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4. 달구경
「“그야 당연히 로맨스 소설이 제일 잘 나갑니다. 요새 누가 모험 소설을 읽어요?” - 어느 서점주인이 출판사의 설문조사에 참여하면서 한 말.」
발걸음이 느려진 해가 서쪽 하늘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는 시각, 셰비언은 비몽사몽 몸을 일으켰다. 묵직한 둔통은 목과 등을 때려대는데, 작은 창문을 넘어 들어온 붉은 햇살은 이제 곧 밤이 올 것을 예고하고 있었다. 가로등의 불빛들이 어둑어둑해진 거리를 비췄다.
“너무 잤다…….”
처음엔 잠깐만 쉬고 일어날 생각이었는데 어느새 잠들어서 조금도 깨지 않고 푹 잠들어 버렸다. 아이샤와 워커가 싸우는 소리와 둘이 펼쳐 내는 마법의 여파가 마법망을 통해 계속 전해지는데도 그것도 모르고 자다니, 기가 막혔다. 이 시대에도 용 살해자가 있었으면 한참 전에 목이 따였을 게 분명했다.
셰비언은 서둘러 옷과 머리를 정돈하다 말고 거울 앞에 섰다. 그리고 웃옷을 확 벗고 목과 어깨를 죄다 덮은 비늘을 확인했다. 선명한 은빛으로 빛나야 할 비늘은 탁한 흰색이었고, 아래쪽에서 불그스름한 색이 올라왔다.
“씁…….”
둥지를 벗어난 이후, 그의 상처 회복 속도는 현저하게 느려지고 통증도 심해졌다. 용의 마력을 가진 오드리와 붙어 있을 땐 그나마 괜찮은데, 거리가 멀어지면 귀신같이 상태가 나빠졌다.
이래서야 도대체 언제가 되어야 샤를레아를 잡으러 갈 수 있을지 가늠이 안 됐다. 아쉬운 대로 아이샤를 가르치곤 있지만 그녀의 성장 속도는 한숨이 나오도록 느렸다. 하필 비교 대상이 워커라서 그렇게 느껴지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하나쯤 잡아먹으면 좋아질 텐데.’
꼭 용의 마력이 아니더라도 괜찮으니, 마력을 풍부하게 타고난 인간 한 명만 잡아먹으면 상당한 개선이 있을 게 분명했다. 문득 유혹이 밀려왔다. 어차피 인간들은 자신들끼리도 신분으로 목숨에 등급을 나누는 모양이니, 그중 아래쪽의 인간을 한 명 슬쩍하면 괜찮지 않을까. 혓바닥 아래쪽에 침이 고였다.
하지만 그랬다간 인간 사회에 섞여 살 수 없게 될 것이다. 포식자를 무리 속으로 받아들이는 짐승은 세상에 없으니까. 셰비언이 단순히 이종족인 것을 넘어 인간의 포식자가 되었을 때 오드리가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될지도 의문이고 말이다.
‘샤를레아는 이런 거 신경 쓰지 않겠지.’
깨어나자마자 정보를 얻겠다는 단순한 이유만으로 수십의 인간을 삼켰던 샤를레아다. 부상 치료를 위해 인간 서넛 잡아먹는 거야 그녀에겐 별일도 아닐 게 분명했다. 인간을 먹는 것보단 자신의 둥지에 처박혀 자는 쪽이 훨씬 효율적이라 그나마 다행이었다. 샤를레아가 그런 합리를 모를 정도로 멍청하지 않다는 것도.
“맞아, 둥지가 훨씬 효율적…….”
순간 오한이 들었다. 그녀의 둥지엔 화산이 있고, 화산이 폭발하자 그에 관심을 갖는 인간들이 있었다는 게 그제야 생각이 났다.
‘발톱섬에서 실종된 사람이 몇 명이었더라?’
워커와 아이샤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마법사협회에 발톱섬에 조사 인력을 보내지 말 것을 요청하고, 혹시 생각지 못한 사이 간 사람이 있는지 지리학자협회, 탐험가협회 등 각 협회에 문의해 확인하고, 그 외에도 외국의 협회에 보낼 협조 요청서를 작성하고…….
금방 끝날 거라고 생각했던 일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셰비언은 인내심을 가지고 일을 처리했다. 이게 다 골칫덩이 동족을 둔 죄다, 생각하면서. 하지만 일이 거의 다 끝났다 싶었을 때 뒤늦게 소식을 접하고 나온 관리가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하자 너무 짜증이 나서 다 때려치우고 싶어졌다.
“달튼 제도의 발톱섬이 용의 둥지라니, 말도 안 돼! 거긴 그냥 섬이라고요!”
“당신들은 내 둥지도 그냥 보석 광산 취급하고 살았잖아. 지금 남은 용이 그 녀석과 나뿐이라 그렇지, 용의 둥지가 세계 어디에 있었는지 다 까발리면 그때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관리는 입을 꾹 다물고 지도에 집중했다. 셰비언 성벽이 용의 둥지라는 통보야 한참 전에 받았지만, 그를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해서는 아직 정해진 게 아무 것도 없었다. 왕실의 재산이 나오는 다이아몬드 광산을 냉큼 넘겨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셰비언이 당장 자신의 땅을 내놓으라며 날뛰지 않는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해야 하는 게 지금 멜브란트 왕실이었다.
“발톱섬은 살아 있는 용, 그것도 인간을 한 끼 보양식으로 생각하는 용이 사는 둥지야. 알아서들 조심하고 다가가지 않도록 해.”
“젠장, 달튼 제도는 통행량이 많은데……. 발톱섬 주변에 항로가 많은가? 안 많으면 좋겠군. 젠장, 젠장, 젠장! 아르젠 남작, 이런 걸 알고 있었으면 진작 가르쳐 줬으면 좋았을 텐데요. 이걸 이제야 가르쳐 주는 이유가 뭡니까?”
“이제 생각났거든.”
“문제가 생기면, 아르젠 남작, 책임을 피할 수 없을 겁니다.”
“책임? 물 수 있으면 물어봐. 솔직히 난 지금 안 가르쳐 줘도 상관없는 정보를 가르쳐 주고 있는 거거든? 멋모르는 인간이 제 발로 용의 아가리에 걸어 들어가는 사태를 막으려고 말이야.”
관리는 하고 싶은 말이 아주 많은 표정이었지만, 이번에도 입을 다무는 쪽을 택했다. 현명한 선택이었다.
“난 여기까지만 하겠어. 이만큼 했으면 충분히 성의를 보인 거지. 안 그래?”
누구도 반론하지 않았다. 하긴 화가 나서 목의 비늘이 바짝 곤두선 용을 멋대로 붙들 수 있는 강심장은 워커 정도인데, 그 워커조차 끝없이 설명을 반복하느라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나머지는 인간의 몫이지. 잘해 봐.”
셰비언은 그대로 마법사협회를 박차고 나왔다. 그가 발톱섬을 떠올린 순간부터 얼마나 많은 인내심을 발휘했는지, 새카만 하늘에 별이 총총했다. 오드리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마음이 급해졌다. 걸음을 서둘렀다.
이보다 더 빠르게 올 순 없다고 장담할 수 있을 정도로 빨리 헨젤 저택에 도착했지만, 차마 정문으로 들어갈 엄두는 안 났다. 셰비언은 예전에 그랬듯이 이번에도 슬쩍 담장을 넘어 제 방의 창문을 열었다.
릴리가 셰비언에게 내준 손님방은 커다란 캐노피가 달린 큰 침대가 인상적인 방이었다. 그 외에도 신혼부부에게나 어울릴 듯한 아기자기하고 사랑스러운 가구와 장식품으로 꾸며져 있었지만, 셰비언은 릴리의 그런 배려는 전혀 알지 못했다.
‘아무도 없나?’
정말 다행하게도, 방은 침묵에 잠겨 있었다. 셰비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방에 들어갔다. 종일 입고 다녔던 로브는 벗어 구석에 팽개쳐 놓고, 다급히 몸단장을 시작했다. 마법을 써서 몸을 씻고, 머리도 빗었다. 옷깃 사이로 보이는 은빛 비늘이 몹시 거슬렸지만, 한참 회복 중인데 억지로 집어넣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부디 오드리 아가씨의 눈에도 자신이 괜찮아 보여야 할 텐데. 거울에 이리저리 자신을 비춰보며 걱정하던 그의 눈에 이상한 움직임이 잡혔다. 거울에 비친 방 한구석이 호수의 표면처럼 일렁거렸다.
휙 뒤를 돌아보았지만, 방은 그냥 빈 방이었다. 눈에 거슬리는 곳이라곤 아무데도 없었다. 하지만 다시 거울을 보자 또 한구석이 일렁거렸다. 심지어 움직이기까지 했다.
“……뭐지?”
뭔가 있다며 뒤돌아보았다가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하길 몇 차례. 도저히 이상한 기분을 참기 힘들어져 거울에 대고 말 한 마디를 뱉은 순간, 일렁거리는 표면에서 꿀색 피부의 손이 불쑥 튀어나와 셰비언을 향해 달려들었다.
“큭!”
셰비언이 습관처럼 항상 두르고 다니던 방어막이 오랜만에 제 역할을 했다. 텅 비어 숨소리도 안 나던 침실에 요란한 번갯불이 번쩍였고, 그에 방어막에 막힌 손 주인의 얼굴이 드러났다.
꿀색 피부, 새빨간 핏물 같은 머리칼, 바다를 통째로 옮겨온 듯 푸른 눈동자……. 샤를레아였다. 셰비언은 정말 상상도 해 보지 못한 상대의 등장에 말문이 막혔다. 저번에 심장을 거의 뽑아내다시피 한 데다가 등에 창을 꽂아 큰 부상을 입혔거늘, 눈앞의 샤를레아는 아주 건강해 보였다. 샤를레아가 두 손목을 문지르며 툴툴거렸다.
“아, 따갑잖아. 도대체 그놈의 방어막을 이런 순간까지 두르고 다닌다니, 말이 돼?”
“미친……. 너, 인간 잡아먹었어? 또?”
“싸우자고 온 거 아냐.”
샤를레아가 두 손을 들어 싸울 의사가 없음을 표시했다. 셰비언은 그녀를 믿을 수 없어 온몸의 긴장을 확 끌어올렸다. 당장이라도 싸울 수 있도록 마력으로 만들어낸 창을 손에 쥐고 주변의 마법망을 장악했다. 그의 동공이 하얗게 변해 뾰족하게 곤두서고 목과 어깨를 덮은 비늘에도 파르라니 빛이 감돌았다.
“싸우려고 온 거 아니라니까.”
“나더러 그걸 믿으라고?”
셰비언의 창끝이 샤를레아의 목을 겨누었다. 날카로운 끄트머리가 당장이라도 그녀의 목을 꿰뚫을 듯 힘차게 나아갔지만, 샤를레아는 살짝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셰비언의 창 범위에서 벗어났다. 그리곤 비늘 돋은 손으로 창끝을 잡고 부드럽게 밀어냈다.
“넌 나한테 체술로 안 돼. 그걸 아직도 몰라?”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샤를레아의 발 아래쪽에서 빛이 터져 나왔다. 순식간에 그녀의 발목을 휘감고 오금을 후려쳐 무릎을 꿇리고 팔을 뒤쪽으로 잡아당겨 구속했다. 샤를레아는 마치 죄인처럼 주저앉아 헛웃음을 지었다.
“이런 마법은 언제 준비했어?”
“난 너한테 체술로 안 되니 이런 마법이라도 준비해 둬야지. 안 그래?”
샤를레아의 목에 두꺼운 고리가 걸렸다. 셰비언이 그 고리에 연결된 끈을 쥐고 휙 잡아당기자, 샤를레아가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마른기침을 했다. 지나치게 순순한 반응이라 셰비언이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쿨럭! 싸우러 온 거 아니라니까 말이라도 좀 들어.”
“그렇게 당하고도 널 믿으면 내가 등신이게?”
셰비언은 한 손에는 고리와 연결된 끈을, 한 손에는 창을 쥐고 크게 심호흡했다. 샤를레아가 마법에 걸려 사지가 구속된 채 바닥에 쓰러져 있으니 이제 찌르기만 하면 되는데, 도무지 팔이 움직이질 않았다. 풀어헤쳐져 바닥에 흩어진 붉은 머리칼이 자꾸 눈을 어지럽혔다.
하나 뿐인 동족이었다.
“셰비언, 내가 너와 제대로 싸울 작정이었으면 지금쯤 이 집에 숨 쉬는 인간 같은 건 아무도 없었어.”
“…….”
“이제 말을 나눠볼 마음이 들었어?”
샤를레아가 씩 웃고 몸을 뒤집어 일어났다. 목에 걸린 고리 같은 건 있지도 않은 듯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곧게 선 그녀가 목을 까딱이는 것만으로도 고리는 산산이 부서져 떨어져 버렸다.
“뭘 그렇게 놀래? 한 번 당한 걸 또 당할 리가 없잖아.”
“빌어먹을…….”
“그래도 창을 찌르지는 않았으니 아주 멍청이는 아니네. 너도 참 의외로 날카로운 데가 있다니까.”
샤를레아가 아무리 사근사근하게 말을 건네도 태평한 건 그녀뿐, 셰비언의 긴장도는 점점 더 높아졌다. 샤를레아는 주변의 마법망 전체가 셰비언에게 동조하기 시작하는 걸 느끼고 남몰래 침을 삼켰다. 피부 안쪽이 따끔따끔했다.
“셰비언, 우린 동족이잖아. 이 넓은 세상에 우리 둘밖에 안 남았어. 다른 것도 아니고 고작 인간 때문에 우리끼리 싸워서야 되겠어? 경계 좀 풀어.”
“동족이라. 네 기준에서 나는 동족이고 뭐고 모르는 천둥벌거숭이 아니었던가? 언젠간 반드시 네 손으로 죽여 버린다고 이를 갈아놓고 그따위 말을 하면 누가 믿겠어?”
“그건 그렇지만…….”
샤를레아가 히죽 웃었다.
“상처를 치료하는 동안 깨달았거든. 아무리 아껴봤자 인간 마법사는 결국 인간이야. 네 아가씨가 아무리 용의 마력을 짙게 타고났어도 결국 용이 아니라 인간인 것처럼 말이야.”
“용이 개소리를 하는군. 그래, 이왕 시작한 거 계속해 봐.”
“난 ‘진짜’ 동족을 원해.”
“내가 싫다니까? 샤를레아, 너 치료에 전념하느라 뇌에 구멍이라도 났어? 내가 싫다고.”
“너 말고.”
“남은 건 우리 둘뿐이라고 조금 전에 네 입으로 말해놓고 나 말고 다른 동족을 원한다고? 이런, 이런……. 저번에 내가 뜯어낸 게 심장이 아니라 뇌인 줄은 미처 몰랐어. 뇌를 머리가 아니라 가슴에 보관하다니 정말 특이한 취향이야. 아하, 그래서 마법을 조금이나마 쓸 수 있었나 보지? 머리에 남은 심장이 있어서?”
셰비언의 빈정거림이 계속됐다. 처음에는 참고 들었던 샤를레아였지만, 셰비언의 조롱이 점점 수위를 높여가자 결국 참지 못하고 빽 소리를 질렀다.
“난 내 자식을 원한다고! 내 자식! 내 알! 내 동족!”
“맙소사……. 정말 돌아버렸군.”
“아니! 난 멀쩡해! 너야 자식을 갖는 데에 마법 말곤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없는 수컷이지만, 나는 아니거든? 쓸 수 있는 방법이 아직 남아 있어. 단지 혼자서 할 수 없다는 게 흠일 뿐이지.”
자식을 가질 수만 있다면 무슨 방법이라도 쓰겠다. 설령 그 방법이란 게 용 사이에서는 아주 예전에 사라져 버린 것일지라도, 상대가 미워 죽겠는 원수일지라도 상관없다.
셰비언은 샤를레아의 광기에 치를 떨며 뒤로 물러섰다. 용의 사회에선 수컷과 암컷이 어울려 자손을 만들지 않은 지가 한참이었다. 성별이 어느 쪽이든 용은 강력한 포식자고 원하는 대로 마법을 이용해 홀로 자식을 만들 수 있는데 굳이 위험 요소를 감당해가며 육체적인 관계를 이용해 자식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 어쩌다 서로를 사랑하는 커플이 생기면 성별에 상관없이 서로의 마력을 뒤섞어 자식을 만들었다.
그런데 자신은 원하지도 않는 자식을 가지기 위해서, 멀쩡히 태어날지도 의심스러운 자식을 만들기 위해서 샤를레아와 교미한다? 단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올라왔다.
“싫어.”
“너에게 많은 걸 바라지는 않아. 준비는 다 해놨어, 딱 한 번이면 돼.”
“무슨 준비? 네가 만들었던 그 인큐베이터는 내가 다 박살을 내놨는데, 어딘가에 같은 걸 또 만들기라도 했어?”
타우레드 영지의 괴물 사태. 인어의 마력을 가진 하녀가 담수저장고에 빠져 죽고, 인어의 마력에 오염된 물이 성을 돌고 돈 걸로 모자라 일부가 렘 강을 통해 흘러 나가면서 인간을 괴물로 바꾸고 영지 전체를 망가뜨렸던 사건.
애초 그 하녀가 마력균형을 잃고 갈증을 견디다 못해 담수저장고에까지 찾아가게 된 원인이 바로 샤를레아가 만들어둔 인큐베이터였다. 소중한 알에게 마력이 끊이지 않고 공급되도록 정성을 들여 설치하고 꼼꼼히 숨겨둔 것을, 셰비언은 기어이 찾아내 기초 하나까지 모조리 박살내는 걸로 타우레드 영지를 정상화했다.
아이샤의 마력이 갑자기 확 늘어난 것도, 그녀의 마력에서 인어의 마력이 차지하는 비중이 늘어난 것도 그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인큐베이터를 설치한 장본인인 샤를레아가 그 상실을 모를 리 없는데, 준비를 다 해뒀다고 하니 셰비언은 기가 막히고 답답할 뿐이었다. 자신이 모르는 사이 또 어디에다가 사고를 쳐 놨을까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어디다 만들었냐고!”
“굳이 애써서 만들 필요까지 있나. 몹시 다행히도 난 암컷이라, 처음부터 가지고 태어났는걸. 그거 써먹으면 되지. 그냥 뱃속에서 부화시켜서 새끼로 낳으면 되잖아?”
샤를레아를 구속하고 있던 마법에 금이 갔다. 셰비언이 제 마법이 조각나는 걸 눈으로 똑똑히 보고 기가 막혀 말을 잊은 사이, 샤를레아가 바닥에 떨어져 흩어져가는 마법 조각을 주워 입에 넣었다. 까드득. 얼음 씹는 소리가 났다.
“너는 알까 모르겠는데……. 몸으로 직접 알을 만들고 낳으려면, 그것도 부화 상태로 낳으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려. 네가 네 소중한 아가씨와 나름 알콩달콩 좋은 시간을 보내고 때가 되어 이별하기에도 충분한 시간이지.”
“…….”
“네가 딱 한 번만 협조해 주면, 나는 네 아가씨와 인간들에게 어떤 해도 끼치지 않고 내 알만 바라보며 살겠다고 약속하지. 암, 내 새끼 내 동족 보기도 바쁜데 인간 따위가 무슨 의미람. 내 둥지 근처에 얼씬대지만 않으면 돼.”
샤를레아가 셰비언에게 접근했다. 그가 쥐고 있는 창 따위는 조금도 위협이 되지 않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그녀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셰비언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셰비언, 어떤 선택이 합리적인 건지는 금세 판단할 수 있잖아. 응? 딱 한 번이면 돼.”
“싫어. 내가 미쳤다고 너와 교미를 해?”
“와우, 신기하네. 다른 용도 아니고 마법의 주인이 이렇게 명확한 합리를 앞에 두고 싫다는 말을 다 하고.”
“합리? 합리 같은 소리 하네. 용은 끝났다는 걸 대체 언제가 되어야 받아들일 거야? 알이고 새끼고 불가능해. 없어.”
셰비언의 단언에도 샤를레아는 포기를 몰랐다. 체모 색상과 완전히 반대되는 푸른 눈이 열기로 이글거렸다.
“무슨 소리야, 마지막에 남은 용이 암컷과 수컷이잖아. 할 수 있는 건 다 해 봐야 하는 거 아니겠어? 넌 마법의 주인으로서 용의 마법을 수호하고 이어가야 할 의무를 내버렸으니, 이런 일에라도 적극적으로 협조해. 그게 맞아.”
“닥쳐. 내가 의무를 내버렸다고? 종족으로서의 용은 끝났다는 말을 하기까지 내가 얼마나 많은 방법을 시도했었는지 알지도 못하는 게……! 용끼리 관계해서 알을 가지는 거, 네 멍청한 머리로도 생각해 낸 그 방법, 내 동료들이 생각해 내지 못했을 거 같아? 했어, 이미 해 봤어! 아예 알이 생기지도 않았다고!”
“아아, 그래, 당연히 해 봤겠지. 하지만 그게 너는 아니었겠지. 안 그래?”
셰비언의 등이 벽에 닿았다. 샤를레아가 셰비언에게 바짝 다가섰다. 홍채의 무늬까지 서로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셰비언의 창이 샤를레아의 목을 파고들었다. 살짝 베인 살갗에서 피가 흘러 옷자락을 적셨다.
“한쪽이 마법의 주인이면 결과가 다를 거야.”
“부질없는 짓이야.”
“아니, 충분히 시도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지.”
어떤 말을 해도 먹히지 않는다. 뚫리지 않는 벽이 있다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셰비언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놓인 채 입술을 깨물었다. 대체 무슨 수를 쓴 건지 속박마법은 산산이 깨졌고, 창은 아무리 힘을 주어도 가느다란 목을 꿰뚫지 못했다.
그렇다고 파괴력이 큰 마법을 쓰기엔 장소가 나빴다. 여긴 헨젤 저택이고, 오드리의 집이었다. 무엇보다 자신이 오기 전에 먼저 이곳에 와 있었던 샤를레아가 무슨 짓을 해뒀는지 알 수 없다는 게 망설임의 가장 큰 이유가 됐다.
샤를레아에겐 셰비언의 망설임이 손에 잡힐 듯 들여다보였다. 아무리 마법의 주인이라 하나 성년을 넘긴지 얼마 안 된 젊은 용이었다. 경험의 부족과 시야의 협소함은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거기에 감정적인 약점이 끼어 있다면 더더욱.
“창 내려. 네 아가씨가 걱정된다면.”
“이……. 대체 뭔 짓을 했기에……!”
“알고 싶으면 얌전히 있어. 금방 끝나.”
샤를레아가 셰비언의 뺨에 손을 댔다. 화룡 특유의 뜨거운 체온이 유황 냄새 나는 마력과 함께 전해진 순간, 셰비언은 도저히 참지 못하고 샤를레아의 명치를 걷어차고 창을 내질렀다. 샤를레아가 미끄러지듯 뒤로 물러나 발을 피하고 창을 움켜쥐었다.
셰비언이 창을 회수하려 팔에 힘을 주었지만, 육체적인 능력에선 샤를레아 쪽이 단연 압도적이었다. 창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샤를레아가 쯧, 혀를 차며 셰비언을 나무랐다.
“왜 이래? 내가 많은 걸 요구하는 것도 아니잖아. 내가 뭐 마음을 달랬어, 나중에 새끼에게 애비 노릇을 해달랬어? 나라고 네가 뭐 좋아서 이러는 줄 알아? 서로 눈 딱 감고 필요한 것만 해치우고 다신 보지 말자.”
“필요? 필요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너에게나 필요한 거겠지, 난 아니거든! 네가 그 잠깐 사이에 뭔 짓을 해서 이만큼 회복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야 당연히,”
“닥쳐, 알아도 모르고 싶으니까. 너와 닿는 걸 상상만 해도 구역질이 나. 유황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도 속이 뒤집힌다고!”
“아, 그래? 나라고 네놈 새끼 마력과 닿는 게 뭐 좋은 줄 알아? 그냥 필요하니까 이러는 거지. 너, 오드리 아가씨가 어떻게 돼도 상관없나 보지? 그렇지? 이 집, 브란젤에서도 꽤 큰 편인 거 같은데……. 일하는 사람도 많겠지? 피비린내로 꽉 채우면 맛있는 도시락 같을 거야.”
샤를레아의 동공이 하얗고 길쭉하게 변했다. 목덜미에 붉은 비늘이 오도독 돋아나고 자세가 살짝 구부정해지면서 이가 뾰족해졌다. 날름 입술을 핥는 혀가 잘 익은 체리보다 붉었다. 그녀가 입맛을 다셨다.
“어때? 말만 들어도 침이 고이지 않아? 딱 보니 아직까지 부상 치료도 다 못했는데 당연히 그렇겠지. 아, 그래. 회복이 덜 돼서 거부하는 건가? 그럼 여기서 인간 한둘 골라다 먹으면 되잖아. 사냥이 힘들면 내가 잡아다 줄 수도 있어.”
“말하는 게 천박하군. 이건 숫제 용이 아니라 짐승과 같아.”
“킥……. 용이든 인간이든, 아무리 고상하게 굴어도 결국은 다 짐승이야. 다급한 순간에 이르면 결국 본능이 우선하게 되어 있어. 종족 보전의 본능은 그중에서도 꽤 강력한 본능이고. 하긴, 너처럼 비관적인 생각만 하는 녀석은 네가 왜 하필 용의 마력을 가진 인간에게 반했는지 고민해 본 적도 없겠지만.”
“재미있네. 더 얘기해 봐.”
“얘기는 무슨? 바로 실력 행사에 들어가야지!”
샤를레아가 셰비언엔게 달려들었다. 몸이 길게 늘어져 보일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셰비언이 그새 펼쳐 낸 방어막이 샤를레아의 팔에 파고들어 피부와 근육을 지지고 불태웠지만, 샤를레아는 멈추지 않았다. 까맣게 타들어간 팔로 셰비언의 목을 쥐고 그를 벽에 처박았다. 쿵, 소리와 함께 벽이 흔들렸다.
“큭!”
“어린 용아, 전장에서 이 정도 부상은 아무 것도 아니란다. 인정해, 접근전으로 넌 날 못 이겨. 이 거리에선 내가 절대적으로 우위에 있어.”
“커헉……. 그……래? 그럼 이……건 어때?”
셰비언이 샤를레아의 팔을 움켜쥐고 그대로 마법을 밀어 넣었다. 잔뜩 응축된 마법이 샤를레아의 팔을 타고 심장을 향해 내달렸다. 마법이 지나는 곳마다 근육이 갈라지고 피가 터지니, 샤를레아는 황급히 셰비언을 놓아주고 뒤로 물러났다. 그녀는 좀처럼 똑바로 서지 못하고 핏덩이를 툭툭 토해냈다. 반쪽만 남은 심장이 고통스럽게 펄떡거렸다.
셰비언이 그새 멍든 목을 어루만지며 히죽 웃었다.
“아무리 접근전에 자신이 있어도 그렇지, 마법의 주인을 우습게 보면 안 되지. 이런 식으로 당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방심을 했어? 쯧, 멍청한 것도 병이라니까.”
“이 빌어먹을 자식이……!”
“내가 너한테 괜히 목을 잡혀준 줄 알아?”
셰비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의 발아래에서 마법진이 퍼져 나갔다. 비슷한 수법에 당한 바가 있는 샤를레아는 기겁을 하고 마법진을 피했지만, 마법진은 샤를레아를 그냥 지나쳤다. 대신 손님방 전체를 감싸 일종의 격리 공간으로 만들었다. 손님방을 채우고 있던 가구들이 사라지고 주위는 금세 텅 비어 검게 변했다.
“공간에 끌어들이느라 시간 끄는 것도 모를 정도로 둔해 빠져가지고 전쟁은 어떻게 치렀나 몰라.”
샤를레아의 발아래에서 검은 덩굴이 자라났다. 샤를레아는 헛웃음을 짓고 검을 뽑아 덩굴을 베어냈지만 덩굴은 순식간에 다시 자라났다. 여긴 셰비언의 공간, 그의 의식세계였다. 그가 원하는 대로 되는 게 당연했다.
샤를레아는 팔에서 흐른 피를 주변에 뿌려 임시로나마 제 공간을 확보했다. 그녀의 손등에 핏줄이 불거졌다. 바닥에 떨어지던 피는 어느새 멎어 있었다.
“……그래, 이렇게 된 거 아예 공간째로 때려 부숴주지. 안타까워, 마법의 주인이 바보가 되겠군.”
“오호, 마법을 완전히 잃은 주제에 내 의식세계를 깨뜨려 보겠다고? 샤를레아, 꿈이 너무 큰 거 아냐?”
“용은 마법 그 자체고, 나는 용이야. 이제 시간을 멈출 정도로 큰 마법은 못 써도…….”
“나는 마법의 주인이야. 허세는 안 통해.”
마법을 샤를레아에게 밀어 넣은 짧은 순간, 셰비언은 샤를레아가 완전히 마법을 잃은 것을 알아챘다. 도대체 어떻게 숨겼을까 궁금했던 자잘한 마법조차 이젠 쓸 수 없게 된 것이다. 마력과 지식이 남아 있으니 마법진을 그리고 구동시키는 거야 어렵지 않겠지만, 마법 생물이라고 부르기엔 초라한 수준이었다.
“솔직히 말해봐. 인간의 모습을 유지하는 것도 힘들지 않아?”
샤를레아가 셰비언에게 달려들었다. 눈의 실핏줄이 죄다 터져 흰자위가 새빨갰다. 셰비언은 몸을 휘청대며 간신히 검을 받아내고도 얄미운 혓바닥을 멈추지 않고 샤를레아를 약 올렸다.
“이왕 의식세계에서 싸우는 거, 본체로 싸워보자. 응? 그게 속 시원하잖아! 어때? 아, 혹시 완전히 회복한 게 아닌 거야? 그래서……. 읏차!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는 건가? 용의 모습을 취할 수가 없어서?”
“닥쳐.”
“아하하, 역시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아무리 인간을 잡아먹었다고 해도 그 짧은 사이에 이만큼이나 회복했을 리가 없는데 말이야! 너, 둥지에서 나온 이후로 본모습으로 돌아가 본 적은 있어? 없지?”
둥지 얘길 꺼낸 순간 샤를레아의 자세가 흐트러졌다. 셰비언의 창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샤를레아의 옆구리를 노리고 짓쳐 들어갔다. 그대로 옆구리를 뚫릴 듯하던 샤를레아가 창대를 옆구리에 끼고 도리어 셰비언의 목을 찔러왔다.
“큭!”
완벽하게 피하지 못한 셰비언의 뺨에 긴 상처가 생겼다. 셰비언은 가까스로 창을 빼앗아 훌쩍 뒤로 물러섰다. 하마터면 목을 꿰뚫릴 뻔했던지라, 놀란 심장이 격하게 펄떡거렸다. 샤를레아가 땀에 푹 젖은 채로 눈을 번들대는 게, 어쩐지 간담이 서늘했다.
“와, 이러다 진짜 죽이겠네.”
“걱정 마, 목적을 이룰 때까진 살려둘 테니까.”
“그거 참, 목적을 이루자마자 죽여 버리겠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잘 알고 있네.”
일부러 이죽거렸지만 샤를레아는 끄떡도 하지 않고 셰비언을 몰아붙였다. 셰비언이 뭐라고 떠들든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 그들이 부딪칠 때마다 별 하나도 없이 검기만 한 공간이 몇 번이고 출렁거렸다.
그렇게 싸우기를 한참, 둘 다 자잘한 상처로 피 칠갑이 됐지만 여유로운 쪽은 셰비언이 아니라 샤를레아였다. 격리마법을 견고하게 유지하면서 의식세계에 샤를레아를 끌어들여 싸우는 게 셰비언에게 부담이 간 탓이었다. 게다가 샤를레아가 흘리는 피가 많아질수록 공간을 제어하기도 힘들어졌다.
그에 셰비언은 아예 본신으로 돌아가려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번번이 샤를레아의 방해를 받는 통에 시도는 계속해서 수포로 돌아갔다.
“왜 이렇게 조용해? 더 떠들어보지?”
“헉, 헉……. 듣지도 않는 거, 혼자 떠들어봐야……. 크윽!”
샤를레아의 검이 은빛 비늘을 뚫고 셰비언의 어깨에 틀어박혔다. 채 아물지 않은 상처가 또 헤집어지면서 비늘 사이로 피가 흘러내렸다. 셰비언의 손에서 창이 떨어졌다.
샤를레아가 셰비언을 억지로 쓰러뜨려 눕히고 그를 깔고 앉아 검을 비틀었다. 상처가 벌어지며 피가 쏟아지고 비늘이 떨어졌다. 떨어져 나가는 비늘의 개수가 늘어날수록 주변을 채웠던 어둠이 점차 흐릿해지며 본래의 방 풍경이 윤곽을 드러냈다. 셰비언이 샤를레아를 끌어들였던 의식세계가 흩어지고 있었다.
“킥, 용이 인간 틈에 어울려 살겠다고 멍청한 꿈을 꾸니까 이런 꼴을 당하는 거야.”
“닥쳐……! 아악!”
“그깟 인간 서넛 잡아먹는 게 뭐가 그리 무서워서 몸이 이 지경이 되도록 방치를 하셨나 그래.”
샤를레아는 벌어진 상처에 입을 대고 피를 핥았다. 짙은 마력이 어린 피는 머리가 어지럽도록 향긋하면서도 참을 수 없이 역겨웠다. 동족의 피였다. 그녀는 셰비언의 관절 곳곳에 자신의 마력을 쐐기처럼 박아 넣는 걸로 그를 구속했다.
“으윽……!”
샤를레아의 손이 바빠졌다. 셰비언이 아직 고통에 정신을 못 차릴 때, 그에 더해 자신의 상태가 더 나빠지기 전에 서둘러 목적을 이뤄야 했다.
“……셰비언?”
바로 그때, 아주 가느다란 목소리가 셰비언을 불렀다. 공포와, 당혹과, 일말의 분노를 품고서.
샤를레아는 당혹해서 주변을 살폈다. 셰비언의 격리마법은 아직 견고하게 살아서 제 역할을 하고 있었고, 의식세계 역시 완전히 걷힌 게 아니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오드리가 방 한 가운데에 서서 그들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셰비언!”
오드리가 샤를레아를 향해 손을 뻗었다. 보석을 붙여 장식한 손톱이 코앞에 다가왔지만, 샤를레아는 그 손을 피하기보다는 셰비언을 억누르는 쪽에 더 집중했다. 어떻게 보는 건지는 몰라도 마법이 유지되는 이상 단지 보는 것으로 끝날 테니까.
하지만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오드리가 샤를레아의 머리채를 붙들고 확 잡아당겼다. 완전히 방심하고 있었던 샤를레아의 목이 뒤로 홱 꺾였다. 둘의 눈이 마주쳤다.
“떨어져!”
“너, 목숨이 몇 개는 되는 모양이지?”
“알 게 뭐야!”
오드리는 아예 양손을 다 써서 샤를레아를 잡아당겼지만, 방심하고 있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샤를레아는 완전히 달랐다. 그녀는 마치 땅에 깊이 파묻힌 바위 같았다. 아무리 용을 써도 조금도 흔들림 없는 바위 말이다.
“아, 귀찮게!”
샤를레아가 파리라도 쫓는 듯 가볍게 팔을 휘둘렀다. 오드리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고 통증을 기다렸지만, 예상했던 충격은 오지 않았다. 조심스레 눈을 떠보니 상황이 아까와는 몹시 달랐다. 샤를레아에게 깔려 있던 셰비언이 오드리의 앞에 서서 그녀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숨을 몰아쉬느라 어깨를 들썩일 때마다 그의 목과 어깨에서 피가 튀었다.
“셰비언, 피가……!”
“아가씨. 잠시만 가만히 계셔주겠어요?”
샤를레아가 오드리에게 정신을 판 잠깐이 셰비언에게 기회가 됐다. 그는 고통을 무시하고 샤를레아의 마력을 뽑아내고 일어난 걸로도 모자라 샤를레아의 어깨와 팔에 큰 상처를 입혔다. 덕분에 샤를레아는 지금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오른팔을 붙들고 지혈 중이었다. 이제까지 흘린 피의 양이 만만치 흘려서인지, 입술이 온통 허옇게 질려 있었다.
셰비언은 오드리를 제 등 뒤로 감췄다. 그가 손가락을 튕길 때마다 방 전체를 감싸고 있던 마법망이 조금씩 부피를 줄이며 샤를레아를 향해 기어갔다. 샤를레아가 주춤 물러서며 입을 삐죽거렸다.
“이거 원, 마법이 무슨 뱀 떼 같은걸.”
“조금만 더 깊게 후벼 팔 걸 그랬지. 그럼 진짜 죽여 버릴 수 있었을 텐데.”
“하여간……. 셰비언, 내가 알을 배는 데에 한 번만, 딱 한 번만 협조해 달라니까 그게 그렇게 싫단 말이야? 해 보고 안 되면 이번에야말로 포기할게. 응? 마법의 주인으로서 종족 보전의 의무를 다하라고!”
이게 대체 무슨 말이람? 오드리의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그녀는 셰비언의 등 뒤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었지만, 곧 셰비언에게 잡혀 제자리로 돌아갔다.
“아가씨, 아무 것도 아니에요. 그냥 저 용이 헛소리하는 거니까 듣지 마세요.”
“헛소리라니? 이봐 아가씨. 당신 연인에게 마법의 주인으로서 의무를 다하라고 말 좀 해주겠어? 다행히 나는 저 녀석의 마음은 눈곱만큼도 원하지 않거든? 말 그대로 육체적인 결합만 하면 돼!”
“저 미친……!”
오드리의 앞이라 참고 참았건만, 결국 셰비언의 입에서도 욕설이 튀어나왔다. 그는 반년 전의 자신은 까맣게 잊은 듯 오드리의 눈치를 봤다. 정작 그 말을 들은 오드리는 용은 다 똑같은 사고방식을 가졌구나, 뭐 그렇게 심드렁하게 넘겨 버렸지만 말이다.
“죄송해요, 저런 말종이 동족이라서.”
“아냐. 되게 용답네. 전에 그대가 했던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니었다는 걸 알겠어.”
“으…….”
셰비언이 혀를 차며 흐릿해졌던 의식세계를 강화했다. 희미하게나마 모습을 드러냈던 가구가 사라지고 어둠으로 가득 찬 공간이 다시 펼쳐졌지만, 격리마법은 밖으로 밀려나기는커녕 도리어 더 뚜렷해지고 선명해졌다. 더불어 셰비언의 격한 감정을 반영하듯 줄어드는 속도가 확연히 올라갔다.
“야, 셰비언! 내가 여기서 죽으면 시체는 어쩌게? 응?”
“내가 너처럼 멍청한 줄 알아? 그런 걱정은 죽고 나서 해.”
샤를레아는 떠들기를 멈추고 격리마법을 깨기 위해 이런저런 시도들을 했지만, 마법을 잃은 그녀로서는 영 어려운 일이었다. 그녀는 오래지 않아 작은 우리처럼 줄어든 격리마법 안에 갇힌 신세가 되고 말았다. 쪼그리고 앉아 최대한 몸집을 줄였지만 마법은 계속해서 그녀를 짓눌렀다.
그러나 샤를레아의 눈빛은 조금도 죽지 않고 살아 있었는데, 그건 셰비언이 창을 쥐고 그녀의 코앞에 섰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직도 마음이 안 바뀌었어? 의무를 다할 생각은 조금도 없어?”
“의무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너야말로 왜 그렇게 종족과 자식에 집착하는 건데? 이제 슬슬 포기할 때도 안 됐어? 네가 만들었던 자식은 죄다 알에서 깨어나지도 못하고 죽어서 썩어버렸는데 아직도 현실을 몰라?”
아픈 곳을 찔린 샤를레아의 표정이 싹 굳었다. 종족다툼이 격렬하던 시절, 샤를레아는 언제나 가장 앞에 나서서 싸우던 용이었다. 겨우 다툼이 잦아들고 평화가 찾아와 알을 만들었건만, 고대하던 자식은 태어나지도 못하고 알 속에서 죽어버렸다. 몇 번이고 반복했지만 그때마다 결과는 똑같았다.
셰비언은 딱히 알을 만들거나 잃은 적은 없었지만, 동료의 죽음을 겪으며 샤를레아의 슬픔을 어렴풋하게나마 공감하고 이해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녀가 같은 결과를 반복하면서도 끊임없이 시도하는 이유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종족으로서의 용은 끝났다는 걸, 몸으로 겪어 누구보다 잘 알 그녀가 끝끝내 용의 순수성을 고집하는 이유도.
“그리고 이건 내 솔직한 생각인데 말이야……. 만약 내가 너에게 협조해서 기적적으로 알이 만들어진다고 해도, 그래서 다 자랄 때까지 네가 뱃속에 품어 기른다고 해도, 과연 무사히 새끼가 태어날까? 이번엔 네 뱃속에서 죽어버리지 않을까?”
멀찍이서 구경만 하는 오드리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얄미운 말이었다. 그러니 그 이죽거림을 정면에서 본 샤를레아는 어떻겠는가. 흰자위 실핏줄이 죄다 터지고 부득부득 이 가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렸다.
“이…… 갈가리 찢어 진흙 속에 처박아도 모자랄 자식 같으니…….”
“와우, 그 말 오랜만에 들으니 반갑네. 왜, 더 하지? 마법의 주인이니 뭐니 앞에선 존중하는 척해도 뒤에선 심장이 얼음으로 된 새끼들이라며 잘근잘근 씹었던 걸 모를 줄 알고? 마지막 유언 듣는 셈 치고 들어줄 테니까 다 얘기해.”
셰비언의 말이 마지막 마개를 열어버린 듯, 들어주기 힘든 욕설이 줄줄 터져 나왔다. 뚱하니 그들을 구경하던 오드리는 그냥 알아서 귀를 막았다. 계속 듣고 있어봐야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셰비언은 음악이라도 감상하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대며 한참 동안 욕설을 들어주었다. 샤를레아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욕을 다 할 기세로 욕을 해댔지만 그것도 결국엔 끝이 났다. 계속해서 조여드는 격리마법이 그녀를 사정없이 짓눌러, 숨쉬기도 어려운 상황에 이른 것이다.
“흐아, 하아, 죽어버려, 윽, 고통스럽게 죽어, 소중한 걸 다 잃어버리고 고통스럽게! 아아악!”
샤를레아가 무슨 저주를 퍼붓든지, 셰비언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다. 그는 격리마법에 신중하게 틈을 내고 곧바로 창을 꽂아버렸다. 마력을 잔뜩 머금은 창이 마지막 자물쇠가 되어 격리마법을 완성시켰으니, 조금 전까지 샤를레아가 있던 자리엔 크고 둥근 황금색 공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오드리는 셰비언이 그 공을 장난스럽게 한손으로 던졌다 받았다 하는 걸 보고서야 귀를 막았던 손을 내렸다.
“끝난 건가?”
“일단은요. 봉인만 해뒀어요. 사실 샤를레아의 말이 틀린 건 없어서……. 여기서 죽이면 시신을 감당하기 힘들거든요. 나중에 괜찮은 장소에 가져가서 처분하려고요.”
“그거 안전하긴 해? 막 풀려나고 그런 거 아니지?”
“절 믿으세요, 아가씨.”
“알겠어. 마법의 주인인데 어련히 잘했겠지. 근데…….”
셰비언이 한껏 어깨를 펴고 자신감을 표출했지만, 오드리의 불안감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셰비언이 샤를레아에게 제압당해 죽기 직전에 이르렀던 상황을 본 게 방금 전인 데다가 지금 그의 몰골이 아주 엉망이었다. 목과 어깨의 비늘이 숱하게 떨어져 벌건 살이 드러난 걸로 모자라 검에 꿰였던 구멍에선 아직도 피가 줄줄 흘렀다.
“그건 그렇다 치고, 상처가 어떻게 이렇게 크게…….”
오드리가 속상한 심정을 감추지 않고 드러내며 셰비언의 어깨에 손을 댔다. 얌전히 누워 있던 비늘이 작은 자극에도 바짝 곤두섰다. 오드리도 화들짝 놀라 손을 거뒀다.
“아, 미안. 아프지. 아 이거 어떡해. 치료는 돼? 둥지로 돌아가야 하는 거 아닌가? 응?”
“괜찮아요. 여긴 제 의식세계니까요. 완벽하게 치료하긴 어렵겠지만, 어느 정도 완화하는 거야 뭐, 어렵지 않아요. 그 다음엔 시간이 해결해 주겠죠.”
“그 말, 믿어도 돼?”
괜찮다, 괜찮을 거다. 곧 괜찮아질 거다. 별일 아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오드리가 밀리나에게서 꾸준히 듣고 또 들었던 말이었다. 셰비언이 창백한 입술로 하는 장담이 곧이곧대로 들릴 리 없었다. 도저히 숨기지 못한 불안이 온몸에서 배어나왔다.
“제가 괜찮다고 아무리 말해도 지금은 소용없겠네요. 일단 의식세계에서 나간 다음에 얘기하죠. 공간 접을게요.”
그때까지도 그들 주변을 감싸고 있던 의식세계가 천천히 흩어졌다. 큰 창문을 통해 쏟아지는 달빛과, 그 달빛을 받은 가구들의 윤곽이 뚜렷하게 살아났다. 방 곳곳을 장식한 꽃들이 뿜어내는 향기가 코를 간지럽혔다. 살짝 서늘한 공기 때문에 피부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이렇게 여유롭고 느긋하게 의식세계에서 벗어나 본 경험이 처음인 오드리가 감탄사를 흘렸다. 책장 넘기듯 시야가 휙휙 바뀌는 것만이 전부라고 생각했는데, 그거 참 대단한 착각이었다.
“자, 보세요.”
셰비언이 옷을 젖히고 어깨를 드러냈다. 그의 장담대로 상처는 상당히 아문 상태였다. 비늘이 뽑혀 나간 자리에 벌건 살점이 드러난 건 어쩔 수 없었지만, 적어도 피를 줄줄 흘리던 구멍은 깨끗하게 메워져 있었다. 그 외에도 계속 피를 흘리며 셰비언의 체력을 빼앗던 자잘한 상처들도 마찬가지였다.
오드리는 가장 큰 상처가 있던 자리를 매만졌다. 아직 남아 있는 피 때문에 잘 보이지는 않아도, 깊게 패인 구멍 대신 상처를 얇게 덮은 비늘이 손가락 끝에 느껴지자 저절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다행이다……. 나, 나는 너무, 너무 놀라서…….”
마음이 놓이자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오드리는 그 자리에서 풀썩 주저앉아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예뻐 보이고 싶어서 열심히 바르고 왔던 화장이 죄다 눈물에 녹아 흐를 게 뻔한데, 그 꼴이 얼마나 보기 싫을지 알면서도 도저히 진정이 안 됐다. 마치 수도꼭지가 고장 난 것 같았다.
셰비언은 그런 오드리의 어깨를 감싸 안고 등을 토닥거렸다. 덜덜 떨리는 어깨와 등이, 옷자락을 적시는 눈물과 숨죽인 울음소리가 무서운 줄도 모르고 대뜸 용의 머리채를 잡아당겼던 사람이라곤 믿기지 않게 연약했다.
“……미안해요. 끔찍한 꼴을 보게 했네요. 내가 좀 더 조심했어야 하는 건데, 샤를레아가 얼마나 미쳐 있었는지를 고려하지 못했어요. 설마 알이 아니라 새끼를 낳겠다고 덤빌 줄은……. 그보다 아가씨는 괜찮아요? 내 공간에 들어오는 건 그렇다 쳐도 격리마법까지 뚫었잖아요. 어디 아프거나 열나거나 그런 거 없어요?”
“흐으윽……. 내 얼굴 보지 마…….”
오드리는 필사적으로 셰비언의 손을 밀어냈다. 화장이 엉망으로 번졌을 얼굴을 보여줄 수가 없었다. 사실은 이대로 벌떡 일어나 도망이라도 치고 싶은데, 마음처럼 움직여 주지 않는 다리가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셰비언은 그런 오드리의 마음은 눈곱만큼도 모르는 것처럼 굴었다. 큰 손으로 오드리의 저항은 쉽게 저지하곤 화장이 까맣게 번진 눈가에 다정하게 입을 맞췄다. 쪽, 쪽, 저절로 뺨이 달아오르는 소리가 계속 오드리의 귓가를 자극했다.
“그만, 그만해. 난 아무렇지도 않아, 아픈 곳도 없고 열은…… 지금 그대 때문에 오른 거야. 그러니 제발 그만!”
“왜요? 너무너무 예뻐서 그런 건데. 아프지 않다니 더 해도 되겠네요.”
“꺅!”
셰비언이 오드리를 덥석 들어 올려 제 무릎 위에 앉히더니만, 오드리의 발간 얼굴을 보며 사르르 웃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을 안은 듯, 매만지는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필사적으로 얼굴을 가리는 손등에 입을 맞추는 행동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정말 고마워요. 아가씨가 아니었으면 진짜 큰일을 당했을지도 몰라요.”
“애초 왜 그렇게 잡혀 있었던 거야? 뭐가 문제였어?”
“음, 아무래도 피올에게 몸 쓰는 법을 배워야 할 것 같아요. 준비를 덜한 상태에서 인간 모습으로 맞닥뜨리니까 감당이 안 되네요. 어떻게 마법을 펼쳐 내고 의식분리도 시키긴 했는데 그 상태에서 계속 싸우려니 계속 밀려서 본체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어휴. 작은 상처라도 계속 쌓이니까 힘들더라고요.”
허세 없이 솔직한 투덜거림이 오드리를 웃게 했다. 오드리는 얼굴을 적신 눈물을 닦아내며 하하 웃었다.
“차라리 베텔 경은 어때? 내가 듣기로 보티안 씨는 남을 가르치는 데에 영 소질이 없다던데. 치안대 내에서도 이제 보티안 씨에게는 신입 육성을 안 맡긴대.”
“그 사람은 싫어요.”
“왜? 베텔 경이 그대에게 뭔가 실례될 만한 짓이라도 했어?”
“아뇨, 그런 건 아닌데…… 그냥요. 저는 그 사람이 이상하게 껄끄럽더라고요. 저한테는 역시 피올이 훨씬 나아요. 대하기도 편하고. 그나저나 아가씨, 손톱에 보석은 왜 붙이고 오신 거예요? 이러면 불편하지 않나요?”
당연히 불편하다. 보석이 떨어질까 신경도 쓰이고 무거워서 손가락 움직임도 부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이건 오드리의 야밤 외출 계획을 알게 된 다이앤이 의욕에 넘쳐서 이러면 예쁘다며, 이게 브란젤의 최신 유행이라며 손톱마다 물을 들이고 보석을 붙여준 거였다. 다이앤의 성의가 갸륵해 허락했다 말하는 오드리의 속내도 사실은 다이앤과 별로 다르진 않았다. 셰비언에게 예쁘게 보이고 싶었다.
하지만 오드리와 다이앤의 노력을 알 리 없는 셰비언은 오드리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어떻게 붙였는지 신기해하기 바빴다.
“보석이 작고 하급인데도 모양 내서 붙인 게 신기하고 예뻐요. 이 반짝임은 어떻게 한 건지 모르겠네요. 아가씨, 계속 이렇게 붙이고 있을 수 있어요?”
“나도 몰라. 그건 왜 물어보는 건데?”
“흐음. 만약 계속 붙이고 있을 수 있다면 이 보석들에 마법을 걸어볼까 했죠. 아가씨의 몸을 지킬 수 있는 것들로요. 아까는 정말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거든요. 실은 지금도 마구 뛰고 있어요.”
셰비언이 오드리의 손을 제 맨가슴에 가져다 댔다. 약간 차가운 살갗이 손바닥에 찰싹 달라붙었다. 평소 느릿느릿 뛰던 그의 심장 박동이 보통 사람들만큼이나 빨랐다.
“많이 놀랐나 보네.”
“어디 놀라기만 했을까 봐요? 아주 죽을 뻔했어요.”
노상 서늘하기만 하던 입술이 따뜻한 온기를 품고 오드리의 손가락에 닿았다 떨어졌다. 손가락에 온기가 닿을 때마다 오드리의 귀가 조금씩 발갛게 달아올랐다. 애틋한 표정으로 제 손을 쓰다듬는 셰비언이라니, 정말이지 심장에 안 좋았다.
“셰비언, 왜 이렇게 뜨거워? 어디 아픈 거 아냐? 아니, 아니지. 비늘이 이렇게 떨어졌는데 어떻게 안 아파. 그냥 봐도 아픈걸. 셰비언, 얼른 침대에 눕는 게…….”
“난 괜찮다니까요. 아가씨야말로 아까보다 체온이 훨씬 올랐어요. 왜인지 물어봐도 돼요?”
말을 잘라 먹혔는데도 오드리는 즉답을 하지 못하고 시선을 피했다. 지금 둘은 멀쩡한 가구를 내버려 두고 바닥 카펫에 주저앉아 서로를 안고 있었다.
셰비언은 오드리의 등과 목을 한 팔로 받치고, 오드리는 셰비언의 가슴에 한 손을 댄 채 셰비언의 무릎 위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하나씩 남은 손은 굳게 깍지를 끼고 있었으니, 서로의 체온을 느끼고 심장 소리를 듣기에 부족함 없는 자세였다.
“네에? 대답 안 해줄 거예요?”
“알면서 뭐 하러 계속 묻는 건데……. 못됐어.”
“네? 전 하나도 모르겠는걸요. 아시다시피 전 눈치가 없잖아요. 아가씨가 직접 말해주세요.”
“으…….”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고 하셨던 건 아가씨잖아요. 사람의 마음을 미루어 짐작하지도 말라고 하셨던 것도 아가씨고. 그렇죠?”
오드리는 과거 자신이 했던 말에 발목을 붙들렸다. 슬그머니 도망치고 싶었지만 셰비언의 팔이 지나치게 단단해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이런저런 시도는 죄다 귀여운 바르작거림이 됐을 뿐이었다. 결국 그녀는 귀뿐만 아니라 목과 얼굴까지 죄다 붉힌 채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야 그대가 이렇게 날 안고 있으니까 그렇지.”
“그거 너무 행복한 이유네요. 제가 뜨거운 것도 같은 이유예요. 아가씨가 제게 이렇게 안겨 있다는 게 믿어지질 않아서요.”
셰비언이 오드리를 더욱 가까이 끌어당겼다. 서로의 가슴이 닿고 이마도 닿았다. 긴 은빛 속눈썹이 나비처럼 팔랑거렸다. 얼음 낀 강 같은 옅은 푸른 눈동자에 낯선 열기가 어렸다.
오드리는 셰비언과 계속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곧 익숙한 감촉이 입술을 덮었고, 동시에 아무리 반복해도 익숙해질 것 같지 않은 감각이 화르륵 타올랐다.
몸이 붕 떠오르는 것 같았고, 머릿속에 가득했던 복잡한 생각들이 죄다 자취를 감췄다. 척추 아래쪽에 고인 열기가 등줄기를 타고 전신으로 퍼졌다. 등과 목을 받쳐 주는 팔이 더없이 든든하고 짜릿했다. 오드리는 자신도 모르게 깍지 낀 손을 풀고 셰비언의 목에 매달렸다.
“읏…….”
“셰비언? 아, 이런. 미안해. 괜찮아?”
셰비언이 무심결에 흘린 신음소리가 오드리의 정신에 확 찬물을 부었다. 오드리는 허둥지둥 일어나 셰비언의 목과 어깨를 살폈다. 비늘이 뽑혀 벌겋게 드러난 살점에 새로운 상처가 생겼는지, 비늘 사이로 피가 번지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얇게 새 비늘이 덮인 부분은 구멍이 있던 자리뿐이고, 다른 곳들은 연약한 살점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어떡해, 이거 내가 건드린 거지? 어어, 진짜 어떡하지. 인간의 약은 안 듣잖아. 응?”
상처를 살피는 오드리의 목소리에 점점 물기가 어렸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기껏 멈췄던 눈물을 다시 펑펑 쏟을 것만 같았다. 퐁퐁 솟는 피를 찍어내느라 오드리의 드레스 소맷자락이 엉망이 되어가고 있었다.
셰비언은 경솔한 제 입을 철썩 때리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그거 조금 긁힌 게 뭐라고 신음소리 하나 못 참아서 이렇게 분위기를 깼을까. 오드리가 해주는 걱정은 그게 뭐든 감사하고 기쁘지만, 지금만은 아니었다.
“별것 아니에요. 그냥 조금 긁힌 정도인걸요. 피도 금방 멎을 거예요.”
“그래도……. 피가 이렇게 계속 나는데 어떻게 그렇게 태평할 수가 있어? 기다려 봐, 뭐라도 싸맬 걸 찾아올게. 아, 소독약도 필요하지. 부디 다이앤이 깨어 있어야 할 텐데…….”
“아가씨, 제발.”
농밀하고 끈끈하던 분위기는 이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셰비언은 오드리를 붙들고 가지 말라 사정했지만, 오드리는 완강했다. 스치기만 해도 상처가 벌어지는 걸 어떻게 외면할 수가 있냐는 거였다.
“진짜 괜찮아요. 종이에 손가락 베이고 따갑다고 하는 것과 다를 게 없는 상처예요.”
“실은 내가 필요해서 그래. 아까 손톱에 보석 붙이다가 실수로 접착제가 묻어서 살이 조금 찢어졌는데……. 그게 따갑고 아파. 괜찮을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나니까 다시 벌어졌나 봐.”
“진짜요? 어디예요? 아까 언뜻 볼 땐 괜찮아 보였는데? 다이앤이 치료는 잘 해줬어요?”
셰비언이 깜짝 놀라 오드리의 손을 샅샅이 훑었다. 하지만 애초 다치지도 않은 상처가 찾아질 리가 없다. 오드리가 두 손을 얼굴 옆에서 쫙 펴고 혀를 낼름 내밀었다.
“……거짓말이었어요?”
“내가 그대를 걱정하는 마음을 좀 알아줬으면 싶어서. 언뜻 봐선 보이지도 않는 상처에 그대가 그리 놀라는데, 피 흐르는 상처를 본 나는 어떻겠어? 괜찮다는 말이 곧이곧대로 안 들려. 게다가 둥지를 벗어난 이후로 영 상처가 나아지는 걸 본 적이 없는데 말이야.”
“나 참…….”
“솔직히 대답해 봐. 둥지에서 나온 후로 상처가 조금이라도 아물기는 했어?”
셰비언은 그만 헛웃음을 지었다. 숨긴다고 숨겼는데 오드리에겐 그게 훤히 다 보였던 모양이었다. 오드리가 그만큼 관심을 갖고 자신을 살폈다고 생각하니 몹시 기쁘면서도 어쩐지 민망했다.
“아가씨 말이 맞아요, 아물지 않았어요. 하지만 충분히 버틸 만한 상황이라 나온 것도 맞아요. 비늘이 뽑힌 자리에 쉽게 다치는 연한 살이 노출돼 있으니 아가씨가 걱정하는 건 이해하지만, 비늘 몇 개 떨어진 것쯤은 별거 아닌 상처라는 제 말도 아가씨가 이해해 줬으면 좋겠어요. 그거 정말 별거 아니거든요.”
오드리는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이는 셰비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깨의 상처에서 흐른 피가 이젠 옷자락을 야금야금 적시고 있는데, 그는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어쩌다 종이에 손가락을 베여도 침 한 번 묻히고 나면 까맣게 잊어버리는 자신처럼 말이다.
하지만 셰비언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주기엔 어깨의 상태가 너무 나빴다. 은빛으로 매끄럽게 빛나야 할 비늘이 듬성듬성 빠진 자리가 지나치게 눈에 띄었다. 떨어져 나간 비늘이 한두 개라면 모를까, 이건 모른 체 할 수가 없는 개수였다.
“셰비언, 나는 인간이야. 인간은 쉽게 죽어. 가끔은 길바닥에 넘어져 무릎이 까진 걸로도 죽고, 가시덤불에 손가락을 찔린 걸로도 죽어. 그러니 내 눈에 그대의 상처는 충분히 크고 심각해 보여.”
차근차근 말하던 오드리는 카펫 한쪽이 피로 붉게 물든 걸 발견했다. 그 자리엔 은빛 비늘 여러 개도 함께 흩어져 있었다. 아까 보지 못했다는 게 어이없는 큰 자국이었다. 일단 인지하고나자 비릿한 피 냄새가 코를 습격했다.
“저리 피를 흘려놓고 아무렇지 않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셰비언이 슬금슬금 자리를 옮겨 핏자국을 그림자로 덮으려 했다. 발로 비늘을 슥슥 모아 밟고 긴 옷자락으로 어떻게든 핏자국을 가리려 하는데, 차라리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게 더 나은 시도였다.
“그런다고 감춰져?”
“진짜 별거 아닌데……. 아가씨, 생각해 보세요. 제 본래 덩치는 이 저택만 하다고요. 그만한 덩치에 피 이만큼이면 진짜 살짝 긁힌 것에 불과한 수준이에요.”
“용의 모습으로 다친 거면 이렇게 걱정도 안 해.”
“심장 절반을 뽑히고 옆구리가 절반쯤 갈라져도 사는 게 용인데, 인간의 모습으로 비늘 조금 떨어지고 구멍 좀 난 게 뭐가 대수겠어요. 그것도 조금 큰 상처였던 구멍은 벌써 싹 메워버렸는데요. 말씀드렸잖아요, 샤를레아에게 밀린 건 한꺼번에 이것저것 하느라 그런 거라고요.”
셰비언은 진심이었다. 비늘 몇 개 떨어진 것쯤이야, 관절 곳곳에 쐐기처럼 박힌 샤를레아의 마력이 주는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쪽이 더 아프다고 하소연하며 뒹굴 생각도 없었지만 말이다. 어차피 따로 치료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 시간과 공을 들여 밀어내야 하는 걸 굳이 말해서 걱정 끼칠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다행히 셰비언의 진심 어린 태도는 오드리에게 어느 정도 통했다. 당장이라도 다이앤을 부르러 나갈 기세였던 오드리가 조금은 머뭇대는 기색을 보였다.
“정말 괜찮은 거지?”
“그럼요. 빠진 손톱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나잖아요. 비늘도 그와 다르지 않아요. 이런 일 아니라도 숱하게 빠지고 다시 나는걸요.”
“……손톱이 빠지면 그거 되게 큰 부상이야.”
“아, 그래요? 하긴 인간은 용처럼 회복력이 좋지 않으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럼 뭘로 비유해야 하지? 머리카락? 하지만 인간들 중엔 대머리가 꽤 많던데……. 비늘이 그렇게 안 나는 일은 없거든요.”
풋. 대머리 얘기에 오드리가 웃음을 터뜨렸다. 실컷 울다 웃음을 터뜨린 게 하도 민망하여, 오드리는 괜히 얼굴을 만지작거리며 눈물 자국을 지웠다. 겸사겸사 번진 화장도 좀 닦고.
셰비언은 오드리가 웃음을 보였다는 것만으로도 그저 기쁠 따름이었다. 그가 가볍게 발을 두드리자 바닥에 고여 있던 피가 금빛으로 빛나며 사방으로 흩어지더니, 방 곳곳에 자리를 잡고 쑥쑥 자라났다.
위로 솟아오른 금빛은 천장 부근에 이르러 수십 수백의 가지로 갈라져 뻗어나가며 서로 얽혀 천장을 죄다 가렸고, 빛이 가라앉자 그 끄트머리에서 손톱만 한 하얀 꽃들이 와르르 피어났다. 체리꽃이었다.
“아가씨가 좋아하는 체리꽃이에요. 올해는 구경 못 했잖아요. 바빴던 데다 장례도 있었고 괴물 사태도 있었고…….”
오드리가 손을 뻗자 나뭇가지가 스스로 흔들리더니 꽃잎을 떨어뜨렸다. 흰 꽃잎이 오드리의 뺨과 어깨에 떨어져 달라붙었다.
“눈 구경은 실컷 했는데.”
“눈 구경과 꽃구경이 같나요? 저는 아가씨와 함께 계절을 즐기고 싶었다고요. 시간과 계절이 어우러진 아름다움은 나름 특별한 맛이 있단 말예요. 공간에서 즐기는 거랑은 좀 다르죠. 아가씨, 제가 만든 체리꽃 군락이 아름답지 않으세요? 영 마음에 안 들어요?”
셰비언은 입을 삐죽대며 바닥에 떨어진 비늘을 주워 모았다. 작고 동그란 은빛 비늘은 마치 보석처럼 은빛으로 반짝거렸다. 다이아몬드보다는 우아하고 진주보다는 화려한, 독특한 느낌의 광채였다.
“설마 그럴 리가. 눈을 못 떼게 아름다워. 하지만……. 셰비언, 다쳤는데 이렇게 마력을 마구 써도 돼? 작은 상처라도 치료에 신경 써야지.”
“용의 피엔 마력이 풍부해요. 3차 괴물 사태를 일으키고 싶은 게 아니라면 이렇게라도 쓰는 게 낫죠. 아가씨, 이리 와보세요.”
셰비언이 오드리의 머리핀을 떼어내자 예쁘게 틀어 올렸던 긴 머리칼이 와르르 쏟아졌다. 오드리가 깜짝 놀라 쏟아진 머리칼을 부여잡았다.
“가만히 계세요.”
그가 조금 전 주워 모은 비늘들을 오드리의 머리 위에 떨어뜨렸다. 금빛 마력이 실이 되어 데굴데굴 굴러 떨어지는 비늘을 알알이 엮어 오드리의 머리를 감쌌다. 얼핏 투박한 것 같아도 단정하고 정교한 머리 장식이 순식간에 완성됐다.
“짠, 선물 완성!”
“으응? 생일 선물은 얼마 전에 받았잖아. 웬 선물?”
“아가씨와 처음으로 함께 보내는 밤이잖아요. 그 기념품이죠.”
오드리의 뺨이 확 달아올랐다. 정말이지, 본인이 말할 땐 괜찮았는데 다른 이의 입으로 들으니 민망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몸매가 쉽게 드러나는 얇고 팔랑팔랑한 드레스가 괜히 불편해 자꾸만 뒷걸음질을 하게 된다.
셰비언이 그런 오드리의 어깨를 잡고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체구가 작은 오드리는 그의 품에 완전히 폭 안기고 말았다. 그에게선 비릿한 피 냄새와 함께 서늘한 겨울 냄새가 났다.
“제가 멀쩡하다는 걸 아가씨도 인정하셨으니, 이젠 진짜로 같이 달구경을 해 볼까요?”
“으음, 그게……. 오늘은 그대가 다치기도 했고, 또…….”
“도망은 안 돼요.”
귓가에 닿는 숨결이 몹시 간지러웠다. 오드리는 셰비언이 이끄는 대로 달빛 비치는 창가에 섰다. 하늘에 둥실 떠오른 달이 대단히 아름답건만, 그쪽엔 고개도 안 돌아갔다. 그녀는 달빛을 품고 빛나는 은발을 홀린 듯 바라보다 셰비언의 목에 팔을 감았다. 그의 체온은 끌어안기 딱 좋게 따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