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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5. 뤼나소 (38/62)

chapter 35. 뤼나소

「신화시대가 끝나고 신비(神秘)는 분석과 탐구의 장으로 끌려나와 그 찬연한 빛을 잃고 말았다. - 재미로 보는 범죄자의 인상적인 개소리 中」

작년 여름부터 시작된 가뭄은 멜브란트뿐만 아니라 살론, 나랍 등 나라를 막론하고 상당한 피해를 입혔다. 비 없는 여름과 눈 없는 겨울을 보내고 다시 맞닥뜨린 여름은 작년보다 더 뜨겁고 건조했다.

큰 강은 수위가 낮아졌고 시냇물은 바닥을 드러냈으며, 들판의 작물은 노랗게 타들어갔다. 도시의 분수는 노래하기를 멈췄고 교외의 물레방아엔 먼지가 끼었다. 평소 치수에 공을 들이고 마법도구로 물 순환 시스템을 잘 관리한 몇몇 지역들만이 그럭저럭 가뭄을 견디고 있었다.

그러니 지금 내리는 비가 얼마나 반갑겠는가. 새벽 무렵부터 톡톡 떨어지기 시작한 빗방울이 나뭇잎을 두드리는 소리가 마치 경쾌한 행진곡 같다. 누군가 이 아침부터 노래를 부르는지, 빗소리 사이로 농가에서 즐겨 부르는 민요가 들렸다.

그리웠던 그대를 보오

흰 달빛 아래에서

제비꽃 화환을 머리에 얹고

미소 짓는 그대를 보오…….

오드리는 창문을 열고 길게 팔을 뻗어 손이 젖는 느낌을 즐겼다. 만탈락에도 비가 내리고 있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가뭄이 끝날 거라는 희망을 가지게 된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아가씨……. 벌써 깼어요?”

“으응. 빗소리가 좋아서 일찍 일어났지.”

셰비언이 비척비척 일어나 길게 하품했다. 길고 매끄러운 머리칼이 은빛 비늘 위에 아무렇게나 흩어졌다. 어젯밤 샤를레아에게 비늘을 뜯긴 자리는 여전히 구멍이 뽕뽕 뚫려 있었지만, 언뜻 봐도 상태가 많이 좋아졌다. 벌겋던 부분이 짙은 분홍색 정도로 바뀌었으니 많이 나아진 것이다.

“졸리면 더 자.”

부상을 치료하는 내내 둥지에서 자던 셰비언을 생각해서 한 말이었다. 과연, 어떻게든 깨보겠다고 눈을 비비며 낑낑대던 셰비언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도로 침대에 쓰러져 잠들고 말았다.

오드리는 옷을 주워 입다 말고 셰비언의 이마에 가볍게 키스했다. 종잇장처럼 창백하던 얼굴에 발그레하니 혈색이 도는 게 보기 좋았다. 숨소리도 내지 않고 자는 게 어쩐지 귀여웠다.

오드리는 다시 침대 위로 기어 올라갔다. 말랑말랑한 뺨을 콕콕 찌르며 장난을 치자 /좀 전까지 자는 줄 알았던 셰비언이 눈을 감은 채로 웅얼거렸다.

“자라고 하셨으면서…….”

“응, 계속 자.”

“누구 덕분에 다 깨어버렸어요. 책임지세요.”

셰비언이 오드리를 제 품에 가두고 입맞춤을 퍼부었다. 턱, 목, 어깨……. 입다 만 옷자락을 파고드는 손이 제법 따뜻했다. 오드리는 만족스러운 무게감을 느끼며 신음했다. 옴짝달싹할 수 없게 갇히고서도 조금도 불안하지 않았다. 새벽비와 함께 떨쳐낸 줄 알았던 열기가 다시금 피어올랐다.

그때, 문 밖에서 기척이 났다.

“아가씨, 아가씨! 아가씨이~!”

다이앤이었다. 오드리에게 밤 단장을 해줄 만큼 협조적이었던 다이앤이 아침 해가 뜨도록 돌아오지 않는 오드리 때문에 애가 닳아 발을 구르고 있었다. 오드리는 대단히 아쉬워하며 다이앤을 맞았다.

“이런, 데리러 오란 소린 안 했는데.”

“알아서 오실 줄 알았죠. 설마 이렇게 늦으실 줄 알았나요? 아가씨, 빨리 나오세요, 빨리요.”

다이앤은 애초 오드리가 제대로 드레스를 다시 입을 거란 기대 같은 건 전혀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오드리는 다이앤이 입혀 주는 가운에 팔을 꿰며 어린애가 된 기분이라고 투덜거렸지만, 오드리를 방으로 돌려보내는 일에 정신이 팔린 다이앤에게 그녀의 불평은 들리지도 않았다.

“아무리 공인된 사이라도 그렇지, 이렇게 대놓고 밤을 같이 보낸 걸 백작님이 아시면 어쩌려고 이러세요? 여긴 무도회장이 아니라 저택이라고요. 적당히 눈치 보는 시늉이라도 좀 하셔야죠!”

“나 참……. 다이앤, 어젯밤에 내가 여기까지 오는데 마주친 고용인이 몇 명이나 될 것 같니?”

“그건 괜찮아요, 밤에 일어난 일은 릴리가 알아서 잘 틀어막을 테니까. 막말로 아가씨가 임신을 하셔도 막아낼걸요. 하지만 지금은 해가 떴잖아요? 집사가 나서면 릴리도 힘들단 말예요.”

다이앤은 오드리를 드레스룸에 밀어 넣고 갈아입힐 옷을 찾아 옷장을 뒤졌다. 셰비언이 오드리의 목과 가슴에 남긴 자국이 생각보다 많고 짙어서 미리 정해놓은 옷을 입힐 수가 없었다. 목과 가슴을 죄다 가리는 중부식 드레스를 받아든 오드리가 질색하고 옷을 밀어냈다.

“다이앤, 좀 시원한 옷으로 주면 안 돼? 비도 오는데 이렇게 꽁꽁 싸매놓으면 답답해.”

“오, 아가씨, 거울 한 번만 보실래요? 아가씨께서 방에만 콕 박혀 계실 작정이시면 여유로운 옷을 드릴게요.”

다이앤이 들이댄 거울을 본 오드리는 바로 다이앤의 조치에 수긍했다. 아무리 살결이 가무잡잡하다지만 벌레에 물렸다고 둘러대기엔 좀 무리가 있었다. 그래도 중부식 드레스는 싫었다. 코르셋도 답답한데 상체 전부를 싸매는 디자인이라니, 상상만 해도 현기증이 난다.

“차라리 승마복을 입으마. 그쪽이 훨씬 더 편하겠어.”

“그거 입고 이 저택 안에만 계실 거라고 약속해 주시면 꺼내 드릴게요.”

“어제 못 본 보고서가 아직도 한참이야. 따로 보고 싶은 사람이라 봐야 하델 정도인데, 하델은 지금 근신 중이잖니.”

“……하녀 된 입장에서 마땅히 아가씨를 믿어야 하는데, 이것 참…….”

다이앤이 오드리의 어린 시절을 직접 겪어보진 않았어도 들은 건 많았다. 당장 이디케는 말할 것도 없고, 릴리만 하더라도 오드리의 꾐에 넘어가 사막을 헤매다 죽을 뻔한 전적이 있지 않던가 말이다.

“다이앤, 말 보태지 말고 빨리 승마복이나 내놓으렴.”

겪어보았다면 절대 주지 않았을 텐데, 다이앤은 오드리의 호언장담을 미답지 못하게 여기면서도 결국 승마복을 내주었다. 제발 이거 입고 어디 나가지 말아달라고 신신당부를 하면서.

“알았다니까, 알았다고. 다이앤, 나에게 너무 붙들려 있지 말고 너도 네 할 일을 하러 가렴. 이디케가 데멘사 일로 바쁜데 너까지 나한테 붙들려 있으면 로렐라이는 누가 챙기니? 그만 귀찮게 굴고 가!”

하지만 오드리가 다이앤의 부탁을 들어준 건 딱 아침식사를 마칠 때까지만이었다. 텅 빈 배를 든든하게 채운 오드리는 만탈락 최고의 말썽꾸러기였던 경험을 십분 발휘해서 하델이 근신하고 있는 방에 침입을 시도했다.

심심하고 지루한 근신 생활, 책을 펴놓고 꾸벅꾸벅 졸고 있던 하델은 갑자기 책장이 휙 돌아가면서 나타난 통로로 등장한 오드리에게 놀라 딸꾹질을 시작했다. 딸꾹, 딸꾹.

하델이 어버버 말을 못하는 사이, 오드리는 머리카락과 옷자락에 묻은 먼지와 거미줄을 툭툭 걷어내고 태연히 하델의 맞은편에 앉았다. 하델이 펼쳐 놓은 책의 제목을 확인하는 손길이 지극히 여유로웠다.

“『세상의 법을 바꾼 사건사고 모음집』. 이거 참, 제목만 재밌지 내용은 하품만 나오는 책을 잘도 읽고 있구나. 어디서 구한 거니?”

“왕비전하께서 보내주신 책 중 하나…… 딸꾹. 누나, 지금 비밀통로로 들어온 거예요? 딸꾹? 그게 있는 줄은 어떻게 알고요? 여긴 내 방인데, 딸꾹, 나도 몰랐던 걸!”

“그야 네가 쓰기 전엔 내 방이었으니까 알지. 난 너처럼 얌전한 어린 시절을 보내지 않았거든.”

“그럼, 딸꾹, 누나가 이 방의 비밀통로를 안다는 걸, 딸꾹, 아버지도 모른단 말예요?”

“이젠 너와 나만 알아. 그러니 말이 새어나가면 당장 너부터 의심받을 줄 알아.”

하델은 이디케가 늘어놓던 오드리의 어린 시절 일화들을 떠올렸다. 그땐 불안해하는 자신을 달래느라 이디케가 온갖 말을 다 꾸며낸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 보니 그게 다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예를 들면, 만탈락 성의 옛 해자 어딘가에 묻혔다고 전해지는 보물을 찾겠다고 성벽 아래를 다 파고 다녔다든가 하는 일들 말이다.

“하도 안 와서 셰비언 성벽에서 죽어버렸나 했는데, 딸꾹, 건강해 보이네요. 당장 윈디를 타고, 딸꾹, 달려도 되겠어요. 언제 왔어요?”

“어제. 꽤 떠들썩했을 텐데, 몰랐니? 아무도 말을 안 해줬어?”

“알렉스가 있으면, 딸꾹, 가르쳐 줬을 텐데……. 지금은 그 녀석도, 딸꾹, 근신 중이라서요. 제 편을 들어주던 다른 고용인들은, 딸꾹, 누나가 다 갈아치웠고. 집사 할아범은 아버지 말씀이라면 딸꾹, 제 방문에 못질도 할 수 있을걸요. 딸꾹, 아 이놈의 딸꾹질!”

“쯧쯧……. 물이라도 한 잔 마셔.”

“그런 건 따라주고 얘기해요. 딸꾹.”

하델은 입으로만 걱정하는 오드리에게 핀잔을 주고 알아서 물을 따라 마셨다. 찬물이 벌컥벌컥 들어가자 간신히 딸꾹질이 멈췄다.

“어흐, 이제 살겠네. 누나, 어머니 유언장 받으러 온 거 맞죠?”

“유언장도 받을 겸, 근신 상태인 네 상황도 좀 알아볼 겸…….”

“미안한데, 유언장은 아버지에게 있어요. 뺏겼거든요. 그래도 왕비전하께 사본은 전해 드렸으니까 나머지는 누나가 알아서 해요. 랄리우스 후작이 되든 아르젠 남작부인이 되든 이젠 누나가 알아서 할 일이죠. 난 몰라요.”

“흐응……. 왕비전하께 사본을 전할 수 있을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면 원본을 넘기는 쪽이 더 빨랐을 텐데? 그럼에도 원본이 아니라 사본을 넘겼으니 아버지에게 근신은 너무 가혹하다고 조를 수 있었을 거고, 근데 왜…….”

“난 이제 모른다니까요. 누나 일은 누나가 알아서 해요.”

하델의 태도는 다분히 도피성에 가까웠다. 완전히 오드리의 편을 들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잘못인 걸 알면서 공개적으로 헨젤 백작의 편을 들지도 못해서 모두를 화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 어정쩡함이 하델의 최선이었다.

오드리는 하델의 복잡한 마음이 손에 잡힐 듯 보이는 통에 차마 화를 내지 못하고 대신 잔뜩 풀이 죽은 뺨을 쭉 잡아당기며 심술을 부렸다.

“알았어. 넌 졸지 말고 공부 열심히 하렴. 그래야 내년에 왕실에 갔을 때 드케에게 밀리지 않지.”

“네? 드케요? 드케 그웬? 걔 이름이 왜 튀어나와요?”

“나이가 너보다 한 살 더 많잖니. 요새 우편국에서 아주 활약한다더라. 부디 힘내렴, 동생아. 드케는 셋째였다가 갑자기 후계자가 된 건데 네가 드케보다 못하면 민망하잖니.”

“바로 어제 왔으면서 어떻게 그런 걸 다……. 누나 진짜 얄밉다.”

“내 귀야 예전부터 밝았고, 지금 내 입이 얄미운 건 네 덕분에 그래. 지킨 것도 잃은 것도 아닌 유언장 때문에 내 머리가 좀 복잡하거든.”

오드리는 하델이 펼쳐 놓은 책의 페이지를 제멋대로 파라락 넘겼다. 평민 친구에게 거짓말을 하고 사기를 쳤다가 법의 심판을 받은 귀족들의 사례가 실려 있었다. 사건이 반복될수록 형량이 높아지는 그래프가 아주 볼만했다.

“하델, 아무래도 헨젤가가 다치지 않는 쪽을 선택하는 게 낫겠지?”

“제발 그래주기를 바라요. 여긴 누나가 돌아올 집이잖아요. 가문이 잘 버티고 있어야 어딜 가든 무시당하지 않는 거라고요. 고모를 봐요, 그 놀라운 당당함을!”

네이기스 문제로 메너트에게 시달릴 대로 시달린 하델이 한껏 메너트를 비꼬았다. 오드리가 히죽 웃으며 일어섰다.

“그래……. 잘 알아들었어.”

“……누나? 저 지금 되게 불안하거든요? 무슨 생각해요?”

“확실한 생각.”

“어, 누나? 그 생각 좀 알려주면 안 돼요? 네? 누나? 누나! 그렇게 가면 어떡해요! 누나! 아 이거 어떻게 여는 거야!”

하델의 애타는 부름에도 불구하고 훌쩍 비밀통로로 뛰어든 오드리에게선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심지어 잠시 망설인 사이 책장이 돌아가 버려 비밀통로가 막혀 버리기까지 했다. 하델은 방의 구조에 무관심하게 살았던 지난날을 깊이 후회하며 책장 이곳저곳을 샅샅이 살폈지만, 비밀통로는 끝내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 * *

요즘 헨젤 백작은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은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아무리 빠르게 일을 처리해도 일이 끝나질 않았다.

겉은 멀쩡해도 속까지 완벽하게 회복되지는 못한 브란젤을 어떻게든 굴리는 데 들어가는 예산 분배, 가뭄으로 아우성치는 지방 도시의 세금감면 탄원서와 지원금 요청 처리, 가을의 세수가 확연히 줄어들 게 눈에 보이는 상황에서 치러야만 하는 왕세자의 결혼식과 대관식이라는 대형 이벤트 예산 집행 감독, 그 이벤트에 참석하기 위해 찾아오는 각국의 귀빈 대접을 위한 예산 확보와 집행…….

돈에 관련된 일만도 어마어마하게 많은데, 막중한 책임감에 짓눌린 가스트로가 자꾸 그를 찾으며 조언을 요구했다. 왕권에 기대어 성장한 헨젤이기에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다른 사람을 보내는 건 불가능했고, 가스트로를 만나고 올 때마다 금쪽같은 시간이 뭉텅이로 사라졌다.

이런 상황에서 헨젤 백작이 오드리를 만나겠다고 저택에서 반나절을 보낸 건 정말이지 큰 희생이었다. 그가 순종적이지 않고 뻣뻣하게 구는 오드리를 괘씸하게 여기면서도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는 이유의 절반은 오드리가 암만 버텨봤자 결국은 결혼을 받아들일 거란 확신 때문이지만, 나머지 절반은 너무 바쁘기 때문이었다.

바쁘고, 바쁘고, 바빴다.

‘천장이 무너졌으면 좋겠군. 아니면 바닥이 꺼지는 것도 괜찮은데…….’

헨젤 백작은 잠이 부족해 멍한 머리로 끔찍한 상상을 하다 문득 헛웃음을 지었다. 피로가 쌓이니 별 이상한 생각을 다 하게 된다. 그는 고개를 젓고 수북이 쌓인 서류를 집었다. 빼곡한 검은 글자와 숫자들이 아지랑이처럼 일렁거렸다.

그가 어떻게든 제대로 읽기 위해 눈을 비비고 있는 와중, 오스미다가 찾아왔다. 보좌관 일랑은 오스미다의 옷자락 끄트머리를 보자마자 냅다 도망갔기에, 헨젤 백작은 오스미다와 단둘이 마주 앉아 사이좋게 차를 마시는 처지가 됐다. 오스미다의 시녀인 발레리가 동석하고 있었지만 본래 시녀는 머릿수로 치지 않는 법이었다.

“많이 바쁜가 보지?”

“여유롭진 않지요. 무엇 때문에 찾아오셨습니까? 부르시면 제가 바로 갔을 텐데요.”

“입 발린 소리라도 고맙군. 바쁠 테니 본론만 간략히 얘기하지. 백작, 랄리우스 후작 위를 오드리에게 줄 생각이 아직도 없는가?”

“제가 아들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 아들이 어딘가 모자란 것도 아닌데 그걸 왜 오드리에게 줘야 합니까. 전하, 이 바쁜 때에, 그런 말도 안 되는 얘길 하러 오신 겁니까?”

평소라면 좀 더 부드럽고 우아하게 말할 수 있었을 텐데, 켜켜이 쌓인 피로가 헨젤 백작을 거칠게 만들었다. 하델이 오스미다에게 유언장 원본을 넘기지 않았음을 알고 있는데 그녀가 자꾸 말을 꺼내는 것도 그의 불쾌감을 부채질했다.

“전하께서 제 죽은 부인과 가까이 지냈다는 건 압니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가문의 일입니다. 더는 말을 꺼내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강경하군.”

“제가 일테니아 후작 위의 행방에 대해 궁금해하면 전하께서도 불쾌하실 것 아닙니까.”

“그렇겠지. 음, 분명 그럴 거야.”

오스미다가 여유롭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헨젤 백작의 아슬아슬한 발언에도 별로 기분이 상한 표정은 아니었다.

“하지만 백작과 나는 처지가 다르지 않은가. 밀리나의 유언장이 공개되면 백작은 몹시 곤란해질 텐데?”

“…….”

“비록 내가 가진 게 원본은 아니라지만 출처가 워낙 확실해야지. 백작은 곧바로 원본 공개 압력을 받게 될 거야. 물론 백작의 수완이라면 그런 압력쯤 유야무야 가라앉게 만드는 일도 불가능하진 않겠지만…….”

헨젤 백작이 고위 귀족과 관료들의 비리를 수집하고 있다는 걸 아는 듯한 말투였다. 하긴, 유언장이 있던 장소를 생각하면 모를 수가 없다. 헨젤 백작은 하델을 생각하자 또 속이 쓰려오는 통에 찻잔으로 얼굴을 가렸다.

오스미다가 손을 까닥이자 발레리가 냉큼 불붙인 담뱃대를 올렸다. 담배 연기가 차향을 잡아먹으며 자욱하게 퍼졌다.

“헨젤 백작가를 시기하는 사람이 한둘이어야지. 때는 이때다,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물어뜯고 백작이 앉은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 하는 가문이 아주 많아. 그런데 그렇게 뻣뻣하게 굴어서야 되겠나?”

“모기에 뜯기면 간지러워 한동안 괴롭기는 하겠지만, 그것 때문에 죽지는 않습니다. 제가 기껏 로렐라이와 만탈락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았는데, 이렇게 갑자기 오셔서 그 이상을 요구하시면 저도 다른 생각을 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다른 생각이라.”

“전하께서 일테니아 후작으로서 계속 회의에 참석하시는 저의를 짐작합니다. 제가 적극적인 훼방꾼이 되면 전하께서도 몹시 곤란해지실 텐데요.”

“그러니 서로 조용히 하자? 난 요구의 절반을 받았고 그대는 평안을 얻었으니까?”

“거칠게 표현하자면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오스미다가 짧게 웃고 담배 연기를 훅 뿜어냈다. 그녀가 일부러 헨젤 백작의 얼굴을 빤히 보면서 뱉은 연기였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 위에 미미한 불쾌감이 비쳤다.

“어차피 내 편을 들어줄 생각도 없으면서 위해주는 척은.”

“전하께서도 밀리나의 유언장을 공개할 생각은 없으시잖습니까. 괜히 툭툭 건드리지 마시고 돌아가시지요.”

“무례하군.”

“사과는 급한 불을 다 끄고 나서 하겠습니다.”

“딱히 사과를 바라지는 않아. 행동을 바랄 뿐이지. 백작, 랄리우스 후작 위를 오드리에게 주는 게 정 마음에 안 들거든, 앞으로 있을 회의에서 날 방해하지 않고 내 의견에 찬성표를 던지겠다는 약속을 해주게. 그럼 밀리나의 유언장은 영원히 밖으로 나오지 않을 거야.”

“…….”

“백작, 나는 지금 온건하게 일을 해결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주고 있는 걸세.”

오스미다의 말이 헨젤 백작에게 가 닿는 일은 없었다. 헨젤 백작은 짧은 침묵만으로도 집중력을 잃고 처리해야 할 사안들 쪽으로 정신을 팔았다. 오스미다와 이렇게 보내는 시간 동안 쌓일 일거리가 얼마나 될지 가늠하기가 무서웠다.

오스미다는 헨젤 백작의 그런 기색을 민감하게 알아차렸다. 이래서야 계속 대화를 시도할 의미가 없다. 그녀는 쓴웃음을 짓고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까지 헨젤은 기회를 놓치지 않는 영리한 뱀이었는데, 그 운도 이젠 다한 모양이야.”

“높은 평가에 감사드립니다.”

“부디 그 자신감이 오래도록 지속되길 바라겠네. 발레리, 가자.”

헨젤 백작은 오스미다를 딱히 배웅하지 않았다. 어차피 여긴 왕궁 안이었고 해야 할 일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하지만 문 틈 사이로 멀어지는 어떤 사람의 뒷모습을 발견한 순간,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겼다.

“……음?”

포스터 이후로 머리칼을 염색하는 사람이 늘어 초록색 머리칼은 왕궁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승마복은 아니었다. 아무리 단순하고 명쾌한 디자인이라도 그렇지, 몸에 딱 붙는 승마복과 정강이를 전부 감싸는 부츠가 왕궁 출입에 가당키나 한가? 게다가 머리칼을 죄다 틀어 올려 고정한 핀에는 드레스에나 어울릴 법한 화려한 꽃 장식이 붙어 있었다.

저건 오드리다. 오드리가 승마복을 입고 왕궁에 들어온 거다.

생각 이전에 확신이 먼저 찾아왔다. 헨젤 백작은 벌떡 일어나 밖으로 뛰어 나갔다. 막 오스미다를 배웅하고 돌아온 일랑이 헨젤 백작의 다급한 표정에 잔뜩 겁을 먹고 어깨를 움츠렸다.

“어, 백작님……. 서류에 뭔가 오류라도 있었습니까? 분명 다 확인하고 올렸는데…….”

“방금! 방금 오드리가 왔다 갔나?”

“예? 예……. 백작님께 드릴 옷가지와 재무국 사람들에게 줄 먹을거리를 챙겨오셨습니다. 백작님께 인사라도 드리고 가시라고 제가 몇 번이고 말씀드렸는데, 바쁜데 방해하고 싶지 않다고 하시며 바로 돌아가셨습니다.”

“맙소사. 승마복 따위를 입고 왕궁을 돌아다니는 게 정말 내 딸이라니. 창피스러워서 원…….”

헨젤 백작이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었다. 일랑은 챙겨두었던 짐과 간식을 슬그머니 구석에 숨겼다.

“집으로 바로 돌아간다고 하던가?”

“예? 그, 글쎄요. 그런 걸 따로 여쭤보진 않았습니다.”

헨젤 백작의 눈초리가 사나워졌고, 보좌관은 몹시 억울해졌다. 무슨 차림을 하고 다니든 귀족 영애인데, 상관의 따님인데 그런 걸 꼬치꼬치 캐묻는 게 더 이상한 것 아닌가?

“오드리가 선왕비와 마주쳤나?”

“예……. 백작님께서 말씀하셨다시피 귀족 영애로서 적절한 차림은 아니셨지만 선왕비 전하께서는 따로 지적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잘 어울린다고 칭찬도 하셨고, 머리핀은 어디서 샀는지도 물어보셨고……. 분위기가 굉장히 좋았습니다.”

“그랬겠지. 거적을 입고 왔어도 잘 어울린다고 했을 텐데 분위기가 나빴을 리가 있겠나? 그 둘이 얼굴을 맞대게 한 자체가 잘못인데, 그걸 자랑이랍시고 그렇게 떠들고 있나? 자네는 재무적 감각은 뛰어난데 정무 감각은 영 별로로군. 내 아래에서 일한 게 몇 년인데 아직도 그 모양인 이유가 대체 뭔가?”

“죄송합니다.”

“말로만 죄송하다고 하지 말고 좀 발전을 해 보게나. 이런 식의 실수가 몇 번째인지 알긴 한가? 내가 빠뜨린 부분이 있으면 자네가 메워줘야 하는데, 어떻게 매번 입장이 반대인가? 이런 식이면 내가 자네를 어디다 추천해 줄 수가 있겠나? 일랑, 자네는 평생 보좌관이나 하다가 경력을 끝낼 셈인가?”

헨젤 백작이 그동안 쌓아뒀던 스트레스가 짜증이 되어 일랑에게 쏟아졌다. 일랑은 눈꺼풀을 내리깔아 텅 빈 눈을 감추고 헨젤 백작의 짜증을 묵묵히 견뎠다. 그러나 그 속까지 덤덤하진 않았다.

‘젠장, 나는 왜 재무국 따위에 지원을 해가지고……. 진짜 로렐라이로 가버릴까? 적어도 거기는 잠은 재워가면서 일하게 해줄 텐데. 하지만 그랬다간 아버지가 날 죽이려고 들겠지……?’

일랑은 주머니에 든 금속 명함의 감촉을 느끼며 잠시나마 다른 생각을 했다. 재무국에서 일하는 자신을 자랑스러워하는 집안 식구들을 생각하면 로렐라이 같은 건 생각도 말아야 하는데, 정말이지 재무국은 일하면 일할수록 탈출을 꿈꾸게 되는 부서였다.

자라면서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고 어디에서 일을 해도 능력 없단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건만, 헨젤 백작의 보좌관이 된 후로는 하루하루 쌓이는 일거리와 인간 같지 않은 속도로 그를 처리해 내는 헨젤 백작을 보며 자신의 초라함에 치를 떠는 나날들이 반복됐다. 하여간 계속 재무국에 있다간 일에 깔려 수면 부족으로 죽든지 아니면 헨젤 백작의 닦달에 말라 죽든지 둘 중 하나는 할 것 같았다.

그러나 헨젤 백작이 그런 일랑의 속내를 알 리가 없다. 책임감에 발목을 잡힌 상태라 서류를 내던지고 나갈 수 없었던 헨젤 백작은 일랑에게 실컷 짜증과 폭언을 쏟아낸 뒤에야 겨우 마음을 가라앉혔다.

“오드리가 또 오거든 그때는 붙들어두게. 그 보기 싫은 꼴로 왕궁을 돌아다니게 두지 말란 걸세.”

“네, 알겠습니다.”

“대답은 잘 하는군. 당장 직원을 보내서 오드리가 제대로 집으로 돌아갔는지부터 확인하게.”

“네, 확실하게 하겠습니다. 걱정 않으셔도 되게끔 하겠습니다.”

“……일처리를 어떻게 하는지 두고 보지.”

헨젤 백작은 일랑을 미덥지 못하게 보면서도 결국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 잠깐 사이 또 일이 쌓였는지 직원들이 들고 오는 서류들이 산더미 같았다.

그는 아까 읽던 서류를 다시 펴들었다가 곧바로 눈을 감고 미간을 꾹 눌렀다. 본의는 아니라도 잠시 쉬었는데 나아진 게 조금도 없었다. 여전히 흰 건 종이요, 검은 건 글씨인 상태다.

푹 자고 일어나면 좀 나아질 걸 알지만, 헨젤 백작은 잠을 자는 대신 서랍에서 약 몇 개를 꺼내 입에 털어 넣고 씹었다. 그러자 곧 시야가 깨끗해졌고 머리도 맑아졌다. 몸을 누르는 피로감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그럭저럭 견딜 만한 수준이었다. 그는 다시 서류에 파묻혔다.

“일랑! 일랑!”

하지만 채 서너 장을 넘기기도 전에 미비점이 보였다. 헨젤 백작은 신경질적으로 일랑을 불렀지만, 일랑은 허겁지겁 오드리를 찾으러 나가고 없는 상태였다. 책상엔 서류가 쌓였는데 의자는 텅 비어 있었다.

“쯧……. 하여간 요령이 없어.”

헨젤 백작은 마음에 안 드는 서류를 구석으로 밀어놓고 다시 일에 파묻혔다. 사정이야 어쨌든, 자신이 맡은 일은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이 그를 채찍질했다. 그에게 남은 건, 그리고 그의 인생을 사로잡고 있는 건 단지 그것뿐이었다.

* * *

사람 여섯 명은 족히 앉을 수 있을 듯 큰 테이블에 지도가 펼쳐졌다. 멜브란트 전역을 다 표시한 지도에 검은 선이 쭉쭉 그어져 있었다. 브란젤을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퍼져 나가는 경향이 뚜렷한 가운데 산트렘까지 이어지는 긴 선이 인상적으로 두드러졌다.

그 지도에 새로운 선이 추가됐다. 브란젤에서 만탈락까지 이어지는 선이었다. 그 사이에 자리한, 지역의 거점 역할을 하는 작은 소도시들도 알차게 지나갔다.

“이걸 다 잇겠다고?”

“못 이을 건 뭐죠? 산트렘의 일만 아니었다면 당연히 만탈락이 우선이 됐을 거예요.”

“꿈이 크군. 산트렘까지 연결하는 게 공으로 된 줄 알아? 군인을 투입하고 돈을 쏟아 부어 가능했던 거야.”

“물론 군을 투입하지 않으면 시간이 몹시 늦어질 것이고 그만큼 투자 비용도 상승하겠지만……. 설마 로렐라이에 그만한 여력도 없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죠?”

“이거 참, 온전히 로렐라이 혼자서만 투자할 것처럼 말하는군. 우편국이 군침을 흘리며 덤벼들 걸 서로 다 알고 있는데.”

“그만큼 좋은 투자라는 거죠. 손해만 보는 사업이었다면 브란젤 주변의 도시들에서 이렇게 기를 쓰고 전보를 놓았겠어요? 만약 우편국의 참여가 전하의 의중에 반하는 것이었다면 지금이라도 배제하겠습니다.”

“…….”

“전하, 산트렘까지 선을 놓은 걸로 저는 전하와의 약속을 다 지켰습니다. 그러니 브란젤과 만탈락을 연결하는 이번 사업 계획을 허락해 주셔야죠.”

“내가 약속한 건 브란젤 내에서의 설치 허가뿐인 것 같은데? 실제로 지금 데멘사는 브란젤 내부에 거미줄처럼 선을 깔고 있지 않나. 도로가 뒤집어진 틈을 타서 아주 집착적으로 선을 놓는다고 여기저기에서 말이 많아.”

가스트로가 거만하게 손가락을 튕겼다. 마음에 안 드는 대답을 하면 지금 당장이라도 허가를 취소시켜 버릴 수도 있다는 것처럼, 그렇게. 그러나 오드리에겐 그의 허세가 먹히지 않았다.

“전하, 전보는 최대한 넓게, 많이 퍼져야 의미를 갖는 물건입니다. 기차와 다를 바 없죠. 만약 기차의 노선이 세피아 항구와 브란젤을 잇는 것뿐이었다면 지금의 십분의 일에도 못 미치는 효용을 보였을 거예요. 이를 잘 아실 전하께서 전보에 미지근한 반응을 보이는 이유를 알 수가 없네요.”

“그걸 몰라서 묻나? 주인도 아닌 대리인이 나온 시점에서 당연한 거 아닌가? 헨젤 영애, 그대가 얼마나 영리하든, 로렐라이의 재산 얼마를 그 손에 쥐고 있든 상관없이 데멘사의 대표는 라비린일세. 다음엔 지금처럼 어머니를 움직여 날 만날 생각 말고 라비린과 함께 오게나.”

“아하, 그렇게 생각하셨군요. 미처 몰랐습니다.”

오드리가 생긋 웃었다. 그녀의 그늘 없는 웃음을 본 순간, 가스트로는 어쩐지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전하, 그럼 전보가 남부지방에도 확대되어야 한다는 의견 자체에는 동의하시는 거 맞지요?”

“……그렇긴 하지만…….”

“데멘사의 주인이 직접 나선다면 딱히 반대할 생각도 없으신 거고요.”

가스트로는 황급히 발언 수습에 나섰다.

“물론 헨젤 영애가 로렐라이만큼이나 데멘사에도 많은 지분을 갖고 있다는 건 알고 있네. 하지만 주인이 따로 있는 마당에 내 멋대로 결정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나? 나중에 문제가 생길 여지가 너무 많다는 걸 헨젤 영애도 이해하리라 믿……. 이게 뭔가?”

“읽어보시죠.”

오드리가 자신만만하게 꺼내놓은 건 얄팍한 서류 몇 장이었다. 하지만 그 내용은 절대 얄팍하지 않았으니, 라비린 벨키스 타우레드가 데멘사에 가진 모든 권리를 오드리 헨젤에게 양도하는 서류였다.

오드리는 데멘사의 완벽한 주인이었다. 새로 갱신된 데멘사의 권리 서류에 라비린의 이름은 철자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오드리가 아직 성년이 아닌 만큼, 그녀의 보증인으로서 오스미다의 서명이 들어가 있었다.

“……어머니께서 처리하셨군.”

“네에. 정말 감사하게도 일테니아 후작님께서 많이 도와주셨답니다. 제가 없는 동안에 아주 바쁘셨지요.”

“하, 참. 내가 아는 어머니는 정치도 사교도 신물이 난다며 죄다 내던지고 최소한의 의무만 수행하는 분이셨는데……. 헨젤 영애와 얽히기만 하면 무거운 엉덩이를 떼고 일어나시는군. 그대는 도대체 무슨 재주를 부린 건가? 비법이 있다면 내게도 좀 가르쳐 주게.”

“제가 무슨 재주가 있겠어요? 다 돌아가신 어머니 덕분인걸요. 저야 오스미다 전하께서 베푸시는 친절에 무한히 감사하는 입장이지요.”

오드리의 대답은 아주 겸손했다. 가스트로는 오스미다가 오드리를 미래의 동지로 점찍어두었음을 알고 있었지만, 오드리가 관계의 시작을 죽은 어머니에게로 돌리는 바람에 딱히 꼬투리를 잡지 못했다. 사실 부모 잘 두었기로 따지면 국왕부처를 부모로 둔 가스트로만 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는 입맛을 다시며 서류를 돌려주었다.

“데멘사의 남부 확장 사업을 승인하겠네. 우편국의 협조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받을 수 있겠지만 군의 지원은 없어. 그대는 인부를 많이, 아주 많이 고용해야 할걸세. 힘들 거야.”

“감사합니다, 전하. 일자리가 많이 생기는 건 브란젤에도 멜브란트에도 좋은 일이죠. 제가 왕국을 위해 기여할 수 있는 일이 또 생기다니, 그거 참 기쁘기가 한량없습니다.”

가스트로의 비꼼은 오드리에게 조금의 타격도 입히지 못했다. 가스트로는 태연자약한 대답을 들으며 브란젤 곳곳에 나붙고 있는 포스터를 떠올렸다. 마침 오드리의 차림은 포스터 속의 벨트람과 아주 비슷한 승마복이었다. 머리칼을 깔끔하게 올린 것만이 다를 뿐이었다.

“그렇군. 이러다간 헨젤 영애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겠어. 전보가 마법진에 이어 포스터 속에 등장할지도 모르겠군. 그러고 보니 오늘 차림도 승마복이로군? 일부러 그렇게 입고 왔나? 2차 괴물 사태가 있던 날이 떠오르도록? 별일이야, 아무리 어머니의 비호가 있다지만 그 차림으로 왕궁을 헤집고 돌아다닐 수 있다니. 시녀장이 쫓아와 나무라지 않던가?”

“별말 않더군요. 사실 제가 승마복 좋아하는 거야 작년부터 아주 유명했지요. 그래도 이거 입고 다니면 곱게 보는 사람이 별로 없었는데, 돌아와 보니 분위기가 싹 바뀌어 아주 신기하더군요. 귀부인과 귀족 영애들이 남부식 드레스를 입고 다니질 않나, 머리를 초록색으로 염색하질 않나…….”

“분위기에 너무 휩쓸려서 들뜨지 말게. 그대를 따라하는 사람이 늘어났다고 해도 그건 일시적인 일탈에 불과해. 날이 추워지고 새로운 유행이 시작되면 사람들은 금세 흥미를 잃을 거야.”

“압니다. 라디아타가 왕비가 되어 전면에 나서기 시작하면 사람들의 시선은 단번에 그쪽으로 쏠려 버리겠죠. 그만큼 눈부신 사람이니까요. 자, 전하. 말 돌리지 마시고 여기 서명 좀 해주시죠.”

오드리가 여전히 웃는 낯 그대로 서류를 내밀었다. 가스트로가 받아보니 전보 개설 예정 루트를 거의 완벽하게 짜서 작성한 전보 개발 허가 서류였다. 거쳐야 할 하위 의사결정단계를 다 뛰어넘은 서류였지만, 왕위계승 예정자인 가스트로의 서명만 있으면 바로 효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가스트로는 기함하고 오드리를 노려보았다. 서명이 들어간 공식적인 서류를 남기는 건 단순한 구두 허가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얘기였다.

“……헨젤 영애, 그대가 브란젤에 온 건 어제가 아니었던가?”

“그렇지요.”

“정말 하루 만에 이런 서류들을 죄다 준비한 것도 모자라 어머니를 설득해서 날 만나러 온 건가? 내가 만나주지 않으면 어쩌려고?”

“일테니아 후작님과 길게 대화한 일은 없습니다. 왕궁에 온 것도 아버님께 전해 드릴 물품이 있었던 거고요. 다만 혹시 전하를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을 품고 왕궁에 온 건 맞습니다. 서류 또한 하루 만에 준비한 건 아니고요.”

“자네가 안 하면 누가 이런 준비를 했다는 건가? 아, 혹시 그……. 데멘사의 설립 과정에서 큰일을 했다는 자네 심복이 준비한 건가? 내 스카웃 제의를 무시했던?”

가스트로는 이디케의 이름도, 성별도 몰랐다. 그에게 중요한 건 결과였고, 이디케는 그의 닦달에 매번 흡족한 결과물을 제공했다. 무거운 책임감 때문에 어깨가 짓눌리는 요즘, 유능한 비서가 절실한 가스트로는 오드리의 미소에 연신 한숨을 쉬었다.

“대답은 않고 마냥 웃는 걸 보니 맞는가 보군. 젠장, 그를 내가 데려왔어야 하는데.”

“하하……. 안 됩니다. 그 애가 없어지면 당장 저부터도 몹시 곤란해지거든요. 제가 아무리 전하께 충성을 바친다 한들, 멀쩡한 오른팔을 자를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겠지. 주인이 자리를 비웠는데도 이만한 준비를 알아서 해내는 수하면 오른팔 이상이겠지. 확 뺏어오고 싶군.”

“안 됩니다.”

“정색하기는. 헨젤 영애, 지금 내게 멀쩡한 펜이 없는데 서명은 좀 나중에 하는 게 어떨……까…… 했는데 펜이 있군, 그놈의 만년필…….”

가스트로의 궁색한 변명을 기다렸다는 듯, 오드리가 웃옷 안주머니에서 만년필을 꺼내 내밀었다. 잉크를 따로 가지고 다닐 필요가 없는 혁신적인 펜은 여기에서도 훌륭하게 제몫을 했다.

“질릴 정도로 꼼꼼하군. 국경을 지키는 군인들도 헨젤 영애만큼 꼼꼼하진 않을 거야. 아르젠 남작은 헨젤 영애의 이런 면을 두고 뭐라고 하진 않나?”

“셰비언은 제 성격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언급하지 않는답니다. 그게 바로 그의 사랑스러운 점이죠. 전하께서도 라디아타에게 사랑과 관심을 받고 싶다면 그녀의 타고난 천성을 바꾸려 들지 않으시는 편이 좋을 거예요.”

“이런, 헨젤 영애가 라디아타의 절친한 친구라는 걸 내가 깜빡 했군. 별 소용은 없겠지만, 잔소리 고맙네.”

“웬만하면 소용이 있길 바랍니다. 아끼는 벗이니까요.”

“이거 참, 약속한 것도 아닐 텐데 여자들이 똘똘 뭉쳐 날 괴롭히는군. 내 고민의 절반은 여자들이 원인이야.”

“어쩌겠어요, 세상의 절반은 여자인걸. 하지만 전하께서 계속 그런 입장을 고수해서는 라디아타와의 관계 개선이 영 어려우실 텐데요. 선물만 보내지 마시고 가끔은 직접 가서 얼굴도 보고 대화도 나누고 하세요. 예전엔 잘 하셨잖아요?”

라디아타가 계속 거절할 땐 잘 하더니 약혼하고 나서는 왜 갑자기 이 따위로 구는 건데? 대놓고 따지지 못하는 오드리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질문이었다.

“설마 라디아타가 아직도 전하를 문간에서 돌려보낼까 봐 그러는 건 아니시죠? 전하께서 직접 찾아가시면 라디아타도 기뻐할 거예요. 선물의 의미가 각별하게 느껴지겠죠.”

“그대는 내가 얼마나 바쁜지 상상이 안 가나? 잊지 않고 선물을 챙기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걸세. 라디아타도 조용히 있는데 그대가 뭐라고 날 독촉하지? 알아서 할 테니 걱정 말게.”

“나중에 저더러 중재해 달라고 하시면 안 돼요.”

“헨젤 영애야말로 친구의 역할을 너무 확대 해석하지 말게나.”

가스트로는 오드리의 말을 한 귀로 흘렸다. 전보의 확장은 시기를 놓칠 수 없는 일이라 서명이야 했지만, 또 어디서 예산을 확보할까 생각하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밝은 얼굴로 서류를 받아드는 오드리가 얄미워질 지경이었다.

“미리 축하하네. 데멘사의 전보가 멜브란트 전역에 깔릴 날이 멀지 않은 것 같군.”

“데멘사의 전보가 저 개인뿐만 아니라 왕국 전체에 도움이 되는 날이 곧 올 겁니다. 지금 투자하는 금액 이상으로 되갚아 드릴 테니 그리 속 쓰린 표정 짓지 마세요.”

“내 표정이 보이나? 정말이지, 헨젤 가문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눈이 밝아……. 참 곤란한 사람들이야.”

“칭찬 감사합니다. 허면, 저는 이만 물러나도 될까요?”

“되도록 빨리 사라져 주게. 그대가 어머니를 앞세워 들이닥친 통에 내 스케줄이 밀리고 있어.”

오드리는 몹시 뿌듯해하며 가스트로의 집무실을 나섰다. 품에 넣어둔 서류가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 이걸 데멘사에서 몸이 부서져라 일하고 있는 이디케에게 가져다주면 얼마나 기뻐할까. 거의 눈물을 흘릴 정도로 기뻐하지 않을까. 어릴 적에 직접 잡은 개구리 선물 이후로 가장 큰 반응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오드리는 휘파람을 불며 깡총대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참고 걸음을 재촉했다. 새벽부터 축축하게 내리는 비가 자신의 앞날을 축복하는 것만 같았다.

한데, 그녀는 궁을 채 벗어나기도 전에 생각지도 못했던 인물과 마주쳤다. 당연히 헨젤 백작 옆에서 일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그의 보좌관 일랑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랑 씨? 날 기다렸나요? 설마 아버님께서 날 불러오라고 시키기라도 하셨어요?”

“아뇨, 그건 아닙니다. 레이디 헨젤이 곧바로 저택으로 돌아갔는지 확인하고 오라고 시키셨을 뿐이죠. 레이디 헨젤, 이제 저택으로 돌아가십니까?”

“이런, 아버님께서 너무한 짓을 하셨군요. 시종에게나 맡길 법한 일을 보좌관에게 시키다니요.”

일이 힘들어 다들 기피하는 자리라 그렇지, 재무국장 헨젤 백작의 보좌관이면 상당한 고위직이었다. 오드리가 어찌나 안쓰러워하는지, 일랑은 뒤늦게 찾아온 부끄러움에 허겁지겁 변명을 주워섬겼지만 별로 효과는 없었다. 그는 멋쩍게 뒷머리를 매만지며 사실을 실토했다.

“……사실은 도망 나온 겁니다. 오스미다 전하께서 다녀가신 후 헨젤 백작님의 기분이 영 별로라서요.”

“아하……. 이해해요. 아버님은 능력 있는 분이시지만 그만큼 예민한 분이시라, 옆에 있는 사람의 신경을 바짝바짝 말릴 때가 있죠.”

이해는 개뿔. 오드리는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일랑은 그걸 고스란히 믿었다. 헨젤 백작의 예민하고 까칠한 성질머리를 아는 사람이 나 말고 또 있었다니, 하고 조금은 감격하기도 했다. 오드리가 그 뒷말을 잇기 전까지는.

“하지만 어쩌죠……? 일랑 씨에겐 미안하지만, 곧바로 저택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어요. 몇 달 만에 돌아온 브란젤인데 여기저기 구경도 좀 하고 그래야죠.”

“예? 비가 오는데도요? 레이디 헨젤, 웬만하면 바로 돌아가시죠. 구경은 내일부터 하시면 됩니다. 오늘이 브란젤의 마지막 날인 것도 아니잖습니까.”

“어허, 지긋지긋한 가뭄의 끝을 알리는 비가 내리는 날인데 마음껏 축하해야죠!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나뿐만은 아닐걸요? 오늘 아침엔 창문을 열자마자 노랫소리를 들었다고요.”

“맙소사, 레이디 헨젤!”

어떻게든 오드리를 곧바로 저택으로 돌려보내려는 일랑의 노력은 눈물겨웠다. 그는 씩씩하게 마차를 향해 걷는 오드리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서는, 오드리가 곧장 저택으로 돌아가야 하는 이유를 줄줄이 읊어댔다.

웬만한 사람들이면 듣는 것만으로도 지쳐 나가떨어질 것이지만, 오드리는 이디케와 다이앤에게 이미 숱하게 겪어 한참 전에 적응했다. 그녀는 잔소리를 능숙하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마차를 탔다. 다급해진 일랑이 마차의 문을 붙들고 매달렸다.

“레이디 헨젤, 사람 한 명 구한다 생각하시고, 제발! 레이디 헨젤이 왕세자 전하의 집무실에서 보낸 시간은 제가 어떻게든 메워보겠습니다! 제가 못 미덥더라도 부디……!”

“일랑 씨, 그렇게 매달려 있지 말고 그냥 마차에 타는 게 어때요?”

“네에?”

“난 일랑 씨의 능력을 높이 평가해요. 인재를 보좌관으로 잘 써먹다가 아들이 재무국에 들어오면 냅다 업무를 넘겨주고 보좌관에겐 뒤치다꺼리만 시키다가 다른 곳으로 보낼 가능성이 매우 높은 아버지와는 달라요.”

오드리가 하는 말은 일랑이 생각해 온 것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헨젤 백작에 대해 이렇게까지 노골적인 평가를 하는 사람은, 그것도 대놓고 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아무리 딸이라지만, 아니, 딸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일지도 모른다.

마차 문을 붙든 채 말이 없어진 일랑을 오드리가 한 번 더 꼬드겼다.

“일랑 씨, 내가 조금 전까지 누굴 만나고 왔는지 알잖아요?”

“그야 오스미다 전하를 만나신 거 아닙니까…….”

“어머, 조금 전에는 제가 왕세자 전하의 집무실에서 보낸 시간을 잘 메워보겠다고 하셨잖아요.”

“…….”

“지금 왕궁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왕세자 전하가 아니라 오스미다 전하이시고, 그분은 저를 딸처럼 아끼시죠. 왕궁에서 일하는 모든 시종과 시녀는 그분의 아래에 있고요. 내가 왕세자 전하와 면담한 게 아버님의 귀에 들어갈까요, 안 들어갈까요?”

“당연히 들어갑니다. 헨젤 백작님을 너무 쉽게 보시는 거 같은데, 아무리 늦어도 오늘 저녁쯤엔…….”

“일랑 씨가 나서지 않아도? 그래도 오늘 저녁일까요? 다들 아버님의 심기를 거스르기 싫어서 집무실 안에 안 들어가고 일랑 씨를 통하는 걸 내가 다 아는데, 그래도 오늘 저녁이라고 생각하세요? 진심으로?”

그런 건 또 언제 어떻게 알았을까. 일랑은 오드리를 과하게 반기던 재무국의 직원들을 떠올렸다. 그때는 오드리가 가져온 간식을 좋아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

“차기 헨젤 백작인 내 남동생은 벌써 몇 달 전에 열세 살 생일을 맞았어요. 그 애는 지금 비레직 남작령의 일을 맡아보고 있죠.”

“벌써…… 말입니까? 열세 살인데?”

“일랑 씨와 제가 나눌 말이 아주 많을 것 같지 않나요? 타세요.”

오드리가 마차의 빈 공간을 가리켰다. 일랑은 홀린 듯 마차에 올라탔다. 구석에 숨어 보이지 않도록 숨죽이고 있던 다이앤이 얼른 마차의 문을 닫았고, 마차의 문이 닫히자마자 마부가 곧장 채찍을 휘둘렀다. 덜컹덜컹, 마차가 흔들렸다.

“……벌써부터 후회가 됩니다. 이게 잘한 짓일까요?”

“그럼요. 아주 탁월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하게 될 거예요.”

아치형으로 휘어지는 오드리의 눈매를 보자 어쩐지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보이지 않는 족쇄가 발목에 철썩 채워진 기분이었다. 일랑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후회가 됐다. 애초 재무국 따위에 지원하는 게 아니었는데 내가 왜 그랬을까. 한층 거세진 빗줄기가 마차 지붕을 마구 두드리는 게, 제 인생이 망하는 소리 같아 울적할 뿐이었다.

셰비언은 무겁디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올렸다. 널찍한 방 전체에 붉은 노을이 들어차 시야가 온통 붉었다. 잠깐만 눈을 붙이자 생각했던 때가 이른 아침이었는데, 지금은 저녁이었다.

“이런……!”

놀란 나머지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지만, 일어나 앉자마자 띵하니 머리가 울리고 구토감이 밀려왔다. 아직 샤를레아의 마력이 관절 곳곳에 쐐기처럼 박힌 채로 남아 있어서인지 이곳저곳이 쑤시고 아렸다.

하지만 셰비언은 아픔 따위에 쓸 정신이 없었다. 그는 침대에서 벗어나 샤를레아를 봉인한 봉인구부터 찾았다. 어제 오드리에게 정신이 팔린 나머지 대충 아무 곳에나 던져 두었던 봉인구는 어찌된 일인지 창문 커튼 아래에 굴러들어가 있었다.

봉인구의 크기는 갓난아이의 머리만 했고, 색은 영롱한 금빛이었다. 셰비언은 팔에 묵직하게 걸리는 무게를 가늠하며 밤새 뭔가 잘못된 곳은 없는지 점검했다.

‘일단 겉으로는 괜찮은데…….’

마법을 준비할 당시에는 완벽하게 만들었다고, 이 이상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본래 계획했던 단계를 거의 다 생략하고 꾸역꾸역 마지막 봉인만 한 꼴이 된지라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걸 어쩔 수가 없었다.

셰비언은 봉인구에 몇 중으로 마법을 걸었다. 불안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를 안도가 채울 때까지, 몇 번이고 계속. 그걸로도 모자라 마법진까지 새겼으니, 한계까지 마법을 받아들인 봉인구는 특제 마법등처럼 은은한 금빛으로 빛났다.

만족스럽다 싶은 수준에 이르러 봉인구를 내려놓고 나서야 땀으로 흥건하게 젖은 등과 관절 곳곳을 쑤셔대는 고통이 느껴졌다. 셰비언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샤를레아의 마력을 해소하는 데에 집중했다. 그녀의 마력은 주인을 닮아서인지 집요하고 끈질겼다.

이만하면 앞으로 움직이는 데에 무리가 없겠다 싶을 정도를 마력을 해소하고 나서 눈을 뜨니, 방은 완연한 어둠으로 물들어 있었다. 창문을 가린 커튼을 걷었지만 어둡기는 마찬가지였다.

“오늘밤엔 달을 보기 힘들 거야. 지금도 비가 내리고 있거든.”

등골에 소름이 쫙 돋았다. 셰비언은 자신에게 말을 건 사람이 오드리라는 걸 눈으로 확인하고서야 경계를 풀었다. 오드리가 침대 아래쪽에 놓인 의자에 앉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세상에, 아가씨였군요…….”

“아직도 내 목소리를 구분하지 못하는 건가? 그거 좀 서운한데.”

“설마 그럴 리가요. 그저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는데 말소리가 나서 깜짝 놀란 거예요. 그림자라도 나온 줄 알았네.”

“그림자?”

“어떤 상대의 모습을 훔쳐서 진짜인 척하고 다니는 괴물이에요. 진짜의 모습을 한 채 멋대로 행동하고 다니면서 진짜가 주변인들의 오해를 사게 만들죠. 공격력은 약하지만 성가셔요. 용이 내전을 벌이던 때, 그림자가 작전에 혼선을 주는 일이 잦아서 멸절시켰어요.”

“성가실 만하군. 그런 괴물을 왜 그림자라고 부른 거지? 헷갈리잖아.”

“글쎄요……. 진짜와 똑같은 모습을 했으나 다른 존재라는 점에 착안해서 그리 불렀나 보죠. 아무튼 이젠 없는 괴물이에요. 샤를레아가 갑자기 방에 숨어들어온 뒤로 제가 좀 예민했나 봐요. 그림자 따위 이젠 있을 리도 없는데.”

오드리는 말갛게 웃는 셰비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쓸데없이 밤눈이 밝은 탓에 봉인구가 뿜어내는 은은한 빛만으로도 셰비언의 상태가 훤히 보였다. 하루 종일 잤다고 들었는데 검게 피곤이 맺힌 눈두덩이나, 파리하게 질린 채 부르튼 입술, 본인은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듯하지만 아까부터 간헐적으로 떨리는 몸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런데…… 언제 오셨어요?”

“조금 전에. 눈을 감고 앉아 있기에 몰래 다가가서 놀라게 하려고 했는데, 그대가 갑자기 눈을 뜨는 바람에 내가 더 놀라고 말았지 뭐야. 설마 날 눈치채지 못할 줄은 몰랐지만.”

사실은 셰비언이 눈을 뜨기 전에 들어와 있었으면서, 오드리는 태연히 거짓말을 했다. 이래도 되나, 하고 들었던 회의는 안심한 셰비언이 그녀의 옆에 와서 앉자마자 사라졌다.

셰비언이 꾸벅꾸벅 조는 병아리처럼 머리를 끄덕대다 오드리의 어깨에 머리를 얹었다. 오드리는 셰비언의 목에 팔을 두르고 젖은 등을 살살 쓸었다. 어젯밤에 끌어안을 때와는 너무 다른 느낌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식사도 거르고 종일 잠만 잤다던데……. 환자가 그러면 안 되지. 뭔가 먹고 싶은 게 있나? 있으면 말해봐. 바로 가져오게 할 테니까.”

“별로……. 생각나는 게 없어요. 배고프지도 않고.”

“오, 드디어 자신이 환자라는 걸 인정했군. 하긴 어제의 그대는 별로 환자 같지 않긴 했어. 그게 환자면 세상에 건강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걸.”

셰비언이 숨죽여 웃었다. 그의 어깨가 마구 들썩거렸다. 오드리는 먼저 뻔뻔한 농담을 던져놓고 본인이 더 민망해 손등으로 뺨을 식혔다.

“음, 환자는 배고프지 않아도 먹어야 돼. 그대가 식욕 없다고 할 줄 알고 내가 알아서 챙겨왔으니 먹어. 고기 종류 좋아하지? 허브를 넣고 푹 끓인 닭 수프인데……. 그대 입맛에 맞을까 모르겠군.”

오드리는 벌떡 일어나려고 했지만, 셰비언이 그녀를 덮어 누르듯 끌어안는 바람에 그 자리에 도로 주저앉고 말았다. 이거 왜 이래, 투덜대며 끙끙 밀어냈지만 셰비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닭고기고 소고기고 필요 없어요. 잠깐만 이러고 있으면 돼요…….”

“날 안고 있는다고 배가 채워지는 것도 아닌데 말도 안 되는 소릴. 날 잡아먹고 싶은 게 아니면 당장 비켜.”

잠깐이나마 인간을 잡아먹고 싶단 생각을 했다는 건 절대 말하지 말아야지. 셰비언은 남몰래 다짐하며 오드리를 놓아주었다. 생각보다 순순한 태도에 오드리가 의심의 눈길을 보냈지만, 셰비언은 아픈 척 눈을 감고 시선을 피했다. 몹시 티 나는 연기였다.

마법도구에 담긴 닭 수프는 담은 지가 한참인데도 여태 따뜻하게 김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셰비언은 감시인지 보살핌인지 알 수 없는 눈빛을 받으며 수프를 퍼먹었다. 그가 그릇을 절반쯤 비웠을 때, 오드리가 불쑥 말을 붙였다.

“옛 마법이라고 하는 거, 왕궁마법사들에게 전수할 생각 없어?”

“흐음, 마법사협회에 넘겼던 마법들을 말씀하시는 건 아닌 것 같고……. 그게 어떤 마법이냐에 따라 다르죠. 그걸 감당할 수 있는 마법사가 있는지도 중요하고요. 아이샤 정도면 워커에겐 한참 못 미치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따라올 순 있을 거예요.”

셰비언의 허락이 어찌나 시원시원한지, 오드리는 얼떨떨한 기분마저 들었다.

“내가 왜 이런 부탁을 하는지는 안 물어봐?”

“이유가 있겠죠.”

“물론 이유가 있긴 하지만…….”

“아가씨는 이제까지 제게 마법으로 뭔가를 해달라고 하신 적이 없어요. 정신마법의 존재를 알게 된 뒤에도 그걸 써먹고 싶다고 하신 적이 없죠. 헨젤 백작님도, 하델 공자도 정신 마법으로 조종해 버리면 편할 텐데 그쪽은 아예 생각도 안 하셨잖아요. 그걸 믿는 거예요.”

“그야 그때는 그대가 내 연인이 아니었고……. 이제부터는 실컷 부탁할 생각인데? 그런데 정신마법이라니, 세상에, 내가 왜 정신마법으로 조종하는 걸 못 떠올렸을까. 지금이라도 해줄 수 있어?”

“농담은 적당히 하시고요. 필요한 대로 마음껏 부탁하세요, 안 되는 건 안 된다고 할 테니까.”

“음, 내 판단력을 시험받을 때가 온 거로군. 이거 긴장되는데.”

셰비언이 보여주는 신뢰가 오드리의 어깨를 무겁게 만들었다. 오드리는 뛰는 심장을 안고 셰비언의 뺨에 입 맞췄다.

“그대를 만나서 다행이야.”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그런데 아가씨, 저 이거 그만 먹어도 돼요? 배부른데. 전 식사 말고 다른 거 하고 싶어요. 저 이제 괜찮아요. 진짜예요. 안색 좋아진 거 보이시죠?”

오드리가 깔깔 웃으며 식기를 한쪽으로 밀어버렸다. 셰비언이 냉큼 테이블을 넘어와 오드리를 안고 바닥에 뒹굴었다. 또 바닥이네요. 릴리가 카펫 청소 잘 해뒀을 거야. 연인은 시답잖고 달콤한 속삭임을 나누며 서로의 체온으로 녹아들었다. 빗소리가 신음소리를 죄다 삼킨 밤이었다.

* * *

오드리가 돌아온 뒤로 삼 주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왕세자의 결혼이 코앞으로 다가오면서 브란젤의 분위기는 확연히 밝아졌다. 힘들고 어려운 시기는 다 지나갔고, 앞으로는 좋은 일만 있을 거라는 희망이 번졌다.

결혼식 이후 이뤄질 왕세자 부부의 행진을 보기 위해 사람이 몰려들었고, 그들을 노린 숙박업소와 외식업소가 성업을 이뤘다. 한때 매출이 바닥까지 떨어진 상태였던 도박장과 극장, 전시회장에도 활기가 돌았다. 노점상이 거리 곳곳을 점령했고 공원 구석마다 곡예단의 텐트가 진을 쳤다. 어린 아이들이 꺅꺅 비명을 질러대며 골목을 뛰어놀았다.

그 활기 가운데서도 보석 경매장의 매출 증가가 유독 두드러졌다. 본래 부유층이 주 고객이다 보니 애초 괴물 사태에 별 타격을 입지 않기도 했지만, 최근 들어 부쩍 손님이 늘어났다. 사람들이 갑자기 보석에 미쳐서 경매장에 몰려든 건 당연히 아니고, 브란젤의 보석 경매장에서만 구할 수 있는 특별한 보석 때문이었다.

손님이 빽빽한 경매장, 불 켜진 무대에 엄지손톱만 한 루비가 올라왔다. 영롱한 붉은 색상도, 조명을 반사하는 광채도 최상급이지만 이 루비의 진짜 가치는 다른 곳에 있었다.

“이번 물품은 루비입니다. 여기 담긴 마법은 화염으로부터의 보호입니다. 쇠가 녹을 정도의 불길 속에서도 최대 한 시간 동안 착용자를 보호하며, 마법의 유효기간은 적어도 오 년 이상입니다.”

사회자는 말을 끝내기 무섭게 루비를 천으로 감싸서는 활활 타는 장작이 든 양철통에 통째로 던져 넣었다. 여기저기에서 숨죽인 비명 소리가 났다. 사회자는 익살스럽게 어깨를 으쓱이며 충분한 시간을 끈 뒤에야 루비를 건져 냈다.

놀랍게도 루비를 감싼 천은 조금도 상하지 않은 그대로였다. 사회자가 보란 듯 천을 펼쳐 사방에 보이는데, 불에 탄 자국은커녕 작은 구멍 하나 없다. 하지만 그가 루비 없이 천만 다시 양철통에 던져 넣자 천은 순식간에 불타올랐다.

“아르젠 남작의 검증을 거친 보석입니다.”

보호마법이 걸린 보석, 그것도 용의 검증을 받은 보석! 이제는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옛 마법이 보석에 담겨 유통되는 것이다.

멜브란트의 귀족과 부호는 물론이고 왕세자의 결혼식과 대관식에 참석하기 위해 멜브란트를 찾아온 외국의 귀빈들까지도 눈에 불을 켜고 보석 경매장을 찾았다. 일상에서도 보석을 착용하는 게 당연한 계층일수록 보호마법이 걸린 보석을 탐냈다.

침묵 속에서 빠르게 팻말들이 올라갔다. 사회자가 굳이 경쟁심리를 부추길 필요도 없었다. 보호마법이 걸린 보석은 경매장에서 하루 한 개, 많으면 두 개 정도밖에 나오지 않았으니까. 유용성에 희소성이 결합되자 보석 가격이 천정부지로 오르고 있었지만,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다.

오드리는 빠르게 올라가는 금액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저 보석 판매금의 10%는 경매장의 몫, 50%는 보석에 마법을 걸어 공급한 왕궁마법사의 몫, 그리고 나머지 40%는 왕궁마법사에게 마법을 가르치고 보석의 마법을 검증한 셰비언의 몫이었다.

그리고 셰비언은 오드리에게 재산관리를 전부 맡겼다. 그에 더해 자신이 버는 돈은 전부 오드리의 것이니 필요한 곳에 마음껏 쓰라는 말을 덧붙였으니, 재산관리라기보다는 돈을 통째로 넘겨준 수준에 가까웠다.

“아가씨, 경매 현황 보는 게 그렇게 재밌어요?”

셰비언이 오드리의 뒤에서 다가와 그녀의 뺨에 입을 맞췄다. 오드리는 놀라지 않고 셰비언에게 아예 기대어 섰다. 그들이 있는 곳은 경매장 측에서 제공한 특별실로, 바깥에는 모습이 노출되지 않으면서 경매 현황을 볼 수 있는 시설이 갖춰져 있었다.

“나날이 사람이 늘어나네요.”

“그럼. 홍보를 그렇게 했는데 늘어나야지.”

오드리는 뿌듯함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그도 그럴 것이, 기계 장치는 물론이고 마법진도 없이 보석에 마법을 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 시대 사람들에게 너무나 낯선 개념이었다. 곰팡내 나는 책에서나 언급되는 옛 마법이 다시 등장했다는 걸 믿게 하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무엇보다 마법사협회가 셰비언에게 배운 마법을 일반에 공개하지 않고 연구용으로만 쓰고 있었으니, 셰비언의 이름을 팔아도 편견은 공고했다. 사람들은 마법사협회가 못하는 걸 왕궁마법사들이 할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 셰비언이 직접 마법을 건 게 아니라면 아무 의미 없다고 대놓고 말하는 사람도 많았다.

오드리는 그 벽을 깨기 위해 직접 나섰다. 신문에 무수히 많은 광고를 내는 걸로 모자라 신문팔이와 어린아이들에게 돈을 쥐어주며 전단지를 뿌렸다. 지긋지긋한 사교모임도 입에 단내가 나도록 다녔다. 셰비언이 오드리에게 다시 선물한 옐로 다이아몬드 장신구 세트는 다알리아 머리핀과 함께 오드리의 상징 같은 장신구가 됐다.

라디아타도 마법을 건 보석을 매우 좋아했다. 그녀는 오드리로부터 가장 먼저 마법 걸린 보석을 선물 받은 사람이었는데, 그 보석에는 통증 감소와 회복 마법이 걸려 있었다. 코르셋이 없으면 제대로 자세를 잡을 수 없는 처지에 코르셋 없는 남부식 드레스의 유행 한가운데에 놓인 라디아타에게 아주 딱 맞는 마법이었다.

라디아타는 그 보석을 가공해 머리장식으로 만들었고, 하루도 빠짐없이 착용했다. 그리고 그 상태로 각국의 귀빈을 만나고 사교활동을 했다. 오드리의 노력만으로는 뚫을 수 없었던 외국 귀빈들의 마음을 돌린 데엔 그녀의 공이 아주 컸다. 돈을 주고도 할 수 없었을 홍보를 라디아타가 맡아 해준 셈이었다.

경매장에서 보석을 팔아 번 돈의 태반은 남부지방으로 전보를 까는 데에 들어갔고, 일부는 왕실로 흘러들어갔다. 정확히는 오스미다 왕비와 가스트로 왕자의 주머니를 채웠다.

열악한 왕실 재정상황에 고심하던 가스트로는 오드리가 흔드는 돈주머니를 거절하지 못했다. 가스트로는 이를 갈면서도 오드리의 돈을 받고 작위를 약속했다. 대관식도 아직인데 치러야 할 빚만 이곳저곳에 쌓이고 있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일랑과 이디케는 그들 사이에서 최선을 다해 돈을 세탁했다. 그 흐름을 헨젤 백작이 모르도록 하는 게 그 둘의 임무였다.

오드리의 준비는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이대로 한 달만 더 지나면, 아무리 늦어도 두 달 뒤에는 지금까지 한 일들의 결과물을 볼 수 있게 될 터였다.

독립.

랄리우스가 아니라도 좋으니, 자신만의 성과 작위를 갖고 정전을 출입할 자격을 얻는 것. 헨젤에서의 탈출!

아득하게만 느껴지던 목표를 손에 쥘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붕 떠올랐다.

오드리는 불쑥 뒤돌아서서 셰비언의 목을 끌어안고 그의 뺨에 입 맞췄다. 셰비언이 당혹스러워하며 얼굴을 확 붉혔다.

“어어? 빨개졌네!”

함께 보낸 밤이 벌써 몇 번인데, 셰비언은 오드리가 이렇게 달라붙어 올 때마다 얼굴을 붉혔다. 그게 부끄러움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는 알기 어렵지만, 덕분에 요즘 오드리는 셰비언을 놀리는 데에 맛이 들린 상태였다. 그녀는 일부러 셰비언을 더 꽉 끌어안으며 장난을 쳤다.

“숨 막혀요, 아가씨. 놔주세요.”

“가녀린 여자가 꽉 끌어안아 봐야 얼마나 힘들다고 엄살이야?”

“아가씨의 힘은 절대 일반적인 여자의 힘이 아니거든요? 그 부분을 생각해 주셔야죠.”

입으로는 힘들다, 어떻다 하면서도 셰비언도 싫은 눈치는 아니었다. 오드리의 어깨와 등을 마주 안고 놔주질 않는 걸 보면 말이다. 바짝 붙어 서로의 숨소리를 듣고 있다 보니 어째 분위기가 이상야릇해졌다. 체온이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셰비언의 손이 오드리의 뺨을 쓰다듬고 목을 더듬었다. 나풀거리는 실크 셔츠의 깃을 만지작대는 손길이 몹시 관능적이었다.

“으음……. 이대로 아가씨에게 입 맞추고, 이 예쁜 드레스를 죄다 벗겨 버리고 싶지만…….”

오드리는 숨을 죽이고 셰비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의 손길이 지나는 곳마다 피가 뜨겁게 끓었다. 손이 지나간 곳을 짚어보라면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셰비언의 얼굴이 코앞에 다가왔을 때, 그녀는 더 견디지 못하고 눈을 감아버렸다.

쪽.

오드리는 어이가 없어 이마를 문질렀다. 이런 곳에서 옷을 벗기길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진한 키스 정도는 할 줄 알았다. 어린아이에게나 해줄 법한 이마 뽀뽀 때문에 그렇게 긴장했던가 생각하니 갑자기 억울해졌다.

“이게 뭐야? 나랑 장난해?”

“장난은 무슨? 저는 맛있는 건 가장 나중에 먹는 타입이거든요.”

“뭐?”

셰비언이 몸을 굽히고 오드리의 귓가에 속삭였다.

“여기선 기껏해야 입맞춤 정도인데……. 그건 너무 아쉽잖아요? 전 밤을 기다릴래요.”

“으…….”

“오, 이젠 아가씨 얼굴이 빨개졌어요.”

이래서야 셰비언을 놀리려다 되레 호되게 놀림당한 꼴이다. 오드리는 냉방 마법도구 앞에 서서 뜨끈뜨끈한 뺨을 문질렀다. 언제 저렇게 유들유들해졌는지, 농담도 빈말도 이해 못해서 헛소리를 하던 때가 그리워질 지경이었다.

셰비언은 오드리를 가만 내버려 두지 않았다. 오늘 연극을 보러 가기로 했던 걸 잊었냐며 오드리를 독촉해 셜리 극장으로 장소를 옮겼다. 하지만 오드리는 셜리 극장 앞에 서자마자 뒤돌아 도망치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큰 천에 인쇄된 초록머리의 벨트람이 극장 외벽을 장식한 걸 보는 게 몹시 힘들었다.

“내가 왜 오자고 했지.”

극장 내부는 더했다. 널따란 로비에 이제까지 배포됐던 연극 포스터가 종류별로 쭉 전시돼 있었던 것이다. 한 장 한 장 볼 때도 민망함에 몸이 떨렸는데, 이렇게 모아놓고 보니 아주 장관이었다. 초기작은 그래도 벨트람 티를 내느라 검은 말과 흰 망토가 꼬박꼬박 들어갔었는데, 뒤로 가면 갈수록 옷차림과 소품이 다양해졌다. 그러고도 계속 벨트람처럼 보인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오드리는 당장에라도 예약한 박스석으로 도망치고 싶어 했지만, 셰비언은 좀처럼 로비를 떠나려 들지 않았다. 갖지 못한 수집품을 앞에 둔 수집가라도 되는 듯, 포스터를 보는 내내 눈이 반짝거렸다. 연극 시작 시간이 다가올수록 로비의 사람이 늘어나는 통에 이러다 들킬까 오드리만 노심초사 애가 탈 뿐이었다.

“셰비언, 계속 볼 거면 내 손이라도 좀 놔줘. 난 먼저 가 있어야 할 것 같아.”

“왜요, 이렇게 멋진 그림들인데 다 보고 가셔야죠. 브란젤을 뒤집은 천재 화가의 뮤즈가 된 기분이 어떠세요?”

“제발 놀리지 마…….”

“아, 이건 못 보던 거네. 할 수만 있으면 다 가져가서 둥지에 걸어놓고 싶다…….”

챙 넓은 모자를 쓰고 오길 잘했다. 머리칼을 죄다 올려서 모자 속에 숨기기를 정말 잘했어. 오드리는 얼굴을 가려주는 모자가 목숨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꼭 부여잡고 셰비언의 뒤를 졸졸 따랐다.

다행히 포스터를 다 보고 박스석에 올라올 때까지 아무 일도 없었다. 분명 알아본 사람이 서넛은 있는 것 같았는데, 남부식 드레스와 초록색 염색이 워낙 유행이다 보니 확신하지 못해 섣불리 나서지 못한 듯했다. 오드리는 그 유행에 감사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슬퍼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차라리 평판이 땅에 처박혀 있을 때가 나았어. 왜 나더러 자꾸 벨트람이래?”

오드리가 사교모임에 다니면서 제일 많이 들은 얘기가 바로 벨트람 신화였다. 장본인이 워낙 싫어하니 대놓고 말하지는 못해도, 다른 화제는 젖혀놓은 채로 벨트람 신화만 줄줄 떠들어대는 의도가 너무 뻔했다.

솔직히 오드리가 유명세를 안 치러본 사람도 아니고, 어지간하기만 했으면 오히려 즐기면서 잘 이용했을 것이다. 문제는 네이기스의 포스터가 브란젤에 퍼지면서 어지간한 수준이 아니게 되었다는 것이다. 남부식 드레스를 입고 초록색으로 머리칼을 염색한 사람들을 볼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움찔하게 되는 걸 어쩌란 말인가. 네이기스의 포스터가 브란젤을 넘어 멜브란트 전역으로 퍼지는 걸 상상하면 식은땀이 다 났다.

“그날의 아가씨가 벨트람처럼 보였나 보죠.”

“아니, 이건 다 저 포스터 때문이야. 포스터의 그림이 너무 설득력 있게 그려져서 사람들이 착각하는 거라고. 솔직히 말해서, 초록색 머리칼의 벨트람이라니 그게 말이나 돼? 이럴 바엔 곡물창고의 수호신 벤의 화신이 고양이가 아니라 개라고 하는 쪽이 더 어울리겠다!”

“하하…….”

“셰비언, 지금 내가 말하는 거 다 한 귀로 흘려듣고 있지? 초록머리든 검은머리든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거 다 알아. 그렇지?”

셰비언은 오드리의 추궁에 답하지 않고 마냥 딴청을 피웠다. 그도 그럴 것이, 그에게 인간의 신화는 그냥 재미있는 옛날 이야기였다. 벨트람의 본질이 전쟁과 승리라면 그것만 챙기면 그만일 텐데, 거기에 머리색이 어떻고 말 색이 어떻고를 따지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오드리의 불행한 상상은 벌써 현실이 되어가는 중이었다. 브란젤의 신문을 따로 받아보는 주변 지역의 사람들은 그렇게 예쁘다는 포스터를 실물로 보고 싶어 했고, 그 수요에 따라 포스터를 확보해 판매하는 중개역이 등장했다.

중개역은 셜리 극장이 연극 관람객에게만 따로 판매하는 포스터를 관람객에게서 사들여 타 지역에 판매했다. 신문 기사를 통해 브란젤의 2차 괴물 사태를 소상히 알고 있던 사람들은 초록색 머리칼의 벨트람을 쉽고 빠르게 받아들였다. 무엇보다 그림이 멋지고 예뻤다.

오드리 몰래 포스터를 차곡차곡 모으고 있는 셰비언은 그런 사정을 다 알고 있었지만 그냥 입을 다물었다. 막을 수도 없는 일에 스트레스를 받느니 차라리 모르는 게 나았다.

오드리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셰비언을 노려보았다.

“셰비언, 내게 말하지 않은 게 있다면 지금 당장…….”

“그야 그날의 오드리 언니는 정말 벨트람 같았으니까 그렇죠.”

“그게 무슨 개소리……. 네이기스?”

갑자기 박스석 뒤의 문이 벌컥 열리고 네이기스가 나타났다. 셰비언의 멱살이라도 잡을 듯 짜증을 내던 오드리는 깜짝 놀라 자세를 바로잡았다. 아무리 포스터 속의 초록머리 벨트람이 마음에 안 들더라도 창작자의 앞에서 악담을 쏟아내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어쩐지, 꼭 오늘 이 연극을 봐야 한다고 이디케가 당부에 당부를 하더라니……. 나 몰래 둘이 뭔가 얘기라도 했던 거예요?”

오드리의 투덜거림이 더없이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되는 양, 네이기스가 까르르 웃었다. 보지 못하는 사이 약간 야위고 눈 밑에는 그늘이 생겼지만, 빛나는 눈빛은 예전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오드리 언니, 오랜만이에요. 언니는 여전하네요.”

“네이기스도 여전하다고 말하고 싶지만……. 조금 야위었군요. 많이 힘든가요?”

“아뇨. 요즘은 하루하루가 너무 즐거워요. 사람들이 제 그림을 알아준다는 게 이렇게 좋은 일일 줄은 몰랐거든요. 정말이지, 이게 다 언니 덕분이에요.”

네이기스의 얼굴은 순수한 호의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렇게 직접 만나서 감사 인사를 할 수 있게 되어 행복하다는 마음이 겉으로 죄다 드러났다. 네이기스를 만나면 호되게 나무라야지, 작정하고 있던 오드리였지만 그 솜사탕 같은 미소를 보자 저절로 맥이 빠졌다.

“그래요……. 안 그래도 로비에서 포스터 전시해 놓은 거 봤어요. 정말 잘 그렸더군요. 예전에 그리던 풍경화와는 화풍이 많이 다르던데, 고생했겠어요.”

“아뇨, 조금도 고생스럽지 않았어요. 오드리 언니는 제 뮤즈예요. 언니를 그릴 때면 볼린이 보낸 천사가 제 어깨와 손에 내려앉아 있는 것만 같거든요.”

“무슨 볼린까지…….”

네이기스의 눈빛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반짝거렸고, 오드리는 이제 막 꽃을 피우기 시작한 화가의 여린 심성에 상처를 내서는 안 된다는 압박감을 받았다.

“고, 고마워요. 네이기스 덕분에 내가 여신의 이름으로 불려도 보고……. 별일을 다 겪네요.”

“어머, 그건 언니의 착각이에요. 제가 언니를 벨트람으로 그렸기 때문에 사람들이 언니를 벨트람으로 부르는 게 아니고, 사람들이 언니를 벨트람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제가 언니를 벨트람으로 그린 거예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사실이에요. 무명 화가의 그림 한 장에 뭐 얼마나 대단한 영향력이 있어서 사람들에게 무의식적인 동의를 받았겠어요? 그날 브란젤에 있던 사람들, 언니가 괴물을 이끌고 달리는 걸 본 사람들은 언니의 뒷모습에서 벨트람을 떠올렸던 거예요. 저도 마찬가지고요.”

네이기스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달빛도 별빛도 모조리 사라진 검은 하늘에 떠오른 거대한 마법진 아래에서, 빛을 잃어가는 가로등 사이를 가로지르던 오드리를. 잉크처럼 검은 털의 준마를 타고 흰 망토를 펄럭이며 달리는 그녀를 쫓는 괴물 떼의 질주는 쉬이 잊힐 만한 성질의 장면이 아니었다.

“제가 한 일은 사람들이 다 같이 떠올린 장면을 현실로 끌어내 준 것뿐이죠. 그래서 인기가 있는 거기도 하고요.”

“라디아타의 인정을 받았던 천재 화가님이 말하기엔 너무 겸손한 발언이군요.”

“사실이니까요. 브란젤의 시민들은 언니에게 빚을 졌어요. 아니, 그날 왕궁에 계셨던 왕세자 전하를 생각하면 멜브란트 왕국 전체가 빚을 졌죠. 원수는 대를 이어 갚지만 은혜는 빨리 잊는 게 사람의 속성이니, 부디 제 그림이 사람들의 기억을 오래오래 붙드는 데에 도움이 되길 바랄 뿐이에요. 고마워요, 오드리 언니.”

네이기스가 벌떡 일어나 정중하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뒤이어 왕족에게나 할 법한 존경의 표시를 하니, 생각지도 못한 인사에 오드리는 몹시 당황했고 셰비언은 흥미진진한 눈으로 두 여자를 구경했다.

“일단 허리부터 펴요. 내가 왕족도 아니고 그런 인사는 못 받아요. 네이기스에게 그런 존경을 받을 정도로 큰일을 했다고도 생각 안 하고요. 그래도 감사 인사를 들으니 기분은 좋네요.”

지난 삼 주 동안 벨트람이 떠오른다는 말은 무수히 들었지만, 고맙다는 말은 비니타 이후로 처음 들었다. 상상 이상으로 정중한 인사에 어쩐지 얼굴이 간지럽긴 해도 기분이 좋았다.

“음……. 오드리 언니, 제가 과장해서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아니라곤 말하지 않겠어요. 물론 네이기스의 선한 마음은 고맙지만…….”

“증거를 보여줄 수도 있어요.”

“증거요?”

“이따 연극의 막이 오르면 박스석 난간에 기대서 밖에 얼굴을 드러내 봐요. 그 챙 넓은 모자도 벗고, 틀어 올린 머리칼도 풀고서요.”

“왜죠? 그때는 다들 무대를 보고 있을 텐데요. 굳이 날 볼 사람은 없을 거예요.”

“주연배우는 보겠죠. 연극 중에는 못 하더라도 커튼콜에서는 분명 언니에게 인사를 할걸요. 그때 관객들이 언니를 어떻게 볼까요? 내기해도 좋아요, 언니와 한 극장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다들 굉장히 기뻐할 거예요.”

오드리는 순간적으로 관객석을 훑었다. 벨트람과 칼레이의 연애담이 인기 좋은 소재인 건 사실이지만, 그걸 감안하고서라도 셜리 극장의 관객석엔 사람이 너무 많았다. 아직 시간이 꽤 남았는데도 불구하고 1층의 자리는 반이나 차 있었다. 이미 관객이 들어와 커튼이 걷힌 박스석도 여럿이었다. 연극이 시작될 무렵엔 극장이 전부 찰 게 분명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벨트람이라고 부를 걸 생각하니 등에서 땀이 쭉 흘렀다.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여긴 좀 특수한 장소가 아닌가 싶긴 하지만……. 도저히 시험해 볼 용기는 없네요. 네이기스의 말이 맞는 걸로 할게요.”

“아이 참, 진짜라니까요.”

“네, 진짜로요.”

네이기스가 가슴을 두드리며 답답해했지만, 오드리는 바늘 끝도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단호했다. 안 그래도 포스터가 계속 갱신되는 덕분에 화제성이 예상보다 오래가서 곤란한데, 브란젤역에서 겪었던 일을 또 겪을 순 없었다.

“그보다 이제 네이기스의 얘기를 해보죠. 네이기스, 이디케를 통해 날 여기로 부른 게 네이기스죠? 무슨 일이에요?”

네이기스의 뺨이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약간 경직된 듯한 분위기가 싹 사라지고 그 대신 막 꽃잎이 벌어지는 장미 같은 싱그러움이 그녀의 전신에서 배어 나왔다.

“음……. 언니, 연극 시작되려면 시간이 아직 남았는데 커튼 닫아도 되죠? 잠깐만 닫을게요.”

네이기스는 오드리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박스석 앞의 커튼을 쳐서 시야를 가렸다. 성능 좋은 커튼은 극장의 웅성거림을 훌륭하게 차단해 박스석 안을 고요하게 만들었다.

“실은, 언니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 후우, 그래서 락시 양에게 따로 연락을 넣었어요. 그게 뭐냐면…….”

“네이기스, 숨 좀 쉬어요. 그러다 쓰러지겠어요.”

“아, 네.”

좁은 박스석 한가운데 선 네이기스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어찌나 긴장했는지, 저러다 뒤로 넘어가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가슴 앞에서 모아 쥔 손이 덜덜 떨렸다.

“왜 그렇게 긴장해요? 설마 내 얼굴로 포스터를 그려서 브란젤 전역에 뿌린 것보다 더 큰일인가요?”

“어쩌면요.”

온갖 나쁜 상상이 오드리의 머릿속을 스쳤다. 그녀의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저, 결혼하려고요.”

“……네? 결혼이요? 누구랑요? 설마 보티안 씨요?”

“네. 피올이 아니면 제가 누구와 결혼하겠어요?”

오드리는 자신도 모르게 네이기스의 아랫배를 슬쩍 바라보았다. 그사이에 설마 임신한 건 아니겠지? 대놓고 묻지는 못해도 충분히 의미가 전해지는 시선에 네이기스가 입을 삐죽였다.

“임신 아니에요. 본래는 그의 바람대로 조금 더 기다려 볼 생각이었는데……. 이대로 있다간 결혼은커녕 그냥 집에 끌려 들어갈 것 같아서요. 그럼 이번에야말로 진짜 끝이고요.”

연락을 끊고 집을 나갔더라도 딸은 딸이라, 메너트는 좀처럼 네이기스를 포기하지 못했다. 그녀는 오드리가 없는 동안 네이기스를 찾아 헨젤 백작가에 거의 매일 찾아왔고, 네이기스가 헨젤 저택을 나가 행적을 숨긴 후로는 사방팔방 찾아다녔다.

그 과정에서 포스터가 네이기스의 작품이라는 걸 알게 됐는지, 에이쉬는 메너트가 인쇄소에 행사하는 압력을 막아내느라 하도 시달린 나머지 피골이 상접해졌다. 그나마 귀족 후원자들이 버티고 있는 극장에는 함부로 말을 꺼낼 수 없는지 아직 잠잠하지만, 그게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아무도 몰랐다.

에이쉬는 네이기스에게 걱정하지 말라며, 이 정도 보호도 못 해줄 거면 포스터 뿌리라는 말도 안 했을 거라고 호언장담을 했지만……. 자신을 위해 다른 사람들이 희생하고 있다는 죄책감과 안전한 공간이 자꾸만 줄어든다는 압박감은 네이기스의 신경을 야금야금 갉아먹었다.

“피올과도 많이 상의했는데, 제가 그웬이 아니게 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결론이 나왔어요. 에이쉬 오라버니도 동의했구요. 포스터를 익명으로 배포하길 정말 다행이지 뭐예요.”

“……이디케의 마음을 알 것 같기도 하고……. 이것 참 기분이 이상하네요. 네이기스, 결혼하더라도 그림은 계속 그릴 거죠?”

“당연하죠. 제게 처음으로 그림을 권한 사람이 피올인데요. 그래서 말인데요, 오드리 언니가 제 결혼의 증인이 되어줬으면 좋겠어요!”

멜브란트의 전통적인 결혼식에서 증인은 총 세 명이 필요했다. 신랑과 신부의 친인척이 각 한 명씩, 그리고 둘 모두가 동의하는 가까운 친구가 증인이 되어주었다. 오드리는 네이기스의 사촌이니, 증인으로서 자격은 충분했다.

“보통 증인은 결혼한 사람에게 맡길 텐데요…….”

“아뇨, 전 오드리 언니에게 부탁하고 싶어요.”

네이기스의 눈빛이 이루 말할 수 없이 간절했다. 오드리는 몹시 부담스러워하면서도 결국 허락하고 말았다.

“그래서 결혼식이 언제인데요?”

“닷새 뒤요.”

“……네? 농담이죠?”

“사정이 이래서 호사스럽게는 못하고, 구색만 맞춰서 간단하게 할 거예요. 자, 여기 결혼식 청첩장.”

오드리는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심정으로 청첩장을 받았다. 웬만한 결혼식 초대가 몇 달 전에 이뤄진다는 걸 생각하면, 아무리 사정이 급하더라도 이건 정말 너무한 날짜였다. 네이기스가 어색하게 웃으며 변명했다.

“어머니에게 들키면 큰일 나잖아요. 일부러 왕세자 전하 결혼식 이틀 전으로 잡았어요. 그땐 어머니도 너무 바빠서 아무것도 못하실 테니까요.”

“정말 도둑 결혼이네요……. 이런 결혼에 증인을 서도 되나 몰라.”

오드리는 청첩장을 팔락대며 셰비언을 흘겨보았다. 어쩐지 계속 흥미도 없는 연극을 보러 가자고 졸라대더니만, 이게 다 피올의 사주를 받은 게 분명했다.

“셰비언, 이제 인간 다 됐네.”

“노력의 결과죠.”

곧장 받아치는 게, 말이 정말 많이 늘었다. 오드리는 셰비언이 피올과 어울리게 둔 게 과연 잘한 일인지 새삼 회의에 빠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날, 오드리는 연극의 주연 여배우에게 꽃다발을 받았다. 레이디 오드리의 팬이라, 언젠가 한 번은 실물을 꼭 보고 싶었다나.

* * *

본래 피올과 네이기스는 작은 식당을 빌려서 증인 셋과 몇몇 초대객만 두고 간단히 식을 치를 생각이었다.

하지만 결혼식을 대충 하는 꼴은 못 보겠다고 나선 사람들이 있었고, 덕분에 결혼식 당일에 이르러선 식장 가득 꽃을 채우고 악단을 부르고 푸짐한 음식과 향기로운 술을 준비하는 등 그럭저럭 구색을 갖춘 결혼식이 됐다.

오드리는 달콤한 샴페인을 홀짝거리며 삼삼오오 모인 하객들의 면면을 살폈다. 하객의 절반은 치안대 사람들이었고, 나머지는 예술계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화가만이 아니라 소설가, 시인, 작곡가, 극작가, 배우, 가수……. 치안대 사람들은 피올의 손님으로 보이는데, 어째 예술계 사람들은 네이기스가 아닌 에이쉬의 손님들 같았다.

“오드리, 잘 지냈나요?”

한참 바쁘게 손님들을 대접하던 에이쉬가 오드리에게 다가와 친근하게 말을 붙였다. 작년에 시곗줄을 사러 갔다가 만났던 그는 사사건건 살론과 멜브란트를 비교하던 얼간이였는데, 지금의 에이쉬는 꽤 그럴듯한 신사처럼 보였다.

“잘 지냈죠.”

“하하, 왜 그렇게 뻣뻣해요? 좋은 날인데 좀 웃고 그러지. 누가 보면 화난 줄 알겠어요.”

“화났으니까요. 신랑신부가 눈앞에 있는 것도 아닌데 내가 굳이 생글생글 웃어야 하는 이유가 뭐죠? 에이쉬가 보기에 좋으라고? 내가 장식품이에요?”

오드리의 날선 반응에 에이쉬가 몹시 당황했다.

“왜 이래요? 결혼식에 왔으니 좀 웃으라는 게 뭐 나쁜 소리라고?”

“그럼 웃음이 나게 생겼어요? 네이기스의 결혼식에서 정작 네이기스의 친구가 나 하나뿐인데?”

에이쉬는 곧바로 오드리를 몸으로 가려 다른 사람들의 시선부터 차단했다. 덩치 차이가 확연한 만큼 그의 태도에 불쾌감을 넘어 위협을 느낄 만도 한데, 오드리는 그런 건 안중에도 없이 조목조목 따지기부터 했다.

“네이기스가 그림을 그리느라 평판이 떨어졌다고 해도 그 애를 아끼는 사람은 많아요. 그런데 네이기스의 결혼식에 참석한 친구가 한 명도 없다는 게 말이 돼요? 결혼식에 참석한 게 고작 나 하나라는 게?”

“오드리도 알다시피 바로 내일 모레가 왕세자 전하의 결혼식이잖아요. 다들 바빠서 못 온 거예요. 워낙 급하게 잡힌 날짜고…….”

“나는 뭐 한가해서 여기 있는 줄 알아요?”

“오드리, 이런 식으로 따지는 건 나중에 해도 되잖아요. 어쨌거나 다들 네이기스를 축하해 주려고 모인 사람들이고, 아주 안면이 없는 것도 아닌데요. 자, 화를 가라앉혀요. 사람들이 쳐다보잖아요. 분위기가 엉망이 되면 책임질 거예요?”

오드리는 결국 입을 다물었다. 따지고 싶은 게 잔뜩 있었지만, 기껏 결혼식의 증인으로 와서 식을 망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도 이건 물어봐야겠어요. 대체 내가 왜 신랑신부의 증인이죠?”

“그야 내가 네이기스의 증인이니까요. 오라비가 있는데 왜 사촌에게 증인을 맡겨요? 오드리는 보티안 씨하고도 한참 전부터 친하게 지냈으니 딱 좋은 증인이잖아요.”

“아, 황당해 죽겠네 정말…….”

결혼식에 필요한 세 명의 증인. 네이기스의 증인은 오드리가 아니라 에이쉬였고, 신랑신부가 모두 동의한 증인은 오드리였다.

“신랑의 증인은 누구예요?”

“글쎄요. 누가 올 건지 말을 안 해주더라고요. 그래도 곧 오긴 하겠죠. 오드리, 증인 기다리는 김에 내 얘기 좀 들어볼래요? 실은 전부터 내가 꼭 하고 싶었던 게 있는데요…….”

에이쉬가 조잘조잘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내용을 대충 들어보니 구상하는 게 있는데 투자자가 필요하다는 말 같았다. 오드리는 열심히 들어주는 척 한 귀로 흘리며 피올의 증인을 기다렸다. 과거를 통째로 지운 남자가 친인척이 필요한 증인에 누굴 세웠을지가 궁금했다.

“……듣고 있어요?”

“아, 네. 나중에 제대로 형식 갖춰서 서류 넣어주시면 그땐 긍정적으로 검토하도록 하죠. 투자는 함부로 결정하는 게 아니라서.”

사실 구체적인 내용은 아무것도 들은 게 없지만, 여기서 그런 말을 해 봤자 귀찮은 것만 늘어난다. 오드리는 다시 떠들기 시작한 에이쉬보다 막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한 식당 입구에 집중했다. 곧 그녀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생겼다.

“이런…….”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있는 것처럼 훤칠한 키와 당당한 어깨, 선이 굵직하고 시원시원한 이목구비, 호감을 불러일으키는 단정한 미소, 놀랍도록 세련된 옷차림.

한껏 단장하고 나타난 라비린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라비린은 시선을 능숙하게 받아넘기며 오드리에게 아는 체를 했다. 보기 좋은 사교용 미소였다. 에이쉬가 알겠다는 듯 손가락을 튕겼다.

“네이기스 녀석, 의외로 보는 눈이 있네. 역시 레이디 오드리의 곁에 있게 두길 잘했습니다. 사람이 알아서 모여드네요.”

“뭐라고 부른 거예요, 지금? 레이디 오드리?”

“벨트람이라고 부르면 싫어한다는 말은 익히 들었기에.”

오드리가 현세의 벨트람이라고 불리게 된 원인을 제공한 사람 중 한 명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울컥 올라오는 게 있었다. 허나 장소가 장소인지라, 오드리는 차마 화를 내지 못했다. 그저 에이쉬와 라비린이 그녀의 곁에서 적당히 인사를 나누는 걸 보며 마음을 가라앉히려 노력할 뿐이었다.

하나 그것도 잠깐이었다. 에이쉬가 다른 하객들을 챙기러 사라지고 라비린과 둘만 남자마자 오드리의 가시가 삐죽 솟아올랐다.

“보티안 씨의 증인이 너였어?”

“형이잖아. 동생이 결혼을 한다는데 어디 그냥 놔둘 수가 있어야지.”

오드리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라비린을 살폈다. 대체 어딜 갔었던 건지, 거의 한 달을 연락도 없이 준 실종상태로 있었던 남자에게선 그동안의 공백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보티안 씨는 과거를 싹 지워 버리고 싶어 하던데, 용케 네게 증인을 맡겼네. 결혼을 계기로 가문에 돌아갈 생각인가?”

“설마 그럴 리가. 본인이 원해도 힘들걸. 가문이라는 게 어린애들 물놀이하는 개울도 아니고 그리 쉽게 나갔다 들어갔다 할 수 있는 거던가?”

“그야 그렇지.”

그게 그리 쉬우면 오드리가 이렇게 고생을 하고 있을 리가 있나. 오드리의 평판이 바닥에 떨어져 여기저기에서 씹힐 때도 헨젤 백작은 그녀에게서 성을 빼앗지 못했다. 피올이 타우레드를 버릴 수 있었던 건 치안대의 특별한 제도를 이용한 덕이 컸다.

오드리의 미간에 주름이 깊어지는 걸 가만 보고 있던 라비린이 구석으로 그녀를 슬슬 몰아넣었다. 조명이 적고 그나마 있는 것도 키 큰 화분이 가리고 있었다. 단순히 다른 사람들의 시야에서 벗어나기 위함이라 생각하기엔 필요 이상으로 공간이 좁았다.

오드리는 춤을 출 것도 아닌데 지나치게 바짝 다가온 라비린을 밀어냈다. 드레스의 치맛자락이 그의 다리에 자꾸 닿는 게 부담스러웠다.

“왜 이래?”

“음, 내가 무례했다면 사과하지.”

몇 발짝 물러난 라비린이 오드리에게 악수라도 청하는 듯 손을 내밀었다. 오드리는 반사적으로 그의 손을 맞잡았고, 짧은 악수 끝에 그에게서 작은 종지쪽지를 받았다. 도대체 무슨 내용이기에 이렇게 숨겨서 주는가 하는 호기심과 여기서 열어보면 안 된다는 직감이 동시에 찾아왔다.

오드리는 쪽지를 펴보지도 않고 장갑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그게 몹시 만족스러운 듯 라비린이 씩 웃었다.

“결혼식이 끝나면 가서 확인해. 아, 머리카락은 좀 가리고 가고.”

“내 걱정은 말고 넌 저기 가서 하객들 수습이나 해. 치안대원들 충격 받은 거 안 보여? 신랑의 증인이 이렇게 구석에 박혀서 하객들 대접도 안 하고, 이게 뭐야. 에이쉬 혼자 애쓰네.”

“쯧, 그런 것까지 내가 굳이 해줘야 하나…….”

“이대로 뒀다간 결혼식 내내 뻣뻣하게 굳어 있을 모양새인데, 이러다 네이기스의 결혼식이 망하면 네 행동 하나하나를 라디아타에게 전부 일러바칠 줄 알아.”

“아이쿠야……. 그거 너무 무서운 협박이군그래. 말하는 화분에서 대접이 더 떨어지면 뭐가 되지?”

라비린은 겁먹은 것처럼 어깨를 움츠렸다. 하지만 그의 여유로운 태도는 겁먹은 것과는 거리가 아주 멀었고 도리어 오드리를 놀리는 것 같은 분위기마저 풍겼다.

놀리지 말라며 오드리가 짜증을 내기 직전, 라비린이 불쑥 오드리에게 손을 뻗었다. 오드리의 뺨에 뜨끈한 체온이 닿았다. 그의 소맷부리에서 풍기는 익숙한 향기가 코끝에서 수채화처럼 번졌다.

벽등을 가린 키 큰 화분이 라비린의 얼굴에 그늘을 만들었다. 계속 머금고 있던 미소가 싹 사라진 무표정한 얼굴은 어쩐지 거리에 세워진 흔한 조각상과 비슷해 보였다. 햇살이 닿은 것도 아닌데 그의 속눈썹이 금빛으로 빛났다.

건조한 입술이 스치듯 가볍게 오드리의 입술을 훔쳤다. 불을 머금은 듯 뜨거운 입술이었다.

“이 자리의 주인공이 우리였다면 좋았을 텐데.”

“구질구질한 미련이야. 근 한 달을 소식도 없이 쏘다녀 놓고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어?”

“그러게. 곰탱이도 아닌데 미련만 남아서는……. 시간을 헛보냈어.”

라비린이 장난스레 양팔을 들고 뒤로 물러섰다.

“뺨이라도 한 대 맞을 줄 알았는데. 역시 아끼는 사촌 동생의 결혼식이라 참은 건가?”

“별로? 딱히 화가 난다거나 그렇지는 않아.”

오드리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너는 체온이 뜨겁구나 생각했어.”

“…….”

“더 할 말 없지? 비켜.”

오드리가 한 번 돌아보지도 않고 그를 지나쳤다. 그녀는 보란 듯 하객들과 어울려 하하호호 웃다가, 증인의 특권을 발휘해 신부를 먼저 봐야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오드리가 사라지자 라비린에게도 사람이 몰려들었다.

라비린은 피올과의 관계를 묻는 사람들에게 사전에 꾸민 변명을 적당히 둘러대고 평소 치안대에서 피올의 태도는 어땠는지 등을 물으며 의례적인 대화를 이어나갔다.

이상하게 머리가 멍했다. 사람들과의 대화도, 멋지게 차려입은 신랑과 예쁘게 꾸민 신부의 행진도, 머리가 약간 벗겨진 하티의 사제가 신랑신부에게 읊어주는 축사도, 전문 가수가 부르는 멋들어진 축가도, 신랑신부가 결혼계약서에 각각 서명하고 반지를 교환하는 등의 결혼식 절차 어떤 부분에서도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무심결에 입에 넣고 씹은 레몬케이크가 질펀한 진흙덩이 같았다.

“라비린, 뭐 해?”

“……어, 어?”

뿌연 안개 속에 갇혀 있는 것만 같던 오감이 화악 살아났다.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노랫소리, 악단의 흥겨운 연주가 귀에 꽂히고 그에 맞춰 춤추는 사람들의 옷자락이 눈에 보였다. 바닥이 쿵쿵 울리는 게 느껴졌다. 갑작스럽게 밀려든 현실감이 낯설어 어쩐지 멀미가 났다.

라비린은 잔뜩 눈썹을 치켜세우고 제 어깨를 퍽퍽 때리는 오드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림 속의 인물들처럼 납작한 사람들 사이에서 오드리 혼자서만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멍청하게 앉아서 뭐 하는 거야? 결혼계약서가 하티의 신전에 잘 가도록 지키고 확인해 주겠다고 약속했다며? 보티안 씨가 그것 때문에 굳이 널 증인으로 지명했다던데?”

라비린은 이 결혼식이 메너트의 귀에 들어갔을 경우를 대비한 피올의 보험이었다. 세간의 체면 때문에 셜리 극장도 뒤엎지 못한 메너트가 건드리기엔 타우레드의 후계자는 지나치게 위험한 상대였다. 설령 만약의 일이 일어나더라도 라비린은 제 한 몸 정도는 지킬 인물이기도 했고 말이다.

“맡은 일에 이렇게까지 성의가 없을 일이야? 빨리 움직여!”

라비린은 반사적으로 일어나 하티의 사제를 찾았다. 하객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던 늙수레한 사제는 라비린이 굳이 결혼계약서를 신전에 가져다주겠다고 하니 몹시 놀란 눈치로 난색을 표했다.

“신랑의 증인이 결혼계약서를 나르는 건 이젠 사장된 풍습이에요. 안 됩니다.”

“옛 마법도 세상에 다시 나온 마당에 사장된 풍습이라고 못 지킬 건 뭐 있겠습니까?”

“아, 안 된다니까요. 증인이긴 해도 친척은 아니고 그렇다고 동료도 아닌데 어떻게 맡겨요? 어림도 없죠!”

라비린은 하티의 사제와 옥신각신 말다툼을 하며 이를 갈았다. 망할 놈이 일을 시킬 거면 설득은 못 해도 운 정도는 띄워뒀어야 하는데, 피올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듯했다.

하티의 사제는 곧 죽어도 자신이 직접 갖고 가야 한다며 라비린을 거부했다. 게다가 그 과정에서 라비린을 못 미더운 사람으로 낙인찍었는지, 정 그리 할 거면 함께 가자 했더니 아주 질색을 한다. 타우레드의 이름도 영 효과가 없었다.

결국 라비린은 사제에게 이 도둑 결혼에 얽힌 사정을 줄줄 읊고서야 결혼계약서가 담긴 둥근 통을 받을 수 있었다. 기껏 통을 받았을 때는 그냥 가는 길에 호위만 해주면 되는 걸 내가 왜 굳이 나섰는가 하는 의문이 찾아왔지만, 결혼계약서를 갖다 준다는 핑계로 식장을 빠져나오고 나니 그저 잘했다 싶었다. 결혼식 특유의 들뜬 분위기에서 벗어난 것만으로도 숨쉬기가 편해진 기분이었다.

이대로 하티의 신전에 직행해서 결혼계약서를 갖다 주고 곧바로 저택으로 돌아가자. 그리고 쥐죽은 듯 처박혀 있다가 라디아타의 결혼식에 참석한 뒤엔 다시 브란젤을 떠나야지. 대관식에는 꼭 참석하지 않아도 되니 이번엔 멀리까지 가보자…….

그렇게 마음먹고 하티의 신전으로 가던 중, 라비린은 놀랍도록 눈길을 끄는 사람을 발견했다. 긴 갈색 머리칼을 양 갈래로 쫑쫑 땋아 늘어뜨리고 지푸라기를 엮어 만든 챙 넓은 모자를 쓴 아가씨였다. 외출복은 조금 낡은 것이었지만 걷는 자세며 풍기는 분위기가 발랄하고 화사했다. 뒷모습뿐이지마는 분명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사람인데 이상하게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라비린은 아예 마차 밖으로 몸을 빼고 그 아가씨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마차가 그녀를 지나치는 순간, 넓은 챙 아래로 살짝 미소 지은 입술과 야무진 턱이 눈에 들어왔다.

“……오드리? 오드리!”

아가씨는 고개를 드는 대신 모자를 더 꽉 움켜쥐었다. 그는 아예 뒤돌아서서 목을 길게 뺐다. 하지만 마차는 속도를 줄이는 법 없이 계속 나아갔고, 오드리인지 아닌지 모를 아가씨는 인파 속에 파묻혀 이내 보이지 않게 되었다.

“내가 미쳤나…….”

오드리는 아직 결혼식장에 있을 텐데, 그걸 알면서도 보는 순간 오드리를 떠올렸다. 브란젤에 피부가 까무잡잡한 사람이 오드리만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지푸라기를 엮어 만든 모자를 쓰고 있었던 걸 보면 브란젤 근처에 있는 농가의 처녀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오드리는 아닐 것이다. 분위기도 걸음걸이도 그녀와는 아주 다르니까. 라비린은 그렇게 생각했다.

백합과 사자의 문장을 단 마차가 북적이는 거리 저편으로 사라졌다. 지붕 없는 마차에서 연신 고개를 갸웃대던 라비린도 보이지 않게 됐다.

오드리는 머리에 영 맞지 않아 금방 벗겨질 것처럼 아슬아슬한 모자를 붙들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간 형제가 똑같이 눈도 좋아…….”

결혼계약서 운반을 핑계로 라비린을 내보낸 것까진 좋았다. 자신이 식장을 비우면 제일 먼저 알아챌 사람을 치운 거니까. 그가 사제에게 정신을 다 판 걸 확인하고 다이앤의 도움을 받아 잽싸게 옷을 갈아입고 가발도 쓰고 화장마저 고쳐서 나왔는데 그걸 알아볼 줄이야.

변장에는 나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치안대원인 피올이라면 모를까 라비린에게까지 들키고 나니 자신감이 떨어졌다. 하긴 이렇게 본격적으로 변장하고 거리로 나와 본 건 거의 일 년 만의 일이니, 그동안 어딘가 어색한 점이 생겼을지도 모른다.

오드리는 그리 생각하면서도 불만스럽게 입술을 삐죽였다. 아무리 그렇다 한들 여기까지 오는 내내 자신을 알아본 사람이 아무도 없었는데, 어떻게 스치듯 본 것만으로 알아봤는지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우편국에서도 날 알아볼까? 그럼 안 되는데.’

요새 브란젤 곳곳에 붙은 포스터가 좀 많았어야지. 오드리는 걱정 한 보따리를 등에 지고 우편국을 찾아갔다.

하지만 그런 걱정은 전부 기우였다. 우편국의 직원은 오드리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고, 오드리는 손쉽게 사서함의 내용물을 손에 넣었다.

라비린이 아닌 메이즈의 이름으로 만들어져 있던 사서함에는 반 뼘은 될 듯한 두툼한 서류뭉치와 먼지 한 톨 안 들어가게 밀봉된 작은 봉투 여러 개가 보관돼 있었다. 한 손에 들어보니 꽤 묵직했다.

“이게 대체 뭐라서 메이즈란 이름까지 써가며 내게 몰래 전하려고 했을까?”

“아가씨를 알아봤다고요?”

다이앤은 사서함의 내용물보다 라비린이 오드리를 알아봤다는 사실 쪽에 더 관심을 가졌다. 오드리의 초록색 머리칼과 가무잡잡한 피부의 조합은 꽤 강렬한 것이라, 둘 중 하나만 지워도 인상이 퍽 흐려졌다. 본래 얼굴을 연상할 수 없도록 공들인 화장까지 더해지면 못 알아보는 게 당연했다.

실제로 식장에 있던 하객 중 오드리의 변장한 모습을 알아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드리가 변장한 모습 그대로 하객들 사이에 끼어 술도 마시고 춤도 추었는데도 말이다. 다들 발 넓고 사람 좋아하는 예술가들 중 누군가가 부른 사람이겠거니, 하고 생각하는 듯했다.

네이기스의 신부화장에 이어 오드리의 변장을 도와주며 나름 자부심을 가졌던 다이앤으로서는 충격적인 얘기였다. 아무리 자주 보았다지만 마차를 타고 스치듯 지나가면서 알아봤다니, 자존심이 상했다.

“그걸 어찌 알아봤대…….”

“다이앤, 넌 그쪽이 더 신경 쓰이니?”

“어쩌겠어요, 저는 이디케가 아닌걸요. 그 내용물이 뭐든 전 짐작도 못할 거고 그걸로 아가씨께 도움이 되지도 못할 거예요. 그럴 바엔 제가 할 수 있는 일 쪽에 집중해야죠.”

매양 어떤 일이든 이디케에게 밀리는 걸 견딜 수 없어하던 다이앤이 하는 말이라기엔 믿을 수 없이 온건하고 침착한 발언이었다. 오드리는 자신이 없던 몇 달 사이에 다이앤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 했지만, 정작 당사자는 아무 일도 없었다며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그보다 아가씨, 어깨가 굳었어요. 마사지 해드릴까요?”

“뭐, 네가 정 말하기 싫어한다면야……. 마사지는 됐어. 지금은 이쪽이 더 급해.”

오드리는 밀봉 봉투부터 열었다. 엄지손톱만 한 크기의 알약 몇 개가 들어 있었다. 색은 희고 향은 없었으며, 살짝 핥아 보았지만 아무 맛도 안 났다. 다이앤이 기겁을 하고 약을 빼앗아갔다.

“아니, 그게 뭔 줄 알고 대뜸 핥아보시는 거예요!”

“설마 죽는 거겠니? 그럼 써 놨겠지.”

“태평하시기는!”

다이앤이 화를 내거나 말거나 오드리의 관심사는 서류 쪽으로 옮겨갔다. 도대체 무슨 내용이기에 두께가 반 뼘이나 되는 걸까. 후르륵 넘겨보던 오드리의 낯에서 점점 핏기가 사라졌다.

“……미친, 뤼나소라니…….”

“네? 뭐라고 하셨어요? 리……뤼?”

“아니, 아무 것도 아니야.”

태연히 말한다고 했지만, 목소리가 떨렸다. 오드리는 이미 읽고 내려놓았던 서류를 뒤집었다. 손이 떨리는 통에 몇 번이나 헛손질을 하느라 종이가 형편없이 구겨졌다.

뤼나소.

매년 여름마다 짙고 아름다운 푸른 꽃을 피워내는 꽃의 이름이지만, 동시에 위험하고 매력적인 약의 이름이기도 했다.

반 알을 먹으면 잠을 쫓고, 한 알을 먹으면 몸에 활력을 주며, 두 알을 먹으면 다 죽어가던 노인도 한창 때의 장정처럼 일하게 해준다는 약. 그러나 한번 손을 대면 좀처럼 끊지 못하고 계속 사용하게 되고, 동일한 효과를 위해 필요로 하는 분량이 점점 늘어나게 된다.

남용하지 않고 적절히 사용하면 훌륭한 업무 보조제가 된다지만, 중독성 있는 것들이 흔히 그렇듯 끝내 사용자가 약의 노예가 되어 파멸하는 사례가 훨씬 많았다. 한때는 노동자를 위한 최고의 약이라고 치켜세워진 적도 있었지만, 극심한 부작용 때문에 지금은 마약으로 분류됐다. 당연히 금지된 약이었고, 특별 허가 없이 사용하다 걸리면 무거운 처벌을 받았다.

서류는 그 뤼나소의 거래 내역이었다. 관청의 엄격한 관리를 피해 음지에서 거래되는 어떤 뤼나소의 행적이 꽤 정확하게 포착되어 있었다. 듬성듬성 커다란 구멍이 있긴 하지만 전체적인 흐름을 알아보기엔 어렵지 않은 수준이었다.

백 가지 보석을 찾으려면 셰비언 성벽으로 가고, 천 가지 약초를 찾으려면 나랍으로 가라 했던가. 뤼나소의 여행은 나랍과 멜브란트를 오가는 밀수선에서 시작했다. 기차, 마차, 우편물품 바꿔치기 등등 온갖 수단으로 멜브란트 곳곳을 거치며 북상한 여행의 끝에는 헨젤 백작이 있었다.

이 서류 속의 거래 내역이 전부 사실이라고 가정했을 때, 헨젤 백작의 뤼나소 구입은 꽤 오래 전부터인 걸로 보였다. 아무리 보수적으로 기준을 잡아도 살론의 사략선이 큰 문제가 되어 헨젤 백작이 직접 항구에 나가야만 했던 몇 년 전부터라고 봐야 했다. 초기의 거래량은 대단히 미미한 수준이었지만, 1차 괴물 사태 즈음부터 양이 늘기 시작해 최근에는 급격히 늘어났다.

그가 뤼나소를 어떤 목적으로 구입해서 어떻게 쓰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본인이 복용하기 위해 구입하는 건지, 아니면 다른 쪽으로 또 유통을 하고 있는 건지……. 어쨌거나 금지된 약을 음지에서 꾸준히 구입하는 목적이 좋을 쪽일 리가 없는 건 확실했다.

눈앞이 아득해졌다. 오드리는 서류를 내려놓고 관자놀이를 꽉 눌렀다. 다시금 찾아온 두통이 지독했다.

‘아닐 거야. 아버지가 바보 멍청이도 아니고……. 유서 위조도 큰일이지만 이건…… 정말……. 그래, 중간에 빠진 부분들이 있잖아. 아닐 거야. 이건 추측으로 때운 부분이 너무 많은 자료야. 이런 걸 가지고 법원에 가면 틀림없이 져.’

너무 큰일이 눈앞에 닥치면 일단 회피하고 싶어진다. 오드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영리한 머리는 구멍을 메울 자료를 금세 떠올리고 말았다.

아뉴람브 성에서 찾았던, 책 속에 숨겨져 있던 이상한 지도.

특수한 풀까지 발라 정성을 다해 숨겨두었기에 뭔가 중요한 건가 싶어 챙겼었다. 하지만 빼곡한 숫자와 몇 가지 선으로 채워진 큰 종이는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한데 지금 뤼나소의 거래 내역을 읽고 나니 그게 뭔지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그건 뤼나소의 음지 유통 경로가 그려진 지도였다.

“다이앤, 아까 그거 좀 줘봐.”

“안 돼요.”

“잠깐만 보려고 그래. 먹으려는 거 아니니까 줘.”

“절대 안 돼요.”

“다이앤!”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든 오드리는 서늘하고 딱딱하게 굳은 표정의 다이앤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오드리가 서류를 읽는 동안 다이앤은 이 하얗고 큰 알약의 정체를 파악한 것이다.

“인가 없이 제작된 뤼나소를 아가씨에게 전하다니, 벨키스 경이 정신이 나갔군요. 이건 제가 바로 폐기할게요.”

다이앤은 수십 가지 약과 독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약사였다. 의사는 아니지만 처음에는 조금만 쓰면 된다고 쓰기 시작한 뤼나소가 어떻게 사람을 망가뜨리는지에 대해서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허가받지 않은 뤼나소를 갖고 있다가 들키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에 대해서도.

“다이앤, 그건 증거야. 멋대로 건드리지 마. 폐기는 절대 안 돼!”

“아가씨야말로 이걸 만질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마세요. 정 폐기해선 안 되는 물건이라면 제가 관리할 테니, 정말로 증거로서 필요한 때가 오면 그때 말씀하세요. 바로 내드릴게요.”

다이앤은 그 자리에서 뤼나소는 물론이고 다른 밀봉 봉투까지도 전부 챙겼다. 이 안에 어떤 약이 들어있는지는 자신이 확인하고 보고서로 올려주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본래 이런 건 전문가가 관리하는 거예요. 이제 제 약제실은 당분간 아가씨는 물론이고 도련님까지도 출입 금지예요. 아르젠 남작님께 말씀드려서 출입금지마법을 수정할 테니까 그렇게 알고 계세요.”

그렇게 오드리는 속절없이 뤼나소를 빼앗겼다.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으면서도 동시에 소름이 돋았다. 아무리 전문가라지만 다이앤이 조금 살핀 것만으로도 정체를 알아챌 정도로 순도 높은 뤼나소를 헨젤 백작이 꾸준히 구입하고 있다는 뜻이 아닌가.

“라비린 녀석……. 대체 어딜 다녀온 건지 모르겠네.”

라비린이 이 자료를 그렇게나 비밀스럽게 건네주고 싶어 했던 이유를 알 만했다. 도대체 어디에서 무슨 경위를 통해 자료를 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정도면 헨젤 백작에게 결정타를 먹이지는 못해도 상당한 압박을 줄 수는 있었다. 오드리가 가진 지도를 합하면 아예 목에 비수를 꽂아버릴 수도 있었고.

하지만 오드리는 도저히 이 자료를 써먹을 수가 없었다. 뤼나소로 헨젤 백작의 목을 딸 수는 있겠지만, 그랬다간 헨젤 백작가 전체가 큰 상처를 입을 게 너무 뻔했다.

헨젤 백작이 재무국의 수장 자리를 내려놓는 정도에서 끝날 게 아니었다. 치안대원이 들이닥쳐 저택 전체를 수색하는 걸 상상하자 저절로 몸이 떨렸다. 헨젤을 아끼는 건 아니나 여기엔 하델이 있었다. 그리고 오드리가 독립을 하더라도 출신 가문의 힘은 중요했다. 만신창이가 된 헨젤보다는 껍데기라도 멀쩡한 헨젤이 독립한 오드리에게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참자. 진짜 날카로운 칼은 단지 가지고 있는 것이지, 꺼내는 게 아니라고 했어.’

뤼나소 따위가 없더라도 오드리의 계획은 충분히 순항 중이었다. 전보 개설은 착착 진행되고 있었고 보석 경매장에선 꾸준히 수익이 들어왔다. 오스미다는 오드리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가스트로는 오드리에게 새로운 성과 작위를 약속했다. 그가 대관식을 치르는 날까지는 고작 한 달여 정도가 남아있을 뿐이었다.

오드리는 서류를 정갈히 정리해서 보안마법을 건 함에 지도와 함께 보관했다. 열 수 있는 사람은 오드리 단 한 명이었다. 이걸 열어야 할 날이 오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하루, 이틀. 고작 두 번의 밤을 보냈을 뿐인데 가스트로와 라디아타의 결혼식 날이 밝았다. 새벽부터 부슬부슬 비를 뿌리는 구름 때문에 브란젤 전체가 어둑어둑했다.

오드리는 헨젤 백작영애로서 결혼식에 참석할 의무가 있었다. 헨젤 백작은 전날에도 집무실에서 돌아오질 않았기에, 부녀는 왕세자의 결혼식 당일이 되어서야 근 한 달 만에 얼굴을 마주했다.

오드리는 무례해 보이지 않는 선에서 재빨리 헨젤 백작을 훑었다. 채 지우지 못한 피로가 역력한 모습이었지만, 딱히 뤼나소 복용의 흔적이 보인다거나 몸이 아주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눈 밑이 검고 몸이 좀 말랐지만 격무에 시달리면 그럴 수도 있는 법이었다.

“겨우 한 달 사이에 얼굴이 많이 상하셨군요.”

“멀쩡하면 그게 이상한 일이지. 요새 오드리 너는 돈 벌랴, 돈 쓰랴 아주 바쁜 모양이더구나. 네가 관련된 서류가 하루에도 몇 십 장씩 올라온다.”

“감히 아버님 앞에서 바쁘다 투정할 정도는 아니랍니다.”

“그래? 그럼 슬슬 결혼 준비를 시작해도 되겠구나. 싫다는 말은 하지 마라. 네 돈벌이에 아르젠 남작을 그만큼 이용했으면 양심이 있어야지.”

“아버님, 저는…….”

“헨젤 백작, 이용은 내가 하고 있는데 왜 오드리에게 양심 운운을 하는지 모르겠군.”

인간의 예의는 자신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던 말을 온몸으로 실천하는 듯, 누구와도 말을 나누지 않고 내내 오드리 곁에만 서 있던 셰비언이 불쑥 끼어들었다. 그것도 의례적인 인사말도 존대어도 다 떼어버린, 일방적인 하대로 말이다.

하지만 헨젤 백작은 감히 셰비언의 무례를 나무라지 못했다. 작위나 정계에서의 입지 따위를 견주면 헨젤 백작 쪽이 훨씬 우위에 있겠지만 셰비언은 용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당장 왕궁을 무너뜨릴 수도 있는 상대에게 어떻게 예의를 따지겠는가?

“결혼은 내가 하고 싶을 때, 그에 맞는 형식을 갖춰서 할 거야. 상대는 당연히 오드리가 되겠지만 오드리를 갖고 날 휘둘러보겠다는 꿈은 버리는 게 좋아.”

“아르젠 남작이 과한 경계를 하시는군. 나는 그저…….”

“백작, 2차 괴물 사태 전까지 내가 꽤 그럴싸하게 인간 흉내를 내고 있었다는 걸 생각해 보도록. 흉내를 내려면 관찰이 기본이고 관찰을 하려면 눈과 귀가 밝아야 해.”

덜렁 말이 잘린 헨젤 백작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셰비언은 그러거나 말거나 오드리를 제 품으로 살짝 끌어당기고 속삭였다.

“여긴 제게 맡기고 아가씨는 저쪽으로 가봐요. 아가씨를 찾으러 온 사람이 있네요.”

“누구?”

“저쪽의 저 시종이요. 아까부터 아가씨에게서 눈을 못 떼던걸요. 뭔가 전할 말이 있나 보죠.”

오드리는 셰비언이 턱짓한 시종의 얼굴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는 가스트로의 비서 노릇을 하는 전속 시종이었다.

결혼식 직전에 불러내기에 대체 무슨 급한 일이 있는 건가 걱정했는데, 시종은 오드리를 라디아타에게 데려다놓았다. 시녀도 없이 혼자 앉아 있던 라디아타는 오드리의 난데없는 등장에 몹시 놀란 눈치였다.

“오드리, 네 얼굴을 보는 건 굉장히 반갑고 좋긴 한데……. 네가 왜 여기 있어?”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왕자 전하의 시종이 날 여기다 데려다놓기만 했지, 이유는 도무지 알려주질 않았거든. 그런데 네 얼굴을 보니까 알 것 같기도 해……. 안색이 왜 이리 나빠? 어디 아파?”

라디아타의 안색은 오드리의 걱정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창백했다. 시녀들이 최선을 다해 화장을 해줬을 텐데도 그녀가 느끼는 긴장과 불안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예쁘게 웃는데도 그랬다.

“결혼식을 앞둔 신부가 대체 무슨 일이야?”

“나는 괜찮아. 전하께서 괴상한 배려를 해주시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네가 아니면 안 될 것처럼 굴던 분이 왜 갑자기 이래? 너도 마찬가지야. 왜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건데?”

오드리는 갑갑해 미칠 것 같았다. 대놓고 라디아타를 소홀히 하는 가스트로도, 가스트로의 구애를 콧대 높게 거절하고도 당당하던 라디아타가 그의 변화를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도 이해가 안 됐다.

라디아타는 오드리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했다. 하지만 이해한다고 해서 다 말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자신이 독대 중에 가슴을 움켜쥐고 쓰러진 펠른3세를 응급처치도 소용없는 수준에 이르도록 방치했으며, 그게 실수도 사고도 아니라는 걸 가스트로가 알아차렸다고 어떻게 말하겠는가? 오드리가 아무리 투정을 부리고 집요하게 질문을 한다고 해도 비밀은 비밀이었다.

“그 얘기는 그만. 네가 아무리 물어도 절대 대답 못 하는 거니까 그런 줄 알아. 너도 도저히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사연 하나쯤은 있을 거 아냐?”

“아니? 나는 어린 시절 저지르고 다녔던 사건사고들만 아니면 당당한데.”

“그럼 앞으로 말할 수 없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걸 생각해서 넘어가 줘. 앞날은 알 수 없는 거잖아?”

“좋아, 비밀 하나 적립했다. 나중에 내가 너한테 뭔가를 숨겨도 그걸로 서운해하거나 하면 안 돼. 약속?”

“약속.”

약속을 받아내 놓고도 오드리의 미간은 펴질 줄을 몰랐다. 라디아타의 미소 지은 얼굴이 잘 만든 가면 같아서였다. 흠도 없고 틈도 없는, 사교모임에서나 보던 얼굴을 단둘이 얘기하면서 보게 될 줄이야.

“그웬 영애 얘기나 좀 해줘. 어때, 결혼식은 괜찮게 잘 치러졌어?”

“네이기스야 잘했지…….”

오드리는 한숨을 삼키고 네이기스의 결혼식 풍경을 읊었다.

뻣뻣하게 긴장하고 참석했던 치안대원들은 예술가들의 흥에 휘말려 몇 시간이나 춤을 추며 노래했고, 자유로운 영혼이라는 예술가들이 친구의 친구를 불러가며 하객을 불리는 통에 준비한 샴페인이 모자라는 사태가 발생했고, 신랑신부가 어찌나 행복해 보이는지 결혼식 내내 부러움의 한숨 소리가 끊이질 않았노라고.

라디아타의 얼굴에 기쁜 기색이 어렸다. 네이기스의 결혼 소식을 알자마자 거액의 돈을 투자해 식장을 바꾸고 사람을 구하고 음식을 장만하는 등의 일을 한 사람이 바로 라디아타였다. 그녀는 네이기스의 전 후원자로서 결혼식에 참석하고 싶어 했지만, 정작 자신의 결혼식이 바로 이틀 뒤인지라 엄두도 내지 못했다.

“지원한 보람이 있네.”

“기대해, 네이기스가 네 초상화 그릴 준비하고 있더라. 안 불러줘도 알아서 그릴 거니까 그런 줄 알래.”

“오? 그래? 나도 네 포스터 같은 그림 받을 수 있는 거야? 이왕이면 볼린이 좋다고 전해줘. 예술과 사랑의 신이니 내게 딱 맞아.”

“더불어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여신이기도 하고?”

“그렇지. 솔직히 내가 좀 예쁘잖아?”

라디아타가 큰 눈을 깜빡거리며 한껏 예쁜 표정을 지었고, 오드리는 소리 내어 깔깔 웃었다. 확실히 라디아타의 미모는 외국의 귀빈들을 접대할 때 상당한 효과를 봤다. 말 속에 칼이 있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그녀의 미소 한 번에 그냥 입을 다무는 치들이 한 보따리였다.

“제발 네 초상화가 크게 유행해서 벨트람인지 뭔지 하는 거 싹 지워졌으면 좋겠다.”

“그건 힘들걸? 본래 화가의 이름값이 높아지면 초기작에 관심이 쏠리는 법이거든. 게다가 벨트람 포스터는 하도 버전이 많아서……. 아예 시리즈물로 취합해서 정리할 가능성도 있어. 벌써부터 앞날을 내다본 수집가들이 눈이 벌게져서 포스터를 수집한다는 거 알아?”

“으……. 그런 건 알려주지 않아도 돼. 모르고 싶어.”

오드리가 고개를 저으며 격렬한 거부 의사를 표시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무려 여신의 이미지를 빌어 포스터에 그려진 얼굴이 역사에 남게 생겼으니 그 심정 모르는 바는 아니나, 라디아타가 보기엔 그거 참 귀여운 투정이었다.

“모르고 싶다고 몰라지나 그런 게? 언젠가는 꼭 맞닥뜨리게 될걸. 그때 가서 충격 받느니 지금부터 마음의 준비를 해. 그나저나 네 결혼식은 언제야? 아마 참석은 힘들겠지만 선물은 잔뜩 보내줄게.”

왕국의 관습상, 국왕부처가 참석할 수 있는 결혼식은 왕족의 결혼식뿐이었다. 고집을 부려 참석할 수는 있겠지만, 그랬다간 신랑신부에게 쏠려야 할 주목이 죄다 국왕부처에게 쏠리게 되므로 결혼 당사자로부터 정중한 거절이 돌아오는 게 보통이었고 말이다.

가장 친한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아졌으니, 라디아타는 대신 산더미 같은 선물을 할 예정이었다. 한데 그 선물을 받을 당사자는 몹시 곤란한 표정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음, 글쎄……. 모르겠는데.”

“왜? 사교 모임에 아르젠 남작과 항상 함께 나왔잖아. 매번 분위기도 좋았고……. 설마 아르젠 남작이 연애만 좋고 결혼은 싫대?”

“그게 아니야. 셰비언은 결혼하고 싶어 해. 하지만…….”

오드리는 라디아타에게 처음으로 자신의 꿈을 밝혔다. 결혼으로 가문을 나가는 게 아니라, 자신만의 성을 갖고 작위를 받아 국왕의 정전에 서는 꿈. 발언권을 가진 귀족으로서 정책 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은 야망. 단지 꿈을 말하는 것만으로도 오드리의 뺨은 붉게 달아올랐다.

“뜬구름 잡는 소리라고 하겠지만, 이게 내 꿈꾸는 미래야. 곧 이뤄질 미래기도 하고. 그러니 이런 포상 같은 결혼은 받아들일 수 없어. 적어도 내가 작위를 받은 뒤에……. 아니면 내가 후계자가 필요해질 때가 되면 그때 결혼할 생각이야. 아이를 입양할 땐 부모가 다 있는 쪽이 훨씬 나으니까.”

“입양……?”

“셰비언은 인간이 아니잖아. 내가 임신할 일은 아마 없지 않을까?”

오드리가 태평하게 웃고 있는 것과 비례해서 라디아타의 표정은 급격하게 나빠졌다. 그녀가 창백한 안색으로 주먹을 쥐었다.

“멍청한 짓이야. 작위? 정책 결정에 영향력 행사? 꿈이 곧 이뤄질 거라고? 그 곧이 언제가 될 줄 알고? 오드리, 오스미다 전하를 봐. 그분은 일테니아 후작이시고 국정회의 참석 자격도 있으시지만 단지 그것뿐이야! 그걸 뻔히 알면서도 무슨 약속을 받았기에 그리 믿는 거야? 누가 약속했든 간에 믿지 마, 좋은 시절 다 보내고 나이만 먹게 될 거야.”

“음, 라디아타, 그게…….”

“오드리, 넌 예전부터 가문을 나가고 싶어 했잖아? 답은 벌써 나와 있어. 아르젠 남작과 바로 결혼해. 그건 네 용감한 행동에 대한 포상으로 받은 거고, 아무도 널 방해할 수 없어! 아르젠 남작이 백작으로 승작하고 나면 네가 하고 싶은 일은 어지간해선 다 할 수 있게 될 거고…….”

“정말 포상이라고 생각해?”

“그야 당연히…….”

“정말 포상이야? 감당하기 힘든 용에게 여자 하나 얹어주고 그걸로 목줄을 채우려는 뻔한 속셈이 아니라?”

라디아타는 입을 딱 다물었다. 만약 오드리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단둘이 만나는 자리만 아니었다면, 웃는 얼굴로 매끄럽게 거짓을 얘기했을 텐데 어째 그게 안 됐다. 목구멍에 뭔가 커다란 게 걸려 있는 것처럼 말이 안 나왔다.

오드리가 눈이 가느다랗게 접히도록 활짝 웃었다.

“이래서 네가 내 친구고, 내가 네 친구인 거지.”

“…….”

“내가 이 터무니없는 꿈을 털어놓은 건 내 하녀들과 셰비언 말곤 네가 처음이야. 네이기스에게 말했어봐, 눈물을 글썽이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냐고 날 타박했을걸?”

“……그럴 수도 있었겠네.”

“그럴 수도 있었던 게 아니라, 정말 그랬을 거라니까. 흑, 오드리 언니, 언니를 생각한 사람들의 진심을 그렇게 나쁘게 생각하다니 너무해요!”

오드리의 네이기스 흉내가 막 우울해지려던 라디아타의 기분을 확 끌어올렸다. 제법 그럴듯한 흉내인데 오드리가 짓는 선량하고 적의 없는 표정이 너무 웃겼다. 오드리라고 그런 표정을 못 지을 것도 없는데, 이상하게 낯설고 어울리지가 않았다.

오드리는 키득대고 웃는 라디아타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아까보다 확연히 얼굴이 밝아진 걸 보니 조금 마음이 놓였다.

“행복하게 살아. 행복하지 못할 거면 잘살기라도 하든가.”

“그건 내가 할 말이야. 편한 길 두고 굳이 가시밭길을 걷겠다는 네 심리가 이해가 안 되지만, 그래도 응원할 테니까.”

“가시밭길이라……. 뭐, 나도 가끔은 내가 이해가 안 가긴 해. 응원 고마워, 라디아타.”

증인도 친척도 아닌데 신부를 단독으로 볼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오드리는 곧 결혼식이 이뤄질 식장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돌아와서는 당연히 헨젤 백작의 옆에 서게 될 줄 알았건만, 식을 앞두고 오드리에게 배정된 자리는 셰비언의 옆이었다. 오드리는 헨젤 백작과 멀리 떨어지게 된 것에 대한 기쁨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써야만 했다.

“내 자리가 왜 여기지? 결혼도 안 한 딸이 이런 자리에서 멀리 있는 걸 용납할 분이 아닌데? 셰비언, 그대가 자리를 바꾼 건가?”

“오만한 귀족 흉내를 좀 내봤어요. 의외로 쉽게 자리를 마련해 주던데요?”

“세상에……. 그런 건 또 어떻게 알고 흉내를 냈어?”

“많이 봤거든요.”

셰비언이 1차 괴물 사태에서 세운 공을 인정받아 아르젠 남작이라는 작위를 막 받았을 때 그를 시기하고 견제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그가 인간사회에 호기심을 가진 용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에 신경 쓰고 상처받는 보통 사람이었다면 정말 큰일이 났을지도 모를 정도였다.

셰비언은 칭찬을 바라는 듯 웃었지만, 오드리는 도저히 마주 웃을 수가 없었다. 셰비언이 많이 봤다던 그 귀족들이 어떻게 행동했을지 눈에 훤했다. 억지로 끌어올린 입술 끝이 파르르 떨렸다.

“그 많이 봤다던 사람들, 이름이나 얼굴 기억하지? 조만간 싹 적어서 보고서로 올려.”

“귀찮은데……. 굳이 해야 돼요? 어차피 이젠 그때 같은 짓은 꿈에도 못 꿀 텐데.”

“받았으면 갚아주는 게 도리잖아. 그대는 가만히 있어, 복수는 내가 할 테니.”

오드리의 눈웃음이 아주 살벌했다. 누구 하나 잘못 걸리면 아주 뼈도 못 추릴 태세였다. 셰비언은 이젠 제 앞에서 숨도 제대로 못 쉬는 치들을 상대로 굳이 복수까지 해야 하나 싶었지만, 오드리가 하고 싶다는데 굳이 말려야 할 이유도 찾지 못했다.

“아가씨 마음대로 하세요.”

오드리는 셰비언의 확답을 듣고서야 조금 마음이 편해졌고, 그때부터 결혼식을 즐겼다. 그녀가 아무리 백작영애라도 일생에 한 번 볼까 말까한 구경이었다.

왕위계승을 코앞에 둔 왕세자의 결혼식이라서 그런지 장식은 호화로웠고 형식은 전통을 충실히 따랐다. 왕립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홀을 휘감고 날아올라 드높은 천장을 두드렸고 그 사이로 합창단의 노래가 물결치며 퍼졌다. 이어진 신랑신부의 행진이나 사제의 축사도 마찬가지로 우아하고 차분하기 그지없는 분위기였다. 전체적으로 품격 있는 행사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 티가 났다.

하지만 그것도 왕궁 내 홀에서의 얘기였다. 식을 마친 왕세자 부부가 지붕 없는 마차를 타고 호위 인력과 함께 브란젤 시내를 돌기 시작하자 비명에 가까운 환호성이 터졌다. 괴물의 그림자가 아직 선명하게 머릿속에 남아 있는 브란젤 사람들에겐 젊은 미남미녀인 왕세자 부부의 모습이 이제 좋은 일만 있을 거라는 희망 그 자체로 보이는 듯했다. 그들은 새벽부터 추적추적 내리는 비조차 좋은 일에 대한 징조로 받아들였다.

높은 담장을 넘고 정원을 건너 홀까지 들려오는 환호성이 셰비언의 귀를 들쑤셨다. 그는 토끼처럼 귀를 쫑긋거렸다.

“피올의 결혼식은 어땠어요? 아까처럼 차분했어요? 아니면 지금처럼 소란스러웠어요?”

“지금 같진 않았지만 아까보단 훨씬 더 시끄럽고 요란했어. 사제가 축사를 할 때만 빼곤 계속 휘파람과 환호가 있었거든.”

“이런, 역시 가봤어야 했는데……. 결혼식에 오지 말라고 피올이 신신당부한 이유를 영 모르겠어요. 나도 축하해 주고 싶었는데.”

“이런, 왜 그랬는지 나는 알 거 같은데.”

오드리는 셰비언을 확 끌어당겨 그의 입술에 길게 키스했다. 셰비언은 놀란 듯 몸을 움찔댔지만 오드리를 밀어내지는 않았다. 도리어 걸치고 있던 망토로 오드리를 감싸니, 과감하게 드러냈던 오드리의 목과 어깨가 셰비언의 망토에 죄다 가려졌다.

“……셰비언.”

“네?”

오드리는 살짝 손을 뻗어 연분홍빛 입술에 번진 붉은 연지를 손가락으로 문질러 닦아냈다. 대담한 스킨십에 주변의 눈이 쏠리는 게 느껴졌다. 기분 좋은 흥분이 등을 타고 올라왔다.

“피올은 사랑스러운 신부가 결혼식장에서 그대에게 반해 버릴까 걱정했던 거야. 그럴 수도 있지, 당장 나부터도 그대를 볼 때마다 매번 새로 반하고 있으니.”

셰비언의 뺨에 화르륵 불이 붙었다. 기대했던 반응 그대로였다. 오드리는 발그레 열 오른 셰비언의 얼굴을 흡족하게 바라보다 덥석 그의 팔짱을 끼고 몸을 기댔다. 아까 마신 샴페인이 이제야 효력을 발휘하는 듯 입 안이 다디달았다.

“아가씨, 웬일이에요? 이렇게 공개적인 곳에서?”

“그대는 내 거라고 광고하는 거야. 그대가 결혼 발표를 아직 하지 않았다는 것에 희망을 건 사람들이 보여서 말이야. 그대는 의외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몹시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거든.”

“우와, 이왕 하실 거면 신문에도 광고 내고 그러세요. 아니, 제가 낼까요? 그래도 되죠?”

오드리는 키득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작 샴페인 몇 잔에 취하기라도 했는지 기분이 붕 떠올랐다. 멀리서 들려오는 환호성이 마치 자신을 위한 것만 것 같았다. 정말이지, 거짓말처럼 좋은 날이었다. 거짓말처럼 좋은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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