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권-chapter 33. 레이디 오드리 (36/62)

목차

chapter 33. 레이디 오드리

chapter 34. 달구경

chapter 35. 뤼나소

chapter 36. 힘겨루기

chapter 37. 질투와 거짓말

chapter 33. 레이디 오드리

「새로운 마법도구를 개발하면 반드시 일정 기간 이내에 마법사협회에 작용원리와 설계도를 제출해야 한다. 어느 나라든 예외는 없다. 이 규정을 어기고 멋대로 마법도구를 만들어 쓰다가는 거센 철퇴를 맞는다. 이 규정에 의문을 가진 이들은 아주 많으나, 마법사협회는 해명요구에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셰비언과 오드리가 돌아온다는 소식은 브란젤을 강타했다. 작년에 오지 않은 태풍이 소문의 형태로 몰아닥친 것 같았다. 도시 복구에 전념하느라 입을 다물었던 사람들이 지지배배 떠들기 시작했고,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고 미적대던 일들이 빠르게 진행됐다.

먼저 샤를레아에 대한 재판이 있었다. 샤를레아가 다나를 딸처럼 아꼈다는 증언이 나오자, 법원은 직계 친족의 복수를 인정하는 오랜 관행이 있었음을 들어 샤를레아의 죄를 조각냈다.

누군가는 그 둘이 진짜 친족이 아니고 그 관행이 깨진 지가 언젠데 이런 판결이냐며 법원의 면피성 판결을 조롱했지만, 그렇다고 인간이 아닌 용에게 인간의 법으로 죄를 물을 순 없는 노릇이라는 주장도 만만치 않았다. 막말로, 사형 판결을 내린들 대체 누가 무슨 수로 사형을 집행할 것인가?

사실이 어떻건 간에 샤를레아의 죄가 조각났으니 그만큼 2차 괴물 사태의 원인을 제공한 스와디에게 원망이 쏠리는 게 자연스러울 텐데, 여론은 의외일 정도로 반으로 갈렸다.

스와디를 옹호하는 쪽은 스와디가 마지막에 목숨을 불살라 마법진의 빛기둥을 다시 세웠다는 걸 이유로 들었다. 이미 죗값을 치렀는데 뭘 그리 욕하느냐고 말이다. 심지어 괴물을 잡는 데에 누구보다 열성적이었던 스와디의 과거 행적을 들먹이며 다나가 1차 괴물 사태를 일으켰던 문제의 마법사들과 교류가 있었던 게 아니냐고 의심하는 자들도 나왔다. 그렇지 않고서야 스와디가 살인까지 했겠느냐고 말이다.

물론 반대파가 보기엔 그만큼 웃기는 논리가 없었다. 그들은 다나가 남긴 연구 업적이 분명하게 남아 있거늘, 어떻게 살인자의 일방적인 변명을 믿고 위인을 모욕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무엇보다 애초 스와디가 다나를 죽이지 않았더라면 2차 괴물 사태 따위는 오지도 않았을 거라는 게 너무 명확하다며.

사람들은 마주치기만 하면 샤를레아와 스와디의 이야기로 침을 튀겼다. 새벽시장에서, 작은 카페에서, 일거리 쌓인 공사장에서…….

진실을 알고 있는 소수의 사람들이 보기엔 참 무의미한 토론이었다. 스와디가 다나를 죽여서 2차 괴물 사태가 일어난 건 맞지만, 만약 다나가 살아 있었다면 그땐 그녀가 2차 괴물 사태를 일으켰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그들은 어느 쪽에도 끼지 않고 대중의 무지를 비웃었다.

그러나 어떤 입장의 사람이든 셰비언을 두려워하는 건 같았다. 인간의 도시와 목숨 따위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겠느냐는 용을 어떻게 무시할 수가 있을까. 지난여름, 왕궁마법사들이 고치는 데에 거의 한 달 이상을 썼던 담수저장고와 정화마법도구를 한 시간 만에 고쳐 낸 작자였다. 피부에 확 와 닿는 압도적인 격차는 시기와 질투보다 경외와 존경, 그리고 공포를 불러 일으켰다.

대관식은 일정만 잡아둔, 그리하여 아직 권위가 부족한 가스트로는 그 공포에 기대어 선언했다.

“아르젠 남작을 백작으로 승작하겠다.”

공작의 작위는 왕족의 것. 후작의 작위는 공신의 것. 일반 귀족이 악을 쓰고 올라갈 수 있는 작위의 한계가 백작이다. 아무리 작위의 가치가 예전만 못한 시대라지만 파격적인 처사인 건 확실했다.

“전하, 아르젠 남작은 용입니다. 용이 백작의 작위를 받는다고 기뻐하겠습니까?”

“맞는 말일세. 그럼 그가 왜 남작위를 받았는지 아는 사람 있으면 대답해 보게. 무의미한 꼬투리잡기로 한 달이나 흘려보냈으면 충분하지 않나? 그가 돌아올 때가 되었다는 걸 다들 잊은 모양이야.”

무의식적으로 뇌리 밖으로 밀어내던 셰비언의 귀환이 정면으로 언급되자 다들 가스트로의 눈을 피했다.

“계속 도망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란 걸 뻔히 아는 사람들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군. 다들 알다시피 아르젠 남작은 헨젤 백작영애와 연인 관계일세. 내가 듣기로, 헨젤 백작영애가 아르젠 남작의 머리꼭대기에 앉아 그를 부린다지?”

인간의 예의와 규칙은 자신이 알 바 아니라며 가스트로의 사자를 내쫓던 셰비언이 허술한 보고서나마 올리고 브란젤의 수도시설 일체를 고친 건 오로지 오드리 때문이었다.

“아르젠 남작을 백작으로 승작한 다음엔 곧바로 오드리 헨젤 백작영애와 결혼을 시킬걸세. 둘 다 백작이니 가문의 격도 치우침이 없지. 이건 헨젤 백작도 동의한 사항이야.”

“아, 그래서 가문의 격을 맞춰주시려고 승작을…….”

“전하의 고심을 이제야 이해했습니다.”

파격적인 승작에 대한 불만이 거품처럼 사그라졌다. 가스트로는 약간의 여유를 되찾았다.

“아르젠 남작에게 백작위는 의미가 없어도 헨젤 영애가 연인에서 정식 아내가 되는 건 의미가 있겠지. 연인과 정식으로 맺어지는 것이니 헨젤 영애에게도 좋은 포상이 될 것이고.”

멜브란트 유수의 명문가인 랄리우스와 헨젤의 피를 모두 이어받은 오드리 헨젤이라면 용이 남편이 되더라도 잘 제어할 것이다. 헨젤 백작은 그런 기대가 담긴 시선들을 온몸으로 받으며 표정 관리에 힘을 기울였다. 조금만 긴장을 늦추면 자신도 모르게 욕을 퍼부을 것 같았다.

제 자식 아니라고 다들 편한대로 생각하는군.

그러나 헨젤 백작의 심정과는 상관없이 회의장은 훈훈하고 좋은 공기로 가득 찼다. 꾸역꾸역 미뤄왔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았다는 기쁨과 안도가 사람들을 감쌌다.

“전하, 그거 참 우습고 재미있는 말씀을 하십니다. 아르젠 남작과의 결혼이 어떻게 레이디 헨젤에게 좋은 포상이 됩니까?”

오스미다가 회의장 안으로 걸어 들어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레이디 헨젤은 자신의 마력으로 괴물을 유인해 민간의 피해를 줄이고 괴물 진압을 도왔으며, 자신의 목숨을 걸고 시계탑의 마법진을 다시 발동시켰습니다. 그런데 그런 공적에 대한 포상이 고작 결혼?”

“애초에 승작과 결혼을 해결책으로 제시한 건 후작이오.”

회의장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오스미다의 등장 자체보다 가스트로가 사용한 후작이라는 호칭에 더 충격을 받았다. 몇몇은 벌떡 일어나기까지 했으나 거기까지였다. 오스미다는 선왕비이자 일테니아 후작이었다. 멜브란트를 이끄는 핵심 계층으로서 그 정도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드러내 봐야 수치밖에 당할 게 없었다.

“일테니아 후작님은 회의 출입을 제한 받으셨을 텐데요.…….”

“그거야 선왕 시절의 일이죠. 지금 선왕께서는 차갑게 식어 무덤에 계시잖습니까.”

“왕자전하의 대관식도 아직인데 아주 기세등등하군. 전하를 어떻게 구워삶은 거지?”

“그걸 저한테 물으시면 제가 어떻게 압니까…….”

목소리 낮춰 쑥덕대는 말들이 들리지 않을 리도 없는데, 오스미다는 귀가 먼 사람처럼 태연한 신색으로 회의장을 가로질렀다. 부쩍 더워진 날씨와 최근의 유행에 맞춰 남부식으로 재단한 얇은 옷감이 물결처럼 찰랑거렸다.

사람들은 그녀가 의자에 앉고 나서야 회의 초반부터 빈 자리가 하나 있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너무 오랫동안 비워져 있어 누군가의 몫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던 자리, 일테니아 후작의 자리였다.

귀족원이 해체되고 국정운영의 주체가 소수의 귀족과 고위 관료로 교체되며 국정회의가 정착한 과정에 일테니아 후작의 공로가 적지 않았다. 그 보상으로 내려진 자리였다. 오스미다는 어제도 그제도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제 자리를 찾아 앉았다.

“그거야 아르젠 남작을 위한 포상이었지요. 그게 레이디 헨젤에게도 포상이 될 거라고 여긴 건 전하의 헛된 착각이십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모르겠군. 가망 없는 연인관계에 결실을 맺게 해주는 게 왜 포상이 아니라는 건가? 설마 후작은 아르젠 남작 혼자서 헨젤 영애를 탐내고 있는 거라고 말하고 싶은 게요?”

“그럴 리가 있습니까. 다만, 이 나라의 수뇌부가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가난해졌을까 놀라워서 말이죠.”

오스미다가 차분하게 오드리의 공적을 읊었다. 도시 곳곳에 숨어 폭력을 휘두르던 괴물을 끌어 모아 피해를 극적으로 줄이고 진압을 도왔으며, 꺼졌던 시계탑의 마법진을 다시 발동시켜 시민들을 불안에서 구해냈다.

“물론 레이디 헨젤이 없었더라도 괴물은 모두 소탕했을 테고 시계탑의 마법진이 아니어도 인간은 서로를 믿고 강해질 수 있는 종족이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레이디 헨젤이 아니었다면 브란젤의 복구가 적어도 두 배 이상 늦어졌을 거라는 건 확실하지 않습니까?”

1차 괴물 사태와는 달리 도시 구석구석으로 괴물이 파고들었던 게 2차 괴물 사태였다. 게다가 2차의 괴물들은 공격성이 강해 자신보다 약한 인간이 있으면 덤벼들기를 주저하지도 않아 피해가 컸다.

오드리가 자신을 미끼로 걸지 않았더라면, 그 괴물들을 일일이 찾아내 소탕하고 시신을 처리하는 시간이 몇 배는 더 필요했을 게 분명했다. 당연히 흉년을 견디지 못하고 올라온 사람들이 이토록 쉽게 정착하지도 못했을 것이고.

“어쩌면 급격히 늘어난 인구와 채 치우지 못한 시체조각, 뜨거워진 날씨가 맞물려 전염병이 창궐했을지도 모를 일이이지요. 대단한 공적이 아닙니까?”

“지나친 가정입니다!”

“카즈네 공작, 이건 합리적인 추론입니다. 이 탁자에 앉을 자격이 있는 분들은 모두 이 정도 추론은 할 수 있는 사람들일 텐데, 이상하게 다들 입을 다물고만 있군요. 레이디 헨젤이 어린 귀족영애라고 그 큰 공적을 모른 체하다니, 어쩜 이렇게 마음이 가난하신지 모르겠습니다.”

졸지에 마음이 가난하고 옹졸한 사람이 된 회의 참석자들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가운데, 오스미다가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큰 공적에 큰 포상이 내려지지 않으면 누가 왕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습니까? 전하, 이 정도 공로라면 마땅히 작위를 주어야 합니다. 레이디 헨젤에게 작위를 주시지요.”

회의장이 벌집을 쑤신 듯 시끄러워졌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미성년 귀족 영애에게 작위라니, 선왕께서 들으시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시겠습니다! 귀족법 위반입니다! 작위를 그렇게 쉽게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등등.

가스트로는 품위를 잊은 소음 가운데서 오스미다를 약간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 오스미다가 회의장에 들어오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소란이 일 것은 예상했지만, 그녀가 일테니아 후작인 이상 그 정도는 어떻게든 무마할 자신이 있어 회의 참석을 허락했다. 한데 이렇게 대놓고 사람들의 심기를 거스르는 제안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는 귀족과 관료들이 떠들어대는 말을 귀담아 듣는 척, 종이에 슥슥 글을 휘갈겼다. 그리곤 바로 곁에 앉은 오스미다에게 만년필과 함께 슬쩍 밀어냈다.

- 어머니, 이거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 내가 뭘 너무했다는 거니?

- 이 난리가 날 줄 뻔히 알면서 그런 제안을 하시면 어떡합니까? 설마 정말 될 거라고 생각하고 하신 말씀은 아니실 거고……. 대체 이런 짓을 하신 이유가 뭡니까? 아들한테만 살짝 알려주시죠.

- 왜 내 제안이 진심이 아니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구나. 헨젤 영애는 충분히 작위를 받을 만한 공로를 세웠어.

“어머니, 적당히 좀 하세요.”

가스트로는 웃는 낯에 약간의 한숨을 담아 오스미다를 타박했다. 하지만 웃음으로 맞받아칠 줄 알았던 오스미다는 가스트로가 질릴 정도로 진지한 표정이었다. 만년필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 관절 부위가 하얗게 변했다.

- 적당히? 너는 내가 설마 적당히 해서 일테니아 후작위를 받았을 거라고 생각하니?

- 헨젤 영애는 어머니의 딸도 조카도 아니잖아요.

- 딸도 조카도 아니지만 아끼는 아가씨지. 앞으로 내 동지가 되어줄 예감이 드는 사람이기도 하고.

동지? 가스트로의 안색이 확 변했다. 오스미다가 귀족 상속법 개정을 목적으로 몇 년을 귀족들과 대립하다 마지막 회의 때 탁자를 쪼개고 나갔다더라는 얘기는 그도 들어본 적이 있었다. 세월이 지나 과장된 일화일 거라고 치부하기엔 오스미다의 성격과 추진력이 만만치 않다는 걸, 가스트로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 어머니, 대체 무얼 하시려고?

“발레리, 가져 온 걸 보여드리렴.”

오스미다가 뒤에 달고 왔던 시녀를 불렀다. 웬만한 남정네들만큼 키가 훤칠한 시녀가 품에 안고 있던 큰 종이를 회의장 탁자에 확 펼쳤다.

그건 포스터 형식으로 인쇄된 한 장의 그림이었다. 흰 케이프 코트를 걸친 초록 머리칼의 여성이 거침없이 내달리는 거대한 검은 말에 올라타 고삐를 잡고 있었다. 풀어헤친 머리칼이 구불거리며 화면을 가득 채웠다.

그녀의 머리 뒤로 복잡해 뵈는 금색 문양이 후광처럼 비춰졌다. 온통 어둡고 컴컴한 그림 속에서 문양의 금빛과 케이프 코트의 흰색, 무엇보다 여성의 빛나는 초록색 눈동자가 보는 이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섬세한 선과 대비되는 대범한 색채 사용이 아주 압권이었다. 그림은 약간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듯한 구도였는데, 또렷하게 보이는 턱선에서 여성의 대담함과 단호함이 더욱 도드라졌다.

그림의 효과는 절대적이었다. 회의장 안을 가득 채웠던 소란이 한순간에 가라앉았다. 포스터 속 여성이 누군지 알아보지 못한 사람은 이 회의장 안에 아무도 없었다.

“사나흘 전부터 뿌려진 이 포스터가 그렇게 인기라는군요. 붙이기만 하면 사람들이 자꾸 떼어가서 아침이면 새로 붙여야 한다고요.”

“참 잘 그린 그림이긴 합니다. 화가가 누구인지 몰라도 저도 한 장 갖고 싶을 정도군요. 하지만 이게 헨젤 영애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

어떻게든 트집을 잡아보려던 귀족 한 명이 오스미다의 기세에 눌려 입을 다물었다. 오스미다가 그림 아래에 희미하게 깔린 금빛 안개를 툭툭 두드렸다.

“레이디 헨젤이 자신을 미끼 삼아 괴물을 끌어내는 걸 모두가 봤는데, 그 영웅적인 행동의 보상이 고작 결혼? 여러분, 멜브란트의 수뇌부가 언제부터 이렇게 얄팍하게 굴게 된 게요? 보상은 보상답게 줍시다.”

“애초 신분 차가 심해서 이뤄지기 힘들었던 결혼입니다. 충분히 보상이 되죠.”

“그 상대가 용이고, 그 용이 자신에겐 의미도 없는 인간들의 도시와 목숨을 굳이 지킨 이유는 레이디 헨젤이 그를 아끼기 때문이라고 대놓고 말한 전적이 있는데도? 용이 원하는 건 레이디 헨젤일 뿐 승작 따위가 아니라는 걸 우리만 아는 줄 압니까?”

오드리가 괴물을 이끌고 달린 것과 셰비언이 쓰러진 오드리를 소중하게 안아들고 카즈네 공작에게 독설을 퍼부은 것, 그리고 구름보다 흰 용이 오드리를 등에 태우고 셰비언 성벽을 향해 날아가는 장면을 본 사람의 머릿수를 합치면 브란젤 시민 전체의 숫자와 비등할 것이다.

브란젤 시민들의 인식 속에서 오드리와 셰비언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된 지 이미 오래였다. 그리고 그 둘 중에서는 오드리의 인기가 셰비언보다 약간 더 높았다. 아무래도 명백하게 다른 종족인 용보다는 인간 쪽이 더 친근하고 마음이 쓰이는 것이다.

당장 오스미다가 입고 나온 남부식 드레스만 해도 그랬다. 작년에도 유행이었지만 그래도 일부 개방적이고 대범한 아가씨들만 입고 다니던 옷이었는데, 올해는 선왕비인 오스미다가 입고 다녀도 괜찮을 정도로 대유행이었다. 그걸 단순히 평년보다 뜨겁고 건조한 날씨 탓이라고 치부하고 넘기기는 어려웠다. 이 현상의 원인이 누구인지 모두가 알고 있었다.

“레이디 헨젤을 용에게 팔아넘겼다고 수군대는 말들을 그렇게나 듣고 싶은가 보지요?”

오스미다의 천박하고 정확한 표현에 회의 참석자들의 낯빛이 붉게 달아올랐다. 여기저기에서 헛기침이 울리는 와중, 돌연 헨젤 백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작님, 거 참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귀족으로 태어나 정략결혼을 하지 않고 사랑하는 연인과 결혼하는 겁니다. 오드리 본인이 선택한 상대인데, 그가 용이라는 게 대체 무슨 문제가 됩니까? 아르젠 남작이 오드리가 아니면 인간의 도시 따위 아무 의미 없다고 할 정도로 그 애를 사랑한다는 게 그리 유명하다면, 누구든 잘됐다 축복하며 박수를 쳐 주지 않겠습니까?”

“맞습니다. 아르젠 남작과 헨젤 영애가 연인이라는 걸 멜브란트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팔려갔다니요? 누가 그런 말을 하겠습니까? 우리가 뭐 싫다는 사람들 억지로 결혼시키겠다고 한 것도 아니잖습니까.”

“서로 좋다는 연인에게 후작님께서 말씀이 심하셨습니다.”

헨젤 백작이 반대의사를 밝히자 여기저기에서 동조하는 말이 튀어나왔다. 오스미다가 예상한 그대로였다. 오스미다는 다시 한번 포스터를 두드렸다.

“레이디 헨젤의 의사는 중요하지 않은가 봅니다? 그들이 연인이었던 건 2차 괴물 사태 전이었는데? 지금은 마음이 달라졌을 수도 있는데요. 사람이었던 상대가 용이 됐는데 그녀의 말도 들어봐야지요.”

오드리에게 줄 포상이 사랑하는 상대와의 결혼이라면, 그 상대가 아직도 아르젠 남작인지 확인해 봐야 하는 거 아니냐. 정당한 지적이었으나 그게 먹힐 리가 없다.

“그 뒤에도 아르젠 남작이 헨젤 저택에 며칠을 머물렀지 않습니까. 그동안 헨젤 영애가 남작을 내쳤다는 말은 못 들어봤습니다.”

“신년제 때는 그 둘이 아기 손님맞이도 함께 했다는데 그 정도면 의사를 밝힌 거나 마찬가지죠.”

“정 포상이 더 필요하다 싶으면 선왕비께서 따로 은사를 내려주시지요. 결혼 드레스를 맞춰주신다든가, 축복을 내려주신다든가……. 그 정도면 명예로우면서도 적당한 포상이 되지 않겠습니까? 귀족 영애에게 작위를 주라는 건 너무 전례 없는 말씀이셨습니다.”

전례 없는 말. 카즈네 공작의 발언에 잘 닫아두었던 오스미다의 뚜껑이 살짝 열리고 말았다.

“전례가 없다? 전례가 왜 없지요? 내가 있는데? 공작의 눈에 내가 가진 후작위는 장식으로 보여요? 전례 없기로는 공작이 지금 이 자리에 나와 있는 게 더 전례 없지요!”

본래 카즈네 공작은 피로 계승되는 게 아니라 왕의 형제가 일시적으로 맡아 운영하는 작위였다. 따라서 왕이 사망하고 장례가 끝나면 현 공작은 곧바로 작위를 새 왕의 형제에게 넘겨주고 일선에서 물러나는 게 통례였다. 다만 가스트로는 외동이라 현 공작의 아들이 소공작인 데다 대관식은 일정만 잡힌 상황이라 그가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분명 전례가 없는 경우이긴 했다.

카즈네 공작과 오스미다 사이에서 불꽃이 튀었다. 카즈네 공작은 제 애매한 처지는 뒷전으로 미뤄두고 오스미다를 공격했다.

“그때 후작은 귀족 영애가 아니었잖습니까. 이미 결혼해서 왕비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어떻게 헨젤 영애와 똑같이 비교를 하겠습니까? 게다가 계승자 없는 가문을 물려받는 것과 새로 작위를 받는 건 완전히 다른 일이지요.”

“그럼 물어봅시다. 만약 레이디 헨젤이 미혼이 아니라 기혼이었다면, 누군가의 부인이었다면, 공작은 어떤 보상을 주는 게 온당타 하실 거요?”

“그야 남편을 승작시켜주거나, 가문에 세금 혜택 등의 보상을…….”

“왜? 어째서? 레이디 헨젤에게도 물려받을 가문이 있는데, 왜 나와는 대우가 다르지요? 전례가 그리 중요하다면 이번에도 마땅히 전례에 따라야지 않겠어요?”

반쯤 몸을 일으킨 오스미다가 헨젤 백작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헨젤 백작, 지금 랄리우스 후작은 누구지요? 헨젤 백작부인은 죽는 순간까지 레이디 랄리우스였으니 설마 헨젤 백작 본인은 아닐 테고……. 두 가문이 결혼으로 결합하더라도 그 다음 대에 자식들에게 따로 작위를 나누어주는 일이 드문 것도 아닌데, 어째 새로운 랄리우스 후작이 나왔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건…….”

“아직 어려서 그렇다는 말은 변명이지요. 작위만 주고 관리는 백작이 해도 충분한데. 계승에 뭔가 특별한 조건이라도 걸려 있었던 건 아닌가요? 그렇지 않고서야 멀쩡한 아들이 아직까지 후작위를 잇지 않은 이유가 뭐지요?”

헨젤 백작은 타우레드 후작의 경고를 떠올렸다. 밀리나의 몇 안 되는 인맥들이 헨젤 부부의 결혼계약서 내용을 공유하고 있다던, 그 말.

“나이 제한이 있습니다. 성년이 되어야 작위를 가질 수 있죠.”

“백작, 잘 떠올려 보세요. 나는 왕비로서 레이디 랄리우스의 유언장에 공증을 섰어요. 아무리 내가 나이를 먹고 세월이 지났더라도 그 파격적인 내용을 온전히 잊기는 어려웠습니다.”

“…….”

“특히 랄리우스 후작위 계승에 관한 건에 대해서는 더.”

“성년 조건 정도만 해도 충분히 파격적입니다. 혹시 열 살도 되지 않은 딸에게 만탈락을 맡기겠다는 부분과 헷갈리고 계신 건 아닙니까?”

이 회의장 안에서 헨젤 백작에게 꼬투리가 잡힌 귀족은 그렇지 않은 자보다 훨씬 많았다. 그들은 오스미다의 편을 들어 헨젤 백작의 위세를 꺾는 트집 잡기에 동참할 것인지, 아니면 헨젤 백작의 편을 들어 자신의 치부를 감출 건지 저울질을 시작했다.

넓디넓은 회의장에 오스미다와 헨젤 백작 단둘이 남은 것처럼 설전이 오갔다.

“내가 나이를 먹어 기억력이 떨어진다고 말하고 싶으신 게요?”

“유언장 사본이라도 가져다 드려야 제 말을 믿으실 것 같아 한 말입니다. 굳이 랄리우스 후작위를 도마에 올린 저의를 제가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마땅히 아들에게 가야 할 작위를 딸에게 주라는 압력이라도 넣고 싶으셨던 거라고 생각하면 됩니까?”

“이왕 가져올 거면 원본을 보고 싶소만. 내 기억력이 멀쩡하다는 걸 증명해야지요.”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닌데 꼬투리 잡기가 너무 심하십니다. 예전에 후작께서 작위 계승은 성별 상관없이 태어난 순서대로 해야 한다며 귀족법 개정을 추진하셨던 게 떠오르는데, 그건 제 착각입니까?”

오스미다의 과거가 수면 위로 떠오르는 순간, 귀족들의 저울이 헨젤 백작에게로 확 기울었다. 오스미다와 헨젤 백작 모두 그걸 알았다.

“결혼만으로는 부족하다 계속 말씀하시니, 훈장은 어떻습니까? 그만하면 미성년 귀족 영애에게 충분한 영광이지요.”

“그런 껍데기뿐인 영광……!”

“훈장 괜찮군.”

가스트로가 갑자기 끼어들어 오스미다의 말을 잘랐다. 그리곤 목소리가 계속 커지는데도 중재할 생각이 없어 보이던 조금 전과는 완전히 다른 태도로 회의를 이끌었다. 자연히 오스미다는 뒤로 밀려났다. 때문에 포상 내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셰비언과 오드리에게 각각 금월계수 훈장을 추가로 주는 걸로 마무리됐다.

회의가 끝나고 삼삼오오 무리를 지은 사람들이 빠져나가는데, 거의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오스미다가 막 나가려는 헨젤 백작을 불러 세웠다.

“헨젤 백작, 잠깐 나 좀 보세.”

“또 랄리우스 후작위 얘길 하시려고 그러십니까? 그거라면 조만간 제가 찾아뵙고…….”

“날 찾아올 거면 그땐 유언장 사본을 가져오게. 백작이 가진 사본은 내가 가진 사본과 뭐가 다른지 비교대조를 해 보고 싶거든. 이왕이면 원본을 가져오는 게 가장 좋겠지만 말이야.”

“전하, 지나치십니다. 그 말씀은 제가 마치 아내의 유언장을 조작하기라도 했다는 것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제대로 들었군. 다행이야, 백작의 귀가 정상이라서.”

“이건 헨젤 가문에 대한 모욕입니다.”

“아직 모르는군. 백작, 백작은 내가 조금 전에 테이블에 펼쳐 놓은 게 레이디 헨젤을 그린 포스터라는 걸 감사해야 할 처지야. 알겠나?”

오스미다가 일부러 도발하듯 비꼬았음에도 헨젤 백작의 표정은 별반 달라진 게 없었다. 가면을 씌워놓은 듯 서늘하고 차갑기만 했다.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회색 눈동자가 꼭 뱀을 연상시키는 통에, 오스미다는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자식들이 그를 닮지 않았다는 게 정말 다행이었다.

“전하, 말씀 다 하셨으면 이만 가봐도 되겠습니까?”

“내가 잠깐 보자 했을 텐데.”

“송구합니다. 제가 일이 너무 많아 이렇게 흘려보내는 시간이 너무 아까워 그랬습니다.”

“그럼 그 시간을 내가 조금 더 뺏도록 하지. 따라오게.”

헨젤 백작은 짜증을 눌러 삼키고 오스미다의 뒤를 따랐다. 발레리인지 뭔지 하는 시녀가 서류를 들어주겠노라 손을 내밀었지만 거절했다. 시녀답지 않게 크고 거친 손이 어쩐지 거슬렸다.

‘찻주전자가 어울릴 손이 아닌데?’

아닌 게 아니라 툭툭 불거진 손마디며 검게 착색된 손바닥 굳은살 등이 딱 검을 안고 사는 기사들과 흡사했다.

“내 시녀에게 관심이 있나?”

“아닙니다.”

“놀잇감으로 내어주기엔 내가 많이 아끼는 아이야. 헨젤 백작부인 정도라면 보내줄 수도 있는데, 어떤가?”

“농담은 사양하겠습니다.”

“재미없기는. 그러고 보면 자네도 참 괴상한 사람이야. 가문에 부인의 손길이 필요한 부분이 아주 많을 텐데, 어떻게 그 긴 시간 동안 재혼을 안 하고 다른 가문에 시집 간 누이에게 살림을 죄다 맡겨놓았던 건지…….”

“제 결혼에 대해 말씀하시려고 보자 하신 겁니까?”

“설마 그럴 리가 있나. 자, 들어오게.”

오스미다가 헨젤 백작을 제 응접실로 들였다. 헨젤 백작은 꼭 곰이 사는 동굴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것만 같은 기분으로 발을 뗐다.

오스미다의 응접실은 얇은 커튼에 한 차례 걸러진 햇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허공을 맴도는 먼지를 세며 무료하게 앉아 있던 소년이 인기척을 느끼고 벌떡 일어났다. 짧게 자른 검은 고수머리와 봄의 새싹처럼 연둣빛으로 반짝이는 눈동자가 인상적인 소년이었다.

“아버지?”

“……하델. 네가, 여기, 왜…….”

오스미다는 차가운 뱀 같던 사내의 표정이 와장창 무너지는 꼴을 즐겁게 감상했다. 근래 몇 년을 통틀어 손꼽히게 즐거운 순간이었다.

* * *

오드리는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확 달려드는 더위에 미간을 찌푸렸다. 하긴 벌써 7월 초순이니 한창 더울 때이긴 한데, 바짝 말라 먼지 냄새마저 나는 공기가 어째 만탈락과 비슷했다. 이래서야 브란젤로 돌아오자마자 여름 휴가지를 알아봐야 할 지경이었다.

“작년에도 이러더니, 올해도 가뭄인가?”

“여기 여름은 본래 이런 거 아니었어요?”

“아니야, 브란젤의 여름은 덥고 습하고 찝찝하기로 유명해. 사흘에 한 번은 비가 오는 게 정상인데……. 이래서야 올해 농사도 망하겠는걸.”

“하랄이 날씨의 신이라더니, 수확제 때 제물만 실컷 받아먹고 일은 안 하는 모양이죠.”

셰비언은 오드리에게 살랑살랑 부채를 부쳐 주며 느긋하게 주변을 돌아보았다. 여름 휴가가 시작될 시기인 데다 괴물 사태가 일어나고 몇 달 지나지 않은 때니 사람이 없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사람이 많았다.

“정말이지……. 인간의 적응력이란 놀랍네요. 어떻게 이렇게 태연하게들 돌아다닐까?”

“굶어죽는 것보다 무서운 게 세상엔 별로 없거든요. 브란젤 말고 다른 곳은 식량 부족으로 난리인데, 그래도 여긴 돈이 있으면 먹을 걸 살 수 있잖아요. 와, 가로등 싹 갈아치운 거 봐. 끝내준다.”

오드리가 만탈락의 식량 사정을 걱정하고 셰비언이 인간의 적응력에 감탄하는 동안, 아이샤의 관심은 싹 교체된 가로등에 쏠렸다. 그녀는 역사 곳곳에 배치된 신식 마법도구를 보고 거의 눈물이라도 흘릴 듯한 표정이 되었다.

역사에 편리함과 호화로움을 더하는 기존 마법도구들은 설치된 지 너무 오래돼서 자꾸 고장이 났지만, 위에서는 돈이 많이 드는 교체 대신 왕궁마법사들에게 잦은 수리를 강요했었다. 그러다 2차 괴물 사태 당시에 마법진의 충돌을 겪으면서 수리도 못 할 지경이 되자 결국은 바꾼 것이다.

“이제 수리하러 안 와도 되겠다!”

“그건 몰라요. 딱 보니까 저거 상단 창고에 쌓여 있던 구식 모델을 한꺼번에 재고처리 한 건데……. 솔직히 말해서 수명 그렇게 길지 않을걸요.”

“괜찮아요, 그래도 상단의 창고에 있던 건데 사흘에 한 번씩 멈추고 그러진 않겠죠!”

“……많이 고생하셨구나.”

오드리는 잔뜩 들뜬 아이샤에게 찬물 끼얹기를 그만두고 마중 나온 사람을 찾아 목을 길게 뺐다. 도착일자를 미리 일러놓았으니 마중 나온 사람이 있을 터였다. 사람이 워낙 바글거리는 통에 통 뵈질 않아서 그렇지.

아는 얼굴을 찾아 브란젤 역 곳곳을 살피다보니 자연히 사람들이 입은 옷에도 시선이 갔다. 얇고 팔랑거리는 옷감을 쓰고 치마를 크게 부풀리지 않으며, 코르셋을 차는 대신 가슴 바로 아래에서 화려하게 치장한 끈을 묶어 맵시를 내는 남부식 드레스들이 유독 많이 눈에 띄었다.

‘남부에서 사람들이 많이 올라왔나?’

작년까지만 해도 오드리가 남부식 드레스를 입고 거리에 나서면 사방에서 시선이 몰려들었다. 한데 올해는 머리스타일만 중부식으로 틀어 올렸지 모자, 옷, 심지어 신발까지도 남부식으로 둘둘 감고 있는데도 그리 튀지가 않았다.

“남부식 드레스가 이상하게 흔하네……. 이래서 날 못 찾나?”

“아가씨, 저기 그림 좀 보세요.”

셰비언이 갑자기 역사의 광고판 구역을 가리켰다.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돌렸던 오드리는 검은 말을 타고 흰 망토를 휘날리는 여자가 그려진 포스터를 발견하고 헛숨을 삼켰다.

검은 말과 흰 망토의 조합은 분명 전쟁의 신 벨트람의 상징이 맞는데, 어째 휘날리는 머리칼은 흑발이 아니라 짙은 녹발이었다. 심지어 눈은 선명한 녹색이었고, 얼굴 윤곽은 거울 속의 오드리를 쏙 빼닮기까지 했다.

오드리는 제 눈을 벅벅 비비고 다시 확인했지만 그림의 얼굴은 달라지지 않았다. 꼭 제 초상화를 기반으로 그려진 듯한 그림이었다.

“저게…… 뭐지?”

놀란 나머지 목소리가 다 떨렸다. 거리가 멀어서 오드리가 포스터 아래의 글씨를 알아보지 못한 걸로 착각한 셰비언이 친절하게 문구를 소리 내어 읽었다.

“신화 속의 벨트람을 지상에서 만난다. 리즈비아 거리, 셜리 극장, 물의 날 저녁 여섯 시, 식사 제공, 출연자는…….”

“그만! 미친! 누구야, 저런 걸 그린 사람이! 제정신인가?”

전쟁과 승리의 신 벨트람은 남녀노소 계층 가릴 것 없이 인기 있는 신이었다. 그렇다 보니 죽음의 신 칼레이와의 연애담을 소재로 한 연극과 오페라, 노래극이 흔했다. 그러니 극장에서 벨트람을 소재로 극을 올리는 게 뭐가 이상하겠느냐마는, 포스터에 그려진 벨트람의 얼굴과 특징이 오드리를 고스란히 빼다 박아놓은 수준이라면 얘기가 좀 다르다.

오드리는 오도독 닭살이 돋은 팔을 문지르며 씩씩 광고판으로 향했다. 쓸데없이 크기만 큰 포스터를 확 떼어내 버릴 셈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넋을 놓고 포스터를 구경하던 소녀가 오드리의 손을 앙칼지게 쳐 냈기 때문이었다.

“포스터 떼어가지 마세요! 자꾸 도둑맞는 곳엔 더 안 붙여준다고 그랬…… 단…… 말이에요…….”

소리 높여 오드리를 야단치던 소녀의 말꼬리가 늘어졌다. 눈이 커다랗게 팽창되고 뺨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동시에 도저히 숨길 수 없는 기쁨이 소녀의 온몸에서 흘러넘쳤다.

“레이디 오드리!”

레이디 오드리! 레이디 오드리! 레이디 오드리……!

천둥을 삼켰나, 목소리가 크기도 하다. 브란젤 역사의 높고 크고 둥근 천장 전체에 소녀의 목소리가 메아리쳐 울렸다. 역사 내의 사람들이 휙 고개를 돌려 외침의 근원을 찾았다. 그러다 소녀를 보고, 그 앞에 선 오드리를 보고, 그녀가 모자 밑으로 말아 넣은 초록색 머리칼까지 알아본 사람들이 거의 비명과 같은 함성을 지르며 오드리에게 달려오기 시작했다.

“레이디 오드리!”

“기차를 타고 오실 줄은 몰랐어요!”

오드리는 어릴 적부터 온갖 종류의 시선에 노출되며 살아왔다. 만탈락 사람들은 마지막 랄리우스였던 밀리나의 딸에게 관심이 아주 많아 오드리가 어딜 가서 뭘 하든 눈을 떼지 않았다. 하지만 그만큼 정중한 거리감이 있었기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열광적으로 달려드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뭐든 해도 해야 할 텐데, 너무 놀란 나머지 몸이 딱딱하게 굳고 말았다.

“아가씨, 잠깐 안을게요.”

셰비언이 슬쩍 끼어들어 오드리를 들쳐 안았다. 그는 성가신 후드를 휙 벗어버리곤, 몰려든 군중 앞에 정면으로 섰다. 용의 마력을 은근하게 퍼뜨리자 사람들이 주춤거리며 그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그들은 여전히 오드리를 뜨겁게 바라보면서도 서너 걸음의 공백을 넘지 못했다.

“이게 무슨……. 마법이라도 쓴 건가?”

“종족적인 거부감이죠. 마력의 종류가 확연히 다르니 닿기도 전에 거북함을 느끼는 거예요. 아가씨도 나중에 상대하기 싫은 사람이 있으면 슬쩍 마력을 흘려보세요. 아가씨는 용의 마력 순도가 높으니 저와 비슷한 결과물이 나올 거예요.”

“아니, 그런 좋은 방법이 있으면 진작 알려줬어야지. 그럼 좀 편했을 텐데.”

“흠흠.”

오드리는 셰비언에게 안겨 편안히 군중 사이를 통과했다. 역사를 나올 때쯤엔 뜨겁고 열광적인 시선에도 나름 적응이 되어 주변을 보며 생긋 웃어줄 수도 있게 되었다. 그 웃음 한 조각에 꺅,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을 보았을 땐 입꼬리가 바르르 떨리긴 했지만 말이다.

역사 바깥에 나오자 사정이 나아졌다. 일단 자신을 열렬히 바라보는 시선에서 벗어났다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트였다. 오드리는 바닥에 내려서자마자 셰비언의 머리에 확 후드부터 덮어씌웠다. 이 이상 시선을 끄는 건 사양이었다. 라디아타는 대체 어떻게 그 시선들을 다 감당하고 사는지 모를 일이었다.

“잘 좀 숨겨봐. 자꾸 삐져나오잖아.”

“제 은발이 예쁘다고 하셔놓고…….”

“보기 싫어서 이러는 거 아니란 걸 알면서 웬 투정이야. 그런데 아이샤 씨는? 왜 안 보이지?”

오드리의 말을 기다렸다는 것처럼 아이샤가 역사 밖으로 나왔다. 한데 셰비언의 뒤에 바짝 붙어 따라온 것치고는 꼴이 많이 험했다. 마법사 로브 곳곳이 구겨졌고 머리칼은 쥐에 파먹힌 듯 끝이 엉망이었다. 날이 덥다지만 이마에 벌써 땀이 흥건했다.

“아니……. 아이샤 씨, 꼴이 왜 그래요? 바짝 붙어온 것 아니었어요?”

“저도 그렇고 싶었는데요…….”

아이샤의 눈길이 셰비언의 뒤쪽 아래를 향했다. 셰비언의 옷자락을 방패 삼아 잘 숨어 있던 소녀가 사나운 시선에 어깨를 움츠렸다. 오드리를 보자마자 천둥처럼 큰 목소리로 레이디 오드리! 하고 소리를 질렀던 바로 그 소녀라곤 믿을 수 없게 소심한 동작이었다.

“얘가 갑자기 끼어드는 바람에 사람들 틈에 파묻힐 뻔했어요.”

셰비언도 오드리도 깜짝 놀랐다. 둘 모두 졸졸 따라오는 소녀의 존재를 까맣게 몰랐던 것이다. 가까이에서 자세히 보게 된 소녀는 하델보다 약간 어려 보였고, 잘 먹지 못한 듯 몹시 말랐으며, 거적에 가까운 너저분한 옷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셰비언을 연상시킬 정도로 아주 옅은 하늘색 눈동자가 무척 예뻤다.

그 눈동자가 오드리의 경계를 풀었다. 오드리는 기꺼이 허리를 숙여 소녀와 눈을 맞췄다. 셰비언의 로브자락을 잡고 싶어 헛손질을 하는 손을 당겨 쥐고 짐짓 다정하게 물었다.

“아까 내 이름을 부른 게 너지?”

“…….”

“왜 그랬니?”

안 그래도 소녀의 뺨은 잘 익은 사과처럼 붉었는데, 오드리가 말을 건네자 얼굴을 넘어 귀와 목까지 새빨개졌다.

“그, 그게…….”

“화내지 않을 테니 말해보렴.”

그 말이 용기를 주었나 보다. 소녀의 눈이 반짝거렸다. 오드리는 잠시 잠깐 홀렸고 셰비언은 못마땅하게 혀를 찼다.

“레이디께서 괴물을 이끌고 달리는 걸 봤어요. 정말, 정말 멋있었어요. 전쟁의 여신 벨트람이 제 눈앞에 내려온 줄 알았어요!”

소녀의 목소리가 높아질수록 오드리의 얼굴도 점점 붉어졌다. 돈 있는 어린 미혼 여성이다 보니 다양한 사람들에게서 온갖 종류의 아첨과 칭찬을 다 들어보았지만, 여신과 같았다는 칭찬은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저한테는 진짜 그랬어요. 괴물에게 잡혀서 이대로 꼼짝없이 죽는구나, 싶었을 때 아가씨께서 괴물을 데려가셨는걸요. 꼭 한 번은 만나서 고맙다고 인사하고 싶었어요. 레이디 오드리, 레이디 덕분에 제가 지금 여기 살아 있어요. 감사합니다.”

소녀가 꾸벅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외모는 멜브란트인인데 인사는 나랍식이다. 하나 그 괴리에 위화감을 느낄 새도 없이 소녀가 함지박만 한 웃음을 지었다. 말갛고 밝은 미소엔 보는 사람의 마음을 잡아 흔드는 무언가가 있어서, 뾰족하게 곤두섰던 신경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오드리는 물론이고 계속 입을 삐죽대던 아이샤도 입매를 누그러뜨렸다.

“내가 저지른 무모한 짓이 널 구했다니, 갑자기 보람이 느껴지는걸.”

“아까 레이디의 손을 쳐서 정말로 죄송해요. 포스터를 떼어가려는 사람인 줄 알았어요. 저 같은 어린애도 떼고 싶은 걸 꾹 참고 있는데, 나이 먹은 어른이 이런 낮에 떼려고 하다니 정말 나쁘다고 생각했어요. 좋은 건 다 같이 봐야죠!”

“음, 그래. 그거 맞는 말이긴 한데……. 말하는 게 딱 부러지는 게, 네 부모님은 널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겠구나. 너, 이름이 뭐니?”

“비니타 아쥬시. 비니타라고 부르시면 돼요! 쭉 나랍에 살다가 작년 봄에 멜브란트로 넘어왔고……. 브란젤에 온 건 겨울이에요. 아버지를 꼭 닮긴 했지만 어머니는 나랍 사람이에요.”

작년 겨울이면, 수확제에서 괴물 사태가 벌어지고 난 다음이다. 이주민이 아직 적고 나랍인에 대한 편견은 강하게 남아 있을 때였다. 얼른 묻지도 않은 설명을 붙이는 비니타에게서는 나랍풍 이름이라고 사람들에게서 별의별 질문을 다 받아본 티가 났다.

“비니타. 예쁜 이름이구나.”

오드리는 비니타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나름대로 단정하게 땋은 머리칼이었지만 여러 날 씻지 못한 듯 기름때가 끼어 꼬질꼬질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아무리 비가 안 온대도 여긴 브란젤이고 수도시설이 아주 정교하게 잘 구축된 도시인데 말이다.

“비니타, 네 선한 마음은 알겠지만……. 날 부를 땐 레이디 오드리가 아니라 레이디 헨젤이라고 부르는 게 맞단다. 레이디라는 호칭은 이름이 아니라 성 앞에 붙이는 거야.”

성이 없거나 본인이 성으로 불리길 꺼려하면 모를까, 성을 가진 사람을 부를 땐 당연히 성을 우선해야 한다. 지극히 상식적인 얘기였다. 하지만 비니타는 뭔가 불만에 찬 듯 입술을 삐죽거리며 되물었다.

“왜요?”

“왜라니? 그야 당연히 나는 헨젤 백작영애니까 레이디 헨젤이라고 해야지.”

“레이디 헨젤은 예전에도 많았잖아요. 하지만 자신을 미끼 삼아 괴물을 유인한 레이디 헨젤은 오드리 헨젤 영애뿐이었을걸요. 전 레이디 오드리라고 부르고 싶어요.”

“오, 이런. 비니타. 나 이전의 레이디 헨젤 중에 나 같은 사람이 없었다는 건 그렇게 나서야만 하는 급한 일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겠니? 평화는 좋은 거지. 하지만 다음에도 나처럼 자비로운 귀족을 만날지 장담할 수 없으니, 레이디는 꼬박꼬박 성 앞에 달아 부르고 실수하지 않도록 조심하렴.”

대엿살 먹은 어린아이 다루듯 조근조근 타이른 게 오히려 독이 됐는지, 비니타의 입이 한 뼘은 더 튀어나왔다.

“하지만 레이디께서 결혼하시면 성이 바뀔 거잖아요. 그땐 레이디라고 부르지도 못할 거고……. 레이디 오드리가 좋아요. 변하지 않는 이름으로 불러드리는 게 맞는 것 같아요!”

“변하지 않는 이름?”

“네! 다른 사람들도 저와 똑같이 얘기해요. 레이디 헨젤은 이전에도 많았고 앞으로도 많겠지만, 레이디 오드리는 딱 한 분이라고요.”

오드리가 수많은 레이디 헨젤 중 한 명인 건 분명하지만, 그 레이디 헨젤 중에서 오드리는 한 명이다. 나중에 성이 바뀌더라도 이름은 바뀌지 않으니 마땅히 이름으로 불러야 한다.

오드리는 그 말이 몹시 마음에 들었다. 워커, 아이샤, 다나……. 생각해 보면 멀쩡한 성이 있어도 이름만 대고 잘 사는 사람이 숱하게 많은데, 굳이 자신의 이름 대신 가문의 이름으로 불리기를 자청하고 살 필요는 없는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은 어떻게 하게 됐니?”

“어머니께서 늘 말씀하시던 거예요. 일가족의 성이 다 똑같아야 할 이유가 대체 뭔지 모르겠다고, 멜브란트는 왜 결혼하면 성을 바꾸느냐고 짜증을 내셨거든요. 결혼한다고 뿌리가 바뀌는 게 아니라면서 말이에요. 하지만 바뀌지 않는다고 뿌리가 사람의 전부가 되는 것도 아니니, 이왕이면 사람의 이름을 부르라고 가르치셨어요.”

나랍에서는 결혼하더라도 남녀 누구도 성을 바꾸지 않고, 자식이 어머니나 아버지의 성 중 하나를 골라서 이어받는 일이 흔했다. 멜브란트나 살론에서는 그걸 두고 가족의 개념도 모르는 야만적인 풍습이라고 비웃지만, 나랍인의 관점에서는 성을 바꾸는 멜브란트와 살론이 더 이상해 보이는 게 당연했다.

나랍인 어머니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자라난 비니타는 레이디 헨젤보다 레이디 오드리가 더 자연스러웠다. 처음에는 사람을 이상하게 부른다는 지적도 많이 받았지만, 이젠 다들 레이디 오드리라고 부르는데 뭐가 문제랴 싶었다. 정작 당사자를 앞에 두니 조금 걱정이 되긴 하지만 말이다.

“그렇구나. 레이디 오드리라…….”

“그……. 마음에 안 드세요? 제가 친구들에게 전할까요? 아가씨께서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말씀하셨다고?”

오드리가 말이 없자 비니타가 겁을 먹었다. 혼내지 않겠다고 했는데도 하늘색 눈동자를 자꾸 위아래로 굴리며 오드리의 눈치를 본다.

“오호, 네가 주도한 거니?”

“으음…….”

“조금 전까지 잘만 떠들어놓고 그렇게 입을 다물면 거짓말 못하는 게 너무 티가 나잖니. 나랍 혼혈이라도 친구들 사이에서 꽤 인기가 좋은 모양이지? 수완이 좋구나. 그리 떨지 않아도 괜찮아. 마음에 들었어. 계속 레이디 오드리라고 불러도 좋단다.”

오드리는 쉽게 허락했다. 그 허락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하고.

“오! 진짜죠? 나중에 레이디께서 아르젠 남작님과 결혼하셔도 계속 레이디 오드리라고 불러도 되는 거죠?”

셰비언과 결혼? 오드리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일생을 함께 할 각오를 한 남자니 당연히 결혼 생각을 하는 게 마땅할 텐데, 어째서인지 셰비언과 자신이 결혼 예복을 입고 반지를 나눠 끼는 장면은 전혀 상상이 안 갔다.

그때, 오드리가 비니타와 대화하는 내내 옆에 멀뚱멀뚱 서 있기만 하던 셰비언이 갑자기 후드를 벗고 몸을 굽혔다. 은실로 자아낸 듯한 긴 은발이 사르르 흘러내렸다. 그와 눈을 마주친 비니타가 넋이 나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와아……. 이게 진짜 은발……. 흰 머리가 아니네?”

“꼬마야, 잠깐 나 좀 볼래?”

“아르젠 남작님, 맞으시죠? 진짜 미남이시네요……! 신문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훠얼씬 잘 생기셨어요! 레이디 오드리를 모델로 포스터를 그린 화가가 남작님도 그려주면 좋겠어요!”

오드리를 앞에 두고도 꼬박꼬박 제 할 말을 다 하던 맹랑함은 셰비언 앞이라고 딱히 줄어들지 않았다. 오드리와 셰비언을 번갈아가며 보느라 하늘색 눈동자가 아주 바쁘기 그지없다. 이제까지 마주친 다른 사람들과는 사뭇 다른 반응에 오드리와 아이샤 모두 놀랐지만, 셰비언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태연한 기색이었다.

“너, 마법사 테스트 받아본 적 있어?”

“어……. 나랍에서 한 번……. 네, 한 번 받아봤어요.”

“결과가 어땠는지 들어는 봤고?”

비니타가 고개를 저었다. 셰비언은 아이샤를 불러 비니타의 손을 쥐어주었다. 얼결에 손을 잡게 된 두 사람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멀뚱멀뚱 셰비언을 바라보았다.

“아이샤, 이 꼬맹이는 마법사의 재목이야. 벌써 무의식적으로 마법을 쓸 정도로 타고 났어.”

“네에?”

“제가 마법을 쓴다고요? 저 마법사예요? 마법사가 될 수 있어요?”

“마력 계통은 아마도 용일 거고……. 마법사는 갈 곳 없는 어린 마법사를 무시하면 안 된다며? 제자로 들이면 되겠네. 잘 가르쳐 봐. 재능은 있으니 나머진 본인의 노력과 운에 달렸지. 잘 맞아떨어지면 크게 될 거야.”

아이샤가 기겁을 하고 비니타의 손을 뿌리쳤다.

“그거야 그냥 하는 말이죠! 옛날 옛적 불문율이라고요! 제 나이가 몇인데 벌써부터 웬 제자? 저 아직 창창하거든요? 들일 거면 셰비언님이 들여야……. 야, 너 이거 안 놔?”

“안 놔요! 못 놔요!”

비니타가 아이샤의 팔을 끌어안고 매달렸다. 아이샤는 떼어내려고 용을 쓰고 있었지만, 바닥에 주저앉아 있다가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을 잡게 된 비니타는 아주 끈질겼다. 오드리는 다음에 만날 땐 아이샤의 옆에 꼬마 마법사가 딸려 있을 것을 예감했다.

셰비언은 그렇게 자연스럽게 아이샤와 비니타를 떼어놓고 오드리를 데리고 자리를 옮겼다. 이대로 가면 어떡하느냐, 오드리가 따져 물어도 그게 뭐 어떠냐는 식이었다.

“아이샤가 브란젤에서 산 세월이 얼만데 설마 길을 잃겠어요? 어떻게 가도 가겠죠. 그보다 아가씨, 저길 보세요.”

셰비언이 역전 광장 한편을 가리켰다. 하녀복 치마를 움켜쥔 이디케가 사람들 사이를 헤집으며 달려오고 있었다. 오드리를 발견한 이디케가 제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라 손을 흔들었다.

오드리는 마주 손을 흔들며 셰비언의 옆구리를 살짝 찔렀다.

“내가 비니타에게 무르게 굴었던 거, 마력의 계통 때문인가?”

“아뇨. 마법 때문이죠. 그 꼬맹이의 눈에서 마법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더라고요.”

“뭐?”

“꼬맹이와 눈을 마주친 사람들은 분명 자신도 모르는 호의에 젖어 꼬맹이에게 친절했을 거예요. 거친 환경에서 깨어난 본능이 생존을 위해 가장 효율적인 방향으로 발전한 거죠. 과연 그런 식으로 마법을 쓰면서 사는 게 생존뿐만 아니라 장수에도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마법 사용은 마법사의 건강과 수명을 깎아 먹는다. 그걸 모르는 마법사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마법을 포기하는 마법사도 없었다. 따라서 마법사에게 좋은 스승을 찾는 일은 단순히 장래를 결정하는 것을 넘어 생존과도 직결되는 문제였다. 반강제라지만 아이샤를 스승으로 두게 된 비니타는 운이 아주 좋은 편이었다.

“음……. 마법을 배우기도 전에 마법을 쓰는 마법사라. 게다가 마력 계통은 용이고……. 비니타의 재능은 어림잡아 어느 정도지? 제대로 배우면 어떤 수준이 될까? 크게 된다는 거, 그냥 입 발린 칭찬이었지?”

“글쎄요? 거짓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장담하기도 어렵네요. 백을 갖고 태어나 십도 쓰지 못하고 죽는 인생이 얼마나 많은데 제가 어떻게 미래를 장담하겠어요? 그래도 일단 눈에 보이는 재능의 크기는 워커보다 약간 못한 수준이긴 해요.”

난데없이 로렐라이를 지탱하는 천재 마법사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마력 계통이 용이라는 말에 확인차 물었던 오드리는 갑자기 뒷목이 뻐근해졌다.

“아니, 그 정도로 큰 재능이면 당연히 로렐라이로 데려왔어야지! 왜 왕궁마법사에게 보내?”

“앞날은 모르는 거잖아요. 재능에 비해 성취가 부족할 수도 있고…….”

“죽어라 노력해도 재능이 없으면 못하는 게 마법사야. 아직 어리니까 마음먹고 교육시키면 워커만큼 쓸모 있는 인재가 될 수도 있는데, 어떻게 그렇게 쉽게 보내 버릴 수가 있지?”

오드리의 눈에서 한기가 뚝뚝 떨어졌다. 셰비언은 몹시 억울해졌다. 지금의 워커든 다 자란 비니타든 그들은 셰비언의 발끝도 못 쫓아오긴 마찬가진데, 아직 마법사도 못 된 어린 씨앗 하나를 넘겨줬다고 이렇게 싸늘한 눈빛을 받을 일인가 말이다.

“셰비언, 아이샤 씨에게 가서 비니타를 도로 데려와. 어차피 아이샤 씨도 제자는 부담스러워했잖아. 자, 어서 빨리.”

“싫어요.”

생각지도 못한 거부에 오드리가 눈을 크게 떴다. 셰비언이 어린아이처럼 툴툴거렸다.

“그 꼬맹이랑 있으면 아가씨가 자꾸 걔한테만 눈길을 주잖아요. 꼬맹이가 얼마나 잘 크든 마법의 주인인 저하고는 비교도 안 된다고요. 안 그래도 마법사의 재능이고 뭐고 그냥 지나치려다가 호의를 베푼 건데……. 솔직히 인간 마법사들의 불문율 같은 게 저랑 무슨 상관이겠어요?”

“나 참……. 너무 당당한 거 아닌가? 아이샤 씨가 들으면 울겠어. 아이샤 씨는 자기 교육이 효과가 있었다고 믿고 있던데.”

“효과야 있었죠. 그 꼬맹이가 결혼 얘기만 안 꺼냈어도 진짜 지나쳤을 거예요. 그거 땜에 봐줬다, 진짜.”

셰비언의 투덜거림에 오드리의 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지나가다 마주친 아이가 아무것도 모르고 무심코 입에 담은 결혼이란 말에 셰비언이 즉각 반응했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셰비언이 그랬다는 게.

“결혼 같은 거, 아무 의미 없는 요식 행위라며?”

“그런 게 아니라고 세뇌하다시피 가르친 사람이 곁에 있었거든요.”

셰비언의 대답은 아주 담백했다. 이젠 인간 사회에서 결혼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알고 있고, 그렇기에 당신과 결혼하고 싶다. 오드리는 그의 속은 읽었으되 적절한 대답은 찾지 못해 입을 다물었다.

그 침묵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씩 개구지게 미소 지은 셰비언이 오드리의 뺨에 살짝 입 맞추고 속삭였다.

“예전에 라비린이 왜 날 그렇게 재수 없어 했는지 이젠 알 것 같아요.”

오드리는 둥그렇고 우아하게 휘어지는 눈매에 완전히 정신을 빼앗겼다. 이젠 질투가 뭔지 알겠다고 말하는 셰비언의 미소가 지독히 매력적이었다.

“아가씨, 락시 양이 왔어요. 계속 이렇게 굳어 계실 거예요?”

“……아. 이디케?”

“아가씨!”

셰비언이 오드리를 돌려세운 시점은 절묘했다. 오드리가 몸을 돌리기 무섭게 인파를 뚫고 올라온 이디케가 오드리를 덥석 끌어안았다. 오드리가 열세 살 생일 이후엔 받아본 적 없던 격렬한 환영의 표시였다. 처음에는 반가움에 같이 안아주었던 오드리였지만, 어째 시간이 갈수록 팔 힘이 점점 강해지는 것만 같았다.

“컥, 숨 막혀!”

“아이 참. 죄송해요, 아가씨. 제가 너무 기쁜 나머지. 남작님도 안녕하세요!”

이디케가 오드리를 끌어안았던 팔을 풀더니만 이번엔 손을 쥐고 흔들었다. 팔이 위아래로 힘차게 흔들리는 것이, 그녀가 얼마나 오드리를 반가워하는지 알 만했다. 생각해 보면 두 사람은 오드리가 막 기어다니기 시작했을 무렵부터 쭉 함께 자라 이렇게 오래 떨어져 있었던 건 처음이었다.

“나도 널 봐서 기뻐. 이디케, 그동안 잘 지냈어?”

“아뇨, 그럴 리가 있나요.”

웃는 낯으로 덥석 나온 것치고는 긍정적인 답이 아니었다. 이디케가 제 눈 밑을 톡톡 두드렸다.

“아가씨가 안 계신 동안 일에 깔려 죽는 줄 알았어요. 지금 제가 멀쩡해 보이는 건, 전부 다이앤의 화장 솜씨 때문이에요. 아가씨의 하녀가 밖에서 추레한 꼴로 다니면 안 된다며 아주 공을 들여 화장해 줬어요. 어때요, 일단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죠?”

“으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네. 나 이제 가만히 서서 혼나기만 하면 돼?”

오드리가 무모한 짓을 저지르고 돌아와 침대에 누워 앓는 동안, 이디케는 오드리에게 잔소리는커녕 나무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오드리가 보던 업무를 도맡아 처리하고 수발드는 하녀들을 감독했다. 셰비언이 오드리를 셰비언 성벽으로 데려가야겠다고 말을 꺼냈을 때 반발하는 릴리를 설득한 것도 이디케였다.

오드리는 그 조용함이 무서웠다. 하녀라지만 자매와 같이 자랐고 서로의 속을 훤히 아는 친구였다. 벼락이 떨어질 건 확실한데 도통 시기를 알 수가 없으니…….

“일단은 곧장 저택으로 돌아가시는 게 좋겠어요. 점점 사람들이 몰려드네요.”

이디케의 말대로였다. 오드리가 딱히 얼굴을 감출 생각을 않는 데다 셰비언이 후드를 벗고 있어서 그런지 발을 멈추고 그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었다. 조금만 더 지나면 아예 그들을 둘러싸고 구경이라도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셰비언은 후드를 다시 썼고, 오드리도 모자를 더 깊이 써서 얼굴과 머리칼을 가렸다. 몰려든 인파를 뚫는 건 이번에도 이디케의 몫이었다. 기웃대는 사람들을 몸으로 막아내며 힘겹게 마차를 지키고 있던 카프러스는 오드리를 보자마자 마차 문부터 열었다.

“아가씨! 빨리 타시죠, 기자들이 벌써 몰려왔습니다.”

“기자들이? 브란젤에 도착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아가씨, 빨리요! 빨리!”

이디케가 오드리를 마구 재촉했다. 오드리는 더 묻지 못하고 얼떨떨한 상태로 마차에 올랐다. 마차는 일행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기 무섭게 출발했고, 내내 초조해 보이던 카프러스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오드리에게 반가운 인사를 건넸다.

“아가씨, 무사히 돌아오셔서 기쁩니다. 요양을 추운 곳으로 가신다고 해서 몹시 걱정했는데,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지내는 동안 불편한 점은 없으셨습니까?”

“저야 잘 지냈지요. 그러는 베텔 경은 얼굴이 많이 상했군요.”

아닌 게 아니라, 피부가 반짝거리는 오드리와 달리 카프러스는 피로가 누적된 까칠한 낯을 하고 있었다. 그는 오드리의 걱정이 민망한 듯 푸르스름한 수염 자국이 남은 턱을 괜스레 만지작댔다.

“걱정 감사합니다. 저야 뭐 나쁘지 않게 지냈지요.”

셰비언은 오드리 옆에 앉은 자신은 보이지도 않는 듯 오드리에게만 집중하는 카프러스가 왠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인사를 꼭 받아야겠다는 마음이 드는 것도 아닌데, 오드리가 적당한 예의를 갖춰 그를 대하는 것조차 이상하리만치 신경에 거슬렸다.

셰비언은 보란 듯 손을 뻗어 오드리가 무릎 위에 얌전히 올려놓은 손을 슬쩍 잡았다. 시시때때로 벌어지는 셰비언의 스킨십이 익숙해진 오드리는 별 반응이 없는데, 카프러스의 시선이 그쪽에 못박혔다. 그는 별말 없이 화제를 돌렸다.

“요새 헨젤가의 마차를 따라다니는 사람이 많이 늘었습니다. 기자까지 찾아온 건 오랜만이지만 아가씨께서 이때쯤 도착하실 걸 알고 있었을 테니 이상할 것도 없지요.”

“사람들이 헨젤가의 마차를 왜 따라다녀요? 내가 이 시간에 여기 올 건 기자들이 어떻게 알고?”

“이게 다 전보 때문이에요.”

이디케가 냉큼 끼어들었다.

“전보라고요, 전보. 아가씨, 기억나세요? 올해 상반기 내에 브란젤과 산트렘 사이에 전보선이 다 깔릴 거라고 예측하셨었잖아요.”

“그랬지. 그게 정말 그렇게 됐어? 중간에 큰일이 많았으니 분명 지체됐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이상이에요.”

이디케가 손짓 발짓을 더해가며 전보의 현상황을 설명했다.

일단 브란젤과 산트렘을 잇는 과정에서 중간 개통의 꿀맛을 본 지역들이 등장했다. 멜브란트의 중요 소식을 신문이 도착하기도 전에 받아보는 건 물론이고 거대한 소비도시인 브란젤의 수요를 즉각적으로 확인해서 대응할 수 있다는 건 대단한 매력이었다. 이후 자비 부담을 해서라도 전보를 잇고 싶다는 타 도시의 요청이 쇄도했다. 데멘사도 우편국도 거절할 이유가 없는 요청이었다.

그즈음, 로렐라이는 실용성보다 심미성을 우선한다는 편견 때문에 브란젤의 기반시설 복구에 참여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망가진 마법도구를 새로 구입하는 사람들 덕분에 매출은 그럭저럭 나왔지만 왕실의 대량 주문에 비할 바는 못 됐다. 도로 밑에 깔리는 강화장치와 새로 교체되는 가로등을 보며 아쉬움에 손가락만 빨고 있는 가운데 전보선 대량 주문이 들어왔으니, 로렐라이는 신이 나서 전보선을 대량으로 양산했다.

전보선을 어디부터 어디까지 깔 것인지에 대한 우선순위는 그웬 백작이 나서서 정했다. 데멘사의 대표로 나선 라비린이 묘하게 의욕이 없는 데다 로렐라이에는 오드리가 없으니 무게 중심이 우편국으로 기울어진 결과였다. 결국 전보선은 각지의 우편국을 중심으로 연결됐고, 앞으로의 계획도 비슷하게 짜여졌다.

“네가 있는데도 그랬단 말이야?”

“어쩌겠어요, 저는 아가씨가 아닌데. 머리가 있는 사람들은 아가씨가 로렐라이의 주인이라는 걸 대충 짐작하고 있는 상황에서 아가씨의 부재가 너무 명백했잖아요. 저로서는 한계가 있었어요.”

“으음……. 고모부님, 그렇게 안 봤는데 의외로 능력 있으시네.”

“백작부인께 눌려 살아서 그렇지, 그웬 백작님도 어디 가서 빠지는 분은 아니시죠. 우편국을 중심으로 계획을 세운 것도 효율을 중시해서 그랬다고 하면 딱히 흠 잡을 곳 없을 수준으로 잘 해주셨어요. 우편국과 연계한 덕분에 전보량도 급속도로 늘고 있고요. 편지보다 더 빨리 소식을 전달할 수 있다는 건 그만한 메리트가 있으니까요.”

“그럼 기자가 내 도착 소식을 알게 된 통로도 전보인가? 내가 지난 역에서 너에게 전보를 치느라 데멘사에 들렀으니…….”

“틀림없어요. 기자들보다 전보를 잘 써먹는 사람은 곡물상 정도밖에 없을걸요.”

전보의 유용성은 확신했으되 이토록 빠른 확산은 생각지 못했던 오드리였다. 그녀는 제 행적이 노출됐다는 말을 듣고도 기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소도시의 데멘사 지점에 사람이 북적이는 걸 보았을 때의 즐거움과 맞먹는 기쁨이 그녀를 휩쓸었다.

“전보가 잘되어서 나한테 떨어지는 건 기껏해야 돈밖에 없는데 왜 이렇게 기분이 좋지?”

“좋아하실 줄 알았어요. 잘될 거라고, 가용할 수 있는 돈이면 비상금까지 다 털어서 투자하셨잖아요.”

“맞아, 그랬었지. 내 눈이 틀린 게 아니야. 괜한 짓을 한 게 아니라니까! 이디케, 정말 고생했어. 중요한 때에 직접 일하지 못해 아쉽긴 해도 기대 이상의 성과야. 이디케 네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오드리의 칭찬을 흐뭇하게 듣던 이디케가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폈다.

“근데, 그보다 더 좋은 소식이 더 있어요.”

“전보 소식만으로도 이렇게 기분이 좋은데, 그보다 더 기분 좋은 소식이라니? 그게 뭔데?”

“돌아가면 자연히 알게 되실 거예요.”

오드리는 이디케가 왜 그렇게 기분이 좋아 보이는지, 돌아가면 알게 될 좋은 소식이 뭔지 영 알 수가 없었다. 이리저리 찔러봐도 이디케는 대답이 없고 카프러스도 비슷하게 난처한 표정만 지었으니까. 두 사람이 굳게 입을 다무는 동안 오드리의 기대도 함께 부풀었다.

“정말이지, 별것 아니기만 해 봐.”

이디케는 오드리의 협박 아닌 협박을 너끈히 이겨내고 그녀를 저택으로 이끌었다.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기강으로 바짝 힘이 들어간 고용인들이 오드리를 맞았다. 하녀들의 맨 앞에 선 릴리의 뺨이 흥분과 기대로 불그스름했다. 집사도 마찬가지로 주름진 얼굴로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내가 오는 게 그렇게 좋은 일인가? 다들 얼굴빛이 좋네. 그런데 하델은? 하델은 안 나왔어?”

“아가씨, 주인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보이지 않는 하델을 찾던 오드리는 제 귀를 의심했다.

“……누가? 누가 날 기다린다고?”

“주인님께서 본관 집무실에서 아가씨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까 소식을 받자마자 돌아오셔서 내내 기다리고 계시니, 얼른 가보시지요.”

“집사 할아범, 내가 잘못 들은 건 아니지? 아버님이 왜 날 기다려?”

릴리가 황당해하는 오드리의 등을 떠밀었다. 이미 충분히 오래 기다린 백작님의 기분이 상하기 전에 빨리 가보라면서. 오드리는 당황해서 셰비언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셰비언, 같이 가자.”

“아가씨, 아르젠 남작님은 저희가 잘 챙길게요. 얼른 가보세요. 남작님, 아시죠? 오랜만에 부녀가 단둘이 만나는 자리에 다른 사람이 끼어드는 건 별로라는 거요. 알아서 피해줘야죠. 이리 오세요, 지내시기 편하도록 따로 방을 치워뒀어요.”

“아니, 내가 언제부터 아버님과 그렇게 친밀했다고……! 셰비언은 그렇다 쳐도 나 옷 갈아입을 시간 정도는 줘야 하는 거 아냐?”

“지금 차림새도 충분히 단정하고 어여쁘세요. 요새 브란젤에선 남부식 드레스가 대유행이라서 꼬투리 잡힐 것도 없어요.”

딱히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셰비언은 릴리에게 끌려갔고, 딱히 도망갈 핑계를 대지 못한 오드리는 어영부영 집사를 따라 걸었다. 그러다 오드리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헨젤 백작의 집무실 앞이었으니, 그녀는 집무실 문을 두드리려는 집사를 황급히 말렸다.

“잠깐, 잠깐만. 할아범, 뭔가 짐작되는 거 없어? 내가 지금 아무 준비도 안 되어 있어서 그래.”

“아가씨, 그렇게 긴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딸이 아버지를 만나는데 무슨 준비가 그리 필요하겠습니까?”

집사의 표정과 말투만 보면 헨젤 백작과 오드리가 굉장히 사이좋은 부녀인 것만 같았다. 둘 사이에서 찬바람이 부는 걸 뻔히 아는 사람이 할 말은 아니었다. 오드리가 눈을 모로 뜨고 집사를 위아래로 훑었다.

“할아범, 못 본 사이 뭐 잘못 먹은 거라도 있어? 아니면 크게 아팠거나. 왜 이래?”

“다만 이 늙은이가 부탁드리건대, 아가씨께서 하델 도련님을 안타까이 여기고 그분을 위해 힘써주시면 좋겠습니다.”

“하델은 또 뭔데?”

집사는 더 말을 잇지 않고 집무실의 문을 두드렸다. 주인님, 아가씨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대답은 금방 돌아왔고, 결국 오드리는 집사에게서 어떤 힌트나 당부도 듣지 못하고 마음의 준비마저 모자란 채 헨젤 백작을 마주하고 말았다.

“인사는 됐고, 일단 앉아라.”

헨젤 백작은 그새 살이 빠졌는지 뺨이 홀쭉했다. 본디 그는 살이 통통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정면에서 얼굴을 마주보는 것만으로도 강퍅한 성질머리를 엿볼 수 있을 정도로 마른 사람도 아니었다. 푹 들어가서 어둡게 빛나는 눈이 그가 지난 시간 동안 얼마나 바쁘고 힘들었는지를 선명하게 드러냈다.

“한 달 뒤에 가스트로 왕자전하와 타우레드 영애의 결혼식이 있고, 두 달 뒤엔 대관식이 있다. 대관식이 끝나면 곧바로 아르젠 남작의 승작이 있고, 그 뒤엔 네 결혼식이다.”

“……네?”

“아르젠 남작은 백작이 될 거고, 넌 아르젠 백작부인이 되겠지.”

“잠깐, 잠깐만요.”

오드리는 눈을 감고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했다. 헨젤 백작이 와르르 쏟아놓은 이야기가 바구니 속 털실처럼 뒤엉켰다. 그나마 다행인 건, 역에서 비니타를 만난 덕에 셰비언과의 결혼에 대해 잠깐이나마 생각해 볼 기회가 있었다는 것뿐이었다.

“귀족으로 태어나 살면서 제 결혼을 제 뜻대로 결정할 수 있을 거란 기대 같은 건 하지 않고 살았어요. 그러니 이 일방적인 통보가 별로 놀랍지는 않네요. 한데, 제 결혼이 이렇게 갑자기 정해진 이유가 뭐죠?”

“네 영웅적인 행동에 대한 포상이다. 너 자신을 미끼로 괴물을 끌어냈으니, 원하는 사람과 결혼할 수 있게 해주겠단 거지.”

“포상이 결혼이라고요?”

결혼상대자를 마음대로 고를 수 있다는 건 미혼의 귀족영애에게 아주 의미 있는 보상이었다. 오드리 역시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어째 기분이 몹시 더러웠다. 좀처럼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쾌함이 자꾸 목구멍을 긁어댔다.

“그게 왜 저에게 주는 포상이죠? 이건 제가 아니라 셰비언이 받는 포상 같은데요? 사악한 용을 물리치고 용 퇴치의 상품으로 걸려 있던 공주와 결혼하는 용사의 이야기가 떠오르는 게 저뿐일 것 같진 않네요.”

“혹시 지난 석 달 사이에 마음이 바뀌어서 아르젠 남작을 신랑으로 원하지 않는다면 지금 얘기해라. 다른 남자를 골라도 좋다.”

오드리가 누구의 이름을 대든 그에게 신랑 예복을 입혀 식장에 세워주겠다는 듯한 말투였다. 오드리는 모자 아래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손가락에 감고 빙글빙글 돌렸다. 무례한 태도였지만 헨젤 백작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제가 가스트로 왕자전하를 골라도 되나요?”

“네 하나뿐인 친구를 망신 주고 싶다면 그래도 좋다.”

“왕비자리가 탐나기는 해도 친구를 망신 줄 순 없죠. 그럼 카즈네 소공작은요?”

“소공작은 일찍 결혼해서 벌써 부인이 있다. 정 원한다면 억지 이혼을 시켜서라도 추진해 주겠지만 그랬다간 그의 어린 자식을 네가 키워야 한다는 걸 명심해라.”

“패널티가 확실하네요. 그럼 타우레드 공자는 어떤가요? 제가 라비린의 이름을 대면 두 달 뒤엔 오드리 타우레드가 될 수 있는 건가요?”

헨젤 백작이 결국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지금 널 데리고 장난이라도 하는 것 같으냐? 똑바로 얘기해라.”

“아버님이야말로 왜 제가 장난치는 거라고 생각하시는 건지 모르겠네요. 라비린은 저와 신분이 맞고, 성격도 비슷하고, 말도 잘 통하는데요. 심지어 생김새도 제 취향으로 잘생겼어요. 2차 괴물 사태 때 제가 시계탑으로 갈 땐 나서서 제 뒤를 받쳐주기까지 했죠.”

“……좋다.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타우레드 쪽에 내가 말을 건네도록 하마. 파혼 이력이 거슬리지 않는다면 나쁠 것도 없지.”

시험하듯 말을 던졌던 오드리는 너무나 순순히 답하는 헨젤 백작이 놀라워 입을 벌렸다. 설마 누구라도 좋으니 결혼상대자를 고르라는 말이 진짜였단 말인가. 그녀가 황급히 말을 정정하려는 찰나, 헨젤 백작이 먼저 입을 뗐다.

“대신 조건이 있다.”

“조건이요?”

“지금 네 공식적인 연인은 아르젠 남작이다. 게다가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너보다 그쪽의 마음이 더 깊은 걸로 보이는데, 네가 그 대신 다른 남자를 남편으로 삼겠다고 했을 때 그가 분노해 날뛰지 않는다는 보장을 할 수 있겠느냐? 예비 신랑을 죽이지 않는다는 보장은 가능해? 결혼할 당시에는 참는다 하더라도 나중에 뒤엎지 않게 막을 수 있느냐?”

“…….”

“일단 결혼해 버린 뒤에 그가 어떤 태도를 취하든 너와 상관없다는 식으로 굴면 곤란해.”

그럴 일은 없다고 하면 된다. 자신은 어차피 셰비언을 원하니 그런 엉뚱한 걱정은 접어두라고. 그럼 괜히 얼굴 붉힐 일도 없고, 빈정 상할 일도 없다. 잘 알고 있는데도, 오드리는 목을 긁어대는 불쾌감을 그대로 토해내고 말았다.

“알겠어요. 저는 셰비언을 잡아두는 목줄이로군요. 그런 거라면 급하게 결혼 날짜를 잡아도 이상하지 않죠. 그런데 다른 남자요? 누구든 좋으니 골라보라는 건 그냥 입 발린 소리잖아요. 그럴 바엔 포상이란 말을 왜 붙이신담. 그냥 필요해서 보낸다고 하시지.”

“알면 그냥 받아들여라.”

헨젤 백작은 필요해서 추진하는 결혼이라는 걸 딱히 부정하지 않았고, 오드리는 머리칼을 괴롭히는 손가락 장난을 그만두었다.

“셰비언이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할 목적으로 결혼을 추진하는 거라면 필요 없어요. 셰비언은 아시다시피 용이고, 그에게 인간의 제도는 그다지 큰 의미를 갖지 못해요. 저 역시 결혼에 대해서는 아직 생각이 없고요.”

오드리는 그만 일어났다. 셰비언과 결혼하는 건 상상만으로도 좋지만, 사람이 아니라 상품이 되어 그의 품에 떨어지는 건 완전히 다른 얘기였다. 여기 계속 앉아 있어봐야 짜증만 줄줄 솟을 게 분명했다. 하나 그녀가 채 세 걸음을 걷기도 전, 헨젤 백작이 생각지도 못한 미끼를 내걸었다.

“네가 아르젠 남작과 순순히 결혼한다면, 그땐 만탈락을 네 몫으로 가져갈 수 있게 떼어주마.”

만탈락이라니,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오드리는 체면 상관 않고 귀를 휘저었지만 그녀의 귀는 아주 멀쩡했다.

“그리 인심 쓰듯 말씀하지 않으셔도 만탈락은 본래 제 것이에요.”

“착각하지 마라, 네가 만탈락을 맡은 건 어디까지나 임시다. 아무리 가문의 재산이 탐나더라도 욕심은 적당히 부려라. 내가 로렐라이를 내버려 두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줄 알아야지.”

오드리는 약간 의아해졌다. 지금 헨젤 백작은 오드리가 만탈락이 밀리나의 개인 재산이었다는 걸 알지 못하는 걸 전제로 말하고 있었다. 그건 마치 라비린이 헨젤 백작부부의 결혼 계약서를 오드리에게 빼돌려 준 사실을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라비린 그 자식, 얘기 안 했나……? 나더러는 둘이 손을 잡았다고 했으면서 그 얘길 안 했어? 최소한의 신뢰관계 구축에 필요했을 텐데?’

아무래도 라비린과 얘길 좀 해 봐야 할 듯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헨젤 백작이 마지막까지 움켜쥐고 놓지 않아야 할 중요한 카드인 만탈락을 이렇게 쉽게 꺼내드는 이유를 알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일단 시간을 좀 주세요.”

“하라면 하는 것이지, 시간을 가질 필요가 뭐가 있다고……!”

“제가 입 벙긋하길 기다리는 기자들이 아주 많아요. 아시잖아요? 같은 내용을 말하더라도 눈짓 하나, 손짓 하나에 따라 받아들이는 사람의 감정은 완전히 달라진다는 걸요.”

“협박을 아주 고상하게 하는구나.”

“협박이라니요? 너무나 걱정되어서 한 말인데요. 아직 미숙한 제가 감정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하고 가문에 흠이 날 만한 발언을 할까 두렵거든요.”

“열여덟 살이나 먹고 아직 미숙하다는 말을 그리 당당히 하다니, 민망하지도 않느냐?”

“아직 성인이 아닌 건 사실이잖아요.”

헨젤 백작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복잡한 표정을 하고도 빈정댐 이상의 말을 하지 못했다. 오드리 본인은 잘 모르겠지만 요즘 브란젤 내에서 오드리의 인기는 심상치 않았다. 그녀의 입을 열 수만 있다면 신발 밑창도 핥을 수 있는 기자들이 헨젤가의 담벼락에 수없이 달라붙어 있었다.

‘그놈의 포스터.’

‘왜 덧붙이는 말이 없지?’

오드리는 제 안의 혼란과 의문을 꽁꽁 숨겨 감추고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하델이 안 보이더군요.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건가요?”

“하델은 근신 중이다.”

“네? 집에만 있는 아이가 근신까지 당할 만한 일이 뭐가 있다고……. 혹시 2차 괴물 사태 때 브란젤을 나갔다 온 것 때문이라면 그건 제가 부추긴 일이니 너무 노여워 마시고 그만 용서해 주세요. 그래도 그때 브란젤 밖에 있었던 덕분에 괴물도 안 만나고 무사했잖아요?”

헨젤 백작이 일어선 오드리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를 노골적으로 훑었다. 오드리는 낯선 눈빛에 순간 움츠러들었다가 자존심 때문에라도 보란 듯이 어깨를 폈다.

“그게 아니라면 하델은 대체 무슨 이유로 근신 중인 거죠?”

“멋대로 왕궁에 출입한 죄다. 생일이 지났어도 아직 열셋. 내 허락도 없이 몰래 왕궁에 발을 들였으니 근신이 당연하지. 네 결혼식이 끝나기 전까지 하델은 만날 생각도 하지 마라.”

“어머……. 왕궁에 멋대로 들어갔다고요? 왜 그랬는지 이유를 물어도 될까요?”

“이유가 뭐가 됐든, 네가 알 것 없다. 얘기 다 들었으면 이만 가라.”

가르쳐 주지 않으면 직접 물어보면 된다. 마법의 주인이라는 용이 있고 의식분리가 있는데 그깟 근신이 무슨 벽이 되겠는가? 오드리는 헨젤 백작과 무의미한 신경전을 벌이느니 그게 낫다 판단했고, 방으로 돌아가자마자 셰비언을 찾았다.

“안 돼요, 아가씨. 씻고 옷도 갈아입고 깔끔하게 단장하신 다음 만나셔야죠.”

“난 지금도 깨끗해.”

“깨끗한 거 말고 예뻐진 다음에 만나세요.”

“아깐 단장 안 해도 예쁘다며? 그리고 셰비언이 나는 눈에 눈곱이 껴 있어도 예쁘댔어!”

“아버지를 만날 때와 애인을 만날 땐 당연히 달라야죠. 그리고 아가씨, 남자는 결혼 전에는 다 그렇게 말해요.”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결혼해 본 것도 아니면서!”

“표본이 많으면 평균치를 구하기 쉽죠. 아가씨보단 제가 더 남자를 많이 만나봤을 거예요. 보고 들은 것도 훨씬 많고요. 그렇지, 이디케?”

“그럼. 아가씨, 다이앤 말이 백 번 옳아요.”

“맙소사!”

다이앤과 이디케가 합심해서 달려드니 당할 재간이 없다. 오드리는 오랜만에 김이 무럭무럭 올라오는 욕조에 처박혀 다이앤과 이디케의 마사지를 받았다. 두 사람은 마사지를 받을 땐 마음이 편해야 한다며 보고서 한 장도 주지 않았는데, 사실 여기저기 뭉친 근육을 푸는 과정이 너무 아픈 나머지 보고서 달라고 할 정신도 없었다. 끝나고 의자에 앉자마자 앓는 소리가 절로 흘러나왔다.

“아파 죽는 줄 알았네.”

“그 정도론 안 죽어요, 아가씨. 괴물을 끌고 달리기까지 하셨으면서 웬 엄살이 그리 심하시담.”

“그거랑 이거랑 같아? 아으으……. 그보다 이디케 너, 나더러 좋은 일이 생길 거라고 했던 게 그거였어? 셰비언과 내가 결혼한다는 거?”

“오, 듣고 오셨어요? 하긴, 백작님께서 일부러 아가씨를 기다리기까지 하셨는데 당연히 말씀하셨겠죠!”

“아가씨, 백작부인이에요. 후작부인이 아닌 건 좀 아쉽지만 무려 용의 부인이잖아요. 이제 사람들이 아가씨 말이라면 다 죽는 시늉이라도 할걸요? 크, 상상만 해도 좋다!”

이디케와 다이앤이 호들갑을 떨었다. 오드리는 오랜만에 지끈거리는 두통이 엄습해 와 그만 이마를 짚었다. 오드리가 얼른 괜찮은 남자를 만나 편히 살기를 꾸준히 바랐던 이디케는 그렇다 쳐도, 하루빨리 작위를 얻고 독립하라던 다이앤마저 저런 반응인 게 기가 막혔다. 언제는 하델에게 독이라도 조금 먹이는 게 어떠냐고 속을 떠보기까지 했으면서 말이다.

“그 얘기는 그만! 아무리 일러도 두 달 뒤의 얘기고, 막상 닥쳐서는 결혼 안 할 수도 있어.”

“네에? 결혼을 안 할 거면 남자는 왜 만나요?”

“안 돼요, 지금부터 청첩장 보내야 하는데! 종이도 골라야 하고, 카드에 붙일 레이스도 골라야 하고…….”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 용의 부인 역할 따위를 하려고 여태 아득바득 버틴 거 아니야. 결혼은 내가 원할 때, 필요할 때 할 거니까 그 얘긴 이제 금지!”

오드리가 어찌나 강경한지, 이디케도 다이앤도 금세 풀이 죽었다. 오드리는 아쉬움을 애써 눌러 삼키는 둘을 모른 체하며 다른 쪽으로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내 얼굴을 그림의 모델로 써서 연극 포스터로 건 걸 봤어. 잘 그리긴 했지만 얼굴 주인의 허락도 없이 그러면 안 되지. 리즈비아 거리의 셜리 극장이라는데 누가 그렸는지 좀 알아보고…….”

“허락하셨잖아요, 아가씨.”

멍하니 눈을 깜빡이는 오드리를 앞에 두고 이디케가 쐐기를 박았다.

“네이기스 아가씨가 지금 그리는 그림에 아가씨의 얼굴을 써도 되냐고 물어보셨을 때 된다고 하셨잖아요.”

“그 그림이 네이기스의 작품이라고? 말도 안 돼, 내가 아는 화풍이 아닌……. 잠깐만, 내가 허락했다고? 대체 언제?”

“한 달쯤 전에 브란젤로 오는 중이라고 전보 치셨을 때요.”

새카맣게 잊어버렸으면 좋았을 텐데, 오드리의 성능 좋은 머리는 이디케의 말을 듣자마자 단박에 그날의 기억을 떠올려 버렸다. 셰비언에게 다알리아 머리핀을 선물 받은 데다 소도시 기차역에 설치된 데멘사를 보고 기분이 좋은 나머지 뭐든 괜찮다고 대답해 버렸던 그날을 말이다.

오드리는 휘청거리며 일어나 입고 있던 샤워 가운을 벗어던졌다. 훤히 드러난 알몸에 당황한 다이앤을 향해 당장 갈아입을 옷을 꺼내오라 소리를 질러놓곤 슬슬 꽁지를 빼려는 이디케를 콱 붙들었다.

“네이기스는 어디 있어? 당장 나오라고 해!”

“네이기스 아가씨는 얼마 전에 이 집을 나가셨어요. 포스터 이후로 메너트님이 계속 찾아오시는 바람에……. 여기에 계속 있기가 너무 괴롭다며 쪽지 한 장만 남기고 나가신 거라 어디에 계신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일부러 거처를 알리지 않으셨는데 제가 멋대로 찾는 것도 아니다 싶어서 적극적으로 알려 하지 않은 것도 있지만요.”

“뭐어?”

“포스터의 버전이 계속 바뀌는 걸로 봐서는 어딘가에서 계속 그림을 그리고 계신 것 같아요. 아가씨께서 크게 걱정하진 않으셔도 될 것 같은데……. 정 신경 쓰이시면 그웬가의 첫째 공자님께 말을 넣어둘까요? 남매들끼리는 연락이 되겠죠.”

오드리는 어지럼증을 느끼고 도로 의자에 주저앉았다. 포스터의 버전이 바뀐다는 말까지 듣고 나니 이제와 네이기스를 나무라 봐야 무슨 소용일까 싶었다.

“어쩌다……. 네이기스는 어쩌다 그런 그림을 그리게 된 거야?”

“글쎄요? 저는 네이기스 아가씨 담당이 아니어서……. 다이앤에게 물어보세요. 네이기스 아가씨는 다이앤이 거의 전담하다시피 했거든요. 말없이 떠나셨을 때 엄청 충격 받았어요.”

“다이앤!”

다이앤이 갈아입을 옷을 한 무더기나 끌어안고 달려왔다. 오드리는 대충 아무거나 입겠다는 말로 다이앤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다이앤은 의외로 군말 없이 오드리에게 옷을 입혔는데, 그녀가 주문대로 ‘아무거나’ 고른 옷은 하필 허리를 꽉 조이고 가슴을 강조하는 옷이었다.

“아니, 골라도 왜 이런 옷이야? 남부식 옷이 유행이라며!”

“저택 내부는 냉방 마법도구가 있어서 시원하니까 중부식으로 입는 것도 괜찮아요. 코르셋 확 조이진 않을 테니까 가만히 계세요. 예전에도 이 정도는 쉽게 하셨잖아요?”

오드리가 코르셋 비슷한 것도 안 하고 산 기간이 석 달이 넘었다. 그를 감안하면 손속에 여유를 둘 법도 하건만, 다이앤은 조금의 자비도 없이 코르셋을 조였다. 일 없이 잘 먹고 쉬는 동안 포동포동하게 살이 오른 오드리를 드레스에 집어넣으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오드리는 자신이 살이 쪘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 말이다.

“다이앤 너, 나 골려먹으려고 이런, 헉, 걸로 고른 거지…….”

“에이, 설마요. 딱 예전 사이즈가 나올 정도로만 조이고 있는걸요. 정 마음에 안 드시면 다른 옷으로 바꿔 입으실래요?”

“어으, 내 입이 방정이지. 내 입이 문제야. 됐고, 네이기스가 왜 내 얼굴을 넣은 벨트람 따위를 그리게 됐는지나 말해봐.”

“아가씨께서 윈디를 타고 괴물을 유인할 때, 네이기스 아가씨는 돌아오셔서 서관의 가장 높은 방에 계셨어요. 그 정도면 아주 멀리까지 보기는 힘들어도 대략적인 상황을 알아보기엔 충분한 높이잖아요? 또 아가씨가 이 근처를 지나기도 하셨고요.”

다이앤의 목소리가 심상찮게 떨렸다. 하지만 오드리는 코르셋의 고통 때문에 그런 자잘한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허윽…….”

“조금만 참으세요. 네이기스 아가씨는 자신이 본 광경을 기록하지 않으면 큰일 날 것 같다고 하시면서 그날 본 장면들을 그리셨어요. 동화책용 삽화를 그리는 틈틈이 스케치를 하고, 여러 가지 구도를 연습하고……. 그러다 구스토 씨가 직접 의뢰했던 그림을 보러 오셨는데, 그때 그 스케치도 보신 거예요.”

“남부식 드레스가 유행이라며, 왜 하필 이런 옷을……! 윽!”

“아무거나 고르라고 하셔서 무조건 예쁜 걸로 골랐어요. 아르젠 남작님이 보자마자 또 반하고 말 정도로 예쁘실 거예요.”

방긋 웃는 얼굴에서 한기가 스며 나왔다. 오드리는 하녀에게 치이는 제 처지를 안타까이 여기면서도 끝내 토를 달지는 못했다. 아무거나, 라고 말한 건 어디까지나 본인이었으니까. 다이앤이 솜씨 좋게 코르셋 끈을 엮으며 말을 이었다.

“하여간 그 그림이 구스토 씨의 마음에 쏙 들었나 보더라고요. 동화 삽화용으로 그린 그림은 그만하면 됐다며, 스케치만 하지 말고 완성을 해 보라고 독촉을 하셨어요. 완성되면 사고 싶다고요. 네이기스 아가씨는 본래 그리려던 거니까 좋구나 하고 그리셨고요.”

“맙소사. 그래도 그렇지, 내 얼굴은 왜 넣었대?”

“왜 들어갔긴요? 괴물을 죄다 끌어낸 사람이 아가씨니까 당연히 아가씨 얼굴을 썼죠. 한데 구스토 씨가 마지막에 마음을 바꾸셨지 뭐예요. 누군가가 연상되는 그림은 살 수가 없다며, 머리색도 바꾸고 얼굴도 다 뜯어고치라고 했는데…….”

“네이기스도 안 그런 척하면서 한 고집 하는데. 안 먹혔군?”

“네. 사기 싫으면 사지 말라며, 안 팔겠다고 하시더니 배경을 그날 밤을 연상시키는 소도구로 노골적으로 채우시더라고요. 그리곤 이왕 그린 거, 남들에게 많이 보여주고 싶다고 포스터 제작업체도 알아보시고……. 사실, 아가씨께 그림에 얼굴을 써도 되느냐고 물어보셨을 땐 그림이 완성된 다음이었어요.”

“무모하기는. 내가 안 된다고 했으면 어쩌려고 그랬대?”

“그런 생각은 아예 해 보지도 않으셨던 것 같아요. 허락 얘기를 꺼낼 때도 포스터로 인쇄할 정도면 한 장이 아니니까 말은 꺼내봐야지 않을까 하셨던 것 같고요.”

“……네이기스도 은근히 대책이 없다니까……. 아무튼, 그래서? 내가 사용을 허락하자마자 바로 포스터 돌린 건가?”

“네. 그웬가의 첫째 공자님이 많이 도와주셨어요. 의외로 그쪽에 발이 넓으시더라고요. 네이기스 아가씨와 상의하면서 포스터 형식에 뭘 넣으면 좋네, 이건 안 좋네 한참 떠들더니만, 며칠 뒤부터 새로운 그림이 포스터가 되어 브란젤 전역에 깔렸지 뭐예요.”

오드리는 머리가 띵한 이유가 코르셋 때문에 숨이 막혀서인 건지, 아니면 네이기스의 대범한 스케일 때문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아마 둘 다일 게 분명했다.

“돈은 누가 댔니? 설마 라디아타가 댔어?”

“그웬가의 첫째 공자님이 그쪽 계통의 친구분이 많으시더라고요. 저는 여기저기 심부름만 다녔는데, 어느새 뚝딱 포스터가 나오고 뚝딱 배포할 사람이 모이고……. 돈은 생각보다 덜 들었어요. 그거 아세요? 처음 배포한 포스터는 글자 같은 건 하나도 안 들어간 그냥 그림이었는데, 인기가 엄청났어요. 거리에 붙이고 돌아서면 없더라니까요!”

제 일도 아닌데 다이앤이 자랑스럽게 어깨를 폈다. 마침 이디케가 그동안 차곡차곡 모아두었던 포스터를 한 아름 안고 달려왔다.

“아가씨, 이거 보세요. 제가 아가씨 보여드리려고 모아뒀던 거예요. 이게 첫 번째!”

이디케가 커다란 포스터를 펼쳤다. 그건 오스미다가 왕궁회의에서 펼친 것과 같은 포스터로, 오드리가 금빛 마법진을 광배처럼 머리에 두르고 윈디를 탄 채 내달리는 장면이 그려져 있었다. 아래에서 살짝 올려다보는 구도는 역동적이고 화면 전체를 메운 머리칼은 화려했다.

오드리는 자신의 얼굴은 보지 않으려고 애쓰며 그림을 감상했다. 숲과 꽃, 호수로 가득 찬 풍경을 주로 그리던 네이기스의 이전 작품과는 결이 아주 다른 그림이었다.

“네이기스는 인물화에 약했는데……. 대체 언제 이렇게 발전했지?”

“괜히 천재 소릴 듣는 게 아니죠.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시더라고요. 말의 근육을 봐야겠다며 윈디 아래에 드러누워 스케치를 하실 땐 좀 많이 놀랐지만요.”

“윈디 아래 드러누웠다고? 미쳤대? 그걸 내버려 뒀어?”

“어휴, 말릴 수 있는 사람 아무도 없었어요. 베텔 경이 윈디 다루느라 고생 많이 하셨죠.”

이디케가 다음 그림을 펼쳤다. 이번엔 구도가 완전히 달랐다. 하늘과 땅이 구분되지 않는 어둡고 텅 빈 공간 가운데에 흰 망토를 두른 초록 머리의 기수가 검은 말을 타고 금빛 궤적을 남기며 달리고 있었다.

“……음침한데? 이것도 인기 있었어?”

“잘 보세요.”

이디케가 그림을 대각선으로 틀어 빛을 비췄다. 그러자 어두워 보이기만 하던 배경에 붓질로 만들어낸 농담이 화려하게 드러났다. 어두운 줄만 알았던 하늘엔 구름과 바람이 있었고, 땅에선 모래가 흩날렸다. 손으로 문지르면 번질 듯이 물감의 질감이 눈으로 확인됐지만, 정작 만져 본 포스터 표면은 매끈하기만 했다.

“물감의 질감까지 전달하려면 일반 종이로는 안 됐을 텐데……. 이것도 브란젤 전체에 뿌렸어?”

“네. 인기 엄청 좋았어요!”

오드리는 포스터에 쓰인 종이 가격을 어림짐작했다가 그만 질리고 말았다. 화가 한 명이 작품 활동에 개인적으로 쓰는 거라면 모를까, 포스터를 제작해서 브란젤 전체에 뿌리려면 돈이 어마어마하게 들었을 게 분명했다.

“다이앤, 이 포스터 제작과 배포에 돈이 얼마나 들었을지 생각 안 해 봤니? 엄청난 거액이야. 설마 이것도 다 에이쉬의 친분으로 해결된 거라곤 하지 않겠지? 솔직히 말해봐, 누가 돈을 댔지?”

“진짜예요, 아가씨. 진짜 그웬가의 첫째 공자님의 친분으로 일해주겠다는 사람이 아주 많았어요. 이 포스터에 쓴 종이만 해도 시중가의 절반, 아니 그 이하로만 받았는걸요. 그 정도 돈은 자신에게도 있다며 공자님이 대금을 지불하셨고요.”

“미친…….”

그웬 백작의 만류에도 아랑곳없이 여기저기 싸돌아다니더니만, 그가 쌓은 친분이 마냥 헛된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오드리는 옆구리를 찔러대는 이디케의 만류는 가뿐히 넘기고 남은 포스터를 폈다.

구도를 바꿔가며 계속 그렸다더니, 정말 그랬다. 수없이 많은 오드리가 그림마다 들어 있었다. 표정도 자세도 다르지만 풀어헤친 초록색 머리칼과 흰 망토, 흑마는 빠지지 않는 요소였고, 그중에서도 흰 망토와 흑마는 오드리를 전쟁과 승리의 신 벨트람 그 자체로 보이게 했다. 이 정도면 화가가 의도적으로 착각을 유도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오드리는 민망함에 발갛게 달아오른 귀를 만지작댔다. 네이기스의 그림 속에 나타난 자신은 거울로 보는 자신보다 훨씬 자신만만하고 오만하며 매력적인 인물로 보였다. 그녀가 걷는 길을 따르기만 하면 어떤 어려움도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 중에는 내가 본 그림이 없는데? 극장 광고는 어떻게 된 거야? 네이기스가 어디에 머무는지는 너희도 모른다며. 어떻게 알고 의뢰를 넣었대?”

“네이기스 아가씨는 거처를 숨기고 계시지만 포스터 제작 업체는 드러나 있잖아요. 그쪽으로 의뢰가 들어간 걸로 알아요.”

셜리 극장은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익명의 화가에게 벨트람의 그림을 의뢰했다. 구도와 형식을 제한하지 않으며, 정보 제공을 위한 글자 삽입까지도 화가의 자율에 맡기는 파격적인 의뢰였다.

네이기스는 자신은 그날의 오드리를 그릴 뿐이지 벨트람을 그리는 건 아니라고 정중하게 사양의 뜻을 밝혔으나, 셜리 극장에서는 상관없다고 대답했다. 얼굴이 누구를 닮았든, 머리칼이 검은색이든 초록색이든 상관없이 사람들은 그녀의 그림에서 벨트람을 본다면서. 다만 극장의 연극이 내려갈 때까지 새로운 포스터를 그리지 않는 걸 조건으로 걸었다.

한창 몸값을 높여야 할 시기인 화가의 자유로운 작품 활동을 제약하느니만큼 극장이 제시한 액수는 어마어마하게 높았다. 계속되는 박대에도 불구하고 연일 헨젤가를 찾아오는 메너트를 피해 도망친 네이기스가 혹할 정도의 액수였다. 에이쉬 역시 네이기스를 부추겼다. 실력을 보여줄 만큼 보여줬으니 이젠 돈을 받아야 할 때라며, 재능을 길바닥에 뿌리지 말라고 말이다.

오드리는 대충 사정을 짐작하고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일찍이 네이기스에게 제값을 받고 그림을 팔길 권했던 건 바로 자신이었다. 나무랄 수 없다는 걸 깨닫자 남은 건 좌절뿐이었다.

“결국 별 생각 않고 허락해 준 내가 자초한 일이로군. 이렇게 포스터를 찍어서 내 얼굴을 사방에 뿌려댈 거라는 걸 알았으면 절대 허락하지 않았을 텐데…….”

“어차피 아가씨의 얼굴은 신문에 실려서 멜브란트 전역에 퍼진 지 한참 됐어요. 새삼 포스터에 실렸다고 그렇게 좌절하실 건 없지 않나요?”

“무슨 소리야? 신문은 시간이 지나면 없어지지만, 네이기스의 그림은 역사에 남을 거란 말야. 그런데 각 잡고 그린 초상화도 아니고 벨트람 흉내로 얼굴이 박제되다니 이게 뭐람.”

“정 싫으시면 네이기스 아가씨께 연락할까요? 지금이라도 얼굴을 바꾸면…….”

“됐어. 이 포스터들이 한 달 내내 돌았다면서? 글렀어. 이제와 얼굴 바꿔봐야 초기 포스터가 희귀품이 되어 돌아다니는 꼴을 보게 될 거야……. 그 꼴을 보느니 천재 화가 네이기스 그웬의 모델이 됐다는 걸 자랑으로 삼아야지. 다이앤, 그보다 셰비언 좀 불러와.”

“드레스 마저 입으시면요. 그러고 나면 화장도 하셔야 하고, 머리도 올려야 하고, 보석도 고르셔야 하고. 아, 할 일 많다.”

다이앤이 빗과 머리 인두를 들고 생긋 웃었다. 소중한 포스터를 애지중지 챙기던 이디케도 지지 않았다.

“보고서 가져다 드릴 테니 앉아 계신 동안에는 보고서를 읽으세요. 로렐라이와 데멘사 일로 쌓인 보고서가 아주 많아요.”

오드리는 이번에도 하녀들을 당해내지 못했다. 그녀는 인형처럼 앉아 꾸며지면서 산더미 같은 보고서에 둘러싸이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여기저기 끌려 다니는 건 덤이었다.

‘싫은 건 아닌데 이상하게 서럽네.’

분명 주인은 자신인데 이럴 땐 주종이 바뀐 느낌마저 든다. 오드리는 입을 삐죽대면서 보고서를 읽었다. 로렐라이도 데멘사도 전보의 확충에 상당히 매달리고 있는 게 눈에 보이는 와중, 특이한 판매 이력이 발견됐다.

2차 괴물 사태 때 망가진 마법도구 전부를 로렐라이의 제품으로 갈아치우는 손님들이 포착된 것이다. 출입금지마법도구는 물론이거니와 방음장치, 온도와 습도조절 마법도구, 마법등, 복사 마법도구 등등. 어지간한 귀족가 저택 하나를 통째로 채울 만한 구매가 몇 건이나 있었다. 잘 팔았다고 그저 좋아하기엔 로렐라이에 대한 편견이 아직 공고했다.

이디케도 이를 이상하게 여기고 해당 손님들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조사를 진행했다. 오드리는 그 이상한 구매 행태를 보인 손님들의 명단을 확인하고 헛웃음을 지었다. 어쩐지 이름이 낯익다 했더니, 거의 대부분이 오스미다 왕비에게 소개받아 친분을 쌓았던 귀부인들이었다.

‘이거야 원, 뜻밖의 곳에서 도움을 받는걸.’

모여앉아 차를 홀짝대며 시답잖은 얘기를 하는 모임에 무슨 의미가 있어서 계속 불러내는가 했는데, 이 정도 돈을 턱턱 쓸 수 있는 사람들이라서 그랬구나 싶었다. 단순히 친분만으로 손해를 떠안을 사람들이란 인상을 받은 적이 없으니 자세한 속내는 직접 만나봐야 알겠지만 말이다. 자신을 평가하듯 바라보던 주름진 눈매들을 떠올리니 어쩐지 목이 탔다.

“만나야 되는 사람 왜 이렇게 많아……. 다이앤, 나 물 좀 줘. 얼음 잔뜩 띄워서.”

“찬물은 몸에 안 좋대요.”

오드리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당연히 다이앤이 대답할 줄 알았는데, 그녀의 옆에 서 있는 건 다이앤이 아니라 셰비언이었다. 마법사의 로브는 벗어버리고 멀끔한 신사로 단장한 셰비언은 당장 왕궁의 무도회장 한복판에 데려다놓아도 위화감이 없을 정도로 반짝거렸다.

“대체 언제부터 여기 있었어?”

“아가씨가 한참 서류를 보고 계실 때 들어왔죠. 삼십 분쯤 됐나…….”

“아니, 그렇게 일찍 들어왔으면 기척을 냈어야지! 가만히 서서 보기만 하다니 너무하잖아.”

“집중해서 일하는 모습이 너무 예뻐서 방해할 수가 있어야죠.”

그리 말하며 방긋 웃으니, 도저히 더 화를 낼 수가 없다. 오드리는 그만 김이 빠져 서류를 내려놓았다. 고개를 젖히자 귓가에서 찰랑거리는 귀걸이가 느껴졌다. 서류에 정신을 놓은 사이 다이앤과 이디케가 알아서 화장도 해놓고 장신구도 걸어놓은 모양이었다. 언제 다듬었는지 머리칼도 깔끔하게 빗어 올리고 머리핀과 보석으로 치장해서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이디케와 다이앤이 내 껍질을 한 꺼풀 벗길 기세로 치장했는데, 그대가 보기엔 어때?”

“눈부시게 예뻐요. 아주 잘 어울려요.”

“내내 앉아 일하는 것만 봤으면서 말은……. 셰비언, 빈말이 아주 많이 늘었는걸. 그래도 그대가 말하니까 기분이 좋아. 더 해 봐.”

“빈말이 아닌데……. 진짜 예뻐요. 아가씨를 볼 때면 주변의 다른 풍경들이 흐릿해지는걸요. 아주 은은한 마법등을 켜둔 것처럼 아가씨에게서 빛이 나요.”

“……내가 실수했어. 그만해도 돼.”

오드리는 얼른 항복 선언을 했다. 계속 듣고 있다간 얼굴 전체가 홍당무처럼 붉게 변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말만 하지 않을 뿐이지, 셰비언이 오드리를 바라보는 눈빛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애써 서류로 시선을 돌렸지만 글자는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고 자꾸 가슴만 뛰었다. 셰비언이 책상을 가볍게 두드려 오드리의 시선을 끌었다.

“아가씨, 목마르다고 하셨죠? 자요.”

비어 있던 물 잔에 물이 차올랐다. 빈 컵에 무슨 재주로 물을 채웠는지 알 길이 없었으나, 오드리는 사양 않고 컵을 받아들었다. 물은 마시기 딱 좋을 정도로 미지근했다.

“난 찬물이 좋은데.”

“알아요. 아가씨는 평소에도 냉차를 즐기시잖아요. 하지만 다이앤이 찬물은 아가씨 몸에 안 좋다고 그랬는걸요. 앞으로 저는 미지근한 물만 드릴 거예요.”

“다이앤 녀석, 약초학 원고 쓰는 거나 열심히 쓸 것이지 웬 오지랖을 부렸담.”

셰비언은 툴툴대면서도 꾸역꾸역 물을 마시는 오드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오드리가 표정을 짓고 말하고 움직일 때마다 주변의 풍경은 점점 흐릿해지고 시야엔 오로지 오드리만이 남아 반짝이는 빛을 뿜어냈다. 오드리에게서 빛이 난다는 건 그에게만은 절대 빈말이 아니었다.

“헨젤 백작님을 만났어요. 두 달 뒤엔 아가씨와 제가 결혼하게 될 거라고 하시더군요. 얼른 신혼살림을 꾸릴 집을 알아보는 게 좋겠다고 잔소리를 들었죠.”

“…….”

“아가씨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글쎄……. 어차피 귀족으로 태어나서 정략결혼은 피할 수 없는 문제인데, 상대가 그대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지. 하고 싶어.”

셰비언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그는 오드리를 끌어안으려 손을 뻗었지만, 오드리는 그의 가슴팍을 밀어내고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이대로 결혼해도 될까 싶은 것도 사실이야.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날 도구로 쓰려는 사람들이 추진하는 결혼이잖아. 날 그대를 조종하는 고삐로 쓰고 싶어서.”

“어라……. 아가씨라면 제 고삐를 잡으셔도 저는 아무 상관없는데. 오히려 환영이에요.”

“내가 그런 요구에 시달리는 게 싫어. 매번 양심과 이득 사이에서 고민할 내가 눈에 보여서 싫다고. 안 그래도 손톱만한 양심이 다 닳아빠질 게 분명해. 당장 오늘 아버님만 하더라도 내가 그대와 결혼하는 조건으로 만탈락을 제시하셨단 말이야.”

“만탈락을요?”

“그래. 그대와 결혼하면 만탈락을 내게 주신다지 뭐야. 본래 내 것인 도시를 무슨 커다란 상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야……. 근데 웃긴 게 뭔지 알아? 순간 흔들렸어. 사랑하는 그대와 결혼하면서 만탈락도 깔끔하게 챙길 수만 있다면 약간의 찝찝함쯤이야 별거 아닌데, 그 정도면 남는 장사가 아니냐는 생각이 들더라고.”

“…….”

“내 인생은 상품이 아닌데.”

오드리의 마지막 말엔 망설임과 두려움, 미세한 불쾌감과 오래된 고민 따위가 복합적으로 섞여 있었다. 라비린과 약혼하려고 스캔들을 내고 다닐 때에도 이렇게 마음이 복잡하진 않았다. 적어도 그건 그와의 결혼으로 얻을 것과 잃을 것을 명확하게 따져서 결정한 일이었지, 지금처럼 감정에 휘둘리는 상태가 아니었다. 지금 오드리는 스스로를 온전히 믿을 수 없었다.

셰비언의 미간에도 고민이 고였다. 솔직히 말해, 그는 오드리의 고민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더불어 아이샤의 피땀 어린 강의를 통해 인간 사회에서 결혼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게 됐다. 그렇다 보니 이전처럼 아가씨 편한 대로 하세요, 하고 물러나기가 쉽지 않았다.

“아무튼 그래서 나는 아직 마음을 못 정했어.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지? 내가 그대와 결혼하길 바라?”

“저는…….”

“결혼은 혼자 하는 게 아니잖아. 그대의 의견을 듣고 결정하겠어.”

셰비언은 그 답지 않게 한참을 우물쭈물했다. 그러다 오드리의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내려 할 때쯤이 되어서야 속내를 털어놓았다.

“사실은 아가씨의 마음이 가는 대로 하시라고 말하고 싶어요. 결혼을 하든 안 하든 선택을 기다리는 쪽은 나인데 무슨 말을 얹겠어요? 그저 날 잊지 말고 계속 내 손을 잡아달라 부탁하는 게 다인데. 그런데 그 말이 안 나와요. 겁이 나요…….”

“겁?”

“아가씨와 당당히 결혼할 수 있는 기회를 제 발로 걷어차 버렸다가 그 기회가 다시는 오지 않으면 어떡하죠? 다른 남자가 아가씨 좋다고 쫓아다니면 어떡해요? 그 남자가 헨젤 백작님의 마음에 차서 아가씨에게 결혼을 명령하면요? 그럼 저는 그걸 보고만 있어야 할지도 모르잖아요.”

“맙소사. 언제는 내가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하더라도 마음만 그대에게 있으면 나머지는 별 상관 없을 거라더니?”

“불륜은 안 할 거라고 하셨던 건 아가씨거든요! 그리고 그때 저는 결혼이 뭔지 제대로 알지도 못했다고요!”

셰비언이 오드리의 말에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그는 오드리의 웃는 얼굴을 보고서야 자신이 놀림당한 걸 깨닫고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었다. 민망하기 그지없었다.

“아가씨는 예쁘고, 젊고, 부자인 데다, 매력적이고, 건강하고, 신분도 높고……. 인간 사회에서 결혼상대자로서 매력적이라고 평가받는 조건들을 다 갖추고 있잖아요. 남자 서넛쯤은 아가씨 뒤를 졸졸 따라다녀도 이상하지 않다고요.”

“그대가 열거한 조건 중에서 적어도 두 가지는 다른 사람들이 동의하지 못할 것 같은데? 내가 젊고 건강하고 부자인 데다 신분이 높긴 하지만 예쁘고 매력적이진 않지. 봐, 눈 쌓인 곳에서 석 달을 지냈는데 피부가 희어지기는커녕 더 까매졌어. 조금만 더 타면 어디 외국에서 살다 온 사람으로 보일 거야.”

“아뇨……. 아가씨가 정말 매력적이지 않았다면 그웬 영애가 아가씨를 주인공으로 써서 그림을 그릴 리 없잖아요. 사람들이 그렇게 포스터를 떼어갈 일도 없을 거고요.”

“그건 내 얼굴 탓이 아니라 네이기스의 그림이 워낙 잘난 탓이야. 앞뒤를 바꾸면 안 되지.”

“그만한 안목이 있는 화가가 골라낸 모델이 아가씨라고요. 정말이지, 아가씨는 자신의 겉모습을 지나치게 낮게 평가해요. 아가씨의 초록색 눈이 얼마나 매력적인데요.”

셰비언이 워낙 단정적으로 잘라 말한 탓에 오드리는 거기다 대고 더 딴죽을 걸지 못했다. 아니라고 암만 말해 봐야 칭찬만 돌아올 테니, 계속 반박하는 것보다는 얼른 본래의 화제로 돌아가는 쪽이 훨씬 생산성 있었다.

“날 그렇게 매력적으로 봐주다니 고맙네. 그런데 셰비언, 그대가 생각하지 못한 게 있어.”

“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용이야. 무려 용이 마음에 뒀다고 공개적으로 밝힌 여자에게 어떤 남자가 구혼을 할까?”

“좋아하면 하는 거 아니에요? 그리고 귀족들은 가문 간의 교류와 결합을 중시한댔으니까…….”

“그건 이론적인 거고. 라디아타는 뭐 부족한 게 있고 빠지는 게 있어서 구애를 받지 못했던가? 왕자전하가 자신이 라디아타를 좋아한다고 대놓고 떠들고 다니셔서 그랬던 거지.”

“아…….”

“내 혼삿길은 한참 전에 막혔어. 지금 내게 남은 건 그대와 결혼을 할지 말지 정도라고. 자기가 했던 말을 그리 까맣게 잊어버리면 어떡해?”

오드리가 입을 삐죽대며 툴툴거렸다. 셰비언은 거의 자동 반사처럼 오드리의 이마에 키스하다 문득 라비린을 떠올렸다. 잠깐이나마 겪어본 바로, 라비린은 상대가 용이거나 말거나 다시 오드리에게 구애하고도 남을 인물이었다.

“……다른 남자에게 마음 주지 마세요.”

“갑자기 무슨 소리람. 결혼 어떻게 생각하냐니까?”

“특히 라비린에게는요. 아가씨가 아프실 땐 매일 병문안을 왔던 녀석이 왜 아직까지 들이닥치지 않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놈은 제가 용이라도 상관 안 할 거예요. 일단 자신이 아가씨의 마음을 뺏는 것에 성공하기만 하면 제가 그에게 아무런 해도 끼칠 수 없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어요.”

오드리는 콕 집어 라비린을 언급하는 셰비언의 말에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오드리가 시계탑에서 내려와 피를 토하고 쓰러져 집에 처박혀 앓을 적, 라비린은 매일매일 병문안을 왔었다. 올 때마다 오드리 취향에 딱 맞춘 화분이나 차 등을 가져 오는 그를, 오드리는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만나주곤 했었다.

마치 예전부터 절친한 친구였던 것처럼 천연덕스럽게 구는 라비린의 뻔뻔함이 어이없긴 했지만, 서로 사고방식이 비슷한 데다 그는 꽤 괜찮은 이야기꾼이라 만날 때마다 퍽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났다. 한데 그때는 아무 말도 안 하던 셰비언이 이렇게 라비린을 꼬집어 말하다니.

“라비린은 친구지. 말이 잘 통하긴 하지만 그래서 더 얄밉고 밉상인 친구. 알잖아.”

“알죠……. 그냥 제 불안이에요.”

셰비언은 의자에 앉은 오드리에게 맞춰 깊게 몸을 숙이고 그녀를 끌어안았다. 품에 쏙 들어오는 작은 몸이 너무 애틋해서 겁이 났다.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자신의 손 같은 건 단박에 떨쳐 내고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았다. 근거 없는 불안이라는 걸 알지만, 예전에도 지금에도 이 관계에서 약자는 자신이었다.

“전 아가씨와 결혼하고 싶고, 그래서 이 기회를 놓치기 싫어요. 하지만 그게 아가씨가 자신의 인생을 상품으로 만든다는 기분을 느끼며 하는 거라면 안 해도 돼요.”

그러니 할 수 있는 건 이런 것뿐이다. 욕망도 욕심도 다 누르고 자신을 잡아달라 애걸하는 것. 목을 감싸고 뺨을 더듬는 따스한 손길이 어쩐지 감격스러웠다. 봄바람 같은 숨결이 귓가를 간질였다.

“그대가 이런 대답을 할 줄 알았어.”

“…….”

“알면서도 물어본 내가 참 못됐지……. 미안해, 지금은 결혼 못 해.”

“괜찮아요. 셰비언 성벽에 처박혀서 아가씨와 떨어져 살 각오도 했었는데, 고작 ‘지금은’ 결혼 못 하는 걸로 그렇게 좌절하지 않아요. 시간은 숨만 쉬어도 흘러가잖아요.”

오드리는 셰비언을 끌어안은 채 웃었다. ‘지금은’이라는 말에 담아둔 속내를 이렇게 읽어내다니, 셰비언의 변화가 놀라웠다. 자신이 외면하는 동안 홀로 고생한 아이샤에게 감사조로 뭔가 선물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맞아, 시간은 숨만 쉬어도 흘러가지. 하지만 적당한 때는 숨만 쉬어선 오질 않으니……. 그대와 결혼할 수 있는 적당한 때가 오도록 내가 노력할게.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 주길 부탁해도 될까?”

“저, 기다리는 거 잘해요.”

셰비언이 새침하게 대답했다.

아, 귀엽기도 하지. 덩치 차이가 이렇게 나는데 왜 재롱 많고 순종적인 강아지를 어르고 달래는 기분이 드는 걸까. 괜히 속이 간질간질했다. 오드리는 참지 못하고 셰비언의 입술에 제 입술을 꾹 눌렀다가 더한 걸 하고 싶어지기 전에 얼른 떼어냈다.

다이앤이 정성들여 발라놓은 입술연지가 셰비언의 입술에 옮겨갔다. 흐릿한 베이지핑크색 입술에 붉은 연지가 물들자 입술에 꽃이 피어난 듯했다. 손으로 쓱 쓸어내자 손가락 끝에도 색이 물들었다. 오드리는 장난치듯 그 손가락을 셰비언의 뺨에 문질렀다. 우유처럼 흰 피부에 연지가 번졌다.

“릴리가 손님방을 내줬을 텐데, 어때? 마음에 들어?”

“나쁘진 않아요. 창문이 커서 숲도 잘 보이고, 바람도 잘 들어오고.”

“그래? 창문이 크다니 달도 잘 보이겠지? 보름은 아니어도 예쁘게 차오르는 상현달이 뜰 시기인데, 오늘 밤에 그대의 방에서 같이 달구경을 할까?”

오드리가 눈을 천천히 깜빡거리며 은근하게 물었다. ‘지금은’을 알아들을 정도가 되었으니 이 말도 알아듣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고서.

“어……. 그건 잘 모르겠어요. 달의 움직임까지 어떨까 신경 쓰며 살펴보진 않았거든요. 확인하고 알려드릴게요. 아니면 릴리에게 따로 물어볼까요?”

박수도 양손이 부딪쳐야 소리가 나고 불을 피우려면 장작이 말라 있어야 한다. 오드리가 나름 큰맘 먹고 건넨 말은 푸시시 식고 말았다.

“……아이샤 씨를 불러야 하나…….”

“아이샤 씨는 왜요? 그 꼬맹이 내놓으라고 하게요?”

오드리는 쓴웃음을 지으며 셰비언의 뺨에 입을 맞췄다. 좀 전에 손가락으로 문지른 것과는 비교도 안 되게 진한 입술 자국이 났다.

“꼬맹이도 꼬맹이고, 내 연인이 언제쯤 내가 속삭이는 밀어를 알아들을 수 있을까 궁금한 것도 있고. 그대에게 결혼 개념을 가르치는 데 성공한 아이샤 씨라면 그쪽의 강의도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야.”

“……!”

“오늘 밤에 그대의 방에 가도 될까? 달과 별이 모두 지고 해가 뜨는 새벽까지 함께 있을 수 있다면 더 좋을 것 같아.”

그제야 오드리가 무슨 의도로 달구경을 언급했는지 알아챈 셰비언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게 어느 정도였냐면, 오드리가 찍어놓은 입술 자국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오드리의 어깨를 감싸고 있던 팔도 순식간에 따끈따끈하게 달아올랐다.

“어, 얼마든지 오세요. 달이 아주 예쁠 거예요.”

좀 더 멋진 말을 하고 싶은데, 입 밖으로 나온 말이라곤 고작 이런 것뿐이다. 셰비언은 자신의 부족한 어휘력을 탓하고 싶어졌다. 그동안 읽은 책이 얼만데 이럴 땐 한 문장도 떠올리지 못하는 건지, 제 기억력이 이렇게 부족했나 기가 막혔다.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에 힘이 들어간 통에, 오드리가 미간을 찌푸리며 약한 신음소리를 냈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셰비언은 오드리에게서 한 세 걸음은 족히 뒤로 물러났다. 마치 자신이 뭔 짓을 할지 몰라 무서워하는 것처럼. 그는 그녀의 체온이 남은 팔을 문지르며 횡설수설 정돈되지 못한 말을 쏟아냈다.

“그럼 아가씨는 계속 보던 일 보세요. 전 저녁까지 잠깐만…… 잠깐만 나갔다 올게요. 데멘사의 전보가 잘 굴러가고 있는지도 봐야 하고, 워커의 강철새엔 얼마나 진척이 있을지도 궁금하고……. 그 꼬맹이에게도 한번 갔다 와야 할 것 같고, 왕궁에도……. 할 일이 많네요. 네.”

오드리가 탁자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괴었다. 다이앤이 골라 입힌 드레스는 목과 어깨를 거의 대부분 드러낸 디자인이었다. 깔끔하게 틀어 올린 머리칼 덕에 훤히 드러난 목덜미에 햇살이 닿아 자르르 윤기가 흘렀고, 풍성한 치맛자락 사이마다 뿌려놓은 향수 때문에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향기가 함께 일렁거렸다.

“이, 이따 봬요!”

셰비언은 그대로 도망치듯 오드리의 방을 빠져나갔다. 오드리는 황급히 사라지는 은발 끄트머리를 보며 키득대다 아까 읽다 만 보고서를 다시 집어 들었다. 하지만 보고서 속의 글자에 영 집중이 안 됐다. 깨알 같이 적어 넣은 글자들이 멋대로 흩어져 셰비언의 얼굴을 만들어냈다. 그를 알아챈 순간, 오드리의 얼굴에 확 열이 올랐다.

‘……아으, 내가 무슨 정신으로 밤에 찾아가겠다고 한 건지 모르겠네. 미쳤나 봐.’

셰비언을 놀릴 땐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혼자 남은 지금에 와서야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온몸이 따끈따끈해졌다. 오드리는 좀체 읽히지 않는 보고서를 쥐고 끙끙대다 탁자에 머리를 박았다.

“목욕이나 한 번 더 할까…….”

마음이 심란하니 떠오르는 건 현실도피뿐이다. 오드리는 잔뜩 부푼 비누 거품과 뜨끈뜨끈한 목욕물을 상상했지만, 좀처럼 기분이 나아지질 않았다. 뭔가 빠뜨린 것처럼 허전했다.

‘아, 맞다. 본래 하델 문제로 불렀던 거였지…….’

뒤늦게 떠오른 용건에 혀를 찼지만, 이미 늦었다. 오드리는 붉어진 얼굴로 뛰쳐나간 셰비언을 도로 불러오기보다는 그냥 밤을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한나절 정도 시간을 둔다고 해서 무슨 큰일이 일어날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그보다 이제 피올을 닦달할 수 없는 처지가 됐다는 게 몹시 아쉬웠다. 네이기스와 적당한 때에 결혼하겠다는 말을 주절댄 것에 대해 퍼부어주고 싶은 게 많았는데, 자신 역시 그와 같은 말을 하게 되다니 말이다. 이 사실을 피올이 알게 되면 두고두고 놀림당할 거라는 위기감이 들었다. 그가 자신을 비웃는 걸 상상하자마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오드리는 피올의 귀에 이 사실이 들어가지 않도록 하는 방법들 여러 가지를 주르륵 떠올렸으나 하나같이 현실성이 떨어졌다. 피올이 라비린의 동생이자 라디아타의 오라버니인 이상, 언젠가는 반드시 소식이 들어갈 게 분명했다. 손에 쥐고 있던 보고서가 구깃구깃해졌다.

보고서가 너저분한 종이쪼가리가 되기 직전, 다이앤이 탁자를 두드려 오드리의 정신을 망망대해에서 끄집어냈다.

“아가씨, 손님이 오셨어요.”

“손님? 누구?”

“벨키스 경이 오셨는데……. 돌아가시라고 할까요?”

오드리는 그만 눈을 감고 이마를 짚었다.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오랜 요양에서 돌아온 지 하루도 되지 않았으니 다이앤 선에서 그만 돌아가게 했을 텐데, 하필 한 번쯤 얼굴을 보긴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라비린이었다.

“……응접실로 안내해.”

셰비언이 조금 싫어할지도 모르겠지만, 어쩔 수 없다. 마침 손님을 맞이하기에 모자라지 않은 차림이기도 했다. 그렇게 오드리는 라비린을 만났다. 라비린이 오드리를 보자마자 환하게 웃었다.

“건강해 보이네. 쓰러져 있을 때보다 훨씬 좋아 보인다.”

“소식도 빨라. 어떻게 이렇게 일찍 왔어?”

“그래? 난 나름대로 충분히 여유를 두고 왔다고 생각했는데. 봐, 약속도 없이 왔지만 오래 기다리지 않고 만날 수 있었잖아.”

오드리가 치장할 만한 시간을 충분히 고려해서 왔다는 얘기였다. 혹시나 너무 일찍 와서 거절당하는 일이 없도록 말이다. 오드리는 그만 미간을 찌푸리고 털썩 소파에 주저앉았다. 예의 같은 건 개나 주라는 듯 방만한 태도였다.

“확 돌려보낼 걸 그랬어.”

“설마 그럴 리가. 넌 쓸데없을 정도로 성실하니까 친구를 내보내진 않을 거라고 믿었지.”

“누가 친구야? 너? 웃기시네. 네가 라디아타의 오라버니만 아니었으면 걸레 빤 물을 뒤집어 씌워서 쫓아냈어.”

“냉정하기는. 그 라디아타의 일로 왔으니 오늘은 좀 봐줘.”

갑자기 라디아타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오드리는 깜짝 놀라 늘어졌던 자세를 바로잡았다.

“라디아타에게 무슨 일 있어?”

“요즘 이상하게 우울해해. 결혼이 한 달 남아서 그런 건지 어떤 건지……. 힘이 되어주고 싶은데, 너도 알다시피 나는 그 애에게 발 달린 화분 이상이 되질 못하잖아. 네가 와서 기분을 좀 풀어주면 좋겠는데.”

익숙한 두통이 뒷덜미를 찔렀다. 오드리는 반사적으로 의자 손잡이를 두드리려다 그냥 주먹을 쥐고 충동을 참아냈다.

“……시간을 오래 쓸 수 없어. 저녁 전엔 돌아와야 해.”

“당연하지, 설마 이제 막 요양에서 돌아온 사람을 자고 가라고 붙들겠어? 나 그렇게 몰상식한 놈 아니야.”

라비린이 몹시 억울하다는 듯 가슴을 두드렸다. 세상에서 제일 결백한 사람인 것처럼 구는 그의 태도가 오드리의 속을 툭, 건드렸다. 덮고 덮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매끈하게 다져 두었던 상처가 금세 제 존재를 주장하며 벌어졌다.

“손을 잡은 상대에게 정보도 제대로 안 주는 놈이 멀쩡하긴 뭐가 멀쩡해?”

“응? 무슨 말이야, 난 나름대로 너에게 최선을 다했거든? 결혼 계약서도 구해다 줬지, 본가의 친척들이 날뛰는 걸 막아도 줬지, 얼마 전엔 피로 길을 열어주기까지 했잖아. 내가 너에게 얼마나 헌신적이었는지 벌써 잊어버렸어?”

“헌신? 지금 헌신이라고 했어? 넌 내 아버지에게 우리 둘이 무슨 생각으로 스캔들을 내고 만났는지 일러바쳤어. 아버님이 조금만 한가했더라면 난 지금쯤 로렐라이의 알짜 재산을 다 뺏기고 빈털터리가 되어서 손가락만 빨고 있었을 거야. 사실은 지금도 아슬아슬해. 젠장, 성년이 되기도 전에 재산을 내 명의로 돌리는 짓을 하게 될 줄이야!”

일단 물꼬가 트이자 꾹꾹 눌러두었던 감정이 거침없이 쏟아졌다. 오드리는 말도 삿대질도 아끼지 않고 퍼부었다. 라비린에게 느꼈던 배신감으로 몇 날 며칠을 울며 보냈던 걸 생각하자 열이 끓어올랐다.

하지만 오드리에게 일방적인 비난을 들으면서도 라비린의 태도는 별로 달라진 게 없었다. 그는 그저 어깨를 으쓱이고 보기 좋은 미소를 지었을 뿐이었다.

“음……. 그렇게라도 해야 유언장 원본의 행방을 알 수 있을 것 같았거든……. 구체적인 장소를 알아내지도 못해서 네 신뢰를 깬 보람도 없이 끝나고 말았지만 말이야. 처음부터 목적을 갖고 백작님께 접근한 거니까 그것도 널 위해 그랬던 걸로 쳐 주면 안 될까?”

“웃기시네.”

“맞아, 웃겨. 지금 생각하면 닳고 닳은 헨젤 백작님이 내가 접근한 목적을 몰랐을 리가 없지. 솔직히 말해 내가 그분을 이용하기는커녕, 오히려 이용당한 것에 가까울걸. 그래도 우리 결혼계약서 내용은 안 불었어. 백작님의 결혼계약서를 빼돌린 것도 잘 감췄고. 그러니 용서해 줬으면 좋겠는데……. 아직도 내가 용서가 안 돼?”

라비린이 퍽 진실성이 느껴지는 표정으로 읍소했다. 북부의 사람들만큼이나 넓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얌전히 눈꼬리를 내리고 애처로운 표정을 짓는 게, 마치 덩치 큰 대형견이 주인의 눈치를 보는 것처럼 안쓰러워 보는 사람의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그러니 어지간하면 마음을 풀 만도 하건만, 오드리는 그런 라비린이 꼴도 보기 싫다는 듯 혀를 차며 일어섰다.

“라비린, 네가 진짜 나를 위했고 오로지 정보를 빼낼 목적으로 내 아버지에게 접근했다면 그걸 내게 숨길 이유가 없어. 하필 파혼하는 순간에 그걸 밝힐 이유도 없었고. 넌 나와 아버지 사이에서 줄타기를 한 거야. 양쪽에 다 유효한 카드를 들고 어느 쪽에 붙어야 더 이득일지 계산했던 거지. 내 추측이 틀렸다면, 그게 아니라면 부정해 봐.”

“오드리……. 난 너에게 잘했어.”

“맞아, 넌 나에게 잘했어. 그걸 부정하진 않겠어. 하지만 이제와 이런 얘기를 늘어놓은들 내겐 변명으로밖에 안 들려. 됐어, 그 얘기는 이제 끝난 거야. 나도 멍청하지, 네 앞에서 이런 얘기를 주절주절 떠들어대고……. 젠장! 릴리, 마차 준비해 줘. 라디아타를 만나러 갈 거야.”

“아니, 마차는 내가 타고 온 걸 같이 타면 돼. 왜 일을 늘리려고 해? 그럼 늦잖아. 몰리 양, 따로 준비하지 않아도 돼. 오드리는 나와 같이…….”

“넌 닥쳐. 내 하녀고 내 사람이야. 외부인 주제에 누구에게 명령하려고 들어? 릴리, 마차 준비해! 다이앤, 넌 모자랑 장갑 챙겨오고!”

면전에서 험한 말을 들은 라비린이 어쩐지 어두운 낯빛을 하고 다시 소파에 주저앉았고, 오드리는 그런 라비린은 꼴도 보기 싫다는 듯 팩 고개를 돌렸다. 우울하고 어두운 침묵이 응접실을 무겁게 채웠다.

“……그날 이후로 후회 많이 했어. 네가 피를 토하고 쓰러지는데 난 염려의 말도 못 하고, 손가락 하나 대지도 못하고…….”

“그 입 다물어.”

“지키려고 떠나보낸다는 말이 얼마나 헛되고 멍청한 소린지 그제야 알겠더라.”

“계속 그런 헛소리를 지껄이면 이 저택에 출입 금지될 줄 알아.”

“본가에서 그렇게 널 보내고 아버지에게 엄청나게 혼났었어. 분명히 후회할 테니 지금이라도 얼른 쫓아가서 관계 개선에 힘쓰라고 하셨는데……. 그땐 그 말이 우습기만 했거든? 근데 아니더라. 전부 맞는 말이었어.”

우울한 낯으로 진심을 토로하는 라비린이 오드리에게 얼마나 같잖아 보이는지 그는 모를 것이다. 오드리는 다이앤이 건네준 모자를 받아 쓰고 거울을 들여다보며 옷맵시를 갖췄다. 레이스로 짠 여름용 장갑을 끼고 작은 양산을 팔목에 걸고 나자 예비 왕세자비를 만나러 가기에 적당한 차림이 됐다.

“라비린 벨키스 경, 적당히 친구로 지내기로 했으면 그에 맞춰 행동하셔야죠? 계속 그런 식으로 굴면 그나마 있던 친분마저 후회스러워지는 수가 있어요.”

“……오랜만에 존댓말을 들으니까 거리감이 확 드네.”

“계속 나한테 존댓말을 듣고 싶으면 계속 그렇게 행동하시든지.”

차가운 말이 라비린의 가슴에 창처럼 꽂혔다. 긴장이 심해서 물 한 모금 넘기지도 못하고 왔는데 멀미라도 하는 듯 속이 울렁거리고 목구멍에서 쓴물이 올라왔다. 하지만 그런 제 마음을 겉으로 드러내 봐야 오드리에게 더한 비웃음만 당할 게 분명했다.

‘그래……. 이렇게 격 없는 대화를 할 수 있는 사이로 남은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겨야지.’

라비린은 잠시 잠깐 드러냈던 속내를 감추고 멀끔하게 표정을 가다듬었다. 아직 낫지 않은 상처를 건드린 건 오드리가 먼저지만 손을 놓은 건 자신이 먼저였다. 이만큼 받아주는 것도 용하다 싶은 상황에 사실은 나도 힘들었다고 더 말해 봐야 구질구질한 매달림이 될 뿐이었다.

“하긴, 땅에 쏟은 물을 도로 주워 담을 수도 없는데 이제와 이런 말을 꺼내봤자 무슨 소용이겠어. 그때 그렇게 했으면 좋았을걸, 하고 곱씹어봐야 과거가 바뀌는 것도 아닌데.”

“알면 다행이고.”

“라디아타를 잘 부탁해.”

“그런 말 안 해도 라디아타는 잘 챙길 거야. 나는 이제 나갈 테니 너도 이제 가. 주인 없는 응접실에 손님이 계속 엉덩이를 붙이고 있으면 안 되지.”

오드리가 코웃음을 치며 라비린을 쫓아냈다. 라비린은 쓴웃음을 짓고 타우레드의 마차로 돌아왔다. 오드리와 함께 갈 생각에 말이 아닌 마차를 골라왔는데, 텅 빈 맞은편 좌석이 너무 넓어 보여 속이 쓰렸다. 그는 모자를 내팽개치고 마구 머리를 헤집었다.

“……결혼하지 말란 말을 하러 간 거였는데.”

우울한 라디아타는 그저 핑계고, 사실은 결혼하지 말란 말을 하고 싶었다. 너는 결혼으로 신분상승을 노릴 만한 계층의 여자가 아니고, 네 목표는 결혼으로 이룰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결혼 따위를 포상으로 받지 말고 다른 걸 받아내라고.

하지만 막상 오드리의 얼굴을 보자 그런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도리어 그녀가 결혼 대상으로 고려할 만한 남자에 자신이 포함됐으면 좋겠다는 염치없는 소망이 제 안에 존재했다는 걸 깨달았을 뿐이었다.

‘괜찮을 줄 알았는데…….’

마차에 탄 이후 출발하잔 말 없이 조용한 라비린이 걱정되었는지, 내내 고삐만 쥐고 있던 마부가 작은 창문을 열고 라비린을 불렀다.

“벨키스 경, 출발할까요?”

“어디로?”

“예? 그야 저택으로…….”

“아니, 저택은 됐어. 브란젤역으로 가주겠나?”

마부는 어리둥절하면서도 라비린의 요청을 거역하지 못하고 브란젤역으로 마차를 몰았다. 라비린은 브란젤역에 도착하자마자 목적지 따위는 상관하지 않고 지금 살 수 있는 가장 빠른 표를 샀다. 눈을 두는 곳마다 오드리의 얼굴이 포스터로 도배돼 있는 브란젤에서 당장 벗어날 수만 있다면, 그게 어디든 다 좋을 것만 같았다.

라비린이 기차표를 사고 오드리는 라디아타를 만나러 가는 그 시각, 셰비언은 왕궁마법사의 숙소에서 아이샤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아깐 싫다면서? 떨어지라고 막 난리를 부렸으면서.”

“그거야 아까 얘기고요. 셰비언님이야말로 반나절만에 마음이 바뀐 이유가 뭔데요?”

“뭘 거 같아?”

“……안 물어봐도 알 것 같긴 하네요.”

아이샤가 뒷목을 주무르며 한숨을 쉬었다. 만사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유하기만 한 셰비언이 강경하게 구는 몇 가지가 있는데, 그게 바로 마법과 오드리와 로렐라이였다.

“오드리 아가씨는 왜 갑자기 남의 제자에 눈독을 들인대요? 본인이 마법사인 것도 아니면서!”

“오드리 얘기 한 번만 더 해 봐, 어떻게 되나.”

“와, 용이 인간 협박한다! 여긴 셰비언 성벽도 아니고 인간의 도시인데 용 무서워서 어떻게 살까 몰라! 아이고 무서워라!”

셰비언의 둥지에서 석 달을 함께 보낸 시간이 있어 용에 대한 아이샤의 공포심은 예전보다 훨씬 줄어든 상태였다. 마법의 주인에 대한 경외감이야 여전하지만 그마저도 오드리와 벌이는 연애 행각을 볼 때마다 쭈그러들었다 펴지기를 반복해 지금은 주름이 자글자글했다.

다른 왕궁마법사들은 차마 그들 사이에 끼어들지 못하고 흘끔흘끔 훔쳐보기만 했다. 책을 거꾸로 들고 읽는 척하는 마법사, 코를 자꾸 빠뜨려서 레이스인지 걸레짝인지 모를 작품을 뜨고 있는 마법사, 자꾸 차를 흘려서 앞섶이 흥건하게 젖은 마법사……. 그들의 눈엔 셰비언에게 지지 않고 따박따박 말대꾸를 하는 아이샤가 간덩이가 붓다 못해 미친 것처럼 보였다.

“좋아, 그럼 비니타에게 물어보자. 누구 제자가 되고 싶은지!”

“미쳤나 봐! 애가 뭘 안다고 애한테 물으래요?”

세상에, 들었어? 지금 용한테 미쳤다고 했어. 쟤가 돌았나 봐. 석 달 동안 뭔 일이 있었기에 저렇게 이상해지지? 수군대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아이샤는 꿋꿋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안 되는 이유는 더 있어요. 제가 벌써 마법사협회에 등록했거든요! 마법사 아이샤 아네메의 제자, 비니타 아쥬시!”

셰비언이 쯧, 하고 혀를 찼다. 마법사협회의 지부가 없는 소도시였다면 반나절은커녕 서류가 오가느라 이레는 족히 걸렸을 제자 등록이지만 여긴 브란젤이었다. 아이샤가 아까 헤어지자마자 바로 협회에 가서 등록을 했다면 지금쯤 서류작업이 거의 끝났을 게 분명했다.

예전의 셰비언이었다면 그렇군, 내가 늦었군, 하고 순순히 물러났을 것이다. 하지만 요즘의 셰비언은 오드리의 옆에 있으면서 인간들이 어떤 경우에 ‘융통성’을 발휘하는지 아주 잘 알게 된 상태였다.

“그깟 등록, 없던 일로 하면 되지. 딱 기다려, 비니타를 자유의 몸으로 만들고 올 테니까.”

“자유의 몸은 무슨? 누가 들으면 내가 애한테 족쇄라도 채운 줄 알겠네요!”

셰비언이 마법사협회에 가서 제자 등록을 없던 일로 만들려던 그때, 위층에서 와다다 달려 내려온 비니타가 아이샤의 허리를 덥석 끌어안았다. 깨끗하게 목욕하고 새 옷을 입은 비니타는 확연히 달라진 겉모습도 겉모습이지만 환하게 펴진 표정부터가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아이샤! 방 너무 좋아요! 마음에 들어요! 이제 협회에 가는 거예요?”

셰비언이 휙 돌아섰다. 아이샤는 차마 셰비언과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질끈 눈을 감았다. 침묵으로 아이샤의 거짓말에 협력하던 다른 마법사들도 분분이 눈을 피했다. 사정 모르는 비니타만 셰비언을 반가워할 뿐이었다.

“남작님! 또 뵙네요! 아이샤가 절 제자로 삼아준대요! 이 숙소에 제 방도 마련해 줬고요, 협회에 가서 제자 등록도 시켜줄 거랬어요! 나중에 정식 마법사가 되면 왕궁마법사가 될 수도 있을 거래요!”

“오, 그래? 난 또, 벌써 협회에 다녀온 줄 알았지. 제자 등록을 아직 안 했구나.”

용의 마력을 타고난 비니타는 두려움 없이 셰비언의 옷자락에 매달렸다. 아이샤가 새 옷도 사주고 목욕탕도 데려가줬다고 조잘대는 얼굴에 행복이 가득했다.

“아이샤가 아주 잘해줬나 보네. 하지만 꼬맹아, 멜브란트에서 왕궁마법사는 취급이 그리 좋지 않아. 아이샤를 따라 왕궁마법사를 하는 건 다시 생각해 봐. 다른 방향으로 나가는 게 훨씬 네 장래를 위해 좋을 거야.”

셰비언이 얼음도 녹일 미소로 비니타의 넋을 쏙 빼놓았다.

“그러니 아이샤 말고 다른 스승은 어때? 왕궁마법사보다 훨씬 돈도 많이 벌고 성공한 마법사를 소개시켜 줄게. 능력도 재주도 아이샤보다 나을 거야.”

“셰비언님, 저도 나름 능력 있거든요?”

“거짓말도 안 할 거고 말이야.”

아이샤가 입을 꾹 다물었다. 비니타가 아이샤와 셰비언 사이에서 큰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로렐라이 상단 알지?”

“네. 레이디 오드리의 도시, 만탈락에 뿌리를 둔 상단이잖아요. 브란젤로 올라오던 길에 부모님이 만탈락을 구경시켜 줬었어요.”

“그 로렐라이를 지탱하는 천재 마법사, 워커 크라티우스를 소개시켜 주마. 하늘을 나는 강철새를 만들겠다는 꿈에 미쳐 있긴 해도 그 실력과 재능만큼은 나무랄 데가 없는 마법사야. 나와는 아주 친하지. 꼬맹이 네가 워커의 제자가 되면 나중에 정식 마법사가 됐을 때 자연스레 로렐라이에 채용될 가능성도 높아져.”

“제가 로렐라이의 마법사가 된다고요?”

“그래. 꼭 로렐라이가 아니더라도 오드리 아가씨가 네게 관심이 아주 많아. 네가 타고난 재능을 제대로 개발하기만 하면 경제적으로 곤궁해질 일은 없을 거다. 부모님의 허락이 필요하면 내가 설득해 줄 것이고, 지낼 곳이 필요하면 그것도 마련해 주마. 어때?”

입으로는 싫다고 투덜대면서도 할 수 있는 건 다 해준 아이샤, 마법사로 성장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을 제시한 셰비언. 비니타는 둘 중 어느 쪽도 택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했다. 아이샤가 깊은 한숨을 내쉬고 비니타를 툭 떠밀었다.

“비니타, 셰비언님께 고맙다고 해. 셰비언님, 비니타는 2차 괴물 사태 때 부모님을 다 잃었어요. 지금은 제가 비니타의 보호자니까 그 자격으로 워커 크라티우스 씨의 행동을 눈으로 보고 나서 보낼지 말지 결정할게요. 워커 씨가 비니타를 받아줄지 아닐지는 모르는 거잖아요.”

“아이샤!”

놀란 비니타가 아이샤를 붙들었지만, 아이샤는 매몰차게 비니타를 밀어냈다.

“왜? 내가 너 받고 싶어서 받은 건 아니라는 거 처음부터 잘 알았잖아. 새삼 놀란 표정 짓기는. 그리고 워커 씨의 제자가 되는 거, 큰 기회다 너. 왕궁마법사 같은 걸 하려고 그걸 놓치는 건 멍청한 거야.”

“아이샤, 저 버리는 거예요? 제가 곧바로 아이샤라고 대답하지 않아서 그래요? 아이샤, 제가 잘못했어요!”

“무슨 소리야, 얘가. 내가 네 부모라도 된다니? 셰비언님, 지금 당장 가죠.”

“아주 협조적이네. 어쩌다 마음이 바뀌었어?”

“용에게 어린애를 맡기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으니까요. 아무리 억지로 떠맡은 거라도 부모 잃은 아이를 용에게 보내는 건 좀 너무하잖아요?”

비니타가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지만, 숙소 로비를 차지한 마법사들 중 누구도 비니타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비니타는 눈물 자국도 채 마르지 않은 상태로 아이샤의 손에 끌려 말브레 극장 지하에 마련된 워커의 연구실에 가게 됐다.

전보를 개발하던 시기, 셰비언은 그 연구실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다. 그래서 연구실의 구석구석까지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었는데, 몇 달 만에 다시 들어가 본 연구실은 이전과는 매우 다른 풍경이었다.

넓은 연구실 한가운데에 강철새가 날개를 펴고 있는 거야 익숙했다. 하지만 깔끔하던 주변엔 온갖 종류의 부품과 장비들이 쌓여 있었고, 마법진인지 낙서인지 모를 선으로 가득 찬 종이들이 사방에 뒹굴고 있었다. 서랍은 죄다 열려 있고 걸을 때마다 뭔지 모를 부스러기가 밟혔다. 도둑 서넛이 들어와 죄다 헤집고 돌아다녀도 이보단 깔끔할 터였다.

문을 여느라 날렸던 먼지가 코를 간질이는 탓에 비니타가 연신 재채기를 해댔다. 에이치! 아이샤는 로브자락으로 코를 틀어막았고, 셰비언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에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뭐야, 이거?”

“에취! 남작님, 저게 강철새예요? 저게 진짜 하늘에 떠요?”

“아직은 못 떠. 하지만 연구가 좀 더 진척되면 뜰 수도 있지. 도대체 워커 이 녀석은 연구실을 이 꼴로 만들어놓고 어딜 간 건지……. 어, 함부로 만지면 안 돼!”

셰비언의 만류는 한 박자 늦어서, 그땐 이미 비니타가 강철새에 손을 얹은 다음이었다. 비니타는 싸늘하게 손을 식히는 금속의 온도에 부르르 몸서리를 쳤다. 그 순간, 지하 연구실 전체가 완전히 다른 장소로 뒤바뀌었다.

허리춤까지 자라 알곡이 영근 밀이 드넓은 벌판을 채우고, 노을 물든 하늘엔 검은 깃을 가진 새들이 떼를 지어 날았다. 새 떼가 지나가고 나자 검은 깃털이 눈처럼 떨어졌다. 제 어깨에 떨어진 깃털을 주워든 비니타가 후우, 바람을 불었다.

그걸 기다렸다는 것처럼 풍경이 일렁거렸다. 노을이 흩어지고 밀에서 알곡이 떨어졌다. 몇 번 눈을 깜빡인 다음 순간, 셰비언을 비롯한 일행들은 다시 연구실로 돌아와 있었다. 그것도 도둑이라도 맞은 것처럼 엉망이던 연구실이 아니라 깔끔하게 정돈되고 뭔가 뚱땅거리는 소리가 요란한 연구실이었다.

책상에 주저앉아 턱을 괴고 있던 워커가 셰비언에게 손을 흔들었다. 뺨의 살이 빠져 수척해보이기는 해도 표정은 아주 밝았다.

“셰비언! 오랜만이야! 해는 넘긴 다음에 올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일찍 왔네. 아가씨는 어때? 잘 털고 일어나셨나?”

“미친 놈, 방문자를 대뜸 공간으로 끌어들이다니……. 정 보안이 중요하면 그냥 자물쇠를 걸어!”

“하하하, 해 보니까 좋더라고. 공간을 쓰는 연습도 되고, 의식분리도 더 정교하게 할 수 있게 되고……. 그런데 너, 몰랐지?”

셰비언은 미간을 찌푸렸다. 다 알면서 굳이 캐묻고 히죽히죽 웃는 워커가 어찌나 재수가 없는지, 속았다는 말을 해주는 게 싫었다. 그는 뚱하게 팔짱을 끼고 툭 내뱉었다.

“나 혼자 왔으면 금방 알았을 거야.”

“예이! 내가 용을 속여먹었다! 하하하! 좋아, 오늘을 내 두 번째 생일로 삼아야겠어. 마법사 워커 크라티우스, 오늘 다시 태어나다!”

책상 위에 올라가서 펄쩍펄쩍 뛰는 워커는 어딘지 미친 사람처럼 보였다. 셰비언은 그저 혀를 차고 말았지만, 아이샤와 비니타는 그때까지도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비니타는 주변의 풍경이 휙휙 변한 것에 놀란 정도였지만, 대충 셰비언과 워커의 대화를 알아들을 수 있는 아이샤는 너무 큰 충격에 말이 나오지 않는 상태였다. 공간과 의식분리가 먼지 쌓인 옛 기술이 된 지가 대체 언제였던가.

“하하, 잊어버리기 전에 꼭 연구 일지에 써놔야지. 그런데 거기 두 사람은 누구야? 누군데 여길 같이 왔어?”

“이쪽은 왕궁마법사 아이샤 아네메고, 이 꼬맹이는…… 너, 이름이 뭐였지?”

“비니타 아쥬시. 아버지를 닮았지만 어머니가 나랍 사람이라 나랍 혼혈이에요. 이름은 외할머니가 지어줬대요. 멜브란트에는 작년 봄에 왔고, 브란젤에는 겨울에…….”

“거기까지. 그만 말해도 돼. 워커, 이 꼬맹이는 예비 마법사야. 네 제자로 들여 가르쳐.”

“뭐어?”

난데없이 제자 들이라는 말을 들은 워커는 황당함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셰비언이 아무리 마법의 주인이고 용이라도, 제자를 들이고 말고는 자신의 온전히 자신의 선택이 되어야 했다.

“됐어, 아직 제자 들일 생각 없어.”

“용의 마력을 가지고 태어난 애라 앞날이 아주 창창해. 오드리 아가씨도 관심을 가진 애야.”

용의 마력, 거기에 오드리의 관심. 모두 워커에게 상당한 압력으로 다가오는 것들이었다. 그는 온 얼굴로 싫은 티를 내며 비니타의 앞에 섰다. 비니타는 잔뜩 긴장해서 빳빳하게 자세를 가다듬었다. 상대의 호감을 이끌어내는 마법이 걸린 눈이 워커를 빤히 바라보았다.

한동안 말없이 비니타의 이곳저곳을 살펴보던 워커가 불쑥 혀를 찼다.

“쯧……. 됐어, 다른 데 보내. 아가씨한테는 내가 말해 볼 테니까.”

“왜? 가르치기 딱 좋은 시기 아닌가? 왕궁마법사 쪽에서 데리고 간 걸 내가 일부러 데려온 거야.”

“그럼 도로 왕궁마법사 쪽에 돌려보내든가. 재능이고 뭐고, 애 눈깔이 마음에 안 들어. 내 목숨도 간당간당한 판에 얼마나 살지도 모를 애를 받아서 어쩌라고? 솔직히 난 제자 별로 필요하지도 않고……. 굳이 받는다면 좀 멍청하고 모자라도 되니까 오래 살고 내 연구 결과를 잘 보존할 만한 애면 돼.”

“인간의 마법이 이렇게 쇠퇴한 이유를 알 만한 대답이군.”

셰비언의 빈정거림도 워커에겐 닿지 않았다. 워커는 비니타는 아예 없는 사람처럼 뒤로 제쳐 놓고 아이샤 쪽에 관심을 보였다.

“그보다 아이샤 아네메 씨? 어, 당신 낯이 익네요. 어디서 봤지? 1차 괴물 사태 때 만났었나? 아님…….”

“신문에서 보셨겠죠. 셰비언님이 셰비언 성벽에 갈 때 데려간 마법사가 저거든요.”

“아, 기억났다. 2차 괴물 사태 때 크게 활약했던 마법사! 와, 반가워요. 아네메는 됐고 아이샤 씨라고 부르라던 인터뷰가 인상적이었죠. 한 번쯤은 만나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보네요. 그때 빛줄기고 뭐고 사람이 많은 곳으로 나가면 위험하다는 걸 모르는 마법사가 없었을 텐데, 왕궁마법사들은 죄다 뛰쳐나갔죠? 그리고 불안해하는 사람들을 토닥이고 마법망을 안정시키고……. 정말 대단해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어요? 난 연구실에 처박혀서 꼼짝도 안 했는데, 인터뷰 보고 너무 부끄럽더라고요. 진짜로 감동받았어요.”

워커가 스스럼없이 손을 내밀었다. 아이샤는 떨떠름한 심정으로 그 손을 잡았다. 누가 봐도 워커 쪽이 훨씬 수준이 높은 상황에서 쏟아지는 칭찬이 부담스러웠다.

“……왕궁마법사니까요. 그게 우리 일이었어요. 그리고 워커 씨가 가르쳐 줬던 마법 안정화 기술과 스크롤 기술이 큰 도움이 됐어요. 최소한의 노력으로 일정 이상의 결과물을 낼 수 있었거든요.”

“에이, 아이샤 씨가 제 칭찬을 하시면 민망하죠. 괴물 잡으면서 갈려나가는 와중에도 틈틈이 스크롤을 만들어서 비축하고 필요한 순간에 정확하게 쓰는 거, 그거 쉬운 거 아니에요. 왕궁마법사들의 수명이 짧다는 말이 왜 나오는지 알겠더라니까요. ……아. 죄송해요, 제가 방금 말실수를 한 것 같은데…….”

“사실이긴 하죠. 남들의 배로 마법을 쓰고 몸도 쓰고 머리도 쓰고 근데 휴식은 부족하니까 빨리 죽죠. 나름 돈도 괜찮게 주고 숙식 제공도 해주니 나가는 사람도 적은데 매년 지원자를 잔뜩 뽑는 게 괜한 일이 아니라니까요. 항상 인원이 모자라서 난리예요.”

분위기가 아주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워커는 슬그머니 잡힌 손을 빼려고 했지만, 아이샤는 손아귀 힘을 빼지 않았다. 연구에 몸이 축날 대로 축난 워커와 셰비언의 둥지에서 잘 쉬다 온 아이샤의 힘 대결 결과는 불 보듯 뻔한 거였다. 워커는 손이 쥐어짜이는 듯한 고통에 이를 악물었다.

“비니타를 제자로 받아줘요. 내가 스승이 되면 저 애의 재능이 어떻든 결국엔 왕궁마법사로 끝날 거라고요. 정 가르치기 싫으면 내가 가르치고 이름만 워커 씨 아래로 놔둬도 되니까.”

“씁……. 나도 자존심이 있지, 배경지 따위로 취급되고 싶진 않거든요? 나한테 배우지도 않은 걸 가지고 내 이름을 쓰고 다니는 꼴은 못 봐요! 안 돼!”

“그럼 좀 가르치든가! 당신은 뭐 스승 없이 여기까지 왔어요? 받은 만큼 좀 베풀어봐요! 당신 같은 사람들 때문에 인간의 마법이 쇠퇴했다는 말이 부끄럽지도 않아요?”

“하, 뭘 모르는 소리! 인간의 마법이 왜 이 꼴이 났는지 나보다 잘 이해하는 사람도 없을걸요! 그리고 뭐, 받은 만큼 베풀어? 내가 뭘 받았다고 베풀어요? 내 스승이란 작자들은 하나 같이 나보다 못난 인간들뿐이었는데! 그렇게 재능이 있으면 왕궁마법사에게 배우든, 떠돌이 거지에게 배우든 어떻게든 위로 기어 올라가겠지! 왜 시작도 안 해 보고 나한테 난리예요?”

“한계가 있으니까! 아무리 재능이 있어도 혼자 올라가려면 한계가 있다고요! 쟤가 사내애만 됐어도 당신에게 부탁 안 했어!”

아이샤와 워커의 목소리가 천장을 뚫을 듯 높아졌다. 본래 지하극장이었던 연구실의 둥근 천장은 두 사람의 목소리를 몇 배로 증폭해 반사시켰다. 셰비언은 혀를 차며 비니타를 두 사람에게서 떨어뜨렸다.

“꼬맹아, 너 그냥 나한테 배울래?”

“남작님께서 절 챙겨주시는 건 레이디 오드리 때문이죠?”

“그렇지.”

“그럼 조금 더 생각해 보고 결정할래요. 근데 저 강철새 만져 봐도 돼요?”

“마음대로 해.”

셰비언이라는 마지막 보루가 생긴 비니타는 아까보다 한결 가벼워진 걸음으로 강철새에 접근했다. 작은 소녀의 눈에 비친 강철새는 이름 그대로 강철로 만들어진 새였다. 이런 게 하늘을 날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다니, 믿어지지 않는 얘기였다. 강철새 이곳저곳을 만지고 두드려 대는 얼굴에 호기심이 가득했다.

“아까처럼 차갑지가 않네. 근데 이거 왜 자꾸 흔들리……. 어, 사람! 사람이다! 남작님! 강철새가 사람을 낳았어요!”

비니타가 깜짝 놀라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러나 놀라기는 강철새 뱃속에서 한창 일하다 나온 사하스바티도 마찬가지였다.

“넌 뭐냐? 뭔데 여길 들어왔어?”

“어어, 저는 비니타 아쥬시고요, 나랍 혼혈이고 멜브란트엔 지난 작년 봄에 왔고, 브란젤에 온 건 지난겨울이에요. 아르젠 남작님께서 절 워커 크라티우스 씨의 제자로 넣으려고 여기로 데리고 왔는데…….”

“잠깐만. 귀마개를 깜빡했다.”

사하스바티는 귀마개를 뽑아내자마자 쩌렁쩌렁 울리는 고성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그는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버럭버럭 싸우는 아이샤와 워커를 한 번 보고, 세상 평온한 표정으로 워커의 연구 일지를 검토하는 셰비언을 한 번 보고 나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손님이구나. 넌 누구랑 왔냐? 아이샤 씨? 아니면 아르젠 남작?”

“아르젠 남작님을 따라왔어요……. 워커 씨가 절 제자로 삼아줄 거라고 그러셨는데, 아무래도 그른 것 같아요. 그런데 아저씨는 누구세요? 누군데 강철새 뱃속에서 나와요? 이 새 뱃속은 비어 있어요? 사람은 몇 명이나 들어갈 수 있어요? 이거 뜰 수는 있어요? 물에다 던져도 바로 가라앉을 것 같은데!”

“하나씩 물어보면 안 되겠냐…….”

비니타의 질문이 폭풍처럼 쏟아졌다. 처음에는 비니타의 호기심이 당황스러웠던 사하스바티지만, 아이가 생각보다 영리하고 말귀를 잘 알아들으니 대화가 점점 즐거워졌다. 그는 점점 흥이 나서 침을 튀기며 강철새에 대해 설명했다.

강철새가 얼마나 의미 있는 발명품인지, 이게 세상을 어떻게 바꿀 건지, 여기에 들어가는 기술과 마법이 얼마나 고급인지, 사람들은 마법만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만 지금 시중에서 유통되는 마법도구들의 기반은 기계라는 것과, 왕립기계연구소가 앞으로 해낼 일들에 대한 전망까지…….

어느새 강철새에서 주제가 벗어났다. 하지만 비니타는 눈을 또랑또랑하게 빛내며 사하스바티의 설명에 집중했다. 사하스바티가 몹시 흡족해할 만한 집중력이었다.

“마법적 재능이 있으면 기계를 다루지 못하나요?”

“설마! 기계기술자에게 마법적 재능이 있으면 아주 좋지. 새로운 마법도구 설계를 할 때 시행착오를 엄청나게 줄일 수 있을걸! 기계에 대해선 딱히 아는 것도 없는 마법사를 붙들고 몇 시간씩 설득할 필요도 없고 말이야. 근데 그건 왜 물어보는데? 혹시 내 제자 하게?”

“네. 저 사하스바티 제자 할래요!”

“너처럼 똑똑한 아이가 기계를 배우겠다면 나야 좋지. 그런데 너, 아르젠 남작님이 굳이 워커에게 들이밀 정도로 재능을 타고 났잖아. 그 재능이 아깝지는 않아?”

“마법은 저 말고도 잘하는 사람 많잖아요. 하지만 기계 쪽엔 아직 사람이 없다면서요? 당연히 앞날을 생각하면 기계로 가야죠. 그리고 기계 쪽으로 나가면 완전히 다른 것들을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저 강철새 너무 멋져요…….”

강철새를 보는 비니타의 뺨이 사과처럼 붉었다. 사바스바티는 비니타가 완전히 마음에 들었다. 그는 비니타의 어깨를 두드리고 선언했다.

“좋아, 오늘부터 넌 내 제자다.”

비니타의 거취를 두고 목소리를 높이던 마법사 둘은 이 뜻밖의 사태에 경악하고 말았다. 무려 마법의 주인에게 공인받은 재능을 팽개치고 기계의 길을 걷겠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너 미쳤어?”

“당신은 누군데 애한테 이상한 바람을 불어넣어요? 마법적 재능이 있으면 당연히 마법을 배워야지! 비니타, 이리 와!”

“아니, 기계가 어때서 이래? 기계는 앞으로 흥할 일만 남았어! 애가 더 앞날을 잘 보네! 누가 마법사 아니랄까 봐 시야 좁은 거 보소!”

아이샤와 워커에 이어 사하스바티까지 고함을 질러대며 싸우기 시작했다. 비니타는 그 사이에 오도카니 서서 입을 다문 채 셰비언을 바라보았다. 이 전쟁에 불을 붙인 당사자는 세상 태평하게 워커의 연구 일지를 읽고 있었다.

셰비언이 잠시 눈을 뗀 몇 달 사이에 워커의 연구는 상당히 진척되어 있었다. 워커의 공간 내에서 제약 없이 이뤄진 실험 덕분이겠지만, 연구 일지대로라면 공간이 아니라 실제 하늘에 띄워도 상당한 시간 동안 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랬다, 단순히 떠 있는 게 아니라 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하스바티가 연구에 참여하면서 방향 전환과 동력 장치 쪽에 획기적인 발전이 있었다. 공간 내부에서 실험을 진행하면서 야외실험은 번거로움 때문인지 아예 중단해 버린 것 같은데, 이 정도면 본격적으로 시험 비행을 시도해 볼 만도 했다.

이만한 결과물을 내기 위해 워커가 얼마나 공간을 많이 썼고 의식 분리에 집중했는지 알 만했다. 얼굴이 눈에 띄게 수척해졌다 싶더니만, 몇 달 사이 수명이 십 년은 줄었을 게 분명했다.

셰비언은 연구 일지에 완전히 몰입했다. 연구 일지의 빈 공간에 추가하고 싶은 부분을 메모하기도 하고, 간단하게나마 마력을 돌려보기도 했다. 그가 연구 일지의 마지막 장까지 읽고 눈을 뗐을 때, 상황은 조금이나마 정리되어 있었다.

비니타는 워커와 사하스바티 사이에 서 있었고, 아이샤는 반대편이었다. 남자 둘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는 반면, 아이샤는 세상이 무너진 듯 좌절한 기색이었다.

“뭐야, 누가 이긴 거야?”

“우리가 이겼지.”

“우리?”

워커가 자부심 넘치는 동작으로 사하스바티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조금 전까지 비니타를 가르치기 싫어 목소리를 높이던 사람이라곤 믿을 수 없는 태도 변화였다.

“애가 강철새가 좋다잖아. 마법도 내가 가르칠 거야.”

“아, 그래…….”

“기계 쪽으로 진로를 정하더라도 마법을 알면 유리해지는 면이 얼마나 많은데, 강철새를 연구할 기계 기술자면 내가 직접 가르칠 보람이 있지!”

워커의 목적은 아주 확실했다. 강철새의 기계적인 부분과 마법적인 부분 모두를 아우르는 전문가를 키워내는 것. 그는 비니타가 마법사로서 반쪽짜리가 되더라도 조금도 신경 쓰지 않을 셈이었다.

보기 드문 재능이 똥통에 처박히는 걸 보게 생긴 아이샤는 비니타를 붙들고 설득을 거듭했지만, 강철새에 마음을 뺏긴 비니타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버리지 말라며 엉엉 울던 그 애가 맞나 싶을 정도였다. 결국 아이샤가 뒤로 물러났다.

“비니타, 네 방 안 뺄 테니까 거기서 지내면서 배우러 다녀.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말종들이랑 같이 살면 안 된다. 알겠니?”

“어허, 말종이라니? 말이 좀 심한 거 아녜요?”

“멀쩡한 마법사 앞길을 망쳐 놓으려는 사람들이 그럼 말종이지 성인일까! 그리고 여자애는 빨리 커요. 내가 매일 들여다 볼 거니까 허튼 짓 할 생각만 해 봐. 그땐 진짜……!”

아이샤가 눈을 희번덕거리며 두 남자를 압박했다. 스승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자의 입장에 놓일 수밖에 없는 제자가 스승의 폭력과 학대에 노출되는 건 도제 문화가 있는 업계 대부분이 겪는 문제였다. 그건 위계와 권력의 문제였기에 사제 간의 나이나 성별과는 상관없이 발생했다.

다행히 워커와 사하스바티는 그런 종류의 인간이 아니었다. 결혼도 하지 않고 유흥에도 관심 없이 연구에 대부분의 재산을 탕진하는 타입인 두 사람은 책임져야 할 부분이 줄어든다는 것에 순수하게 기뻐했다.

“나야 그래주면 좋죠. 일일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자네는?”

“나도 찬성. 그나저나, 기계가 뭐 어때서 자꾸 애 앞날을 망쳐 놓는대? 하여간 마법사란 족속들은 말이야, 자기들도 기계의 도움을 받으며 살면서 마법이 최고인 줄로만 안다니까!”

“망치는 걸 망친다고 하지 그럼 뭐라고 그래요? 왕립기계연구소 따위가 다 뭐야, 이름만 바꾼 거지 그래봤자 비마법이면서……!”

아이샤의 발언으로 2차전이 시작되기 직전, 셰비언이 타이밍 좋게 끼어들었다.

“그럼 저 꼬맹이의 스승은 워커와 사하스바티고, 지내는 건 왕궁마법사 숙소가 되는 건가? 정리 끝?”

마법사들은 용의 상황 종료 요구에 입을 다물었고, 사하스바티는 작위에 눌려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셰비언은 과정이 어떻든 오드리가 만족할 만한 결과물을 냈다는 사실 자체에 만족했다. 그가 보기에 강철새 전문가라는 분야의 전망은 앞으로 아주 밝을 예정이었다.

“워커, 그동안 고생했던데? 수명 깎아가며 연구한 보람이 있어. 강철새, 이제 슬슬 밖에 가지고 나가서 테스트해.”

“……어, 진짜? 그래도 괜찮을 것 같아? 솔직히 진짜 사람을 태우는 건 아직 좀 망설여지는 감이 있거든? 공간에서야 무슨 난리가 나든 내가 어떻게든 하면 되는데 현실 쪽은 아니잖아.”

“백날 상상 속에서만 띄울 거면 그렇게 하든가. 하지만 이제 슬슬 투자자에게 투자금을 회수할 기회를 줘도 될 것 같아. 음, 몇 가지는 더 고쳐야겠지만.”

셰비언이 연구 일지에 끄적거린 몇 가지 수식을 본 워커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현실에서 실험하기를 망설이게 만들었던 문제들의 해결책이 그 안에 있었다.

“아가씨께 전해줘, 조만간 인내의 열매를 맛보게 해드린다고.”

“그런 건 성공하고 얘기해. 공간은 작작 쓰고. 그러다 꼬맹이 다 가르치기도 전에 죽어. 그리고…… 아이샤!”

계속 비니타에게 집중하고 있던 아이샤가 고개를 돌린 순간, 그녀는 완전히 다른 곳에 서 있었다. 다시 셰비언의 둥지로 돌아온 듯 새하얀 설원이었다. 놀란 나머지 주춤 뒷걸음질을 치자 뽀드득 소리와 함께 눈에 발자국이 남았다.

아이샤가 셰비언의 공간에 들어와 본 건 처음이었다. 겨우 두 번째 당해보는 의식분리였지만그녀는 거의 본능적으로 워커와 셰비언의 공간을 비교했다. 아무리 워커가 천재라도 셰비언은 용이고 마법의 주인인지라, 셰비언의 공간은 워커의 공간보다 훨씬 정교하고 실감이 넘쳤다. 눈 덮인 설원이라는 비현실적인 풍경이 아니었다면 너무 놀란 나머지 패닉을 일으켰을 것만 같았다. 춥지는 않아도 눈에 닿은 발은 차가웠고 손에 쥔 눈은 녹아서 물이 되어 흘러내렸다.

“……징그럽다, 진짜…….”

“징그럽긴 뭐가 징그러워? 눈이 그렇게 싫으면 네가 공간을 만들 정도가 되어서 네 취향으로 꾸미든지 해.”

“아니 뭐……. 그런 뜻은 아니고요……. 그냥, 너무 진짜 같아서 징그러워요.”

백 년이 지나도 아이샤의 감정은 이해 못할 셰비언은 그녀의 투덜거림을 사뿐히 무시했다.

“됐고, 아이샤 너 꼬맹이에게 너무 그렇게 정성 쏟지 말고 내가 가르친 것들 수련이나 해. 눈길 가는 게 그리 많아가지고 언제 수준을 올릴 건데? 몇 달을 가르쳤는데 왜 아직도 공간을 못 다루고 의식분리를 못 해?”

억울하다. 아무리 인어의 마력을 깨우고 용의 둥지에서 수련했다지만 몇 달 만에 옛 마법사들의 수준을 따라가라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그게 그리 쉬웠으면 맥이 끊겼을 리가 있나.

하지만 아이샤의 억울함은 입안에서만 뱅뱅 돌았다. 워커의 어마어마한 경지를 직접 경험한지 한 시간도 안 됐다. 그는 해냈는데 자신은 못한다고 하는 건 너무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셰비언이 쯧, 혀를 찼다.

“이래서야 데려갈 수 있으려나 몰라.”

“어딜 데려가게요?”

“용잡이에 데려가려고.”

너무 놀란 나머지 말이 안 나왔다. 아이샤는 주변에 아무도 없을 줄 알면서도 사방을 살폈다.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던 텅 빈 설원이 되레 안심이 됐다.

“용잡이요? 지금 저랑 농담 따먹기 하자는 거 아니죠? 본인이 용이면서 웬 용잡이?”

“종족이 같다고 다 사이가 좋은가? 인간들도 자기들끼리 전쟁하잖아? 왕립기계연구소가 왕실에서 계속 요구받는 게 바로 무기 제작이야. 조금이라도 상대를 효율적으로 많이 죽이기 위한 연구가 매일 이어지지. 솔직히 왕궁마법사들도 처지가 다르진 않을 텐데? 연구팀이 만든 대포는 처음부터 괴물 잡을 날이 올 줄 알고 만들었던 건가?”

“……으. 반박을 못하겠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셰비언님에게 그런 지적을 받다니 창피스럽네요…….”

“더 많이 수련해서 더 빨리 더 높은 경지로 올라와. 왕궁마법사 일이 그에 방해가 된다면 내가 직접 나서서 막아줄 용의도 있어.”

“왜 하필 저예요? 마법사가 귀하다고는 하지만 찾으려면 못 찾을 것도 없이 흔한 게 마법사인데요. 그런 위험한 일은 좀…….”

“설마 내 가르침이 공짜라고 생각했어? 대체 무슨 근거로?”

“그야 당연히 맞교환이라고 생각했죠. 저도 셰비언님한테 많은 걸 가르쳐 드렸잖아요? 제가 아니면 셰비언님은 아직도 인간에게 결혼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영 모르고 있었을걸요. 레이디 헨젤에게 거하게 걷어차이는 날을 제가 막아드린 거라고요.”

“그러니까 네가 내 앞에서 욕하는 것도 봐주고 있잖아. 더 배우기 싫으면 얘기해. 싹 잊어버리게 해주지.”

“……그런 것도 돼요?”

“못할 것 같으면 시험해 보든가.”

간덩이가 꽤 크다는 평을 받는 아이샤지만, 차마 용을 상대로 모험하지는 못했다. 그러기엔 이제까지 배운 마법이 지나치게 매력적이었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수련에 열중할 것을 약속했다.

셰비언은 그렇게 워커는 강철새 개선 작업에, 아이샤는 수련 지옥에 차례로 던져 놓고 곧바로 데멘사에 들렀다. 급격하게 팽창하는 데멘사에서 브란젤 지점은 본점이었고, 당연히 사람으로 북적거렸다.

몹시 바쁠 텐데도 직원들의 표정은 아주 밝은 걸로 보아 전보는 아무 문제없이 작동하는 듯 했다. 이대로 들이닥쳐 전보를 점검할까 하다가, 그랬다간 이 많은 손님들이 전부 헛걸음을 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제법 인간처럼 생각하게 됐는데? 많이 발전했네.’

셰비언은 홀로 자화자찬하고 점검 계획은 나중으로 미뤄두었다. 그거 조금 미룬다고 당장 망가질 정도로 허술하게 만들지 않았다는 자신감도 게으름을 부추겼다.

대신 그는 혹시라도 후드가 벗겨지지 않도록 단단히 붙들고 복잡한 지점 구석에 앉아 사람들을 구경했다. 글자 몇 개가 담긴 종이쪽지를 쥐고 우는 사람, 웃는 사람, 심각한 고민에 빠진 사람, 행복해하는 사람, 화내는 사람, 탄성을 터뜨리는 사람……. 구경하는 동안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졌다. 분명 조금 전까지 워커보다 확연하게 성취가 늦은 아이샤 때문에 꽤 짜증이 나 있었는데 말이다.

‘전보가 처음으로 작동했을 때랑 비슷한 기분이야.’

굳이 따져 보면 전보는 많은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사용해야 의미가 있는 물건이었다. 실험실에서 벗어나 나라 곳곳으로 퍼져 나간 지금이 진정한 의미로 전보를 성공시킨 순간인지도 몰랐다.

문득 바일런 섀덤이 떠올랐다. 기차와 승강기, 그리고 그 외 무수한 마법도구의 설계도를 남긴 천재 마법사. 연구서도 제대로 남기지 않고 요절한 탓에 후대 마법사들에게 존경과 증오를 한 몸에 받는 그는 자신의 수명을 알았을까 몰랐을까.

아마 알았을 것이다. 워커만 해도 마법 사용이 수명에 미치는 영향을 꽤 정확하게 측정하고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는데, 바일런 섀덤쯤 되는 마법사가 몰랐을 리 없다. 이제까지 셰비언은 바일런 섀덤이 왜 요절할 정도로 마법에 몰두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렇게 전보를 붙들고 시끌벅적하게 구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니 어쩐지 알 것 같기도 했다.

‘이것 참……. 이상하게 흐뭇하네.’

셰비언은 그 자리에서 꽤 오랜 시간을 보냈다. 직원들은 시커먼 로브를 뒤집어쓴 수상한 마법사가 구석에 앉아 있는 걸 수상한 눈으로 보면서도 쫓아내려 들지는 않았다. 사고를 치지도 않았는데 나서서 쫓아내기엔 업무가 너무 바빴다.

그러다 사람이 좀 줄어들고 데멘사의 직원들이 겨우 한숨을 돌릴 때쯤, 꼬질꼬질한 옷을 입고 뭔가 커다란 짐을 진 사람이 데멘사 안에 들어왔다. 몇몇 직원들이 거의 뛰어나가다시피 방문객을 반겼다.

꼬질꼬질한 방문객은 큰 짐에서 둘둘 말린 긴 종이들을 꺼내 직원들에게 건넸고, 직원들은 신난 기색으로 종이를 다른 직원들에게 나눠주었다. 종이를 펼친 직원들 사이에서 기쁨에 찬 비명이 흘러나왔다.

방문객은 직원들의 반응엔 관심이 없었다. 그는 대뜸 지점 내의 빈 벽에 슥슥 풀을 바르더니 새 종이를 꺼내 벽에 붙였다.

그건 네이기스의 새 포스터였다. 달빛 비치는 창가에 느긋하게 기대앉은 오드리가 그림 밖의 관객에게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오드리의 상징과 같은 초록색 머리칼과 눈동자는 여전한데, 그녀를 전설 속의 벨트람처럼 보이게 하던 검은 말과 흰 망토는 없는 대담한 구성이었다.

심지어 옷도 예의 승마복이 아니라 하늘하늘한 남부식 드레스였다. 얇은 천이 물 흐르듯 몸의 곡선을 타고 흘러내려 그림 아래쪽에 고였다. 그 옷자락 아랫단에 연극의 이름과 극장 등이 쓰여 있었지만, 그보다는 달빛에 빛나는 목과 어깨에 훨씬 눈길이 갔다.

지금쯤 셜리 극장은 네이기스에게 포스터에 대한 모든 권한을 준 걸 어마어마하게 후회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연극 홍보를 하랬더니 오드리의 팬아트를 그리고 연극 홍보는 덤으로 하고 있는 상태니까.

“하…….”

셰비언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쏟아지는 입을 틀어막았다. 그림을 본 순간, 간신히 머리 구속으로 밀어냈던 오드리의 유혹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향긋한 입술의 감촉과 뺨을 문지르던 손가락의 온기, 그녀의 체향과 뒤섞인 향수 같은 것들. 체온이 오르는 게 느껴졌다.

‘어떡하지.’

사실 이렇게 현실도피 따위나 하고 있으면 안 된다는 건 안다. 하지만 현실도피 말고 뭘 해야 하는지를 생각하면 갑자기 막막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뭔가 준비를 해야 하지 않을까 싶긴 한데, 도무지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용과 인간의 준비는 다를 게 분명하잖은가.

‘지금이라도 비늘 손질을…… 할 필요 없지. 음. 그럼 선물을 사야 하나? 사면 보석? 꽃? 하지만 아가씨는 보석이고 꽃이고 그다지 관심이 없는데……. 책은 나보다 더 많이 가졌을 테고…….’

어떻게든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숱하게 읽은 로맨스 소설은 예전이고 지금이고 도움 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책 속의 주인공과 실제 인물은 다르다는 것만을 뼈저리게 실감했을 뿐이었다.

주저앉아 얼마나 고민을 했는지, 아직 낫지 않은 상처가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무시할 만한 통증이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고통의 강도가 점점 높아졌다. 선물도 좋지만 일단 어디로든 가서 쉬어야 할 듯 했다.

하지만 헨젤 저택의 손님방으로 돌아갈 엄두는 눈곱만큼도 나지 않았다. 결국 셰비언은 리즈비아 거리에 있는 그의 옛 숙소로 걸음을 옮겼다. 남들의 시선이 없는 곳에서 휴식하면서 좀 더 고민할 셈이었다. 그 숙소 아래에 워커의 숙소가 있고, 그 아래엔 연구실이 있다는 건 조금도 고려하지 않은 결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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