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6. 힘겨루기
「……신들의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 큰 도끼를 차고 나온 벨트람이 거대한 산맥의 절반을 뚝 잘라 적진에 내던지며 싸웠다. 그때 벨트람의 도끼에 허리가 동강난 산맥이 바로 셰비언 산맥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벨트람의 도끼자국 전설이 얽힌 절벽을 성벽이라고 부르는 것일까? 이는 셰비언 성벽을 실제로 보면 곧바로 이해할 수 있는데……. - 셰비언 성벽, 그 황홀한 아침 산책 中」
왕세자 부부의 결혼식은 브란젤 전체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곧 대관식까지 있으니 안 그래도 들떠 있던 분위기가 한층 더 달아올랐다. 사나흘에 한 번씩 내리는 비도 그런 분위기에 일조했다. 하늘이 아무리 우중충한 회색이라도 가뭄으로 말라가던 강의 수위가 차츰 오르는 게 눈에 보이는데 어찌 싫을 수가 있을까.
오드리 역시 퍽 기분 좋은 하루하루를 보내고는 있었지만, 완전히 즐기지는 못했다. 연극이 끝나고도 벨트람 포스터가 계속 퍼지고 있는 것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메너트에게 네이기스의 결혼 사실이 알려진 탓이었다.
메너트는 자신이 모르는 사이 네이기스의 결혼계약서가 하티의 신전에 보관되고 관청에 혼인신고서가 접수됐다는 걸 알고 대단히 큰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곧바로 딸을 만나려고 시도했지만, 치안대 차원의 압력을 받았다. 업무상 폭력적인 보복을 받을 위험이 있는 치안대의 가족은 원하면 언제든 치안대의 직접적인 보호를 받을 수 있었고, 치안대는 네이기스뿐만 아니라 피올 역시 보호대상으로 간주하고 메너트를 막았다.
메너트는 자신이 제한 대상이라는 걸 납득하지 못하고 길길이 날뛰다가 그웬 백작의 저지를 받고서야 피올과 네이기스를 만나려는 시도를 그만두었다. 소동이 커져 봐야 좋을 게 없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그렇다고 메너트가 네이기스를 포기한 건 아니었다. 그녀는 아예 혼인 자체를 무효로 만들 생각을 했고, 그를 위해 혼인신고서에 서명한 증인들을 만나고자 했다. 그러나 라비린은 타우레드의 이름을 방패 삼아 메너트를 절대 만나주지 않았고, 에이쉬는 아예 자취를 감췄다. 남은 건 그나마 만만한 오드리였다.
헨젤 백작은 왕궁에 잡혀서 오지도 못하고 있겠다, 메너트는 자신을 막는 고용인들을 다 밀어젖히고 들어와 오드리를 붙들고 하소연했다. 가출 따위를 해 봐야 어차피 금방 돌아올 거라고 쉽게 생각하지 말았어야 했다, 부모도 모르게 멋대로 결혼이라니 믿을 수가 없다…….
오드리는 셰비언에게 일을 맡겨 내보낸 걸 내심 후회하며 메너트를 대접했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라도 손님은 손님이라 멋대로 내칠 수 없다는 게 슬플 따름이었다.
“조카님, 네이기스는 내 딸이에요. 어떻게 부모도 모르게 하는 결혼에 증인을 서준 거죠?”
“보티안 씨는 괜찮은 신랑감이에요. 에이쉬조차 그를 보고 네이기스의 눈이 높다고 했죠.”
“그건 에이쉬의 평가죠. 나는 못 봤어요. 내가 죽어서 못 봤다면 모를까, 멀쩡히 살아서 사위될 사람을 보지 못했다는 게 말이나 되나요? 어떻게 그런 결혼이 있을 수 있어요?”
“고모님, 그렇게 화를 내셔도 증인 철회는 없어요. 전 둘이 꽤 괜찮은 부부가 될 거라고 생각하고, 서로를 도와가며 잘살 거라고 믿어요. 무엇보다 두 사람이 절 선택해 준 믿음에 보답해야죠.”
“나는 굳이 조카님에게 증인 철회를 하라고 요구하는 게 아니에요. 많은 걸 바라지 않아요, 내가 네이기스를 만날 수만 있게 해주기만 하면 돼요. 응? 얼굴 볼 자리만 만들어주면, 그 다음은 내가 알아서 할게요. 네이기스도 내가 몹시 보고 싶을 거예요. 조카님은 믿지 못하겠지만 우린 굉장히 사이좋은 모녀였단 말이에요.”
오드리를 두고 어쩔 수 없는 랄리우스라며 폄하하던 메너트라곤 믿을 수 없는 저자세였다. 그녀는 구덩이에 빠진 자신에게 내려진 밧줄이 오드리밖에 없는 것처럼 애절하게 매달렸다.
그러나 완전히 저자세는 아닌 것이, 그녀의 말에서는 자신이 네이기스와 직접 대면하기만 하면 그녀를 제 뜻대로 집으로 데려갈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배어나왔다. 네이기스가 헝겊인형도 아닌데 대체 어디서 왔는지 모를 자신감이었다.
‘하델이 진절머리를 낸 이유를 알 만하네.’
오드리는 네이기스가 헨젤 저택에 있던 동안 홀로 메너트를 상대했을 하델에게 심심한 동정과 위로의 마음을 보냈다.
“조카님, 그렇잖아요. 부모자식이 평생 얼굴도 안 보고 살 순 없는 거잖아요?”
“그럴 작정으로 가문의 후계자를 에이쉬에서 드케로 바꾸셨던 것 아닌가요? 저는 고모부님께 네이기스와 관련된 편지는 한 통도 받아본 적 없는걸요. 고모님, 전 제 서명에 책임을 질 거고 그건 고모부님께서도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해요.”
“네이기스와 에이쉬는 다르죠! 그 애는 아직 어려요!”
“귀족 영애로서 데뷔탕트를 치렀으면 나이가 몇이든 결혼하기에 충분하죠. 아시잖아요. 아, 그러고 보니 요즘 드케에게 혼담이 밀려든다죠? 축하드려요.”
“조카님!”
“고모님, 네이기스는 이제 품 안의 어린애가 아니에요. 그웬도 아니고요. 가문을 뛰쳐나간 네이기스에게 이렇게 매달릴 시간에 드케에게 관심을 가져 주시는 게 어떨까요? 명색이 그웬의 후계자인데 어머니의 눈 밖에 났다는 소문이 돌면 안 되잖아요.”
“누가 감히 그런 말을 한다고……!”
울컥 소리를 지르려던 메너트의 말이 뚝 끊겼다. 그녀를 바라보는 오드리의 눈빛에서 만약 그런 소문이 안 난다면 자신이 직접 소문을 내주겠다는 의지가 엿보인 탓이었다.
“고모님께서 그웬가에 발휘하는 영향력에 대해서 모르는 사교계 인사가 없어요. 그웬의 여주인이 갑자기 후계자가 된 둘째 아들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첫째 아들을 민다는 소문이 나면 그 혼담들이 계속 유효할까요? 싹 사라지지 않을까요? 전 왠지 그럴 것 같은데요.”
메너트의 눈가가 바르르 떨렸다. 그녀는 오드리에게 동정과 자비를 호소하던 걸 그만두었다.
“협박하지 말아요……. 조카님 마음대로는 안 돼요. 지금 사교 모임에서 조카님을 환영하는 사람들이 정말 진심이라 그럴까요? 조카님이 벨키스 경에게서 양보 받은 데멘사가 탐나고 그 허연 용이 무서워서 그러는 것뿐이에요. 사람들은 조카님보다 날 믿을 거고, 조카님이 그 같잖은 포스터로 얻어낸 인기 따위는 금세 사라져 버릴 거예요. 그런 건 다 허상이거든요.”
“오, 그 부분에 대해선 저와 의견을 같이하시네요. 전적으로 동의해요.”
“알면 내 말을 좀 귀담아 들어요. 조카님, 어리고 순진한 사촌동생이 인생에 큰 흠집을 남기는 걸 방관하지 말아요. 그것도 죄예요.”
“고모님이야말로 네이기스를 고모님 인생의 대용품으로 삼지 마세요.”
“이……!”
격분한 메너트가 소파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대로 뺨이라도 칠 듯한 기세에 놀란 다이앤이 오드리의 앞을 막아섰다가 메너트에게 밀쳐져 나동그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터져 버린 오드리의 입은 멈출 줄을 몰랐다.
“고모님께서 기껏 한 정략결혼이 하향결혼이어서 억울하고 분하셨던 건 알겠는데, 설령 네이기스를 왕족에게 시집보낸다고 해도 그걸로 고모님의 인생이 보상받는 건 아니에요. 무엇보다, 하향결혼을 하신 덕분에 쭉 그웬가에 큰소리치며 살지 않으셨던가요?”
“오드리!”
“네이기스가 사람들에게 칭찬받고 사랑받는 걸 보며 대리만족을 느낀 적이 없다고 하티의 이름 앞에 맹세하실 수 있다면, 그대로 제 뺨을 치셔도 돼요.”
메너트의 가슴이 크게 들썩였다. 다이앤이 일어나 오드리의 앞을 다시 막아섰지만, 이번엔 오드리에게 밀려났다.
“조카님이 열여덟 살이라는 게 새삼 느껴지는군요. 그래요, 어릴 땐 그렇게 생각할 수 있죠. 세상의 중심이 나 같고, 내 생각이 전부 맞는 것 같고……. 그런 시기죠. 게다가 조카님은 그 생각이 틀렸다고 가르쳐 줄 사람이 곁에 없으니 더욱 그렇지 않겠어요?”
“이런, 품위 넘치는 고모님께서 한참 전에 돌아가신 분을 걸고넘어질 줄은 몰랐어요. 고모님, 고모님이 제게 무슨 말을 하셔도 소용없답니다. 저는 물론이고 증인 셋 중에서 네이기스를 고모님 앞에 데려다놓을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나중에 조카님이 아이를 낳아보면 내가 왜 이러는지 알게 될 거예요. 그때까지는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겠죠……. 조카님이 제대로 반성하기 전까진 서로 얼굴 보지 않는 쪽이 낫겠군요.”
오드리는 배웅 따위는 필요 없다며 휙 돌아서는 메너트의 등을 보면서 다시는 그녀와 웃으며 얘기할 수 없으리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오드리의 마음은 얼어붙은 호수의 표면처럼 잠잠하고 고요했다.
도리어 나동그라졌던 다이앤이 안달이 나서 오드리를 채근했다. 아무리 사이가 안 좋아도 그렇지, 이런 식으로 관계를 끝내서야 되겠느냐며. 웬만하면 말실수를 인정하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게 좋겠다는 식이었다.
“사실인데 내가 왜?”
“아가씨께서 백작부인의 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도 아닌데 그걸 어찌 그렇게 장담하세요? 보티안 씨가 모자란 사람은 아니지만 도둑 결혼이잖아요. 정말 걱정하고 계셨는데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면 어떡해요?”
“다이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그런 식으로 말하니까 굉장히 신선하게 들리는 거 아니?”
“저도 제가 어울리지 않는 소릴 하고 있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네이기스 아가씨는 이런 식으로 아가씨와 백작부인이 갈라서는 건 바라지 않으실 것 같단 말예요. 형식상으로라도 빨리 화해하세요.”
“이것 참……. 오래 모셨던 것도 아니면서 아주 잘 아는구나.”
“속을 모르기가 더 어려운 분이셨으니까요.”
오드리는 완강하게 버티는 다이앤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너무 맹목적이라 때로는 부담스럽게까지 느껴질 정도로 자신을 따르던 다이앤이 네이기스를 위해 자신을 다그치는 광경이 몹시 이색적이고 낯설었다.
“그래……. 어쩌면 고모님께선 정말 순수하게 네이기스를 걱정하셨던 건데 내가 얼토당토않은 말로 심기를 긁은 걸지도 모르지. 어차피 서로 실수했으니, 어린 내가 한 발 물러서면 서로 적당히 체면 세우면서 넘어갈 수 있을지도 몰라.”
“알고 계시면서 왜 그러셨어요?”
“사교 모임에서 네이기스를 데리고 다니던 고모님을 봤으니까.”
오드리는 네이기스에게 쏟아지는 칭찬과 구애를 두고 그게 마치 자신을 향한 것인 양 즐기던 메너트를 똑똑히 기억했다. 자식을 뿌듯해하는 보통의 부모와는 느낌이 확연히 달랐었다. 오히려 오드리에게 자신의 처지를 투영하고 그녀의 성공을 바라는 다이앤과 훨씬 더 비슷했다.
“다이앤, 생각해 보렴. 고모님은 대체 왜 네이기스만 찾아다닐까? 도둑 결혼? 벨트람 포스터? 그 두 가지 일이 있기 전에도 네이기스만 찾으셨던데, 대체 왜? 가문의 체면 문제라면 계승권 따위는 필요 없다며 뛰쳐나간 장남부터 잡아오는 게 먼저일 텐데, 고모님은 에이쉬의 행보에는 관심이 없어. 이상하지 않니?”
“…….”
“어차피 내가 네이기스의 도둑 결혼에 증인을 선 이상 고모님과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문제야. 네이기스가 이걸 몰랐다면 그건 그 애 잘못이고.”
“아가씨……. 그래도…….”
“계속 헛소리하면 나 대신 네이기스나 시중들라고 보내 버릴 줄 알아. 내가 너나 이디케의 의견을 귀담아 듣는다고 이런 식으로 날 휘두르려 드는 것까지 허용한 건 아니라는 걸 좀 명심하렴.”
다이앤이 입을 꾹 다물었다. 오드리는 다이앤이 불만스러운 기색을 풀풀 풍기는 걸 일절 무시하고 일거리 속으로 파묻혔다. 셰비언이 곁에 있을 때는 그쪽으로 자꾸 신경이 쏠려 일하기가 쉽지 않으니, 이렇게 혼자 있는 날에 최대한 많은 것들을 봐야 했다. 전보 개설 사업 때문에 올라오는 데멘사의 서류가 나날이 늘어나고 있었다.
오드리가 집무실 책상 가득 쌓인 서류를 팔랑팔랑 넘기는데, 다이앤이 불쑥 두툼한 서류봉투를 내밀었다.
“아가씨, 이것 좀 봐주세요. 그웬의 첫째 공자님이 보내신 거예요.”
“에이쉬가?”
자칫하면 편지를 보내다가 메너트에게 거취를 들킬 수도 있는데 꾸역꾸역 보낸 걸 보면 정말 중요한 내용인 듯했다. 미간에 깊은 주름을 새기고 봉투를 봉인한 밀랍을 뜯었다. 빼곡하게 글자를 채워 넣은 서류 사이에서 제법 잘 그린 건물 조감도가 삐죽 머리를 내밀었다.
에이쉬가 보낸 건 일종의 후원 요청서였다. 브란젤에 세울 종합예술학교를 위한 초기 자금을 부탁하는 내용이었다. 그동안 이곳저곳에서 야금야금 모은 후원금으로 학교 부지를 구입했는데, 생각 이상으로 부지 구입에 비용을 많이 쓰는 바람에 정작 건물을 세우고 교사를 고용할 자금이 모자란다나.
“이런 멍청한……. 땅이 비싸면 다른 곳을 찾아야지, 꼭 브란젤을 고집할 이유가 대체 뭐가 있다고 거기다 돈을 다 써?”
그래도 땅을 사느라 멍청하게 돈을 다 쓴 것치고 사업계획서는 꽤 꼼꼼하게 작성돼 있었다. 돈은 굴릴 줄 몰라도 서류 꾸밀 줄은 안다는 것처럼 말이다.
종합예술학교의 목표는 거창했다. 어릴 적부터 각 분야의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아이들에게 전문적이고 수준에 맞는 교육을 제공하고, 재학생과 졸업생의 작품으로 전시회를 열며, 작품 구입을 원하는 수집가와 작가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고, 예술가가 불공정한 계약관행에 휘둘리지 않도록 도와주겠다, 그리고…… 기타 등등 기타 등등.
재능만 있으면 신분 가리지 않고 어린 나이일 때부터 가르쳐서 뛰어난 예술가로 키워내겠다는 발상이 아주 야심찼다. 비록 수입 모델이 형편없어 운영자금의 태반을 후원금으로 충당해야겠지만, 학교의 명성이 높아진다면 기꺼이 후원금을 댈 사람들이 나올 것이다.
오드리는 네이기스의 결혼식에서 에이쉬가 자신을 붙들고 종알종알 떠들어대던 게 이거였다는 걸 후원 요청서를 읽고서야 깨달았다. 자꾸 돈 얘길 하기에 기껏해야 친분 있는 무명 예술가의 후원을 부탁할 거라고 여겼는데 학교라니. 생각도 해 본 적 없는 방향의 이야기였다.
에이쉬가 계획하는 학교는 어린아이부터 준 성인에 이르기까지 넓은 연령대를 포괄하고 있었고, 신분을 가리지 않는 만큼 최소한의 교양 교육까지 커리큘럼에 넣었다. 그렇다 보니 운영비가 만만치 않게 들 것이 예상되는데 학생 1인당 책정한 학비는 놀라울 정도로 낮았다. 오드리가 아무리 부자라도 이건 무리였다.
‘학교, 학교라……. 그것도 종합예술학교. 이런 건 나보다 라디아타가 더 관심이 많을 텐데. 그러고 보면 이거 혹시 라디아타에게 연결시켜 주길 바라고 준 건가?’
예전부터 재능 있는 화가를 발굴해 후원하는 일을 즐겼던 라디아타였다. 왕비가 되고 움직일 수 있는 예산의 액수가 커지면 학교 자체를 후원하는 쪽에도 관심을 둘 만했다.
문제가 있다면, 라디아타는 오직 여성 화가만 후원했고 후원의 대상자도 까다롭게 골랐다는 것이다. 과연 재능의 씨앗이 보인다는 것만으로 거액의 돈을 쓰려고 할지, 그것만은 오드리도 짐작할 수가 없었다. 망설이던 오드리는 후원 요청서 위에 간단히 적었다.
<입학기준 및 교육 과정과 평가 및 지원 기준에 성별을 이유로 차별을 두지 말 것, 입학 기준선을 높이 잡을 것. 이게 수용되면 왕세자비 전하께 전달할 용의 있음.>
“다이앤, 에이쉬에게 이걸 돌려보내야겠는데, 가능하지?”
“아, 네. 사서함 번호를 받았어요. 편지 보내는 척 보내면 돼요. 아가씨, 무슨 내용이에요?”
바로 조금 전에 주제넘게 굴지 말란 말을 듣고도 이런 질문을 한다. 오드리는 자신이 하녀들에게 허용한 선이 너무 가까운 거 아닌가 생각하면서도 에이쉬의 후원 요청서를 통째로 넘겨주었다.
“에이쉬가 브란젤에 종합예술학교를 짓고 싶대. 아주 꿈이 크다니까. 신분에 관계없이 재능 있는 아이를 모아서 학비도 지원해 가며 키우고 싶다는데?”
“종합예술학교고 뭐고, 어린애도 학교에 다닐 수 있어요? 적어도 열여덟 살은 넘어야 받아주는 거 아니었어요?”
“그건 대학이고.”
“학교는 당연히 대학을 말하는 거 아니에요?”
“예전엔 어린아이가 다니는 학교도 많이 있었어. 지금은 다 없어지고 대학만 남았지만.”
신화시대가 끝나고 신전이 쇠퇴하면서, 신전이 맡아 하던 보편교육은 끝났다. 그러나 그를 대신할 만한 교육기관은 나오지 않았고 지식은 신분과 돈을 따라 소수에게 집중됐다. 지금의 대학은 신전의 보편교육이 있던 시절의 유산이었다. 입학 시험을 거쳐 합격하면 누구나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그 시험을 위해 지식을 쌓을 수 있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다.
다이앤은 오드리가 깜짝 놀랄 정도로 학교에 흥미를 보였다. 어린아이도 최소한의 교양 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듯했다. 그러고 보면 다이앤도 본의는 아니어도 어린 시절부터 집안에서 강도 높은 교육을 받으며 자란 사람이었다.
“좋아 보이니?”
“네……. 어차피 어린애들은 집안일을 돕고 친구들과 노는 게 하루의 전부잖아요. 진짜 기술을 배우기 전까지만이라도 이런 교양을 쌓게 해주면 좋죠. 비록 먹고사는 데 필요한 교육은 아니지만요.”
“어차피 종합예술학교라 따로 기술 가르치는 건 없을 거고, 예술가로서 성공하지 못한 아이들은 결국 맨손으로 학교를 나올 텐데도?”
“그래도 어릴 적에 교육을 받아본 애들과 아닌 애들은 일할 때 차이가 많이 나요. 최소한 글은 잘 읽을 테니 그것부터 가르치는 수고는 안 해도 되잖아요? 셈을 따로 가르치지 않아도 될 거고요. 상점 주인들이 좋아하겠어요. 어유, 이런 애들만 오면 릴리 일이 절반은 줄 텐데.”
“……그 정도니?”
“그 정도예요. 남자애도 아니고 여자애가 자라서 해 봐야 하녀인데 애써 가르쳐서 뭐 하냐는 부모가 얼마나 많은데요. 그런 거 가르치는 집 애들은 하녀 하지도 않아요. 아가씨도 그걸 알고 하녀들에게 전부 글과 셈을 가르치게 하신 거 아니었어요? 책이며 잡지 읽는 재미에 빠진 하녀들이 아가씨를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맞아……. 그 효과를 노리긴 했지. 근데 그게 릴리 일의 절반이나 되는 줄은 몰랐어.”
“글과 셈만 가르친다고 끝은 아니잖아요. 하다 보면 그 이상도 가르치게 되는데, 어깨 너머로 배운 걸 저들끼리 가르치며 어설프게 익힌 애들이 제일 골치예요. 뭐, 어차피 이 학교는 예술적 재능이 없으면 못 들어가는 학교라니 졸업하고 나와서 하녀가 될 애들은 없겠지만요. 애초 여자애를 끼워줄지도 의문이고요.”
오드리가 적어 넣은 문구를 보고도 다이앤은 여자아이들이 학교에 들어갈 수 있게 될 거란 희망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에이쉬는 오드리조차 놀랄 정도로 빠른 시간 내에 답변을 보내왔다.
여자라고 대상에서 제외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고 했다. 볼린의 천사는 남녀를 가리지 않고 예술가의 어깨에 내려앉으니 굳이 성별을 이유로 차별할 필요가 없다고 말이다. 반면 입학 기준점을 높이라는 것엔 난색을 표했다. 그러면 재능이 엿보이는 아이들을 일찍부터 지원하는 학교의 의의가 사라져서 안 된다나. 대신 평가를 엄격히 하겠다는 단서를 달았다.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하지만 답변서 끄트머리에 이르자 황당한 말이 나왔다. 자금이 없어서 학교 건물도 못 올리고 있는 주제에, 차후 왕세자비의 지원을 받으면 학생들에게 무료 교육을 제공하고 싶다는 헛소리가 줄줄 적혀 있었다. 만족스럽게 답변서를 읽던 오드리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이거……. 그냥 돈만 줘서는 안 되겠는데?”
“왜요? 뭔가 또 마음에 안 들어요?”
일하는 오드리 옆에서 큰 스케치북에 새 마법수식을 끄적대던 셰비언이 불쑥 고개를 쳐들었다. 긴 은발 몇 가닥이 조각 같은 코 위로 사르륵 흘러내렸다.
오드리는 셰비언의 영롱한 눈을 보면서 화를 가라앉혔다. 잘생기고 예쁜 걸 보고 있으니 심신안정에 좋았다. 머리칼을 넘겨주고 서늘한 뺨에 입을 맞추자 조금 긍정적인 생각이 드는 것도 같았다.
“별일 아니야. 다른 사람은 물 붓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 돕기는커녕 물병 바닥에 구멍 뽕뽕 뚫을 생각에 들뜬 놈을 하나 봐서……. 응, 그래서 그래. 조금 갑갑해서 그랬어.”
비유를 바로 알아듣지 못하고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셰비언이 뒤늦게 까르르 웃었다. 오드리도 그와 함께 웃으며 답변서에 만년필을 휘갈겼다.
<무료 교육은 꿈에서나 하시고, 빠른 시일 내에 재정관리 전문가를 영입하지 않으면 지원이고 뭐고 없을 줄 아세요. 왕세자비 전하께 소개도 없습니다.>
오드리가 에이쉬와 편지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학교 설립 계획을 구체화하고 있던 즈음, 가스트로는 골치 아픈 방문자를 맞았다. 화가 잔뜩 난 헨젤 백작이었다.
헨젤 백작은 가스트로를 만나자마자 그에게 종이 뭉치를 내밀었다. 그 안엔 용과 수사슴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형태의 문장이 스케치 형태로 그려져 있었다. 가스트로가 오드리에게 작위를 내리기 위해 지시한 내용 중 일부였다.
“딸을 용에게 주라는 지시도 받아들였고, 일거리가 쏟아져 근 한 달째 집에 못 들어가도 참고 일했습니다. 한데 그 결과가 이겁니까?”
“백작의 능력이 내 생각보다 대단하군. 그리 일하면서도 이런 사소한 곳에까지 눈을 둘 여유가 있다니 말이야. 어디에서 유출했는지 당장이라도 확인하고 무겁게 처벌해야겠어.”
“귀족의 문장을 새로 등록하는데 눈과 귀가 쏠리지 않을 이유가 대체 뭐가 있겠습니까? 전하, 이런 식으로 딸자식이 홀로 작위를 얻어 가문을 나가면 제 꼴이 너무 우습게 되지 않습니까? 절대 안 됩니다. 부디 청컨대 재고해 주십시오.”
말이 요청이지 극렬한 반대다. 곤란해진 가스트로는 유들유들한 태도로 헨젤 백작을 달래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헨젤 백작의 분노는 점점 더 높아져만 갔다.
“제 딸이 헨젤이라는 성을 싫어하는 걸 압니다. 보나마나 그동안 벌어들인 돈으로 작위를 사고자 시도한 것일 텐데, 작위 장사는 전하께서 가장 혐오하는 일 아니었습니까?”
“음……. 작위 장사라는 말은 듣기 싫은데 아주 부정은 못하겠군. 그렇지만 백작도 한번 생각해 보게. 헨젤 영애가 작위를 받는대도 그 작위로 대체 뭘 할 수 있을 것 같은가? 쓸모없는 장식품 구입에 거액의 돈을 지불하겠다는데 내가 그를 거절할 이유가 대체 뭔가?”
“전하, 작위가 장식품입니까?”
“의외로 명분도 충분하다네. 백작, 요즘 사람들이 헨젤 영애를 뭐라고 부르는지 아는가? 레이디 오드리라고 부른다네. 레이디 헨젤과 헨젤 영애는 이전에도 많았고 앞으로도 많겠지만 레이디 오드리는 한 명뿐이라면서. 이 정도면 내가 작위 장사를 했다고 생각할 사람은 별로 없을 거야. 자네 같은 사람은 혀를 차겠지만 그런 사람이 어디 흔한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전하께서도 본래는 작위 수여에 부정적이셨잖습니까. 그래서 훈장으로 끝내기로 결정하신 것 아닙니까?”
“생각해 보면 여인의 몸으로 훈장을 받을 정도의 공을 세운 걸세. 사내였으면 마땅히 작위를 주고도 남았어. 백작, 나는 공정하게 일을 처리한 거야.”
공정은 무슨 공정. 억지로 끼워 맞춘 앞말과 뒷말이 요란하게 삐걱거렸다.
“전하!”
“그놈의 전하는 그만 찾게. 레이디 오드리가 지금 왕실에 대고 있는 금액이 어느 정도인지 알면 자네도 할 말이 없을 테니 그러려니 하게나.”
“전하의 신념을 꺾을 정도로 큰돈이었습니까?”
“물론이지. 백작, 요새 금전 운영에 숨통이 좀 트이지 않았나? 그게 다 레이디 오드리 덕이라네. 줄면 줄었지 늘어날 일 없다고 생각했던 곳간에 요즘 밀이 아니라 금을 쌓아주고 있는 게 레이디 오드리야.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고.”
헨젤 백작의 몸이 그 자리에서 휘청 흔들렸다. 치솟은 화 때문에 숨이 잘 안 쉬어졌다.
“그러게 그렇게 영리하고 대담한 딸이면 어릴 적부터 잘 길러서 손안에 두었어야지, 멀리 떨어뜨려 놓고 원하는 대로 자라지 않았다고 그리 화낼 일인가? 아름다운 정원을 위해서는 끝없는 노력이 필요한 법인데, 그대는 정원에 물 한 번 준 적 없으면서 왜 꽃과 나무에게 너희 마음대로 자랐느냐고 호통을 치려 드는군. 그러게 딸 관리를 잘 했어야지.”
“그 부분은……. 후……. 가정사입니다.”
“고작 가정사로 왕위계승예정자를 찾아와 함부로 군 걸 넘어가 줄 테니 백작이 양보하게나. 난 이미 레이디 오드리에게 작위를 주기로 약속했다네.”
가스트로에게서 일방적인 통보를 들은 헨젤 백작이 입을 꾹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조금 뒤, 그는 처음 들어올 때보다 한결 차분한 안색으로 폭탄선언을 했다.
“전하, 사표 쓰겠습니다. 수리해 주시죠.”
“……뭐? 다시 말해보게.”
“제가 나이를 먹고 쇠약해져 도저히 중앙의 격무를 감당할 수 없는 바, 사직을 청합니다.”
헨젤 백작의 머리는 아직도 까마귀 깃털처럼 까맣고, 차가운 회색 눈은 지성으로 반짝였다. 반듯하게 세운 허리는 흔들림이 없고 목소리엔 힘이 있었다. 한 마디로 나이 먹고 쇠약해졌다는 건 믿으려야 믿을 수가 없는 거짓말이었다.
“백작, 지금 날 협박하는 건가?”
“사실을 말하는 겁니다. 전하, 제가 아까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집에 들어가지 못한 지가 벌써 한 달이 넘어갑니다. 저뿐만 아니라 재무국의 직원들 거의 전부가 비슷한 실정인데 그나마 직원들은 젊기라도 하지, 저는 더 못 버티겠습니다.”
“백작!”
“이제 그만 관직을 내려놓고 그동안 소홀했던 영지 관리에 충실하고자 하니 허락해 주시지요.”
가스트로는 헨젤 백작이 뻔뻔하게 협박 아닌 협박을 하는 것에 기가 막혀 헛웃음을 흘렸다. 헨젤 백작이 혼자 처리해 내는 일의 양도 양이지만, 헨젤 백작가가 재무국에서 차지하는 위상만 두고 생각해도 이렇게 멋대로 그만두겠다고 하는 건 말이 안 됐다.
과거 지방 귀족의 권한이 강했던 멜브란트가 국왕 중심의 중앙집권체제로 변화해 가는 과정에는 항상 헨젤이 있었다. 국왕의 국가통제력을 지탱하는 관료제를 체계적으로 가다듬는 과정에서 랄리우스를 밀어내며 입지를 다졌고, 본래 상인들의 느슨한 연대에 가까웠던 은행조직을 지금의 왕립은행으로 바꾸고 어음과 수표 거래를 정착시켰다. 지금 헨젤이 왕가의 금고지기라고 불리는 건 오롯이 헨젤 백작가가 몇 대에 걸쳐 이뤄낸 성과였다.
재무국의 수장은 매번 당대의 헨젤 백작이 맡아왔고, 지금의 헨젤 백작은 반란 진압 이후 바닥으로 추락했던 멜브란트의 경제를 되살리는 데에 큰 공헌을 했다. 1차, 2차 괴물 사태를 수습하는 데에도 뛰어난 역량을 보여주었다. 그런 사람이 이런 시기에 떠나간다면 가스트로의 평판이 떨어질 게 분명했다.
‘지금 제 가문의 힘과 평판을 믿고 날 휘두르려 드는 건가?’
가스트로는 짙은 불쾌감 속에서 천천히 심호흡했다. 조언이 필요할 때 다른 이들도 더러 부를 것을, 적당히 믿을 만하고 가까이 있단 이유로 너무 자주 불렀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얌전히 손에 잡혀 있는 줄 알았던 날 잘 드는 칼이 멋대로 방향을 바꿔 자신을 겨누었다는 생각을 떨치기가 어려웠다.
“내가 레이디 오드리에게 작위를 주기로 한 건 취소하면, 그땐 사직을 청한 걸 무를 건가?”
“딸과는 관련 없는 얘기입니다. 전하, 저도 사람인데 쉬어야지요.”
“그런가? 정말 백작이 레이디 오드리에게 작위를 주기로 한 걸 항의하러 왔다가 거절당한 것과는 관계가 없다는 건가?”
“모든 건 공교로운 우연입니다.”
“거 신기한 우연이 다 있군.”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서로를 조금도 믿지 않는 눈빛이었다. 두 사람은 강경하게 서로의 입장을 내세우며 부딪쳤다. 몇 번의 고함과 힐난 끝에 승자의 깃발을 차지한 건 가스트로였다.
“앞으론 따로 불러 시간을 빼앗지 않을 테니 백작은 돌아가서 일을 하게. 결혼식은 무사히 넘겼다지만 아직 대관식이 남았잖은가.”
“……제가 이번 일로 너무 충격을 받은 나머지 예전처럼 일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노력은 해 보겠습니다.”
헨젤 백작치고는 굉장히 노골적인 경고였으나, 가스트로는 그 비아냥에 가까운 경고를 귓등으로 흘려들었다. 그 대단한 헨젤 백작을 자신이 꺾었다는 만족감이 젊은 왕세자의 감각을 마비시켰다.
바로 그날부터 헨젤 백작의 태업이 시작되었다. 사실 태업이라 봤자 별것 아니었다. 그는 집무실에 딸린 작은 방에서 쪽잠을 자며 쌓인 서류를 처리하는 대신, 해가 질 무렵 저택으로 퇴근했다. 그간 오드리가 전적으로 처리해 왔던 집안일을 보고 받아 몇 가지 간섭을 하고, 근신에서 막 풀려난 하델과 함께 저택 정원을 산책했다. 그리고 새벽별이 뜨기 전에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출근 시간에 딱 맞춰 출근한 헨젤 백작을 기다린 건 눈 밑이 까맣게 된 재무국 직원들과 책상을 가득 채운 서류더미였다.
“백작님, 여기서부터 봐주시면 됩니다. 시급한 순서대로 쌓아놓은 거라……. 예. 그것부터요. 표지에 순서대로 숫자 붙여놨습니다.”
보좌관 일랑이 헨젤 백작 앞에 만년필과 기타 참고 서류들을 착착 쌓았다. 헨젤 백작은 한없이 느긋한 태도로 서류를 넘겼다.
“어젯밤에 얼마나 잤나?”
“예? 아, 예……. 서너 시간쯤 잤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손이 느려서 이만큼밖에 못했습니다.”
“서너 시간쯤 잔 것치곤 적게 했고, 수면시간이 부족한 것치곤 꼼꼼하게 잘 봤군.”
칭찬인지 타박인지 애매하지만, 일랑으로서는 정말 오랜만에 듣는 칭찬이었다. 그는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믿을 수 없어 무심결에 귀를 후볐다. 서류만 보는 듯하던 헨젤 백작이 쯧, 혀를 찼다.
“지저분하게 귀는 왜 파나? 그보다 저기 집무실 구석에 놔둔 간이침대, 얼른 치워 버리게.”
일랑은 몹시 당황했다. 그 간이침대는 그의 것이었다. 일이 계속 쌓이며 퇴근을 하기 힘들어지자 그냥 여기서 자고 출퇴근 시간을 아끼자 싶어 들여놓은 것인데, 들여놓을 때는 그냥 눈감아주더니만 들인 지 열흘도 넘은 지금에 갑자기 이러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백작님, 보기에 안 좋더라도 좀 봐주시면 안 됩니까? 다른 곳은 벌써 다 다른 직원들의 침대가 차지하고 있어서 놓을 만한 자리가 안 나옵니다.”
“일하는 곳에 침대를 두고 잘 생각하지 말고, 퇴근을 하게나. 그 비싼 월세가 아깝지도 않나?”
일랑의 눈에 원망이 차올랐다. 그가 어디 퇴근을 하기 싫어서 안 하는가? 일이 너무 많아서 못 하는 거지. 차마 말은 못하고 속으로만 욕을 퍼붓고 있는데, 믿을 수 없는 지시가 이어졌다.
“오늘부터 제 시간에 퇴근하게.”
“……예? 백작님. 그럼 일이 밀립니다.”
“계속 이런 식으로 일하다간 분명 과로로 쓰러질걸세. 아무리 일이 많고 급해도 사람 목숨보다는 가볍지 않겠나? 조금 밀리더라도 어쩔 수 없지.”
일중독, 완벽주의자, 일의 진행사항 앞뒤 모든 걸 직접 확인하고 끝까지 지켜봐야 직성이 풀리는 헨젤 백작에게서 들을 거라곤 상상도 못해 본 말이었다. 일랑은 또 귀를 파려다가 간신히 멈추고 되물었다.
“다른 직원들은 계속 여기서 쪽잠을 자면서 일하는데 어떻게 저만 퇴근합니까?”
“다 같이 퇴근하면 되지, 별 희한한 소리를 다 하는군. 다른 직원들의 침대도 다 빼도록 하게.”
“그, 백작님……. 다른 부서에서 퇴근 시간에 임박해서 서류를 주는 일이 많습니다. 그런데 저희가 퇴근해야 한다고 그걸 전부 돌려보낼 수는 없지 않습니까.”
“오늘부턴 돌려보내게.”
일랑은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자신의 앞에 앉은 사람이 헨젤 백작이 아니라 다른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망상이 굉장히 합리적으로 느껴졌다.
“백작님, 저…….”
“뭔가? 질질 끌지 말고 말하게.”
“헨젤 백작님 본인 맞으십니까? 다른 사람이 분장하고 와서 헨젤 백작님인 척 하는 건 아니죠? 어떻게 일이 밀려도 되니 서류를 그냥 돌려보내라고 말씀하실 수 있…… 악!”
일랑은 만년필 뚜껑에 이마를 맞으면 꽤 아프다는 걸 몸으로 배웠다. 입에서 나오는 대로 줄줄 말하다가 매를 번 것이다. 종일 책상 앞에 앉아 일하는 사람이 어찌나 팔 힘이 좋은지 이마가 얼얼했다.
“챙겨줘도 난리군. 어차피 내가 없으면 처리도 못 할 서류 아닌가. 다른 부서에는 퇴근 시간을 넘기면 서류를 받아주지 않을 거니 게으름 피우지 말고 제때 서류 내라 전하고, 직원들도 사정 봐주지 말도록 교육하게. 그 일로 문제가 생기면 내가 책임지지.”
“…….”
“안 나가나?”
헨젤 백작이 귀찮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일랑은 혹시나 그가 마음을 바꿀까 두려워하며 허겁지겁 집무실을 뛰어나왔다. 눈이 퀭하게 들어간 직원들이 대체 무슨 일일까 신경을 곤두세우고 그를 바라보았다.
“백작님께서 오늘부터 정신 퇴근하라고 하셨습니다!”
“에이, 설마.”
“일랑 씨, 꿈 꿨어요? 그러게 좀 자라니까……. 자꾸 잠을 줄이니까 서서 잠들고 그러는 거잖아요.”
“농담도 무슨 말 같은 걸 해야 웃어주지. 다음에 또 그런 재미없는 농담하면 확 대가리를 깨버릴 겁니다.”
반응은 싸늘했다. 일랑은 입 대신 눈으로 욕하는 직원들 앞에서 마치 신의 계시를 전하는 사제처럼 번쩍 손을 치켜들었다.
“진짜입니다. 오늘부터 재무국 직원들은 전부 정시 퇴근입니다. 퇴근 시간 이후에 다른 부서에서 주는 서류는 그대로 돌려보내시면 됩니다. 일이 밀려서 벌어지는 문제에 대한 책임은 백작님께서 지신다고 하셨습니다!”
책임 소재 얘기가 나오자 그제야 조금 믿을 만해진 듯, 직원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미치셨나?”
“아니, 그보다는 어디 아프신 거 아닐까? 죽을병이라든가……. 어제 갑자기 일찍 퇴근하셨던 게 의사를 만나야 해서 그랬던 건지도 몰라.”
“병 얘기는 갑자기 왜 나와?”
“내가 예전에 나랍 친구에게서 들은 말인데, 거기서는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변한다고 하더라고. 나랍에서 나온 말이니까 믿을 만한 거 아냐? 거기가 약초학에서는 최고잖아.”
“오, 그럴듯한데. 솔직히 매일 그렇게 일했는데 건강하다는 게 말이 안 되긴 하지.”
헨젤 백작에 대한 루머를 실시간으로 생성해서 퍼뜨리던 직원들이 갑자기 히죽히죽 웃기 시작했다. 그가 정말 미쳤든 아니면 죽을병에 걸렸든, 당장은 눈앞의 퇴근이 더 달콤하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돌려보내면 돌려보낸 만큼 일이 쌓이는 거 아냐? 나중에 한꺼번에 몰아닥치면 어떡해?”
“그건 그때 가서 걱정하자고. 백작님께서 책임져 주신다잖아.”
“그 책임이 내 모가지일까 봐 그러지.”
“최대한 빨리, 많이 처리해서 끝내고 퇴근하면 되지. 백작님은 은근히 공정하시니까 트집잡힐 것만 없으면 돼. 자, 다들 일하자고!”
피곤과 졸음에 절어 여기저기 늘어져 있던 직원들의 몸놀림이 아주 빠릿빠릿해졌다. 다들 눈에 불을 켜고 일하는 광경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일랑은 시종을 불러 간이침대 철거를 명령했다. 너저분하게 재무국 사무실 구석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간이침대들이 사무실 바깥으로 줄줄이 치워졌다. 보는 것만으로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처럼 가슴이 시원한 광경이었다.
‘그런데 이게 나한테도 좋은 일일까는 영 모르겠네. 앞으로도 좋은 일일지도 모르겠고.’
하지만 일랑은 헨젤 백작이 아닌 오드리에게 줄을 선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며 고민에 빠졌다. 알게 모르게 오드리에게 넘어간 상태였던 재무국의 직원들 대부분이 앞으로 누구의 손을 들어줄지 가늠이 어려웠다.
‘일단 알리고 보자.’
헨젤 백작의 변화를 알려야겠다고 생각한 건 일랑만이 아니었다. 그날 이디케는 정시 퇴근한 재무국 직원들에게서 수십 통의 메시지를 한꺼번에 받았고, 그녀에게서 요지를 전달 받은 오드리는 일랑에게 간단히 지시했다.
<대규모 채용 계획을 건의하고 반드시 통과시키세요.>
예전부터 헨젤 백작이 밤낮 가리지 않고 일해서 겨우 꾸려가던 재무국이었다. 아무리 직원들의 업무 효율이 좋아졌다고 해도 그가 자리를 비우면 금세 한계를 드러낼 게 분명했다. 일랑 역시 그녀의 지시에 공감했다. 근본적으로 야근과 밤샘을 하지 않아도 되는 환경을 만드는 게 제일 우선이었고 그러려면 사람이 늘어야 했다.
헨젤 백작은 놀라울 정도로 순순히 일랑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재무국의 살벌한 업무강도는 이미 소문이 날 대로 난 상태였다. 지원자는 기대 이상으로 적었으며 합격자는 그보다 더 적었다.
신입에게 일을 가르치고 자잘한 실수를 커버해 주며 처리 속도를 높였지만 재무국의 상황은 아주 약간 나아진 정도에 그쳤다. 미처 처리하지 못하고 쌓이는 서류가 계속 늘어났고, 재무국 때문에 일이 밀린 다른 부서의 아우성은 점점 커져만 갔다. 재무국에서의 병목 현상 때문에 행정 전체가 느려지고 있었다.
결국 일이 쌓이는 꼴을 더 보지 못한 재무국 직원들 몇몇이 정시 퇴근을 그만두고 추가 근무를 시작했다. 헨젤 백작은 그들을 따로 나무라지는 않았지만 격려하지도 않았다. 그는 추가 근무하는 직원들 앞을 유유히 지나 매일 정시 퇴근했다.
다른 부서 입장에서는 환장할 노릇이었다. 대관식을 앞두고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많은데 서류가 중간에 멈춰 버리니 곳곳에서 곡소리가 났다. 처음엔 헨젤 백작을 붙들고 항의하던 귀족관리들은 상황이 영 나아지지 않자 다른 쪽으로 눈을 돌렸다.
가스트로는 한 뼘은 족히 되도록 쌓인 탄원서에 헛웃음을 지었다. 사람을 안 뽑은 것도 아니라는데, 헨젤 백작이 정시 퇴근을 시작한 것만으로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기가 막혔다. 사람 하나의 능력에 이렇게까지 기대는 조직이 행정 중추에 있었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이런 상황에 이르기까지 그걸 까맣게 몰랐다는 것도.
“이거 참, 아파서 사직하고 싶은 걸 참고 일한다는 핑계가 참 좋아.”
징계를 내리면 아파서 그러하니 책임을 질 수 있게 사표를 받아달라고 할 것이고, 내버려 두면 계속 정시 퇴근을 하며 일이 밀리는 걸 방치할 것이다. 조직과 결재 절차를 개편해서 헨젤 백작이 정시 퇴근을 하거나 말거나 일이 밀리지 않도록 만드는 게 가장 이상적이지만, 단시간에 되는 일이 아닌 데다 대관식이 코앞이라는 게 문제였다.
“이래서 그렇게 자신만만했군…….”
가스트로는 씁쓸하게 인정했다. 그날 말다툼에서 진 건 헨젤 백작이 아니라 자신이었다. 그의 조건부 항복 선언은 헨젤 백작 이전에 오드리에게 먼저 전해졌다. 약속했던 대로 그녀에게 작위를 주려면 아무래도 헨젤 백작의 동의가 있어야만 할 것 같다고 말이다.
* * *
헨젤 백작의 정시 퇴근은 시작부터 오드리에게 상당한 불안감을 안겼다. 일랑으로부터 전해지는 재무국의 업무 분담 현황은 그다지 변한 게 없는데 헨젤 백작이 일을 남겨두고 퇴근한다는 것부터가 불안 요소였다. 오드리 본인부터가 시간을 쥐어짜 가며 일을 해 봤던 경험이 있는지라, 수장의 부재가 조직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예측이 쉬웠다.
그렇기에 가스트로의 항복 선언이 그리 충격적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각오했던 게 드디어 왔구나 싶은 정도랄까. 다만 조금 신기하기는 했다. 자신의 가치가 오로지 일에 있는 것처럼 일에 몰두하던 헨젤 백작이 태업을 수단으로 사용했다는 것이.
“나라면 절대 못 할 짓인데.”
오드리의 어조에는 일말의 감탄마저 담겨 있었다. 이디케가 못마땅하다는 듯 요란하게 혀를 찼다.
“그야 로렐라이는 아가씨의 것이지만 재무국은 백작님의 것이 아니잖아요. 경우가 다르죠.”
“아니, 다르지 않아. 대대로 재무국은 헨젤가의 영역이었어. 하지만 아버님이 이런 일을 저질렀으니 가스트로 전하는 능력이 닿는 대로 재무국을 개편하고 체재를 개혁해서 재무국 수장의 영향력을 줄이려고 할 테지. 어쩌면 하델에게 차기 재무국 수장의 자리를 주지 않을 수도 있어. 그걸 모를 분이 아닌데 이런 선택을 했다는 게 놀라운 거야.”
“거꾸로 얘기하면, 태업을 하고도 재무국 수장의 자리를 도련님께 물려줄 수 있을 거란 자신감을 보이신 걸 수도 있죠.”
“그만큼 조직을 장악하고 있다는 뜻인가? 그런 것치고는 다들 쉽게 넘어왔는데?”
“정말 넘어온 게 맞을까요? 처음 회유 작업을 할 때야 아가씨가 하셨지만, 유지 작업은 아가씨 대신 제가 했잖아요. 혹시 제가 속고 있는 거면 어쩌죠?”
세상 무서운 게 없던 이디케가 드물게 풀이 죽었다. 오드리는 피식 웃으며 이디케에게 냉차를 권했다. 속이 타는지, 이디케가 벌컥벌컥 냉차를 들이켰다.
“그건 아닐 거야. 그랬다면 아버님이 태업을 하는 대신 가스트로 전하께 들어가는 자금부터 끊었을 테니까. 이 메시지가 내게 전해질 일도 없었겠지.”
오드리가 가스트로의 메시지를 팔랑팔랑 흔들었다. 공기에 노출되는 것만으로 농도가 흐려지는 특수잉크로 쓴 메시지인지라, 벌써부터 글자가 옅은 회색으로 보였다. 한 시간쯤 더 지나면 이 종이는 완전히 백지가 될 것이다. 워커와 셰비언의 합작품인 이 특수잉크는 오드리가 몇몇 한정된 사람들에게만 나눠준 비매품이었다.
“전하께 보내는 자금을 더 늘려. 포착될 위험을 조금은 감수해도 괜찮아. 어차피 지금 아버님은 태업 중이시고, 노출되더라도 일랑 씨가 적당히 뭉개줄 거야.”
“백작님의 허락 없이는 작위를 안 준다는데도 자금을 늘려요? 제 마음 같아서는 확 끊어버리고 자금난에 허덕여 보시라고 하고 싶은데요!”
“이런, 이디케가 언제부터 이렇게 과격해졌을까…….”
“한참 됐어요. 데멘사에서 종일 일하면서 느는 거라곤 화밖에 없거든요. 이게 다 아가씨 때문인 거 알죠?”
“내 탓이 아니라고 마냥 부정할 수는 없다는 게 슬프군.”
오드리는 적당히 글씨가 흐릿해진 종이를 따로 꺼낸 상자에 담았다. 그 안엔 백지 종이가 수북이 담겨 있었다.
“아가씨, 그냥 결혼하시면 안 돼요? 꼭 작위가 있어야 헨젤 성을 뗄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아르젠 남작과의 사이도 좋고, 그분이 뭐 부족한 것도 아니고…….”
“내 꿈 몰라? 작위가 있어야 국정회의에 참석할 수 있어.”
“피, 예전엔 벨키스 경이랑 약혼 잘만 하셨으면서 핑계는……. 그냥 로렐라이도 데멘사도 빼앗기지 않을 것 같으니까 이제 작위도 욕심나기 시작한 거 아니에요?”
“이디케, 내가 화내길 바라?”
오드리가 짐짓 목소리를 낮추며 경고했다. 이디케는 입을 삐죽이며 상자를 챙겼다. 그녀가 알기로 오드리의 어린 시절 꿈은 자신의 손으로 세상을 바꾸는 거였지 작위를 갖는 것 따위가 아니었다.
“작위가 없어도 세상을 바꾸는 일은 할 수 있어요. 데멘사의 전보가 사람들의 생활을 얼마나 바꿔놓았는지 아가씨는 체감이 잘 안 되시죠? 전보를 만든 건 아르젠 남작이라지만 거기에 과감한 투자를 결정하고 돈을 구하러 사방으로 뛰어다닌 건 아가씨세요. 아가씨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데멘사는 없어요. 충분히 자부심을 가져도 된다고요.”
“소녀는 자라서 어른이 되고 작은 묘목은 자라서 하늘을 덮는 거목이 되기 마련이야. 내가 어린 시절의 꿈 이상을 바라면 안 될 이유라도 있어?”
“으음…….”
이디케가 차마 아니라는 말은 못하고 미간을 모은 채 끙끙거렸다. 사실 오드리라고 이디케가 매양 결혼을 강권하는 이유를 모르지 않았다. 만탈락에 있을 땐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처럼 설치고 다니던 오드리가, 브란젤에서는 사방에서 발목을 잡혀 한 걸음 떼는 것도 버거워하니 그게 보기 힘들어 그러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그녀가 편하기를 바라서.
하지만 걱정도 정도껏 들어야 고맙지, 걱정이 지나쳐 간섭이 되면 짜증이 나는 게 사람이다. 오드리는 제 오른팔도 아깝지 않은 이디케에게 정도 이상으로 화내지 않기 위해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자금이 끊기면 전하께서 내 요구를 들어줄 이유가 사라지잖아. 일단은 계속 끈을 유지해야 돼. 다 알면서 굳이 떠보지 마.”
“치……. 네, 제가 잘못했어요. 그럼 아가씨, 이렇게 된 거 본래 예정했던 대로 가시는 게 어때요? 수집한 증거들을 바로 가스트로 전하께 올리시는 거예요. 오스미다 전하께서 아가씨의 뒤를 봐주실 테니 성년까지 기다리지 않으셔도 되잖아요.”
밀리나가 오드리에게 물려준 만탈락은 빈껍데기가 아니었다. 그곳엔 랄리우스가 자신의 자리를 차지한 헨젤을 고꾸라뜨리기 위해 칼을 갈며 모아둔 증거들이 때를 기다리며 잠들어 있었다.
그만큼 위험도도 컸다. 성년이 되도록 만탈락에 쭉 처박혀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예전에야 로렐라이의 돈으로 작위를 산 후 그 증거들을 이용해 헨젤 백작에게서 만탈락을 받아낼 꿈을 꾸었다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안 돼. 내가 작위를 가졌다면 모를까, 안타깝게도 지금은 나도 헨젤이야. 내가 가스트로 전하의 입장이면 내게 돈만 빼먹고 버릴걸? 아버님도 그걸 뻔히 알고 있으니만큼 협박용으로도 못 써먹을 거고……. 아, 이럴 땐 내가 왜 아직도 열여덟인지 모르겠다니까.”
“아가씨는 마님의 결혼 첫 해에 태어나셨잖아요.”
“알아, 알지만……. 그냥 아쉽다는 거지.”
두 살만 더 많았으면, 결혼을 하지 않고도 성인으로 인정받는 스무 살이었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자유로웠을 것이다.
“그러게 결혼하시라니까. 결혼해서 성을 갈고 나면 그 증거들 쓰는 거 아무 문제없잖아요.”
“이디케, 셰비언이 네게 뇌물이라도 먹였니? 그놈의 결혼 소리는 아주…….”
오드리의 날 선 핀잔에 이디케가 딴청을 부렸다. 주변을 챙기라는 워커의 조언을 진지하게 들은 셰비언이 이디케에게도 상당한 선물을 하고 있다는 건 죽을 때까지 비밀이었다.
“그럼 뤼나소는요? 그건 충분히 써먹을 수 있지 않나요? 그러려고 아르젠 남작을 계속 이곳저곳에 보내고 계신 거 아니었어요?”
“……안 그래도 고려하고 있어.”
오드리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약제실에 처박혀 며칠 밤을 샌 다이앤이 아주 은밀하게 올린 보고서엔 아주 의외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덕분에 요즘 오드리는 그 자료를 자신에게 넘긴 라비린의 진의를 파악하느라 골머리를 썩였다. 자칫 잘못하면 베려고 휘두른 칼에 자신이 맞아 죽을지도 몰랐다.
“대중에게 공개만 안 되면, 다른 귀족들이 모르기만 하면 괜찮아요. 가스트로 전하는 알아도 모른 척 넘어가실 거고 되레 아주 잘 써먹으실 거예요. 여차하면 오스미다 전하께서 도와주실 거고요.”
“가끔 생각하는데, 넌 나보다 더할 때가 있어.”
이디케가 어깨를 으쓱였다.
“다 아가씨에게서 배운 거예요. 전 본래 아주 순진한 소녀였다고요.”
“유모도 그 말에 동의할까?”
“당연하죠. 아무튼 너무 늦으면 안 돼요. 그땐 진짜 결혼밖에 답이 안 남을걸요. 아가씨가 결혼하시면 저야 매우 기쁘겠지만요.”
“일단은 일랑 씨에게도 사정을 알려줘.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자. 아직 시간 있잖아?”
오스미다와 가스트로에게 들어가는 자금 관리는 이디케와 일랑이 함께하고 있었다. 일랑은 하루에 서너 번씩 내가 대체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후회하면서도 시간을 돌이킬 수 없어 오드리에게 협력 중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사정을 알게 된 일랑의 반응은 오드리나 이디케보다 격렬했다. 헨젤 백작의 태업으로 자신에게 떨어진 일이 얼마나 많은지 아느냐는 짜증과, 그리 자신만만하더니만 이게 뭐냐는 원망, 이럴 거면 자신을 왜 끌어들였느냐는 화 등등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편지 속에 아주 빽빽했다.
오드리는 쓸데없는 말은 휙휙 넘기고 중요한 부분만 골라 읽었다. 사방에서 쪼이다 못해 바빠서 죽어버릴 것 같다는 일랑이 직접 약속장소와 시간을 지정하고 만나기를 청하고 있었다.
“이디케, 셰비언의 복귀 예정일이 언제지?”
“늦어도 내일 오전쯤이면 도착하실 거예요.”
“딱 좋아. 줄을 잘못 잡은 게 아닌가 새삼 후회하는 팔랑개비에게 신기한 경험을 시켜줄 수 있겠군. 겸사겸사 일도 좀 시키고.”
“그럼 변장 준비는 안 해도 되는 거네요?”
“그래. 그건 필요 없어. 그보다 다이앤에게 내가 머리 염색을 빼려고 마음먹었으니 준비해서 오라고 해.”
이디케는 쉽게 답하지 못하고 멈칫거렸다. 오드리가 눈을 치뜨고 혀를 찼다.
“언제는 그놈의 염색 언제 빼느냐고 난리더니만, 지금은 뭐가 그리 마음에 걸려서 망설여?”
“아가씨, 아르젠 남작께서 아가씨의 초록색 머리칼을 굉장히 좋아하시는데…….”
“왜, 내 머리칼이 검은색이 되면 그가 날 사랑하지 않을 것 같아?”
“음……. 조금 서운해하시지 않을까요? 말이라도 해 보고, 그래도 괜찮다고 하시면 그때 빼시는 게…….”
“셰비언 보기 좋으라고 염색하고 있던 거 아니야. 그리고 고작 머리색이 바뀐 정도로 사랑이 식을 정도의 남자면 지금이라도 걷어차는 게 맞고.”
말이야 바른 말인데, 어디 연애라는 게 그리 원칙대로만 돌아가는 것이던가. 이디케는 물론이고 다이앤마저도 오드리가 머리 염색 빼는 걸 반대했지만, 오드리의 고집은 대단했다. 결국 다이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염색을 뺐다.
다이앤이 만든 특제 염색약은 염색도 잘 되지만 빠질 때도 깨끗하게 잘 빠졌다. 하도 오래 봐서 이젠 본래 타고난 머리색처럼 느껴지던 녹발은 금세 그믐밤 하늘보다 더 까만 흑발로 탈바꿈했다. 윤기 자르르한 검은 머리칼이 마법등의 빛에 우아하게 반짝였다.
“혹시 몰라 반대하긴 했지만, 아가씨는 역시 검은 머리가 잘 어울려요…….”
머리칼을 정성들여 빗질하던 다이앤이 한숨을 쉬며 감탄했다. 유독 피부가 흰 데다 머리칼마저 은발인 셰비언과 가무잡잡하게 그을린 피부에 흑발로 돌아온 오드리가 나란히 서면, 누군가 일부러 흑백으로 색을 맞춰 쌍으로 만든 인형처럼 보일 것이다.
“죽을 때까지 초록색 머리칼로 사실 것 같더니, 왜 갑자기 마음이 변하신 건데요?”
“뭔 짓을 해도 벨트람 소리에서 벗어날 수가 없으면 이용이라도 해야지.”
결혼식이 끝난 후, 벨트람 포스터가 차지하고 있던 자리엔 볼린을 모티브로 한 라디아타의 포스터가 걸렸다. 라디아타가 볼린을 언급한 걸 전해들은 네이기스가 몇 가지 모티브를 급히 추가해서 수정한 그림이었다.
한데 네이기스가 굉장한 정성을 들여 라디아타의 황홀한 금발과 자수정 눈동자를 그려냈음에도 이상하리만치 반응이 뜨뜻미지근했다. 도리어 지난 버전의 벨트람 포스터를 구할 수는 없느냐는 문의가 극장에 쇄도했다. 요즘엔 무려 오드리에게 직접 포스터에 대한 말을 꺼내는 작자들마저 속속 나타나는 중이었다.
이런 상황에 오드리가 검은색 머리칼로 사교모임에 나타나면 반응이 어떨지, 보지 않아도 뻔했다. 기자들은 신나서 기사를 써댈 것이고, 전쟁과 승리의 신 벨트람의 이미지가 곧 오드리의 이미지가 될 것이다. 다이앤이 안절부절 오드리를 걱정했다.
“아가씨, 다시 염색하고 싶어지시거든 언제든 불러주세요. 미리 만들어둔 염색약 많아요.”
“괜찮다니까. 귀찮게 하지 말고 이만 돌아가렴.”
“아가씨, 그럼 옷을 갈아입혀 드릴게요.”
“됐다니까.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나가!”
오드리는 자꾸 말을 붙이는 다이앤을 쫓아내고 거울 앞에 앉아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평생을 흑발로 살았는데 새카만 머리칼이 새삼 낯설었다.
‘괜히 바꿨나?’
이디케와 다이앤 앞에선 세상 당당하게 굴었지만, 막상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고 나자 마음이 약해졌다. 고작 머리색을 바꾼 것뿐인데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초록색 머리칼이 주는 이질감이 사라진 자리에 헨젤 특유의 서늘하고 냉정한 분위기가 짙게 감돌았다.
“고작 이걸로 실망하면 확 걷어차야지.”
소리 내어 말해도 불안이 걷히지 않았다. 말로야 걷어찬다고 하지만, 정말 그럴 수 있을지 스스로도 자신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오드리는 생긋 귀엽게 미소를 짓거나 눈꼬리를 내리거나 하며 이런저런 표정을 지어보았다. 하지만 표정이 늘어날수록 스스로에 대한 한심함만 늘어났다. 사랑은 사람을 겁쟁이, 멍청이로 만든다더니 지금 자신의 꼴이 딱 그랬다.
‘에이, 그냥 자자.’
계속 깨어 있다간 다이앤을 도로 불러다가 염색을 다시 해달라는 꼴불견을 보일 것 같았다. 오드리는 침대 속으로 기어들어가 베개 아래에 머리를 파묻었다.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잡념에서 조금씩 벗어나 마침내 잠에 빠져들기 직전, 누군가 어깨를 톡 건드리더니 이어 머리칼을 한줌 집어 들고 쓰다듬었다.
이디케도 다이앤도 아니다. 인지한 순간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오드리는 벌떡 일어나 앉으며 뒤로 물러났다.
“깨울 생각은 아니었는데……. 미안해요.”
경계와 긴장감이 넘치는 시선을 마주한 셰비언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오드리는 요란하게 쿵쾅거리는 심장을 붙들고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셰비언의 얼굴을 확인했음에도 빳빳하게 굳은 몸이 잘 풀리질 않았다.
“내일……. 내일 온다며?”
“아가씨가 보고 싶어서 일찍 왔어요.”
“기차도 멈췄을 텐데 어떻게?”
밤이 되면 안전을 이유로 여객 열차의 운행이 중단된다.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셰비언이 용이라는 건 까맣게 잊은 듯한 질문이었다. 셰비언은 숨죽여 웃었고 뒤늦게 실수를 깨달은 오드리가 얼굴을 붉혔다.
“날아온 건가?”
“네에. 숙소의 침대에 누웠더니 아가씨 생각이 나서, 그 길로 날아왔죠. 사실 날아오면서도 내가 너무 급한 거 아닐까 걱정했어요. 그런데…….”
셰비언이 손을 뻗어 오드리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매끄러운 머리칼이 그의 손가락 사이로 스르르 빠져나갔다.
“역시 일찍 오길 잘했어요. 아가씨의 바뀐 모습을 조금이라도 빨리 봐서 기분이 좋아요. 염색은 언제 뺀 거예요?”
“오늘 저녁에…….”
“그럼 이 멋진 흑발을 본 사람은 아직까지 몰리 양과 락시 양뿐이겠네요? 그 둘이야 어쩔 수 없으니 결국은 내가 처음인 셈이잖아요? 세상에, 이런 행운이 있나!”
셰비언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오드리를 끌어안고 그녀의 정수리에 입을 맞췄다. 오드리는 셰비언의 품에 완전히 파묻혔다. 그의 옷자락에선 뜨겁고 건조한 모래 냄새가 났다.
“음……. 그대는 내 초록색 머리칼을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좋아하죠. 하지만 녹발이 아니라고 아가씨가 다른 사람이 되는 건 아니잖아요?”
“이디케와 다이앤이 걱정이 많았어. 그대가 싫어할 거라고 말이야.”
“그거 참 이상한 걱정이네요. 머리색 바꾸는 것과 옷 갈아입는 게 뭐가 다르다고 그러는 거죠? 옷은 일정에 따라 하루에 서너 번도 더 갈아입잖아요.”
셰비언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오드리는 그에게 세상엔 연인의 옷차림마저도 자신의 취향대로 강요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해주려다 그만두었다. 승마바지와 중부식 드레스의 차이를 단순히 바지와 치마 정도로만 이해하는 이에게 그런 얘길 해 봐야 인간의 문화는 쓸데없이 복잡하다는 소리나 들을 게 뻔했다.
“아무튼 그대가 괜찮다니 다행이야. 그대가 워낙 초록색 머리칼을 좋아하니, 나도 조금은 걱정했거든.”
“이거 참, 아가씨는 평소엔 놀라울 정도로 대범하면서 때때로 영 이상한 곳에 신경을 쓰신다니까요. 그보다 아가씨, 흑발이 정말 예쁘긴 한데 문제가 있어요.”
“문제?”
“큰일이에요. 이젠 옐로다이아 장신구 세트가 안 어울리겠어요.”
순간적으로 긴장했던 오드리는 맥이 탁 풀려 셰비언의 어깨를 때렸지만, 셰비언의 걱정은 진심이었다. 파격적인 색으로 시선을 분산시키던 머리칼이 검은색이 되고 나자 오드리의 선명한 초록색 눈동자가 놀라울 정도로 도드라졌다.
“어설픈 보석으로는 아가씨의 눈빛을 이길 수가 없겠는걸요. 알룬드의 목걸이도 지금은 안 되겠어요.”
“그대의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거야.”
“내일 외출 전에 장신구를 걸쳐 보시면 제 말이 맞다는 걸 알게 될 거예요.”
“내일까지 기다릴 게 뭐 있어? 지금 당장 걸쳐 보면 되지.”
오드리는 망설일 것도 없이 드레스룸으로 셰비언을 끌고 들어갔다. 실내복 위에 케이프 코트를 걸쳐 대충 외출복 흉내를 내고는 보석함을 열었다. 다이앤이 열과 성을 다해 모아온 보석들이 휘황하게 반짝였다.
하지만 수십 개의 장신구 중 어떤 것도 셰비언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보석상의 마네킹처럼 장신구를 갈아 끼던 오드리는 텅 빈 보석함 바닥이 어이없어 헛웃음을 지었다. 다이앤도 눈이 아주 높고 까다로운데, 아무래도 셰비언에 비할 바는 아닌 듯했다.
“이게 다 안 되면 난 어떻게 다니라고?”
“당분간은 다알리아 머리핀으로 참아주세요. 아가씨의 눈에 밀리지 않는 에메랄드를 찾아볼 테니까요.”
셰비언이 오드리의 머리에 다알리아 머리핀을 얹었다. 노란빛이 도는 흰 꽃의 형상을 한 머리핀은 흑발에도 아주 잘 어울렸고, 단지 그것만으로도 분위기를 화사하고 화려하게 만들었다.
“아주 예뻐요.”
생각지도 못한 시점에 훅 들어온 칭찬에 오드리의 뺨이 붉어졌다. 달빛을 뽑아 만든 듯 화사한 은발을 늘어뜨리고 웃는 셰비언이야말로 아름답다는 찬사가 딱 어울리건만, 입에 풀이 발린 것처럼 말이 나오질 않았다. 누군가 보드라운 깃털로 살살 문지르는 듯 가슴 안쪽이 간질간질했다.
“아가씨, 오늘은 어땠어요? 제가 없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요.”
자려던 사람을 깨워놓고 궁금한 게 뭐가 그리 많을까. 하지만 생글생글 웃는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피로 같은 건 죄다 잊히고 묻는 대로 대답해 주고 싶어졌다.
오드리는 어리광이라도 부리는 것처럼 셰비언의 무릎에 걸터앉아 헨젤 백작의 방해 공작을 고자질했다. 일에 인생을 건 것처럼 굴던 그가 설마 태업을 할 줄은 몰랐다며 투덜대는 것도 잊지 않았다. 셰비언이 오드리의 손을 지분대다 손등에 입을 맞추며 웃었다.
“다행이네요, 아가씨. 라비린 녀석이 준 거래내역이 사실이라서. 좋은 무기잖아요. 그렇죠?”
“……아직도 중부식 드레스와 남부식 드레스를 입을 자리를 따로 구분하지도 못하면서 그런 건 잘만 아네.”
“그야 당연하죠. 전 전쟁을 치른 경험이 있는걸요. 그런 쪽으로는 감각이 아주 발달했어요. 아가씨도 알고 계시죠? 반격의 기회를 잘 잡으면 상대에게 치명타를 입힐 수 있다는 거.”
“알아. 그렇게 명줄을 끊어놓은 경쟁자가 몇인데 모를까. ……그래서 말인데 내일 나 좀 도와주겠어? 일랑 씨가 새삼 후회를 하는 것 같아서, 좀 신기한 경험을 시켜주고 싶어.”
당연히 허락할 거라고 생각하고 던진 질문이었다. 한데 셰비언은 오드리보다 한술 더 떴다.
“굳이 내일 만날 필요가 있나요? 지금 제가 여기 있는데. 지금 만나러 가는 게 어때요?”
“지금? 이 밤에?”
“얼굴 아실 테고, 본명 아실 테고, 사는 곳도 알고 계실 테죠. 그 정도로 분명한 대상이 범위 안에 있기만 하면 얼마든지 찾아갈 수 있어요. 예전에 그런 식으로 레이디 타우레드…… 아니, 이제 왕세자비 전하라고 불러야 하나? 아무튼 그렇게 만났었잖아요.”
“그게 마음대로 되는 거였어?”
셰비언이 오드리의 입술을 훔쳤다.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그녀가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다는 것처럼.
“교묘하게 얽어서 옴짝달싹할 수 없게 만드는 것도 좋은 전략이지만, 미처 준비하지 못했을 때를 노려 빈틈을 찌르는 것만큼 효과적인 전략도 없죠. 어때요? 지금 당장 가는 거?”
“그건 그대 말이 맞아. 하지만 이 차림으로?”
“새카만 머리칼을 풀어 늘어뜨리고, 새하얀 케이프 코트를 입었어요. 비록 당장 흑마가 옆에 있는 건 아니지만 아가씨가 윈디를 타고 내달렸던 걸 모르는 사람이 더 적고, 애초 없던 새 대신에 새하얀 용이 곁을 지켜요. 벨트람을 겹쳐 보기 딱 좋은 조건이죠. 벨트람은 전쟁과 승리의 신이라면서요?”
오드리는 벨트람이란 말에 반사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가 얼른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림 같은 미소가 아주 우아했다.
“그래, 승리의 신이니 마땅히 이겨야겠지. 오랜만에 게으름 피우길 잘했군. 하마터면 코트를 잠옷 위에 입고 있을 뻔했잖아? 셰비언, 날 일랑 씨에게 데려다줘.”
셰비언이 손을 내밀었다. 오드리는 그 서늘한 손을 단단히 맞잡았다. 시야가 까맣게 암전되더니 이내 수십 갈래의 복도가 눈앞에 나타났다. 오드리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발을 내디뎠다. 망설임이라곤 조금도 없는 걸음이었다.
* * *
헨젤 백작의 정시 퇴근이 길어지면서, 안 그래도 안달을 내던 다른 관리들의 참을성이 바닥을 드러냈다. 그러나 헨젤 백작은 굽히지 않았고, 그 불똥은 재무국의 직원들에게 튀었다. 자발적으로 추가 근무를 하던 직원들뿐만 아니라 정시 퇴근을 하던 다른 직원들까지도 강제적으로 추가 근무에 돌입했다.
재무국 직원들은 최종적으로 헨젤 백작에게 올리는 서류는 검토 필요 없이 결재만 하면 되도록 꾸미는 걸 목표로 삼고 일했다. 말이 태업이지, 헨젤 백작은 그저 정시에 퇴근할 뿐이었고 근무 중에는 성실하게 일을 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헨젤 백작의 빈자리를 채우기엔 역부족이었다. 기존 직원은 물론이고 새로 들어온 신입들까지도 눈 밑이 시커멓게 되도록 일하는데도 간신히 현상 유지나 하는 게 고작이었으니, 지칠 대로 지친 직원들은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갑자기 들이닥친 치안대를 보고도 반응이 느렸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협조 부탁드립니다.”
“……무슨 일이시오?”
“대관식을 앞두고 조심해야 할 시기에 혹시 금지물품이 반입된 게 있는지 점검하는 겁니다. 의례적인 일이니 그리 놀라지 않으셔도 됩니다. 금방 끝내고 가겠습니다.”
대관식을 앞두고 치안대가 재무국을 뒤진다니, 그런 의례는 들어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먼저 나서서 치안대를 막아섰던 일랑이 뒤로 물러나니, 재무국의 직원들은 차마 치안대를 말리지 못했다. 헨젤 백작이 없는 재무국에서 제일 영향력이 있는 사람은 일랑이었다.
치안대는 재무국 직원들의 책상을 샅샅이 훑은 걸로 모자라 헨젤 백작의 집무실 구석구석까지 전부 뒤졌다. 직원들은 불안해하며 일랑의 눈치를 살살 살폈지만, 그가 자리로 돌아가 태연히 일을 시작하자 곧 안심하고 소곤대기 시작했다.
“치안대원들은 이런 야밤에도 일을 하나?”
“우리도 하는데 치안대도 하겠지. 2차 괴물 사태 일어나기 전에 왕궁마법사들이랑 엄청 고생했었잖아.”
“아, 그랬지. 매일 서류만 보다 보니까 그때 기억이 다 가물가물해졌어.”
“이해해. 재무국 힘들다는 말은 많이 들었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니까. 과중한 업무를 처리하는 건 나름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여긴 진짜…….”
지독한 업무량을 두고 투덜거리던 직원들은 일랑의 뾰족한 눈초리에 냉큼 입을 다물었다. 일랑은 퍽 엄하고 무서운 사수였다. 치안대는 오래지 않아 돌아갔고, 치안대 때문에 부산해졌던 재무국의 분위기는 빠르게 정돈됐다. 늦은 밤의 소란은 그렇게 끝났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헨젤 백작은 재무국에 출근하지 않았다.
웬일로 헨젤 백작이 지각을 다 하느냐며 키득대던 직원들은 점심 무렵이 되어서도 그가 나타나지 않자 주체할 수 없는 불안함을 호소했다. 오늘 아침에 해가 동쪽에서 뜬 거 맞느냐는 우스갯소리가 마냥 농담은 아니었다.
“백작님도 하루쯤 쉬고 싶은 날이 있을 수도 있지. 자네들은 나중에 휴가 쓰겠다는 말 하지 말게.”
마침 서류를 가지러 나왔던 일랑이 직원들의 입을 막았다. 직원들은 찔끔한 표정으로 얼른 책상에 고개를 처박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일랑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입을 툭 내밀고 투덜거린다.
“그놈의 휴가, 일이 이렇게 많아서 갈 수는 있는 거야?”
“이건 내 추측이지만, 일랑 보좌관도 한 번도 휴가간 적 없을걸.”
“일랑 보좌관은 처음 일을 시작할 때부터 재무국이지 않았어? 몇 년을 이러고도 탈출도 안 하고, 백작님을 감쌀 여유도 있고……. 속도 좋다.”
그러나 일랑이 속이 좋아서 헨젤 백작을 감싼 것이 아니듯, 헨젤 백작은 갑자기 하루 쉬고 싶어서 결근한 게 아니었다.
지난 새벽, 저택에 들이닥친 치안대에게 끌려와 가스트로의 궁에 갇혔기 때문이었다.
영문도 모르고 끌려와 뜬 눈으로 밤을 새운 헨젤 백작은 아침 해가 뜨기 직전에 이르러서야 가스트로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백작, 잘 주무셨소?”
“전하야말로 아주 잘 주무셨나봅니다. 얼굴에서 번쩍번쩍 윤이 나시는 걸 보면.”
“그런가? 희한하군, 난 백작 때문에 한숨도 못 잤는데 내 얼굴이 좋아 보인다니.”
눈 밑이 푸르스름하고 입술이 죄다 터서 피가 비치는 게, 한숨도 못 잤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 듯 피곤한 안색이었다. 하지만 부드럽게 휜 눈매나 능글능글한 웃음이 밴 입꼬리는 헨젤 백작의 좋아 보인다는 말이 빈말이 아니게 만들었다.
“백작, 아직도 그대가 소환된 이유를 모르는가?”
“제가 알겠습니까? 정식 소환장도 없이 새벽에 들이닥친 치안대에게 질질 끌려와 갇힐 정도로 정시 퇴근이 큰 죄인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헨젤 백작이 대놓고 말할 정도로 그가 당한 취급은 몹시 험했다. 지금도 결박만 안 당했다 뿐이지, 창문이 하나도 없는 좁고 어두운 방에 가둬둔 게 딱 죄인 취급이었다. 난데없이 끌려온 헨젤 백작이 화내는 것도 당연하건만, 가스트로의 미소는 지워지지 않았다.
가스트로가 들고 온 주머니를 뒤집었다. 푸른 꽃 수십 송이가 후드득 떨어져 탁자에 쌓였다. 금방 따온 듯 생기가 넘쳤다.
“이게 뭔 줄 아는가?”
“뤼나소군요. 꽃송이가 마르지 않고 싱싱한 게…… 마법 처리를 한 겁니까? 그게 아니면 누군가 브란젤에서 뤼나소를 재배하기라도 했다는 건데, 정말 그렇다면 큰일이군요. 보건국이 한바탕 뒤집히겠습니다. 한데 그게 저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 제 앞에 들이미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이걸 어디서 가져온 건지는 아는가?”
“그걸 제가 어찌 압니까? 설마 제 집 뒷마당에서 꺾어오기라도 하셨습니까?”
가스트로는 헨젤 백작의 꼿꼿함이 너무나 신기했다. 새벽녘의 무례한 강제소환, 창문 없는 방에서의 감금, 거기에 언제든 칼을 뽑을 준비가 된 치안대원에게 둘러싸여 밑도 끝도 없는 추궁을 당하면서 어찌 저리 흔들림이 없는가.
“백작의 뒷마당에서 꺾어왔으면 차라리 쉬웠겠지.”
정교하게 스케치된 얼굴 초상들이 헨젤 백작 앞에 펼쳐졌다. 가스트로는 그 얼굴들 하나하나를 짚으며 이름을 불렀다. 눅스의 마로니. 체빌라의 데에소, 페몰의 텔……. 마지막 초상을 짚었던 손가락이 헨젤 백작을 가리켰다.
“브란젤의 뉴터.”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왕국의 뒷골목에 뤼나소가 돌고 있다는 소문은 꽤 오래전부터 있었지. 빌어먹을 중독자들을 아무리 잡아내도 끝이 보이지 않기에, 아예 유통경로를 통째로 들어낼 생각으로 수사를 하고 있었다네. 한데 거기에 이름 높은 뱀이 걸려들 줄은 꿈에도 몰랐지 뭔가. 뤼나소 유통망의 끝이라는 뉴터가 그 뉴터 비레직 헨젤일 줄이야.”
뤼나소를 비롯한 마약을 유통하는 일당 색출은 치안대의 숙원사업 중 하나였다. 가스트로는 영 의욕이 없던 선왕보다 훨씬 과감한 편이었고, 치안대는 군의 수색대까지 동원해서 일을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일단 마음먹고 덤비자 잔챙이 유통 업자를 잡아내는 건 쉬웠다. 하지만 진짜 굵직한 놈들은 잡아내기가 어려웠고, 기껏 잡아도 점조직 형태라 중간에 끊기기 일쑤였다. 그중에서도 브란젤의 뉴터는 겨우 이름만 알아냈을 뿐, 그림자조차 밟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 오드리가 뤼나소의 유통경로를 특정하기 충분한 거래내역과 지도를 들고 왔으니 가스트로가 오죽 기뻤겠는가. 그럼에도 신중해야 했기에, 우선 그 정보를 바탕으로 점조직 유통망 색출을 시도했는데,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그 가운데 드러난 헨젤 백작은 대량의 뤼나소를 정기적으로 구입하는 최우수 고객이자 나랍에서 브란젤까지 오는 뤼나소 유통망을 구축한 장본인이었다.
가스트로가 낄낄 웃으며 탁자를 두드렸다. 어딘지 미친 것처럼 보일 정도로 기분이 좋아 보였다.
“백작이 뤼나소를 썼다는 걸 알고 나니까 그 사람 같지 않던 업무처리 속도가 납득되더군. 솔직히 백작이 그걸 쓴 건 이해가 돼. 뤼나소를 적절히 쓰면 업무능력향상에 도움이 된다는 개소리가 만연하던 때가 그리 먼 과거가 아니니까.”
헨젤 백작이 아직 십 대 소년이던 시절만 해도 뤼나소에 대한 인식이 지금처럼 나쁘지 않았다. 지독한 중독성과 판단력 저하, 섭취가 반복될수록 효능이 떨어지는 등의 부작용은 나중에 발견된 것이었다.
“그런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게 있다네. 가명을 쓰지 않은 건 대체 어떤 생각에서 그런 건가? 절대 들키지 않으리라는 자신감? 아니면 헨젤 가문의 힘에 대한 믿음? 어리고 미숙한 왕은 감히 대귀족을 건드릴 수 없을 거라는 확신?”
“전하께서 착각하신 겁니다. 뉴터는 흔한 이름입니다. 당장 뒷골목에 가서 뉴터, 혹은 뉴터와 비슷하게 들리는 이름을 가진 사람을 골라내면 한 시간 이내에 열 손가락을 채우고도 남을 겁니다.”
가스트로가 손바닥만 한 주머니를 꺼내 뒤집었다. 열린 입구에서 엄지손톱만큼 넓적하고 흰 알약이 우수수 쏟아졌다. 치안대가 어젯밤에 재무국의 헨젤 백작 집무실에서 수거해 온 약이었다. 마법과 기계장치를 이용해 정교하게 숨겨진 약이었지만, 치안대는 숨긴 물건을 찾아내는 쪽으로 달인에 가까운 경험과 기술을 갖고 있었다.
그 약들을 바라보는 헨젤 백작의 표정은 끔찍하리만치 무표정했다. 어떤 감정도 읽히지 않는 얼굴이었다. 가스트로가 탁자를 쭉 훑으며 물었다.
“백작, 내가 이 탁자 가득히 증거물을 올리길 바라나? 그 다음은 나도 장담할 수 없다네.”
“…….”
“종류별로 나눠서 전시해 줄 수도 있어. 신문 기자들이 그런 배치를 좋아하더군. 그림으로 그려서 설명하기 편하다고 말이야.”
“전하야말로 그 다음을 걱정하셔야 할 겁니다. 제 빈자리를 어찌 감당하실 셈입니까?”
변명 대신 협박으로 노선을 바꾼 것치고는 놀랍도록 태연한 대꾸였다. 가스트로는 그만 헛웃음을 지었다. 정말 분하지만, 헨젤 백작의 자신감은 나름 합당했다.
헨젤 백작은 단순히 정시에 퇴근하는 것만으로도 행정 각 부의 일처리를 느려지게 만든 사람이었다. 그의 자리가 갑자기 공석이 되면 발생할 혼란을 감당하기엔 시기가 너무 나빴다. 두 차례나 괴물 사태를 겪은 멜브란트의 여력을 파악하고 싶어 하는 각국의 고위직들이 대관식을 핑계로 대거 들어와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전하, 제가 마음먹고 일을 엉망으로 하기 시작하면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상상이 되십니까?”
“이젠 혓바닥에 기름칠도 안 하는군. 내가 백작의 목을 칠까 겁나지 않는가? 마약 복용 및 유통에 대한 처벌은 아주 무겁다네. 사형으로 다스린 전례가 수도 없이 많아.”
“치안대는 조용히 찾아왔고 제가 갇힌 이곳은 감옥이 아니라 정갈하게 꾸며진 방입니다. 심지어 제가 정말 뤼나소를 복용했는지 확인할 의사마저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전하께서 절 회유해 써먹을 생각으로 여기 앉혀놓은 걸 아는데 제가 왜 두려워해야 합니까? 자, 말씀하시지요. 저 같잖은 증거를 빌미로 저에게 뭘 시키고자 하십니까?”
가스트로는 헨젤 백작의 회색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이전에 만났을 때와 똑같이 서늘하고 냉정하며 지성으로 빛나는 눈이었다. 정기적으로 뤼나소를 복용했다고는 믿어지지 않는 침착함이 어쩐지 오싹하기까지 했다.
“상황파악이 빠르고 판단력이 좋군. ……지나치게 좋아. 그래, 좀 지나쳐. 백작, 뤼나소를 복용한 거 맞나? 만약 아니라면, 먹지도 않을 물건은 왜 구입하고 유통망은 왜 정비했나?”
“제가 알아온 전하는 아주 영리한 분이십니다. 이번에도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시는군요.”
“이런, 백작에게 영리하다는 칭찬을 듣다니 아주 감격스러워. 스승에게 자랑할 만한 업적이야. 오늘 밤엔 오랜만에 편지를 써야겠군.”
헨젤 백작의 표정 없던 얼굴에서 한 줄기 기대감이 피어올랐다. 가스트로는 그 기대감을 무참히 꺾어 짓밟았다.
“하지만 왕국을 이끌어가는 지배자에게는 때때로 영리함보다 뻔뻔한 낯짝이 더 필요한 순간이 있지. 지금이 바로 그때인 것 같군.”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는 겁니까?”
“바로 그걸세! 지금 내 손에 들어온 증거들을 조합하면 자네를 당장 광장의 교수대에 목매달 수도 있는데 그를 써먹지 못할 이유가 대체 뭔가? 낚시 바늘 하나로 두 마리 고기를 잡을 수 있는데 내가 마다할 이유가 대체 뭐가 있지?”
진실이 무슨 상관인가? 헨젤 백작이 정말 뤼나소를 복용했든 안 했든, 진실이 드러나는 건 매우 늦은 시점이 될 것이고 왕실이 최대한의 이득을 챙긴 다음일 것이다.
가스트로는 자신의 심중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헨젤 백작의 침착하던 표정엔 실금이 생겼다.
“헨젤은 남부 대평원의 주인으로서 왕국의 식량 생산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습니다. 왕실의 재정 관리에도 아주 충실했습니다. 전하, 사나운 개를 잘 기르려면 먹이를 잘 주셔야 하는 법입니다. 자기 잘못도 아닌 일에 매를 맞은 개는 다시는 주인을 신뢰하지 않게 될 테니까요.”
“아니지. 사나운 개를 잘 기르려면 목줄이 중요하지. 그래야 여차하면 당기고 필요할 땐 풀어주면서 적당한 곳에 잘 써먹지 않겠는가?”
“전하!”
“백작, 일터로 돌아가게. 이전에 일했듯 앞으로도 일하고, 재무국의 권한을 축소, 견제하는 조직개편에 순응하게. 레이디 오드리에게 작위를 내리는 일에 반발하지 말고, 반발하는 움직임을 조장하거나 좌시하지도 말게.”
탁자 아래에 숨겨놓은 헨젤 백작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헨젤 백작은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혈액순환을 돕기 위해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그의 손끝은 여전히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 증거들이, 뤼나소가, 정말 제 목줄이 될 것 같습니까? 전하, 입장이 뒤바뀌는 걸 경계하시지요. 즉위 초의 의욕은 좋지만 그렇기에 발밑에 수렁이 생기는 걸 모르고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나중에 알고 빠져나오려 할 땐 늦으실 겁니다.”
가스트로가 히죽 웃었다. 헨젤 백작의 경고는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한 웃음이었다.
“헨젤이 약간의 틈이라도 내보이길 기다리는 가문이 얼마나 많은지 아는가? 백작이 무슨 반박 증거를 내놓고 어떤 이유를 대든 그들은 상관하지 않을걸세. 모처럼 만난 고깃덩이를 실컷 즐긴 다음에야 이런, 사정을 몰랐습니다, 늦어서 유감입니다, 따위의 말을 할걸세. 그에 비하면 나는 아주 신사적이지. 목줄만 채우고 끝내겠다지 않나.”
“그럼 너무 늦지 않게 지금 당장 싸워봐도 되겠습니까? 대관식이 코앞인 지금에 뤼나소 스캔들을 터뜨리고 난장판 속에서 제가 지원했던 연구 결과들을 다 공개해도 되겠습니까? 뤼나소의 부작용을 최소한으로 만든 약이 있고, 그 약을 쓰면 업무 효율이 확 오른다고 공개해도 됩니까?”
“오호, 그거 무척 흥미로운 약이군. 보건국과 치안대 양쪽에서 아주 흥미로워하겠어. 백작이 뤼나소를 들여온 목적이 오로지 연구였다면 왜 허가를 받지 않았는지 아주 궁금해할걸세. 조금 전에 백작이 내게 거짓말을 줄줄이 늘어놓은 이유에 대해서도 해명이 필요할 거고.”
“그건 나름의 이유가……!”
“그보다, 공개할까 말까 고민하기 전에 일단 백작의 말을 받아 적어줄 곳이 어디에 있을까부터 걱정하게.”
브란젤에는 매주 발행되는 수 개의 신문과 수십 종의 월간, 계간 잡지가 있었다. 그들은 기삿거리를 찾아 길거리를 어슬렁거리고 제보와 기고를 받고 유명인사의 인터뷰를 따내러 돌아다녔다. 문해력을 갖춘 독자가 늘어나는 만큼 신문과 잡지의 영향력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많은 신문과 잡지 중 왕실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운 곳은 없었다. 괴물 사태 당시, 평소에는 대립하며 서로를 비난하던 신문과 잡지들은 약속이나 한 듯 왕실의 입맛에 맞춘 기사를 일제히 쏟아냈고 시민들은 그에 쉽게 휘둘렸다.
한때 쓰레기와 꽃이 함께 쌓이던 스와디의 무덤에 지금은 꽃과 선물만이 놓이는 게 단적인 예였다. 지금은 누구나 인정하는 명문가 헨젤이고 대단한 헨젤 백작이지만, 기자의 펜이 왕실의 손가락에 맞춰 춤추고 난 뒤에도 계속 예전과 같은 위상을 가질 수 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백작을 아끼는 마음에서 부디 충고하는데, 아직 완벽하지 못한 결과물은 무기로 삼지 말게나. 그리고 아들 생각은 안 하나? 사교계에 나오지도 못하는 어린애라지만 공자의 나이가 열 셋일세. 어리다고 귀도 없고 눈도 없는 줄 아는가?”
“…….”
“허공에 대고 외치다 두드려 맞는 치욕을 겪느니 딸이 작위를 받아 가문을 나가는 작은 수치를 감내하는 쪽이 훨씬 낫겠군. 그러면 적어도 왕실의 금고지기 헨젤의 명예와 명성은 그대로일 것 아닌가?”
가스트로는 한결 조용해진 헨젤 백작 앞에 종이 몇 장을 내밀었다. 오드리에게 작위를 주는 일을 아버지인 헨젤 백작이 전적으로 동의하고 지지한다는 걸 증명하는 서류였다.
“레이디 오드리가 미성년자라 귀찮은 일이 많아. 두 살만 더 먹었으면 훨씬 편했을걸……. 자, 서명하게.”
“……이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나야말로 묻고 싶군. 이렇게까지 해야 할 만큼 이게 큰일인가?”
만약 뤼나소의 일이 없어서 헨젤 백작의 태업이 성공했더라도, 장기적으로 재무국에서의 헨젤의 입지가 축소되는 건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를 모를 헨젤 백작이 아닌데 왜 이런 큰 희생을 감수했을까.
그러나 헨젤 백작은 가스트로의 의문을 풀어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는 몇 번이고 펜을 쥐었다 놓았다를 반복하다 끝내 서류에 서명했다. 혹 뒤늦게 마음이 바뀌기라도 할까, 가스트로는 서명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서류를 따로 챙겼다.
“현명한 선택일세. 백작, 새벽에 갑자기 끌려오느라 피곤했을 텐데 쉬었다 가게나. 식사도 좀 하고.”
“평소처럼 일하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재무국으로 가겠습니다.”
“어허, 지금 백작의 낯빛이 어떤지 아는가? 백작이 그렇게 파리한 낯을 하고 있는데 당장 일부터 하라고 보낼 만큼 내가 매정한 사람은 아니라네. 휴가 냈다 생각하고 오늘 하루는 푹 쉬게.”
“그렇다면 집에서 쉬겠습니다.”
“집에서 쉬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나와 점심 한 끼는 하고 갔으면 좋겠군. 그 전까지 백작이 여기서 쉬고 있으면 내 마음이 몹시 좋을 것 같아.”
겉으로는 부드러운 권유였지만,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강압이 그 안에 담겨 있었다. 가스트로와 함께 들어온 이후 계속 헨젤 백작의 뒤에 서 있던 치안대원들이 헨젤 백작의 어깨를 양쪽에서 지그시 눌렀다. 크게 힘을 주는 것도 아닌데 헨젤 백작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전하, 이게 무슨…….”
“그럼 이따 보세.”
헨젤 백작을 놀리기라도 하는 듯 웃으며 나간 가스트로는 정말 점심 무렵이 될 때까지 그를 방에 가둬두었다. 방문을 지키는 치안대원들은 헨젤 백작이 무슨 말을 해도 통하지 않았기에, 그는 가스트로와 껄끄러운 점심식사를 함께한 후에야 자유의 몸이 되어 저택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영문도 모르고 끌려 나간 헨젤 백작을 걱정하던 저택의 사람들은 백작이 치안대의 깍듯한 인사를 받으며 무사히 돌아오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긴장을 풀 수는 없었는데, 치안대가 물러간 뒤에도 헨젤 백작의 싸늘한 기색이 조금도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중에서도 집사는 특히 걱정이 많았다. 잠을 제대로 잔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 헨젤 백작이 침실이 아니라 집무실로 향했기 때문이었다.
“주인님, 조금이라도 쉬시는 게…….”
“오드리를 데려와라.”
“아가씨는 아르젠 남작과 함께 외출하셨습니다.”
“외출?”
집사는 어쩐지 뒷덜미가 선뜩해지는 느낌에 침을 삼켰다. 차분하게 앉아 있는 헨젤 백작이 막 끓어오르기 직전에 이른 물처럼 보였다.
“당장 찾아서 모셔오겠습니다.”
집사는 도망치듯 집무실을 뛰쳐나와 릴리를 찾았다. 하지만 릴리도 오드리의 행방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오늘은 아가씨의 참석이 예정된 사교 모임이 없어요. 따로 잡은 약속도 없으시고요.”
“그럼 저택에 계셔야지, 어딜 가셨단 건가?”
“아가씨 발목에 실을 묶어놓은 것도 아닌데 제가 그걸 어떻게 알겠어요? 일단 짐작 가는 곳에 아이들을 보내 찾아볼게요.”
“빨리 찾아서 모셔 오게. 주인님께서 더 화가 나시면 자네나 나로는 감당이 안 돼. 주인님께서 이렇게 화를 내시는 건 거의 십 년만이야.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졌다간 산도 태울 분노가 될걸세.”
집사가 어찌나 걱정을 하는지, 나름 차분하던 릴리마저 덩달아 불안해졌다. 두 사람은 오드리를 찾기 전에 일단 진화작업부터 하기로 의견을 모았고, 하델을 불러 소방수 역할을 부탁했다.
“아버지가 누나를 찾는 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텐데 나더러 어쩌라고? 사고를 쳤다면 누나가 알아서 감당해야지.”
“도련님, 그 말씀은 언젠가 도련님이 사고를 치셨을 때 아가씨의 도움은 필요 없다는 뜻이 된다는 거 아시지요? 앞날을 그리 장담하실 수 있겠습니까?”
“윽…….”
배짱을 부리던 하델은 결국 읽던 책을 내던지고 헨젤 백작의 집무실에 뛰어들었다. 언제나 그랬듯 얼굴 가득히 웃음을 띠고 아버지의 팔에 매달려 애교를 부리려는데, 헨젤 백작의 분위기가 심상치가 않았다. 말 한 마디라도 잘못 붙였다간 괜한 벼락을 맞을 것만 같았다.
하델은 헨젤 백작의 팔에 매달리는 대신 바닥에 떨어진 서류를 하나씩 주워 책상에 올렸다. 언제나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던 서류들이 책상과 바닥에 마구 흐트러진 광경이 굉장히 낯설었다.
“아버지, 왕궁에서 뭔가 나쁜 일이 있으셨어요?”
“누가 너더러 들어오라더냐.”
“시킨 사람은 없지만 아버지가 걱정돼서 왔죠. 새벽에 치안대가 왔다 갔잖아요.”
“나는 괜찮다.”
“정말이죠? 정말 다행이에요. 치안대가 새벽에 찾아오다니, 너무 놀라서 잠을 설쳤다니까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네 누나가 사고를 쳤다.”
분기를 꾹 눌러 담은 목소리였다. 하델은 아까보다 한결 더 날카로워진 공기를 감지하고 꿀꺽 침을 삼켰다. 숨 쉬는 것도 눈치가 보이는 것이, 자칫하면 오드리에게 떨어질 불벼락이 자신에게 향할 것 같았다.
“괴물을 끌고 달렸던 것보다 더 큰 사고예요?”
“어떤 면에서는.”
“와……. 그 이상으로 크게 칠 수 있는 사고가 있다니 상상도 안 가는데요. 무슨 일을 쳤는데요?”
“내가 말한다고 일이 해결된다더냐? 빨리 들어오기나 했으면 좋겠구나.”
헨젤 백작은 말을 아꼈다. 지금 입을 열었다간 하델이 듣기에 부적절한 말이 우르르 쏟아질 것 같았다. 그런 그의 태도를 어떻게 해석했는지, 하델이 헨젤 백작의 손을 주무르며 살살 애교를 피웠다.
“에이, 아버지……. 누나가 좀 대책 없이 굴긴 해도 자기 앞가림은 나름 잘하잖아요.”
“…….”
“누나가 좀 늦게 들어오더라도 너무 걱정 마세요. 또 무슨 일을 치더라도 아르젠 남작이 잘 해결해 줄 거예요. 분명 지금도 같이 있을걸요?”
하델은 일부러 셰비언을 입에 올렸다. 셰비언의 정체를 알게 된 후, 어지간해서는 셰비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노력하는 헨젤 백작의 태도를 뻔히 알고 한 말이었다. 한데 그게 오히려 헨젤 백작의 분노에 기름을 부은 꼴이 됐다.
“아르젠 남작과 그렇게 붙어 다닐 거면 냉큼 결혼이나 할 것이지, 약혼도 싫다 결혼도 싫다……!”
“어…… 음……. 누나가 결혼 안 한대요?”
“안 한다더라! 찰싹 붙어서 오만 곳을 다 돌아다니는 주제에 결혼은 싫다니 미친 게지!”
오드리가 셰비언과 가끔, 아니 꽤 자주 밤을 보내는 걸 알고 있는 하델은 약간 혼란스러워졌다. 두 사람이 고용인들 사이에 알음알음 소문이 다 퍼지도록 농도 짙은 연애를 해도 다들 모른 척 입을 다무는 이유는 그들이 곧 결혼할 사이라는 인식 때문이었다.
그런데 헨젤 백작에게 결혼하지 않을 거라고 공언을 했다니, 대체 무슨 일인가 싶었다. 단순히 대관식 뒤로 결혼 발표를 미룬 게 아니었단 말인가?
하델이 잠시 말을 잊은 사이, 헨젤 백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당장이라도 외출할 것처럼 모자를 쓰고 장갑을 끼다가 갑자기 마음이 바뀐 듯 모자를 벗어 내던지고 집무실 바깥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하델은 허둥지둥 그의 뒤를 따라 걸으며 물었다.
“아버지, 어디 가시게요?”
“이 집에 내가 못 갈 곳이 있더냐? 집사! 자네 말을 잘 듣는 하인들을 골라 서관으로 불러오게. 큰 상자 여러 개와 곡괭이, 망치 등 공구도 챙겨오도록 하고.”
“아버지, 뭐 하시려고 그런 게 필요해요? 네? 아버지!”
헨젤 백작이 우뚝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섰다. 그는 자신의 팔꿈치에 코를 부딪치고 끙끙대는 하델을 가만히 굽어보았다. 연두색 눈동자에 그렁그렁 고인 눈물이 풀잎에 맺힌 이슬 같았다.
“뭘 하려고 그러는지 궁금하더냐?”
“네. 알고 싶어요.”
“제 앞가림을 그토록 잘하는 네 누나가 재산을 얼마나 쌓아뒀는지 확인하러 간다.”
“네에? 아버지, 누나가 없을 때 이러시면 안 되죠!”
헨젤 백작은 하델이 놀라 빽빽대거나 말거나 아예 상대를 해주지 않았다. 그는 집사가 황급히 데리고 온 충실한 하인들을 부려 서관의 집무실과 서재를 뒤지기 시작했다. 당연히 출입문에 잠금장치가 걸려 있었지만 아예 문을 뜯어내는 데에는 당할 수가 없었다.
“상자를 전부 열고, 서랍은 전부 빼서 뒤집어라. 편지 종류는 저 상자에 담고, 서류는 내게 가져와라.”
일전에 헨젤 백작과 오드리 사이의 다툼에서 고용인들이 죄다 오드리의 편을 들었던 사건 이후, 헨젤 백작은 고용인 관리에 나름 공을 들였다. 그는 군말 않고 제 명령을 따르는 하인들을 몹시 흡족하게 여기며 제 손에 들어오는 서류를 읽고 분류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헨젤 백작의 감상일 뿐이고, 엉망이 되어가는 집무실을 보는 하델은 도무지 마음이 편하질 않았다. 엎어진 서랍과 뒤섞인 서가에 눈길이 닿을 때마다 가슴 안쪽이 따끔거렸다.
“아버지, 알아볼 게 있으시면 누나에게 직접 달라고 하면 되잖아요. 꼭 이렇게 하셔야 하나요?”
헨젤 백작은 고개도 들지 않고 무심히 서류를 분류해 상자에 나눠 넣었다. 하나는 데멘사, 하나는 만탈락, 나머지 하나는 집안 살림에 관한 서류였다.
“오드리는 아직 미성년자고 결혼을 한 것도, 약혼자가 있는 것도 아닌데 보호자인 내가 이렇게 하면 안 될 이유가 있으면 읊어봐라.”
“어……. 그게……!”
“할 말 없으면 그만 나가봐라. 아니면 너도 여기 붙어서 손을 보태든지.”
“에, 그러니까……. 아버지, 아르젠 남작이 이 꼴을 보고도 가만히 있을까요? 네? 남작은 언제나 무조건 누나 편이고 다른 건 전혀 신경 쓰지 않잖아요! 서관은 누나의 영역인데 여기가 이렇게 뒤집힌 걸 보면 엄청나게 화가 나서…….”
하델은 말을 끝맺지 못하고 그만 입을 다물었다. 서류에 집중하던 헨젤 백작과 눈이 마주쳤는데, 그 시선이 몹시 엄하여 절로 주눅이 들었다.
“그가 용이든 뭐든, 오드리는 어쨌거나 내 딸이고 인간이다. 인간 사회에 녹아들어 살 거면 양보하는 법도 알아야지.”
“…….”
“내가 부모로서 당연한 권리를 행사하겠다는데 그조차 싫다면 당장 결혼이라도 해서 새 보호자가 되는 게 맞다.”
오드리가 들었다면 발끈해서 화를 냈을 말이긴 해도, 일반적인 사회통념상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당장 네이기스만 해도 피올과 결혼하는 것으로 메너트의 간섭을 끊어내지 않았나.
하델은 감히 더 말을 얹지 못하고 뒤로 물러났다. 헨젤 백작과 눈을 마주친 건 잠깐인데도 불구하고 등에서 땀이 흘렀다. 더 부딪칠 엄두가 안 났다.
‘어차피 떠밀려서 온 거고……. 이만하면 나도 나름 말린 거 아닌가?’
할 만큼 했으니 이만 물러나도 괜찮지 않을까. 하델은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시작했다. 하인들 사이에 끼어서 저 난장판에 일조하고 싶지 않았고, 서류에 손을 댔다가 나중에 오드리에게 한 소리 듣고 싶지도 않았다.
하델이 그렇게 몇 걸음 물러났을 즈음, 하인 한 명이 헨젤 백작에게 작은 상자를 가져다주었다. 잠금장치가 걸려 있지 않은 상자 안에는 몇 번씩 접은 백지가 수북하게 들어 있었다. 재질도 크기도 모두 달랐다.
헨젤 백작은 그중 하나를 꺼내 마법등에 들이댔다. 이리저리 각도를 바꾸며 빛을 비추자 얼룩 하나 없는 백지에 살짝 눌린 자국이 희미하게 드러났다.
“편지로군. 이건 따로 내 집무실에 가져다 놓아라.”
아무것도 비추지 않던 차가운 얼굴에 일순 짙은 욕망의 빛이 어렸다 사라졌다. 그건 아주 잠깐에 불과했지만, 계속 헨젤 백작의 눈치를 보고 있던 하델은 그 잠깐을 똑똑히 보고 말았다.
‘로렐라이를 탐내던 나도 저랬나? 누나 앞에서 저런 표정을 지었던 건가?’
하델은 불현듯 밀려온 토기에 입을 틀어막고 집무실을 뛰쳐나왔다. 헨젤 백작의 시선이 등에 꽂히는 게 느껴졌지만, 그보다 사람을 찾는 게 더 급했다. 릴리, 다이앤, 이디케, 그중 누구라도 좋았다. 오드리가 옆에 끼고 사는 하녀 중 한 명을 만나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