히.
“그동안 나는 헨젤이 얌전한 금고지기라고만 생각했소. 내가 어리석었지.”
“…….”
“정말 몰랐던 거요? 이 모든 것들이 백작과는 아무 상관이 없소?”
헨젤 백작은 입안의 여린 살을 짓씹으며 가스트로의 추궁을 견뎠다. 폭언을 하지는 않지만 오랫동안 책상 앞에 세워놓고 비슷한 질문을 계속 해대니 숫제 모멸감까지 들 지경이었다.
“제일 먼저 제 손발부터 꽁꽁 묶어두신 분께서 그리 몰아세우시니 기가 막힙니다.”
“아니라고 할 셈이오?”
“전하께서 바라시는 답이 어떤 건지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만, 이번에도 실망시켜 드려야겠습니다. 예, 저는 아닙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쪽에 들일 시간도, 정신력도 없습니다.”
헨젤 백작의 대답엔 은은한 노기마저 어려 있었다. 그는 뤼나소 문제로 가스트로에게 약점을 잡힌 이후 재무국에서 거의 살다시피 머무르며 일하고 있었다. 그리고 가스트로는 대관식을 코앞에 두고도 과감하게 행정개혁을 시도했다.
산처럼 쌓이는 업무야 편히 지냈던 날들의 유산이라 생각하면 그만이지만, 뭉텅이로 잘려나가는 자신의 권한을 실시간으로 보는 건 정말이지 괴로운 일이었다. 차라리 쓰러져 몸져눕기를 간절히 바랄 정도였다.
“잘 아시잖습니까? 요즘 전하께서 하시는 걸 보면 한참 예전부터 절 잘라내려 계획하셨던 것처럼 느껴질 정도라 놀랍습니다.”
“이런, 내가 백작에게 놀랍단 소릴 듣다니 그게 더 놀랍군. 이거 뿌듯하기도 하지.”
가스트로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헨젤 백작에겐 멍든 얼굴을 하고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오드리만큼이나 꼴 보기 싫은 미소였다. 저절로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새 자라난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상처를 냈다.
헨젤 백작이 비록 농담처럼 말하긴 했지만 놀랐다는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선왕이 막 붕어했을 당시와 지금의 가스트로를 비교하면 둘은 물고기와 새만큼이나 차이가 났다. 단시간에 결정하고 곧바로 행동에 옮기는 행동력도 행동력이지만, 그보다…….
‘재무국 내에서 정보가 새는데 그게 어디인지 알아낼 수가 없다니.’
그게 어떤 분야이든,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알 수 없는 지점이 있다. 가스트로는 그 부분을 정확하게 파고들어 재무국에서 헨젤 백작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분명 깨끗하게 비웠던 집무실 어디에서 그 많은 뤼나소가 나왔는지도 아직 못 알아냈다.
치안대가 공개적으로 재무국을 뒤졌다는 건 가짜도 진짜로 바꿀 자신으로 행동한 거란 판단아래 빠르게 죄를 인정했었다. 증거가 있건 없건 상관없이 당할 일이니, 어리석게 끝까지 결백을 주장하기보다는 인정하는 쪽이 조금이라도 협상할 여지를 높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나중에 따로 알아보니 치안대는 정말로 집무실에서 뤼나소를 발견한 거였다. 아무리 헨젤 백작과 브란젤의 뉴터가 동일 인물이라도 설마 재무국 집무실에 뤼나소가 있겠어 했다가 뒤집어지게 놀랐다는 말을 듣고 어찌나 어이가 없던지.
헨젤 백작에게 선택의 여지라든가 운신의 폭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다. 만약 끝끝내 죄를 부정했다면 작위수여 동의서 정도로 끝나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그러니 치안대가 오는 시간에 맞춰 뤼나소를 넣은 간 큰 놈이 어떤 녀석인지 알아내야 하는데, 최근 일손이 모자란다고 신입을 대거 뽑은지라 어려움이 많았다.
‘왕세자가 어디서부터 손을 댄 거지……? 설마 내가 태업을 시작했을 때부터 계획한 건가?’
의심은 의심을 낳아 헨젤 백작의 눈을 가렸다. 그리고 헨젤 백작이 있지도 않은 꼬리를 찾아 안개 속을 더듬대는 꼬락서니는 가스트로를 몹시 즐겁게 만들었다.
가스트로가 알기로 재무국은 오드리의 손아귀에 들어간 지 오래였다. 헨젤 백작에게 가혹하게 시달리며 자부심만으로 일하던 사람들이 가장 먼저 넘어갔고, 새로 뽑았다는 신입은 한 명도 빠짐없이 오드리와 끈이 닿아 있었다.
치안대가 오는 시간에 맞춰 헨젤 백작의 비밀 서랍에 뤼나소를 채워 넣은 사람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일랑 보좌관이라는 걸 가스트로가 알았더라면, 그는 집무실의 문을 걸어 잠그고 온종일 웃었을 것이다.
‘그 헨젤 백작을 이 꼴로 만들어놓다니, 레이디 오드리는 확실히 수사슴의 핏줄이야. 사자가 그 난리를 치는 것도 이해가 간다니까. 그래봤자 이젠 놓친 사냥감이지만……. 뭐, 본래 사랑에 넋이 나간 사내란 다 그런 법이니까. 그러게 누가 파혼하래?’
마약상 검거에 군을 동원한 건 처음이 아니었다. 하지만 군이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나서서 치안대를 도운 건 처음이었다. 이유야 뻔했다. 분명 가문에서 따로 파악하고 있었을 기밀 정보까지 죄다 털어낼 기세로 날뛰는 라비린 때문일 것이다.
‘세상 똑똑한 척하면서 정작 중요한 순간에 바보짓을 하다니, 어린 시절 그대로야.’
가스트로는 뒤늦게 헛짓을 하는 소꿉친구를 향해 속으로 백 번쯤 혀를 차주었다. 겉으로는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백작. 손발이 다 묶인 사람의 입이 되고자 자처하는 사람이 이리 많다니 대단하군. 부러울 지경이요. 이게 다 평소에 백작이 쌓아놓은 인덕이 있어서 그런 것 아니겠소?”
조금 전까지는 네가 뒤에서 조장한 것 아니냐 야단을 해놓고, 이제와선 부러워하는 기색을 잔뜩 내보인다. 이런 조롱을 받아본 게 하도 오랜만인지라, 헨젤 백작은 잠시 숨을 멈췄다.
“아무튼 어리석은 치들이 저지른 짓이 백작과는 하등 상관이 없다하니 안심이오. 내 백작의 말을 믿을 테니, 백작은 행동으로 내 믿음에 보답해 주길 바라겠소.”
“전하, 요즘 제가 일이 너무 많아 그러하오니, 이건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셔도…….”
“헨젤 공자의 나이가 올해 열셋이라고 알고 있소. 내년이면 백작을 따라 재무국에서 일하겠군.”
“…….”
“공자가 한 살만 더 많았어도 아비의 짐을 덜어줄 수 있었을 텐데 아쉽게 됐소.”
이번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 재무국에 네 아들이 들어올 자리는 없을 줄 알아라.
헨젤 백작은 무언의 경고를 충분히 알아들었다. 그는 굴욕감을 참으며 가스트로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헨젤 백작은 직접 손을 댈 수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도움이 됐건 안 됐건, 어쨌거나 그의 속내를 읽고 그를 위해 나선 사람들이었다. 비록 그 생각 없음과 얄팍함에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고 해도 직접 나서서 손을 썼다간 입장이 곤란해진다.
‘왕세자가 원하는 수준까지 처리하면 반감만 살 테지. 그렇다고 적당히 넘어가면 앞으로 하델이 받을 압력이 커질 테고.’
하델이 열넷이 되기까지 몇 달 남지 않은 게 문제였다. 가스트로의 기억이 흐려지길 바라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헨젤 백작은 오스미다를 이용하기로 했다. 어차피 국정회의에서 오드리에게 작위를 주자고 주장했던 최초의 인물은 오스미다지 않았던가. 그녀도 이 반대 움직임이 불쾌하긴 마찬가지일 것이다.
과연 오스미다는 헨젤 백작이 슬쩍 보여준 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그녀의 입김이 닿는 귀족들이 작위수여 반대를 주장한 자들의 약점을 물고 늘어졌다. 공교롭게도 그들 대부분이 귀족이 아니었기에 작업은 더욱 쉬웠다.
리즈비아 거리에 모인 신문사에 지저분하고도 흥미로운 스캔들이 흘러들어갔다. 자극적인 소식을 물어 나르는 삼류 신문이 가장 먼저 미끼를 물었지만, 스캔들이 진짜라는 걸 확인하고 나자 점잖다는 정론지도 기꺼이 진흙탕에 뛰어들었다.
사생활은 사생활이고 공론은 공론이면 참 좋겠다마는, 그게 그리 무 자르듯 분리가 안 되는 게 사람이다. 일단 발화자의 투명성이 의심받기 시작하자 그와는 전혀 관련 없는 부분도 함께 영향을 받았다.
가스트로의 의지가 강경한 데다 믿었던 헨젤 백작은 전혀 그들을 돕지 않으니, 작위 수여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힘을 잃는 건 순식간이었다. 오스미다는 자신이 헨젤 백작에게 이용당하는 걸 뻔히 알면서도 즐겁게 그에 응했다.
“이런 기회가 어디 쉽게 오는 거던가? 백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 같군.”
오스미다와 함께 차를 마시던 귀부인들이 동의한다는 듯 까르르 웃었다. 그 귀부인들의 가문이 오스미다의 세력이었다. 남편이, 혹은 아들이 작위를 갖고 있다지만 가문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람은 그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의 가문 대부분이 데릴사위로 작위를 건사했다. 삼십여 년 전의 내전에서 내정했던 후계자를 잃고 딸만 남은 가문이 어디 한두 곳이었던가.
지금이라도 이혼하면 후계를 지정할 권한을 도로 찾아올 수 있는 사람들이 태반이었고, 그들은 오스미다가 이미 결혼한 처지이면서도 친정의 작위를 거머쥐고 스스로 후작이 되는 걸 보며 부러워 어쩔 줄 몰라 했던 경험이 있었다.
“전하, 선대 헨젤 백작에게 못 푼 원한을 여기다 푸시면 어째요.”
“그러게 오래 살았어야지. 선대 헨젤 백작은 왜 그리 빨리 갔는지 모르겠군.”
일찍 병사한 선대 헨젤 백작 얘기를 하며 웃는 오스미다의 얼굴에서 서늘한 예기가 스쳤다 사라졌다. 화기애애하던 분위기에 살얼음이 꼈고, 귀부인들은 제각각 표정관리에 들어갔다.
표결 직전까지 갔었던 오스미다의 개혁안을 끝내 좌초시킨 게 선대 헨젤 백작이었다. 개혁안이 좌초되면서 오스미다의 정치적 영향력은 상당한 타격을 입었고, 그녀는 끝내 회의장의 탁자를 쪼개 버리고 발길을 끊었다. 그로부터 적잖은 세월이 지났건만, 오스미다의 원한은 조금도 흐려지지 않았다.
“여기서 미혼의 귀족 영애가 작위를 받는 일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한 사람 있는가?”
있을 리가 있나. 오스미다의 영향을 받아 친정의 작위를 자신이 이어받으려고 소송을 시도했던 이들도 있었지만, 그들 모두가 패소했다. 기껏 냈던 용기가 한 번 꺾이고 나니 두 번째는 감히 상상도 못하게 됐다.
오스미다는 그들에게 오드리가 이미 랄리우스를 계승했더라는 말을 해줄까 하다 참았다. 한때는 여기에 있는 귀부인들 태반이 가문의 계승자였다.
“난 레이디 오드리에게 기대를 걸고 있다네.”
긴장했던 귀부인들이 전하는 농담도 잘한다며 웃었다. 하지만 그건 오스미다의 진심이었다. 그녀는 정말로 기대를 걸고 있었다. 오드리라면, 그녀가 끝내 이루지 못한 꿈을 이뤄줄지도 모르겠다고.
한편 오스미다가 그리 기대하고 있는 오드리는 지금 개고생을 하는 중이었다. 셰비언이 자리를 비우면서 그의 공간에서 쓸 수 있었던 시간도 동시에 증발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만탈락, 로렐라이, 랄리우스, 데멘사, 집안일…….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데 시계바늘이 째깍댈 때마다 일이 차곡차곡 쌓이고 피로도 덩달아 쌓였다. 이쯤 되니 얼굴 때문에 사교 모임에 가지 못하는 게 그나마 다행인가 보다 싶을 정도였다.
헨젤 백작의 얼굴을 보러 재무국에 가는 잠깐이 그나마 숨통 트이는 시간이었다. 오가는 시간이 적잖이 걸리긴 하지만, 그 찡그린 눈매를 보고 있으면 기분이 확 좋아져서 끊을 수가 없었다. 멍이 생각 이상으로 빠르게 사라지는 게 아쉬울 정도였다.
한데 이젠 못 갈 듯했다. 도저히 그쪽에 정신을 팔 수 없게 하는 큰일이 벌어졌으니까.
셰피아 항구에서 나랍으로 가는 배의 출항이 몇 주째 막히고 있다는 소식이 올라온 것이다. 콕 집어 달튼 제도를 피해서 항해하라는 어이없는 요구사항보다, 이 중대한 소식이 이제야 올라왔다는 게 더 기가 막혔다.
“다들……. 미쳤대? 돌았대? 불량배에게 처맞고 머리가 깨지기라도 한 거야? 뭐? 기다리면 풀릴 줄 알았어? 이런 개 같은 요구를 받았으면 어떻게든 사정 알아볼 생각을 해야지 뇌물부터 들이밀다니, 대충 넘길 수 있는 일 같았나? 에라이, 머리에 뇌 대신 벌레를 채운 새끼들 같으니라고!”
오드리의 입에서 막말 향연이 펼쳐졌다. 그녀가 쥐고 있던 만년필이 두 동강 나 바닥을 굴렀다.
‘와, 저게 부러지네.’
‘저거 마법 걸려 있는 거 아니었나?’
이디케와 다이앤은 입을 꾹 다물고 눈만 데구루루 굴렸다. 오드리가 이렇게 눈이 돌아가서 화내는 걸 보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멋대로 오드리의 명령을 왜곡하며 돈을 횡령하던 대리인을 잡아냈을 때보다 더한 분노였다.
“빌어먹을! 분명 징조가 있었을 텐데! 나는 이럴 때 왜 바빠가지고!”
오드리는 마구 성질을 부리며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설탕과 약초 값이 오르는 걸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때가 때인지라 워낙 사람이 몰렸으니 공급이 달려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단순해도 너무 단순했다. 머리가 어떻게 됐던 게 분명했다.
‘달튼 제도 봉쇄라니, 누가 시켰는지 뻔하지! 누구 입김인지 모를 수가 없지! 당연히 셰비언이 압력을 넣었겠지!’
셰비언은 오드리에게 에메랄드를 캐러 달튼 제도에 가려는 거라고 했지만, 그걸 믿을 오드리가 아니었다. 갑자기 볼일이 생겼다며 훌쩍 떠나선 며칠째 돌아오지 않는 것도 기가 막힌데, 달튼 제도 봉쇄 압력을 넣으면서 자신에겐 아무 말도 없었다니 하도 어이가 없어 말도 안 나왔다.
“설마, 몰랐나?”
“예?”
“아가씨, 뭘요?”
“너희한테 한 말 아냐! 제기랄, 그래, 어쩌면 몰랐을 수도 있어. 그에게 달튼 제도는 화룡의 둥지지 무역항로 따위가 아니었을 테니…….”
화룡의 둥지? 이디케와 다이앤은 놀라 입을 헤 벌렸다. 처음 듣는 얘기였다.
“저, 아가씨, 화룡의 둥지요? 그건 무슨 얘기예요?”
“뭐긴 뭐겠어, 달튼 제도가 샤를레아의 둥지란 얘기지!”
두 하녀는 질기고 튼튼한 제 정신줄을 원망했다. 달튼 제도를 오가는 배가 얼마나 많은지 잘 알고 있으니만큼 그 충격이 대단했다.
“그, 그럼 통행금지는 언제 풀리는 거예요?”
“그걸 내가 어찌 아니!”
궁금해서 물었다가 애먼 불똥만 튀었다. 두 하녀는 더 입을 떼지 않고 제각각 머리를 굴렸다.
‘달튼 제도를 피해 가려면 물류비가 몇 배로 뛸 거야. 세상에, 그걸 어디서 메우지? 설탕은 무작정 값을 올릴 수 있는 품목도 아니고, 나랍 쪽에 들어가는 돈도 어마어마한데!’
‘약초…… 어떡하지, 약초. 지금이라도 나랍산 말고 다른 지방에서 난 약초를 알아봐야 하나? 하지만 나랍산 약초 품질이 제일 좋은데. 그렇다고 값이 너무 오르면 그건 좀…….’
두 하녀가 제각각 고민에 빠져 있는 동안 오드리는 쉴 새 없이 방을 돌아다녔다. 부산하다고 지적을 받아 고치려던 습관이지만, 앉아서 손가락만 튕겨대다간 손가락이 부러지든 챙겨둔 만년필이 죄다 부러지든 둘 중 하나는 부러질 것 같았다.
오드리는 몇 번이나 집무실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가 놓기를 반복했다. 당장 왕궁마법사들에게 달려가 달튼 제도에 대해 아는 건 죄다 털어놓으라고 날뛰고 싶지만, 그렇게 해서 뭘 얻을 수 있느냐는 한 가닥 이성의 끈이 그녀를 말렸다.
“젠장, 이럴 땐 차라리 멍청해지고 싶다.”
“아가씨, 무서운 말씀 하지 마세요. 이럴 때 아가씨가 멍청해지시면 저흰 진짜 대책이 없어요.”
“어 그래, 내가 멍청해지고도 모든 게 멀쩡하길 바라기엔 지금이 너무 비상이긴 하지. 그나저나 셰비언에게선 아무 연락 없어?”
“아직…….”
열 오른 오드리가 얼음을 찾았다. 그녀는 한 컵이나 되는 얼음을 아작아작 씹어 먹고 나서야 손끝발끝에 고인 열기를 식혔다. 셰비언의 마력을 삼키고 마력균형을 이룬 뒤엔 늘 몸이 차가웠는데, 어째 지금은 빙룡이 아니라 화룡의 마력을 담은 듯 몸이 뜨끈뜨끈했다.
“스크롤……. 스크롤 담당자에게 연락해. 왕궁마법사 쪽에 압력을 넣어야겠다.”
할 수만 있다면 아예 마법사협회를 파보겠다만, 안타깝게도 마법사협회엔 오드리의 입김이 닿지 않았다. 그러니 멀리 돌아가는 수밖에.
한데 오드리가 스크롤 담당을 움직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라비린이 나타났다. 그것도 그녀가 가장 원했던 정보를 들고.
“달튼 제도의 발톱섬에 들어갈 탐사대가 꾸려지지 않은 이유가 셰비언 때문이라고?”
“그래. 화룡의 둥지에 마법사를 들이밀어서 보양식으로 삼게 할 순 없다고, 사람의 접근을 통제하라고 했다더라.”
“와, 자기가 포식자라는 걸 대놓고 말했네. 미쳤나. 하지만 겨우 발톱섬이야. 무인도잖아? 그거가지고 제도 전체를 봉쇄한다는 게 말이 돼? 뭔가 다른 이유가…….”
“섬을 때려 부숴야겠다고 했다더라.”
“풉!”
최선을 다해 여유로운 척하던 오드리가 마시던 냉차를 뿜었다. 라비린이 질색을 하면서 제 잔을 사수했다. 그래봤자 다 마시고 얼음밖에 안 남았는데 뭐가 그리 아까운지 모를 일이었다.
“섬 하나를 때려 부수면서 그 근처를 지나는 배까지 감당할 자신은 없다고 그랬대. 근처 마을에 해일이 덮칠 수도 있으니까 사람도 다 소개(疏開)시키라고 했다는데, 아무래도 용을 눈으로 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믿을 수 없다고 버티는 사람이 많아서 시간이 좀 걸리는 중이고……. 배 통제하는 게 그나마 제일 빨리 되고 있는 거래.”
라비린이 느긋한 태도로 기밀에 해당할 게 분명한 정보를 줄줄 읊었다. 오드리는 혼란에 빠졌다. 평정이 깨져 손이 자꾸 떨렸다. 컵 속의 얼음이 잘그락잘그락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이게 대략적인 내용이야. 더 자세한 사항은 내가 가져온 저 봉투 안에 들어 있으니까 그걸로 확인해.”
라비린은 마음껏 오드리의 혼란을 즐겼다. 본가의 성에서처럼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 놓인 것도 아닌데 오드리의 맨얼굴을 보게 되다니, 생각지도 못했던 수확이었다.
“라비린, 너…….”
“가짜일까 의심스러워?”
라비린이 덥석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호기심 많은 아이처럼 눈빛에서 생기가 넘쳤다.
잠시 고민하던 오드리는 미간을 좁히고 고개를 저었다. 너무 황당한 이유라서 오히려 더 믿음이 갔다. 셰비언이라면 저지르고도 남을 일이었다. 그런 큰 결정을 하면서 자신에겐 말해주지 않았다는 점이 몹시, 매우, 아주 서운하긴 하지만 말이다.
“저번에도 진짜였는데 이번이라고 못 믿을 건 뭐겠어.”
“역시 그렇지? 역시 신뢰라는 건 시간과 행동이 쌓여야 생겨나는 거라니까.”
라비린이 유쾌하게 웃었다. 귀공자답게 잘 손질한 머리칼이 사르륵 흘러내려 흰 이마를 덮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햇빛이 그의 속눈썹에 맺혀 금빛으로 반짝거렸다. 날렵하게 뻗은 코와 살짝 올라간 입꼬리……. 초콜릿색의 달짝지근한 눈동자가 거울처럼 오드리의 모습을 비췄다.
그야말로 오드리의 취향 한가운데인 얼굴이라 보기는 참 좋은데, 어쩐지 배알이 뒤틀렸다. 애써 묻어두었던 경계심이 곧장 머리를 치켜들고 쉭쉭 소리를 냈다. 뒷목과 어깨 근처가 화끈하게 달아오르는 것 같기도 했다.
“신뢰는 무슨. 너, 대체 왜 이러는 건데?”
“내가 뭘?”
“왜 자꾸 나한테 기밀을 흘려? 뭘 바라고 이래? 데멘사? 로렐라이?”
달라면 줄 것도 아니면서 떠보기는. 라비린은 부루퉁한 얼굴로 얼음을 입에 넣고 씹었다. 얼음 속에 들어 있던 민트 때문에 입안에서 화한 느낌이 났다.
“내가 내게 전했던 정보 때문에 뭔가 불이익을 본 거라도 있어?”
“아니, 그런 건 없어.”
“그런데 뭐가 그렇게 궁금해? 그냥……. 네 등에 업힌 포모스가 가져다준 행운이려니 하면 되는 걸.”
“이게 정말 포모스의 행운이면 그럴 수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나는 세상에 목적 없이 베푸는 호의는 없다는 걸 아니까 궁금한 거야. 네가 대체 언제 어떤 것을 청구할지 모르겠어서.”
라비린은 빈 잔에 새 냉차를 따랐다. 컵에 맺혔던 물방울이 또르르 흘러 테이블에 고였다.
“정말 세상에 목적 없이 베푸는 호의가 없다고 믿어?”
“당연한 거 아냐?”
“그럼 아르젠 남작이 널 사랑하는 것도 목적이 있어서 그런 거라고 하겠군.”
난데없이 셰비언은 왜 끌고 들어오는 건지. 오드리는 너무 당황스러워 잠시 말을 잊었다. 라비린은 냉차를 한 번에 바닥까지 다 마셔 버리고 또 얼음을 씹었다.
“그냥 해 본 말이야. 뭘 그렇게 놀라? 차인 사람 서글프게.”
그러고 보니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나한테 키스했었지. 오드리는 뒤늦게 그날의 일을 떠올리고 슬그머니 몸을 뒤로 젖혔다. 테이블이 사이에 있어 거리는 이미 충분한데도 말이다.
라비린이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네게 딱히 뭘 바라고 이러는 거 아니야.”
“…….”
“그저…… 네게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은 것뿐이지.”
“뭔 소리를 하는 거야?”
“부부가 되긴 글렀고, 연인은 아예 희망이 없어 보여. 친구라도 될 수 있을까 했더니 그건 내가 안 될 것 같고……. 그래서 아예 안 보면 될까 싶어서 훌쩍 떠나보기도 했는데…….”
라비린은 얼음을 입안에 와르르 털어 넣었다. 여기저기 오드리가 떠오르지 않는 곳이 없는 브란젤을 견딜 수가 없어서 뛰쳐나왔는데, 정작 그녀의 흔적이 없는 곳에 이르니 그게 훨씬 더 견디기가 힘들었다.
미친놈처럼 초록색 머리칼을 찾고, 아무것도 보내지 못할 거면서 괜히 데멘사 지점 주변을 서성거렸다. 신문에 실린 벨트람의 포스터를 종류별로 긁어모았다가 버리고, 버린 걸 도로 주워와 짐에 끼워 넣었다. 심지어 오드리와 셰비언의 연애기사까지 다 모았다.
심지어 혹시 뱃속을 태우는 열기가 사라질까싶어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밤거리를 헤매기까지 했다. 별 소용은 없었다. 옷을 푹 적신 빗물조차 차갑지 않았다. 그런 자신이 어찌나 어이가 없는지, 머리에 꽃이라도 한 송이 꽂아야 하는 거 아닌가 싶었다.
그러다 만취한 주정뱅이들이 달튼 제도 봉쇄 얘길 하는 걸 들었다. 새 왕은 나랍과 전쟁이라도 하려는 모양이라고 떠들어대는 대화를 듣자마자 오드리 생각이 났다. 달튼 제도를 틀어막다니, 그 원흉이 누군지는 몰라도 오드리에게 온갖 욕을 다 얻어먹고 있겠다고 말이다.
이어 오드리는 자세한 사정을 알지 못하겠다는 것에 생각이 미친 순간, 돌아가야겠다는 결심으로 머리가 꽉 차버렸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쏟아지는 장대비에 마법등의 빛마저 흐려진 밤, 새카맣기만 하던 시야가 환해졌다. 빛으로 만들어진 길이 눈앞에 펼쳐진 것만 같았다.
그 길 끝에 기다리는 게 무엇이든, 절대 후회하지 않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라비린은 그날로 짧은 방황을 끝냈다. 타우레드 후작은 혀를 차면서도 라비린의 동분서주를 말리지 않았다. 라비린이 마약상 검거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날뛰는 것도, 군의 정보를 캐내는 것도 다 알면서 눈감아주었다. 비록 이유를 들을 수는 없었지만, 묻기도 애매해서 같이 모른 체했다.
라비린의 침묵이 하염없이 길어지자 답답해진 오드리가 더 버티지 못하고 테이블을 두들기며 먼저 입을 뗐다.
“네이기스의 결혼식 이후 네가 브란젤을 떠났다는 건 나도 알아. 라디아타의 결혼식에 참석도 않고 훌쩍 떠나서 소식을 끊어버리는 바람에 돌아오면 보자며 후작 부부가 아주 이를 갈더라고 소문이 자자했거든.”
“……어, 그래?”
“난 네가 돌아오자마자 팔다리 한두 군데는 부러질 줄 알았어.”
“그거 참, 안 부러져서 다행이네…….”
라비린은 자신이 무척 고맙게 여겼던 아버지의 관대함이 어쩌면 관대함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식은땀을 흘렸다. 그건 이놈을 언제 족쳐야 손해는 입지 않으면서 타격은 크게 줄 수 있을까 고민하는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여행에서 뭔 일이 있었기에 필요한 사람이니 뭐니 하는 헛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혹시, 음, 인생의 방향을 바꿀 만한 큰일이라도 겪었어?”
부부니 연인이니, 그의 미련 따위는 죄다 멀리 날려 버리고 딱 필요한 얘기에만 집중하는 게 몹시 오드리다웠다. 라비린은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아, 로렐라이의 구멍을 내가 메워야겠다. 그건 나만 할 수 있겠다.”
“뭐래, 미친놈이. 내 로렐라이에 너만 메울 수 있는 구멍이 있다니 그게 말이 돼? 정말 말이 되는 거 같으면 당장 지껄여 봐. 혹시 헛소리면 후작이 아니라 내 손에 팔다리 한 짝씩 나갈 줄 알아.”
라비린은 다이앤의 화장술에 새삼 감탄했다. 아무리 사적인 자리라지만 막말이 술술 나오는 걸 보니 오드리의 피로가 극에 달해 있나 본데 겉으로 봐선 조금도 티가 안 났다.
“로렐라이의 정보력에 생긴 구멍 말하는 거야. 타우레드와 로렐라이의 거리가 멀어지면서 어쩔 수 없이 생겨난 틈. 그 부분을 메울 수 있는 건 나뿐이라고 생각해.”
“……으.”
“봐, 달튼 제도 봉쇄에 관련된 뒷사정을 이만큼 알아올 수 있는 게 나 아니면 또 누구겠어? 예전 같으면 첫 번째 군함이 뜨기도 전에 정보가 들어왔을 텐데, 넌 내가 이 정보를 가져올 때까지 영 모르고 있었잖아.”
“아냐, 알고 있었어.”
“자세한 정보는 필요 없나 보지?”
“…….”
오드리가 불만으로 뺨을 잔뜩 부풀렸다. 라비린은 그녀의 맨들맨들한 뺨을 콕 찔러보고 싶은 유혹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이젠 약혼 관계도 아니고 그냥 친구라기도 애매한데 그런 장난을 쳤다간 정말 팔이 부러지는 수가 있었다.
“내가 이러는 이유가 도저히 납득이 안 가거든, 그냥 잠깐 방황하는 거라고 생각해. 약혼녀를 잃은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멍청이가 바보짓을 좀 하는 거라고. 그거면 돼. 넌 사람 이용하는 걸 거리끼지 않으니, 날 이용한다고 생각하면 딱 괜찮겠다.”
쯧, 혀를 찬 오드리가 라비린의 이마에 손가락을 튕겼다. 기사 작위도 있고 전쟁터에서 굴러도 본 라비린은 멍청하게 오드리만 보고 있다가 어마어마한 통증에 이마를 붙들고 신음했다.
“진심을 주면 진심으로 보답 받고 싶어지는 게 사람이야. 난 돌려주는 것도 없이 널 이용하기만 할 건데, 그래도 괜찮다고? 웃기고 있네.”
“큭……. 진짜로 때렸어……. 오드리, 넌 네 힘이 얼마나 되는지 아직도 몰라? 힘 조절은 대체 언제 배울래?”
“예전엔 그래도 괜찮았어. 나도 네게 줄 수 있는 게 있었단 말이야. 그게 허울뿐인 연인 노릇이든, 어렴풋하게 설익은 마음이든, 어쨌거나 돌려줄 수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달라. 난 너에게 아무 것도 줄 수가 없어. 그건…….”
하나도 빠짐없이 셰비언의 몫이니까. 오드리는 차마 말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최근 엄청난 속도로 감수성이 메말라 가고 있는 그녀이지만, 이렇게 절절한 고백을 단박에 거절하려니 몹시 미안해진 탓이었다.
‘내가 뭐라고……. 멀쩡한 녀석이…….’
라비린이 오드리의 잔에 손가락을 튕겼다. 챙- 맑은 소리가 울렸다.
“다른 사람의 몫을 뺏고 싶은 생각은 없어. 조그만 가능성이라도 있으면 걸어보겠지만 내겐 영 승산이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고.”
“…….”
“그냥, 이런 거야. 내가 너에게 사랑이 아니더라도 좋으니까, 네가 날 필요로 해줬으면 좋겠다.”
라비린이 근사한 미소를 지었다. 남자답고 무뚝뚝해 보이던 얼굴이 고작 미소 하나로 부드럽고 달콤하게 변했다. 촉촉하게 빛나는 초콜릿색 눈동자에선 눈물 대신 꿀이 떨어질 듯했다. 그래봤자 맞은 자국이 흰 이마 한가운데에 불그레하게 남아 있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말이야……. 네 사랑을 얻지 못했다고 해서, 내가 로렐라이를 사랑했던 지난 시간이 무의미해지는 건 아니잖아. 로렐라이를 아끼는 거야말로 내 마음이지. 안 그래?”
오드리가 확 미간을 찌푸렸다.
“호구 새끼.”
“……너 잠은 제대로 자고 있어? 제어장치가 느슨해지다 못해 아예 사라진 느낌인데……?”
“내 친구가 호구가 되길 원한다는데 친구로서 그 소원 못 들어줄 것도 없지. 기대해, 아주 포도즙 짜듯 짜줄 테니까.”
산트렘의 속담이 아주 절절하게 와닿는 듯, 라비린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오드리는 더 말하고 싶어 하는 라비린을 두들겨 쫓아내고 의자에 드러눕듯 몸을 기댔다. 빈말로도 안락하다고 말할 수 없는 딱딱한 등받이가 등 이곳저곳을 아프게 찔러댔다.
‘사랑이 아니더라도 좋으니까 필요한 존재가 되고 싶다……라.’
오드리가 생각하기에 자신은 욕심이 너무 많아서, 라비린과 같은 사랑은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남긴 말은 그동안 오드리를 괴롭혀 왔던 질투심의 근원을 정확하게 찔렀다.
‘셰비언, 난 그대에게 필요한 존재일까?’
그저 사랑이기만 한 것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다.
나는 그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고 싶다.
그대가 가는 길에 보탬이 되고 싶다.
셰비언, 그대는 내가 필요해?
셰비언, 내가 그대에게 도움을 주려면 뭘 해야 하지?
셰비언, 나도 당신에게 뭔가를 주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