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7. 질투와 거짓말
「신화 속에서 볼린과 사이가 좋은 신은 거의 없다. 하지만 그녀는 강력한 신으로서 수 없이 많은 신도를 거느리며 권능을 행사한다.」
마법사협회의 간부가 오드리와 셰비언을 협회 건물 안쪽으로 이끌었다. 본래 마법사 이외에는 출입이 금지된 구역이었지만 협회는 용의 연인에게 기꺼이 특혜를 베풀었다.
오드리는 너무 부산해 보이지 않도록 노력하며 복잡한 복도에 딸린 문들을 구경했다. 태반은 닫혀 있었지만 문의 장식이 죄다 달라 보는 재미가 있었다. 셰비언이 오드리의 어깨를 톡 쳤다.
“닫힌 문 보는 게 무슨 재미라고 그렇게 열심히 봐요?”
“문 구경만 해도 재밌는걸. 난 평소에 볼 일 없는 곳이잖아.”
“언제든 말만 해요. 저 닫힌 문 안쪽까지 죄다 볼 수 있게 해줄게요.”
오드리의 눈이 반짝 빛났다.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마음이 들뜬 오드리가 냉큼 고개를 끄덕이기 직전, 뒤쪽에도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고 있던 협회의 간부가 끼어들었다.
“아무리 마법의 주인이라도 인간의 예의를 모르는 건 아니시겠지요. 닫힌 문은 닫힌 대로 두는 게 좋습니다.”
“내가 인간의 예를 차려야 할 이유가 있던가? 다른 곳도 아니고 여기, 마법사협회에서?”
“그야 마법의 주인께 보여드리지 못할 곳은 없습니다만……. 부족한 실력을 들키는 게 몹시 창피스러워서 그럽니다.”
“그런 건 굳이 문을 열어보지 않아도 훤히 알 수 있으니 새삼 창피스러워할 것도 아닌데 왜…….”
“셰비언, 그만해. 애초 내가 너무 과한 호기심을 가진 거야.”
생각지도 못했던 입씨름에 민망해진 오드리가 셰비언을 만류했다. 셰비언이 바로 입을 다물자 협회의 간부는 오드리에게 과장된 태도로 감사를 표했고, 덕분에 오드리는 두 배로 민망해졌다.
협회의 간부는 높은 돔 천장과 사방의 벽을 감싼 책장이 인상적인 작은 홀에 이르러서야 걸음을 멈췄다. 건조한 공기에선 오래된 책 냄새가 났고 홀 가운데에 놓인 큰 원탁엔 연약한 아침햇살이 떨어지고 있었다. 햇살 가운데에서 춤추는 먼지가 보석 가루처럼 반짝였다.
“저, 레이디 오드리……. 죄송하지만…….”
“저는 빠져 있을 테니 얘기 나누세요.”
오드리는 호의를 베푼 협회의 간부가 난처해지기 전에 얼른 발을 뺐다. 멍하니 있으면 신경 쓰일까 싶어 책장 가득 꽂힌 마법자료 중 적당해 보이는 걸 한 권 뽑아 펼쳤다. 하지만 한 페이지를 다 읽기도 전에 낯선 용어의 향연에 질려 버리고 말았다.
‘도저히 못 읽겠다.’
보아하니 여기 있는 자료들은 전부 이런 종류인 모양이었다. 마법에 대해 일반인보다 약간 더 공부한 수준에 불과한 오드리가 이해하기엔 터무니없이 수준이 높았다.
하나 여기서 책을 읽는 것 외에 뭘 할 수 있겠는가. 오드리는 그나마 그림이 많은 책을 골라 작은 탁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도대체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 문장들을 눈으로 더듬다 흘끗 고개를 돌렸다.
셰비언이 원탁에 앉아 협회의 간부가 날라다 주는 보고서를 읽고 있었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미간에 새겨진 주름이 깊었다. 종종 혀를 차기도 했다.
‘꼭 다른 사람 같네.’
오드리는 자신이 근처에 있는데 다른 쪽에 완전히 집중한 셰비언의 모습은 처음 보았다. 아주 진지하게 일에 집중하는 모습이 낯설면서도 어쩐지 마음이 설렜다. 아침 햇살을 머금고 왕관처럼 빛나는 은발이 눈부셨다.
본래 두 사람이 약속했던 오늘의 일정은 마법사협회 방문 따위가 아니었다. 며칠 전, 두 사람은 침대에 엎드려 소곤소곤 데이트 일정을 짰다. 잔소리하는 하녀들도 눈초리 매서운 베텔 경도 다 떼어놓고, 이리저리 예의를 차려야 하는 사람들에게서 벗어나 둘만의 시간을 보내자고 말이다.
일단 하루가 멀다 하고 내린 비로 호수의 수위가 충분히 높아졌으니 뱃놀이를 하러 가기로 했었다. 아침 안개가 걷히기 전에 배를 띄우고 안개 낀 풍경을 느긋하게 즐기다가, 해가 머리 꼭대기에 이르면 카페 로열에서 식사를 하고 곡예단의 공연을 구경하기로 했다. 그리고 시끌벅적하고 화려한 브란젤의 밤을 즐기기로 약속했다.
공교롭게도 수확제와 대관식의 일정이 겹치는지라, 요즘 브란젤의 거리는 호화로움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다. 농사가 주 경제활동인 지역은 아주 난리도 아니라는데 브란젤 거리를 채운 사람과 상품에선 오랜 가뭄의 여파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하필 벼르고 별렀던 날 새벽에 헨젤 백작이 치안대에 끌려간 건 예상외의 일이었으나, 데이트를 해야겠다는 두 사람의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들은 저택을 나서자마자 마법사협회의 심부름꾼을 만나고 말았다.
<발톱섬 탐사에 관련해서 급하게 의논할 것들이 있습니다. 되도록 빠른 시일 내에 방문해 주시기 바랍니다.>
셰비언은 오드리에게 매우 미안해하면서도 마법사협회에 먼저 가봐야겠다고 했고, 오드리는 그의 부탁에 고개를 끄덕였다. 협회의 마법사들에 대해 야박한 평 내리기를 주저하지 않던 이가 안색까지 바뀌어 진지하게 반응하는 게 어쩐지 심상치 않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아침 안개 낀 호수에서 배를 타지 못하고 손에 잡히는 읽을거리가 죄다 지루하긴 해도, 진지하게 보고서를 읽는 셰비언을 보고 있으니 이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호수의 풍경이 아름답고 곡예단의 공연이 화려해도 셰비언의 다른 면을 구경하는 것보다 즐겁진 않을 것 같았다.
‘시간 가는 줄을 모르겠어.’
무슨 수를 쓴 건지 셰비언과 근처 마법사들의 대화는 조금도 들려오지 않았다. 자꾸 홀에 들어오는 사람이 늘어나는데도 홀은 여전히 조용했다. 오드리는 무언극을 보는 듯한 기분으로 턱을 괴었다. 새벽부터 잠을 설친 탓인지 눈꺼풀이 무거웠다.
계속 보고서를 읽던 셰비언은 불현듯 고개를 들어 오드리를 확인했다. 눈꺼풀을 느릿하게 깜빡이던 오드리가 눈이 마주치자 생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셰비언은 마주 웃으며 손을 흔드는 척, 소리를 차단하는 마법막의 범위와 강도를 높였다. 위협적으로 몸을 훑고 지나가는 마력의 느낌에 보고서의 내용을 첨언해 주던 간부의 안색이 시퍼레졌다.
“발톱섬에 사람을 보내지 말라고 내가 그렇게 당부했을 텐데, 내 말을 귓등으로 들었나 보지.”
보고서에 담긴 발톱섬의 상태는 심상치 않았다. 거하게 용암을 쏟고 잠잠해진 줄 알았던 화산 꼭대기에선 용암이 수도꼭지에서 물 새듯 쫄쫄 흘러나오고, 섬과 주변 바다엔 유황 냄새가 자욱하게 퍼졌다. 근처의 다른 섬에선 잔잔하게 땅이 흔들리는 느낌마저 받은 적이 있다고 했다. 어디로 보나 2차 폭발의 징후였다.
셰비언은 관찰이 이루어진 시점이 샤를레아를 봉인하기 전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분명 위협적인 징조였지만 충분히 예상했던 바이기도 했다. 샤를레아의 봉인으로 상황이 바뀌었을지 확신할 수 없을 뿐이지.
‘다 쓸데없어. 인간의 보고 따위……. 결국 내가 직접 가야 하는 건가.’
셰비언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니, 지레 겁을 먹은 간부가 서둘러 변명을 시작했다.
“말씀을 전해받자마자 탐사 예정이었던 팀을 죄다 해체했습니다. 하지만 저희 입김이 닿지 않는 곳이 있어서 문제입니다.”
“협회의 말을 듣지 않는 마법사가 있다는 건가? 아니면, 마법사 없이 활화산이 있는 섬에 탐사를 가는 미친놈들이 있다는 걸 나더러 믿으라고?”
“마법사는 당연히 마법사협회의 결정을 따릅니다. 하지만 협회가 멜브란트에만 있는 건 아니잖습니까? 저희야 남작님의 지시를 철저히 따릅니다만, 살론의 마법사협회는 마법사를 구하는 탐사대에 상당히 긍정적으로 반응했고…….”
“그걸 막았어야지. 그러라고 했는데 못한 건 너희들이고.”
간부는 몹시 억울해졌다. 그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출발 직전의 탐사대를 해체하는 데만도 어찌나 고생을 했는지 생전 없던 위염을 다 얻었다.
하지만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살론의 마법사협회는 용의 등장 자체를 믿지 않았다. 오히려 멜브란트의 마법사들은 탐구심이 떨어진다고 비웃으며 비공식 탐사대에 적극적으로 마법사를 공급했다. 발톱섬이 멜브란트의 영토인지라 함부로 끼어들지 못하고 손가락만 빨고 있었다는 게 짐작되는 적극성이었다.
덕분에 요즘 멜브란트의 마법사협회는 살론의 마법사를 끼워서라도 탐사를 하겠다는 사람들을 막느라 고군분투하는 중이었다. 발톱섬이 용의 둥지라는 정보를 대체 어디서 알아왔는지, 유서 쓰고 가면 되는 거 아니냐며 막무가내들이었다.
간부는 쓰린 속을 부여잡고 다시 사정을 설명했다.
“죄송합니다, 협회가 나라별로 나눠져 있는지라 살론까지 어떻게 해 보기엔 힘이 달렸습니다. 그래도 벌써 들어가 있었던 탐사대들은 다 빼내왔습니다. 여기 있는 보고서는 그 탐사대에서 다 써낸 겁니다.”
“일찍 빼낸 거 맞아? 사람이 여럿 죽었어.”
셰비언이 사망으로 표시된 사람들을 가리켰다. 나이가 있는 학자의 희생은 의외로 없고, 죽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젊고 유망한 마법사였다. 간부는 슬그머니 사망자 서류를 뒤집었다.
“무인도잖습니까. 그것도 화산이 아직도 활동하는 섬인데 겨우 서넛 죽고 끝났으면 잘 끝난 거죠.”
“마법사가 죽었는데 아주 여유롭군.”
“첫 번째 탐사대가 몰살이었던 걸 알고 간 사람들입니다. 자신들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걸 알고 갔는데 제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동료가 죽었어도 안 나오려고 버티는 걸 끌어내느라 제 머리가 한줌은 빠졌습니다.”
“사람을 보내지 말라는 내 지시는 알아들었는데, 그 이유까지 알아듣지는 못했나 보지?”
“알아들었습니다. 용에게 한 끼 식사가 될 수 있으니 나오라고 하셨다고……. 상처 입은 용에게 젊고 건강한 인간 마법사는 식사가 아니라 몸에 잘 듣는 약이 되니까 그러셨겠죠.”
“난 또, 몰라서 마법사 서넛 죽은 것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말하는 줄 알았는데 알고 있었잖아? 놀랍기도 하지.”
“저도 훌륭한 인재들의 죽음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그래도 그들이 올린 성과를 생각하면 마냥 막는 게 더 나았을 거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을 뿐입니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이 자료를 얻을 수 없었을 테니까요. 때로는 희생만이 그만한 결과물을 낼 때가 있죠.”
간부가 이제 막 도착한 보고서를 셰비언에게 내밀었다.
“희생이라……. 인간들은 머릿수가 많아서 그런가, 나와는 생각이 참 달라. 전쟁 중인 것도 아닌데 희생을 쉽게도 입에 담는 게 참 신기하다니까.”
“딱히 머릿수가 많아서라기보다는, 능력이 부족하니까 그렇게라도 생각해야 마음을 달랠 수 있는 것에 가깝지 싶습니다.”
“말은 잘해.”
셰비언은 보고서를 후루룩 넘기다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페이지를 발견했다. 발톱섬의 화산 폭발이 섬에 만들어낸 독특한 지형들이 꼼꼼하게 기록된 부분이었다. 언뜻 보면 화산섬의 변화를 기록한 것에 불과하지만, 셰비언은 그 지도에서 어렴풋하게나마 마법진의 형태가 드러나는 걸 알아보았다.
“마법진……?”
“역시 남작님도 알아보시는군요. 발톱섬의 현 상태도 상태지만, 무엇보다 이 마법진 때문에 남작님의 조언이 필요했습니다.”
화산으로 생겨난 용암천의 흔적들, 새로이 생겨난 동굴들, 간헐천이 솟아나 생겨난 작은 연못들……. 얼핏 아무 의미도 없는 듯 보이는 지형들이 미묘한 조화와 규칙성을 보였다. 탐사대의 마법사들 역시 의문을 느낀 듯, 단순한 위치 표시를 넘어 아예 지형지물 자체를 스케치한 부분이 잔뜩 있었다.
“이걸 본 마법진 전문 마법사가 이건 절대 우연일 수가 없다며 자기 손목을 걸어도 좋다고 하더군요. 뭘 위한 마법진인지를 알아볼 수가 없어서 그렇지, 이건 분명 마법진이라고 말입니다.”
“혹시 그 마법진 전문 마법사가 너야?”
간부가 대답 대신 씩 미소를 지었다. 그의 자부심 넘치는 미소를 보는 다른 마법사들의 눈빛이 아주 초롱초롱했다.
“인간이 마법진에 대해 가진 지식은 상당히 허술할 텐데 용케 알아봤네.”
“사실 믿지 못하겠다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남작님 말씀대로면 발톱섬은 살아 있는 용의 둥지가 아닙니까? 이런 일이 있을 수도 있는 거지요. 무슨 마법진인지 알아보시겠습니까?”
“종이와 펜 좀 가져와.”
셰비언은 능숙한 솜씨로 지도의 마법진을 종이에 옮겨 그렸다. 아무래도 변화된 부분만 표시한 자료다 보니 부족한 부분이 많아서 완벽한 마법진이 나오진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도 마법진의 목적을 짐작하기엔 충분했다.
“이건 마력을 빨아먹는 마법진이야. 본래는 치료 목적으로 사용하는 걸 악랄하게 변형했어. 왜 마력이 충분한 젊은 마법사들이 비실대다 죽었는지 알 만해. 사고사? 사고 좋아하네. 섬 전체가 죽이려고 달려드는데 살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지.”
셰비언은 샤를레아가 무슨 수로 그리 빨리 회복했는지 그제야 납득했다. 샤를레아는 자신의 둥지인 발톱섬에 들어앉아 제 발로 찾아온 먹이를 조용히 삼킨 것이다. 첫 번째 폭발이 있을 적에 섬의 지형 자체를 바꿔놓은 걸 보면 부상을 입고 칩거할 때를 미리 대비한 것처럼 보였다.
“인간에게 들키지 않도록 교묘하게 꾸며뒀어. 하, 그 단순한 용이 웬일로 이렇게 대비를 다 해뒀을까…….”
“설마 용에게 잡아먹혔다는 겁니까?”
“그래. 샤를레아의 회복에 아주 크게 기여했지. 둥지라는 장소 특성에다가 이 마법사들의 마력이 보태졌으면…… 심장의 구멍을 메우고도 남았겠어.”
간부의 낯빛이 허옇게 질렸다. 그는 요즘도 붉은 용이 흰 용의 목을 물어 죽이고 브란젤을 모두 때려 부수는 악몽을 꾸곤 했다. 불타는 브란젤의 폐허 한복판에서 현실로 깨어날 때마다 그게 그저 꿈이라는 것에 크게 안도했건만, 셰비언의 말 몇 마디에 그 안도가 깡그리 사라졌다.
“하, 하지만 발톱섬에서 용을 봤다는 대원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셰비언 절벽의 주민들 중에도 내가 둥지에 들락거리는 걸 본 사람은 없을걸.”
“셰비언 성벽과 발톱섬은 경우가 다릅니다. 손바닥만 한 작은 섬인데 어떻게……. 적어도 용이 날아오는 건 봤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어떤 탐사대원도 용을 목격하지 못했습니다.”
“샤를레아가 발톱섬에서 나오는 걸 본 인간도 없다는 걸 생각해. 인간의 시야는 터무니없이 좁고 사각이 많아. 아무리 마법을 잃고 부상을 입었대도 샤를레아가 겨우 인간 몇을 속이지 못했을 거란 생각은 안 들어.”
마법막 안의 마법사들 멘탈을 마구 깨부수는 말을 연달아 뱉는 셰비언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새삼 인간 마법사들이 걱정이 되어서는 아니었다. 마법사의 마력까지 빨아먹은 샤를레아가 왜 자신의 봉인에 손쉽게 당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였다. 좀 더 수작을 부린다거나 격하게 반항하는 것도 가능했을 텐데 말이다.
‘뭔가……. 뭔가 속셈이 있었던 건가?’
샤를레아 생각을 한 탓인지, 아직 다 빼내지 못한 마력이 남아 있는 어깻죽지가 욱신거렸다. 칼로 확 잘라내면 시원해질까 싶은 통증이었다.
셰비언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오드리를 찾아 고개를 돌렸다가, 턱을 괴고 그를 바라보던 오드리와 눈이 마주쳤다. 오드리가 봄바람 같은 미소를 지었다. 통증이 마법처럼 사라지고 뿌옇게 안개가 끼었던 머릿속이 명료해졌다.
“달튼 제도는 사람이 많이 살아?”
“……거긴 예전부터 워낙 섬이 많은 곳이라서……. 나랍과의 무역 통로 중 하나라서 통행량이 많은 건 압니다만 정확한 수치를 알아보려면 관련 기관에 물어봐야 합니다.”
아주 미덥지는 못해도 간부는 간부라고, 다른 마법사들에 비하면 회복이 빨랐다.
“당장 관계기관에 가서 달튼 제도 부근의 인간들을 소개시키라고 전해. 무역 통로면 배가 많이 다니겠지? 그 배들의 항로도 새로 짜야겠군. 설마 뱃길이 하나인 건 아닐 테니, 새로 개척해야 한다 어쩐다 소리는 하지 않겠지.”
“이유를 물어볼 겁니다.”
“발톱섬을 깨부숴 버릴 건데 그 여파가 어디까지 미칠지 모르겠거든.”
간부는 자신이 잘못 들은 건 아닌지 의심스러워 귀를 후볐다. 그동안 인간의 제스처에 많이 익숙해진 셰비언이 친절하게 한 번 더 반복했다.
“발톱섬을 아예 부숴 버릴 거라고. 인근 바다가 죄다 뒤집힐 테니 배고 사람이고 다 치우라고 미리 말해주는 거야.”
“그, 그런……. 그런 건 직접 말씀하셔야 되는 거 아닙니까? 제가 말해봐야 믿지도 않을 겁니다.”
“당장 섬을 부수러 가고 싶은 걸 참고 있는 용이 왕궁에 들어가도 된다는 건가? 그래? 당연히 왕궁이 조금 부서져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말하는 거겠지?”
“억지입니다!”
“내가 그렇게 생각한다는데 그게 왜 억지지? 어쨌건 나중에 나더러 뭐라 하거든 네 이름을 대야겠어. 네가 내 심부름을 거절해서 내가 직접 왔으니 그리 알라고 말이야. 너, 이름이 뭐지?”
간부의 등에서 땀이 줄줄 흘렀다. 팔짱을 끼고 내려다보는 셰비언의 태도를 봐서는, 왕궁에 가자마자 대뜸 건물 하나를 때려 부수고 간부의 이름을 댈 것만 같았다.
“……알겠습니다. 제가 가죠. 하지만 빠른 시간 내에 긍정적인 답변을 들을 거란 기대는 하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거주지의 사람을 소개시키고 무역로를 바꾸는 게 하루아침에 가능한 일은 아니잖습니까.”
“글쎄? 난 그런 거 모르겠는데? 난 결정했고 급한 건 너희들이야. 알아서들 해. 난 오래 기다리지 않을 거야.”
셰비언은 그 말을 끝으로 마법막을 홱 거뒀다. 거친 손속에 연약한 마법사 몇몇이 버티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간부는 주저앉은 마법사를 챙길 정신도 없이 서둘러 홀을 빠져나갔다.
오드리는 입까지 벌리고 눈을 깜빡거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정적에 잠겨 명화의 한 장면 같던 홀이 갑자기 부산한 소리들로 가득 찬 게 신기했다. 셰비언이 그녀에게 다가와 자연스럽게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아가씨, 기다리느라 지루했죠?”
“아니, 재미있었어. 그대의 표정을 보는 것만으로도 시간 가는 줄을 모르겠던걸. 그보다 무슨 얘기를 들었기에 그렇게 화를 냈어?”
“제가 화를 냈다고요? 에이, 잘못 보셨을 거예요. 저 불쌍한 인간 마법사들에게 제가 왜 화를 내겠어요?”
“그럼 저 마법사들은 왜 쓰러졌어?”
“다리가 아픈가 보죠. 쯧쯧, 그러게 인간 마법사들은 운동을 좀 해야 해요. 너무 허약하다니까요.”
“협회의 간부는 왜 뛰쳐나가고?”
“볼일이 급한가 보죠. 부디 화장실이 가까이 있어야 할 텐데요.”
어이가 없어진 오드리가 대체 무슨 일이냐고 더 추궁하려는 순간, 셰비언이 오드리의 손을 낚아채 쥐고 손가락 끝에 입을 맞추며 웃었다. 천 년 묵은 화도 녹여 버릴 만큼 매력적인 미소였다. 오드리의 뺨이 화끈 달아올랐다.
“아가씨, 우리 이제 뱃놀이 갈까요?”
“말 돌리기는……. 내가 캐묻는 게 그렇게 싫어?”
“뱃놀이는 별로예요?”
셰비언이 풀 죽은 아이처럼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역시 안개 걷힌 호수는 매력이 없는 건가요……. 아가씨와 뱃놀이 할 생각에 노 젓는 방법도 열심히 배웠는데 소용없게 됐네요. 아직 점심식사를 하러가기엔 이르고, 이런 시간에는 딱히 볼 만한 공연도 없을 텐데 어쩌지……. 후……. 아가씨가 진짜 어렵게 내준 시간인데…….”
“지금 나더러 미안하라고 이러는 거지?”
“설마요. 나중에 피올이 데이트 어땠느냐고 분명 물어볼 텐데 뭐라고 대답해야 놀림을 안 당할까 생각한 것뿐이에요. 노 젓기를 가르쳐 준 게 피올이거든요.”
“검술을 배우겠다더니 노 젓기를 배웠네.”
“체술도 배웠어요.”
“그리고 이렇게 말을 잘하는 걸 보면 화술도 배운 모양이지? 보티안 씨는 가르치는 것엔 영 재주가 없다더니 그대에게는 좋은 선생이었나 봐.”
오드리는 혀를 차며 셰비언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셰비언이 풀 죽었던 모습은 간데없이 화사하게 웃었다. 그 미소를 보고 있자니 자신이 이렇게 너그러운 사람이었나 싶을 정도로 마음이 물렁해졌다. 잘 익은 복숭아도 이처럼 물렁하진 않을 것 같았다.
정말 중요한 일이면 어련히 말했겠지. 별일 아니니까 이렇게 넘어가는 거겠지. 사랑이 눈을 가리는 걸 알면서도, 오드리는 기꺼이 유혹에 넘어갔다.
“그래, 꼭 오늘이 아니어도 설명을 들을 날이 오겠지. 그때까지는 참아볼 테니까 뱃놀이 가자.”
“오, 정말이죠?”
“그렇지만 설명이 너무 늦으면 그대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털어서 대답을 듣는 수가 있어.”
실행할 생각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가벼운 협박이었건만, 셰비언의 반응은 격렬했다. 그는 홱 고개를 돌려 아까까진 공기처럼 무시했던 마법사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함부로 입을 놀렸다간 가만두지 않겠다는 무언의 경고였다.
“셰비언, 괜히 겁주지 마.”
“겁을 주다니, 제가 그럴 리가 있나요. 생산적인 대화를 나눴으니 얼굴을 기억한 거죠.”
오드리는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는 셰비언이 귀여워 웃음을 터뜨렸다. 피올이 똑같은 말을 했다면 얄미워 미쳐 버릴 것 같았을 텐데, 상대가 셰비언이 되니 마음이 이렇게나 달랐다.
오드리에게 일말의 희망을 걸었던 마법사들의 분위기는 두 배로 우중충해졌지만, 그거야말로 오드리가 알 바 아닌 일이었다.
두 사람은 안내역을 마다하고 단둘이 걸어 마법사협회의 건물을 빠져나왔다. 건물이 대로변에 위치해 있었던지라, 나오자마자 북적거리는 인파와 정면으로 마주하고 말았다. 아침보다 한결 뜨겁고 강해진 햇살이 정수리에 이글거렸다.
“다들 부지런하기도 하지…….”
“그러게요. 배가 남아 있긴 할까 걱정이에요.”
“부지런한 건 생계가 걸린 사람들이고, 수확제 준비기간에 뱃놀이를 할 만한 한량들은 아직 단잠에 빠져 있을 시간이야. 남아 있을 거야. 없으면 뭐 어때, 좀 기다리면 되지.”
잘 익은 복숭아처럼 물렁해진 마음은 달콤한 과즙처럼 긍정적인 쪽으로 사고를 몰아갔다. 오드리는 셰비언과 손을 잡고 햇살 아래를 걷는 것만으로도 발이 너무 가벼워 몸이 떠오를 것 같았다.
아주 뜻밖의 만남이 있기 전까진 그랬다. 뺨을 발갛게 물들인 비니타가 인파에서 불쑥 솟아나 오드리의 앞을 막아섰다. 놀란 오드리가 적절한 인사말을 찾고 있는데, 그보다 먼저 비니타가 옷자락을 들어 올리며 야무지게 인사를 했다.
“레이디 오……. 아니, 헨……. 아니, 아니…….”
“레이디 오드리라고 해도 돼.”
“네! 안녕하세요, 레이디 오드리! 안녕하세요, 아르…….”
어린 소녀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어찌나 맑고 높은지, 오드리는 기겁을 하며 비니타의 입을 틀어막았다. 다행히 오드리가 큰 모자를 쓰고 있는 데다 거리가 소란스러워 비니타의 말을 제대로 들은 사람은 없는 듯, 누구도 오드리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비니타, 난 사람이 몰리는 게 싫단다. 비밀로 해줄래?”
비니타가 큰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드리는 언제든 다시 입을 막을 자세로 손을 뗐지만, 다행히 또 입을 막아야 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비니타는 눈치가 빠른 소녀였다.
“레이디의 머리색이 바뀌었다고 다들 난리라서 제 눈으로 꼭 한 번은 보고 싶었어요. 그런데 수확제를 앞두고 이렇게 만나 뵙게 되다니, 저는 정말 운이 좋은가 봐요. 아가씨는 머리칼이 녹색일 때도 벨트람 같으시더니, 흑발이 되니 더 벨트람 같으세요!”
비니타의 말은 오드리의 뼈저린 현실이었다. 오드리가 녹발일 때도 그녀에게 호의적이었던 사람들은 오드리의 예상보다 훨씬 더 그녀의 흑발을 좋아했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이 오드리에게서 벨트람의 이미지를 겹쳐 보았다.
거대한 흑마 윈디를 타고 즐기는 아침 승마 코스엔 나날이 구경꾼이 불어났고, 밀려드는 사교모임 초대장에는 부디 흰 망토를 두르고 참석해 주면 좋겠다는 문구가 빠지질 않았다.
어쩌다 오드리가 머리를 꾸며 늘어뜨리고 사교모임에 나갔을 땐, 셰비언이 뻔히 옆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오드리에게 승리의 기원을 부탁하는 이들마저 있었다. 놀랍게도 그들 상당수가 진심이었고 그중엔 외국인도 끼어 있었다.
오드리는 의도했던 것 이상으로 열광적인 반응에 점차 지쳐 가고 있었다. 몇 번 장단을 맞춰 어울려 주면 곧 흑발에 익숙해질 거라던 생각이 얼마나 안이했는지 깨닫는 나날이었다. 견디다 못해 네이기스에게 다른 얼굴의 벨트람을 그리면 안 되겠느냐고 운을 띄워보기도 했지만 단호한 거절만 돌아왔다.
“아가씨, 싫으면 싫다고 해도 돼요. 굳이 저런 어린애 기분까지 맞춰줄 필요는 없잖아요.”
셰비언이 소곤소곤 속삭였다. 오드리는 깜빡 유혹에 넘어갈 뻔했지만, 호감과 동경으로 범벅돼 반짝이는 비니타의 눈동자를 차마 외면하지 못했다. 소녀의 눈동자는 셰비언과 꼭 닮은 푸른색이었다.
“어때, 어울리니?”
오드리는 비니타와 눈높이가 맞도록 몸을 굽히고 모자챙을 살짝 들어 올려 얼굴을 노출했다. 셰비언이 격에 맞는 보석이 없다 한탄했던 초록색 눈동자가 모자챙의 그늘 아래에서도 선명하게 빛나며 비니타를 사로잡았다. 용의 마력을 타고난 소녀는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훨씬 더 잘 어울리세요. 아가씨의 초록색 눈동자가 예전보다 훨씬 더 도드라지고 매력적으로 보여요. 누군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보석을 구해서 눈에 넣어 오더라도 아가씨와는 비교도 안 될 거예요.”
“그거 참……. 굉장한 칭찬이구나. 고맙다.”
민망할 정도의 칭찬세례였다. 오드리는 화끈거리는 얼굴을 감추려 얼른 모자를 깊이 눌러썼다. 어떻게 아까보다 더 시선이 뜨거워질 수 있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부끄러워하는 오드리를 보는 셰비언의 기분은 비니타의 시선의 온도에 비례해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공부하기는 어렵지 않니?”
“괜찮아요. 재밌어요. 신기한 게 엄청 많아요!”
셰비언의 기분은 영 모르는 듯, 오드리는 자꾸 비니타에게 말을 붙였다. 비니타는 동경하는 오드리가 말을 붙여준 것만으로도 신이 나서 재잘거렸다. 워커에겐 뭘 배웠고, 사하스바티에겐 뭘 배웠고…….
“이젠 멜브란트어도 잘 읽게 되었나 보네.”
“규칙을 알게 되니까 전보다 훨씬 읽기 쉬워졌어요. 이젠 복잡한 문장도 척척 읽을 수 있어요. 이만한 두께의 마법 이론서도 한 시간이면 읽는걸요.”
비니타가 어깨를 펴고 제 독서 속도를 자랑했다. 얼마 전까지 잡지 한 권 읽는 데에 하루가 걸렸다던 아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발전인지라, 오드리는 몹시 놀라고 말았다. 선생들의 칭찬을 한 몸에 받았던 오드리조차 그 정도로 빠르게 외국어를 익히지는 못했다.
오드리의 놀란 표정에 비니타가 억울하다는 듯 가슴을 두드렸다.
“진짜예요.”
“네가 그렇게 빨리 글을 익힐 줄은 몰라서 놀란 거야. 마법도 그렇게 늘고 있니?”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비니타가 작은 손을 쫙 펴고 문장을 띄웠다. 몸통이 새하얗고 잎이 뾰족한 나무들이 빽빽하게 숲을 이루고, 나무 사이에선 붉고 노란 꽃들이 순서를 다투어 피어났다. 마지막으로 나풀나풀 함박눈이 쏟아져 알록달록하던 문장 전체를 하얗게 물들였다.
오드리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감탄했다. 문장을 띄웠다는 건 마법사로 불릴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을 획득했다는 뜻이었다. 재능은 충분하다고 셰비언이 장담하긴 했지만 이렇게 빠른 성취는 예상하지 못했다.
‘천재는 남을 가르치는 쪽엔 영 재주가 없다고 알고 있었는데……. 워커는 좀 다른가? 의외의 곳에 재능이 있었네.’
그건 오드리의 착각이었다. 스승 노릇이 처음인 워커는 당연하다는 듯 어린 시절의 자신을 기준으로 삼아 비니타를 가르쳤다. 그때의 내가 할 수 있었으니, 너도 당연히 할 수 있을 거라는 식이었다. 평균보다 약간 나은 수준의 재능을 가진 예비 마법사였다면, 이해가 안 된다고? 왜? 그냥 보면 아는 거잖아? 따위의 말을 들으며 제자리걸음만 했을 수업이었다.
그럼에도 비니타는 워커의 수업을 무난하게 따라잡았다. 마법망에 대한 민감도도, 마력운용의 섬세함도 훌륭했다. 워커가 아주 약간 물꼬를 터준 것만으로도 비를 맞고 자라나는 죽순처럼 실력이 늘었다.
종종 셰비언이 끼어들어 보충수업을 해줬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비니타의 부모가 일생일대의 결심을 하고 바다를 건넜던 게 이해가 될 정도로 훌륭한 재능이었다.
그러나 아직은 미숙했다. 완벽하게 익혔다고 할 만한 수식은 기껏해야 서너 개에 불과했고, 새로운 수식을 만들어내기는커녕 이미 익힌 수식을 자유롭게 변형해 응용하는 것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마법엔 재능이 절대적이지만, 재능 못지않게 노력과 시간이 필요한 부분이 분명히 있었다.
오드리는 그런 자세한 사정을 잘 몰랐다. 설령 알았대도 별로 개의치 않았을 것이다. 비니타는 아직 어리고, 앞날이 창창하니까. 그녀는 온 진심을 담아 칭찬했다.
“비니타, 마법을 배우기 시작한 지 얼마나 됐다고 문장을 다 띄우니? 그야말로 꼬마 마법사님이네. 문장도 아주 화려하고 멋져. 이렇게 어린 나이에 풍경이 변하는 문장이라니 기가 막히는구나. 네가 더 발전하면 어느 정도가 될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기 시작했어.”
오드리의 칭찬에 비니타가 몸을 배배 꼬며 부끄러워했다. 내내 뚱하게 입을 다물고 있던 셰비언이 덥석 끼어들었다.
“용의 마력을 타고났는데 그럼 이 정도는 해야 정상이죠. 보통의 인간 마법사와는 애초 출발선 자체가 다른데요. 아직 한참 모자라요.”
하도 냉정하게 딱 잘라 말하는 통에 비니타의 어깨가 축 처졌다. 오드리가 셰비언의 옆구리를 슬쩍 찔렀지만 셰비언의 혹독한 평가는 멈출 줄을 모르고 이어졌다.
“비니타, 문장의 구성 요소는 다양해서 좋지만 형태가 뚜렷하지 않아. 마지막에 눈이 내렸다고 해서 색이 한 가지로 바뀌어 버리는 것도 네가 부족해서 그런 거다. 문장이 작은 오렌지만 한 크기라는 것도 문제야. 네가 마음먹고 띄웠을 때 적어도 잘 익은 수박 정도는 되어야지. 제대로 된 문장을 만들려면 한참은 더 배워야 하는 걸 너도 알면서 조금 전처럼 자랑하고 다니지 마라.”
“네, 남작님. 잘못했습니다. 그런데요…….”
비니타가 우물쭈물 셰비언의 눈치를 보았다. 셰비언은 동그란 머리통을 콱 쥐어박아 얼른 떠나보내고 싶은 걸 꾹 눌러 참고 눈짓했다. 꼬맹아, 할 말 있으면 빨리 해라, 바쁘다.
“제가 남작님이 만족하실 정도로 괜찮은 문장을 만들려면 얼마나 더 지나야 할까요?”
“그건 네 노력에 달린 문젠데 내가 어떻게 알겠냐? 다행히 재능은 충분하니까 중간에 다른 길로 새거나 수련에 소홀하지만 않으면 삼, 사 년이면 어느 정도 구색은 갖춰지겠지.”
아직 어린 비니타에게 3, 4년이란 시간은 까마득하게만 느껴지는 먼 미래였다. 게다가 그 정도면 된다는 것도 아니고 겨우 구색을 갖춘단다. 비니타는 희게 질려서 손가락을 꼽기 시작했지만, 오드리는 생각 이상으로 짧은 수련 기간을 제시한 것에 깜짝 놀랐다.
“셰비언, 아이샤의 문장을 보고도 괜찮다는 소리 안 했었잖아. 그런데 비니타는 삼, 사 년이면 그 이상이 될 거라고?”
“부단히 노력하는 많은 마법사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마법은 재능을 지나치게 많이 타는 영역이에요. 마법을 배운 적도 없으면서 자기 눈에 마법을 걸고 다니던 아이가 그 재능에 노력을 더하면 상상 이상으로 빠르게 발전하는 건 당연한 일이죠. 계속 노력을 기울일 수 있느냐가 문제지만요.”
“비니타가 그런 천재라는 말은 안 했었잖아. 재능 있다는 소리만 하고.”
“재능의 크기만으로 어떻게 천재인지 아닌지 알죠? 그건 단지 마법사로서 다다를 수준을 가늠하는 척도 중 하나일 뿐이에요. 남들이 끝이라고 하는 곳에 이르러서도 한 발 더 나가는 자, 혹은 남들과 다른 시선을 갖고 새로운 영역을 여는 자들만이 천재라는 말을 들을 자격이 있어요.”
그저 빠른 시간 내에 수준 높은 마법사가 되는 것만으로는 천재가 아니라니 엄격하기 그지없는 조건이었다. 과연 마법의 주인이었다.
“예를 들면……. 바일런 섀덤 같은?”
“맞아요, 그는 진짜 천재죠. 그리고 워커도요. 워커의 강철새는 조만간 하늘을 날 거예요. 언젠가 강철새가 셰비언 절벽 꼭대기에 내려앉는 광경을 볼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그거 듣던 중 반가운 말이네. 강철새가 저번 비행 실험에서 또 중간에 떨어졌다고 이디케가 아주 죽상이던데 말해주면 좋아하겠어. 드디어 예산 먹는 괴물이 떨어져 나간다고 만세를 부를 거야. 비니타도 그런 천재가 될 수 있을까?”
“단언할 수 없어요. 모처럼 용의 마력을 타고난 마법사라도 다나 같은 끝을 맞을 수도 있는데, 미래를 누가 알겠어요? 지금은 가진 재능을 캐내기에도 바쁜 시기인데요.”
셰비언은 지극히 중립적이고 건조한 어투로 말을 끝맺었다. 하지만 오드리는 셰비언의 말에서 희미한 소망을 읽었다. 부디 비니타가 다나처럼 비참한 끝을 맞이하지 않기를 바라는 듯한 느낌이랄까. 당연한 소망인데 미미한 불쾌감이 밀려왔다.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런데 비니타 쟤는 어린애가 왜 보호자도 없이 혼자서 돌아다니는 걸까요? 왕궁마법사 숙소든 워커의 연구실이든 얼른 데려다줘야…….”
“비니타아아!”
타이밍도 좋다. 셰비언이 슬슬 비니타를 떼어놓을 시도를 하려는데, 복잡한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아이샤가 나타났다.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나타난 아이샤는 비니타 말고 다른 사람은 보이지도 않는 듯, 대뜸 비니타의 어깨를 붙들고 흔들며 잔소리를 시작했다.
“내가, 너를, 너를 얼마나 찾은 줄 아니? 응? 웬일로 말도 잘 들으면서 얌전히 걷는다 싶더니, 그렇게 멋대로 뛰쳐나가면 어떡해! 내가 그러면 위험하다고 했잖아! 브란젤엔 너 같은 어린애를 잡아다가 뒷골목에 처넣고 죽을 때까지 일만 시키는 못된 사람들이 있다고, 그러니까 꼭 나랑 붙어 다녀야 한다고 몇 번을 당부했는데 내 말은 귓등으로 들었어?”
앞뒤로 흔들리던 비니타의 모자가 벗겨져 땅에 떨어졌다. 아이샤는 그제야 정신이 든 듯 비니타를 놓아주었다. 비니타가 모자를 주워 쓰며 샐쭉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아무 생각 없이 뛰어나온 거 아니에요. 아르젠 남작님이 계셔서 인사하려고 그런 거라고요. 늦으면 또 놓칠까 봐서요.”
“그런 변명은 하지 말랬지……! 비니타, 네 다리가 빠른 건 알지만 호숫가에서 협회 근처까지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는 알고 그런 말을 하니? 응? 네가 어디 간다 말도 않고 사라지는 바람에 내 수명이 일 년은 줄어든 것 같다! 다음엔 어디 간다 말이라도 하고 가!”
“……네에.”
말꼬리가 늘어지는 폼이, 다음에도 말을 잘 할 것 같진 않다. 아이샤는 갑갑함에 가슴을 치며 한숨을 푹푹 내쉬고 나서야 셰비언과 오드리에게 아는 척을 했다. 비니타 때문에 어지간히 맘고생을 하고 있는 듯, 몇 달 사이 폭삭 나이를 먹은 얼굴이었다.
“아이샤 씨, 고생이 많아요. 설마 호숫가에서 여기까지 뛰어왔어요?”
“비니타는 그런 모양인데, 저는 그보다 배는 더 뛰었죠. 어디로 갔는지를 몰라서 한참 찾아 헤맸거든요. 내 제자도 아니고 자식도 아닌데 한번 눈에 밟히고 나니까 도저히 내버려 둘 수가 없어서……. 속이 아주 문드러진다니까요. 우리 어머닌 날 어떻게 키웠나 몰라.”
아이샤의 쨍한 눈초리를 받은 비니타가 딴청을 부렸다. 오드리는 몸을 낮춰 비니타와 눈을 맞췄다. 궁금한 게 있었다.
“비니타, 정말 셰비언이 여기 있는 걸 호숫가에서부터 알고 왔니? 사람이 이렇게 많고, 거리도 한참이나 떨어져 있는데 어떻게 알았니?”
평범하게 걸으면 삼십 분은 족히 걸어야 할 만큼 먼 거리였다. 중앙공원의 호숫가와 마법사협회 사이가 텅 빈 공터도 아니고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닌데, 셰비언이 여기 있다는 걸 알고 왔다는 말이 이상했다.
“아가씨, 마구잡이로 둘러댄 변명이에요. 어린애 거짓말에 그리 신경 쓰지 마세요.”
아이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오드리는 비니타의 손까지 잡고 퍽 진지한 태도로 물었다.
“비니타, 솔직히 대답하렴. 나는 지금 네가 진실을 말했다고 믿고 묻는 거야. 설령 네가 진짜 거짓말쟁이더라도, 적어도 나한테만은 거짓말하지 않을 거라고 믿고서. 나는 너의 벨트람이잖니?”
오드리가 살짝 미소 짓자 비니타가 홀린 듯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서 상황 돌아가는 꼴을 지켜보던 셰비언은 그만 이마를 짚었다. 오드리가 제 입으로 벨트람이란 말까지 꺼냈는데 제대로 된 대답을 듣기 전에 비니타를 놔줄 리 없었다.
“어떻게 알았니? 나한테만 살짝 말해보렴.”
비니타가 오드리의 품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들리지 않도록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이건 비밀이랬지만……. 레이디 오드리에게만 특별히 알려드릴게요. 사실 아르젠 남작님이 어디에 계신지는 금방 알 수 있어요. 어느 정도 가까워지면 맑고 차가운 기운이 강렬하게 느껴지거든요.”
“그게 정말이니?”
“남작님이 그러는데, 그건 제가 가진 용의 마력 때문이래요. 마법사 수련을 하면서 마력을 느끼는 감각이 많이 발달해서 동종의 마력을 예민하게 잡아내는 거라고요. 이건 제 생각지만요, 아마…… 아얏! 악! 아악!”
비니타는 인정사정없이 귀를 잡아당기는 손에 비명을 질렀다. 어찌나 아픈지 눈물이 찔끔 났지만, 그 손의 주인이 셰비언이라는 걸 알고 나자 고인 눈물을 닦을 엄두도 안 났다. 비니타는 후다닥 오드리의 품에서 빠져나와 셰비언의 앞에 섰다.
셰비언이 제법 자상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비니타. 이왕 이렇게 만난 거, 아직 해결하지 못한 질문 과제에 조언을 해주마. 워커가 어떤 주제로 과제를 내줬지?”
크게 혼날 줄 알고 잔뜩 움츠러들었던 비니타는 평소답지 않게 자애로운 셰비언의 태도에 어떤 사실을 깨달았다.
‘남작님과 레이디 오드리가 싸우면 레이디 오드리가 이기는구나.’
오드리가 옆에 없는 셰비언은 이렇게 너그럽지 않았다. 비니타는 이 드문 기회를 놓치지 않기로 마음먹고 묵혀둔 질문을 쏟아냈다.
오드리는 생각 외로 친밀해 보이는 셰비언과 비니타를 보며 입술을 앙다물었다. 거칠거칠한 사포가 마구 문질러 대는 것처럼 입안이 껄끄러웠다. 일부러 편하고 가벼운 옷을 입었는데 왜 갑자기 코르셋이라도 찬 것처럼 깊은 숨을 쉬기가 어려운지 알 수가 없었다.
“아, 정말이지 섭섭해 죽겠네. 제자도 아니면서 무슨 신경을 저리 쓴담.”
오드리는 화들짝 놀라 제 입술을 확인했다. 혹시 자신도 모르는 속마음이 말이 되어 나온 걸까 두려워하면서. 다행히 말의 주인은 따로 있었다. 아이샤가 오드리를 붙들고 하소연을 시작했다.
“아가씨! 저나 비니타나 제자가 아닌 건 똑같다고 해놓고, 셰비언님이 차별 대우를 얼마나 심하게 하는지 아세요? 저한테 마법을 가르칠 땐 세상 귀찮은 일이라는 듯 대충 가르쳐 주고 구멍은 알아서 메우라 하시더니, 비니타한테는 차근차근 가르쳐 주고 질문에도 꼬박꼬박 대답해 준다고요!”
“음, 그랬어요? 서운했겠네요.”
“애가 똘똘하고 잘 배우니까 흥이 나서 그러시는 건 알겠는데요, 이건 너무하잖아요. 저한테는 꼭 일 시켜먹으려고 가르치는 것처럼 굴면서……! 어떻게 가르치는 것마다 죄다 일거리야!”
아이샤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셰비언이 마법사협회가 아니라 왕궁마법사에게 옛 마법을 가르쳐 준다고 했을 때, 그때 알아봤어야 했다. 왕궁마법사는 협회와 달라서 부려먹기 좋다는 말은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옛 마법이라는 말에 정신이 나가서 덥석 미끼를 물어선 안 됐다.
“아가씨, 제가 요 근래 보석을 얼마나 많이 봤는지 아세요? 전엔 빨간 건 루비고 파란 건 사파이어다, 꼴랑 요 정도만 알던 제가 이젠 보석 이름과 등급을 줄줄 외는 건 물론이고 세공 유행까지 꿰고 있어요. 저는 마법사지 보석 판매상이 아닌데 이상한 직업병마저 생길 것 같다니까요. 아까도 아가씨를 뵙자마자 보석 종류부터 체크했어요. 목걸이와 귀걸이는 진주, 팔찌는 은 세공, 늘어뜨린 허리끈 끄트머리에 호박이 박혔고…….”
“요새 유행하는 그, 마법 보석? 레펙치오……라고 부르던가? 그거 말하는 거군요. 그게 왕궁마법사 제작이었어요?”
“……모르는 척하시는 거죠? 셰비언님이 낀 일인데 아가씨가 몰랐다는 게 말이 돼요?”
아이샤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오드리를 바라보았다. 노골적인 의심의 시선이었지만, 오드리는 웃으며 손을 저었다.
“용의 연인이라고 모든 걸 다 알 수는 없죠. 셰비언이 보석에 걸린 마법을 검수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아이샤 씨가 레펙치오 제작에 참여하고 있는 줄은 몰랐어요. 둥지에서 배운 것들이 많으니 당연히 마법 연구와 수련에 매달리고 있을 줄 알았죠.”
본래 장사꾼이란 거짓말을 잘하는 족속이었고, 오드리는 귀족 영애인 동시에 장사꾼이었다. 왕궁마법사가 레펙치오를 제작하는 걸 몰랐다는 확언은 하지 않아도 뉘앙스는 살짝 풍기는 일쯤이야 아무 것도 아니었다. 아이샤는 순식간에 속아 넘어갔다.
“그쵸? 당연히 연구와 수련을 하는 게 맞죠? 어휴, 그놈의 레펙치오 때문에 정작 내 연구는 가끔 책만 펴보는 수준이라니까요. 하나 만들고 나면 기운이 쭉 빠지는 게, 아주 힘들어 죽겠어요.”
“그래도 보수는 많이 받죠? 아이샤 씨는 돈 벌려고 왕궁마법사 하는 거라면서요.”
“그야 많이 받기야 하죠. 돈 벌려고 왕궁마법사 하는 것도 맞고……. 그래도 말이죠, 저도 마법산데 어떻게 향상심이 없겠어요? 이왕 가르칠 거면 덜렁 방법만 가르치지 말고 원리까지 같이 가르쳐 주면 뭐가 덧나는 것도 아니잖아요. 매번 새 마법 수식만 툭 던져 주고 이거 읽고 잘 해 봐라, 이러고 가버리신다고요. 설명도 조언도 없어요.”
아이샤가 셰비언에게 원망 어린 시선을 보냈다.
“우리도 설명 들을 줄 아는데 셰비언님은 비니타만 챙기시고…….”
“이제 막 마법사의 길을 걷기 시작한 어린애와 왕궁마법사를 같이 취급하라고? 저 녀석, 마법사 등록은 했어?”
마침 비니타의 질문에 대답을 끝낸 셰비언이 픽 코웃음을 쳤다. 당사자를 앞에 놓고 앞담을 한 셈이 된 아이샤는 움찔해서 어깨를 움츠렸다. 딱히 셰비언 들으라고 한 말은 아니라도 들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목소리가 크긴 했다.
하지만 반성은 잠깐이었고, 쌓인 불만이 터지는 쪽이 훨씬 더 빨랐다.
“문장을 띄웠으니 어엿한 마법사지만 아직 어리니까 등록은 좀 나중에 할 생각이에요. 그보다 전부터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그런데 좀 들어보세요. 셰비언님, 왕궁마법사나 초보마법사나 어차피 셰비언님한테는 개울의 자갈처럼 비슷해 보이는 거 알아요. 똑같이 취급하든 다르게 취급하든 그거 가지고 불만 가질 수 없다는 것도 알고요. 근데…….”
“근데 뭐가 문제야? 서론 질질 끌지 말고 결론부터 얘기해.”
“비니타 앞에서 자꾸 쟤들은 모르겠지만~ 이런 식의 말을 붙여가며 조언을 해주시니까 문제죠! 아무리 잘나봤자 아직 햇병아리인데, 우리에게 물어도 될 법한 것도 안 묻고 마냥 셰비언님 오시기만 기다리잖아요!”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오드리는 아이샤의 옷자락을 쥐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비니타를 손짓해 불렀다. 손가방에서 과일 맛 사탕을 꺼내 쥐어주고 어깨를 토닥토닥했다.
“불안해하지 않아도 된단다. 저 둘은 예전에도 저렇게 자주 싸웠어. 브란젤에 와서는 안 싸우는 거 같더니 기어이 오늘 싸우네. 길거리라는 것도 잊어버렸나 봐.”
“아이샤는 남작님을 되게 존경한다고 그랬는데…….”
“나도 물어본 적 있는데, 존경한다고 해서 화가 안 나는 건 아니라더라. 화가 가라앉고 나면 아이샤가 창피해할 테니까 지금 저러고 있는 건 모른 체하고 말하지 말렴. 사탕 더 줄까?”
비니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드리는 비니타의 양손에 사탕을 하나씩 쥐어주고 사탕을 물어 불룩 튀어나온 볼을 톡톡 두드렸다. 어린아이 특유의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피부가 기분 좋았다.
“그래도 아이샤가 허튼소리 할 사람은 아닌데……. 셰비언이 네게 많이 잘해주나 보다.”
“네. 정말 잘해주세요.”
“그래? 어느 정도인데?”
“음……. 가끔은 아빠 같아요. 어떠냐면요…….”
오드리는 비니타의 대답을 통해 낯선 셰비언을 만났다.
연구실에 들러 워커에게 수업 내용 조언을 해주는 셰비언, 미처 못 하고 쌓인 숙제를 도와주고 자료를 구해다주는 셰비언, 식사를 챙겨주는 셰비언, 잘했다고 칭찬하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셰비언…….
비니타의 일방적인 시선이라는 걸 감안하더라도 굉장히 친절한 태도였다. 브란젤을 비워야 하는 일정이 생기면 꼬박꼬박 말해주고, 어쩌다 숙제를 봐주기로 해놓고 약속을 지키지 못한 날에는 공간에 불러들여서라도 봐준다는 건 놀랍기까지 했다.
“남작님의 공간은 진짜 신기하고 재밌는 곳이에요. 계절도 마음대로 바꿀 수 있고, 장소도 얼마든지 바꿀 수 있어요. 동물도 잔뜩 만들 수 있고요. 전 할 수만 있으면 매일 거기에 가고 싶은데, 남작님이 그건 안 된대요. 아직 부족할 때 남의 공간을 너무 자주 경험하면 마법사로 성장하는 데 방해가 될 거래요.”
“……그래? 아쉽겠네.”
“네. 남작님께는 말한 적 없지만 많이 아쉬워요……. 그렇지만 계속 수련하면 언젠가는 저도 저만의 공간을 가질 수 있게 될 거라고 했으니까, 그때까지 열심히 할 거예요. 그래서 제 공간에 백조를 잔뜩 만들 거예요! 호수 전체를 하얗게 채워야지!”
비니타가 양손에 사탕을 꼭 쥐고서 결의를 다지는 모습은 무척 귀여웠다. 하지만 오드리는 가면 같은 웃음을 짓는 일 이상은 하지 못했다.
‘공간을 열어줬다고……?’
봄, 여름, 가을이 함께 머무르는 공원에서 꿀 같은 휴식을 취했던 날이 떠올랐다. 유유히 호수를 떠다니던 백조들의 날갯짓 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하고, 바닥에 주저앉아 커다란 고양이처럼 의자 팔걸이에 턱을 올려놓고 자신을 바라보던 웃는 얼굴이 눈에 선했다.
셰비언에게 비니타를 맡긴 건 오드리 자신이고 셰비언이 그의 공간에 누굴 초대하든 그건 그의 자유인데도, 폐가 오그라드는 것처럼 아프고 숨이 막혔다. 주먹으로 가슴팍을 꾹 눌러보았지만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레이디? 어디 아프세요?”
“……괜찮아, 아무것도 아니야. 난 정말 괜찮단다.”
고집스레 괜찮다고 말하면서도 오드리는 좀처럼 일어서질 못했다. 비니타는 얼른 오드리를 부축해 일으켜 세우려 했지만 영 소용이 없었다. 당황해서 발을 동동 구르다 셰비언에게 도움을 청하려 하는데, 오드리가 그런 비니타를 말렸다.
“쉿……. 말하지 마.”
“왜요? 빨리 의사한테 가봐야 해요. 네?”
“별거 아니고, 조금만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벌써 아까보다 훨씬 나아졌는데 뭐. 비니타, 이리 오렴. 저 둘이 무슨 말을 하며 싸우는지 듣자. 재밌을 거야.”
비니타는 불안해하면서도 오드리의 말을 거역하지 못하고 그녀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어깨를 감싸 안는 팔이 너무 가늘게만 느껴졌다.
‘멜브란트 여자들은 하나같이 팔도 몸도 너무 가늘어서 뼈다귀 같아. 이런 몸으로 어떻게 걸어 다니지? 우리 엄마랑 이모들은 안 그랬는데.’
비니타는 몰랐다. 오드리가 귀족 영애 중에서는 통통한 편이라는 것도, 그 가늘게 느껴지는 팔로 웬만한 성인 남성 못지않은 괴력을 발휘한다는 것도. 천 가지 약초가 나는 땅에서 나고 자란 소녀는 오랜만에 고향 생각을 했다.
“글쎄, 그 녀석은 아이샤 네가 가르칠 수 있는 그릇이 아니라니까.”
“언제는 나더러 제자 삼으라더니? 멋대로 주고 멋대로 뺏어가고, 아주 가지가지 하시네요!”
셰비언과 아이샤는 아직도 말싸움 중이었다. 아이샤의 열정이 셰비언에게 옮겨 붙기라도 했는지, 둘 다 얼굴이 붉었다.
“그때는 이렇게까지 빨리 배울 줄 몰랐지. 너한테 그냥 뒀으면 일 년도 못 돼 다 배웠다고 이젠 뭐 하냐고 칭얼거릴걸? 워커가 짠 계획이 하도 허술해서 조금 참견했을 뿐인데 순식간에 실력이 느는 걸 어쩌란 거야.”
“익……! 죄송하네요, 수준 낮은 인간 마법사라서! 천재를 안겨줘도 감당을 못 하고!”
“천재인지 아닌지는 아직 모른다니까 또 그러네. 용의 특성이 강하게 드러나는 마법 재능이라고 했잖아, 일반적인 마법사와는 아예 시야 자체가 다르다고. 이론과 수식보다 본능이 앞서서 마법을 쓰는 유형인데 그걸 네가 어떻게 감당해? 다른 왕궁마법사들도 똑같아! 워커 정도나 되면 모를까 어림도 없다니까!”
“아, 셰비언님이 자꾸 그런 식으로 말하니까 애가 왕궁마법사들을 무시하잖아요! 물론 왕궁마법사들의 수준은 셰비언님보다 모자라요. 몇몇은 워커보다도 훨씬 모자란 거 저도 알아요! 그나마 낫다는 저도 못 따라가는데 그 사람들은 어련할까! 그래도 적어도 애 앞에서만은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요!”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는데 그게 어떻게 무시가 돼? 그럼 새를 보고 돼지라고 할까? 눈에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하는 쪽이 교육에 좋다는 거야?”
“정말이지 내가 기가 막혀서……! 그건 예의와 태도에 관련된 문제라고요. 사람이 살면서 어떻게 마법만 배우고 마법만 쓰며 살아요? 혼자 살 것도 아닌데 예의도 갖춰야 하고 상식도 배워야 하고 교양도 있어야 하고……. 아무튼 많잖아요. 셰비언님은 그게 모자라서 나한테 수업 들었던 거 다 까먹었어요? 와, 용은 기억력 좋다던 거 다 거짓말이야!”
아이샤가 셰비언의 둥지에서 있었던 일들을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셰비언은 또 시작이야 따위의 표정을 짓고 삐딱하게 서서 귀를 후비적거렸다.
오드리와 비니타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킥킥 웃었다.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구경이 불구경 싸움구경이라더니, 그 말이 왜 나왔는지 알 법한 광경이었다.
“레이디, 이제 괜찮아요?”
“괜찮아, 멀쩡해. 그런데 이상하구나. 이렇게 소리를 질러가며 싸우는데 왜 아무도 멈춰 서지 않지? 돌아보는 사람도 없어.”
오드리는 주변을 둘러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거리에 넘쳐나는 수많은 사람 중 누구도 일부러 걸음을 멈추거나 귀를 기울이는 기색이 없었다. 셰비언과 아이샤를 배려해 못 본 척, 못 들은 척 하는 거라기엔 지나치게 자연스러웠다.
“그야 남작님이 마법을 썼으니까 그렇죠. 다른 사람들에겐 우리가 보이지도, 말소리가 들리지도 않을 거예요. 길을 막고 멈춰선 사람이 있다는 것도 모르면서 빙 돌아갈걸요. 보세요, 사람들이 피해 가는 거.”
“어머……. 신기해라. 어떻게 알았니? 난 전혀 몰랐는데.”
“레이디, 제가 어설프긴 해도 마법사인걸요. 아까 제가 레이디를 뵙고 인사드릴 때 남작님이 마법막 치시는 걸 느꼈어요. 음……. 사실 조금은 보이기도 하고요. 저랑 아이샤 말고도 이걸 알아볼 만한 사람은 워커 스승님 정도밖에 없을걸요.”
세상에 일정 수준 이상의 실력과 재능을 갖춘 마법사가 어디 그들뿐이겠느냐마는, 비니타는 우쭐거리며 턱을 치켜들었다.
오드리는 소녀의 어설픈 자부심을 깨뜨리는 대신 그냥 마주 웃어주고 물었다.
“비니타, 정말이지 네 앞날이 아주 기대되는구나. 그럼 내 궁금증을 하나만 더 풀어주겠니?”
“네, 말씀하세요!”
“아까 하다 만 말을 마저 해주렴. 아마…… 다음에 하려던 말이 뭐였는지 궁금해.”
비니타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데굴데굴 눈을 굴렸다. 셰비언이 정말로 아이샤와의 말다툼에 집중하고 있는지 계속 눈치를 살피다가 오드리의 재촉을 받고서야 입을 뗐다.
“제가 남작님을 찾아낼 수 있는 것처럼, 남작님도 절 찾아낼 수 있는 것 같아요. 아니, 확실히 찾아낼 수 있어요. 분명해요.”
못 미더워하는 오드리의 시선을 느꼈는지, 비니타가 말을 덧붙였다.
“남작님은 셰비언 절벽의 지배자이며 마법의 주인이시잖아요. 어설프고 미숙한 제가 할 수 있는 일인데 그분이 못 할 리가 없죠. 만약 레이디에게도 마법사의 재능이 있었다면 두 분도 서로를 찾아낼 수 있었을 거예요. ……저처럼요.”
오드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던 말이건만, 그걸 진짜 귀로 들으니 충격이 대단했다. 말이 못이 되어 가슴에 틀어박힌 것만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심장이 뛸 때마다 이렇게 아프다는 게 말이 안 됐다.
“레이디, 정말 괜찮으신 거 맞아요?”
비니타가 불쑥 얼굴을 들이밀고는 오드리의 안색을 요리조리 살폈다. 오드리는 서둘러 표정을 바꿨지만 짓눌렸던 입술은 여전히 붉었다.
“괜찮아.”
“하지만…….”
“비니타, 너무 가까운데 조금만 떨어져 줄래?”
만약 비니타에게 꼬리가 있었다면, 축 처져 바닥에 닿았을 것이다. 오드리는 쓴웃음을 지으며 비니타의 뺨을 만지작거렸다.
“어쩜 이렇게 귀여울까.”
오드리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비니타가 마음에 들었다.
길거리에서 몸을 지키기 위해 일부러 더러운 꼴을 하고 다닌 총명함, 까마득한 신분차이에 무서워하면서도 하고 싶은 말은 전부 해 버리는 대담함, 어린 나이에 부모를 한꺼번에 잃고도 그늘 없이 미소 짓는 긍정적인 마음가짐은 물론이고 또래 아이들 사이에서 대장 노릇을 한다는 것조차 좋아 보였다.
그런데 비니타의 얼굴을 만지작대는 이 순간, 오드리의 눈은 비니타의 단점만 보았다.
여자아이치고는 상당히 큰 키, 살짝 구부정한 자세, 자신도 모르게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나랍식 인사법과 제스처, 톡톡 쏘는 듯한 나랍 억양이 섞인 말투……. 무엇보다, 셰비언과 꼭 닮은 눈동자 색이 싫었다. 세상에 둘은 없으리라 여겼던 색을 다른 이가 갖고 있다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눈에 마법을 담고 사람들의 호의를 얻어냈다는 게 새삼 불쾌했다.
‘이 눈……. 방부처리와 보존처리를 해서 보관하면 얼마나 갈까?’
뺨을 만지작대던 손이 점점 위로 올라갔다. 서늘한 손이 눈썹을 덧그리고 눈두덩을 더듬고 속눈썹을 쓰다듬는데도 비니타는 별 경계심이 없었다. 타인이 마음껏 만지게 내버려 두기엔 몹시 예민한 부분인데도 마냥 좋다는 듯 생글생글 웃을 뿐이었다.
“레이디, 손이 정말 부드러워요. 봄에 피어난 꽃잎이 얼굴에 닿은 것 같아요.”
순수한 신뢰와 호감이 담긴 웃음이 오드리에게 쏟아졌다. 비니타는 오드리의 손길을 두고 봄꽃 같다고 하지만, 비니타의 미소야말로 봄꽃 그 자체였다. 오드리는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놀라 손을 떼어냈다.
‘내가 미쳤나? 내가 왜 이러지?’
순간이나마 비니타의 눈을 파내서 보관함에 넣어두고 싶다고 생각했다. 더러운 부분은 호화로운 비단 장식으로 가리고 저 예쁜 색만 보이도록 전시하면 좋을 것 같다고 말이다. 이런 끔찍한 생각을 너무 자연스럽게 했다는 게 놀라워 손이 다 떨렸다.
그러나 오드리의 충격을 알 리 없는 비니타는 그저 오드리 걱정뿐이었다. 오드리의 서늘한 손에 호호 입김을 불어가며 손바닥 이곳저곳을 꾹꾹 눌렀다.
“레이디는 본래 손이 차가운 편이시라는 거 알지만……. 그래도 너무 차가워요. 손이 이렇게 차면 겨울에 힘들지 않으세요? 만탈락의 겨울은 따뜻하니까 그나마 좀 나은가요?”
“……괜찮아.”
“에이, 아까부터 괜찮다는 말만 하신다. 우리 엄마가 그랬는데, 괜찮다는 말도 습관이라 나중엔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하게 된댔어요. 그게 반복되면 가까운 사람도 말을 믿어주지 않게 되니 조심하라고요.”
“정말 괜찮으니까 괜찮다고 하는 거야.”
오드리는 약간 매몰차 보일 정도로 단호하게 손을 빼냈다. 비니타가 텅 빈 제 손을 아쉬워했지만 달래줄 여유 같은 건 조금도 없었다. 눈 부분이 뻥 뚫린 비니타의 얼굴을 상상하고 즐거워했던 조금 전의 자신이 소름끼쳐 몸이 떨렸다.
“아가씨, 왜 이래요? 갑자기 몸이 안 좋아졌어요?”
셰비언이 오드리를 일으켜 세우고 걱정을 쏟아냈다. 의사도 아니면서 이마의 열을 재고 눈을 살피는 등 아주 꼼꼼하기도 했다. 아이샤와 말다툼하는 것에 완전히 정신이 팔린 줄 알았는데, 실은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마력 흐름은 괜찮은데 몸이 너무 차가워요. 쯧, 왜 이러는지를 모르겠네. 이럴 줄 알았으면 케이프 코트라도 걸치고 나올 걸 그랬어요. 다알리아 머리 장식을 하고 왔으니까 괜찮을 줄 알았는데…….”
“코트는 무슨. 난 정말 괜찮으니까 호들갑 떨지 마.”
“레이디는 아까부터 괜찮다는 말만 하세요. 제 눈엔 전혀 아닌데! 역시 너무 말라서 몸에 힘이 없는 거 아닐까요? 남작님, 나랍인 의사에게 가서 보약을 지어달라고 하세요. 레이디는 살을 좀 붙여야 돼요. 레이디 팔 가느다란 것 좀 보세요, 뼈랑 가죽밖에 없어요!”
오드리는 기가 막힌 심정으로 비니타의 말을 들었다. 만탈락이라면 모를까, 브란젤에 와서는 살 좀 빼라는 소리를 사방에서 들었는데 뼈와 가죽밖에 없다니?
하지만 비니타는 누가 봐도 진심이었다. 긴 옷소매를 둥둥 걷고 제 팔에 붙은 근육을 자랑하듯 내보이며 근육의 필요성을 늘어놓았다.
“적어도 팔에 근육이 이 정도, 아니 이 정도는 붙어 있어야 힘을 쓰죠. 지금 레이디는 책 몇 권 나르다가 쓰러지실 것 같아요. 그 가느다란 팔로 큰 흑마를 대체 어떻게 다루시는 거예요? 뭔가 특별한 비법이라도 있나요? 아니면 그 말이 엄청나게 똑똑해서…… 악!”
“비니타, 내가 말조심하라고 했지.”
아이샤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비니타의 정수리에 아주 아픈 꿀밤을 먹였다. 비니타가 머리를 감싸 안고 끙끙댔다.
“아가씨, 비니타가 아직 멜브란트의 문화에 익숙지 않아서 말을 실수했으니 용서해 주세요. 저도 최근에 알았는데, 나랍에서는 남자여자 가릴 것 없이 탄탄하게 근육 잡힌 몸을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몸으로 꼽는대요.”
오드리는 고개를 푹 떨군 비니타를 내려다보았다. 문장을 띄울 수 있다고는 하나 아직은 등록도 하지 않은 예비 마법사인 지금이라면, 감히 귀족에게 무례하게 군 죄를 물어 태형을 내릴 수 있었다. 비록 아이에게 너그럽지 못하다는 비난을 듣고 기껏 올려놓은 평판이 다시 떨어지겠지만 말이다.
솔직히 말해서 비난과 평판 하락은 두렵지 않았다. 그러나 비니타의 태도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은데 새삼 무례하다 말하며 벌을 내리는 건 공정한 태도가 아니었고, 벌을 내린다고 해서 속이 시원해질 것 같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미움이 삽시간에 솟아난 이유가 뭔지도 모르면서 분풀이부터 하는 건 취향이 아니었다.
‘정신 차리자, 오드리. 이성적으로 생각해.’
크게 심호흡하며 비니타에게 벌을 주면 안 되는 이유들을 떠올렸다. 장래가 유망한 어린 마법사고, 워커와 사하스바티의 제자이고, 편하게 말하도록 여지를 준 건 자신이고……. 차근차근 이유를 댈 때마다 머릿속이 차가워지면서 가슴의 통증도 줄어들어 견딜 만한 수준이 되었다.
“……용서하죠. 여자도 사냥을 하고 검을 쓰는 곳에서 자랐으니 마른 몸보다는 근육이 있는 몸이 좋아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을 테니까요. 비니타, 앞으론 이런 식으로 굴지 말렴.”
“네……. 잘못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네가 잘못 아는 게 있는데, 난 이 팔로도 충분히 힘이 세.”
오드리가 손가방에서 사탕을 하나 꺼냈다. 다른 사탕보다 크기는 작아도 단단하기로는 두 배는 족히 되는 사탕이었다. 오드리는 그걸 양손으로 잡고 꾹 누르는 것만으로 두 조각을 냈다. 아이샤와 비니타 모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굳이 쓸 일이 없어서 안 쓰는 거지.”
“와……. 레이디, 그럼 혹시 팔씨름이라고 아시…… 읍!”
“아가씨, 너그러운 용서 감사해요. 저희는 이만 가볼게요. 셰비언님, 당분간 비니타에게 예절교육을 혹독하게 시켜야겠으니까 그런 줄 알고 간섭하지 마세요. 이대로 뒀다간 언젠가 속 좁은 좀생이에게 밉보여 큰일 치를 게 뻔해요.”
아이샤에게 입을 막혀 아무 말도 못하는 비니타가 셰비언에게 간절한 시선을 보냈다. 셰비언은 야멸차게 외면했다.
“마음대로 해. 내가 쟤 스승은 아니지만, 워커에게 물어도 대답은 비슷할 테니.”
“감사합…….”
“하지만 예절 가르친답시고 준비에 소홀하면 안 돼. 시간이 없으면 쥐어짜서라도 만들어.”
아이샤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어쩔 수 없었다.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대뜸 예정에도 없던 큰일을 지시하는 셰비언이 고와 보이면 의사를 찾아가야 할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타우레드 영지에 파견 나가는 게 아니었어요. 내 인생은 거기서부터 꼬인 거예요. 어휴, 내가 왜 그랬을까!”
인어의 마력, 마법 실력 향상, 옛 마법, 거액의 돈……. 하나같이 달콤한 보상이었지만 이젠 하라면 맹세도 할 수 있었다. 다시 그날로 돌아간다면 타우레드 영지로 가는 파견대 명단에 이름을 쓰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
“아무튼 셰비언님이 지시하셨으니 따라야겠죠. 달튼 제도라니, 당분간 엄청나게 바쁘겠네요. 지금도 바쁘지만 이제 한 네 배쯤 바빠지려나……. 비니타, 얌전히 따라와.”
“어, 어딜 가는데요?”
“어딜 가긴? 마법사협회에 가야지. 소개시켜 줄 사람이 많다고 했잖아? 마법사는 마법만 잘하면 된다는 건 용에게나 통하는 기준이야. 난 마법사 선배로서 후배에게 마법사 사회를 제대로 가르칠 의무가 있어!”
“네에? 워커 스승님도 협회 같은 건 신경 안 써도 된다 그랬는데요? 거긴 앞뒤 꽉 막힌 사람들만 있는 데다 자료도 다 낡아빠져서 배울 게 하나도 없다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워커가 괴짜에 외톨이인 거지. 다른 건 다 배워도 그런 건 배우는 거 아니야.”
비니타의 변명 같은 항의는 변명으로 끝났고, 아이샤는 비니타를 질질 끌고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셰비언과 오드리는 드디어 단둘이 남았다.
“마지막까지 소란스럽네요.”
셰비언이 가볍게 팔을 휘저어 마법막을 거뒀다. 오드리는 그의 동작이 아까 협회에서 했던 것과 똑같다는 건 알아볼 수 있었지만 마력의 움직임은 느끼지 못했다. 당연한 사실에 문득 짜증이 났고, 짜증이 났다는 사실에 또 짜증이 났다.
“한바탕 소나기가 지나간 기분이에요.”
“그러게. 온몸이 비에 젖은 것처럼 기분이 눅눅하다는 점에서 아주 비슷해. 적절한 비유였어.”
방해꾼들이 사라졌는데 오드리의 목소리는 싸늘한 겨울바람이었다. 아까 단둘이 있을 때 웃음이 넘쳐흐르던 것과는 아주 달랐다.
‘뭔가 잘못된 거 같은데…….’
셰비언은 눈치라곤 없는 척 슬쩍 오드리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다행히 오드리는 그의 손을 쳐 내지 않았다.
“아가씨, 미안해요. 아이샤가 무슨 말을 하든 그냥 무시했어야 하는데 같이 흥분해 버렸네요. 겨우 단둘이 되었는데 시간이 한참 늦어버려서 어떡하죠? 배를 타기엔 좀 더울 것 같은데, 바로 카페 로열로 갈까요?”
“아니, 배 타러 가자. 나한테는 다알리아 머리핀이 있고 그대에게 날씨는 별 의미가 없는데, 해가 머리 꼭대기에 있든 뒤에 있든 무슨 상관이겠어. 그래도 혹시 그대가 바로 식사를 해야겠으면 카페 로열로 가도 돼.”
“아가씨가 원하는 쪽이 제가 원하는 쪽이죠. 하지만 그냥 가면 배고플 테니까 군것질거리를 좀 사서 가요.”
셰비언의 어조가 어찌나 부드러운지, 오드리는 민망함에 입을 다물었다. 괜히 짜증을 부렸던 게 부끄러워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대관식과 수확제를 앞둔 중앙공원의 호숫가는 호젓하고 한가한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산책로 주변엔 벌써 좌판을 펼쳐 놓은 보따리상으로 와글와글했고, 나무 그늘마다 소풍을 나온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공원 빈터는 곡예단 천막이 빽빽하게 들어차 들어갈 엄두도 안 나는 미로가 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악기를 연습하는 소리로 시끄러웠다.
그렇게 사람이 많은데도 배는 남아 있었다. 모처럼 구름에서 벗어난 해가 마지막 여름을 불태우려는 듯 이글대는 시간이었으니 당연했다. 오드리는 챙 넓은 모자를 쓰고 오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고, 셰비언은 비장한 각오로 노를 잡았다.
셰비언은 노 젓는 일에 온 정성을 쏟았다. 쉴 새 없이 흔들리는 수면은 초보 노잡이에겐 너무 큰 난관이었다. 웬만하면 배 안에 물을 튀기고 싶지 않은데, 배가 휘청거릴 때마다 한 컵은 족히 되는 물이 안으로 들어오는 듯했다.
오드리는 배에 오른 후 내내 뱃전에 턱을 괴고 호수를 보고 있었다. 백조들이 난리를 치는 덕분에 호수의 수면은 마구 출렁거리며 햇빛에 반짝거렸고, 빠진 깃털은 민들레 홀씨처럼 사방팔방 바람을 타고 날아다녔다. 모처럼 구름 없이 파란 하늘에 흰 깃털이 점을 찍었다.
좋은 경치에 시선을 고정한 상태이면서도 오드리의 신경은 온통 다른 쪽에 가 있었다. 아까부터 명치를 꾹 누르던 짜증이 이젠 가슴까지 눌러대는 통에 숨 쉬기가 힘들었다. 왜 이러는 건지 뻔히 알고 있고 풀어줄 이가 누구인지도 아는데 도대체 말이 안 나왔다.
‘내가 이렇게 겁쟁이인 줄은 몰랐는데…….’
괴물에게 쫓겨 빈 가게에 숨었을 때도, 시계탑을 기어 올라오는 괴물에게 세제를 뿌릴 때도, 작은 방에 갇혀 괴물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으며 밤을 견딜 때도, 마력을 뿌리며 브란젤을 휘젓고 달릴 때도 이런 기분은 아니었다.
입 한 번 떼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일 줄이야.
그게 뭐든 마음으로 결정한 일을 행동으로 옮길 때 거침이 없었는데, 셰비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는데, 고작 원하지 않는 답이 나올까 봐 이렇게 두려워하는 자신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자신의 것이라는 확신이 있는데도 이런다는 게 말이다.
‘계속 이러고 있을 순 없어.’
이런 마음으로는 어떤 일도 할 수 없다. 미뤄봤자 사라지거나 작아지기는커녕 점점 덩치를 불려가며 자신을 짓누를 게 분명했다. 하룻밤은 고사하고 반나절도 안 됐는데 벌써부터 이 꼴인 걸 보면 내일은 어떨지, 모레는 또 어떨지 보지 않아도 훤했다.
오드리는 굳게 결심하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셰비언과 마주보고 앉은 형태가 되자 심장이 마구 뛰고 물에 빠진 것처럼 주변의 소리가 먹먹해졌다.
“셰비언, 있잖아…….”
“아가씨!”
꽤-액! 백조 한 마리가 배 안으로 뛰어들었다. 백조는 제 발로 뛰어들어 놓고 저가 더 놀라 커다란 날개를 연신 퍼덕거렸다. 오드리는 비명도 못 지르고 웅크리고 있다가, 셰비언이 백조의 목을 잡아 밖으로 던져 버리고 나서야 간신히 얼굴을 가렸던 팔을 내렸다.
“아가씨, 괜찮아요?”
오드리는 셰비언의 질문에 대답해 줄 정신도 없었다. 어찌나 놀랐는지 심장이 아직도 두근두근했다. 하지만 소맷자락이 젖은 상의 이곳저곳에 백조 깃털을 붙이곤 놀란 표정을 한 셰비언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셰비언, 깃털 달린 옷을 입고 왔었네. 미처 몰랐어.”
“네에? 깃털은 무슨 깃……. 아이고, 정말이네. 하지만 아가씨 옷에도 깃털이 있는데요?”
“나? 나는……. 이런.”
오드리는 그제야 제 차림도 셰비언 못지않게 엉망이라는 걸 깨달았다. 배에 고인 물을 빨아들인 치맛자락은 정강이 근처까지 젖어 있었고, 피부에 달라붙은 흰 깃털은 가무잡잡한 피부색 때문에 더 눈에 잘 띄었다.
“엉망이네.”
“그러게요. 아가씨나 저나 아주 엉망이에요.”
벼르던 데이트를 위해 고르고 골라 입은 옷이 엉망이 됐으니 가슴 아파야 할 일인데, 어쩐지 웃음부터 났다. 평소엔 근처에 얼씬도 안 하던 짐승이 갑자기 배에 뛰어들어 옷을 더럽힐 거라곤 상상도 해 본 적 없었다.
오드리와 셰비언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키득거리고 웃기 시작했다. 이마에 붙은 깃털을 떼며 웃고 어깨에 붙은 솜털을 떼며 웃고……. 아까부터 묘하게 굳어 있던 분위기가 부드럽게 풀렸다.
오드리는 아주 자연스럽기를, 어색해 보이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입을 뗐다.
“아까 비니타에게 듣고 궁금한 게 생겼는데……. 용의 마력을 타고 난 마법사는 서로의 마력을 느낄 수 있어?”
비니타는 비밀이라고 했지만 지켜달란 말은 안 했다. 그러니 거리낄 것도 없는데 셰비언의 대답을 기다리는 짧은 순간이 어찌나 긴장되는지, 오드리는 표정 관리를 잘할 자신이 없어 고개를 푹 숙인 채 치맛자락만 쥐어짰다. 미지근한 물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찾으려고 마음먹으면 못 찾을 건 없죠. 용이 다른 종족의 모습을 하고도 서로를 알아보는 것과 비슷한 원리거든요.”
“오……. 신기하네. 예전에 다나 때도 그랬어?”
“네. 별로 찾고 싶지 않아도 알 수밖에 없었죠. 다나는 화룡의 마력을 타고났으면서 마력 갈무리를 잘 못해서 냄새가 났거든요. 유황 냄새가 아주 지독했어요.”
셰비언은 코에 진동하던 유황 냄새를 떠올리고 미간을 좁혔다. 비쩍 말라 음침하게 후드를 뒤집어쓰고 다니던 다나는 금방 쓰러질 듯한 얼굴보다 짙은 유황 냄새가 더 인상적이었다.
샤를레아에게 제대로 된 마력 갈무리를 배운 후에는 냄새를 거의 흘리지 않게 되었지만, 셰비언은 그녀가 남기고 간 냄새를 어쩌다 맡게 될 때마다 표정 관리하기가 힘들었다. 하필 그녀가 브란젤 곳곳을 돌아다니던 왕궁마법사라서 더더욱.
“그래? 내가 다나를 만나본 적이 없어서 영 모르겠네. 하긴, 마법사가 아니니 만나봤자 마력 냄새 따위를 맡을 수도 없었겠지만……. 비니타는 어때?”
“비니타는 다나와는 비교도 안 되게 깔끔하죠. 걔는 빙룡 계열이라 냄새가 거의 안 나요. 남국 출신이라 그런지 빙룡치고는 좀 뜨거운 감이 있긴 하지만 뭐, 그것도 개성이니까요.”
“그대는 빙룡이라고 했었지? 한데 비니타가 빙룡 계열이라니……. 동족을 보는 기분이겠어.”
오드리는 치맛자락을 쥐어짜던 손을 풀었다. 아침에 나올 때만 해도 살랑살랑하던 천 자락이 주름으로 꼬깃꼬깃했다.
“음……. 글쎄요? 착각하기엔 너무 미약한 마력이라서요. 용의 마력이 가지는 존재감은 그리 약하지 않아요. 아무리 색이 비슷해 보여도 비눗물과 우유는 엄연히 다르고 착각하기 힘들잖아요. 용의 마력도 마찬가지예요. 그래도…… 가끔 그런 기분이 들 때도 있긴 해요. 정말 가끔이지만.”
천을 아무리 팽팽하게 당겨도 주름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대로 말라 버리면 치마에 보기 싫은 구김이 생길 게 분명했다. 오드리의 미간에도 깊은 주름이 잡혔다.
그녀는 치마의 젖은 부분을 주섬주섬 말아 대충 안쪽으로 밀어 넣어 숨겼다. 덕분에 앉은 모습이 어정쩡하고 보기 싫어졌지만 별로 거기까지 생각하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비니타에게 잘해주는 건가? 그대가 공간까지 열어가며 수업을 해줬다니 깜짝 놀랐어.”
“그야 당연하죠. 아가씨가 직접 부탁한 마법사잖아요? 워커에게 온전히 맡기기엔 불안하다고요.”
셰비언은 손을 뻗어 젖은 치맛자락을 밖으로 빼내 펼쳤다. 오드리가 깜짝 놀라 손목을 잡고 말렸지만 용의 힘에는 어림도 없었다. 주름진 옷자락이 한낮의 햇살 아래 활짝 드러났다.
“셰비언, 당장 그 손 놓지 못해?”
“이대로 마르면 옷이 엉망이 될 거예요. 물론 아가씨는 주름진 드레스라도 신경 쓰지 않고 입을 분이라는 걸 알지만, 내가 속상해서 안 돼요. 이른 아침부터 시간과 정성을 들인 차림인데 내 잘못으로 망치면 너무 미안하단 말이에요.”
셰비언이 젖은 치맛자락을 가볍게 쓸었다. 그의 손이 지나가는 자리를 따라 물기가 싹 사라지고 주름도 쫙 펴졌다. 물이 한가득 고여 있던 배 바닥도 처음처럼 멀쩡해졌다.
“옛 마법은 정말 필요한 순간이 아니면 쓰지 않겠다고 아가씨와 약속했었죠……. 적당히 어울려 주는 것도 지혜라고요. 하지만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 아니면 언제겠어요?”
오드리는 아침과 다를 바 없이 멀쩡해진 옷자락을 쥐고 셰비언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을 볼 때마다 언제나 얼어붙은 강 같다고 생각했건만, 지금은 한 조각의 얼음도 보이지 않았다.
“아가씨가 싫다고 하시면 비니타에게서 바로 손 뗄게요.”
“…….”
“비니타를 가르치면서 확실히 알았어요. 아가씨가 아니면 제겐 용의 마력이니 뭐니 하는 것도 별 의미가 없어요.”
용이 사라지고 반쪽 마법만 남은 세상에서 샤를레아는 화룡의 마력을 타고난 다나에게 집착했다. 죽은 동족이 살아 돌아온 듯 아끼며 뭐라도 더 주지 못해 안달했다.
하지만 셰비언은 빙룡의 마력을 타고난 비니타를 가르치면서 어떤 특별함도 느끼지 못했다. 그에게 비니타는 운 좋게 용의 마력과 마법사의 재능을 한 번에 안고 태어난 인간 마법사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되지 못했다. 그런데도 비니타를 돌본 건 오로지 오드리의 바람이 비니타에게 닿아 있기 때문이었다.
셰비언은 말을 잃은 듯 조용한 오드리의 뺨을 어루만졌다. 보송보송한 솜털과 보드라운 피부에서 전해지는 체온을 느낀 순간 가슴 안쪽이 따뜻해졌다. 주변의 풍경이 흐릿하게 무너지는 가운데 오드리만이 또렷했다.
“정말 이상하죠. 내 눈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은데, 감정이 달라진 것만으로 어떻게 이렇게 다를 수가 있을까요.”
“…….”
“나는 분명 마법의 주인으로서 내 종족의 이익을 가장 먼저 생각하도록 길러졌는데……. 아가씨를 보고 있으면 그런 건 다 잊어버려요. 잊고 말아요.”
셰비언이 오드리의 허리에 손을 감고 그녀를 끌어당겼다. 셰비언의 어깨를 미는 오드리의 손길엔 힘이 없었다.
“내가 블록 장난감이라면 좋겠어요. 그럼 아가씨를 만나면서 내가 얼마나 바뀌었는지 눈으로 보여줄 수 있을 텐데.”
형식적으로나마 지키고 있던 거리가 사라졌다. 오드리는 자연스럽게 셰비언의 품에 폭 파묻힌 자세가 됐다. 그에게서 전해지는 체온에 자꾸 가슴이 뛰었다. 그만큼 가슴의 따끔거림도 심해졌지만 도저히 밀어낼 엄두가 안 났다.
“……안 봐도 알아.”
“정말요? 그럼 내 세계가 아가씨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는 것도, 때로는 가치판단의 기준마저 흔들린다는 것도 알겠네요?”
“…….”
“가끔은 이런 고민도 해 봤어요. 이렇게까지 날 휘두르는 감정은 대체 뭘까, 사랑이라는 게 그렇게 대단한가, 대체 언제까지 사랑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을까, 언젠가 이 시간의 내 결정을 후회하는 날이 오는 건 아닐까, 어쩌면…….”
“…….”
“어쩌면…… 내가 쓸모 있는 마법사라서, 나만이 아가씨의 마력균형을 조정해 줄 수 있어서, 내가 아가씨의 미래 설계에 유용한 패라서, 이런 도시 하나쯤 하룻밤에 때려 부술 수 있는 용이라서……. 그래서 아가씨가 내 억지를 받아주고 있는 건 아닐까.”
“날 알면서 왜 그런 생각을 해?”
오드리가 팔을 꼼지락대자 끌어안는 힘이 더 강해졌다.
“우리는 운명이라고, 말은 거창하게 했지만……. 때때로 겁이 났어요. 내가 아가씨를 따라가지 못하면 그대로 버려질 것만 같았거든요. 그동안의 정이라며 딱 한 번 돌아보곤 성큼성큼 걸어서 사라져 버릴 것 같았죠.”
“언제는 같이 있으면 안 될 것 같으니 나 혼자 돌아가라고 했으면서…….”
셰비언이 소리 없이 웃었다. 그의 표정을 볼 수 없는 오드리는 팔을 뻗어 셰비언의 등에 둘렀다. 널따란 등을 끌어안고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저 때문에 아가씨가 변하면 안 되니까요. 아가씨가 걷고 싶은 길을 걷고, 갖고 싶은 것을 갖고, 원하는 방식으로 인생을 사는 게 내가 바라는 거예요. 아가씨가 고작 마력 따위에 휘둘리게 둘 수는 없죠.”
오드리에겐 너무 달콤한 말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설탕 과자라도 된 것 같은 착각에 휩싸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맥없이 녹아내릴 리가 없었다.
‘셰비언은 왜 하필 나를 사랑하는 걸까? 용의 마력을 가진 사람이 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중엔 비니타처럼 마법사의 재능을 가진 사람도 있는데.’
흔히 사랑에는 이유가 없다고들 하지만, 한번 솟아오른 의문은 사라지지 않았다. 형체 없이 녹아버린 아이스크림 같은 마음 한가운데에 뾰족한 질문만이 녹지 않고 남아서 오드리를 쿡쿡 찔렀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예전엔 셰비언의 사랑 자체를 믿을 수가 없어 괴롭더니만, 그의 사랑을 확신하고 나자 이유가 궁금하다니.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던 옛말이 딱 맞았다.
‘왜 나야? 왜?’
오드리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질문을 꿀꺽 삼켰다. 어떤 대답을 듣더라도 만족하지 못할 자신을 잘 알고 있었다. 더 힘주어 셰비언의 등을 끌어안는 게 그녀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나한테 그런 말을 해주는 사람은 그대밖에 없어.”
“하지만 전 인간이 아니잖아요. 아가씨와 함께 셰비언 절벽을 내려온 후엔……. 행복하면서도 무서웠어요. 함께 손을 잡고 걷는 게 행복했고, 자꾸 아가씨의 감정이 더 깊고 농밀해지길 바라는 내가 무서웠죠.”
“…….”
“사랑에 눈이 멀어 기준점을 잃은 용이 무슨 짓을 저지를까 무서웠어요.”
“인간을…… 해칠까 봐?”
“네. 아가씨의 동족을 잡아먹었다가 아가씨에게 경멸을 받을까 봐 무서웠다는 쪽이 더 정확하겠지만요.”
셰비언은 오드리의 얼굴이 몹시 보고 싶었다. 한심한 자신을 고백하는 지금, 그녀는 어떤 눈을 하고 자신을 보고 있을까. 너무나 궁금하지만 딱 그만큼의 두려움이 셰비언을 압박했기에, 그는 끝내 팔을 풀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그런데 아가씨가 비니타를 상대로 질투를 했으니, 제가 얼마나 기뻤겠어요? 바라던 게 드디어 이루어진 거예요.”
“……질투라니, 무슨 소리야? 난 그런 적 없어.”
“아가씨를 이토록 사랑하는데 어떻게 모르겠어요? 하나하나 읊으면 아가씨가 창피해할 걸 아니까 아무 말 안 하는 거예요.”
오드리는 차마 더 따져 묻지 못했다. 맥이 쭉 빠졌다.
“맞아……, 새파란 어린애에게 질투했어.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대의 마력을 느끼고 위치를 찾아내는 일 따윈 못 할 거고 그런 게 가능할 거라고 상상도 해 본 적 없는데, 그 애는 그리 자연스럽게 할 수 있다는 게 너무 충격적이었어.”
‘그대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조건을 갖춘 게 나만은 아니었다는 걸 새삼 깨달았지 뭐야.’
“어휴, 나름 연기를 잘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이게 뭐람. 아마추어한테 죄다 들켜 버렸잖아.”
셰비언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오드리는 울컥해서 그의 등을 철썩 때렸다.
“웃지 마! 내가 질투하는 게 그렇게 기분이 좋아?”
“그럼요. 예전의 아가씨는……. 뭐랄까, 필요해지면 저를 다른 사람과 공유해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느껴졌거든요.”
“그건 또 무슨 말이야? 내가 그대를 왜 공유해? 그대는 내 거고, 난 내 것을 남과 공유하지 않아. 공유해도 된다고 생각한 건 내가 아니라 그대겠지. 내가 다른 사람과 결혼해도 상관없다고 했었잖아.”
셰비언은 지난날의 멋모르는 발언을 깊이 반성했다. 그는 두려움도 잊고 오드리의 눈을 정면으로 보며 분명하게 말했다.
“아가씨, 알고 보니까 용도 질투를 하더라고요. 아가씨가 마음 쓰는 사람이라면 덮어놓고 못마땅하던 그게 질투였다는 걸 뒤늦게 알았지 뭐예요. 라비린은 물론이고 가끔은 몰리 양이나 락시 양에게도 질투가 나요. 그 둘은 저는 보지 못하는 아가씨의 다른 모습들도 마음껏 보잖아요.”
오드리는 셰비언의 변화를 확실히 실감했다. 지금 셰비언은 마치 예전부터 질투를 했던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아니었다. 느껴지는 감정의 밀도가 달랐다.
‘나만큼…… 아니, 나보다 더 변했어.’
아득히 넓은 아량과 관용으로 질투 따위 없이 넉넉한 마음으로 품어만 주던 이의 변화가 마음에 쏙 들었다. 오드리는 지극히 높은 곳에 있던 연인의 추락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비니타는…….”
“비니타는 그냥 어린 마법사를 키우는 과정을 밟느라 신경 쓰는 것뿐이에요. 마력으로 동족을 찾는 법을 가르친 건 마력 갈무리를 가르치느라 그런 것뿐이고, 공간에 들인 건 용의 마력을 자극하느라 그런 거예요.”
“응, 알겠어. 난 괜찮으니 계속 가르쳐. 때가 되면 비니타도 그대에게서 독립하겠지.”
빙긋 웃는 오드리의 표정에 셰비언은 몹시 심란해졌다. 저 말을 그대로 믿어도 되는지 가늠이 안 됐다. 그는 자신의 뺨을 어루만지는 손을 잡고 손바닥에 키스했다.
오드리의 목이 붉게 달아올랐다.
“질투는 때때로 거짓말을 만들죠. 그 말 그대로 믿어도 되는 거예요?”
“응, 믿어도 돼. 나는 그저……. 내 마력은 그대와 아주 비슷하니, 내게도 비니타와 같은 재능이 있었다면 그대와 특별한 교감을 나눌 수 있었을 텐데 싶어 아쉬웠을 뿐이야.”
오드리는 웃는 얼굴 그대로 거짓말을 했다. 아무리 노력하고 갈망해도 가질 수 없는 재능을 부러워하는 꼴을 보이느니 차라리 이쪽이 나았다. 이게 훨씬 자신다웠다.
셰비언은 오드리의 거짓말을 어렴풋하게나마 눈치챘지만, 추궁하거나 캐묻기보다는 그냥 웃는 편을 택했다. 오드리가 그쪽을 원했기 때문에.
“이런, 저는 조금도 아쉽지 않은데요? 아가씨도 알잖아요, 아가씨에게 그런 재능이 없으니까 그나마 제가 비집고 들어갈 자리가 있었던 거. 마법이 필요해지면 언제든 부르세요, 제가 바로 아가씨의 마법이 되어 봉사할 테니까요.”
“시계탑에서 그랬던 것처럼?”
“네, 그때처럼.”
다정하게 속삭인 셰비언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오드리는 눈을 감고 그의 입맞춤을 받아들였다. 빈틈없이 맞붙어 혀를 얽고 연인의 숨을 탐했다. 맞닿은 가슴에서 전해지는 고동이 온몸을 울렸다. 깍지 낀 손바닥에 땀이 고였다.
배가 흔들렸다. 머리장식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던 모자가 스르륵 미끄러져 배 밖으로 떨어졌다. 챙 넓은 모자는 쉽게 가라앉지 않고 물 위에 둥둥 떠다니며 주인을 기다렸다. 호기심 많은 오리 몇 마리가 부리로 툭툭 두드려 보다 흥미를 잃고 멀어졌다.
한참을 떠다니던 모자가 가라앉기 직전, 셰비언이 그것을 주워 오드리에게 건넸다. 오드리는 모자를 쓰지 않고 대신 불그스름하게 달아오른 얼굴을 가렸다.
“셰비언, 오드리라고 불러봐.”
“……? 오드리.”
“응, 앞으론 그렇게 불러. 연인 사이에 아가씨가 뭐야, 아가씨가. 그대가 내 아랫사람도 아닌데 매번 존대하는 것도 싫어. 그대가 좋아해서 그냥 두긴 했지만 매번 말하고 싶었어.”
“흠……. 나름 특별한 의미를 담아 부르는 건데 그게 그렇게 싫었어요?”
“날 오드리라고 부르는 남자는 아버지와 친척을 제외하면 라비린뿐이야.”
“오드리라고 부를게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라비린에게 밀릴 순 없죠. 존대는 포기해요, 왕도 못 듣는 특별한 존대니까 그런 줄 알고요.”
빠른 태도 변화에 오드리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 특별한 존대 때문에 멍청한 사람들이 착각을 하잖아. 내가 그대를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자꾸만 늘어나는걸.”
“착각 아니니까 그건 그냥 두면 돼요.”
“흥, 내 말이면 다 듣는다고 하면서 실은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거 내가 모를 줄 알고? 보티안 씨는 대체 뭘 어떻게 가르쳤기에 체술에 화술에 사탕발림까지 이렇게 늘었을까?”
셰비언은 머쓱하게 헛기침을 하며 노를 저었다. 그새 능숙해진 노질 덕분에 배는 안정적으로 호수를 갈랐다.
“오드리, 모자 좀 치워주면 안 돼요? 얼굴 보고 싶은데.”
“안 돼. 지금 나는 못된 생각을 하는 중이란 말이야.”
“오……. 그래요? 그럼 모자 치우라는 말은 안 할 테니 그 못된 생각을 들려주는 건 어때요?”
오드리는 모자 밖으로 눈을 빼꼼 내밀고 셰비언을 흘겨보았다. 피올과 자꾸 어울려서 그런 건지 농담마저도 그와 비슷해지고 있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얼굴을 못 보면 듣기라도 해야죠. 한데 얼굴 반쪽을 보여주는 걸 보니 말도 반쪽만 할 건가 보네요. 반쪽만 할 거면 그냥 안 말해줘도 되니까 얼굴 보여줘요. 예쁜 얼굴 자꾸 가리면 아까워요.”
“반쪽만 말할래. 셰비언, 앞으로 내 곁을 떠나지마. 내 옆에 딱 붙어 있어.”
모자 밖으로 보이는 눈빛이 어쩐지 필사적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여유가 몸에 배어 있던 사람 같지 않았다. 셰비언은 오드리의 낯선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가 들으면 내가 멋대로 오드리 곁을 떠나 떠돌아다닌 줄 알겠어요. 옆에 있고 싶다는 걸 이리저리 내돌릴 땐 언제고 새삼스럽게 그런 말을 해요?”
“네가 내 마법이라며? 그럼 당연히 언제든 쓸 수 있게 옆에 붙어 있어야지.”
“하하, 그건 그렇네요. 하지만 할 일이 남아 있는걸요. 당장 마약상 잡아들이는 일만 해도 아직 중서부와 북부가 남았어요. 왕세자는 내가 계속 협조해 줄 거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을걸요? 그의 믿음과 지원은 오드리에게도 중요하잖아요.”
오드리는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헨젤 백작이 눈치채지 못할 만큼 단시간에 마약상을 잡아낼 수 있도록 셰비언을 가스트로에게 지원 보냈던 건데, 그게 새삼 후회가 됐다.
“……그대가 그리 애쓰지 않아도 돼. 찾아보면 다른 방법이 나올 테니.”
“물론 오드리라면 어떻게든 다른 방법을 찾아내겠지만……. 난 오드리를 돕고 싶어요.”
“내 옆에 있는 게 날 돕는 거야. 베텔 경의 에스코트는 이제 끝낼 때가 됐어. 앞으로 난 그대 없이 사교 모임에 안 갈 테니까 예정했던 일정이 있으면 다 취소해.”
셰비언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오드리는 내렸던 모자를 다시 올려 얼굴을 전부 가렸다. 억지를 쓰는 자신이 창피해서 셰비언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이렇게 창피한데 말을 주워 담을 생각이 안 든다는 것도 기가 막혔다.
“오드리, 잠깐 손 내밀어봐요.”
“손은 왜?”
“어디 아픈지 확인 좀 해 보게요. 혹시 요즘 잠을 잘 못 잔다든가, 가슴이 답답하다든가, 갑자기 기운이 빠진다든가 그런 증상이…….”
“난 멀쩡해!”
“하지만 하는 행동이 평소 같지 않잖아요. 나는 오드리가 펼친 장기판에서 가장 쓸모 있고 강력한 말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내가 아는 오드리는 그런 말을 관상용으로 내버려 둘 사람이 아닌데 그러겠다고 하니까 이상하다고요. 정말 멀쩡한 거 맞아요? 혹시 내 치료가 필요한 곳이 있는 거 아니에요?”
차라리 진짜로 아파 쓰러져서 옆에 있어 줄 걸 청하는 거면 당당하기나 하지, 이건……. 오드리는 환절기인데도 지나치게 멀쩡한 제 몸뚱이를 탓하며 그럴듯한 변명거리를 찾아 머리를 굴렸다.
그러나 갑자기 바보라도 된 것처럼 머릿속이 텅텅 비어 아무 생각도 안 났다.
“오드리, 어딘가 아프다면 숨기지 말고 얘기해요.”
처음 겪는 일에 마음이 급해진 상태에서 한 번 더 재촉을 받자 빌어먹을 주둥아리가 멋대로 진실을 읊었다.
“난 그대가 내 옆에 있어줬으면 좋겠어.”
“…….”
“혹시 다른 곳에서 나보다 더 사랑할 만한 사람을 만날까 봐 무서워. 그대가 내 곁을 떠날까봐 두려워…….”
이 무슨 어린애 잠투정 같은 소리람. 말을 다 뱉고 나자 부끄러움이 심하게 밀려왔다. 셰비언이 어째 말이 없는 가운데 오드리는 이대로 쓰러져 죽고 싶은 심정이 되고 말았다. 세상에 수치사라는 걸 하는 사람이 있다면 지금 이 순간의 나일 거야.
“개인적으로 봐야 할 용무가 있어요. 아무리 짧게 잡아도 아마 한 달은 오드리 옆을 비워야 할 거예요.”
놀랍도록 담담한 목소리였다.
오드리는 깜짝 놀라 모자를 내리고 고개를 들었다가, 빙긋 웃고 있는 셰비언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얼굴 전체에 확 열이 오르는 게 느껴졌다. 얼른 얼굴을 다시 가리려고 했지만 모자는 이미 빼앗긴 뒤였다.
“이제야 얼굴을 보여주네요.”
“이, 이런 기술은 어디서 배워온 건데?”
“누구겠어요?”
오드리는 열심히 생각했지만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아무래도 조금 전 입맞춤을 한 뒤부터 머리가 영 안 돌아가는 게, 잠깐 사이 바보 멍청이가 된 것 같았다.
셰비언이 끙끙대는 오드리의 뺨을 가볍게 꼬집으며 웃었다.
“피올이 이런저런 잡기에 능하더라고요.”
“무슨 치안대원이 소매치기 기술을 알아?”
“피올은 검도 잘 쓰는데 담도 잘 타요. 아마 도둑으로 길을 잡았으면 크게 성공했을 거예요. 멜브란트 역사에 남는 대도가 됐을걸요.”
실없는 소리를 하던 셰비언이 갑자기 진지한 표정을 짓고 오드리와 눈을 맞췄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오드리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셰비언?”
“오드리,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일은 없어요. 장담할 수 있어요. 나야말로…… 내가 없는 사이 누군가가 오드리의 눈길을 사로잡을까 봐 두려운걸요.”
“그럴 일 없어.”
오드리가 자기도 모르게 셰비언의 팔을 움켜잡았다. 셰비언은 그녀의 손을 떼어내 제 얼굴에 갖다 댔다. 따스한 체온이 서서히 번지듯 스며들었다. 관계 중이 아닐 때도 오드리가 이렇게 따뜻했던 게 대체 언제 적의 일이었던가? 익숙하면서도 낯선 온기였다.
“알아요, 하지만 무서워요. 이 손이 사라진다고, 그래서 혼자 남겨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면 한밤중에도 잠이 확 깨요. 정말 다행이죠, 서로가 서로를 원해서.”
“…….”
“내 개인적인 용무는 최대한 빨리 해결하고 올게요. 다녀와서는 오드리 옆에서 절대 떨어지지 않을 테니까, 이번 한 번만 용서해 줘요.”
우는 아이를 어르는 듯 다정한 말투였다. 오드리가 그 다정함에 홀랑 넘어가면 좋았을 텐데, 멍청해진 줄 알았던 머리가 이럴 때는 제 성능을 발휘했다. 그녀는 셰비언의 뺨을 만지작대며 물었다.
“달튼 제도에 가는 거지?”
망할 아이샤. 일부러 의식분리까지 해서 따로 지시했는데 굳이 지명을 입 밖으로 꺼낸 아이샤. 셰비언은 아이샤에게 레펙치오 제작 할당량을 더 늘려줄 방법이 없을까 고민을 시작했다.
오드리가 자신에게 집중하라는 듯 셰비언의 뺨을 쭉 잡아당겼다.
“작년 봄이었나, 초여름이었나. 달튼 제도의 어떤 섬에서 화산이 터졌다는 기사를 본 적 있어. 탐사를 하러 갔던 팀이 송두리째 증발하는 바람에 아주 난리였지.”
“아야야…….”
“샤를레아는 화룡이야. 유황 냄새가 지독하다고 네가 몇 번이고 말했던 거 기억나. 셰비언, 화산이 터졌다는 그 섬이 바로 샤를레아의 둥지 맞지? 둥지 주인은 봉인구에 잡혀서 꼼짝도 못하는데 남의 둥지에 가서 뭘 하려고?”
“거기 안 가요. 달튼 제도에 섬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재수 없는 델 가요?”
셰비언은 냉큼 부인했지만 오드리는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물어볼 때 대답하는 게 좋아. 구체적으로 어떤 섬인지는 몰라도 대략적인 행선지만으로도 알아낼 수 있는 건 아주 많거든. 협회는 내가 어쩔 수 없겠지만 왕궁마법사는 얘기가 달라. 그들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사람 중 내 입김이 통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까?”
“왕궁마법사도 마법사고 난 마법의 주인이에요. 오드리 입김 같은 건 안 통해요.”
“맞아, 그럴지도 몰라. 하지만 난 그대의 연인이고 사람 머릿수가 많아지면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구멍이 생기게 마련이야. 내가 자초지종을 알아낼 때까지 과연 얼마나 걸릴지 내기할까?”
오드리의 눈이 야생 살쾡이처럼 번쩍거렸다. 셰비언은 내심 탄식했다. 안 그래도 샤를레아에게 호되게 당하는 모습을 보인 탓인지 걱정이 많은데, 그녀가 지형지물까지 바꿔가며 마법진을 구축해 둔 둥지를 깨부수러 간다는 소리는 죽어도 할 수가 없었다.
“빨리 말하면 날 속이려고 했던 건 용서해 줄게.”
더는 안 되겠다.
“에메랄드 구하러 가요.”
셰비언은 눈 딱 감고 거짓말을 했다.
“……흐응, 에메랄드. 그러고 보니 그대가 내게 에메랄드를 선물하겠다고 했었지. 달튼 제도에서 나는 에메랄드가 얼마나 대단하기에, 셰비언 성벽에서 공급되는 보석을 누르고 그대의 눈에 들었을까?”
오드리가 간살을 부리듯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셰비언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곤란한 상황을 모면하고 발톱섬으로 떠날 때까지 잠깐 시간을 벌 수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어째 제 손으로 무덤을 판 것만 같다.
“사람을 보내둘 테니까 보석 따윌 구하겠다고 직접 가는 짓은 하지 마. 난 에메랄드보다 그대가 꺾어 주는 꽃 한 송이가 더 기뻐. 시드는 게 마음에 걸리거든 그 꽃에 보존 마법을 걸어서 줘. 꽃목걸이라도 기쁘게 하고 다닐 테니.”
셰비언은 확신했다. 다 들켰다. 망했다.
<9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